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흐르는물처럼 | 우화의강
원문 http://blog.naver.com/nenia21/130045692944
남재(南齋) 심우정(沈愚正) | ||||||||||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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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시작하는 말 중국의 한자가 우리나라에 수용되는 시기는 전한(前漢) 무제(武帝)가 서기전 108년에 한반도를 침공하여 평양과 만주일대에 한사군을 설치한 때이다. 이 시기는 소전(小篆)에서 보다 간편한 예서(隸書)가 나왔던 때로, 우리는 이때부터 시작하여 2천년이 넘게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해 왔다. 단순 서사(書寫)와 서예(書藝)는 구별되어야 하겠지만, 갑골문 이후 변이가 정지된 해서(楷書)에 이르기까지 사물의 형상을 극단적으로 추상화한 조형의 변천임을 따져본다면 한자의 역사는 서(書) 예술(藝術)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 2천 년 동안 서예라는 조형예술을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여 왔지만, 항상 우리의 입맛에 맞게 변용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자기화의 변용은 우리민족의 독특한 미적 감수성과 주체성이라 할 수 있는데 광개토대왕비1)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 ||||||||||
▼그림 1 광개토대왕비문(상해 유정서국 1905년 발행 구탁호태왕비 탁본) | ||||||||||
광개토대왕비의 서체가 우리민족의 독창성의 발현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장단의 논변과 서체의 분석이 있었지만, 이 비문의 서체를 공부하는 학서(學書)들에게는 쉽게 전달되지 못한 것은 서체의 독창적 예술성보다 앞서 인식되어졌어야 할 한국서예사적 가치를 뒷전에 놓았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광개토대왕비의 서체의 특징이나 서예사적 가치의 연구는 비문의 해석과 역사적 사실문제 그리고 탁본의 연구에 비하여 대단히 미미한 편이다. 그 이유로 우리에게 먼저 해결해야 할 급요한 역사적 쟁점도 있었겠지만, 비가 건립 이후 무려 1500여 년간 발견되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던 원인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서기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1616년 후금(後金) 건국 후 백두산 일대를 만주족의 발흥지로 이른바 봉금제(封禁制)를 실시하여 출입을 금하였기에 비가 발견될 수 없었고, 또한 청의 강희(康熙, 1662-1722) 무렵부터 발흥하기 시작한 고증학과 금석학은 서예 복고의 소리가 높았고, 고법의 연구는 자연스레 당비나 한비에 쏠렸다. 서예사(史)에서 이 시기 이후를 비학기(碑學期)라 부르고, 이전을 첩학기(帖學期)라 부른다. 이 비학기의 정점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교류한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완원(阮元, 1764-1849) 등이 있어 금석학의 금자탑을 이루었지만 불행하게도 이들에게 발견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더욱 아쉬운 것은 추사가 우리의 금석문 발견과 보존 ․ 고증에 열정을 쏟은 것은 이미 누구나 알고 있다. 그가 금석학에 힘쓴 이유를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가 발견되었을 당시 함경도 관찰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히고 있는바, “대개 이 비는 한갓 우리나라 금석의 시조(始祖)가 될 뿐만 아닙니다. 신라의 봉강(封疆, 봉토의 경계)에 대하여 국사(國史)를 가지고 상고해 보면 겨우 비열홀(比列忽)까지에만 미쳤으니, 이 비를 통해서 보지 않으면 어떻게 신라의 봉강이 멀리 황초령(黃草嶺)까지 미쳤던 것을 다시 알 수 있겠습니까. 금석이 국사보다 나은 점이 이와 같으니, 옛 사람들이 금석을 귀중하게 여긴 까닭이 어찌 하나의 고물(古物)이라는 것에만 그칠 뿐이겠습니까.”2)라고 하면서 원래 있던 곳에 그대로 두고 영원히 보존할 계책을 마련하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즉 금석학을 통하여 서체의 고증은 물론 우리민족사 상고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그가 평생 파임획이 없는 방경고졸(方勁古拙)한 서한 예서를 서법의 조가(祖家)로 삼아 추구했던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묘법(妙法)의 전형을 광개토대왕비가 보여주고 있음이 발견되었더라면 얼마나 멋진 고증이 나왔을까 상상하여 본다. 광개토대왕비는 추사 사후 30년도 채 되지 않은 1880년을 전․ 후하여 발견되었다. 이렇듯 아쉬운 점이 있지만, 비가 발견된 이후, 중국인으로 정문작(鄭文焯)의《高句麗永樂太王碑釋文纂考》, 구양보(歐陽輔)의 《高麗好太王碑》, 영희(榮禧)의 《讕言》, 고섭광(顧燮光)의 《夢碧簃石言》에서 단편적이나마 논변이 있었고, 국내에서도 임창순, 김응현에 이어 박시형, 최완수, 채용복, 정상옥, 손환일, 김수천, 고광의, 김병기 등 꾸준한 연구가 이어지고 있어 다행스런 일이다. 아무리 선행연구자들의 연구 집적을 토대로 한다지만 광개토대왕비에 표현된 서체의 독창성과 한국서예사적 가치를 조명하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연구자별 다양한 이견(異見)과 이견의 당연성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지만, 자칫 민족적 편향의 예단을 앞세워 균형점을 잃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단을 배제하고 객관성이 담보를 위하여 먼저 입비 배경과 시대적 상황을 검토한 뒤에 지금까지 발굴된 사료를 통하여 4-5세기 고구려 서체의 유형을 추론해 보고, 선행 연구자들의 서체 논변 점검과 서체의 특징을 조명해 볼 것이다. 그런 다음 한국미술의 독창성에 서예를 접목하여 비문의 서예학적 독창성을 현출하여 본다면 한국서예사적 가치여부는 자연스레 드러날 것이다. | ||||||||||
