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雲寺 洞口
-서정주
선운사(禪雲寺)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미당 서정주 선생의 명예는 5공지지 방송과 친일명단으로 인하여 핏빛으로 물들었지만 지자체의 브랜드로, 또 한국의 브랜드로, 그리고 언어의 마술사 같은 한국인 심성의 근저를 환기시키는 한국시의 브랜드로 손색이 없다. 그를 지우고 누구를 내세워 그 자리를, 그 큰 공간을 채울 수 있단 말인가?
1960년대 후반 교내 시화전에서 본 미당 선생의 작품이 바위에 새겨져 있어 소풍나온 여자아이들처럼 기분이 환해졌지만 이 비석이 철거되었던 적도 있어 다양성을 존중할 줄 모르는, 민족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일방적 매도에 가슴이 아팠다. 그분은 석조관 강의실에서 주로 지식 내용을 불러주며 학생들에게 받아쓰게 했는데, 양복조끼 주머니에서 자주 회중시계를 꺼내보곤 하셨다. 작품 창작에는 천재시인이시지만 강의는 좀 부담스러워하셨던 것 같다.
시간당 한 칠판씩 잔뜩 메모하시고 학생들의 필기 마치기를 기다리시며 백조 담배를 한 개피 태우시던 평론가 조연현 선생과는 딴판이셨다. 현대문학 주간도 겸하셨던 조 선생님은 바둑에 빠져 강의시간에 가끔 늦으시긴 했지만 준비된 내용을 전달하시는 게 청산유수이셨다.
나는 그 차이를, 고양된 감정을 유지하며 사물을 재발견하고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시인과 주관을 최대한 배제하고 냉철한 이지적 활동에 종사하는 비평가의 간격으로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