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주]영남사림의 선두주자는 그렇게 부관참시당하였다. 지하의 귀신들까지 들고 일어나 그를 두 번 죽일 판이었다. 죄목은 충분(忠憤)이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한 왕의 전교와 신하들의 논의

 

연산 030 04/07/17(신해) /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한 왕의 전교와 신하들의 논의

○傳旨曰:

전지하기를,

金宗直 草茅賤士, 世祖 朝登第, 至 成宗

朝, 擢置經筵, 久在侍從之地,
“김종직은 초야의 미천한 선비로 세조조에 과거에 합격했고, 성종조에 이르러서는 발탁하여 경연(經筵)에 두어 오래도록 시종(侍從)의 자리에 있었고,

以至刑曹判書, 竉恩傾朝。

종경에는 형조 판서(刑曹判書)까지 이르러 은총이 온 조정을 경도하였다.

及其病退, 成宗 猶使所在官, 特賜米穀, 以終其年。

병들어 물러가게 되자 성종께서 소재지의 수령으로 하여금 특별히 미곡(米穀)을 내려주어 그 명을 마치게 하였다.

今其弟子 金馹孫 所修史草內, 以不道之言, 誣錄先王朝事, 又載其師 宗直 《吊義帝文》

지금 그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찬수한 사초(史草) 내에 부도(不道)한 말로 선왕조의 일을 터무니없이 기록하고 또 그 스승 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었다.

 

其辭曰:

그 말에 이르기를,

丁丑十月日, 余自 密城 京山 , 宿 踏溪驛

,
‘정축 10월 어느 날에 나는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으로 향하여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夢有神披七章之服, 頎然而來, 自言:

꿈에 신(神)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楚懷王 孫心 西楚霸王 所弑, 沈之 郴江 。” 因忽不見。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 패왕(西楚覇

王)에게 살해 되어 빈강(江)에 잠겼다.」 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余覺之, 愕然曰: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懷王 南楚 之人也, 余則 東夷 之人也。

「회왕(懷王)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地之相距, 不啻萬有餘里, 而世之先後, 亦千有餘載。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휠씬 넘는데,

來感于夢寐, 茲何祥也?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且考之史, 無沈江之語,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使人密擊, 而投其屍于水歟?

정녕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是未可知也。” 遂爲文以吊之。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드디어 문(文)을 지어 조문한다.

 

惟天賦物則以予人兮,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孰不知尊四大與五常?

어느 누가 사대(四大) 오상(五常) 높일 줄 모르리오.

豐而 嗇,

중화라서 풍부하고 이적이라서 인색한 바 아니거늘,

曷古有而今亡?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을손가.

故吾 夷人 , 又後千載兮,

그러기에 나는 이인(夷人)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恭吊 懷王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하노라.

祖龍 之弄牙角兮, 。

옛날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하니,

四海之波, 殷爲衁

사해(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네.

雖鱣鮪鰍鯢, 曷自保兮,

비록 전유(鱣鮪), 추애(鰍)라도 어찌 보전할손가.

思網漏而營營。

그물을 벗어나기에 급급했느니,

時六國之遺祚兮, 沈淪播越,

당시 육국(六國)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僅媲夫編氓。

겨우 편맹(編氓)가 짝이 되었다오.

也南國之將種兮,

항양(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종(將種)으로,

踵魚狐而起事。

어호(魚狐)를 종달아서 일을 일으켰네.

求得王而從民望兮,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름이여!

熊繹 於不祀。

끊어졌던 웅역(熊繹)의 제사를 보존하였네.

握乾符而面陽兮,

건부(乾符)를 쥐고 남면(南面)을 함이여!

天下固無大於芉氏。

천하엔 진실로 미씨(氏)보다 큰 것이 없도다.

遣長者而入關兮,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關中)에 들어가게 함이여!

亦有足覩其仁義。

또는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겠도다.

羊狠狼貪, 擅夷冠軍兮,

양흔 낭탐(羊狠 狼貪)관군(冠軍)을 마음대로 축임이여!

胡不收而膏齊斧?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嗚呼! 勢有大不然者兮,

아아,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에 있어,

 

吾於王而益懼。

나는 왕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겼네.

爲醢腊於反噬兮,

반서(反)를 당하여 해석(醢腊)이 됨이여,

 

果天運之蹠盭。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려.

郴之山磝以觸天兮,

빈의 산은 우뚝하여 하늘을 솟음이야!

景晻愛以向晏。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에 가깝고.

郴之水流以日夜兮,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흐름이여!

波淫泆而不返。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르도다.

天長地久, 恨其可旣兮,

천지도 장구(長久)한들 한이 어찌 다하리

魂至今猶飄蕩。

넋은 지금도 표탕(瓢蕩)하도다.

余之心貫于金石兮,

내 마음이 금석(金石)을 꿰뚫음이여!

王忽臨乎夢想。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네.

紫陽 之老筆兮,

자양(紫陽)의 노필(老筆)을 따라가자니,

思以欽欽。

생각이 진돈(螴蜳)하여 흠흠(欽欽)하도다.

擧雲罍以酹地兮,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冀英靈之來歆。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항하소서.’하였다.

 


其曰: ‘

祖龍 之弄牙角。’ 者, 祖龍 始皇 也,

그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했다.’는 조룡은 진 시황(秦始皇)인데,

 

宗直 始皇 世廟

종직이 진 시황을 세조에게 비한 것이요,

 

其曰: ‘求得王而從民望。’ 者,

그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고 한 왕은

 

王, 楚懷王 孫心 , , ’

초 회왕(楚懷王) 손심(孫心)인데,

 

項梁 , 求 孫心 以爲 義帝

처음에 항량(項梁)이 진(秦)을 치고 손심을 찾아서 의제(義帝)를 삼았으니,

 

宗直 義帝 魯山

종직은 의제를 노산(魯山)에게 비한 것이다.

 

其曰: ‘羊狠狼貪, 擅夷冠軍者。

그 ‘양흔 낭탐(羊狼貪)하여 관군(冠軍)을 함부로 무찔렀다.’고 한 것은,

 

宗直 以羊狠狼貪指 世廟 ,

종직이 양흔 낭탐으로 세조를 가리키고,

 

擅夷冠軍, 指 世廟 金宗瑞

관군을 함부로 무찌른 것으로 세조가 김종서(金宗瑞)를 베인 데 비한 것이요.

 

其曰: ‘胡不收而膏齊斧?’ 者,

그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 했느냐.’고 한 것은,

 

宗直 魯山 胡不收 世廟

종직이 노산이 왜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其曰: ‘爲醢腊於反。’ 者,

그 ‘반서(反)를 입어 해석(醢腊)이 되었다.’는 것은,

 

宗直 魯山 不收 世廟 , 反爲 世廟 醢腊。

종직이 노산이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세조에게 죽었느냐 하는 것이요.

 

其曰: ‘循 紫陽 之老筆, 思螴蜳以欽欽。’ 者,

그 ‘자양(紫陽)은 노필(老筆)을 따름이여, 생각이 진돈하여 흠흠하다.’고 한 것은,

 

宗直 朱子 自處, 其心作此賦, 以擬 《綱目》 之筆。

종직이 주자(朱子)를 자처하여 그 마음에 부(賦)를 짓는 것을, 《강목(綱目)》의 필(筆)에 비의한 것이다.

