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kr.buddhism.org/%eb%b6%93%eb%8b%a4%ec%9d%98-%ec%83%9d%ec%95%a0%ec%99%80-%ec%82%ac%ec%83%81/
1. 들어가는 말
이번 호부터 “붓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불교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붓다의 생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불교계에서는 출가 · 재가를 막론하고, 붓다의 생애를 너무나 가볍게 여기거나 거의 무시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재가 불자들은 붓다의 생애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한국불교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인 기복적인 신앙과 잘못된 신앙 형태들은 붓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야기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붓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자신의 인격향상과 올바른 불교관 정립은 물론 잘못된 불교 신앙을 바로 잡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500여 년 간 인류의 스승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깨우쳐 주었고, 불교의 개조(開祖)로서 받들어져 온 고따마 붓다(Gotama Buddha)께서 실제로 어떠한 생애를 보냈으며, 또 그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 가능한 한 정확히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 공부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붓다의 생애 속에는 신화적(神話的) · 전설적(傳說的)인 요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붓다께서 가르쳤다는 교설(敎說) 속에도 후세 사람들의 가필(加筆)과 윤색(潤色)이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러한 후대의 요소들을 되도록 배제(排除)하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로서의 붓다의 생애와 그 가르침을 가능한 한 사실에 가깝게 접근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유럽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실시해 온 연구 방법론입니다. 주로 서구의 불교 학자들은 신화와 전설로서의 붓다가 아닌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붓다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드러내고자 시도하였으며, 지금도 이러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이기영(李箕永) 박사가 처음으로 이러한 접근 방법으로 붓다의 생애를 다루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이기영 지음,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지문각, 1965)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의 불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높게 평가 받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이 출판될 당시(1965)에는 아직 학문적으로 이러한 접근 방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이 책이 한국의 불자들에게 많이 읽혀졌더라면 한국불교는 지금보다는 좀더 나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의 상황보다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이제는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와 아울러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생애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신화와 전설로 가득 찬 불전문학(佛傳文學)에 기록된 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붓다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연속 강좌를 마련하게 되었음을 밝혀둡니다.
2. 붓다의 호칭(呼稱)과 불전(佛傳)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고따마 붓다를 가리킬 때, 일본의 불교 학자들은 대부분 ‘석존(釋尊)‘이라고 부릅니다. 예로부터 중국 · 한국 · 일본에서는 관례적으로 ‘석가족(釋迦族)의 존자(尊者)’라는 의미로 ‘석존(釋尊)’이란 존칭을 널리 사용해 왔습니다. 이 말은 원래 중국에서 ‘석가모니 세존(釋迦牟尼 世尊)’ (혹은 釋迦牟尼尊) 또는 ‘석가세존(釋迦世尊)’ (혹은 釋迦尊)이라고 하던 것을 줄여 쓴 말입니다.1)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석가(釋迦)’라고 하는 호칭도 사용되고 있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붓다가 출생한 종족의 이름이지 자신의 이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관용적으로 쓰여진 익숙해진 호칭입니다.2) 그런데 “불타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석가모니, 또는 석존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3)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석존의 호칭으로서 가장 일반적인 것은 ‘붓다(Buddha)’입니다. 이것은 인도 · 동남아시아 및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널리 채용되고 있는 호칭입니다. 중국에서는 ‘불(佛)’, ‘불타(佛陀)’로 음사(音寫)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4) ‘붓다’라는 말은 불교의 전용어가 되었지만, 본래는 보통명사이며 자이나교(Jaina)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붓다란 ‘깨달은 사람(覺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석존 이외에 또 다른 붓다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이미 초기불교에서도 석존 이전에 여섯 명의 붓다가 존재하였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존을 고타마(Gotama)라고 하는 그의 족성(族姓)에 따라 고타마 붓다(Gotama Buddha)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팔리어 경전에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 용례가 있어5) 흔히 남방불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호칭입니다. 서양의 많은 학자들도 이 명칭을 쓰고 있으며, 근래에는 일본의 학자들도 즐겨 사용하게 되었습니다.6)
그러나 이기영 박사는 그의 저서 <석가>라는 책에서 붓다란 말은 불교의 이상적 존재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서 고유명사가 아니기 때문에 불교의 개조(開祖) 개인을 지칭할 때에는 ‘고따마 붓다’란 호칭을 쓰거나 ‘석가모니(釋迦牟尼)’란 존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석가모니는 원래의 인도음 샤캬무니(Sakyamuni)를 한자로 음사한 것인데, ‘샤캬(釋迦)’란 고따마 붓다가 탄생한 종족의 이름이고, ‘무니(牟尼)’란 ‘거룩한 분'(聖者)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샤캬무니’라고 하면 샤캬족 출신의 성자란 뜻이 되므로 고유명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7)
필자는 개인적으로 ‘붓다’라는 호칭을 선호합니다만 여기에서는 특별한 구별 없이 ‘붓다(佛陀)’, ‘석존(釋尊)’, ‘세존(世尊)’, ‘석가모니(釋迦牟尼)’ 등의 호칭을 두루 사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우에 따라 여러 호칭들은 서로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붓다’라는 호칭이 낮춤말처럼 들릴지 모르나, 이 단어 속에는 이미 깨달은 자라는 뜻과 존경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높임말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붓다의 전기에 관한 자료는 매우 많습니다. 불교경전 중에서 부처님의 생애를 주제로 한 것을 일반적으로 ‘불전(佛傳)’, ‘불전경전(佛傳經典)’, ‘불전문학(佛傳文學)’이라고 합니다. 불전은 산스끄리뜨어, 팔리어, 한역(漢譯), 티베트어 역본(譯本) 등 오래된 불전만 하더라도 20여 종에 이릅니다.8) 그 중 중요한 것으로는 산스끄리뜨어로 씌어진 <마하바스뚜(Mahavastu, 大事)>, <랄리따비스따라(Lalitavistara)>와 불교시인 아쉬바고사(Asvaghosa, 馬鳴; A.D. 2세기경)에 의해서 카비야체(體)라는 아름다운 미문(美文)들로 씌어진 <붓다짜리따(Buddhacarita, 佛所行讚)>, <자따까(Jataka, 本生潭)>의 서문에 해당되는 인연품(因緣品), 한역으로는 <보요경(普曜經)>,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등이 있습니다.9)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붓다가 입멸한 후 수 백년이 지난 뒤 성립한 것이고, 더구나 불타로서의 석존의 위대함을 찬탄하는 입장에서 씌어진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여러 가지 창작과 가탁(假託)이 부가되어 비역사적·신화적인 요소가 대단히 많습니다. 따라서 붓다를 역사적 존재로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불전문학의 원천이 되었던 것, 다시 말해서 초기불교 성전인 <율장(律藏)>과 <아함경(阿含經)> 가운데 전해지고 있는 붓다의 전기적인 기술을 중심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초기성전의 기술은 불전을 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하여진 것이 아니라 교단 규칙의 제정이나 중요한 설법과 관련하여 붓다의 사적(事蹟)을 단편적으로 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사적 역시 창작이나 신화적 요소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인간 붓다의 생애 전모를 있는 그대로 묘사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야겠지만, 초기성전이 전하는 바에 의해서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붓다의 단서는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10)
3. 붓다의 전기(傳記)를 대하는 태도
지금까지 우리는 불전 혹은 불전문학에 기록된 내용으로써 붓다를 이해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헌들을 통해서는 역사적인 붓다의 생애 혹은 인간적인 측면에서의 붓다를 올바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헌에 나타난 부처님의 일대기는 너무나 신격화(神格化)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쉬바고사(馬鳴)에 의해 씌어진 장편 서사시(敍事詩) <불소행찬(佛所行讚)>이 그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아쉬바고사는 인도 카니쉬카(Kanisika)왕과 동시대의 인물로서 대략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초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11) 불교시인(佛敎詩人)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인물입니다. 이 책은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붓다의 모습보다도 신격화된 부처님의 덕[佛德]을 찬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헌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부처님은 우리와 너무나 동떨어진 인물입니다. 그의 능력은 감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스리랑카 출신 불교 학자인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과거의 여러 종교 지도자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붓다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도 온갖 형태의 신화와 전설들로 점철되어 왔다. 신화와 전설을 역사적인 실제 사건과 구분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려운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열렬한 광신도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문제이다. 신화를 해석하는 사람은 신화란 독실한 신도의 소박한 상상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광신도의 저항이 정당화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냉정하고 신중하게 분석해 보면, 신화란 극적인 설명이 요구되는 실제의 역사적 사건들이나 복잡한 인물 성격과 관련하여 감정이나 정신상의 사태들을 상징화한 것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12)
위에서 지적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붓다의 생애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생애에 있어서 신화와 전설의 부분을 삭제한다고 해서 부처님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붓다의 모습을 통해 진실로 인류의 스승으로서의 참모습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붓다의 생애를 공부하는 목적은 그러한 붓다의 생애를 거울삼아 우리들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여 역사적 인물로서의 고따마 붓다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근대 학문의 원전비평(原典批評)의 방법을 채택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의 성전(聖典)이라 할지라도 역사적 소산(所産)임을 인정하고, 그것은 사상의 발전에 기초하여 성립한 것임을 생각할 때, 후대의 전적(典籍)보다도 오래된 전적에 의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래된 전적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부분에 의거할 것입니다.13)
둘째, 우리는 고고학적(考古學的) 자료에 의거하여 확실한 증거를 찾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성전 중의 가장 오래된 부분에는 비교적 신화적 요소나 붓다의 초인화(超人化), 신격화(神格化)는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혀 신화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문헌에 근거하는 한, 신화적이지 않은 석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묘사(描寫)를 꿰뚫고, 역사적 면모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확실한 증거, 즉 고고학적 자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4)
셋째, 우리는 불교경전 중의 가장 오래된 것과 그와 거의 동시대의 다른 종교의 성전과를 비교해서 그 사상의 같고 다름을 밝히는 것이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붓다의 교설이 지니는 의의(意義)를 밝히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15)
넷째, 우리는 남방계의 불전(佛傳)에 의거하여 붓다의 생애를 조명할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처님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불전경전(佛傳經典)은 남방에 전해진 것(南傳)과 북방에 전해진 것(北傳)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생애를 표현하는 방법에도 남전과 북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남방의 불전에는 부처님의 생애를 ①탄생, ②깨달음을 이루다(成道), ③최초의 설법(初轉法輪), ④열반에 들다 라는 네 가지 사건(四大佛事)을 중심으로 설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와는 달리 북방의 불전에서는 ①도솔천에서 내려오시다(下天), ②마야부인의 태내에 들다(托胎), ③탄생(降誕), ④출가(出家), ⑤마귀 파순과 싸워 이기시다(降魔), ⑥깨달음을 여시다(成道), ⑦처음으로 설법하시다(初轉法輪), ⑧열반에 들다(涅槃)의 여덟 가지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여기에 더 상세히 하여 청년 시대, 결혼, 규방 생활, 고행, 깨달음의 자리에 있다 라고 하는 네 가지 항목이 더 추가되어 12 항목으로 된 것도 있습니다.16)
이와 같이 북전의 불전에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가정 생활을 거쳐 출가하고 고행해서 마왕을 항복 받고 성도하기까지의 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주로 남전의 불전에 의거하여 붓다의 생애를 조명해 나갈 것입니다.
