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rEREXwJ2P9Q&t=2s
[황후역 - 문근영 · 이미연]
[명성황후] 미모의 이미연님이 물오른 연기로 장기간 시청자들의 시선을 강탈했습니다.
KBS2 2001.05.09. ~ 2002.07.18.방영종료 124부작
https://www.youtube.com/watch?v=CrP7VjqkMyk
을미사변 ▶ 1895년
사건명 ▶ 명성 황후 시해 사건
피해자 ▶ 왕후 민씨(명성 황후)
사건 장소 ▶ 임금이 사는 경복궁 안
사건 현장의 모습 ▶ 왕후 민씨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옷까지 벗겨진 目不忍見의 모습이었음.
장례와 홍릉 ▶ 2년후 1997년 11월 대한민국 국장으로 릉호도 동구릉> 홍릉수목원> 홍릉(남양주시)으로 제 이름을 회복함.(아래 동영상 참조)
* 민비는 친족 중심의 인사로 경복궁을 건설한 흥선대원군과 충돌했고 개화파 제거에도 열을 올려 그들과의 갈등도 이미 1894년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말하자면 민비는 정권실세였습니다. 고종은 대체 뭘 했는지 궁금해지네요. 유길준이 민비 제거작업에 동조한 것도 개화파를 제거하려는 민비의 의도 때문으로 보입니다. 친정 인물들과 그 동조세력으로 자신을 지키려는 민비도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고집불통으로 추정됩니다. 고집불통으로 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요.
그러나, 깨달음을 추구하고 인류를 배려하는 종교창시자들 같은 고집불통은 고무하고 선양할 일입니다. 고타마 붓다께서도 다른 수행자들과 함께 밥을 빌며 거지처럼 살아가다 정반왕과 갈등했지만 그 고집을 꺽지 않았지요. 유태인들이 그토록 오래 갈망하던, 세례 요한으로부터 기름 부은자가 된 예수그리스도 덕분에 한국도 교회 첨탑이 천지빛깔이잖아요. 대형 교회들은 시민들의 눈살을 찌프리게 하지만.
대형교회 다닌다고 구원받는 건 아니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천상세계에 가려면 이웃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일이지요.
구원이나 붓다가 되는 길은 타종교를 비난하거나 비방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이 신양하는 종교 창시자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라는데, 남의 심기를 건드려 화딱지나게 해서야 쓰나요? 자신의 인격만 손상될 뿐입니다.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는 명대사를 두고 역사적 시비를 거는 이들도 많지만, 드라마에서나마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도 되살리고 국격도 심정으로나마 좀 회복하여 앙양시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자는 데 왜 그 야단들인지 알 수 없어요.
역사가들도 아니면서 과거 역사의 사실여부를 따져서 어따 쓰실려구요? 개인간에도 과거 따져서 얻는 결론은 시비거리나 이혼밖에 더 있나요? 과거를 묻지 말라는 왕년의 유행가도 있잖아요? 그 노래가 유행했다는 것은 수많은 대중들이 그 노래의 가사에 공감한다는 증거물입니다. 신인가수의 배출은 물론 가수의 목소리에 빠져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래 <위키백과> 사전 기록은 다음과 같다.
"명성황후 폐위 음모와 실패[편집]
갑오경장 초기에 명성황후와 고종 폐위 음모를 꾸미던 대원군과 이준용은 먼저 명성황후 폐위를 전초작업으로써 착수하였다. 명성황후 폐서의 취지를 적은 문건이 1894년 6월 22일부터 흥선대원군에 의해 일본 공사 오토리에게 전달되었다."
"명성황후는 방 한 구석에 기대어 몸을 감추고 있다가, 낭인 오카모토 류노스케의 눈에 띄어 검에 베여 죽었다 한다.[66] 명성황후의 죽은 몸은 그 뒤 석유가 뿌려진 다음 불태워졌다. 이 때 명성황후의 나이는 43세였다."
注66) 신봉승, 《조선왕조 500년 : 24. 왕조의 비극》 (금성출판사 , 2010) p.390.
