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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5) 41칙 ~ 50칙

벽암록 41칙 조주화상의 크게 죽은 사람 “잘못된 약으로 대선사 시험하는 건 무모” {벽암록}제41칙은 조주화상과 투자(投子)화상과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주화상이 투자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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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041則]投明須到
〈垂示〉垂示云。是非交結處。聖亦不能知。逆順縱橫時。佛亦不能辨。爲絶世超倫之士。顯逸群大士之能。向冰凌上行。劍刃上走。直下如麒麟頭角。似火裏蓮花。宛見超方。始知同道。誰是好手者。試擧看。
〈本則〉擧。趙州問投子。大死底人卻活時如何。投子云。不許夜行。投明須到。
〈頌〉活中有眼還同死。藥忌何須鑒作家。古佛尙言會未到。不知誰解撒塵沙。

벽암록 41칙 조주화상의 크게 죽은 사람

“잘못된 약으로 대선사 시험하는 건 무모”


{벽암록}제41칙은 조주화상과 투자(投子)화상과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주화상이 투자선사에게 질문했다. '크게 한번 죽은 사람이 되살아날 때는 어떻습니까?'
투자선사가 대답했다 '야간에 통행을 해서는 안 된다. 날이 밝으면 반드시 도착해야 한다.'

擧. 趙州問投子, 大死底人却活時如何. 投子云, 不許夜行投明須到.

조주화상에 대해서는 {벽암록} 제2칙에서도 언급하였다. 투자선사는 서주(舒洲) 투자산(投子山)에서 활약한 대동(大同:819~914)선사로서 취미무학(翠微無學)화상의 문하에서 나아가 선종의 종지를 완전히 깨닫고, 두루 유행하다가 투자산에 초암을 짓고 살았다.

{조당집}제6권 투자화상전에는 조주화상과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주화상이 투자산 밑에 이르니 가게를 보는 사람이 있어 물었다. "투자산이 어디인가?" 가게 주인이 "왜 물으시오?" 라고 했다. 조주화상은 "투자화상의 명성을 오래전부터 듣고 예배하려고 하오", 가게 주인은 "가깝기는 하나 산에 오를 필요가 없소. 내일 아침에 돈을 얻으러 올 것이니 그때 만나시요." 조주화상이 말했다. "그러면 투자화상이 오시면, 어떤 납자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지 마시요." 가게 주인이 승낙했다. 이튼날 과연 투자화상은 산에서 내려와 돈을 얻으니 조주가 나서서 붙들고 말했다. “투자의 명성을 들은 지 오래인데 이것뿐인가?" 투자화상은 이 말을 듣자마자 이내 몸을 숙이고 물러가서 다시 조리를 치켜들고 말했다. "소금 값을 주시오." 조주가 곧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니 투자화상은 그대로 돌아갔다. 조주가 좀 뒤떨어져 따라가면서 투자화상에게 질문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날 때는 어떻습니까?" 투자화상이 말했다. "야간에 통행을 해서는 안 되며, 날이 밝으면 반드시 도착해야 한다" 조주는 곧장 달아났다. 투자화상이 사미를 시켜서 조주를 쫓아가 그렇게 행동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자, 조주는 "태백(太伯)을 만났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투자화상은 크게 웃었다고 한다. '태백(太伯)을 만났다'는 것은 투자화상을 큰 선지식으로 존경한다는 의미이다.

먼저 조주화상이 질문한 "크게 한번 죽은 사람(大死底人)이 되살아날 때는 어떻습니까?"라는 말은 선수행을 통해서 불법의 궁극적인 경지를 체득하여 불법의 지혜작용을 자유롭게 펼치는 것을 말한다. 선어록에 크게 한번 죽어야 한다는 의미로 대사일번(大死一番)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죽음(死)은 아상(我相), 인상(人相)의 자아의식과 중생심(生滅心)을 완전히 텅 비운 공(空)의 실천수행을 말하며, 삶(活)은 일체의 번뇌 망념의 생사심(生死心, 중생심)과 사량 분별을 여의고 철저히 크게 깨달은 무심(無心)의 경지에서 불심의 지혜작용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선어록에서 사활(死活)은 번뇌 망념을 죽이는 칼(殺人刀)과 지혜작용을 살리는 칼(活人劍)과 같은 의미이며 살활자재는 뛰어난 선승의 기지(機智)로서 번뇌 망념을 죽이고, 지혜작용을 살리는 지혜를 자유자재로 한다(殺活自在)고 주장하고 있다. 사활(死活)을 육체적인 생사로 이해하여 깨닫게 되면 육체적인 생사자재(生死自在), 생사해탈을 얻은 경지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불교는 육체적인 임종을 위한 종교도 아니고, 사후의 영생을 얻기 위한 종교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불심으로 위대한 보살도의 삶을 잘 사는 지혜를 체득하는 종교이다.


조주의 '사활(死活)'경계 묻는 질문에
투자화상은 초월한 경지서 대답

그런데 조주는 크게 한번 죽은 사람이 되살아날 때는 어떠한가를 묻고 있다. '되살아났다(活)'는 것은 죽음(死)의 체험을 토대로 한 말이다. 선불교에서 죽음(死)이나,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인다(殺)는 표현은 부처나 조사라는 편견과 고정관념 등 나쁜 업장을 만드는 중생심을 텅 비우는 공(空)의 실천이며, 살린다는 것은 불심의 지혜작용을 펼치는 것을 말한다.

{전등록} 제20권 소주 영광원의 진(眞)선사는 다음과 같이 법문하고 있다. "말끝이 조금만 어긋나도 고향(깨달음의 경지)은 만 리 밖이니, 반드시 절벽에 매달린 손을 놓아야(懸崖撒水) 스스로 깨달을 수가 있다. 죽었다 다시 소생하는 일(絶後蘇生), 그대를 속일 수가 없는데, 비상한 종지를 뉘라서 숨기랴!" 즉 '백 척의 장대 끝에서 다시 한 걸음 더 허공에 몸을 날려야 한다(百尺竿頭 進一步)'는 말과 같이 깨달음의 경지에도 머물지 않고 초월하지 않으면 불심의 지혜의 작용은 되살아 날 수가 없는 것이다.

{법화경}에 몸을 불태워서 공양하는 소신(燒身)공양 이야기가 있는데, 정말 육체를 불태워 공양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자신의 육체를 불태워 누구에게 공양하는가. 부처님께 공양하려면 부처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부처는 각자의 청정한 마음이기에 소신공양은 육체를 불태워 공양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가장 귀중한 신명(身命)까지도 아끼지 않고 불태워 공양한다는 것은 신명보다도 더 중요한 불법을 깨닫는 법공양을 말한다. 따라서 신명을 아끼는 자아의식을 갖는 마음을 불태워 멸각시키며, 아상과 아집을 완전히 불태워 버리는 공(空)의 실천을 소신공양으로 설한 것이다. 신명까지 불태워 없애버리는 소신공양은 참다운 불법을 깨달아 지혜로운 삶을 실행하는 보살도의 법공양이 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조주가 질문한 아상 인상의 자아의식과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죽이고, 불심의 지혜작용을 되살아나도록 한 경지는 어떠한가. 사활(死活)의 어느 한 쪽에 머문다면 사활자재(死活自在)한 작용이 불가능한 것이다. 투자선사는 "한 밤중에 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니 어두운 한밤에 다니지 말고, 날이 밝으면 내일 반드시 도착해야 한다"라고 대답하고 있는데, 상당히 어려운 말이다. 밤은 암흑(暗)이고, 낮은 밝음(明)인데, 어둠을 피하고 밝음을 선택하며, 취사 분별하는 중생심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어둠과 밝음을 모두 함께 초월하라는 말이다. 조주가 죽고 사는 사활(死活)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경지를 질문한 것에 대하여 투자는 명암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입장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석두화상 {참동계(參同契)}에 "밝음(明) 가운데 어둠(暗)이 있거든 어둠으로 만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둠 가운데 밝음이 있거든 밝음으로 만났다고 생각하지 말라. 밝고 어둠이 서로 각각 상대함은 마치 앞뒤의 걸음걸이와 같다"라고 읊고 있다. 조주가 제시한 사활(死活)과 투자가 대답한 명암(明暗)은 삼라만상의 차별경계를 말한다. 인간은 사바세계의 차별세계를 떠나서 살수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차별경계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이 세운 원력의 보살도를 실천하는 길을 무심의 경지에서 걸어가는 것처럼, 차별경계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체득하도록 불법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다.

원오도 '도적은 도적을 안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조주와 투자는 각자의 선기를 잘 파악하고 있는 선승이라고 평가하고 있으며,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살아있는 가운데 안목을 갖추면 죽은 것과 같네." 조주는 원래 죽은 사람이 아니라 크게 살아있는 안목을 갖춘 선승인데, 지금 투자화상을 감별해보기 위해 도리어 죽은 사람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함께 먹으면 안 될 약으로 어찌 작가를 감별하려고 하는가' 약기(藥忌)란 환자가 약을 복용할 때에 금기해야할 식물이다. 지황에 무우라든가, 철제(鐵劑)에 차(茶)를 함께 먹지 않도록 금기하는 것을 말하는데, 대승의 불법에서 사활(死活)의 차별을 논의한다는 것은 금기해야할 말이다. 불법은 사활(死活)없는 건강한 불심을 체득하는 것인데, 금기해야할 사활(死活)의 차별심을 가지고 투자와 같은 대선사를 감별해 보려고 한 것은 쓸데없이 무모한 일이었다. '고불(古佛)도 오히려 이르지 못했다고 했네.' 사활(死活)을 초월한 경지는 삼세제불도 아직 도달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제불도 도달했다고 말하지 않는 경계는 어떠한 경지인가. 불법은 체득했다고 하는 것은 올바른 체득이 아니다. 그래서 불가득(不可得), 무소득(無所得)의 경지이기 때문에 불법을 체득했다고, 전해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량분별의 중생심인 것이다. "그 누가 티끌 모래를 뿌리는가?" 투자는 조주의 질문에 뛰어난 안목으로 접화한 수단이 있었다고 읊고 있다.



[第042則]握雪團打
〈垂示〉垂示云。單提獨弄帶。水拖泥敲唱俱行。銀山鐵壁。擬議則髑髏前見鬼。尋思則黑山下打坐。明明杲日麗天。颯颯淸風匝地。且道古人還有[言+肴]訛處麽。試擧看。
〈本則〉擧。龐居士辭藥山。山命十人禪客。相送至門首。居士指空中雪云。好雪片片不落別處。時有全禪客云。落在什麽處。士打一掌。全云。居士也不得草草。士云。汝恁麽稱禪客。閻老子未放汝在。全云。居士作麽生。士又打一掌。云眼見如盲。口說如啞。雪竇別云。初問處但握雪團便打。
〈頌〉雪團打雪團打。龐老機關沒可把。天上人間不自知。眼裏耳裏絶瀟灑。瀟灑絶。碧眼胡僧難辨別。

벽암록 제42칙 방거사와 눈 이야기

“눈내리는 풍광 보려면 눈부터 떠라”


{벽암록}제42칙은 방거사가 눈이 오는 모습을 보고 말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방거사가 약산선사를 방문하고 하직할 때, 약산은 열명의 선승들에게 방거사를 산문 앞에 까지 전송하도록 지시했다. 방거사는 마침 허공에 날리고 있는 눈송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멋진 눈이야! 눈송이 하나하나가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는군!' 그때 선승들이 모두 방거사 곁에서 말했다. '어느 곳에 떨어집니까?' 방거사는 손바닥을 한번 쳤다. 선승들이 모두 말했다. '거사는 지나친 행동을 하지 마시오.' 거사는 말했다. '그대들이 이 정도의 안목으로 선객이라고 한다면 염라대왕이 용서해주지 않으리라.' 선객들은 말했다. '거사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거사는 또다시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눈은 뜨고 있지만 장님 같고, 입은 벌려도 벙어리 같다.' 설두도 달리 착어했다. '처음 물었을 때 눈을 뭉쳐서 곧바로 쳤어야지.'

