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s_CGUZ9exek 

 

* 시조창에서는 본디 종장의 끝구를 생략함.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45]는 남의 애를 [끊나니]

*[45] 한 곡조의 풀잎피리 소리라는 설과, 명나라 피리 소리라는 설이 있다. 원문에는 '羌笛'라 하였으나 羌이나 胡나 매양  변방의 오랑캐라는 의미다.

 

閑山島月明夜上戍樓(한산도월명야상수루)

撫大刀深愁時(무대도심수시 )

何處一聲羌笛更添愁(하처일성강적경첨수)

*이순신의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이순신

https://namu.wiki/w/%EC%9D%B4%EC%88%9C%EC%8B%A0

 

모든 날짜는 음력으로, 이순신의 나이는 세는나이로 기재하였다. 서기와 함께 조선 국왕의 재위년도를 표시하였다.
  • 1545년(1세) 인종 1년
    • 3월8일: 서울 건천동에서 이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남.
  • 1565년(21세) 명종 20년
    • 이즈음에 방진의 딸인 방수진과 결혼. 그 전년도였을 수도 있다.
  • 1573년(29세) 선조 6년
    • 훈련원 별과에 응시, 낙마(落馬)해서 탈락하다.
  • 1576년(32세) 선조 9년
    • 2월: 식년시 무과에 급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 생활을 시작하다.[53]
    • 12월: 종9품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으로 부임하다.
  • 1579년(35세) 선조 12년
    • 2월: 종8품 한성훈련원 봉사로 재직.
    • 10월: 충청도 병마 절도사 군관이 되어 충청도 해미 병영으로 가다.
  • 1580년(36세) 선조 13년
    • 둘째 형 이요신이 죽다.
    • 7월: 전라 좌수영 관내 발포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54]로 전근, 서익이 불러 부당 인사를 제안하나 일언지하에 거절함.
  • 1582년(38세) 선조 15년
    • 1월: 군기경차관[55]으로 온 서익이 과거의 일에 대한 보복으로 근무 태만이라 거짓 보고를 올려 발포 수군 만호 직에서 파직되다.
    • 5월: 종8품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다.
  • 1583년(39세) 선조 16년
    • 7월: 함경도 남병사 이용이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삼다.
    • 8월: 여진족 토벌의 공을 세워 종7품 훈련원 참군으로 승진하다.
    • 10월: 경원 고을 건원보의 권관으로 자리를 옮기다.
    • 11월 15일: 부친 이정이 74세의 나이로 별세하다.
  • 1584년(40세) 선조 17년
    • 1월: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잠시 벼슬을 떠나 삼년상을 치른다.
  • 1586년(42세) 선조 19년
    • 1월: 복직하여 사복시 주부(종6품)가 되다.
    • 2월: 종4품(중령)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종4품 이상의 장군직)로 임명되다.
  • 1587년(43세) 선조 20년
    • 1월: 맏형이었던 이희신이 사망하다.
    • 8월: 정언신의 추천으로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도 겸직하다.
    • 10월: 녹둔도 전투 발발. 이순신이 이일 측에 지원 병력을 요청했으나 거절, 그럼에도 이경록과 둘이 전투를 치뤄 승리하다. 그리고 전투 후 북병사 이일의 모함으로 1차 백의종군(보직해임) 처벌이 내려지다.
  • 1588년(44세) 선조 21년
    • 1월: 여진족 시전부락 공격에 참가, 공을 세워 사면되어 백의종군 해제.
    • 6월: 아산으로 내려가다.
  • 1589년(45세) 선조 22년
    • 1월: 비변사에서 불차채용[56]을 하게 되자 이산해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다.
    • 2월: 이광의 추천으로 전라도 감사 휘하 조방장에 임명되다.
    • 11월: 선전관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가다.
    • 12월: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도 정읍현감(종6품)이 되다.[57]
  • 1590년(46세) 선조 23년
    • 7월: 류성룡이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로 천거했으나 사간원의 반대[58]로 개정되다.
    • 8월: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59]로 천거되었으나, 역시 사간원에서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개정되다.
  • 1591년(47세) 선조 24년
    • 2월 13일이억기, 이천, 양응지와 함께 이순신을 남해 요해지로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선조의 전교를 받았고, 이전처럼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종6품 정읍현감에서 종4품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 전에 정3품(소장계급)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초수(超授)하다.
  • 1604년 선조 37년
    • 덕풍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이후 좌의정에 추증되다.
  • 1643년 인조 21년
    • 충무라는 시호를 받다.
  • 1706년 숙종 32년
    • 충청도 유생들의 상소로 사당 건립을 윤허받다.
  • 1707년 숙종 33년
    • 숙종이 친히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을 하사하다.

