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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3) 21칙 ~ 30칙

벽암록 21칙 지문화상과 연꽃 “연꽃과 연잎은 不二…불심과 중생심도 하나” {벽암록} 제21칙에는 지문(智門) 화상에게 연꽃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지문 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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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021則]蓮花荷葉
〈垂示〉垂示云。建法幢立宗旨。錦上鋪花。脫籠頭卸角馱。太平時節或若辨得格外句。擧一明三。其或未然。依舊伏聽處分。
〈本則〉擧。僧問智門。蓮花未出水時如何。智門云。蓮花。僧云。出水後如何。門云。荷葉。
〈頌〉蓮花荷葉報君知。出水何如未出時。江北江南問王老。一狐疑了一狐疑。

벽암록 21칙 지문화상과 연꽃

“연꽃과 연잎은 不二…불심과 중생심도 하나”

{벽암록} 제21칙에는 지문(智門) 화상에게 연꽃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지문 화상에게 질문했다. "연꽃이 물 속에서 꽃이 피지 않았을 때는 무엇입니까?" 지문 화상이 대답했다. "연꽃이다" "연꽃이 물 밖으로 꽃이 피어 나왔을 때는 무엇입니까?" "연잎(荷葉)이다"

擧. 僧問智問, 蓮華未出水時如何. 智問云, 蓮華. 僧云, 出水後如何. 門云, 荷葉.


망념을 비우면 그것이 곧 보리(菩提)
대승불교와 선사상은 '일치'

송대의 선승 지문광조(智門光祚)화상에 대해서는 {연등회요} 제27권, {오등회원} 15권 등에 약간의 법문을 수록하고 있다. {지문광조선사어록}도 전하고 있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지문화상은 운문 선사의 제자인 향림징원(香林澄遠) 선사를 멀리 사천 익주까지 찾아가 참문하여 운문종의 정법을 계승하고, 호북성 수주의 지문사에 수행자를 지도하였으며, 그의 문하에 {벽암록}의 '송고(頌古)'를 지은 설두화상을 비롯하여 30여명의 선지식을 배출하였다.

어떤 스님이 지문화상에게 "연꽃이 물 속에서 꽃이 피지 않았을 때는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요?"라고 질문했다. 아마 연못가에서 연꽃을 쳐다보며 나눈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선문답을 사물을 제시하여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는 차사문의(借事問義)라고 한다. 연꽃이라는 사물을 차용하여 불법의 근본(본래면목)을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연꽃에 의미를 두고 이 선문답을 이해하려고 하면 연꽃이라는 경계에 떨어진 중생이 된다.

'연꽃이 물 속에서 꽃이 피기 이전(未出水)'은 즉 진실된 자기의 본래면목을 자각하지 못한 순수한 범부의 경지는 어떠한가? 우리들은 진실의 자기 본래면목을 자각하기 이전의 모습은 어떠한가? 중생이 본래 구족하고 있는 불성은 어디서나 있는 것이다. {열반경}은 "불성은 본래 있었고, 지금도 있다(本有今有)"고 말하고 있다. 즉,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을 구족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

원오도 '평창'에서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기 전은 어떻습니까? 우두법융선사가 사조도신을 뵙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반석(斑石)에 혼돈이 나뉘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차별심(중생심)이 일어나기 이전의 불성을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선문답에서 자주 제기하는 '부(父)'나 '모(母)'라는 상대적인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父母未生以前]의 소식을 질문하고 있다. 천(天)과 지(地)라는 차별적인 분별의식이 일어나기 이전의 근원적인 자기의 불성에 대한 질문이다.

그러나 연꽃이 물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밖으로 들어나 있지 않기 때문에 불성을 직접 보고 확인 할 수가 없다. 이때 만약 방편의 언구를 사용하면 이미 상대적인 차별에 떨어지고 만다. 이 질문은 근원적인 불성의 본체에 대한 지문화상의 안목을 시험하는 질문인 것이다. 그런데 지문 화상은 "연꽃(蓮華)"이라고 대답했다. 질문한 스님은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불성의 실재를 질문했는데, 지문화상은 연꽃이라는 사물의 현상으로 대답하고 있다.

그러자 그 스님은 연꽃이 피어 물 밖으로 나온 이후(出水)는 무엇입니까? 앞의 질문과 반대로 현상의 입장에서 추궁하고 있다. 질문한 스님은 연꽃이 물속에 있을 때와 물 밖에 나왔을 때, 즉 '미출수(未出水)와 출수(出水)' 양변의 상대적인 분별과 차별상에 집착되어 있는 질문이다.

불성을 깨닫기 이전의 본래면목과 깨닫고 난 이후는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차별심을 가지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오는 이 스님의 질문이 미오(迷悟)의 차별심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귀신의 소굴에서 지혜작용이 없는 살림살이 하지 말라!"고 주의 주고 있다.

이 스님은 아마도 당(唐) 규기(窺基)의 {법화현찬(法華玄贊)} 제2권에서 연꽃이 물 속에서 꽃피지 않았을 때와 꽃이 피어 물 밖으로 나왔을 때, 두 가지 이름이 따로 따로 있다는 주장을 근거로 하여 질문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지문 화상은 "연잎(荷葉)"이라고 대답했다. 연꽃이 피어 물 밖으로 들어 나지 않았을 때도 연잎은 항상 물 밖에 드러내고 있다. 연꽃과 연잎은 같은 것인가? 지문 화상이 "연잎"이라는 대답에 대하여 원오는 "유주(幽州)지방은 그래도 괜찮은데 가장 힘든 곳은 강남(江南)"이라고 착어(着語, 선에서 비평하는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북송말 흠종(欽宗)시대에 정강(靖康)의 사변으로 잘 알려진 고사를 말한다. 즉 송대의 조정이 오랑캐의 침략으로 북쪽의 하북(河北) 하남(河南)의 지방을 빼앗기고 남쪽의 강남(江南)으로 도망 왔지만, 계속된 오랑캐(금나라)의 약탈과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옛날 유주의 굴욕은 그래도 견딜 만 한 일이었는데, 뒤에 강남의 굴욕은 참기 어려운 일이라는 당시의 소문을 인용하여 착어한 것이다.

즉 스님의 첫 번째 질문에 지문 화상이 "연꽃"이라고 대답한 것은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대답이었지만, 두 번째 질문에 "연잎"이라고 대답한 말은 쉽게 알 수 있는 말이 아니니 수행자는 특별히 주의하여 정신차려 참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보이지 않는 물속의 연꽃이 근원적인 불성을 의미하는 대답이라면, 물 밖의 연잎은 번뇌 망념의 중생심이다. 연꽃과 연잎이 둘이 아닌 것처럼, 불심과 중생심은 둘이 아니다. 그런데 질문한 스님은 연꽃과 연잎을 둘로 보는 차별심에 떨어져 있다. 즉 중생심과 불심, 생사와 열반을 다르게 보는 것이다. 지문화상은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는 {열반경}의 사상을 체득한 입장에서 질문자가 교학에서 주장하는 연꽃의 두 가지 이름과 출수(出水)와 미출수(未出水)의 두 견해(二見)의 차별을 벗어나 일체중생의 불성이 본체(연꽃)와 현상(연잎)이 하나라는 사실을 통해서 불성의 참된 의미를 체득하도록 제시하고 있다.

{유마경}은 '번뇌가 그대로 깨달음(보리)'이며 '생사심(生死心)이 그대로 열반의 경지'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대승불교의 정신을 잘 새겨 체득해야 한다. 중생의 번뇌를 텅 비우면 번뇌가 없어진 그대로가 깨달음의 불심이며, 중생의 생사 망념을 텅 비우면 그대로 열반적정의 경지를 체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번뇌 망념을 텅 비우는 공(空)의 법문을 설하고 있다.

{신회어록}에도 불심과 중생심을 질문하는 사람에게 "중생심(衆生心)이 불심(佛心)이며, 불심이 중생심"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불심과 중생심을 둘이라고 보고 나누는 것이 차별심이며 중생이다. 연꽃과 연잎이 둘로 보는 것은 현상의 사물에 떨어진 중생심이다. 불심과 중생심은 다른 것이 아니며(不異), 연꽃과 연잎은 둘이 아닌 것(不二)이라는 사실을 체득해야 한다.

설두는 이 공안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읊고 있다. "지문화상이 연꽃과 연잎으로 질문한 스님에게 잘 가르쳐 주었네" 즉 지문 화상은 질문한 스님에게 연꽃과 연잎, 자기와 남의 차별심을 초월하여 일체 만법과 하나 된 불법의 본체 묘용을 잘 제시한 법문이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원오도 "지문 화상은 노파심이 간절했다"고 착어(着語)하고 있다. 그리고 "(연꽃이) 물 밖으로 나왔을 때와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때는 어떠한가?"라는 분별심에 사로잡힌 스님의 질문에 대하여 원오는 "진흙 속에서 흙덩이를 씻는구나"라고 착어함으로써,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잘 사유하고 음미해서 참구해야 한다고 주의하고 있다. '강북과 강남의 여러 선지식(王老)에게 묻고 물어, 의심하고 또다시 의심하는군'이라는 말은 지문 화상이 친절하게 분별심으로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고 했는데, 질문자가 잘 사유하여 체득하지 못하고 강북과 강남의 여러 선지식을 찾아서 돌아다니며, 이렇쿵 저렇쿵 사량 분별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더욱 많은 의심과 분별심에 떨어진 중생이 되고 만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第022則]南山鼈鼻蛇
〈垂示〉垂示云。大方無外細若鄰虛。擒縱非他。卷舒在我。必欲解粘去縛。直須削跡呑聲。人人坐斷要津。箇箇壁立千仞。且道是什麽人境界。試擧看。
〈本則〉擧。雪峰示衆云。南山有一條鱉鼻蛇。汝等諸人。切須好看。長慶云。今日堂中。大有人喪身失命。僧擧似玄沙。玄沙云。須是稜兄始得。雖然如此。我卽不恁麽。僧云。和尙作麽生。玄沙云。用南山作什麽。雲門以拄杖。攛向雪峰面前。作怕勢。
〈頌〉象骨巖高人不到。到者須是弄蛇手。稜師備師不柰何。喪身失命有多少。韶陽知。重撥草。南北東西無處討。忽然突出拄杖頭。抛對雪峰大張口。大張口兮同閃電。剔起眉毛還不見。如今藏在乳峰前。來者一一看方便。師高聲喝云。看脚下。

벽암록 22칙 설봉화상과 독사 이야기

“진리는 남산에만 있지 않고 천지에 가득”


{벽암록} 제22칙은 설봉 화상이 맹독의 독사를 제기하여 다음과 같이 법문하고 있다.

설봉 화상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남산에 맹독을 가진 독사(鼈鼻蛇)가 한 마리 있다. 그대들은 조심하도록 하라" 장경혜능이 말했다. "오늘 이 법당 안에 큰 사람이 있는데, 몸이 상하고 목숨을 잃었다." 어떤 스님이 이 말을 현사스님에게 전달하자, 현사는 말했다. "혜능 사형이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그러면 스님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현사스님이 말했다. "남산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는가?" 운문스님은 스승인 설봉화상 앞에 주장자를 던지면서 놀라는 시늉을 했다.

[본칙] 擧. 雪峰示衆云, 南山有一條鼈鼻蛇, 汝等諸人, 切須好着. 長慶云, 今日堂中, 大有人喪身失命. 僧擧似玄沙. 玄沙云, 須是稜兄始得. 雖然如是, 我卽不恁. 僧云, 和尙作生. 玄沙云, 用南山作什. 雲門以杖, 向雪峰面前, 作勢.


