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이열전 /사기 권61
伯夷列傳 제1
한문 공부 삼아 <사기> 열전을 읽어본다.
[ ] 속의 숫자는 원문의 주석 번호이다.
인터넷에서 <사기> 원문 및 주석을 확인하기 바랍니다.
[索隱] 傳者,謂列入臣事跡,令可傳於後世,故曰列傳。
傳이란 신하들의 사적을 나열해 놓아 후세에 전해지게 하였으므로 열전이라 한다.
그러므로 열전이라 하였다.
[正義] 其人行跡可序列,故云列傳。
사람의 행적을 차레로 열거하였으므로 열전이라 한다.
夫學者載籍極博,猶考信於六蓺。
무릇 학자들이 공부하는 서책은 비록 광범위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믿을 수 있는 기록은 단지 <육경(六經)>1)일 뿐이다.
1)육경(六經)/ 공자가 편찬한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경(禮經), 악경(樂經), 춘추(春秋),
역경(易經)을 말한다. 이중 악경은 일실 되었고,
서경은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없어진 것을 후세 사람들이 다시 편집한 것이다.
詩書雖缺,[一]然虞夏之文可知也。[二]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은 비록 결손되어 완전하지 않다고는 하나,
우(虞)나 하(夏)2) 시대 때의 글을 보면 선양(禪讓)에 관한 일을 알 수 있다.
2)진시황의 분서 갱유 때 시경과 서경의 일부가 없어진 것을 말하며, <상서(尙書)>의
<요전(堯典)>, <순전(舜典)>, <대우모(大禹謨)> 편에 선양에 대한 상세한 기사가 있다.
요(堯)는 당(唐), 순(舜)은 우(虞), 우(禹)는 하(夏)로 통칭된다.
堯將遜位,讓於虞舜,
당요(唐堯)가 임금의 자리에 물러나면서 그 자리를 우순(虞舜)에게 양위했고,
舜禹之閒,岳牧咸薦,乃試之於位,典職數十年,[三]
우순이 양위할 때는 사악(四嶽)3)과 12목(牧)4)의 추천을 받아 하우(夏禹)를 일정한 자리에 올려
시험 삼아 십 수 년 동안 그 직을 수행하게 하고,
3)사악(四嶽)/ 요(堯) 임금 때 사방의 제후들이 거느리고 있던 관리들을 관장하던 벼슬의 명칭.
태악(太岳)이라고도 함.
4)12목(牧)/ 요임금이 전국을 12주로 나누고 그 지방장관을 목(牧)이라고 불렀다.
이어서 하나라를 세운 우임금이 구주(九州)로 다시 나누었다.
功用既興,然後授政。
그 공적의 결과가 나타난 연후에야 정권을 넘겨주었다.
示天下重器,[四]王者大統,
傳天下若斯之難也。
이는 천하는 귀중한 그릇이고, 제왕이란 가장 중요한 법통이기 때문에
천하를 전하는 일은 이처럼 어렵다는 사실을 말한다.
而說者
그러나 혹자는 말한다.
曰堯讓天下於許由,
「요임금이 천하를 허유(許由)5)에게 전하려고 하자,
5)허유(許由)/ 요임금 때 은자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요임금이 그에게 임금의 자리를 선양하려고
하자 받지 않고 영수(穎水) 북쪽의 기산(箕山)으로 달아나 숨어버렸다.
그 뒤 다시 요임금이 불러 구주(九州)의 장을 맡기려고 했으나 그 말은 들은 허유는 자기 귀가
더렵혀졌다고 영수의 물가로 달려가 그 귀를 씻었다고 했다.
허유의 이야기는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 <서무귀(徐無鬼)>, <양왕(襄王)> 등의 편에
수록되어 있다.
[五]許由不受,恥之逃隱。
허유는 이를 받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치욕으로 느끼고 도망가 숨어버렸다.
及夏之時,有卞隨﹑務光者。
이어서 하나라 때는 변수(卞隨)와 무광(務光)6)과 같은 은자가 있었다.」
6)변수(卞隨)와 무광(務光)/ 상나라 때의 은자들이다. 하걸(夏桀)을 멸한 상탕(商湯)이 임금의
자리를 이 두 사람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이 두 사람은 이를 치욕으로 생각하고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다. 출전 : <장자(莊子)> <양왕(襄王)> 편
此何以稱焉?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은자들이 칭송되고 있는 것일까?
