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

*아래 글에서 별난 양반 연암 선생의 自贊 부분만 발췌해 보았다.

소완정(素玩亭)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 화답하다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연암집 제 3 권

혹은 여러 날 동안 세수도 하지 않고, 혹은 열흘 동안 망건도 쓰지 않았다. 손님이 오면 간혹 말없이 차분하게 앉았기도 하였다. 어쩌다 땔나무를 파는 자나 참외 파는 자가 지나가면, 불러서 그와 함께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느릿느릿 하는 말이 종종 수백 마디였다. 사람들이 간혹 힐책하기를, 세상 물정에 어둡고 얼토당토아니하며 조리가 없어 지겹다고 해도 이야기를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고 집에 있어도 손님이요 아내가 있어도 중과 같다고 기롱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느긋해하며, 바야흐로 한 가지도 할 일이 없는 것을 스스로 만족스러워하였다.

새끼 까치가 다리 하나가 부러져 짤뚝거리니 보기에도 우습길래, 밥알을 던져주었더니 더욱 길들여져 날마다 와서 서로 친해졌다. 마침내 그 새를 두고 농담하기를,

“맹상군(孟嘗君)은 하나도 없고 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구나!”

하였다. 우리나라의 속어에 엽전을 푼〔文〕이라 하므로, 돈을 맹상군이라 일컬은 것이다.

[주D-004]맹상군(孟嘗君)은 하나도 없고 : 돈이 한푼도 없다는 말이다. 맹상군은 전국(戰國) 시대 제(齊) 나라의 공자(公子)인데, 성은 전(田)이고 이름은 문(文)이다. 연암이 아래에 덧붙인 설명을 참조하면, 우리나라에서 엽전〔錢〕을 푼〔文〕이라고 했기 때문에, 맹상군의 이름 전문(田文)이 엽전 한푼〔錢文〕과 같다고 농담을 한 것이다.
[주D-005]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구나 :
평원군은 전국 시대 조(趙) 나라의 공자인데 문하(門下)에 식객이 수천 명이었다고 한다. 평원군의 이웃에 다리를 저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원군의 애첩이 그가 절뚝거리며 물 긷는 것을 보고 깔깔거리며 비웃었으므로, 평원군을 찾아와서 “선비들이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오는 것은 군께서 선비를 귀하게 여기고 첩을 천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가 불행히 병을 앓아 불구가 되었는데, 군의 후궁(後宮)이 저를 보고 비웃었으니 목을 베어 주십시오.” 하였다. 평원군이 승낙은 하였으나, 애첩의 목을 베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여겨 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다리 저는 이웃 사람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식객들이 반 이상이나 떠나가 버렸으므로, 마침내 평원군은 그 애첩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76 平原君列傳》 여기에서는 다리를 저는 새끼 까치를 ‘평원군의 식객’에다 비유한 것이다.


자다가 깨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자도 깨워주는 이가 없으므로, 혹은 종일토록 실컷 자기도 하고, 때로는 글을 저술하여 의견을 나타내기도 했다. 자그마한 철현금(鐵絃琴)을 새로 배워, 권태로우면 두어 가락 타기도 하였다. 혹은 친구가 술을 보내주기라도 하면 그때마다 흔쾌히 술을 따라 마셨다. 술이 취하고 나서 자찬(自贊)하기를,

[주D-006]철현금(鐵絃琴) : 금속 줄로 된 양금(洋琴)을 이른다. 유럽에서 들어왔다고 하여 구라철사금(歐邏鐵絲琴)이라고도 한다. 명 나라 말에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중국에 처음 소개하였는데, 조선에는 영조(英祖) 때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암의 증언에 의하면, 1772년 홍대용이 국내 최초로 이 철현금을 향악(鄕樂) 음정에 조율하여 연주하는 데 성공한 뒤 그 연주법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한다. 《熱河日記 銅蘭涉筆》
[주D-007]자찬(自贊)하기를 :
한문(漢文)의 문체 중에 찬(贊)이 있는데 대개 운문(韻文)이다. 작가가 자신에 대해 지은 찬을 자찬(自贊)이라 한다. 여기에서는 스스로를 칭찬한다는 뜻과 함께, 자찬을 지었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吾爲我似楊氏 오위아사양씨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은 양주(楊朱)와 같고
兼愛似墨氏 겸애사묵씨       만인을 고루 사랑하는 것은 묵적(墨翟)과 같고
屢空似顔氏 루공사안씨       양식이 자주 떨어짐은 안회(顔回)와 같고
尸居似老氏 시거사로씨       꼼짝하지 않는 것은 노자(老子)와 같고