[참조]
《서유견문》(西遊見聞)은 1895년에 유길준이 미국 유학 중에 보고 배운 것을 국한문혼용체로 쓴 책이다.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구 문화 전 영역을 포괄하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백과사전적 저술이다.[1] 참고로, 우리나라 최조의 국한문 혼용으로나마 지식인들은 여태까지의 한문기록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qjP4B-GZsk
https://www.youtube.com/watch?v=z1OEuWw2UG8
https://www.youtube.com/watch?v=COPkbatcC5Q
https://www.youtube.com/watch?v=XlTxv92drgM
https://ko.wikipedia.org/wiki/%EB%AA%85%EC%84%B1%ED%99%A9%ED%9B%84
조수미 - 나 가거든(2001)(명성왕후 OST)
https://www.youtube.com/watch?v=bxR6_an7-EI
문근영 연기력 - 명성황후(2001) 1-2회
https://www.youtube.com/watch?v=9laDyaTgGiM
명성황후(2001) 편집본
https://www.youtube.com/watch?v=MrQ_7_gPxhY
https://www.youtube.com/watch?v=ZMEI2oQCKSs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84278&cid=47306&categoryId=47306
https://kydong77.tistory.com/1028?category=486747
* 포털이 몇 차례 바뀌다 보니 글씨 수정이 불가능하여 위 포스트를 재록합니다.
<민비(1851~1895)의 초상.
시해 당시 44세였지만 외모가 20대 같은 동안이라 낭인들이 찾아내기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내가 조선의 국모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 거주지인 진고개의 한 요정에서는 기생을 곁들인 질펀한
주연(酒宴)이 무르익고 있었다.
손님은 ‘여우사냥’에 나설 낭인들이었다.
술이 거나해진 낭인들은 구니모토의 지령에 따라 서너 명씩 조를 짜서 경복궁을 향해
진군해갔다.
같은 시각 남산 아래 <한성신보>사에 집결해 있던 낭인 30여 명은 용산을 거쳐 마포의
대원군 별장으로 향했다.
일본 병기창과 경찰서가 있는 용산에서는 몇 명의 일본 사복경찰이 일행에 합류했다.
별장에 당도한 낭인들은 기습으로 대원군을 감시하던 10여 명의 조선 순검을 포박하여
창고에 가둔 뒤 대원군을 깨웠다.
대원군은 거사의 취지를 백성들에게 알리는 고유문(告諭文) 초안을 재가한 뒤 오전 3시,
가마에 올랐다.
박은식(1859~1925)은 1915년에 편찬한 「한국통사」에서 당시 대원군의 매국적 행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대원군은 일본의 요구에 응해 저들의 꼭두각시가 되니, 춘추시대 조순이 왕을 주살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박은식은 1925년, 이승만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다.
일본 낭인들이 남대문에 이르러 합류하기로 한 일본군 수비대를 기다리는 동안 대원군은
낭인 두목 오카모도를 불러 주문했다.
“나의 입궐을 방해하는 무리는 모조리 베시오.
그리고 이완용, 이범진, 이경직, 안경수 같은 대신들도 모조리 베어버리시오.”
모두가 며느리 민비와 권력 다툼을 벌일 때 민비 편에 선 인물들로 대원군의 사감(私感)이
깃든 요청이었다.
그러나 오카모도는 쓰다달다 대답이 없었다.
약속시간이 지나도 수비대가 나타나지 않자 일행은 서대문 한성부청으로 옮겨 우범선이
이끄는 훈련대 제2대대와 합류했다.
길이 어긋나 도착이 늦어진 일본군 수비대 등이 모두 합류한 건 5시 30분경이었다.
일행은 대오를 지어 구보로 경복궁으로 향했다.
낭인 50여명-일본 경찰 10여명-일본 수비대-훈련대 제2대대-대원군 가마-일본 수비대
1개 대대-훈련대 제1대대 순이었다.
진고개에서 출동한 낭인별동대가 대원군의 가마 양 옆에서 호위했다.
일본군 수비대가 준비해온 사다리를 타고 담벼락을 넘어가자 조선 순검과 병사들은 들고
있던 총검을 던지고 다투어 도망갔다.
5시 50분,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광화문이 활짝 열렸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조선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1개 중대를 인솔하고 달려왔을 때는
역도들이 광화문을 거의 통과한 뒤였다.
