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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출가와 수행
1. 출가의 동기
고따마 싯닷타(Gotama Siddhattha, Sk. Gautama Siddhartha)는 온갖 호화로움과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도 비범한 재능을 발휘한 학문이나 무예도 결코 싯닷타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싯닷타는 부족함이 없는 왕궁의 생활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는 인간이나 세계와 같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 깊은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 가운데서도 특히 그를 괴롭힌 것은 생(生) · 노(老) · 병(病) · 사(死)와 같은 삶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와 양모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Sk. Mahaprajapati Gautama, 摩訶波闍波提瞿曇彌)는 이런 왕자를 조심스럽게 지켜보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싯닷타가 훌륭하게 자라나 왕위를 잇고 석가족(釋迦族)의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싯닷타는 그런 세속의 일보다는 항상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혹시 왕자가 출가(出家)하여 수행자가 되지나 않을까 늘 염려하였습니다. 싯닷타를 서둘러 결혼시킨 것도 이러한 걱정과 염려 때문이었습니다.1)
이와 같이 젊은 날의 싯닷타는 자신이 처한 위치와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뇌하였던 것입니다. 여러 문헌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호사스런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생의 문제에 대해 깊이 사색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의 고뇌는 주로 생·노·병·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사문출유(四門出遊)로서 정리되었던 것입니다.2)
초기경전인 <마하빠다나 숫따(Mahapadana sutta, 大本經)>에는 과거세(過去世)의 비바시불(毘婆尸佛)의 ‘사문유관(四門遊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붓다는 유원(遊園)으로 가기 위해서 곱게 꾸민 수레를 신두산(産) 말에 매고 가던 중, 머리는 희고 이는 빠진 채 지팡이를 손에 쥐고 부들부들 떠는 노인을 만남으로써 살아있는 모든 것이 늙는다면 태어나는 일 자체가 화(禍)라고 느꼈으며, 마찬가지로 질병과 죽음을 보고 인생의 덧없음을 알았고, 최후로 출가 수행자를 보고 자신도 집을 떠날 결심을 굳혔다”3)고 합니다. 이것이 후세에는 정형화(定型化)하여 사문출유(四門出遊)의 전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4) 이 전설에 의하면 태자는 왕성(王城)의 네 개의 문으로부터 출유(出遊)하여 각각 노인·병자·죽은 사람, 그리고 수행자를 만났다는 것이며, 이것이 출가의 동기(動機)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붓다의 출가 동기로서 널리 전해지고 있는 ‘사문출유’의 전설은 후대의 불전문학(佛傳文學)인 <랄리따위스따라(Lalitavistara, 普曜經)>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 태자는 동쪽의 성문을 나와 노인을 만나고, 남쪽의 성문을 나와 병자를 만났으며, 서쪽 문을 나와 죽은 자를 만나 비애(悲哀)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북쪽 문을 나와 출가 수행자를 만나 그의 숭고한 모습에 감동하여 출가를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팔리어로 씌어진 <자따까(Jataka, 本生經)>의 주석서 서설(序說)에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설화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처음 세 차례의 출유(出遊)에서 노인과 병자와 죽은 사람을 만나 도중에서 되돌아섰던 태자는, 네 번째의 출유 때 사문을 만나고서 자기 생애의 목표를 분명히 깨달았으므로 마음 가볍게 그대로 동산에 가서 해질 녘까지 즐겁게 놀았습니다. 동산의 못에서 미역을 감고 향을 뿌린 몸에 새 옷을 입고 산뜻한 기분으로 돌아갈 채비를 차립니다. 바로 이때 성 안에서는 태자비가 사내아이를 낳았으므로 숫도다나왕은 기뻐하면서 급히 시종을 보내어 태자에게 알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자는, “라훌라가 생겼구나!” 라고 외쳤습니다. 라훌라(Rahula)란 ‘장애(障碍)’라는 뜻입니다. 은애(恩愛)의 굴레가 늘면 출가 수행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로 인해서 그 아이는 라훌라(羅候羅)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날 태자의 귀로에는 시민들의 환영으로 떠들썩했다. 어느 길가에 왔을 때, 한 높은 누상(樓上)에서 무사 귀족의 딸 끼사 고따미(Kisa Gotami, 機舍喬答彌)가 태자의 행렬(行列)과 그 행렬 속의 태자의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저런 아들을 가진 아버지는 행복하겠네,
저런 아들을 가진 어머니는 행복하겠네,
저런 사람을 남편으로 받드는 부인은 행복하겠네.
이 노랫소리가 태자의 마음을 끈 것은 그 노래 속의 ‘행복하겠네'(Nibbuta)란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태자가 늘 구해 마지않던 열반(涅槃)과 관련이 있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5) 태자는 ‘드디어 출가할 시기가 온 것을 깨우쳐주었다’라고 생각하고 아주 기뻐하며, 그 답례로 자기 몸에 지니고 있던 값비싼 진주 목걸이를 벗어 그녀에게 던져주었습니다. 끼사 고따미는 ‘태자는 날 사랑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고 기뻐 어찌 할 줄을 몰랐습니다.
궁전에 돌아온 태자는 출가의 결심을 하고, 그 날밤 마부 찬나(Channa, Sk. Chandaka, 車匿)에게 분부하여 애마(愛馬) 깐타까(Kanthaka, 犍陟)를 채비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들에게 이별을 고하고자 하지만, 태자비의 팔에 안겨 있는 갓난아기를 만지면 태자비가 눈을 떠 출가의 기회를 잃어버릴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말없이 떠나버렸다고 합니다.6)
이처럼 불전문학(佛傳文學)에 씌어진 사문출유(四門出遊)의 이야기는 사실 그대로를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들은 있었겠지만, 이것은 후대의 불전 작가들이 보다 드라마틱하게 윤색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7) 이것은 ‘인간 고뇌로부터의 해탈’이라고 하는 붓다의 출가 목적을 확실히 드러내려고 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8)
여하튼 싯닷타 태자가 왕궁의 호화로운 생활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아들 라훌라(Rahula, 羅候羅)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제 출가를 결행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밤 싯닷타는 남몰래 왕궁을 빠져 나와 출가 구도(求道)의 길을 나섰습니다. 후대 불전에 의하면 태자는 어느 날 밤 몰래 마부 찬나(Channa)를 앞세워 애마 깐타까(Kanthaka)를 타고 까삘라밧투를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그때 나이는 29세였습니다.
싯닷타가 뒷날 진리를 깨달아 붓다가 된 다음, 그는 자신의 출가 동기를 이렇게 술회하고 있습니다.9)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 걱정 번뇌가 없고, 더러움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열반)을 얻기 위해서였다.<중아함경 권56, 라마경>
이 세상에 만약 늙고, 병들고, 죽는 이 세 가지가 없었다면 여래(如來, 붓다)는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잡아함경 권14, 346경>
위에서 살펴본 사문유관의 도식적인 묘사나 이같은 붓다 자신의 술회는 다같이 싯닷타의 절실한 출가 동기가 무엇이었던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늙고 병들고 죽는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했고, 그 필연적인 인생의 괴로움을 슬퍼하였으며, 불완전한 인간 세상의 모습을 괴로워했습니다. 그 끝에 마침내 그러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왕궁을 버리고 출가를 단행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의 길을 찾아 세속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던져 버린, 참으로 ‘위대한 버림’ 바로 그것이었습니다.10)
2. 구도의 편력
이렇게 해서 사문(沙門), 즉 출가 구도자가 된 싯닷타에게 이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후대의 문헌에 속하는 테리가타(Theragatha, 長老尼偈)의 주석서에서는 그의 편력(遍歷)에 대해서 처음 박가와(Bhaggava)의 은신처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는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하늘에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고행을 닦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싯닷타는 우선 이들 고행자들의 목적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일 또한 생과 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떠난 싯닷타는 다시 브라흐만(Brahman, 梵天)과 해와 달과 불을 섬기는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서도 그는 역시 자신이 닦을 만한 수행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된다.11)
이 외에도 많은 수행자들을 찾아 다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랄리따위스따라(Lalitavistara)>에 의하면, 그는 출가하여 바라문 여성 싸끼(Saki)와 바라문 여성 빠드마(Padma)의 은신처에 초대를 받았으며, 바라문 라이와따(Raivata) 성인과 뜨리만디까(Trimandika)의 아들 라자까(Rajaka)로부터 환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때는 싯닷타가 베살리에 도착하여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를 만나기 전이었습니다.12)
이렇게 싯닷타의 구도 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까삘라왓투(Kapilavatthu)에서 동남쪽으로 약 1,000리 거리에 위치한 베살리(Vesali, Sk. Vaisali, 毘舍離城)로 가서는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 Sk. Arada Kalama, 阿羅羅伽羅摩)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배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관(觀)하는 선정(禪定)’ 즉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당시 큰 나라였던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 라자가하(Rajagaha, Sk. Rajagrha, 王舍城)에 도착했습니다. 신흥의 도시 라자가하는 당시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답게 수많은 사문들과 사상가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싯닷타는 그곳에서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 Sk. Udaraka Ramaputra, 優陀羅羅摩子)라는 스승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13) 웃다까 라마뿟다는 ‘상념(想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관(觀)하는 선정(禪定)’ 즉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는데, 싯닷타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상비비상처정’은 ‘무소유처정’보다 더욱 미묘한 선정의 경지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미묘한 선정에 들면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지고 마치 마음이 ‘부동(不動)의 진리’와 합체(合體)된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선정에서 깨어나면 다시 일상의 동요하는 마음으로 되돌아옵니다. 따라서 선정에 들어 마음이 고요해졌다고 해서 진리를 체득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선정은 심리적인 마음의 단련이지만, 진리는 논리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진리는 지혜에 의해 얻어집니다. 그래서 싯닷타는 그들이 택하고 있는 수정주의(修正主義)의 방법으로는 생사의 고통에서 해탈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곁을 떠났다고 합니다.14)
베살리에서 헤어진 알라라 깔라마와 함께 웃다까 라마뿟따는 당시 가장 명망높은 수행자들이었습니다. 선정(禪定), 즉 정신통일에 의해서 정신적 작용이 완전히 정지되어 고요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이들의 수행 목적이었습니다. 선정(禪定)주의자 또는 수정(修定)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지도 아래, 싯닷타는 그들이 해탈의 경지라고 인정하는 최고 단계에까지 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모든 괴로움이 없는 완전한 경지는 아니었습니다. 정신통일이란 끊임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경지이며, 정신적 작용의 완전한 정지 또한 결국 죽음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15)
그들은 수행의 목적과 방법을 혼동한 채 오로지 수행을 반복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같은 모순을 알게 된 싯닷타는 더 이상 수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답습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스승으로 삼아왔던 웃다까 라마뿟따와도 작별하였습니다.16)
싯닷타는 전통적인 수행자들로부터는 더 이상 기대할 바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 라자가하에서 남쪽으로 80㎞ 가량 떨어진 우루웰라(Uruvela, Sk. Uruvilra, 優樓頻螺)의 세나(Sena, 斯那) 마을에 있는 네란자라(Neranjara, Sk. Nairanjana, 尼連禪河) 강 근처의 숲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고행림(苦行林)으로 불리던 이 곳은 현재의 보드가야(Bodhgaya) 동쪽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그는 새로운 결심으로 맹렬한 고행을 시작했습니다.17)
싯닷타가 구도자의 길에 들어선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라자가하의 성 밖의 판다바 산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빔비사라(Bimbisara, 頻婆娑羅)왕은 성 안에서 탁발하고 있는 싯닷타를 발견하고, 그 단정한 태도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을 시켜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을 알아낸 다음, 스스로 수레를 갖춰 판다바산으로 가서 동굴에 거주하던 싯닷타를 방문하고, 코끼리 무리를 선두로 하는 군대와 재력을 제공하여 원조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빔비사라 왕은 싯닷타의 출가 수도를 중지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싯닷타는 자신이 유서 깊은 샤카족 출신으로 욕망의 충족을 위하여 출가한 것이 아니라, 욕망을 벗어나 열심히 수도하기 위하여 출가한 것이라 하여 이 원조의 약속을 거절했다고 합니다.18) 이때 빔비사라 왕은 당신의 뜻을 이룬 다음 자신에게 그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이룬 뒤 붓다는 빔비사라 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라자가하를 방문하여 그에게 법을 설하게 되었습니다.
고행과 중도의 실천
1. 수정(修定)에서 고행(苦行)으로
붓다는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이루기까지 몇 단계의 수행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출가하여 알라라 깔라라(Alara Kala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라는 두 스승 밑에서 선정(禪定)을 주로 배우고 닦았습니다. 그는 곧바로 스승들의 경지를 체득하였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그들로부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들 곁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언급할 수정주의(修定主義)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석존은 라자가하(Rajagaha, 王舍城)를 떠나 남서쪽 가야(Gaya, 伽倻) 교외, 우루벨라(Uruvela)의 세나(Sena) 마을에 있는 네란자라(Neranjara) 강 근처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고행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았습니다. 이곳은 부근에 고요한 삼림이 있었고 강물은 맑아 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오직 혼자서 여러 가지 고행을 실천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수정(修定)을 버리고 고행(苦行)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행(苦行)은 당시 아지비까(Ajivika)나 자이나교(Jaina) 등의 사문들이 즐겨 실천했던 수행방법이었습니다. 아지비까는 숙명론자(宿命論者)였던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가 이끌고 있던 교단이었습니다. 아지비까라는 명칭은 원래 단순히 각각의 ‘생활법(生活法)에 따른 자’라는 의미이지만 교단의 명칭으로 사용하여 ‘생활법의 규정을 엄격히 지키는 자’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사상에서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고행하는 자’로 이해되었고, 훗날 한역경전에서는 ‘사명외도(邪命外道)’로 폄칭(貶稱)되었습니다. 아지비까에서는 고행도 자연의 정해진 이치, 즉 결정으로 보았다거나 고행 그 자체를 목적시하였다거나, 혹은 고행에 어떠한 실천적 의의를 인정하였을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 학설이 추정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아지비까 교도들은 생계수단을 위해서이건 철저한 고행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이나교는 그 어느 종교 단체보다도 고행을 중요시하는 교단이었습니다. 자이나교의 교주 마하비라(Mahavira, 大雄)는 업(業, karma)을 미세한 물질로 보고 이 업이 외부로부터 신체 내부의 영혼에 유입(流入, asrava) 부착하여 영혼은 속박(bandha)하기 때문에 윤회의 생존이 되풀이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업에 의해 속박된 윤회에서 벗어나 영혼이 그 본성을 발현하여 해탈하기 위해서는, 미세한 업 물질을 지멸(止滅, nirjara)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고 고행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출가수행에 의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출가 수행자는 불살생(不殺生) · 진실어(眞實語) · 부도(不盜) · 불음(不淫) · 무소유(無所有) 등 ‘다섯 가지 대금계(大禁戒)’ 즉 오대서(五大誓)를 엄격히 지키고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형(裸形)으로 여러 가지 고행을 행하였으며, 때로는 단식 수행으로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붓다 당시 가장 엄격한 고행주의를 실천했던 사람들이 바로 자이나 교도들이었습니다.
2. 고행의 실천 내용
이러한 당시의 수행풍토에 따라서 석존도 본격적으로 고행을 실천했습니다. 석존께서 실천했던 여러 종류의 고행들을 경전에서는 언급하고 있는데, 석존은 그러한 모든 것들을 실수(實修)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곧 마음을 제어하는 것, 호흡을 멈추는 것, 단식(斷食)에 의한 것, 절식(絶食)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경전의 설명에 따르면 마음을 제어하는 고행이란 단정히 앉아 아랫니와 윗니를 맞닿게 모으고 혀는 위턱에 붙이고 마음을 억제하여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호흡을 멈추는 고행이란 먼저 입과 코로부터의 호흡을 막으면 귀로 숨이 들락날락하게 되며 커다란 이명(耳鳴)이 들려 격심한 고통이 따릅니다. 이 귀의 호흡을 막으면 날카로운 정수리를 빠개는 듯한 고통이 일어나며 또한 질긴 가죽끈으로 머리를 휘감는 듯한 고통을 느낍니다. 그 숨이 하복부로 옮겨가면 배를 가르는 듯한 고통이 따릅니다. 마지막으로 이같은 호흡을 막고 있으면 마치 힘이 센 남자들이 힘이 약한 남자의 팔을 잡아 잿불 속으로 집어넣어 불에 타는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처럼 온몸에 타는 듯한 괴로움이 일어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앗기벳사나(Aggivesana)여, 신들은 나를 보고 이같이 생각하였다. ‘사문 고따마는 이미 죽었다’고. 어떤 신들은 이같이 생각하였다. ‘사문 고따마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나 죽을 것이다’고. 어떤 신들은 이같이 생각하였다. ‘사문 고따마는 죽지 않았고 죽지 않을 것이다. 사문 고따마는 아라한이다. 실로 아라한의 경지는 이와 같은 것이다’고. [<中部經典> I, p.245]
석존은 그의 고행을 본 사람들이 그가 죽어버렸다고 여길 정도로 극심한 고행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극심한 고행을 실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안은 얻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석존은 일체의 음식을 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절식(絶食)에 의한 고행, 감식(減食)에 의한 고행을 계속한 결과 석존의 전신은 살이 빠져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났으며 눈은 움푹 들어가고 몸의 털은 부식하여 뽑혀지고 피부는 생기를 잃어 그때까지 아름답게 빛나던 황금색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일을 회상한 석존의 말을 경전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앗기벳사여, 나는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옛날 어떤 사문 · 바라문이 어떠한 격심한 고통을 받았다 해도 내가 받은 것은 최고이며 그 이상의 고통은 없었다. 또 미래의 어떠한 사문 · 바라문이 어떠한 격심한 고통을 받게 되더라도 내가 받은 것은 최고이며 그 이상의 고통은 없을 것이다. 또 현재의 어떠한 사문 · 바라문이 어떠한 격심한 고통을 받는다 해도 내가 받은 것은 최고이며 그 이상의 고통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격심한 고행에 의해서도 나는 일상의 인간이나 법(法)을 초월한 최고의 지견(智見)에 도달할 수 없다. 깨달음에 이르는 다른 도(道)가 있을 것이다.[<中部經典> I, p.246]
이 밖에 초기경전에서는 석존이 실천하였던 고행으로서 식사에 관한 고행, 신체적인 고행, 항상 먼지나 오물로 더렵혀져도 결코 몸을 씻지 않겠다고 하는 따위의 맹세를 지키는 것 등의 고행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석존이 실제로 실수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석존은 고행은 심신(心身)을 훼손시키는 것일 뿐 깨달음에 이르는 도(道)는 아니라고 명확하게 단정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석존은 마음을 제어하고 호흡을 멈추고 감식(減食)하고 혹은 단식(斷食)하였습니다. 죽음에 직면할 정도로 육체를 괴롭혔으며, 그러한 고통을 극복함으로써 강한 의지를 확립하여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행은 6년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3. 중도의 실천
그러나 그것으로도 역시 궁극의 해탈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석존은 고행이 해탈하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이것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먼저 고행에 의해 극도로 쇠약해지고 더러워진 몸을 네란자라 강물에 깨끗이 씻고, 마을 처녀 수자따(Sujata, 善生)가 바친 우유죽을 섭취하여 심신을 회복한 후 깨달음에 이르는 자기 자신만의 수행 방법을 강구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정주의와 고행주의의 두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 Majjhim Patipada)인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출가자는 두 가지 극단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모든 욕망에 따라 쾌락에 탐닉하는 것으로, 열악하고 야비하며 범부가 행하는 것이며 천하고 이익이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을 피로하게 하는 것에 탐닉하는 것으로, 괴롭고 천하며 이익됨이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에 가까이 가지 않고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眼)이 되고 지(智)가 되어 적정(寂靜) · 증지(證智) · 정각(正覺) · 열반(涅槃)으로 이끄는 것이다.[<相應部經典> V. p.42.]