붓다 탄생 이전의 인도
1. 인도의 자연환경
붓다의 생애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살았던 당시 인도의 역사적 배경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그 사람의 생애와 사상은 어떤 형태로든 그 당사자가 몸담고 있던 자연환경 및 생활환경 그리고 사회환경과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붓다께서 살았던 시대 상황과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완전히 알아야만 비로소 붓다의 생애와 그 역사적 의미를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붓다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 등에 대한 정보는 곧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도 역사적 산물(産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붓다와 그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붓다가 태어나 살았던 인도와 인도의 문명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도(印度)라는 말은 본래 대수(大水), 대해(大海), 대하(大河) 또는 인더스(Indus)강을 뜻하는 산스끄리뜨어(범어) 신두(Sindu)로부터 유래한 말입니다. 신두가 페르시아어의 영향을 받아 힌두(Hindu)로 변하고, 다시 그리스어의 영향을 받아 인더스(Indus)로 바뀌고, 인더스에서 현재의 인디아(India)라는 영어가 파생되었습니다.1) 하지만 인도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인도(India)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본래 범어나 힌디어로 된 인도의 호칭인 브하라뜨 칸다(Bharat-khanda) 또는 브하라뜨 와르샤(Bharat-varsa)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영원히 번영하는 사람들’ 또는 ‘영원히 번영하는 땅’이라는 뜻입니다.2) 후자의 ‘브하라뜨 와르샤’를 한국의 백과사전에서는 ‘바라타-바르샤’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 명칭은 바라타족(族)의 서사시 <마하바라타> 속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며, 자이나교의 성전(聖典)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일찍이 리그베다시대에 갠지스강(江) 상류의 광활한 지역을 통일하여 성세를 이룬 전설적인 바라타족에 자긍심을 가져, 외국인이 붙인 인도라는 국호보다 이렇게 부르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3)
인도는 히말라야산계(山系)의 남쪽에 가로놓인 유라시아 대륙의 반도로서 그 면적은 서유럽의 전지역에 필적하는 약 450만 ㎢이며, 현재는 인도공화국,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부탄 등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인도의 북쪽은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히말라야(Himalaya)산계(山系)와 힌두쿠쉬(Hindukush)산맥(山脈)을 경계로 아시아 대륙과 구분되고, 동서는 그 지맥(支脈)인 아라칸과 술라이만의 양 산맥으로 구분되며, 남쪽으로는 코모린 곶(Comorin cape)을 꼭지점으로 하는 광활한 역삼각형의 모양으로 펼쳐져 인도양(印度洋)에 돌출되어 있습니다. 이같은 인도는 그 지리적 특색에 따라 ①히말라야 지역, ②힌두스탄(Hindustan) 평원(平原), ③인도반도 또는 데칸(Decan) 고원 지역 등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뉘어집니다. 이러한 분류 외에도 인도를 ①인더스강 유역, ②갠지스강 유역, ③빈드야산맥 이남 지역 등 세 지역으로 나누는 경우도 있습니다.4)
이처럼 인도의 국토는 광대하기 때문에 기후도 매우 다양합니다. 남쪽은 북위 8도에서 북쪽은 37도까지 이르러, 대부분은 아열대(亞熱帶)에 속하나, 그 기후는 몬순(moonsoon, 계절풍)에 의해서 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기(雨期)와 건기(乾期)가 뚜렷이 구분되고, 하천(河川)의 수량도 연중 크게 변화합니다. 또 몬순의 도래시기가 일정하지 않아 봄베이(현재의 뭄바이)가 며칠씩 큰 비로 시달려도 델리는 건조한 날이 계속됩니다. 강수량도 아샘의 실롱 구릉(丘陵)이 세계에서 최대량을 기록하는데 반하여 라자스탄의 서부에는 사막이 전개되어 있습니다.5)
이러한 자연환경의 차이는 곧 생활문화의 차이로 연결됩니다. 아직도 원시림이 남아 있는 히말라야 산록의 계곡이나 분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더위가 극심한 평야 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라자스탄의 모래 먼지와 열풍이 몰아치는 지방과 벵갈이나 아샘처럼 다습한 지방과는 자연의 모습도 사람들의 의식주나 기질도 전혀 다릅니다. 데칸의 고원 지대에는 그 나름의 정신적·문화적인 풍토가 존재합니다. 다양한 인도의 자연은 참으로 다양한 생활문화를 산출하며, 거기에 인종이나 언어 상황마저 결부되게 되면 그 다양성은 더욱더 심화되는 것입니다.6)
2. 언어의 다양성
인도의 자연환경이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인종과 언어도 매우 다양합니다. 특히 인도의 언어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인도의 언어에 대한 전모를 파악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도에서 1961년 시행된 국세조사에 의하면 인도에서 ‘모국어’로 신고된 언어가 실로 1,652가지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는 기본적으로는 같은 언어이지만 부족에 따라 명칭이 다른 것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정리해 보면 방언을 포함하여 826종의 언어가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1971년의 조사에서 사용자가 100만을 넘는 언어는 33가지가 있고, 5천명 이상의 언어는 281가지를 헤아립니다. 이 가운데서 14개 언어는 헌법에 의해서 ‘특히 발전 · 보급시켜야 할’ 언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사용 인구가 많은 순서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①힌디어, ②델구어, ③벵갈어, ④마라티어, ⑤타밀어, ⑥우르두어, ⑦구자라티어, ⑧칸나다어, ⑨말라야람어, ⑩오리야어, ⑪판자비어, ⑫앗샤미어, ⑬캐시미르어, ⑭산스끄리뜨어 순입니다.7)
산스끄리뜨어는 고대로부터 문학과 사상을 담당해 온 문장어인데, 그래도 2,544명이 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것으로 신고되어 있습니다. 인도 문화의 담당자라는 뜻에서 인도 정부는 이 산스끄리뜨어를 ‘특히 발전 · 보급시켜야 할’ 언어 속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현재 인도에는 21개 주가 있는데, 이는 대체로 언어 지역에 따라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비하르 주나 라자스탄 주와 같이 일반적으로는 힌디어가 통용이 되고, 그 지역의 고유 언어는 위에서 언급한 공용어로 인정되지 않고 있는 것도 존재합니다. 반면에 우르두어나 산스끄리뜨와 같이 특정의 주를 가리지 않는 언어도 있지만, 이들을 제외하면 12개 언어가 이른바 공용어로서 통용이 되고 있습니다.8)
이러한 인도의 언어는 크게 몇 가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즉 인도-유럽어족의 인도-아리야어계가 있고, 주로 남인도에서 통용되는 드라비다어계가 있으며, 이 밖에 티베트-버마어계와 호주-아시아어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인종과 어계(語系)를 같이 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문화인류학이나 언어학에서 보여주고 있는 주목할 만한 성과는 어계와 인종이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즉 인종적으로 같은 집단이라 할지라도 단일한 어계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고 여러 어계의 다양한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9) 그렇지만 인도의 언어는 종족과 분리할 수 없는 어떤 깊은 관계가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3. 힌두문화의 형성
이와 같이 광대한 인도의 자연환경 속에서 다양한 종족에 의해 그들만의 독특한 인도문화, 즉 힌두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힌두문화는 오랜 세월동안 여러 종족들에 의해 형성된 각양각색의 문화가 하나로 어우러진 혼합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아리야(Arya)인들이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인도에 침입한 것은 기원전 1,500년 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인도에는 선주민족(先主民族)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10) 그들이 바로 ‘인더스 문명(Indus civilization)’을 이룩한 비아리야계로 알려진 드라비다(Dravida)인이었습니다. 이들이 이룩했던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 유역의 모헨조다로(Mohenjodaro)나 하랍빠(Harappa), 기타의 유적 발굴에 의하여 그 실체가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드라비다인 보다 먼저 인도에 들어온 종족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에는 일찍이 네그로이드(Negroid)인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이란연안을 거쳐 남인도 및 서인도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들은 곧 북인도에도 나아갔으며, 후에는 안다만제도에서 마레의 방향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후세의 인도문화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11)
그 후에 이주해 온 사람들은 호주-아시아계(Austro-Asia)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현대의 중인도의 콜족(Kol)과 문다족(Munda), 아삼의 카시족(Khasi)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또한 벵갈에서 비하르에 이르는 지방에 거주하는 산탈족(Santal)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얀마와 타일랜드의 몬족(Mon), 캄보디아의 크메르족(Khemer)도 동일한 계통에 속합니다. 그들은 당시 전 인도에 유포되어 있었으며, 그 후 인도문화의 여러 형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12)
다시 그 후에 유입된 사람들이 바로 드라비다(Dravida)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중해 지역 및 소아시아 방면에서 이주해왔다고 하며, 현대의 남인도 사람들은 주로 이 계통에 속합니다. 드라비다계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총인구의 20퍼센트가 넘습니다. 이 외에 현재의 벵갈지방에서 비하르, 오릿사 일대에는 티베트·버마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습니다.13)
이와 같이 인도에는 여러 이민족(異民族)들이 들어와 자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문화를 형성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인도의 문화는 대체로 바라문 문화가 과거 3천년 동안 그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바라문 문화를 형성한 주체는 바로 아리야(Arya)인들이었습니다. 이 민족은 피부가 희고 금발이며 코가 높은 것이 특색입니다. 민족학이나 비교언어학적 입장에서 보면 이란인·희랍인·로마인·게르만인들과 역사적으로 관련이 깊습니다.14) 이들이 인도아대륙(亞大陸)에 침입해 온 시기는 대략 기원전 15세기 이후라고 합니다. 그들은 먼저 서북인도의 판잡(Panjab, 五河) 지방으로 침입하였습니다. 판잡은 지금의 파키스탄에 해당됩니다. 이곳에는 인더스강을 이루는 다섯 지류가 있습니다. 판잡은 이와 같은 다섯 물의 흐름(panca ap)이라는 명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보통 오하(五河) 지방으로 불리는 이곳에 아리야인이 침입하여 원주민을 무력으로 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점차 동진(東進)하여 북인도의 중앙으로 확장하여 갔습니다. 물론 단일 민족이 한번 침입한 것이 아니라, 여러 집단이 파상적으로 이 지방으로 침범해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15)
서북인도에 침입한 아리야인은 인더스강 상류의 판잡지방에 정착하여 리그베다(Rg-veda)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를 탄생시켰습니다. 시기는 대략 기원전 1,200년 경입니다. 이것은 주로 천공(天空) · 비 · 바람 · 우뢰 및 기타의 자연계의 힘을 신으로 숭배하는 다신교(多神敎)였습니다. 그 후 기원전 1,000년 경부터 아리야인은 다시 동쪽으로 진출하여 야무나(Yamuna)강과 갠지스(Ganga)강 중간의 비옥한 토지를 점거했습니다. 이 땅은 토질이 매우 비옥해서 항상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었고, 외부로부터 침공하는 외적도 없어서 태평한 가운데 풍요로운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후세의 인도문화의 특징이 되는 갖가지 제도는 대개 이 시대(대략 B.C. 1,000-500)에 확립되었습니다.16)
이 시대에 아리야인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농경과 목축을 위주로 하면서 생활하고 있었지만, 상공업도 상당히 발달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도시는 아직 성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직업의 분화도 이루어져 신을 제사 지내는 제식을 담당하는 바라문계급(Brahmana, 브라흐마나), 군대를 통솔하고 정치를 담당하는 왕족계급(Ksatriya, 刹帝利), 그 밑에서 농경 · 목축 · 상업 · 수공업 등에 종사한 서민계급(Vaisya, 毘舍), 위의 세 계급에 봉사하는 것이 의무로 부여된 노예계급(Sudra, 首陀羅)이라는 사성(四姓, varna)의 구별도 이 시대에 확립되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여러 갈래로 복잡하게 분화된 카스트(Caste)제도의 모태가 되는 것입니다.17)
한편 정치적으로는 아리야인들이 발전함에 따라 부족간의 대립이나 통합이 생기고, 점차 군소 부족이 통합되어 독재권을 가진 왕(Rajan, 라잔)을 지도자로 받드는 왕국으로 발전해 갔습니다.18) 그리고 아리야인의 문화와 토착민의 문화가 접촉하는 과정에서 상호 융합과 변용 작용을 거쳐 정착된 것이 곧 힌두교 혹은 힌두문화입니다. 최초기의 힌두문화는 바라문 문화라고 할 요소가 많았지만, 이는 결코 정체적 · 고정적으로 파악되어서는 안됩니다. 아리야인의 생활문화가 표면화되면서도 내면으로는 아리야인과 원주민의 인종적 · 문화적 혼혈이 착실히 진행되어 갔던 것입니다. 경제적 · 사회면으로도 다양한 변화가 있었으며, 점차 기원전 6-5세기의 소위 인도고대사의 격동기로 이어져갔습니다.19)
끝으로 인도는 자연환경과 민족, 그리고 종교와 언어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습니다. 나라 야스아키(奈良康明)가 말한 것처럼, “한 국가 내에서 이처럼 많은 수의 언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민족이 다르고, 자연이 다르며, 이에 덧붙여 언어도 다른 것입니다. 인도라는 광대한 지역에는 사막도 있고 기름진 평야도 있습니다. 산악 지대가 있는가 하면 고원도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 조건의 차이에 따라서 사람들의 사고 방식도 다르고 생활 문화도 다릅니다. 실제로 인도에 가 보면 사람들의 용모나 체격 또는 의복이나 식생활, 그리고 생활 풍습 등이 지방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난다는 것을 누구든지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다양성과 그 위에서 그 다양성을 포괄하면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인도라는 세계인 것입니다.”20) 이러한 나라, 인도에서 기원전 6세기 경 석가모니 붓다께서 탄생하였습니다.