발밑 살펴보면 그곳이 자성의 자리
바보는 진여(眞如) 구족하고도 못 깨달아


본칙의 공안은 {조당집} 제7권 설봉화상전과 {전등록} 18권 장경화상전, {현사광록} 등에도 전하고 있다. 또 {굉지송고} 24칙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설봉 화상의 법문에 대하여 그의 문하에 뛰어난 제자 장경혜능(長慶慧稜)과 현사사비(玄沙師備), 운문문언(雲門文偃) 착어(코멘트)로 이루어진 공안이다.

설봉(882~908) 화상에 대해서는 {벽암록} 제5칙에 이미 언급한 것처럼, 언제나 공양주의 소임으로 대중을 봉양하는 수행자였다. 세 차례나 투자산에 올라 대동 선사를 참문하고, 아홉 차례나 동산양개 화상을 찾아가 법문을 청하는 진정한 구도자였다. 뒤에 덕산 선감의 선법을 계승한 선승이다. 특히 동문인 흠산과 암두 화상과 함께 행각 수행하다 암두의 교시로 오산(鰲山)에서 불도를 이룬 이야기는 수행자의 귀감이 되고 있다. 뒤에 설봉산에서 1500명의 수행자들을 지도한 당대 최고의 선지식이다.

설봉 화상이 대중에게 "남산에 맹독의 독사가 한 마리 있으니 그대들은 조심하라!"는 법문을 하였다. 설봉이 말한 별비사(鼈鼻蛇)는 맹독을 가진 코브라 뱀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독사는 한번 물리면 목숨을 잃게 된다고 특별히 주의주고 있다. 설봉이 제시한 독사는 수행자 각자의 불성(본래면목)으로 학인들이 자각하여 생사대사를 깨닫도록 지시하고 있는 법문이다. 독사이야기는 귀종지상과 대수화상의 법문에도 언급되고 있으며, {종용록} 59칙에 동산은 죽은 뱀을 법문으로 제시하고 있다. 선어록에는 개(狗子)나 호랑이(大蟲), 뱀, 지렁이 등 많은 동물이 등장하고 있지만 모두 수행자의 진여자성(본래면목)을 지칭한 것이다.

만약에 설봉이 제시한 남산의 독사를 살아있는 독사로 생각한다면 남산과 독사라는 모양과 경계에 떨어져 헤매고 있는 중생이 된다. 선문답에서 제시한 어떤 사물이라도 사물의 모양과 형체를 의식하고 경계에서 진실을 추구하는 놈은 밖을 향해서 불법을 구하려는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밖으로 향해서 경계를 쫓는 자기의 마음을 안으로 되돌이켜 근원적인 본래심을 자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나무 기둥이나 동물 등 여러 가지 사물을 제시하여 법문을 한다. 이러한 법문을 사물을 가리켜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도록 하는 '지사문의(指事問義)'의 법문이라고 한다. 일체의 만법과 자기는 본래 하나(萬法一如)이며 만물과 자기는 일체(萬物一體)의 근본에서 불법을 체득하도록 제시한 것이다.

만약 내가 일체의 만법을 차별과 대상으로 이해한다면 나라는 주관과 아상(我相) 인상(人相)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차별심과 분별심을 벗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영원히 중생심으로 업장을 만들며 삼계에 윤회하며 고통 받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자아의 존재에 대한 집착(我相)과 상대적인 경계에 차별이 없고 일체의 만법과 자기와 하나가 된 절대 본래심의 입장에서 일체의 상대적인 존재나 차별심이 없는 깨달음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설봉 화상은 수행자들에게 남산의 독사라는 사물(경계)에 떨어진 사람은 선문답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번뇌 망념에 떨어져 자신의 본래면목을 잃어버리게 되니까 상대적인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고 순간순간 자신의 불성을 자각(念念自覺)하라는 법문이다.

설봉 화상이 제시한 독사의 법문에 그의 문하 제자들은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먼저 장경이 "오늘 이 법당 안에 큰 사람이 있는데, 몸이 상하고 목숨을 잃었다." 설봉의 법당에 독사의 맹독으로 완전히 죽은 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대유인(大有人)'이라는 말을 '많은 대중'으로 이해하고 법당 안에 많은 대중이 독사에 물려 목숨을 잃은 사람이 많다고 번역하면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대(大)'는 많고적음[多少]의 의미가 아니라, '한 사람(一人)이 크게 목숨을 잃었다'는 의미이다. 선어록에서 말하는 일인(一人)은 본래인(本來人), 무위진인(無位眞人)이며, 여기서는 설봉을 지칭하고 있다. 또한 장경을 비롯하여 모든 수행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말한다. 목숨을 잃었다(喪身失命)는 말은 크게 한번 죽었다(大死一番)는 말과 같이 자신의 자아의식(아상)과 상대적인 의식(인상) 등 일체의 번뇌 망념을 죽인 살인도(殺人刀)의 입장을 말한다.

원오는 장경의 말에 "보주인(普州人)이 도적을 전송하다"라고 착어했다. 보주는 도적이 많기 때문에 보주인은 도적놈이라는 말인데, 도적이 도적의 심정을 아는 것처럼, 설봉의 법문을 곧바로 깨달은 장경의 안목을 칭찬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현사에게 이 법문을 전달하자 현사는 "장경사형 정도의 안목을 갖춘 선승이 되어야 그렇게 말 할 수 있지. 역시 장경의 안목은 대단해!"라고 평가하고 있다. 원오는 "같은 구덩이에 다른 흙이 없지."라고 착어하고 있다. 이는 장경과 현사는 설봉의 제자니까 집안의 가풍은 서로 잘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현사는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남산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말했다.

즉 설봉 화상은 남산에 독사가 있다고 했지만, 그 독사는 시방세계에 함께하고 우주에 맹독이 꽉 차 있는데, 남산이라는 한 장소를 말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의미이다. 현사는 '모든 시방세계가 그대로 사문의 밝은 구슬(明珠)', 혹은 '모든 시방세계가 모두 본래인의 진실한 몸(법신)'이라는 법문으로 유명한 선승인 것처럼, 불법의 안목이 뛰어난 선승이다. 장경과 비교해 볼 때 현사의 스케일이 훨씬 크고 뛰어난 점을 볼 수 있다.

원오는 "목숨을 잃은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군!"이라고 착어 했다. 현사는 제법 스케일이 큰 경지를 말하고 있는데, 자신이 남산의 독사를 삼키고도 목숨을 잃은 줄 모르고 있는 것 같군! 남산의 독사인 진여법신 여래의 손아귀 속에 살면서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손오공이 여래의 손바닥위에서 재주를 부린다는 {서유기}의 이야기와 같이 만법과 하나 된 무심의 경지에 살고 있는 현사를 칭찬하고 있다.

마지막에 운문은 "주장자를 스승인 설봉의 면전에 내 던지며, '야, 독사다!'라고 말하고 두려워한 표정을 지었다." 주장자는 수행자의 필수 도구로 본래면목을 상징한다. 즉 본래면목의 지혜를 자유롭게 사용하여 조금도 숨김없이 전부 드러내 보인 것인데, 독사가 나오면 갑자기 두려워하는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지극히 당연한 본래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운문을 원오는 "운문이 설봉의 첫째 제자"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다른 형제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칭찬하고 있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설봉산 상골암은 높고 높아 오르는 이 없는데, 오르는 자라면 모두 독사를 마음대로 취급하는 명인이라야 한다. 장경과 현사도 그 독사를 어떻게 할 수 없었는데, 목숨을 잃고 불법을 체득한 자 몇이나 될까? 운문은 독사를 잘 알고 있어 주장자로 풀 속에서 찾아냈다. 그 독사는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없으니 밖에서 찾으면 볼 수없다. 운문의 지혜작용은 독사가 입을 벌리는 것이 전깃불과 같이 빠르니, 사람들의 정식으로 볼 수가 없네." 끝으로 설두는 모든 사람들에게 "발밑을 살펴라!"고 주의하고 있다.



[第023則]髑髏遍野
〈垂示〉垂示云。玉將火試。金將石試。劍將毛試。水將杖試。至於衲僧門下。一言一句。一機一境。一出一入。一挨一拶。要見深淺。要見向背。且道將什麽。試請擧看。
〈本則〉擧。保福長慶遊山次。福以手指云。只這裏便是妙峰頂。慶云。是則是。可惜許。後擧似鏡淸。淸云。若不是孫公。便見髑髏遍野。
〈頌〉妙峰孤頂草離離。拈得分明付與誰。不是孫公辨端的。髑髏著地幾人知。

벽암록 23칙 보복화상과 산봉우리

“깨달음 경지 안주하는 것은 또 다른 집착”

{벽암록} 제23칙에는 설봉 문하의 보복과 장경화상이 산에서 노닐며 나눈 대화에 경청과 설두가 착어(着語)한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다.


"보복 화상과 장경 화상이 산에서 노닐 때, 보복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이 바로 경전에서 말하는 묘봉정(妙峰頂)이다.' 장경이 말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애석하군!' 설두 화상이 착어했다. '오늘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산 놀이해서 무엇하겠는가?' 또 말했다. '백 천년 뒤에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출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드물 것이다.' (보복, 장경 두 사람은) 뒤에 경청에게 이 이야기를 제시하니, 경청 화상은 말했다. '손공(孫公: 장경)이 아니었더라면 온 들에 해골이 가득 널려 있었을 것이다.'"

[본칙] 擧. 保福長慶遊山次, 福以手指云, 只這裏便是妙峰頂. 慶云, 是則是, 可惜許. 雪竇著語云, 今日共這漢遊山, 圖箇什. 復云, 百千年後, 不道無, 只是少. 後, 擧似鏡淸. 淸云, 若不是孫公, 便見遍野.


묘봉정은 깨달음 세계를 가리켜
일체중생과 함께 보살행 닦아야


이 공안은 {전등록}18권 장경전에 수록하고 있는 것인데, {조당집} 10권에도 보인다. 보복종전(保福從展: ?~928)의 전기는 {조당집} 11권, {전등록} 19권에 수록돼 있다.

원오는 '평창(評唱)'에, "보복과 장경, 경청은 모두 설봉의 제자이다. 세 사람은 똑같이 불도를 체득했고, 똑같이 불법을 깨달았으며, 똑같은 안목으로 진실을 보고, 똑같이 본래면목을 드러내고 지혜작용을 펼쳤으며, 한결같이 출입을 함께 하며, 서로서로 날카롭게 질문하며 탁마(琢磨)하였다. 그들은 동시대에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문제를 제시하면 곧바로 근본을 알았다. 설봉의 문하에 평상시 선문답을 한 사람은 이 세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실 설봉의 문하에는 여기에 등장하는 세 사람을 비롯하여 운문문언, 현사사비, 남악유경(南岳惟勁) 등 뛰어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보복과 장경이 산에 노닐(遊山)면서 보복이 손가락으로 눈앞을 가리키며 '이곳이 바로 묘봉산의 정상'이라고 혼잣말로 말했다. 산놀이(遊山)는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선승들이 여러 곳을 다니며 산수(山水)를 바라보고 즐기며 유유자적하게 노니는 것을 말한다. {조당집} 제6권 동산장에 약산과 운암의 산놀이와 {벽암록} 36칙에는 장사(長沙)의 하루 유산(遊山)을 싣고 있다.

보복이 말한 묘봉산(妙峰山)은 수미산을 말한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의 권유로 구도심을 일으켜 최초로 방문하는 산인데, 덕운비구가 거주하고 있다. 선재는 덕운비구를 친견하기 위해 7일간 찾은 뒤에 산의 정상에서 조용히 경행하는 덕운비구의 모습을 보고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동산록}에도 동산양개 화상이 묘봉산을 소재로 한 선문답을 전하고 있다. 원오는 어느 스님이 조주 화상에게 묘봉고정(妙峰孤頂)에 대해 질문한 선문답을 평창에 인용하고 있다. 묘봉산은 깨달음의 세계, 일미평등(一味平等)의 절대세계로서 진실의 완전한 경지를 산에다 비유한 것이다.