 

 

7.1. 참전 목록[편집]

출전 연도 날짜
(음력)
해전 아군 피해 성과
1차 출전 1592년
(선조 25년)[141]
5월 7일 옥포 해전
(玉浦海戰)
1명 부상[142] 적선 26척 격침
합포 해전
(合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및 전멸
5월 8일 적진포 해전
(赤珍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11척 격침 및 전멸
­ ­
2차 출전 5월 29일 사천 해전
(泗川海戰)
2명 부상[143] 적선 13척 격침 및 전멸
6월 2일 당포 해전
(唐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21척 격침 및 전멸
구루시마 미치유키 전사
6월 5일 제1차 당항포 해전
(唐項浦海戰)
알 수 없음 적선 26척 격침
적 지휘관 전멸
6월 7일 율포 해전
(栗浦海戰)
알 수 없음[144] 적선 3척 격침,
4척 포획
­ ­
3차 출전[145] 7월 8일 한산도 해전
(閑山島大捷)
19명 전사,
116명 부상
적선 59척 격침,
14척 나포,
와키자카 사베에,
와타나베 시치에몬 전사,
마나베 사마노조 사망[146]
7월 10일 안골포 해전
(安骨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42척 격침 및 전멸,
3,960여 명 전사
­ ­
4차 출전[147] 8월 29일 장림포 해전
(長林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6척 격침
9월 1일 화준구미 해전
(花樽龜尾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다대포 해전
(多大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서평포 해전
(西平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8척 격침
절영도 해전
(絶影島海戰)
피해 없음 적선 9척 격침
초량목 해전 피해 없음 적선 4척 격침
부산포 해전
(釜山浦海戰)
6명 전사,[148]
25명 부상,
일부 전선 파손
적선 128척 격침,
3,800여 명 전사[149]
­ ­
5차 출전 1593년
(선조 26년)
2월 10일 ~ 3월 6일 웅포 해전
(熊浦海戰)[150]
협선 4척 전복 적선 51척 격침,
구와나 지카카쓰 전사,
2,500명 전사
­ ­
6차 출전 5월 2일 2차 웅포 해전
(熊浦海戰)[151]
피해 없음  
­ 1594년
(선조 27년)
­
7차 출전 3월 4일 2차 당항포 해전
(唐項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31척 격침 및 전멸
­ ­
8차 출전 9월 29일 1차 장문포 해전
(長門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2척 격침
10월 1일 영등포 해전
(永登浦海戰)
피해 없음 피해 없음
10월 4일 2차 장문포 해전
(長門浦海戰)
피해 없음 피해 없음
­ ­
9차 출전 1597년
(선조 30년)
2월 10일 2차 부산포 해전
(釜山浦海戰)
피해 없음 알 수 없음
­ ­
10차 출전 8월 27일 어란포 해전
(於蘭浦海戰)
불명 불명[152]
9월 16일 벽파진 해전
(碧波津海戰)
피해 없음 알 수 없음
9월 16일 명량 해전
(鳴梁海戰)
2명 전사로 기록
나머지 불명
적선 31척 격침,
도도 다카토라 부상,
구루시마 미치후사,
하타 노부토키 전사,
전사자 불명
­ ­
11차 출전 1598년
(선조 31년)
7월 19일 절이도 해전
(折爾島海戰)
30여 명 추정[153] 적선 50여 척 격침[154]
9월 20일 ~ 10월 7일 장도 해전 / 왜교성 전투
(獐島海戰/倭橋城 戰鬪)[155]
조선 수군 130여 명 사상,[156]
명나라 전선 30여 척 침몰 및 파손,
명 수군 2천여 명 전사
적선 30여 척 격침,
11척 나포,
3천여 명 사상
11월 19일 노량 해전
(露梁海戰)
조선 수군 10명 전사,[157]
300여 명 부상
명 수군 500여 명 사상
적선 200여 척 격침,
100여 척 나포,
150여 척 반파,[158]
사상자 2만 ~ 3만 명(추정치)

 

竭忠於國而罪已至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으나 죄가 이미 미쳤고
欲孝於親而親亦亡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자 하였으나 부모마저 돌아가셨네.
天地安如吾之事乎
세상에 어찌 나같은 사람이 있으랴?
不如 早死也
속히 죽느니만 못하다.

정유년 4월 19일(1597년 6월 3일) 《난중일기》

 

10.2. 공정함과 애민(愛民)[편집]