붓다시대의 정치·경제적 상황
1. 베다 종교의 출현
지난 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도 아대륙(亞大陸)에는 여러 인종들이 들어와 널리 퍼져 살면서 인도 역사를 이루어왔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인더스 문명의 주체자였던 드라비다(Dravida)인과 호주-아시아(Austro-Asia)계 이후 인도 아대륙의 새로운 주인공은 인도-아리야(Indo-Arya)인이었습니다. 인도-아리야인들은 인도-유럽인 가운데에서도 인도-이란인(Indo-Iranian)의 지파(支派)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아리야인이라는 말이 모든 인도-유럽인을 나타내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인도 아대륙의 인도-유럽계 사람들만을 한정해서 쓰고 있습니다.1)
이들은 원래 인도 아대륙에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라 유럽과 인도 아대륙의 어느 중간 지점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분산·이동하였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들 중 일부가 힌두쿠쉬(Hindukush) 산맥을 넘어 인도의 서북부를 통해 인더스강과 쟘나강 사이의 판잡(Panjab) 지방에 침입하여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600-1,300년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2) 그 시기는 정확한 것이 아니고 학자들에 따라 약간 다르게 추정할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아리야(Arya)라고 부르면서 다른 원주민들과 엄격히 구별하였습니다. 아리야란 고결한(noble), 명예로운(honorable)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리그-베다(Rg-veda) 등에 나오는 이 말의 기원은 근본적으로 선주민(先主民)에 대한 우월의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아리야인들이 처음에는 인더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수백 년 동안 동쪽으로 나아가면서 갠지스강 유역에 도달, 거기에서 다시 남인도 쪽으로도 뻗쳤습니다. 현대에 이르는 동안 선주민족(先主民族)과 혼혈하고 문화적으로도 복잡한 발전을 이룩했습니다.3)
인도에 들어온 아리야인은 <베다>라는 오래 된 성전(聖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베다>에 의지하여 세습적인 바라문이 희생(犧牲) 등의 종교 의식을 집행, 사람들의 안전과 행복을 도모하려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다}는 절대 신성하며, 바라문은 나면서부터 최고라고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아리야인의 생활은 주로 목축이었습니다. 따라서 우유나 유제품(乳製品)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바라문과 함께 소를 신성한 것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리야인은 목축민이라 농경(農耕)은 그렇게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4)
그러나 아리야인들이 판잡 평원(平原)에서 점차 동진(東進)하면서 농경생활에 적합한 문화와 종교를 발전시켰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종교는 주로 농경에 관계가 깊은 신(神)들을 모시는 제의종교(祭儀宗敎)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습니다. 이를 일컬어 베다(Veda)종교 또는 브라흐마니즘(Brahmanism, 바라문교)이라고 합니다.5)
그들은 기원전 1,100년-900년경에는 이미 갠지스강 상류지역까지 진출합니다. 그들은 다시 동쪽과 남쪽으로 전진하면서 자연환경에 힘입어 농업을 더욱 발전시켜갔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본래는 사제(司祭)였던 바라문들이 점차 하나의 사회계급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들은 주술(呪術)의 힘을 기조(基調)로 하는 제식(祭式)의 효과를 강조하고 이 제식을 독점함으로써 종교권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여기에 바라문 지상주의(至上主義), 제식(祭式) 만능주의(萬能主義)를 특징으로 하는 바라문 중심의 문화가 이른바 바라문 중국(中國)을 중심으로 꽃피게 됩니다.6)
이와 같이 바라문 문화는 서력 기원전 10-6, 5세기 경에 성립되었으며, 그 본거지는 남북으로는 빈디야산맥과 히말라야산맥으로 한정되며, 동으로는 프라야가, 서(西)로는 비나샤나에 이르는 지역입니다. 현대의 웃타르 프라데쉬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말합니다. 그들은 이곳을 중국으로 불렀습니다. 즉 ‘바라문 중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붓다가 활약했던 비하르주의 동방은 이곳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변방이었습니다.7)
2. 정치적 과도기(過渡期)
아리야인이 발전함에 따라 부족간의 대립이나 통합이 생기고 점차 군소 부족이 통합되어 독재권을 가진 왕(Rajan, 라잔)을 지도자로 받드는 왕국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부족간의 전쟁으로서는 당시 최강의 부족이었던 바라따(Bharata)와 뿌루(Puru)족간의 전쟁이 유명한데, 그 결말은 마하바라따(Mahabharata)라는 장편의 서사시로 구전되고 있습니다.8)
붓다 당시의 사회는 정치적으로 격변기(激變期)였습니다. 종래의 군소 부족국가들이 점차 통합하여 강력한 국가 체계가 형성됩니다. 초기경전에는 이른바 16대국(大國)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앙가(Anga), 마가다(Magadha), 카시(Kasi), 코살라(Kosala), 밧지(Vajji), 말라(Malla), 체띠(Ceti), 방사(Vamsa). 쿠루(Kuru), 판찰라(Pancala), 맛챠(Maccha), 수라세나(Surasena), 앗사카(Assaka), 아반띠(Avanti), 간다라(Gandhara), 캄보자(Kamboja) 등입니다.
이러한 16대국의 명칭은 고대 통일국가를 이룩했던 마우리야 왕조 이후에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붓다 당시에 모두 실재(實在)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습니다. 그러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것은 당시의 복잡했던 정치상황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16대국을 포함한 붓다 당시의 여러 나라에서는 공화정(共和政)과 군주정(君主政)의 두 가지 형태의 통치가 행해지고 있었고, 이들은 상호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전제군주(專制君主) 국가들은 주로 야무나강과 갠지스강 유역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공화정은 히말라야의 산기슭에 인접해 있었습니다. 군주국가의 팽창에 맞서 공화국들(ga a-sa ghas)은 존립을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또한 군주국끼리의 큰 전쟁도 빈발했고, 공화국끼리의 작은 싸움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공화국은 점점 쇠퇴해가고, 군주국은 영토와 국력을 증대시켜 갔던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추세였습니다.9)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 의하면, 붓다 당시의 석가족은 코살라국에 의해 멸망되었습니다.10) 장아함(長阿含) 유행경(遊行經)에는 마가다국의 아사세왕이 밧지(Vajji)를 정복하고자 하여 대신(大臣) 우사(禹舍)로 하여금 붓다께 자문을 구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또한 마가다국의 파탈리가마(Pataligama)는 대신 우사가 밧지국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했다는 등의 내용이 나옵니다.11) 또 사분율(四分律) 권39에는 코살라의 파사익왕(波斯匿王)과 마가다의 아사세왕이 싸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비구들이 그 죽은 사람들의 옷을 가서 가져오고자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는 베살리(Vesali)의 릿차비족(Licchavi)과 아사세왕이 싸워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12) 이 밖에도 붓다 당시의 정치 상황을 알려주는 내용은 상당히 많습니다.13)
그런데 본래 고대 인도의 공화제는 종족사회를 기초로 하여 발전하였고, 또한 전제군주제는 이러한 공화제 국가 및 그 주변에 잔존(殘存)하는 종족을 정복함으로써 발전하였습니다. 붓다시대의 존존 종족으로는, 사캬족(Sakya)을 비롯하여 말라종족(Malla), 리챠비종족(Licchavi), 비데하종족(Videha), 박가종족(Bhagga), 불리종족(Buli), 콜리야종족(Koliya), 몰리야종족(Moliya), 브라르마나종족(Brahmana), 칼라마종족(Kalama), 티바라종족(Tivara), 판다바종족(Pandava), 카칸다종족(Kakanda) 등이 알려지고 있습니다.14)
원래 종족사회란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정치적으로 독립한 사회로서, 당시 종족사회는 원시공동체 사회의 최고 조직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공화제 국가의 기초를 이루는 과정에서 해체되어 갔던 것입니다.