擧. 龐居士, 辭藥山. 山, 命十人禪客, 相送至門首. 居士, 指空中雪云, 好片片, 不落別處. 時, 有全禪客云, 落在什處. 士, 打一掌. 全云, 居士, 也不得草草. 士云, 汝恁稱禪客, 閻老子未放汝在. 全云, 居士作生. 士, 又打一掌云, 眼見如盲, 口說如啞. (雪竇別云. 初問處, 但握雪團便打.)


내리는 눈보며 만법 귀결처 제시
본분사 낙처 모르는 선승에 독설

본칙의 이야기는 {방거사어록}에 전하고 있다. 선어록에 선승들을 바보로 취급하는 많은 노파와 거사가 등장하고 있지만, 방거사는 중국선종의 역사에 거사로서 유일하게 어록을 남기고 있는 안목이 뛰어난 인물이다.

{조정사원}제3권에 '거사는 네 가지 덕을 갖춘 인물이다. 첫째는 관직을 탐착하지 않고, 둘째는 적은 욕심으로 덕을 쌓고, 셋째는 재산이 있는 큰 부자로, 넷째는 불도를 잘 수호하며 스스로 깨달음을 체득한 인물이다. {보살행경}에 재물이 있는 사람, 세속에 거주하는 사람, 산중에 거주하는 사람, 불법을 체득한 사람을 통칭하여 거사라고 한다.'고 전한다.

방거사의 이름은 방온(龐蘊: ? ~808)이며, 자를 도현(道玄)이라고 하였고 형주(호남) 형양현 출신인데, 부친은 이 고을의 태수였다. 단하천연선사와 과거시험을 가다가 마조의 선원인 선불장(選佛場)으로 가서 참문하여 불법을 깨닫게 된 이야기는 유명하다.

방거사는 석두희천선사의 선법을 이은 거사로서 제방의 훌륭한 선승들과 많은 문답을 나누었고, 처와 딸 영조(靈照)와 함께 대나무로 조리를 만들어 팔면서 청빈하게 살면서 가족이 모두 불법을 깨달아 독자적인 안목을 갖춘 재가불교인이었다.

원오도 '평창'에 방거사가 처음 석두화상을 참문하여 "만법과 짝을 삼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을 하니,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석두화상이 방거사의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깨친 바가 있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날마다 하는 일 별다른 것이 없네, 나 스스로 마주칠 뿐이다. 사물에 대하여 취하고 버리려는 망심이 없고, 곳곳마다 펴고 오무릴 차별심도 없으니, 붉은 빛 자주 빛을 그 누가 분별하랴! 청산은 한 점 티끌마저 끊겼네. 신통과 묘용이란 물긷고 나무하는 일이다.'

그 뒤에 마조를 방문하고 또 똑같이 "만법과 짝을 삼지 않는 자는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하자, 마조는 "그대가 서강(西江)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실 때 대답해 주마."라는 말에 크게 깨달았다.

{조당집} 제15권에는 방거사가 붓으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고 한다. '시방에서 한 모임에 같이하여, 각각 무위(無爲)의 법문을 배운다. 여기가 바로 부처를 선발하는 장소이니, 번뇌 망심을 비우면 급제하여 돌아가리.'

본칙은 방거사가 약산유엄(惟嚴:751~834)선사를 방문하고 하직할 때, 약산은 열명의 선승들에게 방거사를 산문 앞에까지 전송하도록 지시했다. 약산 역시 석두의 제자로서 방거사와는 동문인데, 늙고 안목있는 거사에 대하여 정중하고 각별한 예의를 갖춘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산문 앞에서 방거사는 때마침 허공에 날리고 있는 눈송이를 가리키며, '정말 눈이 내리는 풍경은 멋있군! 눈송이 하나하나가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떨어져야할 장소에 떨어지는군!'이라고 말했다. 방거사는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시절인연의 여법한 풍광(風光)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으며, 눈이 내리는 광경에 의거하여 만법의 귀결처인 자기의 본분사의 낙처를 제시하고 있다.

즉 방거사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제시하여 열명의 선객들에게 각자 선승으로서 본분사의 낙처를 파악하고 있는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때 열명의 선승들이 모두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어느 곳에 떨어집니까?'라고 질문했다. 방거사가 던진 문제에 걸려든 것이다.

그때 방거사는 손바닥을 한번 치자 선승들이 모두 '거사는 지나친 행동은 하지 마시오.' 라고 말했다. 거사가 손바닥을 탁! 친 것은 눈이 떨어지는 곳(낙처)를 가탁하여 그대들은 선승으로서 각자 본분사의 낙처도 모르는가? 질책하고 있는 행위임과 동시에 지금 손바닥을 치는 일이 각자 본래면목의 지혜작용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라는 의미로 친절하게 본분사의 낙처(落處)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방거사는 '그대들이 이 정도로 본분사의 낙처도 모르는 안목으로 선객이라고 한다면 염라대왕이 용서해주지 않으리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객들은 입을 닫지 않고 모두가 '거사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방거사는 또다시 손바닥을 쳤다. 방거사가 또다시 손바닥을 친 행동에 원오는 '눈위에 서리를 더한 것(雪上加霜)'이라고 착어한 것처럼, 선승들에게 다시 한번 낙처를 친절하게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눈은 뜨고 있지만 장님 같고, 입은 벌려도 벙어리 같다.'라고 선승들의 안목을 평하고 있다. 즉 눈을 뜨고 사물을 보고는 있지만, 이렇게 멋진 눈이 내리는 여법한 제법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장님과 다름없고, 입을 벌리고 이러쿵 저러쿵 곧잘 말을 하면서도 자기 본래면목의 지혜작용(落處)을 전혀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혜롭게 말하지 못하는 모습이 벙어리 같다고 신랄하게 독설을 퍼붓고 있다.

설두는 다른 견해로 '처음 방거사가 선객들에게 물었을 때, 선객들은 눈을 뭉쳐서 곧바로 방거사의 문제제기를 쳐버렸어야지!'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처음 방거사가 눈이 오는 모습을 보고 문제를 제시했을 때 곧바로 눈을 뭉쳐서 절대평등한 깨달음의 경지를 제시한 문제의 근본을 쳐날려 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방거사의 문제제시에 걸려서 열 명의 선승들이 방거사에게 이렇게 형편없이 비판받게 되었다는 입장으로 코멘트를 제시하고 있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눈덩이로 쳐라, 눈덩이로 쳐라!' 방거사가 이렇게 멋진 눈이 다른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에 맞추어 눈을 뭉쳐서 방거사가 제시한 시절인연의 여법하고 절대 평등의 깨달음의 경지를 쳐부수는 수단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지혜작용과 방편의 수단이 있어야 방거사의 선기(禪機)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고, 방노인의 지혜방편으로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천상과 인간도 전혀 알 수 없으리.'라는 말은 온천지에 흰 눈으로 가득찬 풍경은 천상계나 인간세계에서도 스스로 알 수 없는 경지이다. 마치 새가 허공을 날면서 허공을 모르고, 고기가 물속에 헤엄치지만 물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일체 만물이 모두 차별심 분별심이 없이 무심한 경지에서 제법의 참된 실상이 여법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눈과 귀도 깨끗하고 산뜻하다.' 인간이 차별심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은 눈으로 사물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는 분별작용 때문인데, 만법과 하나 된 무심의 경지는 눈과 귀로 분별심 차별심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청정하고 산뜻한 것이다.

'산뜻하고 깨끗함이여!' 천지 가득 흰눈 일색(一色)으로 만법이 청정한 절대 평등의 세계와 무심(無心)의 경지에 만법과 하나 된 깨달음의 세계를 '파란 눈을 가진 달마선사도 파악하기 어렵다.' 방거사나 달마, 설두가 모두 흰눈으로 가득 찬 절대 청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사는 참된 소식을 전하고 있다.



[第043則]無寒暑處
〈垂示〉垂示云。定乾坤句。萬世共遵。擒虎兕機。千聖莫辨。直下更無纖翳。全機隨處齊彰。要明向上鉗鎚。須是作家爐[糒-米+韋]。且道從上來還有恁麽家風也無。試擧看。
〈本則〉擧。僧問洞山。寒暑到來如何迴避。山云。何不向無寒暑處去。僧云。如何是無寒暑處。山云。寒時寒殺闍黎。熱時熱殺闍黎。
〈頌〉垂手還同萬仞崖。正偏何必在安排。琉璃古殿照明月。忍俊韓獹[犭+盧]空上階

벽암록 43칙 동산화상의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

“피할 수 없는 것이면 직접 부딪쳐라”


{벽암록} 제43칙은 동산양개(洞山良价)화상의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으로 가라는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동산화상에게 질문했다. '추위와 더위가 닥치면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동산화상이 말했다. '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는가.' 스님이 질문했다.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 동산화상이 말했다. '추울 때는 그대가 추위와 혼연 일체가 되고, 더울 때는 그대가 더위와 하나가 되도록하라!'

擧. 僧問洞山, 寒暑到來, 如何廻避. 山云, 何不向無寒暑處去. 僧云, 如何是無寒暑處. 山云, 寒時寒殺黎, 熱時熱殺黎.


인간의 生死대사에 비유해 질문
회피말고 초월해야 궁극적 해탈

본칙 공안은 {조당집}과 {전등록}에는 전하지 않고 있으며 출처가 분명치 않다. {사가어록(四家語錄)}의 {동산록}과 {설두송고} 43칙에 수록하고 있는 것처럼, 송대에 주장된 화두라고 할 수 있다. 동산양개(807~869)화상은 조동종(曹洞宗)의 개창자로 그의 전기는 {조당집} 제6권, {전등록} 15권, {송고승전} 12권에 전하고 있으며, 그의 법문집인 어록도 전하고 있다. {조당집} 제5권에는 운암화상과 동산의 사자(師資) 전법의 인연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운암선사가 입적하려고 할 때 동산이 질문했다. 화상께서 백년 뒤에 누군가가 '화상의 초상을 그릴 수가 있는가?' 질문한다면 그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할까요? 운암선사가 대답했다. '다만 그에게 단지 이러한 사람(只這漢)이었다고 하라.' 동산이 한참 침음하거늘 운암선사가 말했다. '이 한 문제는 밤송이 같아서 삼켜도 넘어가지 않는다. 천생 만겁에 쉬어야 한다. 그대가 한 생각 잠깐 일으켜도 번뇌의 풀이 한 길이나 깊을 터인데, 하물며 말로서 표현 하겠는가.' 운암선사는 동산이 깊이 사유하는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 속마음(哀情)을 설하려고 하자, 동산이 말했다. '설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사람 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함일 뿐이니, 이 본분사의 일을 위해 애를 씁니다.'"

운암선사가 입적한 뒤 신산(神山)과 함께 담주(潭州)에 이르러 동산이 개울을 건너다가 물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깨닫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절대로 남에게서 불도를 찾으려 하지 말라. 점점 나와는 더욱 멀어질 뿐이다. 나(我)는 지금 홀로 가지만, 곳곳에서 그(渠)를 만난다. 그(渠)는 지금 바로 나(我)이지만, 나(我)는 이제 그(渠)가 아니다. 응당히 이렇게 깨달아야, 비로소 본래와 여여(如如)하게 계합하리라."