이러한 중도를 비고비락(非苦非樂)의 중도(中道)라고 하며, 구체적으로는 팔정도(八正道, Ariya-atthangika-magga)가 바로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팔정도란 고(苦) · 집(集) · 멸(滅) · 도(道) 네 가지 진리 가운데 도제(道諦)의 내용이 되는 것으로, 바로 ‘열반으로의 삶’이다. 중도는 고(苦)도 아니고 낙(樂)도 아닌 중도(中道)를 말하지만 이는 단지 중간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석존이 스스로 실천하여 정각에 도달한 도(道),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라면 누구든지 실수(實修)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도(道)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초기경전에서 ‘도(道)’라고 할 경우 여기에는 두 가지 용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중도라고 할 때의 도(道, patipada)로서 석존이 정각을 얻은 행도(行道)로서의 도(道)이며, 다른 하나는 객관적인 도법(道法)으로서 도(道, magga, Sk. marga)입니다. 전자는 깨달음을 얻으려는 수행자가 석존의 실천방법에 따라 스스로 실천하는 주체적 도(道)이고, 후자는 객관적인 도로서의 도(道)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정각을 얻은 석존에게 있어 눈(眼)이 되고 지혜(智)가 되어 깨달음으로 이끄는 도(道)이기 때문에 다만 객관적인 진리성을 나타내는 도(道)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실천하는 주체적인 도(道)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4. 중도의 실천적·철학적 의미
한편 붓다 당시 인도의 철학과 종교는 크게 바라문(波羅門) 계통과 사문(沙門) 계통의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전자는 베다·우빠니샤드에 근거한 인도 정통파의 입장에 속하는 것으로, 유일의 원리인 브라흐만(Brahman, 梵)으로부터 전 세계가 생겨났다고 하는 점이 사상적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보통 전변설(轉變說, parinama-vada)이라고 합니다. 바라문 계 사상에 있어서는 전 세계가 어떻게 성립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고찰할 때 먼저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근본원리를 세우고, 이러한 근본원리인 브라흐만이 자기 자신을 전개시켜 질료인(質料因)도 되고 동력인(動力因)도 되어 전 세계를 성립시킨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이러한 바라문 계 사상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한 자유사상가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육사외도(六師外道)들이 주장한 사상의 특징은 유일(唯一)의 원리로부터 복잡한 현상세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독립된 원리와 요소가 어떠한 형태로서 결합하여 이 세계가 구성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아지따 께사깜발린(Ajita Kesakambalin)은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의 네 가지 원소를 주장했습니다. 즉 인간은 이들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체가 소멸함과 동시에 제(諸) 원소도 각각 분해한다고 설하였습니다. 빠꾸다 깟차야나(Pakudha Kaccayana)는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 · 고(苦) · 낙(樂) · 명아(命我) 등 칠요소(七要素)를 인정하였고, 사명외도(邪命外道, Ajivika)로 대표되는 막갈리 고살라(Makkhali Gosala)는 살아 있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영혼(靈魂) ·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 · 허공(虛空) · 득(得) · 실(失) · 고(苦) · 낙(樂) · 생(生) · 사(死) 등 12 가지 원리를 주장하였습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구성요소가 결합하여 인간 및 세계가 성립한다고 하는 주장을 초기경전에서는 적집설(積集說 또는 積聚說, arambha-vada)이라고 합니다. 이 적집설은 바라문 계의 전변설에 비해 유물론적 색채가 강하며, 업(業, karma)이나 인과응보의 이치를 부정하는 경향을 띠고 있습니다.
종교상의 실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바라문 계의 사상은 한결같이 선정을 실수함으로써 해탈을 얻는다고 주장한 데 반해, 이 적집설의 입장을 취하는 자들의 수행방법은 고행이었습니다. 그들은 적집설의 입장에 서서 육체와 정신의 두 가지 원소로 이루어진 인간은 정신이 육체에 의해 지배되어 더럽혀졌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육체를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정신이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석존이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의 가르침을 버리고, 또한 고행생활에 들어갔다가 이것마저 버렸다고 하는 사실은 수정주의(修定主義)로서 주장된 전변설과 고행주의의 근거로 삼는 적집설 양자를 극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석존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이러한 두 가지 입장과는 전혀 다른 새롭고도 보다 높은 차원을 획득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전변설과 같은 절대 유일의 원리를 주장하며 그것으로부터 세계가 전개하였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계는 상호 의존의 관계에서 성립하였다고 관찰하는 연기(緣起)의 입장입니다. 그것은 ‘모든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이 도리는 법으로서 정해져 있다’고 말하였던 것과 같은 우주의 이법(理法)이며,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자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보는 자이다’라고 설하였던 것처럼 석존은 이같은 연기를 자각하여 각자(覺者) 불타(佛陀)가 되었던 것입니다.
붓다의 깨달음[成道]
1. 깨달음의 완성
싯닷타 태자가 네란자라(Neranjara) 강가에서 목욕하고, 우루벨라(Uruvela) 근처의 세나니 마을의 촌장 세나니(Senani)의 딸 수자따(Sujata, 善生)가 공양 올린 우유죽을 먹고 체력을 회복한 뒤, 근처에 있는 앗삿타(assattha) 나무 아래 홀로 앉아 명상에 들었습니다. 앗삿타 나무는 아사왓타(asvattha) 나무 또는 삡빨라(pippala, 畢鉢羅) 나무라고도 하는데, 무화과 나무의 일종입니다. 거기서 드디어 석존은 ‘깨달음’ (anttara sammasambodhi, anuttara samyaksambodhi, 無上正等覺·無上菩提)을 얻어 붓다(Buddha, 佛陀) 즉 ‘깨달은 자'[覺者]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중국이나 한국 · 일본에서는 흔히 ‘성도(成道)’라고 합니다. 이 말은 ‘깨달음의 완성’이란 뜻입니다.
태자가 깨달음을 이룬 시기는 35세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뒷날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이곳을 붓다가야(Buddhagaya, 佛陀伽倻, 현재의 보드가야)라 이름하였으며, 앗삿타 나무를 보리수(菩提樹)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보리수 밑에는 금강보좌(金剛寶座, 성도할 때 앉았다고 하는 돌로 된 좌대)가 있으며 그 옆에는 사각 형태의 대탑(大塔)이 우뚝 솟아 있어 불교도에게 가장 중요한 성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4각4면(四角四面)으로 위쪽으로 갈수록 좁혀져 있는 높이 52미터의 대탑입니다. 이 탑은 굽타 왕조의 위풍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장은 오랫동안 인도교(힌두교)의 손에 있다가 1953년 5월에야 불교도의 관리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탑 그 자체보다도 사실은 그 뒤에 있는 보리수에 이 성지(聖地)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성도한 것은 이 보리수 아래에서였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 이 보리수는 부처님이 입멸한 2백년 후에 불교에 귀의한 아쇼카왕(阿育王)을 비롯하여 굽타 왕조 때에도 대대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중국의 법현(法顯)이나 현장(玄奘) 스님도 여기에 찾아와 보리수 울타리가 쳐 있다는 것과 그 주변에 정사(精舍)와 탑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유적은 그 뒤 정글에 파묻혀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1881년에 이르러 영국인 커닝햄이 발굴,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2)
붓다의 성도일(成道日)은 후대의 전승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음력 12월 8일이라고 하며 남방의 불교국가에서는 베사카(Vesakha 月)3)의 만월일(滿月日)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을 태양력으로 고치면 5월의 만월일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한역경전에서는 2월 8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곳이 많습니다. 그 까닭은 베사카 달이 인도력의 둘째 달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역법(曆法)은 자주 바뀌었으나 주(周)의 역법에 의하면 음려의 11월을 첫째 달로 헤아림으로 둘째 달은 음력 12월이 됩니다. 그러므로 중국·한국·일본 등지에서는 붓다의 성도일(成道日)을 음력 12월 8일로 보고 경축하게 되었습니다.4)
2.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석존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후의 사정을 불전문학에서는 아주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불전문학에서는 석존께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악마(惡魔)와의 싸움을 계속했다는 사실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팔리어로 씌어진 <마하삿짜까-숫따(Mahasaccaka-sutta, 薩遮迦大經)>5)에서는 악마와의 싸움 부분을 생략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경전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여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6)
“이제 나는 단단한 음식이나 끊인 쌀죽을 먹어 힘을 얻어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고, 멀리 떠남에서 생겨난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유와 숙고를 멈춘 뒤, 안으로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희열이 사라진 뒤, 아직 신체적으로 즐거움을 느끼지만, 깊이 새기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평정에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고귀한 이들이 ?평정하고 새김이 깊고 행복을 느낀다?고 말하는 세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행복을 버리고 고통을 버려서, 이전의 쾌락과 근심을 사라지게 하고, 괴로움도 뛰어넘고 즐거움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이 깊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전생의 삶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했습니다. …… 이것이 내가 밤의 초경에 도달한 첫 번째의 지혜입니다.7)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이,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뭇삶(중생)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뭇삶들을 보았습니다. …… 이것이 내가 밤의 이경에 도달한 두 번째의 지혜입니다. ……8)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번뇌의 소멸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
내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존재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무명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습니다. 해탈되었을 때에 나에게 ‘해탈되었다’는 앎이 생겨났습니다. 나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것이 내가 밤의 삼경에 도달한 세 번째의 지혜입니다.9)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이,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10)
위 경전의 내용을 요약하면, 태자는 먼저 사선정(四禪定)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태자의 마음은 고요하고, 맑고, 더러움이 없고, 무엇에 의해서도 장애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태자는 과거를 상기(想起)하고 먼 몇 세대 이전의 일들을 상기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태자는 초경(初更)에 제1의 명지(明知)를 얻고, 이경(二更)에서는 제2의 명지를, 삼경(三更)에서는 제3의 명지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명지를 한역경전에서는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서 제3의 명지, 즉 누진통은 곧 네 가지 온전한 지혜[四聖諦]를 알고, 세속의 허망함이 연기(緣起)의 탓임을 아는 것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마지막 지혜가 생긴 것은 새벽이 통틀 무렵이었던 것입니다.11)
한편 불전문학에 속하는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에 묘사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라를 굴복시킨 보살은 사선정(四禪定)을 체험하였다고 합니다. 사선정은 보살만이 아니고 다른 많은 수행자들에게도, 또 나중에는 부처님의 제자에게도 공통되는 수행 방법입니다. 성도한 날 밤의 보살은 이것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도한 날 밤 보살의 체험은 초저녁(初夜) · 한밤중(中夜) · 새벽(後夜)의 세 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그 중 새벽, 즉 먼둥이 틀 무렵 부처로서의 자각(自覺)에 도달한 것입니다.
사선정에 의해서 바르게 마음을 통일하고 청정 결백하여 광명으로 빛나며 더러움을 여의고 번뇌를 떨쳐버려 자유로이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부동(不動)의 상태에 도달한 초저녁에 보살은 천안통(天眼通)을 얻었습니다. 천안통에 의해 중생이 살고 죽는 운명을 관찰하여 바른 지(智)를 실현하며, 어둠을 없애고 광명을 일으키고 있을 때 초저녁은 지나갔습니다.
다음으로 보살은 역시 전과 같이 선정(禪定)에 든 맑은 심성으로 한밤중에는 숙주지(宿住智) 혹은 숙명지(宿命智)를 얻었습니다. ‘숙주지’라고 함은, 마음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자기 자신과 다른 중생들의 무수한 과거의 생애를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다음에 보살은 역시 앞에서처럼 선정에 든 맑은 마음으로 새벽에 들어갔습니다. 그 새벽을 맞을 때 보살은 인간적인 고뇌를 말끔히 없애고, 미혹(迷惑)의 근원이 되는 번뇌를 죄다 쳐부수는 지견(智見)의 광명을 향해서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그리하여 보살은 누진지(漏盡智)를 체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보살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무엇으로 인해 늙음과 죽음이라는 것이 있을까. 도대체 무엇을 원인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단 말인가. 태어남을 원인으로 해서 늙음과 죽음이 있다. 그러면 무엇으로 인해 태어나게 될까. 생존[有]으로 말미암아 태어난다. 그러면 무엇으로 인해 생존하게 되는 것일까. 집착[取]으로 말미암아 생존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 갈망(渴望·愛)으로 말미암아 집착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갈망이 생길까. 감수(感受 · 受)로 말미암아 갈망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접촉이 생기는가. 여섯 가지 감각[六處]으로 말미암아 접촉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여섯 가지 감각이 생기는가. 모양과 물체[名色]로 말미암아 여섯 감각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모양과 물체가 생기는가. 인식[識]으로 말미암아 모양과 물체가 있다. 무엇으로 인해 인식이 생기는가. 현상[行]으로 말미암아 인식이 있다. 그러면 무엇으로 인해 현상이 생기는가.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현상이 있다.”
이와 같이 해서 인간 고뇌의 원인을 연쇄적으로 차례차례 거슬러 올라가 고찰한 결과, 모든 것의 근원에는 ‘무명’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무명에서 시작되는 이 연쇄 즉,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를 십이인연(十二因緣) 혹은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3. 깨달음의 내용
사실 붓다께서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동서고금의 수많은 학자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초기경전에 나타난 성도(成道)의 과정은 일치하지 않으며 많은 이설(異說)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이설은 15가지 정도가 되는데, 크게 네 가지 부류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12)
①사제(四諦)·십이연기(十二緣起)와 같은 이법(理法)의 증득에 의했다고 하는 설.
②사념처(四念處)·사정근(四正勤)·사여의족(四如意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팔정도(八正道)(이를 모두 합해 三十七助道品 혹은 菩提分法이라고 함)와 같은 수행도(修行道)의 완성에 의했다고 하는 설.
③오온(五蘊)·십이처(十二處)·사계(四界)와 같은 제법(諸法)의 여실한 관찰에 의했다고 하는 설.
④사선(四禪)·삼명(三明)의 체득에 의했다고 하는 설.
이처럼 성도의 과정이 전승하는 바에 따라 일치하지 않은 것은 붓다 자신이 깨달음의 내용을 특정한 교설로서 고정시켜 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붓다는 듣는 자의 근기에 따라 설하는 방법을 달리했기 때문에 깨달음의 내용이 여러 가지 형태로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13)
그러나 성도의 과정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교설 가운데 만약 가장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결국 연기사상(緣起思想)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경우 연기(緣起)라고 해서 그것이 바로 십이연기(十二緣起)처럼 완성된 형태의 연기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십이연기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기 이전의, 심원한 종교적 체험으로서의 연기(緣起)에 대한 자각이 바로 성도(成道)의 근본적 입장일 것입니다.14) 마스다니 후미오(增谷文雄)도 “붓다가 깨달은 존재 법칙으로서의 법이란 결국 연기의 도리였음이 확실하다.”15)라고 말했습니다.
붓다의 성도는 출가의 목적인 해탈의 완성이며 현세에 있어서 ‘열반(涅槃, nibbana, nirvana)’을 실현한 것입니다. 성도하기 이전의 붓다를 ‘보살(菩薩, bodhisatta, bodhisattva, ‘깨달음을 구하는 자’의 뜻)’이라고 하고 붓다가 된 후에는 ‘세존(世尊, Bhagavad)’이라고 존칭(尊稱)되었습니다.16)
Notes:
1)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 샘터, 1990), p.106.
2)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 p.107.
3) 팔리어 베사카(Vesakha)는 비사카(Visakha, 毘舍去) 혹은 비사카(Visakha)로 표기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범어 바이사카(Vaisakha)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베사카는 인도력 2월인데, 양력으로는 4-5월에 해당된다.
4)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 지문각, 1965), p.98.
5) Majjhima Nikaya (PTS) Vol. I, pp.237-251; 南傳大藏經 9, pp.409f. 이 경전은 자이나교의 교주 니간타의 제자인 삿짜까(Saccaka)가 부처님께 몸을 닦는 수행과 마음을 닦는 수행에 관한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과정에서 붓다 자신이 깨달음을 이루게 된 전후 사정을 삿짜까에게 설한 것이다.
6) 아래 인용문은 전재성 역주,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aya)> (서울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2), 제2권, pp.130-134에서 발췌한 것이다.
7) ‘전생의 삶에 대한 관찰의 지혜’를 한역경전에서는 숙명지(宿命智) 혹은 숙명통(宿命通)이라고 번역하였다.
8) ‘뭇삶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찰의 지혜’를 한역경전에서는 천안지(天眼智) 혹은 천안통(天眼通)이라고 번역하였다.
9) ‘번뇌의 소멸에 대한 관찰의 지혜’를 한역경전에서는 누진지(漏盡智) 혹은 누진통(漏盡通)이라고 번역하였다.
10) 전재성 역주,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aya)> (서울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2), 제2권, pp.130-134..
11) 이기영, <석가>, p.97.
12) 후지타 코타츠 外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서울 : 민족사, 1989), p.41.
13) 후지타 코타츠 外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p.41.
14) 후지타 코타츠 外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p.43.
15) 마스터니 후미오 지음 · 이원섭 옮김, <불교개론> 개정2판 (서울 : 현암사, 2001), p.25.
16) 후지타 코타츠 外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p.42.
악마의 유혹
붓다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악마의 유혹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불전문학(佛傳文學)에서는 붓다의 성도(成道)와 악마(惡魔)의 유혹(誘惑)을 결부시켜 서술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후대의 불전에서는 악마의 유혹과 그것의 극복이 성도 직전의 일인 것처럼 씌어져 있으나, 그것은 후대의 불전작가들이 성도의 극적 효과를 인상적으로 강하게 하기 위해서 그와 같이 묘사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기 어렵습니다. 초기의 불교도들은 후세의 불전작가들과는 달리 부단한 정진, 유혹에 대한 7년 간의 부단한 투쟁이 붓다의 수행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1) 이처럼 악마들은 태자가 출가하여 수행하는 동안 줄곧 따라다니면서 깨달음[正覺]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려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악마의 유혹이라는 전설입니다.
1. 고행과 애욕의 유혹
악마의 유혹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수따니빠따(Suttanipata, 經集)>에 편찬되어 있는 <빠다나-숫따(Padhana-sutta, 精勤經)>입니다. 이 경전은 붓다께서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회상(回想)하여 술회(述懷)한 것인데, 그 내용은 제자들에게 열심히 정진하라고 당부한 가르침입니다. 이 경전에 나오는 악마와의 대화는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네란자라 강 기슭에서 명상에 전념하고 있을 때, 실제로 붓다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갈등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우선 경전의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네란자라 강 기슭에서 평안을 얻기 위해 힘써 닦고 명상하는 나에게,
악마 나무찌(Namuci)는 위로의 말을 건네며 다가왔다.
“당신은 야위었고 안색이 나쁩니다. 당신은 죽음에 임박해 있습니다.
당신이 죽지 않고 살 가망은 천에 하나입니다.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생명이 있어야만 모든 착한 일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베다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청정한 행을 하고 성화(聖火)에 제물을 올리는 고행을 쌓는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애써 정진하는 길은 가기 힘들고 행하기 힘들며 도달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같은 시를 읊으면서 악마는 눈뜬 분 곁에 섰다.
