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金正喜, 1786년 ~ 1856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금석학자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이다. 조선국 승문원 검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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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아시나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KBS1,느티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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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체를 아시나요?(박종현)
추사체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추사체가 뭐냐 하면 대답을 잘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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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아시나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KBS1,느티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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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면 추사체는 우리들이 쓰고 있는 글씨들이라고 해도 될지 모른다.

그의 대표적인 글씨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를 보자.


'다 떨어진 책과 무뚝뚝한 돌이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제주도 유배후 강상(한강 용산변의 강마을)시절의 대표작이다.글자의 윗선을 맞추고 내리긋는 획은 마치 치맛자락이 휘날리는 듯 변화를 주었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글씨는 추사 김정희밖에 없었다.


빨래줄에 빨래 걸린 듯하지만 필획이


맞으니 자유분방하다고 표현한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글자의 획이

 

혹은 살지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하여,

 

얼핏 보면 옆으로 삐쳐나가고
종횡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유최진의 '초산잡서'에서)

 

 
 
 
 
 
 
 
'잔서완석루'와 함께 대표작으로꼽히는
'선게비불(禪偈非佛, 사진왼쪽)'과

'판전(板殿)' 같은 작품을 보면 추사체의 '괴이함'을 어느정도 이해할수 있다.
'선게비불'은획의 굵기에 다양한 변화가
있어 울림이 강하고
추사체의파격적인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
'판전'은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대자 현판으로
고졸한 가운데 무심의 경지를
보여주는 명작. 파격이라 하기
보다는 어린애 글씨같은
천연덕스러움이 있다.
추사체는 변화무쌍함과 괴이함에 그치지 않고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의경지에까지 나아갔다.



추사 글씨체 변화에 대하여

추사체가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은
천재성의 발로가
아니라
판서를 지낸
아버지 김노경과 그 선조들, 그리고
청나라
고증학이 합해져서 가능해진 것이다.

 

추사와 동시대에 활동한 박규수는 추사체의 형성과
변천과정에 대해 "
...완옹(阮翁)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 중세
(스물네 살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되니 神이
오는 듯
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박규수의 증언에서도 드러나듯이 추사체의
골격이 형성되는
계기가 된 시기는
제주도
유배생활. 완당은 55세때인
1840년 10월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현에

 

위리안치(탱자나무 가시 울타리 속에서만 생활하도록
하는 형벌)되는 유배의 형을 받게 된다.



유배가던 길에 있었던 일로 두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전주를 지날 때 그곳의 이름난

서가 창암 이삼만을 만난 얘기다.

창암은 전형적인 시골 서생으로
요즘으로 치면 지방작가였다.
원교의 글씨를 본뜬 창암의글씨는 속칭 유수체라 하여
그 유연성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 흐름이 도도하지 못하여

 

영락없이 시골 개울물 같은 면이 있었다.그래서 꾸밈없고, 스스럼없는 천진스러움의 진국을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삼만의 '운학유천'. 시골서생의 순수함이 있다.
대둔사 '대웅보전' 현판. 원교글씨.



그런 창암이 완당에게 글씨를 보여주며 평을 부탁한 것이다.

 

완당은 이때까지만 해도 배 갑판 밑에 모여사는
쥐의 수염만으로
만든 붓 등
최고의
붓과 종이로 글씨를 쓴 '스타일리스트'였기
때문에 창암의 개꼬리를 훑어내어 만든
붓으로
쓴 글씨를 보고 일순 당황했을 성 싶다.

 

그때 창암은 완당보다 열여섯이 더 많은 71세의 노인이었다.

 

현장엔 그의 제자들이 쭉 배석해 있었다.
창암의 글씨를 보면서 완당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완당이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창암은 완당이 삽짝을 닫고 나가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저사람이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 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

전주를 떠난 완당은 해남 대둔사로 향했다.
절마당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니
'大雄寶殿' 네글자가
원교의 글씨였다. 완당은 초의선사를 만난 자리에서

 

"원교의 현판을 떼어 내리게!글씨를 안다는 사람이어떻게 저런 것을
걸고 있는가!"
하고 紙筆墨을 가져오게 해
힘지고 윤기나며 멋스러운 글씨로 대웅보전 네글자를
써주며
나무에 새겨 걸라고 했다.
완당은 붓을 잡은 참에 '무량수각'이라는 현판 횡액을
하나 더
써주었다.

 

대둔사 '무량수각' 현판. 제주도로 유배가면서
써준 것이다. 획이 기름지고 윤기가 난다.