 

馹孫 賛其文曰: ‘以寓忠憤。’

그런데 일손이 그 문(文)에 찬(贊)을 붙이기를 ‘이로써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였다.

 

念我 世祖大王 當國家危疑之際,

생각건대, 우리 세조 대왕께서 국가가 위의(危疑)한 즈음을 당하여,

 

姦臣謀亂, 禍機垂發, 誅除逆徒,

간신이 난(亂)을 꾀해 화(禍)의 기틀이 발작하려는 찰라에 역적 무리들을 베어 없앰으로써

 

宗社危而復安, 子孫相繼, 以至于今,

종묘 사직이 위태했다가 다시 편안하여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功業巍巍, 德冠百王。

그 공과 업이 높고 커서 덕이 백왕(百王)의 으뜸이신데,

 

不意 宗直 與其門徒, 譏議聖德,

뜻밖에 종직이 그 문도들과 성덕(聖德)을 기롱하고 논평하여

 

至使 馹孫 誣書於史,

일손으로 하여금 역사에 무서(誣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此豈一朝一夕之故?

이 어찌 일조일석의 연고이겠느냐.

 

陰蓄不臣之心, 歷事三朝,

속으로 불신(不臣)의 마음을 가지고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余今思之, 不覺慘懼

나는 이제 생각할 때 두렵고 떨림을 금치 못한다.

 

 

其令東西班三品以上, 臺諫、弘文館, 議刑以啓。”

동·서반(東西班) 3품 이상과 대간·홍문관들로 하여금 형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鄭文炯 韓致禮 李克均 李世佐 盧公弼 尹慜 安瑚 洪自阿 申溥 李德崇 金友臣 洪碩輔 盧公裕 鄭叔墀 議: “

정문형(鄭文炯)·한치례(韓致禮)·이극균(李克均)·이세좌(李世佐)·노공필(盧公弼)·윤민(尹)·안호(安瑚)·홍자아(洪自阿)·

신부(申溥)·이덕영(李德榮)·김우신(金友臣)·홍석보(洪碩輔)·노공유(盧公裕)·정숙지(鄭叔)가 의논드리기를,


今觀
 宗直 《吊義帝文》 ,

“지금 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보오니,

 

非唯口不可讀, 目不忍視也。

입으로만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사옵니다.

 

宗直 世祖 朝, 從仕已久,

종직이 세조조에 벼슬을 오래하자,

 

自謂才高一世, 而不見納於 世廟 ,

스스로 재주가 한 세상에 뛰어났는데 세조에게 받아들임을 보지 못한다 하여,

 

遂懷憤懟之心, 托辭於文,

마침내 울분과 원망의 뜻을 품고 말을 글에다 의탁하여

譏剌聖德, 語極不道。

성덕(聖德)을 기롱했는데, 그 말이 극히 부도(不道)합니다.

原其心, 與丙子謀亂之臣何異?

그 심리를 미루어 보면 병자년에 난역(亂逆)을 꾀한 신하들과 무엇이 다르리까.

當論以大逆,

마땅히 대역(大逆)의 죄로 논단하고

剖棺斬屍, 明正其罪,

부관 참시(剖棺斬屍)해서 그 죄를 명정(明正)하여

以雪臣民之憤, 實合事體

신민의 분을 씻는 것이 실로 사체에 합당하옵니다.”하고, 。”

 

柳輊 議: “

유지(柳)는 의논드리기를,

宗直 不臣之心, 罪不容誅, 宜置極刑。
“종직의 불신(不臣)한 그 심리는, 죄가 용납될 수 없사오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옵소서.”
하고,

 

朴安性 成俔 申浚 鄭崇祖 李季仝 權健 金悌臣 李季男 尹坦 金克儉 尹殷老 李諿 金碔 金敬祖 李叔瑊 李堪 議: “

박안성(朴安性)·성현(成俔)·신준(申浚)·정숭조(鄭崇祖)·이계동(李季仝)·권건(權健)·김제신(金悌臣)·이계남(李季男)·윤탄(尹坦)·김극검(金克儉)·윤은로(尹殷老)·이집(李諿)·김무(金珷)·김경조(金敬祖)·이숙함(李叔)·이감(李堪)은 의논드리기를,

 

宗直 假托夢妖, 詆毁先王,

“종직이 요사한 꿈에 가탁하여 선왕을 훼방(毁謗)하였으니,

大逆不道, 宜置極典。”

대역 부도(大逆不道)입니다.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하옵니다.”하고,

卞宗仁 朴崇質 權景祐 蔡壽 吳純 安處良 洪興 議: “

”변종인(卞宗人)·박숭질(朴崇質)·권경우(權景祐)·채수(蔡壽)·오순(吳純)·안처량(安處良)·홍흥(洪興)은 의논드리기를,

宗直 懷二心,

“종직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不臣之罪已甚, 依律斷之爲便。

불신(不臣)한 죄가 이미 심하온즉, 율(律)에 의하여 처단하는 것이 편하옵니다.”하고,

 

李仁亨 表沿沫 議:

이인형(李仁亨)·표연말(表沿沫)이 의논드리기를,

“觀 宗直 《吊義帝文》 及所指之意, 罪不容誅。”

“종직의 조의제문과 지칭한 뜻을 살펴보니 죄가 베어 마땅하옵니다.”하고,

李克圭 李昌臣 崔璡 閔師騫 洪瀚 李均 金係行

:이극규(李克圭)·이창신(李昌臣)·최진(崔璡)·민사건(閔師蹇)·홍한(洪瀚)·이균(李均)·김계행(金係行)이 의논드리기를,

宗直 罪犯, 所不忍言,

“종직의 범죄는 차마 말로 못하겠으니,

 

依律文論斷, 以戒人臣懷二心者。

”율문에 의하여 논단해서 인신(人臣)으로 두 마음 가진 자의 경계가 되도록 하옵소서.”하고,

 

鄭誠謹 議: 정성근(鄭誠謹)이 의논드리기를,

宗直 陰懷是心, 臣事 世廟 ,

“종직이 음으로 이런 마음을 품고 세조를 섬겼으니,

 

凶惡不測, 宜置重典。”

그 흉악함을 헤아리지 못하온즉 마땅히 중전(重典)에 처해야 하옵니다.”하고,

 

李復善

: 이복선(李復善)이 의논드리기를,

宗直 《吊義帝文》 , 在丁丑十月,

“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은 것이 정사년(丁巳年) 10월이었으니,

 

則蓄不臣之心久矣。

그 불신(不臣)의 마음을 품은 것이 오래이었습니다.

 

觀解釋吊文之言,

그 조문(弔文)을 해석한 말을 살펴보니,

 

非徒耳不忍聞, 抑亦目不忍見。

비단 귀로 차마 들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역시 눈으로도 차마 보지 못하겠습니다.

