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장충단공원에서 출발하여 남산에 올랐다가 숭례문까지만 걸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PV27ZAW24c&list=RDQPV27ZAW24c&start_radi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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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단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충단비(奬忠壇碑)는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있는, 대한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장충단에 서 있던 비석이다. 1969년 9월 18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장충단은 조선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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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단비(奬忠壇碑)는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있는, 대한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장충단에 서 있던 비석이다. 1969년 9월 18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장충단은 조선 고종 32년(1895)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일본인을 물리치다 순사한 홍계훈, 이경직 및 여러 신하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제단이다.
비는 반듯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구조이다. 앞면에는 '장충단(奬忠檀)'이라는 비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순종이 황태자시절에 쓴 글씨이다. 뒷면에는 민영환이 쓴 비문이 기록되어 있다.
광무 4년(1900) 고종의 명에 의해 장충단을 지을 때 비도 함께 세워 놓았다. 일제는 1910년 한일합방 후 이 비를 뽑아 버렸으며, 1920년대 후반부터는 여러 시설들을 마구 설치하여 '장충단 공원'이라 이름 붙였다. 광복 후 일제가 세웠던 건물을 모두 헐면서, 비도 다시 찾아 세우게 되었고, 1969년 지금의 자리인 수표교(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서쪽에 옮겨 세웠다.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자질이 상성(上聖)처럼 빼어나고 운수는 중흥을 만나시어 태산의 반석과 같은 왕업을 세우고 위험의 조짐을 경계하셨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가끔 주춤하기도 하셨는데 마침내 갑오·을미사변이 일어나 무신으로서 난국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몸바친 사람이 많았다. 아! 그 의열(毅烈)은 서리와 눈발보다 늠름하고 명절(名節)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길이 제향(祭享)을 누리고 기록으로 남겨야 마땅하다. 그래서 황제께서 특별히 충성을 기리는 뜻을 표하고 이에 슬퍼하는 조서(詔書)를 내려 제단을 쌓고 비를 세워 표창하며, 또 계속 봄가을로 제사드릴 것을 정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보이고 풍속으로 삼으시니, 이는 참으로 백세(百世)에 보기 드문 가르침이다. 사기(士氣)를 북돋우고 군심(軍心)을 분발시킴이 진실로 여기에 있으니 아! 성대하다. 아! 성대하다.
장충단
장충단은 고종 32년(1895) 경복궁에서 일어난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 시해사건인 을미사변 때 일본인을 물리치다 장렬하게 순사(殉死)한 시위대(侍衛隊) 연대장 홍계훈(洪啓薰, ?∼1895)과 궁내부(宮內府) 대신 이경직(李耕稙, 1841∼1895)을 비롯한 여러 장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광무 4년(1900) 9월 고종 황제가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세운 사당이다.
사당건립 후 매년 이곳에서 봄ㆍ가을로 제사를 지냈으나 1910년 일제강점 이후 폐사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이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이라 이름하여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했으며, 상해사변(上海事變) 때 일본군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肉彈三勇士)의 동상과 안중근(安重根) 의사에 의해 살해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혼을 달래기 위한 박문사(博文寺)를 세웠다. 광복 후 육탄삼용사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으나, 6·25전쟁으로 장충단의 사당과 부속건물이 파괴되면서 장충단비만 남게 되었다.
연역
장충단비는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을 새긴 비로 1900년 11월에 세워졌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석을 얹은 간략한 형식이다. 앞면에 새긴 "奬忠壇"이란 전서(篆書) 제목은 뒤에 순종(재위 1907∼1910)이 된 황태자의 예필(睿筆)이며, 뒷면에 새긴 비문은 그당시 육군부장(陸軍副將)이던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짓고 썼다. 1910년 이후 일제가 뽑아버렸던 비신을 광복 이후 찾아서 영빈관(현 신라호텔 자리) 안에 세웠고, 1969년 지금의 자리인 수표교(水標橋,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서쪽으로 옮겼다.