운암선사가 제시한 '단지 이러한 사람(只這漢)'은 운암의 본래면목(본래인)을 말하는데, 동산은 그(渠)로서 체득한 것이다. 동산이 말한 나는 자기 본래이고, 그(渠)는 물속에 비친 자기 모습(그림자)이다. 동산의 오도송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는 바로 나(渠是我)'라고 말하지만, '나는 바로 그(我是渠)'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인데 그것은 나와 그는 하나이며, 주객(主客)이 둘이 아닌 본래인의 경지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조당집} 4권에 약산이 법당에 오르자 어떤 스님이 '화상은 누구의 법을 이었습니까?' 라고 질문했다. '오래된 불전에 한 줄의 글자를 주었다.' '거기에 무엇이라고 씌어 있습니까?' '그는 나를 닮지 않고, 나는 그를 닮지 않았다(渠不似我, 我不似渠)' 동산의 게송은 이 말을 토대로 한 것인데, 여기서 나(我)와 그(渠)는 하나(一如)이며, 불이(不二)이며 불이(不異)인 여여(如如)한 일체인 것이기 때문에 닮은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닮았다고 한다면 나와 그가 서로 상대하는 이원(二元)의 차별경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어떤 스님이 동산화상에게 '추위와 더위가 닥치면 어디로 피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했다. 여기서 말하는 더위와 추위는 기상날씨의 현상이지만, 여기서는 인간의 생사대사(生死大事)로 비유하여 질문한 것이다. 더위나 추위는 회피할 수 없는 시절인연인 것처럼, 인간의 생사도 도망가거나 회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질문하는 스님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 '생사(生死)가 도래하면 어떻게 회피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동산화상은 '그대는 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추위와 더위는 차별심이며 생사 망념의 중생심에 떨어진 것이지만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은 인간 정식(情識)의 갈등과 망념의 생사(生死)를 초월한 불생불멸의 경지를 말한다. 절대 깨달음의 경지인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이며, 음양(陰陽)의 차별심이 미치지 않는 곳이다. 동산이 말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無寒暑)'이란 말은 평범한 한마디이지만 정법의 안목이 없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당연히 의심이 생긴다. 그래서 스님도 '그러면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추위와 더위가 시절인연이 도래하는 그 밖에 달리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생사(生死)와 열반을 나누고 번뇌와 보리를 구분하는 중생의 차별심에 떨어진 것이다. {유마경}에서 설하고 있는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과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대승의 불법을 체득하지 못한 안목없는 졸승인 것이다.

동산화상은 '추울 때는 그대가 추위와 혼연일체가 되고, 더울 때는 그대가 더위와 하나가 된다면 그곳이 바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이라고 설했다. 즉 추위와 더위를 대상으로 두고 피하려고 하지 말고, 추울 때는 철저하게 추위와 일체가 되고, 더울 때는 철저하게 더위와 일체가 되도록 하라는 말이다. {전등록} 20권 조산혜하장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선사가 말했다. '수행자여! 몹시 덥군!' '그렇습니다.' '이런 더위는 어디로 가서 피할까.' '끓는 가마솥이나 숯불 속에서 피합니다.' '끓는 가마나 숯불 속에서 어떻게 피하겠는가.' ' 많은 고통도 미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사는 잠자코 있었다." {조당집} 5권 운암장에 동산이 "마치 어떤 사람이 끓는 가마나 숯불속의 지옥에 들어가서도 타거나 데이지 않는 것 같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동산의 무한서(無寒暑) 공안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백낙천의 시에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려고 미친 듯이 뛰어 다니지만, 홀로 항(恒)선사는 방에서 나오지도 않네. 선방엔들 무더위가 없으랴만, 단지 마음이 차분하면 몸도 시원한 것"이라고 읊고 있다. 또한 당대의 시인 두순학(杜荀鶴)이 오공(悟空)선사의 참선수행에 대하여 "삼복더위에 문을 닫고 승복을 걸친 스님, 소나무 대나무 그늘이 선방을 덮지도 않네. 참선은 반드시 산수(山水)의 경치를 필요치 않나니, 마음에 망념이 없으면 불길도 저절로 시원하리"라고 읊고 있다. '평창'에도 황용 오신(黃龍悟新)선사는 이 시를 인용하여 해설하고 있다.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추울 때는 추위와 더울 때는 더위와 하나가 되는 것이며, 궁극적인 해탈이란 추위와 더위도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까지 초월해야 하는 것이다. {벽암록} 40칙 평창에 "고인(덕산연밀)이 모든 건곤 대지가 바로 하나의 자기이며, 온 천지가 추우면 춥고, 더우면 온천지가 덥다"고 했다. 시방세계와 자기가 하나인 것이기 때문에 추울 때나 더울 때나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하고 있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교화의 손을 드리우면 만길 벼랑과 같다"는 말은 동산이 추위와 더위도 없는 곳으로 가라는 법문은 중생교화의 자비심이지만, 그 말은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없는 만길 벼랑과 같은 험준한 말이다. "정위(正位)와 편위(偏位)를 나눌 필요가 있겠는가." 동산이 오위송(五位頌)에서 주장하는 평등(正位)과 차별(偏位)의 기준을 가지고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을 배치할 필요가 있겠는가. 무한서(無寒暑)의 정위(正位)와 한서(寒暑)의 편위(偏位)를 나눌 필요가 없이 한서(寒暑)가 그대로 무한서(無寒暑)인 것처럼, 동산의 법문은 정편(正偏)이 원융무애한 경지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

"유리궁전에 비치는 밝은 달이여! 영리한 개(韓)가 괜히 섬돌을 오른다."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고사로 한씨집의 개는 영리한 것처럼, 질문한 스님은 동산의 법문에 이런 도리 저런 도리를 궁리하여 찾아보지만 진실은 체득하지 못하고 헛된 일만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第044則]解打鼓
〈本則〉擧。禾山垂語云。習學謂之聞。絶學謂之鄰。過此二者。是爲眞過。僧出問。如何是眞過。山云。解打鼓。又問。如何是眞諦。山云。解打鼓。又問。卽心卽佛卽不問。如何是非心非佛。山云。解打鼓。又問。向上人來時如何接。山云。解打鼓。
〈頌〉一拽石。二般土。發機須是千鈞弩。象骨老師曾輥毬。爭似禾山解打鼓。報君知。莫莽鹵。甛者甛兮苦者苦。

벽암록 44칙 화산화상의 북솜씨

“깨달음은 북을 치는 것처럼 무심의 경지”


{벽암록} 제44칙은 화산 무은화상(891∼961)의 "쿵쿵 쿵더쿵!" 법문을 싣고 있다. 화산화상이 수시했다. "글을 배워 얻은 지식을 문(聞)이라 하고 다 배워 더 배울 것이 없음을 인()이라 한다. 이 두 가지를 초월한 것, 그것을 진과(眞過)라 한다." 한 스님이 "그 진과란 어떤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화산화상은 "내게 북 솜씨가 있지 - 쿵쿵 쿵더쿵!"이라고 답했다. "그럼 진과도 초월한 성제(聖諦)의 제일의(第一義)란 무엇입니까"하고 스님이 또 질문했다. 화산화상은 이번에도 "쿵쿵 쿵더쿵!"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이 마음이 곧 불심(佛心)임은 잘 알고 있으니까 그건 그대로 두고, 비심비불은 어떤 겁니까"하고 또 다시 파고들었다. 화산화상은 그래도 "쿵쿵 쿵더쿵!"이라고 답했다. 단념하지 않고 스님이 "부처님이나 달마 같은 한층 훌륭한 분이 오신다면 어떻게 맞겠습니까"하고 물었다. 화산화상은 끝까지 "쿵쿵 쿵더쿵!"이라고 말했다.

擧. 禾山, 垂語云, 習學謂之聞, 絶學謂之, 過此二者, 是爲眞過. 僧出問, 如何是眞過. 山云, 解打鼓. 又問, 如何是眞諦. 山云, 解打鼓. 又問, 卽心卽佛, 卽不問, 如何是非心非佛. 山云, 解打鼓. 又問, 向上人來時如何接. 山云, 解打鼓.


'북 잘 친다'는 무애한 지혜상징
불도를 가르치는 뛰어난 방법

화산화상은 무은(無殷 884~960)선사로 설봉의존(雪峰義存)에게 출가하여 11년간 시봉하고, 설봉이 입적한 뒤에 구봉도건(九峰道虔)선사의 법을 계승하고 길주 화산의 대지원에서 교화를 펼친 선승이다. 그의 전기는 서현(徐鉉)이 지은 비문이 있고, {조당집} 12권, {전등록} 17권, {오등회원} 6권, {선림승보전} 5권 등에 전하고 있다. {조당집}에는 화산화상의 법문과 선문답이 많이 수록되어 있지만 이 공안은 보이지 않는다. 화산화상의 법문을 잠간 들어보자. '대개 불도를 가르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니, 각자가 자신의 주인이 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옛날부터 노숙들이 제자들에게 사문이란 하루 24시간을 잠깐이라도 주인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고, 한 시각도 등져서는 안 된다. 상근기는 한번 퉁기면 곧 지혜가 작용하지만, 중하(中下)근기는 공훈에 떨어진다. 밤낮으로 부지런히 애써서 망심과 의식을 텅 비워서 인연의 연결이 끊어진 길과 같이 되도록 하라.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할지라도 역시 남의 말을 빌린 것임을 면하지 못하리라.' 불도수행은 일체의 시간을 깨달음의 지혜로운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법문이며 남의 말에 의거하지 말고 자신이 체득한 경지의 법문을 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화산화상이 대중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설법했다. '배우고 익히는 습학을 들음(聞)이라 하고, 배움이 없는 것(絶學)을 가까움(隣)이라고 한다. 그러나 습학과 절학을 초월해야 참된 초월이라고 할 수 있다.' 화산의 설법은 승조의 저술로 주장하는 {보장론}에 '불도를 배움에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진(眞)이라 하고, 두 번째는 인(隣)이라 하고, 세 번째는 문(聞)이라고 한다. 습학은 문이라고 하고, 절학(絶學)은 인이라고 하고, 습학과 절학을 초월한 것을 진이라고 한다'는 일절에 의거한다. 습학(習學)은 {논어}에 '배우고 때대로 익히면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말에 의거하여 점차적인 수행(漸習)의 입장이고, 절학은 {노자} 20장의 '절학무우(絶學無憂)'에 의거한 돈오의 입장을 말한다. 그리고 인은 {회남자(淮南子)}에 '여덕위인(與德爲)'에 의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보장론}에는 불도 수행에 '진(眞), 인(隣). 문(聞)'의 세 종류를 세우고, 불도수행을 배우고 익히며 아직 완전히 자신의 몸에 베이지 않았기 때문에 문을 습학이라고 설하고 있는데 점착적인 수행(漸修)을 말한다. 절학은 {증도가}에서 '일체의 작위성이 끊어지고 불도수행에 배움의 대상이 없어진 한가한 도인(絶爲無學閑道人)'이라고 읊고 있는 것처럼, 불법도 모두 배웠고 습학과 작위도 초월한 무애자재한 경지를 체득한 돈오의 입장이다. {노자}의 절학(絶學) 무위(無爲)를 선수행의 경지에서 말한 것이다. 불교의 수행을 계(戒), 정(定), 혜(慧) 삼학으로 종합하고 있는 것처럼, 삼학의 수행을 대상으로 수행하지 않고 완전히 끝낸 깨달음을 체득한 아라한을 무학(無學)의 성자라고 한다.

대승보살도의 수행에서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52위를 설정하고 있는데, 십지보살은 습학의 경지(聞), 51위 등각은 절학(絶學), 최상의 묘각은 일체를 초월한 참된 깨달음(眞)을 체득한 입장으로 구분하고 있다. 등각은 최상의 묘각과 같은 경지지만 엄격히 묘각과 구분하고 있다. 등(等)은 같다는 의미인데, 절학의 인과 같은 표현이다.

