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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앙엽기(盎葉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앙엽기(盎葉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앙엽기(盎葉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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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앙엽기(盎葉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앙엽기(盎葉記)

 

1 앙엽기서(盎葉記序)

2 홍인사(弘仁寺)

3 보국사(報國寺)

4 천녕사(天寧寺)

5 백운관(白雲觀)

6 법장사(法藏寺)

7 태양궁(太陽宮)

8 안국사(安國寺)

9 약왕묘(藥王廟)

10 천경사(天慶寺)

11 두로궁(斗姥宮)

12 융복사(隆福寺)

13 석조사(夕照寺)

14 관제묘(關帝廟)

15 명인사(明因寺)

16 대륭선호국사(大隆善護國寺)

17 화신묘(火神廟)

18 북약왕묘(北藥王廟)

19 숭복사(崇福寺)

20 진각사(眞覺寺)

21 이마두총(利瑪竇塚)

 

 

 

앙엽기서(盎葉記序)

 

북경 안팎에 있는 여염집과 점포들 사이에 있는 사찰과 궁관들이 천자의 명령으로 특별히 지은 것들만이 아니라, 모두 여러 왕과 부마(駙馬)들과 만(滿)한족(漢族) 대신들에게 기증한 집들이 있으며, 또 큰 장사꾼들이 반드시 한 채 묘당(廟堂)쯤은 짓고, 자신들을 위한 명복(冥福)을 빌어 천자와 더불어 사치하고 화려함을 경쟁하므로, 천자도 새삼스레 건축을 일삼거나 따로 이궁(離宮)을 두지 않고도 천자 있는 도성을 사치롭게 하고 있다. 명의 정통(正統)천순(天順) 연간에는 황제가 직접 돈을 내어 세운 집이 2백여 군데나 되었는데, 근년에 새로 지은 집들은 흔히들 대궐 안에 있어 외인으로서는 얻어 구경할 수가 없었으나, 다만 우리나라 사신이 이르면 때로 끌어들여 마음대로 구경을 시켰다. 그러나 내가 유람한 곳이란 겨우 백 분의 일이나 될까, 때로는 우리 역관들이 억제하기도 하고, 때로는 들어가기 힘든 곳을 문지기와 다투어 가면서 모처럼 들어가면, 바쁘고 총총하며 그저 시간이 부족하였을 뿐이었다. 창건된 역사는 비석 같은 것을 상고하지 않고서는 어느 시대 어느 절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겨우 빗돌 한 개만 읽는 데도 언뜻 몇 시간씩 보내므로, 자개와 구슬처럼 찬란한 궁궐의 구경도 문틈을 지나가는 말이나 여울에 달리는 배처럼 되고 보니, 오관(五官)이 함께 피로만 해지고, 아울러 사우(四友)가 맥이 풀리어 언제나 꿈에 부적 보는 것만 같고, 눈은 신기루(蜃氣樓)를 본 듯 의아하게 거꾸로 기억이 되며 명승 고적은 틀리게 안 것이 많았다. 돌아와서 약간의 기록을 수습해 보니, 어떤 것은 종이쪽이 나비의 날개 폭이나 될까 하면 글자는 파리 대가리만큼씩이나 하니, 대체가 그 총망 중에 빗돌을 얼른 보고 흘려 베낀 것이다. 드디어 이것을 엮어서 얇은 책 앙엽기를 만드니, ‘앙엽이란 말은 옛 사람이 감 잎사귀에 글자를 써서 항아리 속에 넣었다가 모아서 기록했다.”(출처 미상)는 일을 본받아서 한 것이다.

 

 

[C-001]앙엽기서(盎葉記序)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서는 주설루본을 좇아서 추록하였다.

[D-001]오관(五官) : ()()()()().

[D-002]사우(四友) : ()()()().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홍인사(弘仁寺)

 

 

