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ko.wikipedia.org/wiki/%ED%95%A8%EC%96%91_%EC%83%81%EB%A6%BC

 

함양 상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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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상림은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1962년 12월 3일 지정되었다. 상림의 면적은 약 21 헥타르(ha)이고 각종 수목 2만여 그루가 살고 있다. 전형적인 온대남부 낙엽활엽수림으로 잘 보존되고 있어 인공 숲으로서의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일명 대관림(大舘林), 선림(仙林)이라고도 하는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으로 400여 종의 수목이 있어서 식물학상으로도 좋은 연구 거리가 된다. 봄 꽃,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으로 예부터 유명한 곳이다.[1] 1,100여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어 "천년의 숲"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공원 주변에 연꽃단지와 위천천의 맑은 물이 있어 년중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공원이다.

역사

함양상림공원의 유래는 신라 진성여왕때 고운 최치원 선생이 천령군(함양군의 옛명칭)의 태수로 있으면서 백성을 재난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조성하였다. 당시에는 위천강이 함양읍의 중앙을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홍수가 빈번하였다. 이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 강물을 돌리고 둑을 쌓고, 둑 옆에 나무를 싶어 가꾸었다. 처음에는 대관림이라고 불렀으나, 이후 큰 홍수가 나서 중간부분이 유실되어 상림과 하림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하림은 많이 훼손되었으나, 상림은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남아 있는 부분의 이름만을 따서 상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https://dk-choi.tistory.com/7275387

 

상림공원(上林公園)/함양(咸陽)

                                 상림공원(上林公園) / 함양(咸陽) ☞ 경상남도(慶尙南道) 함양군(咸陽郡) 상림공원(上林公園) 상림공원(上林公園) 위치 [●] <다음지도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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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n_Eau_hMnZ4 

 

 

https://www.youtube.com/watch?v=JWfjQLAxbHg 

 

 

 

 

 

난랑비서(鸞郞碑序)

ㅡ崔致遠(최치원)

* '鸞郞'은 화랑의 이름.

國有玄妙之道曰風流

(국유현묘지도왈풍류) : 나라의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設敎之源

(설교지원) : 그 교를 창설한 내력은

備詳仙史

(비상선사) : 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實乃包含三敎

(실내포함삼교) : 실은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여

接化群生

(접화군생) : 군생을 접화하는 것이다.

且如入則孝於家

(차여입즉효어가) : 들어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出則忠於國

(출즉충어국) :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魯司寇之旨也

(노사구지지야) : 노사구 공자의 뜻과 같은 것이요.

處無爲之事

(처무위지사) :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行不言之敎

(행부언지교) : 말하지 않은 교를 행함은
周柱史之宗也*2)

(주주사지종야) : 주주사의 종지와 같은 것이요.

諸惡莫作

(제악막작) : 악한 일은 하지 말고

諸善奉行

(제선봉행) : 선한 일은 받들어 행하는 것은

竺乾太子之化也

(축건태자지화야) : 축건태자의 교화이다.

*1) 鸞郞은 화랑(花郞)이었다.화랑정신은 유불선 삼교의 가르침이 그 바탕이다.

*2)노자 도덕경

가르침을 행하는데 말이 없으며, 만물을 만들었어도 자랑하지 않는다.
Administer a 'no words' teaching.
The ten-thousand natural kinds work by it and don't make phrases.
(道德經 115-127)

출처 : 백제뉴스(http://www.ebaekje.co.kr)

 

출처: https://hwalove.tistory.com/entry/鸞郞碑序난랑비서-崔致遠최치원 [빈막(賓幕):티스토리]

 

[군말]

붓다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아래의 '諸惡莫作  諸善奉行'이다

諸惡莫作

(제악막작) : 악한 일은 하지 말고

諸善奉行

(제선봉행) : 선한 일은 받들어 행하는 것은

竺乾太子之化也

(축건태자지화야) : 축건태자의 교화이다.

 

 

https://kydong77.tistory.com/21440

 

함양(咸陽) 상림(上林)공원의 꽃양귀비밭 外/최치원이 조성한 인공숲

https://www.youtube.com/watch?v=xj-GuEd6pts https://www.youtube.com/watch?v=eU05b6hQq8o https://www.youtube.com/watch?v=HiXI5ugYt6I https://www.youtube.com/watch?v=i_8LqZgGNqo https://www.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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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eU05b6hQq8o 

 

 

https://www.youtube.com/watch?v=HiXI5ugYt6I 

 

 

https://www.youtube.com/watch?v=i_8LqZgGNqo 

 

 

https://www.youtube.com/watch?v=3bJF0Drv30g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1440

 

[운영자 군말]

최치원은 한국 최고의 천재 지성이고 문장가이다.

kydong77.tistory.com/18891

 

최치원, 雙女墳傳記/ 傳記小說

https://www.youtube.com/watch?v=QCSi50s5xQA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4/04/649497/ 최치원의 쌍녀분(雙女墳)을 찾아서 - 매일경제 난징의 봄은 스산함과 화사함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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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5685

 

사산비명(四山碑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라 불교사에서 우뚝한 위치를 차지하는 세 선사(禪師)의 일생 행적과 화엄종 계열의 왕실 원찰(願刹)인 대숭복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문으로서, 사비명(寺碑銘)의 찬술은 『문선(文選)』에 �

encykorea.aks.ac.kr

 

①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 터에 있는 

숭엄산성주사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崇嚴山聖住寺大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銘)주 01),

②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경내에 있는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령탑비명(智異山雙溪寺眞鑑禪師大空靈碑銘)주 02),

③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 말방리 대숭복사에 있었던 초월산대숭복사비명(初月山大崇福寺碑銘),

④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면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는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曦陽山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주 03)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9525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kydong77.tistory.com/6528

 

최치원의 시무십조(時務十條)/ 최승로, 시무 28조/ 조은산, 時務七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11 최치원(崔致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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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시무십조

* 임금의 덕화는 치우침도 편벽함도 없어야 한다.

* 정치는 을 가지고 근본을 삼고 ........백성을 건져주는 것으로서 仁을 이룬다.

* 신하를 알아보기는 어진 임금밖에 없다

* 비상한 인재가 있어야 비상한 일이 있고 비상한 일이 있어야 비상한 공이 있다.

* 천하를 다스리려면 먼저 부정 출세를 막아야 하고 어진 선비의 진출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 장차 곤궁에 빠진 백성을 살리려면 진실로 유능한 관리들에게 의지해야 할 것이다.

* 아래사람이 이탈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대개 윗사람이 온전한 덕이 없기 때문이다.

* 예나 지금이나 사치란 다 몸을 망치는 법이다.

