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상가[僧伽]는 하나의 수행 공동체이다. 또 단체는 하나의 지향점을 보며 함께 나아가는 조직사회이기도 하다. 다수 개개인들의 집합체인 조직사회는 조직의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한 별도의 장치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도(道)이든지 덕(德)이든지 법(法)이든지 어떤 객관적 지위를 담보하는 공증의 규칙이 있어왔고 있어야 한다. 이 기능을 불교에서는 계(戒, śīla)와 율(律, vinaya)이 담당한다. 여기서는 계에 한정해 살펴보자 쉴라(śīla), 곧 계(戒)는 불교적 실천도의 토대이자 정(定)·혜(慧)와 함께 3학(三學)의 하나이다. 또한 5분법신(五分法身)의 하나로 계신(戒身)·계품(戒品)·계온(戒蘊)이라고도 한다. 대승에서는 이것을 대표적 실천도인 6바라밀 또는 10바라밀 가운데 하나로 건립한다. 이러한 범주 설정은 곧 계(戒)가 불교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자각각타(自覺覺他)의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는 증거이다.
6바라밀의 여섯 가지 덕목들에서는, 우선 보시, 즉 "주는 것"을 강조하고 마지막 덕목으로 지혜(무분별지)의 완성을 말하고 있다.[1] 이들 여섯 가지 바라밀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마지막 여섯 번째인 반야, 즉 지혜(무분별지)이다. 다른 다섯 가지 덕목 또는 수행("오행 · 五行"")은 반야바라밀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에 따르면 보살행, 즉 보살의 행이란 지혜(무분별지)에 의거한 자비행(慈悲行)이다.[1]
사성제(四聖諦, 산스크리트어: catvāri āryasatyāni) 또는 사제(四諦)는 《아함경(阿含經)》에 나오는 원시 불교 가르침으로 불교 기본 교의 가운데 하나이다. "제(諦 · Satya)"는 진리 또는 깨우침을 뜻한다. 사성제는 "네 가지 높은 깨우침(Ārya: 높은, Satya: 깨우침)" 또는 "4가지 고귀한 진리(Four Noble Truths)"라는 뜻인데,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의 4가지 진리 또는 깨우침을 의미한다. 흔히 이 네 가지를 간단히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부른다.
1) 깨끗한 것에 공통되는 것[19가지] (1) 믿음(信 saddhā) (2) 알아차림(念 sati) (3) 양심(懺 hiri) (4) 수치심(愧 ottappa) (5) 탐욕 없음(不貪 alobha) (6) 성냄 없음(不嗔 adosa) (7) 중립(tatramajjhattatā) (8) 몸의 경안(輕安 kāyapassaddhi) (9) 마음의 경안(cittapassaddhi) (10) 몸의 가벼움(kāyalahutā) (11) 마음의 가벼움(cittalahutā) (12) 몸의 부드러움(kāyamudutā) (13) 마음의 부드러움(cittamudutā) (14) 몸의 적합함(適業性 kāyakammaññatā) (15) 마음의 적합함(cittakammaññatā) (16) 몸의 능숙함(練達性 kāyapāguññatā) (17) 마음의 능숙함(cittapāguññatā) (18) 몸의 올곧음(正直性 kāyaujukatā) (19) 마음의 올곧음(cittaujukatā)
2) 절제(위라띠, virati)[3가지] (20) 바른 말(正語 samā-vācā) (21) 바른 행위(正業 samā-kammanta) (22) 바른 생계(正命 samā-ājīva)
3) 무량(無量 appamaññā)[2가지] (23) 연민(悲 karuṇā) (24) 같이 기뻐함(喜 muditā)
1) 초선(初禪) : 여러 가지의 장애가 끊어지고 마음을 선정의 대상에 집중하여 마침내 감각적 욕망이 없어지고 불선법(不善法)을 떠남으로써 희열을 느끼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아직 대상에 대해 분별하고 사려하는 마음이 있어 고요히 가라앉지 못하는 단계다.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
2) 제이선(第二禪) : 각(覺)과 관(觀)이 없어져 분별적인 사유작용이 그치고 마음이 하나로 집중하게 되어 정(定)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
3) 제삼선(第三禪) : 제이선(第二禪)에서 생긴 희락(喜樂)의 감정까지도 버리고 정념(正念)과 정지(正知)로써 신체가 가볍고 편안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
4) 제사선(第四禪) : 와서는 신체의 편안함까지도 사라지고, 완전히 고락(苦樂)을 초월하여 마음의 평정이 더욱 순화(純化)되어 부동(不動)이 되는 사념청정(捨念淸淨)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
2. 무색계(無色界) 선정(禪定)의 단계
5)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 일체의 물질관념을 타파하고, 단지 끝없는 공(空)간만을 염(念)하여 마음을 집중시키는 상태이다.