홍인사의 맨 뒤에 있는 전각에는 관음(觀音) 변상(變相)이 있으니 손이 천 개요, 눈도 역시 천 개인데, 손에는 각기 잡은 것이 있었다. 불상 뒤에는 큰 족자 그림이 걸려 있는데, 파도가 치솟는 큰 바다에 빈 배만 떴다 잠겼다 하고, 바다와 하늘에는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올라 상서로운 오색 구름으로 되었는데, 구름 속에는 금관과 옥대로 어린 아이를 껴안은 자가 있었다. 그 아이는 임금의 곤룡포(袞龍袍)와 면류관(冕旒冠)을 갖추었는데, 곱게 생겼으면서도 근엄한 태도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몇천 명이나 되는 사람의 무리가 구름 속에 빙 둘러서서 옹위를 하였는데, 모두들 이마에는 부처의 원광이 둘러졌다. 바다의 언덕 위에는 수없는 남녀들이 이마에 손을 대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어 거의 만 명으로 헤아릴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린 이의 성명도, 그린 해나 날짜와 낙관(落款)도 없으니, 구경하는 이도 무슨 인연으로 시주를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이 그림이 송()의 육수부(陸秀夫 () 충신. 자는 군실(君實))가 임금을 안고 바다로 가는 것이라 생각된다. 무엇으로 그런 줄 안 것인가. 일찍이 송의 군신도상(君臣圖像 저자 미상)을 보니, 범 문정공(范文正公)의 관과 옷이 이와 같았고, 어제 문승상사(文丞相祠)를 참배할 때에 본 소상(塑像)의 관대가 역시 이와 비슷했다. 어린이로 임금의 면목을 갖춘 이는 틀림없이 송의 황제 병( ()의 마지막 황제)일 것이다. 빈 배가 출몰하는 것은 그가 황제를 안고 바다에 떨어지자, 배 가운데 탔던 사람들이 다들 따라서 빠진 것이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이마에 불광(佛光)을 두른 자들은 후세 사람들의 상상에서 나온 것이니, 그림 그리는 이의 고심(苦心)인 것이다. 이때는 송의 운명이 넓은 바다 위에 떠 있어서 임금이나 신하나 위아래가 없이 하루살이 같은 생명을 고래등 같은 파도 속에 붙였고 보니, 그야말로 물이 아니면 하늘인지라 갈 곳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날마다 대학장구(大學章句 주희(朱熹) )를 써서 어린 임금을 가르치니, 그 조용하고 한가한 폼이 바로 전각 속 털방석 위에서 강의를 하는 것만 같으니, 이 어찌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아니랴. 아아, 슬프도다. 충신과 의사란 나라가 망해 엎어진다 해서 조금이라도 그 간절한 충군애국의 마음을 늦추지 않고 본즉, 정성이 곧 천하 국가의 근본이 되는 것이니, 이는 오로지 뜻을 정성스럽게 해서 마음을 바로잡는 데 있는 것이다. 하루라도 이 같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없다면 모르겠지마는, 하루라도 이 같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있다면 이런 과업은 그날그날의 급선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대의에 밝지 못하면 비록 만 리의 강토를 지니고 있더라도 오히려 천하 국가가 없음이나 다름없을 것이나, 만일 이런 대의를 앞세울 줄을 안다면 비록 조각배 속에서라도 천하를 다스리는 원리는 미상불 준비되었다고 볼 것이다. 밥이 없으면 죽고 군사가 없으면 망하지마는, 성인도 오히려 죽고 망한 뒤에라도 신의를 지키고자 하였는데, 하물며 당시에 있어 문 승상은 밖에서 군사를 맡아 보고 등광천(鄧光薦 ()의 명신. 자는 중보(中甫))은 안에서 군량을 동독(董督)하고 있는 그때이니만큼 배 가운데 든 천하라도 오히려 법도만은 먼저 회복해야 할 참된 이치가 있지 않겠는가.

 

 

[D-001]범 문정공(范文正公) : 송의 명신 범중엄(范仲淹). 문정은 시호. 자는 희문(希文).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보국사(報國寺)

 

 

보국사는 선무문(宣武門) 밖으로부터 북으로 1리쯤 가서 있다. 매월 3일과 5일을 장날로 정했는데 국내의 백화가 몰려든다. 불전은 세 채가 있고, 행랑채가 빙 둘러 있으나 사는 중들은 얼마 아니 되었다. 모두가 수도와 외읍으로부터 몰려든 행상들로서 아주 장터나 다름없이 참선하는 절간 속이 버젓한 도회처럼 되었다. 첫째 전각의 편액에도 일진부도(一塵不到)’라 썼고, 셋째 전각 위에는 비로각(毘盧閣)이 있는데, 그 중간은 한 길이 되어 점포들이 쭉 늘어섰고 거마들이 잡다하게 모여드니, 비단 장날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사기(史記)에 소진(蘇秦 전국 시대의 변사(辯士))이 제왕(齊王)을 보고 말하기를, ‘임치(臨淄 ()의 수도)의 거리는 수레바퀴가 서로 부딪치고, 사람들은 어깨를 마주 비비며 땀을 뿌리면 비가 되고, 옷자락을 잇대면 휘장이 된답니다.’라고 하였기에, 나는 너무 과장한 말이라고 하였더니 이제 아홉 채 성문을 구경하니 과연 그렇구려. 또 보국사와 융복사(隆福寺) 같은 것들이 모두 아홉 거리[]나 다름없음을 본 연후에야 더욱이 옛 사람들의 말이 그리 허튼소리나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되었구려. 열국(列國) 시대로 말하면 언제나 난리판이었지마는 도성들의 부유하고 번화함이 그 같았거늘, 하물며 승평한 날 천자가 기거하는 수도일까보냐.”

비로각에 올라가 보니, 전각은 서른 다섯 칸이요, 복판에는 문창성군(文昌星君)을 안치하고 좌우로는 불상과 신장들을 늘어놓았다. 북쪽 바람벽으로부터 층층다리를 밟고 꼭대기로 오르니, 윗층은 캄캄하기가 칠야와 같아서 층층대를 겨우 더듬어 가면서야 찾을 수 있었다. 일곱 길이나 올라가니 층층대는 끊어지면서 환하게 밝아졌다. 윗층은 열다섯 칸인데 큰 금부처가 열한 좌나 있었다. 난간을 한 바퀴 돌아보니 황성의 아홉 성문 안팎이 손금 보듯 자세히 보였다. 콩알만 한 사람과 한 치에 지나지 않는 말이 티끌 뭉치 속에서 꾸물거렸다. 천녕사(天寧寺)의 영탑(影㙮)은 구름 속에 높이 머리를 박았고, 태액지(太液池)는 맑게 툭 터졌는데, 구슬처럼 깨끗한 섬 가운데에 솟은 흰 탑은 수정을 깎아 세운 듯이 스스로 얼굴을 나타내었다. 이 절은 명의 성화(成化) 초년에 황태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창건하였는데, 한림 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유정지(劉定之 ()의 문학가. 자는 주정(主定))가 지은 비문을 왕용(汪容 미상)이 썼다.