* 풍속을 순화시키는 데 제일 먼저 할 일은 권농(勸農)이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9525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1440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https://adipo.tistory.com/entry/%EC%B5%9C%EC%B9%98%EC%9B%90-%EC%8B%9C%EB%AC%B410%EC%A1%B0-%ED%9B%88%EC%9A%9410%EC%A1%B0-%EC%B5%9C%EC%8A%B9%EB%A1%9C-%EC%8B%9C%EB%AC%B428%EC%A1%B0-%EC%B5%9C%EC%B6%A9%ED%97%8C-%EB%B4%89%EC%82%AC10%EC%A1%B0

 

최치원 시무10조, 훈요10조, 최승로 시무28조, 최충헌 봉사10조

최치원 시무 10조 - 신라 하대 - 당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6두품 최치원, 진성여왕 - ​원문이 정확히 전하지는 않지만, 당시 신라의 폐쇄적 골품제를 비판하고,    과거제 실시와 유교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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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建)

훈요 10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내려 자신의 자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 원칙으로 삼게 하였고 후대 왕들은 이를 귀감으로 삼았다.

  • 첫째, 불교를 진흥시키되 승려들의 사원 쟁탈을 금지할 것.
  • 둘째, 사원의 증축을 경계할 것
  • 셋째, 서열에 관계 없이 덕망이 있는 황자에게 황위를 계승하게 할 것.
  • 넷째, 중국 풍습을 억지로 따르지는 말고, 거란의 풍속과 언어는 본받지 말 것.
  • 다섯째, 서경에 1백 일 이상은 머물러 황실의 안녕을 도모할 것
  • 여섯째,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를 증감하지 말고 원래 취지대로 유지할 것
  • 일곱째, 상벌을 분명히 하고 참소를 멀리하며 간언에 귀를 기울여, 백성들의 신망을 잃지 말 것
  • 여덟째, 차령산맥 이남이나 공주강 외곽 출신은 반란의 염려가 있으므로 벼슬을 주지 말 것
  • 아홉째, 백관의 녹봉을 함부로 증감하지 말고, 병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매년 무예가 특출한 사람에게 적당한 벼슬을 줄 것
  • 열째, 경전역사서를 널리 읽어 옛일을 교훈삼아 반성하는 자세로 정사에 임할 것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10401&tabId=01&levelId=hm_045_0030 

 

우리역사넷

이 사료는 943년(태조 26년) 4월 태조(太祖, 재위 918~943)가 대광 박술희(朴述希, ?~945)를 불러 자신의 정치적 경험을 바탕으로 후대 왕들이 경계해야 할 내용을 정리하여 준 훈요십조이다. 구성은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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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우리나라의 대업은 분명히 여러 부처가 지켜 준 데 힘을 입은 것이다. 그렇기에 선종과 교종 사원을 창건하고 주지(住持)를 파견해 불도를 닦도록 하여 각각 그 업(業)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후세에 간신이 정권을 잡아 승려의 청탁을 따르면 각자가 사원을 경영하면서 서로 바꾸고 빼앗게 될 것이니 반드시 이것을 금지하라.

둘째, 모든 사원은 도선이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을 계산하여 개창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지정한 곳 외에 함부로 더 창건하면 지덕(地德)을 상하게 하여 왕업이 길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때문에 짐은 후세의 국왕⋅공후⋅후비⋅조신(朝臣)들이 각각 원당(願堂)을 핑계로 혹여 사원을 더 창건한다면 큰 걱정거리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신라 말에 절을 다투어 짓더니 지덕을 손상하여 망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겠는가?

셋째, 맏아들에게 나라를 전하는 것이 비록 보편적인 예법이기는 하지만, 단주(丹朱)가 어질지 못하여 요가 순에게 선양한 것은 참으로 공명정대한 마음에서 나온 일이었다. 만약 원자가 어질지 못하면 그 다음 아들에게 전하고, 그 아들도 그러하거든 형제 중에서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는 자에게 전하여 주어 대통을 계승하게 하라.

넷째, 우리 동방은 예부터 당나라의 풍속을 본받아 문물과 예악이 다 그 제도를 준수하여 왔으나 그 지역이 다르고 인성이 각기 다르니 분별없이 똑같이 할 필요는 없다.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인지라 풍속이 같지 않고 언어도 다르니 복식 및 제도 등을 삼가 본받지 말라.

다섯째, 짐은 삼한의 산천 신령의 도움에 힘입어 대업을 성취하였다.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며 대업을 만대에 전할 땅인 까닭에 마땅히 사중월(四仲月)에는 행차하여 100일 이상 머물며 안녕을 이루도록 하라.

여섯째, 짐이 지극히 원하는 바는 연등(燃燈)과 팔관(八關)에 있으니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며 팔관은 천령(天靈) 및 오악(五嶽), 명산, 대천과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후세에 간사한 신하가 더하고 줄일 것을 권하는 자가 있거든 필히 그것을 금지하라. 나도 당초부터 맹세하여 회일(會日)이 나라의 기일(忌日)과 맞물리지 않게 하고 임금과 신하가 같이 즐겁게 하였으니 마땅히 삼가 뜻을 받들어 행하라.

일곱째, 임금이 백성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심히 어려우므로 그 마음을 얻고자 하려면 간언을 따르고 참소를 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간언을 따르면 성군이 될 것이니 참언은 꿀 같아도 믿지 않으면 스스로 그치게 된다. 또 때를 가려 백성을 부리고 요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를 적게 하며 농사일의 어려움을 안다면 저절로 민심을 얻어 나라는 부유해지고 백성은 평안해질 것이다. 옛사람이 ”좋은 미끼를 드리우면 반드시 고기가 걸려들고 상을 후하게 주면 반드시 좋은 장수가 나온다. 활을 당기면 반드시 피하는 새가 있고 인(仁)을 베푸는 정치가 있으면 반드시 선량한 백성이 모여든다”고 하였으니 상벌이 공평하면 음양이 순조로워질 것이다.

여덟째, 차현(車峴)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밖은 산의 모양과 땅의 형세가 함께 개경과 반대 방향으로 뻗었는데 그 지역 사람의 마음도 또한 그러하다. 저 아래 고을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王侯), 국척(國戚)과 혼인하고 국정을 잡으면 나라를 어지럽게 하거나 나라를 병합당한 원한을 품고 임금을 시해하려 난을 일으킬 것이다. 또 일찍이 관청의 노비와 진⋅역(津⋅驛)의 잡척(雜尺)에 속하던 무리가 권세에 빌붙어 신분을 바꾸거나 종실⋅궁원(宮院)에 빌붙어 말을 간교하게 하여 권세를 농락하고 정사를 어지럽혀 재앙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벼슬을 주어 일을 맡기지는 말라.

아홉째, 문무백관의 녹봉은 나라의 규모를 보아 정한 것이니 함부로 늘리거나 줄여서는 안 된다. 게다가 고전(古典)에 이르기를, “공적(功績)으로써 녹(祿)을 제정할 것이며 관작(官爵)을 사사로운 정으로 다루지 말라”고 하였으니 만약 공이 없는 사람이나 친척이나 사사로이 친한 사람들로 헛되이 천록(天祿)을 받게 하면 백성들이 원망하고 비방할 뿐만 아니라, 그 본인들도 역시 복록(福祿)을 길이 누리지 못할 것이니 절실히 경계해야 한다. 또 강하고 포악한 나라와 이웃하고 있으므로 평안한 때에 위태함을 잊지 말 것이다. 병졸에게는 마땅히 보호와 구휼을 더하고 요역을 면해 줄 것이며, 매년 가을마다 용기와 기개가 빼어난 가려 편의에 따라 벼슬을 올려 주도록 하라.

