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
李白 (701년 ~ 7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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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태백(太白)이고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이백의 어머니가 태백성을 태몽으로 꾸어 이백을 낳자 자를 태백이라고 하였다.
청련향(靑蓮鄕 = 사천(四川) 면주(綿州) 창명현(彰明縣))에 살았기 때문에
호를 청련거사라고 하였다.
그는 벗들과 어울려 사천의 아름다운 산천을 두루 편력하였으며,
이러한 경험은 이백 시의 바탕이 되었다.
26세 때에는 벼슬을 하기 위하여 사천을 떠나
동정(洞庭), 여산(廬山), 금릉(金陵), 양주(揚州), 낙양(洛陽), 용문(龍門), 숭산(崇山), 태원(太原) 등지를 돌아다녔다.
이 무렵 운몽(雲夢)에서 재상을 지낸 허어사(許圉師)의 손녀와 결혼하여 다음해 딸을 낳았다.
그 사이 당의 명장인 곽자의(郭子儀)와 친교를 맺기도 하였으며,
산동으로 옮겨 임성(任城)에 거주하였다.
이때 배정(裴政), 장숙명(張叔明), 도면분(陶沔汾) 등과
조래산(徂徠山)에 모여 종일토록 음주, 작시하며 즐겨 놀았는데,
'죽계육일(竹溪六逸)'이라고 일컬었다.
이렇게 남북을 편력하는 동안에 이백의 시명(詩名)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절강에서 알게 되었던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이백은 당 현종의 부름을 받아 드디어 장안으로 갈 수 있었다.
그가 장안으로 가기 위해 문을 나서며 기뻐한 나머지
앙천대소(仰天大笑)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당시 그의 심정을 살펴 볼 수 있다.
현종은 이백에게 한림학사의 벼슬을 주었지만
장안에 머무는 3년 동안 자유분방한 생활은 여전하였다.
이 때에 태자의 빈객이었던 하지장(賀知章)은 이백의 시 <촉도난>을 읽다가
이백은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謫仙]"이라고 찬탄하였다.
현종은 이백의 시재를 좋아하여 늘 그를 불러 시를 짓도록 하였으며,
이와 같은 처우에 이백은 불만이 커 날로 광기에 음주가 심하였다.
황제의 총신인 고력사(高力士)에게 신발을 벗기도록 하고
양귀비에게 벼루를 받쳐 들게 하였다는 등의 일화도 남겼다.
이처럼 성정이 오만한 이백으로서는 권신들의 비방, 질시 등을 참을 수 없고,
높은 벼슬의 대우도 해 주지 않아 장안을 떠나기로 결심하게 된다.
위와 같은 이유 이외에도 유랑 길을 올라 강남, 강북을 두루 돌아다닌 것은
더 이상 탈속적인 자유분방한 생활을 장안에서는 즐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낙양에서 두보를 만난 이백은 고적(高適)과 함께 양(梁)에서 노닐기도 하였다.
두보(杜甫)는 「기이십이백이십운(寄李十二白二十韻)」에서
"옛 한 미친 손이 있었더니,
귀양 온 신선이라 했네.
붓을 놓으면 비바람이 놀래고,
시가 이루어지면 귀신이 운다.
(昔年有狂客, 號爾謫仙人.
筆落驚風雨, 詩成位鬼神.)"라고 하였다.
그는 귀신을 울릴 천재적 시인을 만난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하여
"술 취해 춤추며 양원의 밤을 즐기고,
사수의 봄을 노래한다.
(醉舞梁園夜, 行歌泗水春.)"
고 하였다.
그리고 두보와 헤어진 이백은 다시 유랑 생활을 하였는데,
"만리 주인이 없고,
한 몸 홀로 객이 되어
(萬里無主人, 一身獨爲客)"
라고 고적한 심경을 노래하였다.
또한
"어느 해에나 돌아갈 것인가?
비 오듯 눈물이 외로운 배에 떨어진다.
