祭芬皇寺曉聖文
維年月日。求法沙門某。謹以茶菓時食之尊。致供于海東敎主元曉菩薩。
伏以理由敎現。道藉人弘。逮俗薄而時澆。乃人離而道喪。
師卷一六第五張旣各封其宗習。資亦互執其見聞。
至如慈恩百本之談。唯拘名相。台嶺九旬之說。
但尙理觀。雖云取則之文。未曰通方之訓。
唯我海東菩薩。融明性相。隱括古今。
和百家異諍之端。得一代至公之論。
而況神通不測。妙用難思。塵雖同而不汚其眞。
光雖和而不渝其體。令名所以振華梵。
慈化所以被幽明。其在賛揚。固難擬議。
某夙資天幸。早慕佛乘。歷觀先哲之閒。
無出聖師之右。痛微言之紕 繆。
惜至道之陵夷。遠訪名山。遐求墜典。
今者雞林古寺。幸瞻如在之容。鷲嶺舊峯。
似値當初之會。聊憑薄供。敢敍微誠。
仰冀厚慈。俯垂明鑑。
『대각국사문집』 卷第十六
분황사 원효 성사에 대한 제문
모년 모월 모일에 구법사문(求法沙門) 모某는 삼가 다과(茶菓)와 시식(時食)의 제물을 갖추어
해동교주(海東敎主) 원효 보살에게 제사를 올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理)는 교(敎)를 통해서 드러나고 道는 사람에 의해서 넓혀집니다.
그런데 시속(時俗)이 요박(澆薄)해지면서 사람이 도를 떠나 道가 없어졌습니다.
스승 된 사람들이 각 종파의 교리만을 고집할 뿐 아니라, 제자들도 서로 자기의 견문에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자은(慈恩)의 백본(百本(의 담론(談論)12)을 보면 오직 명상(名相)에만 얽매여 있고,
태령(台嶺)의 구순(九旬)의 주장13)을 보면 단지 이관(理觀)만 숭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비록 본받을 만한 글이라고 하더라도 원만하게 회통한 가르침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 해동 보살만이 성상(性相)14)을 융회하여 밝히고 고금을 한데 포괄하여
백가의 이쟁(異諍)의 단서를 화합하고 일대의 지공至公의 논의를 얻었습니다.
여기에 또 신통을 측량할 수 없고 묘용을 헤아릴 수 없었으니, 더 말해 뭐하겠습니까.
티끌과 같이 해도 그 진여는 더러워지지 않고, 빛을 부드럽게 해도 그 실체는 변하지 않습니다.15)
그래서 그 아름다운 명성이 중국과 인도까지 떨치고, 그 자비의 교화가 이승과 저승까지 미쳤으니,
이를 찬양함에 있어 어디에도 비교하기가 어렵습니다.
모某는 다행히 숙세(夙世)의 인연으로 일찍이 불승(佛乘)을 사모하여 선철(先哲)들의 사이를 두루 살펴보았으나
우리 성사(聖師)보다 뛰어난 이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언(微言)이 잘못 전해지는 것을 통탄하고,
지도(至道)가 무너진 것을 애석히 여기면서 멀리 명산을 방문하고 없어진 저술들을 널리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계림(雞林)의 고사(古寺)에서 다행히도 살아 계신 듯한 성사의 모습을 뵙고 보니,
취령(鷲嶺)의 구봉(舊峰)에서 부처님 당시의 회상(會上)을 만난 것만 같습니다.
애오라지 변변치 않은 제물에 기대어 감히 미천한 성의를 바치오니,
바라옵건대 두터운 자비심으로 밝게 굽어 살펴 주소서.
『대각국사문집』 卷第十六
ko.wikipedia.org/wiki/%EC%9D%98%EC%B2%9C
의천(義天: 1055년 10월 30일(음력 9월 28일) ~ 1101년 10월 28일(음력 10월 5일))은 고려시대의 왕족 출신 승려, 작가이다. 자는 의천(義天), 속성은 왕(王), 이름은 석후(釋煦) 또는 후(煦)이며, 호는 우세(祐世), 흔히 대각국사(大覺國師)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시호이다.
ko.wikipedia.org/wiki/%EC%9B%90%ED%9A%A8
원효(元曉, 617년 ~ 686년 4월 28일(음력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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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芬皇寺曉聖文
維年月日。求法沙門某。
謹以茶菓時食之尊。致供于海東敎主元曉菩薩。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 법을 구하는 승려인 저는
삼가 차, 과일 계절 음식을 제물로 하고
해동교주 원효보살님께 제사를 올립니다.