열째,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근심이 없는 때에 경계하고 널리 경사(經史)를 보아 옛일을 거울삼아 오늘을 경계하여야 한다. 주공(周公)3) 같은 대성(大聖)도 「무일(無逸)」 1편4)을 성왕(成王)5)에게 바쳐 경계하였으니 마땅히 이것을 그림으로 붙여 놓고 들어오고 나갈 때 보고 반성하도록 하라” 하였다.

십훈(十訓)의 끝은 다 ’중심장지’의 네 글자로 끝을 맺었는데 후대 왕들은 서로 전하며 보감(寶鑑)으로 삼았다.

『고려사』권2, 「세가」2 태조 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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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로(崔承老)의 시무28조(時務二十八條) 전문

신이 비록 어리석고 몽매하나 외람되이 국가의 요직에 있으면서 이미 아뢰려는 마음도 있기도 하고 또 회피할 길도 없으므로 삼가 비루한 소견을 기록하니, 시무책 28조에 지나지 않지만,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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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나라가 삼한을 통일한 지가 47년이지만, 병사들이 아직 편안히 잠을 자지 못하고 군량[糧餉]을 소비해야만 하는 것은, 서북쪽이 戎狄과 이웃하여 방위해야 할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바라옵건대 聖上께서는 이러한 일을 염두에 두십시오. 대체로 馬歇灘을 경계로 삼자는 것은 태조의 뜻이며, 압록강가의 石城을 경계로 삼자는 것은 중국[大朝]이 정한 것입니다. 간청하건대 장차 이 두 곳 중 성상께서 마음속으로 판단하셔서 요충지를 가려 강역을 정하시길 바랍니다. 토착인으로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는 사람들을 뽑아서 그 곳의 방어에 충당하게 하고, 또한 그 가운데 두 세 명의 偏將을 뽑아서 이들을 통솔하게 하시면 京軍들은 교대로 경비하는 노고를 면할 수 있으며, 말먹이[芻]와 군량[粟]은 급히 운반하는[飛挽] 데에 드는 비용을 줄일 것입니다.

(一) 我國家, 統三以來四十七年, 士卒未得安枕, 糧餉未免糜費者, 以西北隣於戎狄, 而防戍之所多也. 願聖上, 以此爲念. 夫以馬歇灘爲界, 太祖之志也, 鴨江邊石城爲界, 大朝之所定也. 乞將此兩處, 斷於宸衷, 擇要害, 以定疆域. 選土人能射御者, 充其防戍, 又選其中二三偏將, 以統領之, 則京軍免更戍之勞, 芻粟省飛挽之費矣.

2.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는 功德齋를 지내기 위하여 때로는 친히 맷돌에 차를 갈기도 하시고 때로는 보리를 찧는다고 하시니, 저의 어리석은 마음에는 상께서 친히 근로하시는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폐단은 광종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남을 헐뜯는 말을 믿고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는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현혹되어 자신의 죄과를 없애고자 하여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佛事를 많이 일으키셨습니다. 때로는 毗盧遮那懺悔法을 베풀기도 하고, 또 毬庭에서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양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歸法寺에서 無遮會와 水陸會를 열기도 하셨습니다. 매번 부처에게 재를 올리는 날이 되면 반드시 걸식하는 승려들을 공양하셨고, 때로는 內道場의 떡과 과일을 걸인[丐者]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또 新池・穴口 및 摩利山 등지의 魚梁을 방생하는 장소로 삼았고, 1년에 4번 使者를 보내어 그 지방의 사원에 나아가 佛經을 개설하여 익히게 하였습니다. 또 살생을 금지하여 왕실 주방에서의 고기반찬은 요리사[宰夫]에게 짐승을 도살하지 못하게 하고 시장에서 사서 바치게 하셨습니다. 더욱이 대소 臣民들로 하여금 모두 다 참회하도록 하여, 쌀과 잡곡・땔나무와 숯・건초와 콩을 메거나 지고서 서울과 지방의 길에서 거저 주게 한 것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동안에 남을 헐뜯는 말을 믿고 사람을 초개와 같이 여겨 베어 죽인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항상 백성의 고혈을 다 써서 재를 지내는데 공양하셨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자식이 부모를 등지고, 노비가 주인을 배반하며, 여러 범죄자들은 변장하고 승려 및 떠돌아다니는 거지의 무리로 되어 여러 승려들과 함께 와서 서로 섞여 재 올리는 곳으로 나오는 자 또한 많았으니, 무슨 이익이 있었겠습니까? 지금 성상께서 왕위에 계시면서 실행하신 일들이 광종과는 같지 않으시나, 다만 이런 몇 가지 일들은 단지 성상의 몸을 수고롭게 할 뿐이고 이익을 얻을 바는 아닙니다. 바라옵건대 군왕의 도리를 바르게 하시고, 무익한 일은 하지 마시옵소서. 

(一) 竊聞聖上, 爲設功德齋, 或親碾茶, 或親磨麥, 臣愚深惜聖體之勤勞也. 此弊始於光宗, 崇信讒邪, 多殺無辜, 惑於浮屠果報之說, 欲除罪業, 浚民膏血, 多作佛事. 或設毗盧遮那懺悔法, 或齋僧於毬庭, 或設無遮水陸會於歸法寺. 每値佛齋日, 必供乞食僧, 或以內道場餠果, 出施丐者. 或以新池・穴口與摩利山等處魚梁, 爲放生所, 一歲四遣使, 就其界寺院, 開演佛經, 又禁殺生, 御廚肉膳, 不使宰夫屠殺, 市買以獻. 至令大小臣民, 悉皆懺悔, 擔負米穀・柴炭・蒭豆, 施與中外道路者, 不可勝紀. 然以旣信讒愬, 視人如草莽, 誅殺者堆積如山, 常竭百姓膏血, 以供齋設. 當是時, 子背父母, 奴婢背主, 諸犯罪者, 變形爲僧及遊行丐乞之徒, 來與諸僧, 相雜赴齋者亦多, 有何利益? 今聖上在位, 所行之事, 與彼不同, 但此數事, 只勞聖體, 無所得利. 願正君王之體, 不爲無益之事.

3. 우리 조정의 侍衛 군졸들은, 태조시대에는 궁성 宿衛에만 충당하여 그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광종께서 참소를 믿게 되자 장수와 재상들을 엄히 책망하시고, 스스로 의심을 품어 군사의 수를 더욱 늘리셨습니다. 州郡에 풍채 좋은 사람이 있으면 가려 선발하여 대궐 안에 들여 시위하게 하고, 모두 궁궐의 주방에서 먹게 하셨습니다. 당시의 의논은 번잡하고 무익하다고 여겼습니다. 경종 때에 이르러 비록 약간 줄였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수가 많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태조의 법을 준수하시어 다만 날래고 용감한 사람만 머무르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만두게 하여 돌려보내시면, 사람들 사이에는 원망이 없을 것이고 나라에는 재물이 비축될 것입니다. 