6)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 공처(空處)의 심경을 더욱 진전시켜 식(識)이 무변하다는 사실을 염(念)하여 식(識) 중에 일어나는 차별상을 제거하는 수행이다.
7)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공간도 식도 초월하여 일체 존재(有)하는 것이 없다는 상태에 도달한다.
8)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 일체 공(空)이라고 하는 상(想)까지도 뛰어넘어 상(想)도 없고 무상(無想)도 없는 데까지 수련을 진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3. 멸진정(滅盡定, 滅受想定, 想受滅定, 想知滅定, nirodha samapatti)
9) 멸진정(滅盡定, nirodha samapatti) : 상수멸정(想受滅定, sannavedayita)이라고도 하는데 이 선정의 단계에서는 수(受)와 상(想)의 작용이 멸한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하게 되면 감각기관을 통한 느낌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즉 대립 분별적인 심작용인 상(想)과 고(苦)를 일으키는 원인인 수(受)로부터 벗어나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⑩ 다시 살펴보는 지혜(Paṭisankha Ñāṇa, Paṭisaṅkha Ñāṇa) [省察隨觀智]
⑪ 현상에 대한 평등, 초연의 지혜(Sankhārupekkhā Ñāṇa) [行捨智]
⑫ 벗어남에 이르는 관찰의 지혜 [出起觀智]
⑬ 진리에 따르는 지혜(Anuloma Ñāṇa) [隨順智]
⑭ 성숙(種姓 : 범부에서 성인으로의 변환)의 지혜(Gotrabhū Ñāṇa)
* 종성(種姓 gotrabhū)은 성인의 반열에 드는 순간의 마음 또는 열반으로 전향하는 첫 번째 마음이다. 즉 첫 번째 성자의 경지인 수다원도를 얻기 바로 전 찰나에 범부의 이름을 버리고 성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찰나를 종성(種姓 gotrabhū)이라고 부른다. 선(禪)의 증득의 경우, 이것은 욕계의 '범부 혈통'에 속하는 마음을 극복하고 드디어 고귀한 마음의 혈통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종성이라는 이름을 얻고, 첫 번째 도인 수다원의 도의 경우, 이 순간에 범부의 혈통에서 성자의 혈통으로 바뀌기 때문에 고뜨라부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리고 이 순간의 마음을 종성의 지혜(gotrabhū-ñāṇa)라 한다. 또 이 종성의 지혜는 수행자의 지혜가 도(magga)를 얻을 만큼 충분히 무르익었다는 뜻에서 성숙의 지혜라고도 한다.
(7) 지혜통찰의 청정(Ñāṇadassana Visuddhi) 지견청정(智見淸淨)
⑮ 도(道)의 지혜(Magga Ñāṇa)
⑯ 과(果)의 지혜(Phala Ñāṇa)
⑰ 되돌아보는 지혜(Paccavekkhana Ñāṇa) [廻光返照]
⑱ 깨달음에의 몰입 [果定]
⑲ 더 높은 단계의 도와 과로 깨달음의 단계로 전개되어 마지막으로 아라한의 깨달음의 결실이라는 최상의 목적에 이르게 된다.
* 정거천(淨居天) : 색계(色界) 제사선(第四禪)에서 불환과(不還果)를 얻은 성자가 태어나는 무번천(無煩天), 무열천(無熱天), 선현천(善現天), 선견천(善見天), 색구경천(色究竟天)이 있는데, 오직 청정한 성인만의 세계이므로 오정거천(五淨居天)이라 하고, 그곳에 사는 천신(天神. 곧 성자)을 정거천이라 한다.
* 성문사과(聲聞四果, 四向四果)
① 수다원(須陀洹):팔리 원어 소타판나(sotāpanna:전향)를 음사한 말로서 번역하여 예류(預流) 또는 입류(入流)라고도 한다. 세 가지 결박의 번뇌(我見, 懷疑正理, 行邪戒)를 끊고 범속한 생활에서 성스런 흐름에 들어간 사람을 가리킨다.