 

 

[D-001]문창성군(文昌星君) : 문창부(文昌府)를 맡았다는 귀신 이름. 곧 문창제군(文昌帝君).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천녕사(天寧寺)

 

 

보국사로부터 천녕사로 왔다. 이 절은 위() 때의 이름은 광림사(光林寺), () 때에는 홍업사(弘業寺)였고, ()의 개원(開元) 연간에는 천왕사(天王寺)로 현판을 고쳤다. ()의 대정(大定) 21년에 만안선림(萬安禪林)이 되었다가 명의 선덕(宣德) 연간에 고쳐서 천녕사라 하였고, 정통(正統) 연간에는 또 수리하여 만수계단(萬壽戒壇)이라고 불렀다. 한길 가에 닿아서 축대 2층을 쌓아 높이는 댓 길이나 됨직하다. 축대 위에 집채들은 빙 둘러 잇달아서 거의 몇 리나 되었고, 가운데에는 커다란 불전이 다섯 채나 있었다. 옛 이야기에,

 

수 문제(隋文帝 양견(楊堅)) 인수(仁壽) 2(602) 정월에, 황제가 아라한(阿羅漢)을 만나 사리(舍利) 한 주머니를 받아 이를 곧 칠보함(七寶函)에 넣어 기( 섬서성에 있는 고을 이름)( 섬서감숙 지방) 등 서른 고을에다가 각각 탑 한 자리씩을 세우고 이를 간직하도록 하였다.”

라고 하였는데, 지금 천녕사 탑도 그 중의 하나이며 탑의 높이는 스물일곱 길 다섯 자 다섯 치라 한다. 탑은 13층으로 팔모가 났는데, 네 둘레로 방울을 단 것이 만 개는 되어 방울 울리는 소리가 끊어질 때가 없었다. 탑 꼭대기에 구리쇠 바퀴는 바람에 갈리어 번쩍번쩍 사람의 옷자락에까지도 비치어서 희락푸르락하였다. 옛 말에는,

 

탑 그림자가 거꾸로 대사전(大士殿)에 들고, 해가 정오에 이르러 전문을 닫으면 햇빛이 문 틈으로 새어들어 탑의 그림자가 온통으로 돌 위에 비친다.”

고 하였다. 내가 이제 오자 마침 구름이 끼어서 그 그림자는 구경하지 못했으나, 다만 대사상(大士像 불보살(佛菩薩)의 상) 뒤에 걸어 놓은 화엄경(華嚴經) 장자(障子)는 기교하기 짝이 없었다. 강희(康熙) 신미년(1691)에 대흥현(大興縣)에 있던 이지수(李之秀)의 처 유씨(劉氏)가 손으로 베낀 화엄경으로 전부 81권에 60 43자인데, 이것을 구불구불 구부려 접어서 5층 전각을 만들어 복판에는 불상을 두었다. 글자는 가늘기가 개미 대가리만큼씩한데, 한 점 한 획을 다 조심스럽게 긋고 삐친 글씨체가 한 군데도 허술한 곳이 없었다. 전각과 지붕과 문창들도 한 칫수도 어긋남이 없고, 불상의 눈매는 마치 산 사람 같고 옷자락의 구김살도 자연스러웠다. 어허, 한 여인의 마음과 손 재간도 이같이 신기롭거든, 하물며 온 절간의 이룩함이란 천하의 뭇 힘을 모아 놓았음이랴. 절 가운데 있는 보물과 기완들은 틈이 없어 다 구경하지 못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백운관(白雲觀)

 

 

백운관(白雲觀)의 둘레는 놀랍고 화려한 폼이 천녕사에 못지 않았다. 도사 백여 명이 살고 있는데, 패루(牌樓)의 바깥 현판에는 동천가경(洞天佳境)’이라 썼고, 안쪽 현판에는 경림낭원(璚林閬苑)’이라 썼다. 홍예다리 셋을 건너 옥황전(玉皇殿)에 들어가니, 옥황은 황제의 복색을 갖추었다. 전각을 둘러 삼십삼천(三十三天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세계)의 제군(帝君)은 홀()을 잡고, 면류관 술을 드리운 것이 옥황이나 다름없으며 천봉신장(天蓬神將)은 머리가 셋이요, 팔이 여섯으로 각기 병장기를 지니고 있었다. 앞 전각에는 남극노인성군(南極老人星君)이 흰 사슴을 탄 채로 안치되었고, 왼편으로 한 전각에는 두모(斗母 선녀(仙女)의 하나)를 안치하였고, 오른편 전각에는 구장춘(丘長春)을 안치하였으니, 이는 원 세조(元世祖)의 국사(國師)이다. 옥황전의 현판에 자하진기(紫霞眞氣)’라 붙어 있고, 두모전(斗母殿) 현판은 대지보광(大智寶光)’이라 붙었으니 모두 강희 황제의 어필이다. 도사들이 거처하는 행랑채는 모두 천여 칸으로 어디든지 밝고 깨끗하고 조용하여 티끌 한 점도 움직이지 않았다. 쌓아 둔 서적들은 모두 비단 두루마리 책에 옥으로 축을 만들어 집 안에 가득 찼고, 기이하고 오래 묵은 그릇들과 병풍이며 글씨나 그림들은 세상에서 드문 보물들이었다.

 

 

[D-001]남극노인성군(南極老人星君) : 인간의 수고(壽考)를 맡은 남국 노인성.

