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14/20[史記列傳(사기열전)] 권130 太史公 自序(태사공 자서) (14/20) <열전(列傳)①>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의 마지막 편이다. 사기는 전한(前漢)의 사학가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상고시대로부터 전한 무제(武帝)에 이르기까지 2천여 년 간의 역사를 기술한 고대 중국 역사서로 <본기(本紀)>12권, <표(表)>10권, <서(書)>8권, <세가(世家)>30권, <열전(列傳)>7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편의 서문을 통하여 사기 전체의 내용을 간략하게 알 수 있으며, 이 편은 둘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반부는 태사령(太史令) 사마담(司馬談)의 아들인 사마천의 집안 내력과 사기를 집필하게 된 동기 등을 기록하였으며, 하반부는 사기 130편에 대하여 각 편을 기록하게 된 동기를 기록하였다. 이 장에서는 사마천의 사기 중 열전 70편에 수록한 인물들에 대한 집필 동기를 기술한 내용이다. [열전(列傳)] 80. 제1편 <伯夷列傳(백이열전)> : 伯夷(백이),叔齊(숙제) 말세에는 이익을 다투지만 오직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만은 의를 추구했다. 나라를 양보하고 굶어 죽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칭송했다. 이에 열전 제1편 ‘백이열전(伯夷列傳)’을 지었다. |
https://ko.wikipedia.org/wiki/%EC%84%B1%EC%82%BC%EB%AC%B8
성삼문(成三問, 1418년 ~ 1456년 6월 8일)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조선국 사간원 우사간 등을 지냈다.
그는 세종대왕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성삼문의 시조와 한시]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恨)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들 긔 뉘 따헤 났다니.
* <이제夷齊)> : 백이와 숙제를 아울러 이른 말.
☞<성삼문의 절의를 나타낸 다른 시조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참고]
성삼문이 일찍이 중국의 북경(北京)으로 가는 길에 이제묘(夷齊廟)를 지나다 읊은 다음과 같은 한시(漢詩)가 있는데, ‘수양산 바라보며’와 그 내용이 비슷하다.
夷齊廟(이제묘)
(백이 숙제의 사당에 들리다)
當年叩馬敢言非
(당년고마감언비) 그때 말머리를 두드리며 그르다 함은
忠義堂堂日月輝
(충의당당일월휘) 충의가 당당하여 해와 달 같이 빛났도다.
草木亦霑周雨露
(초목역점주우로) 그대 어찌 고사리를 먹었던고?
愧君猶食首陽薇
(괴군유식수양미) 그대가 수양산의 고사리를 먹은 것조차 부끄러워 하노라
[참고]
사육신역사공원, 단종복위운동: 하위지, 성삼문, 박팽년, 유성원, 이개, 유응부
https://www.youtube.com/watch?v=oM-jbUEMyAg&t=2s
81. 제2편 <管晏列傳(관안열전)>
<①管仲(관중) ②晏婴(안영)>
晏子儉矣(안자검의),夷吾則奢(이오즉사); 齊桓以霸(제환이패),景公以治(경공이치)。 作管晏列傳第二(작관안열전제이)。 |
안자(晏子)는 검소했고, 관중(管仲)은 사치스러웠다.
제 환공(齊 桓公)은 관중으로 인하여 패자(覇者)가 되었고,
제 경공(齊 景公)은 안자로 인하여 나라를 잘 다스렸다.
이에 제2편 ‘관안열전(管晏列傳)’를 지었다.
[출처] 130-14/20[史記列傳(사기열전)] 권130 太史公 自序(태사공 자서) (14/20) <열전(列傳)①>|작성자 swings81
82. 제3편 <老子韓非列傳(노자한비열전)>
<①老子(노자) ②莊子(장자) ③申不害(신불해) ④韓非(한비)>
李耳無為自化(이이무위자화),清凈自正(청정자정); 韓非揣事情(한비췌사정),循埶理(순세리)。 作老子韓非列傳第三(작노자한비열전제삼)。 |
노자(老子:李耳)는 ‘내가 무위(無爲)로 대하면 백성들은 감화되고,
내가 고요히 있는 것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바르게 된다.’고 하였다.
한비(韓非)는 사물의 정황을 헤아려 사물의 추세와 도리를 준수하였다.
이에 제3편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을 지었다.
83. 제4편 <司馬穰苴列傳(사마양저열전)> : 司馬穰苴(사마양저)
自古王者而有司馬法(자고왕자이유사마법),穰苴能申明之(양저능신명지)。 作司馬穰苴列傳第四(작사마양저열전제사)。 |
옛날부터 제왕들에게도 사마법(司馬法)이 있었는데
사마양저(司馬穰苴)가 이를 분명히 설명할 수 있었다.