상벌에는 항상 공정했으며, 백성들과 병사들의 식량 공급[210]과 생계, 부정부패의 절대 엄금 등 민생에도 진심으로 최대한 신경 쓰는 등, 장군이자 목민관으로서도 병사들을 포함한 백성들을 진심으로 돌보고 보살펴 주었기에, 덕장(德將)의 면모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이순신이 정읍 현감으로 일할 때 인근 태인현의 현감이 공석이라 태인 현감까지 겸임하게 된다. 그간 현감이 없어서 밀렸던 일들을 이순신이 바로 그 자리에서 신속하고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태인현의 백성들이 현감으로 임명해달라고 청할 정도로 사무 능력은 물론이고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했던 점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승첩 장계에서는 계급을 막론하고 일반 병졸이나 승려, 심지어는 노비까지도 가리지 않고 일일이 소속과 계급, 이름을 빼먹지 않고 적어 전공을 기록하고 있으며, 사망자 역시 신분을 가리지 않고 장계에 이름을 올려 적절한 보상을 받도록 해주었다. 따라서 백성과 병사들은 이순신을 매우 두려워하면서도 진심으로 존경하며 반기를 들 생각을 품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문건에서 이순신이 벌하거나 벌하려 했던 죄인들이 한 행동들은 군기 위반, 탈영, 군용 물자 유용 및 횡령, 군무 이탈이나 군무 회피 알선, 유언비어 유포 등 현대 기준으로 봐도 전시엔 사형이나 중형을 피하기 힘든 중범죄였다. 한마디로 정상적인 원리 원칙을 집행하는 이순신의 처분이었기에 엄격하지만 가혹하다 할 정도는 아니었다.[211] 애당초 가혹하기만 했다면, 수많은 백성들이 이순신의 통제영으로 피난 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통제영 자체가 일본 수군과 싸우기 위한 전진 기지인 만큼 전쟁터와 가장 가까운데도 말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조선 수군을 완전히 전멸하게 만들고 백성들도 대부분 비참하게 죽어가게 된 상황에서, 이순신이 돌아오자 백성들은 울며 절하고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이순신이 돌아오자 "원균의 살점을 강제로 뜯어서라도 먹고 싶다"고 하는 등 원균을 철저하게 증오하며, "장군께서 오셨으니 우리는 살았다"는 식으로 이순신의 귀환을 진심으로 반겼다(《난중일기》 1597년 8월 6일).

  • 청성잡기에 따르면 충무공이 처음 호남 좌수사에 제수되었을 때 왜적이 침입한다는 경보가 다급했다. 왜적을 막는 것은 바다에 달려 있었으나 공은 바다를 방비하는 요해처를 알지 못했고 한다. 그래서 충무공은 날마다 포구의 남녀 백성들을 좌수영 뜰에 모아놓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짚신도 삼고 길쌈도 하는 등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면서 밤만 되면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였다고 한다. 충무공은 평복 차림으로 그들과 격의없이 즐기면서 대화를 유도하였다. 포구의 백성들이 처음에는 매우 두려워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친숙해져 함께 웃으면서 농담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대화 내용은 모두 고기 잡고 조개 캐면서 지나다닌 곳에 관한 것들이었다. '어느 항구는 물이 소용돌이쳐서 들어가면 반드시 배가 뒤집힌다', '어느 여울은 암초가 숨어 있어 그쪽으로 가면 반드시 배가 부서진다.'라고 하면, 공이 일일이 기억했다가 다음 날 아침 몸소 나가 살폈으며 거리가 먼 곳은 휘하 장수를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급기야 왜군과 전투를 하게 되어서는 번번이 배를 끌고 후퇴하여 적들을 험지로 유인해 들였는데, 그때마다 왜선이 여지없이 부서져 힘들여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였다고 한다.

    송시열이 예전에 그의 손님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면서 "장수만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재상 역시 그처럼 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212]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기록된 야사에 따르면 "이순신이 장인을 시켜 검이나 인두, 가위 등을 만들어 조정에 자주 바쳤다"고 한다.[213] 이순신은 청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조정에 뇌물을 바쳐 스스로의 안위를 보전하는 듯한 문구로 볼수도 있는데 이 행위는 당시 의심이 많던 조정에 물자를 바쳐 적대감을 줄여, 마음놓고 전투에 임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바친 내용물은 뇌물로 오해받기 쉬운 사치품이 아니라 무기와 도구 등 전투물자였고 이후에도 공무에 필요한 종이, 둔전 생산 곡식 등을 공공성이 강한 물품이 주된 대상이었다. 만성부족에 시달리던 조정은 이순신에게 더욱 바치도록 닦달했다.

 

 

11.4. 선조와의 관계[편집]

이순신은 선조의 신하로서 그에게 충성했다. 1591년 류성룡은 이순신을 천거하였다. 파격적인 내용에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선조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임명한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1년 전이었다.

선조는 평화 시기에 큰 실책을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되는 군주였다. 다만 그의 전란 대처능력은 그의 평가를 반박하기도 힘들게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선조가 임명한 장수들은 연이어 일본군에 패퇴한다. 급기야 조선 건국이래 최초로 수도를 함락당한다. 종묘사직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유교 국가에서 이러한 행동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선조가 계속해서 개성평양의주로 피난하는 모습에 민심은 요동쳤다.

선조의 평가가 나락으로 떨어질 때, 이순신은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는 조선에게 희망이었지만, 선조의 권력에는 크나큰 위기였다. 선조는 이순신을 크게 의식하였고, 이는 이순신을 끌어내리는 원인이 된다. 결국 이는 현재 선조의 평가를 깎아내리는 가장 큰 원인이 되어 돌아온다.

선조에게 있어 이순신은 전쟁 종결에 반드시 필요한 신하이지만 그만큼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였다.[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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