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qJ8OUxq7svA 

 

 

https://kydong77.tistory.com/18903

 

김종직, 조의제문 (弔義帝文)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9D%98%EC%A0%9C%EB%AC%B8 조의제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조선 시대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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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한 왕의 전교와 신하들의 논의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한 왕의 전교와 신하들의 논의 [은자주]영남사림의 선두주자는 그렇게 부관참시당하였다. 지하의 귀신들까지 들고 일어나 그를 두 번 죽일 판이었다. 죄목은 충분(忠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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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RlEjmcbcLi4 

 

https://www.youtube.com/watch?v=m9mSJ1d43SM 

 

 

https://www.youtube.com/watch?v=2QQ7XrhYzqs

 

https://news.joins.com/article/24097567

 

이재명 44.7% 윤석열 36.7%…李, 오차범위 밖 앞섰다 [글로벌리서치]

그동안 가상 양자 대결에서 혼전 양상을 보였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이 지사가 기존 조사보다 격차를 더 벌이며 윤 전 총장을 앞섰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남녀 응답자 모두 이 지사 지지율이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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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9D%98%EC%A0%9C%EB%AC%B8

 

조의제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조선 시대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 1431년 ~ 1492년)이 지은 제사문으로 항우에게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회왕 즉, 초 의제를 추모하는 글이다. 왕위를 항우에게 찬탈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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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재(再) 풍자

교산 허균은 점필재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꼰 것을 두고 김종직론이라는 글을 통해 조롱한다. 허균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짓고 주시(酒詩)를 기술했던 것은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이미 (그 밑에서) 벼슬을 했다면 그 분이 우리 임금이건만, 온 힘을 기울여 그를 꾸짖기나 하였으니 그의 죄는 더욱 무겁다. 죽은 뒤에 화란을 당했던 것은 불행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그의 간사하고 교활했던 것에 화내서 사람의 손을 빌어다가 명백하게 살륙한 것이 아닐는지?"라고 비꼬았다.

김종직론(金宗直論) - 교산 허균

천하에 이록(利祿)이나 취하고 자신의 명망을 훔치는 자가 있는데, 세상에서 군자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그걸 믿을 것인가? 나는 믿지 못한다고 말하겠다.왜 그게 믿어지지 않을까? 자기 것으로 해버리거나 훔친다면, 비록 도덕(道德)과 인의(仁義)에서 나왔더라도 거짓 짓임을 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록과 명망이겠는가. 이미 이록을 취하였고 명망을 훔쳐서 한 세상을 속이고 자신의 영화와 녹봉을 누린다면, 정말로 자기의 지혜를 다하고 온 마음을 기울여 자기의 직분으로 당연히 할 일에 맞도록 하여야 그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보완할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영화와 녹봉은 나의 뜻이 아니다.” 하면서, 능청스럽게 한갓 그 수레를 붉게 꾸미고 그 인끈을 붉게 하면서 일생을 마친다면, 그의 죄악은 죽음을 당해도 용서받지 못하리라.