결국 전제군주제 국가든 공화제 국가든 모든 국가들은 종족사회가 붕괴한 폐허 위에 건설되었던 것이며, 더욱이 강력한 전제군주국가는 다른 약소국가를 정치적·경제적으로 종속시켜갔습니다. 코살라국에 의한 석가족의 멸망, 그리고 마가다국에 의한 코살라국의 멸망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정복적·노예적 관계를 거부하고 종족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종족들은 서로 연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밧지족은 리차비족과 비데히족의 연합종족으로서, 고대 인도 최후의 민주제 사회로 알려져 있습니다.15)
3. 상업의 발달과 도시화
붓다시대에 있어서 사회기구의 변동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경제적 사회를 확립하였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것을 확립한 근본기조(根本基調)는 촌락사회기구로부터 도시국가기구에로의 변동입니다. 그리고 이것과 병행해서 직업의 분화(分化), 생산기술의 향상, 대상인(大商人)의 출현, 동서교통로, 특히 서방제국(西方諸國)과의 교통로의 확립 등, 종래의 사제자(司祭者) 바라문에 의한 농촌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던 현저한 사회변동을 가져왔습니다.16)
그 배경에 대해 살펴보면, 대략 기원전 800년경에 철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철의 사용에 의해 농기구와 그 이외의 도구가 개량되었으며, 이는 숲의 개간과 농업 생산의 증대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또한 다양한 수공업 제품의 증산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토지가 증가하고, 많은 토지를 소유한 부유한 농민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풍부하게 생산된 제품은 자급자족의 범위를 넘어 상품으로 취급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를 사고 파는 상인계층이 출현하였습니다. 그들은 도적과 교통의 불편함 등의 난관을 극복하고 시골과 도시 사이를 왕래하며 교역했습니다. 그들은 점차로 이 교역로의 안전을 위하여 무력을 지닌 왕족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들은 무력에 의해 보호받았으며 교역의 이익을 확장하였으며, 동시에 왕족은 재정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육로와 하천을 이용한 교통로가 개척되고, 시장이 생기면서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거리·도시가 나타났습니다. 이에 따라 폐쇄적인 농촌의 부족사회는 도시에서 붕괴되어 갔습니다.17)
특히 상업의 발달은 자연히 교환의 매개체로서 화폐를 필요로 했습니다. 육로와 수로의 무역에서 제일 먼저 취급된 것은 금, 은, 보석 등의 사치품과 특산물이었습니다. 먼지 지역을 운반하기에 부피가 적으면서 값이 나가는 물건들을 취급하다가 점점 다양한 품목으로 발전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는 물물교환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점차 금속통화(金屬通貨)가 많이 이용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주조(鑄造) 동화(銅貨)나 타각인(打刻印)을 지닌 방형, 원형의 은화, 금화, 동화를 이용한 교환 경제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그 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화폐의 발행권은 국정의 최고 수반인 국왕의 손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입니다.18)
이와 같이 군주제 국가가 신장됨에 따라 국가의 장벽을 넘는 통상, 경제행위가 발전하였습니다. 이는 불가분 왕권의 강화와 결부되어갔습니다. 화폐경제가 일반화되고, 도시에는 상공업자의 길드도 생겼습니다. 조합장과 대상인의 자본가와 왕족은 도시를 중심으로 사회의 상층계급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라문들이 주장하는 사성제도(varna)에 구속되지 않았습니다. 재래의 농촌과는 다른 새로운 기운과 새로운 가치관의 새로운 문화가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바라문의 종교적 권위는 옛날의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19)
4. 반바라문적 사상운동의 태동
당시 바라문이 독점했던 제식(yajna)은 현세의 이익을 기원하는 의례였습니다. 현세이익은 어느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서민의 종교적 요청이지만, 이 시대에는 그 제식에 부수된 동물의 희생이 혐오되었으며, 그 효과도 의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푸자(puja)라는 새로운 예배의식도 토착문화에서 출발하여 번성하게 됩니다. 옛날의 신들은 몰락하고, 쉬바 또는 비슈누와 같은 신들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던 것도 이 시기부터였습니다.20)
동시에 인간의 지식의 발달은 종교적으로 보다 고차원적인 ‘해탈’의 경지를 희구하게 되었습니다. 해탈에 관한 수행법과 사상이 정비되고, 그 가치는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윤회와 업의 사상도 이 시대에 일반화되었는데, 당시의 문헌은 왕족이 이러한 새로운 설을 바라문에게 가르쳤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경제, 사회, 지성, 종교성 등의 여러 면에서 바라문 지상주의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초기의 불교경전이 사성을 기록함에 있어 크샤트리야를 바라문 보다 앞서 열거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회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21)
이러한 변모를 겪으면서 초기의 힌두문화는 급격히 동쪽과 남쪽으로 확대되어 갔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지역적 발전은 필연적으로 변모를 수반하였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동인도에서 현저하였습니다. 동인도는 바라문중국(中國)의 입장에서 보면 변방지역이며, 그러한 점에서 전통적인 바라문 문화의 속박을 덜 받는 지방이었습니다. 힌두세계에 동화되어 가면서도 독자적인 생활양식과 관행을 많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비바라문적 또는 반바라문적 분위기도 강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사상운동이 꽃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운동을 담당한 사람들은 슈라마나(Sramana, 沙門)라는 출가유행자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반바라문적 색채를 감추려 하지도 않고 다양한 학설을 제시하였습니다.22)
붓다도 이러한 슈라마나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불교는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종교문화 등 인간생활의 여러 면에서 재래의 전통이 의심되었던 격동의 시대에 태어난 신흥종교의 하나로서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였던 것입니다.23)
붓다의 가계(家系)
1. 석가족은 어느 종족인가
석가모니 붓다의 가계(家系)를 추적함에 있어서 대부분의 서구학자나 인도학자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은 일본의 학자들까지 석가족(釋迦族)1) 이 인도-아리야계 즉, 인도-유럽인의 일족(一族)이었다는 전제 아래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구학자들은 석가족이 아리야계로 자신들과 동족이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석가족의 인종에 대한 연구가 보다 심층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석가족이 비(非)아리야 계통의 종족이었다는 사실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석가족이 비아리야계 인종이었다는 연구 논문이 발표되면서 주목받고 있습니다.2)
그러면 과연 석가모니 붓다가 속한 석가족은 어느 인종에 속하였을까? 조준호 박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인도 유럽인(백인종)이었을까? 몽고 인종(황인종)이었을까? 아니면 드라비다(Dravida)인이나 호주-아시아(Austro-Asia)인이었을까? 아니면 이러한 인종들간의 혼혈이었을까?”3)이러한 네 가지 인종은 인도 아대륙에 널리 퍼져 살면서 인도 역사를 이루어 온 주요한 구성원들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석가족은 기원전 1,700년경 인도 서북부 지역으로 들어와 점차 동남쪽의 야무나강과 갠지스강을 따라 이동하였던 인도-아리야계의 한 부족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는 석가족이 아리야계라는 단정 아래 고대인도사나 불교사가 서술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920년대 후반 저명한 인도사학자 스미스(Vincent A. Smith)씨가 석존은 몽고인종이라는 설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는 석가족에 근접하여 살았던 릿차비(Licchavi)족이 티베트의 장례 풍습과 사법절차가 행해졌던 점을 증거로 들어 그 근친 종족인 석가족 또한 아리야계가 아닌 티베트 계통의 몽고계라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4) 그러나 당시 학계의 반응은 냉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학계에 물의를 일으킨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5)
한편 일본의 불교학자 미야사카 유쇼(宮坂宥勝)는 석가족은 비아리야족이며 지리문화적 배경으로 보아 몽고계 인종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붓다의 씨족은 인도에 베다(Veda) 문화를 일으킨 아리야족과는 다른 몽고계의 한 부족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6)
또한 이와모토 유타카(岩本裕)도 석가족은 비아리야 인종이라는 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습니다.7) 그의 주장 내용은 나라 야스아키(奈良康明)의 <인도불교>에 일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의 주장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불전은 사캬족이 <리그 베다> 이래의 영웅으로 일종족(日種族)의 선조인 이크슈바쿠(Iksuvaku)왕의 후예라고 합니다. 팔리어로 오카카(Okkaka) 왕이라고 하며, 감자왕(甘蔗王)으로 한역되는데, 이 역어는 언어학적으로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 왕은 푸르족과 야다바족의 선조라고 하는데, 이들은 모두 비아리야계의 부족입니다. 따라서 이 왕의 후예라고 하는 불전 자체의 기록에 따르는 한, 사캬족은 아리야인 계통이 아닙니다. 그리고 석존의 어머니 마야부인은 콜리야족 출신이라고 하였는데, 이 콜리야족도 오스트로-아시아계의 문다어를 사용하는 코르인과 관계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8)
그리고 태국의 불교학자 잠농 통프라스트(Chamnong Tongprasert)는 초기경전을 근거로 붓다의 생애를 정치적 시각에서 재조명한 매우 독창적인 논문을 발표했습니다.9) 그는 이 논문에서 석가족은 틀림없이 몽고계 인종이었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락카나 숫따(Lakkhana Sutta, 三十二相經)>에 묘사된 “그들의(석가족)의 안색은 청동 빛과 같았으며, 그들의 피부는 우아하고 부드럽고, 그들의 눈과 머리칼은 흑색이었다”10)라는 신체적인 특성과 “석가 왕국이 설립되었던 네팔을 포함하여 오늘날에도 히말라야 산맥 기슭을 따라서 분포된 민족의 대부분은 몽고계 인종에 속하기 때문에 이러한 석가족들은 틀림없이 몽고계 인종이었을 것”11)이라고 확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민족학적 연구에 의하면 당시 히말라야 산록 일대로부터 비하르, 벵갈 지방에 이르기까지 티베트·버마 인종의 제부족이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현재에도 히말라야 산간 지역에 이 계통의 부족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사캬족이 티베트·버마계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12)
그러나 사캬족이 아리야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캬족은 크샤트리야(Kshatriyas)라는 것입니다. 크샤트리야는 아리야인의 계급으로 사캬족이 그 안에 위치하고 있는 이상 그들이 아리야인임은 자명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캬족의 사람들 그리고 석존이 아리야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셋째, 사캬족의 사회는 부계사회로서 모계제 사회가 아니라는 점도 사캬족이 아리야계 인물이라고 결론짓는 하나의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13)
이에 대한 반론은 사캬족이 크샤트리야라고 하지만 새로운 부족이 아리야 문화권에 흡수되어 갈 때, 무력과 정치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크샤트리야로 자칭함으로써 아리야화되어 가는 사례가 여러 차례 있으므로, 크샤트리야라고 해서 아리야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14)
