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능호, <공자행단현가도(孔子杏壇絃歌圖)> (1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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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고전읽기 【1】 논어 #3. 공자의 제자들

논어를 읽으매 읽기 전 어떤 사람이 읽은 후에도 같은 사람이라면 그는 논어를 읽지 않은 것이다 - 정자 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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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사상은 '공자 아카데미'에서 완성된다. '논어 읽기'도 마찬가지다.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며 나누었던 대화들을 이해하는 지경에 이르면 <논어>를 다 읽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대화들은 공자의 삶과 사상을 알 수 있는 근거들이고, 다른 고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재미와 감동의 결정체다.   

공자는 젊어서 계씨 집안의 하급관리로 일한 적도 있지만 "나는 서른에 자립했다(三十而立, 위정 2.4)"는 말처럼 30대에 독자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즉, 그의 자립은 교사라는 직업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34세 때 외국(주나라, 제나라)에 나갔다 돌아와, 36세 때 본격적인 학원을 열고 50세까지 교육과 학문에만 투신했다. 예악을 가르치고 도덕과 인(仁)을 설파하며 그의 명성은 높아졌고, 제자는 해가 갈수록 늘어났다. 이렇게 성장한 제자들은 춘추시대 각국의 관리로 등용되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공자 아카데미는 지금의 고시학원 역할을 했던 셈이다. 물론 주목적은 그게 아니었지만.


사학은 공자가 자신의 독특한 인생 여정을 펼쳐나가는 길이었다. 이 길을 통해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주장과 사상, 이상을 선전하고 실천할 수 있었다. 공자는 사학을 통해 자신의 직업과 사업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도를 찾은 셈이다.

ㅡ 바오평산, <공자전> (이연도 옮김, 나무의 철학, 2013), pp.80-81.


이전까지의 모든 학교는 나라에서 세운 것이었고, 교육받을 권리는 귀족들에게만 있었다. 하지만 공자의 사학은 출신에 관계없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었다. 이것은 당시로서 파천황(破天荒)의 사건이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속수 이상의 예를 행하고 찾아오면, 내 일찍이 가르쳐주지 않음이 없었다."

子曰 "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 (술이 7.7)

자왈 "자행속수이상, 오미상무회언."

'속(束)'은 10개 묶음을 뜻하고, '수(脩)'는 육포이니  '속수(束脩)'란 포 한 묶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정도 선물만 가지고 와서 제자가 되겠다는 예를 취하면 공자는 누구든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심지어 이런 말도 했다.

子曰 "有敎無類" (위령공 15.39)

자왈 "유교무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르칠 때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


'유교무류(有敎無類)'. 이 네 글자야말로 2500년 전에 선포된 위대한 '보통교육'의 이념이다. 가르침에 있어 어찌 무리(類)를 나눌 수 있겠는가. 수강생을 차별하지 않는 공자 아카데미에는 귀족과 부자는 물론 빈민, 천민, 심지어 전과자와 불치병 환자도 있었다. 공자는 이런 제자들과 함께 방 안에서, 야외(杏壇)에서, 길 위에서 끝없이 토론했던 것이다.


공자의 수업은 오늘날 학교 수업과는 달랐다. 요즘 학교는 한 반에 수십 명의 학생이 함께 수업을 듣지만, 공자는 학생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때로는 방 안에서, 때로는 야외에서 다 같이 토론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 수는 2~3명 혹은 3~4명일 때가 많았다. 

ㅡ 바오평산, <공자전> (이연도 옮김, 나무의 철학, 2013), p.90. 


여기서 내가 주목한 포인트가 하나 있다. 공자의 언행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하는 점이다. 당시에는 종이가 개발되지 않아 필기에도 제약이 많았고, 평민 제자들의 문맹률도 높았으리라 예상되기 때문이다(중국은 지금도 문맹률이 높은 나라다). 즉석에서 기록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논어> 속 대화들에는 현장을 직접 보는 듯한 생생함이 넘친다. 신기한 일이다. 
불경은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난 뒤 '집결(結集)'이라는 과정을 통해 완성되었다. 500여 명의 제자들이 한 장소에 모여 부처의 말씀을 복기하고, 문서로 만들고, 승인했던 것이다. 몇 년, 길게는 몇 십 년이 걸리는 대작업 끝에 현장감은 떨어지지만 단정하게 정제된 경전이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논어>는? 공자 사후 제자들이 결집하여 문서화했을까? 나는 다음 대화에서 한 개의 중요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子曰 "予欲無言."