“연대장이 여기 있다. 조선훈련대 장병들은 함부로 궁궐을 범하지 말고 내 명을 따르라!”
홍계훈의 호통에 역도에 가담했던 훈련대원들이 잠시 술렁였다.
일본군 장교가 홍계훈을 향해 총을 발사했고, 홍계훈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홍계훈이 쓰러지자 그가 이끌고 온 훈련대가 역도들을 향해 총격을 했지만 중과부적,
10분도 안 되어 전사자를 남긴 채 뿔뿔이 도망갔다.
홍계훈이 광화문 정면에 버티고 서서 수많은 낭인들을 죽이는 TV 속의 통쾌한 장면은 허망한
시청자를 위한 위안쯤으로 쳐두자.
홍계훈의 보고를 받고 함께 달려왔던 군부대신 안경수는 낭인들의 거점인 <한성신보>사로
도망쳤다.
역도들은 고종과 민비가 거처하는 건청궁으로 직행했다.
저항은 전혀 없었다.
일국의 왕궁이 한 줌의 역도들에게 무방비로 유린당하는 참담한 현장이었다.
대원군은 일본군 수비대 1개 소대의 호위를 받으며 강녕전에서 기다렸다.
역도들이 건청궁 뜰에 집결하자 오카모토가 외쳤다.
“여우를 찾아내어 베어버려라!”
건청궁은 이내 난장판이 되었다.
호위군사들은 눈에 띄는 대로 살해되었다.
속옷 차림의 궁녀들이 맨발로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아우성을 쳤다.
그 가운데는 피투성이가 된 세자(훗날 순종)빈도 있었다.
세자빈은 이 일로 홧병을 얻어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 11월, 32세로 요절한다.
그러나 TV 드라마 「명성황후」에서처럼 민비가 ‘내가 조선의 국모다’ 하며 낭인들에게
호통을 치는 극적인 장면 역시 연출되지 못했다.
민비의 최후는 당시 주한 영국 영사였던 힐리어(Walter Hillier)에 의해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는 당시 경복궁에 머물던 궁녀와 내관, 조선의 직함을 가지고 일하던 영국인과 미국인
등의 진술을 종합하여 이 보고서를 작성했다.
10~40년이 흐른 뒤 각각 자서전을 낸 낭인들이나 일본 군인들의 기록도 여럿 있지만,
이 기록이 가장 객관적이어서 자료로 택했다.
<건청궁에 침입한 민간복장의 일본인들은 왕과 왕세자를 구금한 뒤 일부가 왕비의 침실로
향했다. 궁내부대신 이경직의 급보를 받은 왕비가 막 달아나 숨으려던 순간이었다.
이경직은 두 팔을 벌려 왕비를 보호하려 했다.
일본인 하나가 칼을 내리쳐 이경직의 두 팔을 자른 뒤 왕 앞으로 끌고가 난도질을 하여
죽이는 한편, 사진을 들고 왕비를 찾던 다른 일본인은 이경직이 보호하려던 여인이 왕비임을
직감하고 여러 차례 찔러 죽였다.
이때 왕비와 용모가 비슷한 궁녀도 여럿 자살되었다.
일본인들은 왕비의 옷을 벗긴 뒤 칼로 신체 일부를 도려내는 등 차마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시신을 유린했다.
일본인들이 물러나자 일인들과 함께 난입했던 조선군들이 왕비의 시신을 이불에 말아 녹원
으로 끌고간 뒤 휘발유를 부어 불태웠다.>
그러나 민비를 살해한 낭인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낭인들은 서로 자신이 죽였다고 공을 내세웠고 일본 군경은 국제관계를 고려하여 발뺌을
했기 때문이었다.
여주 명성황후 생가 기념관에는 민비를 죽였다는 낭인 ‘도 가쓰야키’의 일본도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된 바 없다.
일본도에는 ‘一瞬電光刺老狐 - 단숨에 늙은 여우를 베었다’라는 문구가 자랑처럼 새겨져
있어 왜놈들의 광기를 대변해준다.
‘여우사냥’이 끝난 직후인 1895년 10월 8일 오전 7시, 일본공사 미우라는 경복궁으로 향했다.