또한 사캬족이 아리야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증거로 아리야인이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인종집단과 어계(語系)를 같이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현재의 문화인류학이나 언어학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어계와 인종이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즉, 인종적으로 같은 집단이라 할지라도 단일한 어계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고 여러 어계의 다양한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도도 마찬가지로 인도-유럽계통의 언어를 쓴다고 해서 인종적으로 모두 인도-유럽인이 아니고 인도-유럽인 가운데도 드라비다계통의 언어를 쓸 수 있고 드라비다인 가운데도 인도-아리야어를 쓴다는 것입니다.15)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사캬족에 비바라문, 반바라문적인 요소가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라문 계급의 종교적, 사회적 권위는 공공연히 부정되고 있습니다. 또한 베다적인 제사도 수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석존이 슈라마나(沙門)로 수행을 시작하였던 것도 비바라문적 요소가 강한 동인도 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6)
나라 야스아키의 지적에 따르면, “그 후의 불교문화의 발전을 살펴보면 비바라문적 토착적 요소가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요가의 중시, 사리(유골)숭배, 스투파(탑)숭배, 동물숭배, 지모신(地母神) 계통의 야크샤니(Yaksan, 불전의 夜叉, 藥叉의 여성), 그 남성으로 귀령(鬼靈)의 하나인 야크샤 숭배, 나가(Naga, 뱀, 龍神) 숭배 등이 그러한 것이다. 물론 아리야 계통의 사람들도 이러한 토착문화를 흡수하였으므로, 이러한 점을 가지고 사캬족이 인종의 계통에 있어 비아리야계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캬족, 그리고 석존에서 시작되는 불교가 비아리야적 요소가 농후한 인도의 토착문화적 토양 가운데에서 성립·발전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17)라고 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캬족이 아리야인이라는 설의 근거도 박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캬족이 비아리야계의 인종이라고 확언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도 불충분한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연구 성과에 의하면 사캬족은 아리야계와 비아리야계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나라 야스아키가 말한 것처럼 현재로서는 사캬족이 아리야인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좀더 진행되어 확증적인 증거들이 나타나면 사캬족이 비아리야 계통의 인종이었을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석가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
석가모니 붓다의 가계(家系)에 관한 기술은 대부분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인지 밝혀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문헌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사카족은 자기의 종족에 대한 계보(系譜)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왕국이 코살라(Kosala)나 마가다(Magadha)에 비해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18)
초기경전인 숫따니빠따(Suttanipata, 經集)에 석가모니 붓다께서 직접 자신의 가문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19) 석존께서 출가하여 깨달음을 이루기 전,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 라자가하(Rajagaha, 王舍城)에서 탁발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의 탁발 모습을 높은 누각에서 바라보고 있던 빔비사라(Bimbisara, 頻婆娑羅) 왕이 그의 뛰어난 용모와 비범하지 않은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신하를 보내 석존이 머물고 있던 처소를 알아냅니다. 그런 다음 왕이 직접 그를 찾아가서 “나는 당신의 태생을 알고 싶으니 말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왕이여, 저쪽 히말라야 기슭에 한 정직한 민족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코살라 나라의 주민으로 부(富)와 용기를 갖추고 있습니다.”20)
“가계(家系)는 아딧짜(Adicca, 태양)이고, 태생(가문)은 사끼야(Sakiya, 석가족)입니다. 나는 그런 가문에서 출가했습니다. 내가 기쁨을 바라고 갈망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났을 때입니다.”21)
이와 같이 석가모니 붓다는 분명히 자신의 가계는 아딧짜(Adicca, 태양를 의미함)이고, 가문은 사끼야(Sakiya), 즉 사캬(Sakya)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숫따니빠따>에서는 석존이 ‘감자왕(甘蔗王, Okkakaraja)의 후예’이고 ‘석가족의 아들(Sakya putta)’22)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태양의 후예(Adiccabandhu)’23)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딧짜(Adicca)라는 호칭은 좀더 빈번히 쓰이는 수리야(Suriya, 태양)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붓다는 종종 ‘태양의 후예(Adiccabandhu, 日種族)’로 불렸습니다.24)
또한 디가-니까야(Digha Nikaya, 長部)의 암밧타-숫따(Ambattha-sutta, 阿摩晝經)에서는 석가모니 붓다의 친설의 형식을 빌어 사캬족의 선조는 옥까까(Okkaka, 감자왕)라는 왕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25)
이 전설은 암밧타(Ambattha)라는 바라문 청년이 붓다께 석가족의 비천함에 대하여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석가족의 기원과 옥까까(Okkaka)왕으로부터 청정한 혈통이 유지된 석가족의 기원과 함께 암밧타의 혈통도 같은 왕과 하녀에서 비롯된 것임을 그에게 일러주었습니다. 경전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암밧타여, 만일 너의 이름과 너의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씨족을 생각한다면, 사캬족은 성스럽게 태어났지만, 너는 사캬족의 하녀의 아들이다. 사캬족의 선조는 옥까까(Okkaka) 왕이다. 오랜 옛적에 옥까까 왕의 왕비는 자기의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위해서 다른 부인에게서 태어난 옥까무카(Okkamukha), 까라깐다(Karakanda), 핫티니까(Hatthinika), 시니뿌라(Sinipura)를 왕국에서 추방시켰다. 그들은 추방당한 뒤, 히말라야 기슭의 연못 근처, 거대한 사까(Saka) 숲에서26)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혈통이 타락하는 것을 염려하여 누이들과 결혼하였다. 옥까까 왕은 왕자들이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그의 신하에게 물었다. ‘왕이시여, 그들은 히말라야 기슭의 연못 근처, 거대한 사까 숲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혈통이 타락하는 것을 염려하여 누이들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러자 옥까까 왕은 감격적인 어조로 이렇게 선언했다. ‘왕자들은 진실로 훌륭하다(Sakya). 왕자들은 진실로 가장 훌륭하다.’ 그때부터 그들은 사캬족(Sakyas)으로 알려졌으며, 옥까까 왕은 사캬 종족의 시조가 되었다.”27)
이것은 완성된 전설 중의 일부이며, 마하바스뚜(Mahavastu, 大事)와 티베트 율장 및 팔리 주석서 등의 여러 곳에 실려 있습니다. 특히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의 주석서에서는 옥까까 왕 이전의 계보 등이 보다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설, 즉 “첫 번째 사카족으로부터 왕들의 가계는 마하바스뚜와 티베트 문헌 및 팔리 연대기들에서 계속되고 있지만, 각자 서로 너무나 다르다. 이것은 한 계통의 가계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년대기에 있는 명단들은 자따까(Jataka, 本生譚)에 나타나는 여러 왕들처럼 대부분 분명히 인위적으로 끼워 넣은 것들이다?28)라고 에드워드 토마스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파우스뵐(Fausboll)은 석가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은 라마야나(Ramayana) 설화와 그 변형된 것이 자따까(본생담)에서도 발견된다고 지적했습니다.29)
지금까지 살펴본 사캬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 붓다의 씨족은 아딧짜(Adicca)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사카족이 아리야계의 태양씨족(太陽氏族)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30) 하지만 정반대로 이것을 근거로 사캬족이 비아리야계임을 증명하는 학자도 있습니다.31)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석가족의 나라
1. 석가국의 실체
불교는 석가모니 붓다에 의해 창시된 종교입니다. 석가모니 붓다는 인도 동북부에서 기원전 6세기 혹은 5세기 경에 활약했던 분입니다. 그는 북인도에서 네팔에 이르는 지방에 있던 석가국1)에서 태어났지만, 출가하여 중인도 갠지스강 남쪽의 마가다(Magadha)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을 중심으로 한 여러 지방에서 수행을 하여 35세가 되던 때,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붓다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책에서는 붓다의 조국인 나라 이름[國家名]을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아버지를 국왕, 즉 슛도다나(Suddhodana, 淨飯王)라고 칭하고, 그의 어머니를 마야(Maya, 摩耶) 왕비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붓다의 어린 시절을 말할 때 태자(太子)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붓다가 속했던 나라의 실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불교도들은 불교의 개조인 석가모니 붓다의 고국인 석가국이 큰 나라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불교도들은 가능한 석가국에 대해 좋게 묘사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석가국은 붓다 당시 정치적으로 주권을 가진 독립적인 국가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미 붓다 당시에 강대국이었던 꼬살라국에 예속된 작은 영토의 자치주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으로 엄격히 말해서 석가국이라 할 수도 없지만, 여기서 다만 편의상 석가국이라 지칭하는 것입니다.
붓다의 고향, 사캬족(석가족)의 나라에 대해서는 오직 불교도의 저작에서만 알려져 있습니다. 반대로 인도의 정치사에서 석가국의 존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현재 석가족의 나라는 바흐라이치(Bahraich)와 고라크뿌르(Gorakhpur) 사이 네팔의 접경에 인접해 있는 여러 주들의 동북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석가족의 나라에 대한 최초의 정보는 경전들의 서두에 나옵니다. 경전들에서는 수도 까삘라밧투(Kapilavatthu, Skt. Kapilavastu, 迦毘羅城)와 석가족의 여러 마을 혹은 군구(郡區), 그리고 꼬살라(Kosala)국의 수도 사왓티(Savatth , Skt. Sravasti, 舍衛城)가 자주 언급됩니다. 이것만으로는 석가국의 지리적 위치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2)
석가족의 나라에 대한 정보는 세 가지 자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석서와 그 주석서에 기초를 둔 편찬물들에 기록된 전통에 의한 것입니다. 둘째는 인도 성지(聖地)를 직접 방문했던 중국의 순례승, 즉 법현(法顯, 399-414 A.D.), 현장(玄奘, 629-645 A.D.) 등의 기록에 따른 것입니다. 셋째는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것입니다.
2. 석가국의 지리적 위치
석가족의 근거지는 까삘라밧투(Kapilavatthu)였습니다. 까삘라밧투를 중국의 역경가들은 가비라성(迦毘羅城)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때문에 붓다의 고향이 굉장히 큰 고대 도시의 성(城)으로 연상하기 쉽니다. 그러나 실제로 거대한 성이었는지는 의문이며, 현재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더라도 웅장하고 화려했던 성의 자취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실제로 이 까삘라밧투가 정확히 어디인지에 대해서 밝혀내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현대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조사와 중국의 구법승(求法僧)이었던 법현과 현장의 기술이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서기 5세기 초에 중국의 승려로서는 처음으로 인도 땅을 밟은 구법승(求法僧) 법현(法顯)이 까삘라밧투를 찾아갔었다고 합니다. 그의 기행문 <불국기(佛國記)>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동쪽을 향해 1요자나(약 9마일) 남짓 가면 까삘라밧투에 이른다. 성(城)안은 왕도 백성도 없고 황폐하여 다만 얼마간의 승려들과 민가가 수십 호 있을 뿐이었다.”
