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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7) 61칙 ~ 70칙

벽암록 61칙 풍혈(風穴)화상의 한 티끌(一塵) 마음 한티끌로 지옥도 만들고 천당도 만들어 {벽암록} 61칙은 풍혈화상이 한 티끌을 세운 법문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풍혈화상이 대중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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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061則]若立一塵
〈垂示〉垂示云。建法幢立宗旨。還他本分宗師。定龍蛇別緇素。須是作家知識。劍刃上論殺活。棒頭上別機宜。則且置。且道獨據寰中事一句作麽生商量。試擧看。
〈本則〉擧。風穴垂語云。若立一塵。家國興盛。不立一塵。家國喪亡。雪竇拈拄杖云。還有同生同死底衲僧麽。
〈頌〉野老從敎不展眉。且圖家國立雄基。謀臣猛將今何在。萬里淸風只自知。

벽암록 61칙 풍혈(風穴)화상의 한 티끌(一塵)

마음 한티끌로 지옥도 만들고 천당도 만들어


{벽암록} 61칙은 풍혈화상이 한 티끌을 세운 법문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풍혈화상이 대중에게 법문을 제시하였다. '만약 한 티끌을 세우면 나라가 흥성하고,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 설두화상이 주장자를 들고서 말했다. '함께 생사(生死)를 함께 할 납승이 있는가?'”

擧. 風穴垂語云, 若立一塵, 家國興盛, 不立一塵, 家國喪亡.(雪竇拈杖云, 還有同生同死底衲僧.)


욕심 한 티끌 세우면 번뇌 일어나
마음을 비우면 근심걱정도 사라져

풍혈화상은 임제 문하의 제4세로서 남원혜옹(南院慧)의 법을 계승한 연소(延沼. 896~973)선사인데, 여주 풍혈산에서 교화를 펼쳤기 때문에 풍혈화상이라고 불렀다. 그의 전기는 {전등록} 13권과 {광등록} 15권, {오등회원} 11권 등에 전하고 있고, {벽암록} 제38칙 '풍혈화상의 철우(鐵牛)'에 등장한 바가 있다. 본칙의 공안은 {광등록} 제15권 풍혈전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풍혈선사가 상당법문했다. '만약 한 티끌을 세우면 나라가 흥성하지만 농부는 눈살을 찌푸리고(蹙),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하지만 백성은 무심하여 편안(安貼)하다'" 풍혈화상의 상당법문은 역설적인 입장에서 설법한 것인데, 설두중현선사가 취사선택하여 긴요한 문제만을 제시하여 수행자들이 이 공안을 통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도록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당설법으로 설한 수어(垂語)를 수시(垂示), 수계(垂誡), 수훈(垂訓)이라고도 하는데, 안목이 있는 선승이 학인들을 위하여 불법을 교시하는 말씀을 내린 것이다. 따라서 수시의 법문에는 선문답이 아니기 때문에 스승과 학인과의 빈주(賓主) 문답이 없고 각자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

풍혈화상이 어느 날 대중을 위한 법문으로 "만약 한 티끌을 세우면 나라가 흥성하고,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라고 설했다. 한 티끌은 일진(一塵)으로 미세한 먼지를 말한다. {벽암록} 19칙 구지화상의 한 손가락을 세우는 법문에 "한 티끌(一塵)을 들면 대지가 수용하고, 한 꽃(一花)이 피면 세계가 흥기한다"라는 말은 화엄철학의 '법성게'에서 설하는 "한 미세한 티끌에 시방세계를 포함한다(一微塵中含十方)"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도리를 설한 것이다. 풍혈화상은 한 티끌이 일어나는 것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같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국가에 한 사람의 훌륭한 인재나 영웅호걸이 배출하면 도탄에 빠진 인민의 고통을 구제하고 국가가 흥융한 사례는 역사를 통해서 많이 볼 수 있다. 풍혈화상의 설법은 이러한 국가의 문제를 화두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흥망성쇠를 비유하여 선의 정신을 설하고 있다. 즉 마음에 미세한 번뇌망념이 일어나면 선악(善惡)과 범성(凡聖)의 차별심이 일어나게 되고, 지옥이 건립되고 천당도 건설된다. 한 생각의 번뇌망념에는 부처도 있고, 중생도 있으며, 인간세계나 아귀의 세계같이 육도의 윤회세계도 만들어 진다. 무명의 한 생각이 팔만사천의 번뇌망념으로 미친 듯이 번창하는 모습을 국가가 흥성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원오는 "나는 법왕이 되어 법에 자유자재하다. 꽃도 수북하고, 비단도 수북하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풍혈화상이 한 티끌(一塵)을 건립한 것처럼, 국가가 흥성하거나 멸망하거나 그것은 법왕인 풍혈화상의 자유다. 풍혈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한 생각의 번뇌망념이 일어나면 번뇌의 마음가짐과 마음먹기에 따라 지옥도 만들고 극락도 건립할 수다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풍혈화상의 법문은 일체를 놓아 버린 방행문(放行門)의 교화방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 티끌을 세워 국가흥융을 이루는 것에 주안점을 둔 것이 아니라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국가가 망한다'는 전연 반대의 입장을 제시한 파주문(把住門)에서 선의 실천정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천차만별의 일체 경계를 철저하게 소탕하고 인정하지 않는 불심의 본체에서 절대평등의 세계를 제시한 것이다.

즉하나의 미세한 번뇌망념도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속에 어떠한 경계도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황제도 서민 농부도, 범부나 성인, 고락(苦樂), 미오(迷悟), 선악(善惡), 미추(美醜) 등의 일체 차별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화엄오교장}에 "한 생각의 번뇌망념이 일어나지 않으면 부처(一念不生名爲佛)"라고 한 그 경지이다. 원오는 "자취를 쓸어 없앤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번뇌망념의 흔적과 자취까지 완전히 없애버린 경지이다. 나라가 멸망한다는 '상망(喪亡)'은 자취나 종적도 없어진 것을 표현한 말이다. 번뇌망념이 없는 깨달음의 자취까지 텅 비워버린 경지이다. 원오는 "눈동자를 잃고 코(鼻孔)의 생명도 잃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천차만별의 차별경계를 보는 눈도 상실해버리고, 냄새를 맡는 코도 기능을 잃고, 소리를 듣는 귀도, 맛을 보는 혀도, 주관의 마음도 객관의 대상인 사물도 일체 모두를 멸각했다는 의미이다.

하나의 미세한 번뇌망념도 없어진 경지는 어떻게 되는가? 원오는 "일체처가 광명(光明)"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근원적인 본래심(本地)에서 풍광(風光)이 일어나고, 대도의 광명(光明)이 현성한다는 의미이다. 완전한 건강은 약이나 치료의 문제는 물론, 병이 다 완치되었다는 의식까지 없어지고 무심한 경지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다. 국가의 흥망성쇠를 말한다는 것은 사실 국가의 비상사태인 것이다. 국민이 불안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태평 시절은 원오가 "국가를 언급해서 무엇하려고?"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국가라고 하는 말도 의식도 완전히 없어진 경지이다. {광등록} 풍혈의 설법에 "한 티끌을 세우면 나라가 흥성하지만 농부는 눈살을 찌푸리고,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하지만 백성은 무심하여 편안하다"라는 법문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요순황제의 시대처럼, "해가 뜨면 들에 나가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집에 와서 쉰다. 목마르면 우물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고 씨 뿌려 곡식을 만들어 먹는다. 황제의 권력이 나에게 아무 소용없다"라고 노래한 것과 같다. 원오는 '수시'에 "성왕이 홀로 왕궁(中)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일"로 표현했다. 풍혈화상의 선풍은 임제의 가풍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지금 여기 자기 자신의 본분사의 일을 무심의 경지에서 살고 있도록 제시한 법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뒤에 설두화상은 여러 사람들에게 주장자를 들어 보이며 '이 주장자와 함께 생사를 함께할 사람이 있는가?'라고 말했다. 설두가 제시한 주장자는 자기 자신이며, 온 천지와 우주와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이 법석의 납승과 대중, 설두나 풍혈, 뿐만 아니라 일체의 모두가 주장자와 함께 살고 함께 죽지 않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설두는 주장자를 가지고 풍혈화상의 한 티끌을 세우고 세우지 않는 입장, 흥성(興盛)과 상망(喪亡)의 두 가지 차별적인 입장을 지양하고 도리어 나와 함께 생사를 함께할 사람을 찾고 있다.

설두는 국가 흥성의 건립문(建立門)에서 중생교화의 입장으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시골 늙은이가 설사 구겨진 이맛살을 펴지 않는다 해도" 국가를 발전시키고 문화시설과 국방예산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올리고 많은 법칙과 규제를 시행한다. 따라서 시골 농부는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는 말이다. 수행자들을 위해 많은 법문과 잔소리를 한다는 말이다. '국가의 웅대한 터전을 세우고자 하는데' 국가의 발전을 위한 국책사업을 펼치기 위해서는 농부의 빈축을 걱정해서는 안 된다. 풍혈화상이 중생을 위해 다양한 방편법문으로 대기대용을 펼친 것이라는 의미이다. "지모 있는 신하들과 용맹스러운 장수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설두의 주장자 법문을 읊은 것으로, 지금 국가 흥성과 국책사업에 천자를 보필할 신하처럼, 훌륭한 수행자는 있는가? "만 리에 맑은 바람이 부니 자연히 알게 되리라." 요즘 세상에는 좋은 납승이 없지만, 설두 주장자의 살아있는 법문을 멀리 청풍(淸風)은 알리라.

 

[第062則]中有一寶
〈垂示〉垂示云。以無師智。發無作妙用。以無緣慈。作不請勝友。向一句下。有殺有活。於一機中。有縱有擒。且道什麽人曾恁麽來。試擧看。
〈本則〉擧。雲門示衆云。乾坤之內。宇宙之間。中有一寶。祕在形山。拈燈籠向佛殿裏。將三門來燈籠上。
〈頌〉看看。古岸何人把釣竿。雲冉冉。水漫漫。明月蘆花君自看。

벽암록 62칙 운문화상과 하나의 보물(雲門一寶)

“우주 가운데 하나의 보물은 인간의 불성”


{벽암록} 제62칙은 운문화상이 대중에게 하나의 보물에 대하여 설한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운문화상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하늘과 땅 사이, 우주 가운데 하나의 보물이 있으니, 형산(形山)에 감추어져 있다. 등불(燈籠)을 들고서 불전(佛殿)을 향해 가고, 삼문(三門)을 들어서 등불(燈籠)위로 올려놓았다."

擧. 雲門示衆云, 乾坤之內, 宇宙之間, 中有一寶, 秘在形山. 拈燈籠向佛殿裏, 將三門來燈籠上.


'삼문을 등불위에 올려놓다'는
'크다 작다' 분별을 초월한 경지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 중권의 법문(垂示 代語)에 보이며, {굉지송고} 92칙에도 인용하여 설하고 있다. 운문화상의 법문은 '평창'에도 언급한 것처럼, 승조(僧肇)의 저술로 알려진 {보장론(寶藏論)} '광조공유품(廣照空有品'의 한 절을 인용한 것이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승조법사는 서천 27조 반야다라 존자의 깊은 경지에까지 이르렀는데, 어느 날 난을 만나 사형을 당하게 되었을 대 7일간의 여가를 얻어 {보장론}을 저술하였다. 운문화상은 {보장론} 가운데 네 구절을 제시하여 설법하기를 '어째서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물이 음계(陰界) 속에 숨겨져 있는가' 라고 묻고 있다. {보장론}의 내용은 존문의 말들과 일치되고 있다.”