화산화상은 선은 불도를 배우고 익히는 습학(聞)과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와 비슷한 절학()까지 완전히 초월한 참(眞)된 깨달음을 체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어떤 스님이 '무엇이 습학과 절학을 초월한 참된 깨달음(眞過)의 경지입니까?' 라고 질문하자, 화산화상은 '나는 북을 잘 친다(解打鼓)' 라고 대답했다. 북을 잘 치는 것이 어째서 습학과 절학의 경지를 초월한 참된 깨달음의 경지인가? 선원에서 식사시간, 노동시간 등 시간을 알리는 신호로 북을 친다. 원오는 화산의 대답을 '쇠막대(鐵)'라고 착어하고 있다. 이빨도 들어가지 않는 물건으로 일체의 사량분별을 초월하도록 한 말이다.

스님은 또 '무엇이 불법의 근본 진리(眞諦)입니까?'라고 질문하자, 화산화상은 역시 '나는 북을 잘 친다'라고 대답했다. 또 '마음이 부처(卽心是佛)라는 것은 묻지 않겠습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자, 화산화상은 역시 '나는 북을 잘 친다.'라고 대답했다. 습학과 절학의 경지를 초월한 참된 깨달음(眞過)이나, 불법의 근본 진리(眞諦)나, 마조의 설법에서 주장한 마음과 부처의 문제를 제시하여 질문하고 있지만, 화산화상의 입장은 한결같이 '나는 북을 잘 친다(解打鼓)'는 한마디로 대답한다. 설사 이러한 문제를 여기서 아무리 논의해 본들 습학과 절학의 경지에 정체되고 있는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고, 참된 깨달음이나 불법의 진실은 체득 할 수가 없다. 스님은 또 '깨달음의 경지까지 초월한 사람(向上人)이 오면 어떻게 지도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이 스님은 세 번째 질문까지 모두 논의가 되지 않는 대답을 하는 화산화상에게 '나와 같이 일체의 습학과 절학의 경지는 물론, 부처나 조사의 경지까지 모두 초월한 향상인을 어떻게 지도 하겠습니까'라고 최후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화산화상은 역시 '나는 북을 잘 친다.'라고, 역시 반문 할 수가 없는 한마디로 대답했다.

원오는 '화산화상이 북을 잘 친다고 한 말의 의미를 아는가?'라고 문제를 제시하고, 스스로 '아침에 서천에 도달하고, 저녁에 동토에 돌아온다'고 착어하고 있다. 즉 스님의 질문에 네 번 모두 똑같이 대답한 화산화상은 인도와 중국을 아침저녁에 왕복하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무애자재한 지혜작용을 자신이 북을 치는 지금의 일에 몰입한 것을 찬탄하고 있다.

설두스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한 사람은 연자방아 돌을 끌고, 한 사람은 흙을 운반한다'는 말은 귀종선사가 노동시간에 유나에게 연자방아의 돌은 마음대로 끌지만, 중심의 나무는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는 법문과, 목평선도(木平善道)는 처음 찾아오는 스님에게 삼태기에 세 번 흙을 운반 하도록 한 고사인데, 화산의 북을 치는 일처럼, 학인을 지도하는 똑같은 수단을 소개하고 있다. '큰 지혜작용(大機)을 드러내려면 천 균(鈞)짜리 활이어야 한다.' 귀종과 목평, 화산화상처럼, 상근기인 향상인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차별 견해를 초월하고, 정법을 설하기 위해서는 천근의 활로 화살을 날리는 큰 지혜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고 읊고 있다. '일찌기 상골산(설봉산) 노스님(설봉)이 공을 굴렸다지만, 화산화상이 북을 칠 줄 안다는 것만 같겠는가' 설봉화상은 화산의 스승인데, 그도 언제나 나무로 만든 공을 세 개 가지고 굴리며 학인들을 점검했다. 귀종, 목평, 설봉화상의 지혜작용이 화산의 '북을 치는 지혜작용'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찬탄하고 있다. '그대에게 알리노니, 제멋대로 해석하지 말라'고 학인들에게 화산의 '북을 치는 일'을 제멋대로 분별하지 말라고 주의하고 있다. '단 것은 달고, 쓴 것은 쓰다'는 습학(習學)과 절학(絶學)을 초월한 참된 깨달음은 북을 치는 것처럼, 자기와 북이라는 차별대상도 없이 무심의 경지에서 자기 일을 하는 도인이라고 읊고 있다.



[第045則]布衫重七斤
〈垂示〉垂示云。要道便道。擧世無雙。當行卽行。全機不讓。如擊石火。似閃電光。疾焰過風。奔流度刃。拈起向上鉗鎚。未免亡鋒結舌。放一線道。試擧看。
〈本則〉擧。僧問趙州。萬法歸一。一歸何處。州云。我在靑州。作一領布衫。重七斤。
〈頌〉編辟曾挨老古錐。七斤衫重幾人知。如今抛擲西湖裏。下載淸風付與誰。

벽암록 45칙 조주스님의 만법귀일

“일곱근 승복도 하나로 돌아간 만법의 모습”


{벽암록} 제45칙은 선문에서 고금제일의 거장으로 평가되는 조주종심스님(778~897)의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지만, 하나는 어디로 가나"라는 유명한 법문을 싣고 있다. 한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물었다.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만, 그럼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조주스님이 대답했다. "나는 청주에 있을 때 베 적삼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지."

擧. 僧問趙州, 萬法歸一, 一歸何處. 州云, 我在靑州, 作一領布衫. 重七斤.


우주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고
'하나'는 다시 만법으로 돌아가


본칙의 공안은 {조당집} 제10권, {전등록} 제10권, {조주록} 중(中)권에 전하고 있다. 조주는 조주종심선사로 {벽암록} 제2칙과 5칙 등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기 때문에 그의 약전은 생략한다.

{운문어록}에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 하나(一)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다. 무엇이 만법(萬法)입니가?'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처럼, 이 공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만법(萬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불법(佛法)을 만법(萬法), 제법(諸法)이라고 하는 것처럼, 불교는 법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불법은 인연법과 연기법을 토대로 만법의 진실을 밝히고 만법의 근본인 마음으로 깨닫도록 제시한 종교이다. 그래서 불법(佛法)은 심법(心法)이며, 마음 밖에서 법을 구하는 것은 외도(外道)이다.

불법의 근본정신과 본질을 모르고는 이 공안의 의미와 정법(正法)의 안목(眼目)을 체득 할 수가 없다. {화엄경} 등 대승경전에서 주장하는 '삼계는 오직 마음(三界唯一心)이며, 마음 밖에 별다른 법이 없다(心外無別法)' '일체의 모든 것은 마음이 조작한 것(一切唯心造)' 설법이나, '만법은 일심(一心)이며 일심이 만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선어록}에서 한결같이 강조하는 심법(心法)이나, 심지법문(心地法門)은 불법의 본질을 단적으로 설한 말한다.

그런데 만법이 하나(歸一)로 돌아간다고 한 그 하나(一)는 어디이며 무엇인가? {돈오요문}에 다음과 같은 설법이 참고가 된다. '이 법신은 수만 가지 변화의 근본이 되기에 장소에 따라서 이름을 세운 것이다. 법신의 지혜 작용은 다함이 없기에 무진장이라고 한다. 능히 만법을 생성하기에 본래의 법장(法藏)이라고 하며, 일체의 지혜를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지혜장(知慧藏)이라고 하며, 만법이 본래(如)로 돌아가기에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한다. {금강경}에 "여래는 곧 모든 법이 여여하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세간의 일체 생멸법이 모두 본래(如)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다.' 즉 만법이 곧 진여인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며, 진여가 곧 만법인 것은 인연에 따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一)는 진여인 마음의 본체를 가리키며, 법성(法性), 청정법신이라고 한다. 선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 일물본래인(一物 本來人), 진인(眞人), 본래무사인(本來無事人)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체의 만법은 일심(一心)의 인식과 지혜의 판단으로 성립되는 심법(心法)이기 때문에 만법은 근원적인 깨달음의 경지인 일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는 또 어디로 돌아가는가(一歸何處)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근본정신과 보살도의 사상인 불법의 대의를 잘 알아야 한다. 선어록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는 '백척의 장대 끝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百尺竿頭進一步)'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수행을 통한 절대 깨달음의 경지(一)를 체득한 사람은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깨달음의 경지에 머물 것인가? 깨달음의 경지를 체득하기 어렵다고 해서 그 곳에 머문다면 그 곳이 또 집착의 대상이 되고 중생심으로 타락되는 장소가 되고 만다. 그래서 하나(一)가 되돌아가는 곳을 안다면 불법수행을 마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만약 하나(一)를 지키고 놓치 않는다면 귀신의 소굴에서 사는 지혜없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반야경}에서는 번뇌 망념을 텅 비우는 공(空)의 실천으로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는 구체적인 수행으로 제시한 무주(無住), 무박(無縛), 무상(無相), 무애(無碍), 무아(無我) 등을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깨달음의 경지인 하나(一)를 어떻게 벗어나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선에서는 크게 한번 죽어야 한다는 '대사일번(大死一番)'을 강조하고 있다. 죽는다는 말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등 자아의식의 중생심 분별심을 모두 떨쳐버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임제록}에서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고(殺佛殺祖)라는 말이나, 사람을 죽이는 칼과 살리는 칼(殺人刀 活人劍)이라는 표현은 공의 실천으로 체득한 반야의 지혜(칼)로 번뇌 망념인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일어키는 중생심을 비운다는 말이다. 죽인다는 표현은 번뇌 망념의 중생심, 분별심을 비워 버린다는 반야사상인 공(空)의 실천을 선어록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깨달음의 경지(一)까지 초월한다는 것은 어떻게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다시 중생의 사바세계로 되돌아가서 깨달음의 지혜와 부처님의 인격을 자비 광명으로 중생구제의 위대한 보살도의 실천으로 회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만법의 근본을 체득한 부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부처는 중생을 위한 지혜와 자비 광명의 보살도를 실현함으로써 부처로서의 존재의미가 있는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은 깨달음을 이룬 부처로서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실현하는 보살도를 의미하는 말이지,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하거나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정신을 하화중생(下化衆生)과 이타중생(利他衆生)이라고 하며, {십우도}에서는 중생이 살고 있는 저자거리에 나아가 자비와 지혜의 광명을 베푸는 보살행으로 '입전수수(入廛垂手)'라고 하며 법계유희이라는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 깨달음을 이룬 부처의 역할은 만법의 차별세계로 되돌아가서 중생과 함께 하며 원력을 세운 보살도를 실행하는 일 뿐이다. 사실 부처나 깨달음은 중생과 미혹을 극복하기 위한 상대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중생이 없는 세계에 부처 또한 존재할 이유가 없다.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라는 공안은 대승불교의 모든 실천정신을 함축하여 일상의 대화 속에서 불법의 정신을 체득하고 실천 수행할 수 있도록 궁구된 문제인 것이다. 질문한 스님은 이러한 불법의 수행구조와 실천체계를 토대로 조주화상에게 질문하고 있다. 그러나 조주화상은 '나는 고향 청주에 있을 때 승복 한 벌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다.'라고 담담하게 대답하고 있다. 조주화상은 만법이니 깨달음의 경지인 일심(一心. 一)이니 이론적인 불법의 수행체계나 객관적인 불교이론에 전혀 관심 없이 내가 입고 있는 이 승복의 무게나 일곱 근이나 된다고 자신의 일을 말하고 있다. 즉 조주화상은 자신이 만법과 하나가 되어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다. 원오도 '과연 종횡무진이다 하늘을 뒤덮는 그물을 쳤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만법이니 하나니 관계하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 조주가 입고 있는 한 벌의 승복은 하늘을 덮고 땅을 덮고 우주 만법을 모두 그 속에 끌어넣고 있다고 평했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한쪽으로 몰아치는 질문으로 조주화상(老古錐)을 다구쳤네.' 스님은 원숙한 조주화상에게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라는 질문했네. 편벽(偏僻)은 {인천안목}에 분양화상의 18문(問)의 하나인 편벽문(偏僻問)으로 일방적인 견해를 세워서 조주선사에게 질문한 것을 읊고 있다. '일곱 근 승복의 무게 몇이나 알까?' 질문한 스님을 포함하여 조주화상이 대답한 말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는 납승은 몇이나 될까? '지금 서호(西湖) 속에 내던져 버렸네.' 이 말은 설두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대기대용을 들어낸 전구(轉句)이다. 즉 조주화상이 입은 일곱 근의 승복은 만법과 하나를 포용한 일체를 초월한 대단한 옷이지만, 지금 설두는 그러한 옷은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서호(西湖)에 내던져 버렸다고 한다. 나는 조주화상처럼 일체를 초월한 경지에도 머물지 않고 있다는 입장을 읊고 있다. '얕은 맑은 바람을 누구에게 전할까?' 만법과 하나, 불법이나 선법도 텅 비우고 얕은 바람에 강을 건너는 빈 배처럼, 상쾌한 이 마음을 누구에게 전해줄까.