Ⅱ. 건비 배경과 시대적 상황 1. 배경과 내용 고구려 제20대 장수왕(長壽王)은 서기 414년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능묘를 쓰면서 부왕의 공적을 기림과 아울러 수묘(守墓)의 연호(煙戶)를 명기해 두기 위하여 비(碑)를 세웠다. 비문은 높이 6.39미터의 각력응회암을 약간 가공한 뒤 비신 4면에 종(縱)으로 계선(界線)을 긋고 네모 진 정방형의 구획 안에 예서로 1,775자3)를 음각했는데 글자의 규격은 큰 것은 16센치, 작은 것은 11센치 정도로 배합과 간격이 비교적 균등하다. 비문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제1부분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전설, 왕위계승과 광개토대왕의 행장을 기술하였고, 제2부분에서는 광개토대왕이 비려와 백제를 정벌하고 신라를 구하고 왜구를 물리쳤으며 동부여를 정벌한 사실을, 제3부분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존시교언(存時敎言)에 근거해서 수묘인 연호(守墓人煙戶)의 내원(來援) 및 인가 수(人家數)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한중 어느 사서에서도 볼 수 없는 중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신비성 있는 자료로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귀중한 자료로 취급을 받고 있다. 2. 시대적 상황 비가 건립된 서기 414년 전후는 동북아시아 역사상 대격변기였다. 당시 중국은 남북으로 양분되어 양자강 이북은 흉노(匈奴), 갈(羯), 선비(鮮卑), 저(氐), 강(羌) 등 북방민족들이 중원을 나누어 각기 국가를 세운 이른바 5호16국이, 이남은 북방민족에 밀려난 한족의 동진(東晋, 317-420)이 있었다. 당시 고구려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국가는 요서(遼西)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 337-370)과 후연(後燕, 384-409), 북연(北燕, 409-436)이 있어 잦은 접촉과 충돌이 있었다. 그 후 중국 북부지역은 선비족 탁발씨가 세운 북위(北魏, 386-534)가 통일국가를 이루면서 동북아시아 패권은 고구려와 북위 그리고 동진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 물론 한반도의 백제와 신라는 한강 이남지역으로 밀려나 고구려의 세력권에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장수왕 재위기간에 가강 강력한 동북아 패권을 형성한 시기였으며 이러한 강력한 국력의 성장은 자주적 역사관, 자주적 문화관을 형성시켰다. 비문에도 나타나 있듯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은 “天帝之子母河伯女郞(하느님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물의 신 하백의 딸)”이라 하였듯이 고구려가 중국과 다른 천하의 중심 국가임을 대 내외에 선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
Ⅲ. 서체의 독창성 1. 4-5세기 고구려의 서체유형 가. 문자수용과 문화수준 | ||||||||||
▼그림 2 광개토대왕 호우명 탁본 | ||||||||||
국초부터 문자를 사용한 고구려는 4-5세기 중국의 분열로 혼란한 시기에 국가기틀을 완성하였다. 즉 313-314년에 한반도 서북부에 남아있던 낙랑(樂浪)과 대방군(帶方郡)을 완전히 몰아내고, 소수림왕(371-384)때에 이르러 율령을 제정하여 반포하고, 불교를 수용하였으며, 국가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하는 등 국가체제가 완비되었다. 또 전하지 않지만 국사인 유기(留記) 100권을 편찬한 것은 이미 자주 국방 역량의 바탕위에 법치행정의 시행, 인재양성을 통한 관료 임명, 외래 종교인 불교를 수용하였을 정도의 문화적 자신감과 역사서 편찬이라는 국가사업으로 볼 때에 다음 설명하는 바와 같이 문자생활의 일반화는 물론 문화적 수준도 상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
나. 4-5세기 서체유형 | ||||||||||
▼그림 3 모두루 墓誌 묵서 | ||||||||||
광개토대왕비 건립(414)과 같은 시기의 문자 유물은 비(碑) ․ 금속기(金屬器) ․ 인장(印章) ․ 전(塼,벽돌) ․ 도기(陶器) 등에 남겨진 명문(銘文)과 고분벽화에 남겨진 묵서(墨書)를 통해 4-5세기 고구려의 서체유형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중원 고구려비>, <광개토대왕호우명(壺杅銘)>, <광개토대왕릉 전명(塼銘)>은 광개토대왕비의 서체와 비슷한 예서 체세를 보이고 있으며, 같은 시기 고분 가운데 서사 묵적이 있는 것은 <안악3호분>, <덕흥리고분>, <모두루묘(牟頭婁墓)>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의 벽화묵서명은 앞서 설명한 비, 호우, 전명에서 보인 예서 체세와는 달리 격식이나 위엄보다는 활달하고 행기 있는 해서체를 보이고 있다. 이는 비, 전, 금속면과는 달리 발묵(潑墨)이 비교적 잘되는 회벽 위에 모필로 직접 서사하는 조건의 차이도 있지만, 당시 일상생활에 행서와 해서가 자연스럽게 서사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
▼그림 4 덕흥리 고분 묵서 | ||||||||||
