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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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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길을 통한 불교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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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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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승불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소승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전한의 정치가에 대해서는 소승 (전한)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소승불교(小乘佛敎, 영어: Hīnayāna Bhuddism) 또는 히나야나(Hinayana)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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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BOsOvUQczqw 

 

 

https://www.youtube.com/watch?v=zmVLuy186BI 

 

 

https://www.youtube.com/watch?v=A88bCaPZp5U&t=5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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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승불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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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불교는 초기불교(初期佛敎)[3] 또는 근본불교(根本佛敎)라 하기도 한다.[4] 고타마 붓다 및 그의 직제자(直弟子) 시대의 불교를 근본불교(根本佛敎)라 하고 그 후의 것을 협의의 원시불교라 하는 설도 있다.[1] 근본불교라는 용어는 고타마 붓다의 진면목 또는 근본사상이 무엇인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이를 지칭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된다.[4]

원시불교의 특색은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이 직접화법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점에 있으나 실은 제자들에 의하여 구전(口傳)된 것이 고타마 붓다의 입적 후 정리된 것으로 그 확실성의 한계점을 긋기는 어렵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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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파불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부파불교(部派佛敎, 영어: early Buddhist schools)는 고타마 붓다가 반열반에 든 후 제자들 사이에 견해의 차이가 생겨 불멸 후 100년 경에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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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전통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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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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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금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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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편집]

제1회 결집[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제1회 결집입니다.

고타마 붓다가 반열반에 든 후 다음 해에 마하가섭의 주재로 왕사성 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제1회 결집이 열렸다. 아난(阿難)이 (經)을 독송하고 우바리(優婆離)가 (律)을 송출(誦出)하여, 원시불교의 기본 경전과 계율이 확립되었다. 아난이 독송한 경은 후대에 《아함경(阿含經)》이라고 불리게 되었다.[5]

대중부의 전승에 따르면, 제1회의 칠엽굴(七葉窟)에서의 결집에 참여하지 못한 여러 승려들은 부루나(富樓那)의 주재로 굴외결집(窟外結集)이라는 것을 열어 이의를 제기하였는데, 이와 같이 불교 교단의 밑바닥에서는 신구의 두 경향이 대립하였다.[6] 굴외결집에 의해 형성된 경전을 잡경(雜藏)이라 하였으며, 이 가운데는 대승 불교 경전의 전신(前身)이 된 《방광경(方廣經)》이 있었다.

제1회 결집 자체가 열린 적이 없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7][8]

제2회 결집과 근본 분열[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제2회 결집입니다.

고타마 붓다의 입멸 후 약 100년이 지나게 되자 계율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주장하는 비구들이 있어 논쟁이 일어났다.[9] 스리랑카의 편년체 역사서이자 남방불교의 자료인 《도사(島史 · Dipavamsa)》와 《대사(大史 · Mahavamsa》에 따르면, 동부 비구 승단에 속한 와지족의 비구가 계율에 대한 새로운 열 가지 안("십사 · 十事")을 승인해 줄 것과 이에 따라 계율을 수정할 것을 주장하였다.[10]

이에 인도 서부 마유라(摩偷羅)국의 비구였던 야사(耶舍)는 인도 동부와 서부의 700명의 장로(長老: 상좌 · 上座라고도 함)를 초청하여 바이샬리(Vaisali · 비사리 · 毗舍離)에서 제2회 결집을 열어 주로 율장(律藏)을 편집하고 교단의 통제에 힘을 기울였다.[11]

제2회 결집은 칠백결집 또는 비사리 결집이라고도 한다. 제2회 결집에서 동부 비구 승단이 주장하는, 계율에 대한 열 가지 새로운 견해("십사 · 十事")가 잘못된 것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것을 십사비법(十事非法)이라 부른다. 제2회 결집 당시에는 분열이 발생하지 않았으나, 남방불교에 대한 자료인《도사(島史 · Dipavamsa)》 등에 따르면, 그 후에 제2회 결집의 결정에 불복한 진보적인 동부 승단의 비구들이 1만명의 다수인을 모아 독자적인 결집을 열어 계율을 수정하였다. 이를 대결집(大結集)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로부터 이탈하여 대중부(大衆部)를 형성하였다.[11]