예산 화암사 '무량수각' 현판. 획이
가늘면서
힘과 멋이 함께 들어있다.
제주도 유배시절 글씨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두가지 전설은 완당 자신만이 최고라는 생각을 갖고
원교의 글씨를 낮추어보는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누렸던 특권층의 삶과는 거리가 먼
척박하고 고독한
유배생활 8년3개월을 보내면서 예스러운
멋과 회화적 조형미를 동시에 보여주는
'入古出新'의
세계를 갖추게 된다.더 이상 어깨가 올라가는 일도
없어지며
골격은 힘있고 필획의 울림이 강하게 느껴지는
추사체의 면모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9년뒤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완당은 대둔사에
다시 들러 떼어내리게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을 다시
걸게 했으며, 전주에 들러 창암 이삼만을 찾았으나
그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완당은 강상(江上)에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시절부터 완당 글씨의 특징을 보면 추사체의 파격미나
개성미,
이른 바 괴(怪)가 완연히드러남을 실감할 수 있다.글자의 구성에서 디자인적인 변형이 대담해지고
서체를
넘나들며자유로운 조형미를 보여준다.
붓끝에는 힘이 실리고, 획에 금석기가 있으며 필세에
생동감이
있는 등 추사체의 참 멋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때 씌어진 명작 현판 '단연죽로시옥(端硏竹爐詩屋)'은
유명한 단계벼루,
차 끓이는 대나무 화로, 그리고 시를
지을 수 있는 작은 집을 뜻하는 것으로

 

그것만으로 자족하겠다는 선비의 마음을 말한다.
이 현판 글씨는 글자의 구성미,
즉 디자인은
대단히 멋스럽고 획의 흐름에서 리듬조차 감지된다.

 



또하나 현판 글씨로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使我久坐)'
라는
작품이 있다.우리말로 옮기면 '작은 창으로 밝은 빛이
많이
들어오니,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앉아 있게 하네'
라는 뜻이다.
이 현판글씨는 구성미가 아주 뛰어나다.그리고 글자에 유머와
파격을 주어 추사체의 '괴'가 곳곳에 드러나 있는데,

 

특히 밝은 明자의 획을 삐뚜루 쓴 것이나,
앉을 좌(坐)를 흙 토(土)위에 네모
두 개를 그려
마치 땅에 앉은 궁둥이처럼 쓴 데서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것도 한쪽 궁둥이를 슬쩍 들고 비스듬히 앉은 듯
네모의 양감이 다르다.



 

말년인 과천시절 완당이 남긴
'대팽두부(大烹豆腐)'는
결국 완당이
살아온 인생의 종착점이 어디였는가를
말해주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최고 가는 좋은 반찬이란 두부나 오이와
생강과 나물 [大烹豆腐瓜董菜],


최고 가는 훌륭한 모임이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 [高會夫妻兒女孫]


글 내용과 글씨 모두가 완당의 예술이
평범성에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잘 쓰겠다는 의지를 갖지도
않은 상태에서 절로

드러난 불계공졸의 경지이다.

추사 김정희에 대하여


추사 김정희는 1786년(정조10년) 오늘날
추사고택이라고 부르는
경주 김씨월성위
집안의 향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훗날 판서를 지낸 김유경이었다.
추사의 일생은 보통 다섯단계로 나뉘어진다.
-태어나서부터 연경에 다녀오는 24세까지의 수업기

 

-연경을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는 35세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관직에 나아가는 35세부터 제주도로 귀양가는 55세까지 20년간 중년의 활동기

 

-55세부터 63세까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9년간의 유배기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서부터 세상을 떠나는 71세까지 8년간의 만년기.

'조선왕조실록'에는 추사 김정희에 대해"철종 7년, 10월10일 갑오.

 

前 참판 김정희가 죽었다. 김정희는 이조판서김노경의 아들로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젊어서부터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가화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며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
나기도
했으니 그를 송나라의소동파에비교하기도 했다"고 적혀있다.

 

https://blog.naver.com/suvinga/221158927393

 

김정희의 추사체

추사 김정희는 조선시대 명필 중에서도 으뜸가는 서예가다. 김정희는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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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jcjkks&logNo=221213455383 

 

[문화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글씨 3점 보물 지정 예고

 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김정희 필 침계(金正喜 筆 梣溪)」 등 19세기 대표적 학자이자 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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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18044

 

추사 김정희, 세한도(歲寒圖) 발문

집앞에 소나무 2그루[초의(노송)와 이상적] , 집뒤에도 잣나무 2그루 우측 상단의 題辭에는 "歲寒圖 藕船是賞 阮堂"이라 적었다. 제사를 번역하면, "세한도를 우선 이상적은 감상하시게. 완당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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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앞에 소나무 2그루[초의(노송)와 이상적] , 집뒤에도 잣나무 2그루

우측 상단의 題辭에는 "歲寒圖 藕船是賞 阮堂"이라 적었다.

