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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081則]三步雖活
〈垂示〉垂示云。攙旗奪鼓。千聖莫窮。坐斷[言+肴]訛。萬機不到。不是神通妙用。亦非本體如然。且道。憑箇什麽。得恁麽奇特。
〈本則〉擧。僧問藥山。平田淺草麈鹿成群。如何射得麈中麈。山云。看箭。僧放身便倒。山云。侍者拖出這死漢。僧便走。山云。弄泥團漢有什麽限。雪竇拈云。三步雖活五步須死。
〈頌〉麈中麈。君看取下一箭。走三步。五步若活。成群趁虎。正眼從來付獵人。雪竇高聲云。看箭。
벽암록 81칙 약산화상과 큰 사슴 사냥
납자의 사량분별 지혜의 화살로 명중시켜
{벽암록} 제81칙은 약산유엄선사와 큰 사슴을 화살로 잡는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약산화상에게 질문했다. "넓게 펼쳐진 초원에 큰 사슴과 많은 사슴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큰 사슴 가운데 큰 사슴을 화살로 쏘아 맞출 수가 있습니까?" 약산화상이 말했다. "이 화살을 잘 봐라!" 그 스님이 벌떡 자빠지며 거꾸러지자, 약산화상이 말했다. "시자야! 이 죽은 놈을 끌어내라!" 그 스님이 곧장 도망치자 약산화상이 말했다. "흙덩어리나 갖고 노는 놈! 이런 바보같은 놈들을 아무리 상대해도 끝장이 없다니까!" 설두화상이 이 이야기를 제시하여 말했다. "세 걸음까지는 살아 있다고 해도 다섯 걸음 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擧, 僧問藥山, 平田淺草鹿成群, 如何射得中. 山云, 看箭. 僧放身便倒. 山云, 侍者拖出這死漢. 僧便走. 山云, 弄泥團漢有什限. (雪竇拈云, 三步雖活五步須死.)
어설픈 스님의 각본 짠듯한 행동에
'노련한 사냥군' 약산, 한방에 퇴치
늦산화상은 {벽암록} 제41칙에도 등장했다. 본칙 공안의 출처는 분명하지 않은데, 후대의 자료인 {오등회원} 제5권 약산장에 수록하고 있고, {연등회요} 19권에도 전하고 있지만 내용에 약간 다른 점이 있다. 석두희천의 선법을 이은 약산유엄(藥山惟嚴, 751~834)은 전기는 {조당집} 제4권 {송고승전} 17권, {전등록} 14권 등에 전하고 있는 것처럼, 속성은 한(韓)씨, 강서성 신풍현에서 출생하여 17살에 출가했다. 뒤에 석두희천선사를 친견하고 나눈 선문답을 {조당집}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약산이 앉아있는데, 석두선사가 물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약산이 대답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한가히 앉은 것이구나!" "한가히 앉았다면 하는 것이 됩니다." "그대는 하지 않는다 하는데,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천명의 성인도 알 수 없습니다." 이에 석두선사가 게송으로 약산을 찬탄하였다. '전부터 함께 있었지만, 이름조차 모르는데, 마음대로 서로잡고 그런 행동 짓는다. 예부터 높은 현인도 알지 못했거늘, 경솔한 예사 무리야 어찌 밝힐 수가 있으랴!'
석두선사가 약산의 안목을 인정한 게송이다. 약산은 석두선사의 지시로 마조대사를 참문하여 선문답을 나누고 마조선사가 그대의 스승은 석두선사라고 인정한 사실도 전하고 있는 것처럼, 약산화상은 당대의 명승 석두와 마조가 인정한 인물이다. 특히 상공인 이고(李)가 약산화상을 참문하여 도를 묻는 질문에 약산화상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또 물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는 한마디로 깨닫게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지극히 당연하고 눈앞의 현실에서 작용하는 진실된 불법을 직접 깨닫도록 제시한 법문이다.
어떤 스님이 약산화상에게 "넓게 펼쳐진 초원에 큰 사슴() 많은 작은 사슴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왕 사슴중의 왕 사슴을 화살로 쏘아 맞출 수가 있습니까?" 라고 질문했다. 똑같은 질문이 {설봉어록} 하권에도 전하고 있는데, 주()는 큰 사슴(大鹿)을 말한다. 많은 사슴 무리들을 이끌고 있는 큰 사슴들 가운데 가장 큰 왕 사슴을 ‘주중주(中)’라고 하며, 모든 사슴의 무리를 이끌고 있는 왕 사슴을 잡는 방법을 약산화상에게 질문하고 있다. 큰 사슴은 꼬리털이 훌륭하여 작은 사슴들이 큰 사슴의 꼬리털을 목표로 하여 따라 다닌다고 하는데, 선문답에서는 주중(主中)의 주(主), 법왕중(法王中)의 법왕(法王)을 비유하여, 만법의 주체이며 우주의 본체를 지칭하고 있다. 만법의 주체를 어떻게 쏘아 맞출 수가 있는가? 즉 자기의 본성을 어떻게 체득해야 하는가를 큰 사슴으로 비유한 질문이다. 원오도 '평창'에 이러한 질문을 차사문(借事問) 혹은 판주문(辦主問)이라고 하는데, 이로써 지금 당면한 문제의 핵심을 밝히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질문한 스님은 자신이 큰 사슴중의 왕 사슴이라고 자임하면서 약산화상의 안목을 점검하며 화살을 잡고 법전을 펼친 질문이다. 약산화상도 질문한 스님을 향해 화살을 잡아당긴 상황에서 "이 화살을 잘 봐라!"라고 큰 소리를 쳤다. 이 스님의 질문한 핵심을 화살로 쏘아 날려버리는 작용으로 일체의 사량분별을 떨쳐버린 날카로운 지혜의 화살인 것이다.
원오는 '평창'에 화살로 독자적인 법문을 펼친 마조의 제자 석공선사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삼평(三平)이 석공선사를 참문하자 석공선사는 곧장 활을 당기는 시늉을 하면서 "화살을 보라(看箭)"고 말했다. 삼평은 가슴을 열어제치며, "이것은 사람을 죽이는 화살입니까? 살리는 화살 입니까?"라고 말하자, 석공선사는 화살을 세 번 튕겼다. 삼평이 곧장 절을 하니, 석공선사가 말했다. "30년 동안 활 한 개와 두 개의 화살을 가지고 교화했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반쪽 성인을 쏠 수 있었다." 그리고는 곧장 화살을 꺾어 버렸다.] 원오는 [석공선사의 지혜작용이 약산화상과 똑같다. 삼평은 정수리(頂門)에 안목을 갖추고 한 마디 적중시켰는데, 이것은 약산화상이 "화살을 보라!"고 한 말과 같은 것]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약산화상의 화살에 큰 사슴중의 왕 사슴으로 자임한 그 스님은 몸을 뒹굴면서 벌떡 자빠지며 거꾸러졌다. 즉 스스로 약산의 화살에 명중된 큰 사슴중의 왕 사슴이라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약산이 다름 말로 던지면 또한 그에 적당한 말로서 대꾸하려는 복안의 말도 준비했을 것이 분명하다. 원오도 '망상 분별하는 놈'이라고 질타하고 있다. 그래서 약산화상은 "시자야! 이 죽은 놈을 끌어내라!"고 고함쳤다. 죽은 시체를 빨리 없애 버리라고 하자, 그 스님이 곧장 도망치자 약산화상이 말했다. "흙덩어리나 가지고 노는 멍청한 놈! 이런 바보같은 놈들을 아무리 상대해도 끝이 없다니까!"
설두화상이 이 이야기를 제시하여 말했다. "이 스님은 일어나서 두세 걸음을 걸을 때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다섯 걸음 걸어가면 죽은 사람이 된다." 즉 크게 한 번 죽어야 되살아난다는 사중득활(死中得活)이라는 말처럼, 아상 인상과 번뇌 망념을 텅 비우고 불법의 지혜작용을 펼치는 시늉을 하고 있지만, 엉터리 가짜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는 그럴 듯 해 보이지만 곧장 죽은 인간이 되고 만다고 평한 말이다. 원오도 '백보를 도망간다 해도 반드시 목숨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착어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큰 사슴중의 왕 사슴.' 본칙의 제목으로 주중(主中)의 중(主), 법왕(法王)중의 법왕, 진여 법성, 혹은 본래면목, 법신불을 체득하는 일이 수행의 근본이다. '그대는 잘 보라.' 참선 수행자들은 큰 사슴 중에 왕 사슴인 자신의 본래면목을 잘 보도록 하라. 각자 본인 스스로 보고 깨닫는 방법 밖에 없다. 약산화상이 '화살을 보라!'는 법문을 설두는 전체적으로 제시하여 읊고 있다. 약산화상은 화살을 보라고 하며 날카로운 지혜의 '화살 하나를 쏘아' 정확하게 명중시켰다. 그것은 질문한 스님이 본래면목을 깨닫도록 베푼 자비심이었다. '세 걸음 도망치게 했네.' 스스로 큰 사슴중의 왕사슴이라고 생각하고 자빠진 스님도 약산화상이 '이 죽은 놈을 끌어내라!'고 한 말에 도망쳤다. 이러한 행동은 죽은 가운데 되살아난 사중득활(死中得活)의 지혜작용처럼 보였지만, 겨우 세 걸음 움직이고는 죽어버렸다. '다섯 걸음 걸어가서도 살 수 있다면, 떼를 지어 호랑이도 좇을 수 있으리.' 진실로 안목을 갖춘 스님이라면 약산이 이 죽은 놈을 끌어내라고 말할 때 약산을 역습하는 지혜를 펼쳐야 호랑이와 같은 약산도 좇을 수 있다. '정법의 안목은 원래 사냥꾼에게 있었다.' 약산은 정말 사냥꾼과 같은 노련한 선승이었기 때문에 하나의 화살로 명중시켰다. '설두가 큰 소리로 말했다. "화살을 잘 보라!" 고.' 설두 역시 약산과 같은 경지의 안목으로 천하의 수행자들에게 자기 지혜의 화살을 쏘아 본래면목을 잘 성찰해 깨닫도록 지시하고 있다.
[第082則]山花開似錦
〈垂示〉垂示云。竿頭絲線具眼方知。格外之機作家方辨。且道作麽生是竿頭絲線格外之機。試擧看。
〈本則〉擧。僧問大龍。色身敗壞。如何是堅固法身。龍云。山花開似錦。澗水湛如藍。
〈頌〉問曾不知答還不會。月冷風高古巖寒檜。堪笑路逢達道人。不將語黙對。手把白玉鞭。驪珠盡擊碎。不擊碎增瑕纇。國有憲章三千條罪
벽암록 82칙 대용(大龍)화상의 견고한 법신(法身)
사량분별 초월한 모습이 곧 '청정법신'
{벽암록} 제82칙은 대용화상이 법신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대용(大龍)화상에게 질문했다. "색신(色身)은 부서지고 파괴되는데, 견고한 법신(法身)은 어떠한 것입니까?" 대용화상이 말했다. "산에 핀 꽃은 비단결 같고, 시냇물은 쪽빛처럼 맑다."
擧. 僧問大龍, 色身敗壞, 如何是堅固法身. 龍云, 山花開似錦, 澗水湛如藍.
색신과 법신 구분 짓는 망상을
언어도단 경지에서 부숴 버려
본칙의 공안은 어디서 채택한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후대의 자료인 {오등회원} 제8권 대용화상전에 수록하고 있다. 대용화상은 송대에 낭주(朗州) 대용산에서 활약한 지홍(智洪)선사로 덕산의 법맥을 계승한 백조지원(白兆志圓) 선사의 선법을 이었다. 그의 법문은 {전등록} 23권 지홍 홍제(弘濟)대사전 약간의 선문답을 전하고 있지만 전기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본칙의 선문답은 어떤 스님이 대용화상에게 "육체인 색신은 시절인연에 의한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사대(四大)의 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생노병사의 무상한 존재이며, 시절인연이 다하면 반드시 부서지고 파괴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영원히 부서지지 않고 파괴되지 않는 법신이란 어떤 것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이다. 이 질문은 색신과 법신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며, 색신(色身)인 인간의 육체는 부서지고 파괴되는데,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 견고한 법신은 어떠한 것인가를 문제로 삼고 있다.