{전등록} 10권에 장사경잠이 "백 척의 긴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고 말한 '백척간두(百尺竿頭)'도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같은 의미이며, {임제록}에도 깨달음의 경지(向上門)를 고봉정상(孤峰頂上)으로 중생교화의 보살도(向下門)를 십자가두(十字街頭)로 표현하여 설법하고 있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간다. 마찬가지로 현상의 차별세계가 모두 깨달음의 경지인 묘봉정상에 귀결되고, 이 정상에서 다시 만법의 차별세계가 펼쳐진다. 불법 진실의 대의를 완전히 체득하면 깨달음의 세계인 묘봉산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묘봉산을 멀리서 찾아 헤매고 있다. 그래서 보복은 장경이 이 묘봉산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시험하고 있다. 원오가 '수시(垂示, 선에서 고승이 가르침을 내리는 것)'에 "옥(玉)은 불로서 시험하고, 금(金)은 돌로서 시험하고 칼은 터럭으로 시험하고 물은 지팡이로 시험한다"는 마찬가지로, 보복은 묘봉산으로 장경의 안목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보복이 제기한 말을 들은 장경은 "그렇지. 묘봉산이 깨달음의 경지이긴 하지만, 애석하다(可惜許)"라고 보복에게 한방 먹이고 있다. 장경의 '애석하다'는 말의 의미는 원래 깨달음의 세계, 진리의 정상(頂上)은 이름도 없고, 뭐라고 이름 붙일 수가 없는 것인데, 그대는 '묘봉정(妙峰頂)'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는 것은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쓸데없는 짓은 그만하는 것이 좋다고 질책한 말이다. 이 한마디에 완전히 주객이 전도되고 말았다. 원오도 장경의 말에 "보통 사람 같으면 보복의 질문에 혹란되어 묘봉산에서 죽은 인간이 되겠지만, 역시 장경은 지혜의 안목으로 보복의 속을 훤히 다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애석하다'라는 말을 했다"는 의미로 착어하고 있다.

설두는 "오늘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산놀이해서 무엇하겠는가?"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보복과 장경이 산놀이한다면 산놀이답게, 철저하게 유산(遊山)의 유희삼매에 몰입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산놀이하면서 {화엄경}의 묘봉산 이야기를 제기하여 깨달음의 경지가 어떻고, 이러쿵 저러쿵 논의 한다면 산놀이를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영감들하고 산놀이 한들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라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원오도 이러한 설두의 착어에 "보복과 장경의 몸값이 떨어졌지만 어쩔 수 없다."라고 코멘트하고 있다.

설두는 또 "백년 천년 뒤에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출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드물 것"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백년 뒤나 천년 뒤에도 보복과 장경과 같은 선지식이 출현하기는 하겠지만, 아마도 이러한 안목을 갖춘 선승은 지극히 드물 것이라는 의미이다. 앞의 착어는 비판한 것이지만, 뒤의 착어는 지극히 높이 칭찬한 것이다.

보복과 장경은 뒤에 산놀이에서 돌아와 경청(鏡淸)에게 이 이야기를 제시하니, 경청은 "손공(孫公; 장경)이 아니었더라면 온 들에 해골이 가득 널려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보복이 '여기가 묘봉산'이라고 한 말에 대하여 장경이 '애석하다'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참선수행자가 모두 깨달음의 경지(묘봉정상)에 안주하고 정체되어 지혜의 작용이 죽은 수행자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불법수행으로 깨달음의 경지를 체득한 뒤에는 깨달음의 세계인 묘봉산에서 내려와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도를 실행하지 않으면 모두 묘봉산의 정상에서 죽은 시체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죽은 시체의 해골이 천지에 늘려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경청이 '해골(骸骨)이 들에 널려 있다'고 말한 것은 해골을 제기하여 무심의 경지에서 본래면목의 지혜작용(본지풍광)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등산은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인데, 산의 정상에 올라서면 그 곳엔 아무 것도 없고, 텅빈 허공만 보일 뿐이다. 아무것도 없는 정상을 오른 목적은 무엇인가? 사실 등산은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다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상의 집(원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목적이다. 중요한 것은 산의 정상에서 자신의 위대한 보살도의 삶을 실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는 인내와 체험의 지혜(능력)를 자신의 집에서 일체중생과 함께 보살도의 삶으로 회향하며 사는 것이다. 선에서는 이것을 깨달음의 경지를 초월해서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통해서 불법의 지혜로운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설두는 게송으로 읊고 있다. "보복이 묘봉정이라고 절대의 깨달음의 경지를 말한 것은 벌써 차별세계에 떨어진 말이다. 보복이 묘봉정을 들고 나온 것은 장경이 절대 평등의 깨달음의 경지를 분명히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인데, 장경은 '애석하다'"고 말했다. 설두는 "쓸데도 없는 묘봉정을 누구에게 주려고 하는가?"라고 보복을 다그치고 있다. 보복과 장경의 선문답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손공(장경)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면 땅바닥에 해골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대는?



[第024則]放身臥
〈垂示〉垂示云。高高峰頂立。魔外莫能知。深深海底行。佛眼覰不見。直饒眼似流星。機如掣電。未免靈龜曳尾。到這裏合作麽生。試擧看。
〈本則〉擧。劉鐵磨到潙山。山云。老牸牛汝來也。磨云。來日臺山大會齋。和尙還去麽。潙山放身臥。磨便出去。
〈頌〉曾騎鐵馬入重城。敕下傳聞六國淸。猶握金鞭問歸客。夜深誰共御街行。

벽암록 24칙 유철마가 위산을 참문하다

“절대 깨달음의 세계는 무사(無事)무심(無心)의 경지”

{벽암록} 제24칙은 유철마(劉鐵磨)라는 비구니가 위산영우 선사를 참문하는 일단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유철마가 위산에 이르자, 위산 화상이 그 비구니에게 말했다. '이 늙은 암소, 그대 왔는가?' 유철마가 말했다. '내일 오대산에서 큰 대중공양(齋)이 있답니다. 스님! 가시겠습니까?' 위산 화상이 자리에 옆으로 누웠다. 철마는 곧장 법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擧. 劉鐵磨, 到산. 山云, 老牛汝來也.
磨云, 來日臺山大會齋. 和尙還去. 山, 放身臥. 磨, 便出去.

이공안의 출처는 잘 알 수가 없지만 {연등회요} 제7권 위산영우전에 설두의 게송을 함께 수록하고 있으며, {선문염송집} 제10권에도 전하고 있다. 위산 화상은 {벽암록} 제4칙에서 언급한 것처럼, 백장의 법을 계승하여 호남성 장사(長沙)에 있는 위산 동경사에서 선법 펼친 당대의 명승 영우(靈祐: 771~853) 선사이며 선종 오가(五家) 가운데 최초로 개성있는 선법을 펼친 위앙종의 조사이다. 원오는 '평창(評唱)'에 위산과 유철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위산스님은 노승이 죽은 뒤에 산 아래 신도집의 암소로 태어날 것이다. 왼쪽 옆구리에 다섯 글자, '산승모갑(山僧某甲, 산승 아무개)'이라고 쓰여 있을 것이다. 그 때 위산이라고 불러야 하겠는가? 암소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라고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물어도 확실히 대답하지 못한다. 유철마는 오랫동안 참구하여 기봉이 높고 준엄하였음으로 사람들은 그를 유철마라고 불렀다. 그는 위산에서 10 리 떨어진 곳에 암자를 세웠다."

유철마는 위산과 앙산을 참문하여 대오(大悟)한 비구니로서 성이 유씨, 철마(鐵磨)는 별명으로 쇠로 만든 절구통이라는 의미이다. 즉 유철마의 선기가 뛰어나 닥치는 대로 모두 절구통에 집어넣고 부수는 선풍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걸출한 비구니이다. 유철마에 대해서는 {벽암록} 17칙, 설두의 게송에 언급되었고, {전등록} 17권에는 자호(子湖) 선사와의 선문답도 전하고 있다. 유철마가 어느 날 위산영우 화상을 찾아뵙고 인사 올리자, 위산이 '늙은 암소(老牛), 그대 왔는가'라고 친밀감이 넘치는 말로 맞이하고 있다. 자우(牛)는 새끼를 기르는 어미 소(암컷)라는 의미이다. 위산이 철마를 '늙은 암소'라고 부른 이유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위산은 평생 자기 자신을 '수고우(水牛)'라고 부르고, 죽은 뒤에 천당에나 극락에도 가지 않고 산 아래 신도집의 소로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유철마도 자기와 똑같은 무리(同類)로서 친밀감을 가지고 '늙은 암소'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원오는 위산이 '늙은 암소, 그대 왔는가'라는 말에 '탐간영초(探竿影草)'라고 착어하고 있다. 이 말은 {임제록}에서 주장하는 말로, 장대 끝에 깃털을 묶어서 고기를 몰고 다니는 도구와 풀 더미를 물 속에 넣어두어 고기들이 모여들도록 하는 고기 잡는 수단이다. 즉 위산 화상은 유철마의 안목을 시험하기 위해서 던진 한마디라는 의미이다.

그러자 유철마는 곧장 위산 화상에게 “내일 오대산에 큰 대중공양(齋)이 있는데, 스님! 가시겠습니까?”라고 여쭙고 있다. 오대산은 중국의 북쪽 산서성(山西省)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화엄경} '보살주처품'의 설법에 의거하여 옛날부터 일만의 보살과 함께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성지로 신앙화 된 곳이다. 많은 불교인들이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순례하는 영험의 도량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대법보기}와 {임제록}에는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없다"고 하면서 마음 밖을 향해 오대산을 찾아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는 수행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대중공양(大齋會)은 보살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일종의 무차대회(無遮大會)라고 할 수 있다. 유철마가 오대산에 대중공양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임제록}에 보화 화상이 요령을 흔들며, 밝은 것이나 어두운 것이나 일체의 모든 것을 쳐 날린다는 말을 하고 다니자, 임제가 시자를 시켜서, "아무것도 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라고 묻자, 보화는 "내일 대비원에 대중공양이 있다"고 대답한 것을 연상케 한다. 즉 일체의 명암(明暗)과 차별경계에 떨어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떨쳐버리는 초월적인 경지를 행동과 말로 표현하고 있다. 보화가 "내일 대비원에 대중공양이 있다"고 한 것은 '그대도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깨달음의 세계에서 사는 보살이라면 대비원에 와서 공양이나 하라'는 의미이다. 번뇌 망념을 초월한 성자 아라한(應供)은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철마 비구니를 맞이한 위산화상
동류의식 가지고 친밀함 나타내

그런데 호남에 있는 위산과 산서성에 위치하고 있는 오대산과의 거리는 수만리나 되는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곳이다. 당시 걸어서 간다면 몇 달이 걸리는데, 내일 오대산의 대중공양에 참석 할 수가 있을까? {벽암록종전초}에는 "사바세계를 두루하여 자취가 없는 자는 멀고 가까이(遠近)를 문제로 하지 않는다"라고 주석하고 있다. 이는 절대 깨달음의 경지는 멀고 가까이, 높고 낮은, 깊고 얕음을 문제로 삼지는 않는 다는 뜻이다.