이에 대해 고광의는, “동한(東漢, 25-220) 중기에 일상에서 사용하는 속체(俗體)인 예서(隸書) 가운데는 팔분(八分)과 명확히 구분되면서도 후대의 해서(楷書)와 유사한 자형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신예체(新隸體)라 한다. 신예체는 위진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고구려에서 신예체의 사용은 주로 4-5세기 유물들을 통해서 대략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안악3호분>, <덕흥리. 고분>, <모두루묘> 등의 묵서(墨書)나 주서(朱書)의 부분적인 자형결구에서는 파책이 나타나고, 옆으로 긴 체세를 보이는 등 팔분의 서사법을 보유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체세는 규범적인 팔분과는 이미 거리가 멀고, 해서나 행서에 접근되어 일종의 신예체라 할 수 있다. 또한 4세기 전반기에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고구려 와당 명문과 중원고구려비에서도 부분적으로 신예체의 자형이 나타나고 있어, 당시 고구려에서 예서의 사용이 이미 쇠퇴하였고, 신예체가 폭넓게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4)고 하여 고구려의 서체연변 상황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고 하였다 | ||||||||||
▼그림 5 광개토대왕릉전명 탁본 | ||||||||||
2. 서체논변 점검 가. 중국학자들의 논변5) 광개토왕비의 서체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먼저 정문작(1856-1918)은 ≪고려국영락태왕비석문찬고≫에서 “자체가 팔분으로 준혼(遵渾)하다. 이 비는 예서체로써 송곳으로 그린 것 같다. 그 당시는 동경에서 멀지 않아 촉대인의 영향이 있었으며 더욱이 신비함은 마치 吳의 <구진태수곡량비> 같다. 촉한의 비문은 몇 가지 보기 힘든데 동국에 이를 얻어 보아 역사의 기록에 빠진 것을 보충할 수 있으니 가히 뒤에 나온 것 중 가장 오랜 것이라 이를 수 있다(字體八分遵渾 此碑隸體如錐畫沙 其時去東京未遠 多漢人遺意 尤神似吳九眞太守谷郞碑 蜀漢石文 世不數覯 東國得此 足補史乘之闕)” 이라 한 것에 대하여 왕건군은, 광개토대왕비의 글자는 팔분체도 아니고 한대 예서도 아니라고 하면서 정문작이 광개토대왕비의 건립이 한 건흥12년이라고 본 것이나 서평도 틀렸다고 했다. 구양보는 ≪고려호태왕비≫의 안어(按語)에서 “진의 말기엔 진서(眞書=楷書)가 이미 고구려에 전입되었다. 즉 해서가 위진 때 시작되었다는 것은 더욱 믿을 수 있고 이것이 증거가 된다. 억지로 제양(齊梁)때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고집과 편벽에서 비롯됨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當晋之末 眞書已傳至高麗 則眞書之始于魏晋 益信而有 征而强以爲始于齊梁者 可以自知其偏執矣)”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왕건군은 광개토대왕비를 진서(해서)로 보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면서, 서체의 명칭과 생겨난 시대는 당대부터 청 말에 이르도록 계속 논쟁거리였으며, 특히 팔분체와 예서에 대해서는 더욱 주장들이 다르고, 진서에 대해 서한 때 이미 출현했다는 주장이 있으며 확인할 수 있는 자적으로는 한위(漢魏) 이후에야 점점 통용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예서는 방직하고 팔분도 방정하나 파책을 중시하여 구별된다. 진서의 파책은 순세(順勢)가 자연스러워서 팔분처럼 강한 파책(波磔)과 필획이 좌우로 상배(相背)되는 모습과는 다르다. 결론적으로 예서, 해서, 팔분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 광개토대왕비의 서체는 비록 개별적으로는 약간의 파세가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의도적으로 파책한 것과는 달라 팔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희는 ≪난언≫에서, “전서와 예서가 서로 교차되어 글자에 획을 많이 생략했으며 고박하여 즐길만하다. 지극히 위비(魏碑)와 흡사하다. 그 연대를 상고해보고 그 자적을 참고해보면 ‘추(鄒)’자와 ‘개(開)’자를 쓴 것으로 보아 해서의 서법은 겨우 2-30퍼센트요 전서, 예서의 서법이 여전히 6-7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마침 진대는 예서가 해서로 변화하는 시기라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때이므로 이런 흔적이 나타난 것이다(篆隸相羼兼多省文 古樸可喜 極似魏碑 考其時代 參其字跡 如鄒字作추 開字作개等類 楷法甫有二三 篆隸仍存六七 正與晋世化隸爲楷 將變未變之頃 如出一轍)”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왕건군은 약간은 이치에 맞기도 하면서 맞지 않아 혼란만 가중될 뿐이라고 했다. 고섭광은 ≪夢碧簃石言≫에서, “이 비의 글자는 큰 것은 밥공기 만하며 방엄후정하여 예서와 해서의 중간이다(此碑字大如碗 方嚴厚整 在隸楷之間)”이라 하였다. 이에 대해 왕건군은 과학적인 서평이 아니라면서, 서체란 서사(書寫)의 표현형식으로써 그 형체로 말하면 마땅히 기본적인 귀납처(歸納處)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비의 문자는 엄격히 말하여 동진의 예서이고 그 서체의 계통은 직접 한대 예서를 이은 것이다. 그리고 필획의 많은 부분이 초서에서 간편을 취했다고 하였다. 나. 국내 연구자들의 논변 임창순은 “이 시기에 일반통용문자는 해서였으나 본 비는 예(隸)로 썼다. 그것은 예(隸)는 해(楷)보다 정중하고 경건성(敬虔性)을 띠기 때문에 왕릉에 대한 최고의 존엄성을 살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중국에서도 이 당시의 비지(碑誌)는 역시 예(隸)를 썼다. 그러나 예체를 쓰면서도 초(草) ․ 해(楷)의 각체가 혼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으니 건(建), 영(迎), 위(違) 등의 책받침이라든지 차(此), 개(開)의 독특한 간이화 등의 예에서 쉽게 나타난다”6)고 하였고, 최완수는 “글씨체도 기묘하여 기본적으로 위예법에 바탕을 두었으나 해법을 가미하면서 파책의 교(巧)를 극도로 자제함으로써 오히려 고예(古隸)의 질박웅경한 필법에 가까운 듯하되 방정근엄한 기미는 이와도 또 달라 고구려 특유의 서체라고 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계속하여 “이와 같은 글씨체가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광개토대왕호우명>에서도 확인 되는 바 이것이 당시 고구려 특유의 서체였음을 알 수 있다.”7)라 하였으며, 채용복은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의 문자미학을 가장 이상적으로 표현한 한국서예의 원류이며 우리 민족자존심의 상징으로 그 남성적 넉넉함과 구수한 큰 맛은 북방민족 특유의 질긴 완강함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8)면서 서체는 ‘해서로 변화하는 예서’라고 하였고, 정상옥은 “이 비의 서체는 횡획이 수평에 가까운 직선으로 고예와 같고, 후한의 <開通褒斜道刻石>이나 <大吉買山地記>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파책이 없는 것이 특색이다. 