[第046則]出身猶可易
〈垂示〉垂示云。一槌便成超凡越聖。片言可折。去縛解粘。如冰凌上行。劍刃上走。聲色堆裏坐。聲色頭上行。縱橫妙用則且置。刹那便去時如何。試擧看。
〈本則〉擧。鏡淸問僧。門外是什麽聲。僧云。雨滴聲。淸云。衆生顚倒迷己逐物。僧云。和尙作麽生。淸云。洎不迷己。僧云。洎不迷己意旨如何。淸云。出身猶可易。脫體道應難。
〈頌〉虛堂雨滴聲。作者難酬對。若謂曾入流。依前還不會。曾不會。南山北山轉[雨/汸]霈。

벽암록 46칙 경청스님의 빗방울 소리

“자신은 잃어버리고 빗소리에만 집착하는구나”


경청스님은 설봉스님의 뒤를 이은 도부스님(868~937)을 말한다.

경청스님이 한 스님에게 "문 밖에서 들리는 게 무슨 소리냐"하고 물었다. 스님은 "빗방울 소리"라고 답했다. 경청스님이 말했다. "너는 빗방울 소리에 사로잡혀 있구나." 그러자 그 스님이 "스님께서는 저 소리를 뭘로 듣습니까"하고 되물었다. 경청스님은 "자칫했으면 나도 사로잡힐 뻔했지"라고 응대했다. "자칫하면 사로잡힐 뻔하시다니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하고 그 스님이 또 물었다. 경청스님이 잘라 말했다. "속박에서 자유로워지기는 그래도 쉽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표현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擧. 鏡淸問僧, 門外是什聲. 僧云, 雨滴聲. 淸云, 衆生顚倒, 迷己逐物. 僧云, 和尙作生. 淸云, 不迷己. 僧云, 不迷己 意旨如何. 淸云, 出身猶可易, 脫體道應難.


바깥 세상일들에 끄달리지 말고
언제 어디서나 주인이 되어야…

본칙의 공안은 {조당집}제10권, {전등록}제18권 경청화상전에 수록하고 있다. 경청화상(868~937)에 대해서는 {벽암록}제16칙 본칙에도 등장한 선승으로 설봉의존의 법을 이은 도부(道)선사다. {현사어록}에는 경청화상이 젊은 시절 현사사비선사의 처소에서 수행한 인연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도부상좌가 밤중에 현사화상에게 나아가 예배를 올리고 법문을 청했다. '저는 여기에 와서 열심히 수행하였지만 아직 아무런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화상은 자비를 베풀어 깨달음을 체득하는 길(入路)을 제시해 주십시오.' 현사는 말했다. '그대는 저기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는가?' 도부는 '예. 들립니다.'라고 말하자, 현사는 '그러면 그곳으로 들어가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경청화상은 현사의 지시를 받고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체득하였다.

{운문어록}에 운문이 항상 '일체의 모든 소리는 부처의 소리요, 일체의 모든 모양은 부처의 모습이며, 모든 대지가 바로 법신이다.'라고 설하고 있으며, 소동파도 동림상총선사를 참문하여 무정설법을 듣고 대오하고 '개울 물소리가 곧 부처의 설법이요, 산의 모습이 청정법신이로다.'라고 오도송을 읊고 있는 것은 이러한 법문을 체득한 경지이다.

원오도 ‘평창’에 경청화상이 수행자들을 지도하면서 빗방울 소리, 비둘기 울음소리 등 자연을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체득하도록 하는 법문을 몇 가지 소개하고 있다.

본칙의 공안도 경청화상이 방안에서 어떤 스님에게 '문 밖에 무슨 소리인가'라고 묻고 있다. 스님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입니다.'라고 정직하게 대답하고 있다. 그러자 경청화상은 '중생들은 누구나 마음이 전도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리고, 밖으로 사물을 쫓는구나!'라고 말했다. 이 말은 {수능엄경} 제2권에 '일체중생이 무시이래로 자기에 미혹하여 사물이라고 하고, 본심을 잃어버리고 사물의 지배를 받아서 굴림을 당하고 있다. 그래서 이 가운데 대(大)를 보고, 소(小)를 본다. 만약 능히 사물을 지배하여 굴리면 여래와 같이 되리라.'라는 일절에 의거하고 있는 말이다. 즉 중생은 빗소리를 들으면 빗소리에 집착하고, 바람소리를 들으면 바람소리에 집착하여 자신을 잃어버리고 항상 밖의 경계에 끄달리고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는 말이다.

{이입사행론}에도 '미혹할 때는 사람이 법(사물)을 쫓고, 깨달으면 법(사물)이 사람을 쫓는다. 깨달으면 마음이 사물을 수용하고, 미혹하면 사물이 마음을 포섭한다.'라고 설한다. {육조단경}에도 혜능이 법화경을 독송하는 법달에게, '마음이 미혹하면 법화경의 지배를 받고, 마음을 깨달으면 법화경을 마음대로 활용하여 굴릴 수가 있다.'라고 설하고 있다. 임제가 '어느 곳에서나 주인이 되라!'고 설하는 것처럼, 자신이 주인이 되어 일체의 사물과 경계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또 {수능엄경}에 '마땅히 잘 알아야 한다. 들음(聽)과 소리(聲)는 모두 처소가 없다. 들음과 소리, 이 둘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이 아니며 자연의 본성이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실체도 없는 소리에 집착하고, 자기 자신이 미혹하여 빗소리와 자신과는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중생은 전도되어 있다고 한다. 중생의 전도된 모습을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 자기의 진심을 자각하지 못하고 사물이나 대상에 집착하여 망념과 분별심을 일으키는 심(心)전도, 두 번째는 대상은 본래 존재하지도 않는데 마치 공중에 나타난 꽃과 같은 것임을 알지 못하고 실체로 착각하는 견해를 견(見)전도라고 하며, 세 번째는 사물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로 알지 못하고 분별망상으로 집착하는 것을 상(想)전도라고 한다.

스님은 저는 빗소리로 들었습니다만 '화상은 어떻게 들었습니까'라고 경청화상의 경지를 물었다. 경청화상은 '간신히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 즉 하마터면 나도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물에 집착할 뻔했다. 스님은 '간신히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다그치며 질문하자, 경청화상은 '깨달음을 체득하는 일(出身)은 그래도 쉬운 일이지만, 깨달음의 경지(脫體)를 그대로 말로 표현하기란 어렵다네'라고 대답하고 있다.

깨달음을 체득하는 일(出身)은 앞에서 말한 빗소리와 사물모양의 차별경계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즉 밖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빗소리에 끄달려 자신을 잃어버릴 뻔했지만 곧바로 차별경계에 집착한 자신을 자각하고 본래의 자기를 깨닫는 일은 쉬운 일이다. 선에서 번뇌 망념이 일어나면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라. 번뇌 망념을 자각하면 번뇌 망념은 없어지고 본래의 마음을 되찾는 것이 된다는 선수행의 방법과 본래심을 깨닫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즉 일체의 사물을 인식하고 사물에 집착하면 중생이 되지만, 사물의 본질을 깨닫고 본래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면 부처인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의 경지(脫體)를 그대로 말로 표현(道)한다는 말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그 자체를 그대로 본분 전체를 언어 문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사실을 말한다. 그래서 {조론}에도 '깨달음의 경지는 언어 문자로 표현 할 수가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 할 수 없다(言語道斷 ,心行處滅)'고 설하고 있으며, 선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언어나 문자로 설명할 수 없다는 언전불급(言詮不及)을 말하고 있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빈집의 빗방울 소리' 밖에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만 집안에는 텅 비어 아무도 없다. 텅 빈 집(마음)에는 미혹과 깨달음의 차별도 없으니 자신이 미혹한 일도 없고, 사물에 집착하는 일도 없다고 읊은 말이다. '훌륭한 작가도 대답하기 어렵다.' 문 밖에 들리는 소리를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라고 말하면, 사물을 쫓는 것이기에 마음이 법을 보는 것이 되고, 빗방울 소리라고 말하지 않으면, 현실의 사실을 위배하여 만법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하는 정법의 안목 없는 사람이 된다. 훌륭한 선지식도 언어와 사량분별이 끊어진 깨달음의 경지를 언어 문자로 말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만약 흐름을 바꾸었다고 말한다면, 역시 아직 알지 못한 것이다.' {수능엄경}에 '관음보살 흐름을 바꾸어서 아는 바를 잊었다.'라는 말을 토대로 한 게송이다. 흐름을 바꾸다(入流)는 말은 객관의 사물을 주관으로 바꾸어 받아들인 작용(入)을 말한다. 즉 밖에 비오는 소리(객관)를 비오는 소리를 그대로 주관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데, 단지 비오는 소리로 인식하는 경지라면 여전히 빗소리를 듣는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입장이기 때문에 진실로 깨달음의 경지인 비의 소리를 체득하지 못한 것이라고 읊고 있다. '알았는가. 알지 못했는가.' 비의 소리는 알거나 알지 못했거나 관계없이 역시 비의 소리일 뿐이다. '남산과 북산에는 더욱 더 많은 비가 내리고 있네.' 이곳저곳 어느 곳에도 비의 소리가 울린다.



[第047則]六不收
〈垂示〉垂示云。天何言哉。四時行焉。地何言哉。萬物生焉。向四時行處。可以見體。於萬物生處。可以見用。且道向什麽處見得衲僧。離卻言語動用行住坐臥。倂卻咽喉唇吻。還辨得麽。
〈本則〉擧。僧問雲門。如何是法身。門云。六不收。
〈頌〉一二三四五六。碧眼胡僧數不足。少林謾道付神光。卷衣又說歸天竺。天竺茫茫無處尋。夜來卻對乳峰宿。

벽암록 47칙 운문의 법신

“육근육식 인식을 초월한 깨달음의 지혜작용”


{벽암록} 제47칙은 운문화상이 독창적인 법신의 설법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질문했다. "법신은 어떤 것입니까?" 운문화상은 말했다. "여섯으로 거두어들일 수 없다(六不收)."

擧. 僧問雲門, 如何是法身. 門云, 六不收.