이준열사 동상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985
이준(李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이준(李儁, 1859년 음력 12월 18일 조선국 함경도 북청 출생 ~ 1907년 7월 1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별세.)은 대한제국의 관리이다.
평리원 검사이며, 검사 5년차에 법무대신 이하영을 탄핵하였다.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아서 박해받기도 할 정도로 강직한 근무를 했다고 한다.(이덕일과 이희근 지음, 《우리역사 수수께끼》 2권: 이준 열사는 과연 헤이그에서 할복자살했는가, 김영사)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되어 외교 활동 중 순국하였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순칠(舜七), 아호는 일성(一醒), 해사(海士)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3zlfT9eqD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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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항일 의병장(대한독립군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 정치 사상가이다. 태명은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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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저격

저격 직전의 이토 히로부미(왼쪽에서 두 번째)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14]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哈尔滨, 哈爾濱(하얼빈), Harbin)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15]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사격하였다.총알은 할로포인트를 사용하였으며,현재는 금지되어있는 총알이다.[16] 이외에도, 일곱 발의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남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에게 총격하였다.[14]
총격 후, 안중근은 가슴 안에 있던 태극기를 높이 들어 올리며 에스페란토어로
코레아 우라!
이라고 3번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대한 독립만세라는 뜻이었다.[14]
총격 30분 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가끔 사용)를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기록에서는 죽기 직전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 누구지"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체포와 국내외 변호 모금 운동 그리고 사형 판결

자로가 성인(成人)에 대해서 묻자,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는 안중근(1879∼1910) 의사가 남긴 유묵(遺墨)이다.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의 요청으로 산포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진압하려고 나서자 이에 참가하였다. 1906년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학교경영에 전념하기도 했다.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한 후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했으며,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여 그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권총을 쏴 3발을 명중시켰다. 여순감옥에 수감된 후 1910년 3월 26일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여기에는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의 안위를 마음으로 애쓰고 속을 태움) 8자를 중앙에 행서체로 쓰고, 왼쪽 위편에 “증안강검찰관(贈安岡檢察官)”, 오른쪽 아래편에 “경술삼월(庚戌三月)에 여순옥중(旅順獄中)에서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 삼가 경의를 표하다(安重根謹拜)”라 쓰여 있으며, 그 밑에 안중근 의사의 장인(掌印:손바닥으로 찍은 도장)이 먹물로 찍혀 있다.
이것의 크기는 가로 38.2㎝, 세로 149㎝이다. 이 유묵은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여순 옥중에서 자신을 취조한 당시 여순 검찰청 야스오카 세이시로<안강정사랑 (安岡靜四郞)> 검찰관에게 써준 것으로 야스오카는 죽기 직전 그의 장녀에게 물려주었으며, 그 후 1976년 2월 11일에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한 것이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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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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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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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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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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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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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국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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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국무위원회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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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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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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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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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본디 '龜'였으나 36세 때 감방생활중 음이 같은 '九'로 바꿈.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A%B5%AC
김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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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 강점기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자는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연상(蓮上)이다. 백범이라는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1][2]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었으며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감방시절 36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斗來), 윤봉길 의거이후 중국 내륙으로 피난했던 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17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 이후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생활을 하였으며[3], 28세 때 부친 탈상 후 기독교에 입문하였다.[4][5]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 운동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1920년대 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제사회에 일제강점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외교적 노력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되고 일제에 의해 국내 연결조직인 연통제가 와해되어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하고 임시정부 내 노선 갈등이 격화되면서 일부 독립 운동가가 임시 정부를 이탈하는 등 임시정부가 어려움에 처하자 김구는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1931년에 독립 운동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가평의회 의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4월 19일부터 5월5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치러지자 정치와 거리를 두고 건국실천원양성소 등 청년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9년 6월 26일에 사저 경교장에서 안두희가 쏜 흉탄에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으로 장례가 엄수되었고 7월 5일 자신이 순국선역들의 유해봉환을 추진하며 조성하였던 용산구 효창동 애국선열묘역에 모셔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4NyINeTBTg

△김구(1876~1949, 구안동 金 상락공파) 할배와 함께
현재 남산공원에 있는 동상은 모두 10개다. 이 중 △이준(1859~1907) △이시영(1869~1953) △김구(1876~1949) △안중근(1879~1910) △김용환(1892~1919) △유관순(1902~1920) 등 6개는 구한 말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의 것. 나머지는 김유신(595~673·신라시대 장군), 이황(1501~1570·조선 중기 학자), 사명대사(1544~1610·조선 중기 승려), 정약용(1762~1836·조선 후기 학자)의 동상이다.
△이시영(1869~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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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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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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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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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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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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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hosun.com/kid/kid_literacy/kid_sisanews/2010/08/29/KER5ZDRAIPZ34BBWA7NBO5LW54/
서울 남산공원 8개 동상 '재정비'
서울 남산공원 8개 동상 재정비
www.chosun.com






*점심시간 후의 돈의문까지의 시내코스는 결석함. 아래 사진은 인왕산 코스 때 찍음./ 돈의문은 일제가 이전도 않고 해체해 버림.

https://www.youtube.com/watch?v=eks10uWHow0&list=RDeks10uWHow0&start_radi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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