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조]유길준, 서유견문(西遊見聞):조선시대 1895년(고종, 32) 한말(韓末)의 정치가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 미국 유학 때 유럽을 순방하며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로 된 책. 구어체 문장의 효시.
2. 국문학상의 한문학의 위상
❙ 한국의 문자
훈민정음 창제 이전까지는 이두 향찰 등의 말문학과 한문문법에 맞는 기록문학의 이중성을 지녔고,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에도 조선시대 말까지는 한글기록인 말문학과 한문기록인 기록문학의 이중구조가 유지됨.
詩― 漢詩
歌․謠― 우리말문학. 노래의 가사. 鄕歌, 麗謠[俗謠], 時調, 歌辭.
3. 한문은 조선시대 지식인의 공용문자
1895년 유길준의 서유견문이 나오기까지 한문은 한국 지식인의 문자였다. 세종 28년(1446) 훈민정음이 반포되었으나 이 땅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공용문자로 한문을 고집하였다. 한문은 세계의 중심 국가인 중국의 문자였고, 중국에 조공 가서 만나는 외국 사신들도 필담으로나마 의사 소통이 가능한 것은 한문 구사가 자유로웠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당시에는 한문이 오늘날의 영어처럼 세계공통어의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따라서 한글은 말이나 노래의 가사를 적는 수준에 머물렀고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개인의 생각이나 공식적 기록은 언제나 한문으로 기록해 왔다.
그러면 그 이유를 따져 보기로 하자.
1) 땅이 평면이라는 세계관 → 지구(地球) = 땅+구체(球體)
땅이 평면으로 인식되는 한 중심과 변방을 따질 수밖에 없고 한반도의 지식인들은 소중화(小中華)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한대(漢代)에 성행한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바탕한 사유체계에 있어서 공간 개념은 동서남북의 사방(四方)이 아니라 사방에 중심[중앙]의 공간 개념을 추가한 오방(五方)이었다. 땅이 구체로 되어 있다는 진술은 조선 후기 북학파의 선구자인 홍대용의 <의산문답>중 실옹(實翁)의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그는 지구가 구형(球形)이며 스스로 돈다는 지전설(地轉說)의 주장을 한국인 최초로 표명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은 한족(漢族) 중심의 중국 역사 정통론을 지지한 조선시대 양반관료지배계층의 춘추대의론(春秋大義論)에서 벗어나 선진문물을 수용하여 이용후생(利用厚生)해야 한다는 북학파(北學派)의 개혁사상의 근간을 이루었다.
2) 유구한 역사성-공자어록, 춘추, 제자백가서.
문자의 발달과 기록성의 확보
1. 古文, 籒文, 篆文, 隸書
◇ 古文 → 籒文[大篆] → 篆文[小篆] → 隸書⋅楷書[漢字]
1) 古⋅籒
篆文[小篆] 이전의 중국의 일체의 문자
①古文:甲骨文→龜甲⋅獸骨에 새겨진 문자. 殷代(BC.1766~BC. 1121)
金文:고대의 銅器에 새겨진 古文字. 그림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있으나 대체로 小篆에 가까운 한자형도 있다. 술잔, 술통, 종묘제기, 그릇, 盤, 鍾 따위에 사용되었다.
②籒文[大篆]:大篆의 字體. 周나라 宣王(BC.827~BC.782)의 太師였던 籒(주)가 만들어 낸 字體이다.
<大篆15篇> 교육용 표준 字體이다. 石鼓文에 사용되었다.10개의 북처럼 생긴 石塊의 위에 새긴 고문자로 중국 석각의 最古 유물(당나라 때 진창의 田野에서 발견되어 현재 북경의 孔廟에 보존)
2)篆文[小篆]
秦代(BC.221~BC.206)에 李斯, 趙高, 胡母敬 등에게 官定의 표준문자를 만들게 하고 그들은 <倉頡篇> <爰歷篇> <博學篇> 등 세 책을 편찬였다.
3)隸書
예서는 秦代(BC.249~BC.206, BC.221 통일)에 죄수들에게 쓴 공문에 간간이 사용되었으므로 예서라 명명했다 함. 官獄이 많아 간편하고 민첩하게 쓰기 위하여 만듦. 이 字形에 이르러서 비로소 현행 漢字의 형태로 변모하여 고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