이 비의 서체는 예서가 6내지 7이고 해서의 필법이 2내지 3”9)이라고 김응현의 ≪書與其人≫을 인용하면서 건비 시기는 예서가 해서로 변하여 가는 과정의 시기이며 일방적으로는 해서를 상용하던 때라고 하였으며, 손환일은 종합적인 설명은 없으나, “대체적으로 예서의 필획과 결구법을 보이나 부분적으로 팔분법이 보인다”10)고 하였고, 김수천은 “광개토왕비는 서한 고예와 전진(前秦)의 <광무장군비>와 <장산비> 그리고 낙랑의 전명(塼銘)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딱히 광개토왕비 서체에 영향을 미쳤다고 단언할 수 있는 중국의 글씨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11)라고 하였으며, 고광의는 “자형은 기본적으로 정방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전 ․ 예 ․ 해 ․ 초 ․ 행서의 서사법이 나타나고 있다. 자형결구의 측면에만 보면 파책이 극도로 자제되고 古式의 결구들이 보이고 있어, 예서에서 해서로의 과도적 성격을 띠는 예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가 갖는 역사적 의의를 고려할 때 이미 하나의 양식으로 독립된 서체라 할 수 있다”12)라 하였고, 김병기는 “자체로는 예서, 그중에서도 서한시대의 예서인 고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서체로는 중국과는 판이한 ‘고구려체’ 혹은 ‘광개토대왕비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13) 고 하였으며, 북한의 박시형은 “광개토왕릉비의 글씨는 이른바 ‘해예지간(楷隸之間)’ 즉 예서에서 해서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것이라고 하지만 그 대부분의 자형은 이미 해서로 전변되고 얼마간이 아직 예서의 자형을 보유하고 있다. (중략) 일반적으로 한자에서는 주서(籒書),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및 기타의 글씨체들이 있다. 그러나 이 글씨체들은 각기 표준으로 된다고 볼 수 있는 자형들이 있는 동시에 많은 변형의 글자들이 있다. 이 가운데 주서, 전서, 예서, 행서, 초서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해서까지도 실로 많은 속자(俗字), 이체자(異體字), 별체자(別體字), 가차자(假借字), 통용자(通用字) 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사실상 한자 자체의 전 역사적 시기를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예서로부터 해서가 발생 ․ 발전 ․ 고착되어 가던 위(魏), 진(晋), 남북조시기, 그 중에서도 북조제국에서 더욱 심하게 한자 자형에 복잡성 ․ 다양성 ․ 혼란성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벌써 일찍부터 시작되었으며, 또한 일반적으로 비판(碑版)들에서 더욱 심하였다. (중략) 능비 예서의 거의 전부는 물론 중국 한(漢), 위(魏), 진(晋)의 고비 예서들에 다 나오는 글자들이다 다만 능비의 서법, 문장 등에 대하여 언급한 바와 전혀 틀림없이 고구려에서는 중국 예서들과 취미를 달리함으로써 자형에 다소간 차이를 낸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도 없지는 않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고비의 글자들을 연구함에 있어서 우선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14)고 비교적 상세히 논변하였다. 다. 한자의 변용과 광개토대왕비체 서체의 연변(演變)에 대하여 논란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비문에 개별적인 파세가 있지만 팔분으로 볼 수 없으며 고예’라는 의견이다. 이는 앞의 <4-5세기 서체유형>에서 당시 고구려의 서체연변이 해서와 유사한 신예체의 자형이 나타났다고 하는 주장과 다름이 아니라, 비문의 서체를 채택함에 있어 전서의 장중함과 예서의 안정미를 찾아 고예법으로 택하고, 편의상 필획이 많은 글자일 경우 초서에서 간편을 취하여 각(刻) 하였다고 보고 싶다. 그리고 비문에 대해 중국학자들은 서체의 귀의처를 추적한 인상이라면, 국내 연구자들은 서체는 고구려 특유의 서체라는 민족성을 내포한 논변이었다.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알 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대다수의 논변에서 자체(字體)와 서체(書體)를 혼용하고 있는 문제로 이는 한자의 자체의 연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지만15) 김병기가 설명한 바와 같이 “자체(字體)는 한자 발생 초기부터 지금까지 글자의 모양이 변하여 전서체, 예서체, 해서체, 행서체, 초서체로 나누는 것을 말하고, 서체(書體)는 같은 자체에서 나타나는 스타일의 차이를 분류한 것으로 통상 왕희지체, 구양순체, 추사체 등의 서예가를 이르거나 신라체, 백제체, 백제무녕왕지석체, 신라봉평비체 등으로 부르는 것”이라 하면서, 광개토대왕비의 서체를 “자체로는 예서, 그중에서도 서한시대의 예서인 고예(古隸) …, 서체로는 중국과는 판이한 고구려체 혹은 광개토대왕비체”16) 라는 설명이 적절하다고 본다. 