자왈 "여욕무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子貢曰 "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

자공왈 "자여불언, 칙소자하술언."

자공이 말했다.

"공자께서 말씀을 안 하시면 저희가 어떻게 기록하겠습니까?

子曰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양화 17.19)

자왈 "천하언재. 사시행언, 백물생언, 천하언재."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그래도 사계절이 운행하고 만물이 생겨난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말에 신중했던 공자의 태도를 설명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는 이 에피소드에서, 나는 '술(述)'이라는 한 글자에 꽂혔다. 그것은 분명 '기록하다'는 뜻이다. 공자의 강의가 결국 기록을 전제로 진행되었다는 증거다. 제자들이 즉석에서 필기했는지 강의 후 문서 정리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의 언행이 그 당시에 기록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고대사회의 문맹률을 감안해보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자 아카데미에는 어쩌면 읽기와 쓰기 공부를 위한 초급반이 따로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곳은 초등교육에서 공무원 입시까지 책임지는 종합학원이었다는 얘기다. 나는 갑자기, 그 동안 터무니없는 과장이라고 여겨졌던, 공자의 제자가 3천 명이었다는 말이 신빙성있게 느껴지며 무서워졌다 ㅋ


<논어>에 드러난 공자의 교육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다. 일단 제자들의 특성에 따라 가르침을 달리하는 '맞춤형 교육'이 눈이 띈다. 다음 대화를 찬찬히 읽어보자. 

子路問, 

자노문, 자로가 여쭈었다.

"聞斯行諸."

"문사행제."  "들은 것을 바로 실행해야 합니까?"

子曰 

자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有父兄在. 如之何其聞斯行之."

 "유부형재. 여지하기문사행지."

"아버지나 형이 계시면 어떻게 들은 것을 바로 실행할 수 있겠느냐?"

冉有問, "聞斯行諸."

염유문, "문사행제."

염유가 여쭈었다.

"들은 것을 바로 실행해야 합니까?"

子曰 "聞斯行之."

자왈 "문사행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들으면 바로 실행해야 한다."

公西華曰

공서화왈, 공서화가 여쭈었다.

 "由也問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유야문문사행제, 자왈 '유부형재', 

"유(자로)가 '들은 것을 바로 실행해야 합니까?'라고 여쭈었을 때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부형이 계시다면'이라고 하셨고,

求也問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赤也惑, 敢問."

구야문문사행제, 자왈 '문사행지'. 적야혹, 감문."

구(염유)가 '들은 것을 바로 실행해야 합니까?'라고 여쭈었을 때는

'들으면 바로 실행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니 저는 당혹하여 감히 여쭙습니다."

子曰 "求也退, 故進之. 由也兼人, 故退之." (선진 11.22)

자왈 "구야퇴, 고진지. 유야겸인, 고퇴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구는 평소 물러나는 성격이라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고,

유는 다른 사람을 앞질러 나가는 성격이라 물러서도록 한 것이다."

 

게다가 공자는 요즘 유행하는 '자기주도형 학습'까지 실행했다.

다음의 문장은 이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子曰 "不曰'如之何,如之何'者, 吾末如之何也已矣." (위령공 15.16)

자왈 "불왈'여지하,여지하', 오말여지하야이의."

학생 스스로 의문을 품거나 문제의식을 갖는 태도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공자는 제자가 그래야만 비로소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응을 보이면 차츰 더 깊이 들어갔고,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더 이상 가르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울 때)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 애태우지 않으면 촉발하지 않는다. 한 귀퉁이를 들어 보였을 때 (다른) 세 귀퉁이로써 반응하지 않으면 (더 이상) 반복해서 가르치지 않는다."