승조법사는 구마라집 문하의 이해(理解)제일의 제자로서 {조론}과 {주유마힐경} 10권의 저술이 있다. {보장론}은 8세기 후반의 저술인데, 승조에 가탁한 작품이다. 운문화상이 인용한 {보장론}의 일절은 동산양개선사도 {조당집}제6권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 우주 가운데 하나의 보물이 있으니 육체(形山)에 감추어져 있다. 사물을 인식하는 신령스러운 광명은 안과 밖이 텅 비었네. 적막하여 그 본체를 볼 수 없고, 그 위치는 그윽하여 파악 할 수가 없다.' 단지 자기에게서 찾아야지 다른 물건을 빌려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하늘과 땅 사이, 우주 가운데 하나의 보물이 있으니, 형산(形山)에 감추어져 있다.” '하늘과 땅(乾坤)'은 천지(天地)이며, 우주(宇宙)에 대하여 위는 천(天)이고 아래는 지(地)를 우(宇)라고 하고, 고왕금래(古往今來)를 주(宙)라고 하는 것처럼, 우(宇)는 공간, 주(宙)는 시간을 말한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시방이라는 무한의 공간과 삼세라는 무한의 시간이 전개하는 그 가운데 귀중한 하나의 보물이 있으니 형산(形山)에 감추어져 있다고 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형산(形山)은 인간의 육체를 말한다. 천지에 충만하고 있는 하나의 보물은 우주의 본체이며 진여, 혹은 법성(法性),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광대무변한 진여 법성은 우리들 인간의 본심이며 본성인 것이고, 경전에서는 불성이라고 한다.

{전등록}6권에 마조선사가 혜해에게 "지금 나에게 질문한 것이 바로 그대의 보배(寶藏)"라고 설하고 있다. 즉 중생심은 윤회의 고통을 초래하는 업장을 만들지만, 불성의 지혜작용은 무진장한 보배이며 보물과 같이 값진 삶을 만드는 창조적인 것이다. {원각경}에도 불성의 지혜작용을 여의보주(如意寶珠), 마니보주에 비유하고 있으며, {법화경}에도 상투속의 보물(珠)로 비유하고 있다. {전등록} 18권에 현사는 "온 시방세계가 바로 하나의 밝은 구슬(一顆明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불성을 보물에 비유한 말은 {조당집} 5권에 운암선사가 "문으로 쫓아 들어온 것은 보배가 아니다"고 설하고 있다. 육근의 문으로 들어온 보배는 경전과 선승들의 설법을 통해서 들은 언어 문자의 법문을 말한다. 이러한 법문의 내용을 마음으로 깊이 사유하여 깨닫고, 언어 문자의 지식을 지혜로 전환시켜 자신의 무진장한 보배로 만들어야 한다.

자신의 살림살이(지혜)로 만들지 않으면 인연 따라 곧 문을 통해서 나가버리게 되고 만다. 참선수행은 지식으로 전해들은 경전의 말씀과 선승들의 법문을 깊이 사유하고 관찰하여 자신의 지혜로 만드는 수행인 것이다. 경전이나 어록의 법문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면 문제의식이 남게 되며, 이 문제의식이 의심인 것이다. 간화선은 의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문답을 깊이 사유하여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고 반야의 지혜와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수행이다.

원오는 "형산에 감추어져 있다."라는 말에 '찰(). 점(點)'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찰()은 정말 형산에 감추어져 있는가. 분명히 확인해 보자라는 말이고, 점(點)은 감추어져 있는 그 곳을 점검해 버린 것을 착어한 것이다. 그러나 운문화상은 원오의 착어보다도 더 강하게 점검하도록 "등불(燈籠)을 들고서 불전(佛殿)을 향해 가고, 삼문(三門)을 들어서 등불(燈籠)위로 올려놓았다"고 설하고 있다. 등불을 들고서 불전을 향해 간다고 하는 말은 하나의 보물이 형산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바꾸어서 말한 것이다. 하나의 보물이 형산에 있다고 말한 것은 상당히 신비적인 표현으로 들리지만 사량분별이 따른다. 그래서 운문은 무심한 등불을 무심한 불전에 봉납(奉納)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 할 것도 없고, 사량 분별도 따르지 않고, 청정무애하고 자유자재한 경지를 설한 것이다. 즉 육체를 불전과 같이 보고, 등불이 불빛을 비추는 것과 같이 심성(心性)을 본다면 우주의 본질인 불법의 대의를 체득 할 수가 있다고 설한다.

'삼문(三門)을 등불(燈籠)위에 올려놓았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삼문(三門)은 사찰에 들어가는 산문(山門)으로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 또는 무작(無作)의 삼해탈문(三解脫門)을 말하는데, 그렇게 큰 삼문(三門)을 불전의 등불 위에 올려놓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불전은 대(大), 등불은 소(小), 삼문(三門)은 대(大), 등불은 소(小)로서 대소의 차별을 초월한 경지에서 대소가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원융무애한 불가사의 해탈의 경지를 구체적인 사물을 제시하여 설하고 있다. {유마경} 불가사의 해탈법문에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가고, 사해의 바닷물이 한 터럭 구멍에 들어간다고 설하고 있는 내용이다. {보장론}에서 이론적으로 설한 법문을 구체적인 사물인 삼문(三門)과 등불이 불전 가운데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의 보물인 불성이 육체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불가사의한 경지를 비유로 설한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살펴보고, 살펴보라!” 설두는 무엇을 '살펴보라'고 하는가? 운문화상이 설법한 것처럼, 각자가 육체에 감추어져 있다고 하는 하나의 보물을 살펴보라고 한 것인가? 원오는 "높이 눈을 떠라"고 착어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하나의 보물은 범부의 차원 낮은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정법의 안목을 갖춘 정문(頂門)의 눈으로 잘 살펴봐야 한다. 대소(大小), 범성(凡聖)의 차별의 눈과 사량분별하는 정식(情識)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옛 언덕에 어떤 사람이 낚싯대를 잡고 있는가?” 운문화상은 승조법사의 말을 낚시에 매달아 고기먹이로 하여 대중에게 시중법문의 낚싯대를 던지고 있다. 마치 태공망(太公望)이 강 언덕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것처럼, 운문화상도 선(禪)의 바다에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큰 고기를 낚으려고 한 것이다. 원오가 '수시'에서 말한 것처럼, 옛 언덕(古岸)은 대소(大小)나 범성(凡聖)의 차별을 초월한 무심(본래심)의 경지에서 무연(無緣)의 자비심으로 청하지 않은 벗이 되어 무작(無作)의 묘용(妙用)으로 낚싯대를 던진 운문의 마음을 칭찬하고 있다. “구름은 뭉게뭉게. 물은 넘실넘실” 이 말은 옛 언덕(깨달음의 경지)을 읊은 것인데, 구름과 물과 같이 운문이 무심의 경지에서 무한한 자비심의 지혜작용(묘용)을 펼친 것이다. 또한 사람들 모두가 본지풍광(本地風光)이 무심의 경지에 작용하고 있음을 말한다. “밝은 달 갈대꽃을 그대야 스스로 살펴보라!” 달빛도 희고, 갈대꽃도 흰 색이지만, 잘 살펴보면 명월(明月)은 명월의 빛이 있고, 갈대꽃은 갈대꽃의 색이 있다. 형산(形山)과 하나의 보물, 육체와 마음, 등불과 산문이 같은 것 같지만 다른 정법의 안목을 구족해야 한다는 운문의 설법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읊고 있다.

 

[第063則]南泉斬猫
〈垂示〉垂示云。意路不到。正好提撕。言詮不及。宜急著眼。若也電轉星飛。便可傾湫倒嶽。衆中莫有辨得底麽。試擧看。
〈本則〉擧。南泉一日東西兩堂爭貓兒。南泉見遂提起云。道得卽不斬。衆無對。泉斬貓兒爲兩段。
〈頌〉兩堂俱是杜禪和。撥動煙塵不柰何。賴得南泉能擧令。一刀兩段任偏頗。

벽암록 63칙 남전화상과 고양이 살해사건

“고양이 절단한건 선승들의 분별망상 절단”


{벽암록} 제63칙은 남전화상이 칼로 고양이를 절단한 사건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남전화상은 어느 날 선원의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의 선승들이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남전화상은 고양이를 잡아들고서 말했다. "말할 수 있으면 고양이를 참살하지 않겠다." 대중들은 말이 없었다. 남전화상은 고양이를 두 동강이로 절단해 버렸다.

擧. 南泉一日, 東西兩堂, 爭猫兒,南泉見. 遂提起云, 道得卽不斬. 衆無對. 泉, 斬猫兒爲兩段


엉터리 선승들 고양이로 다투자
지혜의 칼 휘둘러 분쟁근원 잘라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화상은 마조도일선사의 제자로서 {조당집} 제14권, {전등록} 제6권 등에 자세한 전기를 전하고 있으며, {어록}도 전하고 있다. 남전화상의 속성은 왕씨로 왕노사(王老師)라고 불리며, 안휘성 귀지현의 남전산(南泉山)에서 행화를 펼쳤다. 문하에 조주종심, 장사경잠, 육응대부 등 뛰어난 선승들을 배출했기 때문에 후대에 마조문하의 서당지장, 백장회해와 함께 3대선승(三大禪僧)으로 주목되고 있다.

{벽암록}에는 63칙, 64칙으로 나누어서 싣고 있는데, {무문관} 14칙, {굉지송고} 9칙에도 수록하고 있는 유명한 공안이다. 본 공안의 출처는 {조주록} 상권, {전등록} 제8권 남전장에도 전하고 있는데, {조당집} 제5권 덕산장에 본 공안의 원형으로 간주되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남전화상 문하에 제일수좌(第一首座)가 고양이를 길렀는데, 옆에 있는 스님이 고양이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이로 인해 싸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남전화상에게 아뢰니 화상이 당장 내려와서 고양이를 번쩍 들고 외쳤다. '누군가 한마디(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궁극적인 일구) 말할 수 있으면 이 고양이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대중 가운데 대답하는 이가 없자 남전화상은 칼을 들고 고양이를 두 토막으로 잘라 버렸다. 설봉이 이 이야기를 들어서 덕산선사에게 질문했다. '남전화상이 고양이를 벤 뜻이 무엇입니까?' 덕산선사는 설봉을 밀어내면서 때리니 설봉이 달아났다. 이에 덕산선사는 다시 설봉을 불러 세우고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대를 위해서 그토록 애썼는데 그대는 모르는 구나 !' 덕산선사가 암두에게 말했다.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것을 잘 지니는 것이 좋겠다.' '이미 모르거늘 잘 지닐 것이 무엇입니까?' 이에 덕산이 말했다. '그대는 마치 무쇠 말뚝 같구나!'"

이 이야기와 똑 같은 구조의 선문답으로 {백장광록}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마조화상이 사람을 시켜서 편지와 간장 항아리 세 개를 보내왔다. 백장스님은 법당 앞에 나란히 놓아두라고 지시하고, 법당에 올라 설법(上堂)할 대에 대중이 모이자. 주장자로 항아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누군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말을 한마디한다면 이 항아리를 깨뜨리지 않을 것이요, 말하지 못하면 곧 깨뜨릴 것이다.' 대중이 말이 없자, 백장스님은 곧장 항아리를 깨뜨리고 방장으로 되돌아갔다.” 또 {오등회원} 제9권 앙산장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앙산스님은 스승 위산화상이 하나의 거울을 보내온 인연에 대하여 거울을 받아 들고 상당 설법하였다. '자! 말해보게나! 이것은 위산의 거울인가? 앙산의 거울인가? 만약 위산의 거울이라고 한다면 앙산의 손 가운데 있고, 만약 앙산의 거울이라면 이것은 위산이 보내준 것이다. 말할 수 있으면 타파하지 않겠지만, 말하지 못한다면 타파해 버리겠다.' 세 번이나 질문했지만 대중이 말이 없자, 앙산은 드디어 거울을 깨뜨려 버렸다.”