두 번째는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많은 변형체들은 통 털어 고구려 특유의 서체로써 독창적 현상으로만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박시형도 지적했듯이 남북조시기 북조에서 한자 자형의 복잡성 ․ 다양성 ․ 혼란성이 조성되었다고 보았거니와 다음의 기록17)에서 이러한 문제는 더욱 또렷이 제기된다. ① ≪안씨가훈≫ 권7<잡예> 에, “북조에서 난리가 발생한 후로는 필적이 고상하지 않고 천박하거나 또는 제멋대로 글자를 더 만들고 졸렬하게 되어 강남보다 심하였다” ② ≪양서(梁書)≫에는, “북조의 비지(碑誌)를 시험적으로 살펴보아도 거의 오자(誤字)들이 어지럽게널려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용문(龍門)에 쓰여 있는 글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③ “육조시대 여러 지역의 문인들이 호기심으로 별자(別子)를 쓰거나 혹은 새롭게 글자를 만들었으며, 당시에는 결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한 관청에서도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는데, 예를들면 북위 태무제(太武帝) 시광(始光)2년(425)에 새로운 글자 1,000여 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속자(俗字)를 승인하고 자전(字典)을 편찬한 것이 바로 안야왕(顔野王)의 ≪옥편(玉篇)≫이다. 또북위 도무제(道武帝) 천흥(天興)4년(401)에 4만여 자를 모아서 ≪중문경(衆文經)≫이라고 하였다” 또 중국어 문법과 음운을 연구한 최영애의 견해와 같이, “한자의 영향력은 한자를 매개로 한 중국문명의 전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 ․ 일본 ․ 베트남처럼 문자 없는 주변국의 언어에 한자라는 문자 자체가 그대로 대여되기도 하고, 자남(字喃)이나 카나(假名)처럼 문자설계의 청사진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베트남의 자남(字喃)은 한자형태를 겹쳐서 복잡하게 만든 것이고, 일본의 카나(假名)는 그 반대로 한자의 변 또는 초서체를 본떠서 간단히 만든 문자체계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미 사자(死字)가 된지 오래인 여진문자(女眞文字)나 거란문자(契丹文字)도 한자체의 변용이고, 중국의 서북부 서하(西夏)도 한자체를 모방하여 서하문자(西夏文字)를 만들었고, 중국 남부지역 소수민족언어문자인 수어문자(水語文字)나 장어문자(壯語文字)도 한자를 본떠서 만든 것이다”18)라고 한 것으로 보아 중국 주변에서의 한문자 변용은 언제나 있어온 일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광개토대왕비 건립 당시에도 문자 상황은 혼란스러웠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최소 북위(北魏)를 포함한 접경국인 고구려 등 동북의 주변국들은 어느 정도 통일된 문자체계를 갖추었지 않았을까 가정해 보았을 때에 고구려인만 사용하는 글자를 능비에 새겼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는 앞서 인용한 박시형의 “능비 예서의 거의 전부는 물론 중국 한(漢), 위(魏), 진(晋)의 고비 예서들에 다 나오는 글자들이다. 다만 능비의 서법, 문장 등에 대하여 언급한 바와 전혀 틀림없이 고구려에서는 중국 예서들과 취미를 달리함으로써 자형에 다소간 차이를 낸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도 없지는 않다”19)고 한 견해를 고려해야 할 것 같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비에 새겨진 변형체 모두가 고구려 특유의 서체라는 등식은 성립되기 어렵다는 견해이다. 3. 서체의 특징 이제 본 논고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야 할 ‘서체의 특징’에 대하여 논(論)할 차례이다. 앞서 설명한 선행연구자들의 논변이 비문의 자체(字體)와 서체(書體)에 대한 총론적 성격이라면 이제 논할 서체의 특징은 각론에 해당할 것이고, 이는 비문에 쓰인 서체의 풍조와 품격(風格)을 말하는 것으로서 결국은 독창성을 규명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광개토대왕비의 서체의 특징에 대하여 김응현이 “예서에 근간을 두고 전 ․ 해 ․ 행 ․ 초의 새로운 운미(韻味)를 혼합한 창조적 종합서체”20)라고 한 것과 같이 국내 대다수 연구자들도 같은 의견이다. 논자도 광개토대왕비 서체의 풍격을 밝힘에 있어 국내 선행연구자들과 별다른 이견 없이 장법, 필획, 결구로 나누어 특징을 살펴보고 별도로 별체자(別體字)와 간체자(簡體字)에 대하여 논하려고 한다. 가. 장법의 특징 장법(章法)이란 자간과 행간의 분간포백(分間布白)과 상하좌우단(上下左右段)의 여백을 적절하게 운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쉽게 말하여 글자 한 자 한 자가 어떻게 전체에 조화롭게 어울려 배치되는지 여부를 말하는 것이며 ‘포치(布置)’라고도 하나 엄밀히 ‘글자의 포치(布置)’라고 써야 타당할 것 같다. 광개토대왕비는 6미터가 넘는 거대한 비면에 글자를 새겨 정연한 맛을 내기위해 계선(界線)을 치고 정방형의 예서장법이다. 이는 장법의 변화에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글자마다 장단과 대소의 변화를 꾀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모든 행에서 41자씩 배당하는 규칙을 지켰다. 주목할 것은 광개토대왕비와 동일인의 글씨로 보이는 <광개토왕릉 전명>과 <광개토대왕 호우명>은 장법적 측면에서 서로 다르다. 광개토대왕비와 전명이 계선을 그어 규칙적으로 배열하였다면, 호우는 글자의 대소와 자간의 간격이 서로 다르고 글자의 배열 또한 불규칙이다. 이러한 표현양식의 차이는 같은 글씨라도 용도에 따라 변화를 꾀하는 심미적 감수성이 뛰어남을 말하는 것이다. 나. 필획의 특징 광개토대왕비체의 필획은 고른 통나무를 연결한 듯 굵기의 변화 없이 직선과 단조로운 점으로 가로획의 가지런한 수평이나 정방형의 구획선 안에 튼튼하고 투박한 모습이다. 가식 없는 자연 ․ 소박 ․ 진실의 실상을 보는 듯하다. 이를 송하경은, “노자의 소위 박(樸, 통나무)이요, 산에서 갓 캐어낸 박옥(璞玉)이라 일컫는다. 박과 박옥은 완성품이 아니요 인공이 전연 가하여지지 아니한 미완된 가능태의 집합체다. 그것은 예쁘고 깜찍하고 날씬하고 매끄럽고 자세하고 완숙하게 다듬어진 세련미는 없다. 그저 투박하고 소탈하고 무뚝뚝하고 촌스럽고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미숙한 고졸미(古拙美)가 있다”21)라 적절히 표현했다. 이를 기본으로 광개토왕비 서체의 필획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고 할 수가 있다. ① 예서의 자체(字體)이나 전서 ․ 해서 ․ 행서 ․ 초서풍의 다양한 체세가 혼융되어 있다. 즉 건비 시기가 예서에서 해서로 변해가는 단계였지만 서체 각각의 장점을 취한 듯하다. 읍부(邑部)가 들어있는 ‘鄒’, ‘朗’, ‘都’, ‘部’字의 경우 ‘㠯(이)’로 써서 전서의 서법이 보이고, 책받침(辵) 방(旁)의 경우 ‘ 辶’으로 하지 않고 ‘ㄴ’이나 ‘ㄴ’위에 점을 하나 찍어 표현했는데 행서와 초서의 서법이다. 예서와 초서의 체세가 혼합되어 나타나는 것은 ‘岡’, ‘來’, ‘獲’, ‘渡’字 등이고, 초서의 영향이라 볼 수 있는 ‘開’, ‘顧’, ‘號’, ‘與’, ‘往’, ‘龍’, ‘示’字 등 있는데, 이 가운데 號, 與 字는 전서의 영향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를 정리하면 <그림6>과 같다. | ||||||||||