제사를 번역하면, "세한도를 우선 이상적은 감상하시게. 완당 김정희"

그림을 해석하면, 내 마음은 벗님들 덕분에 한겨울에도 춥지 않아! 오두막이야 썰렁하지만.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발문. 원문- 번역

https://blog.naver.com/bhjang3/140036533615

사 김정희의 세한도 발문(歲寒圖 跋文) 원문과 번역문.

 藕船是賞 阮堂

- 우선(藕船) 이상적에게 주다. 완당

지난 해(1843, 헌종9)에 『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 두 책을 부쳐주었고, 금년에 또 우경(藕畊)이 지은 『황청경세문편(皇淸經世文編)을 부쳐주었다. 이들 책은 모두 세상에서 언제나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천만리 먼 길에서 구입한 것이고, 여러 해를 거듭하여 입수한 것이지, 한때에 해 낸 일이 아니다.  (……하략……)

이하의 편지 내용은 위 포스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도병훈, 추사 적거지와 세한도

http://www.sonahmoo.com/12048

1840년 6월, 추사는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수행하여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기가 되었던 연행燕行을 30년 만에 다시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동년 8월 하순, 안동김씨 세력의 음모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면서 명문가 자제로서 승승장구하던 추사의 삶은 하루아침에 파탄에 이른다.
당시 충남 예산의 집에 머물던 추사는 의금부 금부도사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호송된다. 이후 추사는 6차례나 모진 고문을 당하고, 또한 곤장 36대를 맞을 정도로 참담한 수모와 고초를 겪었다.
1840년 9월 초, 추사는 친구의 도움으로 목숨만을 건진 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기약 없는 제주 유배 길을 떠났다.
1840년 9월 말, 추사는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 화북으로 건너갔다. 80리길을 더 들어가 서귀포시 대정읍 송계순의 집에 도착했다. 바람이 세고 춥고 험난한 지역이었다. 추사는 얼마 후 다시 강도순의 집 사랑채에 짐을 풀었지만 집 주위에 탱자나무로 가시 울타리를 치는 위리안치(圍籬安置)였다.
설상가상으로 유배당하던 해에 해배에 대한 희망의 끈이었던 절친한 친구 김유근이, 또 1842년엔 부인 예안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추사의 유배 생활은 당시 그가 남긴 수많은 서간에 잘 드러나듯, 기가 막히는 억울함에다 숱한 풍토병과 눈병에 시달렸으며, 겨울에는 한풍이 여름에는 무더위와 높은 습도로 고난과 역경의 삶을 연명해야 했다.
유배기간동안 제자인 소치 허련과 역관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適 184-1865), 친구인 초의선사가 제주를 찾아왔지만 세상은 추사를 잊어갔다. 추사는 책과 서화, 제주의 유생들을 가르치는 일로 ‘푸른 바다와 긴 하늘 같이 한이 끝이 없는’ 유배생활의 고독과 시름을 달랬다.

이처럼 유배지에서 외롭게 삶을 살아가는 추사에게 그나마 큰 위안은 책을 보는 것이었다. 이상적은 중국에 여러 번 드나 든 역관으로서 귀한 중국책들을 구하여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그의 변함없는 마음에 답하고자 1844년 59세의 추사는 서간지를 펼쳐 놓고 붓을 들었다. 이렇게 그려진 그림이 세한도다.  

세한도를 전해 받고 감격한 주1) 이상적은 그해 10월 동지사 이정응(李晸應) 일행을 수행하여 연경으로 가서 이듬해 1845년 정월 22날 그의 벗인 오찬(吳贊)의 장원에서 벌어진 잔치에 초대 받는다. 이 자리에는 오찬 ․ 장요손 등 옹방강(*추사가 아버지를 수행하여 연경에 갔을 때 만난 금석학의 스승)의 제자 17명이 참석을 하였는데, 이상적이 세한도를 꺼내 보이자, 이들은 깊은 감동과 함께 제(題)와 찬시를 쓴다. 주2)