남전화상은 어느 날 선원의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의 선승들이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원오가 "이것은 오늘만 시끄러운 것이 아니었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선원의 수행자들은 항상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논쟁하고 시비 분별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수행자들이 동서로 나누어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는 모습을 본 남전화상은 참고 볼 수가 없어서 곧장 고양이를 잡아들고서 말했다. “자! 그대들이 말할 수 있으면 고양이를 참살하지 않겠다.” 그대들은 수행자인데, 무엇 때문에 이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가. 수행자라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정법의 안목으로 자신의 지혜로 한마디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무문관}에는 "정법의 안목으로 생사대사의 본분사를 해결한 지혜의 말을 한다면 이 고양이를 살려 주지만 말하지 못한다면 고양이를 절단해버리겠다"고 하였다. 원오는 "이 노인 용과 뱀을 구분하는 수단이 있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남전의 한마디는 지혜로 판단하는 안목이 있다. 원오가 '수시'에 "의식이 길이 이르지 못한 경지(意路不到)"라고 말한 것처럼, 언어 문자로 엿볼 수 없는 경지를 체득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시한 것이다. 대중 가운데 남전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남전화상은 고양이를 두 동강이로 절단해 버렸다. 남전이 절단한 것은 단지 고양이뿐만 아니라 동당 서당 선승들의 논쟁한 그 핵심을 절단한 것이며, 선승들의 분별 망상을 절단한 것이며, 아상(我相) 인상(人相)의 근원을 끊어버리고 일체 무명의 근본을 절단해서 펼쳐 밝힌 것이다. 원오도 "통쾌하고 통쾌하다"라고 착어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남전이 왜 고양이를 절단했는가, 불쌍한 고양이를 죽일 필요가 있었겠는가하는 점이다. 남전은 스스로 축생의 경계에 떨어져 불도를 실행하도록 하는 '이류중행(異類中行)'의 설법을 설한 선승으로도 유명한데, 축생도(畜生道)에서는 축생으로 응현하여 불법을 수행하도록 하는 남전화상의 '이류중행(異類中行)'은 살생과 불살생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고양이를 절단한 남전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동당 서당 양쪽 승당엔 모두 엉터리 선승들(杜禪和)” 양쪽 승당의 선승들이 고양이를 다투는 시비 분별에 떨어진 수행자들이라고 심하게 꾸짖는 말이다. 두선화(杜禪和)는 두묵(杜)이라는 시인이 운율에 맞지 않고 격식에도 틀린 엉터리 시를 지었기 때문에 두선(杜撰)이라는 말이 생겼는데, 이 말을 토대로 하여 수행자의 본분을 상실하고, 격식과 품위도 없이 제멋대로 놀고 있는 엉터리 선 수행자(禪和子)들 뿐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봉화의 연기와 티끌(煙塵)만 일으킬 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연진(煙塵)은 랑연(狼煙)으로 봉화의 연기와 마진(馬塵)으로 말이 달리면서 발굽에서 일어나는 티끌을 말한다. 즉 전쟁터에서 사건이 일어난 상황을 말하는데, 천하태평으로 여유 있게 자기의 일대사를 규명하는 본분사의 수행에 몰입하였다면 좋았는데, 쓸데없는 일을 하다가 분쟁이 일어났다는 상황을 읊고 있다. 불법 문중에서 바람없이 풍랑을 일으키고, 불조의 생명인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며, 수행자의 본분을 망각한 일이었다. 그런데 분쟁의 당사자들은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남전의 질문에 대답도 못하여 고양이를 살해하는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다행히 남전화상이 법령을 실행하였으니.” 다행히 남전화상과 같은 능력있는 선승이 출현하여 불조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실행하고 분쟁의 근원과 망상의 뿌리를 일소하였기 때문에 사건은 해결된 것이다. 만약 남전화상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바보같은 선승들이 지옥에 떨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영원히 번뇌 망상의 먼지만 일으키는 사량분별선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단칼에 고양이를 두동강이로 절단하는 쪽(偏頗)을 선택했다.” 편파(偏頗)는 {서경(書經)}의 말로서 공정하지 못하고 한 쪽에 치우친 판단을 말한다. 즉 남전화상이 고양이를 절단하여 죽이는 행동을 선택한 것을 말한다. 선은 양쪽의 의견을 절충하여 타협점을 찾는 것이 아니다.

"양쪽 머리의 뱀을 보는 자는 죽는다."라고 말한 것처럼, 양쪽의 머리를 모두 함께 절단하고 양변의 차별심을 초월하는 지혜작용을 펼치는 것이다. 남전의 일도양단(一刀兩斷)은 불조의 정법을 실행한 지혜의 칼을 휘두른 것이다.

 

[第064則]草鞋頭戴
〈本則〉擧。南泉復擧前話。問趙州。州便脫草鞋。於頭上戴出。南泉云。子若在。恰救得貓兒。
〈頌〉公案圓來問趙州。長安城裏任閑遊。草鞋頭戴無人會。歸到家山卽便休。

벽암록 64칙 조주화상이 짚신을 머리위에 올려놓다

“조주의 '머리위 짚신'은 전도몽상 비판 의도”


{벽암록} 제64칙은 남전화상이 고양이 살해사건에 대하여 조주선사의 의견을 묻는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남전화상은 다시 앞에 있었던 사건(고양이 살해사건)을 조주선사에게 이야기 한 뒤에 조주선사에게 묻자, 조주선사는 곧장 짚신을 벗어 머리 위에 이고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남전화상은 말했다. “그대가 그 때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擧. 南泉復擧前話 問趙州. 州便脫草鞋 於頭上戴出. 南泉云 子若在 恰救得猫兒.


고양이 시비 끼어들지 않으려고
조주화상, 문밖으로 나가버려…

본칙은 {벽암록} 제63칙의 이야기가 연결된 것으로 사건의 후반 부분이다. 남전화상이 조주선사에게 앞의 이야기를 제시하였다고 한 것은 63칙에 제시한 사건을 말한다. 즉 '어느 날 선원의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의 선승들이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 것을 본 남전화상은 고양이를 잡아들고서 말했다. “불법을 체득한 지혜의 안목으로 생사대사를 해결한 궁극적인 한마디(一句)를 말할 수 있으면 고양이를 죽이지 않겠지만,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이 고양이를 참살하겠다.” 대중들은 말이 없기에 남전화상은 칼로 고양이를 두 동강이로 절단해 버렸다.' {무문관} 14칙에는 한 칙의 공안으로 수록하고 있다.

{불유교경}에 "축생을 기르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선원이나 사찰에서 짐승을 기르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당대의 선원에서는 곡식을 탕진하는 쥐를 잡기위해 고양이를 길렀다. 선원에서 일대사(一大事),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구도자들이 한 마리의 축생인 고양이 경계에 떨어져 생사망념(生死妄念)에 허덕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남전화상은 제자들을 각성시키는 교육을 위해서 부득이 고양이를 죽이고 있다. 즉 남전화상은 동서(東西) 양당(兩堂) 수행자들의 생사망념과 차별심, 분별심을 끊어버리도록 부득이 고양이를 죽이면서까지 행동으로 보여준 절실한 교육이었으며, 생사망념을 끊는 지혜의 살인도(殺人刀)를 휘두른 것이었다. 자기를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이와 똑같은 생사문제를 고양이를 제시하여 수행자들을 각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출가하여 생사대사(生死大事)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기 위해 신명(身命)을 내 걸고 수행해야하는 수행자들이 자신의 본분사를 망각하고 고양이라는 경계에 끄달려 자신을 망각하는 제자들에게 직접 지혜의 살인도로서 일체 생사망념을 차단하는 행동을 단행한 것이다. 남전이 고양이를 죽인 것은 전도몽상에 허덕이고 생사망념에 떨어진 학인들과 구도자들의 생사망념의 근본을 끊어 버린 행위이다.

저녁때 외출했다가 돌아온 제자 조주종심은 스승인 남전화상에게 사찰로 돌아온 인사를 하자 남전화상은 낮에 있었던 고양이 참살사건을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조주선사에게 “만약 그대가 그 장소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조주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조주선사는 말없이 곧장 짚신을 벗어 머리위에 이고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조주는 한마디 대꾸도 없이 행동으로 자신의 견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공안에 조주를 등장시키고 있는 것은 {전등록} 제8권 남전장이 최초인데, 조주는 남전화상이 고양이를 참살한 일대 사건을 해결하는 구제자의 역할로서 등장하고 있는데, 고양이를 구제하기보다도 남전화상을 구제한 인물이다. 조주선사가 짚신을 머리 위에 올려놓은 행동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고 있으나 본말(本末)이 전도된 사실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짚신은 구도행각을 하는 수행자가 발에 신고 다니는 생활용품이다. 짚신이 발에 있어야 하는 물건인데, 머리 위에 놓는 것은 전도된 착각을 나타낸다. 즉 조주선사는 수행자들의 전도몽상(顚倒夢想)과 착각(錯覺)을 비판하면서 초월하도록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선원의 동당 서당의 양당(兩堂)에 모인 출가 수행자가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하는 올바른 구법의 참선수행을 하지 않고 고양이 한 마리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 것은 수행자로서 너무나 전도(顚倒)된 행위이다. 또한 남전화상이 출가인으로서 불살생의 계율을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를 칼로 참살하여 살생한 것도 전도된 행위인 것이다.

조주스님이 신발을 벗어 머리 위에 올려놓은 것은 수행자들의 전도된 행위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도몽상과 착각을 벗어나야 한다고 하면서 문 밖으로 나가버리는 조주의 행위는 언전불급(言詮不及)과 전도를 떨쳐 버리도록 하는 직접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체의 전도몽상과 착각을 초월하는 수행자의 정신을 행동으로 보여 주고 있다. 부득이 고양이를 죽인 남전화상의 쓸데없이 지나친 방편수단도 떨쳐버리도록 하고 있다. 또한 조주선사가 짚신을 머리위에 얻고 문 밖으로 나간 행위는 수행자들이 일체의 본분사를 망각하고 전도몽상과 생사심, 단견과 상견, 고정관념, 착각, 사량분별심을 초월한 해탈의 경지(깨달음)에서 자유 자재롭게 살아야 한다고 행동으로 직접 보여 주고 있다. 생사를 초월한 경지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모습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주가 짚신을 머리위에 얻고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은 남전화상의 수단이 쓸데없이 지나친 살생에 대하여 그것은 짚신을 머리 위에 올리는 것과 같이 쓸데없이 지나친 행위라고 비판하는 것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남전화상은 조주선사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그대가 그 때 그 곳에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했다. 남전은 만약 그대가 낮에 고양이를 참살하는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나 역시 그렇게 쓸데없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살생의 지나친 행동과 후회하는 마음이 뒤섞인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조주가 남전을 구제해 주는 인물임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원오는 "잘못을 가지고 잘못에 나아간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조주가 짚신을 벗어 머리 위에 올리고 문 밖으로 나간 전도된 행동으로 남전과 수행자들의 착각을 구제하여 남전도 살리고 수행자도 살리며, 고양이도 구제하고 있는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공안을 원만하게 하여 조주에게 물었네.” 남전화상이 조주의 견해를 물었고, 조주는 짚신을 머리위에 올려놓고 문 밖으로 나갔다. 여기서 남전화상이 고양이를 참살한 일대사건은 완전히 해결되었고, 이 문제는 비로소 원만하게 된 것이다. 남전이 고양이를 참살한 사건이 조주가 짚신을 머리위에 올려놓은 일로서 공안은 완전하게 일원상이 되었다고 읊은 것이다. “장안성 안에서 마음대로 한가롭게 논다.”장안과 낙양은 중국의 수도이다. 대도(大道)는 장안을 통한다고 한 것처럼, 장안은 번창한 세계의 중심지이다. 남전의 질문에 조주는 무심하게 짚신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가볍게 문밖으로 훌쩍 나갔다. 풍류스럽지 않은 것이 풍류인 것처럼, 장안성 안에서 한가히 노닐고 있는 모습이다.

