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열형을 당한 이들은 3일간 효수되었는데, 어두운 새벽을 틈타 생육신의 한 사람이던 김시습[27]이 이들의 시신을 수습,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 이들의 묘를 만들게 된다. 이 묘는 사육신공원의 시초가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jfXjnGi4G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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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발 날리는 영윌 장릉(莊陵,단종 릉)/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
https://www.youtube.com/watch?v=UE0k3MfT59Q https://www.youtube.com/watch?v=r_o1zVGvNGA https://www.youtube.com/watch?v=OBCb9y2rR8Q 눈 ㅡ김수영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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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401143
노루가 앉았다 떠나 따스한 땅
장릉 경내엔 다른 왕릉에는 없는 신하의 현충 시설이 있다. 단종을 위해 목숨 바친 충신부터 여인들까지 268인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과 제단인 배식단(配食壇) 그리고 엄흥도 정려각 등이다. 여기서 엄흥도 정려각은 1726년(영조 2) 어명으로 세워졌다. 붉은색 정려문엔 ‘조선 충신’으로 시작하는 엄흥도의 증직이 새겨져 있다. 엄 박사는 “충의공의 충절을 오늘날 어떤 정신으로 해석할지 자주 생각한다”고 말했다.
엄흥도의 가계를 세세히 검토할 족보나 행적이 확인되는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에 대한 평가는 모두 목숨 걸고 단종 시신을 수습한 일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배경은 역설적으로 그의 공적이 더 높이 평가받는 계기가 됐다.
호장 엄흥도는 단종 옥체를 서둘러 수습한 뒤 장사지내고는 아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 종적을 감췄다. 이후 단종의 무덤은 버려지고 엄흥도도 함께 잊혀 갔다. 단종이 승하한 이후 200여 년간 단종과 단종을 위해 순절한 사람 그리고 사적은 거론할 수 없는 금기였다. 단종의 복위 도모는 역모가 되고, 시도한 사람은 역적으로 낙인찍혔다. 신원(伸冤)과 복권(復權)의 과정은 지난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엄흥도의 행적이 기록 아닌 전설처럼 내려오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엄흥도가 단종의 옥체를 수습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영월 ‘충절의 상’. [사진 엄의현]
숙종, 선왕의 암매장 결단 재평가
그러나 세월 앞에 승자의 역사 기록도 장사는 아니었다. 단종과 관련된 사실도 유교 이념 안에서 그 의미가 재정립돼 간다. 1668년(현종 9) <승정원일기>엔 우의정 송시열이 경연 자리에서 “도가 쇠락한 시대일수록 절의를 더욱 높이 사야 하니, 청컨대 엄흥도의 후손을 녹용(錄用, 등용)하소서”란 기록이 나온다. 역모와 역적은 충절과 충신으로 반전했다.
엄흥도에 대한 평가도 이후 단종의 추복(追復, 빼앗긴 위호를 회복)에 따라 진행됐다. 그는 단종을 수습한 지 240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 조정의 추증을 받아 공조좌랑을 시작으로 공조참판, 공조판서에 이른다. 또 고종 시기엔 충의(忠毅)란 시호를 받는다. 영월 창절서원과 울산 원강서원에는 그의 위패가 모셔졌다. 엄흥도는 죽음을 당한 채 버려진 어린 왕을 사람의 도리 하나로 수습해 유택(幽宅)을 마련했다. 그것은 측은지심의 발현이자 선비들이 지향하는 인·의·예의 수범이었다.
엄흥도를 충신으로 세운 영조와 정조
정려각 옮길 때 무지개 나타나 장소 알려줘
영조는 엄흥도를 공조좌랑으로 추증한 뒤 1726년 다시 충신으로 정려(旌閭)한다. 정려비는 처음 청주에 세워졌다. 이후 단종이 복위한 지 60년이 된 1758년 영조는 엄흥도의 묘소에 친히 제문을 내리고, 이듬해 정려비를 영월로 옮기도록 명한다.
