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천하명문임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나 한문으로 읽기엔 껄꺼럽고, 번역으로 읽어도 호흡의 행간 처리가 어려워 난해하긴 마찬가지다. 한양대 정민 교수가 자신의 홈피에 <연암읽기>를 올려 세간의 호평을 받고 있다. 원문과 번역문을 대역으로 읽으면 그 진수가 잘 드러날 것 같아 한문공부 삼아 한 번 시도해 본다.

이 글은 7월8일 일기에 정민 교수가 제목을 붙이고 감상을 적은 글이다.

http://jungmin.hanyang.ac.kr/

요동벌의 한 울음

好哭場論

初八日甲申晴.

초팔일 갑신 맑음.

與正使同轎, 渡三流河, 朝飯於冷井.

정사正使와 가마를 같이 타고 삼류하三流河를 건너, 냉정冷井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行十餘里, 轉出一派山脚, 泰卜忽鞠躬, 趨過馬首, 伏地高聲曰: “白塔現身謁矣.”

십여리를 가서 한 줄기 산 자락을 돌아 나오자, 태복泰卜이가 갑자기 몸을 굽히고 종종걸음으로 말 머리를 지나더니 땅에 엎디어 큰 소리로 말한다.

“백탑白塔 현신現身을 아뢰오.”

泰卜者鄭進士馬頭也.

태복이는 정진사鄭進士의 말구종꾼이다.

山脚猶遮, 不見白塔.

산 자락이 아직도 가리고 있어 백탑은 보이지 않았다.

趣鞭行不數十步, 纔脫山脚, 眼光勒勒, 忽有一團黑毬七升八落.

채찍질로 서둘러 수십 보도 못가서 겨우 산 자락을 벗어나자, 눈빛이 아슴아슴해지면서 갑자기 한 무리의 검은 공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吾今日始知人生本無依附, 只得頂天踏地而行矣.

내가 오늘에야 비로소, 인간이란 것이 본시 아무데도 기대일 곳 없이 단지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서야 걸어다닐 수 있음을 알았다.

立馬四顧, 不覺擧手加額曰: “好哭場! 可以哭矣.”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서 말하였다.

“좋은 울음터로다. 울만 하구나.”

鄭進士曰: “遇此天地間大眼界, 忽復思哭, 何也?”

정진사가 말했다.

“이런 하늘과 땅 사이의 큰 안계眼界를 만나서 갑자기 다시금 울기를 생각함은 어찌된 것이요?”

余曰: “唯唯否否.

내가 말했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오.

千古英雄善泣, 美人多淚. 然不過數行無聲眼水, 轉落襟前.

천고에 영웅은 울기를 잘하고 미인은 눈물이 많다 하나,

몇 줄 소리 없는 눈물이 옷 소매로 굴러 떨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네.

未聞聲滿天地, 若出金石.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은 울음은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네.

人但知七情之中, 惟哀發哭, 不知七情都可以哭.

사람들은 단지 칠정 가운데서 오직 슬퍼야 울음이 나오는 줄 알 뿐

칠정이 모두 울게 할 수 있는 줄은 모르거든.

喜極則可以哭矣, 怒極則可以哭矣,

기쁨이 지극하면 울 수가 있고, 분노가 사무쳐도 울 수가 있네.

樂極則可以哭矣, 愛極則可以哭矣,

즐거움이 넘쳐도 울 수가 있고, 사랑함이 지극해도 울 수가 있지.

惡極則可以哭矣, 欲極則可以哭矣.

미워함이 극에 달해도 울 수가 있고, 욕심이 가득해도 울 수가 있다네.

宣暢壹鬱, 莫疾於聲, 哭在天地, 可比雷霆.

가슴 속에 답답한 것을 풀어버림은 소리보다 더 빠른 것이 없거니와,

울음은 천지에 있어서 우레와 천둥에 견줄만 하다 하겠소.