子曰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술이 7.8)

자왈 "불분불계, 부비불발. 거일우불이삼우반, 칙불복야."

아래의 문장은 '역부족(力不足)'이라는 말의 출전이 된 유명한 대화인데 <논어>에서 내가 가장 감동받은 대목 가운데 하나이다. 

염구가 말했다. "저는 선생님의 도를 기뻐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역부족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역부족인 사람은 중간에 그만 둔다. 너는 지금 미리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冉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畫." (옹야 6.12)

염구왈 "비불설자지도, 력불족야." 자왈 "력부족자, 중도이폐. 금녀화."

염구는 후에 노나라의 유력한 정치가가 되어 염자(冉子)라고도 불리게 된 인물이다. 공자와 한 세대 차이(29세 연하)였지만, 공자로부터 정사(政事)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가 슬럼프에 빠져 어느 날 '힘에 부친다(力不足)'고 고백하자 스승은 '지금 너 스스로 획을 긋고 있잖아(今女畫)'라는 한마디로 용기와 각성을 주는 장면이다. 나는 이 '획(畫, 여기서는 그림 '화'가 아니라 그을 '획'으로 읽어야 함)'이라는 한 글자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이렇게 위대한 스승을 가진 염구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런데 <논어>에는 공자가 염구를 꾸중하는 얘기들도 많다(계씨 16.1 등). 당시 노나라 실세인 계씨 집안에 재상으로 들어가 공문(公門)을 대표해 도덕정치를 행할 그가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면, 스승의 불호령이 곧바로 떨어졌던 것이다.

季氏富於周公, 而求也爲之聚斂而附益之. 子曰 "非吾徒也. 小子鳴鼓而攻之, 可也." (선진 11.17)

계씨부어주공, 이구야위지취렴이부익지. 자왈 "비오도야. 소자명고이공지, 가야."

계씨가 주공보다 부유한데도 구(염구)는 그를 위해 세금을 거두어 (재산을) 더욱 늘려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염구는) 우리의 무리가 아니다. 북을 울려 그를 성토해도 좋다."

공자는 제자들과 끊임없이 토론하고 논쟁했다. "인에 대해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말라(當仁, 不讓於師, 위령공 15.36)"는 말이 공자 학원의 모토였다. 나는 공자의 제자들이 '3년상'이 비현실적이라고 대드는 기록을 보며 놀랐고, 그걸 물리치는 공자의 꼰대같은 태도에 또 한번 놀랐다. 


宰我問,

재아가 여쭈었다.

"三年之喪, 期已久矣. 君子三年不爲禮, 禮必壞. 三年不爲樂, 樂必崩. 舊穀旣沒, 新穀旣升, 鑽燧改火, 期可已矣."

"삼년지상, 기이구의. 군자삼년불위례, 례필괴. 삼년불위락, 락필붕. 구곡기몰, 신곡기승, 찬수개화, 기가이의."

"3년상은 기간이 너무 깁니다. 군자가 3년 동안 예를 닦지 않는다면 예는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3년 동안 음악을 팽개친다면 음악도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묵은 곡식이 없어지면 새 곡식이 올라오며, 불씨 얻을 나무도 다시 바꾸는 데 1년이면 충분합니다."

子曰 

자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食夫稻, 衣夫錦, 於女安乎."

"식부도, 의부금, 어녀안호."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는 것이 너에게 편안하겠느냐?"

曰 "安."

 "안.",   "편안합니다."

 "女安, 則爲之. 夫君子之居喪, 食旨不甘, 聞樂不樂, 居處不安, 故不爲也. 今女安, 則爲之." 

"녀안, 칙위지. 부군자지거상, 식지불감, 문락불락, 거처불안, 고불위야. 금녀안, 즉위지."

"네가 편안하면 그렇게 하거라. 군자는 상을 치르는 기간에 기름진 것을 먹어도 맛을 모르고 음악을 들어도 즐거움을 모르며, 집에 있어도 편안하지 않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너는 편안하다고 하니 그렇게 하거라."