[주D-008]양식이 …… 같고 : 안회(顔回)는 공자 제자로 도(道)를 즐거워하고 가난을 편안히 받아들여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論語 先進》
[주D-009]꼼짝하지 …… 같고 :
《장자》 천운(天運)에서 공자(孔子)가 노자(老子)를 만나고 와서 용을 만나 본 것과 같다고 감탄하자, 자공(子貢)이 “그렇다면 정말 꼼짝하지 않으면서도 용이 나타난 것과 같은 사람〔尸居而竜見〕이 있다는 말인가?” 하며 노자를 만나러 갔다고 하였다.

曠達似莊氏 광달사장씨       활달한 것은 장자(莊子)와 같고
參禪似釋氏 참선사석씨       참선하는 것은 석가(釋迦)와 같고
不恭似柳下惠 불공사류하혜 공손하지 않은 것은 유하혜(柳下惠)와 같고
飮酒似劉伶 음주사류령       술을 마셔대는 것은 유령(劉伶)과 같고
寄食似韓信 기식사한신       밥을 얻어먹는 것은 한신(韓信)과 같고

善睡似陳搏 선수사진박       잠을 잘 자는 것은 진단(陳摶)과 같고


[주D-010]공손하지 …… 같고 :
유하혜(柳下惠)는 노(魯) 나라 대부(大夫)로 이름은 전금(展禽)이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자신의 처신을 백이(伯夷)의 처신과 비교하여 “백이는 편협하고 유하혜는 공손하지 않으니, 편협한 것과 공손하지 않은 것은 군자가 따르지 아니한다.” 하였다.
[주D-011]술을 …… 같고 :
유령(劉伶)은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이다. 술을 매우 좋아하여 늘 술병을 지니고 다녔으며, 주덕송(酒德頌)을 지어 술을 찬양하였다. 《晉書 卷49 劉伶傳》
[주D-012]밥을 …… 같고 :
한신(韓信)은 한(漢) 나라 고조(高祖)의 명신(名臣)으로, 포의(布衣) 시절에 생계를 꾸려가지 못하여 항상 남에게서 밥을 얻어먹고 지냈다고 한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주D-013]잠을 …… 같고 :
진단(陳摶 : ? ~ 989)은 송(宋) 나라 때의 유명한 도사(道士)로 주돈이(周敦頣)의 태극도(太極圖)의 남상이 되는 선천도(先天圖)를 남겼다. 그는 한 번 잠이 들면 100여 일 동안이나 깨지 않았다고 한다. 《宋史 卷457 陳摶傳》


皷琴似子桑 고금사자상       거문고를 타는 것은 자상(子桑)과 같고
著書似揚雄 저서사양웅       글을 저술하는 것은 양웅(揚雄)과 같고
自比似孔明 자비사공명        자신을 옛 인물과 비교함은 공명(孔明)과 같으니
吾殆其聖矣乎 오태기성의호  나는 거의 성인에 가까울 것이로다