▼그림 6 체세의 혼합 | ||||||||||
② 점을 제외한 모든 획을 직선으로 처리하고 가로획이 중첩될 때에는 수평을 유지하고 있고, 별획(撇劃, 丿)이나 날획(捺劃, 乀)도 모두 직선이거나 중간 아랫부분으로 약간 굽어있다. ③ 적법(趯法, 갈고리)이 생략 또는 퇴화되고, 약세(掠勢, 긴삐침)와 파세(波勢, 가로획의 끝을 물결치듯 빼는 체세)나 책세(磔勢, 파임)를 극히 제한하였다. | ||||||||||
다. 결구의 특징 | ||||||||||
서예학에서 ‘결구(結構)’와 ‘간가(間架)’란 용어를 구분 없이 혼용하는 예가 많고, 또 ‘간가결구(間架結構)’라는 합성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다시 의미를 집어보면서 보다 더 쉽게 서예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의 목조건축에서 간가는 기둥과 기둥사이의 간격(徑間)을 무한정 크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을 세우게 되고, 이러한 구조적인 특성으로 평면에 칸(間)이라는 일정한 모듈이 적용된다. 이때 평면을 나타낸 그림을 ‘간가도(間架圖)’ 라고 하는데 서양건축학의 평면도와 같은 말이다. 그리고 부재를 길이 방향으로 이어가는 것을 ‘이음’, 달리 직교하여 연결하는 것을 ‘맞춤’이라고 하는데 이를 통 털어 결구(結構)라고 부른다. 따라서 목구조는 어느 한 부분에서 어음과 맞춤이 동시에 나타나면서 결구되는 것이다. 기둥머리부분을 예를 들면, 기둥과 도리 및 보는 서로 맞춤으로 연결되고, 도리와 도리는 이음으로 연결된다. 이렇게 목조건축은 이음과 맞춤으로 많은 결구부분을 갖는 조립식 가구구조(架構構造)라고 하는 것이다.22) | ||||||||||
▼그림 7 다양한 결구형태 | ||||||||||
집을 짓는 것이나 글자를 만드는 일이나 이치는 같다. 따라서 결구는 점과 선 또는 선과 선의 이음과 맞춤의 구조이며, 간가는 한 글자의 점과 선의 배분적 조화로움을 말한다고 본다. 간가를 ‘점획의 포치(布置)’라고 한 채숭명(蔡崇名)의 설명은 정확하다. 본고는 결구에 간가가 내재된 혼합된 개념으로 다음과 같이 광개토대왕비의 결구의 특징을 알아본다. | ||||||||||
▼그림 8 동일자 비교표 | ||||||||||
① 광개토대왕비의 결구형태는 기본적으로 정방형이나 세로로 긴 직사각형, 가로로 긴 직사각형 등 다양한 결구형태를 보이고 있다. 몇 가지 특징을 분류하면 정방형(正方形), 종장형(縱長形), 횡장형(橫長形), 상하대소형(上下大小形), 편방대소형(偏旁大小形), 대칭형(對稱形), 비대칭형(非對稱形)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는 해 ․ 전 ․ 예체가 혼성된 결구형태를 보이고 있다. 즉 정방형은 전서에서 보이는 강경한 세로획과 파세 없는 가로획을 써서 장중미와 안정미를 주고 있고, 종장형과 횡장형은 해서와 예서의 영향이며, 상하대소형은 상하의 크기를 변화시켜 부정형의 미를, 편방대소형은 예서의 편(偏=形部)이 작고 방(旁=聲部)이 큰 것과 또는 그 반대의 표현으로 공간감과 형태미를 의도적으로 추구하고 있고, 대칭형은 신성하고 근엄한 전서의 영향이며, 비대칭형은 역시 변화미를 추구했다고 보여 진다. 이 가운데 몇 가지 특징을 <다음7>과 같이 정리했다. | ||||||||||
② 비문의 동일자를 비교해보면, <그림 8>에서 보는 것과 같이 ‘家’, ‘年’, ‘看’, ‘山’, ‘爲’, ‘韓’, ‘牟’, ‘國’, ‘其’, ‘羅’, ‘百’字 등에서 동형의 반복이 없음을 알 수 있다. | ||||||||||
▼그림 9 추사체와 비교 | ||||||||||
③ ‘顧’, ‘領’, ‘碑’字의 경우는 좌변의 ‘雇’, ‘令’, ‘石’을 위로 올려붙여 수평을 유지하는 표현은 마치 秋史의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에서 ‘루(樓)’의 ‘木’과 <사서루(賜書樓)>에서 ‘사(賜)’ 의 ‘貝’와 ‘루(樓)’의 ‘木’의 표현을 보는 듯하다. 라. 별체자(別體字)와 간체자(簡體字) 앞서 논했듯이 남북조시기, 그중에서도 북조 제국에서 한자 자형의 복잡성, 다양성, 혼란성이 조성되었다고 하였듯이 광개토대왕비에서도 예, 해, 초서에서 취한 별체자가 많이 보인다. 그 가운데 ‘門’字는 ‘門’, ‘閣’, ‘閏’이 나오지만 오직 ‘開’字의 ‘門’부분을 초서처럼 간략하게 썼으나 岡’字 등의 자형과 함께 중국의 금석문에서 찾을 수 없는 형태라서 흥미롭다. 또 2면 2행의 ‘彡’字의 독특함과 획의 일부를 생략한 것으로 보이는 ‘顧’, ‘隨’字의 경우가 그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2면의 6행에서 보이는 ‘貢論事九年己亥’에서 ‘己亥’가 아니고 ‘己死’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탁본상 확인되나, 간지의 순서로 보아 ‘己亥’가 맞다는 주장이 다수이지만, ‘己死’로 보는 주장도 있었다.(나진옥, 유승간)23), 물론 논자도 ‘己亥’라고 보고 있었으나, 지난 2009년 1월 발굴된 <백제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와 중국 육조시대 새긴 <관세음응험기> 목판과 또 이를 필사한 일본 교토 청련원 소장 <관세음응험기>의 ‘기해(己亥,639)’ 기사부분에서 광개토대왕비와 동일한 결구형태가 나와 의구심을 지울 수 있게 되었다. | ||||||||||
▼그림10 ① <광개토대왕비> ②<백제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 ③중 국육조시대 목판 <관세음응험기>의 ‘己亥’字 표기 | ||||||||||