정려비는 그러나 엄흥도가 살던 곳이 고증되지 않아 영월읍 내 영흥리 영월의료원 근처에 먼저 세워졌다. 그 뒤 비각이 쇠락해 이건을 검토하던 중 홀연히 무지개가 솟구치더니 장릉의 능침 바깥으로 드리워졌다. 마치 엄 호장이 살던 곳을 알려주기 위해 사람을 인도하는 듯했다. 그래서 1969년 무지개가 드리워진 현재 자리로 정려각이 옮겨 세워졌다. 왕릉인 장릉 경내에 이례적으로 호장의 정려비가 자리 잡은 내력이다. 정려비 뒷면에는 강원 관찰사 윤사국이 지은 사적비가 새겨져 있다.
영조에 이어 정조는 1791년 장릉 아래 제단을 설치하고 단종을 위해 순절하진 않았지만 엄흥도도 충신으로 배향할 것을 명한다. 정조는 “죽음을 무릅쓰고 의리를 떨치며, 장사지내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인 자는 오직 엄 호장 한 사람뿐”이라고 전교했다. 정조는 또 영월 지역 사당인 창절사(彰節祠)에 사육신 및 김시습·남효온(생육신)과 나란히 엄흥도를 배향토록 명했다.
출처 : 월간중앙(https://www.m-joongang.com)
사육신공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에 위치한 사육신 의 묘역 및 그 일대에 조성된 시립 공원이다. 서울특별시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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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에 왕좌에 올랐지만 숙부인 세조에게 강제로 양위한 조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실패하여 1456년 6월, 용산구 새남터에서 거열형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박팽년은 옥사 후 육시)을 매월당 김시습[2]이 어두운 새벽을 이용해 한강을 건너서 지금의 노량진에 이들의 시신을 안장시킨 것이 시초였다[3]. 후에 1681년 숙종 때 '민절서원'이 세워졌고, 정조 때에 와서 신도비를 세웠으며 1978년 서울특별시 당국이 묘역을 확장하였고 후에 사육신의 업적과 충성심 등을 전시해 놓은 사육신역사관이 설립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Ho4DKPZvN4
https://www.youtube.com/watch?v=4et8xmr8Gso&t=178s
https://www.youtube.com/watch?v=W5hBKSMEK5A
https://www.youtube.com/watch?v=ITNRh4FvPB0&t=91s
https://www.youtube.com/watch?v=kZPYoGoqM-g
https://namu.wiki/w/%EC%82%AC%EC%9C%A1%EC%8B%A0
사육신
상왕 이 계시거늘 나리 가 어찌 저를 신하라고 하겠습니까 성삼문 가장 유명한 말이지만, 이것은 조선 후기에 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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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 <까마귀 눈비 맞아>
고문받기 전 자살한 유성원
유성원
유성원(柳誠源, ?~1456)은 조선 전기의 문신 이다. 본관은 문화, 자는 태초, 시호는 절의이다. 생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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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성삼문4.2. 박팽년4.3. 이개4.4. 하위지4.5. 유응부
성삼문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1418년 출생으로. 본관은 창녕이었으며, 자는 근보(謹甫), 호 는 매죽헌 훗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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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
조선 전기의 문신 으로 사육신 의 1명. 본관은 순천 , 자는 인수(仁叟). 생애 충청도 회덕현 출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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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개
조선 전기의 문신 . 사육신 중 하나다. 토정비결 의 저자 토정 이지함 은 그의 종증손이고, 조선 중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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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지
조선 전기의 문신 이자 사육신 중의 한 사람. 후에 이조판서 로 추증되었다. 생애 하위지는 하윤(河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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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응부