至情所發, 發能中理, 與笑何異?

지극한 정이 펴는 바인지라

펴면 능히 이치에 맞게 되니, 웃음과 더불어 무엇이 다르리오?

人生情會, 未嘗經此極至之處, 而巧排七情, 配哀以哭.

사람의 정이란 것이 일찍이 이러한 지극한 경지는 겪어보지 못하고서,

교묘히 칠정을 늘어놓고는 슬픔에다 울음을 안배하였다네.

由是死喪之際, 始乃勉强叫喚喉苦等字.

그래서 죽어 초상을 치를 때나

비로소 억지로 목청을 쥐어짜 ‘아이고’ 등의 말을 부르짖곤 하지.

而眞個七情所感, 至聲眞音, 按住忍抑, 蘊鬱於天地之間, 而莫之敢宣也.

그러나 진정으로 칠정이 느끼는 바 지극하고 참된 소리는 참고 눌러 하늘과 땅 사이에 쌓이고 막혀서 감히 펼치지 못하게 되네.

彼賈生者, 未得其場, 忍住不耐, 忽向宣室一聲長號, 安得無致人驚怪哉?

저 가생賈生이란 자는 그 울 곳을 얻지 못해 참고 참다 견디지 못해

갑자기 선실宣室을 향하여 큰 소리로 길게 외치니, 어찌 사람들이 놀라 괴이히 여기지 않을 수 있었겠소.”

鄭曰: “今此哭場, 如彼其廣, 吾亦當從君一慟, 未知所哭. 求之七情所感, 何居?”

정진사가 말했다.

“이제 이 울음터가 넓기가 저와 같으니, 나 또한 마땅히 그대를 좇아 한 번 크게 울려 하나, 우는 까닭을 칠정이 느끼는 바에서 구한다면 어디에 속할지 모르겠구려.”

余曰: “問之赤子. 赤子初生, 所感何情?

내가 말했다.

“갓난아기에게 물어 보시게. 갓난아기가 갓 태어나 느끼는 바가 무슨 정인가를 말이오.

初見日月, 次見父母, 親戚滿前, 莫不歡悅.

처음에는 해와 달을 보고, 그 다음엔 부모를 보며,

친척들이 앞에 가득하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오.

如此喜樂, 至老無雙, 理無哀怒, 情應樂笑, 乃反無限啼叫, 忿恨弸中.

이같이 기쁘고 즐거운 일은 늙도록 다시는 없을 터이니 슬퍼하거나 성낼 까닭은 없고 그 정은 마땅히 즐거워 웃어야 할 터인데도 도리어 무한히 울부짖는 것은 분노와 한스러움이 가슴 속에 가득차 있음이다.

將謂人生神聖愚凡, 一例崩殂,

이를 두고 장차 사람이란 거룩하거나 어리석거나 간에 한결같이 죽게 마련이고,

中間尤咎, 患憂百端, 兒悔其生, 先自哭弔.

그 중간에 커서는 남을 허물하며 온갖 근심 속에 살아가는지라

갓난아기가 그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먼저 스스로를 조상하여 곡하는 것이라고들 말한단 말이지.

此大非赤子本情.

그러나 이는 갓난아기의 본 마음이 절대로 아닐 것일세.

兒胞居胎處, 蒙冥沌塞, 纏糾逼窄,

一朝迸出寥廓, 展手伸脚, 心意空闊, 如何不發出眞聲盡情一洩哉?

아이가 태 속에 있을 때는 캄캄하고 막힌데다 에워싸여 답답하다가,

하루 아침에 넓은 곳으로 빠져 나와 손과 발을 주욱 펼 수 있고

마음이 시원스레 환하게 되니 어찌 참된 소리로 정을 다해서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겠소?

故當法嬰兒, 聲無假做.

그런 까닭에 마땅히 어린아이를 본받아야만 소리를 거짓으로 지음이 없을 것일세.