고종은 안면이 창백한 채 그때까지 벌벌 떨고 서 있었다.
미우라가 조선말로 안부를 물었으나 고종은 대답조차 할 경황이 없었다.
지근에서 왕비가 죽고 알몸이 되어 낭인들에게 유린당한 뒤 불태워진 처지였으니 정신이
있었겠는가.
그때 대원군이 앞으로 나와 미우라에게 9배(拜)를 올렸다.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는 최고의 예였다.
권력을 되찾아준 은인이라고는 하지만 75세의 최고 권력자가 49세의 일개 외국 외교관에게
올리는 예 치고는 너무나 굴욕적이었다.
대원군에게서 일말의 우국충정이라도 찾아보고자 했던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대원군은 한낱 정동영이요 박지원이요 손학규였다.
미우라에게 9배를 올렸다는 기록 덕분에 故 유주현 선생의 역작 「대원군」을 교재로
대원군과 민비의 관계를 짚어보려던 계획을 바꾸어
동네 서점에 이수광 작 「명성황후」를 주문해놨다.
민비의 눈으로 대원군을 바라보려 함이다.
대원군은 안동김씨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다니며 자신을 철저히 낮추어
결국 자식을 왕위에 올린 깊은 지략이 있었고 경복궁 복원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남겼지만,
미우라에게 9배를 올렸다는 얘기를 읽고 나서 너무나 치욕스러워 내 머릿속의 역사사전에서
걸레로 벅벅 지워버렸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명성황후 복수기」의 저자 이종각의 기록이 철저한 고증을 거쳤을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월탄 박종화 선생과 함께 문체가 유려하신 유주현 선생의 글을 다시 읽어보려던 당초의
기대가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래는 별난 양식으로 만든 글쓰기 방법입니다.
우측 화살표를 클릭하면 그 줄[行]의 마지막 행까지 읽을 수 있습니다. 차례로 읽어가면 됩니다.
https://kydong77.tistory.com/1027?category=486747
조회자님들의 편의를 위해 <여우사냥 03>의 글을 아래에 옮겨 봅니다.
여우사냥 03
곰을 불러들인 ‘여우사냥’
1903년 일본에서 노윤명과 함께 우범선을 살해한 고영근은 조선 조정으로 보낸 서한에서 우범선을 ‘국모를 시해하고 그 몸을 소각한’ 대역죄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현장을 지켜본 여러 사람의 증언을 종합한 결론이었다.일본에 있는 우범선의 묘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박물관에는 ‘여우사냥’ 당일의 행적이 기록된 노트가 전시되어 있다.기록자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이 노트의 기록은 낭인그룹 중 하나인 <흑룡회>가 1933년에 발간한 「동아 선각지사 기전」
집필에도 인용되었다.‘우범선이 곤녕전에 도착하니 민비는 이미 칼에 찔려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우범선은 훈련대 하사관에게 민비의 시신을 이불에 말아 새끼줄로 묶게 한 뒤 건물 밖 녹원으로 옮겨 휘발유를 끼얹어 태우도록 시켰다.하사관은 타다 남은 뼈를 연못에 갖다 버렸다.’다시 ‘여우사냥’ 당일로 돌아가 1895년 10월 8일 오전 9시, 총소리에 놀란 군중 수만
명이 광화문 앞에 운집해 있었다.낭인들이 피 묻은 칼을 시위하듯 흔들며 왁자지껄 광화문을 빠져나오고 있었으나 군중들은 공포에 질려 쳐다보기만 했다.웨베르 러시아 공사와 알렌 미국 공사가 고종을 알현하기 위해 경복궁에 도착했을 때는 막 신임내각이 발표되고 있었다.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이범진, 군부대신 안경수 등 친러․친미파 인사들이 해임되고궁내부대신 이재면, 군부대신 조희연,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법부․학부 겸임대신 서광범 등