宰我出, 子曰

재아출, 자왈,  재아가 나가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予之不仁也. 子生三年, 然後免於父母之懷, 夫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 予也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 (양화 17.21)

"여지불인야. 자생삼년, 연후면어부모지회, 부삼년지상, 천하지통상야, 여야유삼년지애어기부모호."

"여(재아)는 인(仁)하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나서 3년이 지나야만 부모의 품을 벗어난다. (그러니) 3년상은 천하에서 통용되는 상례인 것이다. 여(재아)도 그의 부모로부터 3년 동안 사랑을 받았을까?"

제자가 논리적으로 따지자 공자는 노골적으로 못마땅해하며 일단 돌려보낸다. 그리고 연이어 다른 제자들 앞에서 그의 뒷담화(?)를 한다. 세상에... 이 에피소드는 나중에 <예기>에서 상례를 3년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됐다고 하는데, 지금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기도 하다. 하여간 공자와 제자들은 그저 예를 갖춰 설렁설렁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치열하고 솔직하게 논쟁했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은,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공자 학원의 그런 살아있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子曰 "二三子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是丘也." (술이 7.24)

자왈 "이삼자이아위은호. 오무은호이. 오무행이불여이삼자자, 시구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숨기는 게 없다. 나는 너희와 함께 하지 않은 일이 없다. 이것이 바로 나 구(丘=공자의 이름)다."

공자의 제자들에 관한 기록은 후대에 많이 만들어졌으나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중니제자열전>이 가장 중요하다. <논어>에서는 '선진'편이 대표적인데, 앞 부분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子曰 "從我於陳蔡者, 皆不及門也." (선진 11.2)

자왈 "종아어진채자, 개불급문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나를 따랐던 제자 가운데 이젠 아무도 없구나."


이것은 말년의 공자가 '진채지액(陳蔡之厄)'을 회고한 것이다. 주유열국하던 BC.489년, 공자 나이 64세 때 진나라와 채나라의 국경에 갇혀 모든 사람이 7일간 아무 것도 못먹고 쫄쫄 굶어야했던 끔찍했던 사건이었다. 당시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이 어느덧 아무도 남아있지 않음을 한탄하며 공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德行: 顔淵, 閔子騫, 冉伯牛, 仲弓. 言語: 宰我, 子貢. 政事: 冉有, 季路. 文學: 子游, 子夏. (선진 11.3) 

덕행: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 언어: 재아, 자공. 정사: 염유, 계로. 문학: 자유, 자하.



덕행에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있었고

언어에는 재아와 자공,

정사에는 염유와 계로가 있었다.

문학은 자유와 자하였다.

여기에서 거론된 제자들을 흔히 공자의 10대 제자, 공문10철(孔門十哲), '사과(四科)십철'이라 부른다. 이 가운데 안연, 자공, 계로의 세 제자가 가장 유명하고, 10대 제자에 유약, 증삼, 자장을 더해 13대 제자를 꼽는 이들도 있다. 13대 제자를 공자의 일생에 따라 3기로 나누고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공자는 항상 즐거웠다. 다혈질인 자로를 놀려대며 '너는 제 명에 못 살 걸'하며 놀려댈 정도로... 

곁에서 선생님을 모실 때 민자건은 공손하고 엄숙했고, 자로는 당당하고 굳셌으며, 염유와 자공은 자유롭고 편안했다. 공자께서는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유(자로)처럼 행동하면 제 명대로 못 살 것이다."
閔子侍側, 誾誾如也. 子路, 行行如也. 冉有子貢, 侃侃如也. 子樂. "若由也, 不得其死然." (선진 11.13)

끝으로 자로, 안회, 자공의 3대 제자에 관한 기록들을 따로 살펴보기로 한다. <논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도 이 세 명이다. 등장 횟수를 세어보면 자로는 41회, 자공은 38회, 안회는 21회라고 한다. (김시천, <논어, 학자들의 수다> (더퀘스트, 2016), p.38)



1. 자로(子路, 일명 중유)