[六]太史公曰:
태사공이 말한다.
余登箕山,[七]其上蓋有許由云。
「내가 기산(箕山)7)에 올랐었는데, 그 산 위에는 허유의 무덤이 있다고 했다.
7)기산(箕山)/ 지금의 하남성 등봉시(登封市) 동남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하본기(夏本紀)에
‘익(益)이 우임금의 아들 계(啓)에게 제(帝)의 자리를 선양하고 기산(箕山)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라는 기사가 있다.
孔子序列古之仁聖賢人,如吳太伯﹑伯夷之倫詳矣。
공자가 옛날 인자(仁者), 성인(聖人), 현인(賢人) 등을 차례로 열거하면서 오태백(吳太伯),
백이(伯夷)와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하게 말하고 있다.
余以所聞由﹑光[八]義至高,
나도 허유와 무광의 덕행이 고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九]其文辭不少概見,何哉?[一0]
그러나 <시(詩)>와 <서(書)>에 적힌 기사에는 그들에 대해 조그만 것도 나타나 있지 않으니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孔子曰:「伯夷﹑叔齊,不念舊惡,怨是用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이, 숙제는 남의 지난날의 잘못을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남으로부터 원망 받는 일이 드물었다.」8)
8)논어 공야장(公冶長) 편에 나오는 문구로 원문은
‘不念舊惡(불념구악) 怨是用希(원시용희)’이다.
「求仁得仁,又何怨乎?」
또 말씀하셨다.
「그들이 어진 것을 구함으로 해서 어진 것을 얻었는데,
구태어 원망할 필요가 있겠는가?」9)
9)논어 述而(술이) 편에 나오는 말로 원문은
‘求仁得仁(구인득인), 又何怨乎(우하원호)?’이다
余悲伯夷之意,睹軼詩可異焉。[一]其傳曰:
그러나 내가 백이의 마음이 비통하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일시(軼詩)10)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11)
10)일시(軼詩)/ 본문 아래에 나오는 <채미(采薇)>라는 시를 가리킨다.
일(軼)은 잃어버렸다는 일(佚)과 통한다. 즉 백이가 수양산에 들어가 불렀다는 채미라는 시는
시경에 수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일시라고 부른 것이다.
伯夷﹑叔齊,孤竹君之二子也。[二]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 왕의 두 아들이다.
父欲立叔齊,及父卒,
고죽국 왕이 숙제를 그 후계로 세우려고 하다가 미처 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叔齊讓伯夷。伯夷曰:「父命也。」遂逃去。
숙제가 왕위를 백이에게 양보하려고 하자 ‘부왕의 명이었다.’라고 말하면서 달아나 버렸다.
叔齊亦不肯立而逃之。
숙제도 역시 왕위에 오르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
國人立其中子。
고죽국의 국인들이 중자(中子)를 왕으로 세웠다.
於是伯夷﹑叔齊聞西伯昌善養老,盍往歸焉。[三]
이어서 백이와 숙제는 서백(西伯) 창(昌)이 노인들을 잘 공경한다는 소문을 듣고 주나라로 달려가
귀의하려고 했다.
及至,西伯卒,
武王載木主,號為文王,
東伐紂。
이윽고 그들이 당도했을 때는 서백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서백 창을 받들어 문왕이라고 추존한 다음
그의 신위를 나무로 만들어 병거에 싣고
군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나아가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려고 했다.
伯夷﹑叔齊叩馬而諫曰:
백이와 숙제는 무왕이 탄 수레를 끌던 말의 고삐를 붙잡고 출전을 만류하며 간했다.
「父死不葬,爰及干戈,可謂孝乎?
以臣弒君,可謂仁乎?」
「부친이 죽어 아직 장사도 지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일으키니
이것을 하늘의 도리에 맞는 효라 할 수 있습니까?