사실 법신의 문제는 {벽암록} 39칙과 47칙에 운문선사에게 질문한 선문답을 비롯하여 선문답의 중심과제이다. 선문답의 핵심문제는 색신과 법신에 대한 철저한 안목을 체득했는가. 아니면 법신을 어떻게 체득할 것인가. 이 문제는 수행자들이 불법의 대의와 선사상을 철저하게 확립해서 정법의 안목을 구족해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수행자들은 불법의 근본사상을 배우고 익히며, 법신을 체득하고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기 위해 선지식을 참문하고 이러한 문제를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한 스님은 {불유교경}에 "일체의 세간에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존재는 모두 파괴(敗壞)되는 것이기에 불안한 모양인 것이다"라고 하는 일절과, {화엄경} 노사나품에 "법신은 견고하여 파괴되지 않고 일체의 모든 법계에 두루 충만하고 있다"는 설법을 염두에 두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인연으로 이루어진 색신은 유루법(有漏法)이고 진리의 당체인 법신은 무위법(無漏法)이다. {대지도론} 9권에 '부처는 두 종류의 몸(二種身)이 있다. 첫째는 법성신(法性身)이며, 두 번째는 부모생신(父母生身)이다'라고 설한 것처럼, 색신은 부모의 인연으로 몸을 받은 육체를 말하며, 법신은 불법을 체득한 지혜의 당체를 말한다.
색신과 법신은 부처가 구족하는 기능을 분류한 것이다. 육체가 없이 법신(마음)의 지혜작용을 전개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육신은 인연으로 가합된 것이기 때문에 생노병사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무상을 거쳐 파괴되고 만다. 무상한 육신이 파괴되는 모습을 점차로 관찰하여 세간의 다섯 가지 욕망과 육신의 애착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리도록 제시한 수행법이 구상관(九想觀)이며 백골관(白骨觀)이다. 그러나 불법의 진실을 체득한 당체이며 지혜작용을 전개한 법성신(法性身) 즉 법신은 영원히 파괴되지 않고, 시방의 허공에 가득 차고 무량광명과 무량의 수명이기 때문에 파괴되지 않는다. {유마경}에 유마힐이 아난에게 "여래의 몸은 금강과 같이 파괴되지 않는 것을 본체(金剛之體)로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법신은 파괴되지 않는 금강불괴신(金剛不壞身)이다. 왜냐하면 법신은 육신과 같이 생멸법과 생사의 인연법을 초월한 지혜의 법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엄경}에도 "불자여! 비유하면 허공과 같이 일체의 모양과 형상이 있는 경계(色處)나 모양과 형색이 없는 곳(非色處)에나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며, 그래서 이르지 않거나 이르지 아니한 곳도 아니다. 왜냐하면 허공은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기 때문이다. 여래의 법신도 이와 같다. 일체의 경계에 이르고 일체의 국토에 이르고, 일체 법이나 일체 중생에게 이르지 아니한 곳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여래의 몸은 고정된 몸이 아니기 때문에 곳에 따라 변화하여 그 몸을 나투어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설한다. 또 {화엄경} 여래현상품에도 "불신은 법계에 가득 충만하여 널리 일체 중생들 앞에 나투고 있다. 인연에 따라 나아가 감응하여 두루하지 아니한 곳이 없지만 항상 깨달음의 당처에 앉아 있도다"라고 읊고 있다. {유마경} 방편품에 "불신(佛身)은 곧 법신이다. 무량의 공덕과 지혜를 이룬다"라고 하고, "무량하고 청정한 법을 이루기 때문에 여래신(如來身)이라고 한다"고 설하고 있다. 또한 {대승기신론}에 "진여(眞如)의 지혜를 법신이라고 한다"는 것처럼, 불법의 진실을 체득한 지혜가 법신이다. 법신은 모양도 형상도 없기에 파괴되지 않고 영원한 지혜광명과 무량한 공덕을 이루는 당체이다.
{열반경} 등 대승경론에서는 여래의 법신을 허공에다 비유하는데 허공은 태어나거나 죽는 생사와 생멸이 없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며, 무량무변하며, 일체의 만물을 포용함과 동시에 생성하도록 하고 있는 무한한 지혜광명의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 스님은 경전에서 주장한 색신과 법신에 대한 말을 듣고, 법신에 대한 의미를 확실히 체득하기 위해 대용화상에게 질문한 것인데, 원오는 "이 스님이 색신과 법신이라는 두 가지 차별에 떨어졌다"라고 착어했는데 이러한 차별에 떨어진 스님의 질문에 대용화상은 "산에 피어 있는 많은 꽃들은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이 아름답고, 개울의 시냇물은 파란 색깔에 너무나 맑기만 하다"라고 삼라만상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게송으로 읊고 있다. 대용화상은 사량분별을 여읜 만법의 진실한 모습이 그대로 법신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청정법신은 산에 꽃이 피고 개울물이 흐르는 그 진실된 모습인 것이다. 소동파도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부처님의 설법이고, 산의 모양이 청정한 법신"이라고 읊고 있다. 중생의 사량분별을 초월한 무심(無心)한 산의 모습이나 개울물이 그대로 청정한 법신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설두화상은 본칙의 공안을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읊었다. "질문도 알지 못하고", 이 스님은 색신과는 달리 법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법신과 색신에 대한 불법의 대의를 전혀 알지도 못하고 질문하였다. "대답해도 알지 못하네", 법신은 언어도단의 경지라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 대용화상은 차별심을 초월한 입장(不會)에서 제법실상의 세계를 게송으로 읊었는데, 스님은 대용화상의 대답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네. "달은 차갑고 바람은 드높은데, 옛 바위의 쓸쓸한 전나무여", 달은 하늘에서 비추고 바람은 천지를 상쾌하게 하네. 그곳에 천년의 세월에 이끼가 낀 바위 옆에 푸른 전나무가 사철 변함없이 묵묵히 솟아 있다. 한적하고 청정한 법신 풍경의 유경(幽境)을 대용화상은 언어도단(不會)의 차원에서 읊고 있다. 일찍이 향엄지한선사는 "길에서 도인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꾸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오히려 우스운 일'이로다. 대용화상은 말이나 침묵으로 상대할 때도 있고, 상대하지 않을 때도 있는데, 그것을 상대하지 말라고 규칙으로 정한 것은 우스운 일이다.
대용화상은 말이나 침묵, 양변(兩邊)을 여의고 더군다나 그 양변의 차별을 버리지도 않고 산에 핀 꽃과 개울물 흐르는 게송으로 견고한 법신을 제시하였다고 찬탄하고 있다. "백옥(白玉)의 채찍을 손에 잡고, 검은 용의 구슬을 모조리 부숴버렸네", 대용화상이 대답한 "산에 핀 꽃"이라는 백옥의 채찍(법신의 지혜)으로 용의 구슬을 사정없이 때려 부셔버렸다. 만약 대용화상이 용의 구슬이 아깝다고 "쳐부수지 않았다면, 흠집만 더했으리라", 이 스님은 영혼을 불성이라고 착각하고 영원히 번뇌 망념이 증가하여 불법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나라에는 국법이 있고", 법률이 있는 것처럼 그 법칙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법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삼천조목의 죄로서 다스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선의 세계에도 선수행자는 불법을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해서 중생을 구제해야 하는데, 정법의 안목을 갖추지 못한 졸승은 삼천 가지 죄를 적용해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게송이다.
[第083則]南山雲北山雨
〈本則〉擧。雲門示衆云。古佛與露柱相交。是第幾機。自代云。南山起雲北山下雨。
〈頌〉南山雲北山雨。四七二三面相睹。新羅國裏曾上堂。大唐國裏未打鼓。苦中樂。樂中苦。誰道黃金如糞土。
벽암록 83칙 운문화상의 고불(古佛)과 기둥(露柱)
남산과 북산, 고불과 기둥이 '하나의 경지'
{벽암록} 제83칙은 운문화상이 대중에게 설한 상당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운문화상이 법당에서 대중들에게 설법을 했다. "고불(古佛)과 기둥(露柱)이 사이좋게 교제하는데, 이것은 어떤 단계의 마음작용(機)인가?" 운문화상 스스로 대답했다.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
擧. 雲門示衆云, 古佛與露柱相交, 是第幾機. 自代云. 南山起雲. 北山下雨.
고불은 본래 청정한 불심 상징하고
기둥은 사물과 현상 경계 대변한 것
본칙 공안은 {운문광록} 중권(中卷)의 수시대어(垂示代語)에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운문화상이 법당에 올라 설법하였다.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고불(古佛)과 기둥(露柱)이 사이좋게 교제하는데, 이것은 몇 번째 기틀(機)인가?'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운문화상이 물었다. '그대들에게 묻는다. 나는 그대들을 위해서 말한 것이다.' 어떤 스님이 곧바로 질문했다. 운문화상은 말했다. '이 채찍 끈은 삽십전(三十文)이다.' 앞의 말을 대신하여 말했다.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어째서 채찍 끈이 삽십전입니까?' 운문화상은 곧장 내리쳤다." 설두화상은 이 일단의 대화에서 요약한 것인데, {굉지송고} 31칙에도 똑같은 공안을 제시하고 있다.
운문문언(864~949)화상은 {벽암록}에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전기는 생략한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공안은 번뜩이는 전광석화와도 같아 참으로 신출귀몰하다고 하겠다. (원오와 동문인) 경(慶) 장주(藏主: 경전을 관리하는 직책)는 이 공안에 대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이 한 평생 설한 대장경에도 이와 같은 말씀이 있을까요?'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흔히 분별 의식으로 살림살이하면서 '부처님은 삼계의 도사이고, 사생(四生)의 자비로운 어버이다. 이미 고불(古佛)인데 무엇 때문에 기둥(露柱)과 사이좋게 지내는가'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이해해서는 운문화상의 말뜻을 결코 파악 할 수가 없다."
말하자면 '대웅전에 모신 불상(古佛)과 대웅전의 기둥이 서로 함께 나란히 마주하며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것은 어떠한 경지(차원)의 지혜작용인가?'라고 대중에게 질문한 것이다. 대웅전의 불상 뿐만 아니라, 석가불이나 아미타불, 삼세의 모든 부처나 역대의 모든 조사가 고불(古佛)이다. 설봉선사가 조주선사의 법문을 듣고 '조주 고불(古佛)'이라고 칭찬하는 말이 최초인데, {조주록}에는 다음과 같은 일단도 보인다. "어떤 수재가 조주선사를 참문하고 곧장 선사를 칭찬하기를 '화상이 바로 고불(古佛)입니다'라고 말했다. 조주선사는 '수재가 바로 신 여래(新如來)입니다'라고 말했다." 고불(古佛)은 옛 부처라는 말이 아니다. 옛(古) 부처라고 하면 새(新) 여래라는 상대적인 차별심에 떨어진 것이다. {조당집} 제9권에 '고불은 수행과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에 따르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고불(古佛)은 본래, 원래, 근본적으로 부처라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전등록} 24권 법안장에 어떤 스님이 '고불이란 어떤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법안선사는 '지금 그대의 마음에 일체의 의혹이 없는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동산록}에도 '그대의 본래 청정한 불심이 곧 고불심(古佛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평상심과 번뇌 망념이 없는 무심을 말하며, {육조단경} 등 선어록에서는 본래 청정한 거울(古鏡)의 작용을 불심에 비유하고 있다. 운문화상은 법당에서 눈앞에 전개되고 불상과 기둥이 나란히 마주하고 있는 현상의 사실을 수행자들에게 제시해 고불과 기둥과 같이 일체 상대적인 차별경계를 초월한 경지를 체득하도록 법문을 한 것이다. 법당의 불상(古佛)과 기둥이 별개인 것으로 본다면 경계에 떨어지고 차별에 떨어진 중생심이 된다. 법당의 불상으로 상징되는 고불은 일체 제불과 모든 조사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서 법문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구족하고 있는 본래 청정한 불심을 말한다. 법당의 기둥은 현전하는 일체의 모든 사물과 현상 경계를 대변한 말인데, 고불(古佛)과 노주(露柱)는 자각의 주체인 불심과 현상 경계의 모든 사물을 말한다. 말하자면 주체(主)와 객체(客), 인(人)과 법(法), 심(心)과 경(境)이 서로 서로 친히 교섭하며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불이일체(不二一體)가 되어 일체의 차별과 분별심이 초월된 경지를 설법하고 있다.