원오는 "이처럼 쾌활하고, 이처럼 자유로울 수 있어야지."라고 착어한 것처럼, 무애자재한 조주의 심경을 칭찬하고 있다. “짚신을 머리위에 이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네.” 이러한 조주의 쾌활 자재한 경지를 파악하는 사람이 없다고 개탄하고 있는데, 원래 사량 분별이 미치지 않는 경지이며, 범정(凡情)과 망념으로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원오는 "일개(一個) 성자와 반개(半個) 성자가 있다"라고 착어했는데, 이러한 조주의 경지를 아는 사람은 누굴까? 여기 원오라는 한 사람이 있지 않는가? 라고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고향산천에 돌아가면 모두가 쉬게 된다.” 짚신을 머리 위에 올려놓은 조주는 어디로 갔을까? 길이 아무리 좋아도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좋은 경치라도 자기 집에 가서 편히 쉬는 일이 최상이다. 고향은 근원적인 본래심의 경지이다.

 

[第065則]良馬見鞭影
〈垂示〉垂示云。無相而形。充十虛而方廣。無心而應。遍刹海而不煩。擧一明三目機銖兩。直得棒如雨點喝似雷奔。也未當得向上人行履在。且道作麽生。是向上人事。試擧看。
〈本則〉擧。外道問佛。不問有言。不問無言。世尊良久。外道讚歎云。世尊大慈大悲。開我迷雲。令我得入。外道去後阿難問佛。外道有何所證。而言得入。佛云。如世良馬見鞭影而行。
〈頌〉機輪曾未轉。轉必兩頭走。明鏡忽臨臺。當下分姸醜。姸醜分兮迷雲開。慈門何處生塵埃。因思良馬窺鞭影。千里追風喚得回。喚得回鳴指三下。

벽암록 65칙 외도가 부처님께 질문하다

선기 뛰어난 외도 …이심전심의 깨달음 /


{벽암록} 제65칙은 어떤 외도가 부처님에게 불법의 진수를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어떤 외도(外道)가 부처님에게 질문했다. "말로 대답하는 것(有言)도 묻지 않고, 말없이 침묵으로 대답하는 것(無言)도 묻지 않습니다.(말과 침묵을 여읜 경지에서 불법의 진수를 설해 주십시오)" 세존이 말없이 계셨다(良久). 외도는 찬탄하며 말했다. “세존께서 대자대비로 저의 미혹한 구름을 열어 주시고 저를 깨달음을 체득하게 하셨습니다.” 외도가 떠난 뒤에 아난이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외도는 무엇을 증득했기에 깨달음을 체득했다고 합니까?” 부처님은 말씀했다. “훌륭한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것과 같다.”

擧. 外道問佛, 不問有言, 不問無言. 世尊良久. 外道讚歎云, 世尊大慈大悲, 開我迷雲, 令我得入. 外道去後, 阿難問佛, 外道有何所證, 而言得入. 佛云, 如世良馬見鞭影而行.


이공안은 {조당집} 제1권 석가모니불전에 최초로 등장한다. {전등록} 제27권, {심부주(心賦注)} 제1권 등에도 전하고 있는데, {수능엄경} 제4권의 아난과 세존과의 대화를 근거로 한 것이다. 어떤 외도(外道)가 부처님에게 '언어로 표현하지 않고, 또한 침묵으로 대답하는 것(無言)을 여읜 경지에서 불법의 진수를 설해 주십시오'라고 질문했다. 외도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불법에 대해 질문한 이야기는 {잡아함경}에 많이 보이는데, 본 공안과 같은 내용의 정확한 근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명마(名馬)는 채찍 그림자 봐도 달리듯
여여(如如)한 부처님 모습에 즉각 체득

외도가 주장하는 공통점은 모두 윤회의 실체인 영혼(아트만:我)의 실재를 주장하고 있는 점이며, 불교는 영혼을 부정하는 무아설(無我說)을 제시해 인도 종교사상사에 한 획을 긋고 있다. 외도는 '유언(有言:언어)과 무언(無言:침묵)을 떠나서 불교의 정신을 제시해 보십시오'라고 질문한 것이다. 유언(有言) 무언(無言)은 일체의 언어 문자의 논리적인 방편을 모두 부정한 입장이다. 선(禪)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는 '사구(四句) 백비(百非)를 떠나서 불법(佛法)의 본질을 제시해 주십시오'라는 질문과 같다. 세존이 언어문자로 대답하면 유언(有言)이 되고 상견(常見)에 떨어지며, 침묵하면 무언(無言)이 되며 편견에 떨어진다고 비난할 것이다. 언어와 침묵 이 두 가지 방편과 이견(二見)을 초월한 경지에서 불법의 진수를 제시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존은 외도의 질문에 태연하게 말없이 계셨다(良久). {무문관}에 "세존은 앉아있는 그 자세로 앉아 있었다(世尊據座)"고 한다. 즉 본래의 자리에서 본래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벽암록}에 세존이 "말없이 대답하지 않았다(良久)"고 한 것은 말로서 대답한 것도 아니고, 침묵으로 대답한 것도 아닌 부처본래의 경지를 여여하게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다. 즉 유언(有言)에도 무언(無言)에도 떨어지지 않고, 이 두 차별경계를 모두 포용한 불심의 지혜작용을 잠시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良久)이다. 원오는 "앉은 사람, 선사람 모두가 그를 움직일 수 없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세존의 양구(良久)는 절대적인 법신의 경지를 단적으로 제시한 모습이기에, 앉은 것을 일으켜 세울 수도 없고, 서있는 것을 자빠지게 할 수 없는 무상(無相)의 형체와 무심의 경지에 순응한 입장이기에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평하고 있다.

이렇게 의미가 깊고 엿보기 어려운 세존 양구(良久)의 당처에 외도는 찬탄하며 말했다. “세존께서 대자대비로 저의 미혹한 구름을 열어 주시고 깨달음을 체득하게 하셨습니다.” 즉 유무(有無)의 차별적인 이견(二見:二邊)에 미혹한 무명의 암흑 구름을 제거해 주고 진실의 광명세계를 깨닫게 됐다고 하면서 세존의 대자비한 법문에 감사의 예의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원오는 "영리한 놈은 한번 튕겨주자 곧바로 깨달음으로 전향한다. 소반 위에 구르는 밝은 구슬"이라고 착어했다. 세존 양구(良久)에 선기가 발동한 외도는 미혹에서 일전(一轉)하여 깨달음을 체득하였으니 진실로 영리한 사람이다. 외도의 깨달음(轉身)은 마치 쟁반 위의 하나의 구슬이 구르는 것과 같이 산뜻하고 걸림 없이 무애자재한 것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이 공안에서 참구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 세존이 양구(良久)해 외도에게 무엇을 보여 주었기에 외도는 곧바로 깨닫게 된 것인가? 또한 외도는 무엇을 깨닫게 된 것이며,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외도나 범부나 본래 법성을 구족한 것이며, 유무(有無)의 차별과 이견(二見)을 초월해 법성을 깨닫게 되면 무명(無明)의 실성(實性)이 곧 불성(佛性)인 것이라고 〈증도가〉에도 읊고 있다. 자신의 발밑을 잘 살펴 자신의 불심을 상실하지 않도록 선기를 전향해 곧바로 깨달음을 체득해야 한다.

외도가 떠난 뒤에 부처님의 십대제자인 아난이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외도는 무엇을 증득했기에 깨달음을 체득했다고 합니까?” 아난이 세존에게 '그 외도는 어떠한 깨달음을 체득했기에 세존을 찬탄하고 절을 하면서 돌아갔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은 외도의 질문에 세존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을 뿐이며 아무런 설법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훌륭한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 말은 {잡아함경} 33권에 전하고 있는데, 천태지의의 {마하지관} 2권(下)에 인용하고, 담연(湛然)이 {지관보행전홍결(止觀輔行傳弘決)} 2권5에 '네 종류의 말'의 비유로 인용하고 있다. 이 말은 불제자들 가운데 근기를 나누어 비교한 것인데, 지금 세존을 참문한 외도는 최상의 근기로서 세존의 양구(良久)한 모습을 보고 유무의 차별을 초월한 법성의 진실을 깨닫고 있다. 그러한 사실을 세존이 아난에게, 그 외도는 최고 좋은 말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곧바로 깨닫게 되었다고 비유해 말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선기(機)의 바퀴를 굴리지 않았네.” 기(機)는 불성의 지혜작용으로 무상(無相), 무심(無心)의 지혜로서 세존이 유무를 초월한 양구(良久)의 경지를 읊고 있다. “굴리면 반드시 양쪽으로 달리리라.” 법신본분은 여여(如如) 부동(不動)한 경지이기에 유무의 차별을 초월한 것이다. “밝은 거울이 경대에 걸려 있으니” 세존이 양구(良久)한 당처를 읊은 것으로, 세존의 법신광명의 거울은 시방삼세에 두루하고, 일체 제법을 분명하게 밝힌다. “당장에 예쁘고 추함을 분간하도다.” 무심의 거울로 비추면 예쁘고 추한 모습과 미혹함과 깨달음을 모두 분명하게 밝힌다. “예쁘고 추함을 구분함이라. 미혹의 구름이 열리니.” 세존이 명경을 밝게 비추니 외도는 예쁘고 추한 것을 분명히 파악하게 됐다. “자비의 문 그 어디에 티끌먼지가 일어나랴!” 외도가 깨달음을 체득해 “세존의 대자대비” 운운(云云) 감격한 것을 읊은 말로, 세존의 양구(良久)와 외도가 미혹의 구름을 걷고, 유무의 차별을 초월한 본래 무일물의 경지에서 세존의 거울과 외도의 거울이 서로 비추는 그곳에 번뇌 망념의 티끌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니 훌륭한 말이 채찍 그림자를 엿보니” 외도가 떠난 뒤에 세존이 아난의 질문에 대답한 말을 읊은 것인데, 다음의 맺는 말(結句)을 환기시키고 있다. '천리마인 추풍(追風)은 부르면 곧장 되돌아온다.' 추풍(追風)은 천리 준마의 대명사로서 진시황이 기른 명마 7두 가운데 가장 뛰어난 말이다. 여기서는 외도의 뛰어난 선기를 추풍과 같은 준마에 비유한 것인데, 만약 차별 경계인 갈림길에 떨어져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채찍의 그림자만 제시해도 부르면 곧장 말머리를 돌려 되돌아온다고 읊고 있다. 즉 세존의 양구(良久)나 채찍의 그림자라고 하는 말에 집착해 차별견해를 일으키거나 착각하면 각자의 본분을 상실한다고 설두화상이 자비심을 제시하고 있다. “불러서 되돌아 왔다면, 손가락을 세 번 튕긴다.” 유무나 미혹과 깨달음도 상대적인 것, 세존과 외도의 깨달음도 쓸데없는 이야기로다.

 

[第066則]師頭落也
〈垂示〉垂示云。當機覿面。提陷虎之機。正按傍提。布擒賊之略。明合暗合。雙放雙收解弄死蛇。還他作者。
〈本則〉擧。巖頭問僧什麽處來。僧云。西京來。頭云。黃巢過後。還收得劍麽。僧云。收得。巖頭引頸近前云。[囗+力]。僧云。師頭落也。巖頭呵呵大笑。僧後到雪峰。峰問。什麽處來。僧云。巖頭來。峰云。有何言句。僧擧前話。雪峰打三十棒趕出。
〈頌〉黃巢過後曾收劍。大笑還應作者知。三十山藤且輕恕。得便宜是落便宜。

벽암록 66칙 암두화상과 어디서 왔는가?