또 7세기 경, 저 현장(玄奘)이 그곳에 갔을 때는 더욱 황폐해서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어느 곳에 성이 있었는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현장은 석가족의 수도 까삘라밧투는 사왓티(舍衛城)에서 동남쪽으로 약 5, 60리 떨어져 있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나서 19세기 말 경에 영국의 탐험가 커닝엄(Cunningham)3) 이 여러 문헌을 섭렵하고 자신이 직접 답사하였으나 까삘라밧투라는 이름의 유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4)
그러나 그 뒤 빈센트 스미스 등의 연구에 의해 어느 정도 윤곽은 드러나 있습니다.5) 스미스씨는 “비록 법현이 보았던 거의 모든 성스러운 장소[聖地]를 현장 또한 보았다. 현장은 여러 가지 다른 부가적인 사항들을 기록하였는데, 두 기록자들이 같은 장소를 묘사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록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매우 다르다”6)고 지적하였습니다. 스미스씨에 의하면 법현이 보았다고 하는 까빌라밧투는 빠다리아(Padaria) 남서쪽 9말일 지점에 있는 삐쁘라바(Piprava)였고, 현장이 보았다고 하는 까삘라밧투는 서북쪽 14마일 지점에 위치한 띨라우라 곳(Tilaura Kot)이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7) 이러한 자세한 지리적 사항에 대해서는 여기서 생략합니다.
까삘라밧투라는 지명은 ‘까삘라(Kapila)’라는 선인(仙人)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며, ‘밧투(vatthu)’란 ‘지방’ 또는 ‘지구(地區)’라는 말입니다.8) 까삘라밧투는 까삘라뿌라(Kapilapura, 迦維羅弗羅)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까삘라밧투라는 지명이 까삘라 선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까삘라 선인은 전설적 인물이므로 그 역사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까삘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고, 또 일정하지 않으므로 어느 설명이 꼭 맞는 것인지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9)
전설에 의하면, 석가족의 시조는 이크슈바꾸(Ikshvaku, Okka ka, 甘蔗王)라고 합니다. 옛날에 이크슈바꾸, 즉 감자왕(甘蔗王)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리야족의 태양계 씨족의 첫 왕이라고 합니다. 그에게는 사남오녀(四男五女)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다시 젊은 왕비가 왕자를 낳자, 이 왕비는 자기가 낳은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 싶은 생각으로 왕의 환심(歡心)을 사서, 그 네 왕자를 국외(國外)로 추방(追放)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 네 왕자들은 다섯 왕녀(王女)들과 함께 북쪽 히말라야산 기슭까지 가서, 까삘라(Kapila)라는 선인(仙人)이 수도하고 있던 근처에까지 가서 정착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혈통을 존중하는 생각에서 장녀를 어머니로 삼고, 사왕자(四王子), 사왕녀(四王女)가 서로 혼인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크슈바꾸왕은 뒤에 왕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그 행방을 찾아다니다가 이러한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나라 일을 잘 시작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잘 했다’는 뜻을 가진 ‘사캬’라는 말이 이 네 왕자의 나라의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서울이 까삘라 선인의 암자(庵子)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그 서울을 까삘라밧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석가족의 나라에 관해서 후대(後代)의 중국 순례승(巡禮僧) 현장(玄奘)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토지는 비옥한 편이며, 농사를 짓되, (적당한) 시기에 파종(播種)을 한다. 사계(四季)의 운행(運行)은 규칙적이며 (주민의) 풍속은 화창(和暢)하다.”
이 지방에서는 지금도 벼농사를 하고 있는데, 석가 당시에도 논농사를 지을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석가의 부왕(父王)의 이름을 숫도다나(깨끗한 쌀, 淨飯)라고 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10)
3. 석가국의 정치적 위치
석가족의 나라는 전체 인구 백만 정도의 작은 나라였다고 합니다. 이 종족의 일부는 로히니(Rohi ) 강을 사이에 두고, 다른 집단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들을 꼴리야(Koliyas, 拘利)족이라고 부릅니다. 석가족의 수도는 까삘라밧투였고, 꼴리야족의 수도는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였습니다. 이 두 종족 사이에서는 서로 혼인관계를 맺고, 대체로 친밀한 관계를 지키고 있었습니다.11)
붓다 시대의 정치체제는 크게 두 가지, 즉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와 공화제(共和制)가 있었습니다. 당시 마가다국과 꼬살라국과 같은 아리야계 종족들은 전제 군주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밧지족(Vajjis)과 말라족(Malla s) 등과 같은 비아리야계 종족[몽골계]는 공화제로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석가족과 꼴리야족은 비아리야계 종족이었으나, 이미 아리야 계통의 전제군주 국가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12)
석가족의 정치체제는 일종의 귀족적(貴族的) 공화제였고, 소수의 지배계급의 합의(合議)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불전(佛典)에 공회당(公會堂)의 건설 및 낙성식 같은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사정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인도의 일반적인 정세는 점차 강력한 전제정치(專制政治)가 대두되는 기운이 농후하였습니다. 석가 당시에는 이미 네 개의 대전제왕국(大專制王國)이 그 세력을 확대해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다왕국은 빔비사라왕의 영도 아래 앙가(Anga, 鴦伽)를 비롯한 밧지, 말라의 군소국가(群小國家)를 정복해 가는 기세였으며, 꼬살라 왕국은 까시(Kasi, 迦尸)국을 점령하고, 석가족의 나라를 보호령(保護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석가족은 그러한 상태에서 마가다국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은 덕택에 간신히 평화를 유지할 정도였던 것입니다.13)
석가족과 꼴리야족이 살던 지대는 히말라야의 남쪽 기슭으로 로히니강(江)을 비롯해 하천(河川)이 많고, 지미(地味)도 비옥(肥沃)하고, 목축(牧畜)에도 적당하여 사람들이 참으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석가 일가(一家)의 가문(家門)의 이름을 고타마(Gotama, 喬答摩)라고 했는데, 그 뜻은 ‘가장 훌륭한 소’ 또는 ‘소를 제일 소중히 여기는 자’란 의미이므로 이 이름도 역시 석가족이 농업과 목축을 주로 하는 종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석가족의 정치적 지위는 그렇게 높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석가족의 모든 활동은 언제나 꼬살라국에 의해 감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사실 석가 왕국은 꼬살라국과 비교하면 너무나 작았습니다. 석가족은 전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싸울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당시 꼬살라국은 가장 강력한 왕국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입니다.14)
비록 꼬살라국이 석가족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통치하기를 허용했을지라도, 그것은 섭정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석가족은 경제, 통상과 재판에 있어서 만은 자유를 가지고 있었으나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석가족이 독립을 원하긴 했지만 대군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독립을 이룩할 수 있었겠습니까? 꼬살라국도 물론 그들을 해방시키지 않았습니다.15)
석가족은 오직 꼬살라국에서 허가된 범위 내에서만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들의 생각은 독립으로 가득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통치의 주체는 여러 큰 종족의 수령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 석가족의 수령들을 자신들은 캇띠야(Khattiya, Skt. Kshatriya)’나 ‘전사(戰士)’ 혹은 때로는 ‘라자(Raja)’라고 불렸는데, 서양 개념의 왕은 아닙니다. 그들은 대개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회의에서 그들은 의장직을 수행할 자신들 중에서 한 사람을 선출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직위를 매우 잘 실행했다면 그는 석가족의 숫도다나(Suddhodana)와 같이 오랜 기간 동안 의장으로 임명되었을 것입니다. 때때로 의장직은 밧지족의 경우와 같이 윤번제로 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16)
석가족의 정치적 위치가 이러한 때에 고따마 싯닷타가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석가족의 ‘희망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국민들은 그를 사랑했으며, 그가 최고의 군주가 되어 자신의 나라를 꼬살라국의 지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17)
그러나 싯닷타는 자기 자신과 자기 씨족의 지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강건함과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싸움에 의해 꼬살라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와 몇몇 유능한 친구들과 작은 군대는 잘 훈련된 꼬살라국의 거대한 군대와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독립을 얻는 것은 쉽지 않았으며 전혀 현명한 방법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곤충이 불 속으로 날아드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방법, 즉 유혈 없는 평화적 독립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그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꼬살라국에서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고민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내린 마지막 결론은 출가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18)
붓다의 탄생(誕生)
1. 탄생에 관한 전설
붓다의 생애 가운데 탄생과 관련된 신화와 전설이 가장 많습니다. 붓다의 탄생에 관한 유명한 전설의 골자는 이미 초기성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석존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투시타(Tusita, 兜率天)에 있다가, 거기서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코끼리를 타고 내려와 마야 부인의 태(胎)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역에서는 석존의 탄생을 일반적으로 ‘강탄(降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1)
이러한 강탄 설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한 인간이 그 짧은 기간에 그토록 완벽한 인격을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부처 되기 이전에 무수한 생애를 거쳐오는 동안 끝없이 자기 희생의 공덕을 쌓았고, 그 결과 도솔천에 올라가 거기에서 신들을 교화하면서 지상에 내려올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2) 그래서 보살의 수많은 전생 설화가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생 설화들은 대부분 여러 생애를 통해 선행의 공덕을 쌓았다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결과 도솔천에 머물고 있으면서 인간 세상에 내려가 교화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솔천 하강설입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도솔천은 보살(菩薩)이 다음 생애에는 지상에 태어나 부처가 될 것이므로 그 준비를 위해 그곳에 잠시 머문다고 합니다. 이때 보살은 하생의 시기와 대륙과 나라와 집안에 대해 살핀다고 합니다. 시기라 함은, 인간 사회가 너무 이상적인 상태에 있으면 종교심이 일어나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타락한 세상에서는 종교를 돌아볼 여유가 없으므로 그 중간의 알맞은 시기를 가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륙[洲]이라 함은, 고대 인도의 세계관에 의한 네 개의 주 가운데 하나를 가리킵니다. 그 중에서 잠부드비파(閻浮提)라는 곳은 인도를 중심으로 한 우리들의 인간 사회를 말한 것인데 부처님의 출현에는 거기가 제일 적당하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같은 인도 중에서도 변경(邊境)이 아닌 중앙부가 좋다고 선택됩니다. 인도 사회의 계급은 세습 종교가인 바라문과 무사 귀족의 크샤트리야(刹帝利)가 상위(上位)에 있는데,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는 크샤트리야 쪽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보살도 그런 집안에 태어나기로 한다는 것입니다.3)
여러 신들은 어느 나라의 왕을 고를까를 의논하여, 열여섯 큰 나라를 하나씩 들어보지만 보살이 태어나기에 적당한 곳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들이 다시 보살에게 그 조건을 물으니, 보살은 국토에 대해서는 예순 네 가지, 어머니가 되실 분에 대해서는 서른 두 가지 조건을 내어놓습니다. 말하자면 국토의 이상과 여성의 이상을 말한 것입니다. 어느 것이나 그 인품이 뛰어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을 들은 여러 보살과 신들은 석가족의 숫도다나왕(淨飯王)과 마야비(摩耶妃)야말로 그런 분이라는 의견이 일치되었다고 합니다.4)