(一) 我朝侍衛軍卒, 在太祖時, 但充宿衛宮城, 其數不多. 及光宗信讒, 誅責將相, 自生疑惑, 增益軍數. 簡選州郡有風彩者入侍, 皆食內廚. 時議以爲繁而無益. 至景宗朝, 雖稍减削, 洎于今時, 其數尙多. 伏望遵太祖之法, 但留驍勇者, 餘悉罷遣, 則人無嗟怨, 國有儲積.

4. 聖上께서는 장・술・메주・국을 길에서 베풀어주십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성상께서는 광종을 본받아 죄의 업보를 없애고 인연을 맺는 뜻을 널리 베풀고자 하시지만, 이는 이른바 작은 은혜는 널리 미치지 못하는 바입니다. 만약 상벌을 명확히 하여 악한 것을 징계하고 선을 권장하신다면, 족히 福이 다다를 것입니다. 이처럼 사소한 일은 임금이 정치하는 도리가 아니니, 이를 없애시길 간청합니다. 

(一) 聖上以醬・酒・豉・羹, 施與行路. 臣竊謂, 聖上欲效光宗, 消除罪業, 普施結緣之意, 此所謂小惠未遍也. 若明其賞罰, 徵惡勸善, 足以致福. 如此碎事, 非人君爲政之體, 乞罷之.

5. 우리 태조께서는 참으로 事大에 힘쓰셨으나, 오히려 몇 해에 한 번씩 사신[行李]을 보내시어 聘禮를 행하셨을 따름이었습니다. 지금은 방문하는 사신뿐만 아니라 무역으로 인해 使命을 띤 사람들[使价]이 번거롭게 많으니, 중국에서 천하게 여길까 염려됩니다. 또한 〈잦은〉 왕래로 배가 난파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요청하건대 지금부터는 교빙하는 사신에게 무역을 겸하여 행하게 하고, 그 나머지 때에 맞지 않는 매매는 모두 금지하십시오. 

(一) 我太祖情專事大, 然猶數年一遣行李, 以修聘禮而已. 今非但聘使, 且因貿易, 使价煩夥, 恐爲中國之所賤. 且因往來, 敗船殞命者多矣. 請自今, 因其聘使, 兼行貿易, 其餘非時買賣, 一皆禁斷.

6. 모든 佛寶의 돈과 곡식은 여러 사원의 승려들이 각기 주・군에 사람을 보내어 그것을 관리하게 하고, 해마다 이자를 받아 백성을 괴롭히고 어지럽게 합니다. 요청하건대 이를 모두 금지하고, 그 돈과 곡식을 사원의 田莊으로 옮겨 두도록 하십시오. 만약 그 主典 중에 田丁이 있으면 아울러 거두어 들여 사원의 莊과 所에 소속시킨다면, 백성들의 피해가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一) 凡佛寶錢穀, 諸寺僧人, 各於州郡, 差人勾當, 逐年息利, 勞擾百姓. 請皆禁之, 以其錢穀, 移置寺院田莊. 若其主典有田丁者, 幷取之, 以屬于寺院莊所, 則民弊稍减矣.

7. 왕이 백성을 다스린다고 해서 집집마다 가거나 날마다 그들을 살펴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수령을 나누어 보내어 가서 백성의 이익과 손해를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태조[聖祖]께서 통일하신 후에 外官을 두고자 하셨으나, 대개 초창기였으므로, 일이 번잡하여 미처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 제가 보건대 향리의 토호들이 늘 公務를 빙자하여 백성들을 침해하고 학대하므로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니, 요청하건대 외관을 두시옵소서. 비록 일시에 모두 다 보낼 수 없을지라도, 우선 10여 개 州縣에 합하여 1명의 관리를 두고, 그 아래 각기 2, 3명의 관원을 두어서 위임하여 백성을 어루만지며 돌보게 하시옵소서. 

(一) 王者之理民, 非家至而日見之. 故分遣守令, 往察百姓利害. 我聖祖統合之後, 欲置外官, 盖因草創, 事煩未遑. 今竊見, 鄕豪每假公務, 侵暴百姓, 民不堪命, 請置外官. 雖不得一時盡遣, 先於十數州縣, 幷置一官, 官各設兩三員, 以委撫字.

8. 엎드려 보건대 성상께서는 使者를 보내시어 屈山의 승려 如哲을 맞아 대궐로 불러 들이셨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여철이 과연 사람들에게 복을 비는 사람이라면, 그가 사는 곳의 물과 흙도 역시 성상의 소유이고, 아침저녁으로 먹는 음식도 또한 성상께서 하사하신 것이오니, 반드시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늘 복 비는 것을 일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 번거롭게 대궐로 맞아들인 연후에야 감히 복을 베푸는 것입니까? 이전에 善會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요역을 피할 것을 도모하여 출가해서 산에 살았습니다. 광종께서는 〈그에게〉 공경을 다하고 예의를 다하셨습니다. 갑자기 선회가 길가에서 참혹하게 죽어서 그의 시신이 길에 뒹굴며 이슬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 같은 평범한 승려가 자기 자신 또한 화를 당하는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복을 빌 겨를이 있겠습니까? 요청하건대 여철을 산으로 돌려보내시어 선회와 같은 비난을 받지 않게 하시옵소서. 

(一) 伏見, 聖上遣使, 迎屈山僧如哲入內. 臣愚以爲, 哲果能福人者, 其所居水土, 亦是聖上之有, 朝夕飮食, 亦是聖上之賜, 必有圖報之心, 每以祝釐爲事. 何煩迎致, 然後敢施福耶? 曩者, 有善會者. 規避徭役, 出家居山. 光宗致敬盡禮. 卒之善會, 暴死道傍, 曝露其尸. 如彼凡僧, 身且取禍, 何暇福人? 請放哲還山, 免致善會之譏.

9. 신라 때에 公卿・百僚・庶人의 의복・신발・버선에는 각기 品色이 있었습니다. 공경과 백료는 조회 시에는 公襴을 입고 穿執을 갖추었으나, 조회에서 물러나오면 便服을 입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무늬 있는 옷을 입을 수 없었는데, 귀천을 나누고 존비를 분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공란은 비록 토산품이 아니라도 백관들이 스스로 만족하며 사용하였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태조 이래로 귀천을 논하지 않고 마음대로 옷을 입었습니다. 비록 관직이 높아도 집이 가난하면 공란을 갖출 수 없고, 관직이 없어도 집이 부유하면 綾羅錦繡를 입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물건은 좋은 것이 적고 조잡한 것이 많습니다. 무늬가 있는 것은 토산품이 아닌데도 사람마다 입을 수 있으니, 염려스러운 것은 다른 나라 사신을 맞이할 때에 백관의 예복이 법식에 맞지 않아서 수치를 당할까 하는 것입니다. 간청하건대 관료들이 조회에서는 모두 중국과 신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공란과 천집을 갖추도록 하고, 일을 아뢸 때에는 버선신・명주신・가죽신을 신도록 하며, 서인들은 화려한 문양과 주름이 잡힌 고운 비단[紗縠]을 입을 수 없게 하고 다만 굵은 명주[紬絹]만 입도록 하십시오.