김종직은 근세에 이른바 대유(大儒)다. 젊은 시절에는 벼슬하려고도 않더니, 세조(世祖)가 과거에 응시하도록 다그치니 부득이해서 과거에 올랐으며, 또한 시종(侍從)의 직책에 드나들더니 벼슬이 높아졌다. 그러면서는 모친이 늙었으므로 억지로 벼슬한다고 일컬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천수(天壽)를 다하고 세상을 마쳤으나, 오히려 벼슬을 그만두지 않았었다. 그의 문인(門人) 김굉필(金宏弼)이 더러 그가 시정책을 건의하지 않음을 간(諫)하면, 이어서, "벼슬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건의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다. 김종직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록을 취하고 명망을 훔치며 능청스럽게 한갓 수레를 붉게 하고 인끈을 붉게 한다고 말해지는 바의 사람이었다.
계유정란(癸酉靖亂)을 당하여, 김종직은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 무리들처럼 녹을 먹던 사람이 아니었고, 김시습(金時習)처럼 평소에 은택(恩澤)을 입었던 것도 없었다. 다만 시골의 변변찮은 한 선비여서 옛 임금 단종(端宗)을 위하여 죽어야 할 의리도 없었으니, 그가 벼슬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 본래 위선이었다. 비록 위선이었지만 이미 뜻을 세웠다면, 임금이 아무리 다그치더라도 죽기를 맹세하고 가지 않았어야 옳았다. 그런데 화(禍)를 두려워하여 억지로 나온 것처럼 하였다. 이미 과거에 합격해서는 붓을 귀에 얹고 임금의 말을 기록했으며, 사책(史策)을 끼고 고운 털자리에 엎드리기도 하였다. 또 고을을 맡아서 그의 어머니를 봉양했으니, 그가 이록을 취했던 것은 정도를 넘었었다. 또 명호(名號)를 훔치고 싶어 남에게 말하기를, “나에게는 어버이가 있다. 그러나 끝내는 서산(西山)의 뜻을 지키리라.” 하였다.
그러나 이미 어머니의 복제(服制)를 벗고도 응교(應敎) 벼슬을 받았었고, 10년 동안에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뛰어올랐다. 그만 쉴 만도 하나 오히려 더 탐내며 떠나가지 않았다. 책임을 완수치 못하면서 직책상 당연히 해야 할 것도 하지 않다가, 문인(門人)이 그 점을 지적해 주면 모면하려고 꾸며대는 말로써 대답하였다. 이게 과연 군자라고 여길 만한가? 이런 속임수는 마땅히 죽임을 당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지금까지 계속하여 그 사람을 칭찬하고 있으니, 무엇 때문일까? 내가 가만히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았더니, 가학(家學)을 주워모으고 문장 공부를 해서 스스로 발신(發身)했던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하고 마음은 교활하여 그의 명망을 높이려고 한 세상 사람을 용동(聳動)시켰고, 임금의 들음을 미혹되게 하여 이록을 훔치는 바탕으로 삼았다. 이미 그러한 꾀를 부렸지만 자기의 재능을 헤아리니 백성을 편하게 하고 구제하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넉넉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하고는 자신의 졸렬을 감추는 수단으로 하였으니 그것 또한 공교로웠다.
그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짓고 주시(酒詩)를 기술했던 것은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이미 벼슬을 했다면 이 분이 우리 임금이건만, 온 힘을 기울여 그를 꾸짖기나 하였으니 그의 죄는 더욱 무겁다. 죽은 뒤에 화란을 당했던 것은 불행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그의 간사하고 교활했던 것에 화내서 사람의 손을 빌어다가 명백하게 살륙한 것이 아닐는지? 나는 세상 사람들이 그의 형적(形迹)은 살펴보지 않고, 괜스레 그의 명성만 숭상하여 지금까지 치켜 올려 대유(大儒)로 여기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때문에 특별히 나타내어 기록한다.