안목 없는 선객의 '휘두름'에 가소로워 웃다


{벽암록} 제66칙은 암두전활 화상과 어떤 선객과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암두화상이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장안(西京)에서 왔습니다.' 암두화상이 물었다. '황소(黃巢)의 난이 지난 뒤에 칼을 입수했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입수했습니다.' 암두화상이 목을 그 스님 앞으로 쑥 내밀며 칵! 하고 소리쳤다. 스님은 말했다. '화상의 머리가 떨어졌습니다.' 암두화상은 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그 스님이 뒤에 설봉화상의 처소에 이르자, 설봉화상이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암두에서 왔습니다.' 설봉화상이 말했다. '암두화상은 무슨 말을 하시던가?' 스님이 앞의 이야기를 제시하자, 설봉화상은 30방망이를 쳐서 쫓아내 버렸다."

擧. 巖頭問僧什處來. 僧云. 西京來. 頭云. 黃巢過後. 還收得劍. 僧云. 收得. 巖頭引頸近前云. 僧云. 師頭落也. 巖頭呵呵大笑. 僧後到雪峰. 峰問. 什處來. 僧云. 巖頭來. 峰云. 有何言句. 僧擧前話. 雪峰打三十棒出.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16권 암두전에 전하고 있다. 암두전활(巖頭全豁:828~887)은 덕산선감의 제자로서 설봉과 법형제인데, {벽암록} 제5칙 '평창'에 언급한 것처럼, 설봉이 오산에서 도를 이루는 인연을 제시한 선승이다. 암두선원은 호북성 악주(鄂州)에 있었는데,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난 이후에 어떤 스님이 암두화상을 참문하면서 나눈 선문답이다.


"지혜의 칼 얻었나" 화상이 묻자
납승 "화상 목이 떨어져" 거들먹

암두화상은 찾아온 스님에게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라고 인사말로 물었다. 이 질문은 간단한 인사말이지만 스님의 안목을 살펴보기 위한 문제를 가볍게 던지고 있는 말이다. 어디서라는 물음은 그대의 본래면목의 당처와 이전에 있었던 지역의 장소를 동시에 제시하여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 스님은 "장안[西京]에서 왔습니다"라고 장소를 말하고 있다. 당대에는 서경(西京)은 장안(長安), 동경(東京)은 낙양으로 양경(兩京)을 두었다. 원오도 이 스님을'과연 하나의 좀도둑'이라고 평하고 있는 것처럼, 암두화상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암두화상은 다시 "황소(黃巢)의 난이 지난 뒤에 칼을 입수했는가?"라고 묻고 있다. 이 스님이 장안에서 왔다고 대답하기 때문에 장안은 황소의 반란으로 장안이 함락된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 선문답이다. 즉 당말 정치가 문란하고 세상이 안정되지 못하여 인심이 불안정하게 되자, 조주(曹州)의 황소라는 소금장사가 874년 친구인 왕선지(王仙芝)와 함께 반란군을 조직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드디어 수만 명 반란군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황소는 ‘하늘이 내려준 황소(天賜黃巢)’라는 명문을 새긴 칼을 잡고 스스로 충천(衝天)장군이라고 자칭하며, 880년 장안을 함락하고 대제국(大齊國)을 세워 대재황제라 하고 연호를 금통(金統)이라고 바꾸었다. 그러나 이극용(李克用)이 지휘하는 당조의 반격으로 884년 고향 산동(山東)에서 자결함으로 4년간의 반란군은 막을 내린다. 여기서는 그러한 고사를 토대로 하여 암두화상이 스님에게 "그대는 하늘이 내려준 보검을 입수했는가"라고 묻고 있다. 즉 어려운 수행(황소의 반란)을 거쳐서 무애자재한 반야의 지혜(칼)를 체득하여 자유자재한 경지를 이루었는지를 묻고 있다.

지혜의 칼은 일체의 차별과 번뇌 망념을 차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의 묘검(妙劒)이며, 본래면목, 본지풍광, 무진장한 보배라고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불성을 지혜작용을 비유한 것이다. 그 스님은 "예! 나는 그 칼을 입수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암두화상이 던진 낚시에 걸려든 것이다. 원오는 "멍청한 놈들이 삼대와 좁쌀처럼 많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지혜의 칼을 가지고 있으면서 쓸 줄을 모르는 놈은 이 스님뿐만 아니라, 수행을 한다는 고금의 많은 선승들이 셀 수도 없이 많다고 비평하고 있다.

암두화상은 "그래! 그렇다면 자네의 그 보검으로 나의 목을 한번에 끊어보도록 하게"하면서 스님 앞으로 목을 길게 쑥 내밀며 칵! 하고 소리쳤다. 화()라는 글자는 전신으로 힘쓰며 지르는 "얏! 에잇!"이라는 기합소리다. 원오는 '범을 잡는 덫'이라고 착어한 것처럼, 얏! 이라는 한 고함에 스님이 칼을 주었다고 하는 분별 망상을 한꺼번에 쳐 날려 버린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암두화상의 자비심을 알지 못하고 "화상의 머리가 떨어졌습니다"라고 엉뚱한 소리를 내뱉고 있다. 겉으로는 지혜의 보검을 쓸 줄 아는 선승처럼 형색은 갖추었지만, 암두화상이 "그러면 내 목을 한번 쳐"라고 하자, 화상의 목을 쳤다고 큰 소리 친다. 자신의 목이 먼저 떨어진 줄 모른다. 암두화상이 던진 올가미에 걸려서 끌려 다니고 있는 주제에 보검을 가지고도 지혜작용을 펼치지 못하는 것이다. 원오는 "송곳 끝이 날카로운 줄만 알고, 끌의 끝이 네모난 줄은 모른다"고 당시의 속담으로 착어하여, 정법의 안목과 융통성이 없고 방편지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비평하고 있다. 암두화상은 "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전등록} 15권 덕산장에 덕산과 용아와의 선문답으로 전하고 있으며, '평창'에도 인용하고 있다.

암두의 큰 웃음은 무엇을 나타낸 것인가? 스님이 칼로 베어버린 암두의 머리는 땅에 떨어졌다고 했는데, 지금 암두화상은 큰 소리로 웃고 있지 않는가. 암두의 머리(법신)는 어디에 있는가? 그 스님은 암두화상의 머리를 탈취하여, 암두의 웃음이 자신을 인가한 것으로 착각하고, 의기양양하게 뒤에 설봉화상의 처소에 이르자, 설봉화상도 암두화상과 똑같이 "어디서 왔는가"라고 안목을 점검하는 인사말을 던졌다. 스님은 "암두선원에서 왔습니다"라고 정직하게 장소를 대답한다. 설봉화상은 "암두화상은 어떤 법문을 하시던가?"라고 묻자, 스님이 앞에 암두화상과의 선문답과 일단의 이야기를 말했다. 설봉화상은 그 스님에게 30방망이를 쳐서 쫓아내 버렸다. 즉 스님은 황소의 보검으로 암두화상의 머리를 끊어 땅에 떨어뜨렸다고 하고, 암두화상이 크게 웃었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그 순간 설봉화상은 방망이로 30방 때려서 밖으로 내쫓아 버린 것이다. 원오는 이런 안목 없는 스님은 "아침에 3000방망이, 저녁에 800방망이를 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암두와 설봉이 덕산 문하의 동기 동창생이기 때문에 똑같이 불법의 본분사를 똑같은 입장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고 하면서, 설봉과 암두가 이 스님을 제접한 귀결처는 무엇인가를 문제로 제시하고 있다. 즉 암두의 웃음과 설봉이 30방망이를 때린 수단은 같은 것인가 잘 살펴보라고 당부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이 공안의 핵심을 게송으로 읊었다. “황소의 난이 지난 뒤에 칼을 주었네.” 스님은 하늘로부터 받은 황소의 보검을 얻었다고 자부하고 있다고 읊고 있다. 원래 사람은 본래 그러한 보검을 구족하고 있지만, 수행하여 정법의 안목을 갖추지 못하면 마음대로 쓸 수가 없다. 칼을 잘 못 쓰면 자신도 죽이고 남도 죽인다. “크게 웃는 웃음은 작가만이 알 수 있다.” 암두가 크게 웃은 것을 읊은 것이다. 암두화상은 스님을 가엽게 생각하며, 어떻게 자비의 손을 쓸까 하고 한 바탕 큰 소리로 웃었는데, 정법의 안목이 없는 바보 같은 그 스님은 자신을 인가한 것으로 착각하고 설봉의 처소로 향했다. 암두화상의 웃음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30방망이 때린 벌칙도 또한 가볍게 용서해 준 것.” 설봉은 암두의 자비로운 웃음을 30방망이 주장자로 때린 내린 벌칙도 설두는 가볍다고 읊었다. “이익을 본 것 같지만 결국 손해만 본 것이다.” 스님이 장안에서 주운 칼로 암두의 머리를 쳤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설봉의 처소에서 자신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第067則]揮案一下
〈本則〉擧。梁武帝請傅大士講金剛經。大士便於座上。揮案一下。便下座。武帝愕然。誌公問。陛下還會麽。帝云。不會。誌公云。大士講經竟。
〈頌〉不向雙林寄此身。卻於梁土惹埃塵。當時不得誌公老。也是栖栖去國人。

벽암록 67칙 부대사의 금강경강의

“진리를 말로 설명할 수 없어 몸으로 드러내”


{벽암록} 제67칙은 부대사가 양무제에게 {금강경}을 강의하는 선문답을 싣고 있다.

양무제가 부대사(傅大士)를 초청하여 {금강경}을 강의하도록 하였다. 부대사는 법상에 올라서 경상을 한번 후려치고는 곧바로 법상에서 내려 왔다. 양무제는 깜짝 놀랐다. 지공화상이 양무제에게 질문했다. “폐하께서는 아시겠습니까?” 무제는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지공화상이 말했다. “부대사의 강의는 끝났습니다.”

擧. 梁武帝請傅大士講金剛經. 大士便於座上. 揮案一下. 便下座. 武帝 愕然. 誌公問. 陛下還會. 帝云. 不會. 誌公云. 大士講經竟.


강의 대신 경상 후려친 행위는
걸림없는 반야의 지혜 그 자체

본공안은 {분양선소어록} 중권에 보이는데, 내용은 약간 차이가 있다. 양무제는 {벽암록} 제1칙에 달마와 함께 등장했었다. 원오는 '평창'에 "양나라의 고조인 무제는 소(蕭)씨이며, 이름은 연(衍), 자는 숙달(叔達)이다. 대업을 일으켜 제(齊)나라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한 뒤에 오경(五經)을 주석하여 강의하였고, 황노(黃老)의 도교를 두텁게 신봉하였고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하루는 출세간의 불법을 얻어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도교를 버리고 부처님을 받들며 누약법사에게 귀의하여 보살계를 받고, 몸소 가사를 입고 {방광반야경}을 강의하며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본칙에 처음 등장하는 세속의 성자인 부대사 흡(翕:497~569)은 중국의 유마거사로 백장과 임제, 약산유엄선사 등이 한결같이 칭송하고 있는 인물인데, 그의 전기는 {속고승전} 25권과 {전등록} 27권에 선혜(善慧)대사로 전기를 싣고 있으며, {선혜대사어록}도 전한다. 특히 그의 작품인 {심왕명}은 선승들이 많이 인용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부대사가 양무제의 초청으로 {금강경}을 강의하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무주(州: 浙江省)에 어떤 대사가 운황산에 거처하면서 손수 나무 두 그루를 심고서 쌍림(雙林)이라고 하고, 자칭 미래의 선혜대사라고 하였다. 그가 하루 글을 지어 제자를 시켜 양무제에게 건의하여 황제께 여쭈었다. 그 때 조정에서는 군신의 예의가 없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대사는 금릉성에 들어가 물고기를 팔고 살았는데, 당시 가끔 양무제가 지공화상을 초청하여 {금강경}을 강의하도록 하자, 지공화상이 말했다. “빈도는 강의를 못합니다. 시중에 부대사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이 경을 강의할 수 있습니다.” 양무제는 조서를 내려 부대사를 대궐로 초청하였다.

