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앞두고 벌어지는 좌의정 김종서와 수양대군간의 갈등이 작품의 배경이다.

한 관상쟁이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 작가의 개성적 시각이었다.

봉상시에서는 수양대군(1417 ~ 1468, 재위 1455~1468) 사후에 세조 [世祖] 라는 시호까지 부여했다.

제8대왕인 예종은 수양대군의 차남이었다.

조선조의 기틀을 완비한 제9대왕 성종은 수양대군의 장손자였다.

참고로 자녀수는 태종29명, 성종28명. 세종 22명 순이다.

[참고]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5962

조선의 제6대 국왕인 단종(端宗, 1441~1457, 재위 1452~1455)은 조선시대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비극적인 운명의 국왕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첨예한 권력 투쟁은 대부분 건국 초기에 빈발한다. 조선이 개창된 지 꼭 60년 만에 11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한 국왕은 권력의 공백이 빚어낸 투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단종의 운명을 사실상 결정지은 사건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단종 1) 10월 10일에 일어났다.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반 만이었다. 그것은 태종이 일으킨 제1․2차 왕자의 난과 함께 조선 전기의 가장 대표적인 권력 투쟁이었다.


정난의 과정과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수양대군과 한명회(韓明澮) 등은 황보인․김종서 등 주요 대신들이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격적으로 거사했고, 그들을 대부분 숙청했다.
정난의 성공으로 수양대군은 실권을 장악했다.

*예종 [睿宗](1450 ~ 1469):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다가 첫째아들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사망하자 1457년(세조 3)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468년에 즉위하였으나 재위 13개월 만에 사망했다.

*성종 [成宗] [1457 ~ 1494, 재위1469년 ~ 1494년]

아버지인 의경세자가 1457년에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세조의 둘째아들인 해양대군(海陽大君) 이황(李晄)이 왕위에 올라 조선의 제8대 예종(睿宗, 재위 1468~1469)이 되었다. 그러나 예종도 왕위에 오른 지 14개월 만에 죽자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와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등 훈구대신의 뜻에 따라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과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 이현(李琄) 등을 제치고 성종이 13세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1469년부터 1476년까지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가 섭정으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성종 본문 이미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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