허균의 풍자는 당대의 논란거리가 되어 정조 때까지 허균의 서적이 불온서적으로 몰리는 원인이 된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7%88%EA%B7%A0

 

허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싸운 공로로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되었다. 1594년(선조 27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597년(선조 30년) 다시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여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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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론(金宗直論) - 교산(蛟山)

천하에 이록(利祿)이나 취하고 자신의 명망을 훔치는 자가 있는데 세상에서 군자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그걸 믿을 것인가? 나는 믿지 못한다고 말하겠다.왜 그게 믿어지지 않을까? 자기 것으로 해버리거나 훔친다면, 비록 도덕(道德)과 인의(仁義)에서 나왔더라도 거짓 짓임을 면(免)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록(利祿)과 명망이겠는가. 이미 이록을 취하였고 명망을 훔쳐서 한 세상을 속이고 자신의 영화(榮華)와 녹봉을 누린다면, 정말로 자기의 지혜를 다하고 온 마음을 기울여 자기의 직분으로 당연히 할 일에 맞도록 하여야 그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보완할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영화와 녹봉은 나의 뜻이 아니다.” 하면서, 능청스럽게 한갓 그 수레를 붉게 꾸미고 그 인끈을 붉게 하면서 일생을 마친다면, 그의 죄악은 죽음을 당해도 용서받지 못하리라.
김종직은 근세에 이른바 대유(大儒)다. 젊은 시절에는 벼슬하려고도 않더니 세조(世祖)가 과거에 응시하도록 다그치니 부득이(不得已) 과거에 올랐으며, 시종(侍從)의 직책에 드나들더니 벼슬이 높아졌다. 그러면서는 모친이 늙었으므로 억지로 벼슬한다고 일컬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천수(天壽)를 다하고 세상을 마쳤으나 오히려 벼슬을 그만두지 않았었다. 그의 문인(門人) 김굉필(金宏弼)이 더러 그가 시정책을 건의하지 않음을 간(諫)하면, 이어서, "벼슬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건의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다. 김종직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록(利祿)을 취하고 명망을 훔치며 능청스럽게 한갓 수레를 붉게 하고 인끈을 붉게 한다고 말해지는 바의 사람이었다.
계유정난(癸酉靖亂)을 당하여 김종직은 박팽년·성삼문 무리처럼 녹을 먹던 사람이 아니었고 김시습처럼 평소에 은택(恩澤)을 입었던 것도 없었다. 다만 시골의 변변찮은 한 선비여서 옛 임금 단종을 위하여 죽어야 할 의리도 없었으니 그가 벼슬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 본래 위선이었다. 비록 위선이었지만 이미 뜻을 세웠다면, 임금이 아무리 다그치더라도 죽기를 맹서(盟誓)하고 가지 않았어야 옳았다. 그런데 화(禍)를 두려워하여 억지로 나온 것처럼 하였다. 이미 과거에 합격해서는 붓을 귀에 얹고 임금의 말을 기록했으며, 사책(史策)을 끼고 고운 털자리에 엎드리기도 하였다. 또 고을을 맡아서 그의 어머니를 봉양했으니 그가 이록(利祿)을 취했던 것은 정도를 넘었었다. 또 명호(名號)를 훔치고 싶어 남에게 말하기를, “나에게는 어버이가 있다. 그러나 끝내는 서산(西山)의 뜻을 지키리라.” 하였다.
그러나 이미 어머니의 복제(服制)를 벗고도 응교(應敎) 벼슬을 받았었고 10년 동안에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뛰어올랐다. 그만 쉴 만도 하나 오히려 더 탐(貪)내며 떠나가지 않았다. 책임을 완수치 못하면서 직책상 당연히 해야 할 것도 하지 않다가, 문인(門人)이 그 점을 지적해 주면 모면(謀免)하려고 꾸며대는 말로써 대답하였다. 이게 과연 군자라고 여길 만한가? 이런 속임수는 마땅히 죽임당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지금까지 계속하여 그 사람을 칭찬하고 있으니 무엇 때문일까? 내가 가만히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았더니, 가학(家學)을 주워 모으고 문장을 공부해서 스스로 발신(發身)했던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하고 마음은 교활(狡猾)하여 그의 명망을 높이려고 한 세상 사람을 용동(聳動)시켰고 임금의 들음을 미혹(迷惑)되게 하여 이록(利祿)을 훔치는 바탕으로 삼았다. 이미 그러한 꾀를 부렸지만 자기의 재능을 헤아리니 백성을 편하게 하고 구제(救濟)하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넉넉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하고는 자신의 졸렬(拙劣)을 감추는 수단으로 하였으니 그것 또한 공교로웠다.
그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짓고 주시(酒詩)를 기술했던 것은 더욱 가소(可笑)로운 일이다. 이미 벼슬을 했다면 이 분이 우리 임금이건만, 온 힘을 기울여 그를 꾸짖기나 하였으니 그의 죄는 더욱 무겁다. 죽은 뒤에 당했던 화란(禍亂)은 불행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그의 간사(奸邪)하고 교활(狡猾)했던 것에 화내서 사람의 손을 빌어다가 명백하게 살륙(殺戮)한 것이 아닐는지? 나는 세상 사람들이 그의 형적(形迹)은 살펴보지 않고 괜스레 그의 명성만 숭상하여 지금까지 치켜 올려 대유(大儒)로 여기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때문에 특별히 나타내어 기록한다.

 

허균은 김종직은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 찬위를 비난하면서도 그 자신은 세조가 주는 관직을 받았다고 비난했다.

허균은 조의제문 따위를 지은 것은 가소롭다고 하고, 김종직을 가리켜 위학자(僞學者)라고 비난했다.[3] 김종직을 매우 예리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김종직의 학통을 계승한 사림파에게 심하게 공격당하고 당대와 이후에 나타난 온갖 인신공격과 비방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허균은 이런 비방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당당하게 펼친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3994

 

홍길동전(洪吉童傳)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길동전」은 16세기 이후 빈번해지던 농민봉기와 그것을 주도했던 인간상에 대한 구비전승을 근간으로 하고, 그 현실적 패배와 좌절을 승리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민중의 꿈을 충족시키기 위

encykorea.aks.ac.kr

 

「홍길동전」은 작품 경향, 사회의식, 역사의식에 있어서 「금오신화」에서 마련된 현실주의적 경향, 강렬한 사회 비판적 성격, 진보적인 역사의식을 이어받아, 후대의 연암소설(燕巖小說)과 판소리계 소설 등의 작품으로 넘겨주는 구실을 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소설사적 의의를 가진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홍길동전(洪吉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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