<중유상(仲由像)> (대만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자로(子路, 일명 중유)는 공자보다 9살 아래인, 초창기 제자의 한 사람이다. 애초에 공자를 만났을 때 행패를 부리던 건달이었는데, 공자가 예로써 대응함에 감동하여 문하에 들게 되었다. 이후 공자는 "자로를 얻게 된 후부터 내 귀에 험담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했다. 무뢰배를 제자로 데리고 다니니 아무도 시비를 걸지 못했다는 뜻이다. 자로는 무인이자 야인으로 공자의 보디가드 역할을 하며 14년간 스승을 모시고 천하를 떠돌았다. 그 어려웠던 '진채지액' 시절 공자에게 대들었던 장면도 기록돼 있다.    

在陳絶糧, 從者病, 莫能興. 子路慍見曰 "君子亦有窮乎." 
진나라에 이르러 양식이 떨어지고, 따르는 제자들은 병이 나 아무도 일어날 수 없었다. 자로가 화가 나서 뵙고 여쭈었다. "공자도 곤궁해질 때가 있습니까?"

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위령공 15.2)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곤궁함을 굳게 버티지만, 소인은 곤궁해지면 아무 짓이나 한다."


자로는 공자에게 유일하게 따지고 대드는 제자였다. 이런 그를 통해 우리는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도 엿볼 수 있다. 누군가로부터 일자리 제안을 받으면 공자는 매번 흔들렸는데, 그때마다 자로가 일침을 가했다. 공자는 자로에게만은 솔직하게 본심을 털어놓기도 하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公山弗擾以費畔, 召, 子欲往. 

공산불요(인명)가 비읍(지명)을 근거지로 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나서 (공자를) 부르자, 공자께서 가시려고 했다.

子路不說, 曰 "末之也已, 何必公山氏之之也." 

자로가 언짢아하며 말했다. "가실 곳이 없으면 그만이지, 어찌하여 꼭 공산씨에게 가려고 하십니까?"

子曰 "夫召我者, 而豈徒哉. 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 (양화 17.5)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자가 어찌 헛되이 나를 불렀겠느냐? 만약 나를 써주는 사람만 있다면 나는 그곳을 동주(東周)로 만들 것이다!"

佛肹召, 子欲往, 
필힐(인명)이 부르자 공자께서 가시려고 했다.

子路曰 "昔者由也聞諸夫. 子曰'親於其身爲不善者, 君子不入也.'

佛肹以中牟畔. 子之往也. 如之何." 

자로가 말씀드렸다.

"예전에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스스로에게 나쁜 짓을 한 자에게 군자는 가지 않는다'.

필힐은 중모(지명)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선생님은 가시려 하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子曰 "然, 有是言也. 不曰堅乎, 磨而不磷. 不曰白乎, 涅而不緇. 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 (양화 17.7)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그런데 견고한 것은 아무리 갈아도 닳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흰 것은 아무리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내가 무슨 조롱박이더냐? 어찌 매달아놓기만 하고 (물을 떠서) 먹을 수도 없단 말이냐?"


공자께서 남자(인명)를 만나자 자로가 달가워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맹세하며 말씀하셨다. "내가 부당한 짓을 저질렀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
子見南子, 子路不說. 夫子矢之曰 "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 (옹야, 6.28)

남자(南子)는 위나라 영공의 부인으로, 대단한 미녀였지만 소문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집요하게 요청해 결국 공자가 만나고 왔는데, 자로는 스승이 미인계에 넘어간 것 같아 불만이 많았다. 그런 자로에게 공자가 아무 일 없었다며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장면이다.

공자 아카데미는 3단계였는데, 초급반은 '입문(入門)', 중급반은 '승당(升堂)', 그리고 고급반은 '입실(入室)'이었다. 말 그대로 학원문을 처음 들어오는 게 '입문'이고, 좀 더 지나면 대청마루에 올라 수업을 들으니 '승당'이라 하였고, 더 지나면 스승과 토론하기 위해 방에 들어가니 '입실'이라 불렀던 것이다. 다음은 우리에게 그런 사정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로의 일화다.