[D-002]구장춘(丘長春) : 원의 도사 구처기(丘處機)의 도호(道號).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법장사(法藏寺)

 

 

천단(天壇) 북녘 담장을 따라 동으로 몇 리 가면 법장사(法藏寺)가 있다. 이 절은 금()의 대정(大定) 연간에 창건되었는데, 옛 이름으로는 미타사(彌陀寺)이다. ()의 경태(景泰) 2(1451)에 중수하고는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제도는 천녕사와 비슷하고, 탑은 7층에 높이가 여남은 길이나 되었다. 가운데는 텅 비어 나선형으로 층층대를 놓았는데, 한밤중같이 캄캄하므로 손으로 더듬어 발을 떼어 놓는데, 마치 귀신 동굴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벌써 한 층을 올라오고 보니, 여덟 개 창문이 활짝 터져 눈과 정신이 시원해졌다. 7층까지 차례로 올라가는데, 한 번씩 꿈을 꾸었다 깨는 듯했다. 층대마다 팔 면이요, 한 면마다 창문이 났고, 창마다 부처가 있어 무려 쉰여덟 개나 된다. 부처 앞에는 모두 등잔 한 개씩을 놓아 두어 더러는 말하기를,

 

정월 대보름날 밤엔 탑을 둘러싸고 불을 켜고는 번갈아 풍악을 잡히면 소리가 마치 하늘 위에서 나는 것만 같다.”

고 한다. 그 제일층에는 우리나라 김공(金公) 창업(昌業)의 제명이 있고, 그 밑에는 또 내 친구 홍군(洪君) 대용(大容)의 제명이 있는데, 먹빛이 금방 쓴 것 같았다. 서글프게 거닐다 보니, 마음을 털어놓고 마주 이야기라도 할 것만 같았다. 난간을 의지하여 사방을 바라다보니 황성 지도의 전폭이 역력히 눈 안에 들어왔다. 안력이 벌써 다하고 보니 심신이 흔들리고 머리칼이 오슬오슬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둘째 전각에는 빗돌 두 개가 섰는데, 하나는 급사중(給事中) 오헌(吳獻)의 글에 홍려 시승(鴻臚寺丞) 고대(高岱)의 글씨였고, 또 하나는 국자좨주(國子祭酒) 호형(胡瀅)의 글에 태자빈객(太子賓客) 회음(淮陰) 김렴(金濂)의 글씨요, 좌도어사(左都御史) 고소(姑蘇) 진감(陳鑑)의 전자(篆字)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태양궁(太陽宮)

 

 

법장사를 나와 서로 몇백 보를 가면 태양궁(太陽宮)이 있다. 참배하는 사람이 많아서 거마가 빽빽이 모여든다. 안팎의 여러 전각과 좌우 행랑채는 남녀 기도군이 하루에도 천만으로 헤아릴 만하였다. 층계 어간에는 촛불똥이 봉우리처럼 모였고, 향불에서 떨어진 재가 눈같이 날렸다. 앞에 전각 바로 복판에는 자미성군(紫微星君 자미성의 신())이요, 동쪽에는 태양성군(太陽星君 태양신)이요, 서쪽은 태음성군(太陰星君 월신(月神))이요, 뒷 전각에는 구천성군성모(九天星君聖母 구천신(九天神)), 왼편의 한 쪽 전각은 관제(關帝 관우(關羽)), 오른편 전각은 석가(釋迦)를 모셨다. 술이야 밥이야 꽃과자 등속을 팔고, 새들을 놀린다, 땅재주를 한다, 요술을 보인다, 야단법석을 하여 절 집 안은 큰 도회지가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안국사(安國寺)

 

 

숭문문 밖 서남쪽에 금어지(金魚池)가 있는데, 또 하나의 이름은 어조지(魚藻池)이다. 못을 작은 웅덩이로 구획하여 복숭아와 버들을 많이 심고,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해마다 오색 금붕어를 키워서 파는 것으로 업을 삼고 있다. 금빛 붕어가 제일 많으므로 금어지라 부른다. 해마다 단옷날이면 도성 사람들이 한목 나와 말을 달리면 못뚝과 또 응달의 일대는 정자와 장원들이 많은 중에서도 안국사(安國寺)가 가장 장하고 화려하다. 절문 좌우에는 종각(鍾閣)과 고루(鼓樓)가 있고, 큰 전각 셋이 있으며 그 앞의 동리 낭각은 몇백 칸인데, 어디나 불상을 모셨고 금벽 단청이 현란하여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다. 전각 뒤에는 또 큰 다락 세 채가 있어서 금빛 난간에 수놓은 들창은 구름 속에 나풀거렸다. 중 두 명이 마주 지키고 있을 뿐 참배하는 자가 드문 것은 괴이한 일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약왕묘(藥王廟)

 

 

천단 북녘에 약왕묘(藥王廟)가 있으니, 무청후(武淸侯)이성명(李誠銘)이 창건하였다. 전각 속에는 태호복희씨(太昊伏羲氏 중국 신화(神話) 중의 인물. 3() 중의 하나)를 모셨고, 왼편은 신농씨(神農氏 3황 중의 하나), 오른편은 헌원씨(軒轅氏 3황 중의 하나)였으며, 역대의 이름난 의원들을 배향했으니, 손진인(孫眞人 ()의 손사막(孫思邈))기백(岐伯 황제(黃帝) 때의 명의(名醫))편작(扁鵲 ()의 명의(名醫))갈홍(葛洪 ()의 도사. 자는 치천(稚川))화타(華陀 후한(後漢)의 명의(名醫))왕숙화(王叔和 ()의 명의)위진인(韋眞人 미상)태창령(太倉令 미상)장중경(張仲景)황보사안(皇甫士安) 등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대체로 문묘(文廟) 종향(從享)의 제도를 본뜬 것이다. 매월 초하루 보름에 남녀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질병 기도를 하는데, 촛불똥이며 향불 태운 재가 눈처럼 쌓였었다. 방금도 한 여인이 화려하게 단장하고 머리를 조아리는데, 분 땀이 자리를 적시었다. 전각의 장려한 폼은 태양궁과 거의 비슷하였다.

 

 

[D-001]장중경(張仲景) : 후한(後漢)의 명의 장기(張機). 중경은 자.