선에서는 주관과 객관이 일체가 된 깨달음의 세계를 하얀 은 쟁반에 흰 눈을 담아 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쟁반과 눈은 둘이지만 흰색으로 일체가 된 경지를 말한다. {반야심경}에서 설한 것처럼, 법당의 기둥을 비롯해 일체의 사물과 차별 경계에 대한 분별 의식이 없이 무심한 경지가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일체의 분별 의식이 없는 무심의 마음으로 일체의 모든 경계나 사물, 도구를 걸림없이 마음대로 생활에 사용하는 것이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자각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인 사물이 무심의 경지에서 자신의 지혜로운 생활이 되도록 하는 법문이다.
그런데 운문화상이 '고불(古佛)도 무심 기둥(露柱)도 무심의 경지에서 서로 서로 하나 된 경지의 작용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떤 단계의 마음작용(機)인가?' 기(機)는 기관(機關)이나 기용(機用), 기근(機根), 기략(機略), 기륜(機輪)이라고 하는 말처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선에서는 마음의 지혜작용을 말한다. 마음의 지혜작용은 여러 가지가 있다. 불심으로 사물의 본체를 곧장 파악하는 직관이나, 사물을 관찰해 인식하는 작용, 문제를 깊이 사유하고 고찰하는 사색 등이 있는데, 지금 고불과 기둥이 서로 사이좋게 교제하는 마음의 작용은 어떤 단계의 지혜작용인가라고 묻고 있다.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운문화상 스스로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온다'라고 대중을 대신해 말했다. 고불과 기둥, 남산과 북산, 구름과 비가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남산과 북산은 본래 하나의 산이며, 일체의 모든 만물은 서로 상의 상관관계 속에서 서로 서로 무심의 경지에서 존재하고 있다. 구름도 무심, 비도 무심, 구름이 일어나고 비가 오는 모습이 그대로 무심의 경지에서 법체(法體)가 현성(現成)된 사실을 말하고 있다. 고불과 기둥, 구름과 비가 무심하게 주객일체(主客一體), 심경일여(心境一如)가 된 경지를 말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남산의 구름, 북산의 비.' 설두는 본 공안의 주안(主眼)인 운문화상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찬탄하고 있다. '서천의 28대, 동토의 6대 조사가 눈앞에서 본다.' 인도에서 부처님의 혜명을 계승한 서천 28대 역대조사와, 달마대사 이후 육조혜능에 이르는 중국의 6대 조사 모두가 남산에 구름이 일고, 북산에 비가 내리는 것을 본다. 역대의 모든 조사는 정법의 안목을 갖춘 선지식이기 때문에 운문이 말한 '남산의 구름과 북산의 비'를 눈앞에서 직접 보고 있다. 삼세(三世)에 상주(常住)하고 법계(法界)에 두루하는 구름이며 비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진실 법계를 법신의 지혜로 친히 본다고 읊었다.
'신라국에서 일찍이 상당설법 하였는데, 대당국에서는 아직 북도 치지 않았다.' 선원에서 주지가 법당에서 상당 설법하기 전에 먼저 북을 치는 의식이 있다. 신라에서 상당 설법을 했는데, 당나라에서는 북도 치지 않았다는 말은 시간의 순서가 맞지 않는 것이고, 신라와 당나라는 거리도 멀리 떨어져 있다. 말하자면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고 북산의 비가 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경지에서 전개된 진실법계의 실상인 것이다. 상식적인 시간과 공간개념으로 상대적인 분별의식으로 운문의 말을 이해하면 안 된다. '괴로움 가운데 즐거움, 즐거움 가운데 괴로움' 남산과 북산, 고불과 기둥, 고(苦)와 락(樂)도 하나의 경지이다. '그 누가 황금을 똥 같다고 말하리요.' {전한서(前漢書)} 열전에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는 양나라 사람으로 황금을 똥으로 볼 정도로 친한 친구였다. 그러나 뒤에 사이가 나빠져 권력 다툼으로 똥보다도 더 더러운 사이가 됐다. 고불과 기둥은 서로 무심의 경지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황금을 똥과 같이 생각할 필요도 없고, 또 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라고 의식할 필요도 없다. 황금은 황금 그대로, 똥은 똥 그대로, 무심한 그 가운데 일체 괴로움과 즐거움(苦樂)의 차별도 없는 것이다.
[第084則]不二法門
〈垂示〉垂示云。道是是無可是。言非非無可非。是非已去。得失兩忘。淨裸裸赤灑灑。且道。面前背後是箇什麽。或有箇衲僧出來道。面前是佛殿三門。背後是寢堂方丈。且道。此人還具眼
也無。若辨得此人。許爾親見古人來。
〈本則〉擧。維摩詰問文殊師利。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文殊曰。如我意者。於一切法。無言無說。無示無識。離諸問答。是爲入不二法門。於是文殊師利問維摩詰。我等各自說已。仁者當說。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雪竇云。維摩道什麽。復云。勘破了也。
〈頌〉咄這維摩老。悲生空懊惱。臥疾毘耶離。全身太枯槁。七佛祖師來。一室且頻掃。請問不二門。當時便靠倒。不靠倒。金毛獅子無處討。
벽암록 84칙 유마거사의 불이법문
일체 자취와 흔적 없는 유마힐의 '침묵'
{벽암록} 제84칙은 {유마경}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제시하고 있다.
유마힐이 문수사리에게 질문했다. "보살이 둘이 아닌 불이법문(不二法門)을 깨닫는 것은 어떤 경지인가?" 문수가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일체의 법에 관하여 말할 수도 없고, 설할 수도 없고, 제시할 수도 없고, 알게 할 수도 없으며, 일체의 질문과 대답을 여읜 그것이 불이법문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에 문수사리보살이 유마힐 거사에게 물었다. "우리들은 각자의 설명을 마쳤습니다. 거사께서 말씀해 보십시오. 불이법문을 깨닫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설두화상이 말했다. "유마거사가 무슨 말을 했는가!" 설두화상은 다시 말했다. "완전히 파악(勘破)해 버렸다."
擧. 維摩詰問文殊師利. 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 文殊曰, 如我意者. 於一切法. 無言無說. 無示無識. 離諸問答. 是爲入不二法門. 於是文殊師利 問維摩詰, 我等各自說已, 仁者當說, 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 雪竇云, 維摩道什. 復云, 勘破了也.
문수보살 답변 역시 흔적 남겨
참 불이법문은 '언어도단' 경지
본칙의 공안은 {유마경} '입불이법문품'에 의거한 것이다. {유마경}에는 어느 날 비야리성의 장자인 유마거사가 석존이 설법하는 장소에 얼굴이 보이지 않아, 석존이 "어떻게 된 일인가?" 걱정하면서 물어보니 제자 한 사람이 "유마거사는 병으로 누워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석존은 제자 사리불과 여러 제자들에게 "유마거사의 병문안을 하고 오라"고 지시하였지만 이런 저런 핑계로 모두 병문안 가기를 싫어했다. 마지막으로 문수보살이 세존을 대신하여 병문안 하러 가게 되었는데, 3만 2000의 대중들을 거느리고 유마거사의 병실을 찾아갔다. 유마거사는 그 많은 대중을 자신이 거처하는 방장(方丈)으로 초청하였지만, 장소가 조금도 협소함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원오는 '평창'에 유마거사와 여러 보살들과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유마힐이 여러 보살들에게 각기 둘이 아닌 불이법문(不二法門)을 말하게 하였다. 그때 32명의 보살이 사물을 둘로 나누어 보는 견해(二見)인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진(眞)과 속(俗)의 두 가지 진리(二諦)를 합일시켜 불이법문이라고 대답했다. 마지막에 문수보살은 '내 생각으로는 일체의 법에 관하여 말할 수도 없고, 설할 수도 없고, 제시할 수도 없고, 알도록 할 수도 없으며, 일체의 질문과 대답을 여읜 그것이 불이법문을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32명의 보살은 말로서 말을 버렸다. 그러나 문수보살은 말이 없는 것(無言)으로 말을 버려 일시에 털어버려 아무 것도 필요치 않는 것으로 불이법문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신령한 거북이 진흙땅에 꼬리를 끄는 것과 같이 자취를 쓸어버린다는 것이 그만 또 다른 흔적을 남긴 꼴이다."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의 대화로 귀결되는 본칙 공안의 핵심은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체득한 견해와 안목을 점검하는 문답이라고 할 수 있다. 유마거사의 질문에 다른 보살들은 대승불교에서 제시한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의미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여러 가지 입장에서 제시하고 있는데, 이미 언어 문자로 설명한 것은 불이법문을 대상으로 설정하여 상대적인 입장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불이의 경지를 체득한 입장이라고 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 불이법문과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는 방법을 아무리 설명해도 언어 문자의 설명은 자취와 흔적이 남는다. 불이법문을 체득하는 것은 선악, 시비, 생사 등의 일체 상대적이고 이원론적인 차별심을 텅 비우는 공(空), 중도(中道)의 실천을 통해서 근원적인 불심의 반야지혜로 일체의 자취나 흔적이 없는 깨달음의 삶을 실행하는 것이다. {육조단경}에서 주장하는 불법의 대의란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는 것이다. 선의 수행은 반야의 지혜로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여 지혜로운 삶을 선의 생활로 전개하는 것이며, 선문답은 이러한 사실을 점검하고 확인하는 스승과 제자의 구체적인 대화인 것이다. {신심명}에서는 "지극한 깨달음을 체득하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단지 취사선택하고 간택하는 분별심만 없으면 된다는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고 설하고 있다.
문수보살은 반야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며, 칠불(七佛)의 스승이고, 시방제불의 어머니(母)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수보살은 반야지혜의 완성으로 부처로서 현성되기 때문에 반야지혜(문수)는 부처를 생산하는 어머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유마경}에서는 문수보살의 안목이 유마힐의 지혜에 미치지 못하는 보살로 등장하고 있다. 문수보살은 최후로 유마거사에게 "우리들 32보살은 불이법문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밝혔는데, 이제는 유마거사 당신이 대답할 차례입니다. 거사의 견해는 어떻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유마경}에 유마거사는 단지 [침묵]을 하였다고 한다. {종용록} 48칙에 "승조의 {조론} 열반무명론에 석가가 성도 후 마갈타국에서 방문을 닫고 침묵하였고, 유마도 비야리성에서 입을 닫고 침묵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불법의 근본(第一義諦) 진실은 언어 문자로 설명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 분별해서 알 수도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인 불립문자의 경지임을 침묵으로 표현한 것이다. 침묵은 상대적인 언어 문자로 설명하는 이원적이고 분별적인 차별심을 텅 비운 본래심의 입장이며, 진실과 하나 된 불이법문을 체득한 경지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칙에서는 유마가 침묵으로 대답한 것을 생략하고, 설두가 "유마거사가, 무슨 말을 했는가!"라고 말했다. 원오는 "유마거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여 무슨 도리를 설하고 있는가?"라고 착어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또다시 "완전히 파악(勘破)해 버렸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설두화상이 유마가 말하지 않고 침묵한 그의 속셈을 완전히 간파해버렸다는 의미이다. 원오는 "설두 당신만 간파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나도 간파했다"라고 착어하고, '평창'에 "그대들은 말해보라 간파한 곳이 어디인가? 이것은 잘잘못에 관계없고, 시비에도 상관하지 않는다. 마치 만길 벼랑 위에서 목숨을 버리고 뛰어 넘을 수 있다면 유마거사를 친견하였다고 인정하겠지만, 버리지 못한다면 울타리에 뿔이 걸려 어쩌지 못하는 염소와 같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자신의 존재와 상대적인 경계와 아상과 인상, 일체의 분별심과 번뇌 망념을 텅 비운 무심(無心)의 경지가 되지 않으면 유마의 침묵과 설두와 원오가 간파한 경지를 파악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야()! 유마노인." 이 한마디에 어묵(語默), 진속(眞俗), 유위(有爲)나 무위(無爲) 등 일체의 차별을 날려 버린 설두의 견해를 읊었다. "중생을 위한 자비심으로 부질없이 고뇌하네." {유마경}에 중생이 병들어 있기 때문에 나도 병든 것이라고 말한 유마의 입장. "비야리성에서 병으로 누워. 온 몸이 너무나 깡말랐다." 비야리성은 유마거사가 사는 도시이고, 그는 중생들이 병들었기 때문에 자신도 병들어 그 고통으로 온 몸이 너무나 야위고 바짝 말라 버렸다. 중생들을 위한 지극한 자비심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칠불조사(문수보살)가 찾아왔네." {방발경(放鉢經)}에 "부처님이 부처가 된 것은 문수의 은혜이며, 문수는 과거의 본사이고, 과거 무량의 제불은 모두 문수의 제자"라고 설한다. {화엄경}에도 "문수사리는 무량 나유타 제불의 어머니이다"라는 말에 의거하여 {백장어록}에서 문수는 칠불의 스승이라고 주장했다. "일실(一室)의 방을 자주 쓸었네." 유마는 일체의 차별, 분별심을 텅 비우고, 손님을 맞이하여 문수에게 "불이법문을 청했다." '곧장 몸을 넘어뜨렸다.' 뛰어난 문수가 유마에게 도리어 불이법문의 질문을 읊고 있는데, 그러나 유마는 "몸이 넘어지지 않았다." 침묵으로 불이법문을 설한 유마의 지혜는 차별경계에 떨어지지 않았다. "황금빛 사자를 찾을 곳이 없네." 황금빛 사자는 문수보살이 타고 있는 것으로 문수보살을 비유한 것인데, 과연 문수도 유마의 침묵에 찬탄하게 되었다. 지혜의 상징인 문수가 지혜로 질문한 불이법문을 유마는 침묵으로 일체의 자취와 흔적이 없는 불이법문의 경지를 제시한 것이라고 극찬했다.