 

其身雖死, 其惡可追, 宜從叛臣之律論斷,

그 몸이 비록 죽었을지라도 그 악을 추죄(追罪)할 수 있사오니, 마땅히 반신(叛臣)의 율에 따라 논단하소서.

 

宗直 地下之鬼, 必稽首甘心伏辜矣。”

종직의 귀신이 지하에서 반드시 머리를 조아리며 달갑게 복죄(伏罪)할 것입니다.”하고,

李世英 權柱 南宮璨 韓亨允 成世純 鄭光弼 金勘 李寬 李幼寧

: 이세영(李世榮)·권주(權柱)·남궁찬(南宮璨)·한형윤(韓亨允)·성세순(成世純)·정광필(鄭光弼)·김감(金勘)·이관(李寬)·이유령(李幼寧)이 의논드리기를,

“今觀 宗直 文, 語極不道。

“지금 종직의 글을 보오니, 말이 너무도 부도(不道)하옵니다.

 

論以亂逆何如?”

난역(亂逆)으로 논단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하고,

 

李惟淸 閔壽福 柳廷秀 趙珩 孫元老 辛服義 安彭壽 李昌胤 朴權 議: 이유청(李惟淸)·민수복(閔壽福)·유정수(柳廷秀)·조형(趙珩)·손원로(孫元老)·신복의(辛服義)·안팽수(安彭壽)·이창윤(李昌胤)·박권(朴權)이 의논드리기를,

宗直 《弔義帝文》 , 語多不道, 罪不容誅。

“종직의 조의제문은 말이 많이 부도(不道)하오니, 죄가 베어도 부족하옵니다.

 

然其人已死, 追奪爵號, 廢錮子孫何如?”

그러나 그 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작호(爵號)를 추탈하고 자손을 폐고(廢錮)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하였는데,

 

文炯 等議。

문형 등의 의논에 따랐다.

 

御筆抹執義 李惟淸 等, 司諫 閔壽福 等議, 以示 弼商 等曰:

어필(御筆)로 집의(執義) 이유청(李惟淸) 등과 사간(司諫) 민수복(閔壽福)의 논의에 표를 하고, 필상 등에게 보이며 이르기를,

 

宗直 大逆已著, 而此輩議之如此,

“종직의 대역이 이미 나타났는데도 이 무리들이 논을 이렇게 하였으니,

 

是欲庇之也。

이는 비호하려는 것이다.

 

安有如此痛恨之事?

어찌 이와 같이 통탄스러운 일이 있느냐.

 

其就所坐處, 拿來刑訊。”

그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가서 잡아다가 형장 심문을 하라.”하였다.

 

時諸宰及臺諫、弘文館皆在坐,

이때 여러 재상과 대간과 홍문 관원이 모두 자리에 있었는데,

 

忽有羅將十餘人持鐵鎖, 一時走入,

갑자기 나장(羅將) 십여 인이 철쇄(鐵鎖)를 가지고 일시에 달려드니,

 

宰相以下莫不錯愕起立。

재상 이하가 놀라 일어서지 않는 자가 없었다.

 

惟淸 等受訊杖三十, 並供無他情。

유청 등은 형장 30대를 받았는데, 모두 다른 정(情)이 없음을 공초하였다.

 



목숨건 사관(史官)의 직필(直筆)


연산 030 04/07/12(병오) / 김일손·허반을 잡아들여 《성종실록》의 권 귀인과 윤 소훈의 일을 캐묻다

○傳曰: “其令兼司僕將, 率兼司僕等, 出 建陽門 外, 圍把 延英門 賓廳 等處, 禁人出入。”

또 전교하기를,
“겸사복장(兼司僕將)에게 명해서 겸사복(兼司僕) 등을 거느리고 건양문(建陽門) 밖으로 나가, 연영문(延英門) 빈청(賓廳) 등처를 에워싸고 파수를 보면서 사람의 출입을 금지하도록 하라.”하였다.
義禁府郞廳
洪士灝 金馹孫 繼至, 命義禁府拿致 許磐

의금부 낭청(義禁府郞廳) 홍사호(洪士灝)가 김일손(金馹孫)을 끌고 들어오자, 의금부에 명하여 허반(許磐)을 잡아오게 하였다.

時, 馹孫 以戶曹正郞丁母憂, 服闋以風疾居 慶尙道 淸道郡 , 權知承文院副正字在官。

이때에 일손이 호조 정랑(戶曹正郞)으로 모친상을 당했는데, 복(服)을 벗자 풍병이 생겨 청도군(淸道郡)에서 살고 있었으며, 허반은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관에 있었다.

上御 修文堂 前門, 尹弼商 盧思愼 韓致亨 柳子光 愼守勤 、注書 李希舜 入侍。
상이 수문당(修文堂) 앞 문에 납시니, 윤필상(尹弼商)·노사신(盧思愼)·한치형(韓致亨)·유자광(柳子光)·신수근(愼守勤)과 주서(注書) 이희순(李希舜)이 입시하였다.

命進 馹孫 于座前, 傳曰: “汝於 《成宗實錄》 世祖 朝事, 其直言之。”

명하여 일손을 좌전(座前)으로 나오게 하고, 전교하기를,
“네가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세조조의 일을 기록했다는데, 바른 대로 말하라.”하니,

馹孫 曰: “臣何敢隱? 臣聞, 權貴人 德宗 後宮, 而 世祖 嘗召之, 權氏 不奉旨, 臣書此事。”

일손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감히 숨기오리까. 신이 듣자오니 ‘권 귀인(權貴人)은 바로 덕종(德宗)의 후궁(後宮)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씨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 하옵기로, 신은 이 사실을 썼습니다.”하였다.
傳曰: “聞諸何人?”

전교하기를,
“어떤 사람에게 들었느냐?”하니,
馹孫 曰: “所傳聞之事, 史官皆得以記, 故臣亦書之。 所聞處恐不當下問也。”

일손이 아뢰기를,
“전해 들은 일은 사관(史官)이 모두 기록하게 되었기 때문에 신 역시 쓴 것입니다. 그 들은 곳을 하문하심은 부당한 듯하옵니다.”하였다.
傳曰: “
《實錄》 當直筆, 豈宜妄書虛事? 所聞處其直言之。”

전교하기를,
“《실록》은 마땅히 직필(直筆)이라야 하는데, 어찌 망령되게 헛된 사실을 쓴단 말이냐. 들은 곳을 어서 바른 대로 말하라.”하니,

馹孫 曰: “史官所聞處, 若必問之, 竊恐 《實錄》 廢也。”
일손이 아뢰기를,
“사관이 들은 곳을 만약 꼭 물으신다면 아마도 《실록》이 폐하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傳曰: “其書必有情, 所聞亦必有處, 其亟直言。”

전교하기를,
“그 쓴 것도 반드시 사정이 있을 것이고 소문 역시 들은 곳이 꼭 있을 것이니, 어서 빨리 말하라.”하니,

馹孫 曰: “古史有曰先是者, 有曰初云者, 故臣亦敢書先朝事。 其所聞之處, 則貴人姪 許磐 也。”
일손이 아뢰기를,
“옛 역사에 ‘이에 앞서[先是]라는 말도 있고, 처음에[初]’라는 말이 있으므로, 신이 또한 감히 전조(前朝)의 일을 쓴 것이오면, 그 들은 곳은 바로 귀인(貴人)의 조카 허반(許磐)이옵니다.”하였다.
傳曰: “汝之出身不久, 以
世廟 事, 書 《成宗實錄》 , 其意云何?”