[주D-014]거문고를 …… 같고 : 대본에는 ‘鼓琴似子桑□戶’로 1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몇몇 이본들에는 공백 없이 ‘鼓琴似子桑戶’로 되어 있다. 그런데 자상호(子桑戶)는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인물로, 그가 죽자 막역지우(莫逆之友)인 맹자반(孟子反)과 자금장(子琴張)이 그의 시신을 앞에 두고서 편곡(編曲)하거나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상호가 거문고를 탔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는 같은 대종사에 나오는 자상(子桑)과 혼동한 듯하다. 즉 자상의 벗 자여(子輿)가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자상은 거문고를 타면서 자신의 지독한 가난을 한탄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하였다. 원문의 ‘鼓琴似子桑□戶’를 그 다음 문장과 연결시켜서 ‘鼓琴似子桑 □戶著書似揚雄’으로 구두를 떼고 누락된 글자를 ‘閉’로 추정하여 ‘鼓琴似子桑 閉戶著書似揚雄’으로 판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앞의 문장들이 대개 ‘□□似□□’의 5자구(字句)를 취하고 있는 점과 어긋난다. 또한 소순(蘇洵)이 ‘폐호독서(閉戶讀書)’한 사실은 있어도 양웅이 ‘폐호저서(閉戶著書)’했다는 기록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子桑戶’의 ‘戶’는 역시 연자(衍字)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D-015]글을 …… 같고 :
양웅(揚雄 : 기원전 53 ~ 기원후 18)은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책을 박람(博覽)했으며 사부(辭賦)를 잘 지었고, 빈천(貧賤)하면서도 부귀영달에 급급하지 않았다. 그가 당시 집권자들에게 아부하여 벼슬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절조를 지키며 《태현경(太玄經)》을 저술하고 있음을 보고 조소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해명하는 ‘해조(解謿)’를 지었다. 또한 《태현경》이 너무 심오하여 사람들이 알기 어렵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해명하는 ‘해난(解難)’을 지었다. 40여 세가 지나서 비로소 상경하여 애제(哀帝) 때 낭(郞)이 되고, 왕망(王莽)이 집권했을 때에도 벼슬이 겨우 대부(大夫)에 머물렀다. 이는 그가 세리(勢利)에 연연하지 않고 호고낙도(好古樂道)하면서 문장으로 후세에 명성을 이룰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로 인해 당시에 홀대를 당했으며 알아주는 이가 적었다. 유흠(劉歆)은 《태현경》을 두고 ‘후세 사람들이 장독 덮개〔覆醬瓿〕로나 쓸 것’이라고 조롱했다. 《漢書 卷87 揚雄傳》
[주D-016]자신을 …… 같으니 :
공명(孔明)은 삼국 시대 촉(蜀)의 재상 제갈량(諸葛亮)을 가리킨다. 제갈량이 융중(隆中)에서 농사지으며 은거할 때 양보음(梁甫吟)을 즐겨 부르면서 매양 자신을 제(齊) 나라의 재상 관중(管仲)과 연(燕) 나라의 명장 악의(樂毅)에게 견주었다고 한다. 《世說新語 方正》

但長遜曹交 단장손조교  다만 키가 조교(曹交)보다 모자라고
廉讓於陵 렴양어릉       청렴함은 오릉(於陵)에 못 미치니
慚愧慚愧 참괴참괴       부끄럽기 짝이 없도다


[주D-017]키가 조교(曹交)보다 모자라고 :
조교는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인물로 키가 9척 4촌이나 되었다고 한다. 조교가 맹자에게 “사람은 누구나 다 요순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조교가 다시 “문왕(文王)은 키가 10척이고 탕(湯) 임금은 9척이라고 했는데, 지금 저는 9척 4촌이나 되는데도 밥만 축낼 뿐이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든 노력만 하면 요순처럼 될 수 있다.”며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조교가 “제가 추군(鄒君)을 만나면 관사(館舍)를 빌릴 수 있을 것이니, 여기에 머물면서 문하(門下)에서 배웠으면 합니다.” 하므로, 맹자는 도(道)를 구하고자 하는 그의 뜻이 돈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도(道)는 대로(大路)와도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사람들의 병통은 구하지 않는 데 있을 뿐이니, 그대가 돌아가서 찾는다면 스승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면서 거절하였다. 《孟子 告子下》
[주D-018]청렴함은 …… 미치니 :
오릉(於陵)은 곧 오릉중자(於陵仲子)인 진중자(陳仲子)를 가리킨다. 진중자는 전국 시대 제 나라 사람으로, 형이 많은 녹봉을 받는 것을 의롭지 않다고 여겨, 초(楚) 나라의 오릉에 가서 은거하며 가난하게 살았으므로 오릉중자라 하였다. 당시 그는 3일 동안이나 굶주려 우물가로 기어가서 굼벵이가 반 넘게 파먹은 오얏을 삼키고 나서야 귀에 소리가 들리고 눈이 보였다고 한다. 《孟子 滕文公下》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201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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