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a-sekGtBChI 

 

 

 

https://www.youtube.com/watch?v=6zB5gm_9ulw&t=37s 

 

 

https://www.youtube.com/watch?v=ZEWx5hh-Qmw 

 

 

호미곶에는 엄청나게 큰 손이 두 개나 있다. 바다에는 오른손, 육지에는 왼손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데, 그 이름이 `상생의 손`이다. 1999년 12월에 완공된 이 조각에는 “새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서로를 도우며 살자는 뜻”이 담겨 있다.

 

(串, 영어Cape) 또는 갑(岬), 혹은 단(端)은 바다 또는 호수 쪽으로 튀어나온 모양을 한 육지로, 3면이 물로 둘러싸인 땅을 말한다. 또한 곶에는 등대가 설치된 경우가 많다. 곶의 규모가 크면 반도라고 한다. 그리고 곶은 의 반대말이다.

1908년 준공된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근대식 등대이다. 등대의 높이는 26. 4m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높으며, 둘레는 하부 24m, 상부 17m이다. 광력(光力)은 1,000촉으로 16마일 해상밖까지 등불이 보이고 2마일 해상밖까지 들리는 안개신호기가 설치되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호미곶등대(虎尾串燈臺))]

 

 

 

호미곶(虎尾串)의 명칭 유래

호미곶은 16세기 조선 명종 때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南師古)가 『산수비경(山水秘境)』에서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으로 기술하였고, 백두산은 호랑이 코,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설명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호미곶(虎尾串)]

[참고]

(串)과 (灣)

*(串, 영어: Cape) 또는 갑(岬), 혹은 단(端)은 바다 또는 호수 쪽으로 튀어나온 모양을 한 육지로, 3면이 물로 둘러싸인 땅을 말한다. 또한 곶에는 등대가 설치된 경우가 많다. 곶의 규모가 크면 반도라고 한다. 그리고 곶은 의 반대말이다.

(灣)은 바다호수 등의 큰 물이 육지 쪽으로 곧장 굽어 들어온 곳을 말한다.[1][2][3] 바다가 육지 속으로 파고들어 와 있는 곳, 즉 해안선에 의해서 둘러싸인 수역은 해만(海灣)으로도 부른다. 영어에서는 규모가 작은 것을 "베이(bay의 반댓말)", 규모가 크고 그에 비해 입구가 좁으면 "걸프(gulf반도의 반댓말)"로 부르는데, 정확한 기준이 있지는 않다. 페르시아만멕시코만아덴만 등 만은 주요한 해상 운송 영역이다.[4]

 

https://www.youtube.com/watch?v=UuGKYw8wnPs 

 

 

 

 

https://www.youtube.com/watch?v=Fbrbr4muNIo 

*연오랑과 세오녀(延烏郞 - 細烏女) 《삼국유사》(권1, 〈기이〉1, 연오랑 세오녀)  필원잡기》(권2) 등에 의거하면 대마도도 우리땅인디...... 

독도 지하의 광물질 땜시롱 화해는 커녕 40년 식민지시대의 악몽만 되살리네요.

내가 가사를 썼다면 "대마도도 우리땅, 시모노세키는 일본땅"이라 썼을 텐디.....

 

 

 

연오랑과 세오녀(延烏郞 - 細烏女)는 《삼국유사》(권1, 〈기이〉1, 연오랑 세오녀)필원잡기》(권2)에 수록되어 전하는 설화이다.[1] 원전은 고려 이전의 문헌인 《수이전》에 실려 있었다고 여겨지며, 태양신(太陽神)에 관한 한국의 신화로 일본 태양신 신화와의 비교연구가 주목되고 있다.[1]

 

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편

 

第八羅阿達王卽位四年丁酉,

제8대 나아달왕이 즉위한지 4년째인 정유년에 

東海濱有延烏郞細烏女夫婦而居.

동쪽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一日延烏歸海採藻,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나가 해초를 캐는데 

忽有一巖, 負歸日本.

갑자기 한 바위가 나타나 자기를 싣고서 일본으로 가버린 것이다. 

國人見之曰: “此非常人也.”

일본 나라사람들이 그걸 보고서 “이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니다.”라고 했고 

乃入爲王.

곧 받아들여 임금으로 삼았다.

 

細烏恠夫不來, 歸尋之,

세오는 남편이 오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생각해 바다에 나가 찾아보니 

見夫脫鞋.

남편의 벗겨진 짚신이 보였다. 

亦上其巖, 巖亦負歸如前.

또한 바위가 떠오르더니 바위는 또한 전과 같이 세오를 싣고 돌아갔다. 

其國人驚訝, 奏獻於王,

일본 나라사람들이 놀라고 의아해하며 왕에게 알리고 바치니, 

夫婦相會, 入爲貴妃.

부부는 상봉하게 됐고 받아들여 귀비로 삼았다.

