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해설 2.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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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반야심경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준말이며,

금강경은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의 준말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이나 둘 다 똑같이 그 핵심은 반야바라밀다입니다.

본래는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인데,

한국에서는 보통 줄여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정확한 용어는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이기 때문에

반야심경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바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입니다.

해탈의 핵심이 바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이기 때문이죠.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반야(般若)와 바라밀다(波羅蜜多)의 합성어입니다.

반야와 바라밀다의 뜻을 알아보겠습니다.

1. 반야(般若)

반야(般若)란 지혜 를 말합니다. 통찰지입니다.

뭐가 반야이며, 뭘 통찰해야 그게 통찰지일까요?

뭐가 지혜인지 우선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지혜라는 것은 제법(諸法), 즉 삼라만상 모든 것들의 존재방식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의 반대는 무명(無明)인데 무명이란 곧 삼라만상의 존재방식을 잘못 알고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반야(般若), 즉 지혜/통찰지라는 것은, 모든 것의 존재방식을 제대로 알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 삼라만상 모든 것들의 존재방식은 어떤 것일까요?

그게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연기법(緣起法)이란 인(因)과 연(緣)이 서로 상호의존하여 모든 법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뜻 합니다.

연기법(緣起法)이란 가장 쉽게 표현하면 상호의존성을 뜻합니다.

상호의존성이란 독립적인 실체가 없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삼라만상에 독립적인 실체가 없을까?

바로 상호의존성 때문입니다. 이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무명(無明)이란 바로 이걸 모르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무명(無明)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엔 독립적인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왜 중생은 무명(無明)에 빠져서 고통을 당할까요?

왜냐하면 보여지는 것이 진짜처럼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냥 우리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면 언제나 진짜처럼 보여집니다. 그래서 속는 것입니다.

속기 때문에 모든 것에 실체가 있는 줄 알고, 집착을 하게 됩니다.

집착을 하게 되므로 온갖 고통이 생깁니다.

집착하는 것을 못 이루거나, 이뤘어도 결국 잃어버리게 되므로 온갖 고통이 발생합니다.

이런 것이 무명(無明)입니다.

이와 같이 중생의 무명(無明)이란 삼라만상의 존재방식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반야(般若)란 이와 반대로 모든 것의 존재방식을 제대로, 똑바로, 사실 그대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써놨듯이 모든 것의 존재방식이란 바로 상호의존성...즉 연기(緣起)입니다.

인과 연이 서로 의존해서 모든 것이 발생하므로, 거기에는 독립적인 실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존재건 사물이건 모조리 다 순간순간마다 변해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게 무상하게 변해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상호의존성 때문입니다.

변해가는 게 당연합니다.

반야(般若)란 곧 지혜/통찰지이며, 지혜/통찰지란 존재 및 사물의 존재방식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2. 바라밀다(波羅蜜多)

바라밀다(波羅蜜多)는 피안으로 건너간다/다다른다...라는 뜻 입니다.

한자로는 도피안(到彼岸)입니다.

바라밀의 종류는 엄청나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승의 육바라밀은 가장 중요한 여섯 가지 바라밀을 취합니다.

피안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핵심이 바로 반야(般若)입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입니다.

지혜라는 배에 타고, 열반이라는 섬에 도착합시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

아라한이 되는 것도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로 인한 것이고,

벽지불이 되는 것도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로 인한 것이고,

부처가 되는 것도 역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로 인한 것 입니다.

무상/고/무아의 삼법인이 있고, 공/무상/무작의 삼해탈문이 있고, 또 반야바라밀이 있습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입니다.

삼법인과 삼해탈문과 반야바라밀의 관계도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이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너무도 심오해서 말이나 언어로써 형용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공하여 모습도 없고, 작위도 역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중생은 언제나 어떤 모습이나 실체가 있는 것을 찾으려는 게 뼈에 박힌 습관입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더더욱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행하기 때문이죠.

불교의 깨달음이란 세속의 종교나 세속의 도 닦는 그런 것들과는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사실 접근이 어렵습니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실체가 없어 공하며, 그러므로 모습(相)이 없고, 그로 인해 작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걸 말이나 언어로써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마치 허공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보살님과 같은 위대한 성인들께서는

비록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가 말이나 언어가 끊긴 언어도단의 경지이지만,

말과 언어로써 중생들을 위해 설하십니다.

왜냐하면, 비록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가 말과 언어, 생각이 끊긴 경지라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말과 언어로써만이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기에 그걸 취해서 중생을 위해 설법을 하시는 것 입니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라는 것도 그냥 단어입니다. 말과 단어죠.

그러므로 말과 단어라는 것은 모조리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지, 달 그 자체는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용어는 우리 인간세계에서 쓰이는, 즉 서로 통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그 뜻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 팔만사천 가지의 법문을 하셨지만,

오로지 이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 중에 바로 이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가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가 핵심인가?

이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바로 부처님의 어머니이자, 부처님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불모(佛母)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반야심경 중간에 나와 있듯이,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정각)을 얻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반야바라밀이 완성된 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며, 그런 분이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어머니이자, 부처님의 스승이 바로 이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입니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로 인해 부처가 탄생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부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보살이 탄생합니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의 다른 말이 바로 “여(如), 진여(眞如), 법성(法性), 실제(實際)”등입니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행하는 방법이 바로 삼해탈문인 空/無相/無作입니다.

삼해탈문인 空/無相/無作에 접어들게 하는 것이 바로 삼법인인 無常/苦/無我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배울 때는 삼법인을 배우고, 삼해탈문의 배우고,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합니다.

무상/고/무아는 삼법인인데, 이 삼법인으로 해탈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도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무상/고/무아는 방편설법입니다.

그러므로 삼법인은 진제가 아니고 속제에 해당하는 진리입니다.

소승이나 대승이나 둘 다 똑같이 해탈의 문은 세 가지이며 바로 空/無相/無作입니다

그래서 니까야나 청정도론에서도 해탈의 근본은 바로 空/無相/無願임이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無作이 곧 無願입니다.

같은 뜻인데 어떤 사람은 作으로 변역했고, 어떤 사람은 願으로 번역했을 뿐이지 같은 뜻 입니다.

바램이란 곧 뭘 짓는다는 것이기 때문에 뜻이 똑 같습니다.

어찌됐건 삼법인인 무상/고/무아로써 해탈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해탈문에 접어들게 하는 통로입니다.

실제 해탈케 하는 삼해탈문은 空/無相/無願입니다.

대승이나 소승이나 금강승(티벳불교)이나 다 똑같이 해탈의 문은 空, 딱 하나입니다.

無相이나 無願은 空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空하여 相이 있을 수 없으니 無相이고, 相이 없으니 뭘 바랄 것도 없다는 것이 無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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