[第085則]掩耳偸鈴
〈垂示〉垂示云。把定世界不漏纖毫。盡大地人亡鋒結舌。是衲僧正令。頂門放光。照破四天下。是衲僧金剛眼睛。點鐵成金。點金成鐵。忽擒忽縱。是衲僧拄杖子。坐斷天下人舌頭。直得無出氣處。倒退三千里。是衲僧氣宇。且道總不恁麽時。畢竟是箇什麽人。試擧看。
〈本則〉擧。僧到桐峰庵主處便問。這裏忽逢大蟲時。又作麽生。庵主便作虎聲。僧便作怕勢。庵主呵呵大笑。僧云。這老賊。庵主云。爭奈老僧何。僧休去。雪竇云。是則是兩箇惡賊。只解掩耳偸鈴。
〈頌〉見之不取。思之千里。好箇斑斑。爪牙未備。君不見。大雄山下忽相逢。落落聲光皆振地。大丈夫見也無。收虎尾兮捋虎鬚。
벽암록 85칙 동봉(桐峰)화상과 호랑이
“어리석은 고양이가 호랑이 흉내내는 격”
{벽암록} 제85칙은 어떤 스님이 동봉화상을 찾아가 다음과 같은 선문답을 나누었다.
어떤 스님이 동봉화상이 살고 있는 암자에 이르러, 동봉화상께 질문했다. "여기서 갑자기 호랑이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동봉화상이 갑자기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자, 그 스님은 곧장 겁먹은 시늉을 하였다. 동봉화상이 껄껄대며 크게 웃자, 그 스님은"이 도적놈아!"라고 말했다. 동봉화상은 말했다. "그대는 노승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 스님은 그만 두었다. 설두화상이 말했다. "옳기는 옳다만, 어리석은 도둑놈처럼, 자신의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칠 줄만 아는구나!"
擧. 僧到桐峰庵主處便問, 這裏忽逢大蟲時, 又作生. 庵主, 便作虎聲. 僧便作勢. 庵主呵呵大笑. 僧云, 這老賊. 庵主云, 爭奈老僧何. 僧休去. 雪竇云, 是則是兩箇惡賊, 只解掩耳偸鈴.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12권과 {광등록} 13권 동봉암주전에 선문답으로 전하고 있다. {전등록}에 그의 전기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어 잘 알 수가 없다. 원오도 '평창'에 '백장회해선사의 법을 계승한 임제의 문하에서 대매(大梅), 백운(白雲), 호계(虎溪), 동봉(桐峰) 등의 네 암주가 배출되었다.'라고 한다. 대매(大梅) 백운(白雲)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전등록}에는 임제의현선사의 문하에 동봉(桐峰), 삼양(杉洋), 호계(虎溪), 복분(覆盆)등의 4인의 암주가 배출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동봉화상도 임제의 선법을 잇고 깊은 산중에 은거한 선승이 아닌가 생각된다. 산악형 종교로 형성된 선불교는 모두 산중에서 수행하고 심산유곡에서 유유자적하게 은둔의 수행자로 삶을 살다간 선승의 숫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조당집}에 '마조문하의 은둔자는 그 수를 셀 수도 없이 많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이름을 알 수 없는 선승은 무척 많다.
본칙에서도 산중에 은거하는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구법행각하는 어떤 수행자가 어느 날 동봉화상이 살고 있는 암자에 이르러 동봉화상에게 곧장 '암주가 홀로 이 산중에 좌선수행하고 있을 때 만약 무서운 호랑이(大蟲)를 만나면 어떻게 처리하겠는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선문답을 선사를 시험하는 험주문(驗主問)이라고 하는데, 질문한 스님이 누군지 알 수 없지만 너무나도 자신만만하고 자신이 일체의 만법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춘 호랑이라고 하면서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암주의 안목을 점검하려고 하고 있다. {조당집} 16권에 남전과 귀종이 호랑이(大蟲)를 소재로 선문답을 나누고 있고, {전등록} 10권에는 앙산이 장사경잠(長沙景岑)의 지혜작용을 마치 호랑이와 같이 용맹스러운 선승이라고 평가하면서 잠대충(岑大蟲)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처럼, 호랑이는 정법의 안목을 갖춘 용맹스러운 지혜작용을 자유롭게 펼치는 작가 선지식을 말한다. 원오는 '작가가 그림자를 가지고 논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이 스님은 안목을 갖춘 호랑이와 같은 작가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지만, 아직 진짜 호랑이는 본 일도 없는 사람같다고 비꼬고 있다.
동봉화상은 스님의 질문을 받고 갑자기 호랑이가 울부짖는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즉 동봉화상은 이 산중에는 호랑이가 살고 있는가? 그런 질문은 쓸데없는 소리야. 내가 바로 살아있는 호랑이다 라고 호랑이 고함소리를 흉내낸 것이다. 호랑이가 울부짖는 고함소리를 낸 것은 {전등록} 9권 백장선사가 황벽에게 호랑이(大蟲)를 보았는가? 라는 질문에 황벽이 곧장,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백장은 상당법문에서 대웅산에 한 마리의 호랑이가 있다고 황벽을 인가한 것처럼, 법계로 동봉화상의 조부인 황벽선사가 최초로 주장한 것이다. 이와같은 선문답으로 하나의 형식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동봉화상도 이미 이러한 각본은 알고 있었기에 즉시로 자신의 지혜로 응용한 것이다. 원오는 '잘못을 잘못에 나아간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질문한 스님도 동봉암주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호랑이 고함소리는 냈지만, 질문한 스님을 물어 죽이는 지혜작용이 없는 그릇됨을 가지고 질문한 스님의 태만한 잘못에 나아간 것이라는 의미이다. 원오는 '같이 살고 같이 죽는다.'라고 착어한 것처럼, 질문한 스님과 암주가 비슷한 안목에서 나눈 말이라고 야유하며, '말을 들으면 반드시 종지를 체득해야지.'라는 석두희천의 {참동계(參同契)} 일절을 인용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선승의 일문일답에서 본분의 종지를 체득해야 하는데, 동봉암주는 호랑이 질문에 호랑이 소리 흉내만 내고, 질문한 스님에게 본분의 종지인 발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동봉암주는 아직 불법의 대의(종지)를 체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상대방 문제점 캐내기만 할 뿐
지혜작용 없는 아류 선승 비판
동봉화상의 호랑이 고함 소리에 그 스님은 곧장 겁먹고 두려워하는 시늉을 하였다. 원오는 '두 사람 모두 진흙덩어리를 가지고 노는 어린애와 같은 놈'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암주는 스님이 겁먹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껄껄대며 크게 웃었다. 암주의 웃음에 대하여 원오는 '웃음 속에 칼이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방심 할 수 없는 선기를 펼쳤다. 스님은 암주가 웃음이 심상치 않은 도적의 선기가 있음을 간파하고 '이 도적놈아!'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님은 암주의 도적놈 기질을 파악하고도 독설을 퍼붓는 욕만 할 뿐 손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동봉 암주는 멀리 달아나 버렸다. 원오도 '졌다'고 착어하고 암주나 스님이 모두 자신의 경지를 내보인 방행(放行)만 하고 거두는 파주(把住)가 없다고 지적했다.
질문한 스님은 호랑이 소문은 들었지만 아직 진짜 호랑이를 본적이 없고, 암주도 호랑이 시늉만 하고 죽이고 살리는 맹수의 지혜작용이 없다. 스님이 이 도둑놈이라고 하자, 동봉화상은 '그대는 노승과 같은 도적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냉소로 대꾸하고 있다. 스님은 암주를 도적이라고 욕설을 퍼붓기만 하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지혜작용이 없어 물러서고 말았다. 원오는 '두 사람 모두 안목 없다. 한심하고 한심하다.'라고 착어하며, 암주와 스님 모두 유야무야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설두화상은 '옳기는 옳다만, 나쁜 도적처럼, 단지 자신의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칠 줄만 아는구나!'라고 {여씨춘추(呂氏春秋)}, {회남자(淮南子)}에 나오는 고사를 인용하여 평했다. 즉 스님과 암주 모두 훌륭한 선승이지만, 나쁜 도적의 악독한 수단으로 호랑이 소리를 흉내내고, 호랑이를 보고 두려워하는 시늉을 하고, 껄껄 호탕하게 웃고, 도둑이라고 욕하기도 하는 등 상대방의 약점만을 공격하는 나쁜 작전을 여러 가지 펼쳤지만, 결국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는 어리석은 아류의 선승이다. 방울을 훔치면 소리가 나기 때문에 남이 곧바로 알지만, 자신의 귀만 막고 있으면 자기에게는 들리지 않으면 남도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방울을 훔치는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했다. 상대방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독자적인 방편의 지혜가 부족하여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작가 선승으로 능력 부족이기 때문에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어리석은 선승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그것(호랑이)를 보고도 잡지 못하면, 천리 밖에 가서 그것(호랑이)를 생각한다.' 선문답을 하는 그 때에 자기 본분사(호랑이)를 체득하는 찬스를 잡지 못하고 아쉬워하는 암주와 스님의 부족한 경지를 읊고 있다. '호랑이의 얼굴진 무늬는 아름다운데, 발톱과 이빨을 갖추지 못했다.' 암주와 스님은 모두 훌륭한 호랑이지만, 발톱과 이빨을 갖춘 지혜작용이 없었다. '그대는 들어보지 못했는가? 대웅산 아래서 홀연히 만나보니, 우렁찬 목소리와 광채가 모두 대지를 진동했던 사실을. 대장부는 보았는가? 호랑이 꼬리를 잡고, 호랑이 수염을 뽑았노라.' 백장이 황벽을 대웅산의 호랑이라고 평한 선문답의 고사를 인용한 것인데, 이 대화에 대하여 앙산이 백장은 황벽을 칭찬한 것뿐만 아니라, 호랑이를 살려서 활동하게 하였다. 즉 호랑이 머리와 꼬리를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호랑이의 머리와 꼬리를 완전히 갖추지 못하면 호랑이로서 용맹을 떨진 지혜를 펼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第086則]好事不如無
〈垂示〉垂示云。把定世界不漏絲毫。截斷衆流不存涓滴。開口便錯擬議卽差。且道作麽生是透關底眼。試道看。
〈本則〉擧。雲門垂語云。人人盡有光明在。看時不見暗昏昏。作麽生是諸人光明。自代云。廚庫三門。又云。好事不如無。
〈頌〉自照列孤明。爲君通一線。花謝樹無影。看時誰不見。見不見。倒騎牛兮入佛殿。
벽암록 86칙 운문화상의 광명(光明)
중생심 차별경계 넘어야 지혜광명 비춰
{벽암록} 제86칙은 운문화상의 법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운문화상이 대중에게 법문을 하였다. "사람마다 모두가 광명을 가지고 있다. 이를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고 어둡고 깜깜하다. 어떤 것이 여러 사람들의 광명인가?" 스스로 대중들을 대신하여 말했다. "부엌의 삼문(三門)이다." 또 거듭 말했다. "좋은 일도 없었던 것만 못하다."