登毗盧絶頂, 望見東海, 可作一場, 行長淵金沙, 可作一場.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는 것이 한 바탕 울만한 곳이 될 만하고, 황해도 장연長淵의 금사산金沙山이 한 바탕 울만한 곳이 될 만하오.

今臨遼野, 自此至山海關一千二百里, 四面都無一點山.

乾端坤倪, 如黏膠線縫, 古雨今雲, 只是蒼蒼, 可作一場.”

이제 요동벌에 임하매, 여기서부터 산해관山海關까지 일천 이백 리 길에 사방에는 모두 한 점의 산도 없어 하늘가와 땅 끝은 마치 아교풀로 붙이고 실로 꿰매 놓은 것만 같아 해묵은 비와 지금 구름이 다만 창창할 뿐이니 한 바탕 울만한 곳이 될 만하오.”

亭午極熱.

한낮은 너무나 더웠다.

趣馬, 歷高麗叢阿彌庄, 分路.

말을 재촉하여 고려총高麗叢과 아미장阿彌庄을 지나 길을 나누었다.

與趙主簿達東及卞君來源鄭進士李傔鶴齡, 入舊遼陽,

其繁華富麗, 十倍鳳城. 別有遼東記.

주부主簿 조달동趙達東 및 변래원卞來源, 정진사鄭進士, 하인 이학령李鶴齡과 더불어 구요동舊遼陽에 들어가니, 그 번화하고 장려함은 봉황성鳳凰城에 열 배나 된다.

별도로 〈요동기遼東記〉가 있다.

이번에 읽으려는 〈호곡장好哭場論〉은 《열하일기》의 한 부분으로, 압록강을 건너 드넓은 요동벌과 상면하는 감격을 적은 글이다. 본래 제목이 없으나 선학先學의 명명命名을 따랐다.

1939년 경성제국대학 대륙문화연구회가 북경과 열하 일대를 답사하고 펴낸 보고서, 《북경北京․열하熱河の사적관견史的管見》에서 결론 대신 이 글을 적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문장이다.

새벽 먼동이 트기 전 출발한 행차는 아침부터 삼류하三流河를 건너 냉정冷井에 이르러서야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십 여 리를 가서 산 기슭을 돌아나오려는데, 중국 길에 익숙한 하인 녀석이 갑자기 종종걸음을 하고 말 앞으로 가더니 머리를 조아리며, “백탑 현신이요!”

하는 것이다. 이제 곧 백탑이 눈 앞에 그 장대한 자태를 드러내 보이리란 뜻이다.

그러나 정작 백탑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급해진다. 말을 채찍질하는 수고를 많이 할 것도 없이 수십보를 지나자 그만 눈 앞이 아찔해진다. 망망한 시계視界, 눈 끝간데를 모르게 펼쳐진 아득한 벌판, 그리고 지평선. 백리의 넓은 벌도 보기 힘든 조선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광경이다. 그냥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백탑은 그 벌판 저편에 홀로 우뚝 서 있다. 내 눈에는 마치 검은 공이 허공 중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처럼만 보인다.

홍대용洪大容이 자신의 《연기燕記》에서 “하늘과 벌판은 서로 이어져 아마득히 드넓다. 오직 요양遼陽의 백탑만이 우뚝 자욱한 구름 가운데 서 있으니 北行에 으뜸가는 장관”이라고 적은 곳이다.

이덕무도 《입연기入燕記》에서 “큰 벌판은 평평하여 눈 끝 간 데까지 가이 없고, 일행의 인마人馬는 마치 개미 떼가 땅을 기어가는 것만 같았다”고 적고 있다.

아! 그렇구나. 나는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이 그저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밟고서야 걸어갈 수 있는 너무도 미약한 존재로구나. 통쾌하게 뚫린 시야,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이 넓은 요동벌과 상면한 감격은 이렇게 시작된다.