兪應孚 사육신 중 한 명으로 자는 신지(信之), 호는 벽량(碧梁)이다. 용맹하며 칼싸움과 활을 잘 쏘는 등 전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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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처음엔 숨기려고 하다가 세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며 “너는 나를 안 지가 가장 오래 되었고, 나도 또한 너를 대접함이 극히 후하였다.[19] 지금 네가 비록 그 같은 일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내 이미 친히 묻는 것이니, 네가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네 죄의 경중(輕重)도 역시 나에게 달려 있다.”라고 묻자 가담자들을 줄줄이 말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대놓고 단종이 복위 운동을 주도했으며, 단종이 자신들에게 거사를 위한 칼을 내려주었다고 말하는 바람에 단종의 신변을 가장 위태롭게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세조가 한 번 더 윽박지르자, 박쟁을 추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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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곤장을 치자 아버지를 포함해 가장 많은 인원을 말한다. 더 대지 않냐고 하니 아버지까지 대었는데 더 댈게 있느냐면서 운검을 통해 거사하려고 했다는 것까지 다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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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전: 친국 중에 세조가 "너 전번에 관찰사로 나가 있을 때, 나에게 올리는 공문에 분명히 '신(臣)'이라고 써 놓고 이제 와서 반역질이냐? 게다가 너도 내가 주는 녹을 처먹었잖아?"고 화를 내며 따졌다. 그러자 박팽년 왈, "신(臣)이라고 쓴 적 없으니까 잘 찾아봐라. 그리고 나도 네가 준 녹 하나도 안 먹고 다 쌓아놨다. 네 녀석은 어찌 하는 말이 뭐 하나도 제대로 맞는 게 없는가?" 세조는 분개하여 그의 공문을 찾아봤는데 모두 신(臣)자가 아니라 거(巨)자였다. 성삼문과 같이 창고에 녹이 쌓여있던 건 덤. 결국 세조는 이런 박팽년의 몸을 시뻘겋게 불에 달군 인두로 지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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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이개는 세조의 옛 친구였기에 실록에서 세조가 "너는 나의 옛 친구였으니, 참으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네가 모조리 말하라."라고 말하기도 했으나 불지 않았으며, 이후 박팽년이 모든 것을 말하자 이개에게 곤장을 치니 박팽년이 분 말과 같은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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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전: 국문 중에 자신의 몸을 인두로 지지자 세조에게 "나리, 법전 어디에 인두로 사람을 지지는 형벌이 있소?"[21]라고 되묻는다. 이는 다른 멤버들의 노골적인 디스에 비하면 별 거 아닌 발언 같지만 이 짧은 한마디는 사육신의 성격과 특성을 잘 보여주는 발언이다. 자신의 몸이 고문당하는 중에도 법전을 찾는 것은 그만큼 이들이 원칙과 명분을 중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질문에 세조는 어버버거리면서 대답을 못 했다. 그 당시 조선 법에는 인두로 사람 지지는 법이 진짜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개는 왕이라는 자가 법에도 없는 짓을 한다고 세조를 돌려 깐 셈. 더군다나 세조 스스로가 조선조 법제의 완비를 의미하는 법전 "경국대전" 제작을 시작했던 인물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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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실록에서도 승정원에 가서야 성변(혜성)을 알게 되었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초는 다음 사람에게 넘어간다. 사실 실록에서도 하위지는 세조를 유난히 경계하여 세조를 견제하는 발언을 많이 했으며, 세조가 6조 직계제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할 때 이를 물러서지 않고 간언하다가 빡친 세조가 "저 망할 새끼 관을 당장 벗겨버려!"라고 명하는 바람에 상투 머리채가 잡혀 끌려나가는 수모와 굴욕을 당하며 의금부에 갇히기도 했다. 세조 역시 예전부터 자신을 노골적으로 견제했던 것에 대한 감정이 폭발했던 모양. 야사나 정사나 시종일관 시크하면서도 가장 당당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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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전: 국문을 가하면서 관련 사항들을 세조가 문초하자 아무 말도 안 하고 "내가 반역죄라면 그 죄가 응당 죽음일 것인데 네놈이 물어볼 것이 뭐가 있다고 묻는 것이냐!"