[D-002]황보사안(皇甫士安) : ()의 명의 황보탄(皇甫坦). 사안은 자인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천경사(天慶寺)

 

 

약왕묘와 담장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천경사(天慶寺)가 있다. 큰 전각 넷이 있는데, 첫째가 사왕(四王)이요, 둘째가 원통(圓通)이요, 셋째가 대연수(大延壽), 넷째가 공상(空相)이다. 공상전 복판에는 한 치 남짓 되는 금부처 몇천만 개를 주렁주렁 쌓아서 큰 부처를 만들었으니, 눈매는 산 사람 같고 이마 주름살이나 옷 주름은 모두 꼬마 부처들을 가로 모로 세우고 눕히어 마치 그림붓으로 모방해 그린 듯이 만들었다. 이 같은 정성과 기술이라면 건축을 이룩함에 있어서나 단청의 화려함에 있어서 어떤 어려움이 있을 것인가. 이처럼 큰 절간에 단지 한 명의 늙은 중이 두세 명의 젊은 중을 데리고 있을 따름이요, 행랑채 사이에는 여러 종류의 공장이들이 살면서 물건을 만드느라 법석이다. 서화의 긴 축들과 표구 장황들을 모두 이곳에서 하고 있었다. 동북쪽 모퉁이의 높은 다락 속에는 13층 금탑을 세웠는데, 조각과 그림이 훌륭하기가 귀신의 솜씨로 된 것만 같았다. 이 절은 명()의 천순(天順) 3년 기묘(1459)에 세웠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두로궁(斗姥宮)

 

 

천단의 서쪽에 두로궁(斗姥宮)이 있다. 대문 앞의 정면 거리에는 패루(牌樓)가 셋이 있어 남쪽 패루 바깥 현판에는 여천동수(與天同壽)라 썼고 안쪽 현판에는 만수무강(萬壽無疆)이라 썼으며, 동쪽 패루 바깥 현판은 봉래심처(蓬萊深處)라 썼고, 안쪽 현판은 동화주주(東華注籌)라 썼으며, 서쪽 패루 안쪽 현판은 천축연상(天竺延祥)이라 썼고, 바깥 현판은 잊어버렸다. 세 개의 패루가 솥발처럼 서서 금벽 단청빛이 현란하여 눈을 바로 뜨고 볼 수 없었다. 첫째 전각 현판은 북극전(北極殿)이라 하여 북두성군(北斗星君 북두성의 신())을 안치하고, 둘째 전각부터 다섯째 전각까지는 모두 쇠를 채워 구경을 시키지 않았다. 대체로 건축의 훌륭한 폼이라든가 그림의 기교는 보통 슬기와 역량으로서 미칠 바가 못 되었다. 좌우 행랑채의 바람벽 위에 그린 그림들은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나, 갈 길이 바빠서 상세히 보지를 못했다. 또한 전각에 이르러 들창 틈 사이로 멀리 들여다보니, 보물과 골동인지는 모르겠으나 푸른 빛이 귀신 불처럼 반짝반짝 하고, 포개어 있는 꼴이 부처의 배처럼 옹기종기하여 짐짓 알고자 해도 알 길이 없고, 마치 꿈에 부적 읽는 것만 같았다. 또 한 방에 이르니 옛 서화를 많이 두었는데, 미불(米芾 송 나라의 서예가(書藝家). 자는 원장(元章))의 천마부(天馬賦)와 산정목매도(山精木魅圖)가 있었으나 다만 그 제목만을 보고 떠났다. 강희 때에 태감(太監) 고시행(顧時行)이 태황 태후(太皇太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제 사재를 시사하여 빗돌을 세웠으니, 글은 한림 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고사기(高士奇 청 나라의 문학가. 자는 담인(澹人))가 지은 것으로 강희 을해년(1695)에 세웠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융복사(隆福寺)

 

 

융복사(隆福寺)의 장날은 매월 사흘과 하루이다. 의주(義州) 상인 경찬(鏡贊)과 동행하였다. 이날이 바로 장날이라 거마들이 더욱 복잡하여 절간 지척에서 그와 서로 잃어버리고는 할 수 없이 혼자서 다니면서 구경을 하였다. 비석에 기록하기를,

 

경태(景泰) 3(1452) 6월 공부 시랑(工部侍郞) 조영(趙榮)이 역군 1만 명을 동독하여 5(1454) 4월에 준공하였는데, 황제는 날을 골라서 거둥할 제 태학생(太學生) 양호(楊浩)와 의제낭중(儀制郞中) 장륜(章綸)이 함께 소장을 올려 간하매 그날로 거둥을 파하였다.”