그런데 위산 화상은 '몸을 옆으로 누워 버렸다.' 위산은 자신의 본래면목인 물소(水牛)의 모습으로 벌렁 누웠다. 배도 부른데 대중공양을 하기 위해 밖으로 멀리 오대산까지 갈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은 여기서 나는 좀 누워서 쉬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위산 화상은 오대산이고 대중공양이고, 선이나 깨달음도 지금 나에게는 관심 없는 일이야. 나는 지금 누워서 쉬는 내 할 일이 있네! 라고 하면서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하여 무사무심(無事無心)의 경지에서 살고 있는 모습을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다.

원오는 위산이 벌렁 누어버린 행동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쿵저러쿵 사량분별로 위산의 경계를 찾으려고 하지 말라고 착어하고 있다.

이러한 위산 화상의 모습을 보고, 유철마는 '곧장 법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유철마도 위산을 참문한 일이 끝났기 때문에 그곳에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다. 아무런 사량분별도 없이 위산은 위산, 철마는 철마, 각자 지금 여기서 자신의 일을 무심의 경지에서 살고 있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고 있다. "유철마는 철마(鐵馬)를 타고 겹겹이 쌓인 성을 쳐들어갔으나, 여섯 나라가 이미 평정되었다는 칙명을 전해 듣게 되었네. 그래도 쇠 채찍 움켜쥐고 돌아오는 길손에게 묻지만, 깊은 밤 누구와 함께 대궐의 뜰 앞을 거닐까."

원오는 '평창'에 "총림에서 설두스님의 이 게송을 최고로 여기고 있다. 송고(頌古) 100칙 가운데 이 게송이 논리가 가장 잘 갖추어졌고 특히 지극히 오묘하며 본질을 명확하게 읊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처음 철마(鐵馬)를 타고 위풍당당하게 몇 겹의 성을 넘어 천자가 있는 곳까지 뛰어 들은 여장군의 모습을 읊고 있는데, 유철마가 위산 화상을 참문 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성에 들어가 황제의 칙명을 받아보니 벌써 여섯 나라는 평정되었다고 하네. 여기서 말하는 여섯 나라(六國)는 춘추전국시대 진(秦)나라에 반항한 한(韓), 위(魏), 연(燕), 제(齊), 초(楚) 나라를 말하는데, 지금은 천하태평의 시대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적(六賊: 六識)을 말한 것이다. 유철마가 위산 화상을 참문하자, 위산은 "늙은 암소, 그대 왔는가?"라고 한 말에 원오는 "개가 칙서를 물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이 말은 {후한서}에 나오는 고사인데, 변방의 장군 유철마가 기세당당하게 여섯 나라(六國: 六賊)을 쳐부수기 위해 황제(위산)를 친견했지만 위산의 한 마디(칙서)에 천하태평으로 장군으로서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유철마는 모처럼 전투 준비를 하고 나왔는데 그 냥 돌아 갈 수가 없어, '내일 오대산에 공양이 있다'고 말하며 채찍을 한번 쥐고 휘둘렀다. '천하태평이라고 칙명을 내렸는데 이 무슨 소리냐?'하고 위산은 누어 버리고 철마는 나가 버린 행위를 설두는 '천하태평한 고요한 밤에 누구와 함께 궁궐의 뜰을 산책할까?'라고 읊고 있다.



[第025則]千峰萬峰去
〈垂示〉垂示云。機不離位。墮在毒海。語不驚群。陷於流俗。忽若擊石火裏別緇素。閃電光中辨殺活。可以坐斷十方。壁立千仞。還知有恁麽時節麽。試擧看。
〈本則〉擧。蓮花峰庵主。拈拄杖示衆云。古人到這裏。爲什麽不肯住。衆無語。自代云。爲他途路不得力。復云。畢竟如何。又自代云。楖[木+栗]橫擔不顧人。直入千峰萬峰去。
〈頌〉眼裏塵沙耳裏土。千峰萬峰不肯住。落花流水太茫茫。剔起眉毛何處去。

벽암록 25칙 연화봉 암주의 주장자

“금가루가 귀중하다지만 눈에는 병이 돼”

{벽암록} 제25칙은 연화봉의 암주가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연화봉 암자 주지가 입적하던 날 주장자를 제기하고 대중에게 설법했다. '옛 사람은 여기에 이르러 왜 안주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대중이 아무 말도 없자 자신이 대신 말했다. '그것은 수행의 길에서 별다른 힘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다시 이어서 말했다. '필경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스스로 대중을 대신해서 말했다. '주장자를 비껴들고 옆눈 팔지 않고 첩첩히 쌓인 산봉우리 속으로 곧장 들어가노라.'

擧. 蓮花峰庵主, 拈杖, 示衆云, 古人到這裏, 爲什不肯住. 衆無語. 自代云, 爲他途路不得力. 復云, 畢竟如何. 又自代云, 橫擔不顧人, 直入千峰萬峰去.

화봉은 원오의 '평창'과 {오등회원} 15권에 '천태산 연화봉'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조정사원} 7권에 의하면 연화봉은 천태의 별산(別山)으로 천태덕소가 입적한 곳이라 하고 있다. 연화봉 암주는 운문의 법을 이은 봉선사 도침(道琛)의 제자라는 사실 이외에는 잘 알 수가 없으며, 보통 상(祥)암주로 불렸는데, {연등회요} 27권과 {오등회원} 15권에 그의 법문을 전하고 있다. {벽암록} 25칙의 공안도 {연등회요} 27권에 수록된 상암주의 법문에서 인용한 것이다.

원오는 평창에 연화봉 암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송(宋)나라가 건국되었을 무렵 천태산 연화봉에 암자를 세웠다. 옛사람들은 도를 얻은 뒤에는 초옥이나 석실에서 발 부러진 가마솥에 나물 뿌리를 삶아 먹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인연따라 한마디 법문(一轉語)을 하면서 불조의 은혜에 보답하고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고저 하였다. 그는 어떤 스님이 오는 것을 보기만 하면 바로 주장자를 들고서, '옛사람이 여기에 이르러 무엇 때문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을까?'라고 질문했다. 이렇게 전후 20년간을 설법했지만 끝내 한 사람도 올바른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늘은 암주가 입적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장자를 들어 보이면서 '옛사람은 왜 깨달음의 경지(주장자)에 안주하려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문제를 제시하여 대중에게 법문하고 있는데, 역시 대중은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주장자는 선승의 7가지 도구 중에 하나로서 항상 손에 쥐고 있는 지팡이다. 선에서는 만법의 근본을 상징하는 도구이며 각자의 불성,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한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과 같이 자기 마음대로 활용하는 지혜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원오는 이 말에 대하여 '허공에다 못을 박지 말라'고 착어하고 있다. 이 말은 {임제록}에 있는 임제의 말인데,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하는 것은 허공에 못을 박는 것처럼, 무모하고 헛된 일이라는 의미이다.

마치 {법화경} '화성유품'에 한 사람의 길 안내자가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보물을 찾아서 먼 길을 갈 때 도중에서 지치고 피곤하여 환화(幻化)의 성(城)을 만들어 쉬도록 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 환화의 성에 안주하고 만족하여 참된 보물을 찾으려는 생각이 없어졌기 때문에 다시 환화의 성을 없애고 모두 보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다. 길 안내자는 부처님이요 보물은 불법을 비유한 것인데, 수행의 도중에 퇴굴심이 생기면 방편으로 제시한 깨달음의 경지를 중생들은 참된 깨달음의 세계인줄 알고 집착한다.

암주가 주장자로, 이곳(깨달음의 세계)이라고 하는 것은 방편으로 제시한 환화의 성과 같은 것이다. {금강경}에 '깨달음의 세계에 안주하지 말라(無住)'고 주장하고, {유마경}에도 '밖으로 범성(凡聖)의 차별경계를 취하지 말고, 안으로 근본(깨달음)에 안주하지 말라'고 설하고 있다. 이 일절은 {임제록} 등 선어록에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암주의 설법도 이러한 불법의 정신을 독자적으로 설하고 있다. 중생의 차별세계는 물론, 깨달음의 경지에도 안주하지 말고 지금 여기 자기 일에 몰입하여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말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선어록에 '백척의 긴 장대 끝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라'는 법문과 {벽암록} 23칙에 묘봉산의 정상에서 안주하지 말라는 법문도 똑같은 내용을 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장자는 깨달음 수행위한 방편
깨달음 자체에도 안주하지 말라

암주의 법문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암주는 자신이 대신 말했다. "그것(주장자)은 수행의 길에서 별다른 힘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주장자라는 것은 길을 갈 때는 필요한 생활도구이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이다. 불법수행을 하는 도중에서는 부처나 여래, 깨달음이나, 열반,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주장자가 필요하지만, 여기 깨달음의 집에 도달(歸家穩坐)한다면 자기와 주장자가 하나가 된 본래면목이 그대로 다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주장자라는 방편의 도구가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임제록}에 '한 사람은 도중에 있으면서 집(家舍)을 여의지 않고, 한 사람은 집(家舍)에 있으면서 도중을 여의지 않는다'라고 설하고 있다. 도중은 수행과 중생구제의 길에서 활약하는 경지이고 집은 깨달음의 마음(본래심)을 상실하지 않은 것이다.

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대들에게 묻노라 주장자란 평소 수행자가 사용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수행의 길에서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을까? 옛사람은 이런 경지에도 안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금가루가 비록 귀중하지만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되는 것과 같다." 주장자나 언어 문자나, 부처나 깨달음 등은 불법 수행에 필요한 방편적인 도구이다. 그러한 방편도구나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하면 자신의 생활도구가 자신을 얽어매는 집착과 속박의 존재가 된다. 그래서 원오는 '금가루가 귀중하지만… …'이라는 속담을 인용하고 있다.

암주는 또 다시 이어서 말했다. "그러면 필경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 어떻게 해야 올바른 불법의 수행자가 될 수 있는가? 학인들에게 분발심을 일으키도록 문제를 던지고 있다.

그리고 또다시 자신이 말했다. "주장자를 비껴들고 옆 눈 팔지 않고, 첩첩히 쌓인 산봉우리 속으로 곧장 들어가노라." 이 말은 평창에도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조주의 제자 엄양(嚴陽)존자 선신(善信)의 말이다. 지금까지 주장자에 대해서 고려하지 못했는데 그 주장자를 옆으로 짊어지고 한눈도 팔지 않고, 암주가 '이 주장자에도 안주하지 않고'라고 말한 것처럼, 대중들의 마음으로부터 주장자를 뺏어들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주장자를 옆으로 짊어지고 첩첩히 쌓인 산중을 향해 들어간다는 말에 원오는 "단지 담판(擔板)과 같다"고 착어하고 있다. 즉 판자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은 옆을 볼 수 없고 오직 앞만 보고 길을 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쪽 부분 밖에 볼 수 없는 사람이 라고 경고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수행의 길(도중)에도 있지 않고, 깨달음의 집에도 안주하지 않고, 또한 주장자에도 의지하지 않고,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하여 오직 자기의 일에 몰입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눈 속의 티끌, 귓속의 흙이여! 천봉우리 만 봉우리에 안주하려 하지 않네. 꽃이 떨어지고 물이 흐르니 아득하기만 한데, 눈썹을 치켜세우고 찾아보았지만 어디로 갔을까?" 암주의 눈은 먼지가 가득하고 귀에는 흙이 가득 함에도 불구하고 중생과 함께하는 동사섭(同事攝)으로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중생교화의 설법에 진력하고 있다고 칭송하고 있다. 천봉 만봉 가운데로 들어가 자취도 없고 흔적도 없는 깨달음의 경지에서 그대는 도대체 어디로 들어가고 있는가? 라고 읊고 있는 것은 학인들이 암주의 행방을 찾고 그의 소식을 참구해야 할 것을 경고하는 말이다. 암주의 지혜작용은 자취가 없고 소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낙화유수처럼, 인연따라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고 도도하게 끝없이 작용하고 있다. 암주의 전광석화와 같은 지혜작용을 눈을 크게 뜨고 보려고 하면 볼 수가 없다.