擧. 雲門垂語云, 人人盡有光明在. 看時不見暗昏昏. 作生是諸人光明. 自代云, 廚庫三門. 又云, 好事不如無.
의식적 분별심으로 불심 가려
'행주좌와(行住坐臥)' 광명 아닌 것 없어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 중권 수시대어를 인용한 것이다. 광명(光明)은 {화엄경} 11권에 '세존이 도량에 앉아 청정한 대광명을 놓으니 마치 천개의 태양이 나타나 허공세계를 두루 비추는 것과 같다.'라고 읊고 있는 것처럼, {방광반야경}, {관무량수경} 등 경전에서는 부처나 보살의 지혜작용을 광명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미혹의 어둠을 타파하는 진리의 빛으로 나타낸 것인데, 아미타불을 무량(無量)의 수명(壽命)과 광명(光明)으로 표현하고 있다.
운문화상이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광명이 있다. 이 광명을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고 어둡고 깜깜하다."라고 고인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말은 {조당집} 제4권, 단하천연서사의 {고적음(孤寂吟)}에 "광명 있는 줄 모두가 다 알지만, 그 광명을 보려하면 어둡고 깜깜하여 볼 수 없다."는 말에 의거한 것이다.
{전등록} 10권 장사장에 "모든 시방세계는 바로 사문의 눈이며, 모든 시방세계는 바로 사문의 온 몸이며, 온 시방 세계는 바로 자기 광명이며, 온 시방세계는 한 사람도 자기 아닌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혜의 {정법안장} 하권에 복주대안이 광명에 대한 법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대들 모든 사람은 각자 가치를 정할 수 없는 큰 보물을 지니고 있다. 눈(眼門)에서 빛(光)을 놓아 산하대지를 비추고, 귀에서 빛을 놓아 일체 선악의 음향을 받아들이고, 이와 같이 육문(六門)은 주야로 항상 광명을 놓는데, 이것을 방광삼매(放光三昧)라고 한다. 그대들은 각자 스스로 인식(識取)하지 않아도 사대신중(四大身中)에 잠재하고 있다. 자 말해보라! 이것은 무슨 물건인가(是甚物)? 그대가 만약 광명을 털끝만큼이라도 찾아보려고 한다면 보이지 않게 된다."
운문화상이 각자가 지니고 있는 광명을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고 깜깜하고 어두운 곳에 빠져 짐작도 할 수 없게 된다(暗昏昏)라고 주장하고 있다. 원오도 "보려고 할 때 눈이 멀게 된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불심의 광명은 무심의 경지에서 항상 잠시도 쉬지 않고 눈 귀 코 등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지혜광명을 발하고 있지만, 만약 그 광명을 대상으로 설정하여 의식적으로 보려고 하면 볼 수 없게 된다는 법문이다. 중생심의 분별의식이 망심이 되어 불심의 지혜광명이 어둡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능엄경} 9권에 "만약 성스러운 견해를 지으면 많은 삿된 망념에 떨어지리라."고 주장한 말과 같고, {현사어록}에 "감정에 성스러운 생각이 있으면 여전히 번뇌 망념(法塵)에 떨어진다."라는 주장과 같다.
원오가 수시에 "입을 열고 말을 하면 곧바로 틀리고, 사량분별 했다간 불심과는 어긋난다."라고 읊은 말도 운문의 법문을 대변한 것이다. 선어록에 "무엇을 하려고 의식하면 곧바로 불심의 지혜작용과는 어긋난다(擬心卽差)"는 선병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운문화상은 "여러분들 모든 사람들의 가지고 있는 광명이란 어떤 것인가?" 그 광명을 분명히 체득하도록 법문을 하고 있다. 자기 광명이란 각자의 본래면목이며, 지금 여기 자신의 본분사를 불심의 지혜로 전개한다면 자기의 광명이 시방세계에 두루하게 된다. 그것은 임제의 법문처럼, 곳에 따라 자신이 주인이 되어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불심으로 작용할 때에 자기의 광명이 천지를 비추게 되는 것이다. 원오는 "산은 산, 물은 물"이라고 착어했는데, 산은 산으로서 본래면목을, 물은 물로서 본분사를 무심하게 작용할 때 산으로서 면목이 들어나고, 물로서 면목을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의 광명도 자기 본분사를 불심의 지혜로, 무심의 경지에서 살수 있을 때 자기법신의 지혜광명이 시방세계를 가득 비추게 된다.
원오는 '평창'에 운문화상은 대중들을 위해서 20년 이와 같은 법문을 하여 점검하였지만, 운문의 요구에 계합하는 대답을 한 사람이 없었다. 향림(遠侍子)스님은 훗날 이 법문에 대하여 대중들을 대신하여 말씀해 주시길 간청하자, 운문화상은 "부엌(廚庫)의 삼문(三門)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주고(廚庫)는 부엌을 말하는데, 운문의 어록에서만 보이는 말이며, 삼문(三門)은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의 삼해탈문(三解脫門)으로 사찰에 들어가는 산문이다. 운문은 부엌과 삼문을 선원의 칠당가람[七堂伽藍, 법당, 불전, 창고(庫裡), 승당, 욕실, 변소(東司), 산문(山門)]을 대변한 말로, 여러 수행자들이 매일 선원의 칠당가람과 함께 법신의 지혜작용으로 생활하는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자기 광명 아닌 것이 없다. 즉 선원의 삼문이나 부엌 어디에서라도 불심으로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전개하는 그대로가 자기 광명이 현전한 것이라고 설한 것이다. 원오는 "노파심의 친절"이라고 착어했는데, 운문화상의 대어(代語)가 좀 지나친 친절이라고 비난했다. 친절은 좋지만, 과잉 친절은 수행자들이 철저한 수행으로 체험해야 하는 자각적인 교육을 망치게 하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에 운문화상은 선기(禪機)를 전환시켜, 또다시 "좋은 일도 없었던 것만 못하다(好事不如無)"라고 말했다.
이말은 당시의 속담인데, {운문어록}에는 이 말을 3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설봉어록}에 "머리를 깎고 먹물옷을 입고 부처님의 은혜를 받았는데, 어째서 부처를 인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설봉은 "좋은 일도 없었던 것만 못하다."라고 했다. {조주록}에도 "조주화상은 불전을 지나는데 한 스님이 예배하는 모습을 보고 주장자로 때렸다. 스님은 '예배하는 것은 좋은 일(好事)인데 왜 때립니까?'하자, 조주는 '좋은 일도 없었던 것만 못하다.'"라고 대꾸했다. 이 두 문답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부처나 광명은 성스러운 성체라는 차별적인 생각, 예배를 올리는 일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집착이며, 호사(好事), 악사(惡事)라는 좋고 나쁜 상대적인 차별에 떨어진 분별심의 행위는 중생심의 업장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없는 일만 못한 것이다. 그러한 일은 오히려 없었던 것이 좋다고 하는 말로, 중생심으로 지은 업장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청정하게 하여 자취와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법문이다. 좋고 나쁜 분별심을 일시에 초월하고 본래 무사한 무심의 경지에서 사는 것이 자기 법신광명을 나투는 것이라고 설한 말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본래 구족한 지혜의 비춤이 홀로 빛난다." 사람들은 각자 불심의 지혜광명을 구족하여 운문이 말하는 부엌과 삼문은 물론 절대적인 경지에서 스스로 삼라만상과 천지 만물을 모두 다 비춘다. "그대 위해 한 가닥 방편의 길을 열어 놓았다." 운문화상은 이러한 사실을 체득하지 못하는 맹인들을 위해서 부엌과 삼문이라는 하나의 길을 열어서 광명을 보도록 하였다. "꽃잎은 시들고 나무는 그늘도 없다."
예쁜 꽃잎도 떨어져 버리고 푸른 나뭇잎도 흩어져 옛 영화의 자취가 완전히 없어지고 한가히 본분으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광명이 없어지고 어둠이 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광명이나 어둠의 상대적인 차별과 미혹함과 깨달음의 그림자도 없어져 일체를 초월하고 텅 비워버린 본분대도(本分大道)의 입장이다. 좋은 일도 없었던 것만 못하다고 한 것처럼, 본분의 무심한 경지에서 자기 광명이 홀로 빛나게 된다. 명암의 차별심을 비우고, 무심의 경지에서 누구나 광명을 볼 수 있는데, 어찌 '보면서 그 누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가.' '봄(見)'과 '보지 않음(不見)'의 차별심에 떨어지면 봐도 보이지 않는다. 본래면목의 광명은 명암과 見과 不見의 차별을 초월한 경지에서 홀로 빛나는 것이다. 마치 '거꾸로 소를 타고 불전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일체 차별경계(중생심)를 초월한 절대의 세계(불심)에서 무애자재한 삶이 자기 광명이다.
[第087則]藥病相治
〈垂示〉垂示云。明眼漢沒窠臼。有時孤峰頂上草漫漫。有時鬧市裏頭赤灑灑。忽若忿怒那吒。現三頭六臂。忽若日面月面。放普攝慈光。於一塵現一切身。爲隨類人。和泥合水。忽若撥著向上竅。佛眼也覰不著。設使千聖出頭來。也須倒退三千里。還有同得同證者麽。試擧看。
〈本則〉擧。雲門示衆云。藥病相治。盡大地是藥。那箇是自己。
〈頌〉盡大地是藥。古今何太錯。閉門不造車。通途自寥廓。錯錯。鼻孔遼天亦穿卻。
벽암록 87칙 운문화상의 병(病)과 약(藥)
병 주고 약 주는 것은 다름 아닌 '본래 자기'
{벽암록} 제87칙은 운문화상이 대중들에게 무엇이 자기인가 문제를 제시했다. 운문화상이 대중에게 법문을 설했다. "약과 병이 서로 치료한다. 온 대지가 약이다. 무엇이 자기인가?"
擧. 雲門示衆云, 藥病相治. 盡大地是藥. 那箇是自己.
번뇌 망념은 병(病), 불법 지혜는 약(藥)
분별의식 비워야 완치판정 받아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 권중에 보이는 짧은 법문이지만, 최상의 선기를 설한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안목있는 훌륭한 의사의 올바른 진단과 처방은 환자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처방하여 병을 치료한다는 비유로 많이 설하고 있다. {불유교경}에 "나는 훌륭한 의사(良醫)와 같이 환자의 병을 잘 파악하고 약을 처방하는 것과 같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부처님은 중생들의 번뇌 망념의 심병(心病)을 지혜로 진단하고 법문을 설하여 불법의 진실을 깨닫도록 묘약을 제시하여 치료한다고 설한다.
사실 일체의 경전과 팔만사천 법문은 중생의 번뇌병을 치료한 지혜의 묘약인 것이다. {유마경} 불국품에는 "부처님은 대의왕이 되어 훌륭하게 중생들의 많은 병을 치료하시는데, 중생들의 병에 알맞은 약을 주어(應病與藥) 복용하도록 치료하여 무량한 공덕을 모두가 성취하도록 하신다"고 의사로 비유하고 있다. 또한 {법구비유경}에 호시(好施)장자를 위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법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횡사하는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자신의 병에 무관심하여 치료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의사의 치료를 받아도 의약처방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셋째는 모든 일을 자기중심 생각대로 멋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일월(日月)과 천지(天地), 군부선인(君父先人)도 그의 고통을 덜어주고 없애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 고통을 벗어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몸의 사대(四大)가 조화롭지 못하고 탈이 났을 대 솔직하게 의약을 복용해야 한다. 둘째는 악귀나 삿된 마구니(망념)에 시달릴 때는 경전의 가르침인 진리의 말씀을 받들어야 한다. 셋째는 위로는 훌륭한 성현을 받들어 모시고 아래로는 중생의 고난과 나쁜 재앙을 구제한다면 복은 일월 천신 지신에 감응하고, 덕은 일체 중생에 두루한다. 이렇게 진실의 지혜광명이 빛나게 될 때 일체 음참한 고뇌의 그림자는 남김없이 없어지고 안온하게 장수를 누릴 수가 있다." 약을 믿지 않고 천지자연의 신묘한 영험으로 치료하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장자의 마음을 바꾸어 몸을 치료받고 불법을 깨닫도록 한 이야기다.