라고 씹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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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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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전: 시종 국문장에서 당당한 태도를 견지하던 성삼문을 디스했다. "자고로 서생 놈들과는 대사를 같이 하지 말라더니 정말 그렇군. 그대들이 말려서 이 꼴이 되었다! 책만 읽으면 뭐하느냐? 너희는 책은 읽었으되 꾀가 없으니 짐승하고 다를 바 없다!"라고 면박을 주었다고. 여기서 성삼문 등이 말린 것을 다른 야사에서 자세하게 다루는데, 별운검이 한명회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유응부는 성삼문에게 그래도 우격다짐으로 한명회부터 죽이고 들어가자고 말했지만 성삼문과 박팽년이 이를 말렸다.[22] 무인인 유응부 입장에서는 칼질도 못해보고 잡혔으니 속이 터질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 그래서 이 말을 들은 성삼문이 그 때만 입을 다물어서 자신의 미안함을 나타내었다고 한다. 세조에 대한 태도도 당당해서 아예 세조를 나리도 아니고 족하(足下)라고 불렀다. 참고로 '족하'는 서로 대등한 사이의 호칭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왕의 옷을 입고 왕 행세를 하고 있지만 당신은 왕이 아닐 뿐더러 조카의 왕위를 빼앗아 인륜도 저버렸으니 왕족 취급 받을 자격도 없다는 것. 아예 어떤 책에서는 당당하게 세조에게 "자네와 자네 아들 놈을 죽이려고 했건만 재수가 없어서 이렇게 됐구나!"라고 말하였다. 이에 열이 단단히 뻗친 세조는 유응부의 살갗을 모조리 벗겨버릴 것을 명했다.
사극 왕과 비에선 이를 약간 각색하여 우격다짐으로 들어가려는 걸 말리는 성삼문을 유응부가 그 자리에서 바로 디스한 뒤, 일단 수양대군부터 베고 생각하자며 성승[23]과 함께 죽기 살기로 돌진하려는 계획을 그대로 시행한다. 하지만 홍윤성이 병사들과 함께 무장한 채로 입구를 막아 버렸기에 결국 들어가지 못해 계획이 좌절된다. 이후 76화에서 박팽년을 디스하는 장면이 나오며, 박팽년이 자신이 축생과 다름이 없다며 미안함을 표하는 장면이 나온다.
5. 사형과 후일담
성삼문·이개·하위지·김문기·박중림·성승·유응부·박쟁·권자신·윤영손·송석동·이휘·석을중·아기지[24]·불덕[25]은 낙형[26]을 당한 후 군기시 앞에서 백관들이 지켜보던 가운데 거열형을 당하였다.
이후 박팽년과 유성원의 시신 또한 거열형을 당했다.
거열형을 당한 이들은 3일간 효수되었는데, 어두운 새벽을 틈타 생육신의 한 사람이던 김시습[27]이 이들의 시신을 수습,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 이들의 묘를 만들게 된다. 이 묘는 사육신공원의 시초가 된다.
생육신
생육신 ( 生 六 臣 )은 세조 가 단종 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6명의 신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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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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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호는 매월당. 8개월에 글을 알고, 5살에 중용과 대학에 통달하여 세종이 찬탄한 천재였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삼일을 통곡하고는 은둔 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어[1]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서울 노량진에 암장했다고도 하고, 엄흥도와 함께 단종의 삼년상을 치렀다는 말도 있다. 공주에 동학사 숭모전을 지어 사육신의 초혼 제사를 했는데, 놀랍게도 다음해(1457년) 세조가 동학사에 들렀다가 초혼단을 보고 감동하여 팔폭 비단에 억울하게 망자들의 명단을 적어 유교와 불교 양식을 섞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남효온, 김종직 등과 교류했다. 이미 중종 때 이조 판서, 선조 때 전기가 쓰이는 등 빠르게 복권되었다. 사후 시호는 청간(淸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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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담수: 자는 미수(眉叟) 또는 이수(耳叟), 호는 문두(文斗). 사육신 중 한 명인 성삼문의 친척이다. 성석린의 동생 성석용의 증손자이자 성삼문의 할아버지 성달생의 형 성개의 손자로 즉 성삼문의 육촌 동생. 사육신의 난에 얽혀 고문 받고 김해로 귀양을 갔다가 풀려났다. 그의 아버지 성희 역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그로 말미암아 사망. 세조는 그에게 감시 목적으로 참봉, 봉사 등의 관직을 내렸지만 받지 않았다. 벼슬을 단념하고 파주의 외진 곳에서 자연 속에 파묻혀 지내며 일생을 낚시와 독서로 소일했다. 사후 정숙(靖肅)의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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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다. 