“아! 참으로 훌륭한 울음터로다.” 연암의 제일성은 이렇듯 뚱딴지 같다. 그리고는 예의 도도한 궤변이 이어진다. 울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어린아이가 갓 태어나 내지르는 고고한 울음이 있고, 천고 영웅이 비분강개에 젖어 울부짖는 울음이 있다. 고개를 숙인 미인의 옷섶으로 뚝뚝 눈물만 떨어지는 말없는 울음도 있다. 그러나 마치 쇠나 돌을 두드려 나오는듯한, 천지에 꽉 차서 듣는 이를 압도하는 그런 울음은 아직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울음은 슬픔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기쁨과 분노, 즐거움, 그리고 사랑과 미움과 욕심 때문에도 인간은 운다. 가슴 속에 가득 차 있는 답답한 응어리를 한꺼번에 풀어버리는 데는 울음만큼 빠른 것이 없다. 그것은 마치 우레와 번개처럼 즉각적이다. 지극한 정리情理에서 나오는 울음은 주체할 수 없어 터져나오는 웃음처럼 거짓이 없다.

그 울음은 그닥 슬프지도 않으면서 짐짓 목청으로만 쥐어짜는 초상집의 곡哭 소리와는 다르다. 가슴으로 느끼는 진정眞情을 견디다 못해 내지르게 되면 그것은 마치 금석金石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지성진음至聲眞音이 되어 듣는 이를 압도하리라.

한나라 때 가의賈誼는 젊은 그의 능력을 시기한 신하들의 모함으로 뜻을 펴보지 못한 채 쫓겨나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뒤늦게 다시 임금의 부름을 받은 그는 그간 그 낙담의 시간 속에서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말들을 마치 포효하며 울부짖듯 거침 없이 토해내었다. 그때 그의 목소리는 마치 금석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지성진음至聲眞音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뜻하지 않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모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으리라.

아, 여보게 정진사! 비좁은 조선 땅에서 숨막히듯 답답하게만 살다가 이 드넓은 요동벌로 통쾌하게 나서려니, 나는 그만 한바탕 목을 놓아 울고만 싶네 그려. 마치 그 옛날 가의賈誼의 그 통곡처럼 나도 내 폐부 깊은 곳에서 주체할 수 없이 터져나오는, 금석이 광광 울리는듯한 그런 울음을 울고 싶네 그려.

정진사는 되묻는다. 자네의 말이 그와 같으니, 나도 자네와 함께 한바탕 시원스런 울음을 터뜨려 보게 싶네. 그러나 나는 아직 모르겠네. 자네의 울음은 그간의 협소한 나를 돌아보는 연민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농조득탈籠鳥得脫의 통쾌함에서 나온 것인가? 기쁨에서인가? 그도 아니면 분노에서이던가?

자네, 저 갓난아이에게 물어 보게. 저가 갓 태어나 고고한 울음을 터뜨릴 때, 그의 심정이 어떠한가를 말일세. 사람들은 곧잘 이렇게 말하곤 하지. 아이가 갓 태어나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그가 앞으로 지고 가야할 인생의 고통을 생각할 때에 하도 기가 막혀서 우는 것이라고 말일세.

그러나 자네 한번 생각해 보게. 태중에서 손과 발을 마음껏 펴 볼 수도 없고, 광명한 세상을 바라다 볼 수도 없이 답답하게 열 달을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환한 빛줄기가 쏟아져 들어오고, 손과 발에 더 이상 아무 걸리는 것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갓난아기가 느꼈을 통쾌함을 말일세. 그 통쾌함이 한꺼번에 소리가 되어 터져나온 것이 바로 그 울음일 것이네.

