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양주 최치원 기념관 얖 백옥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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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사산비명(四山碑銘)/ 격황소서(檄黃巢書) · 雙女墳傳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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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쌍녀분기(雙女墳記 ) or 최치원전(崔致遠傳)
최치원, 쌍녀분(雙女墳)/ 인귀교환(人鬼交歡)설화 - 산 사람이 죽은 이와 시를 수작함.
>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 중의 「만복사저포기」나 「이생규장전」에도 동일한설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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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현승환, 최치원설화의 형성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644
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권15 거성(去聲) 대(隊)조에는 ‘선녀홍대(仙女紅袋)’란 제목으로 되어 있으나, 내용이 거의 비슷한 이야기가 성임(成任)의 『태평통재(太平通載)』 권68에는 ‘최치원’으로 되어 있다. 또 중국 남송 때의 장돈이(張敦頤)가 편찬했다는 『육조사적유편(六朝事迹類編)』의 분릉문(墳陵門) 제13에는 ‘쌍녀분(雙女墳)’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태평통재』에 수록된 내용은 『대동운부군옥』의 수록 내용에 비하여 훨씬 내용이 길 뿐만 아니라 문학화되어 있어 설화보다는 소설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다. 아마도 중국 현지에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는 ‘최치원과 쌍녀분’에 관한 전설이 『육조사적유편』으로 기록되었던 것을 바탕으로, 『대동운부군옥』 수록분과 같은 기록문학 작품으로 발전하였다가, 다시 『태평통재』 수록분과 같은 단편소설로까지 승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대동운부군옥』에 수록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최치원이 중국으로 유학갔을 때 초현관(招賢館)에서 놀았는데, 그 앞 언덕에 ‘쌍녀분’이라는 오래 된 무덤이 있어, 그 석문에다 시를 써 놓고 돌아왔다. 그 뒤 갑자기 손에 홍대를 쥔 여자가 최치원에게 와서 “팔낭자와 구낭자가 화답하여 삼가 바칩니다.”라고 하였다. 최공이 깜짝 놀라 그 낭자가 누구인지 물었더니, 여자는 말하기를 “공께서 아침에 시를 지으셨던 곳이 바로 두 낭자가 사는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홍대를 받아 보니 두 낭자가 화답한 시가 들어 있었고, 뒷폭에는 한 번 만나기를 청하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공이 여자의 이름을 물으니 ‘취금’이라 했다. 공이 또 시를 짓고, 끝에다 역시 만나자는 내용을 써 취금에게 주어 돌아가게 했다. 한참 후 한 쌍의 구슬 또는 두 송이 연꽃과 같은 두 여자가 나타났다. 공이 두 여자를 맞아 근본을 물으니, 두 여자가 들려주는 내력은 이러했다.
그들은 원래 부호인 장씨집의 딸들로서, 언니가 18세, 아우가 16세 때에 각각 소금장사와 차장사에게 시집가기를 부모가 권유하였다. 그러나 자매의 마음에 차지 않아 울적한 마음이 병이 되어 마침내는 요절하였는데 다행히 최공과 같은 수재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매는 오늘 같은 좋은 밤에 시나 지으며 즐기기를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먼저 시를 짓자 이어 두 낭자가 차례로 시를 지어 읊었다. 마침내 그들의 간 곳은 알지 못했다.
이와 같은 내용을 『태평통재』의 것과 비교하여 보면, 전체적인 줄거리는 거의 같으나 「선녀홍대」에는 등장인물들이 주고받은 시들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또 작품 말미에 남녀 주인공들이 하룻밤을 동침하고 나서 이튿날 새벽에 작별한 뒤 최공이 다시 쌍녀분을 찾아가 지난 밤 일을 회상하며 장가(長歌)를 불렀고, 그 뒤 신라로 돌아와 명승지를 유람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버렸다는 「최치원」의 내용이 없다.
