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10.2 - 2022.10.4. 향년 94세

https://www.youtube.com/watch?v=49XzBU96hbE 

 

https://www.sedaily.com/NewsView/26C8CRO9GQ

 

'이게 뭡니까' 보수 원로 김동길 명예교수 별세…향년 94세

정치 > 정치일반 뉴스: '이게 뭡니까'라는 유행어를 남긴 보수진영 원로 인사 김동길 연세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별세했습니다. 연세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사회운동·현실정치에도 깊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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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뭡니까?’라는 유행어를 남긴 보수진영 원로 인사 김동길 연세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별세했다. 향년 94세.

5일 유족에 따르면 숙환으로 입원 중이던 김 교수는 전날 오후 10시 30분께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고인은 지난 2월 코로나19에 확진됐다가 회복했지만, 3월부터 건강이 급격히 악화해 입원 뒤에도 상태가 호전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1928년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6년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자 월남해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미국 에반스빌대와 보스턴대에서 각각 사학과 철학을 공부해 문사철(文史哲)을 섭렵했고 100권 안팎의 저서를 남겼다.


https://namu.wiki/w/%EA%B9%80%EB%8F%99%EA%B8%B8

 

김동길 - 나무위키

1928년 10월 2일, 평안남도 맹산군 원남면 향평리에서 원남면장 김병두(金炳斗)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광산업에 손을 댔다가 가산을 모두 말아먹는 바람에 아주 어린 시절에 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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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10월 2일  평안남도 맹산군 원남면 향평리 출생

2022년 10월 4일 (향년 94세) 사망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대동문길 75-28[1]

풍천(豊川) 김씨  , 호 산남(山南)

1928년 10월 2일평안남도 맹산군 원남면 향평리에서 원남면장 김병두(金炳斗)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광산업에 손을 댔다가 가산을 모두 말아먹는 바람에 아주 어린 시절에 어머니 및 형제들과 함께 맹산을 떠나 평양으로 옮겨 살았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고 한다. 이때 이후로 아버지와의 연락이 끊어져서 한동안 어머니 혼자서 김동길 자신을 포함한 4남매를 먹여 살리고 공부를 시키느라 엄청난 고생을 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장성한 후에도 아버지를 미워하며 끝내 김동길 그 자신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1945년 해방 직전에 교원 자격시험에 통과해서 평안남도 평원군의 괴산국민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46년에 김일성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부모와 함께 야음을 틈타 월남했다.[4]

이렇게 서울에 도착한 김동길은 연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다니던 중 평소에 존경하던 백낙준과 함석헌 등을 좇아 역사학과로 전과했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 미국에서 1년 동안 유학을 하고 돌아와 연세대 전임강사가 되어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미국에서 다시 공부를 하라는 백낙준의 권유에 따라 다시 미국 유학을 떠났다. 이후 인디애나 주에 있는 에반스빌 대학교 사학과에서 수학한 뒤 보스턴 대학교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5]

귀국한 후에는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랄한 사회풍자글을 계속 발표하였다. 유신 이후에는 함석헌이 발행하던 '씨알의 소리'에 노골적인 체제비판글을 게재하면서 민주화운동에 가담하였다. 학생운동권의 배후조종자로 몰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기소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얼마뒤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분의 강연 한 편을 살펴 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vyQAKdKDOlM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는?

불교정신 - 색즉시공 공즉시색/ 4성제, 8정도

https://www.youtube.com/watch?v=sdwC-KQ_qDo&t=147s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2159

 

승군(僧軍)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등(等)상호군(上護軍), 설헌(雪軒), 호군(護軍), 영오(靈悟), 부호군(副護軍), 처영(處英), 사과(司果), 희식(希式), 사과(司果), 처묵(處默), 의병장(義兵將), 홍정(弘靖), 해명(海明), 육정(六精), 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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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대첩 - 7명의 승병
신라의 승려 도옥(道玉)
백제의 도침(道琛)
통일신라 말기의 난세에 해인의 승군을 조직