(一) 新羅之時, 公卿百僚庶人, 衣服鞋襪, 各有品色. 公卿百僚, 朝會, 則著公襴具穿執, 退朝, 則逐便服之. 庶人百姓不得服文彩, 所以別貴賤, 辨尊卑也. 由是, 公襴雖非土産, 百僚自足用之. 我朝自太祖以來, 勿論貴賤, 任意服着. 官雖高而家貧, 則不能備公襴, 雖無職而家富, 則用綾羅錦繡. 我國士宜, 好物少而麤物多. 文彩之物, 皆非土産, 而人人得服, 則恐於他國使臣迎接之時, 百官禮服, 不得如法, 以取恥焉. 乞令百僚朝會, 一依中國及新羅之制, 具公襴穿執, 奏事之時, 着袜靴・絲鞋・革履, 庶人不得着文彩紗縠, 但用紬絹.

10. 제가 듣건대 僧人들이 군현을 왕래하면서 館・驛에 유숙하며 향리와 백성들을 채찍으로 때리며 그들의 영접[迎候]과 공급이 더디다고 꾸짖는데도, 향리와 백성들은 그들의 銜命에 의문이 들어도 두려워 감히 말하지 못하니 폐단이 더할 수 없이 큽니다. 지금부터 승도들이 관・역에 유숙하는 것을 금지시켜 그 폐단을 제거하십시오.

(一) 臣聞僧人, 往來郡縣, 止宿館驛, 鞭撻吏民, 責其迎候供億之緩, 吏民疑其銜命, 畏不敢言, 弊莫大焉. 自今, 禁僧徒止宿館驛, 以除其弊.

11. 중국[華夏]의 제도는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하의 습속은 각기 그 지역의 특성을 따르는 것이므로, 모두 바꾸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禮樂이나 詩書의 가르침과 군신・부자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을 모범으로 삼아서 비루한 습속을 개혁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 車馬・의복 제도는 토착적인 풍속을 따를 수 있게 하여 사치와 검약을 적절히 하되 중국과 꼭 같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一) 華夏之制, 不可不遵. 然四方習俗, 各隨土性, 似難盡變. 其禮樂詩書之敎, 君臣・父子之道, 宜法中華, 以革卑陋, 其餘車馬・衣服制度, 可因土風, 使奢儉得中, 不必苟同.

12. 여러 섬의 주민들은 그 조상의 죄 때문에 바다 가운데서 낳고 자랐으나, 토지에서는 먹을 것이 나지 않아 생계가 매우 어렵습니다. 게다가 光祿寺에서 수시로 징발하고 요구하므로, 날로 곤궁해지고 있습니다. 청컨대 주・군의 사례에 따라 그들의 貢役을 공평하게 해 주시옵소서. 

(一) 諸島居民, 以其先世之罪, 生長海中, 土無所食, 活計甚難. 又光祿寺徵求無時, 日至窮困. 請從州郡之例, 平其貢役.

13. 우리나라는 봄에 燃燈會를 열고 겨울에 八關會를 개최하여 사람들을 널리 징발해 勞役이 대단히 번거로우니, 원컨대 이를 대폭 줄여 백성의 수고를 덜어 주십시오. 또한 여러 종류의 偶人을 만드느라 공역과 비용이 매우 많이 드는데, 한번 〈의례에〉 올려 진 뒤 부수어 버리는 것 역시 심각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인은 喪禮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데, 西朝의 사신이 예전에 와서 이것을 보고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던 일도 있으니, 바라옵건대 지금부터는 이것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시옵소서. 

(一) 我國, 春設燃燈, 冬開八關, 廣徵人衆, 勞役甚煩, 願加减省, 以紓民力. 又造種種偶人, 工費甚多, 一進之後, 便加毁破, 亦甚無謂也. 且偶人非凶禮不用, 西朝使臣, 嘗來見之, 以爲不祥, 掩面而過, 願自今, 勿許用之.

14. 『周易』에서 이르기를, ‘성인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니 천하가 화평해진다.’고 하였습니다. 『論語』에서도 이르기를, ‘하는 일 없듯이 다스린 사람은 아마도 순임금일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였는가? 공손히 자신을 바르게 하여 南面 하였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인이 하늘과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순일한 덕이 있고 사사로운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상께서 마음을 절제하시고 겸손하시며[撝謙], 늘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신하를 예의로 대우하시면, 누구든 마음과 힘을 다해 나와서는 좋은 계책을 아뢰고 물러가서는 국정을 바로잡아 도울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왕이 신하를 예의로써 부리면 신하는 왕을 충성으로써 섬긴다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날마다 하루하루를 삼가시고, 스스로 교만하지 않으시며, 신하를 대할 때 공손하시고, 만일 죄지은 사람이 있어 그 輕重을 법대로 논의하신다면, 태평의 위업을 곧 기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一) 易曰, ‘聖人感人心而天下和平.’ 語曰, ‘無爲而治者, 其舜也歟.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 聖人所以感動天人者, 以其有純一之德, 無私之心也. 若聖上執心撝謙, 常存敬畏, 禮遇臣下, 則孰不罄竭心力, 進告謀猷, 退思匡贊乎? 此所謂,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者也. 願聖上, 日愼一日, 不自驕滿, 接下思恭, 儻或有罪者, 輕重並論如法, 則太平之業, 可立待也.

15. 태조께서는 궁내에 소속된 노비가 궁궐에서 공역할 때를 제외하고는 밖으로 나가 교외에 살면서 토지를 경작하여 세를 바치게 하였습니다. 광종 때에 이르러 佛事를 많이 일으켜 부리는 일[役使]이 날로 많아지니, 곧 밖에 살던 노비까지 징발하여 부역에 충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內宮의 몫[分]으로는 경비 지급이 부족하여 창고의 쌀까지도 소비하게 되었습니다. 성상의 시대에도 그 폐단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또 궁궐 내에서 기르는 말의 수가 많으니 헛되이 소비하는 것이 매우 많아, 백성들이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만약 국경에 환란이 있게 되면, 군량이 원활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오로지 태조의 제도에 의거하여 궁궐 안의 노비・마구간에 있는 말의 수를 헤아려 결정하시고, 나머지는 모두 밖으로 내보내십시오. 

(一) 太祖除內屬奴婢, 在宮供役外, 出居外郊, 耕田納稅. 至光宗, 多作佛事, 役使日繁, 乃徵在外奴婢, 以充役使. 內宮之分, 不足支給, 幷費倉米. 及乎聖朝, 弊猶未除. 且內廐養馬數多, 糜費甚廣, 民受其害. 如有邊患, 糧餉不周. 願聖上一依太祖之制, 酌定宮中奴婢・廐馬之數, 餘悉分遣於外.