이 설화는 당나라 때의 전기소설인 장문성(張文成)의 『유선굴(遊仙窟)』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자와 사자와의 교정(交情)이 중심 모티프이고 산문 작품 속에 삽입시가 다수 포함되어 있어, 내용적인 면에서나 형식적인 면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라 하는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 중의 「만복사저포기」나 「이생규장전」 등에 비교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설화의 문학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gtI0F0b0gs&t=655s
내초도 금돈시굴(金豚始窟)
경주 최씨의 시조로 신라 말기의 대석학인 고운 최치원을 든다. 최치원은 그 높은 학문이 이 나라는 물론 멀리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한학자일뿐 아니라 동방문학을 처음으로 만든 문장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최치원은 기이한 전설을 남기고 있다. 원래 경주 최씨의 시조는 금빛 나는 돼지에서 낳았다하여 일명 「돼지 최씨」라고 불리어 오는데 이것은 단군이 곰에서 낳았다는 전설과 또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박속에서 낳았다는 민족 설화와 함께 이 경주 최씨에 관한 것도 중요한 민족 설화의 하나가 되고 있다. 그 설화가 지금은 군산시에 속해있는 고군산 열도의 하나인 내초도에서 있었던 일로 전해진다.
최치원의 아버지가 하루는 내초도라는 섬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누런 황돼지한테 붙들려 바위 밑 토굴로 끌려가서 몇 달 동안을 사는 동안에 황돼지에 태기가 있어 열 달 후에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점점 자라나자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육지로 나오려고 해도 못나오고 황돼지와 같이 짐승처럼 살게 되었다. 하루는 어미돼지가 이웃 섬으로 사냥을 나가고 없는 새에 다섯 살 난 아들에게 아버지는 사실 이야기를 다하면서 치원이 너를 육지로 데리고 나가 공부를 시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나 빠져나갈 재주가 없다고 한탄을 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들은 어미돼지가 날마다 해다 놓은 나무토막을 몰래 엮어서 배를 만들어서 타고 나가자고 했다.
어느 날 돼지가 또 산에 나무를 하러 나간 사이에 나무를 발처럼 엮은 뗏목을 타고 육지로 나오는데 어느새 어미돼지가 알고서 헤엄을 쳐 쫓아오고 있었다. 금새 앞발이 배에 닿을 듯 하자 아들이 미리 잘라서 실어 놓은 나무토막 하나를 던져 주었다. 욕심이 많은 돼지는 나무토막이 떠내려 갈까봐 아까워서 얼른 물어다가 섬에다 갖다두고 또 쫓아오자 아들은 계속 나무토막을 던져 주어 끝내는 어미 황돼지가 기진맥진해서 죽었다.
가까스로 살아서 육지에 닿은 아들은 머리가 총명해서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공부해서 뒷날에 훌륭한 인물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경주 최씨의 시조요 신라의 대문장가였던 최치원이라고 한다.
이러한 설화에 의해서 옥구군 일대에서는 경주 최씨는 금돼지의 자손이라는 말이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으며, 내초도에는 금돈시굴(金豚始窟)이라는 굴이 아직도 그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그의 뛰어난 업적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담고 있고 또 그만큼 뛰어난 인물이기에 그만한 전설적인 이야기를 남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그가 오늘날에는 믿기 어려운 금돼지에서 태어났다는 것인데 이것이 내초도에 있는 금돈시굴과 묘한 일치를 보이고 있다는데 흥미를 끌고 있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군산 지역의 인근인 옥구 일대는 최치원과 얽힌 사연을 여러 가지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금 옥구 상평마을에 있는 자천대가 바로 그것이다. 「옥구군지」에 나타난 이 자천대는 최치원이 일찌기 당나라에서 큰 벼슬과 학문을 닦고 나라에 돌아왔을 때 세상이 너무 어지러워 민심이 흉흉하자 홀로 이 자천대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랬다는 것인데 애당초 이 자천대는 옥구의 비행장 안에 있던 것을 상평마을에 옮겼다는 것으로 원래 자천대 부근에 있는 곧고 매끄러운 암석 위에는 최치원의 무릎 자국과 먹을 갈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옥구군지」에는 또 그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이 고을의 태수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이보다 더 큰 벼슬을 내렸어도 그는 이를 거절하고 이곳 태수만을 지냈다고 한다.
아무튼 최치원과 옥구땅은 이러한 전설을 통해 기이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 틀림없고 그래서 내초도의 금돈시굴에서 최치원이 낳았다는 설화를 더욱 밑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C%B9%98%EC%9B%90%EA%B8%B0%EB%85%90%EA%B4%80
최치원기념관은 신라 말기 문신인 최치원(崔致遠, 857년 ~ 908년 이후)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장수성 양주시에 2007년에 건립되었다.
중국 양주에서 최치원 기념관이 있는 당성유적지를 찾아서
https://hyeanj.tistory.com/18354789
1층 양쪽 벽에 동판으로 그려진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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