Ⅳ. 서예사적 가치 광개토대왕비가 갖는 서예사적 가치를 찾는 일은 서예의 발원지인 중국 중심의 서예관(觀)에서 벗어나 한국서예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다. 지금까지도 지나치게 중국서예를 중시한 나머지 한국서예의 독창성을 도외시하는 풍조는 분명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때에 한국미술의 독창성을 한국 서예사에 접목하여 삼국금석문서예의 창조성을 규명하려한 김수천의 시도24)는 주목된다. 그는 논문에서 독일인 에카르트(Andre Eckardt, 1884-1971)와 일본인 야나기(야나기 무네요시, 1889-1961), 한국인 고유섭(高裕燮,1905-1944)을 통하여 한국미술의 독창성을 설명하면서, “안드레 에카르트는 한국민족이 지닌 예술적 감수성은 매우 높아 중국미술을 본받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미적으로 한층 더 심화시켰고 그 표현은 ‘자연스럼’이다”라고 하였고, “냐나기 무네요시는 풍토와 역사의 특수성은 각각 그 민족으로 하여금 독자적인 표현을 추구시키는데 한국의 예술은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미의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고유섭은 한국미술의 특징을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작위, 비정제성, 비균제성, 구수한 큰 맛으로 규정하고, 이 다양한 용어들은 자연미로 함축 된다”는 3인의 미술론을 인용하면서, 한국미술의 자주성과 독창성을 그동안 발원중심으로 전개되어온 한국의 서예이론과 너무 대조적인 차이를 보였다고 지적하고 전면적 검토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김수천의 주장은 지극히 당연하다. 예술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스스로의 각성 없이 창발성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서예술의 독창성 또한 같은 맥락이기 때문이다. 서예는 선(線)의 예술이다. 그 선은 우리의 풍토 자연의 선이다. 우리의 산봉우리, 하천계곡, 구부러진 소나무, 달, 초가지붕과 묘지 등의 선율이 그대로 우리민족의 미적 유전자로 스며들었다가 흔연히 표출되어 나와 건축으로, 회화로, 도자기로, 서예로 조방(粗放)하게 표현되는 것이다. 또 한 사람, 일제의 가혹한 식민정책과 언어말살정책에도 주눅 들지 않고 예리한 선비정신과 굳건한 민족정신으로 유린된 정신문화의 마지막 파수꾼이 되고자 했던 김용준(金瑢俊,1904-1967), 그는 광개토대왕비의 독창성에 대하여 수필집 ≪근원수필≫에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는 세인이 이미 주지하는 바다. 비수(碑首)나 비부(碑趺)의 수식도 없이 고구려 사람의 진취적 기상과 독창적 정신을 웅변으로 말하는 이 비는 수십 척 높이의 한 덩어리의 자연석 그대로다. (중략) 이분의 기적비(紀績碑)가 포효하는 사자처럼 아무렇게나 생긴 돌로 우뚝 세워졌다는 것은 고구려의 감각이 아니고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들의 미는 곧 힘이다. 힘이 없는 곳에 그들의 미는 성립될 수 없다. 그들의 이러한 힘, 즉 미의 이상은 글씨로도 나타난다. 시대는 비록 분예가 생긴 훨씬 뒤인 진(晋)대라 할지라도 이 석문의 패기 있고 치졸웅혼(稚拙雄渾)한 맛은 도저히 후한비의 유(類)가 아니다. 공주비(孔宙碑)나 조전비(曹全碑)나 예기비(禮器碑)에서와 같은 염려(艶麗)하다거나 간경(簡勁)한 맛이라고는 약에 쓸래야 찾아볼 수 없다”25)고 하여 바로 우리민족만의 독특한 자연석을 이용한 건비양식과 서체의 독창성을 힘주어 말했다. | ||||||||||
▼그림 10 한국미술의 독창적 발현 사례 | ||||||||||
서예는 중국으로부터 수용하였지만 에카르트의 말대로 모방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미적으로 한층 더 심화시켰다. 즉 재창조한 것이다. 이것의 표현이 바로 광개토대왕비의 서체라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의 서체를 놓고 한 ․ 중 의견이 분분한 것은 재창조된 한국서예를 중국의 서예사적으로 해석하려했기 때문이다. 질박하고 순진하며 즉흥적이고 변화무쌍한 표현은 바로 우리민족적인 서체의 특징이며 가치인 것이다. | ||||||||||
Ⅴ. 맺음 말 광개토대왕비 서체의 독창성과 아울러 이 비가 갖는 한국 서예사적 가치를 조명하고자 함이 논고의 목적이었다. 서체의 독창성에서는 먼저 4-5세기 광개토대왕비가 건립될 당시의 서체유형을 살펴보니 단순 ‘광개토대왕비체’만이 아닌 팔분의 서사법이나 활달하고 행기 있는 해서체인 일종의 신예체가 나타나 이미 고구려의 서체연변상황이 중국의 영향으로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광개토대왕비의 서체에 대하여 중국의 학자와 국내연구자들의 논변을 통하여 자체의 귀납처와 서체의 출처를 규명하려 하였지만 자체는 대체적으로 고예(古隸)라는 의견이지만 서체의 출처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광개토대왕비에 표현된 서체가 고예(古隸)의 자체(字體)이지만, 전 ․ 해 ․ 초 ․ 행서의 서사법이 혼융된 종합체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독창성에서 비롯된 ‘고구려체’ 또는 ‘광개토대왕비체’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서체의 특징에서 장법, 필획, 결구의 특징을 파악하였는데 6미터가 넘는 거대한 바위 면에 글자를 새겨 넣으려고 계선을 그어 정방형의 장법을 택하였으므로 많은 변화를 꾀하지는 못하였지만, 글자의 대소, 자간의 간격, 서로 다른 불규칙한 글자배열 등으로 장법을 대신하는 탁월한 심미적 감수성을 표현했다. 필획에서는 굵기의 변화 없는 직선과 가지런한 수평을 구사하였지만 전서 ․ 해서 ․ 행서 ․ 초서풍의 다양한 체세를 창조적으로 구성하였고, 결구는 기본적으로 정방형이지만, 다양한 직사각형, 대칭형, 비대칭형, 동일자의 동형반복을 회피하는 근엄미와 안정미 ․ 변화미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비문에 별체자와 간체자가 많이 보이는데 대부분 초서의 자형을 취한 것으로, 이는 단단한 비문에 각자(刻字)의 편의와 성글고 시원시원한 맛을 주기 위함으로 보인다. 