한다. 절 안에는 공경과 사대부들의 수레와 말이 연이어 이르러 손수 물건을 골라 잡아 사곤 한다. 온갖 물건이 뜰에 가득 차고, 주옥과 보물들이 이리저리 발길에 채다시피 구르고 있어 걷는 사람의 발길을 조심스럽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송구스럽게 하였으며, 사람의 눈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섬돌 층대며 옥돌 난간에 걸어 둔 것은 모두 용봉 무늬를 놓은 담요와 모직들이며 담장을 둘러 싸다시피 한 것은 모두가 법서(法書)와 명화(名畵)들이다. 이따금 장막을 친 채 징과 북을 치는 곳은 재주를 부리고, 요술을 부려서 돈벌이를 하는 곳이다. 지난해 이무관(李懋官 이덕무(李德懋)의 자)이 이 절을 유람할 때는 마침 장날로서 내각 학사(內閣學士) 숭귀(崇貴)를 만났는데, 그 역시 손수 여우 털 갖옷 한 벌을 골라서 깃을 헤쳐 본다. 입으로 털을 불어 본다. 몸에 대고 짧고 긴 것을 재어 본다. 손수 돈을 끄집어내어 사는 것을 보고 깜빡 놀랐단 말을 들었다. 숭귀란 자는 만주인으로 지난해에 칙명을 받들어 우리나라에 왔던 자이다. 그의 벼슬은 예부 시랑(禮部侍郞)이요, 몽고부도통(蒙古副都統)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난한 선비들로서 비록 부리는 하인 한 명 없는 집안일지라도 아직 자기 발로 장터에 나가 막 굴러먹는 장사치들을 상대로 물건 값을 흥정하는 것은 좀스럽고 더러운 일로 치는 터이니, 이런 광경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돌아다니면서 본 흥정꾼들은 모두 오중(吳中 강소성 지방)의 명사들이요, 특별히 거간꾼들 따위 외에 유람차 온 자는 대체로 한림서길사(翰林庶吉士) 같은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은 친구를 찾아 고향 소식을 묻기도 하고, 겸하여 그릇 등속과 의복을 사기도 한다. 그들이 찾는 물건들이란 대개 골동 그릇이며 새로 발간된 서적이며 법서명화관복염주향랑안경 등으로서 남을 함부로 대신 시켜 군색스러운 일을 하는 것이 차라리 자기 손으로 유쾌하게 골라놓은 것만 못한 까닭인 것이다. 자신들이 멋대로 물건을 선택하면서 오가는 데 있어서도 역시 그들의 소박하고 솔직한 곳을 볼 수 있는 바 이래서 중국 사람은 저마다 물건을 감상할 줄 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석조사(夕照寺)

 

 

석조사(夕照寺)로 유세기(兪世琦)를 찾았다. 절은 그리 크지는 못하나 정쇄하고도 그윽하여 이야말로 티끌 한 점 움직이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이곳 선림 중에서 이처럼 맑은 곳은 처음 보았다. 중은 한 명도 없고 거처하는 사람들은 모두 복건(福建)이나 절강(浙江)에서 온 낙제한 수재로서 고향으로 돌아갈 노자가 없어, 이곳에 많이들 묵고 있으면서 서로 글을 지어 발간하여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당시 그들은 모두 서른한 사람으로서 남의 글 품팔이를 하려고 아침에 나가고 아직 돌아오지 않아 한 사람도 집에 없으니 절 안은 고요하였다. 거처하는 방들은 다들 정결하고 자리들이 잘 정리되어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감회에 잠겨 거닐면서 발길을 못 돌리게 하였다. 석진일기(析津日記)에는 이르기를,

 

연경 팔경(八景) 중에 금대석조(金臺夕照)가 있으니, 이 절 이름도 여기에서 나왔다.”

고 하였다. 유군(兪君)은 원래 복건 사람인데, 섬서성 병비도(陝西省兵備道) 진정학(陳庭學)의 자형(姊兄)이 되었다가 금년 2월에 상처를 하고, 아들도 없이 네 살 난 젖먹이 딸을 그의 처가에 두고 자기는 홀로 심부름 하는 어린애 하나를 데리고 이 절에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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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제묘(關帝廟)

 

 

관제묘(關帝廟)는 천하에 어디든지 비록 궁촌 벽지라도 사람 몇 호만 사는 데는 반드시 사치한 묘우를 떠받들어 지어 놓고, 제사에 정성이 대단하여 소 먹이는 아이와 곁두리 먹이는 지어미[饁婦]들까지 뒤떨어지기가 두려워 달려든다. 책문(柵門)에 들어온 뒤 황성까지 2천여 리 사이에 새로 지은 것이나 묵은 것이나 혹은 크고 작은 수많은 관제묘가 서로 마주 바라다보고 있다. 그 중에도 요양(遼陽)과 중후소(中後所)에 있는 것이 가장 영험이 있다 하고, 북경에 있는 백마관제묘(白馬關帝廟)라 하여 사전(祀典)에 실렸으니, 곧 정양문 오른편에 있는 관제묘가 이것이라 한다. 매년 5 13일이면 제사를 올리는데, 10일 앞서 태상시(太常寺)가 본시(本寺)의 당상관(堂上官)을 보내어 예식을 집행한다. 이날은 특히 민간의 참배가 더욱 극성스럽다. 대체로 나라에 큰 재앙이 있으면 제사를 모셔서 고해 바친다. ()의 만력(萬曆) 시대는 특히 삼계복마대제신위진원천존(三界伏魔大帝神威鎭遠天尊)으로 봉했으니, 이 지시는 궁중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 남관왕묘(南關王廟) 바람벽 위에 걸린 그림도 대체로 이곳의 것을 모방한 그림이다. 초굉(焦竑 () 학자. 자는 약후(弱侯))이 묘비문을 짓고 동기창(董其昌 ()의 서예가. 자는 원재(元宰))이 글씨를 썼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이절(二絶)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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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사(明因寺)

 

 