2. 고려시대의 승군
 1104년(숙종 9) 항마군(降魔軍)이라는 명칭으로 정규군에 편입된 이후, 그 뒤 어려운 상황이 있을 때마다 승군을 차출.
1010년(현종 1)에 거란의 침략으로 서경이 위기에 놓였을 때, 승장 법언(法言)은 사정(思政) 등과 함께 9,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원역(林原驛)에 진을 치고 거란병을 공격하여 적병 수천 명을 살상하는 큰 전과를 올렸으나, 법언은 순국하였다.
인종 때에는 관선(冠宣)과 상숭(尙崇) 등이 묘청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1174년(명종 4) 1월 이의방(李義方)이 난을 일으켰을 때, 중흥사(重興寺) 승군 2,000여 명과 의승병들은 이의방을 죽이고, 나머지 역도들을 모두 섬멸하였다.
또 1176년(명종 6) 공주에서 망이(亡伊)와 망소이(亡所伊)가 난을 일으켰을 때에도 승군의 활동이 컸으며, 1182년(명종 12) 죽동(竹同)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도 안찰사 박유보(朴惟甫)가 이끈 관군은 죽동에게 패하였으나, 승군이 출병하여 그 난을 진압하였다.
1216년(고종 3) 8월 거란이 우리나라 서북쪽 국경을 침범하자, 조정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적을 막게 하였는데, 이 때 승군 수백 명이 참가하였다. 특히 몽고의 침략 때에는 김윤후(金允侯)의 활약이 뛰어났다.
원나라가 살례탑(撒禮塔)을 도원수로 삼아 2차침략을 하여 처인성을 공격하였을 때, 승려였던 김윤후는 활을 쏘아 살례탑을 죽였고, 원나라가 4차침략을 하였을 때에는 충주산성 방호병감(防護兵監)이 되어 70여 일 동안 산성을 수호하여 적군을 물러가게 하였으며, 1254년(고종 41)의 제5차침략 때에도 충주성의 함락을 막았다.
5차침략 때 상주산성을 지키고 있던 승장 홍지(洪之)는 백발백중의 실력으로 적의 지휘관을 사살하고 사기를 꺾었으며, 여러 차례의 공방전으로 적의 병력 반 이상을 살상하여 적을 물리쳤는데, 이 5차침략 때 함락되지 않은 성은 충주성과 상주성뿐이었다.
고려 후기에는 승군의 세력이 매우 강성하였다. 1359년(공민왕 8) 12월 홍건적의 침입이 있게 되자, 선교양종의 승려들이 참여하여 이들을 막았고, 전국의 사찰에 있던 말을 군용으로 보충시켰다.
1377년(우왕 3)에 화통도감(火筒都監)을 세우고 화약제조술을 중국에서 도입하였을 때, 1급의 비밀에 속한 기술요원은 승군에서 충당하였고, 화통을 쏘는 포군(砲軍)은 서울과 각 지방의 사찰에 인원수를 할당하여 조직하였다.
1378년(우왕 4) 3월에는 대마도의 왜구와 강화도 인근의 왜구가 개경의 함락을 목적으로 대거 침략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경상도와 양광도에서 1,000인의 승군과 교주·서해·평안도에서 각 500인의 승군을 차출하여 병선을 제조하고 화약병기를 사용하여 적을 물리치게 하였으며, 1388년 4월 승군들이 왜구의 침략을 막았다.
3. 조선시대의 승군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승려 자체의 군사조직을 만들 수가 없었다. 오히려 무도첩승(無度牒僧)을 환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때를 같이하여 승군의 조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무도첩승을 승군으로 동원하여 일정 기간 성곽 또는 요새를 수축하게 한 뒤 그 대가로서 호패(號牌)를 급여하고 신분을 보장해 주었으나, 그 뒤의 무도첩승은 모두 환속시켜 군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1553년(명종 8)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무도첩승과 도첩승을 가리지 않고 모두 승군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왜변이 끝난 뒤에도 수년 동안에 걸쳐서 배를 만들거나 성을 쌓는 일에 동원하였다.