무형무상 '불상의 본체'를 보고
만물이 변화하는 곳에서 느껴야


운문화상은 문언(文偃: 864~949)선사로 {벽암록} 제5칙과 14, 15칙 등 여러 차례 등장했다. 본칙의 공안은 {운문어록} 중권(中卷)에 전하고 있는데, 운문화상은 언제나 함축된 의미의 짧은 한마디로 대답하고 있기 때문에 운문의 선사상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도대체 법신이란 어떤 것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사실 불교의 교학에서 부처의 몸을 삼신(三身)으로 나누고,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으로 몸(身)을 모양(相)으로 분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몸(身)이라는 번역 때문에 법신도 형상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구마라집은 "천축에서는 다만 가야(歌耶: kaya)라고 말하는데, 한역하면서 신(身), 중(衆), 부(部), 법(法)의 체상(體相),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신(身)이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불교학자도 부처의 삼신을 잘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특히 법신의 이해는 더욱 어려웠기 때문에 솔직히 운문화상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우주의 진리인 법을 인격화하여 법신이라고 부르고, 종교적으로는 화엄철학에서 비로자나불, 밀교에서는 대일여래, 정토종에서는 아미타불 등으로 칭하고 있다. 철학적으로는 법신은 시방세계에 두루 편만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법계(周邊法界)라고 하며,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에 함께 하고 있다. {화엄경} 성기품에 "불자여! 비유하면 허공과 같이 일체의 모양이 있는 곳이나, 모양이 없는 곳이나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왜냐하면, 허공은 형체가 없고, 색깔도 없다. 여래의 법신도 이와 같이 일체의 모든 장소나, 국토나 일체의 법이나 중생에게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라고 설하고 있다. {금강명경}에서도 "부처의 참된 법신은 허공과 같다. 사물에 응하여 형체를 나타내는 것이 물 속에 비친 달과 같다"라고 했다.

{대승기신론}에도 "깨달음의 의미는 마음의 본체가 번뇌 망념을 여읜 것이며, 망념을 여읜 모양은 허공계와 같아서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기에 법계의 한 모양(一相)이니, 즉 이것이 여래 평등 법신"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법신(法身)은 깨달음의 지혜작용이다.

마조의 {어록}에도 "번뇌에 얽혀있을 때(衆生心)는 여래장이며, 번뇌 망념을 벗어나(佛心)면 청정법신이라고 한다. 법신은 한계가 없고, 법신의 본체는 증감(增減)도 없지만, 크게 되고 작게도 되며, 사각형도 되고, 둥근 원형도 되며, 사물에 응하여 형체를 자유롭게 나타낼 수 있는 것이 물 속에 비친 달과 같고, 일체의 모든 곳에 도도하게 운용하지만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질문한 스님은 경전과 어록에서 설하고 있는 교학적인 법신에 대하여 질문한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 살아있는 부처의 참된 법신을 체득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법신을 체득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운문선사에게 질문하고 있다. 원오는 "많은 사람들이 의심했었지"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질문한 스님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수행자가 법신을 체득하지 못하고 법신에 대한 의문을 품고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가? 원오는 또 "일천 성인이라도 벗어나지 못한다"고 착어하고 있다. 즉 법신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항상하며, 시방에 편만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이 법신 가운데 생존하고 있다. 아침에는 부처와 함께 일어나고, 밤에는 부처를 껴안고 잠자고 있기 때문에 울 때도 웃을 때도, 화를 낼 때도 법신을 벗어나지 않고 있는데, 법신을 보지 못하고 체득하지 못하고 있다.

운문화상은 법신에 대한 질문에 "여섯으로 거두어들일 수 없다(六不收)"라고 대답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운문화상이 "여섯으로 거두어들일 수 없다"라는 말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육근(六根)과 욱식(六識)과 육진(六塵)이다. 이 여섯이 모두 법으로부터 생긴 것이기 때문에 육근(六根)으로 법신을 알 수 없다." 이와 같이 사량분별과 망정으로 헤아리고 있는데, 전연 관계없는 말이며, 나아가 운문화상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된다. 보려면 곧바로 보라! 천착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듣지 못했는가? {법화경}에 "이 법은 사량이나 분별로서 헤아려 알 수 없다"라고 한 말을. 운문화상의 말을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교학으로 해석하려는 것에 대한 원오의 비판이다.

사실 운문화상이 말한 '육불수(六不收)'의 육(六)은 불교의 교학에서 말하자면, 육근(六根)과 육식(六識), 육경(六境: 塵), 육대(六大), 육합(六合)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불수(不收)는 거두어들일 수 없다는 말이기 때문에 법신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코로 냄새 맡을 수 없고, 혀로 맛 볼 수가 없고, 몸으로 촉감을 느낄 수가 없고, 의식(意)으로 생각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육근(六根), 육식(六識)의 대상 경계인 육경(六境)도 거두어들일 수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우주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식(識)의 육대(六大)로 성립하고 있지만, 법신은 이러한 육대(六大)의 어떠한 주변에도 해당되거나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육합(六合)이라면 하늘과 땅(天地)과 동서남북의 사방(四方)인 전 우주를 말하는데, 법신은 전 우주도 거두어들일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법신이 전 우주를 거두어들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법신은 형체나 모양이 없기 때문에 어떤 기구나 물건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법신이란 어떤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측량 할 수가 없고, 파악 할 수가 없는 무한하게도 큰 것을 말하고 있다. 더군다나 영원한 법신 그 자체의 전모를 운문은 '육불수(六不收)'라는 한마디로 말하고 있기에 이 말을 곧바로 체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운문이 말한 육(六)을 육근(六根), 육식(六識)의 의미로 해석하여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六根) 육식(六識)의 인식과 중생심의 사량 분별로는 파악 할 수 없으며, 육근 육식의 인식을 초월한 불심(佛性)의 지혜작용을 법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문자로 해석한 이론이기 때문에 일체의 언설을 초월하여 곧바로 지금 여기서 법신을 체득하도록 제시한 운문의 대답은 아니다. 전 우주와 자기와 하나가 된 지혜작용이 활발한 법신을 체득하도록 제시한 운문의 대답을 스님은 어떻게 체득해야 할까?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운문이 "육불수(六不收)"라고 한 말은 무한의 공간을 표현한 것에 대하여 설두는 시작도 끝도 없는 숫자로 무한의 시간으로 법신을 설하고 있다. 법신은 모양이 없고, 공간적인 한계와 시간적인 수량을 초월했기 때문에, "푸른 눈 달마대사가 셈하여도 다하지 못하리라." "소림에서 신광에게 법을 부촉했다고 부질없이 말하네." 달마대사가 소림에서 혜가에게 불법을 부촉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법신은 형상이 없는데, 어떻게 제시하고 부촉 할 수가 있는가? "옷을 걷어 부치고 또다시 천축으로 되돌아갔다고 말하네." 달마대사는 옷을 걷어올리고 한 손에 짚신을 들고서 다시 천축으로 되돌아갔다고 하지만 그러한 전설을 가지고 사실로 믿게 하고 있네. 현사는 "달마는 동토(東土)에 오지 않았고, 혜가도 천축에 가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사가 말하는 달마는 참된 법신의 당체를 말하는데, 참된 달마[법신]는 천축에서 왔거나 중국에서 되돌아 간 것은 아니다. 만약 달마가 천축으로 되돌아갔다고 하지만, '천축은 아득하여 찾을 곳이 없다.' 넒은 천축을 찾아봐도 달마를 찾을 수가 없는 것처럼, 천축과 중국의 국경을 왔다갔다할지라도 참된 달마를 찾을 수가 없다. 달마는 행방불명인가? '간밤부터 설두[乳峰]의 집에 와서 묵고 있네' 설두의 처소에 와서 묵고 있는 달마는 법신인가?



[第048則]踏倒茶爐
〈本則〉擧。王太傅入招慶煎茶。時朗上座與明招把銚。朗翻卻茶銚。太傅見問上座。茶爐下是什麽。朗云。捧爐神。太傅云。旣是捧爐神。爲什麽翻卻茶銚。朗云。仕官千日失在一朝。太傅拂袖便去。明招云。朗上座喫卻招慶飯了。卻去江外。打野[木+埋]。朗云。和尙作麽生。招云。非人得其便。雪竇云。當時但踏倒茶爐。
〈頌〉來問若成風。應機非善巧。堪悲獨眼龍。曾未呈牙爪。牙爪開。生雲雷。逆水之波經幾回。

벽암록 48칙 왕태부와 혜랑상좌의 차 이야기

“진여법성이 어째서 생사 망념을 일으키는가!”


{벽암록} 제48칙은 당말 복건성 천주(泉州) 초경원(招慶院)을 방문한 왕태부와 차를 대접한 혜랑상좌와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왕태부가 초경원을 방문하니 마침 스님들이 차를 대접하였다. 그 때 혜랑상좌가 명초(明招)와 함께 차를 달이는 주전자를 붙잡고 있다가, 혜랑상좌가 차 주전자를 뒤집어 버렸다. 왕태부가 이러한 모습을 보고서 상좌에게 물었다. '차를 끓이는 화로 밑에 무엇이 있소?' 혜랑상좌가 말했다. '화로를 받드는 신이 있지요.' 왕태부가 말했다. '화로를 받드는 신이 왜 차 주전자를 엎어 버렸소?' 혜랑상좌가 말했다. '오랫동안 벼슬살이 하루아침에 쫓겨났지요.' 왕태부는 소매를 떨치고 나가 버렸다. 명초가 말했다. '혜랑상좌는 초경사의 밥을 얻어먹고 도리어 강 건너편에 가서 사람들과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는군' 혜랑이 말했다. '화상은 어떠십니까?' 명초가 말했다. '귀신(非人)에게 당했군.' 설두가 말했다. '당시 그 말을 할 때 차 달이는 화로를 뒤엎어버렸어야지!'

擧. 王太傳, 入招慶煎茶. 時, 朗上座, 與明招把, 朗, 却茶 太傳見, 問上座, 茶爐下是什. 朗云, 捧爐神. 太傳云, 旣是捧爐神, 爲什, 却茶, 朗云, 仕官千日, 失在一朝. 太傳, 拂袖便去. 朗上座, 喫却招慶飯了, 却去江外, 打野, 朗云, 和尙作生. 招云, 非人得其便 (雪竇云, 當時但踏倒茶爐.)


왕태부의 선기가 뛰어난 물음에
혜랑 상좌의 안목없는 답변 비판

본칙 공안의 출처는 잘 알 수가 없지만, {오등회원} 제8권 왕태부전에 보이고 있다. 왕태부는 천주칙사(泉州刺史) 왕연빈(王延彬)으로 설봉문하의 장경혜릉(長慶慧稜. 854~932), 보복종전(保福從展. 867~928)선사를 참문한 당대의 안목있는 거사다. 왕태부는 혜릉선사가 설봉산에서 수행할 때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로 천우(天佑) 3년(906) 자신이 칙사(刺史)로 근무하는 천주에 초경원이라는 절을 지어 혜릉선사가 거주하도록 하고, 자주 찾아가 참선하며 선문답을 나누곤 하였다. 뒤에 조정으로부터 태부(太傅)라는 직위를 수여받았기 때문에 왕태부라고 경칭(敬稱)하여 불렀다.

혜랑상좌는 혜릉의 제자로 뒤에 복주(福州) 보자원(報慈院)의 주지로 활약한 혜랑선사로 {전등록} 제21권에 전기를 수록하고 있다. 명초는 무주 명초산의 덕겸(德謙)선사로 {전등록} 23권의 전기에 의하면 지혜의 기봉이 민첩하고, 왼쪽 눈이 없어 독안룡(獨眼龍)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본칙은 왕태부가 장경혜릉선사가 주석하는 초경원을 방문하자 혜릉화상이 부재중이라 혜랑상좌가 왕태부에게 차를 대접하였다. 그 때 혜랑상좌가 명초(明招)와 함께 차를 달이는 냄비를 붙잡고 있다가, 혜랑상좌가 차를 달이는 주전자를 뒤집어 버렸다. 고의인가 부주의인가? 왕태부가 혜랑상좌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서 상좌에게 "차를 끓이는 주전자 밑에 무엇이 있소?"라고 물었다. 즉 차를 끓이는 주전자 밑에 화로를 떠받치는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모양이 귀신처럼 생겼기 때문에 봉로신(捧爐神)이라고 한다. 구참의 거사가 혜랑상좌에게 한 방 먹이는 질문이다.