[第026則]何是奇特事
〈本則〉擧。僧問百丈。如何是奇特事。丈云。獨坐大雄峰。僧禮拜。丈便打。
〈頌〉祖域交馳天馬駒。化門舒卷不同途。電光石火存機變。堪笑人來捋虎鬚。

벽암록 26칙 백장화상과 기특(奇特)한 일

“평상심의 일상생활이 진실로 비범한 일”

{벽암록} 제26칙에는 백장 화상이 홀로 백장산에 앉아 있는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백장 화상에게 질문했다. '어떤 것이 아주 특별(奇特)한 일입니까?' 백장 화상이 대답했다. '홀로 대웅봉에 앉아 좌선하는 일이지.' 그 스님이 예배를 올리자, 백장 화상은 주장자로 후려쳤다.

擧. 僧問百丈, 如何是奇特事. 丈云, 獨坐大雄峰. 僧, 禮拜. 丈, 便打.

장회해 선사는 중국 선불교에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인물이다. 스승 마조도일의 비문에는 십대제자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지만 백장과 남전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마조의 생전에는 훌륭한 선승들의 틈에서 빛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선원청규}를 제정하고, 수행중심교단을 창립했다. 또한 선원의 전 대중이 공동노동에 참여해야 하는 의무규정인 보청법(普請法)을 제정하여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짓는 생산노동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수행자 교단의 위대한 노동정신을 직접 실천한 선승이었다. 특히 그의 문하에는 위산영우와 황벽희운 이라는 걸승이 배출되어 조사선불교의 교단을 확고히 정착시켰고 선사상을 한층 발전 시켰으며, 위산과 앙산의 위앙종, 황벽과 임제의 임제종이 형성되었다. {전등록} 제6권에는 백장의 선사상이 집약된 '돈오법문'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대들이 모든 반연을 끊고 만 가지 일들을 쉬며, 선과 악,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법을 기억하거나 생각하지 말라. 몸과 마음을 의식하지 말고 자유롭게 하며, 마음을 목석과 같이 아무런 분별심이 없도록 하라. 마음의 분별작용이 없고, 마음의 근본이 허공과 같이 되면 지혜의 해가 자연히 나타나리라. 마치 구름이 흩어지면 해가 드러나는 것과 같다. 일체의 분별심이 쉬고 온갖 반연과 탐욕, 성냄과 애욕, 더럽고 깨끗함에 대한 망정(妄情: 차별심)이 없어지면 육욕(六欲)과 팔풍(八風)을 대하여도 보고 듣고, 깨닫는 분별에 끄달리지 않고, 모든 경계에 현혹되지도 않아 자연히 신통묘용이 구족되리라." 백장은 이러한 불법의 지혜를 체득한 사람을 도인(道人)이라고 하고, 발심한 보살로서 부처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 {벽암록} 제26칙은 어떤 스님이 백장 화상에게 "불법수행으로 특별히 훌륭한 일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이 스님이 '기특한 일(奇特事)'로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불법을 수행하면 아주 특별히 좋은 일이 있는가? 불법을 깨닫고 체득한 특별하고 신통한 일은 어떤 것인가?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법을 수행하여 깨닫게 되면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얻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도 화두를 참구하여 깨닫게 되면 일체의 만법을 단번에 통달하는 부처의 능력을 구족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사람이 많다. 기특한 일, 아주 특별한 일, 좋은 일을 찾아서 불법수행을 하는 사람은 밖을 향해서 불법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전등록} 15권에 협산(夾山) 화상이 제자를 행각수행을 시켰는데, 사방에 다니면서 들어보니, 스승의 도덕이 훌륭하고 수행자들을 모아 지도한다는 소문을 듣고 되돌아와서 물었다. "화상께서는 이렇게 기특한 일이 있으면서 왜 진작 저에게 설법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협산 화상이 말했다. "그대가 밥을 지으면 내가 불을 땠고, 그대가 밥을 돌리면 내가 밥을 먹었는데, 언제 내가 그대에게 불법을 설하지 않은 적이 있었는가?" 제자는 이 말에 곧바로 깨닫게 되었다. 운문 화상이 '날마다 좋은 날'이라고 설한 것처럼, 매일 매사가 모두 기특한 일이다.

{조당집} 제3권에 어떤 스님이 "무엇이 기특한 일입니까?"라고 질문하자, 본정 화상은 "한 생각도 마음에 기쁨이 없다"고 대답했다. 대개 좋은 일, 기특한 일은 기쁜 일, 즐거운 일로 생각하고 있다.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것은 감정에 떨어진 중생심이다. 슬픔과 괴로움의 마음에 상대적인 차별심이 기특한 일이 될 수 있을까? 기쁨과 슬픔의 차별에 떨어지지 않는 본래심(불심)의 경지에서 사는 일이 기특한 일이라고 본정 화상은 설하고 있다.

지금 하는일이 특별한 일 되게해야
현실생활 떠나 밖에서 찾아선 안돼

백장 화상은 '홀로 대웅봉에 앉아 좌선하는 일'이 기특한 일이라고 말했다. 대웅봉은 강서성 남창에 있는 백장산을 말한다. 백장 화상은 이 산에서 선문을 열고 수행자들을 지도했는데, '홀로 대웅봉에 앉아 좌선하는 일'은 백장 자신이 불법의 생활을 하는 매일 매일의 기특한 일이다. 백장 화상의 대답은 나는 지금 여기 백장산에서 홀로 좌선수행의 생활을 하는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이 기특한 일이며 깨달음의 지혜로운 삶이다. 더 이상 자신의 구체적인 현실생활에서 기특한 일이란 특별히 없다. 이러한 현실생활을 떠나 달리 깨달음의 기특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추상적인 공상이며, 망상이 작동하는 환상인 것이지 지금 여기서 자신이 깨달음의 지혜로운 삶을 실현 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다.

실 인간의 평범한 일상생활이 진실로 비범한 일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수단(守端) 선사가 '풍류스럽지 않은 것이 정말 풍류스러운 것(不風流處也風流)'이라고 말한 것처럼, 평상심으로 평범한 일상생활하는 그 자체가 진실로 풍류의 생활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평상심이 도의 경지라는 사실을 체득 할 수가 있다. 기특한 일을 추구하는 마음은 지금 여기 자기자신의 평범한 현실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밖에서 새로운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불법은 각자가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에서 자신이 일체 번뇌 망념이 없는 깨달음의 불심으로 지혜로운 자신의 삶을 평안하게 사는 일이다. 즉 자신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자신과 함께 하는 시절인연에 맞는 자신의 일이 모두 기특하고 훌륭한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인간은 시간과 장소의 시절인연을 떠나서 자신의 구체적인 삶(일)을 살수가 없는 것이다. 불법의 기특한 일은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지혜로운 삶을 하는 것이다. 백장 화상이 대웅봉에 앉아 번뇌 망념의 일없이 본래심(불심)으로 좌선 수행의 지혜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가장 기특한 일인 것이다. 좌선은 일체 차별심을 초월한 불심의 생활이며, 본래의 자기 위치(깨달음의 장소)에 평안하게 지혜로운 삶을 사는 구체적인 일이다. {유마경}에 본래심(直心)이 정토이며 청정한 도량(道場)이라고 설하고 있으며, 선에서는 본래심의 경지에서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을 안신입명(安身立命)이라고 한다.

문한 스님은 "예 잘 알았습니다."라는 의미로 다시 인사를 올렸다. 원오는 이 스님이 "영리한 납승"이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백장이 "홀로 대웅봉에 앉아 있다"고 한 법문의 의미를 체득했기 때문에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백장 화상은 인사하는 스님에게 곧바로 주장자로 내리치고 있다. 백장의 주장자는 어떠한 작용인가? 원오도 "이렇게 엄하게 학인을 때리는 율령(律令)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니 잘 참구해야 한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다시 한번 "정신차리게!"라고 전광석화와 같은 기세로 주의주고 있는 것이다.

설두스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조사의 경지를 달리는 천마(天馬)여!" 이 말은 백장이 마조의 불법을 체득하여 불조(佛祖)의 경지를 종횡으로 자유롭게 치달리는 천마에 비교하고 있다. 원오도 착어에 "오백년에 한 사람 출현할까?"라고 백장의 출현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교화의 수단은 놓아주고 거둠이 적절하네." 학인을 지도함에 파주(把住)와 방행(放行), 살인도와 활인검을 적절하게 잘 활용하여 지도하고 있다고 읊고 있다. "전광석화 속에서도 근기에에 알맞게 대처했으니." 기특한 일을 질문한 스님에게 "홀로 대웅봉에 앉아 있네."라고 대답한 백장과 스님의 선문답은 전광석화와 같은 지혜작용이었다. "가소롭다. 호랑이 수염을 뽑으러 오다니." 백장에게 감히 겁도 없이 기특한 일을 질문한 스님의 용기를 칭찬하고 있다.



[第027則]體露金風
〈垂示〉垂示云。問一答十。擧一明三見免放鷹。因風吹火。不惜眉毛則且置。只如入虎穴時如何。試擧看。
〈本則〉擧。僧問雲門。樹凋葉落時如何。雲門云。體露金風。
〈頌〉問旣有宗。答亦攸仝。三句可辨。一鏃遼空。大野兮涼飇[颱-台+焱]颯颯。長天兮疏雨濛濛。君不見少林久坐未歸客。靜依熊耳一叢叢。

벽암록 27칙 운문화상과 가을바람에 진실 드러나다

“진실은 앙상한 고목처럼 무일물의 경지”

{벽암록} 제27칙에는 운문 화상의 유명한 가을바람에 진실이 모두 들어난 체로금풍(體露金風)의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 화상에게 질문했다. '나무가 시들어 메마르고 잎이 떨어졌을 때는 어떻습니까?' 운문 화상이 대답했다. '가을바람에 나무의 본체가 완전히 드러나지(體露金風).'

擧. 僧問雲門, 樹凋葉落時如何. 雲門云, 體露金風.

오는 '평창'에 이 공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나무가 시들어 메마르고 잎이 떨어졌을 때는 어떤 사람의 경계인가? 이것은 분양 화상의 18가지 질문 가운데 선지식의 역량을 시험하는 질문(辨主問), 또는 사건을 빌린 질문(借事問)이라고 한다. 운문 화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그에게 '가을바람에 나무의 본체가 완전히 드러나지'라는 대답은 아주 훌륭하고, 또한 그 질문에 위배되지 않았다. 즉 질문한 스님도 안목이 있었고, 대답 또한 분명했다."

운문 화상에게 어떤 스님이 찾아와서 "나무가 시들어 메마르고 잎이 떨어졌을 때(樹凋葉落)는 어떻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수조엽락(樹凋葉落)은 마치 겨울철에 나무에 물이 마르고 낙엽이 져서 나무 잎이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풍경을 연상하게 한다. 물론 이 질문은 그러한 앙상한 겨울나무의 자연풍경을 문제로 삼고 질문하는 것은 아니다.

질문하는 스님이 제시한 '나무가 시들어 메마르고 잎이 떨어졌을 때(樹凋葉落)의 경지'는 사실 {대반열반경} 제35권에 부루나가 비유로 설하는 다음과 같은 고사를 토대로 한 문제제기 인 것이다. 즉 "부루나가 말했다. '한 가지 비유를 들어서 말씀 올리니 들어주십시오.' 부처님이 말씀했다. '좋은 일이지. 그대 마음대로 말해보게나.' '세존이시여! 마치 큰 마을 앞에 사라나무 숲이 있고, 그 숲 가운데 한 그루의 나무가 숲보다 먼저 생겨서 백년이 넘었습니다. 그 숲의 주인은 물을 주면서 철에 따라 가꾸었는데, 그 나무가 오래되어 껍질과 나뭇가지와 잎은 모두 다 탈락하고, 굳은 고갱이만 남아 있습니다. 여래도 그와 같아서 낡은 것은 모두 제거해 없어지고 오직 진실한 법만 남아 있습니다.'"