① 전란기의 승군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휴정(休靜)은 전국 사찰에 나라를 구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보냈고, 전국 각지에서는 의승군(義僧軍)이 궐기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싸움은 영규(靈圭)의 청주성발성(淸州城拔城), 처영(處英)의 행주산성대첩을 비롯하여 유정(惟政)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평양탈환 때의 모란봉전투(牡丹峰戰鬪)도성수복 때의 수락산전투·노원평전투·송교전투 등을 들 수 있다.
유정이 의주에서 조정으로부터 도총섭(都摠攝)의 직첩을 받은 것은 1592년 7월이었는데, 휴정은 그 이전부터 600명의 승군을 조직하여 평양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 승군은 뒷날에 조직된 법흥진(法興鎭) 승군의 모체가 되었다.
유정은 강원도에서 궐기한 150명의 승군을 이끌고 황해도를 거쳐서 1592년 10월 평양성 동쪽에 이르렀는데 이 때의 수는 700명이 넘었다. 다시 그들이 법흥진으로 갔을 때, 법흥진의 총 승군병력은 5,000명에 이르렀다. 평양탈환 직전인 11월부터 평양과 중화지방의 적군을 차단하는 작전에 임했던 법흥진승군은 평양탈환전에서도 유정의 지휘 아래 난공지점인 모란봉 방면을 담당하여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산악지대의 지세와 지형을 평소 잘 숙지하고 있었던 승군이었으므로 평양탈환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북관(北關)에서의 적의 동태를 정찰하는 임무도 담당하였다. 승군은 의병과는 달리 끝까지 관에 의해 해체를 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군의 재정비와 명나라 군사가 온 뒤부터는 한편으로 싸움에 임하면서 한편으로는 군량미 수송도 담당하게 되었다. 또 한양의 수복 후에는 성을 쌓는 일을 담당하는 등 관군에 준하는 형태로 변하여 갔다.
전후 7년 동안에 걸쳐 전국 각지에서 승군의 활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라도 무주지방에서의 공방전과 경기도에서의 죽산전투 등도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유정은 한양 수복 후에도 영남지방에서 왜구들과 싸우는 한편, 성을 쌓고 군량미를 조달하는 일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도산성공격(島山城攻擊)과 예교총공격(曳橋總攻擊)에도 참가하였다. 그리고 휴정의 뒤를 이어 직첩 없이 도총섭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대표적인 승병장으로는 휴정·유정·영규·처영 외에도 『선조실록』에는 많은 승려들의 기록이 있다. 무기를 만들고 성을 쌓는 데 공이 컸던 법견(法堅), 정보를 담당했던 행사(行思), 죽산성을 쌓았고 그 성의 수비대장을 겸했던 영주(靈珠), 담양옥천사에서 봉기한 인준(引俊), 용진의 월계산성(月溪山城) 수축의 책임을 맡았던 견우(見牛), 경상도에서 봉기하여 전공을 많이 세운 해안(海眼)이 있다.
그리고 서산대사의 부상으로 평양탈환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인오(印悟)와 천연(天淵), 평안도·황해도 일대의 수비대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법정(法正), 여천 일대의 무기고 수비에 공이 컸던 혜희(惠熙), 이순신의 해군에 편입되어 작전을 편 의능(義能), 해전에 참여한 삼혜(三惠), 서산대사의 뒤를 이어 도총섭이 되었고 파사성(婆裟城)을 쌓았던 의엄(義嚴)도 유명하다.
또한 충청도 부여 출신으로 의승을 모집하여 권율의 휘하에서 적을 맞아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한 설미(雪尾), 경상우도총섭이 되어 군량미의 자급자족을 위해 농사를 짓는 한편, 해인사에서 활과 화살·화약을 만들어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의승군에게 보급하고, 처음의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끈 신열(信悅) 등이 있다. 또 1605년(선조 38) 4월 임진왜란 때의 군공(軍功)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녹공이 있었는데, 이 때 공신이 된 34명의 승군은 다음 [표]와 같다.