16. 세속에서는 선을 행한다[種善]는 명목으로 각기 소원에 따라 불전[佛宇]을 지으니, 그 수가 매우 많습니다. 게다가 중앙과 지방의 승려들도 자기가 거주할 곳을 마련하고자 다투어 공사를 행하고 있고, 널리 주군의 長吏들을 권유하여 백성을 징발하여 부역시키게 합니다. 〈이 일이〉 공역보다 급하여, 백성들이 매우 괴롭습니다. 바라옵건대 엄중하게 이를 금지시켜 백성들의 勞役을 없애 주십시오. 

(一) 世俗以種善爲名, 各隨所願, 營造佛宇, 其數甚多. 又有中外僧徒, 欲爲私住之所, 競行營造, 普勸州郡長吏, 徵民役使. 急於公役, 民甚苦之. 願嚴加禁斷, 以除百姓勞役.

17. 『禮記』에 이르기를, ‘天子의 집은 9척이고, 諸侯의 집은 7척이다.’라고 하였으니, 나름대로 정해진 제도가 있습니다. 근래에는 사람들이 尊卑와 상관없이 단지 재력만 있으면 모두 집 짓는 일을 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주·군·현 및 亭・驛・津・渡의 세력가[豪右]들이 경쟁하듯 큰 집을 지어 제도를 위반하게 되니, 이는 다만 한 가문의 힘을 다하는 것 뿐 아니라 실로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 그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禮官에게 명령하셔서 존비에 따른 가옥의 제도를 참작하여 정하도록 하고, 중앙과 지방에서 이를 준수하게 하며, 이미 지어졌지만 〈제도를〉 위반한 것은 또한 헐어버리게 하여, 후대를 경계하도록 하십시오. 

(一) 禮云, ‘天子堂九尺, 諸侯堂七尺.’ 自有定制. 近來人無尊卑, 苟有財力, 則皆以營室爲先. 由是, 諸州郡縣及亭・驛・津・渡豪右, 競構大屋, 踰越制度, 非但盡一家之力, 實勞百姓, 其弊甚多. 伏望, 命禮官, 酌定尊卑家舍制度, 令中外遵守, 其已營造踰制者, 亦令毁撤, 以戒後來.

18. 寫經・불상[塑像]은 단지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는 것인데, 어째서 진귀한 보배로 장식하여, 도적들의 마음을 끌게 합니까? 옛날에는 불경은 모두 누런 종이였고, 旃檀木으로 축을 만들었으며, 그 肖像은 금・은・동・철을 쓰지 않았고, 다만 돌・흙・나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훔치거나 훼손시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라 말기 불경과 불상은 모두 금・은을 사용하여 사치가 도를 넘었고, 마침내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가령 상인들은 불상을 훔치거나 훼손하고 도리어 매매에 힘써 생업으로 삼았는데, 요사이에도 그 관습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이런 일을 엄히 금지시켜서 그 폐단을 혁파하십시오. 

(一) 寫經・塑像, 只要傳久, 何用珍寶爲飾, 以啓盜賊之心? 古者, 經皆黃紙, 且以旃檀木爲軸, 其肖像, 不用金・銀・銅・鐵, 但用石・土・木. 故無竊毁者. 新羅之季, 經像皆用金銀, 奢侈過度, 終底滅亡. 使商賈, 竊毁佛像, 轉相賣買, 以營生産, 近代, 餘風未殄. 願加嚴禁, 以革其弊.

19. 옛날 晉에서 덕이 쇠하자 欒・郤・胥・原・狐・續・慶・伯 (백)등이 강등되어 皂隷(조례)가 되었습니다. 우리 三韓功臣의 자손들은 매번 宥旨(유지)로 반드시 포상과 등용을 이르고 있지만, 아직 벼슬을 받은 사람 없고 〈여전히〉 천민에 섞여있으며, 신진 관료들이 방자하게 업신여기고 모욕하니, 원망과 탄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光宗 말년에 조정의 신하를 죽이고 쫓아내었으니, 世家의 자손들이 가문을 이을 수 없었습니다. 바라옵건대 누차의 은사[恩宥]에 의거하여 공신의 등급에 따라 그 자손들을 등용하십시오. 또한 경자년(태조 23년, 940)에 田科[역분전]를 받은 사람과 삼한 〈통일〉 후에 入仕한 사람에게도 역시 공을 참작해 관계와 관직을 내리신다면, 원통하게 굽힌 자들의 누명이 풀어질 것이고 재해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一) 昔, 晉德衰而欒・郤・胥・原・狐・續・慶・伯, 降在皂隷. 我三韓功臣子孫, 每宥旨, 必云褒錄, 而未有受爵者, 混於皂隷, 新進之輩, 多肆凌侮, 怨咨以興. 且光宗末年, 誅黜廷臣, 世家子孫, 未得承家. 請從累次恩宥, 隨其功臣等第, 錄其子孫. 又庚子年田科及三韓後入仕者, 亦量授階職, 則寃屈得伸, 而灾害不生矣.