子曰 "由之瑟奚爲於丘之門." 門人不敬子路,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자로)가 거문고를 어찌하여 내 집 문 앞에서 타느냐?"

(그 뒤로) 문인들이 자로를 공경하지 않았다.

子曰 "由也升堂矣, 未入於室也." (선진 11.15)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는 이미 대청에 오른 사람이다. 다만 아직 입실하지 못했을 뿐이다."


위 일화에 대한 나무위키의 설명. 역시 나무위키다 ㅋㅋㅋㅋ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자로는 후에 반란군을 맞아 싸우던 중, 갓의 끈이 끊어지자 '군자는 죽는 순간조차 갓을 벗어선 안된다(君子死, 冠不免)'며 갓끈을 다시 묶고 당당하게 싸우다 전사했다고 한다. 자로의 전사 소식을 들은 공자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2. 안회(顔回, 일명 안연)

<안회상(顏回像)> (대만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안회(顔回, 일명 안연)는 공자보다 30세 연하의 어린 제자였지만, 공자가 가장 아끼고 인정했던 인물이다. 공자는 그 많은 제자들 가운데 안회를 최고로 쳤다. <논어>에는 편애에 가까운 공자의 찬사가 여러 번 나온다. 안회에 대한 공자의 믿음과, (앞서 소개한) 자로의 캐릭터를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재미있는 기록이 하나 있다.

공자께서 안연에게 말씀하셨다.

"등용되면 나아가 일을 하고, 써주지 않으면 은거한다. 오직 나와 너만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로가 (샘이 나서) 여쭈었다.

"선생님께서 3군의 대군을 이끌고 나가신다면 누구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고 맨몸으로 강을 건너다 죽어도 후회없는 사람(즉 너같은 사람), 나는 함께 할 생각이 없다. (내가 함께 할 사람은) 반드시 일에 임해서 두려워하고 계획을 잘 세워서 성공하는 (안연같은) 사람이다."

子謂顔淵曰 "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有是夫." 

子路曰 "子行三軍, 則誰與."  

子曰 "暴虎馮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 (술이 7.11)   

안회는 빈촌 출신으로 '단표누항'의 주인공이다.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도를 즐기는 현인의 모습에 공자는 일찍부터 박수를 보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질구나, 회(안회)야! 한 덩어리 밥과 쪽바가지 물로 누추한 골목에 살면서도, 남들은 그 시름을 견디지 못하는데 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구나. 어질도다, 회야!"

子曰 "賢哉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 (옹야 6.11)

또한 안회는 '습진(拾塵, 먼지를 집어든다는 뜻)'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스승 공자를 부끄럽게 만든 이 고사가 <논어>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여기서 함께 읽어 볼 만하다.   

공자가 진채지액을 겪을 때의 일이다.

풀국도 못 먹고, 7일 간 쌀 한 톨 먹지 못하고 낮잠을 잤다. 안회가 쌀을 구하여 밥을 지었는데, 밥이 거의 익을 무렵 (배고파 초조한) 공자가 멀리서 보니 안회가 솥에서 밥을 한 줌 떠서 먹고 있었다. 얼마 뒤 밥이 다 되어 공자에게 진지를 올리니

(삐친) 공자는 못 본 체하고 거짓으로 말하기를

"방금 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뵈었다. 깨끗한 이 밥으로 제사를 먼저 지내야겠다."

그러자 안회가 대답하기를,

"안됩니다. 좀 전에 재가 솥으로 들어가 밥이 좋지 않게 되어 버려야겠기에 제가 한 줌 걷어 먹었습니다(배가 고파 몰래 먹은 게 아님)." 하였다.

이에 공자는 탄식하며

"믿을 것은 눈인 데도 눈을 오히려 믿지 못하고, 의지할 것은 마음인 데도 마음을 오히려 의지할 수가 없구나!"라고 하였다.

