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주]경기도 양주골 불곡산에서 임꺽정을 만났다. 1호선 전철역 양주역에서 하차하여 양주군청 건물 왼쪽에 만든 계단을 이용하여 불곡산에 올랐다.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상봉은 바위산이어서 몇 차례 밧줄을 타고 오르내렸다.

 

 

 

월북하여 부수상까지 지낸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 때문에 임꺽정을 허구적 인물로 아는 이가 많지만 그는 역사적 실존인물이다. 양주골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힘이 장사여서 할머니는 반역이라도 저질를까봐 걱정 타령이 늘어졌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걱정> 꺽정'이 되었다.

양주골 불곡산 아래는 그의 생가터가 있고 불골산 제2봉이 임꺽정봉이다. 첫번째 사진이 그것이다.

사전의 설명을 덧붙인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7411

 

임꺽정(林─)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임꺽정 [林-, ?~1562]

조선 중기 황해도 함경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도둑으로 천민인 백정 출신이며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줘 의적이라고 불렸다.

조선 중기 양주(楊州)의 백정(白丁) 출신으로 일명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巨叱正)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도둑질을 일삼았다.

이후 명종 대의 정치 혼란과 계속된 흉년으로 관리의 부패가 심해져 민심이 흉흉해지자 불평분자들을 규합,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적 행각을 벌였다. 이들의 행각에 백성들이 호응하면서 관군의 토벌이 있을 경우 미리 정보를 알려주어 자신들의 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1559년(명종 14)에는 개성(開城)까지 쳐들어가 도둑질을 하자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의 소굴을 소탕하러 갔다가 오히려 살해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8월에는 일당이 서울까지 출몰하였다가 장통방(長通坊, 지금의 종로 2가 부근)에서 아내와 부하들이 체포되었고, 12월에 서울 전옥서에 갇힌 아내와 부하들을 구출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던 중 숭례문 밖에서 참모 서림(徐林)이 체포되었고, 이어 황해도에서 형 가도치(加都致)가 순경사 이사증(李思曾)에게 체포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1561년에는 임꺽정 일당을 잡기 위해 경기도 · 강원도 · 평안도 · 함경도 · 황해도의 군졸들이 대거 동원되어 소탕작전을 펼쳤다. 이들이 약간이라도 의심가는 사람이면 모두 잡아 가두어 심문을 벌이면서 민심이 흉흉해지고 원망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정부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도적 체포를 일임하고 다른 군사들은 돌아가도록 조치하였다. 1562년 정월에는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이 구월산으로 도망간 임꺽정을 추격하여 체포하였고,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하였다.

성호 이익(李瀷)이 자신의 저서인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3대 도둑으로 홍길동과 임꺽정 그리고 장길산을 꼽을 정도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도둑이다. 그를 의적으로 평가하면서 소설책과 영화 등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E%84%EA%BA%BD%EC%A0%95

 

임꺽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임꺽정(林巪正, 문화어: 림꺽정, 1521년 ~ 1562년 음력 1월 3일)은 조선 명종 때의 황해도 지방의 백정 출신 도적이다.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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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林巪正,  림꺽정, 1521~1562)은 조선 명종  때의 황해도 지방의 백정 출신 도적이다. 홍길도,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임거정(林巨正), 임거질정(林巨叱正) 등으로도 쓴다.

백정이었으나 성씨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선조 중에 임씨(林氏) 성을 가진 사대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하지는 않다, 

백정이었으나 성씨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선조 중에 임씨(林氏) 성을 가진 사대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하지는 않다. 홍길동장길산 등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이라 칭하기도 하고, 여기에 전우치를 포함해 4대 도적으로 보기도 한다.

경기도 량주(楊州)의 백정으로, 정확한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양주군 주내 지역의 전설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백정이라 마을 사람들에게 천대당했고, 동네 우물물도 먹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임꺽정은 집에서 좀 거리가 있는 양주 불곡산까지 가서 흘러내리는 물을 떠다 마셨다고 한다. 일설에는 그의 아버지가 지방관의 탐학으로 살해되면서 의적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도적이 된 정확한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그와 비견되는 인물들인 홍길동은 그보다 2세대 전에 활동하던 인물이고, 전우치는 그와 동시대였으며, 장길산  숙종 무렵에 활동했다.

그는 중종, 명종시기 양주 일대와  철원, 황해도 봉산군과 해주보, 구월산 일대에서 폭넓게 활동하였다.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불평분자를 규합하여 민가를 약탈하였으나, 아전과 백성들이 도와 잡지 못하였다. 1559년(명종 14년)부터는 황해도 구월산 등의 산채를 은신처로 정하고 황해도 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고을 관아를 습격하고 관리를 살해하는 한편, 관아의 창고를 털어 양곡과 패물을 훔치는 한편 빈민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었다. 황해도 장연(長淵)· 옹진(甕津)· 풍천(豊川) 등지에서 관군이 토벌을 하려 했으나 백성들이 내응하거나 미리 알려주어 이를 피했다.

개성의 포도관 이억근(李億根)과 남지근 , 이흠례 등 당시 조선의 장수들은 그를 체포하려 했지만 그는 번번히 체포되지 않고 달아났다. 1560년(명종 15년)부터 점차 세력이 위축되던 중 1562년(명종 17년) 음력 1월에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인해 구월산(九月山)으로 철수하여 항전하다가 남치근 등에게 잡혀서 사형을 당했다.[1]

평가

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조선후기 실학자 석호 이익은 조선의 3대 도적으로 홍길돌 장길산임꺽정을 꼽았다. 성호가 3대 도적으로 이들을 꼽은 것은 비단 대도(大盜)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당시 위정자들은 이들을 도적떼로 몰고 갔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위정자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자 신분해방의 부르짖음이 담긴 의적(義賊)이라는 시각이 담겨있다고 본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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