전교하기를,
“네가 출신(出身)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는데, 세조의 일을 《성종실록》에 쓰려는 의도는 무엇이냐?”하니,

馹孫 曰: “所傳聞之事, 左丘明 皆書之。 故臣亦書之。”
일손이 아뢰기를,
“전해 들은 일을
좌구명(左丘明)이 모두 썼으므로 신도 또한 썼습니다.”하였다.

傳曰: “日者上疏, 請復 昭陵 者何也?”

전교하기를,
“전번에 상소하여 소릉(昭陵)을 복구하자고 청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하니,


馹孫 曰: “臣出身 成宗 朝, 於 昭陵 有何情乎? 第觀 《國朝寶鑑》 ,

일손이 아뢰기를,
“신이 성종조에 출신하였으니, 소릉(昭陵)에 무슨 정이 있으리까. 다만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오니,

祖宗不絶 王氏 , 又置 崇義殿 , 俾奉其祀。 至於 鄭夢周 子孫, 亦得保首領,

조종(祖宗)께서 왕씨(王氏)를 끊지 아니하고, 또 숭의전(崇義殿)을 지어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며, 정몽주(鄭夢周)의 자손까지 또한 그 수령(首領)을 보전하게 하였으니,

此皆祖宗美德, 當傳之萬世者。 人君之德, 莫加於仁政, 請復 昭陵 者, 欲君上行仁政也。”

이는 모두가 조정의 미덕으로서 당연히 만세에 전해야 할 것입니다. 임금의 덕은 인정(仁政)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소릉(昭陵)을 복구하기를 청한 것은, 군상(君上)으로 하여금 어진 정사를 행하시게 하려는 것입니다.”하였다.

傳曰: “其書 權氏 事也, 必有共議之人, 其言之。”
전교하기를,
“그 권씨의 일을 쓸 적에 반드시 함께 의논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말하라.”하니,
馹孫 曰: “國家設史官者, 重史事也。 臣欲供職, 敢書之。

일손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사관(史官)을 설치한 것은 사(史)의 일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므로, 신이 직무에 이바지하고자 감히 쓴 것입니다.

然若此重事, 安敢與人議之? 臣旣輸情, 請獨死之。”

그러하오나 이같이 중한 일을 어찌 감히 사람들과 의논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본심을 다 털어 놓았으니, 신은 청컨대 혼자 죽겠습니다.”하였다.
傳曰: “爾又書
德宗 昭訓尹氏 事, 聞諸何處乎?”

전교하기를,
“네가 또 덕종(德宗)의 소훈 윤씨(昭訓尹氏) 사실을 썼다는데, 그것은 어디에서 들었느냐?”
하니,

馹孫 曰: “此亦聞諸 也。”

일손이 아뢰기를,
“이것 역시 허반에게서 들었습니다.”하였다.
傳曰: “何時、何處, 與何人共聞乎?”

전교하기를,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느 사람과 함께 들었느냐?”하니,
馹孫 曰: “所聞日月及處所, 則不能追憶。

일손이 아뢰기를,
“들은 월일이나 장소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然如此重事, 豈敢與雜人言之? 臣實獨聞。”

그러나 이 같은 중한 일을 어찌 감히 잡인(雜人)과 더불어 말했겠습니까. 신이 참으로 혼자 들었습니다.”하였다.
傳曰: “
之語二事, 其在一時乎?”

전교하기를,
“허반이 두 가지 일을 모두 한때에 말했느냐?”하니,
馹孫 曰: “然。”

일손이 아뢰기를,
“그러하옵니다.”하였다.
傳曰: “此重事, 何忘之有? 爾所聞處、日月及共聽之人, 其悉言之。”

전교하기를,
“이러한 중대사를 어찌 잊을 리 있겠느냐. 네가 들은 곳이라든가 어느 날, 어느 달에 함께 들은 사람은 누구인지 모두 말하라.”하니,
馹孫 曰: “日月與聞處, 臣實忘之。 臣已言大事, 何敢諱此?

일손이 아뢰기를,
“어느 날, 어느 달과 들은 곳에 대해서는 신이 실로 잊었습니다. 신이 이미 큰일을 말씀드렸사온데, 어찌 감히 이것만을 휘(諱)하오리까.

或宿臣家, 臣亦或宿 家, 同宿時 言之, 臣實獨聞。”

허반이 혹은 신의 집에서 자기도 했고 신도 또한 허반의 집에서 잤사온데, 함께 유숙할 때에 허반이 말하였으므로, 신이 실로 혼자서 들었습니다.”하였다.

傳曰: “爾又書樂歌事, 聞諸何處乎?”

전교하기를,
“네가 또 악가(樂歌)에 대한 일을 썼는데, 어느 곳에서 들었느냐?”하니,


馹孫 曰: “雖童謠, 古人亦皆書之。 故臣亦幷載此也。

일손이 아뢰기를,
“비록 동요(童謠)라 할지라도 옛사람이 또한 모두 썼으므로, 신도 또한 이것까지 아울러 실었습니다.

《後殿曲》 哀促之音, 而國人好之。 雖街童巷婦, 亦皆歌焉。

후전곡(後殿曲)은 슬프고 촉박한 소리온데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여, 가동(街童) 항부(巷婦)라도 또한 모두 노래하였습니다.

臣憂國愛君, 常慮之。 及賜假在讀書堂, 成宗 賜酒殽,

신은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항상 염려하는 터이온데, 급기야 사가(賜暇)를 받아 독서당(讀書堂)에 있을 적에 성종께서 술과 안주를 내려주셨습니다.

臣將其餘物, 泛舟至 楊花渡 , 欲聽琴, 招 茂豐正 , 抱琴而來, 彈 《後殿曲》

신은 그 여물(餘物)을 가지고 배를 띄워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러 거문고 소리를 듣고 싶기에 무풍정 총(茂豊正摠)을 불렀더니, 총(摠)이 거문고를 안고 와서 후전곡(後殿曲)을 연주하므로,

臣語 曰: ‘何好此曲?’

신이 총에게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이 곡을 좋아하느냐?’ 하고,

其後修史之時, 臣實愛君書之, 固無他情。”

그후 사기(史記)를 찬수할 적에 신이 실로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썼습니다. 확실히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하였다.
命進
許磐 于座前, 傳曰: “汝與 馹孫 有所言, 其悉陳之。”

명하여 허반을 좌전(座前)에 나오게 하고, 전교하기를,
“네가 일손과 더불어 말한 바가 있었는데, 모두 진술하라.”하니,
曰: “臣無所言。”

허반은 아뢰기를,
“신은 말한 바 없사옵니다.”하였다.
傳曰: “爾不知
馹孫 耶?”