악마가 이렇게 말하자, 스승(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게으름뱅이의 친척이여, 악한 자여, 그대는 세속에 선업(善業)을 구해서 여기에 왔지만,
내게는, 세속의 선업을 찾아야 할 필요는 털끝만큼도 없다. 악마는 선업의 공덕을 구하는 자에게 가서 말하라.
내게는 믿음이 있고 노력이 있고 지혜가 있다. 이처럼 전념하는 나에게 너는 어찌하여 생명의 보전을 묻는가.
힘써 정진하는 데서 일어나는 이 바람은 강물도 마르게 할 것이다. 오로지 수도에만 정진하는 내 몸의 피가 어찌 마르지 않겠는가.
몸의 피가 마르면 쓸개도 가래침도 마를 것이다. 살이 빠지면 마음은 더욱더 밝아지리라. 내 생각과 지혜와 순일한 마음은 더욱더 편안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토록 편안히 살고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내 마음은 모든 욕망을 돌아볼 수가 없다. 보라, 이 마음과 몸의 깨끗함을!
너의 첫째 군대는 욕망이고, 둘째 군대는 혐오이며, 셋째 군대는 기갈, 넷째 군대는 애착이다.
다섯째 군대는 권태와 수면, 여섯째 군대는 공포, 일곱째 군대는 의혹, 여덟째 군대는 겉치레와 고집이다.
잘못 얻은 이득과 명성과 존경과 명예와 또한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
나무치여, 이것들은 너의 병력(兵力)이다. 검은 악마의 공격군이다. 용감한 사람이 아니면 그를 이겨낼 수가 없다. 용자는 이겨서 즐거움을 얻는다.
내가 문자풀2)을 입에 물 것 같은가? 이 세상의 생은 달갑지 않다. 나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겠다.
어떤 수행자나 바라문들은 너의 군대에게 패해버리고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덕 있는 사람들의 갈 길조차 알지 못한다.
병력이 사방을 포위하고 악마가 코끼리를 탄 것을 보았으니, 나는 그들을 맞아 싸우리라. 나를 이곳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라.
신들도 세상 사람도 너의 병력을 꺾을 수 없지만, 나는 지혜를 가지고 그것을 깨뜨린다. 마치 굽지 않은 흙 단지를 돌로 깨뜨려버리듯이.
생각대로 사유(思惟)를 하면서 신념을 굳게 하고 이 나라 저 나라로 편력할 것이다.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그들은 내 가르침을 실행하면서 게으르지 않게 노력하고 있다. 그곳에 가면 근심할 것이 없고, 욕망이 없는 경지에 그들은 도달하리라.”
악마는 말했다.
“우리들은 칠 년 동안이나 그를 한 걸음 한 걸음 따라다녔다. 그러나 항상 조심하고 있는 정각자(正覺者)에게는 뛰어들 틈이 없었다.
까마귀가 기름을 발라놓은 바위 둘레를 맴돌며 ?이곳에서 말랑말랑한 것을 얻을 수 없을까. 맛 좋은 먹이가 없을까?하며 날아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 맛있는 것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까마귀는 날아 가버렸다. 바위에 가까이 가 본 그 까마귀처럼, 우리는 지쳐서 고따마를 떠나간다.”
근심에 잠긴 악마의 옆구리에서 비파(琵琶)가 뚝 떨어졌다. 그만 그 야차는 기운 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3)
이 경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악마 나무찌가 나타나 고행 중인 석존에게 고행을 포기할 것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석존은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더 정진함으로써 그 유혹을 극복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악마의 군대가 나타나 석존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석존은 지혜로써 악마의 여덟 무리 군대를 격파시켜 버렸다는 것이 이 경전의 핵심입니다.
이 경전에서는 악마와의 결투를 아주 리얼하게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악마의 여덟 무리의 군대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됩니다. 즉 악마의 군대는 ①까마(Kama, 애욕), ②아라띠(arati, 혐오), ③꿋삐빠사(khuppipasa, 기갈), ④땅하(tanha, 갈애), ⑤티나밋다(thinamiddha, 혼침 수면), ⑥비루(bhiru, 공포), ⑦위찌낏차(vicikiccha, 의혹), ⑧막카탐바(makkha-thambha, 위선과 오만) 등의 여덟 가지를 말합니다. 이것은 모두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욕망과 미혹과 나태의 측면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명백합니다.4)
위에서 인용한 <수따니빠따>에 나오는 악마의 유혹과 비슷한 내용이 한역 아함경에도 실려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때에 마라 빠삐만(Mara papiman, 惡魔波旬)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사문 고따마는 지름 우루벨라촌 네란자라 강가에 계시는데, 보리수 밑에서 도를 이룬 지 오래지 않다. 나는 거기 가서 교란시키리라.”
그는 곧 젊은이로 화해 부처님 앞에 가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혼자서 쓸쓸한 곳에 들어와
선정에 들어 고요히 생각한다.
나라와 재물 이미 버리고
여기서 다시 무엇을 구비하는가.만일 마을의 이익을 구한다면
어찌하여 사람을 친하지 않는가.
이미 사람을 친하지 않거니
마침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그 때에 세존께서는, ‘이것은 악마 빠삐만의 교란시키려는 짓이다’ 생각하시고,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미 큰 재물의 이익을 얻어
마음이 만족하고 편하고 고요하다.
모든 악마를 무찔러 항복 받고
어떠한 욕망에도 집착하지 않노라.혼자 고요히 생각하면서
선정의 묘한 기쁨 먹고 있거니
그러므로 구태여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가까이 친하여 않노라.
악마는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고따마여, 만일 스스로
그 안온한 열반길 알았거든
너 혼자 스스로 무위(無爲)를 즐겨하라.
무엇하여 구태여 남을 교화하려는가.악마의 속박 받지 않는 이
내게 와 ‘저 언덕’ 건너기 물으면
나는 곧 그에게 바른 대답으로써
그로 하여금 열반을 얻게 한다.
악마는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어떤 흰 돌이 어린 기름 같아서
새가 날아 와 먹으려 하였으나
마침내 그것을 맛보지 못하고
주둥이만 다치고 허공으로 돌아갔네.
이 나도 또한 그 새와 같거니
헛되이 수고하고 하늘로 돌아가네.
악마는 이렇게 말하고 근심과 슬픔을 품고 마음으로 뉘우쳤다. 그래서 머리를 숙이고 땅에 엎드려 손가락으로 땅을 그었다.5)
경전은 계속됩니다. 석존과의 대화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빠삐만에게 애욕(愛欲), 애념(愛念), 애락(愛樂)이라는 세 딸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그 아버지를 대신하여 석존을 유혹하고 돌아오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 석존을 유혹시키지 못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경전을 근거로 후대의 불전작가들이 악마의 유혹에 대해 좀더 윤색하고 보완하여 드라마틱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실제로 앞에서 인용한 {수따니빠따}에 나오는 악마의 군대는 <본행집경(本行集經)>과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에 그대로 기술되어 있으며, 나가르주나(Nagarjuna, 龍樹)의 <대지도론(大智度論)>에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2. 악마유혹 전설의 의미
악마의 유혹에 관한 이야기는 석존이 성도한 후의 일화에서도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빠삐만(波旬)이라고 불리는 악마는 석존을 공포에 몰아넣으려고 때로는 거대한 코끼리의 상왕(象王)으로, 때로는 큰 뱀(大蛇)의 왕으로 변하여 큰 바위를 부수고 큰 굉음을 울리며 석존에게 접근했지만 그럴 때마다 석존은 이를 피하곤 했다고 합니다. 다시 마왕은 석존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 특히 비구니(여성 출가자)를 유혹하거나 협박했습니다. 경전에는 악마가 “당신은 젊고 아름답다. 나 역시 한창이니, 함께 와서 즐겁게 악기를 타면서 놀자”거나, “여성의 몸으로 정각을 얻어 성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니, 어서 수도를 단념하라”는 유혹을 던진 이야기가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들 악마는 마라(mara, 죽음의 신), 나무찌(namuci, 한역 경전에는 ‘장해탈(障解脫)’이라고 번역되어 있음), 깡하(kanha, 검은 것), 아디빠띠(adhipati, 통치자), 안따까(antaka, 죽음의 신, 죽음의 악마) 등, 갖가지 이름으로 불리며 통틀어서 ?악한 것? 즉 빠삐만(papiman)이라고 불립니다.6)
그렇다면 이와 같은 악마유혹의 전설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석존이 출가할 때 국왕의 자리로써 유혹 받았다는 전설이나, 네란자라 강변에서 고행을 할 때 건강을 유지하여 생명을 보존하고 정통 바라문교도들이 행하듯이 행실을 삼가며 한 가정의 장으로서 성스러운 불에 제물을 바치고, 아그니(agni, 불의 신, 火天) 호트라의 제사를 지내고, 공덕을 쌓으라는 권유를 받았다는 전설 등은 모두 일반 세속세계로의 복귀, 즉 세속적인 욕망에 대한 유혹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팔마군(八魔軍)의 유혹은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인간의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갈등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7)
또 주목되는 것은 악마 빠삐만의 세 딸에 의한 석존 유혹의 전설입니다. 땅하(tanha, 갈애), 아라띠(arati, 혐오)이며, 라가(raga, 탐욕)라 불리는 세 딸은 부친인 빠삐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린 소녀, 젊은 처녀, 남의 아내, 노파 등으로 모습을 바꿔 가면서 석존에게 접근했지만, 일체의 번뇌를 떠나 정각의 경지에 도달한 석존은 이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내 마음은 고요하다’라는 말로써 일축해 버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 마녀의 유혹에도 성적 충동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하는 옛 전설({수따니빠따})이나, 또는 후대의 한역 경전에서 볼 수 있는 전설, 즉 우루벨라 마을의 네 명의 여자가 유혹했다는 이야기와({사분율, 四分律}) 아울러 생각해 볼 때, 금욕 생활을 지켜나가려는 석존에 대한 유혹이 투영된 전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경전에 나타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악마에 의한 유혹의 전설은 인간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즉 인간 존재의 근원에 깔린 욕망과 불안, 공포, 고뇌 등이 인간과 벌이는 투쟁의 경과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번뇌에 대한 인식 및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후대의 경전에서는 악마의 수가 더욱 증가하고, 그 내용도 여성뿐 아니라 추상적으로 발달해 갑니다. 불상이나 불화의 제작이 시작되어 항마성도(降魔成道)의 주제가 많이 이용됨에 따라서, 사람들은 실제로 악마가 달려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8)
Notes:
1)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 지문각, 1965), p.77.
2) 문자풀을 입에 문다는 것은 적에게 항복한다는 뜻.
3) Suttanipata v.425-449; 法頂 옮김, <숫타니파타> (서울 : 샘터, 1991), pp.128-132.
4) 中村元 著 ·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서울 : 김영사, 1984), p.198.
5) 한글대장경 잡아함경 3권, pp.146-152 참조.
6) 中村元 著 ·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198.
7) 中村元 著 ·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198.
8) 中村元 著 ·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198.
깨달음의 즐거움
1. 윤회의 삶은 끝나다
붓다께서는 우루벨라(Uruvela) 마을의 네란자라(Neranjara, 尼連禪河) 강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하였습니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는 성도(成道)에 관한 여러 경전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동일합니다. 하지만 세부적인 사항은 약간 다른 점도 있습니다. 붓다의 성도와 관련하여 악마의 유혹을 물리쳤다는 항마(降魔)의 이야기는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항마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경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아함(中阿含)의 <라마경(羅摩經)>1)과 이에 해당하는 팔리어로 씌어진 아리야빠리예사나 숫따(Ariyapariyesana Sutta, 聖求經)2)에서는 항마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오직 깨달음만을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경전에 의하면, 석존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의 곁을 떠나 마가다(Magadha)국을 편력하던 중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Senanigama, 將軍村)로 갔습니다. 그곳은 수행하기에 매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석존은 이곳이야말로 참으로 수행정진하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자리를 깔고 수행에 전념하였습니다. 출가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결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거기에서 자기의 몸이 ‘태어난다’는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도 이 태어난다는 것에 불행의 원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태어남을 초월한 최상의 평안, 즉 열반을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열반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다음으로 자기의 몸이 ‘늙는다’는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 ‘병에 걸린다’는 자연의 법칙, ‘죽는다’는 자연의 법칙, ‘근심한다’는 자연의 법칙, ‘더러워진다’는 자연의 법칙, 이와 같은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 그러한 존재 속에 불행의 원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초월한 최상의 평안, 즉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 것입니다.3)
그때의 경지를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하여 내게 지견(智見)이 생겼다. 나의 해탈(解脫)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내 마지막 생애이고 이 이상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부분을 한역 <라마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생(生)은 이미 다하고, 청정한 수행은 이루어져, 소작(所作)도 모두 가려졌네. 다시 유(有)를 받지 않으며, 진여(眞如)를 알았다.”
즉 과거로부터 무수한 생애를 두고 정진 노력한 결과가 성숙해서 여기 최고의 이상이 실현된 것이므로 이제는 더 이상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몇 번이고 되풀이되어 온 생사의 유전은 마침내 종말을 고하고, 맑고 깨끗한 수행은 완성되었습니다. 해야 할 일은 모두 다 해놓았으며 또다시 생사를 되풀이함이 없이 최고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말입니다.4)
이러한 팔리문이나 한역 중아함 <라마경>에는 보리수 아래 앉기까지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 즉 마을 처녀의 공양, 강에서의 목욕, 길상초의 보시를 받은 일, 그리고 보리수의 일 같은 것은 전혀 적혀 있지 않습니다. 또한 마라 빠삐만(Mara papiman)에 대해서도 한마디 비치지 않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일본의 불교학자 와다나베 쇼오꼬(渡邊照宏)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라마경}은 원래 부처님이 제자들을 위해 자기 자신의 수행시절의 체험을 말한 것을 기록한 경전이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제자들의 수행에 직접 관계가 깊은 사항에 대한 설명에 주력하고 있다. 따라서 부처님밖에 통용될 수 없는 항마(降魔)나 성도(成道)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같은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간단히 보살은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로 와서 경치가 아름다운 언덕진 숲속에 앉아 좌선,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것, 더러움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고찰한 결과 그런 것들의 본질을 깨닫고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 도달했다고 하는 것만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 밖에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여러 가지 사건 특히 마라와의 싸움 같은 것은 전기 작가의 창작이라거나 후세 사람이 첨가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학자가 지금도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부처님의 참다운 모습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불교의 본질에 접근할 수도 없다.”5)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라마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2. 깨달음의 경지
사실 범부는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와다나베 쇼오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능력에 알맞은 범위 안에서만 사물을 생각하려고 한다. 선천적인 장님이나 귀머거리는 빛깔이나 소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서 설명을 듣더라도 자기 나름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부처님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부처님이 아니므로 부처님의 심경이나 그 경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 수 없다고 해서 부처님의 특수한 모습이 실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르는 대로 경전에 나오는 말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까지 헤아려볼 수는 있다. 경전에 사용되고 있는 말의 표면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실한 그 뜻을 체득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6)
흔히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자신의 체험이 그러한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깨달음을 이룩한 붓다의 경지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부처님께서 성취한 깨달음의 경지는 감히 우리 범부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를 ‘이지불이(理智不二)’의 세계, ‘불불상념(佛佛相念)’의 세계, ‘자수용법락(自受用法樂)’의 경계라고 불려집니다. 이지불이(理智不二)란 지혜와 이치가 하나된 상태를 말하고, ‘불불상념(佛佛相念)’이란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서로 생각하는 상태를 일컫는 것입니다.7) 그리고 ‘자수용법락(自受用法樂)’이란 법의 즐거움을 스스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경지는 목적을 달성한 후에 누린 붓다의 만족감과 한동안의 안도감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8)
우리 범부는 다만 우러러 존숭(尊崇)하고 찬탄하며 경앙(敬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맑은 거울에는 일시에 만상(萬象)이 환하게 다 그 모습을 비추는 것과 마찬가지로 맑은 마음에는 모든 경계가 다 와서 거기에 머뭅니다. 그 마음을 바다에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경계(境界)를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마음의 바다에 와서 머무는 것입니다. 실로 깨달은 그 분의 심경(心境)은 이와 같은 것일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해인삼매(海印三昧)’라고도 합니다.9)
3. 깨달음의 즐거움
여러 율장과 불교문헌들에 의하면 붓다는 성도한 후 4주(28일) 동안 혹은 7주(49일) 동안 보리수 밑에서 또는 그 밖의 다른 나무들 밑에서 홀로 가부좌한 채 열반의 즐거움을 맛보았다고 합니다. 팔리 율장(律藏) 대품(大品)에 의하면, 붓다께서 깨달음을 이룬 뒤, 첫 번째 7일 동안은 보리수 밑에서 보냈고, 다시 7일 동안은 아자빨라 니그로다(Ajapala-nigrodha)10) 나무 밑에서 보냈으며, 세 번째 7일은 무짤린다(Mucalinda) 나무 밑에서 보냈고, 네 번째 7일은 라자야따나(Rajayatana) 나무 밑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첫 번째 7일 동안 붓다는 보리수 밑에서 오로지 한자세로 삼매(三昧)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셨습니다. 이 때 붓다는 연기(緣起)를 발생하는 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셨다고 합니다.
두 번째 7일 동안에는 모든 것을 비웃는 버릇이 있는 거만한 브라흐마나(Brahmana, 波羅門)의 방문을 받고 그에게 진정한 브라흐마나(바라문)이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때의 상황을 기록한 율장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11)
세존께서는 7일이 지난 뒤 삼매에서 깨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보리수를 떠나 아자빨라 니그로다 나무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다리를 맺고 앉은 채 7일 동안 오로지 한자세로 삼매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셨습니다.
그때 교만한 바라문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존께 와서 안부를 여쭙고 몇 마디 인사를 나눈 뒤 한쪽에 서서 말했습니다.
“사문 고따마(Gotama)여, 그대는 어째해야 바라문이 되는지 아시오? 어떤 수행을 해야 바라문이 되는지 아시오?”
그때 세존께서는 감흥을 읊으셨습니다.
“바라문은 죄악을 멀리하고, 마음이 교만하지 않다. 때가 없고 자제(自制)하고, 베다(Veda)에 정통하며 청정한 수행을 완성한다. 바라문이란 그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니, 그에게 세상 어디에선들 교만함이 있겠는가?”
세존께서는 7일이 지난 뒤 삼매에서 깨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아자빨라 니그로다 나무를 떠나 무짤린다 나무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다리를 맺고 앉은 채 7일 동안 오로지 한자세로 삼매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셨습니다.
그때 갑자기 큰 구름이 일어나 7일 동안 비가 내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서 날씨가 을씨년스러웠습니다. 그러자 무짤린다 용왕(龍王)은 자신의 거주처에서 나와 긴 몸으로 세존을 일곱 번 둘러싸고, 고개를 굽혀 세존의 머리 부분을 가리고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추위나 더위가 세존을 침범치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파리·모기·바람·열기·뱀 등이 세존에게 다가서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7일이 지난 뒤 세존께서는 삼매에서 깨어나셨습니다. 용왕은 날씨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게 갠 것을 보고 세존에게서 자신의 몸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동자의 모습으로 변한 뒤 세존을 향해 합장한 채 경배하며 서 있었습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감흥을 읊으셨습니다.
“진리를 듣고 보아
혼자서도 만족함은 즐거움이다.
생명에 대해 조심해서
해치지 않음도 세상의 즐거움이다.
애욕(愛欲)을 극복하여
세상살이에 탐착하지 않음도 즐거움이다.
그러나 내가 있다는 교만심을 누를 줄 아는 것,
이것이 최상의 즐거움이다.”