한편 보살은 도솔천에서 신들에게 법을 설합니다. 신과 천녀들은 머지않아 보살과 작별할 것을 슬퍼합니다. 보살은 자기의 후임으로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정했다고 합니다. 미륵보살은 도솔천에서 신들에게 법을 설하고 언젠가는 석가모니를 본받아 지상에 내려가 부처가 될 날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5)
후세의 전설들에 의하면 특히 한역 경전들에 의하면 태자가 탄생하자, 많은 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손으로 태자를 받들었다고 하고, 그 때에 하늘에서 두 줄기의 온수(溫水)가 쏟아져 태자의 몸을 씻어드렸고, 그러자 태자는 선뜻 대지(大地)에 일어서서 사방(四方)을 둘러보며,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내디디고서 오른 손으로는 위를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사자후(獅子吼)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탄생게(誕生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붓다의 탄생에 관한 설화는 일찍부터 신화화(神話化) 되었습니다. 초기경전에도 탄생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남아 있는데, 이러한 설화들은 후대로 가면 갈수록 더욱더 윤색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화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 학자들은 오늘날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정전에 기록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분명하게 믿을 수 없는 부분을 빼버리고, 나머지 부분을 역사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6) 다만 우리는 이러한 설화를 통해 이렇게 해서라도 상징(象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인류의 스승 석가모니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흠모(欽慕)의 정을 충분히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7)
2. 역사적 붓다의 탄생
석가족은 현재 네팔 중부의 남쪽 변경과 인도 국경 근처에 위치하였던 작은 부족으로, 까삘라밧투(Kapilavatthu, 현재 네팔의 타라이 지방의 티라우라 코트에 해당함)를 수도로 하여 일종의 공화정치 또는 귀족정치(혹은 과두정치)를 행하였습니다. 왕(rajan)이라고 하는 수장(首長)을 교대로 선출하는 독립된 자치공동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꼬살라 국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8)
붓다는 이러한 석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였고, 그의 어머니는 마야(Maya, 摩耶) 부인이었습니다. 아버지 숫도다나는 수장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왕으로 불렸으며, 석존도 왕족 출신이었다고 합니다.9) 그러나 결코 대왕(大王)이라고 불린 적이 없습니다. 아마 이 지방의 지배자(支配者)였던 것은 틀림없으나, 대국(大國)의 왕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정반대왕(淨飯大王)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후세 사람들이 그를 이상화(理想化)한 데서 생긴 호칭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마야부인도 후세에는 마하마야(Mahamaya) 왕비로 높여 불렸습니다. 그녀는 같은 석가족의 한 별계(別系)인 꼴리야(Koliyas)족의 공주였습니다.10)
초기성전에서는 고따마(Gotama, Gautama, 瞿曇)라고 하는 이름이 종종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가장 좋은 소’라고 하는 의미의 족성(族姓)입니다. 그의 이름은 싯닷타(Siddhattha, Siddhartha, 悉達, ‘목적을 성취한 자’의 뜻)이지만 초기성전의 오래된 부분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아 후세에 와서 쓰이게 된 이름으로 보입니다.11)
숫도다나(정반왕)에게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석존을 낳은 것은 아마 당시 40을 넘었을 때의 일인 것 같습니다. 석존의 탄생이 이 가문(家門)의 얼마나 큰 경사(慶事)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12)
마야 왕비는 출산이 임박해 오자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아기를 낳기 위해서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로 향하던 중, 두 도시 사이에 위치한 아름다운 룸비니(Lumbin ) 동산에 이르자, 꽃이 만발한 무수 아래서 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13)
왕자가 태어난 지 닷새 째 되던 날, 왕은 여덟 명의 현자를 청하여 아기의 이름을 짓고 또 왕자의 앞날을 점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현자들은 왕자에게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란 뜻으로 ‘싯닷타(Siddhattha)’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바라문들은 심사숙고한 후 일곱 명은 두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이 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전 세계의 통치자인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이 되어 온 세계를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세속을 떠나 출가한다면 왕자님은 정등각자(正等覺者)가 되어 사람들을 무지에서 구해낼 것입니다.” “오! 왕이시여! 이 왕자는 언젠가는 진리를 찾아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정등각자가 될 것입니다.”14) 그런데 어머니 마야부인은 석존을 낳은 지 이레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동생인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大愛道瞿曇彌)가 양모가 되어 석존을 양육하였습니다.
3. 붓다의 탄생지: 룸비니
붓다의 탄생지는 룸비니(Lumbin )라고 전해지는데, 1896년 퓨러(A. Fuhrer)15)가 네팔 타라이 지방의 룸민디에서 발견한 아소까 왕의 석주(石柱)에는 ?여기에서 불타 석가모니가 탄생하였다?고 하는 뜻의 글이 새겨져 있어 석존 탄생지에 대한 초기성전의 기술이 역사적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16) 이곳은 현재 룸민데이(Rummindei)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 룸비니 동산은 마야비(妃)의 친정인 석가 일족의 데바다하(천비성)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왕비의 친정 어머니 이름을 따서 룸비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온갖 아름다운 꽃과 수목, 과일이 열리는 나무가 울창하고, 연못과 늪과 흐르는 시내도 있고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훌륭한 동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기 405년 이곳을 찾은 중국인 승려 법현(法顯)은 여기에 두 용왕이 태자에게 첫 목욕물을 끼얹어주었다는 유적이 그때도 우물과 연못으로 쓰이고 있었으며, 그 근처에 살고 있던 불교 승려들의 음료수로도 사용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 633년 이 지방을 찾아간 현장(玄 )은 연못과 샘말고도 그 고장 사람들이 유하(油河)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시냇물이 동남쪽으로 흐르고 있더라고 적었습니다. 해산한 뒤 마야비가 목욕한 강이라는 것입니다.17)
현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곳에 무우왕(無憂王, 아소까왕을 가리킴)이 세운 큰 돌기둥[石柱]이 있고 그 꼭대기에 마상(馬像)이 새겨져 있었는데, 뒷날 벼락으로 돌기둥이 중간에서 꺾이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8)
이 룸비니 동산의 유적은 오랫동안 정글에 묻혀서 잊혀진 채 겨우 그 고장 사람이 조그만 집을 짓고 지켜왔었습니다. 그러다가 1896년, 그 당시 인도 정부의 노력으로 퓨러(A. Fuhrer)라는 사람이 네팔에 들어가, 이른바 타라이 지방의 룸민디라는 마을이 룸비니의 고적임을 확인했습니다.19) 특히 아소까왕이 세운 돌기둥이 발견됨으로써 결정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현장이 기록한 바와 같이 그 돌기둥의 위쪽은 꺾여진 채 없어지고 말았지만, 아랫부분은 그대로 있어 거기에 적힌 비문의 넉 줄 반의 글자는 온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석주에는 93자로 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습니다.
“신들의 보호를 받는 덕 높은 왕(아소까)이 왕위에 오른지 20년 되는 해에 친히 이곳에 와서 공양을 올렸다. 여기서 붓다 사캬무니가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담을 만들고 돌기둥을 세우게 했다. 세존께서 여기서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받고, 또 생산의 팔 분의 일만을 지불하게 된다.”20)
위의 석주에는 ‘석가족의 성자, 붓다, 여기서 탄생하셨도다.'(hida buddhe jate Sakyamuni)21)라는 대목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 의해 이곳이 룸비니 동산이었음이 분명히 밝혀진 것입니다. 이 거대한 석주는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서기 7세기 중엽 중국의 구법승 현장 법사가 여기에 왔을 때는 석주는 이미 벼락으로 부러져 있었지만, ‘어제 깎은 듯 생생하다’고 했습니다.
4. 탄생 연대
붓다의 탄생 연도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학설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전과 북전에는 약 100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동남아시아 제국의 불교도들은 불멸(佛滅)을 기원전 544년(또는 543년)으로 보는 학설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것은 세일론(스리랑카) 불교의 전설에 근거한 것이어서 의심의 여지가 있으며 학문적으로 무시되고 있습니다. 학문적 입장에서 볼 때 현재 학계에서 쓰이고 있는 붓다의 재세 연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22)
첫 번째는 서력 기원전 약 560-480년 설입니다. 이것은 주로 서양의 여러 학자들이 세일론의 사서(史書) 등의 자료를 검토하여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멸 연대를 서력 기원전 489년(A. Bareau), 487년(V. A. Smith), 484년(H. Jacobi), 483년(W. Geiger 등), 482년(J. Fleer) 혹은 478년(J. Filliozat), 477년(F. Max Muler 등)으로 보는 등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이들의 학설은 이른바 중성점기(衆聖點記; 많은 聖者들이 불멸 후 <律藏>에다 매년 점을 하나씩 찍어 온 기록)에 희한 486년 설(수정설은 485)과도 거의 일치합니다.23)
두 번째는 서력 기원전 약 460-380년 설로서 일본의 우이하쿠주(宇井伯壽)와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의 학설입니다. 우이(宇井)은 아소까 왕의 즉위 연대를 기원전 271년으로 추정하고 이 즉위가 불멸 후 116년에 거행되었다고 하는 북전(北傳)의 불교 전승에서 역산(逆算)하여 불멸을 서력 기원전 386년으로 산정하였습니다. 아소까 왕의 연대는 그 후의 연구에 의해 다소 수정되어 현재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는 268년 즉위설을 취합니다. 따라서 붓다의 연대는 서력 기원전 463-383년으로 수정됩니다.24)
이상의 두 가지 학설에는 약 100년의 차이가 있지만 고대 인도에 있어 역사 관념의 결여, 연대의 불명확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100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는 것에 오히려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25)
우리나라에서 붓다의 탄생일을 4월 8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방의 불교국에서는 베사카(Vesakha, Vaisakha, 인도력의 2월로서 태양력으로는 4-5월에 해당함) 월의 만월일(滿月日)을 붓다의 탄생·성도·열반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인도와 중국의 역법(曆法)이 서로 틀리기 때문입니다.
붓다의 젊은 시절
1. 태자의 어린 시절
태자가 탄생한 후 7일 만에 그의 생모(生母)였던 마야(Maya) 왕비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야 왕비의 사망에 관한 여러 학설들이 있지만, 너무 미화시킨 것이라 믿기 어렵습니다. 마야 왕비가 일찍 사망한 원인은 아마 산후 몸조리를 잘못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출산을 위해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로 가던 중, 룸비니(Lumbini) 동산에서 태자를 낳았습니다. 야외에서 출산한 뒤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곧바로 이동하여 왕궁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태자가 자라면서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한 사실은 태자의 인격과 성격 형성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봅니다.1)
그 후 태자는 그의 이모(姨母)인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大愛道瞿曇彌)에 의해 양육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언니인 마야 왕비의 뒤를 이어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의 부인이 되었으며, 나중에 난다(Nanda, 難陀)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나중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비구니 교단(敎團)은 그녀의 출가로 인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붓다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관해서는 자세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단편적인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자료들에 의하여 붓다의 어린 시절을 종합 정리해 보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붓다는 어려서부터 감수성이 예민하여 뭇 생명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실례로 어느 날 농부가 일구어 놓은 땅 속에서 벌레가 기어 나오자 새가 날아와 그 벌레를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을 본 태자는 생물은 서로 해친다는 것을 통감했다고 합니다.