전교하기를,
“너는 일손을 알지 못하느냐?”하니,
曰: “臣於辛亥年, 徃 金海 奴家時, 馹孫 以事被鞫于 金海

반은 아뢰기를,
“신이 신해년에 김해(金海)에 있는 종의 집에 갔을 적에, 일손이 사건이 있어 김해에서 국문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臣聞其名徃見之, 遂相從。

신이 그 이름을 듣고 가서 보았는데, 드디어 상종하게 되었습니다.

然未嘗同處讀書, 深相交結, 亦無所言之事。”

그러나 일찍이 같이 지내면서 글 읽은 일도 없으며, 깊이 서로 사귀었으나 또한 말한 일은 없습니다.”하였다.
傳曰: “爾所言,
馹孫 已發, 爾敢隱耶?”

전교하기를,
“네가 한 말은 일손이 이미 다 말했는데, 네가 감히 속이느냐?”하니,
曰: “實若有之, 何敢欺天? 請與 馹孫 面質。

반은 아뢰기를,
“그러한 사실이 있다면 어찌 감히 하늘을 속이리까. 청컨대 일손과 더불어 대질하겠습니다.”하였다.
” 傳曰: “汝與
馹孫 權貴人 尹昭訓 事, 敢終諱歟?”

전교하기를,
“네가 일손과 더불어 권 귀인(權貴人)·윤 소훈(尹昭訓)의 일을 말했다는데, 감히 끝내 휘(諱)할 생각이냐?”하니,
曰: “臣乃貴人三寸姪也, 宮禁事何敢言之? 馹孫 引臣者, 計窮而然也。”

반은 아뢰기를,
“신은 바로 귀인의 삼촌 조카이온데, 궁금(宮禁)의 일을 어찌 감히 말하오리까. 일손이 신을 끌어댄 것은 계교가 궁해서 그러한 것입니다.”하였다.
命召
馹孫 , 傳曰: “ 諱之, 爾其面質。”

명하여 일손을 불러놓고 전교하기를,
“허반이 끝내 휘(諱)하니, 네가 그와 면질(面質)하라.”하니,
馹孫 曰: “臣非係連宮禁, 何從聞之? 臣實聞諸 也。”

일손은 아뢰기를,
“신이 궁금(宮禁)과 연줄이 안 닿는데, 어디서 들었겠습니까. 신은 실지로 반한테서 들었습니다.”하매,
曰: “宮禁事, 臣何敢言? 馹孫 計窮如此, 或是病深昏迷而然爾。”

반은 아뢰기를,
“궁금의 일을 신이 어찌 감히 말하리까. 일손이 계교가 궁해서 그랬거나, 아니면 병이 깊고 혼미(昏迷)해서 그랬을 것입니다.”하고,
馹孫 曰: “臣雖昏迷, 何至妄言?”

일손은 아뢰기를,
“신은 비록 혼암(昏暗)하고 미욱하오나 어찌 망언(妄言)까지 하오리까.”하였다.
上知
詐, 命杖訊于前。

상이 반(磐)이 속임을 알고 명하여 어전에서 형장 심문을 했는데,

受杖三十, 猶不輸情。

반은 형장 30대를 맞고도 오히려 실정을 털어놓지 않았다.

弼商 等鞫 馹孫 等于賓廳。

필상(弼商) 등에게 명하여 일손 등을 빈청(賓廳)에서 국문하게 하였다.


연산군, 제왕의 금기사항 어기다

-사초(史草) 보기

[은자주] 조선왕조실록에는 시호를 받지 못한 왕이 두 분이시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왕자의 칭호를 유지한 채 그들의 사적마저도 "실록"이 아닌 일기였다.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는 불행히도 두 편의 일기가 삽입되었다. 명분에 엄격한 한자문화권의 객관적 기술에 혀가 내둘러진다. 제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사초를 절취(截取)해 올린 실록청 당상들의 현실적 타협안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연산 030 04/07/11(을사) / 김일손의 사초를 들여올 것을 명하니 이극돈 등이 일부를 절취하여 올리다

乙巳 /傳曰: “ 金馹孫 史草皆入內。”
전교하기를,
김일손(金馹孫)의 사초(史草)를 모두 대내(大內)로 들여오라.”하매,

實錄廳堂上 李克墩 柳洵 尹孝孫 安琛 啓:
실록청 당상(實錄廳堂上) 이극돈(李克墩)·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안침(安琛)이 아뢰기를,

“自古史草人主不自見之。 人主若見史, 則後世無直筆也。”
“예로부터 사초(史草)는 임금이 스스로 보지 않습니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에 직필(直筆)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니,

傳曰: “即無遺入內。”
전교하기를,
“즉시 빠짐 없이 대내로 들이라.”하였다.
克墩 等更啓:

극돈 등이 다시 아뢰기를,

“諸史官所納史草, 臣等無不見之,
“여러 사관(史官)들이 드린 사초를 신 등이 보지 않는 것이 없고,

馹孫 所書, 亦皆知矣。

일손(馹孫)의 초한 것 역시 모두 알고 있사옵니다.

臣等年齒已老, 筮仕以後, 祖宗朝事, 無不知矣。

신 등이 나이가 이미 늙었으므로 벼슬한 이후의 조종조(祖宗朝) 일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馹孫 史草, 果有犯於祖宗朝事, 而有非臣等所聞者也。

일손의 사초가 과연 조종조의 일에 범하여 그른 점이 있다는 것은 신들도 들어 아는 바이므로,

臣等以其妄, 未敢載 《實錄》 。 但今命納, 臣等不知其考何事也,

신들이 망령되게 여겨 감히 《실록》에 싣지 않았는데, 지금 들이라고 명령하시니 신 등은 무슨 일을 상고하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然自古人主不得自見其史,

그러나 옛부터 임금은 스스로 사초를 보지 못하지만,

然事若有關宗社, 不可不考

일이 만일 종묘 사직에 관계가 있으면 상고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則臣等當斷取其可考處以入,

신 등이 그 상고할 만한 곳을 절취하여 올리겠습니다.

事得以考閱, 而亦合於人主不見史草之義。”

그러면 일을 고열(考閱)할 수 있고 또한 임금은 사초를 보지 않는다는 의(義)에도 합당합니다.”하니,
傳曰: “可。”

‘가하다.’고 전교를 내렸다.

克墩 等斷取 馹孫 史草六條而封入,

극돈 등이 일손의 사초에서 6조목을 절취하여 봉해 올리니,

傳曰: “其書宗室等事亦入。”

전교하기를,
“그 종실(宗室) 등에 관해서 쓴 것도 또한 들이라.” 하였다.


조의제문(吊義帝文)


무오사화 사적(戊午史禍事蹟)

-점필재집 문집 부록

[참고]

조의제문 [弔義帝文]

조선 전기의 학자 김종직(金宗直)이 세조(世祖)의 찬탈(纂奪)을 비난한 글.