갑갑한 조선 땅에서 나는 지난 몇 십 년을 답답하게 살아왔네. 色目으로 갈리고 당파로 나뉘어 싸움질만 해대는 나라,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도 그저 제 한몸의 보신保身과 영달에만 급급할 뿐인 벼슬아치들, 학문을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리 아닌 출세를 위한 방편으로만 여기는 지식인들, 손발을 마음껏 펴볼 수도 없게 욱죄는 제도와 이념, 한치 앞을 내다 볼 수조차 없는 암담한 시계視界, 이런 것들에 둘러싸여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네.

그런데 이제 그 복닥대며 아웅다웅하던 협소한 조선 땅을 벗어나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탁 트인 이 요동벌 앞에 서니, 나는 저 갓난아이의 통쾌한 울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란 말일세.

이제 이곳부터 산해관까지 일천 이백리의 길은 사방에 한 점 산도 없어, 보이느니 지평선 뿐이요, 아득한 옛날의 그 비는 지금도 내리고, 그 구름이 지금도 창창히 떠가고 있지 않는가?

하늘가와 땅 끝은 마치 아교풀로 붙이고 실로 꿰매 놓은 것만 같을 것이란 말일세.

이 광막한 벌판을 지나며 나는 내 존재의 미약함과, 내 안목의 협소함과, 살아온 날들의 부끄러움을 울어볼 참일세. 새로운 문명 세계를 만나는 설레임과 어제의 나를 과감히 버리는 두근거림을 울어볼 참일세. 그 뼈저린 자각을 울어볼 참일세.

《연암집》에는 이 요동벌에서의 도저한 감회를 노래한 시 한수가 실려 있다.

遼野何時盡 一旬不見山

曉星飛馬首 朝日出田間

요동벌 그 언제나 끝이 나려나

열흘이나 산이라곤 뵈이질 않네.

새벽 별 말 머리로 날리더니만

아침 해 밭 사이서 떠올라오네.

제목은 〈요야효행遼野曉行〉이다.

열흘을 가도록 요동벌은 단지 지평선만을 보여줄 뿐이다. 가도 가도 도무지 끝이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산 하나 보이지 않는 벌판, 크게 지르는 소리는 메아리만 남기고 지평선 끝으로 사라진다.

말 머리 위론 새벽 별이 떨어지고, 밭두둑 너머로 아침 해가 누리를 비추며 떠오른다. 物象의 모습이 그 햇빛에 하나 둘씩 제 모습을 드러낸다. 아! 대지 위의 내 모습은 너무도 미소微小하구나.

한편 연암은 글의 마지막에서 이 밖에 조선 땅에서 한 바탕 울음을 울만한 곳을 두 군데 소개한다.

하나는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서 동해 바다를 바라볼 때이고, 다른 하나는 황해도 장연長淵  바닷가 금사산金沙山이 그것이다.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서 동해를 바라볼 때의 흥취는 역시 요동벌과 마주 선 것 이상의 감격을 부르기에 충분하겠으되, 장연 금사산의 경우는 저간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따로 읽어야 할 한 편의 글이 있다.

梅宕必發狂疾, 君知之乎?

매탕梅宕 이덕무李德懋가 필시 미친 병이 난 듯 한데 그대는 이를 아는가?

其在長淵, 常登金沙山.

그가 황해도 장연長淵에 있을 적에 일찍이 금사산金沙山에 올랐더라네.

大海拍天, 自覺渺小. 莽然生愁, 乃發歎曰:

한 바다가 하늘을 치매, 스스로 너무나 미소微小한 것을 깨닫고는 아마득히 근심에 젖어 탄식하며 말했더라지.

“假令彈丸小島, 饑饉頻年, 風濤黏天, 不通賑貸, 當奈何?

“가령 탄환만한 작은 섬에 기근이 해마다 들고, 바람과 파도가 하늘과 맞닿아 진대賑貸하는 곡식조차 통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지?

海寇竊發, 便風擧帆, 逃遁無地, 當奈何?

해구海寇가 몰래 쳐들어 와 바람을 타고 돛을 올려도

달아나 숨을 땅이 없을테니 어찌 한다지?