그래서 {전등록}에서는 그를 '쌍림수하 당래해탈 선혜대사(雙林樹下 當來解脫 善慧大士)'라고 하며, 미륵의 응신(應身)이라고 한다. 양무제가 지공화상의 권유로 부대사를 궁궐로 초청하여 {금강경}을 강의하도록 하였다. {금강경}은 {대반야경} 577권의 별칭인데, 반야불가득(般若不可得)과 성공(性空)의 묘리를 설한 경전으로 구마라집이 번역한 경전이 선종에서 애용되고 있으며, 특히 수지독송의 공덕을 찬탄하고 있기 때문에 {법화경}과 함께 공덕경으로 널리 주목하고 있다. {금강경}을 32장으로 자세히 나눈 것은 양무제의 아들 소명태자인 점으로 볼 때 특히 이 경정에 주목했다고 할 수 있다. 부대사도 {금강경}의 사상에 부합한 게송을 읊고 있다.

양무제는 많은 강사들처럼 부대사도 {금강경}의 말씀을 자세히 강의할 것으로 기대하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부대사는 법상에 올라서 경상을 한번 후려치고는 곧바로 법상에서 내려왔다. {금강경} 32품의 강의는 끝났다. 마치 {벽암록} 92칙에 세존의 설법에 법상에 오르자, 문수보살이 종을 치며 "법왕의 법을 자세히 관찰하니 법왕의 법은 이와 같다."라고 알렸다. 그러자 세존은 한마디의 설법도 없이 법상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와 같다.

경전에 "수보리야. 설법이란 법을 가히 설할 것이 없음을 설법이라 한다."라고 전한다. 이 말에 대하여 {돈오요문}에는 "반야의 본체는 필경 청정한 것이며 한 물건(一物)도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가히 설할 법이 없는 것"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부대사는 {금강경}의 정체인 불법의 근본을 몸으로 직접 전부 들어낸 것이다. 원오는 "언어 문자를 번거롭게 사용하지 않고 금강경을 강의했다"고 칭찬하고 있다. {반야심경}에도 반야의 지혜는 얻을 수 있는 물건이나 대상이 아니며(不可得), 고정된 특성이 없음(無自性)을 근본으로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부대사가 주장자로 경상을 칠 때 나는 그 소리는 자성이 없으며, 그 소리를 듣는 반야의 지혜 또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성의 자각적인 지혜작용일 뿐이다. 부대사가 경상을 후리친 걸림 없고 무애자재한 행위는 반야지혜의 묘용 그 자체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부대사의 {심왕명}에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마음의 공왕(空王)을 관찰하건데, 현묘하여 헤아리기 어렵다. 얼굴도 형체도 없지만 큰 신통력이 있네. 천 가지 재앙을 소멸시키고, 만 가지 공덕을 이루네. 본체와 성품이 공하지만, 온갖 법칙을 베푼다. 보면 형상은 없지만, 부르면 대답한다. 큰 법의 장수가 되어서 마음의 계법으로 경을 전한다.” {조당집} 15권에 방거사가 "사람은 한 권의 경전을 가졌는데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다. 사람이 이 경을 읽지 못하니, 나에게 집착하면 들을 수가 없다."라고 하고, 경봉스님의 글씨로 전하는 '나는 한 권의 경전이 있다. 종이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다. 경전을 펼치면 한 글자도 없지만 항상 대 광명의 지혜를 펼친다.'라는 법문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양무제는 부대사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양무제는 문자반야를 듣기 위해 초청했는데, 부대사가 경상을 한 번 후려치고는 내려왔으니 '나를 바보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중생심이기 때문에 불심의 법문을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반야경의 정신이 자아의식인 아상(我相)을 비우고 무아(無我)가 되어야 무아의 경지에서 설하는 법신(法身)의 설법을 들을 수가 있는 것이다. 법신의 지혜법문을 중생의 차별심으로는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양무제뿐만 아니라 불법을 수행한다는 많은 사람이 이렇다. 지공화상이 양무제에게 "폐하께서는 부대사의 강의 내용을 아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하자 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不會)."라고 했다. 회(會)는 언어 문자를 대상으로 설정하여 이해하는 것인데, 문자반야를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다는 답변이다. 지공화상은 이 법회의 사회자로서 오늘 "부대사의 강의는 끝났습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고 있다. “쌍림(雙林)에 이 몸을 의탁하지 않고” 쌍림은 부대사가 살고 있는 암자인데, 양무제의 초청을 받고 황제가 있는 왕실로 나온 것을 읊고 있는 말이다. 원오는 "부대사가 본분의 청정한 쌍림에 안주하지 않고 왕궁으로 나온 것은 중생구제를 위한 이타의 보살행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주머니 속의 바늘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과 같이 대사의 자비심"이라고 평한다. “양나라 땅에서 티끌 먼지 일으켰네.” 쌍림의 나무 밑에 안주했더라면 그의 몸은 속진(俗塵)에 물들지 않았을 텐데, 양무제의 초청에 응하여 왕궁에 나오게 되어 세속의 티끌에 더럽혀지게 되었다. “당시 지공 노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황급히 나라를 떠나는 사람이 되었으리.” {벽암록} 제1칙에서 양무제와 달마의 대화에 뜻이 계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달마대사가 양나라에서 쫓겨나 위나라로 가게 되었다는 고사를 토대로 하여 읊고 있다. 즉 부대사도 양무제와 기연이 맞지 않아 곧장 양나라에서 쫓겨나게 될 판인데, 다행이 지공화상이 있어서 부대사의 {금강경} 강의는 다 마쳤다고 말하며, 참된 강경의 본지를 밝힌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무사히 초청법회가 회향된 것이다. 원오는 부대사와 지공화상은 같은 죄인(불법을 체득한 경지)이라고 평하고 있다.

 

[第068則]汝名什麽
〈垂示〉垂示云。掀天關翻地軸。擒虎兕辨龍蛇。須是箇活鱍鱍漢。始得句句相投機機相應。且從上來什麽人合恁麽。請擧看。
〈本則〉擧。仰山問三聖。汝名什麽。聖云。惠寂。仰山云。惠寂是我。聖云。我名惠然。仰山呵呵大笑。
〈頌〉雙收雙放若爲宗。騎虎由來要絶功。笑罷不知何處去。只應千古動悲風。

벽암록 68칙 앙산혜적화상과 삼성혜연화상

“이름은 본래 없는것…허명에 집착말라”


{벽암록} 제68칙은 위산문하의 앙산화상과 임제문하의 삼성스님의 대화를 싣고 있다.

앙산화상이 삼성스님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삼성스님이 말했다. “혜적(慧寂)입니다.” 앙산화상이 말했다. “혜적은 바로 내 이름인데.” 삼성스님이 말했다. “내 이름은 혜연(慧然)입니다.” 앙산화상이 껄껄대며 크게 웃었다.

擧, 仰山問三聖, 汝名什. 聖云, 惠寂. 仰山云, 惠寂是我. 聖云, 我名 惠然. 仰山 呵呵大笑.


이름을 본래심으로 착각 말도록
'혜적'이든 '혜연'이든 상관없어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12권 삼성혜연장에 수록되어 있다. 앙산은 위산문하의 수제자로 중국선종에 최초로 위앙종을 창립한 선승이다. 사실 백장이 마조문하의 수제자로 등장하게 된 것도 위산과 앙산의 독창적인 위앙종풍이 활발하게 전개된 이후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벽암록〉 34칙에 등장한 바 있는 앙산에 대한 자료는 육희성이 지은 〈비명〉과 〈조당집〉18권, 〈송고승전〉 12권, 〈전등록〉 11권 등에 전하고 있으며, 〈혜적선사어록〉도 전한다. 〈임제록〉에는 임제가 북쪽지방에서 교화를 펼치며, 임제의 행화를 도운 보화스님이 전신탈거(완전열반)할 것이라고 예언한 앙산을 소석가(小釋迦)라고 평가하고 있다.

안산을 소석가라고 부르게 된 것은 〈종문통요집〉 제5권에 어느 날 신통한 범승(梵僧)이 허공을 날아 나타나서 앙산화상께 예를 올리며 섰다. 앙산화상은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라고 묻자, 범승은 “아침에 서천을 떠나 왔다.”고 대답했다. 앙산은 ‘너무 늦게 온 것 아니냐’라고 말하자, ‘산천 유람하고 왔지요’라고 대답했다. 앙산화상은 “신통묘용은 그대가 뛰어나지만, 불법은 반드시 이 노승에게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범승은 “특별히 동쪽에 와서 문수를 예배하고 소석가를 만났다.”고 말하고 드디어 서천의 패엽경전을 앙산화상께 건네주고 구름을 타고 허공으로 치솟아 갔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삼성스님은, 〈임제록〉에 임제화상이 입적하려고 할때 “나의 정법안장을 멸각시키지 말라.”고 말하자 삼성이 나와서 “어찌 감히 화상의 정법안장을 멸각시킬 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고 고함(할)을 치며, 임제스님의 정법을 계승한 선승이다.

원오도 ‘평창’에 삼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삼성스님은 임제문하의 큰스님이다. 어려서 많은 사람 가운데 뛰어난 지략이 있었고, 큰 지혜(大機)의 작용으로 대중 가운데 우뚝 솟아 사방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 뒤 임제화상을 하직하고 하남성과 강소성(淮海) 등의 지방을 두루 행각 하였는데, 이르는 총림마다 큰 선지식으로 대접 하였다.” 그 후 북쪽 지방을 떠나 남방에 이르러 먼저 설봉화상의 찾아가 “그물을 뚫고 나온 황금 잉어는 무엇을 먹이로 해서 낚아야 합니까?” 설봉화상은 “그대가 그물을 뚫고 나올 때 말해 주리라.”라고 대답한 문답은 〈벽암록〉49칙에 전한다.