김종직은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것은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端宗)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다. 이 글을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사초(史草)에 적어 넣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편찬책임자는 이극돈(李克墩)으로 이른바 훈구파(勳舊派)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일손의 사초 중에 이극돈의 비행(非行)이 기록되어 있어 김일손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던 중, 김종직의 ‘
조의제문’을 사초 중에서 발견한 이극돈은 김일손이 김종직의 제자임을 기화(奇貨)로 하여 김종직과 그 제자들이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는 사림파(士林派)를 숙청할 목적으로,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 일파를 세조에 대한 불충(不忠)의 무리로 몰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움직여, 큰 옥사(獄事)를 일으켰다. 이것이 무오사화(戊午史禍)인데, 그 결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盤) 등이 참수(斬首)되었다.

[은자주] 영남사림의 대표주자로 중앙관계에 진출하여 문장으로 서거정과 상벽을 이루었던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문집에 넣은 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음미해 본다. 성종실록 편찬이 계기가 되어 영남사림은 중앙정계에서 훈고파에게 된서리를 맞는다. 그런 바른 소리를 하고도 태연했었던 김종직의 의리관을 다시금 생각한다.



홍치 11년 무오(1498) 연산군(燕山君) 4년.


7월에 사화가 일어났다. 유자광(柳子光)이 연산군에게 아뢰어 대역(大逆)으로 논죄(論罪)함으로써 즉시 부관참시(剖棺斬屍)하게 하였고, 집은 적몰(籍沒)되어 정부인(貞夫人) 문씨(文氏)는 운봉현(雲峯縣)에 정속(定屬)되었다. 부인은 즉시 머리를 깎고 복상(服喪)하였다. 그는 적중(謫中)에 있으면서 항상 탄식하여 말하기를 “가옹(家翁)의 평생의 지절(志節)은 천일(天日)이 밝게 비추어 아는 바인데, 죽은 뒤에 잘못된 화를 입으니, 이 또한 세운(世運)에 관계된 것이고 보면 의당 순종하여 받을 뿐이다.” 하고, 더 이상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9년 동안 적중에 있으면서 절조(節操)를 더욱 힘써 한 번도 이를 드러내어 웃은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경복(敬服)하였다.


아들 숭년(嵩年)은 이 때 나이 13세로 합천군(陜川郡)에 안치(安置)되었는데, 나이가 차지 못했다는 이유로 형화(刑禍)를 면하였다.
이 달 17일에 내린 전지(傳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종직(金宗直)은 초야의 천사(賤士)로 세조조(世祖朝)에 등제(登第)하고 성종조(成宗朝)에는 경연(經筵)에 발탁되어 오랫동안 시종(侍從)의 지위에 있다가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러서는 총은(寵恩)이 조정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가 병으로 물러감에 미쳐서는 성종께서 오히려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특별히 미곡(米穀)을 내려서 그 여생을 잘 마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수찬한 사초(史草) 안에서 부도(不道)한 말로 선왕조(先王朝)의 일을 속여 기록하고, 또 자기 스승인 종직의 조의제문(吊義帝文)을 기재하였다.


조의제문에 이르기를


‘정축년 10월 일에 내가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을 경유하여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한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헌걸찬 모습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적(項籍)에게 시해되어 침강(郴江)에 빠뜨려졌다.」 하고는, 언뜻 보이다가 이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꿈을 깨고 나서 깜짝 놀라 말하기를 「회왕은 남초(南楚) 사람이고, 나는 동이(東夷) 사람이니, 지역의 거리는 만여 리뿐만이 아니요 세대의 선후 또한 천여 년이나 되는데, 꿈자리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 얼마나 상서로운 일인가. 또 사서(史書)를 상고해 보면 강(江)에 던졌다는 말은 없는데, 혹시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 비밀히 격살(擊殺)하여 그 시체를 물에다 던져버렸던가. 이것을 알 수가 없다.」 하고, 마침내 글을 지어서 조문하기를,


惟天賦物則以予人兮 하늘이 사물의 법칙을 부여해 사람에게 주었으니

孰不知其遵四大與五常 그 누가 사대오상을 준행할 줄을 모르리오


[주D-001]사대 : 세상 만물을 이루는 근본이 되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네 가지를 말한다.
[주D-002]오상 :
인간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가리키는데, 전하여 오륜(五倫)의 뜻으로 쓰인다.


匪華豐而夷嗇兮 중화엔 풍부하고 이적엔 인색한 게 아니거니

曷古有而今亡 어찌 옛날에만 있었고 지금엔 없으랴

故吾夷人又後千祀兮 그러므로 나는 동이 사람이요 또 천 년 뒤의 오늘에

恭吊楚之懷王 삼가 초 나라의 회왕을 조문하노라


昔祖龍之弄牙角兮 옛날 진 시황이 포학을 자행하여

四海之波殷爲衁 사해의 물결이 검붉은 피바다를 이루니

雖鱣鮪鰍鯢曷自保兮 상어나 미꾸라지도 어찌 스스로 보전하랴

思網漏以營營 그물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다하였네

時六國之遺祚兮 이 때 산동 육국의 후사가 된 사람들은

沈淪播越僅媲夫編氓 침몰하고 방랑하는 고작 필부 편맹들뿐이었네

梁也南國之將種兮 항량은 남쪽 초 나라 장수의 후예로서

踵魚狐而起事 어호를 뒤따라 대사를 일으키어

求得王而從民望兮 임금을 찾아 얻어서 백성의 소망을 따르니

存熊繹於不祀 웅역에게 끊어진 제사를 다시 보존했도다


[주D-003]항량은……후예로서 : 항량은 곧 초(楚) 나라의 명장(名將)인 항연(項燕)의 아들이며 항우(項羽)의 숙부(叔父)이기도 한데, 그가 진(秦) 나라 이세(二世) 초기에 진섭(陳涉) 다음으로 항우와 함께 군대를 일으키어 진군(秦軍)과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을 민간에서 찾아다가 초 회왕으로 삼았었는데, 초 회왕은 뒤에 다시 항우에 의해 의제(義帝)로 추대(推戴)되었다가 끝내는 항우에 의해 시해되고 말았다.
[주D-004]어호 :
어백 호구(魚帛狐篝)의 준말로, 즉 진(秦) 나라 이세(二世) 초기에 가장 먼저 거사(擧事)하였던 진섭(陳涉)을 가리킴. 진섭이 거사하기 직전에 대중을 유혹시키기 위하여 비단에다 붉은 글씨로 ‘진승왕(陳勝王: 승〈勝〉은 이름이고, 자가 섭〈涉〉임)’ 이라 써서 몰래 남의 그물에 든 고기의 뱃속에 넣어두고 그 고기를 사다가 삶아 먹은 군졸이 그것을 보고 매우 괴이하게 여긴 일과, 또는 총사(叢祠) 안에 밤중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여우의 울음 소리로 울면서 외치기를 “대초가 일어나고 진승이 왕이 되리라.[大楚興 陳勝王]”고 하여, 대중의 여론을 조성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5]웅역 :
주 성왕(周成王) 때 사람으로, 초(楚) 나라 시봉조(始封祖)이다.