{마조어록}에 마조대사가 어느 날 약산에게 "그대 요즘 정법 안목에 대한 견해(見處)는 어떠한가?"라고 질문하자, 약산이 "피부가 완전히 탈락되어 오직 하나의 진실만 남아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는데, 이 일단도 {열반경}의 고사를 배경으로 한 선문답이다.


가을바람에 나무 본체 드러나듯
아상(我相), 번뇌 사라진 본래면목 비유

이러한 내용에 {한산시}에도 {열반경}의 고사를 시로 읊고 있으며, 송대 황산곡(黃山谷.庭堅 : 1045~ 1105)은 {한산시}에 의거하여 "피부와 터럭 모두 떨쳐버리니 오직 진실만 있네"라고 시구에 응용하여 읊고 있다. {육조단경}에 "낙엽이 떨어져 근본으로 되돌아간다(葉落歸本)"고 주장하고 있는 말도 같은 의미인데, 이 말은 {노자} 16장에서 주장하는 "대개 사물은 번창하지만 각기 그 근본으로 되돌아간다. 근본으로 되돌아 간 것을 정(靜)이라고 한다."는 주장을 토대로 한 말이다. {신심명}에도 "근본으로 되돌아가면 종지를 체득하고, 사물에 비친 대상을 따르면 근본을 잃어버린다"고 읊고 있다. 선불교에서는 '만법이 하나로 되돌아간다(萬法歸一)'는 주장처럼, 일체의 번뇌 망념의 숲에서 본래인 불심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환원성(還源性)의 구조이다. {대승기신론}에서 번뇌 망념의 중생심(不覺)에서 본래인 진여 자성의 불심(本覺)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회귀성(回歸性)의 종교사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선어록 등장하는 피부나 나무 잎, 혹은 초목과 풀 등은 숲(사바)의 세계인 번뇌 망념(妄念)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래서 동산양개 화상도 번뇌 망념이 없는 깨달음의 세계를 "멀고 먼 곳에 풀이 하나도 없는 곳(萬里無寸草)을 향해 가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일체의 번뇌 망념이 없는 절대 평등의 무일물(無一物)의 경지인 진실된 법신(法身: 불성)을 깨닫도록 지시하는 법문이다.

나무가 시들어 메마르고 잎마저 떨어진 수조엽락(樹凋葉落)은 {열반경}에서 부루나가 비유로 말하고 있는 오래된 사라나무의 껍질과 가지와 잎이 완전히 탈락된 앙상한 고목은 본래 모습인 진실만 남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인데, 즉 여래의 진실한 법신은 일체의 번뇌 망념(皮膚)의 먼지가 완전히 없어진 청정한 불심의 심경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가 시들고 메말라 잎이 완전히 떨어져 없어진 것은 아상(我相) 인상(人相)과 일체의 번뇌 망념이 완전히 탈락된 본래(本來) 무일물(無一物)인 법신의 진실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열반경}에 의거하여 일체의 번뇌 망념이 탈락한 불성상주(佛性常住), 혹은 법신상주(法身常住)의 경지를 말하고 있다.

어떤 스님은 "번뇌 망념이 완전히 탈락된 깨달음의 경지(法身)는 어떻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즉 본래 무일물(無一物)인 열반적정인 법신 경지를 체득한 입장에서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운문 화상은 "가을바람에 나무의 본체가 완전히 드러나지(體露金風)"라고 대답했다. 체로(體露)는 본래의 모습인 근본이 완전히 들러난 것으로 {광등록} 제8권에 백장이 신령스런 빛이 홀로 빛나니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의 경계를 초월하고, 법신이 그대로 드러났다(體露眞常)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가을바람에 불법의 참된 모습(實相)이 완전히 드러났다는 의미이다. 오행(五行)에서 가을(秋)은 금(金)이기 때문에 금풍(金風)은 추풍(秋風)을 말한다. {임제록}에도 "금풍(金風)이 옥피리를 불면 누가 그 소리를 알아듣는가?"라고 묻고 있다.

운문은 늙은 피부가 남아 무상에 파괴되고 있는 육신을 통해서 법신의 지혜작용을 꿰뚫어 보고 있다. 운문은 화신이라고도 법신이라고도 말하지 않고도 확실한 자기 존재의 근본 당체(본래면목)를 체로금풍(體露金風)이라는 한마디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가을바람에 나무의 본체가 숨김없이 완전히 드러난 것처럼, 일체의 번뇌 망념을 초월하여 깨달음의 지혜로운 삶을 사는 법신은 "가을바람에 흔들리며 법음(法音)을 울리고 있다"고 대답한 것이다. 피부는 물론, 몸과 마음(身心)까지 완전히 탈락한 경지에 살고 있는 자신의 본래면목(법신)의 지혜작용이 분명하고도 당당하게 전부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원오는 운문의 대답에 "하늘을 떠받치고 땅을 버티고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는데, 온 천지(天地) 가득히 가을바람인데 감추고 숨길 곳이 없다는 의미이다. {화엄경}에 "법신(佛身)은 온 법계에 가득 충만되어 있다"는 말과 같다. 만법의 진실(법신)은 감춤이 없고, 여실하고 여법하게 이와 같은 모습(諸法實相)으로 모두 드러나 있는 것이다. 운문은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은 일체의 번뇌 망념을 초월한 법신의 경지에서 "가을바람에 진실이 그대로 모두 드러났다(體露金風)"는 법음을 설하고 있는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두는 이 공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질문에 이미 종지가 있었고, 대답 역시 또한 그렇다" 선문답은 원래 질문 가운데 대답이 있는 법이다. 운문 화상은 스님의 질문에 충분히 종지가 있음을 파악하였고, 스님의 질문 역시 훌륭했다고 칭찬하고 있다.

"삼구(三句)를 판별해야 한다"는 말은 운문의 삼구(三句)설법으로 판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운문이 대답한 체로금풍(體露金風)이라는 일구(一句)에 천지가 하나된 함개건곤(函蓋乾坤)의 구(句)와 일체의 번뇌망념을 끊은 중류절단(衆流截斷)의 구(句), 학인의 근기에 맞추어 지혜를 살리는 수피축랑(隨波逐浪)의 구(句)라는 삼구(三句)가 구비되어 있는가를 판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한 화살이 허공을 통과하네”라고 읊고 있는 것은 운문 화상이 체로금풍(體露金風)이라고 대답한 한마디는 하나의 화살이 되어 천지를 꿰뚫고 시방세계의 허공을 날아가는 것처럼, 결코 삼구(三句)나 일구(一句)로 논의 하거나 해석하는 경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운문의 대답(一句)을 운문의 선사상인 삼구(三句)로서 견주어 판별하여 볼 수 있는 안목을 체득하고는 삼구와 일구를 초월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第028則]有說不說
〈本則〉擧。南泉參百丈涅槃和尙。丈問。從上諸聖。還有不爲人說底法麽。泉云。有。丈云。作麽生是不爲人說底法。泉云。不是心。不是佛。不是物。丈云。說了也。泉云。某甲只恁麽。和尙作麽生。丈云。我又不是大善知識。爭知有說不說。泉云。某甲不會。丈云。我太殺爲爾說了也。
〈頌〉祖佛從來不爲人。衲僧今古競頭走。明鏡當臺列像殊。一一面南看北斗。斗柄垂。無處討。拈得鼻孔失卻口。

벽암록 28칙 남전화상 설하지 않은 불법

“언어문자로 표현하면 불법 그 자체가 아니다”

{벽암록} 제28칙에는 마조 문하의 유명한 남전보원 화상과 백장열반 선사와 '설할 수 없는 불법'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남전 화상이 백장산의 열반 화상을 참문하자, 열반 화상이 질문했다. "예로부터 성인이 남에게 설하지 않은 불법이 있습니까?" 남전 화상이 말했다. "있지요" 백장 화상이 말했다. "어떤 것이 남에게 설하지 않은 불법입니까?" 남전 화상이 말했다. "마음(心)도 아니요, 부처(佛)도 아니요, 중생(物)도 아니요." 백장 화상이 말했다. "설해 버렸군!" 남전 화상이 말했다. "나는 이렇습니다만, 스님은 어떻습니까?" 백장 화상이 말했다. "나는 큰 선지식이 아닌데, 어찌 설할 수 있는 불법과 설할 수 없는 불법이 있는지 알 수 있겠소" 남전 화상이 말했다. "나도 모르겠소(不會)." 백장 화상이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너무 많이 말했군!"

擧. 南泉參百丈涅槃和尙. 丈問, 從上諸聖, 還有不爲人說底法. 泉云, 有. 丈云, 作生是不爲人說底法. 泉云, 不是心, 不是佛, 不是物. 丈云, 說了也. 泉云, 某甲只恁, 和尙作生. 丈云, 我又不是大善知識. 爭知有說不說. 泉云, 某甲不會. 丈云, 我太爲說了也.

공안은 {전등록} 제9권 '백장유정(百丈惟政)장'에 전하고 있으며, {무문관} 제27칙에도 수록하고 있다. 대개 백장열반 화상은 백장회해(百丈懷海)의 법을 이은 법정(法正)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는 항상 {열반경}을 강의하였기 때문에 열반 화상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남전화상이 조카상좌가 되는 열반 화상을 참문한 것이 된다. 여기에 등장한 백장 화상은 마조의 제자 백장 유정(惟政) 화상으로 남전 화상과 법형제가 되는 선승인데, 그의 전기는 잘 알 수가 없다. {전등록}에도 백장유정과 백장열반을 동일인으로 취급하는 혼란이 보인다.

남전(普願 : 748~834) 화상의 전기는 {조당집} 16권, {송고승전} 11권 등의 자료에 전하고 있다. 출가하여 여러 곳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경율론 삼장을 연마했고, {중론(中論)}, {백론(百論)} 등을 연구하여 불교학에 통달했다. 당시 마조의 선풍이 유명하여 참문하고 그의 선법을 체득하였다. 특히 마조는 그의 대표적인 제자 서당(西堂)과 백장(百丈)과 남전 화상 세 사람이 밤에 달을 보고, 마조가 "정말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좋은가?" 질문하자, 백장은 좋은 수행을, 서당은 좋은 공양을 말하자, 남전은 소매를 떨치고 밖으로 나갔다. 이러한 제자들의 견해에 대하여, 마조는 "경은 서당, 선은 백장에게 돌아갔네. 오직 홀로 남전은 일체의 경계를 초월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불법은 체득해야… 설할 수 없어
부처님의 '일자불설(一字不說)'과 같은 것

남전 화상이 동문인 백장열반 화상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백장산을 찾아갔는데, 백장열반 화상은 남전의 의도를 먼저 파악하고 "예로부터 부처나 조사가 중생들에게 설하지 않은 불법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부처나 조사들이 중생들에게 설하지 않은 불법'이란 '설할 수 없는 불법'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중생을 위하여 8만4천 법문으로 모든 불법을 다 설하였고 그 설법을 기록한 것이 경전이며 어록이다. 그런데 선불교에서 제시한 문제는 8만4천의 법문은 중생을 위한 방편법문으로 불법의 진실을 언어 문자로 표현한 것이지만, 불법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부처님이나 조사도 '설할 수 없는 불법'이란 불법의 진실 그 자체를 중생들에게 설하고 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법의 진실을 각자 본인이 직접 체험하여 스스로 체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남전화상은 "있다"고 대답하고 있다. 부처님이 평생 동안 중생을 위하여 8만4천 법문을 설하고도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一字不說)고 {능가경}에서 주장하고 있다. 선불교에서 이 경전을 중시하는 것은 '일자불설(一字不說)'이라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선종의 슬로건도 {능가경}의 일자불설(一字不說)이란 정신을 토대로 주장한 것이며, 이러한 사실을 세존이 꽃을 들어 보이고 가섭이 미소로 대답한 '염화미소(拈華微笑)'로서 교외별전과 이심전심으로 전법이 이루어지게 된 사실의 증명으로 주장하게 된 것이다.