친일파가 대거 임명되었다.고종이 미우라 일본공사의 요구를 100% 수용한 인선이었다.이때까지 이완용은 친러파였다.미우라의 저지로 마냥 기다리다가 러시아와 미국 공사가 고종을 알현한 것은 정오가 지나서였다.그 사이 두 공사는 민비를 호위하던 미국 퇴역장성 등으로부터 전말을 보고받았다.고종의 좌우에는 미우라와 대원군이 버티고 서 있었다. 고종은 그때까지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해 용안은 창백했고 눈동자는 이리저리 겉돌고 있었다.드라마 「명성황후」에서 고종 역을 맡은 탤런트 이진우는 당시 고종의 표정을 참으로 실감나게
연기했었다.미국 공사 알렌은 고종 알현을 마치고 공사관에 돌아오자마자 사건의 전말을 워싱턴에 긴급 타전했다.이틀 뒤인 10월 10일, 미우라의 강압에 의해 고종은 민비를 ‘그 몸을 피해 나타나지 아니하는 죄’를 뒤집어씌워 폐위했다.허수아비 고종은 범인들 스스로 ‘고금의 역사상 미증유의 흉악사건’이라 자처한 마당에 왕비를 도망자로 몰아 폐한 것이다.한편, 경복궁을 나온 미우라가 일본공사관에 도착하자 우치다 영사가 찾아왔다.우치다가 ‘각하, 큰일 아닙니까?’고 하자 미우라는 태연하게 ‘괜찮아. 이로써 조선은 드디어 우리 것이 되었네.’ 했다.
“각하. 조선에 있는 일본인 대부분은 각하를 비롯하여 일본 관원 다수가 이번 일에 관련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일이 외국인들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관련 당사자들에게 굳게 함구령을 내릴 참일세. 재판에 나가더라도 말일세.”
이때 웨베르 러시아 공사를 필두로 재경 외국사절 일행이 일본공사관으로 찾아와 일본의 조선 내정 간섭을 항의했다.
“조선훈련대 일부 병사들이 훈련대 해산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우리는 조선 국왕의 요청에 따라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경복궁에 갔을 뿐입니다.”
그럴 듯한 미우라의 답변에 사절 일행은 아무 소득 없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우치다 영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미우라가 이등방문 총리에게 전말을 보고한 것은 사건 엿새 뒤인 10월 14일이었다. 열강의 항의와 국제적인 비난이 고조되자 일본 정부는 할 수 없이 진상조사에 나섰다. 주한 일본 경찰이 주모자 11명을 조사했지만 경찰 또한 ‘여우사냥’에 개입한 터라 조사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진실을 알고 있는 열강은 당연히 이 조사를 불신했다. 일본은 외교적으로 고립상태에 빠졌다.이등방문 총리는 10월 17일 미우라 공사를 해임하고 후임에 고무라 외무부 정무국장을 임명하는 한편, 미우라를 필두로 사건 관련자 56명을 일본으로 소환했다.일본에 도착한 일행 중 미우라 등 민간인 48명은 히로시마감옥에, 군인 8명은 군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들은 이듬해 1월에 열린 공판에서 증거 불충분이라는 미명하에 전원 석방되었다. 이때 일본은 민비의 서거에 조의를 표하기 위해 전 공사 이노우에를 파견했는데, 인사차 들른 이노우에에게 육군대신 오야마는 ‘여우를 사냥하고 곰(러시아)을 불러들였으니 얼마나 바보인가!’하고 질타했다.
국제적인 압력이 가중되자 일본은 10월 25일 조선에 주둔 중인 일본군을 철수하고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10월 30일에는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훈련대를 해산하고 친위대 1개 연대와 진위대(지방) 1개 연대를 창설했다.현재의 소령을 연대장으로 한 이 두 연대가 19세기 말 공식적인 조선 병력의 전부였다.지방 관아마다 소수의 군졸들이 소속되어 있기는 했지만 조선에는 이들을 국방에 동원할 법령도 조직도 연락망도 없었다.
훈련대가 해산되던 날 우범선은 한 일본인 집으로 숨어들었다가 나중에 일본으로 망명했다.11월 26일에는 민비를 복위시키고 대원군은 스스로 은퇴했다.12월 1일에는 민비가 시해된 사실을 공식 선포하고 국장을 반포했다.