握乾符而面陽兮 제왕의 상서를 쥐고 왕위에 오르니

天下固無尊於芊氏 천하에 진실로 천씨보다 더 높은 이 없었고

遣長者以入關兮 장자를 보내어 관중을 들어가게 하였으니

亦有足覩其仁義 또한 족히 인의로운 마음을 볼 수 있었네

羊狠狼貪擅夷冠軍兮 양과 이리처럼 탐포하여 멋대로 관군을 멸족시켰는데

胡不收以膏齊斧 어찌 그를 잡아다가 처형하지 않았던가


[주D-006]천씨 : 초(楚) 나라의 성(姓)이다.

[주D-007]장자를……하였으니 : 장자는 관후장자(寬厚長者)의 준말로, 즉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가리키는데, 그가 처음 초 회왕으로부터 먼저 관중(關中)에 들어간 사람을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는 약속을 받고 항우(項羽)와 길을 나누어서 진(秦) 나라를 공략하여, 항우보다 먼저 관중에 들어가 진왕 자영(秦王子嬰)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관중을 조용히 평정하였던 일을 이른 말이다.
[주D-008]관군 :
초 회왕의 상장군(上將軍)인 경자관군(卿子冠軍) 송의(宋義)를 가리키는데, 그는 항우에게 기습 살해당하고 멸족(滅族)까지 당하였다.


嗚呼勢有大不然者 아 형세가 대단히 어긋난 것이 있었으니

吾於王而益懼 나는 회왕을 위하여 더욱 두려웁도다

爲醢醋於反噬兮 끝내 배신한 자에게 시해를 당하였어라

果天運之蹠盭 과연 천운이 크게 어긋났도다

郴之山磝以觸天兮 침강 가의 산은 우뚝이 하늘에 치솟았는데

景晻曖而向晏 햇빛은 침침하여 저물녘을 향하였고

郴之水流以日夜兮 침강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데

波淫泆而不返 물결은 넘쳐 흘러 되돌아오지 않도다

天長地久恨其曷旣兮 한스러워라 천지는 장구하여 언제 다하랴마는

魂至今猶飄蕩 그 넋은 지금까지도 떠돌아다니리라


余之心貫于金石兮 나의 충심은 금석을 뚫을 만하기에

王忽臨乎夢想 왕께서 갑자기 몽상에 나타났도다

循紫陽之老筆兮 자양의 노련한 필법을 따라

思螴蜳以欽欽 마음 설레며 공경히 사모하여

擧雲罍以酹地兮 술잔 들어 땅에 부어서 제사지내니

冀英靈之來歆 바라건대 영령은 내려와 흠향하소서


했다.’ 하였다.
그런데 조룡(祖龍)이란 진 시황(秦始皇)을 가리킨 말로서, 종직(宗直)이 진 시황을 세묘(世廟)에 비유한 것이고, ‘왕(王)을 찾아 얻어서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는 데의 왕은 바로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을 가리키는데, 처음에 항량(項梁)이 진(秦)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손자 심을 찾아서 의제(義帝)로 삼았으므로, 종직이 의제를 노산(魯山)에게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종직이 ‘양과 이리처럼 탐포하여 제멋대로 관군(冠軍)을 멸족시켰다.’고 하였는데, ‘양과 이리처럼 탐포하다.’는 것은 세묘를 가리킨 말이고, ‘멋대로 관군을 멸족시켰다.’는 것은 곧 세묘가 김종서(金宗瑞) 죽인 것을 가리킨 말이다. 그 ‘어찌 그를 잡아다가 처형하지 않았던가.’라는 것은 종직이 ‘노산이 어찌하여 세묘를 잡아 죽이지 않았던가.’의 뜻으로 말한 것이고, 그 ‘배신한 자에게 시해되었다.’는 것은 종직이 ‘노산이 세묘를 죽이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세묘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 ‘자양(紫陽)의 노련한 필법을 따라서 마음 설레며 공경히 사모한다.’는 것은 종직이 주자(朱子)로 자처하여 그의 마음에 이 부(賦)를 지어서 주자의 《강목(綱目)》에 비긴 것이었다.


그런데 김일손(金馹孫)이 그 글을 찬양하여 말하기를 ‘이것으로 충분(忠憤)을 부쳤다.’고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 대왕께서는 국가가 위의(危疑)한 즈음을 당하여, 간신(奸臣)이 난(亂)을 획책함으로써 화기(禍機)가 거의 일어날 무렵에 역도(逆徒)들을 죽여 제거함으로 인하여 종사(宗社)가 위태로웠다가 다시 편안해져서,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공업(功業)이 높고 높으며 그 덕(德)이 백왕(百王)에 으뜸가는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종직이 자기 문도(門徒)와 더불어 성덕(聖德)을 비난하고, 심지어는 일손으로 하여금 그런 글을 사서(史書)에다 속여 기록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생긴 일이겠는가. 남몰래 불신(不臣)의 마음을 품고서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내가 지금 생각하매 나도 모르게 참혹하고 두렵구나. 그 형명(刑名)을 의논하여 아뢰어라.”


그리하여 7월 27일에 반사(頒赦)하였다. 그 반사의 교지(敎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세조 혜장 대왕(世祖惠莊大王)께서는 신무(神武)의 자용(姿容)으로 국가가 위의(危疑)스럽고 뭇 간신(奸臣)들이 굳게 자리잡고 있는 때를 당하여 침착한 살핌과 슬기로운 결단으로 화란(禍亂)을 평정함으로써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절로 붙일 곳이 있게 되었으니, 그 성신(聖神)한 공덕(功德)은 백왕(百王)에 으뜸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종(祖宗)의 간대(艱大)한 사업에 광채를 더하고, 자손(子孫)들을 도와서 편안하게 하는 계책을 끼쳐줌으로 인하여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날의 태평 성대에 이르렀다.


그런데 뜻밖에 간신 김종직이 화심(禍心)을 품고 은밀히 당류(黨類)를 결합하여 흉악한 꾀를 부리려고 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래서 항적(項籍)이 의제(義帝)를 시해한 일에 가탁하여 이를 문자(文字)로 드러내서 선왕(先王)을 헐뜯었으니, 그 하늘에 닿는 죄악을 용서할 수 없으므로, 대역(大逆)으로 논죄하여 그를 부관참시(剖棺斬屍)하라.


그리고 그의 문도인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는 서로 간악한 붕당(朋黨)을 지어 같은 무리끼리 서로 도와서 그의 글을 충분(忠憤)이 격앙된 바라고 칭미(稱美)하여 이를 사초(史草)에 써서 먼 후세에까지 전하려고 하였으니, 그 죄는 종직과 같은 등급이므로, 모두 능지처참(凌遲處斬)하도록 하라. 김일손은 또 이목(李穆), 허반(許磐), 강겸(姜謙) 등과 함께 선왕께서 하지 않은 일까지 속여 꾸며서 서로서로 말을 전하여 그것을 사초에 기록하였으니, 이목, 허반은 모두 처참(處斬)하고, 강겸은 결장일백(決杖一百)하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여 극변(極邊)으로 보내서 노복으로 삼도록 하라.