선불교의 새로운 출발은 세존의 일자불설(一字不說)과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경전에서 언어 문자로 전하는 방편법문과 오시팔교(五時八敎)의 교판으로 주장하는 교학체계을 극복하여 불법의 진실을 본인이 직접 체득하는 실천체험의 종교를 주장한 점이다. 이 공안은 이러한 입장에서 주장된 선문답이다. 부처님이 45년 동안 설법하고도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일자불설(一字不說)'이란 말이 {반야경}에는 곳곳에 보이고 있는 것처럼, 언어 문자에 걸림 없고(無碍), 집착 없고(無相), 머무름이 없는(無住) 반야의 논리를 말한다. 또 {반야경}에 "설사 열반의 경지를 초월하는 훌륭한 법이 있을 지라도 나는 꿈과 같고 환상과 같다고 설한다"는 말을 선승들이 자주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언어 문자는 방편법문이지 불법의 진실 그 자체는 아닌 것이며, 불법의 진실 그 자체는 부처나 조사도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여 설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설불급(言說不及), 혹은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등이라는 말로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불법은 각자 본인이 직접 체험하여 깨닫고 체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물을 마셔보고 차고 따듯함을 직접 체험해야 한다는 '냉난자지(冷暖自知)'는 선불교의 체험종교를 대변하는 말로 강조하고 있다.

장 화상은 "어떤 것이 남에게 설할 수 없는 불법인가?"라고 반문하자 남전화상은 "마음(心)도 아니요, 부처(佛)도 아니요, 중생(物)도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화엄경}에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설하고 있는 말을 토대로 하여, 마조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고 하고, 남전은 "마음도 아니고(不是心) 부처도 아니고(不是佛) 중생도 아니다(不是物)"라고 설하고 있다. 불법의 진실은 지금 여기서 불심(佛心)의 지혜작용을 말하는 것인데, 불심의 지혜작용(본래면목)을 "부처다, 마음이다, 중생"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표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남전은 "부처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중생도 아니다"고 언어삼매의 경지에서 불심의 지혜작용으로 밝히고 있을 뿐이다.

백장 화상은 "그렇게 말한 것은 설할 수 없는 불법을 설해 버린 것이 아닌가!"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남전 화상이 "나는 단지 이와 같이 제시했는데, 스님은 어떻게 설할 수 없는 불법을 제시하겠소?"라고 질문한 것이다. 그러자 백장 화상은 "나는 큰 선지식이 아닌데, 어찌 설할 수 있는 불법과 설할 수 없는 불법이 있는지 알 수 있겠소"라고 대답했다. 즉 백장 화상은 나는 대선지식이 아니라고 하며 뒤로 물러서서, '설할 수 있는 불법'과 '설할 수 없는 불법'에 대한 분별과 차별심에 떨어지지 않은 자신의 안목을 '부지(不知)'라고 제시하며, 남전 화상의 지혜작용(禪機)을 점검해 보고 있다. 남전 화상도 "나도 모르겠소(不會)"라고 대답했다. 남전이 말한 '불회(不會)'는 백장이 말한 '부지(不知)'와 같이 '설할 수 있는 불법' '설할 수 없는 불법'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이해하는 중생의 분별심에 떨어지지 않고, 근원적인 불심의 경지에서 일체의 상대적인 대립을 포용한 본래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말이다. 달마가 양무제에게 말한 '불식(不識)'도 같은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백장 화상은 "내가 그대를 위해서 너무 많이 말해 버렸군!" 하였다. 이 말은 '설할 수 없는 불법'에 대하여 남전은 "마음도 부처도 중생도 아니다"고 말한 것에 대하여 "너무 많이 말해 버렸다"고 한 것이다. 백장이 '부지(不知)'라고 했는데, 남전은 '불회(不會)'라고 대답한 것처럼, 설할 수 없는 불법에 대하여 두 사람이 많은 대화로 설한 것을 반성하고 있다.

설두 화상은 게송으로 읊고 있다. "조사나 부처는 예로부터 사람을 위하여 말하지 않았는데, 고금(古今)의 납승들은 다투어 언어 문자를 쫓고 있네. (남전과 백장의 본래면목) 거울(明鏡)이 비춘 모습은 다르지만, 모두 남쪽을 향하면서 북두성을 바라본다" 남전과 백장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시방세계와 하나가 되어 얼굴을 남쪽으로 하면서 북두성을 보고 있는 절대(불심)의 경지에서 '설할 수 없는 불법'을 거울과 같이 무심(無心)의 대화로서 설하고 있다.



[第029則]隨他去
〈垂示〉垂示云。魚行水濁。鳥飛毛落。明辨主賓。洞分緇素。直似當臺明鏡。掌內明珠。漢現胡來。聲彰色顯。且道爲什麽如此。試擧看。
〈本則〉擧。僧問大隋。劫火洞然大千俱壞。未審這箇壞不壞。隋云。壞。僧云。恁麽則隨他去也。隋云。隨他去。
〈頌〉劫火光中立問端。衲僧猶滯兩重關。可憐一句隨他語。萬里區區獨往還。

벽암록 29칙 대수화상의 시방세계를 멸망시키는 불길(劫火洞然)

“본래면목은 일체의 차별심 초월한 경지”

{벽암록} 제29칙은 대수 화상에게 "시방세계가 멸망하게 될 때 불성(본래면목)도 파괴되는가?"라고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대수법진 화상에게 질문했다. "시방세계가 종말하게 될 때 일어나는 맹화(猛火)는 일체의 모든 것을 불태워 삼천 대천의 시방세계가 멸망하게 되는데, 이것(본래면목)도 파괴됩니까?" 대수 화상이 말했다. "파괴된다." 스님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도 따라 갑니까?" 대수 화상이 말했다. "그도 따라 간다"

擧. 僧問大隋, 劫火洞然大千俱壞. 未審, 這箇壞, 不壞. 隋云, 壞. 僧云, 恁?則隋他去也. 隋云, 隋他去.


대수화상은 위산영우의 법을 이은 대안(大安: 793~883)선사의 제자 법진(法眞 834~919)을 말한다. 대수법진 화상에 대한 자료는 {조당집} 19권, {전등록} 11권 등에 전하고 있으며, {고존숙어록} 35권에는 그의 법문을 기록한 어록도 1권 전한다. 이 공안은 {전등록}에 의거하고 있으며, {종용록} 제30칙에도 인용하고 있다.

'평창(評唱, 글에 대한 평판)'에는 대수 화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대수법진 화상은 대안 선사의 법을 이었으며 60여명의 선지식을 참문하였다. 일찍이 위산영우선사의 문하에 있으면서 불(火)을 관리하는 소임(火頭)을 보고 있었다. 위산 화상이 '그대는 여기 여러 해 있었는데, 불법에 대해서 전혀 질문도 하지 않는구나'하자, '내가 무엇을 물어야 할까요?' 라고 하니, '그러면 무엇이 부처인가를 묻도록 하라'고 말했다. 대수 화상은 곧장 손으로 위산 화상의 입을 막아버리자 위산이 말했다. '이후로도 그대처럼, 모든 것을 쓸어버린 사람을 과연 내가 만날 수 있을까?' '그 뒤로 고향인 사천 동천(東川)으로 돌아가 붕구산 가는 길목에 차를 달여서 오가는 길손을 3년간이나 대접하고, 뒤에 세간에 나아가 대수산에서 법당을 열고 수행자를 지도하였다' 부처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 벌써 부처를 대상으로 보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주객(主客)이 나누어지며, 진불(眞佛)이 아니다. 그래서 대수 화상은 부처나 불법을 대상으로 제시한 상대적인 차별심을 모두 쓸어버리는 행동을 하고 있다."

본칙에 스님이 "시방세계가 종말하게 될 때 일어나는 맹화(猛火)는 일체의 모든 것을 불태워 삼천 대천의 시방세계가 멸망(劫火洞然 大千俱壞)하게 되는데, 이것(這箇)도 파괴됩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이 질문은 {인왕호국반야경}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토대로 하고 있다. "겁화(劫火)의 불길이 훨훨 타니 대천세계를 모두 파괴시킨다. 수미산과 거해(巨海)도 마멸하여 남김도 없고, 범천(梵天)과 천룡(天龍), 모든 유정(有情)도 모두 파멸해 버리는데, 어찌 이 몸이 남을 수가 있으랴!" 이 게송은 {조정사원} 제2권에도 인용하고 있는데, {구사론} '세간품'에 "성주괴공(成住壞空) 삼재겁(三災劫)이 일어나면 일체가 파괴된다"는 말이 있다. 겁(劫)은 성겁(成劫), 주겁(住劫), 괴겁(壞劫), 공겁(空劫)의 사겁(四劫)으로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는 영원한 시간을 말한다.

본칙의 질문은 괴겁(壞劫)에 관한 것으로 삼재(三災)가 있다. 먼저 큰 화재(火災)로 전 세계를 불태워 버리고, 그 위에 큰 수재(水災)로 일체를 씻어버리고, 다시 큰 풍재(風災)로 모든 것을 날려 버린다고 한다. 그리고 공겁(空劫)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겁화(劫火)는 괴겁(壞劫)에 일어나는 화재(火災)를 말하며, 삼천 대천세계를 모두 불태워 버리기 때문에 어떠한 존재도 남아 있을 수가 없는 것을 겁화통연(劫火洞然)이라고 한다.


'파괴되나… 안되나' 양쪽 다 편견
불성은 현재 자신의 삶의 자각주체

대개 모든 사람들은 우주는 파괴되어도 부처님이나 신(神)은 영원한 존재라고 믿고 있으며,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영원한 존재로서 천당과 극락에 간다고 믿고 있다. 종교의 목표는 영혼의 불멸(不滅)과 영생(永生)이며, 신(神)과 부처는 영원한 불멸의 존재로서 세계가 종말(終末)해도 신이나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과 천국으로 맞이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질문한 스님도 "겁화통연(劫火洞然)에 삼천 대천 세계가 모두 파괴되면 이것(본래면목)은 어떻게 되는가?"라고 질문하고 있다. 인연으로 생긴 모든 존재는 생주이멸(生住異滅)과 생노병사의 무상한 존재인데, 본래면목도 함께 파괴되는가 라는 질문이다. 즉 육체는 시절인연으로 죽어 없어지는데, 불성(마음)도 함께 파괴되는가? 육체와 마음(불성)을 나누고 불성을 영혼으로 착각하여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고 질문하고 있다. 즉 고정관념(常見)에 떨어진 것이다.

대수화상은 "파괴되고 말고. 본래면목도 영원한 불멸의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질문한 스님이 짊어지고 있는 영원한 존재라고 생각한 본래면목에 대한 집착과 착각을 떨쳐버리기 위한 자비심이다. 원오도 "구멍 없는 철추로 스님의 얼굴을 쳤다"고 평하고 있다. 불성(본래면목)은 중생의 생멸심(生滅心: 생사심)이 없는 자각의 주체이지 우파니샤드에서 주장하는 윤회의 실체로서 영원불멸의 존재인 영혼(Atman)은 아니다. 불성을 식신(識神: 중생심)으로 착각하면 정법의 안목 없는 불교인이고, 불성을 영혼으로 착각하면 불법을 모르는 외도가 된다.