이에 제4편 ‘사마양저열전(司馬穰苴列傳)’을 지었다.
84. 제5편<孫子吳起列傳(손자오기열전)>
<孫子(손자)(①孫武손무 ②孫臏(손빈)) ③吳起(오기:吳子)>
非信廉仁勇不能傳兵論劍(비신렴인용불능전병론검), 與道同符(여도동부),內可以治身(내가이치신),外可以應變(외가이응변), 君子比德焉(군자비덕언)。 作孫子吳起列傳第五(작손자오기열전제오)。 |
믿음과 청렴, 어짊과 용기가 없이는 병법을 전수하고 검술을 논할 수 없으며,
병법과 검술이 서로 부합되면
안으로는 자신의 몸을 다스릴 수 있고
밖으로는 임기응변할 수 있으니
군자는 이를 기준으로 덕에 접근하였다.
이에 제5편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을 지었다.
85. 제6편 <伍子胥列傳(오자서열전)>: 伍子胥(오자서)
維建遇讒(유건우참),爰及子奢(원급자사), 尚既匡父(상기광부),伍員奔吳(오원분오)。 作伍子胥列傳第六(작오자서열전제육)。 |
태자 건(太子 建)이 참소를 당하자
그 화가 오자사(伍子奢)에게 미쳤다.
오상(伍尙)은 아버지를 구하려다 잡히고
오원(伍員:오자서)은 오(吳)나라로 달아났다.
이에 제6편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을 지었다.
86. 제7편 <仲尼弟子列傳(중니제자열전)> : 孔子(공자)
孔氏述文(공씨술문),弟子興業(제자흥업), 咸為師傅(함위사부),崇仁厲義(숭인려의)。 作仲尼弟子列傳第七(작중니제자열전제칠)。 |
공자(孔子)가 문덕(文德)을 전수하니
제자들이 이를 크게 발전시켰으며,
그들은 모두가 사람들의 스승이 되어
인을 숭상하고 의를 행하게 했다.
이에 제7편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을 남겼다.
87. 제8편 <商君列傳(상군열전)> : 상앙(商鞅)
鞅去衛適秦(앙거위적진),能明其術(능명기술), 彊霸孝公(강패효공),後世遵其法(후세준기법)。 作商君列傳第八(작상군열전제팔)。 |
상앙(商鞅)이 위(衛)나라를 떠나 진(秦)나라로 가서
법가의 학술을 밝히니
효공(孝公)은 강성해져 패자(覇者)로 칭해졌으며,
후세 사람들이 그의 법도를 그대로 지키며 따랐다.
이에 제8편 ‘상군열전(商君列傳)’을 지었다.
88. 제9편 <蘇秦列傳(소진열전)> : 蘇秦(소진)
天下患衡秦毋饜(천하환형진무염),而蘇子能存諸侯(이소자능존제후), 約從以抑貪彊(약종이억탐강)。 作蘇秦列傳第九(작소진열전제구)。 |
천하가 진나라의 연횡책과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을 걱정하자
소진(蘇秦)이 합종을 내세워 제후국을 존립하게 하고
합종의 맹약을 맺게 하여 탐욕스럽고 강한 진나라를 억제하였다.
이에 제9편 ‘소진열전(蘇秦列傳)’을 지었다.
[출처] 130-14/20[史記列傳(사기열전)] 권130 太史公 自序(태사공 자서) (14/20) <열전(列傳)①>|작성자 swings81
89. 제10편 <張儀列傳(장의열전)> : 張儀(장의)
六國既從親(육군기종친),而張儀能明其說(이장의능명기설),復散解諸侯(부산해제후)。 作張儀列傳第十(작장의열전제십)。 |
6국이 합종(合縱)하여 서로 친근해지자
장의(張儀)는 연횡(連橫)을 내세워
제후국들을 다시 흩어 놓았다.
이에 제10편 ‘장의열전(張儀列傳)’을 지었다.
90. 제11편 <樗裏甘茂列傳(저리감무열전)>: 저리자(樗里子), 감무(甘茂)
秦所以東攘雄諸侯(진소이동양웅제후),樗裏、甘茂之策(저리감무지책)。 作樗裏甘茂列傳第十一(작저리감무열전제십일)。 |
진(秦)나라가 동쪽의 제후국들을 물리치고 제후들에게 군림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저리자(樗里子)와 감무(甘茂)의 책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제11편 ‘저리감무열전(樗裏甘茂列傳)’을 지었다.