세존께서는 7일이 지난 뒤 삼매에서 깨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무짤린다 나무를 떠나 라자야따나 나무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다리를 맺고 앉은 채 7일 동안 오로지 한자세로 삼매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셨습니다.
그때 따뿟사(Tapussa)와 발리까(Bhallika)라는 두 상인이 욱깔라(Ukkala) 지방에서 세존이 계신 곳으로 향하는 큰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생에 두 상인의 친척이었던 천신(天神)이 그들 앞에 나타나 세존께 공양을 올리도록 권했습니다.
“벗들이여, 이제 막 깨달음을 이루신 세존께서 라자야따나 나무 아래에 계십니다. 그분께 보리죽과 꿀을 공양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들은 오랫동안 즐거움과 안락함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보리죽과 꿀을 가지고 세존에게 다가가 공손히 절한 뒤 한쪽에 서서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보리죽과 꿀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저희들은 오랫동안 즐거움과 안락함을 누릴 것입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생각하셨습니다.
‘여래(如來)가 저들의 손에서 직접 음식을 받을 수는 없다. 나는 어떤 것을 사용하여 보리죽과 꿀을 받아야 할까?’
그러자 사대왕(四大王=四天王)이 세존의 생각을 자신들의 마음으로 알아낸 뒤, 사방에서 다가와 수정으로 만든 네 개의 그릇을 바치며 아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으로 보리죽과 꿀을 받으십시오.”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수정 그릇으로 음식을 받아 드셨습니다.
두 상인은 세존께서 음식을 다 드시고 그릇에서 손을 거두는 것을 보고서는, 세존의 발에 머리를 숙이며 아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과 법(法)에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저희들을 신자로 받아 주십시오. 오늘부터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귀의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상인 따뿟사(Tapussa)와 발리까(Bhallika)는 세존과 법이라는 두 의지처에 귀의한 최초의 신자가 되었습니다.
위 내용은 팔리 율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따뿟사와 발리까라는 두 상인이 500대의 수레에 짐을 싣고 웃깔라 마을에서 중부 인도로 가던 도중 마침 이 근처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 수신(樹神, 일설에는 조령이라 함)의 권고로 앞으로의 이익과 안락을 기원하며 보리죽과 꿀떡을 공양하고 불(佛)과 법(法)에 귀의함을 허락 받아서 붓다의 최초 재가 신자가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12)
그 때는 아직 출가한 제자들의 집단이 없을 때인데, 이와 같이 세속생활을 그대로 하면서 부처님을 받들어 그의 가르침을 실행해 가는 남자들을 우빠사까(Upasaka, 優婆塞)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우루벨라의 숲속에서 고행(苦行)을 할 때에 이미 사람들로부터 대성자(大聖者)로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 부처님이 고행을 버리고 지금 보리수 밑에서 성도한 뒤 아직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벌써 그 거룩한 위덕(威德)에 감화를 입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13)
범천의 권청(勸請)
1. 정각자의 고독
붓다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직후의 상황들은 팔리어 <율장(律藏)> ‘대품(大品)’에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율장>에 의하면, 붓다께서는 성도 후 5주째 7일 동안은 라자야따나(Rajayatana) 나무를 떠나 아자빨라 니그로다(Ajapala Nigrodha) 나무로 다시 자리를 옮겨 깨달음의 희열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때 사함빠띠(Sahampati)라는 범천(梵天)이 나타나 세존께 법을 설하시도록 간청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설화입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범천의 권청이 있기 직전의 상황을 묘사한 경전이 있습니다. <상응부경전(相應部經典)>의 ‘공경(恭敬, Garavo)이라는 경’1)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경전에 묘사된 내용도 세존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후 다섯 번째 주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2) 이 경전에 깨달음을 이룩한 정각자의 고독을 표현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경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괴롭다. 나는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중하고 가까이해야 하랴.”3)
붓다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것은 더 없는 즐거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아도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은 붓다 자신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같은 생각을 지닌 자가 있다면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토로할 대상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무엇인지 모를 고독과 불안을 느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이것을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는 ‘정각자의 고독’이라고 표현했습니다.4) 그때 붓다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차라리 내가 깨달은 법, 이 법을 존중하고 가까이하면서 살리라.”5)
이 대목을 한역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는 범천의 입을 빌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직 바른 법이 있어서, 세존께서 스스로 깨달아 다 옳은 깨달음을 성취하였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래께서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할 만한 것으로써, 그것을 의지해 살아 가셔야 할 것이옵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모든 여래 · 응등정각(應等正覺, 다 옳게 깨달은 이)도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았고, 미래의 모든 여래 · 응등정각(應等正覺)도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도 그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아가셔야 할 것이옵니다.?6)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별역잡아함경(別譯雜阿含經)>에서는 범천의 입을 빌리지 않고, 붓다께서 직접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습니다. “일체 세간에 살고 있는 생류(生類) 중에서 계(戒, sila) · 정(定, samadhi) · 혜(慧, panna) · 해탈(解脫, vimutti) · 해탈지견(解脫知見, vimuttinanadassana)이 나보다 뛰어난 자가 있다면, 내 마땅히 가까이 하여 그에게 의지하고 공양·공경하겠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아도 세간의 인천(人天) · 마(魔) · 범(梵) · 사문(沙門) · 바라문(波羅門)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다. 일체의 세간에서 계 · 정 · 혜 · 해탈 · 해탈지견이 나보다 뛰어난 자가 있다면 나는 의지할 것이다. 그렇지 못할 바에야 ‘내가 깨달은 법(法)’을, 내가 지금 마땅히 가까이 하고 공양·공경하며 성심껏 존중할 것이다.”7)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후세의 불교 용어로 표현하면,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내가 깨달은 법’을 객관화하여 흔들리지 않도록 확립해 놓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거기에서 설법이라는 과제가 새로이 그의 앞에 다가오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8)
2. 범천의 권청
붓다께서 설법하시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은 앞에서 소개한 팔리어 <율장>의 [대품]에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9) 여기서는 가능한 필자의 의견을 생략하고 문헌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존께서는 7일이 지난 뒤 삼매에서 깨어나셨다. 그리고 라자야따나 나무를 떠나 아자빨라 니그로다 나무로 가서 머무셨다.
그곳에서 홀로 선정(禪定)에 잠기신 세존의 마음에는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도달한 이 법은 깊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숭고하다. 단순한 사색에서 벗어나 미묘하고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집착하기 좋아하여, 아예 집착을 즐긴다. 그런 사람들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도리와 연기의 도리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또한 모든 행(行)이 고요해진 경지, 윤회의 모든 근원이 사라진 경지, 갈애(渴愛)가 다한 경지, 탐착을 떠난 경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경지 그리고 열반(涅槃)의 도리를 안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내가 비록 법을 설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만 피곤할 뿐이다.’
그때 세존께서는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게송을 떠올리셨다.
‘나는 어렵게 도달하였다.
그러나 지금 결코 드러낼 수 없다.
탐착과 분노에 억눌린 자들은
이 법을 원만히 깨달을 수 없다.
흐름을 거슬러 가기도 하고
미묘하고 깊고 보기 어렵고 섬세하니,
탐착에 물든 자들이
어떻게 이 법을 보겠는가?
어둠의 뿌리로 뒤덮인 자들이.’
이와 같이 깊이 사색한 세존께서는 법을 설하지 않기로 하셨다.
그때 사함빠띠(Sahampati)라는 범천이 자신의 마음으로 세존의 마음속을 알고서 이렇게 생각했다.
‘아! 세상은 멸망하는구나. 아! 세상은 소멸하고 마는구나. 여래 · 응공(應供) · 정등각자(正等覺者)가 법을 설하지 않으신다면.’
그리하여 사함빠띠는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혔던 팔을 펴고 폈던 팔을 굽히는 것처럼 재빠르게 범천의 세상에서 사라진 뒤 세존 앞에 나타났다.
그는 한쪽 어깨에 상의(上衣)를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은 다음 세존을 향해 합장하며 간청했다.
“세존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선서(善逝)께서는 법을 설하소서. 삶에 먼지가 적은 중생(衆生)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법을 듣는다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을 설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조차 쇠퇴할 것입니다.”
사함빠띠는 다시 게송으로 간청했다.
“세존 이전의 마가다국에는
어지러운 법이 설해져 있었으니
때묻은 자들이 사유한 것이었네.
이제 세존께서 오셨으니 불사(不死)의 문을 여시어
그 법을 듣고 때 없는 자들이 깨닫도록 하소서.
지극히 현명한 분이시여,
모든 것을 보는 분이시여,
슬픔이 제거된 분이시여,
산의 정상에 있는 바위 위에 오르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그와 같이 법으로 이뤄진 누각 위에 올라서
태어남과 늙음에 정복당하고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소서.
영웅이시여,
전쟁의 승리자시여,
일어나소서.
빚 없는 대상(隊商)들의 지도자처럼
세상을 다니소서.
세존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아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사함빠띠의 청을 들으신 뒤 그에게 말씀하셨다.
“범천아, 나는 생각했다. ‘내가 도달한 이 법은 보기 어렵고 …… 열반의 도리를 본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내가 비록 법을 설한다해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만 피곤할 뿐이다.’
범천아, 그때 나에게 이런 게송이 떠올랐다.
‘나는 어렵게 도달하였다.
……
이떻게 이 법을 보겠는가?
어둠의 뿌리로 뒤덮인 자들이.’
범천아, 이런 깊은 사색 끝에 나는 법을 설하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다.”
(사함빠띠 범천은 다시 그리고 또다시 반복해서 세존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범천의 청이 지극함을 아시고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일으켜 부처님의 눈[佛眼]10)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셨다. 그리고 참으로 여러 중생이 있음을 아셨다. 더러움이 적은 사람, 더러움이 많은 사람, 영리한 사람, 둔한 사람, 착한 사람, 악한 사람, 가르치기 쉬운 사람,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 그 중에는 후세와 죄과에 대해 두려움을 알고서 사는 사람, 후세와 죄과에 대해 두려움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셨다.
비유하면 연못의 연꽃들과 같으니, 그곳에는 푸른 연꽃, 붉은 연꽃, 흰 연꽃이 있다. 그들은 모두 물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물의 보호를 받는데, 어떤 연꽃은 물에 잠긴 채 자라고 어떤 연꽃은 물의 표면에 있고 어떤 연꽃은 물 위로 솟아 나와 물에 젖지 않은 채 있다.
그와 같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참으로 여러 중생이 있었다. ……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사함빠띠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을 열겠으니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
범천아,
나는 단지 피로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에게 덕스럽고 숭고한 법을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함빠띠는 세존이 설법을 허락하셨음을 알고는 공손히 절하고 오른쪽으로 돈 다음 그곳에서 사라졌다.
이상에서 인용한 ‘범천권청’의 내용을 요약하면, 붓다께서 처음에는 설법을 망설였는데, 사함빠띠라는 범천이 나타나 붓다의 마음을 되돌려 마침내 설법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 심리적 전환의 경위를 이 경은 ‘범천의 권청’이라는 신화적 수법을 통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범천(Brahma)이란 인도인이 받들어 오던 신인데, 그 신이 붓다의 속마음을 알고 붓다를 예배하면서 설법을 하여 주시도록 권청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름답고 구성면에서도 빈틈없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불교학자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는 “붓다의 설법 결의는 결코 그러한 객관적인 계기로 이루어졌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11)고 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무릇 고대인의 문학적 수법은 거의 심리 묘사를 무시하는 데에 특징이 있다. 그들은 흔히 심리적 과정을 객관적 사건을 통해 묘사한다. 마음속에 나쁜 생각이 떠오르면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표현하고, 훌륭한 생각이 떠오르면 범천 같은 신을 등장시킨다. 그것이 불교 경전의 문학 형식의 상례이다. 그러면 이에 범천 설화의 양식으로써 묘사된 붓다의 설법 결의의 진상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을 푸는 열쇠 또한 앞에 든 ‘정각자의 고독’을 이야기한 경 속에 감추어져 있는 듯하다. 새로운 사상을 자기 혼자 지니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리라. 그것을 어떻게든 남에게 알려서 동조를 얻고 싶어지리라. 인간이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며, 붓다도 인간이기 때문이다.”12)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는 붓다의 설법 결의는 ‘범천권청’ 때문이라기보다도 ‘정각자의 고독’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여튼 붓다께서 범천의 간청에 의해서 최초로 설법을 하려고 결심한 ‘범천권청’의 설화는 그 실재성 여부를 떠나서 불교의 출발점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즉 깨달음의 내용을 설법의 형식을 통해 객관화시키는 것은 깨달음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13)
전도의 개시
첫 설법의 대상
붓다께서는 마침내 법을 설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설법을 결심한 다음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어떻게 설할 것인가를 고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깨달은 성도의 내용과 최초로 다섯 비구들에게 설한 내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붓다는 우선 누구를 대상으로 첫 설법을 해야할지를 신중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은 새로이 준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미묘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것을 설함으로써 남을 이해시킬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대로 붓다가 획득한 깨달음 자체의 첫 시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1)
붓다는 첫 설법의 상대로 처음 출가하여 수행할 때 선정(禪定)을 가르쳐준 스승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를 생각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라면 분명히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이미 죽고 없었습니다. 두 스승에 관한 이야기는 팔리 “율장(律藏)”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붓다는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는 큰 지혜를 갖춘 자였기 때문에 만약 그들이 이 법을 들었다면 곧바로 이해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세존께서는 다시 생각하셨다.
‘이제 누구에게 처음으로 법을 설할까? 누가 이 법을 빨리 이해할까? 그렇다. 다섯 명의 비구가 있다. 그들은 내가 고행(苦行)할 때 늘 나를 보살폈고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다섯 비구에게 먼저 이 법을 설해야겠다.’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를 살피셨다.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청정한 하늘의 눈[天眼]으로 다섯 비구가 바라나시(Baranaasi, 波羅奈城) 근처의 이시빠따나(Isipatana, 仙人住處)에 있는 녹야원(鹿野苑)에 머물고 있음을 보셨다.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우루벨라에서 좋은 만큼 머무시고는 바라나시로 떠나셨다.2)
붓다께서 처음 법을 설하기 위해 그 대상으로 생각한 두 사람의 스승과 다섯 비구는 모두 출가자들입니다. 전도를 시작함에 있어서 붓다는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의 수행을 쌓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후에 붓다의 제자가 되어 불교 교단의 확립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리뿟따(Sariputta, 舍利弗)나 목갈라나(Moggalana, 目(牛+建)連) 등도 모두 이교(異敎)의 가르침을 받들어 제자를 두고 이미 일파를 이루고 있던 출가사문으로부터의 개종이었던 것입니다.3)
이와 같이 초기불교 교단에서 붓다의 설법 대상은 주로 당시 사회의 부유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거나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었습니다. 경전에서는 이들을 꿀라뿟따(kulaputta, 善男子)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좋은 가문의 아들’, 즉 ‘귀족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붓다의 가르침은 계급의 차별을 초월해서 만인이 평등함을 전제로 합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평등하게 그 교단에 들어올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출가수행자나 ‘귀족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그의 가르침을 펼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이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일반 세속 사람들도 교단에 합류하거나 재가 신자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우빠까와의 만남
세존께서 가야와 우루벨라 사이에 있는 큰길을 가고 계셨을 때였습니다. 그때 아지바까(Ajivaka, 邪命外道) 교도인 우빠까(Upaka, 優波迦)가 세존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존께 여쭈었습니다.
“그대의 감관은 매우 깨끗하고 모습은 아주 밝습니다. 그대는 누구를 모시고 있으며, 그대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또 그대는 누구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까?”
세존께서는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것을 이겼고
모든 것을 알았고
모든 것에 더럽혀지지 않았고
모든 것을 버렸다. 갈애가 다한 해탈을 얻었다.
스스로 깨달았으니 누구를 따르겠는가?
나에게는 스승이 없다.
천신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자는 없다.
어떤 자도 나와 동등하지 못하다.
나는 세상에서 완전한 자이므로
내가 최고의 스승이다.
나는 홀로 모든 것을 깨달아
적정한 경지에 이르렀고 열반을 얻었다.
법륜을 굴리기 위해 나는 까시로 간다.
어두운 이 세상에 불사(不死)의 북을 울리기 위해.”
우빠까는 반신반의하여 말했다.
“그대의 주장대로라면 그대는 무한의 승리자일 수밖에 없군요.”
그러자 세존께서는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와 같은 자가 있다면
그들은 참으로 승리자이다. 번뇌를 쳐부수어 승리했기 때문이다. 우빠까여, 모든 그릇된 법을 나는 부수었으니 진실로 나는 승리자이다.”
그러자 우빠까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리고는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다른 길로 가 버렸다.
이상은 팔리 “율장”에 묘사된 그대로를 소개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빠까는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를 얻었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인연 없는 중생은 어쩔 수 없다고 한탄합니다만 이 우빠까가 바로 그런 사람에 해당됩니다. 만일 그가 그때 부처님께 귀의했다면 역사상 최초의 출가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부처님을 만났지만 부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그를 떠나갔던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빠까와 같이 불법을 만났지만 불법을 버리고 떠나는 불행한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라나시 여행
예전에 붓다와 함께 고행하였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붓다가 고행을 포기한 것을 보고 타락하였다고 생각하여 바라나시(현재의 베나레스)의 녹야원(鹿野苑, Migadaya, ‘사슴의 동산’이란 뜻, 베나레스 교외의 사르나트)으로 옮겨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선인(仙人)들이 모여 사는 곳’(Isipatana, Isipatana, 仙人住處)이라고 불려질 정도로 당시 많은 수행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우루벨라를 떠나 녹야원을 향해 출발하였던 것입니다. 도중에 우빠까를 만나기도 하였지만, 여행을 계속하여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녹야원에 이르러, 마침내 다섯 비구가 머물고 있는 근처에 나타나셨습니다. 다섯 비구와 붓다와의 재회에 관해서는 팔리 “율장”에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다섯 비구들은 멀리서 세존께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벗들이여, 수행자 고따마가 오고 있다. 그는 타락한 자로서 고행을 싫어하여 사치스런 생활로 되돌아갔다. 우리는 그에게 인사를 해서도 안 되고, 일어서서 영접해서도 안 되고, 발우와 옷을 받아서도 안 된다. 단지 그가 앉을 자리만은 비워 두어 앉고자 하면 앉을 수 있게 하자.”
그러나 세존께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그들은 자신들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일어나서 세존을 영접했다. 한 사람은 발우와 옷을 받아 들었고 한 사람은 자리를 준비했고 한 사람은 발 씻을 물과 발판과 수건을 가져왔다. 세존께서는 준비된 자리에 앉아 발을 씻으셨다. 그런데 그들은 세존을 부를 때 이름을 부르거나 “벗이여.”라고 하였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여래를 이름이나 벗이라는 말로 불러서는 안 된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마땅히 공양을 받아야 할 분이며,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분이다. 비구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나는 불사의 경지를 증득하였다. 이제 법을 설하겠다. 설한대로 수행하는 자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이 출가할 때 품었던 목적인 범행(梵行)의 궁극적인 완성을 스스로 잘 알고 똑똑히 보아 살아 생전에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러자 다섯 비구는 말했다.
“벗 고따마여, 고행을 닦고 실천하고 수행하여도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성스러운 지견(智見)을 얻기 어려운데 하물며 타락하여 고행을 싫어하여 사치스런 생활로 되돌아간 그대가 어떻게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성스러운 지견을 얻었겠는가?”
