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자서(自序)

글이란 뜻을 표현하면 된다

글이란 뜻을 그려내는 데 그칠 따름이다. 저와 같이 글제를 앞에 놓고 붓을 쥐고서 갑자기 옛말을 생각하거나, 억지로 경서(經書)의 뜻을 찾아내어 일부러 근엄한 척하고 글자마다 정중하게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화공(畫工)을 불러서 초상을 그리게 할 적에 용모를 가다듬고 그 앞에 나서는 것과 같다.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옷은 주름살 하나 없이 펴서 평상시의 태도를 잃어버린다면, 아무리 훌륭한 화공이라도 그 참모습을그려내기 어려울 것이다. 글을 짓는 사람도 어찌 이와 다를 것이 있겠는가.


[주D-001]그 …… 것이다 : 원문은 ‘難得其眞’인데, 《종북소선(鍾北小選)》과 《병세집(幷世集)》에는 ‘眞’이 ‘意’로 되어 있다.


말이란 거창할 필요가 없으며, 도(道)는 지극히 미세한 데까지 분포되어 있나니, 말할 만한 것이라면 부서진 기와나 벽돌인들 어찌 버리겠는가.
그러므로 도올(檮杌)은 사악한 짐승이지만 초(楚) 나라의 국사(國史)는 그 이름을 취하였고,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죽이고 몰래 매장하는 것은 극악한 도적이지만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는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니, 글을 짓는 사람은 오직 그 참을 그릴 따름이다.


[주D-002]말이란 …… 버리겠는가 : 부서진 기와나 벽돌처럼 쓸모없는 것들에도 도(道)가 존재하므로, 이를 소재로 삼아 말로 표현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에서 동곽자(東郭子)가 “이른바 도(道)란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장자는 “없는 데가 없다.〔無所不在〕”고 하면서, 땅강아지나 개미에도 있고, 피〔稊稗〕에도 있고, 기와나 벽돌〔瓦甓〕에도 있고, 똥이나 오줌에도 있다고 하였다. 《시경(詩經)》 용풍(鄘風) 장유자(墻有茨)에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말하면 추해진다네.〔所可道也 言之醜也〕”라고 하였다. 원문의 ‘瓦礫’은 《종북소선》과 《병세집》에 ‘糞壤’으로 되어 있다. 아래에 나오는 ‘不棄瓦礫’의 ‘瓦礫’도 같다.
[주D-003]도올(檮杌)은 …… 취하였고 :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진(晉) 나라의 《승(乘)》과 초(楚) 나라의 《도올》과 노(魯) 나라의 《춘추(春秋)》가 똑같은 것이다.” 하였다. 도올은 원래 전설에 나오는 사악한 짐승이었는데, 초 나라에서 악을 징계하기 위해 이로써 국사의 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원문의 ‘楚史取名’에서 ‘取’ 자는 《종북소선》에 ‘是’로 되어 있다.
[주D-004]몽둥이로 …… 남겼으니 :
극도로 흉악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라 할지라도 역사책에 남겨 후세 사람들이 교훈으로 삼게 한다는 뜻이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 왕온서(王溫舒)라는 혹리(酷吏)가 젊은 시절 사람을 죽이고 암매장하는 악행을 자행했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의 혹리전(酷吏傳)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다. 원문의 ‘劇盜’는 《종북소선》과 《병세집》에 ‘狗屠’로 되어 있고, ‘遷固是敍’의 ‘是敍’는 《종북소선》에 ‘生色’으로 되어 있다.


이로써 보자면
글이 잘되고 못되고는 내게 달려 있고 비방과 칭찬은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귀가 울리고 코를 고는 것과 같다. 한 아이가 뜰에서 놀다가 제 귀가 갑자기 울리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기뻐하며, 가만히 이웃집 아이더러 말하기를,

“너 이 소리 좀 들어 봐라. 내 귀에서 앵앵 하며 피리 불고 생황 부는 소리가 나는데 별같이 동글동글하다!”