是時, 新羅日月無光,

이때에 신라엔 해와 달의 빛이 없어졌다.

 

日者奏云: “日月之精, 降在我國.

천문 관측관이 말했다.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려와 있었습니다. 

今去日本, 故致斯怪.”

그러나 이제 일본으로 가버렸기에 이런 괴이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王遣使求二人.

왕은 두 사람을 구해 일본으로 보냈다. 

延烏曰: “我到此國, 天使然也,

연오가 말했다. “내가 이 나라에 오게 된 건 하늘이 시켜서 그런 것이니 

今何歸乎?

이제 어찌 돌아가겠는가? 

雖然, 朕之妃有所纖細稍,

비록 그렇더라도 짐의 비가 직조한 비단이 있으니 

以此祭天, 可矣.”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지내면 괜찮을 것이네.” 

仍賜其稍.

그래서 그 비단을 하사했다. 

使人來奏, 依其言而祭之, 然後日月如舊.

사신들이 와서 아뢰었고 말 대로 제사를 지낸 후에야 해와 달이 전과 같아졌다.

 

藏其稍於御庫, 爲國寶,

비단을 왕의 창고에 보관하고서 국보로 삼았고 

名其庫爲貴妃庫,

그 창고를 이름 지어 ‘귀비고’라 했으며 

祭天所名迎日縣又郁祈野.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욱기야’라 이름 지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gI-Hdwch7c 

 

 

 

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A%B5%AD%EC%9C%A0%EC%82%AC

 

삼국유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려 시대의 승려 일연(一然)이 고려 충렬왕 7년(1281년)[1]에 인각사(麟角寺)에서 편찬한 삼국 시대의 역사서이다.[2] 원판(原版)은 전하지 않으며 2003년에 조선 초기의

ko.wikipedia.org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려 시대의 승려 일연(一然)이 고려 충렬왕 7년(1281년)[1]에 인각사(麟角寺)에서 편찬한 삼국 시대의 역사서이다.[2] 원판(原版)은 전하지 않으며 2003년에 조선 초기의 간행본과 중종 임신본이 각각 대한민국의 국보 제306호와 제306-2호로 지정되었다.

구성

전체 5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5권 내에 다시 9편으로 나뉘어 있다. 권수는 편목의 유형에 따라 구분한 것이 아니라 분량에 따라 편의적으로 구분한 것이다. 제일(第一)이 붙어 있는 것이 왕력과 기이 두 편이라고 한다.

  1. 권1 왕력(王曆) 제1 : 간략한 제왕의 연대기로 중국 역대 왕조를 기준으로 신라고구려백제가야를 대상으로 하여 기원전 57년부터 936년 고려 태조에 의한 후삼국 시대의 통일기까지를 시간적 폭으로 한 연대표이다.
  2. 권1 기이(紀異) 제1 : 고조선, 위만조선, 삼한, 칠십이국, 낙랑군, 북대방, 남대방, 말갈·발해, 오가야, 부여이서국고구려백제 등 고조선으로부터 남북국 시대 이전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총 36조로 이루어져 있다.
  3. 권2 기이(紀異) 제2 통일신라의 출현과 이후 역대왕들 그리고 기타 등등을 다루고 있으며 총 24조. 고조선에서 고려 건국 이전까지 존재했던 여러 국가와 여러 왕(특히 신라왕)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를 연대기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전체 분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방대하다.
  4. 권3 흥법(興法) 제3 : 삼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고 흥성하는 과정을 기록했다. 총 8조.
  5. 권3 탑상(塔像) 제4 : 불교의 흥성에 따라 삼국(특히 신라)에 주목할만한 사탑이나 불상을 조성했던 사실을 기록했다. 총 29조.
  6. 권4 의해(義解) 제5 : 신라의 고승들이 보여주었던 뛰어난 행적을 통해 그들의 신앙심을 천명하였다. 총 14조.
  7. 권5 신주(神呪) 제6 : 신라 밀교계통 고승들의 기이한 행적을 통해 불교와 무속의 융합 및 호국 불교의 모습 소개. 총 3조.
  8. 권5 감통(感通) 제7 : 불심이 남달랐던 일반 신자와 승려들의 기적 체험을 통해 부처님의 가피력을 천명하였다. 총 10조.
  9. 권5 피은(避隱) 제8 : 구도 과정에서 세상을 등지고 홀로 불법을 닦은 승려들의 행적. 총 10조.
  10. 권5 효선(孝善) 제9 : 세속적 윤리인 효와 불교적 윤리(윤회, 인과응보)의 결합을 통해 신라인의 효행 사례 기록. 총 5조.