혜랑상좌는 왕태부의 질문에 정직하게 "화로를 떠받치는 신(神)이 있지요"라고 대답했다. 왕태부는 "화로를 떠받치는 신이 왜 차 주전자를 뒤엎어 버렸소?"라고 다구쳤다. 화로를 떠받치는 신이라면 차를 끓이는 주전자를 보호하고 뒤집히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어째서 뒤엎어 버렸소? 왕태부가 주전자 밑에 무엇이 있느냐고 질문한 것은 생사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며, 혜랑상좌가 봉로신이라고 대답한 것은 생사의 근원은 진여법성이라는 대답이다. 화로를 받치는 봉로신은 진여법성을 말하며, 차 주전자를 뒤엎은 것은 생사망념을 말한다. 그렇다면 진여법성이 '어째서 생사망념을 일으키는가?'라고 왕태부가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혜랑상좌는 "오랫동안 벼슬살이 하루아침에 쫓겨났지요"라고 대답하고 있다.

진여법성과 생사망념의 관계에 맞추어 보면, {기신론}에 설하고 있는 것처럼, 진여법성은 번뇌망념이 없는 무념(無念)이며 불변(不變)이다. 그러나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무명'이라고 하는 것처럼, 열반적정의 경지에서 홀연히 번뇌망념이 일어나 생사에 유전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오랫동안 착실하게 근무 잘한 관리도 하루아침에 관직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진여자성인 봉로신이 아무리 잘 보호해도 번뇌망념이 일어나는 시절인연을 만나면 어쩔 수가 없이 주전자가 뒤엎어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왕태부는 소매를 떨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왕태부의 행동은 안목없는 한심한 혜랑상좌를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진여법성과 생사번뇌의 분별 망념에 떨어진 일체의 차별심을 함께 떨쳐버려야 한다는 주의를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명초가 "혜랑상좌는 초경사의 밥을 얻어먹고 도리어 강 건너편에 가서 사람들과 소란을 피우는군"이라고 말했다. 즉, 혜랑상좌는 '초경사의 혜릉선사의 지도를 받고 있으면서 혜릉의 제자다운 정법의 안목을 제시하지 않고, 불법을 모르는 세간 사람들과 쓸데없이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고 있는가?'라고 질타하고 있다. 혜랑상좌는 올바른 불법의 안목을 제시하지 못하고 삿된 길에서 왕태부의 말에 끌려 본분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자 혜랑은 "화상이라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라고 명초의 견해를 묻고 있다. 명초는 "귀신(非人)에게 당했다"고 말했다. 비인(非人)은 봉로신을 말하는데, 마음이 방심하면 귀신이 엿본다는 말처럼, 혜랑상좌의 마음이 번뇌망념에 떨어졌기 때문에 봉로신이 차 주전자를 뒤엎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봉로신이 차 주전자를 뒤엎은 것은 번뇌 망념의 실수가 아니라 본분의 작용이었다는 말이다. 원오는 "과연 정법의 안목(一隻眼)을 갖추었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명초의 견해를 칭찬했다.

설두화상은 "당시 그 말을 할 때 차 달이는 화로를 뒤엎어버렸어야지"라고 말했다. 즉 차 주전자와 화로의 논쟁에 대하여 설두는 왕태부나, 명초나 모두 차 도구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고 있기 때문에 본분의 지혜작용이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무엇보다 왕태부가 "차 달이는 주전자 밑에 무엇이 있소?"라고 물었을 때 논쟁의 씨앗인 화로를 뒤엎어버렸다면 봉로신이 엿볼 틈을 주지 않았을 것이며, 왕태부를 화내지 않게 할 수가 있었다고 한 말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묻는 말이 바람이 일 듯 하였으나, 선기로 대처함은 훌륭하지 못했다. 목수가 도끼를 휘둘러 바람을 일으키면서 코끝에 묻은 작은 진흙을 제거하였지만 코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고, 사람 역시 꼼짝하지 않고 서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는 {장자} '서무귀'의 고사를 인용하고 있다. 즉 왕태부가 혜랑상좌에게 던진 질문은 목수가 도끼를 휘두른 바람처럼 훌륭한 것인데, 혜랑상좌의 대답은 왕태부의 질문에 부응하지 못했다. 왕태부를 상대할만한 안목이 없었다고 비판한 말이다.

"가련하다, 애꾸눈 용이여!" 독안룡은 명초의 별명인데, 그가 왕태부와 혜랑상좌의 대화를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읊고 있는 말이다. 설두는 명초가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결코 어금니와 발톱을 들어내지 않았네"라고 읊고 있다. 즉 용(龍)이라면 용답게 어금니와 발톱을 들어내 왕태부와 대항했다면 좋았을 텐데, 용다운 활기를 들어내지 않은 것은 애석한 일이었다. "어금니와 발톱을 벌리면" 명초가 어금니와 발톱을 벌리지 않았기 때문에 설두 자신이 대신 "왕태부가 질문할 때에 화로를 뒤엎어 버렸어야지!"라고 착어한 말을 본인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원오는 "만약 이러한 수단이 있었다면 화로를 뒤엎었을 것인데"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혜랑상좌나 명초가 설두화상과 같은 안목과 선기가 있는 선승이라면 이러한 바보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원오는 혼자 독백하고 있다. "구름과 우레가 일어나네" 용이 발톱과 어금니를 들어내면 그곳에 구름을 부르고 바람이 일며 우레가 진동하게 된다고 설두가 자화자찬하고 있는 것이다. 원오도 설두의 지혜작용에 "천하의 납승 몸 둘 곳이 없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바다를 범람시키는 파도를 몇 번이나 겪었던가?" 우레가 일고 큰 비가 쏟아져 파도가 일어난 것처럼, 설두자신의 선기를 칭찬하고 있다.



[第049則]透網金鱗
〈垂示〉垂示云。七穿八穴。攙鼓奪旗。百匝千重。瞻前顧後。踞虎頭收虎尾。未是作家。牛頭沒馬頭回。亦未爲奇特。且道過量底人來時如何。試擧看。
〈本則〉擧。三聖問雪峰。透網金鱗。未審以何爲食。峰云。待汝出網來。向汝道。聖云。一千五百人善知識。話頭也不識。峰云。老僧住持事繁。
〈頌〉透網金鱗。休云滯水。搖乾蕩坤。振鬣擺尾。千尺鯨噴洪浪飛。一聲雷震淸[颱-台+焱]起。天上人間知幾幾。

벽암록 49칙 삼성(三聖)과 황금빛 물고기

“그물 뚫고 나온 황금빛 물고기는 대자유인”


{벽암록} 제49칙은 삼성화상과 설봉화상이 황금빛 물고기를 잡는 대화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삼성화상이 설봉화상에게 물었다. "그물을 뚫고 나온 황금빛 물고기는 무엇을 미끼로 해서 잡아야 할까요?" 설봉화상이 말했다. "그대가 그물을 빠져 나오거든 말해주겠다." 삼성화상이 말했다. "1500명의 학인을 지도하는 선지식이 화두(話頭)도 알지 못하고 있군!" 설봉화상이 말했다. "노승은 주지로서 하는 일이 바쁘다."

擧. 三聖問雪峰, 透網金鱗. 未審以何爲食. 峰云, 待汝出網來, 向汝道. 聖云, 一千五百人善知識, 話頭也不識. 峰云, 老僧住持事繁.


임제정법 인가받은 삼성화상 도전에
일체 초월한 설봉화상 가볍게 응수

이 공안은 {분양송고(汾陽頌古)} 46칙과 {종용록} 33칙에도 수록돼있다. 설봉화상은 {벽암록} 제5칙에서 언급했다. 삼성(三聖)화상은 임제의현의 법을 이은 혜연(慧然)선사로 {임제록}을 편집한 사람이다. 그의 전기는 {전등록} 제12권, {회요} 제10권에 앙산(仰山)과 덕산(德山), 설봉(雪峰) 등 당대의 선지식을 두루 참문한 대화를 전하고 있다. 삼성은 임제선사를 17년 모셨다고 하며, 임제의 임종에 즈음하여 정법안장의 부촉하는 선문답으로 임제의 정법을 계승한 사실을 {임제록}에는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임제선사가 입적하려고 할 때에 벽에 기대어 말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멸각해 버리면 안 된다!' 그 때 삼성이 나와서 말했다. '어찌 감히 화상의 정법안장을 멸각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임제선사가 말했다. '뒷날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불법의 대의를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삼성이 곧바로 고함(喝)을 쳤다. 임제선사가 말했다. '나의 정법안장이 저 눈먼 당나귀한테서 멸각돼버릴 줄 누가 알았겠나!' 말을 마치고 단정히 앉아 입적했다." 이 일단은 원오가 '평창'에도 인용하고 있는데, 정법안장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해 정법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의 안목을 구족한 선승을 말한다. 임제가 체득한 정법안장은 누구라도 멸각 시킬 수가 없는 것처럼, 각자가 정법안장을 구족해야 정법을 계승할 수 있는 것이다. 삼성의 일갈은 임제의 선풍과 정법을 계승한 지혜작용인 것이다.

삼성화상이 제방을 행각할 때에 설봉화상에게 "그물을 뚫고 나온 황금빛 물고기는 무엇을 미끼로 해서 잡아야 할까요"라고 문제를 던졌다. 그물은 오욕과 탐착의 그물, 언어문자의 그물, 편견과 착각의 그물, 깨달음에 집착한 그물 등 중생의 그물(선병)을 말한다. 금인(金鱗)은 황금 비늘의 물고기로 뛰어난 선기와 안목을 갖춘 훌륭한 선승을 말한다. '그물을 뚫고나온 황금빛 물고기'는 불법이나 계율, 규칙, 깨달음의 틀까지 완전히 초월한 자유자재한 선승을 비유한 것이며, 원오는 '수시'에서 '일체를 초월한 사람(過量底人)'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삼성이 자신은 일체의 그물을 초월한 황금빛 물고기인데, 나와 같은 선승을 어떻게 제접하겠습니까 라고 설봉화상에게 법전(法戰)을 도전하고 있다. 설봉화상은 "그대가 그물을 빠져나오거든 말해주겠다"라고 가볍게 응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선문답은 많다. 예를 들면 방거사가 마조선사를 찾아가서, "만법과 짝이 되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질문하자, 마조는 "그대가 한 입에 서강수(西江水)를 다 들어 마실 때 말해 주겠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만법과 자기와 짝이 되는 것은 주객의 대립과 상대적인 차별을 벗어나지 못한 중생이다. 자기와 만법과 하나가 되는 것은 본인이 만법일여(萬法一如), 만물일체(萬物一體)의 경지를 체득해야 한다. 즉 아상(我相), 인상(人相)과 주객(主客)의 상대적인 차별심이 없어진 허공과 같이 텅 비운 마음은 서강수를 한 입에 들어 마시는 일 뿐만 아니라, 삼라만상의 일체 만물을 포용하게 되며 만법일여, 만물일체의 경지가 되는 것이다. 본인이 그러한 경지를 체험함으로서 저절로 그러한 사실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언어 문자로 설명해도 본인이 체험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진실을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체험해서 알도록 지시하고 있는 법문이다.