이와 같이 불교 교단은 계율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 산스크리트어: स्थविरवाद Sthaviravāda 스타비라바다, 팔리어: Theravāda 테라바다)와 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 산스크리트어: महासांघिक Mahāsāṃghika 마하상기카)의 둘로 분열되었다. 이를 근본 분열(根本分裂) 또는 근본이부 분열(根本二部分裂)이라 하며 상좌부와 대중부를 근본이부(根本二部)라 한다.[6] 근본 분열을 계기로 인도 불교는 부파불교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10]

한편, 근본 분열의 발생 계기에 대해서, 북방불교의 자료에서는 위에 기술된 남방불교의 내용과는 달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대의 학자들은 남방불교의 자료가 사실인 것으로 보고 있다.[10]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을 포함한 북방불교의 자료들에 따르면, 불멸(佛滅) 후 100년경 아소카왕의 치세 때, 마하데바(Mahadeva · 대천 · 大天)라는 진보파 비구가 교의에 관한 다섯 가지의 새로운 안을 주장하며 그것을 승인해 줄 것을 교단에 요구하였는데, 이 다섯 가지 안을 대천오사(大天五事)라 한다. 대천오사에 찬성하는 진보파의 대중부(大衆部)와 이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상좌부(上座部)로 양분되었다.[9][10]

부파의 성립과 지말 분열[편집]

근본이부의 분열이 가져온 분열의 기운은 교리상의 견해, 지도자간의 대립, 지리적 조건 등으로 인하여 더욱 심화되어 붓다의 입멸 후 약 200년 뒤에는 대중부 계통으로부터, 그리고 그 뒤에 이어서 상좌부 계통으로부터 교단의 파생적인 분열이 촉진되었다.[12] 이에 따라 서력 기원을 전후하는 시기에는 총 18-20개 정도의 부파가 형성되었다.[13]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 등의 북방불교의 자료에 따르면, 근본분열 후 약 200년 동안에 걸쳐 상좌부와 대중부 모두에서 부파적 분열이 거듭되어 총 18부로 나뉘었는데 이것을 지말분열(枝末分裂)이라 한다.[6] 근본분열에 의한 근본이부와 지말분열에 의한 18부를 합하여 총 20부의 부파를 소승20부(小乘二十部)라 한다.[6] 그 후 기원 전후에 새로운 대승불교(大乘佛敎)가 일어나게 되자 대승불교도들은 그때까지의 부파불교를 소승불교(小乘佛敎)라고 폄하하여 칭하였다.[2]

부파불교의 부파들[편집]

부파불교 시대의 여러 갈래로 분열하는 모습과 파의 이름 그리고 분파의 수에 관하여는 여러 설이 있다.[12] 대표적인 것으로는 남방불교의 설과 북방불교의 설이 있다. 스리랑카의 편년체 역사서인 《도사(島史, 팔리어Dīpavamsa)》와 《대사(大史, 팔리어Mahāvaṃsa)》에 기록된 남방불교의 설에 따르면 총 18부파로 분열되었다. 이에 비해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 등의 북방불교의 설에 따르면 총 20부파로 분열되었으며, 이 계통에서는 소승20부(小乘二十部)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남방불교와 북방불교의 설을 비교해보면 부파의 수도 다를 뿐만 아니라 어느 부파가 모체가 되어 분열되었는가에 대해서도 그 내용이 다르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 학자들은 두 설을 종합하고 다른 자료들을 보충하여 이들 두 전통적인 견해와는 다른 견해를 제출하기도 한다.

부파 발생의 주된 원인은 계율의 해석에 관한 학설 상의 차이에 있었지만, 학설보다는 지도적 장로(長老)를 중심으로 한 체제가 달랐거나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부파를 형성하는 일도 생겼다. 북방불교의 설에 따르면 대표적 부파로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 설산부(雪山部) · 독자부(犢子部) · 화지부(化地部) · 음광부(飮光部) · 경량부(經量部) 등이 존재하였다.[13]

연표: 불교 전통의 성립과 발전 (기원전 450년경부터 기원후 1300년경까지)v • d • e •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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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야사와 친구들의 귀의 - 불교신문