다시 세존께서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타락하지 않았다. 고행을 싫어하여 사치스런 생활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분이다. 비구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이제 법을 설하겠다. 설한대로 수행하는 자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이 출가할 때 품었던 목적인 범행의 궁극적인 완성을 스스로 잘 알고 똑똑히 보아 살아 생전에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러자 다섯 비구는 똑같은 내용을 두 번째 세 번째 되풀이하였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물으셨다.)
“비구들이여, 잘 기억해 보아라. 내가 예전에 이와 같이 말한 적이 있었느냐?”
“세존이시여, 그런 적이 없습니다.”
세존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분이다. 비구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이제 법을 설하겠다. 설한대로 수행하는 자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이 출가할 때 품었던 목적인 범행의 궁극적인 완성을 스스로 잘 알고 똑똑히 보아 살아 생전에 갖추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의 생각을 돌릴 수 있었다. 그들은 세존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잘 들으려 했고, 참된 앎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켰다.4)
종교의 성지 바라나시
붓다께서는 왜 최초의 설법을 바라나시에서 하게 되었을까? 우루벨라에서 바라나시까지는 직선 거리로도 약200㎞ 정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붓다의 여정은 무척 먼 길이었을 것입니다. “니다나 카타”에 의하면, 그 여행은 아사르하월(인도력의 6-7월) 14일과 15일이었다고 합니다. 새벽녘에 의발(衣鉢)을 챙겨 가지고 18요자나의 먼 길을 걸은 붓다는 그 날 저녁 무렵에 이시빠따나에 닿았다고 합니다.5) 그러나 5세기 경에 성립된 “마하바스투”에 의하면, 붓다가야에서 바라나시까지 7일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 문헌에는 붓다께서 거친 여러 지명과 갠지스강을 건넌 일화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6)
이 경전에 의하면, 붓다가야에서 바라나시까지는 18유순(由旬, 요자나)이었다고 하는데, 1유순이란 멍에를 건 암소가 걸어서 하루가 걸리는 거리를 말합니다. 이를 7마일(약12㎞)로 보는 설에 따르면 실제 거리와도 합치됩니다. 현재는 붓다가야에서 바라나시까지 버스로 약 8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합니다.
어쨌든 붓다께서는 붓다가야(佛陀伽倻)에서 약200㎞나 떨어진 갠지스강 맞은편 언덕인 바라나시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왜 거기까지 가서 제일성(第一聲)을 올렸을까? 오래 전부터 빔비사라(Bimbisara, 頻婆裟羅)왕을 비롯해 많은 신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마가다국에서 왜 최초의 설법을 하지 않았을까. 이 의문에 대해서는 실제적으로나 교리적인 면으로 보아 여러 가지 해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기야 평범하게 생각한다면, 녹야원에서 우연히 최초의 기회가 주어진 것을 나중에 전기 작가들이 처음부터 의도된 것처럼 설명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라나시가 지닌 종교사상적인 위치를 두고 생각할 때 그것은 결코 단순한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7)
바라나시라는 명칭은 이 곳이 갠지스강으로 흘러드는 바라나 강과 아시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두 강 모두 큰 하천이라고 부르기에는 적당치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바라나시는 힌두교도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성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로부터 바라나시는 하르드와르, 웃자인, 마투라, 아요다, 두와르카, 칸치푸람 등과 비견되는 칠대영장(七大靈場)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 곳에는 3만 이상의 바라문 승려가 살고 있으며, 또 연간 백만 명에 이르는 순례자들이 찾아듭니다. 강기슭에는 가트라고 불리는 성스러운 목욕장이 줄지어 있습니다.8)
이처럼 바라나시는 오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도에 있는 온갖 종교의 성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성스러운 갠지스강의 연안 중에서도 특히 이곳이 신성한 장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붓다께서 제일 먼저 이 바라나시를 방문한 것은 많은 수행자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자신이 얻은 정각의 내용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초전법륜(初轉法輪)
1. 최초의 설법
붓다는 바라나시(현재의 베나레스) 근처의 이시빠따나(Isipatana, 仙人住處)에 있는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예전에 함께 수행했던 다섯 수행자들을 만났습니다. 붓다께서 녹야원에 도착했을 때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처음에는 환영하지 않기로 서로 약속하였지만 붓다의 위의(威儀)에 압도되어 결국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붓다는 다섯 수행자들에게 최초로 법을 설하였는데, 이 최초의 설법을 일반적으로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합니다.
붓다께서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왕위를 계승하면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서 세계의 통치자가 되고, 출가를 하면 부처님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해탈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예언되었습니다. 전륜성왕과 부처님은 완전한 정복자라는 의미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자는 외면적인 지배자인데 반해서 후자는 내면적인 지도자입니다. 전륜성왕의 상징인 윤보(輪寶)가 나아가는 곳에 저항하는 자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설법도 또한 반론할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는 그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설법을 법륜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1)
고대 인도에서는 우주의 바퀴를 ‘범천의 바퀴’, 즉 브라흐마 차크라(Brahma Cakra)라고 하여, 이를 돌리는 자는 신들 가운데서 최고의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상에서의 이상적인 왕은 일곱 개의 보물을 소유하고, 그 하나인 윤보(輪寶)를 굴리는 자라는 뜻에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붓다께서 행한 최초의 설법도 이와 같은 전통과의 연관 속에서 ‘법(진리)의 바퀴’, 즉 다르마 차크라(Dharma Cakra)를 처음으로 굴린다고 비유되었던 것입니다.2)
아쇼카왕이 건립한 석주에는 가끔씩 ‘법의 바퀴’가 등장합니다. 또 최초의 설법을 표현하는 불상의 대좌 등에 법륜을 묘사하는 일이 많은 것은 이때 석존이 법의 바퀴를 굴렸다고 하는 전승에 의거한 것입니다. 불상의 인계(印契, mudrā) 중에는 양 손가락을 서로 끼고 있는 설법인(說法印)이 있는데, 이것은 ‘법륜을 굴린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후대에 와서는 법륜이 붓다의 설법뿐만 아니라 붓다의 교법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사용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널리 친숙해져 있습니다.3)
이와 같이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은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을 선포하시어, 법륜이 구르기 시작하였고, 또 다섯 고행자가 귀의한 곳이기 때문에 교법[法]과 승단[僧]의 탄생지가 되었습니다. 아쇼카왕은 이 성스러운 지점을 순례하고서 많은 건조물을 세웠는데, 그 중에서도 기운찬 사자 네 마리를 새긴 대접받침(柱枓)의 석주는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이 대접받침은 법륜을 떠받치고 있어 불법의 흥륭(興隆)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르나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오늘날 인도의 공식적 국가 상징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날을 기리는 법륜제(法輪祭)가 지금도 스리랑카에서 봉행되고 있습니다.4)
자와할랄 네루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베나레스 근처 사르나트에서 나는 부처님이 첫 법문을 설하고 계시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경에 나오는 말씀들이 2500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곧장 나의 귀에 먼 메아리처럼 다가오는 것 같았다. 명문(銘文)에 새겨진 아쇼카의 석주는 그 장엄한 언어로 나에게 한 인간, 황제였지만 황제 이상으로 위대했던 한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5)
2. 최초 설법의 의의
초전법륜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이 이를 갖가지로 전하고 있으며, 또 후대의 경전은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 중도(中道), 무아설(無我說), 십이인연(十二因緣) 등 체계화된 불교 교리의 모든 것이 여기서 설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6)
비교적 오래되었다고 생각되는 전승을 보면 쾌락과 고행 두 가지 극단을 떠난 중도를 설하고 있는데, 내용적으로는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과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이 초전법륜의 골자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실제 역사적 사실을 전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예로부터 붓다가 행한 최초의 설법의 내용이 중도(中道), 팔정도(八正道), 사제(四諦)로 인정되어 왔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7)
붓다의 설법을 듣고 다섯 명의 수행자 가운데 가장 먼저 가르침을 이해한 이는 꼰단냐(Kondañña, 憍陳如)입니다. 그는 붓다께서 다시 출가 수계(受戒)하여 최초의 출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뒤이어 나머지 네 명도 가르침을 이해하여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불교교단(sangha, 僧伽)이 성립하여 비로소 불(佛), 법(法), 승(僧) 삼보가 갖추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 후 붓다는 다시 오온무아(五蘊無我)의 가르침인 [무아상경(無我相經)]을 설하였는데, 이것을 들은 다섯 명의 비구는 모두 아라한(阿羅漢, 聖者)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8)
3. <전법륜경>의 내용
초전법륜의 내용은 [전법륜경(轉法輪經)]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때 붓다는 마가다를 중심으로 한 동쪽 지방의 방언으로 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팔리어, 산스끄리뜨어, 한역, 티베트어역으로 20여종이 전해지며 이전(異傳)도 적지 않습니다. 남방불교의 전승인 팔리 [율장(律藏)]에 의하면, 최초의 설법, 즉 [전법륜경]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9)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두 가지 극단이 있으니 출가자들은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여러 가지 애욕에 빠져 그것을 즐기는 것이니, 그것은 열등하고 세속적이고 범부의 짓이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되는 바가 없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짓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니, 그것도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되는 바가 없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원만히 잘 깨달았다. 중도는 눈을 뜨게 하고 앎을 일으킨다. 그리고 고요함과 수승(殊勝)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여래가 원만히 잘 깨달았고, 눈을 뜨게 하고 앎을 일으키고, 고요함과 수승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正道]를 말하는 것이니,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원만히 잘 깨달았고 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이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여기에 성스러운 고제(苦諦)가 있다. 곧 태어남도 괴로움, 늙음도 괴로움, 병듦도 괴로움, 죽음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도 괴로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간단히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집제(集諦)가 있다. 곧 재생(再生)을 유도하고 희열과 탐욕을 동반하여 이곳 저곳에 집착하는 갈애이다. 다시 말하면 애욕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멸제(滅諦)가 있다. 곧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하고 포기하고 버리고 벗어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도제(道諦)가 있다. 곧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말하는 것이니,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것이 성스러운 고제이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성스러운 고제를 두루 알아야 한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성스러운 고제를 이미 두루 알았다’라는 …… 비구들이여, 나는 ‘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집제를 이미 끊었다’라는 …… 비구들이여, 나는 ‘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멸제를 이미 증득했다’라는 …… 비구들이여, 나는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도제를 이미 수습했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비구들이여, 만약 내가 이 사성제(四聖諦)를 이와 같이 세 번씩 열두 단계로 관찰하지 않아, 있는 그대로 깨끗하게 알지 못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나는 천신, 악마, 범천의 세계와 사문(沙門), 바라문, 인간의 세계에서 가장 높고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훌륭히 성취하였다고 선언할 수 없다.
비구들이여, 나는 사성제를 이와 같이 세 번씩 열두 단계로 관찰하여, 있는 그대로 깨끗하게 알았기 때문에, 나는 천신, 악마, 범천의 세계와 사문, 바라문, 인간의 세계에서 가장 높고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훌륭히 성취하였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알고 보게 되었다. 나의 해탈은 흔들림이 없다. 이것이 최후의 생존이니, 이제 다시 괴로운 존재를 받지 않는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다섯 비구는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세존께서 이 가르침을 설하시자, 꼰단냐는 먼지와 때를 멀리 여윈 법안(法眼)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았던 것이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렸을 때, 땅의 신들이 소리쳤다.
“세존께서 바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서 가장 훌륭한 법륜을 굴리셨다. 이것은 사문, 바라문, 천신, 악마, 범천 등 세상의 어떤 누구도 굴리지 못한 것이다.”
땅의 신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 사왕천(四王天)의 여러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셨다.” 그들의 소리를 듣고서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셨다.” 야마천(夜摩天)의 신들도 도솔천(兜率天)의 신들도, 화락천(化樂天)의 신들도,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셨다.” 그 소리를 듣고서 범천(梵天)의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바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서 가장 훌륭한 법륜을 굴리셨다. 이것은 사문, 바라문, 천신, 악마 등 세상의 어떤 누구도 굴리지 못한 것이다.”
이와 같이 순식간에 범천에까지 그 소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그때 일천 세계(一千世界)가 격렬하게 진동했고, 신들의 위엄을 능가하는 한량없는 광채가 세상에 나타났다.
그때 세존께서는 감흥을 읊으셨다.
“아,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구나.
아,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구나.”
이리하여 꼰단냐 장로는 그때부터 안냐 꼰단냐(Añña Kondañña)로 불리게 되었다.
진실로 안냐 꼰단냐는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알았고, 법을 꿰뚫었다. 의심에서 벗어났고, 망설임을 제거했고, 두려움이 없었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은 필요없게 되었다.
그가 세존께 청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자 합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오너라, 비구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안냐 꼰단냐는 이렇게 구족계를 받았다.
세존께서는 나머지 비구들에게도 교법을 설하셨다. 그때 밥빠(Vappa) 장로와 밧디야(Bhaddiya) 장로가 먼지와 때를 멀리 여읜 법안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은 것이다.
진실로 그들은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알았고, 법을 꿰뚫었다. 의심에서 벗어났고, 망설임을 제거했고, 두려움이 없었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은 필요없게 되었다. 그들이 세존께 청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오너라, 비구들이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두 장로는 이렇게 구족계를 받았다.
세존께서는 가져온 음식을 드시고 난 뒤, 다시 나머지 비구들에게 교법을 설하셨다. 이렇게 세존과 비구들은 세 비구가 걸식해 온 음식을 먹으며 지냈다.
세존의 교법을 듣던 사이에 마하나마(Mahānāma) 장로와 앗사지(Assaji) 장로가 먼지와 때를 멀리 여읜 법안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았던 것이다.
진실로 그들은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알았고, 법을 꿰뚫었다. 의심에서 벗어났고, 망설임을 제거했고, 두려움이 없었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은 필요 없게 되었다.
그들이 세존께 청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오너라, 비구들이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두 장로는 이렇게 구족계를 받았다.
불교 교단의 성립
1. 다섯 제자와 상가의 성립
불전(佛傳)에 의하면, 석존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바라나시(Bārānasi, 波羅奈城, 현재의 베나레스)의 이시빠따나 미가다야(Isipatana Migadāya, 仙人住處 鹿野苑)에서 다섯 명의 고행자들을 향해 최초로 설법하였습니다. 이 최초의 설법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며,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에피소드와 함께 불전(佛傳)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였습니다.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사람들에게 설하기로 결심하고 설법의 상대로서 먼저 생각한 것이 옛날의 스승이었던 알라라 깔라마(Ālāra Kālā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āmaputta)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다음으로 생각한 것은 예전에 함께 수행했던 다섯 명의 고행자들이었습니다. 다섯 명의 고행자 이름은 팔리 율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꼰단냐(Kondañña, 憍陳如), 마하나마(Mahānāma, 摩訶那摩, 摩訶男), 밧파(Vappa. 婆破, 婆濕婆), 앗사지(Assaji, 阿說示, 馬勝), 밧디야(Bhaddhiya, 跋提伽, 婆提) 등입니다.
이 다섯 명의 고행자들은 석존이 출가했을 때, 그를 지키기 위해 부왕 숫도다나(淨飯王)가 딸려 보냈다고도 합니다만 그 사실 여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1) 이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석존의 수행시절의 동료로서 함께 고행하였으마, 석존이 고행을 멈추고 깨달음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을 보고 타락하였다고 생각하여 그의 곁을 떠나 바라나시 교외에서 계속 수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석존이 붓다가 되어 미가다야(Migadāya, 鹿野苑) 가까이 온 것을 보고 이들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고행을 포기하였던 석존이 가까이 와도 경의를 표시하지 않기로 서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 가까이 다가오자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경의를 표하지 않기로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예배하고 의발(衣鉢)을 받아주기도 하고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하면서 붓다를 맞이하였습니다. 붓다는 준비된 자리에 앉자 다섯 명의 수행자들이 옛날의 습관대로 ‘고따마여’ 또는 ‘친구여’라고 불렀는데, 붓다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비구들이여,2) 이름을 말하거나 ‘친구여’라고 여래(如來)를 불러서는 안 된다. 여래는 존경받아야 할 사람, 정각자(正覺者)이다. 비구들이여, 잘 들어라. 나는 불사(不死)를 얻었다. 나는 가르치려 한다. 나는 법(法)을 설하려 한다. 너희들이 가르침대로 행한다면 머지않아, 훌륭한 집안의 아들들이 집을 나와 출가한 목적인 위없는(無上) 불도(佛道) 수행의 구극(究極)을 현세에서 스스로 알고 깨달아 실증(實證)할 것이다.3)
다섯 명의 비구들은 처음에는 이 말을 믿지 않았지만, 붓다께서 이 말을 세 번 반복하자 저절로 붓다의 설법에 귀를 기울일 마음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때 붓다는 자신에 넘치는 태도로 깨달은 바를 거짓없이 설했습니다. 그러자 먼저 꼰댠냐(Kondañña)라는 수행자가 깨달음의 문에 들어섰습니다. 경전에는 그때 붓다께서는 “아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구나!”4)라는 감탄의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깨달은 꼰단냐’의 뜻으로 ‘안냐 꼰단냐(Añña Kondañña)’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맨 처음으로 정각을 얻은 꼰단냐의 뒤를 이어서 밥파(Vappa)와 밧디야(Bhaddhiya)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두 사람은 당시에 곧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경전에는 이미 정각을 얻은 세 사람의 비구가 탁발하여 얻은 공양으로 여섯 사람이 함께 생활하는 동안 최후의 두 사람인 마하나마(Mahānāma)와 앗사지(Assaji)가 정각을 얻어, 붓다를 포함한 여섯 명의 아라한(阿羅漢, Arahat: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5)
이렇게 해서 미가다야에서 다섯 명의 비구들이 붓다께 귀의함으로써 최초의 출가 제자의 무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불교 상가(Samgha, 僧伽)가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불교는 우주의 진리성인 법(法)을 자각하여 ‘깨달은 자[覺者]’가 된 붓다와 그의 가르침인 ‘법(法)’과 그의 가르침을 신봉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단(敎團)이 갖추어져 비로소 하나의 종교로서 성립하였습니다.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라고 할 때, 승(僧)이라고 하는 것은 상가(Samgha)라고 하는 원어를 승가(僧伽)라고 음사하고 이를 줄여서 승(僧)이라고 한 것으로, 이 불, 법, 승 중의 어느 하나가 빠져도 불교는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6)
그런데 다섯 명의 비구가 교단에 들어오기 전에 붓다의 가르침에 귀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붓다께서 아직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우유죽을 공양한 수자따(Sujāta, 善生)와 우루벨라(Uruvelā) 마을의 바라문 가족의 남녀, 그리고 붓다의 성도(成道) 직후 보리죽과 꿀을 세존께 공양올리고, 붓다께 귀의한 따뿟사(Tapussa)와 발리까(Bhallika)라는 두 상인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재가 불자들로서, 아직 공식적으로 교단이 형성되기 전에 붓다께 귀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다섯 비구의 귀의는 조직적 교단의 형성에 관련된 최초의 사건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다섯 비구에 대한 그 후의 동정은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최후의 앗사지 장로에 대한 기록으로는, 후에 사리뿟다(Sariputta, 舍利弗)와 목갈라나(Moggallāna, 目犍連)가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에서 이들을 만났을 때, 그의 자세가 단정한 것을 보고서 자신들도 붓다의 제가가 될 단서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2. 야사의 출가
다섯 명의 비구들로부터 귀의를 받은 붓다는 다음에는 바라나시에 사는 부유한 장자의 아들인 야사(Yasa, Skt. Yaśas, 耶舍)를 교화하여 출가시켰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야사의 청소년 시대와 출가 전후의 기록은 붓다의 경우와 매우 비슷합니다. 겨울, 여름, 우기를 위한 세 개의 궁전 속에서 오직 홀로 기녀들에게 둘러싸여 지낸 온 야사는 어느 날 밤, 문득 잠에서 깨어나 시녀들이 머리칼을 흩트리고 잠꼬대를 하면서 보기 흉하게 잠들어 있는 광경을 보고, 마치 눈앞에 묘지를 보는 것 같은 심한 혐오감을 느껴 출가의 결심을 굳혔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집을 뛰쳐나온 야사는 붓다께서 머물고 있던 이시빠따나로 오게 되었는데, 붓다는 괴로워하는 야사를 자리에 앉게 한 뒤 다음과 같은 법문을 들려주었습니다.