ㅡ <여씨춘추> 권17, 심분람(審分覽) 임수(任數)


孔子窮乎陳蔡之間, 藜羹不斟, 七日不嘗粒, 晝寢. 顏回索米, 得而爨之, 幾熟. 孔子望見顏回攫其甑中而食之. 選間, 食熟, 謁孔子而進食. 孔子佯爲不見之. 

孔子起曰, 今者夢見先君, 食潔而後饋. 

顏回對曰, 不可. 嚮者煤室入甑中, 棄食不祥, 回攫而飯之. 

孔子歎曰, 所信者目也,而目猶不可信, 所恃者心也, 而心猶不足恃

안회는 무엇보다 공자에게 인(仁)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철저하고 흔들림 없는 성격이었다. 공자의 칭찬일색이 재미없게 들릴 지경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회는 그 마음이 석 달 인(仁)을 어기는 법 없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하루나 한 달일 뿐이다."

子曰 "回也, 其心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옹야 6.7)

선생님께서 자공에서 물으셨다.

"너와 안회 중에 누가 더 나으냐?"

자공이 대답했다.

"제가 어찌 감히 안회를 바라보겠습니까? 그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아는 정도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안회만 같지 못하지. 나와 너는 안회만 같지 못하다."

子謂子貢曰 "女與回也孰愈."

對曰 "賜也何敢望回. 回也 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

子曰 "弗如也. 吾與女弗如也." (공야장 5.9)

주유천하 도중 광나라 땅에서 위험천만했던 순간이 있었다. 위기를 겪고 다시 만났을 때, 안회는 스승을 감동시킬 잊지 못할 명언을 한다.

공자께서 광나라에서 갇히게 되었을 때 안연이 뒤처졌다가 겨우 쫓아왔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

안연이 말했다.

"선생님께서 살아 계신데, 제가 어찌 감히 죽을 수 있겠습니까?"

子畏於匡, 顔淵後.

子曰 "吾以女爲死矣."

曰 "子在, 回何敢死." (선진 11.23)

하지만 결국 안회는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의 죽음 앞에서 공자가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天喪予, 天喪予, 선진 11.9)"를 반복하며 통곡한 얘기는 유명하다. 그리고 그 뒤에도 공자는 계속 그를 그리워하고 아까워했다.

공자께서 안연에 대해 말씀하셨다.

"애석하구나. 나는 그가 나아가는 것은 보았어도, 멈춘 것은 본 적이 없다."

子謂顔淵, 曰 "惜乎. 吾見其進也, 未見其止也." (자한 9.21)

계강자(인명)가 물었다.

"제자들 중에 누가 학문을 좋아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안회라는 자가 있어 학문을 좋아했으나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어, 지금은 없습니다."

季康子問,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선진 11.7)

* 똑같은 이야기가 '옹야 6.3'에도 나오는데, 이때 질문하는 이는 '노애공'임


안회는 공자의 평가 속에서 주로 등장할 뿐, 정작 본인이 남긴 말은 별로 없다. 귀한 대사 가운데 하나가 스승 공자에 대한 평가다. 나름 큰 울림이 있어 마지막에 옮겨 놓는다.
 
안연이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파고들수록 더욱 견고하구나. 바라보면 앞에 계시다가 어느새 뒤에 계신다. 선생님은 차근차근 사람들을 이끌어주시고, 문(文)으로써 나를 넓혀주시고, 예로써 나를 단속해주시니 (공부를)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가 없다. 이미 나의 재주를 다 쏟아부어 일어선 것 같은데 선생님은 더욱 우뚝 서있으니 비록 따르고자 해도 어떻게 따라야 할 지 모르겠구나."