둘째, 붓다는 천성적으로 명상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2) 태자가 어렸을 때부터 매우 명상(冥想)을 좋아하는 형의 소년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석가족의 왕인 그의 아버지는 국가적인 행사인 농경제(農耕祭)에 참가했습니다. 이때 어린 왕자도 함께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농경제가 진행되는 동안 어린 왕자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피해 나무 밑에서 좌선을 하여 초선(初禪)의 경지에 들었다고 합니다.
<중아함경(中阿含經)> 제29권의 <유연경(柔軟經)>에 따르면, 붓다께서는 출가 전에 이미 초선(初禪)의 경지를 체험한 것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경전의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또 옛날을 생각하면, 농부가 밭 위에서 쉬는 것을 보고 염부(閻浮)나무 그늘에 가서 가부를 맺고 앉아 욕심을 떠나고 악하고 선하지 않은 것을 떠나,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어, 욕계(欲界)의 악을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 초선(初禪)을 얻어 성취하여 노닐었다.”3)
이 때가 농경제(農耕祭)에 참가했을 때인지 아니면 다른 때인지는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태자가 홀로 나무 밑 그늘진 곳에 앉아 명상에 잠기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쾌 지나간 모양이었습니다. 다른 나무들의 그늘은 해가 돌아감에 따라 모두 그 그림자 자리를 옮겨갔는데, 태자가 앉은 나무의 그늘만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의 오래된 조각(彫刻)들에는 그 광경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시간도 태자의 명상을 깨뜨리지 못한다는 미래의 붓다의 위력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설사 이것이 후대의 추측인 첨가라 할지라도 충분히 사실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4)
한편 후대에 성립한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의 제4권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태자의 선정에 대해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태자가 염부수(閻浮樹) 아래에서 사선(四禪)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5) 이것은 붓다께서 출가하여 성도(成道)를 향한 고행을 마치고, 과거 소년시절 체험했던 명상의 시간을 회상하여 그와 같은 방법으로 좌선하게 되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셋째, 붓다의 젊은 시절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던 것 같습니다. 붓다께서 만년에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여 제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앞에서 인용했던 <중아함경> 제29권 유연경에 설해져 있습니다. 이 경전에 의하면, 자신을 위해 겨울·여름·봄 세 계절에 어울리는 세 가지 종류의 궁전(三時殿)이 지어졌다는 등 유복하고 호화로운 생활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내가 부왕(父王) 숫도다나(悅頭檀) 집에 있을 때에는 나를 위해 여러 가지 궁전, 곧 봄 궁전과 여름 궁전 및 겨울 궁전을 지었으니, 나를 잘 노닐게 하기 위해서였다. 궁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시 푸른 연꽃 연못·붉은 연꽃 연못·빨간 연꽃 연못·흰 연꽃 연못 등 여러 가지 연꽃 연못을 만들고, 그 연꽃 가운데에는 온갖 물꽃, 곧 푸른 연꽃·붉은 연꽃·빨간 연꽃·흰 연꽃을 심어서 언제나 물이 있고 언제나 꽃이 있었으며, 사람을 시켜 수호하여 일체 통행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나를 잘 노닐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네 사람을 시켜 나를 목욕시키고는 붉은 전단향( 檀香)을 내 몸에 바르고 새 비단옷을 입혔으니, 위아래나 안팎이나 겉과 속이 다 새 것이었다. 그리고 밤낮으로 언제나 일산(日傘)을 내게 씌웠으니, 나로 하여금 밤에는 이슬에 젖지 않고 낮에는 볕에 그을지 않게 하기 때문이었다. ……
내가 옛날의 아버지 숫도다나 집을 생각하면 여름 4개월 동안은 정전(正殿)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남자는 없고 오직 기생만 있어서, 스스로 즐기면서 당초에 내려오지 않았다. 내가 동산으로 나가려고 할 때에는 삼십명의 제일 훌륭한 기병(騎兵)을 뽑아 의장(儀仗)이 앞뒤에서 시종하고 인도하게 하였으니, 그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이런 여의족(如意足)이 있었으니, 이것이 가장 유연(柔軟)한 것이었다.”6)
팔리어로 씌어진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aya, 中部)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7) 이와 같이 태자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 보다 좋은 조건과 풍족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붓다는 세속적 삶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즐기며 지내는 것이 상례(常例)입니다. 하지만 이 젊은 왕자는 온갖 안락과 사치를 누리며 예기(藝妓)들의 시중을 받는 궁궐생활에 오히려 싫증을 느꼈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쾌락이나 세속적 야망에 만족하기에는 감수성이 너무나 예민했던 것입니다. 초기 팔리어 사료들을 보면 그는 자신이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슬픔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괴로워하며 환멸을 느끼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습니다.8)
보통 사람들은 추한 노인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지만, 어느 누구도 병의 고통이나 병자의 추잡스러움을 바라지 않지만, 병에 걸리는 것 역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 누구에게도 죽음은 반드시 닥쳐옵니다. 젊은 날의 붓다는 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두려움에 대해 골몰하고 있을 때, 젊음이 넘치는 그의 신체로부터 기쁨이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9)
이러한 세속적 쾌락에 대한 혐오감과 인생이 단지 끝없는 고통이라는 생각은 이 젊은 왕자를 크게 자극했습니다. 결국 그는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종교적 삶을 통해서 평화와 고요를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10)
2. 태자의 교육
태자는 당시 왕족의 교양으로서 필요한 모든 학문·기예(技藝)를 배웠으며, 비범한 재간을 발휘했다는 사실이 후대의 불전(佛傳)에 나옵니다. 물론 그것도 사실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그 교육이란 어떠한 내용의 것을 어떻게 배우는 것이었을까?
태자가 취학(就學)을 한 것은 일곱 때일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인도의 습관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인도의 관습에 의하면 보통 브라만 계급의 사람들은 여덟 살부터 12년 동안, 크샤트리아 계급의 사람들은 열 한 살부터 12년 동안, 바이샤 계급의 사람들은 열두 살부터 12년 동안, 스승 밑에서 인도인이 가장 존중하는 고전(古典)인 <베다>를 배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히 학문에 뛰어난 재간이 있는 사람은 일곱 살부터 스승을 맞이하여 공부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태자가 이와 같은 부류의 소년이었을 것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11) 그리고 태자는 <베다>는 물론 <베다>의 보조학(補助學)도 학습하였다고 합니다. 불교의 경전에는 세 개의 <베다>와 자휘학(字彙學), 어원학(語源學), 사전(史傳), 문법학(文法學), 순세파학(順世派學), 대인상학(大人相學)으로 되어있고, 이것들에 통하는 것이 브라만으로서의 자격을 구비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 자이나교 측에서는 네 개의 <베다>와 사전(史傳), 문법학(文法學) 등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당시의 수재들은 <베다>의 본문 암송(暗誦), 그것에 의한 문법, 어원(語源)에 관한 학문, 사전(史傳) 등을 중심으로 하여, 그 밖에 당시의 일반 과학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록들에는 인도 사상 중 가장 깊이 있는 내용을 가진 <우파니샤드>에 관한 이야기는 나와있지 않지만, 붓다 당시 <우파니샤드>의 사상은 이미 주지(周知)되어 온 사실이기 때문에 태자가 학습한 과목 중의 하나를 이루고 있었을 것은 명백합니다. 불교의 원시경전 중 가장 오래된 층의 것들 속에 우파니샤드적 표현이 많은 것은 석존의 태자 시대의 <우파니샤드>에 대한 교양을 말하고 있음을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12)
또한 태자가 크샤트리야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문(文)의 면만이 아니라, 무(武)의 면도 같이 연수를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는 무사계급(武士階級)인 크샤트리야족 출신으로서 필요한 무술(武術)을 배우고 닦았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후대의 불전에는 태자가 특히 궁술(弓術)에 뛰어나 있었다고 했고, 그가 야소다라비(妃)와 혼인하게 되었던 것도 그가 궁중에서 열린 무술대회에서 발군(拔群)의 성적을 올린 까닭이었다고 하고 있습니다.13)
태자는 인도의 언어와 고전 문학 등의 일반적인 학습만을 한 것이 아니라 도보경주, 원반 던지기와 창 던지기 등의 육체적인 단련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귀족에게 필수적인 네 가지 기예, 즉 말타기, 코끼리 타기, 전차 몰기 그리고 군대의 배치법을 배웠다고 합니다.14) 이와 같이 전기나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태자는 왕족으로서의 교양을 쌓는데 필요한 온갖 학문과 기예를 습득했고, 비범한 재능을 발휘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있습니다.15)
3. 태자의 결혼
태자가 결혼을 한 것은 사실이었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그리고 그 태자비(太子妃)가 라훌라(Rahula, 羅候羅)란 아들을 난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모든 불전(佛傳)이 다 그것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16) 결혼의 시기는 16세, 17세, 19세 20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남방의 전승에 따르면 16세에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16세에 결혼한 것을 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태자비의 이름은 남방성전(南方聖典)에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북방성전(北方聖典)에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방의 전승에서는 라훌라마따(Rahulamata, ‘라훌라의 어머니’의 뜻)라든가 밧다깟짜(Bhaddhakacca) 혹은 밧다깟짜나(Bhaddhakaccana, 跋陀迦旃延)로 불려지고 있지만 북방의 전승에서는 범어로 야소다라(Yasodhara, 耶輸陀羅, ‘영예를 지닌 여성’의 뜻)란 이름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뒷날 팔리어 성전의 주석서에서도 ‘야소다라’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나 어떤 전승에 따라서는 또 다른 이름도 정하고 있어 동일인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습니다.17)
남방의 팔리어 전기(傳記)에서는 다만 ‘라훌라의 어머니'(羅候羅母)라고만 불려지고 있는데, 이런 호칭은 우리나라에서도 통용되는 호칭법으로 옛날 인도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일이 흔했던 것 같습니다. 붓다의 제자나, 신자들 중에도 아들 이름을 붙여 그 어머니를 호칭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북방의 성전에서는 태자의 비를 야소다라(耶輸陀羅)라고 부르고 있는 경우가 제일 많습니다. 그런데 이 야소다라에 관한 이야기는 붓다께서 성도한 뒤 옛 왕성(王城)을 방문했을 때, 출영(出迎)한 것과 그 후에 이모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와 더불어 열심히 출가를 원해서 허락을 받고 니승(尼僧)이 되었다는 두 가지 사실밖에는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18)
붓다의 젊은 시절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생의 지식을 폭넓게 습득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삶의 문제를 통찰하는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결혼 이후에도 그러한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후 얻게 된 그의 깨달음은 그의 단순한 천재성이나 직관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 지속된 내성적 성숙과 노력의 결과라 할 것입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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