(何年是歸日, 雨淚下孤舟.)"
라고 향수를 달래었다.
이 무렵부터 더욱 정치에 대한 불만이 커 정치인들을 풍자한 시들을 쓰기도 하였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55세(천보(天寶)14, 755)의 나이로
안부인 宗氏와 함께 피난, 여산(廬山)에 은거하여 많은 시작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부인의 만류를 듣지 않고
이린(李璘 = 영왕(永王))의 막료가 되었으나,
이린(李璘)의 난이 실패로 끝나자 투옥되었다가,
야랑(夜郞 = 현 귀주(貴州) 동재(桐梓))으로의 유배 도중에 사면되었는데,
그의 나이 59세였다.
몸 붙일 곳이 없었던 이백은
당도(當塗 = 현 안휘(安徽) 당도(當塗))의 이양빙(李陽冰)을 찾아가 얹혀 살았다.
여전히 통음(痛飮)하는 날들을 보내다가 병을 얻어 사망하였는데 62세였다.
근처 채석기(采石磯)에서 물 속에 뜬 달을 건지려다가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뒤에 생겨난 전설이다.
이백의 일생은 참으로 평탄하지 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백 [李白]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2010. 3. 24.,
[참고]
李白(701~762) 年譜
* 明月(理想)↔현실(모순, 혼탁)
⇒ 이상, 교결(皎潔), 진솔(眞率)의 상징.
1. 蜀中期(1-26세) 성장 및 학습기
隋나라 말기 遠祖가 죄를 얻어 西域으로 유배당함. 약 100년후 당 神龍 初期(705) 父가 蜀으로 몰래 들어와 살았이라 추정함. 母는 漢人 또는 胡人說.
이백이 漢胡의 혼혈아라는 설도 있음.
蜀의 彰明縣 靑蓮縣에서 성장함. 호 靑蓮居士.
20세 전후에 협객 도사들과 어울려 민산에 은거함. 검술 무예에도 뛰어남.
成都 峨眉山 등지를 여행함. 초기시에 '峨眉山月' 나옴.
2. 제1차 漫遊期(26-42세)
고향 떠나 동정 상수 일대 여행. 金陵 揚州 거쳐 吳越 돌아 안륙에 정착.
前 재상 허어사(許圉師)의 손녀와 결혼.
산동에서 공소보(孔巢父)등 은사 6명이 조래사(徂來山)에 은거하며 술과 시로 나날을 보냄.
竹溪六逸.
10년 유력 후 浙江으로 남하하여 도사 吳筠 만나 염중에서 仙術 닦음.
3. 長安期(42-44세)
현종의 부름 받고 장안에 들어간 오균의 천거로 翰林學士가 되어 측근에서 현종 모심.
권세가 高力士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기게 했다는 등 일생 중 가장 호탕한 시기였음
4. 제2차 漫遊期(44-55세)
동로와 양원을 중심으로 한 만유와 失意의 표랑시기.
낙양에 온 두보를 일년간에 걸쳐 세차례 만남. 제2차, 제3차 때는 시를 창수함.
두보는 나이 33세로 이백보다 11년 년하임.
5. 晩年期(55-62세)
安綠山의 난 발발. 아들 安慶緖에게 피살당함. (후에 안경서는 史思明에게 피살당함).
永王 李璘의 토벌군에 참모로 참여했으나 이린이 그의 형 李亨에게 반역죄로 몰림.
이백은 투옥되고 산형 선고 받음.
지기들의 주선으로 감형되어 야랑(현 귀주서 동자현)으로 유배 당함.
巫峽까지 갔다가 대사면으로 방면됨(58세)
심양에 돌아와 李光弼이 역적 사조의 치는데 참여했으나 老病으로 좌절함.
이광필은 사사명에게 대승(759).
史思明은 아들 史朝義에게 피살 당하고(761) 사조의 자신은 후에 패배하여 자결함.
김영동 편역,동양문학의이해,중문,2004,pp.2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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