보시(布施)을 실천하고 계율(戒律)을 준수하면 하늘에 나게 된다. 여러 애욕에는 환난과 공허함과 번뇌가 있기 마련이다. 애욕에서 벗어나면 큰 공덕이 드러난다.7)
이와 같이 붓다가 야사에게 들려준 법문은 보시와 계율, 그리고 생천(生天)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각각 시론(施論), 계론(戒論), 생천론(生天論)이라고 불리는 이들 세 가지를 차제설법(次第說法: 순서대로 설법함)이라 하는데, 특히 재가 신자에 대한 교화의 주된 내용으로 삼았습니다. 시(施)는 보시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갖가지 공덕을 말하고, 계(戒)는 계율을 준수함으로써 얻어지는 질서의 유지라는 두 가지 덕행을 기반으로 하여 도덕적인 선(善)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이 일상 생활을 영위한다면, 사후에는 하늘에 태어날 수 있다는 생천론은 당시 인도의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신봉되고 있었던 사상이므로, 붓다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난해한 교리를 설한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길잡이로써 우선 일반적인 도덕론을 설했던 것입니다.
야사는 이어서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 즉 인간의 괴로움과 그 원인,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과 그에 도달하는 길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일체의 집착에서 떠나 마음속의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다음에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습니다.
3. 재가 신자 – 우바새와 우바이
아들의 출가를 막으려고 뒤쫓아온 야사의 아버지는 아들의 출가를 슬퍼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전하지만, 야사의 결의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장자도 붓다의 설법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 귀의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한 첫 번째 남성 재가 신자, 즉 우빠사까(upāsaka, 優婆塞)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야사의 어머니와 아내도 붓다께 귀의하여 최초의 여성 재가 신자, 즉 우빠시까(upāsika, 優婆夷)가 됩니다. 이렇게 하여 앞서 말한 남성 출가자(比丘)와 함께 상가의 사중(四衆) 가운데서 여성 출가자(比丘尼)를 제외한 기타의 성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출가자가 계를 받고 머리와 수염을 깎아 버리고 황색 가사를 입는 데 대하여, 재가 신자는 계를 지키고 “오늘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 불, 법, 승에 귀의하겠습니다”라는 소위 삼귀의(三歸依)를 외움으로써 불교 신자가 됩니다. 재가 신도는 가정에 거주하면서 출가자 교단을 경제적으로 지탱해 나가도록 뒷받침해 주는 등,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시빠따나에서 이루어진 재가 신자의 귀의는 후에 불교 교단을 성립시키는 데 있어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야사에게는 네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크고 작은 부호의 아들들로서, 비말라(Vimala, 無垢), 수바후(Subāhu, 善臂), 뿐나지(Punnaji, 滿足), 가밤빠띠(Gavampati, 牛王)였습니다. 이들도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습니다.8) 그 뒤 다시 야사가 재가 시절에 사귀었던 50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거나 그 다음 오래된 가문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이들 야사의 친구 50명도 출가하여 교단에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바로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로써 불교교단에는 붓다를 포함하여 61명의 아라한이 있었던 것입니다.9)
4. 전도의 길
이제 붓다는 60명의 제자를 거느리게 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아라한으로서 법을 깨닫고 충분히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역량을 갖추 분이었습니다. 우기(雨期)가 끝나자, 세존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신들과 인간들의 덫으로부터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너희들도 신들과 인간들의 덫으로부터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길을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세상에 대하여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신들과 인간들의 이익, 축복, 행복을 위해서. 둘이서 한 길로 가지 마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뜻과 문장이 훌륭한 법을 설하라. 오로지 깨끗한 청정한 삶을 드러내라. 눈에 티끌 없이 태어난 사람이 있지만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버려지고 있다. 그들은 가르침을 아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도 또한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우루벨라의 세나니 마을로 간다.10)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전도선언(傳道宣言)’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순 한 사람의 아라한이 각기 갈 곳을 정해서 포교활동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때 붓다는 가르침을 펼치기 위해 곧바로 바라나시를 출발하여 붓다 가야로 되돌아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도중에 길에서 좀 떨어진 밀림 속에 들어가 한 나무 아래서 좌선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고장의 상류층 청년 서른 사람이 그 숲으로 놀이를 왔었습니다. 저마다 아내를 데리고 왔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의 독신자는 기녀를 데리고 왔었습니다. 다들 노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그 기녀는 여러 사람의 옷가지와 패물 등을 가지고 도망쳐버렸습니다. 청년들은 허둥지둥 그 뒤를 쫓다가 부처님이 좌선하고 있는 장소에 이르러 부처님에게 물었습니다.
“한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혹시 보지 못하셨습니까?”
“여자를 어떻게 하려는가?”
“이러이러한 사정으로 그 여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때 부처님은 청년들을 돌아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들이여, 여자를 찾는 것과 자기 자신을 찾는 것과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물론 자기 자신의 일이 더 중요합니다.”
“좋다, 그러면 거기들 앉거라.”
이와 같이 해서 서른 사람의 청년들은 부처님께 예배하고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설법을 듣고 모두 즉석에서 출가했습니다. 이리하여 부처님의 새로운 교단은 점점 성장해 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은 입멸하시는 날까지 계속하게 되는 성스러운 전법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과 더불어 부처님께서는 인도의 크고 작은 길을 빠짐없이 두루 편력(遍歷)하시며 무한한 자비와 지혜의 광명으로 그 모든 길을 가득히 채우셨습니다. 처음 승단은 겨우 60여명으로 시작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수천으로 늘어났습니다.11)
초기의 교화활동
녹야원에서의 설법을 계기로 붓다의 교화활동은 급속히 전개되었습니다. 팔리어 [율장(律藏)] 「대품(大品)」에서는 그러한 교화활동 상황을 역사적 순서대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라나시에서 장자(長者)의 아들 야사(Yasa, 耶舍)가 교화를 받고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으며, 그의 부모와 아내도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재가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뒤 야사의 친구 4명과 50명의 옛친구도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불교 교단에는 붓다를 포함하여 61명의 아라한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 때 붓다께서는 저 유명한 ‘전도선언(傳道宣言)’을 단행했던 것입니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전도의 여행을 떠나라고 당부하고, 자신은 홀로 성도지(成道地) 우루벨라(Uruvelā, 優樓頻螺)로 향하였습니다. 붓다께서 우루벨라로 돌아오는 도중에 30명의 젊은이들을 교화하여 제자로 받아들입니다. 30명의 젊은이들은 각자 아내를 거느리고 숲속으로 나들이를 나와 즐겼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은 아내가 아닌 기녀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이 놀이에 빠져 있는 동안 기녀는 그들의 귀중품을 모두 가지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들이 도망간 여인을 찾느라고 소란을 피우고 있을 때, 숲속에서 명상 중이었던 붓다를 발견하고, 붓다께 여인의 행방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도망간 기녀를 찾는 일과 자신을 찾는 일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를 묻고, 그들에게 법을 설하여 교화시켰습니다. 그들은 모두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1. 깟사빠 삼형제
초기불교 교단에서 가장 큰 수확은 깟사빠(Kassapa, 迦葉) 삼형제를 개종시킨 사건일 것입니다. 이들 깟사빠 삼형제는 붓다께서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야(Buddhagayā, 佛陀伽倻, 현재의 보드가야)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시 가장 명성이 높은 종교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일 먼저 이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이들 삼형제 중 첫째는 우루벨라 깟사빠(Uruvelā Kassapa, 優樓頻螺迦葉)입니다. 그는 우루벨라 숲속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불렸는데, 그에게는 500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둘째는 나디 깟사빠(Nadī Kassapa, 那提迦葉)인데, 그는 우루벨라 숲과 가야를 연결하는 네란자라 강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습니다. 팔리어 나디(Nadī)는 강(江) 또는 하(河)이라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300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셋째는 가야 깟사빠(Gayā Kassapa, 伽倻迦葉)입니다. 그는 하류(下流)인 가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는데, 그에게도 200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머리를 땋고 불을 숭배하면서 해탈을 목표로 고행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불의 신 ‘아그니(agni, 火神)’를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사화외도(事火外道) 혹은 배화교도(拜火敎徒)라고 불렸으며, 머리를 땋고 주로 고행하였기 때문에 결발행자(結髮行者) 혹은 결발외도(結髮外道)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 종교의 교리와 수행 내용 등과 같은 자세한 사항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팔리 [율장] 「대품」에는 붓다께서 우루벨라 깟사빠를 신통력으로 교화하는 내용이 아주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은 ‘우루벨라의 신통’으로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경전의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세존께서는 결발의 행자 우루벨라 깟사빠가 머물고 있던 수행처로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깟사빠여, 그대가 불편하지 않다면 나는 오늘 하룻밤을 그대의 화옥(火屋)에서 지내고자 한다.”
“위대한 사문이시여, 저는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흉악하고 신통한 용왕이 살고 있는데, 그 용은 맹렬한 독을 뿜는 독사여서 당신을 해치게 될까 걱정됩니다.”
이렇게 세존께서는 깟사빠에게 세 번 반복하여 간청하였습니다. 그러자 깟사빠는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하였습니다.
여기서 화옥(火屋)이란 불을 섬기는 성화당(聖火堂)을 말하는데, 이곳에 나가(Nāga)가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팔리어 나가(Nāga)는 용(龍), 코끼리(象), 뱀(蛇)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아마 거대한 독을 가진 뱀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드디어 세존께서는 화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풀로 엮은 자리를 깔고 그 위에 가부좌로 앉으신 뒤 몸을 세우고 선정(禪定)에 드셨습니다. 큰 독을 가진 뱀은 세존께서 들어와 계시는 것을 보고는 괴롭고 쓰라린 심정으로 독의 연기를 내뿜었습니다. 세존께서는 생각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이 독을 가진 뱀의 피부와 가죽과 살과 힘줄과 뼈와 골수를 다치지 않게 하면서, 나의 불로써 독뱀의 불을 소멸시켜야겠다.’
세존께서는 신통력으로 연기를 뿜어 내셨습니다. 그러자 독뱀은 분노를 참지 못한 채 불을 뿜었습니다. 세존 역시 화계삼매(火界三昧)에 들어 불을 뿜으셨습니다. 세존과 독뱀, 그 둘이 불꽃에 휩싸이자 성화당 안은 마치 거세게 불타는 것과 같았습니다. 수행자들은 성화당 주위에 모여 말했습니다.
“아, 그 위대한 사문은 참으로 아름다웠는데, 이제 독뱀에게 죽임을 당하는구나.”
세존께서는 피부, 가죽, 살, 힘줄, 뼈, 골수 등 그 어느 것도 다치지 않게 하면서 자신의 불로써 독뱀의 불을 소멸시켰고, 밤이 지나자 그 독뱀을 발우에 담아 우루벨라 깟사빠에게 보여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그대의 독뱀이다. 이 독뱀의 불은 나의 불로 소멸되었다.”
그러자 우루벨라 깟사빠는 생각했습니다.
‘이 위대한 사문의 위력은 참으로 훌륭하다. 이 흉악하고 신통한 독뱀이 맹렬한 독으로 불을 뿜는데도, 그 불을 자신의 불로써 소멸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와 같은 아라한은 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우루벨라 깟사빠는 세존께서 보이신 신통을 보고 존경심을 일으켰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승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루벨라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대한 사문이시여, 여기서 머무십시오. 언제나 제가 당신께 공양 올리겠습니다.”
어느 때 세존께서는 우루벨라 깟사빠의 수행처 근처에 있는 숲에서 지내셨습니다. 그런데 밤이 으슥한 무렵에 사대천왕(四大天王)이 뛰어난 용모를 한 채, 숲 전체를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 왔습니다. 그들은 세존께 공손히 절하고 사방에 서 있었는데, 마치 거대한 불기둥과 같았습니다.
밤이 지나자 우루벨라 깟사빠는 세존께로 다가와서 아뢰었습니다.
“위대한 사문이시여, 때가 되었습니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런데 위대한 사문이시여, 어젯밤에 뛰어난 용모를 한 채, 숲 전체를 밝히면서 당신이 계신 곳으로 와서 공손히 절하고 사방에 서 있던, 거대한 불기둥과 같았던 그들은 누구였습니까?”
“깟사빠여, 그들은 사대천왕으로 법을 듣기 위해 나에게 온 것이다.”
그러자 우루벨라 깟사빠는 생각했습니다.
‘이 위대한 사문의 위력은 참으로 훌륭하다. 사대천왕조차 법을 듣기 위해 그에게 오지 않는가? 그러나 그는 나와 같은 아라한은 되지 못한다.’
세존께서는 우루벨라 깟사빠가 준비한 음식을 드시고는 숲으로 돌아가 머무셨습니다.
그 뒤에도 붓다는 여러 가지 신통력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팔리 [율장] 「대품」에는 3,500가지의 신변(神變), 즉 신통력을 보이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신통력으로써 우루벨라 깟사빠를 계속적으로 압박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쉽게 세존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존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이 어리석은 자는 나를 위대한 사문으로, 그리고 나의 위신력을 진정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자신과 같은 아라한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이 자가 스스로 자신의 생각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해야겠다.’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우루벨라 깟사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깟사빠여, 그대는 아라한도 아니고, 아라한의 경지에 들지도 못했다. 아라한과 아라한의 경지에 들기 위한 도(道)를 그대는 갖추지 못했다.”
그러자 우루벨라 깟사빠는 세존의 발에 머리를 대는 예를 갖추고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깟사빠야, 그대는 500명의 수행자들을 이끌고 있는 최고의 지도자이다. 그대는 그들이 자신들의 생각대로 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루벨라 깟사빠는 수행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나는 저 위대한 사문 곁에서 청정한 수행을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신들의 생각대로 하길 바랍니다.”
“깟사빠여, 우리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저 위대한 사문에게 큰 믿음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만약 깟사빠께서 저 위대한 사문에게 가서 청정한 수행을 하신다면 우리들 모두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행자들은 머리를 깎고, 소지품과 불을 섬기는 제사 도구 등을 모두 물에 떠내려보내고, 세존께 가서 머리를 발에 대는 예를 갖추고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자 합니다.”
“오너라, 비구들이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이렇게 그들은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그때 강의 하류에 살던 나디 깟사빠는 물 위에 머리카락과 짐과 불을 섬기는 제사 도구들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형에게 어떤 재난도 닥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수행자들을 형이 있는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300명의 수행자들과 함께 우루벨라 깟사빠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더 뛰어난 것입니까?”
“그렇다. 이것이 진정 더 뛰어나다.”
그리하여 나디 깟사빠와 그 제자 300명이 세존께 귀의하고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야 깟사빠도 자신의 제자 200명과 함께 세존께 귀의하고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깟사빠 삼형제는 자신들의 제자 1,000명과 함께 모두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약하면, 붓다는 우루벨라에서 결발의 행자였던 우루벨라 깟사빠를 신통력으로써 항복시키고, 나디 깟사빠와 가야 깟사빠 및 이 세 명의 깟사빠가 이끄는 제자 천 명을 귀의시켜 교단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이러한 전승은 마가다국 최대의 도시인 가야로 되돌아 온 붓다께서 전통 힌두교와는 다른 출가자 교단의 지도자와 격렬한 종교 논쟁이나 또는 종교상의 대결을 통해서 그를 물리치고 불교 교단의 기반을 이 지역에 구축해 나간 것을 상징해 주는 것입니다. 불교 교단은 개종자를 흡수하면서 계속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2. 불의 설법
붓다는 이제 6년 전에 마가다국의 국왕 빔비사라와 한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깟사빠 삼형제를 비롯한 천 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마가다의 수도 왕사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왕사성 교외의 가야시사(Gayāsīsa, 伽倻尸沙)에 머물렀습니다.
가야시사는 상두산(象頭山)이라고 한역되었습니다. 현장(玄奘) 스님의 기록에 의하면, 가야시사는 가야성(伽倻城)의 서남(西南) 5-6리(里)에 있었다고 하였고, [우다나]의 주(註)에는 가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못과 내가 있는데 그곳은 세속의 사람들이 악(惡)을 씻어버리는 영장(靈長)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 거기에 한 산이 있는데, 코끼리의 머리와 비슷한 큰 바위가 있어 천 명의 비구를 수용할 수 있어 상두산이라고 불린다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사촌동생 데와닷따(提婆達多)가 부처님을 배반하고 독립한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어느 때 세존께서는 우루벨라에서 좋을 만큼 지내신 뒤, 예전에 결발외도(結髮外道)였던 천 명의 비구들과 함께 가야시사를 향해 떠나셨습니다. 이윽고 가야 지방의 가야시사에 도착하여 천 명의 비구들과 함께 머무셨습니다. 그곳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불타고 있는가? 눈이 불타고 색(色)이 불타고, 안식(眼識)이 불타고, 안촉(眼觸)이 불타고, 안촉에 기대어 발생한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불타고 있다. 무엇으로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타고 노여움의 불로 타고 어리석음의 불로 타고, 출생, 늙음, 죽음, 슬픔, 눈물, 괴로움, 근심, 갈등으로 불탄다. 귀도, 코도, 혀도, 몸도,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비구들이여, 들은 것이 많은 나의 성스러운 제자들은, 이와 같이 보는 까닭에 눈도 싫어하고 색들도 싫어하고 안식도 싫어하고 안촉도 싫어하고 안촉에 기대어 발생한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싫어한다. 귀도, 코도, 혀도, 몸도,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에 대해 탐욕을 제거하고 그들로부터 해탈한다. 그리고 해탈했다는 지혜를 일으킨다.
나의 괴로운 생존은 끝났다.
청정한 수행은 완성되었다.
실천해야 할 바를 모두 실천했다.
다시는 괴로운 생존을 받지 않는다.
이렇게 불의 설법이 베풀어졌을 때, 천 명의 비구들은 집착이 사라져 모든 번뇌에서 해탈하였다.