龍鯨鼉蜃, 緣陸而卵, 噉人如蔗, 當奈何?

용과 고래, 악어와 이무기가 뭍을 에워 알을 낳고서 사탕수수처럼 사람을 짓씹어 먹는다면 어찌 하지?

海濤盪溢, 渰覆邨閭, 當奈何?

넘실대는 파도가 마을 집을 덮쳐 버리면 어떻게 하나?

海水遠移, 一朝斷流, 孤根高峙, 嶷然見底, 當奈何?

바닷물이 멀리로 옮겨가 하루 아침에 물길이 끊어져 외로운 뿌리가 우뚝 솟아 아마득히 바닥을 드러낸다면 어찌 하나?

波齧島根, 潏汨旣久, 土石難支, 隨流而圯, 當奈何?

파도가 섬의 밑둥을 갉아 먹어 오래도록 물에 잠겨 흙과 돌이 견디지 못하고 물결을 따라 무너져 버리면 어떻게 할까?”

其疑慮如此, 不狂而何?

그 의심하고 걱정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미치지 않고 어쩌겠는가?

夜聽其言, 不覺絶倒, 信手錄去.

밤에 그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포복절도 하고서 붓을 들어 적어 두었더라오.

연암이 처남 이재성李在誠에게 보낸 편지글 〈여중존與仲存〉이다. 이덕무가 장연 바닷가의 모래산인 금사산에 올랐는데, 그 역시 연암이 요동벌을 앞에 두고 그랬던 것처럼 눈앞에 펼쳐진 광막한 시계視界에 그만 압도되고 말았다. 그래서 너무도 하잘 것 없는 존재의 나약함을 깨달음은 물론, 아울러 앞 바다에 떠 있는 섬조차도 탄알만하게만 여겨져 공연히 그 섬에 사는 사람들을 걱정하느라 노심초사 했더라는 이야기이다. 연암이 〈호곡장론〉의 말미에서 금사산을 거론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중간에 인용된 이덕무의 글은 〈서해여언西海旅言〉이란 기행문에서 따온 것이다.

전문은 너무 길어 실을 수가 없고, 일부분만 읽어 보기로 한다.

卓立沙頂, 西望大海, 海背穹然, 不見其涘. 龍鼉噴濤, 襯天無縫.

사봉沙峰의 꼭대기에 우뚝 서서 서쪽으로 큰 바다를 바라보니, 바다 뒷편은 아마득하여 그 끝이 보이지 않는데, 용과 악어가 파도를 뿜어 하늘과 맞닿은 곳을 알지 못하겠다.

一庭之中, 限之以籬. 籬頭相望, 互謂之隣.

한 뜨락 가운데다 울타리로 경계를 지어, 울타리 가에서 서로 바라보는 것을 이웃이라 부른다.

今余與二生, 立于此岸, 登萊之人, 立于彼岸, 可相望而語然, 一海盈盈, 莫睹莫聆, 隣人之面, 不相知也.

이제 나는 두 사람과 함께 이편 언덕에 서 있고, 중국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사람은 저편 언덕에 서 있으니, 서로 바라보아 말을 할 수도 있으되, 하나의 바다가 넘실거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니, 이웃 사람의 얼굴을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耳之所不聞, 目之所不見, 足之所不到, 惟心之所馳, 無遠不屆.

귀로 듣지 못하고 눈으로 보지 못하며 발로 이르지 못하는 곳이라 해도, 오직 마음이 내달리는 바는 아무리 멀어도 다다르지 못할 곳이 없다.

此旣知有彼岸, 彼又知有此岸, 海猶一籬耳, 謂之睹且聆焉, 可也.

이편에서는 이미 저편이 있는 줄을 알고, 저편 또한 이편이 있는 줄을 알진대, 바다는 오히려 하나의 울타리일 뿐이니, 보고 또 듣는다고 말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然假令搏扶搖而上九萬里, 此岸彼岸, 一擧目而盡焉, 則一家人耳, 亦何嘗論隔籬之隣哉?