더욱이 신하된 자가 자신의 군주를 살해하려고 하는 행위를
인의(仁義)라고 할 수 있습니까?」
左右欲兵之。太公曰:「此義人也。」
무왕의 곁에 있던 군사들이 두 사람을 죽이려고 하자 태공 여상(呂尙)이 말했다.
「저 사람들은 의인이다!」
扶而去之。
상보가 사람을 시켜 백이와 숙제를 부축하게 하여 돌아가게 하였다.
武王已平殷亂,天下宗周,
이윽고 무왕이 상나라 주왕의 폭정을 평정하자
천하는 모두 주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而伯夷﹑叔齊恥之,義不食周粟,
隱於首陽山,[四]采薇而食之。[五]
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의 백성이 된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인의(仁義)를 지켜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하면서
수양산(首陽山)12)으로 들어가 산나물을 뜯어먹으며 배를 채워 연명했다.
12)수양산(首陽山)/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하동(河東) 포판관(蒲阪關) 화산(華山)의 북쪽과
하곡지중(河曲之中)의 설이 가장 유력하다. 지금의 산서성 영제현(永濟縣) 남쪽의 뇌수산
(雷首山)을 말한다.
及餓且死,作歌。其辭曰:
이윽고 그들이 굶주림 끝에 죽으려고 할 때
노래 한 수를 지어 노래했는데 그 가사는 이러했다.
「登彼西山兮,[六]采其薇矣。
以暴易暴兮,不知其非矣[七]。
神農﹑虞﹑夏忽焉沒兮,我安適歸矣?[八]
于嗟徂兮,命之衰矣!」
登彼西山兮 저 서산에 올라
(등피서산혜)
采其薇矣 고사리를 꺾어 먹자꾸나
(채기미의)
以暴易暴兮 포악한 것을 포악한 것으로 바꾸었으니
(이폭이폭혜)
不知其非矣 그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구나!
(부지기비의)
神農,虞,夏忽焉沒兮 신농(神農), 우순(虞舜), 하우(夏禹)의 시대는 홀연이 지나가렸으니
(신농,우,하홀언몰혜)
我安適歸矣 우리는 장차 어디에 의지해야 한단 말인가?
(아안적귀의)
于嗟徂兮 아! 우리는 죽음뿐이라구나
(우차조혜)
命之衰矣 [九] 쇠잔한 우리의 운명이여!
(명지쇠의)
遂餓死於首陽山。
由此觀之,怨邪非邪?[一0]
마침내 두 사람은 수양산에서 굶어죽고 말았다.
이 노래에서 두 사람은 원망하는 마음을 노래했는가?
아니면 원망하지 않는 마음을 노래했는가?
或曰:「天道無親,常與善人。」
어떤 사람은「천도는 무사(無私)해서 항상 착한 사람들 편이다.」라고 말한다.
若伯夷﹑叔齊,可謂善人者非邪?[一]
그렇다면 백이와 숙제는 선인이 아니란 말인가?
積仁絜行如此而餓死!
그들과 같이 인의와 고결한 덕행을 쌓았지만 굶어죽지 않았는가?
且七十子之徒,仲尼獨薦顏淵為好學。
또한 공자는 70여 자기제자들 중
유독 안연(顔淵)만이 학문에 싫증을 내지 않았다고 천거했다.
然回也屢空,糟糠不厭,[二]
그러나 안연도 가난해서 조강(糟糠)으로도 배를 불리지 못하다가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而卒蚤夭。天之報施善人,其何如哉?
하늘이 선한 사람들에게 복을 내린다고 한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盜蹠日殺不辜,[三]
도척(盜跖)13)은 매일 죄 없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13)도척(盜跖)/ 장주(莊周)가 지은 장자(莊子)라는 책의 편명으로 중국 고대전설 상의 유명한
도적 이름이다. 장주가 지어낸 이야기라고도 하고 그의 제자가 지어낸 이야기라고도 한다.
肝人之肉,[四]暴戾恣睢,[五]
그 간을 꺼내어 회쳐서 먹으며 흉악무도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며
聚黨數千人橫行天下,竟以壽終。[六]
是遵何德哉?[七]
수천 명의 도당을 이끌고 천하를 횡행하다 종내는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그것은 도대체 도척이 행한 어떤 덕행에 의해서인가?
