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호 드디어 정상이다. 볼거리는 좀...

여기서 남산의 얽힌 설화를 하나 소개..

남산(南山)과 망산(望山)의 유래

옛날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새벌 이라 했으며 새벌은 동이 터서 솟아오른 햇님이 가장 먼저 비춰주는 광명에 찬 땅이라는 뜻으로 아침 햇님이 새벌을 비추고 따스한 햇살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가 아름답고 온갖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여 언제나 복된 웃음으로 가득찬 평화로운 땅이었다.
이 평화로운 땅에 어느날 두 신이 찾아 왔다. 한 신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통붕퉁한 남신이었고, 또 한사람은 가름한 얼굴에 반짝 반짝 빛나는 눈동자, 예븐 웃음이 아름다운 여신이었다.
두 신은 아름다운 새벌을 둘러보고 " 야! 우리가 살 땅은 이곳이구나!" 하고 외쳤고, 이소리는 너무나 우렁차 새벌의 들판을 진동하였다. 이때 개울가에서 빨레하던 처녀가 놀라 소리나는 곳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산 같이 큰 두 남녀가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게 안니가? 처녀는ㄴ 겁에 질려 "산 봐라!"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다.
"산 같이 큰 사람을 봐라!" 라고 해야할 말을 급한 나머지 "산 봐라!" 하고 외쳤던 것이다. 갑자기 발아래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소리에 두 신도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발을 멈췄는데 그만 왠일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었다. 두 신은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일 수 없는 산이 되었는데 소원대로 이곳 아름답고 기름진 새벌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남신은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하고 강하게 생긴 남산이 되었고, 여신은 남산 서쪽에 솟아 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


정상에 있는 표지석에 세겨진 글귀... 백번보아도 지당한 말이다...

정상에 올라서자 힘이 쪼옥 빠져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었다. 완전 퍼저 버렸다.
표지석에 기대어 털석 주저 앉아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주저 앉았다기 보다는 거의 쓰러져 있었다고 하는게 맞는 표현일거다.

내려가기 전에 한곳을 더 찾아야한다. 바로 예전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바둑바위이다. 바둑바위는 상선암 뒤 마애석가여래좌상있는 큰 바위인 암봉 정상에 있는 것인데 처음엔 위치를 몰라 내려가는 길에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겨우 찾았다.



암봉 정상에서 바라본 경주 전경.
중앙 좌측 부근의 숲이 박혁거세왕를 비롯한 신라 초기 박씨 왕릉이 있는 오릉이고 그 밑에아주 작은 숲이 박혁거세왕이 태어났다는 나정이다. 중앙 우측 부근에 작은 산이 남산 자락의 일부인 도당산이다. 그곳에 도당토성이 있다. 도당토성 뒤로 넓게 퍼진 옅은 초록색이 월성(반월성)이다.

암봉정상에 내 또래의 남자가 체조를 하고 있기에 바둑바위가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모르겠다고 한다.
여기 저기 둘러 보았지만 어느게 바둑바위인지 모르겠다.

주변을 뒤지며 약간 위쪽으로 가니 왼 석물 하나가 보이고 그 뒤로


요런 요상한 곳이.... 바로 금송정터이다.
금송정은 이곳에 있던 정자인데 신라 35대 경덕왕때의 음악가인 옥보고가 가야금을 타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런 좁은 곳에 정자를 짖는 것도 힘들지만 가야금 타러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것이...ㅎㅎ


금송정터에서 바라본 상사바위 서쪽면


다시 바둑바위를 찾으러 돌아오니 국민체조하던 등산객은 보이지 않고 왠지 대단한 포스의 등산객 한분이..
지팡이이를 두 개나 들고 계신다.기명문학의 대빵이신 김용선생의"신조협려"에 보면 개방의 제자들이 고수일수록 마대 숫자가 많아지듯이. ㅋㅋ

워커 : 저 실례지만 바둑바위가 어느 건지 아세요?

등산객 : 바둑바위요? 지금 서 계신 곳이 바둑바위입니다.

워커 : ?

등산객 : 바둑바위라 해서 바둑판이 그려져 있는게 아니고 도교의 유입으로 신선사상이 널리..(중략)..
이곳 전체를 바둑바위라 부르죠. 도움이 돼셨는지요?

워커 : 감사합니다. 남산 공부 막 시작했는데 오기전에 이것저것 공부하고 왔어도 못찾은게 반입니다.

등산객 : 무얼 못 찾으셨는지요?

워커 : 선각마애불하고 부부바위, 거북바위입니다.