명인사에는 위촉(僞蜀 왕건(王建)이 세운 전촉(前蜀))왕연(王衍 전촉의 후주(後主). 자는 화원(花源))의 때에 관휴(貫休 전촉의 저명한 중)가 그린 열여섯의 나한상(羅漢像)이 세상에서 기기괴괴한 그림으로 전하는 것과 다르다는 말을 듣고 나는 한 번 보려고 생각했다. 좌중에는 초 한림(初翰林) 팽령(彭齡)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드디어 날짜를 약속하여 함께 수레를 몰아 절에 닿았다. 절은 정양문 밖 3리 되는 강의 동편 언덕에 있는데, 그리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았고, 다만 해소병 들린 중 한 명이 있었는데, 위인이 더럽게 무뚝뚝하여 굳이 이 그림이 없다고 기휘하면서 절 구경도 못하도록 했다. 초 태사(初太史)는 중을 향하여 재삼 간청하였으나 중은 완고하게도 점점 더 뻣뻣하여 머리를 숙이고 대답도 하지 않더니 조금 있다가는 고함을 치면서 큰 소리로 욕을 해 왔다. 초 태사는 얼굴을 붉히고 물러 나와 심히 흥취를 깨뜨렸다. 나를 이끌고 함께 돌아 오는 길에 호국사(護國寺)를 거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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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륭선호국사(大隆善護國寺)

 

 

호국사(護國寺)는 도성 사람들이 불러서 천불사(千佛寺)라고 하니, 부처 천 개가 있기 때문이요, 또 숭국사(崇國寺)라고도 한다. 크고 작은 불전이 열한 군데나 있어 크기는 굉장하나 역시 많이 헐렸다. ()의 정덕(正德) 연간에 황제의 명령으로 서번(西番) 법왕(法王) 영점반단(領占班丹)과 저초장복(著肖藏卜) 등이 거주하였다. 소위 반단이니 장복이니 하는 것은 지금 열하에 있는 반선(班禪)인 것 같다. 절의 창건은 언제인지 모르겠으나 원()의 승상(丞相) 탈탈(脫脫)의 소상이 있는데,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붉은 옷에 수염이 길고 눈썹도 빼어나 기품이 깨끗해 보이고, 의관은 모두 중국 제도와 비슷하다. 원의 재상도 왜 머리를 깎지 않았는지 좀 이상해 보였다. 곁에서 봉관(鳳冠)을 쓰고 붉은 치마를 입고 있는 노파가 곧 탈탈의 처다. 또 요광효(姚廣孝)의 화상이 있는데, 얼굴이 맑고 점잖게 생겼으며 중머리 바람으로 가부좌를 하고 앉았는데, 세상의 온갖 티끌과 인연을 끊은 것 같이 보여 서호(西湖)에서 엉덩이를 치면서 혼자 시를 읊던 때와는 딴판이다. 옛날 사마천(司馬遷 전한(前漢) 때의 문학가. 자는 자장(子長))은 장자방(張子房 장량(張良). 자방은 자)의 얼굴이 여인과 같다고 했는데, 내가 이 그림을 보지 못했을 때는 필시 하늘을 찌를 만한 살기(殺氣)를 띠고 있으려니 생각했던 것이 지금 와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D-001]요광효(姚廣孝) : 명의 중이고 도사이며 또 문학가. 승명(僧名)은 도연(道衍)이요, 자는 사도(斯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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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묘(火神廟)

 

 

화덕진군묘(火德眞君廟)는 북안문(北安門)일중방(日中坊)에 있다. 원의 지정(至正) 연간에 지었고, 명의 만력 때에 고쳐 증축하였으며, 천계(天啓) 원년(1621)에 명령을 내려 매년 6 22일에는 태상(太常)의 관원으로 하여금 화덕신(火德神)을 제사하게 되었다. 앞에 전각은 융은(隆恩)이요, 뒤의 전각들은 만세(萬歲)경령(景靈)보성(輔聖)필령(弼靈)소령(昭寧)이라 하여 모두 여섯 개의 전각이 있어 푸른 유리 기와를 이었으며, 섬돌 층층대도 죄다 초록빛 유리 벽돌을 깔았다. 그 뒤에는 수정이 호수를 굽어보고 섰는데, 금벽 단청이 비단 물결의 무늬 위에 비치어 번쩍였다. 장하고 화려하기는 약왕묘와 상당하지마는 경치는 그 보다 나을 것만 같다. 빗돌 한 개는 주지번(朱之蕃)의 글이요, 또 한 개는 옹정춘(翁正春 ()의 고관(高官). 자는 조진(兆震))의 글이다.

 

 

[D-001]주지번(朱之蕃) : 명의 문학가이며 서예가. 자는 원개(元介) 또는 원승(元升).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북약왕묘(北藥王廟)

 

 

북약왕묘는 전각이나 모셔둔 위패 같은 것이 남묘와 꼭 같고, 동쪽은 해자(海子)를 굽어 보아 물가에 수없는 버들은 그늘이 짙은데, 물가에 노니는 손들은 언제나 가득했다. 천계 연간에 위충현(魏忠賢 ()의 간신(奸臣))이 세운 것이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숭복사(崇福寺)

 

 

숭복사는 본시 민충사(憫忠寺)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친히 요동을 정벌하고 돌아와 전쟁에 죽은 장사들을 불쌍히 여겨 이 절을 짓고 명복을 빌었었다. 두 개의 탑이 마주 보고 섰는데, 더러는,

 

안녹산(安祿山 당 현종(唐玄宗)의 반신(叛臣))이 세운 것이다.“

라 하였고, 혹은

 

사사명(史思明 당 현종(唐玄宗)의 반신(叛臣))이 지은 것이다.”