此其尤大彰明較著者也。[八]
선한 사람이 비참하게 죽고 악인들이 천수를 누리다 죽은 일들은
하늘에 도가 없다는 지극히 크고 뚜렷한 사례들이다.
若至近世,操行不軌,專犯忌諱,而終身逸樂,[九]富厚累世不絕。
근자에 들어서서, 올바르지 않은 품행으로 정도를 걷지 않고, 오로지 사람이 꺼리고 금하는 일만
골라서 하면서도, 그 몸은 종신토록 인생을 즐기며 부귀와 영화를 대대로 이어 끊어지지 않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或擇地而蹈之,[一0]
그와 반대로 발을 내 딛을 때는 항상 조심해서 마른 땅만을 고르고,
時然後出言,[一一]
자기의 생각을 말할 때는 몇 번이고 생각한 다음에 행하고,
行不由徑,[一二]
길을 갈 때는 지름길이나 좁은 길을 택하지 않으며,
非公正不發憤,而遇禍災者,不可勝數也。[一三]
공명정대하지 않은 일에는 결코 힘써 행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화를 입게 되는 경우가 말할 수 없이 많이 있는 것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14)
14)원문은 ‘ 操行不軌, 專犯忌諱, 以終身逸樂, 富厚累世不絶. 或擇地而蹈之, 時然后出言,
行不由徑, 非公正不發憤, 而遇禍災者, 不可勝數也.’다.
余甚惑焉,儻所謂天道,是邪非邪?[一四]
나는 이것을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만약에 이것이 천도라고 한다면 과연 천도가 옳은 것인가, 옳지 않은 것인가?
子曰「道不同不相為謀」,亦各從其志也。[一]
공자가 말하기를 「 道不同(도부동), 不相爲謀(불상위모)15)」라고 했는데,
그것은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따라 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15)논어 <위영공(衛靈公)> 편에 나오는 말로
‘걷는 길이 서로 같지 않은 사람과는 같이 일을 도모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故曰「富貴如可求,雖執鞭之士,
吾亦為之。[二]如不可求,從吾所好」。[三]
고로 말하기를
「만약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부귀(富貴)라고 한다면,
비록 그것을 얻기 위한 일들이 채찍을 들고 행하는 천한 일이라고 할지라도16)
나는 그 일을 할 것이다.
그러나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쫓을 것이다.」17)라고 했다.
16)원문은 執鞭之士(집편지사)로 채찍을 들고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당시 이런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 수레를 모는 어자(御者), 둘째는 제왕이나 제후들이 행차할 때 채찍을 들고 그 앞길을
정리하는 사람, 셋째는 시장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람이 있었다.
17)논어 <술이(述而)>편에 나오는 말로 원문은
‘ 富貴如可求,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四]
또한 「추운 겨울이 되어야만
송백이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법이다.」18)라고 했다.
18)논어 <자한(子罕)> 편에 나오는 말로 원문은 松柏之後凋(송백지후조)로
직역하면 ‘소나무와 잣나무는 제일 나중에 시든다’
혹은 ‘소나무와 잣나무는 더디 시든다.’이다.
舉世混濁,清士乃見。[五]豈以其重若彼,其輕若此哉?[六]
온 세상이 혼탁해졌을 때야 청렴한 선비들이 드러나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세속의 사람들은 부귀를 중시여기고
청렴한 사람은 이처럼 부귀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인 것이다.19)
19)원문은 “豈以其重若彼, 其輕若此哉”로 해석이 분분하다.
1. 史記索隱은 ‘ 백이가 동생에게 군주의 자리를 양보한 덕은 중한 것이나,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죽은 것은 부귀를 가볍게 여긴 것이다.’ 라고 말한 것은 각주 14번
‘操行不軌, 專犯忌諱, 以終身逸樂, 富厚累世不絶. 或擇地而蹈之, 時然后出言, 行不由徑,
非公正不發憤, 而遇禍災者, 不可勝數也.’의 뜻과 통하는 말이다.