내용

삼국유사에는 삼국과 가락국(駕洛國 : 가야)의 왕대와 연대, 고조선 이하 여러 고대 국가의 흥망·신화·전설·신앙 및 역사, 불교에 관한 기록, 고승들에 대한 설화, 밀교 승려들에 대한 행적, 고승들의 행정, 효행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모든 설화는 삼국 시대의 것이지만, 유동하던 이야기가 고려 시대에 와서 문자로 정착된 것이다. 따라서 흘러 다니던 설화의 내용이 일연이라는 개인에 의해 작품화된 셈이므로 고려의 설화문학으로 취급될 수 있다.[3] 삼국유사에 수록된 설화의 주제는 주로 신라와 불교를 중심으로 편찬되어 있다. 고대사 연구에서 《삼국사기》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고 있다. 특히 단군 신화를 비롯하여 이두로 쓰인 향가 14수가 기록되어 있어 국어 국문학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특히, 향가는 《균여전》에만 11수(首)가 수록되어 있을 뿐, 다른 전적에는 전혀 전하지 않기 때문에 향가 연구에서 삼국유사는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4] 또한 제왕운기》와 더불어 단군 신화를 전하는 유일한 기록으로 고려 후기, 대몽항쟁 과정에서 급부상한 단군 신앙과 동족 의식을 반영한다.[5]

고조선조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1 고조선조는 삼국유사의 첫머리이자 단군 관계 사료로써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며, 해당 조에서는 위서와 고기, 당배구전, 통전의 4개 문헌을 인용하고 있다. 이 4개 문헌 가운데 확인 가능한 것은 당배구전(신당서 권100 열전제25 배구)이며, 나머지는 그 인용 문헌의 기록이 서로 맞지 않거나(통전) 인용했다고 밝힌 문헌이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고기), 혹은 현존하는 기록에서는 인용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단군 신화 기록은 서두에 "위서에 이르기를"(魏書云)이라고 적고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자가 있어서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으니, 고(高)와 같은 시기였다"라고 기록하였다.[6] 그런데 현존하는 《위서》에는 삼국유사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기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는 일제 시대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한 단군신화 자체에 대한 일연의 위조설로 이어졌다.[7]

이러한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1946년 정인보는 《조선사연구(상)》에서 삼국유사에는 위지와 후위서라는 별도의 전거가 분명히 있으므로 진수의 위지(전위서) 내지 위수의 위서(후위서)는 아니고 그밖의 조위의 사서로는 왕침이 지은 것이 있다며 이것이 고조선조에서 말한 위서가 아닐까 추단하였으며[8] 정인보의 이 설은 이후 북한 학계에서 주목되어 주류 학설이 되었다. 1954년 최남선은 《증보 삼국유사》 해제에서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위서에 대해 탁발위(북위)의 위서(후위서), 조위의 위서(위지), 내지는 지나(중국) 문적의 범칭일 가능성을 차례로 거론하고[9] "고기와 위서를 무엇인가고 의심까지 할 수는 있으려니와 망칭과 허구로 단정치 못할 것을 누구든지 생각할 것이오, 더구나 이러한 이유로써 전하는 사실 그것의 전통적 근거를 의심하려 함은 고의가 아니면 고견'[10]이라고 혹평하면서도 "이미 실물이 없고 증빙 또한 없는 상황에서 지단하기는 곤란하다"며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후 1930년대 이후 한국 학자들은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에서 연구를 행했다. 《삼국유사》가 언급한 위서에 대한 연구는 크게 일서설과 의탁설이 있는데[11] 일연이 《삼국유사》 고조선조를 저술하는 과정에서 해당 서적의 이름을 헷갈렸거나 후대의 전승과정에서 서적의 이름이 잘못 표기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의탁설은 일연이 단군 전승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서 《위서》라는 공신력 있는 서적의 이름을 의탁했다는 것으로 일본의 사학자 이노우에 히데오가 1980년 《아시아 공론》에서 주장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그 시대적 배경과 구성>에서 주장하였다.[12] 박대재는 2001년 '삼국유사 고조선조 인용 위서론'에서 삼국유사가 인용한 《위서》는 북제의 위수가 지은 '후위서(後魏書)'라 불리는 《위서》이고 본래 위수가 편찬했던 대로의 《위서》가 아니라 북송 시대의 교감본이며, 《위서》의 복잡한 개수, 교감 과정이나 《삼국유사》 속의 다른 '위서' 인용 부분 및 일본측에 남아 있는 《한원》의 《위서》 인용 부분에도 현존 《위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북송 교감본 《위서》와 그 이전 고본 《위서》 사이에는 내용상 상당한 출입이 있었을 것이며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연이 인용했을 고본과는 달리 단군조선 관계 기사가 들어 있지 않은 (현존하는 것과 같은) 교감본 《위서》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았다.[13]

진지왕에 대한 기록

삼국사기는 신라의 진지왕이 재위 4년만에 사망하고 진평왕이 뒤를 이었다고 적었지만, 삼국유사는 진지왕이 황음무도한 정사를 펴다 국인에 의해서 폐위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였다고 기술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vq8G6UlVHVg 

 

 

[구룡포항]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