라고도 한다. 높이는 각기 열 길씩이나 된다. 이렇게 두 역적이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람들은 오히려 천년 고적이라 하여 그대로 남겨 두었다. 송사(宋史)에는,

 

사첩산(謝疊山)이 원()의 지원(至元) 26(1289) 4월에 연경에 이르러 사 태후(謝太后)의 빈소(殯所)와 영국공(瀛國公 미상)이 있는 곳을 찾아 절을 하면서 통곡하매, 원의 사람들이 그를 민충사에 보내어 두었더니 벽 사이에 서 있는 조아비(曹娥碑)를 보고 울면서, ‘한 여인으로도 오히려 이렇거늘…… 하고는 이어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라고 하였다. 또 장불긍(張不肯 미상)이 사사명을 위하여 당 숙종(唐肅宗 이형(李亨))을 찬송한 비문으로서 소영지(蕭靈芝 미상)가 쓴 것을 찾았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그러나 이는 의당 주이준(朱彛尊 ()의 학자. 자는 석창(錫鬯))의 변증으로 옳음을 삼아야 할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정인지(鄭麟趾) 등의 저)에는,

 

충선왕(忠宣王)이 연경에 이르니 황제가 머리털을 깎아서 석불사(石佛寺)에 두었다.”

라고 하였는데, 혹은 이 절이라 하지마는 상세히 알 수는 없다.

 

 

[D-001]사첩산(謝疊山) : 송의 충신 사방득(謝枋得). 첩산은 호요, 자는 군직(君直).

[D-002]사 태후(謝太后) : 송 이종(宋理宗)의 황후로서 원에 붙들려서 피해를 입었다.

[D-003]조아비(曺娥碑) : 후한(後漢) 때 채옹(蔡翁)이 효녀 조아를 위하여 지은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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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사(眞覺寺)

 

 

진각사는 속명으로 오탑사(五塔寺), 또는 정각사(正覺寺)이다. 탑 높이는 열 길이나 되는데, 금강보좌(金剛寶座)라고 부른다. 그 안으로 들어가 캄캄한 속에 나선형 다리를 따라 꼭대기까지 올라 가니, 위에는 평평한 대가 되고 그 위에 또 다섯 모가 난 작은 탑을 두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명의 헌종 황제(憲宗皇帝 주견심(朱見深))가 살아 있을 때에 의관을 보관해 두었던 곳이다.”

라고 한다. 이 절은 더러는,

 

몽고인이 지은 것이다.”

라 하고, 혹은,

 

명의 성조 황제(成祖皇帝 주체(朱棣)) 때에 서번(西番)의 판적달(板的達)이 금부처 다섯을 바쳤으므로 이 절을 세워서 그를 맡겼다.”

라고 한다.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은 처음으로 금지붕 속에 들어 있는 서번 중들을 보고 마음 속으로 크게 놀라지마는 중국은 역대로 반드시 이같이 떠받들었으니, 세상 사람들은 모두 천자가 소일 삼아 쉬는 곳이며 아울러 명복을 비는 곳이라 인정하므로 이곳은 비록 궁극으로 사치롭게 꾸몄더라도 여러 신하들은 감히 지적을 못하고 다만 서로 용서하였던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이마두총(利瑪竇塚)

 

 

부성문(阜成門)을 나와서 몇 리를 가니 길 왼편으로는 돌기둥 450개를 쭉 늘여 세우고, 위에는 포도 시렁을 만들어 포도가 한창 익었었다. 돌로 만든 패루(牌樓) 세 칸이 있고, 좌우에는 돌로 깎은 사자(獅子)가 마주 쭈그리고 앉았다. 그 안에는 높은 전각이 있는데 수직군에게 물어서 비로소 이마두(利瑪竇)의 무덤인 줄을 알았다. 모든 서양(西洋) 선교사(宣敎師)들의 무덤으로서 동서 양쪽에 계장(繼葬)한 것이 모두 70여 분이나 되었다. 무덤 둘레는 네모로 담장을 쌓아 바둑판처럼 되었는데, 거의 3리나 되니, 그 안은 모두 서양 선교사들의 무덤이었다. ()의 만력 경술년(1610)에 황제는 이마두의 장지를 하사하였는데, 무덤의 높이는 두어 길이나 되고 벽돌로 쌓았다. 무덤 꼴은 시루같이 생겼는데 기왓장이 사방으로 처마 끝까지 멀리 나왔다. 바라보면 마치 다 피지 못한 커다란 버섯처럼 생겼다. 무덤 뒤에는 벽돌로 높다랗게 싼 육모 난 집이 섰는데, 마치 철종 같아 보였다. 삼면으로는 홍예문을 내었고, 속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었다. 빗돌을 세워 글을 새기기를 야소회사이공지묘(耶蘇會士利公之墓)라 하였고, 왼편 옆에는 잔 글씨로,

 

이 선생(利先生)의 휘()는 마두다. 서태(西泰) 대서양(大西洋) 이태리아국[意太利亞國] 사람으로서 어릴 때부터 참다운 수양을 하였다. 명의 만력 신사년(1581)에 배를 타고 중화(中華)에 들어와 교를 널리 펴고 만력 경자년(1600)에 북경에 와서 만력 경술년(1610)에 죽으니 세상을 누린 지가 쉰다섯 해에 교회에 있는 지는 마흔 두 해이다.”

라고 하였고, 오른쪽에는 또 서양 글자로 새겼다. 빗돌 좌우에는 아름답게 조각한 돌기둥을 세우고, 양각(陽刻)으로 구름과 용의 무늬를 새겼다. 빗돌 앞에는 또 벽돌 집이 있는데, 지붕은 평평하여 돈대와 같았다. 구름과 용의 무늬를 새긴 돌기둥을 쭉 늘여 세워 석물로 삼았다. 제사 받드는 집이 있고, 그 앞에는 또 돌로 만든 패루와 돌 사자가 있으니, 이는 탕약망(湯若望)의 기념비(紀念碑)이다.

 

 

[D-001]이마두(利瑪竇) : 이태리에서 중국으로 들어왔던 저명한 선교사. 자는 서태(西泰).

[D-002]탕약망(湯若望) : 독일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선교사. 자는 도미(道味).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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