뒷날 설봉화상이 장원(莊園)으로 가는 길에 원숭이를 보고 삼성에게 말했다. “이 원숭이가 각자 옛 거울(古鏡 : 본래심)을 차고 있다네.” 삼성은 “오랜 세월을 지내도록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데 어찌 고경(古鏡)이라고 합니까?” 하자, 설봉은 “거울에 흠집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삼성은 “1500명의 대중을 지도하는 선지식이 말귀도 모르는군!”이라고 말하자. 설봉은 “노승은 주지 일이 바빠서.” 라고 대꾸했다.” 옛 거울(古鏡)은 본래 구족하고 있는 불심을 말하는데, 무심한 거울의 작용처럼, 불심은 항상 일체의 대상과 사물을 차별없이 비추는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평창’에는 삼성과 앙산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삼성스님은 뒤에 앙산화상의 처소에 이르렀다. 앙산화상은 삼성스님이 준수하고 영리하여 몹시 사랑하여 밝은 창문아래(수좌소임)자리를 배치하였다. 하루는 어떤 관리가 찾아왔기에 앙산화상이 물었다. “어떤 관직에 일하시요?” “감찰관리(推官)의 일을 합니다.” 앙산화상이 불자(拂子)를 들어 보이며 “이것도 감찰 할 수 있소?” 하니, 관리가 대답을 못하자, 여러 대중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모두 앙산화상의 뜻에 계합하지 않았다. 이 때 삼성스님은 몸이 아파서 간병실(연수당)에 있었는데, 앙산화상이 시자를 시켜서 물어보도록 하니, 삼성스님은 말했다. “본래 무사한 것인데, 화상은 괜히 일을 만들고 있군!” 앙산화상은 다시 시자를 보내어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하고 다시 묻자, “다시 범(犯)하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앙산은 이 말을 듣고 그의 안목을 인정하였다.” 다시 범(犯)한다는 말은 본래 청정한 마음(불심)은 번뇌 망념의 일이 없는 무사한 경지인데, 고의로 차별 분별을 일으켜 일을 만들어 질문하는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본칙으로 들어가자. 앙산화상이 삼성스님에게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라고 묻고 있다. 앙산화상이 뛰어난 삼성의 이름을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라, 삼성의 안목을 살펴보고 시험하기 위해 인사말로 던지는 올가미인 것이다. 육체에 붙여진 수행자의 법명은 임시방편의 이름과 본래면목의 이름을 묻고 있다. 또한 자기 자신은 본래 무아이며 고정된 모습이나 실체도 없는데, 자기의 이름이라는 것이 있을까? 삼성스님은 “혜적(慧寂)입니다.” 라고 앙산화상의 본명(이름)으로 대답하고 있다. 즉 주인인 앙산의 질문에 손님인 삼성이 주인의 이름으로 대답한 것인데, 삼성은 주객의 상대적인 대립을 초월한 근원적인 본래의 입장에서 앙산화상과 일체가 된 절대의 경지에서 대답한 것이다. 앙산화상은 “혜적은 바로 노승의 이름인데” 라고 말했다. 앙산의 이 말은 현실의 차별 경계에서 엄연하게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밝히고 있다. 즉 앙산은 앙산이고 삼성은 삼성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처럼, 차별세계가 그대로 곧 절대의 세계라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원오는 “각자 자기 영역을 지키는군!” 이라고 착어하며,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는다고 했다. 화상이 차별의 세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혜적이라고 한다면, “내 이름은 혜연(慧然) 입니다.” 똑같은 차별의 세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처음의 일문 일답은 서로 절대의 경지로 거두는 작용(雙收)이라면, 뒤의 일문 일답은 서로 차별의 세계에 펼치는 쌍방(雙放)인 것이다. 원오는 “시끄러운 시중에서 남의 물건을 뺏는 것”이라고 하며, “앙산과 삼성이 모두 각자의 본분을 잘 지켰다.”고 평하고 있다. 서로 절대의 경지를 거두어 본래심(本來心)을 상실하지 않았고, 차별경계에서도 본분을 잘 지키고 있기에 우열을 논 할 수 없는 선문답이라고 평한 것이다.

앙산화상은 껄껄대며 크게 웃었다. 원오는 “절말 좋은 시절 인연이니. 금상첨화로다”라고 평하고 있다. 앙산의 통쾌한 웃음은 만법과 하나된 경제에서 좋은 시절인연을 맞아한 웃음이다. 이러한 유쾌한 웃음이 금상첨화인 것처럼, 본래면목이 한층 더 통쾌하고 활발한 지혜작용으로 빛을 발휘하게 된 것이라고 읊고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서로 거두기도 하고(雙收), 서로 놓아주기도 하니(雙放) 이 무슨 종지인가?” 앙산화상이 삼성에게 이름을 질문하자, 삼성이 혜적이라고 대답한 일문이 쌍수(雙收)이다. 즉 절대 평등한 본래의 경지에서 서로 대응한 문답이다. 그리고 앙산이 ‘혜적은 나의 이름’이라고 하자 삼성이 ‘나의 이름은 혜연’이라고 나눈 대화는 쌍방(雙放)으로 현실의 차별세계에서 자기의 본분을 밝히는 대화인 것이다. 두 선승의 훌륭한 선문답은 무슨 종지를 나타내기 위한 것인가?

“호랑이를 타기 위해서는 절묘한 기량(功)을 요한다.” 말을 타기도 어려운데 호랑이를 탄다는 것은 지혜와 용기는 물론 독자적인 기량를 갖춰야 한다. 앙산과 삼성은 기량(안목)을 갖춘 선승이었기 때문에 사량분별의 차별심을 초월하여 본분을 상실하지 않고 가볍게 호랑이를 타고 기량을 드날렸다. 앙산의 “통쾌한 웃음은 어떻게 되었는가? 단지 진실로 천고의 비풍(悲風)을 움직이게 하네.” 앙산의 웃음을 깨닫지 못한 수행자의 슬픈 일이며, 불법을 철저히 자각하여 깨닫도록 비풍(悲風)을 일으키고 있다고 읊고 있다.

 

[第069則]畫一圓相
〈垂示〉垂示云。無啗啄處。祖師心印。狀似鐵牛之機。透荊棘林。衲僧家。如紅爐上一點雪。平地上七穿八穴則且止。不落寅緣。又作麽生。試擧看。
〈本則〉擧。南泉歸宗麻谷。同去禮拜忠國師。至中路。南泉於地上。畫一圓相云。道得卽去。歸宗於圓相中坐。麻谷便作女人拜。泉云。恁麽則不去也。歸宗云。是什麽心行。
〈頌〉由基箭射猿。遶樹何太直。千箇與萬箇。是誰曾中的。相呼相喚歸去來。曹溪路上休登陟。復休登陟。復云。曹溪路坦平。爲什麽休登陟。

벽암록 69칙 남전화상과 일원상(一圓相)

도식화한 깨달음의 경지… 만법의 본체


{벽암록} 제69칙은 마조도일선사의 문하에 대표적인 남전과 귀종, 마곡화상이 남양혜충국사를 참문하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남전, 귀종, 마곡화상이 함께 혜충국사를 예방하러 가는 도중에 남전화상이 땅에 하나의 원상(圓相)을 그려놓고 말했다.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안목으로) 한마디를 올바르게 말하면 가겠다.' 귀종화상이 그 일원상 가운데 앉았다. 마곡화상은 여인이 절하며 인사를 하는 시늉을 하였다. 남전화상이 말했다. '이러한 즉 가지 않겠다.' 귀종화상이 말했다. '이 무슨 수작인가?'

擧. 南泉歸宗麻谷, 同去禮拜忠國師. 至中路, 南泉於地上, 一圓相云, 道得卽去. 歸宗, 於圓相中坐, 麻谷, 便作女人拜. 泉云, 恁則不去也. 歸宗云, 是什心行.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제8권 남전보원전에 전하고 있다. 중국 조사선을 완성한 마조도일의 문하에는 800여명, 혹은 1000여명의 수행자가 운집하였고, 법을 전한 제자가 139명이나 된다고 하는 것처럼, 마조의 뛰어난 제자들이 전국에서 교화를 펼침으로 조사선의 시대를 개막하게된 것이다.

{송고승전} 9권 석두희천전에 "강서(江西)의 주인은 대적(大寂: 마조) 호남(湖南)의 주인은 석두(石頭), 서로 왕래가 끊어지지 않았다. 당시 이 두 대사를 친견하지 못한 자를 무지한 사람으로 여겼다."고 하며, 천하의 선승들이 모두 마조와 석두의 할을 참문하여 불법을 연마했다. 마조의 비문에 10대 제자를 언급하고 있지만, 문하에는 개성 있고 뛰어난 수재들이 많이 모였다. 분주무업과 같은 불교학자도 있고, 석공혜장과 같은 사냥꾼 출신도, 방거사도 있다.


혜충국사가 창시한 '선법의 진수'
귀종, 마곡의 안목 시험하는 화두

본칙에 등장하는 남전보원과 귀종지상, 마곡보철도 마조문하의 수재들인데, 강서와 호남지방의 총림을 행각하고 당시 제도(帝都)에서 국사로 존경받고, 명성이 천하에 드날리고 있는 장안 광택사 혜충국사를 예방하고 참문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출발하여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이다.

원오는 {논어}의 말을 빌려 "3인(三人)이 동행하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지."라고 착어하고 있다. 세 사람이 힘을 합치면 문수의 지혜가 있다는 말도 이 말을 응용한 것인데, 남전화상이 갑자기 땅바닥에 하나의 둥근 원상(圓相)을 그려놓고 두 사람을 향해서 말했다.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안목으로 이 원상에 대하여 한마디를 말하여 나의 뜻에 계합된다면 혜충국사를 예방하러 가겠다.' 원오는 이러한 남전의 행동에 대하여 "바람도 없는데 파도를 일으켰다."고 착어했다. 남전화상이 제시한 일원상은 무슨 표시인가? 일원상에 대한 법문은 {벽암록} 33칙에 자복화상이 제시한 사례도 있다.

일원상은 우주 만법의 본체이며 원명하고 적정한 깨달음의 경지를 시간과 공간을 중복시킨 도식화로 표현한 것이다. 즉 만법의 주체인 진여법성과 본래면목을 상징화한 것으로 무상한 절대의 본체를 표현한 것이다. 일원상을 제시한 법문은 마조를 비롯하여 그의 문하에 수노, 회의, 방거사 등 많은 선승들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일원상을 그려서 선문답의 공안으로 응용한 최초의 선승이 혜충국사이다.

{조당집} 3권 혜충국사장에 스님이 친견하러 찾아오면 손으로 일원상을 그려 제시하고 있는 법문을 했다. {조정사원} 2권에 "원상을 시작한 것은 남양혜충국사인데, 시자인 탐원(耽源)에게 전수하였고, 탐원은 예언(讖記)을 받들어 앙산에게 전수하니 드디어 위앙종의 가풍이 되었다."고 전한다. 탐원은 처음 마조의 문하에서 수학한 선승으로 혜충국사의 법을 잇고 뒤에 마조의 처소로 돌아와 원상의 문답을 나누고, 백장, 마곡과도 원상의 선문답을 나누었다.

말하자면 일원상은 혜충국사가 창시한 선법의 진수이며 가풍이다. 혜충국사를 참문하는 것은 혜충국사의 얼굴을 보기위해 가는 것은 아니다. 혜충국사의 법문을 친견하기 위해 가는 길에, 남전화상은 혜충국사의 법문인 일원상을 땅에 그려놓고 귀종과 마곡 동문 두 사람의 안목을 판별해보려고 한 것이다.

종화상은 남전화상이 그린 일원상 가운데 앉았다. 우주 만법을 상징한 일원상 한가운데 앉은 것은 우주와 천지 건곤이 모두 귀종 자신과 일체가 되고 하나가 된 경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혜충국사의 법문인 일원상의 정신을 체득하여 자기 자신의 법신으로 귀향시켜 하나 된 경지(萬法一如)임을 나타내고 있는 행동이다. 원오는 "한 사람이 장단을 맞추어 바라를 치면 같은 길에서 화합되었다."고 착어한 것처럼, 남전이 일원상의 바라를 치면 같은 곡조에 맞추어 귀종이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명콤비를 이룬 것이라고 박수를 보내고 있다. 마곡화상은 여인이 절하며 인사를 하는 시늉을 하였다.

여인이 예배하는 인사를 관인배(官人拜)라고도 하는데, 여인과 관료들은 머리에 두관을 쓰고 머리를 장식을 하였기 때문에 머리를 앞으로 숙이고 오체투지하는 인사가 아니라 허리를 약간 굽히고 가볍게 합장하는 인사이다. 마곡이 여인의 예배를 올린 것은 일원상의 법문을 제시한 혜충국사를 향한 인사이다. 지상에 그려진 그림의 일원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혜충국사의 법신불에 대한 예배인 것이다. 원오는 "한 사람이 북을 치니 세 사람의 성자를 얻었네."라고 착어했다.