20. 佛法을 숭상하고 믿는 것이 비록 나쁜 일은 아니지만, 帝王과 士庶가 공덕을 닦는 일은 실제로 같지 않습니다. 서민들이 수고하는 것은 자신의 힘이고, 소비하는 것도 자기의 재물이므로,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않습니다. 제왕은 즉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고, 백성의 재물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梁 武帝는 천자의 높은 지위로서 필부의 선덕을 닦았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잘못된 일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왕들은 그 연유를 깊이 생각하고, 일마다 모두 적합함[中]을 참작하여, 폐단이 관료와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듣건대 사람의 화복・귀천은 모두 처음 태어날 때부터 받는다고 하니, 마땅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불교를 믿는 것은 단지 내세의 因果만 심을 뿐이고, 〈현세에서〉 보답을 받는 유익은 적으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여기에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또한 〈불교・유교・도교의〉 3교는 각각 業으로 삼는 것이 있으니, 행하는 자가 그것을 섞어 하나로 묶을 수 없습니다. 불교를 믿는 것은 修身의 근본이고,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입니다. 수신은 실로 내세를 위한 바탕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가깝고 내세는 지극히 먼데,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일은 또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은 오로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심 없이 널리 만물을 구제해야만 합니다. 어찌 원하지 않는 사람을 노역시키고, 창고의 저축을 소비하면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이익을 구하셔야 되겠습니까? 옛날에 〈唐〉 德宗 왕비의 부친인 王景先과 부마인 高恬이 황제의 수명 연장을 위하여 금동 불상을 주조하여 왕에게 바쳤더니, 덕종이 말하기를, ‘나는 억지로 만들어진 공덕[有爲 功德]은 공덕이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라 하였고, 그 불상을 두 사람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실로 그 사실은 비록 믿기 어려우나, 신하와 백성들에게 이익 없는 일을 못하게 하고자 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우리 조정의 겨울과 여름에 열리는 講會 및 先王・先后의 忌日齋는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함부로 취하거나 버릴 수는 없지만, 그 나머지 줄일 수 있는 것은 바라옵건대 줄이십시오. 만약 줄일 수 없다면, 『禮記』의 月令에서 말한 내용을 따르십시오. 즉 ‘5월 中氣(하지)는 陰陽이 다투고 生死가 구분되니, 군자는 齋戒하고 거처함에 반드시 몸을 숨기고 조급하지 말 것이고, 음악과 여색을 멀리하고 좋은 음식을 적게 먹어 기호와 욕심을 절제하면서 심기를 안정시킬 것이며, 모든 관료들은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 형벌을 없애서 음기가 일어나는 것을 안정시켜야 할 것이다. 11월 中氣[동지]는 음양이 다투고 만물이 움트니, 군자는 재계하고 거처함에 반드시 몸을 숨기고 조급하게 굴지 말 것이고, 음악과 여색을 물리치고 기호와 욕심을 금지하여 몸과 마음[形性]을 안정시키며,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자 하면서 음양이 안정되는 것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5월과 11월〉에는 불사를 정지할 수 있는데, 어떠십니까? 너무 추우면 일하는 사람이 고통스럽고, 음식물이 정결하지 못합니다. 너무 더우면 땀이 나서 뚝뚝 떨어지고, 많은 벌레들로부터 잘못되어 상할 수 있으며, 재에 받치는 음식이 정결하지 못할 것이니,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또한 오늘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해도, 내일 반드시 그 선한 일에 보답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정치와 교화를 잘 수행하는 것만 못합니다. 바라옵건대 1년 12달을 반으로 나누어, 2월부터 4월까지와 8월부터 10월까지는 정사와 공덕을 반반씩[參班] 시행하시고, 5월부터 7월까지와 11월부터 정월까지는 공덕을 제외하고 정사에 전념하시되 날마다 정사를 들으시고 낮과 밤으로[宵旰,소간] 부지런히 정사를 도모하십시오. 매일 오후에는 군자의 사시사철 하는 의례를 행하시며 정사를 잘 돌보고 몸을 편안하게 하십시오. 이와 같이 하시면 계절에 순응하게 되어 성상의 몸도 편안하게 되고 신하와 백성의 노고도 덜게 될 것이니, 어찌 큰 공덕이 아니겠습니까? 

(一) 崇信佛法, 雖非不善, 然帝王士庶之爲功德, 事實不同. 若庶民所勞者, 自身之力, 所費者, 自己之財, 害不及他. 帝王則勞民之力, 費民之財. 昔梁武帝, 以天子之尊, 修匹夫之善, 人以爲非者以此. 是以帝王深慮其然, 事皆酌中, 弊不及於臣民. 臣聞人之禍福・貴賤皆禀於有生之初, 當順受之. 况崇佛敎者, 只種來生因果, 鮮有益於見報, 理國之要, 恐不在此. 且三敎各有所業, 而行之者, 不可混而一之也. 行釋敎者, 修身之本, 行儒敎者, 理國之源. 修身是來生之資, 理國乃今日之務. 今日至近, 來生至遠, 舍近求遠, 不亦謬乎? 人君惟當一心無私普濟萬物. 何用役不願之人, 費倉庫之儲, 以求必無之利乎? 昔德宗妃父王景先・駙馬高恬, 爲聖壽延長, 鑄金銅佛像, 獻之, 德宗曰, ‘朕以有爲功德, 謂無功德.’ 還其佛像於二人. 是其情雖不實, 然欲令臣民, 不得作無利事者如此. 我朝冬夏講會及先王・先后忌齋, 其來已久, 不可取舍, 其他可减者, 請减之. 若不得减, 則依月令所說. ‘五月中氣, 陰陽爭, 死生分, 君子齋戒, 處必掩身無躁, 止聲色, 薄滋味, 節嗜欲, 定心氣, 百官靜事無刑, 以定晏陰之所成. 十一月中氣, 陰陽爭, 諸生蕩, 君子齋戒, 處必掩身無躁, 去聲色, 禁嗜欲, 安形性, 事欲靜, 以待陰陽之所定.’ 此時則可以停之, 何也? 極寒則役使者苦, 而食物不精潔. 極熱則汗出淋漓, 或誤傷群虫, 齋供不淨潔, 有何功德? 且今日作善, 來日未必獲善報. 以此而觀, 莫如修政敎. 請以一年十二月分半, 自二月至四月, 自八月至十月, 政事功德, 叅半行之, 自五月至七月, 自十一月至正月, 除功德, 專修政事, 逐日聽政, 宵旰圖治. 每日午後, 乃用君子四時之禮, 修令安身. 如此則順時令, 安聖體, 减臣民之勞苦, 豈不爲大功德乎?

21. 『논어』에 이르기를, ‘자기가 모실 귀신이 아닌데도 그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傳(春秋左傳)』에서 이르기를, ‘귀신도 그의 동족이 아니면 제사를 받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부정한 제사에는 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종묘・사직의 제사가, 아직도 법전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산악의 제사와 성수의 초제는 번거로움[煩瀆,번독]이 도를 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제사는 자주 지내지 않아야 하는데, 자주 지내면 번거롭고, 번거롭게 되면 불경스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상께서는 마음을 깨끗이 하시고 공경을 다하여 진실로 태만하지 않으시나, 제관[享官]들이 보통 일상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싫증내어 공경을 다하지 않는다면, 귀신이 그 제사를 즐거이 받겠습니까? 옛날 漢 文帝는 제사지낼 때에 有司로 하여금 공경하되 복을 빌지는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 식견이 뛰어나 훌륭한 덕이라 할 만합니다. 만약 천지신명이 알지 못한다면 어찌 능히 복을 내리겠으며, 만약 신명이 안다면 사사로이 이익을 구하려고 아첨하며 군자를 기쁘게 하기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천지신명이겠습니까? 제사의 비용은 모두 백성의 고혈과 부역에서 나오는 것이니, 저의 어리석은 생각에 만일 백성의 부역을 쉬게 하여 환심을 얻는다면, 그 복이 분명히 기도로 얻는 복보다 많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법식과 다른 기도와 제사를 없애 늘 스스로 삼가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품고 그것이 하늘을 감동시키시면, 재해는 절로 물러가고 복록은 스스로 이르게 될 것입니다. 

(一) 語曰, ‘非其鬼而祭之, 諂也.’ 傳曰, ‘鬼神非其族類, 不享.’ 所謂淫祀無福. 我朝宗廟・社稷之祀, 尙多未如法者, 其山嶽之祭, 星宿之醮, 煩瀆過度, 所謂‘祭不欲數, 數則煩, 煩則不敬.’ 雖聖上齋心致敬, 固無所怠, 然其享官, 視爲尋常事, 厭倦而不致敬, 則神其肯享之乎? 昔漢文帝, 凡祭祀, 使有司敬而不祈, 其見超然, 可謂盛德也. 如使神明無知, 則安能降福, 若其有知, 私己求媚, 君子尙難悅之, 况神明乎? 祭祀之費, 皆出於民之膏血與其力役, 臣愚以爲, 若息民力而得歡心, 則其福必過於所祈之福. 願聖上除別例祈祭, 常存恭己責躬之心, 以格上天, 則災害自去, 福祿自來矣.