2. 史記正義에는 ‘ 盜跖 등의 흉악한 사람이 향락을 누리다가 천수를 다해 죽은 것을 중하게
여기고, 백이, 숙제, 허유(許由), 무광(務光) 등의 청빈한 인사들은 곤궁하게 살다가 죽은 것은
가볍게 여긴 것이다.’라고 했다.
3. 명청교체기의 학자 고염무(顧炎武)의 설은
‘其重若彼라는 말은 속인들은 부귀를 중하게 여기는 말이고,
其輕若此라는 말은 청렴한 선비들은 부귀를 가볍게 여기는 말이다’라고 했다.
고염무의 설을 취했다.
「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一]
공자는‘ 군자는 자기가 죽은 뒤에
그 이름이 칭송되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20)라고 말했고,
20)논어 <위영공(衛靈公)> 20장에 나오는 말로 원문은
‘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이다.
賈子曰:[二]「貪夫徇財,[三]烈士徇名,
夸者死權,[四]#庶馮生。」[五]
가의(賈宜)21)는‘ 탐욕스러운 사람은 재물 때문에 목숨을 잃고,
열사(烈士)는 명분 때문에 목숨을 바치며,
권세를 과시하는 사람은 그 권세 때문에 죽고,
일반 중인들은 자기의 목숨에만 매달린다.’22)라고 말했다.
21)가의(賈誼)/ 락양(洛陽) 출신으로 기원전 200년에 낳고 기원전 168 에 죽은 서한 초기의
정치가이자 문장가이다. 굴원의 뒤를 이은 초사의 작가이며 33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대표작으로 진나라가 멸망한 원인을 분석한 과진론(過秦論)과 굴원의 죽음을 애도한
조굴원부(弔屈原賦)라는 시가가 있다.
22)원문은 ‘ 貪夫徇財, 烈士徇名, 誇者死權, 衆庶馮生’으로 가의(賈誼)의 복조부(鵩鳥賦)의
구절이다.
「同明相照,[六]同類相求。」[七]「雲從龍,風從虎,[八]
聖人作而萬物睹。」[九]
또한 역경(易經)에는 ‘ 같은 종류의 빛은 서로가 비추어주고,
같은 종류의 물건은 서로 감정으로 통한다.
또한 구름은 용을 따라 다니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라 일어난다.
그와 같이 성인이 나타나면 세상 만물이 모두 뚜렷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23)
23)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나오는 말로 원문은
‘同聲相應, 同氣相求, 水流濕, 火就燥, 雲從龍, 風從虎, 聖人 作而萬物睹’ 이다.
伯夷﹑叔齊雖賢,得夫子而名益彰。[一0]
顏淵雖篤學,附驥尾而行益顯。[一一]
백이와 숙제가 비록 현인이기는 했지만
공자의 칭송을 듣고서야 그의 이름이 더욱 빛나게 되었고,
안연이 비록 학문을 즐겨하기는 했지만
천리마의 꼬리에 붙여져서야24) 비로소 그의 덕행이 더욱 뚜렷해 진 것이다.
24)원문은 ‘부기미(附驥尾)’로 천리가의 꼬리에 붙어서 천리를 간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가 공자와 같은 성인으로부터 칭송을 받음으로써
그의 명성이 후세에 까지 떨치게 된 것을 비유한 것이다.
巖穴之士,趣舍有時若此,
類名堙滅而不稱,悲夫![一二]
산으로 들어가 굴속에서 사는 은사들은
출세와 은퇴를 시의에 맞게 행하는데
그와 같은 사람들의 이름이 인멸(湮滅)되어 버린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閭巷之人,欲砥行立名者,[一三]
非附青雲之士,惡能施于後世哉?
시골의 벽진 곳에 살면서
덕행을 연마하여 이름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으로써
청운(靑雲) 거사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의 이름을 후세에까지 전할 수 있겠는가?
'중국고전 > 史記 사기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 관중(管仲) 열전 /사기 권62 (0) | 2011.12.18 |
---|---|
열전 70권의 창작 동기 (0) | 2011.12.16 |
장자열전 /사기열전 3.노자한비열전 (0) | 2011.12.03 |
굴원열전 /사기열전 24 (0) | 2011.12.02 |
田單列傳 第22 貞女不更二夫 (0) | 2011.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