남전과 귀상, 마곡의 세 사람이 법계에 유희하는 성자가 된 것을 칭찬하고 있다. 남전화상은 귀종과 마곡의 행동을 보고는 크게 만족하여 '이 정도의 안목을 갖춘 경지라면 혜충국사를 친견하러 가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그대들과 같이 훌륭한 선승이라면 일부러 멀리 혜충국사를 찾아가서 친견하고 그의 법문을 듣지 않아도 된다고 인정하고 있는 말이다. 즉 남전이 제시한 일원상은 혜충국사가 주창한 법문으로 법신의 지혜작용을 제시한 것이었다. 국사의 법문을 참문하여 듣고 깨닫는 것이나, 일원상을 통해서 깨닫고 체득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기 때문에 남전은 국사를 친견하러 가는 계획을 그만두자고 말한다.

원오는 "반쯤 길을 가다가 빠져 나와야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착어했는데, 세 사람이 국사를 친견하러 가는 행각 길의 중간쯤에 남전 혼자 전신(轉身)의 활로(活路)로 뛰어난 초월을 보였다고 칭찬하며, 원오는 남전의 일원상은 한 바탕의 연극을 멋지게 펼치도록 한 작가라고 극찬했다. 귀종화상은 '도대체 무슨 수작인가?'라고 말했다. 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남전이 국사를 친견하러 간다고 했는데, 갑자기 앞의 약속을 파기한 것에 대한 반발적인 말로 보기 쉽다. 이러한 마음은 감정이며 중생심으로 불심의 지혜를 나누는 선문답이 아니다. 원오는 "다행히 알았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귀종은 남전의 의도를 완전히 간파하고 있다고 칭찬하고 있다.

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유기(由基)가 화살로 원숭이를 쏘니, 나무를 끼고 도는 화살 곧바로 맞추네." 유기는 초나라 사람으로 화살을 잘 쏘는 명인이다. '평창'에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원숭이를 향해 쏜 화살이 원숭이가 나무를 안고 돌지만 화살도 따라 돌면서 명중시켰다고 한다. 남전 귀종, 마곡도 독자적인 안목으로 일원상을 중심으로 펼친 선기작용은 유기가 원숭이를 명중시킨 것과 같이 불법의 대의를 확실히 체득한 안목을 제시한 것이다.

“천사람 만사람 가운데, 어느 누가 일찍 적중 시켰을까?” 예부터 선승은 수천 수만명이 있었지만, 이 세 사람만큼 훌륭한 안목으로 대의를 체득한 사람이 있을까? “서로를 부르며 말했다. “돌아가련다. 돌아가련다.” 등산을 한 뒤에는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본래심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깨달음의 세계를 읊고 있다. “조계의 길에는 가지 않겠다.” 혜능의 불법을 계승한 국사를 친견할 필요가 있겠는가. 설두화상은 다시 말했다. “조계의 길은 평탄한데 무엇 때문에 가지 않는가?” 불법을 마음 밖에서 구하면 안 된다니까!

 

[第070則]倂却咽喉
〈垂示〉垂示云。快人一言快馬一鞭。萬年一念一念萬年。要知直截。未擧已前。且道未擧已前。作麽生摸索。請擧看。
〈本則〉擧。潙山五峰雲巖。同侍立百丈。百丈問潙山。倂卻咽喉唇吻。作麽生道。潙山云。卻請和尙道。丈云。我不辭向汝道。恐已後喪我兒孫。
〈頌〉卻請和尙道。虎頭生角出荒草。十洲春盡花凋殘。珊瑚樹林日杲杲。

벽암록 70칙 백장화상이 위산에게 입과 목을 막고 말하게 하다

“말보다 언어 이전의 언어를 들을 줄 알아야”


{벽암록} 제70칙은 백장화상이 제자들에게 입과 목을 막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를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위산(山)과 오봉(五峯), 운암(雲巖)이 함께 백장화상을 모시고 서 있었다. 백장화상은 위산스님에게 물었다. “목구멍과 입을 닫아버리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위산스님이 말했다. “화상께서 말씀해 보십시오.” 백장화상이 말했다. “내가 사양치 않고 그대에게 말해주고 싶지만 훗날 나의 자손을 잃어버릴까 염려스럽다.”

擧. 山五峰雲巖. 同侍立百丈. 百丈問山. 倂咽喉唇吻. 作生道. 山云. 請和尙道. 丈云. 我不辭向汝道. 恐已後喪我兒孫.


입으로 하는 말엔 지혜작용 없어
눈빛이나 침묵이 훨씬 더 진실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6권 백장전에 전하고 있으며, 원오는 '평창'에 백장과 위산, 오봉, 운암에게 나눈 선문답을 전부 인용하고 있지만, {벽암록} 70칙에는 백장과 위산, 71칙에는 백장과 오봉, 72칙에는 백장과 운암과의 선문답을 나누어서 싣고 있다. 따라서 본칙에서는 백장화상과 위산스님의 선문답을 살펴보자.

백장화상은 마조문하의 정법을 이은 제자로서 {백장청규}를 제정하여 선원을 전통적인 율원에서 독립하고 수행교단을 확립한 선승으로 불교교단의 혁신을 이루었다. 선원에는 부처님을 모신 불전을 두지 않고, 주지가 설법하고 수행자들이 불법을 탁마하는 법당만을 건립하여 선문답을 나누며 정법의 안목을 갖춘 교육을 강화하였다. 또한 선원의 대중 모두가 의무적으로 노동에 참여해야 하는 보청법(普請)을 제정하여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의 경제생활과 생산적인 수행교단의 생활을 확립하였다.

특히 법당에서 주지가 정기적으로 수행자들을 위해서 설법을 실시하였고, 주지와 학인들과불법의 대의를 체득할 수 있는 많은 선문답이 실행되었다. 그래서 주지의 설법과 선문답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는 지혜의 법문이었기 때문에 성전의 의미를 갖고 기록하게 되어 어록이라는 새로운 불교의 문헌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 것이다. 어록은 선승들이 경율론의 삼장을 통해서 체득한 불법의 정신을 일상생활의 언어나 행동으로 제자들에게 나눈 생활상의 설법이며 대화의 기록인 것이다. 사실 마조대사의 비문에 10대제자의 이름을 기록한 곳에 백장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마조문하에 너무나 뛰어난 선승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에 마조의 정법을 이은 제자로는 백장이 자주 거론되고 있으며, 소위 사가(四家)어록은 마조, 백장, 황벽, 임제어록을 말하는 것처럼, 마조의 정법을 상승한 후계자의 법통을 확정시키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로 볼 때 백장이 마조문하의 수제자로 등장하게 된 것은 위산영우(山靈祐:771~853)라는 위대한 선승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후대에 백장문하에 황벽이 정법상승자로 등장하게 된 것도 임제라는 선승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종의 법통은 훌륭한 제자들에 의해서 밑에서 새롭게 재편되고 있다.

본칙에 등장하는 위산은 {벽암록} 4칙에 등장하고 있는데, 위산이 백장의 지도로 깨닫고 법을 잇게 된 선문답이 {전등록} 9권 위산전에 전한다. 즉 백장화상이 위산스님에게 화로에 불씨가 있는지 살펴보라! 고 지시하자, 위산은 불이 없다고 대답한다. 백장은 몸소 일어나 화로의 잿더미 속을 헤쳐서 조그만 불씨를 찾아들고 “이게 불이 아니고 무엇인가?” 다그치자, 위산이 그 때 깨닫고 절을 하니, 백장이 다음과 같이 인가하는 설법을 했다.

여기가 아슬아슬한 갈림길이다. 경전에 "불성을 보고자 한다면 시절 인연을 관찰하라"고 하였는데, 시절이 이르면 미혹했다가 깨닫는 것 같고, 잃어버렸던 일을 기억하면, 본래 자기의 물건이요 남에게서 얻은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조사가 "깨닫고 나면 깨닫기 이전과 같고, 망심이 없으면 경계(法)도 없어진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다만 허망하게 범부나 성인 따위의 차별생각이 없으면 본래부터 망심과 경계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이제 그렇게 되었으니 잘 보호해 지니도록 하라.

기서 말하는 불씨는 불성을 상징한 것인데, 누구라도 불씨를 가지고 있다. {주자어류} 4권에도 잿더미속의 불씨를 사람의 본성에 비유하고 있으며, 대혜도 "식은 잿더미속의 한 알의 콩알이 튀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불씨가 불로 연소되는 것은 시절인연이며, 시절인연을 관찰하는 자각의 지혜가 불성을 보고 깨닫는 일이다.

본칙은 백장화상이 위산스님에게 "목구멍과 입을 닫아버리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문제를 던져 위산의 안목을 점검하고 있다. 목구멍(咽喉)과 입술(脣吻)은 함께 말을 하는 인체기관이다. 언어는 여러 가지 소리가 있어 목구멍과 입술, 턱, 혓소리 등으로 나누고 있는데, 모두 이 목구멍과 입술의 기관을 통해서 발음이 가능하다. 목구멍과 입술을 닫고서는 한 마디도 발음할 수가 없다. 백장은 언어 문자로 발음하기 이전의 소식(聲前一句)을 제시해 보라고 어려운 문제를 위산에게 던진 것이다. 원오는 '수시'에 "말하기 이전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라고 문제 제기한 것이다. 백장의 물음에 원오는 "백장과 같은 훌륭한 장수 한 명을 구하기 어렵다."라고 착어했는데, 백장과 같이 훌륭한 장수 밑에는 반드시 위산과 같은 훌륭한 장수가 있기 마련이다. 위산스님은 백장의 물음이 끝남과 동시 찰나에 "화상께서 목구멍과 입을 닫아버리고 말해보라고 했는데, 먼저 화상께서 그렇게 말씀해 보십시오."라고 반문했다. 문제를 제기한 그 사람의 근본당체로 문제를 되돌리고 있는 말이다. 문제의 갈등을 갈등이 일어나기 이전의 본래 상태로 되돌려 무효화시키고 있다. 원오는 "적군의 길을 이용하여 적군을 격파한 작전은 교묘한 전술이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장화상은 "내가 그대에게 조금도 사양치 않고 말해주고 싶지만 내가 말해버리면 훗날 나의 법손이 없어질 것을 걱정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왜 그럴까? 원래 목구멍과 입술로 뱉은 말은 방편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진실 그 자체는 아니다. 말하자면 지혜작용이 없는 언어문자의 표현인데, 이 언어 문자에 끄달리고 집착하여 불법의 진실을 체득하지 못하는 제자들이 될까 염려스럽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언어 문자에 끄달린 참선공부를 사구(死句)참구라고 하며,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고 불성의 지혜작용을 살리는 참선수행을 활구(活句)참구라고 한다. 원오도 백장화상은 제자와 후대의 수행자들이 올바른 활구참구로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참선수행을 하여 불혜명(佛慧命)이 단정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파심이라고 평하고 있다.

설두화상이 게송으로 읊었다. "화상께서 말씀해 보시오." 위산이 백장의 문제를 차단한 말을 들고, 위산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뿔 돋친 호랑이가 울창한 숲 속에서 나왔다."고 읊고 있다. 호랑이는 맹수인데 뿔까지 갖춘 호랑이가 숲 속에서 뛰어나왔기 때문에 어떤 것도 두려움이 없는 것처럼, 위산이 백장에게 되돌린 말 한마디 지혜작용은 뿔 돋친 호랑이가 되어 걸림이 없었다. "십주(十洲)에 봄이 저무니 꽃잎이 시들한데." 십주는 중국인들이 상상한 이상세계인데, 원오는 '평창'에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이상세계라도 역시 봄이 저물면 꽃이 시들한 법, 인간세계와 다름없다. 불법을 체득하여 안목을 갖춘 선승이라도 목과 입술을 사용하여 언어문자로 깨달음의 경지를 말하면 똑같이 중생의 차별심에 떨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봄이 저무는 일도 없고 꽃이 떨어지는 일이 없는 상주불멸의 세계(본래심)는 어딘가? "산호 가지마다 햇살이 빛나는 구나." 바다 속에 산호는 언제나 변함없는 아름다운 꽃나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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