② 사다함(斯陀含):사카다가민(sakadāgāmin)의 음사이며 일래(一來)로 번역된다. 세 가지 결박의 번뇌뿐만 아니라 탐진(貪瞋 : 삼독심 중 탐심, 진심)의 둘도 약화시켜 이 세상에 한 번 돌아와 괴로움을 다하는 단계이다.
③ 아나함(阿那含):안아가민(anāgāmin)의 음사이며 불환(不還) 또는 불래(不來)라고 번역된다. 다섯 가지 결박(五下分結)의 번뇌(我見, 懷疑正理, 行邪戒, 貪, 瞋)를 끊고 이 세상에 옴이 없이 천상에서 열반에 드는 것을 뜻한다. 죽은 다음 색계나 무색계에 나고 거기에서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는 앞의 두 단계를 얻은 뒤 감각적 욕망과 그릇된 의지를 이겨내면서 얻게 된다.
④ 아라한(阿羅漢):일체의 번뇌(我見, 行邪戒, 懷疑正理, 貪, 瞋, 痴)를 끊고 현재의 법에서 그대로 해탈의 경계를 체득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깨달음에 이른 경지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자든 여자든 출가(出家)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단계이다. 불교에서 완전해진 사람, 존재의 참 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열반(涅槃) 또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을 일컬으며,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다시는 생(生)을 받아 태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번뇌라는 도적을 멸한 의미에서 살적(殺賊), 마땅히 공양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여 응공(應供), 미혹한 세계에 태어나지 않으므로 불생(不生), 더 배울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 악을 멀리 떠났으므로 이악(離惡)이라고 불린다. 특히 응공, 살적, 불생의 세 가지를 아라한의 삼의(三義)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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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도위(見道位)의 무루지인 미지당지근은 이지근의 수도(修道)를 획득하거나 혹은 견소단의 번뇌를 소멸하는 일에 대해, 수도위(修道位)의 무루지인 이지근은 구지근의 무학도를 얻거나 혹은 수소단의 번뇌를 소멸하는 일에 대해, 무학위(無學位)의 무루지인 구지근은 현법락주(現法樂住)의 열반을 얻는 일에 대해 각각 증상력이 있기 때문에 '근'으로 설정된 것이다. 그러나 미지당지근, 이지근, 구지근은 무루근인 신(信) 등 5근에 포함되고, 여근, 남근은 신근(身根)에 포함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17개 근(根)이다.)
(* 8정도의 원래순서는 [정견], [정사유]로 시작하는... [혜]...[계]...[정] 순서로 되어 있는데, 이는 수행 덕목 중 가장 중요한 [정견]이 먼저 바르게 갖추어져야만 수행이 제대로 된다는 측면에서는 올바른 순서이지만, 초보자입장에서는 [정견]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서는 먼저 [계정혜] 3학 순서로 단계적으로 밟아 나가면서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측면에서는 [계정혜]순서가 더 올바른 순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순서는 어떤 한 단계가 완전히 성취되어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닌 것이며, 비록 현재 수행 수준이 낮은 단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다음 단계로 진행해 나가면서 수행하고, 계속 반복 순환하면서 수행해 나감으로써 점차 나선형으로 전체 수행의 수준을 높여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수행이론 단계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
(* 무명과 갈애, 집착으로 업지음으로써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해 온갖 괴로움이 생기니, 사마타 선정수행 등을 통해 갈애, 집착을 일으키지 않고, 위빠사나 지혜수행을 통해 통찰지혜를 얻어 무명을 타파하여 탐진치(貪瞋癡)를 완전히 벗어버림으로써, 업지음을 회피하여 윤회,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해탈하여 열반적정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자 핵심입니다. ^^)
순관(順觀)으로 보면 12연기의 유전문은 무명(無明)을 조건(緣)으로 행(行)이 있고(起), 내지 노사(老死)가 있다는 것이고, 환멸문은 무명(無明)이 멸하면(因) 행(行)이 멸하고(果), 내지 노사(老死)가 멸한다는 것이다. 즉 무명에서 노사가 연기(緣起)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유전문이고, 무명이 사라지면 노사의 괴로움도 사라진다는 인과(因果)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환멸문이다.
역관(逆觀)으로 보면 12연기의 유전문은 노사(老死)(起)는 생(生)(緣)이 있기 때문이고, 내지 무명(無明)(緣)이 있기 때문이다는 것이고, 환멸문은 노사(老死)(果)를 없애려면 생(生)(因)이 없어야 하고, 내지 무명(無明)(因)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