표연말(表沿末), 홍한(洪翰), 정여창(鄭汝昌), 무풍부정 총(茂豐副正摠) 등은 난언죄(亂言罪)를 범하였고, 강경서(姜景敍), 이수공(李守恭), 정희량(鄭希良), 정승조(鄭承祖) 등은 난언(亂言)하는 것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으니, 모두 결장일백하여 유삼천리(流三千里)하도록 하라.


이종준(李宗準), 최보(崔溥), 이원(李黿), 이주(李胄), 김굉필(金宏弼), 박한주(朴漢柱), 임희재(任熙載), 강백진(康伯珍), 이계맹(李繼孟), 강혼(姜渾)은 모두 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결성하여 서로 칭찬하고, 혹은 국정(國政)을 비난하고 시사(時事)를 비방하기도 하였으니, 임희재는 결장일백하고, 이주는 결장일백하여 극변에 부처(附處)하라. 이종준, 최보, 이원, 김굉필, 박한주, 강백진, 이계맹, 강혼 등은 모두 결장팔십하여 원방(遠方)에 부처하되, 이 유배된 사람들에게는 모두 봉수정로간(烽燧庭爐干)의 역(役)을 정하도록 하라.


수사관(修史官) 등은 김일손 등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아뢰지 않았으니, 어세겸(魚世謙), 이극돈(李克墩), 유순(柳洵), 윤효손(尹孝孫) 등은 파직하고, 홍귀달(洪貴達), 조익정(趙益貞), 허종(許琮)허종은 갑인년에 이미 죽었으니, 필시 허침(許琛)일 것이다., 안침(安琛) 등은 좌천(左遷)하라. 그 죄의 경중(輕重)에 따라 모두 이미 처결하고, 삼가 사유(事由)를 가지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고하였다.


생각건대 나는 과매(寡昧)한 사람으로 간당(奸黨)을 제거하고 나니, 두려운 생각이 이미 깊은 한편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그러므로 지금 7월 27일 어둑새벽 이전까지의 강도(强盜), 절도(竊盜) 및 강상죄(綱常罪)에 관계된 죄인 이외의 죄수들에 대해서는 형(刑)이 이미 결정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은 자를 막론하고 모두 용서하여 석방하라. 이들에 대하여 감히 유지(宥旨) 이전의 일로써 서로 고어(告語)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 죄로써 벌줄 것이다.


아, 인신(人臣)은 군왕에 대하여 반역의 뜻도 품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들은 이미 부도(不道)의 죄를 받았으니, 천지(天地)가 풀리어 뇌우(雷雨)가 이르듯이 의당 새로운 은택을 널리 펴야 하겠으므로, 이와 같이 교시(敎示)하노니, 자세히 알아서 실천하도록 하라. ……”



홍치 17년 갑자(1504) 연산군 10년.


9월에 사화(士禍)가 재차 일어나서 김굉필, 박한주 등 여러 사람에게 가죄(加罪)하였다.


정덕(正德) 2년 정묘(1507) 중종 대왕(中宗大王) 2년.


죄를 입은 제현(諸賢)들의 원통함을 추후하여 신설(伸雪)하였다. 이 때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김흠조(金欽祖)·정충량(鄭忠梁), 대교(待敎) 이희증(李希曾)·김영(金瑛), 검열(檢閱) 권벌(權橃)·이영(李泳)·정웅(鄭熊)·윤인경(尹仁鏡)·윤지형(尹止衡)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무오년에 수사관(修史官)들이 한갓 사적인 혐오 때문에 공의(公議)를 돌아보지 않고 은밀히 대신(大臣)에게 촉탁하여 그의 노염을 돋구고, 유자광(柳子光)이 따라서 이를 창화하여 함께 의논해서 밀계(密啓)함으로써 끝내 대화(大禍)를 불러온 것이니, 이는 곧 은밀히 과실을 가리려다가 끝내는 가리지 못하고 도리어 과실이 당일에 폭양(暴揚)되어 만세 후까지 누가 미치게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만세의 사가(史家)의 법칙을 훼손시키고 한편으로는 임금의 사람 죽이기 좋아하는 마음을 열어놓았기에, 그 죄가 의당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인데 상(賞)이 도리어 미쳤으니, 신들은 몹시 분개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요즘에는 모두 무오년의 화(禍)를 경계하여 사기(士氣)가 매우 꺾이었습니다. 신들은 김일손 등을 애석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사가의 법칙이 이로부터 모조리 폐해짐으로써 만세의 공론(公論)이 없어져버릴까 매우 염려하는 바입니다. ……” 하였다.


그러자 전교하기를,

“김종직, 김일손 등 사련(辭連)으로 죄를 입은 사람들은 과연 애매한 점이 있으니, 그들을 복관(復官)시키고, 그 나머지는 모두 추증(追贈)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때의 추관(推官)인 윤필상(尹弼商), 노사신(盧思愼), 유자광(柳子光) 등에게 상사(賞賜)한 물품과 무오년에 사국(史局)의 일을 누설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기청(日記廳)으로 하여금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이 해에 밀양(密陽) 대동(大洞)의 구택(舊宅) 뒷산 경좌 갑향(庚坐甲向)의 언덕에 개장(改葬)하였다.
상(上)이 특명으로 그 부인에게 늠료(廩料)를 지급하고, 그 자손들을 찾아서 녹용(錄用)하도록 하여, 아들 숭년(嵩年)이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 동부 참봉(東部參奉)에 연해서 제수되었다. 그러나 숭년은 화를 당한 나머지 명리(名利)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모부인(母夫人)의 명령에 따라 사은(謝恩)을 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모친을 섬기면서 효성을 다하였으므로, 향인(鄕人) 및 사림(士林)들이 지금까지 칭도하고 있다.


참봉은 주부(主簿) 손순무(孫筍茂)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윤(府尹) 손영유(孫永裕)가 바로 그의 조(祖)이다. 아들 3인을 두었는데, 윤(綸)은 문행(文行)이 있었으나 요절하였고, 유(維)는 참봉 최필손(崔弼孫)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유(紐)는 지평(持平) 이신(李伸)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선생의 문집(文集) 초본(抄本) 20여 권이 모두 불타버렸으나, 오히려 남은 난고(亂稿)가 들보 위에 쌓여 있었는데, 가인(家人)이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 하여 이를 또 불 속에 던져버리자, 곁에 있던 사람이 활활 타는 불 속에서 1, 2편(編)을 꺼냄으로써 겨우 완전히 태워버림은 면하였다. 그래서 지금 보존된 것은 10분에 2, 3도 안 되는데, 선생의 생질 강중진(康仲珍)이 이를 상자 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무오년으로부터 22년 뒤인 경진년(1520, 중종15)에 읍재(邑宰)와 상의하여 판각(板刻)하도록 하였고, 남곤(南袞)이 서문(序文)을 지었다.


그리고 예조(禮曹)에서는 선생이 살았던 고을과 강도(講道)하던 곳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봄, 가을의 중월(仲月)이면 관(官)에서 치제(致祭)할 일로 의정부(議政府)에 보고하니, 의정부가 계청(啓請)하여 상이 윤허했으므로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밀양(密陽)의 예림서원(禮林書院), 선산(善山)의 자양서원(紫陽書院), 함양(咸陽)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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