또 {오왕경}에 "인신(人身)은 사대의 화합으로 이루어진다. 사대란 지수화풍(地水火風)인데, 어느 하나라도 조화롭지 못하면 101의 병이 생긴다. 사대가 함께 조화롭지 못하면 404의 병이 동시에 모두 생긴다"라고 설한다. 불교에서는 몸과 마음을 둘로 나누지 않고 하나로 보는 심신일여(身心一如)이기에 몸의 조화는 마음도 함께 하는 것이다. 번뇌 망념이 없이 마음의 안정과 평정이 심신(身心)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지수화풍 사대의 조화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사대가 조화롭지 못하면 병이 생기고, 사대가 흩어지면 죽음인 것이다.
운문화상의 설법은 "약과 병이 서로 치료한다(藥病相治)"는 중생의 번뇌 망념의 병은 불법의 지혜라는 묘약으로 치료하는 경전의 말씀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병이 없는 사람에게는 약이 필요 없다는 사고가 불법의 가르침이다. 임제의 설법에도 이와 똑같이 "산승의 설법은 모두 한때의 약과 병이 서로 치료하는 것을 설한 것이지, 전혀 실다운 법이란 없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약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방편이며, 병은 또한 약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병과 약은 이러한 상대관계에서만 성립된다. {백장광록}에 "부처는 바로 중생쪽의 약이다. 병이 없다면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 약과 병이 함께 없어진다"라고 설하고, 또 "대승의 가르침은 마치 감로와 같고, 독약과 같다. 완전히 소화하여 체득하면 감로와 같고, 녹여 소화하지 못하면 독약과 같다"라고 설한 것처럼, 약의 잔재는 부작용으로 또 다른 병을 만든다. 그래서 약과 병을 모두 함께 소멸하여 자취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
운문의 법문은 중생의 번뇌 망념은 병이고, 망념을 자각한 불심을 약이라고 설한 것인데, {조당집} 6권 동산장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다. "어떤 스님이 '병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동산은 '잠깐 일어나는 번뇌 망념이 병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약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일어난 번뇌 망념이 계속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약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선수행에서 번뇌 망념이 일어난 것이 병이고,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여 망념이 계속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약이라고 설한 대화이다. 그래서 약과 병이 서로 치료하고 약과 병이라는 의식의 자취도 완전히 없어진 경지가 약병상치이다.
{증도가}에 "번뇌 망상을 없애려고도 하지 않고, 진실을 구하려고도 하지 않네. 무명(無明)의 실성(實性)이 바로 불성(佛性)이다"라는 말이 있다. 없애려고 하는 마음도, 구하려고 하는 마음도 망념이다. 중생심과 불심은 둘이 아닌 불이(不二)며, 다르지 않은 불이(不異)인데, 하나를 없애고 하나를 추구하는 것은 또 다른 집착을 향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불심과 중생심, 번뇌와 깨달음, 약과 병에 대한 두 가지 상대적인 의식을 모두 함께 동시에 텅 비워 일체의 자취나 흔적도 없어진 경지로서 약과 병이 서로 치료된 본래의 상태가 된 것이 약병상치이다.
운문은 "온 대지가 약이다." 즉 우주 만물일체가 모두 하나의 평등한 깨달음의 약이 되었다고 한 말이다. 제법의 참된 실상은 진실 그 자체이며 깨달음의 세계이다. 이 말은 마지막으로 운문은 "무엇이 자기(自己)인가?"라고 문제 제기를 위한 전제이다. 즉 이미 약과 병이 혼연 일체가 된 일합상(一合相)으로 불가득이라면 온 대지가 약이라고 한 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말이다. 약이라고 해도, 병이라고 말해도 옳지 않다. 온 대지가 모두 약이라면 자기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운문은 이 한마디를 설하고 싶었던 것이다. 원오는 '평창'에 "지금 온 대지의 삼라만상과 자기까지도 모두 약이다. 이런 경우 무엇을 자기라고 하겠는가?"라고 문제제기하고, 그대가 그저 약인 줄만 안다면 알았다가 아무리 많은 세월을 수행해도 불법을 체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온 대지가 약과 하나가 되었다면 온 대지가 자기와 하나가 된 사실을 체득해야 한다고 주장한 법문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온 대지가 약이다" 운문의 말을 인용한 것인데, 온 대지가 약이라면 온 대지가 자기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고금(古今)에 왜 이처럼 그르치고 있나.'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체득하는 사람이 적고, 운문의 이 말을 잘못 이해하여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문닫고 수레를 만들지 말라' 이 말은 문을 닫고 수레를 만들어도 문밖에 나가면 길에 딱 맞다(閉門造車 出門合轍)는 고사를 인용한 것인데, 선에서는 안과 밖이 멋지게 합치된 경지를 읊고 있다. 여기서는 자기 본래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운문이 제시한 자기를 문제로 삼을 필요도 없다. 본래 그대로의 모습이 진실한 자기이기 때문에 좌선수행하여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도로는 본래부터 드넓게 뚫려 있다.' 본래의 자기 수레를 확 뚫려 어떤 장애도 없는 큰 도로에서 앞으로, 뒤로 자유롭게 운전하여 달리기만 하면 된다. 범성, 미오의 분별심의 자취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종횡무진 달리기만 하면 된다. '틀렸다! 틀렸다!' 운문화상이 '온 대지가 약'이라고 한 말도 틀렸고, '무엇이 자기인가'라는 한 말도 틀렸다고 설두는 고함쳤다. '콧대를 하늘 높이 세웠지만, 콧대가 꺾였다.' 운문화상이 '온 대지가 약이고, 무엇이 자기인가'라고 주장한 것은 본래면목을 전부 들어낸 전제로서 콧대를 높이 세운 운문의 뛰어난 안목으로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경지였다. 설두는 틀렸다고 주장하며 그러한 운문의 콧대를 꺾어버렸다.
[第088則]玄沙三病
〈垂示〉垂示云。門庭施設。且恁麽。破二作三。入理深談。也須是七穿八穴。當機敲點。擊碎金鎖玄關。據令而行。直得掃蹤滅跡。且道[言+肴]訛在什麽處。具頂門眼者。請試擧看。
〈本則〉擧。玄沙示衆云。諸方老宿。盡道接物利生。忽遇三種病人來。作麽生接。患盲者。拈鎚豎拂。他又不見。患聾者。語言三昧。他又不聞。患啞者敎伊說。又說不得。且作麽生接。若接此人不得。佛法無靈驗。僧請益雲門。雲門云。汝禮拜著。僧禮拜起。雲門以拄杖挃。僧退後。門云。汝不是患盲。復喚近前來。僧近前。門云。汝不是患聾。門乃云。還會麽。僧云。不會。門云。汝不是患啞。僧於此有省。
〈頌〉盲聾瘖啞。杳絶機宜。天上天下。堪笑堪悲。離婁不辨正色。師曠豈識玄絲。爭如獨坐虛窗下。葉落花開自有時。復云。還會也無。無孔鐵鎚。
벽암록 제88칙 현사화상의 세 가지 병
"보고듣고 말한다고 다 같은 경계가 아니다"
{벽암록} 제88칙은 현사사비(師備)화상이 귀머거리, 봉사, 벙어리 세 가지 병을 가진 사람에게 어떻게 불법을 설해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기했다.
현사화상이 대중들에게 법문을 하였다. "제방 총림의 노스님들이 여러 중생들을 제접하고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법문을 한다고 하지만, 갑자기 귀머거리, 봉사, 벙어리가 찾아왔을 때는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 눈먼 봉사에게 망치방망이를 들고, 불자를 들어 보여도 그는 볼 수 없다. 귀머거리는 일체의 언어로 설법해도 들을 수가 없다. 벙어리는 말을 하도록 시켜도 말을 하지 못한다. 세 가지 병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제접해야 할까? 만약 이를 제접하지 못한다면 불법은 영험이 없는 것이다."
어떤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이 공안을 제시하고 법문을 청하자, 운문선사는 "그대는 절을 하라!"라고 했다. 스님이 절을 하고 일어나자, 운문선사는 그를 주장자로 밀쳐버렸다. 스님이 뒷걸음치자, 운문선사가 말했다. "그대는 눈이 멀지는 않았군!" 다시 그를 불러 가까이 오라하여 스님이 다가오자, 운문선사가 말했다. "귀머거리는 아니군!" 운문선사가 "알았는가?"라고 했다. 스님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니, "그대는 벙어리는 아니군!"이라고 말하자 그 스님은 이 말에 깨달았다.
擧. 玄沙示衆云, 諸方老宿, 盡道接物利生. 忽遇三種病人來, 作生接. 患盲者, 拈鎚拂, 他又不見. 患聾者, 語言三昧, 他又不聞. 患啞者敎伊說, 又說不得. 且作生接, 若接此人不得, 佛法無靈驗. 僧請益雲門. 門云, 汝禮拜著. 僧禮拜起. 雲門以杖, 僧退後, 門云, 汝不是患盲. 復喚近前來, 僧近前. 門云, 汝不是患聾. 門乃云, 還會. 僧云, 不會. 門云, 汝不是患啞. 僧於此有省.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에서 인용한 것인데, 현사의 법문은 {현사광록} 중권, {전등록} 18권 현사전에 수록하고 있다. 현사사비 화상은 복주 현사산에서 교화를 펼친 종일(宗一, 835~908)선사인데, 운문선사와 마찬가지로 설봉의존의 선법을 계승한 뛰어난 선승이다.
현사화상이 대중들에게 "전국의 총림에서 훌륭한 선지식이 많은 수행자들을 제접하고 중생들을 깨닫도록 법문을 한다고 하지만, 갑자기 귀머거리, 봉사, 벙어리가 찾아왔을 때는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 만약 봉사에게 망치방망이(槌砧)를 들거나, 불자(拂子)와 같은 도구를 들어 보여도 그는 볼 수 없다. 또한 귀머거리는 어떠한 말로 설법해도 들을 수가 없다. 벙어리는 말을 하도록 시켜도 말을 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병을 가진 사람에게 어떻게 불법을 가르쳐야 할까? 만약 이들에게 불법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불법은 영험이 없는 것이다"라고 학인들에게 참구할 문제를 제시한 법문이다.
이 공안에 대하여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코멘트하고 있다. [현사화상이 제시한 3종 병인(病人)을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유마경}에 "눈으로 사물(色)을 보아도 봉사와 같으며, 귀로 소리를 들어도 귀머거리와 같다"고 했다. 또한 장사선사는 "눈으로 사물(色)을 보지 못하고, 귀로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문수보살은 항상 눈으로 보고, 관음보살은 귀를 틀어막는다" 고 하였다. 여기에 이르러 눈으로 보아도 봉사와 같으며, 귀로 들어도 귀머거리와 같아야 현사화상의 의도와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중생심으로 소리를 듣고 사물을 보면 좋고 나쁜 감정이 일어나지만, 불심으로 무심의 경지에서는 일체의 감정과 차별심이 일어나지 않고, 산에 울리는 메아리와 같이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고, 들어도 취사선택하는 분별과 애증(愛憎)의 차별심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경지를 봉사와 같고 벙어리와 같다고 한다. 말하자면 현사화상은 당시 안목없는 엉터리 선승들이 다른 선사들의 기발한 언행을 흉내내고 불법의 근본을 알지 못하는 눈먼 환자(患盲者)로, 다른 선사들의 좋은 법문을 흉내내는 귀머거리 환자(患聾者)로, 독자적인 방편의 지혜가 없어 불법을 설하지 못하는 벙어리 환자(患啞者)로 비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사의 3종 병에 대한 법문은 오해하기 쉽고, 파악하기 어려운 공안으로 많은 선승들이 참구하고 있다. {조당집}과 선승들의 법문에 자주 제기하여 학인들에게 참구하도록 하고 있는데, 본칙은 어떤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이 공안을 제시하고 법문을 청한 내용이다.