그렇지만 가령 무언가를 붙잡고서 흔들흔들 구만리 상공에 올라가 이편 언덕과 저편 언덕을 한눈에 다 본다면 한 집안 사람일 뿐일 터이니, 또한 어찌 일찍이 울타리로 막혀있는 이웃이라 말하겠는가?

登高望遠, 益覺渺小. 莽然生愁, 不暇自悲, 而悲彼島人,

높이 올라 멀리를 바라보니, 더더욱 내가 잗단 존재임을 깨달아 아마득히 근심이 일어, 스스로를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저 섬에 사는 사람들을 슬퍼하였다.

假令彈丸小地, 饑饉頻年, 風濤黏天, 不通賑貸, 當奈何?

가령 탄환만한 작은 섬에 기근이 해마다 들고, 바람과 파도가 하늘과 맞닿아 진대賑貸하는 곡식조차 통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지?

海寇竊發, 便風擧帆, 逃遁無地, 盡被屠戮, 當奈何?

해구海寇가 몰래 쳐들어 와 바람을 타고 돛을 올려도 달아나 숨을 땅이 없어 전부 도륙을 당하게 되면 어찌 한다지?

龍鯨鼉蜃, 緣陸而卵, 惡齒毒尾, 噉人如蔗, 當奈何?

용과 고래, 악어와 이무기가 뭍을 에워 알을 낳고서 사나운 이빨과 독한 꼬리로 사탕수수처럼 사람을 짓씹어 먹는다면 어찌 하지?

海神赫怒, 波濤盪溢, 渰覆村閭, 一滌無遺, 當奈何?

해신海神이 크게 성을 내어 파도가 솟구쳐서 마을 집을 덮쳐 버려 남김없이 쓸어가 버리면 어떻게 하나?

海水遠移, 一朝斷流, 孤根高峙, 嶷然見底, 當奈何?

바닷물이 멀리로 옮겨가 하루 아침에 물길이 끊어져 외로운 뿌리가 우뚝 솟아 아마득히 바닥을 드러낸다면 어찌 하나?

波嚙島根, 潏汨旣久, 土石難支, 隨流而圯, 當奈何?

파도가 섬의 밑둥을 갉아 먹어 오래도록 물에 잠겨 흙과 돌이 견디지 못하고 물결을 따라 무너져 버리면 어떻게 할까?

客曰: “島人無恙, 而子先危矣.”

객이 말하였다.

“섬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대가 먼저 위태롭게 여기네 그려.”

風之觸矣, 山將移矣, 余迺下立平地, 逍遙而歸.

바람에 부딪치자 산이 장차 옮겨가려 하는지라, 나는 이에 내려와 평지에 서서 소요하다가 돌아왔다.

余東望佛胎長山, 諸環海之山, 而歎曰: “此海中之土也.”

내가 동쪽으로 불태산佛胎山과 장산長山 등 여러 바다에 둘러싸인 산을 바라보다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이것은 바다 속의 흙일세 그려.”

客曰: “奚爲也?”

객이 말하였다.

“무슨 말인가?”

“子試穿渠, 其土如阜, 天開巨浸, 拓滓成山.”

“자네 시험삼아 도랑을 파보게. 그 흙이 언덕처럼 쌓이겠지. 하늘이 큰 물길을 열면서 찌꺼기를 모은 것이 산이 된 것일세.”

仍與二生, 入追捕之幕, 進一大白, 澆海遊之胸.

그리고는 두 사람과 함께 뒤쫓아온 막사로 들어가 큰 술잔 하나를 내와 바다에서 노닐던 가슴을 축이었다.

금사산은 황해도 장연 땅 장산곶의 백사장을 말하니, 바람이 실어온 금모래가 산을 이룬 곳이다.