특히 별체자에 대하여 몇몇의 글자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표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당시 자형의 복잡성 ․ 다양성 ․ 혼란성이 조성되었던 것을 반영한다면 비문에 표현된 별체자라고 하여 고구려만의 독특한 표현이라는 즉 독창성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곤란하며, 이에 대한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광개토대왕비의 한국 서예사적가치는 한국미술의 독창성을 확인하면서 얻으려는 시도였다. 서예의 원류는 분명 중국이지만, 이것을 수용하였으면 우리의 서예로 재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광개토대왕비는 분명 우리북방민족의 질박하고, 순진하며, 즉흥적이고 변화무쌍한 성격을 그대로 표현해 낸 서체라는데 그 가치를 찾았던 것이다. 남은 과제는, 그동안 지나치게 편식해온 ‘기예적(技藝的) 서사(書寫)’에서 광개토대왕비를 포함한 삼국시대 이후는 물론, 삼국초기로 거슬러 올라가 한국서예의 독창성을 탄탄하게 이론(理論) 정립하고 연구하는 일이다. 이것의 실천은 우리의 금석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한국서예의 법첩화’ 작업일 수도 있다. 이러한 ‘주체적 서예관(觀)’ 없이 한국서예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로 졸고의 끝을 맺는다. | ||||||||||
* 참고문헌 <단행본> 『광개토대왕비』, 미술문화원, 1992.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한국방송공사, 1995. 『국역 완당전집 Ⅰ』, 민족문화추진회, 1995. 『삼국사기』, 최호 譯解, 홍신문화사, 1994. 『서예대자전』, 교육출판공사, 1985. 『서예술총서②(서예술의 기원 漢)』, 정문출판사, 1989. 『서예술총서③(서예술의 여명 三國 ․ 西晉 ․ 十六國)』, 정문출판사, 1989. 『서예술총서④(서예술의 여명 東晋)』, 정문출판사, 1989. 『옛탁본의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역사』, 예술의전당, 1998. 『옛탁본의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역사 논문집』, 예술의전당, 1998. 『전각자림』, 미술문화원, 1986. 『행초대자전』,미술문화원, 1992. 곽노봉 選譯, 『중국서예논문선』, 동문선, 1996. 김근수 編, 『광개토왕비 연구자료집』, 한국학연구소, 1985. 김병기,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학고재, 2005. 노간, 『위진남북조사』, 김영환 譯 , 예문춘추관, 1995. 김왕직, 『알기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 동녘, 2007. 김용준, 『근원수필』, 범우문고, 1988. 김응현, 『동방서범 광개토왕비』, 1994. 박병천, 『서법론연구』, 일지사, 1985. 박시형, 『광개토왕릉비』, 푸른나무, 2007. 박진석, 『고구려 호태왕비연구』, 아세아문화사, 1996. 송하경, 『서예미학과 신서예정신』, 다운샘, 2003. 송하경, 『신서예시대』, 불이, 1996. 왕건군, 『광개토왕비연구(원제 : 호태왕비연구)』,임동석 譯, 역민사, 1985. 유홍준, 『완당평전1』, 학고재, 2002. 이봉호 編著, 『광개토대왕비』, 신흥인쇄사, 1991. 이진희, 『광개토왕릉비の연구』, 길천홍문관, 昭和 47년(1971). 이진희,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이기동 譯, 일조각, 1982. 임기중 編著, 『광개토왕비원석초기탁본집성』, 동국대학교출판부, 1995. 전규호, 『서예장법과 감상』, 이화경영연구소, 2003. 정상옥, 『서법예술의 미학적 인식론』, 이화문화출판사, 2000. 정태희, 『중국서예의 이해』, 원광대학교출판국, 1996. 최영애, 『한자학강의』, 통나무, 2000. <논문> 고광의, “서체를 통해서 본 고구려의 정체성(4-5세기 문자 유물을 중심으로)” 김수천, “한국미술의 독창성과 삼국 금석문 서예의 창조성” 손환일, “광개토호태왕비의 서체가 6C 신라 금석문 서체에 미친 영향” 임창순, “고구려의 금석과 서예” 채용복, “금석문을 통해 본 서에 대한 조형의식” 최완수, “우리나라 고대 ․ 중세 서예의 흐름과 특질” | ||||||||||
2)민족문화추진회(1995),『국역 완당전집』Ⅰ(완당전집 제3권 與權彛齋敦仁 三十二), p.280-282. 3)비문의 전체 字數에 대하여 1,775자(왕건군 ․ 김병기), 1,800자(박시형), 1,804자(박진석) 등 연구자 별로 약간씩 차이가 있음. 4)고광의, "서체를 통해서 본 고구려의 정체성(4-5세기 문자 유물을 중심으로)". 5)이에 대해 왕건군(1985),「광개토왕비연구(원제 : 호태왕비연구)」임동석 譯(역민사), p.287-293을 인용. 6)임창순, “고구려의 금석과 서예”. 7)최완수, "우리나라 고대 ․ 중세 서예의 흐름과 특질". 8)채용복, "금석문을 통해 본 서에 대한 조형의식". 9)정상옥, 『서법예술의 미학적 인식론』(이화문화출판사), P.166-167. 10)손환일, "광개토호태왕비의 서체가 6C 신라 금석문 서체에 미친 영향". 11)김수천, "한국미술의 독창성과 삼국 금석문 서예의 창조성". 12)고광의, 전게서. 13)김병기(2005),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학고재), P. 89. 14)박시형(2007), 『광개토왕릉비』(푸른나무), p. 118-119. 15)곽노봉 選譯(1996),『중국서예논문선』(동문선), “서예적인 측면에서 본 자체의 연변”(郭紹虞) 참조. 16)김병기, 전게서, P. 83-91 중에서 간취. 17)노간(1995), 『위진남북조사』김영환 譯, (예문춘추관), P. 179-181. 18)최영애(2000), 『한자학강의』(통나무), P. 38-39. 19)박시형, 전게서. 20)김응현(1994), 『동방서범 광개토왕비』(동방연서회), P. 313-314. 21)송하경(1996), 『신서예시대』(도서출판 불이), P. 124. 22)김왕직(2007), 『알기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동녁), p. 87-88, 321. 23)임기중(1995), 『광개토왕비원석초기탁본집성』(동국대학교 출판부), P.341. 24)김수천, 전게서. 25)김용준(1988), 『근원수필』(범우문고), p.149-1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