스님은 "대천이 모두 함께 파괴되면 그(본래면목)도 함께 따라 본래의 공(空)으로 되돌아갑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즉 나는 지금까지 불성(본래면목)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일체의 존재와 함께 파괴되는 것입니까? 믿기 어렵다는 질문이다. 불법은 몸과 마음이 하나(身心一如)이며 본성과 형상이 둘이 아닌(性相不二) 경지를 설하고 있다. 혜충 국사가 "몸은 죽어 없어지지만 마음(불성)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을 들어 {육조단경}과 남방의 종지를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외도법을 불법으로 착각한 것을 지적하고 있다.

대수 화상은 "그렇다. 본래면목도 대천세계와 함께 파괴되고 말고"라고 말했다. 불성(본래면목)은 번뇌 망념의 생멸심이 없고, 시작과 마침도 없이 대천세계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오는 "앞의 화살은 그래도 가볍게 박혔으나 뒤에 화살은 깊이 박혔다"고 평하고 있다. 대답은 질문 속에 있다고 한 것처럼, 질문한 스님의 의문이 깊으면 깊을수록 대수화상의 대답이 깊이 골수에 박히게 된다.

'평창'에는 다음과 같은 일단도 전한다. "훗날 어떤 스님이 수산주(修山主)에게 질문했다. '겁화동연(劫火洞然)에 대천세계가 모두 타서 파괴되는데 이것(불성)도 파괴됩니가?' '파괴되지 않는다' '왜 파괴되지 않습니까?' '대천세계와 같기 때문이다' '파괴된다(壞)고 말해도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고, 파괴되지 않는다(不壞)라고 말해도 장애가 된다.'"

이 일단은 대수 화상의 대답과 반대로 대답하고 있다. '파괴된다'는 생각도 편견이요, '파괴되지 않는다'는 생각도 편견이다. 어떤 때는 긍정, 어떤 때는 부정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은 질문자의 견해에 따라서 방편으로 대답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성(본래면목)은 궁극적으로는 긍정(壞)과 부정(不壞)의 차별심(중생심)을 모두 초월한 경지이며, 일체의 만법과 하나 된 경지(萬法一如)에서 지금 여기 자신의 삶(일)을 지혜롭게 사는 자각의 주체인 것이다.

평창에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투자대동 화상이 이 스님을 통해서 대수 화상의 법문을 듣고 향을 올리고 절을 하면서 "서촉에 고불(古佛)이 출현하였다. 그대는 속히 돌아가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스님이 다시 대수화상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입적한 이후였다고 한다.

설두 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겁화(劫火)의 불빛 속에 질문을 던지니, 납승이 오히려 두 겹의 관문에 막혀 버렸구나." 질문한 스님은 "불성을 파괴(壞)하는가? 파괴하지 않는가(不壞)"라며 차별심에 떨어진 것을 두 겹의 관문에 막힌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가엾다. 그 스님은 대수 화상이 '그도 따라 간다'는 한 마디를 듣고 깨닫지 못하여 만 리 밖의 투자산 대동화상의 말을 듣고 되돌아오니 대수화상은 입적했다. 쓸데없이 대수산과 투자산의 먼길을 헛되이 애써 왔다 갔다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第030則]鎭州蘿蔔
〈本則〉擧。僧問趙州。承聞和尙親見南泉。是否。州云。鎭州出大蘿蔔頭。
〈頌〉鎭州出大蘿蔔。天下衲僧取則。只知自古自今。爭辨鵠白烏黑。賊賊。衲僧鼻孔曾拈得。

벽암록 30칙 조주화상과 큰 무(大蘿蔔頭)

“선은 '무' 맛을 보듯 직접 먹어봐야 알아”

{벽암록} 제30칙은 조주 화상과 진주에서 생산하는 큰 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떤 스님이 조주 화상에게 질문했다. "소문으로 듣기를 화상은 남전 선사를 친견(親見)하였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 조주 화상이 말했다. "진주에는 큰 무가 많이 나지."

擧. 僧問趙州, 承聞和尙親見南泉, 是否. 州云, 鎭州出大蘿蔔頭.

이선문답은 {조주록}에 전하고 있다. 조주 화상은 2칙과 9칙 등에 등장하고 있는 조주종심(趙州從 778~897)이다. 그는 학인들에게 임제나 덕산처럼 고함(喝)을 치거나 주장자를 휘두르는 거친 교화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입으로 한 두 마디의 말로써 불법을 자유롭게 설하여 지도하고 있다. 그래서 송대 법연선사는 조주의 입술에는 빛이 발한다는 의미로 구순피선(口脣皮禪)이라고 평하고 있다.

선불교는 인도에서 전래된 불법의 종교를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종교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선어록에는 생산노동과 관련된 쌀과 보리, 가지와 무 등의 식물과 호떡과 빵, 과자 등의 많은 음식물들이 선문답의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전등록}에 전하는 '청원화상과 여릉의 쌀값' '운문의 호떡'은 유명한 말이다. 조주 화상이 진주지방에 큰 무가 많이 생산된다는 말을 하자 {벽암록} 98칙에 무선(蘿蔔頭禪)이라는 새로운 선어가 만들어지고 있다.

{전등록} 13권에 어떤 스님이 "무엇이 고불심(古佛心) 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수산 화상은 "진주의 무는 무게가 세근이나 된다"고 대답하고 있다. 이 선문답도 조주의 고불심(古佛心)을 진주의 큰 무로 대답한 것을 토대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불(古佛)은 조사와 같이 존경한 경칭이다.

어떤 스님이 조주 화상에게 "소문으로 듣기를 화상은 남전 선사를 친견(親見)하였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라고 질문했다. 이 말은 {조주록}에 전하고 있는 것처럼, 조주 화상이 출가하여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선사를 참문하여 선법을 체득한 인연을 배경으로 질문한 것이다. 즉 조주가 사미로서 처음 남전 화상을 친견하니 마침 남전 화상은 방장실에 누워있었다. 남전 화상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자, 조주는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남전이 "상서로운 모습을 보았는가?" 라고 묻자, 조주는 "상서로운 모습은 보질 못했지만 누워있는 여래(如來)를 친견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남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주를 맞이하고, '평상심이 도'라는 법문으로 불법의 안목을 체득하게 한 전법상승의 기연을 토대로 질문한 것이다.


지금 여기 불법의 지혜로 살아야
과거의 일 문제 삼는 것은 무의미

특히 조주는 남전 선사를 40년이나 모셨고, 60살부터 제방의 선지식을 참문하는 구법행각을 하면서, '나보다 불법의 안목이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세살 어린애라도 가르침을 받고, 나보다 안목이 못하면 80 노인이라도 불법을 가르친다'는 원력을 세우고 20년을 유행했다. 나이 80살 때에 처음 진주 관음원에서 법당을 열고, 120살까지 수행자들을 지도했다. 이러한 조주 화상의 행적은 천하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질문한 스님도 "소문으로 듣기로"라고 정중하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전 화상을 친견하였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라는 질문은 간단히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를 하고, 선문답을 나눈 것을 확인하는 말이 아니다. {금강경}에 "만약 모양(色)으로 자아(自我)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聲)으로 구하려고 한다면 여래(如來)를 친견할 수가 없다"고 설한다. 질문한 스님은 소문으로 들은 것처럼, 조주 화상이 남전 선사를 친견하고 "누워있는 여래를 보았습니다"라고 한 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남전을 친견하고 체득한 불법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추궁하고 있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설한 여래와 조주가 남전을 보고 말한 여래는 똑같이 참된 자아의 법신(法身)을 말한다. 법신 여래는 감각기관인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불심의 지혜로 자각하여야 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누워있는 남전의 모습을 보고 조주가 "누워있는 여래를 보았다"고 말한 것을 근거로 남전을 친견한 것을 묻고 있는 스님은 '조주 화상이 남전(여래)을 친견한 것인가?'를 확인하고 있다. 조주와 남전을 구분한다면 주객의 상대적인 차별에 떨어지고, 조주가 누워있는 여래(남전)를 대상으로 친견했다면 조주와 남전은 올바른 친견이 아니라 대상의 여래를 친견한 차별에 떨어진 것이 된다. 즉 '조주 화상 당신은 남전 화상을 친견했다고 하는데, 남전 화상으로부터 전해 받은 불법은 어떠한 것입니까?'라는 질문인 것이다.

조주 화상은 "이곳 진주에는 큰 무가 많이 나지"라고 대답하고 있다. 진주는 조주 화상이 살고 있는 지명으로 큰 무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그래서 원오는 '평창'에 이 공안을 읽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주의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진주는 원래 큰 무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으며, '조주 화상이 남전을 친견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래서 스님이 '화상은 남전을 친견했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조주 화상은 '진주에는 큰 무가 많이 나지'라고 말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혀 관계없는 말이다. 이 공안을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된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에게는 하늘에 통하는 길이 있다. 듣지 못했는가? 어떤 스님이 구봉(九峰)스님에게 "제가 듣기로 스님(구봉)은 연수(延壽)스님을 친견하였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앞산에 보리가 익었는가?"라고 대답한 말을, 원오는 이 일단의 선문답도 본칙의 공안과 똑같은 내용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조주의 대답에 "하늘을 떠 바치고 땅을 버티고"라고 평하고 있다. 이 말은 조주의 대답은 천지(天地) 가득 무로 꽉 찼다는 의미인데, 조주와 무가 하나 된 경지, 조주화상은 만법(萬法)과 하나(一如) 된 법신(法身)의 입장에서 대답하고 있다는 말이다. 조주가 남전을 친견한 것도 본래면목의 지혜작용인 법신으로서 남전의 법신(여래)을 친견한 것이었다.

지금 조주 화상이 '진주의 큰 무'를 말하고 있는 것은 지금 여기의 상황(풍경)에서 자신이 남전 선사로부터 전해 받은 새로운 불법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남전의 '평상심이 도'라는 법문을 듣고 남전의 선법을 전해 받은 것은 과거의 일이지만, 결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남전 화상을 친견하고 전해 받은 불법은 항상 지금 여기서 항상 자신이 불법의 지혜로 살고 있다. 지나간 옛날이야기를 새삼스럽게 할 필요가 있는가? 지금 그대는 '내가 남전을 친견하고 선법을 전해 받은 사실'에 집착되어 있다. 내가 새롭게 제시한 불법을 그대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진주에 왔으니 유명한 진주의 큰 무를 맛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진주의 유명한 무가 어떤 맛인지 그대는 아는가? 본인이 직접 먹어보고 맛보는 수밖에 없다"고 조주 화상은 설하고 있다.

선은 항상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의 일을 통해서 불성의 지혜작용을 전개하는 것이다. 질문한 스님처럼 과거의 일이나 남의 일을 문제로 삼는 것은 무의한 일이며 자신의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다. 물을 마셔보고 물의 찬 맛과 따뜻한 맛을 자각하는 불성의 지혜작용이 자아의 법신(본래면목)을 친견하는 일이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조주 화상이 진주에 큰 무가 난다고 말하니, 천하의 납승이 조주를 흉내내며 선의 극칙으로 삼고 있네" 그러나 많은 수행자가 조주 화상의 말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줄만 알 뿐, 따오기는 희고 까마귀는 검은 것을 어떻게 분별할까?" 그리고 "도적놈! 도적놈! 납승의 본래면목(鼻孔)을 체득하게 했다"는 말은 조주 화상의 교화를 읊은 말인데, 조주 화상은 질문한 스님의 집착심을 뺏는 도적이 되어, 수행자가 자기의 본래면목을 체득하도록 하고 있다고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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