바람에 따라 산의 모습은 백변百變의 장관을 연출한다. 툭 터진 시야로 서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육지의 산들은 바다 속의 흙일 뿐이다. 모래산 위에 올라 가없는 바다를 바라보다 이덕무가 뜬금없이 던지는 말이다. 태청허공太淸虛空에 날아 올라서 본다면, 저 바다란 것도 한 국자의 물에 불과하고, 산이란 것은 개미집이나 한줌 흙더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이켠 언덕에서 저켠 언덕을 바라보면 바닷물이 막히어 서로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알래야 알 수도 없지만, 높은 하늘에서 바라본다면 중국이니 조선이니 하는 울타리는 아무 의미가 없고 기실은 한 집안 사람일 뿐이다. 말 그대로 사해동포四海同胞인 것이다. 그러니 중국이니 조선으로 가르고, 노론老論과 남인南人으로 싸우며, 또 양반과 서얼로 울타리를 세우는 분별은 얼마나 허망한 것이냐.

그런 울타리 없는 세상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오직 마음 속으로만 다다를 수 있는 그런 곳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한층 거나해진 흥취를 못이겨, 숙소로 돌아와서도 그들은 큰 사발에다 술을 듬뿍 따라서 답답했던 가슴을 축였던 것이다.

이덕무는 일찍이 그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서 이렇게 적은 바 있다.

眞情之發, 如古鐵活躍池, 春筍怒出土;

진정眞情을 펴냄은 마치 고철古鐵이 못에서 활발히 뛰고, 봄날 죽순이 성난 듯 땅을 내밀고 나오는 것과 같다.

假情之飾, 如墨塗平滑石, 油泛淸徹水.

거짓 정을 꾸미는 것은 먹을 반반하고 매끄러운 돌에 바르고, 기름이 맑은 물에 뜬 것과 같다.

七情之中, 哀尤直發難欺者也.

칠정 가운데서도 슬픔은 더더욱 곧장 발로되어 속이기가 어려운 것이다.

哀之甚至於哭, 則其至誠不可遏.

슬픔이 심하여 곡하기에 이르면 그 지극한 정성을 막을 수가 없다.

是故眞哭骨中透, 假哭毛上浮. 萬事之眞假, 可類推也.

이런 까닭에 진정에서 나오는 울음은 뼛속으로 스며들고, 거짓 울음은 터럭 위로 떠다니게 되니, 온갖 일의 참과 거짓을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살아가는 일은 답답하고 속터지는 일이다. 봄날 죽순이 땅을 밀고 솟아나듯, 내 존재의 깊은 곳에서부터 겉잡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울음과 만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진정에서 나와 뼛속까지 스며드는 그런 울음은 어디에 있는가? 갓난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터뜨리는 첫 소리 같은 음을 어떻게 울 수 있을까? 나의 시, 나의 노래는 그러한 울음이었던가? 슬프지도 않으면서 짐짓 슬픈체 우는 거짓 소리는 아니었던가? 기름이 물에 뜬 것처럼, 반반한 돌 위에 쓴 먹 글씨처럼 스미지는 못하고 겉돌기만 하는 그런 울음은 아니었던가?

아! 그곳은 어디에 있는가? 요동의 벌판에 있는가, 금강산 비로봉의 꼭대기에 있는가?

아니면 장연의 바닷가에 있는가? 나도 그런 곳에 서서 큰 소리로 한번 울어 보고 싶구나.

한편 추사 김정희는 〈요야遼野〉란 작품에서 연암의 〈호곡장론〉을 읽은 흥취를 이렇게 노래하였다.

千秋大哭場 戱喩仍妙詮

譬之初生兒 出世而啼先

천추의 커다란 울음터라니

재미난 그 비유 신묘도 해라.

갓 태어난 핏덩이 어린아이가

세상 나와 우는 것에 비유하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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