22. 本朝의 良賤의 법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聖祖께서 창업하신 초기에 여러 신하들 가운데 본래 노비를 소유했던 사람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본래 소유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종군하여 포로를 얻거나 재화로 노비로 사기도 하였습니다. 태조께서는 일찍이 포로를 풀어주어 양인으로 삼고자 하셨으나, 공신의 뜻이 동요될까 염려하여 편의를 따르도록 허락하셨는데, 60여 년이 지나도록 항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광종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노비를 조사하여 그 시비를 가리게 하시니, 이에 공신들이 탄식과 원망이 없지 않았으나 간언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大穆王后께서 간절히 간언했지만, 받아들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賤隷가 뜻을 얻어 존귀한 사람들을 능멸하여 업신여기고 앞 다퉈 허위를 꾸며 본래의 주인을 모함하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광종은 스스로 화근을 만들어 놓고, 능히 〈그 피해를〉 차단하지 못하였으며, 말년에 이르러 누명을 씌어 죽인[枉殺] 사람이 매우 많아 크게 失德하였습니다. 옛날에 侯景이 梁의 궁성[臺城]을 포위하니, 〈왕의〉 측근인 朱异의 家奴가 성을 뛰어넘어 후경에게 투항하였습니다. 후경이 그 종에게 儀同 벼슬을 주자, 그 종은 말을 타고 비단 도포를 입고 성으로 가 소리쳐서 말하기를, ‘주이는 50년간 벼슬살이하여 겨우 中領軍이 되었으나, 나는 처음 후왕에게 벼슬살이하여 벌써 의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성안의 종들이 다투어 나와서 후경에게 투항하므로, 궁성이 마침내 함락되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지난 일을 깊이 성찰하셔서 천한 이들이 귀한 이들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시고, 노비와 주인과의 관계에서 공평하게[執中] 처리하십시오. 대개 벼슬이 높은 사람은 이치를 알아서 불법이 드물고, 벼슬이 낮은 사람은 참으로 그 지혜가 능히 비행을 꾸밀[飾非] 수 없는데, 어찌 양인을 천인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宮院과 公卿이 비록 위세로써 나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이 혹시 있다 할지라도, 지금의 정치가 거울처럼 밝고 사사로운 것이 없으니, 어찌 제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周〉 幽王・厲王이 도를 잃었어도 宣王・平王의 덕을 가릴 수 없었고, 〈漢〉 呂后의 不德도 文帝・景帝의 현명함에 누를 끼치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지금의 판결은 중요한 일은 상세하고 분명하게 하여 후회가 없도록 할 것이며, 앞 시대의 판결은 자꾸 캐내고 따져서 어지럽게 하는 단서를 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一) 本朝良賤之法, 其來尙矣. 我聖祖創業之初, 其群臣除本有奴婢者外, 其他本無者, 或從軍得俘, 或貨買奴之. 聖祖嘗欲放俘爲良, 而慮動功臣之意, 許從便宜, 至于六十餘年, 無有控訴者. 逮至光宗, 始令按驗奴婢, 辨其是非, 於是, 功臣等, 莫不嗟怨而無諫者. 大穆王后切諫, 不聽. 賤隷得志, 凌轢尊貴, 競構虛僞, 謀陷本主者, 不可勝紀. 光宗自作禍胎, 不克遏絶, 至於末年, 枉殺甚多, 失德大矣. 昔侯景圍梁臺城, 近臣朱异家奴, 踰城投景. 景授儀同, 其奴乘馬披錦袍, 臨城呼曰, ‘朱异仕宦五十年, 方得中領軍, 我始仕侯王, 已爲儀同.’ 於是, 城中僮奴, 競出投景, 臺城遂陷. 願聖上深鑑前事, 勿使以賤凌貴, 於奴主之分, 執中處之. 大抵官貴者識理, 鮮有非法, 官卑者, 苟非智足以飾非, 安能以良作賤乎? 惟宮院及公卿, 雖或有以威勢作非者, 而今政鏡無私, 安能肆乎? 幽・厲失道, 不掩宣・平之德, 呂后不德, 不累文・景之賢. 唯當今判決, 務要詳明, 俾無後悔, 前代所決, 不須追究, 以啓紛紜.”

최승로는 왕이 뜻을 가지고 있어 함께 할 수 있는 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이 글을 올렸다. 나머지 6개 조항은 사서에 전해지지 않는다. 

承老見王有志而可與有爲, 乃進此書. 餘六條史逸.

『高麗史』卷93, 列傳6, 諸臣, 「崔承老」

출처: https://sargon.tistory.com/6 [생각창고:티스토리]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은 時務十條는 차지하고서라도 時務三條라도 한 번쯤 짚어 볼 일이다. 반드시.

時務一條는 누구나 국민통합일 것이다.

해방 이후 지속된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의 대결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정치인들에게 묻는다.

그 해답은 국시(國是)에 있다.

 

제1조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C%B9%98%EC%9B%90

 

최치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최치원(崔致遠, 857년 ~ 908년? )은 신라 말기의 문신, 유학자, 문장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해부(海夫)이며, 시호는 문창(文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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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崔致遠, 857년 ~ 908년? )은 신라 말기의 문신, 유학자문장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해부(海夫)이며, 시호는 문창(文昌)이다. 868년 당나라로 건너가 과거에 급제한 후 당나라의 관료로 생활하였다. 신라 말 삼최(三崔) 중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이력

6두품 출신으로서 12세의 나이로 당에 유학하여 6년 만에 당의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절도사 고병의 막하에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당 전역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승무랑 시어사(承務郞侍御史)로서 희종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귀국하여 헌강왕으로부터 중용되어 왕실이 후원한 불교 사찰 및 선종 승려의 비문을 짓고 외교 문서의 작성도 맡았으며, 시무 10여 조를 올려 아찬(阿飡) 관등을 받았다. 그러나 진골 귀족들이 득세하며 지방에서 도적들이 발호하는 현실 앞에서 자신의 이상을 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여 행방불명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가야산의 해인사로 들어갔다고 하고, 민담에서는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고도 한다. 908년까지 생존해 있었음은 확실하지만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귀국 직후 당에서 쓴 글을 모아 헌강왕에게 바쳤던 《계원필경(桂苑筆耕)》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으로 꼽히며,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난랑비서(鸞郎碑序)》는 신라 화랑도의 사상적 기반을 말해주는 자료로서 주목받는다.

경주 최씨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pobF6RSapu8 

 

 

https://www.youtube.com/watch?v=_4M19W1wkbA 

 

 

https://www.youtube.com/watch?v=H4j1evq-YwE&list=TLPQMDIxMDIwMjIBf6799boOfA&index=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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