91. 제12편 <穰侯列傳(양후열전)> : 위염(魏冉)
苞河山(포하산),圍大梁(위대량),使諸侯斂手而事秦者(사제후렴수이사진자), 魏冉之功(위염지공)。 作穰侯列傳第十二(작양후열전제십이)。 |
황하와 화산 일대를 차지하고 대량(大梁)을 포위하여
제후들로 하여금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진(秦)나라를 섬기게 한 것은 위염(魏冉)의 공이었다.
이에 제12편 ‘양후열전(穰侯列傳)’을 지었다.
<원문출처>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史記 -> 列傳 -> 太史公自序
80
末世爭利,維彼奔義;讓國餓死,天下稱之。作伯夷列傳第一。
말세에는 이익을 다투지만 오직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만은 의를 추구했다.
나라를 양보하고 굶어 죽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칭송했다.
이에 열전 제1편 ‘백이열전(伯夷列傳)’을 지었다.
81
晏子儉矣,夷吾則奢;齊桓以霸,景公以治。作管晏列傳第二。
안자(晏子)는 검소했고, 관중(管仲)은 사치스러웠다.
제 환공(齊 桓公)은 관중으로 인하여 패자(覇者)가 되었고,
제 경공(齊 景公)은 안자로 인하여 나라를 잘 다스렸다.
이에 제2편 ‘관안열전(管晏列傳)’를 지었다.
82
李耳無為自化,清凈自正;韓非揣事情,循埶理。作老子韓非列傳第三。
노자(老子:李耳)는 ‘내가 무위(無爲)로 대하면 백성들은 감화되고,
내가 고요히 있는 것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바르게 된다.’고 하였다.
한비(韓非)는 사물의 정황을 헤아려 사물의 추세와 도리를 준수하였다.
이에 제3편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을 지었다.
83
自古王者而有司馬法,穰苴能申明之。作司馬穰苴列傳第四。
옛날부터 제왕들에게도 사마법(司馬法)이 있었는데
사마양저(司馬穰苴)가 이를 분명히 설명할 수 있었다.
이에 제4편 ‘사마양저열전(司馬穰苴列傳)’을 지었다.
84
非信廉仁勇不能傳兵論劍,與道同符,內可以治身,外可以應變,君子比德焉。作孫子吳起列傳第五。
믿음과 청렴, 어짊과 용기가 없이는 병법을 전수하고 검술을 논할 수 없으며,
병법과 검술이 서로 부합되면
안으로는 자신의 몸을 다스릴 수 있고 밖으로는 임기응변할 수 있으니
군자는 이를 기준으로 덕에 접근하였다.
이에 제5편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을 지었다.
85
維建遇讒,爰及子奢,尚既匡父,伍員奔吳。作伍子胥列傳第六。
태자 건(太子 建)이 참소를 당하자 그 화가 오자사(伍子奢)에게 미쳤다.
오상(伍尙)은 아버지를 구하려다 잡히고 오원(伍員:오자서)은 오(吳)나라로 달아났다.
이에 제6편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을 지었다.
86
孔氏述文,弟子興業,咸為師傅,崇仁厲義。作仲尼弟子列傳第七。
공자(孔子)가 문덕(文德)을 전수하니 제자들이 이를 크게 발전시켰으며,
그들은 모두가 사람들의 스승이 되어 인을 숭상하고 의를 행하게 했다.
이에 제7편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을 남겼다.
87
鞅去衛適秦,能明其術,彊霸孝公,後世遵其法。作商君列傳第八。
상앙(商鞅)이 위(衛)나라를 떠나 진(秦)나라로 가서 법가의 학술을 밝히니
효공(孝公)은 강성해져 패자(覇者)로 칭해졌으며,
후세 사람들이 그의 법도를 그대로 지키며 따랐다.
이에 제8편 ‘상군열전(商君列傳)’을 지었다.
88
天下患衡秦毋饜,而蘇子能存諸侯,約從以抑貪彊。作蘇秦列傳第九。
천하가 진나라의 연횡책과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을 걱정하자 소진(蘇秦)이 합종을 내세워 제후국을 존립하게 하고
합종의 맹약을 맺게 하여 탐욕스럽고 강한 진나라를 억제하였다. 이에 제9편 ‘소진열전(蘇秦列傳)’을 지었다.
89
六國既從親,而張儀能明其說,復散解諸侯。作張儀列傳第十。
6국이 합종(合縱)하여 서로 친근해지자
장의(張儀)는 연횡(連橫)을 내세워 제후국들을 다시 흩어 놓았다.
이에 제10편 ‘장의열전(張儀列傳)’을 지었다.
90
秦所以東攘雄諸侯,樗裏、甘茂之策。作樗裏甘茂列傳第十一。
진(秦)나라가 동쪽의 제후국들을 물리치고 제후들에게 군림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저리자(樗里子)와 감무(甘茂)의 책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제11편 ‘저리감무열전’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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