이것이 저 유명한 ‘불의 설법(燃火經)’입니다. 이 법문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단(壇)을 꾸미고 불을 태워 그 타오르는 화염(火炎) 속에 제사를 지냈던 자들에게 설한 것입니다. 이 법문의 핵심은 외부의 불보다 인간의 내부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더 무서우며, 그 불길을 꺼버리고 해탈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王舍城에서의 敎化
1. 왕사성과 초기불교 교단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는 붓다 당시 인도의 사대강국(四大强國) 중의 하나인 마가다(Magadha, 摩揭陀)국의 수도(首都)였습니다. 라자가하는 당시로서는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는데,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옛 도시는 기릿바자(Giribbaja, 山圍域)로 널리 알려졌던 언덕 위의 요새, 즉 산성(山城)이었습니다. 이 산성은 매우 오래되었으며, 능숙한 건축가였던 마하고빈다(Mahāgovinda)왕이 설계하고 세운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1) 신도시는 산 기슭의 평지에 빔비사라(Bimbisāra)왕이 세웠습니다. 신(新), 구(舊) 도시 모두 기릿바자(Giribbaja)로 불렸습니다. 그 이유는 주위에 빤다바(Pandava, 白善山), 깃자꾸따(Gijjhakūtā, 靈鷲山), 베바라(Vebhāra, 負重山), 이시기리(Isigili, 仙人掘山), 베뿔라(Vepulla, 廣普山) 등 다섯 개의 산으로 둘러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자가하는 붓다의 활동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붓다께서 처음 출가하여 90마일 거리의 아노마(Anomā) 강을 건너 걸어서 라자가하를 방문했습니다. 빔비사라왕은 거리에서 탁발하는 싯다르타를 발견하고, 그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출가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빔비사라왕은 나중에 그가 목적을 이루면 라자가하를 다시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싯다르타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2) 그래서 붓다는 깨달음을 이룬 뒤, 자띨라(Jatila, 結髮外道)를 개종시키고, 가야(Gayā)에서 라자가하로 와서 1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빔비사라왕과 그의 백성들은 붓다를 열렬히 환영했으며, 왕은 붓다와 제자들을 왕궁으로 초대하여 융숭하게 대접했습니다. 붓다께서 왕실 구역 안으로 들어오던 날 삭까(Sakka)는 어린 아이로 변신하여 붓다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대열을 이끌었다고 합니다. 이 첫 번째 방문 때, 빔비사라 왕은 벨루와나(Veluvana, 竹林)를 붓다와 승단에 기증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와 목갈라나(Moggallāna, 目犍連)도 라자가하에서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가장(家長)들이 승단에 합류했는데, 사람들은 붓다가 자신들의 가정을 파괴한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비난은 채 일주일도 넘기기 못하였습니다.
붓다는 라자가하에서 첫 번째 왓사(vassa, 安居)를 보내고, 겨울과 그 이듬해 여름까지 라자가하에서 머물렀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스님들을 뵙기를 원했고, 자신들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붓다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먼저 닥키나기리(Dakkhināgiri)에 갔으며, 이어서 까삘라왓투(Kapilavatthu, 迦毘羅衛城)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붓다방사(Buddhavamsa, 佛種性史)의 주석서에 의하면, 붓다는 세 번째, 네 번째, 열일곱 번째, 스무 번째의 안거를 라자가하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붓다는 20년 동안 라자가하를 중심으로 그의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왓티(Sāvatthī, 舍衛城)를 자신의 본거지로 삼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종종 라자가하를 방문하여 머물었습니다. 많은 율의 규정들도 라자가하에서 제정되었습니다. 붓다는 입멸 직전 마지막으로 라자가하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아자따삿뚜(Ajātasattu, 阿闍世王)는 밧지족(Vajjian)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자신의 성공 여부를 알기 위해 대신 왓사까라(Vassakāra)를 깃자꾸따(Gijjhakūta, 靈鷲山)에 계시던 붓다께 보냈습니다.3)
붓다께서 열반하신 뒤, 마하깟사빠(Mahākassapa, 大迦葉)와 여러 스님들에 의해 제1차 결집을 위한 만남의 장소로써 그들의 본부로 라자가하를 선정했습니다. 제1차 결집은 삿따빤니구하(Sattapanniguhā, 七葉窟)에서 행해졌는데, 아자따삿뚜왕은 진심으로 후원해 주었습니다. 또한 왕은 자신의 몫으로 차지했던 붓다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라자가하에 탑을 세웠습니다.
마하방사(Mahāvamsa, 大史)에 의하면, 약간 후대에 마하깟사빠(대가섭)의 제안에 따라 아자따삿뚜왕은 라자가하의 일곱 장소에 분산하여 보관해 오던 붓다의 사리 중 라마가마(Rāmagāma)에 봉안된 것을 제외하고 모두 거두어 한 곳에 모아 대탑(大塔, Mahāthūpa)를 세웠습니다. 후세의 아소까(Asoka)왕이 세운 사찰과 탑에 봉안된 사리는 모두 대탑에서 꺼낸 것입니다.
라자가하는 붓다 재세시 육대(六大) 도시 가운데 하나였으며, 중요한 무역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의 육대 도시는 라자가하를 포함하여 짬빠(Campa, 앙가의 수도), 사왓티(Sāvatthī, 꼬살라의 수도), 사께따(Sāketa, 고살라의 도시), 꼬삼비(Kosambi, 밤사의 수도), 바라나시(Bārānasī, 까시의 수도) 등입니다.4)
붓다께서 입멸했을 때, 라자가하에는 열 여덟 개의 큰 사원이 있었습니다. 그 후 따뽀다(Tapodā)와 삿삐니(Sappinī) 강의 범람으로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붓다 생존시 라자가하에는 인구가 1억 8천만 명이었는데, 도시 안에 9천만 명이 살았고, 도시 밖에 9천만 명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위생 시설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라자가하의 회계원과 아나타삔디까(Anathapindika, 給孤獨)는 서로 자기들의 여동생과 바꾸어 결혼했습니다. 아나타삔디까는 결혼을 위해 라자가하로 가는 도중에 처음으로 붓다를 만났습니다. 붓다 입멸 후 곧바로 라자가하는 그 중요성과 번영을 모두 잃어버리고 쇠퇴하였습니다. 시수나가(Sisunāga)왕은 수도를 베살리(Vesāli)로 옮겼으며, 깔라소까(Kālāsoka)왕은 다시 빠딸리뿟따(Pataliputta)로 천도(遷都)하였습니다. 빠딸리뿟따는 이미 붓다 당시에 전략상 중요한 장소로 여겨졌던 곳입니다. 중국의 현장(玄奘) 스님이 라자가하를 방문했을 때는 바라문들이 라자가하를 차지하고 있었고, 도시 전체가 매우 황폐화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2. 빔비사라왕과의 만남
붓다는 깟사빠 삼형제를 교화한 다음, 가야시사(Gayāsīsa, 象頭山)를 출발하여 라자가하에 도착했습니다. 붓다는 깟사빠 삼형제를 비룻한 천 명의 제자들과 함께 랏티와눗야나(Latthivanuyyāna, 杖林)의 수빠띳타 쩨띠야(Supatittha cetiya)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마가다국의 세니야 빔비사라(Seniya Bimbisāra)왕은 세존께서 천 명의 비구들과 함께 라자가하에 도착하여 수빠띳따 쩨띠야에 머물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빔비사라왕은 마가다국의 12만 명의 바라문과 장자들을 거느리고 세존을 찾아뵈었습니다. 왕은 세존께 공손히 절하고 한쪽에 앉았습니다.
그때 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저 위대한 사문이 우루벨라 깟사빠(Uruvela Kassapa, 優樓頻螺迦葉)를 모시고 청정한 수행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루벨라 깟사빠가 저 위대한 사문을 모시고 청정한 수행을 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존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우루벨라 깟사빠에게 게송으로 “어찌하여 불에 제사 지내던 일을 그만두게 되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우루벨라 깟사빠는 “제사를 지내는 일에도 즐겁지 않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어깨에 상의를 걸치고 세존의 발에 머리를 대는 예를 갖추고 아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저의 스승이시며, 저는 세존의 제자입니다.”라고 반복하여 아뢰었습니다. 그리하여 12만 명의 바라문과 장자들은 ‘우루벨라 깟사빠가 저 위대한 사문을 모시고 수행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보시를 실천하고 계율을 준수하면 하늘에 나게 된다. 여러 애욕에는 환란과 공허함과 번뇌가 있다. 애욕에서 벗어나면 큰 공덕이 드러난다.”라는 요지의 법문을 설했습니다. 이어서 세존께서는 본래 진실한 고집멸도의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그러자 때 없는 흰 천이 잘 염색되듯이, 빔비사라 왕을 비롯한 11만 명의 바라문과 장자들은 그 자리에서 먼지와 때를 멀리 여윈 법안을 얻었습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때 빔비사라왕은 붓다께 왕자 시절에 자신이 세운 다섯 가지 소원을 모두 이루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섯 가지 소원이란 첫째는 왕위에 오르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 영토에 평등하시며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세존께서 오셨으면 하는 것이고, 셋째는 세존을 모셔 봤으면 하는 것이고, 넷째는 그 세존께서 자기에게 법을 설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세존의 법을 명료하게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빔비사라왕이 붓다를 친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다섯 가지 소원을 모두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빔비사라왕은 붓다를 찬탄한 뒤, 자신을 재가 신자로 받아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는 생명이 다할 때까지 붓다께 귀의하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은 세존과 비구 승단을 내일 왕궁으로 초대하여 공양을 올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붓다는 침묵으로 승낙하였습니다.
다음 날 세존께서는 가사를 두르고 발우를 든 채, 예전에 결발외도였던 천 명의 비구들과 함께 라자가하로 들어갔습니다. 그 장면은 참으로 거룩하고 감동적입니다. [율장(律藏)] 「대품(大品)」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5)
그때 천신들의 왕 삭까(Sakka)가 동자의 모습으로 변한 뒤, 세존이 지도자이신 비구 승단의 선두에 나아가 게송을 읊었다.
“세존께서는 이미 극복했고 해탈하셨네.
세존을 통해 과거 결발외도들도
이미 극복했고 해탈하였네.
금(金)의 고리와 같이 아름다우신 세존께서는
그들과 함께 라자가하로 들어가시네.
세존께서는 이미 벗어났고 해탈하셨네.
세존을 통해 과거 결발외도들도
이미 벗어났고 해탈하였네.
금의 고리와 같이 아름다운신 세존께서는
그들과 함께 라자가하로 들어가시네.
세존께서는 이미 건너셨고 해탈하셨네.
세존을 통해 과거 결발외도들도
이미 건넜고 해탈하였네.
금의 고리와 같이 아름다우신 세존께서는
그들과 함께 라자가하로 들어가시네.
세존께서는 이미 멈추셨고 해탈하셨네.
세존을 통해 과거 결발외도들도
이미 멈추었고 해탈하였네.
금의 고리와 같이 아름다우신 세존께서는
그들과 함께 라자가하로 들어가시네.
열 가지에 거주하고 열 가지 힘이 있고
열 가지 법을 알고 열 가지를 갖추신 세존께서는
천 명의 사람들에 둘러싸여
라자가하로 들어가시네.
사람들은 천신들의 왕 삭까를 보고 말했다.
“아! 저 동자는 너무도 수려하다. 아! 저 동자는 너무도 아름답다. 아! 저 동자는 너무도 매혹적이다. 저 동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 말을 듣고 천신들의 왕 삭까는 그 사람들에게 게송으로 말했다.
확고부동하고 모든 것을 극복했으며
청정하고 세상에 짝할 이 없으며
아라한이고 선서(善逝)이신 세존의 시자(侍者)이다.
세존께서는 빔비사라왕의 거처에 이르러 비구 승단과 함께 준비된 자리에 않으셨다. 왕은 세존을 비롯한 비구 승단을 위해 손수 시중들고 봉사했다. 세존께서 식사를 끝내고 그릇에서 손을 거두시니 왕은 한쪽에 앉았다.
왕은 생각했다.
‘세존께서는 어떤 장소에서 지내셔야 할까?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고, 오고가기에 편하며, 이런저런 목적을 지닌 사람들이 찾아뵙기 좋고, 낮에는 지나치게 붐비지 않고 밤에는 소음이 없고 인적이 드물고, 혼자 지내기에 좋고 좌선하기에 적절한 곳, 바로 그런 곳에 머물러야 하실텐데.’
왕은 다시 생각했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벨루 숲이 있다.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고, 오고 가기에 편리하고, 이런저런 목적을 지닌 사람들이 찾아뵙기 좋고, 낮에는 지나치게 붐비지 않고 밤에는 소음이 없고, 인적이 드물고, 혼자 지내기에 좋고 좌선하기에 적절한 곳이다. 나는 벨루 숲을 세존이 지도자이신 비구 승단에게 승원(僧園)으로 사용하도록 바쳐야겠다.’
그리하여 왕은 왕금으로 만든 병을 세존게 올리면서 말했다.
“세존이시여, 벨루 숲을 세존이 지도자이신 비구 승단에 승원으로 사용하도록 바치고자 합니다.”
세존께서는 승원을 받으셨다. 그리고 다시 빔비사라 왕에게 법을 설하신 뒤 왕이 그것을 받들고 기뻐하는 것을 보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셨다.
세존께서는 이 인연으로 법을 설하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승원을 받기로 하였다.”
Notes:
1) G. P. Malalasekera(ed.),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Oriental Books Reprint Corporation, 1983), Vol. II, p.489, 참조.
2) 出家經(Pabbajja sutta)와 그 주석서 참조.
3) Dīgha-nikāya(PTS), Vol. II, p.72.
4) D. II, p.147.
5) 아래의 번역은 최봉수 옮김, [마하박가1](서울: 時空社, 1998), pp.112-115에서 인용한 것임.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귀의
붓다께서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를 중심으로 교화를 펼치고 계실 때, 라자가하 부근에는 여러 종교 단체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인 산자야 벨랏티뿟따(Sañjaya Belatthiputta)도 250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우빠띳사(Upatissa, 優波帝須)와 꼴리따(Kolita, 俱律陀)라는 두 사람의 수제자(首弟子)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나중에 붓다께 귀의하여 초기불교 교단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와 목갈라나(Moggallāna, 目犍連)입니다.
사리뿟따의 본명은 우빠띳사(Upatissa)였습니다.1) 주석가들은 우빠띳사가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이라고 하지만,2) 다른 곳에서는 나라까(Nāraka)가 그의 마을 이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3) 사리뿟따의 아버지는 바라문 방간따(Vanganta)4)이고, 그의 어머니는 루빠사리(Rūpasāri)입니다. 그가 사리뿟따(사리의 아들)로 불린 것은 그의 어머니 이름 때문이었습니다.5) 우빠띳사라는 이름은 경전들에서 아주 드물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쭌다(Cunda), 우빠세나(Upasena), 레와따(Revata)라는 세 명의 남동생과 짤라(Cāla), 우빠짤라(Upacāla), 시수빠짤라(Sisūpacāla)라는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모두 출가하여 승단에 입단했습니다. 또한 경전에는 그의 숙부와 조카의 이야기도 언급되어 있습니다.6)
목갈라나는 라자가하 근처의 꼴리따가마(Kolitagāma)에서 태어났습니다. 같은 날 사리뿟따도 태어났다고 전합니다.7) 그는 나중에 그의 마을 이름인 꼴리따(Kolita)로 불렸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목갈리(Moggalī) 혹은 목갈라니(Moggallāni)로 불렸던 여성 바라문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마을 촌장이었습니다.8) 그의 이름 목갈라나는 그의 어머니 이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갈라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승단에 너무 많았기 때문에 붓다의 두 번째 제자인 목갈라나는 마하목갈라나(Mahāmoggallāna)로 불렸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라자가하의 축제를 구경하며 함께 즐기고 있었는데, 그들은 문득 백년 후에 이 사람들 중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과연 있을 것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무상(無常)을 느껴, 해탈의 길을 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집을 떠나 육사외도의 하나인 회의론자 산자야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산자야의 문하에서 수행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먼저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달하는 자가 다른 사람에게 반드시 알려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불사라는 말은 오랜 옛날부터 최고의 이상을 표현하는 말로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절대의 경지 또는 해탈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9)
산자야의 두 수제자였던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붓다께 귀의하게 된 것은 불교교단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건입니다.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개종에 관해서는 팔리 『율장(律藏)』「대품(大品)」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10) 그 전후 사정을 요약해서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라자가하의 거리를 거닐고 있던 사리뿟따는 한 사문의 엄숙한 용모와 고요하고도 위엄있는 거동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문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최초의 다섯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앗사지(Assaji, 馬勝)였습니다. 앗사지 비구는 나아가고 물러서고, 앞을 보고 뒤를 보고, 굽히고 펴는 것이 의젓하였고, 눈은 땅을 향하여 훌륭한 몸가짐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사리뿟따는 이러한 앗사지 비구의 위의(威儀)에 크게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앗사지 비구의 걸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벗이여, 당신의 모습은 우아하고, 당신의 눈빛은 맑게 빛납니다. 벗이여, 당신은 누구에게 출가하였으며,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며, 누구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까?”
“벗이여, 사캬족 가문(Sakyakulā)의 사캬의 아들(Sakyaputta)로서 출가한 위대한 사문이 있습니다. 그 분은 세존이십니다. 나는 세존에게 출가하였으며, 세존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며, 세존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대의 스승께서는 무엇을 설하십니까?”
“벗이여, 저는 어리고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법과 계율에 대해서는 배움이 짧습니다. 저는 세존의 가르침을 자세히 가르쳐 줄 수는 없고 다만 간략한 의미만을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앗사지 비구는 사리뿟따에게 법문(法門, dhammapariyāyam)을 설하였습니다.
“모든 법은 인(因)으로 말미암아 생긴다.
여래께서는 이 인(因)을 설하시었다.
모든 법의 소멸에 대해서도
위대한 사문은 그와 같다고 설하시었다.”11)
(諸法從緣起 如來說是因 彼法因緣塵 是大沙門說.)
사리뿟따는 이 법문을 듣고 먼지와 때를 멀리 여윈 법안(法眼)을 얻었습니다. 곧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는 것’12)이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깨달음의 첫 단계인 예류과(預流果, sotāpanna)를 성취하였습니다. 그리고 게송을 읊었습니다.
“비록 이것뿐이라고 하여도 이것은 바른 법이다.
수만 겁(劫)을 헤매어도 보지 못하였던
슬픔 없는 이 법구(法句)를 그대들은 깨달았네.”13)
사리뿟따는 목갈라나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앗사지 비구를 만난 사실과 가르침을 받은 내용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목갈라나 역시 친구가 전해주는 게송을 듣고서 곧바로 깨침의 첫 단계를 얻었습니다. 이때 목갈라나는 사리뿟따에게 말했습니다.
“벗이여, 우리 세존의 곁으로 갑시다. 세존만이 우리의 스승입니다. 그런데 벗이여, 250명의 유행자(遊行者)들이 우리를 의지하며 여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정을 알려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합시다.”
이러한 말을 전해들은 다른 동료들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들은 그대들에게 의지하며 여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만약 그대들이 저 위대한 사문에게 가서 청정한 수행을 하신다면 저희들도 모두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때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산자야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저희들은 세존의 곁으로 갑니다. 세존만이 저희들의 스승입니다.”
그러자 산자야는 “안된다. 가지 마라. 우리 셋이 함께 이 무리를 보살피도록 하자.”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250명의 유행자들을 이끌고 벨루와나(Veluvana, 竹林)를 향해 떠났습니다. 산자야는 그곳에서 뜨거운 피를 토했습니다.
세존께서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저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저기에 오고 있는 두 사람은 꼴리따(Kolita)와 우빠띳사(Upatissa)이다. 그들은 가장 뛰어나고 현명한 나의 한 쌍의 제자가 될 것이다.”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세존께서 계신 곳에 이르러 세존의 발에 자신들의 머리를 대는 예를 갖추고 아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오너라. 비구들이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이렇게 그들은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산자야의 제자들 중에서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부처님에게 귀의한 것은 불교교단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후에 불교교단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널리 포교하였기 때문입니다.14)
위에서 언급한 앗사지가 전한 붓다의 가르침은 게송(偈頌)의 형식으로 전하는데 매우 유명한 것입니다. 물론 그 게송의 형식이 앗사지가 말한 그대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부처님의 가르침의 중심 골자가 들어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게송은 후대에 매우 중요시되어 법신게(法身偈) 또는 법사리(法舍利)라고 불리어지게 되었습니다.15) 여러 불전(佛典)에는 이 게송이 조금씩 다른 형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16)
붓다께서는 제자가 된 이들 두 사람을 모든 제자의 상좌(上座, 윗자리)에 두었습니다. 이는 하루라도 일찍 교단에 들어온 자를 상좌에 두는 전통에 어긋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고참 비구들로부터의 불평이 많이 있었지만 붓다는 이들을 잘 달랬다고 합니다. 이 일은 두 사람이 얼마나 뛰어난 자질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가 하는 사실을 잘 나타내 줍니다.