[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승군(僧軍)

 
등급(等級)관직(官職) 및 승명(僧名)
1 등(等) 동지(同知), 유정(惟政), 승장(僧將), 영규(靈圭), 삼행(三行)
2 등(等) 상호군(上護軍), 설헌(雪軒), 호군(護軍), 영오(靈悟), 부호군(副護軍), 처영(處英), 사과(司果), 희식(希式), 사과(司果), 처묵(處默), 의병장(義兵將), 홍정(弘靖), 해명(海明), 육정(六精), 혜근(惠根), 종인(宗印), 승보(勝寶), 도암(道庵), 한석(閑石), 사의(思義), 법관(法寬), 태원(太元), 옥준(玉俊), 덕응(德應), 의원(義元), 희인(希印), 호월(浩月), 호철(浩哲), 묘혜(妙惠)
3 등(等) 부호군(副護軍), 사묵(思默), 사과(司果), 법근(法近), 사과(司果), 보훈(寶訓), 사용(司勇), 태헌(太軒), 도의(道義)
다른 한편으로 국가에서는 승군 동원을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1593년 8월에 도총섭 밑에 각 도마다 총섭 2명씩을 두게 하여 조직을 일원화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각성(覺性)과 명조(明照) 등의 의승군이 활약하였다.각성은 1624년(인조 2) 팔도도총섭이 되어 남한산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였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3,000명의 의승을 모아 항마군이라 이름한 뒤 스스로 승대장이 되어 북상하였으나, 도중에 왕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을 중지하였다.

명조는 1627년 후금이 침략해 오자, 의승군 4,000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진을 쳐서 크게 전공을 세웠고, 병자호란 때에는 군량미를 모아서 전선에 보내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② 전란기 이후의 승군
병자호란 후에 승군들은 산성의 수축 및 수호에 주력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곳으로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두었던 남한치영(南漢緇營)과 북한치영(北漢緇營)을 들 수 있다.
각성이 감독하여 쌓은 남한산성 안의 남한치영은 각 도에서 의승을 불러서 번을 서게 하였고, 성 안의 9개 사찰 승군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게 하였으며, 도총섭 1인 밑에 중군(中軍) 1인, 교령관 1인, 초관(哨官) 3인, 기패관(旗牌官) 1인, 성 안팎 10개 사찰의 원거승군(原居僧軍) 138명, 의승(義僧) 356인을 두었다.
북한치영은 1711년에 북한산성을 쌓음으로써 생겨나게 되었다. 주위 7,620보에 장대(將臺) 3곳, 대문 4곳, 암문(暗門) 10곳을 비롯하여 도총섭이 있는 중흥사(重興寺)를 중심으로 태고사·노적사·서암사·경흥사·국영사·원각사·부황사·보광사·보국사·용암사·봉성암 등의 사찰이 있었으며, 이들 사찰에 승군들이 머무르면서 산성을 수호하였다.
승영에는 도총섭 1인과 중군·좌별장·우별장·천총(千摠)·파총(把摠)·좌병방(左兵房)·우병방 각 1인, 교련관·기패관·중군병방(中軍兵房) 각 2인, 오기차지(五旗次知) 1인, 도훈도(都訓導)·별고감관(別庫監官) 각 1인, 사료군(射料軍) 10인, 서기 2인, 통인(通引) 2인, 고직(庫直) 3인, 책장무(冊掌務)·판장무(板掌務) 각 1인, 취수(吹手) 2인, 각사승장(各寺僧將) 11인, 수승(首僧) 11인, 의승 350인을 두었다.
이들 치영 외에도 역대 왕조실록을 둔 곳 가까이의 사찰인 강릉 월정사, 무주 적상산성, 봉화 각화사, 강화 전등사에 수호승군을 두어 실록 수호의 임무를 다하게 하였다. 이 승군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승군(僧軍))]

 

https://kydong77.tistory.com/18900

 

사명대사(泗溟大師) 유정(惟政)의 漢詩

이은영의 한시산책 사명대사, 목탁 대신 붓과 칼을 잡다 泗溟堂 영웅은 난세를 통해 세상에 나타난다. 물론 누구나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출중한 능력을... blog.naver.com 浮碧樓에서 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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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가르침

— 《논어》 위정편(爲政編)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 所欲不踰矩."