단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강원도 영월로 쫓겨가자 세상과 접촉을 끊고 살았는데, 단종이 살아있을 때에는 조려, 이수형과 함께 영월을 찾아 관란정(觀瀾亭)에 유숙하며 단종의 문후를 드리기도 했다.[2] 1457년 단종이 세상을 떠나자 원주에 내려가 있는 것을 세조가 호조참의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야사로는 머리를 향상 단종이 잠든 자리가 있는 동쪽으로만 향했다고 한다. 생전에 손자 원숙강(元叔康)이 출사하였으나 예종 때 사관으로서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던 중 대신들의 허물을 적어놓은 자기 사초를 수정하려고 했다 발각돼 사형당한 뒤, 자신이 쓴 책을 모두 소각하고 자손들에게 글을 읽어 명리를 바라지 말라고 타일렀다 한다. 은거 중인 선비 원자허가 꿈에서 사육신과 단종을 만난다는 줄거리의 소설 원생몽유록의 주인공이다. 자허(子虛)는 원호의 자. 사후 시호는 정간(貞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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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맹전: 호는 경은(耕隱) 자는 백순, 병조판서 이심지의 아들로 세종 때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사간원 정언, 지제교, 소격서령을 지냈으며, 시세가 어려워질것을 예상해 외직을 자청하여 거창현감 등을 지냈다. 거창현감 재직시 선정으로 백성을 보살펴 청백리로 불리었다.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권을 찬탈하자 눈이 잘 보이지 않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는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났다.[3] 그 후 고향인 구미 선산으로 내려가 김숙자 김종직 부자등과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조정의 끈질긴 출사 요구와 협박에도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훗날 정조때 이조 판서와 양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사후 시호는 정간(靖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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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려: 호는 어계. 단종 원년 성균관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명망이 높았다. 그 뒤 국자감에 입학하여 학문 연구를 하던 중, 세조가 즉위하자 바로 고향 경상남도 함안군 원북에 은거했다. 단종이 살아있을 때에는 원호, 이수형과 함께 영월을 찾아 단종의 문후를 드리기도 했다. 사육신의 난이나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 등에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문후, 문상을 자유롭게 드리는 등 국문을 받지 않은 걸 보면 명확한 근거는 없다. 단종이 사사당하자 문상을 하러가던 그는 영월 청령포 앞에 이르러 배가 없어 통곡할 때, 호랑이가 나타나자 조려가 호랑이를 보고 "네 녀석이 충절이라는 것을 안다면 내가 이 강을 건널 수 있게 도울 수 있느냐" 며 하소연하자 호랑이가 그를 등에 업고 영월 동강을 도강하여 문상했다는 야사가 있으며 3년간 상복을 입고 삼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그 뒤 벼슬을 받지 않고 독서와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사후 시호는 정절(貞節) .
김시습, 금오신화(金鰲新話) 5편 원문과 국역/ 김시습 시 65편
] 自寫眞贊[자화상 찬] 俯視李賀 (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다 볼 만큼 優於海東 (우어해동) 조선에서 최고라고들 했지. 騰名謾譽 (등명만예) 높은 명성과 헛된 칭찬 於爾孰逢 (어이숙봉) 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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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寫眞贊[자화상 찬]
俯視李賀
(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다 볼 만큼
優於海東
(우어해동) 조선에서 최고라고들 했지.
騰名謾譽
(등명만예) 높은 명성과 헛된 칭찬
於爾孰逢
(어이숙봉) 네게 어찌 걸맞겠는가.
爾形至眇
(이형지묘) 네 형체는 지극히 작고
爾言大閒
(이언대동) 네 언사는 너무도 오활하네.
宜爾置之
(의이치지) 네 몸을 두어야 할 곳은
丘壑之中
(구학지중) 금오산 산골짝이 마땅하도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9751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2467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https://www.youtube.com/watch?v=yuRKlDn03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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