사진설명: 바라나시 장자의 아들 야사와 친구 54명이 출가해 승단 출범에 일조한다. 야사의 출가 장면을 그린 아잔타 석굴 제1굴의 벽화.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다섯 비구는 모두 아라한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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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의 변화를 본 부처님은 고집멸도 가르침을 설(說)했다. 마치 때 없는 흰 천이 잘 염색되듯이, 야사는 그 자리에서 먼지와 때를 멀리 여읜 법안(法眼)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았다. 야사의 출가와 깨달음 과정은 부처님과 유사하다. 부처님도 출가하기 전 극성스런 조건 속에서 호화롭게 살았다. 그러다 문득 잠자는 미희들은 추태를 보고 출가하기로 마음먹었다. 때문에 당시의 부유한 가문의 자제들이 부처님이나 야사와 비슷한 고뇌를 안고 있었다고 해석해도 무리는 없을 듯 하다.

야사가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있을 즈음. 야사의 어머니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별장에 올라갔다. 야사가 보이지 않았다. 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곧 장자(長者. 야사의 아버지)를 찾았다.

“여보! 야사가 보이지 않습니다.”

장자는 하인들을 사방으로 보내 야사를 찾았다. 자신도 아들을 찾아 이시파타나의 녹야원으로 갔다. 이윽고 장자는 버려져 있는 황금신발을 발견하고는 자취를 따라갔다.

부처님을 본 장자는 말했다.

“야사라는 아이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장자야! 그러면 여기에 앉아라. 그러면 그대 옆에 앉아 있는 아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장자를 위해 차례차례 말해주었다.

“보시를 실천하고 계율을 준수하면 하늘에 나게 된다. 여러 애욕에는 환난과 공허함과 번뇌가 있다. 애욕에서 벗어나면 큰 공덕이 드러난다.”

그리곤 곧바로 고집멸도의 가르침을 폈다.

마치 때 없는 흰 천이 잘 염색되듯이, 장자는 그 자리에서 먼지와 때를 멀리 여읜 법안을 얻었다. 법안을 얻은 장자가 부처님에게 말했다. “뛰어나십니다. 뛰어나십니다. 마치 뒤집어진 것을 바로 세우고 덮인 것을 벗겨내고, 미혹한 자에게 길을 가르쳐 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켜 눈 있는 자에게 형상을 보여 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여러 방편으로 법을 드러내셨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부처님께 귀의하오며, 법과 비구 승단에 귀의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저를 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귀의하겠습니다.” 장자는 삼귀의(三歸依)에 의한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동안 야사가 어느 틈엔가 옆에 나타났다.

“야사야! 너의 어머니가 슬픔에 빠져 있다. 어머니를 죽게 하지 마라.”

그 때 부처님이 말했다.

“장자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야사는 유학(有學)의 - 아직 더 배울 바가 있다는 뜻. 아라한은 무학(無學)으로 부른다 - 지견(智見)으로 이미 법을 보았으니, 마치 그대의 경지와 같다. 집착이 사라져 모든 번뇌에서 해탈하였다. 장자야! 그러한 야사가 세속으로 돌아간다면 예전처럼 애욕에 빠져 지내겠느냐?”

“부처님이시여! 그렇지는 않습니다. 야사는 마음의 집착이 사라져 모든 번뇌에서 해탈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큰 이익이며, 큰 행운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야사를 수종사문(隨從沙門. 걸식할 때 장로 비구를 수행하는 지위가 낮은 비구)으로 삼아주십시오. 그리고 오늘은 제가 공양을 올리고자 하오니 허락해 주십시오.”

부처님은 침묵으로 허락했다. 장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공손히 절하고는 오른쪽으로 돈 뒤 떠났다.

장가가 떠난 뒤 야사가 말했다.

“부처님!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오너라, 비구야!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야사는 이렇게 구족계를 받았다. 야사를 데리고 부처님은 그의 집으로 갔다. 야사의 어머니와 과거의 아내가 부처님께 와 공손히 절하고는 한쪽에 앉아 설법을 들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먼지와 때를 멀리 여읜 법안을 얻었다.

“부처님이시여! 저희를 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귀의하겠습니다.”

그들은 삼귀의에 의한 최초의 여성신자가 되었다.