운문선사는 "그대는 이 공안의 핵심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절을 하라!"라고 말하자, 스님은 시키는 대로 공손히 절을 하였다. 원오는 착어에 "바람이 부는 대로 풀이 쏠린다. 쯧쯧()"이라고 착어한 것처럼, 남이 시키는 대로 따라하는 한심한 녀석이라고 질타했다. 그 스님이 절을 하고 일어나자, 운문선사는 그를 주장자로 밀쳐버렸다. 주장자는 본분을 대신한 도구인데, 이 스님은 자기의 본분을 망각한 것을 운문이 질타한 것이다. 스님은 운문선사가 주장자로 밀자 주장자를 보고 뒷걸음쳤다.
운문선사는 이러한 스님의 행동을 보고서 말했다. "그대는 주장자를 보고 몸을 피하는 것을 보니 눈먼 녀석은 아니군!" 운문선사는 다시 그 스님을 불러 가까이 오라하니, 스님은 안심하고 다가왔다. 그러자 운문선사가 말했다. "그대를 부르면 대답하는 그대의 본래인은 귀머거리가 아니군!" 운문선사가 그 스님에게 그대의 본래주인공이 귀머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는가?'라고 다그쳐 물었다. 그런데 그 스님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모르겠다고 말하는 그 한마디의 확인으로 운문선사는 "그대의 본래인은 역시 벙어리도 아니군!" 이라고 말했다.
그 스님은 운문선사의 이 말을 듣고 깨달았다. 이 스님뿐만 아니라 이 공안을 읽는 사람은 운문선사의 지시는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대화에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고 지혜작용을 펼치는 주인공이 본래면목이며, 일체의 병이 없는 약을 제시한 법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현사화상이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삼종병을 제시한 것은 '상황에 맞는 대응(機宜)이 완전히 끊어졌다.'
근원적인 본래면목의 경지로서 부모미생 이전의 소식으로 일체의 사량분별과 언어 문자의 방편을 초월한 입장이다. '천상천하' 널리 세간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눈이 멀고 귀가 먹고, 입이 벙어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고', 눈이 있으나 보질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고, 입이 있으나 말하지 못하면 '불쌍한 것이다.' '이루(離婁)도 본래의 색깔(色)을 분별하지 못하는데,' 이루는 {장자} 천지편에 나오는 이주(離朱)로 태고 황제 때의 사람인데, 백보 밖에서도 터럭 끝을 보는 시력을 가졌다. 이루와 같이 아무리 강력한 육안을 가졌다고 해도 불법의 바른 색깔(본지풍광)을 볼 수 있겠는가? 불법은 원래 색깔을 여의고 형상을 초월했기 때문에 본래 볼 수 있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사광(師曠)인들 어떻게 현묘한 음률(玄絲)을 알 수 있으랴.'
사광은 진(晋)의 평공(平公) 때 사람으로 음악의 대가인데, 음률을 잘 듣는 귀가 발달하여 산 너머 개미 싸우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불법의 유현하고 미묘한 묘음(妙音)을 들을 수가 있겠는가? 이루와 사광과 같은 시력, 청력이 특출한 사람이라도 불법의 궁극적인 진리는 알 수 없으며, 참된 소경과 귀머거리가 된 무심의 경지가 아니면 정법의 색깔과 미묘한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고 한 말이다.
'툭 트인 창 아래 홀로 앉아 시절 따라 낙엽지고 꽃피는 것만 같겠는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려고 하기보다, 텅 빈 창 아래서 앉아 무엇을 보려고 하지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사계절의 질서 있는 변화와 법신의 여여한 모습을 보여주고 설법을 끊임없이 해 줄 것이다. '다시 말하노니, 알겠는가.' 설두는 독자들에게 "이 공안의 참된 의미를 그대는 체득했는가"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구멍 없는 철추로다"라는 한마디를 던졌다. 구멍이 없기에 손을 쓸 수가 없는 쇳덩어리처럼, 현사의 3종병 공안도 사량분별로서는 접근할 수가 없다. 무심의 경지에서 체득해야 한다.
[第089則]通身手眼
〈垂示〉垂示云。通身是眼見不到。通身是耳聞不及。通身是口說不著。通身是心鑒不出。通身卽且止。忽若無眼作麽生見。無耳作麽生聞。無口作麽生說。無心作麽生鑒。若向箇裏撥轉得一線道。便與古佛同參。參則且止。且道參箇什麽人。
〈本則〉擧。雲巖問道吾。大悲菩薩。用許多手眼作什麽。吾云。如人夜半背手摸枕子。巖云。我會也。吾云。汝作麽生會。巖云。遍身是手眼。吾云。道卽太殺道。只道得八成。巖云。師兄作麽生。吾云。通身是手眼。
〈頌〉遍身是。通身是。拈來猶較十萬里。展翅鵬騰六合雲。搏風鼓蕩四溟水。是何埃壒兮忽生。那箇毫釐兮未止。君不見。網珠垂範影重重。棒頭手眼從何起。咄。
벽암록 제89칙/관음보살의 천수천안
“몸뚱아리 중 소중하지 않은 것 있더냐”
{벽암록} 제89칙은 운암화상과 도오화상이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을 주제로 다음과 같은 선문답을 나누고 있다.
운암화상이 도오화상에게 물었다. "대비보살이 수많은 손과 눈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요?" 도오화상이 말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밤중에 손으로 목침을 더듬는 것과 같다." 운암이 말했다. "나는 알았소." 도오화상이 말했다. "그대는 어떻게 알았다는 것인가?" 운암이 말했다. "전신(遍身)이 손이요 눈입니다." 도오화상이 말했다. "말을 잘했지만, 10에서 단지 8할 정도 맞는 말이다." 운암이 말했다. "사형은 어떻습니까?" 도오화상이 말했다. "온몸 전체가 바로 손이고 눈이다."
擧. 雲巖問道吾, 大悲菩薩, 用許多手眼作什. 吾云, 如人夜半背手摸枕子. 巖云, 我會也. 吾云, 汝作生會. 巖云, 遍身是手眼. 吾云, 道卽太殺道, 只道得八成. 巖云, 師兄作生. 吾云, 通身是手眼.
본칙의 공안은 {조당집} 5권 도오장과, {전등록} 14권 운암장에 전하고 있는데, 질문자가 운암이 아니라 도오화상이다. 도오원지(道悟圓智:769~835)는 이미 {벽암록} 55칙에, 운암담성(雲巖曇晟: 782~841)은 70칙에 등장한 선승인데, 모두 약산유엄선사의 제자이다. 원오는 '평창'에 "운암은 도오와 함께 약산선사를 참문하고 40년 동안 눕지 않고 정진하였다.
약산선사는 조동종(曹洞宗)이라는 한 종파를 출현하게 했는데, 거기에 3인이 있어 법도가 성행했다. 운암선사 문하에 동산양개(洞山良价), 도오선사 문하에 석상경제(石霜慶諸), 선자덕성(船子德誠)선사 문하에 협산선회(夾山善會)가 배출되었으니 바로 그들이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도오와 운암은 약산문하를 대표하는 뛰어난 선승들이다.
원오는 또 "대비 관세음보살은 8만 4천 모타라비(母陀羅臂:印相:mudra)가 있고 수많은 손과 눈이 있다. 그대에게도 있느냐? 백장선사는 '일체의 언어 문자는 모두 돌이켜 자기에게로 귀결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면서 공안의 사유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천수경}에서 대비관세음보살은 천개의 자비 손과 천개의 지혜 눈으로 다양한 중생들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서 수많은 지혜작용을 제시하고 있다고 경전에서 설하고 있다.
관음보살과 미묘한 지혜작용을 단순히 경전에서 설한 말씀이라고 객관적인 대상으로 이해해서 안 된다. 백장선사가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나 자신이 관음보살이 되고 천수천안 지혜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임제록}에도 '대비보살의 천수안(千手眼) 가운데 어떤 것이 정안(正眼)인가?'라는 질문으로 선문답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 선승들의 안목을 점검하는 문제로 거론되고 있었다.
본 공안도 운암화상이 도오선사의 안목을 점검하는 문제로 "관세음보살은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갖고 있다는데, 그렇게 많은 손과 눈으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이다. 즉 도오선사여! 그대는 관음보살의 천수천안의 미묘한 지혜작용을 체득했는가? 체득했다면 천수천안의 미묘한 지혜를 어떻게 체득하여 활용하는지 말해보라고 도오선사의 경지를 시험해보기 위한 낚시 바늘이다.
원오는 운암의 질문에 "그대는 평소 여기 저기 뛰어 다니면서 무엇을 하였는가?"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그대는 일상생활의 행주좌와 모든 행동이 그대로 천수천안의 지혜작용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대비보살이 달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 자신이라고 지적한 말이다.
운암의 질문에 도오선사는 "마치 어떤 사람이 밤중에 손으로 목침을 더듬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즉 잠자리에 몸부림 많이 치는 사람이 잠시 잠에서 깨어나 목침이 없어졌음을 알고, 깜깜한 밤중에 손을 더듬어서 목침을 찾아 처음 잠잘 때처럼, 다시 목침을 베고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과 같다고 대답한 것이다. 손이 바로 눈이라고 말한 것이다. 운암이 "나는 알았소."라고 말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그대로군요. 도오선사가 "그대는 어떻게 알았다는 말인가?"라고 다그치며 물었다.
운암은 "신체 중(身)에 손이 있고 눈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원오는 "불법 사상과 맞지 않고, 지혜작용이 없는 말이며, 진흙 속에서 흙덩이를 씻는다."라고 신랄하게 꾸짖고 있다. 도오선사는 "이치로는 그럴듯하게 말했지만, 10에서 단지 8할 정도 맞는 말이다."라고 비평했다. 운암이 "사형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질문했다. 즉 자신의 견해에 대해 도오선사는 8할 정도 인정하였기에, 10점 만점의 안목은 어떤 경지인가라고 질문한 것이다. 도오선사는 "온몸 전체가 바로 손이고 눈이다(通身是手眼)"이라고 대답했다.
운암이 '편신(身)'이라고 대답한 것은 8점이고, 도오가 '통신(通身)'이라고 대답한 것은 10점 만점이다. 편신(身)은 눈과 손의 움직임과 같이 몸의 일부가 작용하는 것을 말하고, 통신(通身)은 온몸 전체가 눈이 되고 손이 되는 것처럼, 하나가 되어 작용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굳이 다른 점을 논해 본다면 편신(身)은 평면적, 외연적이라면, 통신(通身)은 입체적 내포적이라고 할까?
그러나 {조당집} 5권 도오전에는 신산(神山)이 "혼신(渾身)이 바로 눈"이라 대답하고 있다. 또 10권 경청장에는 "어떻게 처처에서 그를 상봉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경청은 "온 몸(遍身)이 눈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처럼, 통신(通身), 편신(身), 혼신(渾身), 편신(遍身)은 같은 의미라고 봐야 한다.
{벽암록} 18칙과 '수시'에 "온 몸이 바로 눈"이라고 말한 것처럼, 온 몸 전체가 손이 되고 눈이 된 경지에서 지금 여기 자신의 지혜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손뿐만 아니라 다리나 머리도 눈이 되는 것처럼, 온 몸 전체가 원통하고 무애자재한 지혜를 펼치는 천수천안의 관음보살의 묘용이다. 손이 1000개, 눈이 1000개라 할지라도 어느 하나의 손과 눈에 마음이 쏠리고 머무르면 999개의 손과 눈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마음을 어느 하나의 손과 눈에 머무르지 않는 무주(無住), 무심의 경지에서 1000개의 손과 눈이 자유자재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장자}의 백족(百足, 지네)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무심의 경지에서 온몸을 자유롭게 움직여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할 때 편안하고 지혜로운 삶이 되는데, 괜히 번뇌 망념을 일으켜 중생심으로 분별 의식을 일으키면 불심의 지혜로운 생활이 죽어버린다.(死人)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전신(身)이 옳은가. 온몸(通身)이 옳은가?" 본칙의 공안에서 운암의 대답이 옳은가, 도오의 대답이 옳은가?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시비 분별하면 10만 리나 멀어진다." 그러나 설두는 편신(身)이나 통신(通身)은 같은 말로 그러한 언어문자를 시비로 삼으면 천수천안 관음보살의 지혜와는 멀어진다. "나래치는 붕새는 천지 사방(六合)의 구름위에 날고," 운암의 지혜작용을 {장자}의 붕새에 비유하여, 한번의 날개짓에 천지를 뒤덮는 것과 같았다.