顔淵喟然歎曰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競吾才, 如有所立, 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 (자한 9.11)




3. 자공(子貢, 본명은 단목사)

<단목사상(端木賜像)> (대만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자공(子貢, 본명은 단목사)은 안회와 비슷한 연배의 2세대 제자인데, 다음 두 가지 의미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첫째, 공자 학단의 경제적인 후원자 역할을 했다.
둘째, 공자 사후에 기록을 정리하며 <논어>의 기초를 세웠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상인들의 이야기를 따로 묶은 <화식열전>이 있는데, 자공은 거기에 두 번째로 등장할 정도로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는 공자의 제자로 있는 동안에도 투자를 계속해 재산을 불려나갔다고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회(안회)는 거의 도를 터득했지만 자주 쌀통이 비었고, 사(자공)는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재산을 불려나갔는데 그의 예측은 대개 적중했다.
子曰 "回也其庶乎屢空. 賜不受命而貨殖焉, 億則屢中." (선진, 11.19)

주유천하 시기에 공자의 여비를 부담한 사람도 자공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공자는 14년 간의 순례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을 것이다. 최악의 시간, 공자가 "시경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데 저 들판에서 헤매고 있구나'라고 했는데 나의 도가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이냐? (詩云 '匪兕匪虎, 率彼曠野' 吾道非邪? 吾何為於此, 공자세가)"라며 탄식의 질문을 던진 이들도 결국 자로, 안회, 그리고 자공 세 사람이었다.

<논어>를 읽으며 떠오르는 자공의 이미지는 매우 똑똑하고, 남의 마음을 잘 읽는 인물이다. 그의 질문이나 대답은 항상 반짝인다. 앞서 본 '스승님이 말씀을 안 하시면 저희가 어떻게 기록하겠습니까(양화 17.19)'도 자공의 질문이었고 '제가 어찌 감히 안회를 바라보겠습니까? 그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압니다(공야장 5.9)'도 그의 답이었다. 이런 일화도 있다.

염유가 말했다. "선생님께서 위나라 임금을 위해 벼슬을 하실까?" 자공이 말했다. "좋습니다. 제가 여쭤보지요." 들어가서 여쭈었다.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엣날의 현인이시다." "원망했습니까?" 말씀하시길 "인을 추구하여 인을 얻었는데, 또 무엇을 원망했겠느냐?" 자공이 나와서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벼슬하지 않으실 겁니다."
冉有曰 "夫子爲衛君乎." 子貢曰 "諾. 吾將問之." 入曰 "伯夷叔齊何人也." 曰 "古之賢人也." 曰 "怨乎." 曰 "求仁而得仁, 又何怨." 出曰 "夫子不爲也." (술이 7.15)
 
배경지식 없이도 이해가 되는 에피소드다. 같은 제자이며 선배인 염유는 전혀 알 수 없는 스승의 마음을 자공은 몇 마디 질문으로 알아내고 척척 답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과유불급'이란 말도 자공의 질문에서 비롯된 고사다. 자공이 자기보다 어린 후배 둘을 거론하며 스승의 마음을 테스트한 사건이었다.  

자공이 여쭈었다.

"사(자장)와 상(자하) 중에서 누가 더 낫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는 지나치고(過), 상은 미치지 못한다(不及)."

자공이 여쭈었다.

"그렇다면 사가 더 낫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過猶不及)."  

子貢問 "師與商也孰賢."

子曰 "師也過, 商也不及."

曰 "然則師 愈與."

子曰 "過猶不及." (선진 11.16)

'유(猶)'가 '같다'는 뜻임을, 그리하여 '과유불급'의 의미는 '지나침=못미침'이지 '지나침≤못미침'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자. 3년 전부터 내가 강조해 온 내용이다^^

노나라 애공 16년(BC.479), 공자가 73세 나이로 죽었다. 제자들이 모여 장사를 지내고 3년상을 치렀다. 그리고 3년 뒤, 모두 떠났으나 자공은 그대로 남아 무덤 가에 여막을 짓고 3년을 더 지냈다. 그러면서 혼자서 스승의 기록들을 정리했다. 지금의 <논어>는 아마 그때 기초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자공이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더 아래 제자들과 노나라 사람들이 자공 주위로 모여들어 함께 공자를 기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촌락을 이루어 '공자마을(孔里)'이라 하였으니, 지금 취푸에 세워진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살아서 별일 없었던 공자는 이렇게, 죽어서 영원한 별이 되었다. 제자들과 함께...

 

www.youtube.com/watch?v=ecDmsiCUg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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