설봉이 '그물을 뚫고 나오면 말해 주겠다'라고 대답한 것은 설봉의 입장에서 볼 때 삼성이 아직 그물 속에서 헤매고 있는 물고기로 보였기 때문이다. 즉 그대가 말만 그렇게 하지 말고 본인이 직접 일체의 그물을 뚫고 나온 황금빛 고기가 돼 봐라. 그 때에 한마디 멋있는 법문을 해 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원오는 설봉이 삼성의 명예에 관계되는 말이라고 하면서, '설봉 노인은 작가 종사'라고 칭찬하고 있다. 삼성은 그물을 뚫고 나왔다고 하는데, 설봉은 그물을 뚫고 나오라고 하고 있다. 설봉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그물을 뚫고 나왔다고 주장하는 놈은 진짜 그물을 뚫고 나온 녀석이 아니다. 뚫고 나왔다는 그 그물에 걸려있는 녀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삼성은 임제의 정법안장을 인가받은 당대의 선승이다. 설봉의 이러한 응수에 결코 그대로 물러설 수 없는 기지를 발휘하고 있다. 삼성은 "1500명의 학인을 지도하는 선지식이라는 사람이 내가 한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귀(話頭)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네"라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원오는 삼성의 기지는 "청천에 벽력이 떨어진 것처럼, 설봉산의 대중이 놀랐다"라고 하고, 또 "삼성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설봉화상은 "노승은 주지로서 하는 일이 바쁘기 때문에 이만 실례하네"라고 역시 가볍게 대응하고 있다. 삼성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고, 나는 주지로서 사찰의 업무에 무척 바쁘다고 하면서 삼성의 무모한 법전(法戰)에 응수할 여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원숙한 경지에서 학인을 지도한 설봉의 대답이다. 삼성의 폭탄적인 법전에 한발 뒤로 물러선 후퇴인가 아니면 삼성이 그물을 뚫고 나온 것을 인정한 것인가. 원오가 "승부가 없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삼성이 이긴 것도 아니고, 설봉이 진 것도 아니다. 설봉이 주지일로 바쁘다고 한 말은 "가장 독한 말"이라고 원오는 착어하고 있는데, 그것은 설봉이 앞에서 '그대가 그물을 뚫고 나오면 말해 주겠다'는 말보다 더 혹독한 말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삼성이 더 이상 법전을 계속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그물을 뚫은 황금빛 물고기" 삼성이 설봉에게 질문한 말을 읊고 있다. 설봉이 그물을 뚫고 나오면 말해 주겠다는 대답은 삼성이 그물 속에 있는 것으로 판단한 것인데, 설두는 설봉에게 "물속에 있다고 말하지 말라"고 질책하고 있다. "하늘을 흔들고 땅을 움직이네." 그물을 뚫고 나온 황금빛 고기가 자유자재로 작용하는 모습은 천지를 진동하고 대기대용을 발휘하고 있다. 원오도 '작가 작가'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역시 삼성은 작가 중의 작가라며, '일체를 초월한 사람(過量底人)'이 아니라면 이러한 활동은 불가능하다고 칭찬하고 있다. "지느러미를 떨치고 꼬리를 흔드네." 황금 물고기(삼성)가 기세 좋게 활동하는 모습을 읊은 것이다.

다음 삼성이 설봉에게 1500 대중을 지도하는 선지식이 말귀도 모른다고 한 법전의 기세는 '고래가 뿜어대는 거대한 파도는 천 길이나 나는 것처럼' 산이 무너지고 땅이 진동한다고 읊고 있다. 설봉이 노승은 주지 일로 바쁘다고 한 말은 '진동하는 우레 소리에 맑은 회오리바람이 일어난다'고 읊고 있다. 설두는 '맑은 회오리바람 일어난다'고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제시하면 또다시 새로운 것이다. 다시 청풍(淸風)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비가 온 뒤에 푸른 산을 보는 것과 같이 진실로 신선하게 보이는 것이다. 설봉의 한마디는 일체의 시비를 초월하고 선승의 본분에서 안목있는 자신의 일을 하는 신선한 청풍이다. 설봉의 법문을 체득해 아는 사람은 드물다. "천상과 인간에 청풍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 몇이나 될까?" 설두도 묻고 있다.



[第050則]缽裏飯桶裏水
〈垂示〉垂示云。度越階級超絶方便。機機相應。句句相投。儻非入大解脫門。得大解脫用。何以權衡佛祖。龜鑑宗乘。且道當機直截。逆順縱橫。如何道得出身句。試請擧看。
〈本則〉擧。僧問雲門。如何是塵塵三昧。門云。缽裏飯桶裏水。
〈頌〉缽裏飯桶裏水。多口阿師難下嘴。北斗南星位不殊。白浪滔天平地起。擬不擬。止不止。箇箇無褌長者子。

벽암록 50칙 운문의 진진삼매(塵塵三昧)

“티끌 하나 하나에도 우주가 들어있다”


{벽암록}제50칙은 운문화상에게 진진삼매(塵塵三昧)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질문했다. "무엇이 진진(塵塵) 삼매입니까?" 운문화상이 대답했다. "발우 속에는 밥이 있고, 물통 안에는 물이 있지."

擧. 僧問雲門, 如何是塵塵三昧. 門云, 鉢裏飯, 桶裏水.


발우속에 밥이 들어있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가 '진진삼매 경지'

운문문언화상은 {벽암록} 제6칙의 '날마다 좋은 날'이 되도록 법문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많이 등장하고 있다.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상권에 수록하고 있는데,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진진(塵塵) 삼매란 어떤 경지입니까?"하고 질문하고 있다.

진진삼매(塵塵三昧)란 {화엄경} 14권 현수품 게송에 "일체가 모두 자유 자재한 것은 부처의 화엄삼매 힘이다. 한 티끌(微塵) 가운데 삼매에 들어가 일체의 티끌(微塵)의 선정을 성취한다. 그러나 그 티끌(微塵)은 또한 늘어나지도 않고 하나로서 널리 생각할 수 없는 많은 국토를 나툰다"라고 읊고 있는 말에 의거한 질문이다. {화엄경} 45권에 '한 티끌 가운데 일체가 있다'라는 말이나 '한 티끌(一塵) 법계를 다한다', '한 티끌 가운데 무량의 국토를 나툰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화엄사상에서 주장하는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의 사상을 토대로 질문하고 있다.

의상스님의 {법성게}에도 이러한 화엄사상을 '한 티끌 그 가운데 시방세계 포용하고, 일체의 모든 티끌 하나하나도 낱낱이 또한 같다(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라고 읊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일미진(一微塵)은 지극히 미세한 티끌을 말하며, 진진(塵塵)은 미세한 티끌 하나하나를 말한다.

따라서 진진(塵塵) 삼매나 개개(個個)삼매 혹은 개별삼매(個別三昧)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한 티끌 가운데 우주 일체를 포섭시키고 있는 삼매라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로 진진일념(塵塵一念)이란 말이 있는데, 일체의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한 생각의 움직임(작용)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즉 이 질문은 화엄사상에서 주장하는 장단(長短)과 대소(大小)의 차별을 초월한 화엄법계의 연기의 이치와 도리를 확실히 체득한 입장이 아니면 질문 할 수도 없고, 또한 대답 할 수도 없다. 말하자면 화엄철학에서 설하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이치를 선사는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법계의 사사무애(事事無碍)는 만물의 근본은 일체라는 원리와 만물이 서로 상관관계라는 이치를 토대로 주장하고 있다. 만물은 일심(一心)의 법계로 나타낸 것이며 마음 밖에 법이 없다(心外無法). 따라서 '일체는 오직 마음의 조작이다(一切唯心造)'라고 주장한다. 책을 읽는 마음이나 글씨를 쓰는 것, 한 손가락 움직이는 것이 곧 법계와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계를 움직이는 것이며, 인간의 마음 씀이 곧 일체의 법계와 서로 서로 관계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만물이 일체라는 주장도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연필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나무는 땅에서 자란 것이며, 땅은 흙과 물과 바람과 공기 등 많은 사물과 함께 성장된 것처럼, 자신의 마음과 하나 된 경지에서 사용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모든 존재와 사물이 서로 서로 상관관계 속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화엄철학에서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고 한다. 상즉(相卽)은 파도와 물과 같이 서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만물이 동체(同體)인 관계를 말하며, 상입(相入)은 두 거울이 서로 마주 비추는 것처럼, 만물의 상관관계를 말한다. 화엄철학에서는 십현문(十玄門)이라는 열 가지 법계를 관찰하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일체의 모든 법이 무애자재하게 상즉상입하는 사실을 설하고 있다. 또한 육상(六相)이 원융(圓融)한 화엄철학으로 일체의 모든 모양이 무애자재하게 서로서로 즉입하는 관계를 제시하고도 있다.

그리고 삼매(三昧)는 'samadhi'의 음역으로 정수(正受)라고도 번역하는 것처럼, 올바르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거울은 어떤 사물이나 무심하게 그대로 받아들여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것처럼, 나의 마음이 무심의 경지에서 일체의 만물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주관)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여 자기와 사물과 하나가 되는 경지를 말하며, 독서삼매라고 할 때 책을 읽는 자신과 책과 하나가 되고, 일을 할 때는 지금 여기서 자신이 하는 일과 혼연 일체가 되고 하나가 되는 경지를 말한다.

따라서 진진삼매는 미세한 하나하나의 티끌 가운데 능히 무량 광대한 세계와 하나가 되고, 한 생각 한 생각에 무량 법계와 하나가 된 깨달음의 경지를 말한다. 스님은 운문화상에게 "어떤 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사사무애 법계의 사는 경지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이다.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진진삼매나 사사무애법계의 법문은 자기와는 별개의 법문이며, 자기 밖에서 그러한 법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원오선사가 "천하의 납승들이 모두 여기에 안주할 소굴을 만든다"라고 착어한 것은 질문한 스님뿐만 아니라 많은 선승들이 이렇게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즉 경전에서 주장하는 언어 문자의 함정과 미혹함의 괴로움에 빠져 있으면서 진진삼매란 특별한 법문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마치 물 속에서 갈증을 느끼는 것처럼, 불법의 진실과 깨달음을 마음 밖에서 추구하는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있다.

깊고 미묘한 화엄사상의 진수를 진진삼매라는 한마디로 요약하여 질문하자, 운문화상은 "발우 속에는 밥이 있고, 물통 안에는 물이 있지"라고 대답하고 있다. 진진삼매 말인가. 발우에는 밥이 있고, 물통에는 물이 담겨 있는 이것이 화엄에서 주장하는 진진삼매이며 사사무애한 화엄법계이다. 운문은 발우와 물통이라는 일상생활의 도구로서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대답하고 있다. 선어에서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고 말하는 것처럼, 사물 하나하나의 참된 모습은 지극히 당연한 그대로의 사실이기 때문에 진실이며, 제법의 실상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사실이 그대로 진진삼매이며 사사(事事)가 무애(無碍)한 법계의 이치인 것이다.

원오선사는 "포대 속에 송곳을 넣어 두었군!"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운문의 기봉(機鋒. 지혜작용)은 송곳이 포대 밖으로 나온 것으로 비유하여 지혜의 안목이 뛰어남을 칭찬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발우 속에는 밥이, 물통에는 물." 운문의 대답을 다시 인용하여 진진삼매의 경지를 감춤이 없이 그대로 모두 들어낸 것이라고 읊고 있다. ["말 많은 스님도 입을 열기 어렵네." 불법을 잘 알고 변재가 뛰어난 사람이나 삼세의 제불도 운문화상의 이 한마디에는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북두성과 남극성의 위치는 본래 그 자리에 있는데" 북극성의 별은 언제나 북쪽에, 남극성의 별은 언제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일체의 모든 사물은 반드시 있어야 할 그 곳에 있는 그대로가 진진삼매이며 사사가 무애한 경지이다. 운문이 "발우에는 밥, 물통에는 물이 있다"고 대답한 것과 같다. "하늘까지 넘실거리는 흰 물결은 평지에서 일어난다." 운문화상의 말은 원융무애하고 변화가 자유자재하여 바다에 있어야 할 성난 파도가 하늘에까지 미친다고 읊고 있다. "마음으로 생각하려 해도 생각하지 못하고, 마음으로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두지 못하네."]

운문선사의 대답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인가, 저것인가 비교해서 사량분별하거나 생각해서 알 수 있는 경지도 아니다. 그렇게 미혹한 마음으로 사량분별하는 모습은 마치 {법화경} 신해품에 나오는 거지로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고생하는 장자의 어리석은 아들에 비유하여 "모두가 속옷도 없는 장자의 아들이로다"고 했다. "속옷도 없다"라는 말은 {한산시}에 의거한 표현인데, 사바세계의 미혹한 중생은 모두 가난하여 속옷도 없다고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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