김홍집 내각은 군부협판 이주희, 훈련대 부위 윤석우․박선 등 3명을 민비 시해의 주범으로 몰아 12월 30일 처형했다.박선은 우범선의 지시로 타다 남은 민비의 시신을 연못에 버린 불경죄로 처형되었다. 이 와중에 친러․친미파 정객들이 시위대 장병을 동원하여 고종 탈취를 기도했다가 실패했는데, 철군을 공언하고도 그때까지 미적거리고 있던 일본은 물실호기, 열강이 조선의 내정에 개입했다며 철군계획을 취소했다. 참으로 개떡 같은 조선의 국운이었다.
1896년 1월 20일 감옥에서 풀려난 미우라가 기차를 타고 도쿄로 올라갈 때, 각 역에는 수많은 군중이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도쿄역에서는 왜왕의 명을 받은 시종이 나와 미우라를 맞이했다.
“폐하께 심려를 끼쳐 대단히 죄송하네.”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해야 할 때는 해야 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찾아온 것은 ‘여우사냥’에 이용한 대원군에게 특별한 약속을 했는지를 알아오라는 분부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대원군과는 약속이고 뭐고 없다. 은거상태에 있던 그가 스스로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이다.
아무 약속도 없었다고 전하라.”
< 끝 >
- 이후에도 이종각의 「명성황후 복수기」는 300여쪽이 더 진행된다.
고종의 아관파천과 환궁, 대한제국 선포, 명성황후 추존, 을사늑약 체결 등 조선의 최후가 가파르게 펼쳐진다.
그리고 자객 고영근이 일본에서 민비 시해범 우범선을 추격하여 살해하는 과정도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밝혔듯이 역사는 다 아는 사실이요 고영근의 복수극에는 나 자신이 큰 흥미를 못 느껴 읽지도 않고 덮었다.
대신 「여우사냥」을 쓰면서 새로 생긴 관심에서 주문해놓은 이수광의 「명성황후」를 학수 고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조선의 아픈 역사를 곱씹으면서 나는 단종, 사육신, 사도세자만 생각했었다. 巫家에서 단종의 송비를 최고 영험을 가진 귀신으로 모신다는 얘기도 했었다. 왜 민비를 떠올리지 못했을까?
남편을 비명에 잃은 송비의 처지에는 의분을 느끼면서 왜 직접 당신의 목숨을 잃은 민비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을까? 더구나 막가파 같은 왜국의 낭인들에게 개처럼 비천하게 목숨을 잃고 시신이 능욕까지 당한 가장 억울한 죽음을.
사도세자의 죽음이 조선을 통틀어 가장 억울하다면 민비의 죽음은 가장 참혹하다.사도세자는 죽자마자 시호를 받고 세자의 예로 장례가 치러졌지만, 민비는 남편 고종에 의해 행방불명 선포와 함께 폐위되었다. 어느 모로 보나 그러려니 지나칠 사건이 아니다. 지금껏 이를 간과한 민망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명성황후」를 정독하고자 한다. 사랑방에 올려 공유하게 될지는 그 이후에 생각해보련다. -
https://www.youtube.com/watch?v=sJdR7BwWxbA
https://www.youtube.com/watch?v=FKWZv8SUyZg
https://www.youtube.com/watch?v=OLNDPNHv270
https://kydong77.tistory.com/1029?category=486747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C%A0%9C%EA%B5%AD_%EA%B3%A0%EC%A2%85
https://kydong77.tistory.com/1766
https://www.youtube.com/watch?v=jKlyJhPS-2Y
임선혜 - ‘울게 하소서’ [동영상 화면에 가사 이태리어:국역 제공]
https://www.youtube.com/watch?v=_OeU3dfEXRc
https://www.youtube.com/watch?v=kUTGmFKnSRw
https://www.youtube.com/watch?v=fktfxhTW62Y
https://www.youtube.com/watch?v=40kuaceEWe0
https://www.youtube.com/watch?v=RqjP4B-GZsk
윤시내 - 천년, 나는 19살이예요, 마리아, 난 모르겠네, 공연히
https://www.youtube.com/watch?v=aYP8pW2b3-0
윤시내 - 과거를 묻지 마세요 外
https://www.youtube.com/watch?v=Vjx-50JeD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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