등산객 : 하하 혼자 오면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가 내려가는 길에 가르쳐 드리죠.

워커 : 아니 그런 수고를 일부러...죄송해서..

등산객 ; 아닙니다. 내려가는 길에 잠시 들리는 건데요..

워커 :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남산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신가 봅니다. (사실은 나도 몇 달 공부한 사람이야 ㅎㅎ)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던데요.

등산객 : 저도 많이 아는 건 아닙니다. 한 20년 남산에 오르다 보니.. 사실은 20년전에 윤경렬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남산에 처음 올라왔는데 남산이 너무좋아져 부산에서 전근 신청해서 경주로 이사를 왔었죠.

워커 : 유유윤... 윤경렬 선생님이요? 살아있는 신라인 윤경렬 선생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등산객 : 네 ^&^



윤경렬 (尹京烈)

"신라를 알고 싶으면 경주에 가 살아라. 겨레의 혼을 알고 싶으면 서라벌의 흙냄새를 맡으라. 그리고 한국 불교의 원류를 찾고자 한다면 경주 남산에 가 보아라" 라는 스승 고유섭 선새의 말에 따라, 윤경렬 선생은 30살의 젊은 시절, 함경북도 주을의 고향을 떠나 옛 신라의 서울 경주에 터를 잡았다. 그 후 선생은 평생을 신라문화의 아름다움을 연구하고 널리 알리는 일에 바쳐 세인으로부터 '살아있는 신라인'으로 불리웠다
살아서는 신라의 수문장이 되어 서라벌의 맥을 잇고자 노력했고, 죽어서는 남산의 수호신이 되리라던 선생은 한 달에도 몇 번씩 노구를 이끌고 남산을 오르내리다가 1999년 별세하시어 뭇사람들의 추모 속에 남사자락에 그 유골을 흩뿌리셨다.
윤경렬 선생은 1960년대 진홍섭씨와 함께 경주에 어린이 박물관학교를 세워 조상의 슬기를 가르쳐 온 공로로 외솔상(11회, 실천부문)을 받았으며, 풍속인형연구소인 고청사(古靑社)를 세워 풍속토우를 만들어 경주 민속품의 주맥을 이루어 오기도 했다.

저서로 경주남산고적순례 등 여러 권을 집필하셨다.


윤경렬 선생이 지으신 책 '겨레의 땅, 부처님의 땅'
남산 올라가기전에 이 책 열심히 보고 올라간다..ㅎㅎ

워커 : 사부!!!! ㅎㅎ ^&^
등산객 ; 무신 말씀을.. 그래 어떠세요..경주 남산 참 아름답죠?
워커 : 넵 사부 ^&^

사부께서 나를 데리고 내려가면서 이것 저것 윤경렬 선생님과의 옛이야기도 해주시고 내가 찾지 못한 곳도 직접 데려다 주셨다.


거북바위

보물 666호인 석불좌상에서 선각마애불 쪽으로 가다가 보면 보인다.
두마리의 거북이 형상으로 큰 거북이 등에 작은 거북이가 올라타 교미를 하는 형상이다.
솔잎에 가려 큰 거북이 대가리가 잘 안보인다. 겨울에 보면 진짜 같다..



선각마애불로 사부의 설명으로는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것으로 보여진다고 한다.



자세히 보니 통일신라 것에 비하면 많이 떨어지는 느낌이



바로 옆의 부부바위
자세히 보면 오래만에 상봉한 부부가 서로 껴 앉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도 사실은 카메라 각이 잘못되어 별로.. 나중에 다시 가서 찍어야겠다...ㅠ.ㅠ



흔들바위
사부께서 덤으로 보여주신 ... 달라붙어 밀어 보았는데 흔들리기는 커녕 꿈적도 안한다..



내려가면서 옛 절터와 선방터들을 하나 하나 찾아주시며 설명해 주셨다.


마지막으로 보여주신 바위..
뭔지 아시겠죠 ^&^

삼릉부근에서 사부와 헤어지기 아쉬워 존함을 여쭈었는데

사부 : 남산을 사랑하고 자주 오르시면 언젠가 또 만나겠지요 ^&^

하시며 우문에 현답으로 답하시며 배리 삼불 쪽으로 넘어가셨다.


드디어 출발 지점인 서남산 주차장부근으로 ..
시계를 보니 4시 30분이다..나도 정말 대단하다 10시 30분에 올라가기 시작해서

4시 30분에 내려오다니... 남들보다 거의 2배 반이나 더 걸렸다.

그래도 처음으로 금오봉 정상을 밟아보았다는 마음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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