한편 야사가 재가시절 사귀었던 네 명의 친구가 있었다. 그들은 크고 작은 부호의 아들들로서 비말라, 수바후, 푼나지, 가밤파티였다. 그들은 야사가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 푸른색.붉은색.흰색.검은색과 같은 순수색 외에 잡색(雜色)으로만 물들여 쓰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바로 가사가 잡색인 갈색을 의미하는 말이므로 가사라 한다 - 입고서 출가했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했다.

‘야사가 출가한 것을 보니 이는 하찮은 가르침이 아니다.’

네 사람은 야사가 있는 곳으로 갔고, 야사는 그들을 부처님께 안내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은 네 사람은 ‘먼지와 때를 머리 여읜’ 법안을 얻었다. 그들도 출가해 구족계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아라한은 열 한 명이 되었다.

이들과 함께 야사가 재가 시절 사귀었던 50명의 친구가 있었다. 그들은 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거나 그 다음 오래된 가문의 아들들이었다. 야사의 출가 소식을 들은 그들도 부처님을 찾아왔다. 가르침을 받은 그들은 ‘집착이 사라져 모든 번뇌에서 해탈’해 출가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아라한은 61명이 되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https://www.youtube.com/watch?v=bhhCbPM1QLM&t=67s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D%95%A8%EA%B2%BD

 

아함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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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阿含經)》은 불교 초기의 경전 모음이다.

"아함"이란 산스크리트어 낱말 아가마(āgama)의 음역(音譯)으로 법장(法藏) 또는 전교(傳敎)라고 번역(飜譯)된다.[1] "아함"이란 문자 그대로 ""전승(傳承)" 또는 "전승(傳承)한 가르침"이며, 스승에서 제자로 계승한 것을 뜻한다.[1][2] 즉, 《아함경》은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는 성전(聖典)을 가리킨다.[1] 실제로는 고타마 붓다와 그 제자들의 언행록이며, 원시 불교 연구의 근본 자료이다.[1]

후일 대승 불교가 일어나자 아함(阿含)은 소승(小乘)이라고 천칭(賤稱)되어 중국 등의 전통적인 불교에서는 그리 중시되지 않았으나 근래에 이르러 원전 연구가 활발해짐에 따라 팔리어 대장경의 《4부(四部)》와 한역 대장경의 《4아함(四阿含)》의 비교 연구에 의하여 원시 불교의 진의(眞意)를 구명하려는 경향이 생겨 뛰어난 성과를 가져왔다.[1]

 

https://namu.wiki/w/%EB%8B%88%EA%B9%8C%EC%95%BC

 

니까야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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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nikaya)의 본래 단어뜻은 모임, 모음인데 길이나 주제나 숫자별로 경들을 모았기 때문에 경전의 이름이 되었다.

보통 5부 니까야라해서 5개로 나눈다.

 

1. 디가 니까야 : '디가'는 길다라는 뜻이다. 즉, 긴 거 모음. 내용이 긴 만큼 자세하다. 34개
2. 맛지마 니까야 : '맛지마'는 중간이라는 뜻이다. 즉, 중간길이 모음. 중간길이의 경을 모아놓았다. 152개
3. 쌍윳따 니까야 : '쌍윳따'는 소들에게 하나의 멍에를 얹어 연결하다라는 뜻으로, 주제별로 연결하다라는 의미다. 주제별 경 모음. 56개 주제 2,904개
4. 앙굿따라 니까야 : 1부터 11까지 숫자별 모음. 가장 나중에 만들어졌다. 앞의 3개의 경 내용들을 숫자별로 분류한 거라 중복이 많다. ex) 4가지 속박은 4시리즈에
5. 쿳다까 니까야 : 15개의 독립된 경

사실 이런식으로 나눈 이유는 2600년 전인 석가모니 시절에는 기록을 위한 글이나 종이가 발명되지 않았기에 쉽게 전달하는 방법이 노래처럼 운율에 맞추어 외워서 불러야 했기 때문이다(인도의 베다도 마찬가지). 이것들을 모두 노래로 부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시간 배분상 길이별로 나눈 것으로 보인다. 처음으로 마하가섭과 아난다 등 500 아라한이 모여 이것을 취합한 제1차 결집 때 7개월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ODa4p8wjcsw 

 

 

https://www.youtube.com/watch?v=_IzTD7wqP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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