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明竹(금명죽, 초록색과 황색이 번갈아 나타나는 대나무)

 

 

 

 

 

 

 

https://www.youtube.com/watch?v=elZjr8OL-fg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C%B0%BD%EC%9D%8D%EC%84%B1

 

고창읍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창읍성(高敞邑城)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에 있는 옛 읍성이다. 1965년 4월 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45호로 지정되었다. 자연석 성곽으로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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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高敞邑城)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에 있는 옛 읍성이다. 1965년 4월 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45호로 지정되었다.

자연석 성곽으로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축성했다고도 하고, 숙종 때 완성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백제 때 고창 지역을 모량부리로 불렀던 것에서 모양성[*모량성]이라고도 불린다.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대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국난극복을 위한 국방관련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주) *모량성이 맞는 표기.

둘레 1,684m, 높이 4~6m, 면적 50,172평으로 동서북문과 옹성 3개소, 치성 6개소, 성밖의 해자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 2지, 4천이 있었으나 전화로 대부분의 건물이 손괴된 것을 1976년부터 복원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22동 중 14동(동헌·객사·풍화루·공북루·진서루·등양루·성황사·관청·작청·내아·향청·서청·장청·옥)이 복원되었고 앞으로 8동의 관아 건물도 복원할 계획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BmA7o6lLzYI

 

 

 

 

https://blog.naver.com/kydong47/223125625720

 

고창읍성 맹종죽림(孟宗竹林)/ 맹종읍죽(泣竹), 맹종설순(雪筍), 반포지효(反哺之孝)

https://www.youtube.com/watch?v=5id19jXlylc https://namu.wiki/w/%EB%A7%B9%EC%A2%85(%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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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amu.wiki/w/%EB%A7%B9%EC%A2%85(%EC%82%BC%EA%B5%AD%EC%A7%80)

 

맹종(삼국지)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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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삼국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홀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고 한다.

한 번은 오래동안 병상에 누워있던 그의 모친이 한겨울 죽순을 먹고 싶다고 하자 맹종은 눈이 쌓인 대밭으로 갔지만 죽순이 있을 리 없어, 죽순을 구하지 못한 맹종은 눈물을 흘렸다. 하늘이 감동해 맹종의 눈물이 떨어진 그곳에 눈이 녹고 죽순이 돋아나 맹종이 그것을 끓여 모친에게 대접하자, 어머니의 병환이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이것이 맹종읍죽과 맹종설순이라고 불리는 고사로 24효나 효제문자도에도 나온다. 그의 어머니는 12폭 짜리 이불을 만들어 어진 선비를 불러서 함께 덮게 했는데, 아들이 군자의 말씀을 듣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남양의 이숙으로부터 배워 그에게서 재상의 그릇이라고 평가받았으며, 처음에는 주거 휘하의 군리를 지내면서 어머니를 군영으로 모셨고, 밤에 비 때문에 물이 새자 울면서 어머니에게 사죄하자 어머니는 노력할 뿐이고 어찌 눈물 흘릴 일이냐고 위로했다. 주거가 맹종을 알아보면서 염지사마에 임명되었으며, 맹종은 그물을 엮고 손으로 물고기를 잡아 젓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보냈지만, 어머니는 어업을 관장하는 관리가 되어 생선젓을 만들어 부치는 것은 혐의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돌려보냈고, 이후 오현의 현령으로 임명된다.

당시에 집을 옮길 수 있는 관직을 얻지 못해 절기에 맞는 물건을 맞으면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보내 항상 먼저 먹지 않았으며, 237년 오나라 호종과 고옹이 효와 충은 병행할 수 없다고 해 손권은 부모가 죽었을 때 근무지를 이탈하면 사형에 처하는 법을 만든다. 하지만 맹종은 모친이 죽자 법을 앎에도 불구하고 바로 달려나가 상을 치룬 후 스스로 무창에 돌아와 감옥에 갇혀 형 받기를 청했는데, 육손이 평소 그의 행실과 효성에 대해 비호하자 손권도 결국 그의 직위를 한 단계 강등시키는 선에 그쳤다.

손권이 스스로 엄한 법을 만들어 놓고도 맹종을 사형하지 아니해 상황이 자못 우습게 되었으나, 오히려 사람들은 "그 효자 맹종마저 벌을 받다니"라며 엄정함에 놀랐고, 그후로는 누구도 그 법을 어기지 않았다.

258년에 광록훈을 지내 손침이 손량을 폐위하기 전에 종묘에 고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손침이 손휴에게 무창에 주둔하겠다고 밝히는 것도 맹종을 통해 행해졌다. 262년 10월에 어사대부로 승진했으며, 267년 12월에는 수승상의 직위로 관료와 중군의 보병기병 2천 명을 준비해 임금의 시신을 태우는 수레를 끌고가, 동쪽 명릉에서 손화의 영혼을 맞이했다.[1]

268년 2월에 사공이 되었다가 271년 9월에 사망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mA7o6lLzYI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1812년 ~ 1884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3346

 

신재효(申在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만년에는 「춘향가」 · 「심청가」 · 「박타령」 · 「토별가」 · 「적벽가」 · 「변강쇠가」의 판소리 여섯마당을 골라서 그 사설을 개작.

고소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은 판소리를 바탕으로 줄거리를 부연한 작품들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C%9E%AC%ED%9A%A8

신재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재효 3개 언어 문서 토론 읽기 편집 역사 보기 도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재효 (申在孝, 1812년 ~ 1884년 )는 조선국 가선대부 등을 지낸 조선 말의 판소리 연구가인 동시에 판소리 작가이자 문신이다. 가선대부, 오위장 등을 지냈다. 자(字)는 백원(百源), 호(號)는 동리(桐里)·호장(戶長)이고 본관은 평산 (平山)이며 조선 전라도 고창현 (지금의 대한민국 전라북도 고창군 ) 출생이다. 생애 [ 편집 ] 아버지 신광흡(申光洽)은 경기도 고양군 (지금의 대한민국 경기도 고양시 ) 출생으로 한성부 (지금의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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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tps://www.youtube.com/watch?v=KGUXHePtb2s

 

 

 

 

[펌]

https://www.youtube.com/watch?v=VysWVHEEUK4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2286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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