주1)이상적이 세한도를 전해 받고 추사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려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어찌 이런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감개가 절절하셨단 말입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나 이권을 좇지 않고 스스로 초연히 세상의 풍조를 벗어났겠습니까? 다만 보잘것없는 제 마음이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그런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책은 마치 문신을 새긴 야만인이 선비들의 장보관(章甫冠)을 쓴 것 같아서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정치판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저절로 청량(淸凉)세계에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어찌 다른 의도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서 장황을 한 다음 친구들에게 구경을 시키고 제영을 부탁할까 합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그림을 구경한 사람들이 제가 정말로 속물에서 벗어나 권세와 이권 밖에서 초연하다고 생각할까 하는 것입니다.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치 않은 일입니다.(이 글은 박철상 지음, 세한도, 문학동네, 2010, 183~184쪽에서 인용함)   

   
주2)현존하는 세한도는 청나라 학자 16인의 제찬, 또는 제영題詠과 함께 길이 약 13m의 긴 두루마리로 되어 있다. 이 장권의 세한도 두루마리는 이상적이 죽고 그의 제자였던 이병선과 김준학,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의 소유가 된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민규식은 경성제대 중국철학교수 후지츠카 지카시에게 세한도를 팔게 된다. (……하략……) 

 

[참고] 세한도 발문의 중심문장의 원문과 추사선생의 해설을 좀 더 자세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孔子曰

공자왈,  공자가 『논어』 「자한」편에 에 이르기를,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오랜 세월) 후에 시드는 것을 안다고 하였네.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송백시관사시이부조자,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 내내 시들지 않은 것이라서,

歲寒以前一松栢也 

세한이전일송백야,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한 결 같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요, 

歲寒以後一松栢也

세한이후일송백야,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한 결 같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이지만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성인특칭지어세한지후,  성인은 특별히 날씨가 추워진 뒤에 이를 일컬었네..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금군지어아 유전이무가언 유후이무손언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함에 유배전이라고 해서 더 잘한 것도 없고, 유배 후라고 해서 더 못한 것도 없네.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연유전지군 무가칭 유후지군 역가견칭어성인야야

그러나 유배 오기 전의 그대는 특별히 칭찬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유배온 뒤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성인지특칭 비도위후조지정조경절이이

성인이 특별히 언급한 것은 단지 늦게 시드는 곧은 지조와 굳은 절개 때문만이 아니라,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역유소감발어세한지시자야

또한 날씨가 추울 때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일세.  


위의 번역 글은 강관식의 추사의 그의 시대(돌베개, 2002) 213~214쪽의 번역을 바탕으로 도병훈님이 부분적으로 수정한 것이다. ‘후조後凋’에 대한 해석은 말 그대로 하면 ‘늦게 시든다’이지만, 전체 문맥상 흔히 ‘늘 푸름’ 또는 ‘시들지 않는다’고 해석하며, ‘시드는 것을 뒤로 한다’는 해석도 있다. ‘(오랜 세월) 뒤에 시든다’고 해석한 것은, 원래 한자 문명권에서는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의 개념이 없다는 세계관에 기인한다. 소나무도 언제까지 푸를 수는 없고 다만 살아 있는 동안 푸름이 지속되므로 공자도 ‘후조’라 했다는 것이다.      

 

김정희[]

1786년(정조 10) ~ 1856년(철종 7)조선 말기의 문신·실학자·서화가. 금석학자. 왕희지 필법에도 능숙함.

 추사() ,완당(), 예당(), 시암(), 과노(), 농장인(), 천축고선생()

예산 출신.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 호는 추사()·완당()·예당()·시암()·과노()·농장인()·천축고선생() 등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정희 [金正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세한도' 그림에서 네 그루의 소나무와 초막의 상징에 대한 갑론을박도 있으나 소나무는 물론 염량세태에도 변함 없이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위리안치된 추사 자신을 찾아주던 제자인 이상적, 소치 허련과 친구인 초의선사 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조선 후기에 금속학을 개척하며 9년간의 제주 유배시절에도 서예로 자신을 가다듬으며 언제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불굴의 위인이셨다. 과거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추구한 흔적은 그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호를 바꿔간 데서도 증명된다.

 

이상적(李尙迪)  

1804년(순조 4) ~ 1865년(고종 2)  

호 우선(藕船)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혜길(惠吉), 호는 우선(藕船). 한어역관(漢語譯官)집안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연직(李延稷)이다. 김정희(金正喜)의 문인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A0%95%ED%9D%AC

 

김정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정희가 그린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김정희(金正喜, 1786년 ~ 1856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이다. 조선국 승문원

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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