사리뿟따는 부처님을 모시고 수행하는 중 자기를 부처님께 인도해 준 앗사지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어서 일생동안 앗사지가 있는 쪽으로는 다리를 뻗고 자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리뿟따는 방위(方位)를 믿는 이교도(異敎徒)라는 비난이 생길 정도였다고 합니다.17)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두 사람이 부처님게 귀의한 이래 부처님의 명성(名聲)은 더욱 높아지고 라자가하의 명문 자제로서 출가하는 사람의 수효가 점점 늘어갔습니다. 그 때문에 ‘고따마 사문은 부모에게서 자식을 빼앗아 가고, 아내로부터 남편을 빼앗아 가고, 집안의 혈통을 끊는 자’라는 비난마저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한 때 그 제자들의 탁발까지도 어려운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법(正法)을 가르치는 부처님의 숙연한 태도에 그 비난의 소리도 점차 가라앉아 교세(敎勢)는 더욱 늘어가기만 하였습니다.18)
사리뿟따는 ‘지혜제일(智慧第一)’이라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갖가지 지식에 통하고 통찰력도 뛰어났으며, 더욱이 교단의 통솔에도 빼어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경전 가운데도 세존을 대신해서 사리뿟따가 교리를 상세하게 설하고, 붓다께서 그것을 추인하는 형식이 가끔 보입니다.
목갈라나는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고 불리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습니다. 어느 날 그의 안색이 너무나 좋아서 사리뿟따가 그 이유를 물은 즉, “오늘 나는 붓다와 법담(法談)을 나누었는데, 붓다와 내가 모두 천안천이(天眼天耳)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신통력은 붓다와 동등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 그는 가끔 쁘레따(preta, P. peta, 餓鬼)를 보고 웃곤 했는데, 그 이유를 묻는 이에게 쁘레따에 대해 설명했다고 합니다. 쁘레따는 보통 사람은 볼 수 없는 조상의 영혼이나 전세에 지은 악업의 대가로 기아와 갈증에 시달리며 배회하는 귀신을 뜻합니다. 또 마리지(摩利支) 세계에 살고 있는 죽은 모친을 천안으로 보고서, 그곳으로부터 모친을 구출했다고도 합니다. 이것이 소위 목련구모(目連救母)의 전설인데, 이것은 중국 등지에서 거행되는 우란분(盂蘭盆; 지옥에 떨어진 이의 혹심한 괴로움을 구원하기 위하여 닦는 법)이나 시아귀회(施餓鬼會; 굶주림에 고통 받는 망령을 위안하기 위하여 베풀어 주는 법회)에서의 인연 설화의 기원이 되고 있습니다.19)
목갈라나는 붓다와 함께 사왓티(Sāvatthi, 舍衛城) 교외의 미가라마뚜빠사다(Migāramātupāsāda, 鹿子母 講堂)에 있을 때, 많은 비구들이 단정치 못한 자세로 잡담을 즐기는 광경을 보고, 신통력을 써서 발가락으로 강당을 흔들었기 때문에 비구들이 놀라서 도망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20) 또 모여든 비구 중에 부정한 자가 있음을 알고 그의 팔을 잡아 축출해냈다고도 합니다. 그는 아난다, 사리뿟따와 함께 교단 내부의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므로, 교단의 통제를 위해서도 그는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21)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모두 붓다께서 열반에 드시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붓다보다 먼저 입멸했다고 전해집니다. 두 사람 모두가 붓다보다 나이가 많았고, 또 붓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은 사실입니다. 붓다 자신도 “두 사람의 죽음으로 모든 비구들이 허전해 하는 것 같다”라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사리뿟따의 죽음을 애도하는 목갈라나의 게(偈)가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사리뿟따가 먼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생각됩니다.22)
현장은 라자가하와 날란다의 중간 지점에서 사리뿟따의 출생지로 알려진 카라피나카 마을을 찾아 스투파에 참배했다고 하며, 목갈라나의 고향인 꼴리따 마을의 스투파에도 참배했다고 합니다.23)
사리뿟따는 고향 나라까 마을에서 시종이기도 했던 동생 쭌다의 임종 간호를 받으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쭌다는 그 유골과 남긴 주발, 입었던 가사 등을 가지고 사왓티에 체류 중이던 붓다 앞에 이르러, 아난다와 함께 그의 죽음을 알렸습니다. 붓다는 그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했다고 합니다. 현장은 이 두 제자가 모두 자신의 출생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법현은 마투라에 사리불탑과 목련탑이 있었다고 전하고, 현장도 그곳에서 목건련과 그 밖의 다른 불제자의 사리탑에 참배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24)
Notes:
1) Majjhima-nikāya(PTS), Vol. I, p.150.
2) Dhammapadatthakathā(PTS), Vol. I, p.88ff; Anguttaratthakathā(PTS), Vol. I, p.155ff;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third edition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49), pp.84-85.
3) Satipatthāna Samyutta의 Cunda Sutta와 그 주석서에 의하면, 사리뿟따의 탄생지는 나라까(Nālaka) 혹은 Nālagāma로 되어 있다. 이 이름은 저 유명한 나란다(Nālanda)와 매우 가깝다. Nyanaponika Thera, The Life of Sariputta, The Wheel Publication No. 90-92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66), p.7 No.1.
4) Dhammapadatthakathā(PTS), Vol. II, p.84.
5) Sanskrit 경전들에서는 그의 이름이 Sāriputra, Śāliputra, Śārisuta, Sāradvatīputra로 나타난다. 또한 譬喩經(Apadāna, II, p.480)에서는 Sārisambhava라고 불렸다.
6)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Oriental Books Reprint Corperation, 1983), Vol. II, p.1109.
7)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95.
8)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II, p.541.
9)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샘터, 1990), p.186.
10) Vinaya Pitaka(=Vin.) Vol. I, pp.39-44.
11) “Ye dhammā hetuppabhavā/ tesam hetum tathāgato āha/ tesañ ca yo nirodho/ evamvādī mahāsamano.” <Vin. I, p.40.>
12) “생겨난 것은 소멸하는 것”이라는 말은 팔리어 “yam kiñci samudayadhammam sabbam tam nirodhadhammam”를 번역한 것이다.
13) “es’eva dhammo yadi tāvad eva paccavyathā padam asokam adittham abbhatitam bahukehi kappanahutehīti.” <Vin. I, p.40.>
14) 스가누마 아키라 지음, 편집부 옮김, 『부처님과 그 제자들』(서울: 봉은사출판부, 1991), p.107.
15) 이기영, 『석가』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지문각, 1965), p.155.
16) 四分律 33: “如來說因緣生法 亦說因緣滅法 若法所因生如來說是因 若法所因滅大沙門亦說是義 若法此是我師說..”; 五分律: “我師說法從緣生 亦從緣滅 一切諸法空無有主.”; 因果經 4: “一切諸法本因緣生無主 若能解此者卽得眞實道.”; 佛本行集經: “諸法因生者 從法隨因滅 因緣滅卽道 大師說如是.”; 大智度論 18: “諸法從緣生 是法緣及晝 我師大聖主 是義如是說.”; 南海寄歸傳 4: “若法종從緣起 如來說是因 彼法因緣滅 是大沙門說.”
17) 이기영, 『석가』, p.157.
18) 이기영, 『석가』, p.157-158.
19)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서울: 김영사, 1984), p.217.
20) Pasādakapana sutta(S. V. 269ff.; Utthāma sutta, SNA. I. 336f.).
21)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217.
22)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218.
23)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218.
24)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218.
디가나카와 마하까싸빠의 귀의
붓다께서 성도한 이후의 행적은 팔리어 『율장(律藏)』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헌에는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와 목갈라나(Moggallāna, 目犍連)가 250명의 무리와 함께 붓다께 귀의하여 교단에 들어왔다는 사실까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대 불전(佛傳)에는 계속하여 디가나카(Dīghanakha, 長爪)와 마하까싸빠(Mahā Kassapa, 大迦葉)의 귀의나 고향인 까삘라밧투(Kapilavatthu, 迦毘羅衛城)을 방문하여 사캬족(Sakya, 釋迦族)을 교화했다는 사실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행적을 편년사적(編年史的)으로 더듬어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후 상세한 내용이 알려지고 있는 것은 입멸 전후의 사건뿐입니다.1)
1) 디가나카의 귀의
역사적으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불교교단에 들어온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붓다께 귀의한 사람은 디가나카(Dīghanakha, 長爪)였습니다. 디가나카는 사리뿟따의 조카로서2) 숙부인 사리뿟따가 붓다께 귀의한지 겨우 반달이 지났을 때 붓다를 친견했습니다.3) 팔리어 디가나카(Dīghanakha)라는 말은 ‘긴 손톱’이라는 뜻이며, 한역에서는 장조(長爪)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마 손톱을 깍지 않고 길게 길렀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바라문 가문의 출신자였지만 바라문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던 회의주의자 혹은 절멸주의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라문의 전통에서 보면 이단자였던 것입니다.4) 불교 경전에서는 그를 편력자(遍歷者)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디가나카는 그의 숙부 사리뿟따가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대체 붓다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보려고 붓다를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수까라카따(Sūkarakhatā, 豚崛洞, ‘멧돼지 동굴’이라는 뜻)에서 처음으로 붓다를 친견했습니다.5) 디가나카와 붓다의 대화는 팔리어로 씌어진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 中部) 제74경 디가나카 숫따(Dīghanakha Sutta, 長爪經)6)에 실려 있습니다. 이 팔리어 경전과 대응하는 한역은 잡아함경(雜阿含經) 34권 장조경(長爪經)7)과 별역잡아함경 11권 5경8)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전들에 의하면, 그는 붓다를 친견한 뒤 곧바로 “나는 일체의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라고 자신의 회의주의적인 생각을 피력하였습니다. 그러자 붓다께서는 “당신은 그 인정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붓다는 “주의주장에는 일체를 긍정하는 것, 일체를 부정하는 것, 일부를 긍정하는 것, 일부를 부정하는 것이 있으나, 이 중 일체를 긍정하는 견해는 탐욕과 계박(繫縛)과 집착에 가깝고, 또 일체를 부정하는 견해는 적이 생기고 장애가 나타나므로 이 두 견해는 모두 다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9)
이 경전에서 붓다는 그를 악기베싸나(Aggivessana, 火種)10)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한역 『장조경』에 의하면, 붓다의 설법을 듣고 디가나카는 “티끌과 때를 멀리 떠나 진리의 눈이 깨끗하게 되어, 법을 보아 법을 얻고 법을 깨달아 법에 들어갔다. 모든 의혹을 끊되 남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바른 법, 율에 들어가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11)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붓다로부터 구족계를 받아 비구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는 “곧 선래(善來)비구가 되어 ‘착한 남자로서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바른 믿음으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는 까닭’을 생각하고 내지,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12)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팔리어 『디가나카 숫따』에서는 그가 붓다의 설법을 듣고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 재가불자가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13) 다시 말해서 남전의 팔리어 경전에서는 디가나카(長爪)가 붓다의 설법을 듣고 재가 신자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북전의 한역 아함경에서는 그가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전승이 역사적으로 더 정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마하까싸빠의 귀의
붓다께서 입멸하신 뒤 실제로 교단을 이끌었던 마하까싸빠(Mahā Kassapa, 大迦葉)가 붓다의 제자가 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마하까싸빠는 붓다의 저명한 제자 가운데 한 분이며, 가장 엄격한 두타행(頭陀行, dhutavādānam)14)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에 ‘두타제일(頭陀第一)’ 혹은 ‘행법 제일(行法第一)’이라고 불리었습니다.
마하까싸빠는 마가다국의 마하띳타(Mahātittha) 바라문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까삘라(Kapila) 바라문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수마나데비(Sumanādevī)였습니다.15) 그의 어릴 때 이름은 삡빨리(Pippali)였습니다. 그가 성장했을 때 그의 부모들은 결혼하기를 원했으나 그는 결혼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부모들의 강요를 회피하기 위해 그는 아름다운 황금 인형을 만들어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한다면 결혼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모들은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그러한 조건을 갖춘 밧다 까삘라니(Bhaddā Kāpilānī)라는 여인을 사가라(Sāgala)에서 찾아냈습니다. 두 사람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비록 결혼하지만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겠다고 서로 약속했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이틀 밤을 함께 지냈지만 꽃으로 만든 사슬을 경계로 서로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삡빨리는 막대한 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혼자서 많은 양의 향료를 사용했습니다. 그가 소유한 토지는 엄청나게 광대하였습니다. 그 토지에 농사를 짓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열여섯이었다고 합니다.16)
어느 날 그가 들에 나가서 농부들이 밭갈이 할 때, 기어 나오는 벌레들을 새들이 쪼아 먹는 것을 보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저토록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소유한 모든 재산을 버리고 출가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같은 시간 그의 아내 밧다(Bhaddā)도 까마귀가 작은 벌레들을 잡아먹고, 이 때 밖으로 뛰어나온 씨앗들이 말라죽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모든 생물들이 생명을 잃는 아픔을 생각하며, 그녀도 출가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17)
남편과 아내가 서로 의견이 일치하였습니다. 둘은 함께 출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각자 머리를 깎고 황색 가사로 갈아입고, 발우를 들고 길을 떠났습니다. 함께 같이 길을 걷다가 교차로에 도착하여 서로에게 장애가 될 것을 염려하여 남편은 오른쪽으로 아내는 왼쪽으로 떠났다고 합니다.18)
아내와 헤어져서 혼자서 여행을 계속하던 삡빨리는 어느 날 붓다를 친견하게 됩니다. 그때 붓다께서는 벨루와나(Veluvana, 竹林精舍)의 간다꾸띠(Gandhakuti, 香室, 부처님의 거실)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런데 붓다께서는 지진이 일어날 징후를 아시고, 세 가부따(gāvuta, 길이의 단위, 1/4 由旬)19)를 걸으신 다음, 라자가하(Rājagaha)와 나란다(Nālandā) 사이에 있는 바후뿟따까(Bahuputtaka, 多子) 니그로다(Nigrodha, 榕樹) 나무 밑에 앉으셨습니다. 이 여행으로 붓다의 명성은 더욱 빛이 났다고 합니다. 삡빨리(이제부터는 마하 까쌋빠라고 부른다)20)는 붓다를 발견하고, 곧바로 붓다를 자신의 스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붓다께서 그를 굴복시키기 전에 그는 이미 붓다의 위대함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그를 자리에 앉도록 하고 세 가지 설교를 한 다음, 그에게 구족계를 주었습니다.21)
붓다와 함께 라자가하로 돌아오던 마하까싸빠는 자신의 몸이 위대한 성자의 상징인 32호상 가운데 일곱 가지가 갖추어져 있음을 알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붓다는 길옆의 어느 나무 아래 앉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마하까싸빠는 자신의 가사를 접어 붓다께서 앉을 수 있도록 바닥에 갈아드렸습니다. 붓다께서 그곳에 앉으신 다음, 그 가사를 만져보시고 매우 부드럽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마하까싸빠는 자신의 가사를 세존께서 받아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면 너는 무엇을 입지?”라고 붓다께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까싸빠는 붓다께서 입고 계시는 누더기 가사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사용하여 빛이 바랬다”라고 붓다께서 말씀하였으나, 까싸빠는 전세계에서 이것이 최상이라고 찬양하고, 가사를 교환했습니다.22) 보통 사람들은 붓다께서 벗어버린 가사를 입기에 적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까싸빠의 공덕에 의하여 다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까싸빠는 이것을 매우 영예롭게 생각했으며, 자기 스스로 열세 가지 명세들[dhutagunā, 頭陀의 德]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으며, 그리고 8일 뒤 아라한이 되었습니다.23)
마하까싸빠는 두타제일로 불리는 것과 같이 엄격함을 지니고 살았으며 부처님이 입멸한 후의 불교교단에 중심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우루벨라 까싸빠(Uruvela Kassapa), 나디 까싸빠(Nadi Kassapa), 가야 까싸빠(Gayā Kassapa) 등 까싸빠 삼형제와 구별하기 위하여 마하까싸빠(Mahā Kassapa, 大迦葉)로 불리어졌습니다. 그에 관한 전기는 남, 북 양전에 달리 나타나지만, 애욕이 부정한 것임을 알아 아내를 맞이해도 끝내 육체관계를 멀리 했으며, 아내와 함께 출가를 했다는 점에선 남전과 북전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 나와 있으며, 그에 관한 시구가 『테라가타(Theragāthā, 長老偈)』제1051-1090게(偈)에 전하고 있습니다.24)
북전에 의하면 마하까싸빠와 헤어진 아내는 외도의 수행자 밑에 있었지만, 부처님의 교단에 비구니의 출가가 허용되었을 때 마하까싸빠가 아내의 일이 염려되어 천안(天眼)으로 그녀의 소재를 알고 비구니 한 사람을 시켜서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비구니 교단에 들어온 그녀는 비구니 교단의 수석이었던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i Gotami)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꾸준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얼마 안 있어 불제자로서 최고의 경지인 아라한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25)
마하까싸빠는 언제나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누르고 간소한 생활 규율(頭陀行)을 지켰습니다. 붓다께서 당신은 이미 늙었으니 부드러운 옷을 입고 신자의 초대를 받으면서 나의 곁에 있으라고 권했을 때도 그는 이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또 언젠가 그는 지난날 함께 수도를 하던 동료가 환속을 하여 도적질을 하다가 체포당해서 형장으로 끌려갈 때, 곧 달려가서 여러 가지로 훈계를 하여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형리의 무기를 두려워하지 않아, 당시의 왕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평소 마하까싸빠가 어떻게 생활했는가는 그가 남긴 시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래으 시들은 그가 남긴 시구 가운데 일부입니다.
“나는 침상에서 내려와 시내로 탁발을 나갔다. 밥을 먹고 있는 한 문둥병자에게 가, 그의 곁에 가만히 섰다.”<1054게>
“그는 문드러진 손으로 덩이의 밥을 주었다. 발우 안에 밥을 담아줄 때, 마침 그의 문드러진 손가락이 ‘툭’하고 그 안에 떨어졌다.”<1055게>
“담 벽 아래에서 나는 그가 준 밥을 먹었다. 그것을 먹고 있는 동안,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내게는 혐오스러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1056게>
“문전에 서서 탁발로 얻은 것을 양식으로 삼고, 소 따위의 냄새나는 오줌으로 만든 것을 약으로 삼으며, 나무 밑을 침상으로, 누더기 기운 것을 옷으로 삼아, 그것만으로 만족해하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사방(四方)의 사람26)이다.”<1057게>
이처럼 마하까싸빠는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된 이후, 철저한 두타행을 실천함으로써 승가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후대의 대승불교에서는 그가 붓다의 정법(正法)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존께서 입멸 하신 뒤 세존의 유해를 넣은 관은 마하까싸빠가 도착할 때까지 아무리 해도 불이 붙지 않아서 다비를 행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붓다께서 열반에 든 직후, 교단의 동요와 분열을 염려한 그는 아난다와 함께 비구들을 라자가하의 칠엽굴에 모이게 하고, 세존의 바른 가르침을 확인하기 위한 이른바 제1차 결집을 거행하였습니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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