伏以理由敎現。道藉人弘。
逮俗薄而時澆。乃人離而道喪。
엎드려 생각하건대, 이치는 가르침으로 나타나고,
도리는 사람에 힘입어 넓어지는데,
지금은 풍속이 경박해지고 시대가 타락한 지경에 이르러
사람이 떠나가 도리가 손상되었습니다.
師卷一六第五張旣各封其宗習。資亦互執其見聞。
스승이라는 이들 또한들은 각기 그 종파의 습성 안에 갇혀 있고
제자들 또한 자기네 견문을 서로 고집합니다.
至如慈恩百本之談。唯拘名相。
台嶺九旬之說。但尙理觀。
현장(玄奘, 602년 4월 6일 ~ 664년 3월 7일) 스님의 백본(百本) 담론은 오직 그 이름에 구애되교,
지의(智顗: 538~597) 스님의 구순(九旬) 설볍은 다만 도리 관념만 숭상하는 것처럼 되었습니다.
* 현장과 지의는 하단에 별주로 처리함
雖云取則之文。未曰通方之訓。
비록 본받을 만한 글을 얻는댜 해도.
널리 통용되는 교훈이라고 말하지는 못합니다.
唯我海東菩薩。融明性相。隱括古今。
오직 우리 해동보살께서는 性(본질)과 相(현상)을 아울러 밝히고,
고금을 드러나지 않게 아우르며
和百家異諍之端。得一代至公之論。
백가가 다투는 발단을 화합하게 해서
일대의 지극히 공평한 논의를 얻었습니다
而況神通不測。妙用難思。
더구나 신통을 헤아리지 못하고,
절묘한 활용은 생각하기도 어렵습니다.
塵雖同而不汚其眞。
光雖和而不渝其體。
먼지를 동반해도 진실이 더럽혀지지 않고,
빛과 함께 있어도 본체가 변하지 않습니다.
令名所以振華梵。慈化所以被幽明。
이름을 중국과 인도에 떨치고
자비로운 교화를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받게 합니다.
其在賛揚。固難擬議。
이것을 찬양하는 말을 어디다 견주어 하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某夙資天幸。早慕佛乘。
歷觀先哲之閒。無出聖師之右。
저는 타고난 행운을 일찍 얻고
어려서부터 불교의 진리를 사모해
선철들의 법도를 두루 살폈으나
聖師의 경지를 넘어서는 이가 없습니다.
痛微言之紕繆。惜至道之陵夷。
사소한 말이 잘못 얽히는 것을 통탄하고
지극한 도리가 무너지는 것을 애석하게 여깁니다
遠訪名山。遐求墜典。
今者雞林古寺。幸瞻如在之容。
멀리 명산을 방문해 손상된 전적을 널리 구하다가
이제 계림의 옛절에서
다행히 살아 계시는 듯한 모습을 우러러 봅니다.
鷲嶺舊峯。似値當初之會。
취령의 오랜 봉우리에서
그때의 법회를 만난 것 같습니다.
聊憑薄供。敢敍微誠。
오로지 변변치 않은 제물을 차리고
감히 작은 정성을 올리며
仰冀厚慈。俯垂明鑑。
우러러 바라노니 두터운 자비로
밝게 굽어 살피소서.
『대각국사문집』 卷第十六
ko.wikipedia.org/wiki/%ED%98%84%EC%9E%A5
현장(玄奘, 602년 4월 6일 ~ 664년 3월 7일)은 당나라 초기 고승이자 번역가이며, 흔히 현장삼장(玄奘三藏)으로 불린다. 10세 때 형을 따라 낙양의 정토사에서 불경을 공부했고, 13세 때 승적에 이름을 올려[1] 현장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그를 부르는 또 다른 명칭은 삼장법사인데, 삼장(三藏)이란 명칭은 경장(經藏) · 율장(律藏) · 논장(論藏)에 능해서 생긴 별칭이다.
ko.wikipedia.org/wiki/%EC%A7%80%EC%9D%98
18세에 출가하여 율장(律藏)과 비담(毘曇) · 성실(成實) · 선법(禪法) 등을 배워 익혔다.[1] 그 후 남악대사(南岳大師) 혜사(慧思)의 문중에 들어가 지관법문(止觀法門), 삼론계(三論界)의 교리와 선관(禪觀), 달마선(達磨禪) 등 소위 북방계의 교리를 이어받고 법화삼매(法華三昧)에 의하여 대오(大悟)하였다.[1]
30세에 금릉(金陵)으로 가서 8년간 《법화경》 등의 강론에 힘썼다.[1]
576년 명리(名利)를 떠나 천태산에 들어가 여기에서 약 10년간 수도 생활을 하였다.[1] 천태교리의 대강(大綱)은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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