"회오리 바람은 깊은 바다(四溟水)를 들끓게 하네." 도오의 견해는 사해(四海)의 바닷물을 일시에 동요시키는 큰 역량을 갖춘 안목이다. 두 사람 견해의 우열은 논한다는 것은 어렵다. "웬일로 먼지가 갑자기 생기는가?" 운암의 지혜가 대붕과 같이 웅대하지만, 관음보살의 천수천안 활약에 비교하면 한 점의 티끌이 공중에 날리는 것과 같다. "무슨 일로 가는 털은 어찌 멈추지 않는가?" 또한 도오의 지혜도 훌륭하지만, 관음 대비의 광대무변한 원력에 비교하면 미세한 터럭이 불과하다. 전신이니 온몸이라는 차별심으로 대비관음의 천수천안을 친견할 수가 없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제석천의 구슬로 법을 드리우니 겹겹이 그림자 쌓이는 것을."
{화엄경}에 도리천에 구슬로 엮은 주련이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에 수천 수만의 구슬이 서로서로 비추어 전부 하나의 구슬 가운데 비춘다는 중중 무진의 법계를 비유하고 있다. 온 시방세계가 하나의 구슬이며, 천수천안의 무애자재한 경지이다. "주장자 끝의 손과 눈이 어디에서 일어날까?" 대비보살의 천수천안 지혜는 덕산이 주장자를 휘두르는 것과 같고, 임제가 고함치는 것 같이 일체의 모든 도구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이며, 밤중에 목침을 찾아 편히 잠자는 것이다. "쯧쯧()." 말이 많았군!
[第090則]蚌含明月
〈垂示〉垂示云。聲前一句千聖不傳。面前一絲長時無間。淨裸裸赤灑灑。頭髼鬆耳卓朔。且道作麽生。試擧看。
〈本則〉擧。僧問智門。如何是般若體。門云。蚌含明月。僧云。如何是般若用。門云。免子懷胎。
〈頌〉一片虛凝絶謂情。人天從此見空生。蚌含玄免深深意。曾與禪家作戰爭。
벽암록 제90칙 지문(智門)화상과 반야지혜의 본체
반야지혜의 무분별지 體.用으로 잰들…
{벽암록} 제90칙은 지문화상에게 반야지혜의 본체와 작용에 대한 질문을 하며, 다음과 같이 선문답을 나누고 있다.
어떤 스님이 지문화상에게 질문했다. "어떤 것이 반야지혜의 본체입니까?" 지문화상이 대답했다. "대합조개가 밝은 달을 삼킨다." 스님은 질문했다. "무엇이 반야지혜의 작용입니까?" 지문화상이 대답했다. "토끼가 새끼를 잉태했다."
擧. 僧問智門, 如何是般若體. 門云, 蚌含明月. 僧云, 如何是般若用. 門云, 兎子懷胎.
본체는 작용을 떠나지 않고
작용은 본체를 여의지 않아
본칙의 공안은 {고존숙어록} 제39권에 수록된 {지문광조선사어록}에 전하고 있는 선문답인데, {벽암록} 제21칙 본칙의 평창에도 인용하고 있다. 지문광조(智門光祚)화상은 운문문언선사의 제자로서 그의 전기는 {광등록} 22권, {속등록} 2권, {연등회용} 27권 등에 전하고 있는데, 사천성 향림원 징원(澄遠)선사를 참문해 법을 잇고 뒤에 호북성 수주 지문사에서 선법을 펼쳤다. 그의 문하에 설두중현 등 30여명의 훌륭한 선지식이 배출됐다.
본칙의 선문답은 반야 지혜의 본체(體)와 작용(用)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반야란 일체의 사량분별이 없는 불심의 지혜이다. 반야(prjna)는 여성명사로 생산능력이 있는 말인데, {유마경}에 "반야바라밀(智度)은 보살의 어머니(母)이며, 방편을 아버지(父)로 한다"라고 설하고 있다. 불법을 깨달은 지혜의 완성을 어머니로 하는 것은 반야바라밀의 실천으로 부처의 성도(成道)가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야지혜의 보살인 문수를 제불을 출현시키는 어머니라고 한다.
{대지도론} 18권에 반야바라밀은 모든 보살이 초발심에서 일체의 지혜를 구하며 일체 만법의 참된 모습(諸法實相)을 깨달아 아는 지혜라고 설하며, 또 반야는 일체의 모든 지혜 가운데 제일이고 한다. 대승불교는 공(空)과 반야를 같이 주장하고 있는데, 반야의 지혜는 일체의 번뇌 망념을 텅 비우는 空(sunya)의 실천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생심 번뇌 망심을 텅 비워진 그대로가 불심으로 반야의 지혜가 일체의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여법(tatha)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대승의장} 10권 등에 반야는 실상(實相), 관조(觀照), 문자(文字)반야의 세 가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실상은 반야의 본체(體)로서 견고해 파괴할 수가 없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본래 구족하고 있는 불심인 것이다. 관조의 작용은 지극히 예리한 것으로 일체의 번뇌 망념을 타파하는 불심의 지혜광명이다. 문자반야는 이러한 반야지혜의 이치를 언어 문자로 표현하여 만고에 전하고 사람들이 반야지혜를 체득하도록 하는 경전이다. 반야지혜의 한마디와 짧은 문장을 설하여 세간의 등불이 되고 무명을 제거하여 해탈인이 되도록 하기 때문에 문자반야라고 한다. 실상반야는 마음의 본체로서 밝은 거울과 같음을 본체로 하고, 삼라만상의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무심하게 비추는 작용을 관조반야라고 하며, 그러한 사실을 언어문자로 표현한 것을 문자반야라고 한다.
여기서는 반야지혜의 본체와 작용을 문제로 제시하고 있는데, 반야사상의 체(體)와 용(用), 화엄사상의 이(理)와 사(事), 유식사상의 성(性)과 상(相)의 논리는 중국불교의 각 종파의 철학체계를 확립한 핵심적인 사상이었고, 논리가 빈약한 중국인들의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선사상은 반야의 체용(體用), 화엄법계의 이사(理事), 불성과 유식의 성상(性相)의 논리를 불심의 지혜와 작용으로 소화시켜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대화나 지혜로 활용하고 있다. {종경록} 45권에는 "선정은 자심(自心)의 본체요, 지혜는 자심의 작용이다. 선정이 곧 지혜이기 때문에 본체는 작용을 떠나지 않고, 지혜가 곧 선정이기 때문에 작용이 본체를 여의지 않는다. 지혜와 선정 이 둘이 서로서로를 차단하면 함께 없어지고, 이 둘이 서로 서로를 비추면 함께 존재한다. 본체와 작용이 서로 서로 성립되면 차단함과 비춤에 걸림없이 무애하리라. 이러한 선정과 지혜 두 법이 참선수행의 요체이며 조불(祖佛)의 큰 뜻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지문화상에게 "어떤 것이 반야지혜의 본체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지문화상은 "대합조개가 밝은 달(明月)을 삼킨다"라고 대답했다. 원오는 '평창'에 "이 말은 한강에서 생산되는 조개 속에 맑은 진주가 있는데, 중추절이 되면 수면으로 떠올라 입을 벌리고 달빛을 빨아들여 교감(交感)되어 진주가 생긴다고 한다. 합포주(合浦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중추절에 달이 뜨면 진주가 많이 나오고 달이 뜨지 않으면 진주가 적게 나온다고 한다"고 했다. 강주 합포(合浦)라는 곳의 대합조개(蚌蛤)는 진주를 안고 있는데, 8월15일 밤에 조개가 명월(明月)의 정기를 받아서 진주가 된 것이라는 전설이 {조정사원} 8권과 {본초강목(本草綱目)} 등에도 전하고 있는데, 이러한 전설을 토대로 지문화상은 진주가 명월을 삼키고 있다고 대답했다. 반야의 본체에 대한 질문에 명월(明月)과 조개는 별다른 의미가 없지만, 명월이 창공에서 무심하게 비추고, 조개도 무심하게 명월을 머금고 있는 모습을 말한다.
스님은 다시 "무엇이 반야지혜의 작용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지문화상은 "토끼가 새끼를 잉태했다"라고 대답했다. 원오는 '평창'에 "토끼는 음(陰)에 속한 동물이다. 중추절에 달이 뜨면 입을 벌려 달빛을 삼키고 바로 새끼를 잉태하여 입으로 낳는다하니 이 또한 달이 뜨면 새끼가 많고, 없으면 적게 낳는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토끼 역시 8월 15일 밤에 달을 향해 입을 열고 달의 정기를 받아 새끼를 잉태한다는 전설을 토대로 대답한 것이다. 질문자는 반야를 본체와 작용으로 나누고 있지만, 지문화상은 체용(體用) 일체의 입장에서 대답한 것이다. 8월15일 강물 속의 조개가 밝은 달이 무심하게 비추는 달빛을 삼키어 진주를 만들고, 토끼는 새끼를 잉태하였다는 속설로 대답했는데, 밝은 달의 광명이 무심하게 만물을 비추는 모습을 말한다. 즉 반야 무분별지가 일체의 사량분별을 초월하여 역력하고도 분명하게 나타나 작용하고 있는 모습을 비교해서 대답했다. 마치 밝은 거울이 무심하게 일체의 만물을 차별심과 분별심도 없이 무심하게 비추는 것과 같이 청정한 불심이 반야의 본체이고, 무심하게 지혜를 비추는 것을 반야의 작용이기 때문에 체와 용이 둘로 나눌 수가 없고 하나가 된 경지이다. {조당집} 15권에 반산선사는 이러한 경지를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마음 달 홀로 원명하니, 그 빛이 만상을 삼킨다. 빛은 경계를 비추지 않고, 경계 또한 존재하지 않으며, 빛과 경계 함께 잊으니 도대체 이것은 어떤 물건인가?"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한 덩어리 맑고 투명한 것(달)은 언어와 정식(情識)이 붙을 수가 없다" 반야의 체와 용을 모두 다 송출했다. 허(虛)는 허령불매(虛靈不昧)로 인간 본심(불심)의 신령스러운 지혜의 광명이 무애자재한 것이고, 응(凝)은 응적(凝寂)의 의미로 본심의 영광(靈光, 지혜작용)이 항상하여 변함이 없으면서도 외부의 힘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읊은 것이다. 즉 중생의 사량 분별심과 정식이 일체 끊어진 불심은 반야의 본체로서 부동이며, 지혜의 광명은 신령스럽게 시방삼세를 두루 비추고 있다. "인간과 천신이 이로부터 수보리(空生)를 본다" '평창'에도 언급한 것처럼,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가 좌선하고 있는데, 범천이 꽃비를 내린 이야기이다. 수보리가 반야에 대하여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지만, 반야의 체와 용을 설했다고 찬탄한 사실을 파악한다면 지문화상이 대답한 말의 의미를 체득할 수 있다.
지문화상이 "조개는 달빛을 삼키고, 토끼는 새끼를 잉태했다고 대답한 깊고 깊은 뜻" 지문화상의 대답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조개가 달(토끼)을 삼켰다고 한 것은 조개와 토끼로 반야의 체와 용이 둘이 아닌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멋지게 비유하여 대답한 것이다. "일찍이 선승들은 한바탕 법전을 펼쳤다" 지문화상의 의미 있는 대답은 선가의 수행자들이 서로 서로 법전을 하면서 참구하였지만, 지문화상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안목 있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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