하였다. 이웃집 아이가 귀를 기울여 맞대어 보았으나 끝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자, 안타깝게 소리치며 남이 몰라주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주D-005]이로써 보자면 : 원문은 ‘以是觀之’인데, ‘以是’가 《종북소선》에는 ‘由是’로, 《병세집》에는 ‘是以’로 되어 있다.
[주D-006]귀가 울리고 :
병으로 인해 귀에 이상한 잡음이 들리는 이명증(耳鳴症)을 말한다.
[주D-007]놀라서 …… 기뻐하며 :
원문은 ‘啞然而喜’인데, 《종북소선》에는 ‘啞’가 ‘哦’로 되어 있다.
[주D-008]내 귀에서 …… 동글동글하다 :
이와 비슷한 비유가 이덕무(李德懋)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권1에 나온다. 이덕무가, 어린 동생이 갑자기 귀가 쟁쟁 울린다고 하여 그 소리가 무엇과 비슷하냐고 물었더니, “그 소리가 별같이 동글동글해서 빤히 보고 주울 수 있을 듯해요.〔其聲也 團然如星 若可覩而拾也〕”라고 답했다. 이에 이덕무는 “형상을 가지고 소리를 비유하다니, 이는 어린애가 무언 중에 타고난 지혜이다. 옛날에 한 어린애가 별을 보고 ‘저것은 달의 부스러기이다.’라고 했다. 이런 따위의 말들은 몹시 곱고 속기를 벗어났으니, 케케묵은 식견으로는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라고 평하였다.


일찍이 어떤 촌사람과 동숙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의 코 고는 소리가 우람하여 마치 토하는 것도 같고, 휘파람 부는 것도 같고, 한탄하는 것도 같고, 숨을 크게 내쉬는 것도 같고, 후후 불을 부는 것도 같고, 솥의 물이 끓는 것도 같고, 빈 수레가 덜커덩거리며 구르는 것도 같았으며, 들이쉴 땐 톱질하는 소리가 나고, 내뿜을 때는 돼지처럼 씩씩대었다. 그러다가 남이 일깨워 주자 발끈 성을 내며 “난 그런 일이 없소.” 하였다.


[주D-009]마치 …… 같고 : 원문은 ‘如哇如嘯如嘆如噓’인데, 《종북소선》에는 ‘如歎如哇’로만 되어 있다.
[주D-010]톱질하는 소리가 나고 :
원문은 ‘鋸’인데, 《종북소선》과 《병세집》에는 ‘鉅鍛’으로 되어 있다.
[주D-011]남이 일깨워 주자 :
원문은 ‘被人提醒’인데, 《종북소선》에는 ‘提醒’이 ‘搖惺’으로 되어 있다. 아래에 나오는 ‘怒人之提醒’의 ‘提醒’도 같다.


아, 자기만이 홀로 아는 사람은 남이 몰라줄까 봐 항상 근심하고, 자기가 깨닫지 못한 사람은 남이 먼저 깨닫는 것을 싫어하나니, 어찌 코와 귀에만 이런 병이 있겠는가? 문장에도 있는데 더욱 심할 따름이다. 귀가 울리는 것은 병인데도 남이 몰라줄까 봐 걱정하는데, 하물며 병이 아닌 것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코 고는 것은 병이 아닌데도 남이 일깨워 주면 성내는데, 하물며 병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주D-012]자기가 …… 사람은 : 원문은 ‘己所未悟者’인데, 《종북소선》에는 ‘未’가 ‘不’로 되어 있다.
[주D-013]남이 …… 싫어하나니 :
원문은 ‘惡人先覺’인데, 《종북소선》과 《병세집》에는 ‘惡’가 ‘衆’으로 되어 있다.
[주D-014]문장에도 …… 따름이다 :
원문은 ‘文章亦有甚焉耳’인데, 《종북소선》에는 ‘焉’이 ‘然’으로 되어 있다.
[주D-015]하물며 :
원문은 ‘況’인데, 《종북소선》에는 이 앞에 ‘又’ 자가 더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보는 사람이 부서진 기와나 벽돌도 버리지 않는다면, 화공의 선염법(渲染法)으로 극악한 도적돌출한 귀밑털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요, 남의 귀 울리는 소리를 들으려 말고 나의 코 고는 소리를 깨닫는다면 거의 작자의 뜻에 가까울 것이다.


[주D-016]
선염법(渲染法) : 동양화에서 먹을 축축하게 번지듯이 칠하여 붓 자국이 보이지 않게 하는 수법을 이른다.
[주D-017]극악한 도적 :
원문은 ‘劇盜’인데, 《종북소선》과 《병세집》에는 ‘狗屠’로 되어 있다.
[주D-018]돌출한 귀밑털 :
원문은 ‘突鬢’인데, 즉 봉두돌빈(蓬頭突鬢), 쑥대머리에다 돌출한 귀밑털이란 뜻으로, 거칠고 단정치 못한 모습을 말한다.
[주D-019]들으려 말고 :
원문은 ‘毋聽’인데, 《종북소선》에는 ‘不問’으로, 《병세집》에는 ‘無聽’으로 되어 있다.
[주D-020]깨닫는다면 :
원문 ‘醒’인데, 《종북소선》에는 ‘惺’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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