자왈, "오십유오이지우학, 삼십이립, 사십이불혹, 오십이지천명, 륙십이이순, 칠십이종심, 소욕부유구."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15세에 공부를 하겠다는 뜻을 세웠고,

삼십세에 이르러 일가견을 지니게 되었으며,

40세에 되어서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50세에는 천명을 깨닫게 되었고,

60이 되어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을 해도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다'

 *矩(구) -'법도',

 

http://www.gimhae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881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 김해일보

공자가 재나라 국경을 지나다가 뽕을 따는 두 여인을 보았는데 동쪽에서 뽕 따는 여인은 얼굴이 구슬처럼 아름답고, 서쪽에서 뽕을 따는 여인은 박색이었다. 공자가 이 광경을 보고 농을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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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국을 지키신 분들
세종 훈민정음 제정.
율곡 이이- 십만 양병설
퇴계 이황 - 理氣철학(朱子) 도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3848

 

이기론(理氣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리적 이기관(主理的 理氣觀)의 대표적 이론은 이황에서 비롯되었으며, 이현일(李玄逸)에 의해 계승되고, 이진상(李震相)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황의 이기론은 이기론적 체계를 자연 현상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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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기의 상호 역할 관계를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의 관계라고 하고, 또는 이이일(二而一)·일이이(一而二)의 관계라고도 말한다. ‘이·기가 서로 떠나 있지 않다.’는 명제는 현상적 사물의 특성을 두고 한 말이다. 현상적 사물의 존재란 실상 기의 존재이며, 기가 있어야 이는 사실상의 실재처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기불상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한다.

“사물상으로 보면 이 두 가지는 혼륜해 있어 나누어 각각 다른 곳에 존재할 수 없다(在物上看 則二物渾淪 不可分開 各在一處 : 『朱子大全文集』, 卷46, 答劉叔文).”
이의 존재는 현상적인 기에 의해 그 존재성이 구현되는 반면, 기의 존재는 그 원인·이유로서 이가 있어야 바람직한 존재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 관계는 사물상의 관점에서 살펴본 관계라 할 수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기론(理氣論))]

* 서양철학으로 설명하면, '理'는 본질이고 '氣'는 현상을 말한다.

 

이순신 - 명량해전 12척의 배로 일본 전함들 침몰시킴.

 

안중근 外

https://kydong77.tistory.com/21379

 

안중근, 내가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윤봉길, 상해의 홍구공원 폭탄 투척 사건

https://www.youtube.com/watch?v=yEO3NNOvaXk 내가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https://www.youtube.com/watch?v=hOcB0pngL6g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3/26/2014032600457.html 안중근..

kydong77.tistory.com

▲ 1909년 스트레이츠 타임즈에 보도된 안중근 의사의 "내가 이토를 처단한 열 다섯가지 이유"
 
첫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둘째,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셋째.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넷째,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다섯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째,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째,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째,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번째,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한번째, 한국이 300만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두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세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네번째,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죄
열다섯번째,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XdSphXcJF1c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1379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뉴스 초점> 북 미사일 일본 상공 통과

https://www.youtube.com/watch?v=c1NJouXU5yo 

 

https://www.youtube.com/watch?v=CRMs4b-iXN0 

 

 

https://www.youtube.com/watch?v=MnZLxhO4CAA 

 

https://www.youtube.com/watch?v=RRci7AkqN8o 

 

 

https://www.youtube.com/watch?v=EvopuvxV_m4 

 

https://www.youtube.com/watch?v=qtAc-3qyt8Y 

 

文정부, IOC 제출 제안서…“28조 원 들여 평양 개발” > IOC 거부로 불발

https://www.youtube.com/watch?v=WtqCZ7p9LDE 

 

북 미사일에…한국 떠났던 미 핵항모, 다시 동해로 들어온다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061424.html

 

북 미사일에…한국 떠났던 미 핵항모, 다시 동해로 들어온다

연합훈련 마치고 복귀하던 ‘로널드 레이건호’합참 “5일 동해상 진입할 것”…이례적 재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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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zWggo7O_89s 

 

https://www.youtube.com/watch?v=dhYVdTRCd_c 

 

 

https://www.youtube.com/watch?v=rIAubCIB8yU 

 

 

https://www.youtube.com/watch?v=UtHiII0SZlk 

 

 

https://www.youtube.com/watch?v=lwhJ2ZL7W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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