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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6) 51칙 ~ 60칙

벽암록 51칙 설봉화상과 두 스님 “깨달음은 같아도 교화하는 방법은 다르다” {벽암록}제51칙은 설봉의존화상을 참문한 두 스님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擧. 雪峰住庵時, 有兩僧來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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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051則]要識末句後
〈垂示〉垂示云。纔有是非。紛然失心。不落階級。又無摸索。且道放行卽是。把住卽是。到這裏。若有一絲毫解路。猶滯言詮。尙拘機境。盡是依草附木。直饒便到獨脫處。未免萬里望鄕關。還搆得麽。若未搆得。且只理會箇理成公案。試擧看。
〈本則〉擧。雪峰住庵時。有兩僧來禮拜。峰見來。以手托庵門。放身出云。是什麽。僧亦云。是什麽。峰低頭歸庵。僧後到巖頭。頭問。什麽處來。僧云。嶺南來。頭云。曾到雪峰麽。僧云。曾到。頭云。有何言句。僧擧前話。頭云。他道什麽。僧云。他無語低頭歸庵。頭云。噫我當初悔不向他道末後句。若向伊道。天下人不奈雪老何。僧至夏末。再擧前話請益。頭云。何不早問。僧云。未敢容易。頭云。雪峰雖與我同條生。不與我同條死。要識末句後。只這是。
〈頌〉末後句爲君說。明暗雙雙底時節。同條生也共相知。不同條死還殊絶。還殊絶。黃頭碧眼須甄別。南北東西歸去來。夜深同看千巖雪。

벽암록 51칙 설봉화상과 두 스님

“깨달음은 같아도 교화하는 방법은 다르다”


{벽암록}제51칙은 설봉의존화상을 참문한 두 스님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擧. 雪峰住庵時, 有兩僧來禮拜. 峰見來, 以手托庵門, 放身出云, 是什. 僧亦云, 是什. 峰, 低頭歸庵. 僧後到巖頭. 頭問, 什處來. 僧云, 嶺南來. 頭云, 曾到雪峰. 僧云, 曾到, 頭云, 有何言句. 僧擧前話. 頭云, 他道什. 僧云, 他無語低頭歸庵. 頭云, 噫, 我當初悔, 不向他道末後句. 若向伊道, 天下人不奈雪老何. 僧至夏末, 再擧前話請益,. 頭云, 何不早問. 僧云, 未敢容易. 頭云, 雪峰雖與我同條生, 不與我同條死. 要識末後句, 只這是.


매화와 벚꽃 다르듯 모양과 작용이 달라
말후구(末後句)는 불법을 체득한 한마디

설봉화상이 암자에 있을 때 두 스님이 찾아와서 예배를 하자, 설봉화상은 그들을 보고 손으로 암자의 문을 열고 몸을 내밀면서 말했다. "뭐야!?" 스님도 역시 "뭐야!" 라고 말했다. 설봉은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갔다.

스님은 뒤에 암두화상의 처소에 이르자, 암두화상이 "어디서 오는가?"라고 물었다. 스님은 말했다. "영남에서 왔습니다." 암두화상은 "설봉화상을 찾아갔었는가"라고 물었다. 스님은 "예. 갔다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암두화상은 물었다. "설봉이 무슨 말을 했는가" 스님은 지난날에 있었던 대화를 말씀드리자, 암두화상이 말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더냐" 스님은 말했다. "설봉화상은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갔습니다." 암두화상이 말했다. "아아!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게 불법의 궁극적인 한 말(末後句)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럽다. 만약 그에게 말후구(末後句)를 일러 주었더라면 천하 사람들이 설봉을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스님은 하안거 끝에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들어내어 (암두화상께)법문을 청했다. 암두화상은 말했다. "왜 진작 묻지 않았는가" 스님은 "감히 쉽게 여쭙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암두화상은 말했다. "설봉이 나와 똑같이 한줄기에서 태어났지만(生) 나와 똑같이 죽지(死)는 않는다. 불법의 궁극적인 한 말(末後句)을 알고자 하는가. 단지 이것뿐이다."

이 공안은 {조당집}제7권 암두장과 {오등회원}제7권 설봉장에 전하고 있다. 설봉과 암두는 덕산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으로 {벽암록} 22칙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암두의 교시에 의해 설봉이 오산(鼇山)에서 깨닫고 성도를 하게 되었다. 설봉화상이 영남의 암자에 은거하고 있을 때는 당나라 무종(武宗)의 회창(會昌)5년 폐불사건으로 천하의 사찰을 훼손하고 26만500명의 승려를 환속시킨 일대 법난의 시기였다. 당시 동문인 암두전활(巖頭全豁)선사는 악저호(鄂渚湖)라는 호수에서 뱃사공으로 은거하며 살고 있었다.

설봉화상이 암자에 있는데 두 스님이 찾아와서 참문하자, 설봉화상은 그들을 보고 손으로 암자의 문을 열고 뛰어 나와서 "뭐야!?"라고 묻자, 그 스님들도 역시 "뭐야!" 라고 말했다. 원오는 '화살촉이 서로 마주쳤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설봉과 두 스님의 지혜작용(機鋒)이 일치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자 '설봉은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갔다.' 원오도 '진흙 속에 가시가 있다. 설봉의 기봉에 손 쓸 수가 없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설봉은 임제의 고함이나 덕산의 방망이처럼 격렬한 선기를 들어내지는 않았지만 깊은 선지(禪旨)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일단은 마치 {무문관} 제13칙에 설봉이 덕산선사에게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도 치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를 가느냐고 다그치는 한마디에 덕산은 말없이 방장실로 되돌아갔다는 내용과 갔다.

그 스님은 뒤에 암두화상의 처소에 이르자, 암두화상은 "어디서 오는가" 라고 물었다. 암두의 물음은 스님들이 어느 지방에서 왔는가를 묻는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그들의 수행 정도를 파악하기 위한 말이다. 그 스님은 "영남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암두화상은 "설봉화상을 찾아갔었는가?"라고 물었다. 암두화상은 영남지방의 선지식으로 활약하고 있는 유명한 설봉화상을 친견하고 왔는가 확인하고 있다. 단순히 설봉의 얼굴을 친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설봉의 진의(眞意)와 정법의 안목을 친견했는가를 묻고 있다. 그 스님은 "예, 찾아뵙고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원오는 '진실한 사람 만나기 어렵다. 차별(양변)에 떨어졌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설봉의 처소에 이르렀다는 대답은 벌써 양변의 차별적인 견해에 떨어진 것이라고 평했다. 본래의 근본당처(불심)에 도달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은 이전과 지금으로 논의하거나 사량분별할 장소가 아닌 것이다. 선의 종지로 한방 먹인 것이다.

암두화상은 "설봉이 무슨 말을 했는가?"라고 묻자, 스님은 지난날에 설봉화상을 참문한 일과 그 당시의 대화를 말씀드렸다. 암두화상은 "설봉이 무슨 말을 했는가?" 라고 묻자, 스님은 "당시 설봉화상은 말도 없이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갔습니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정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암두화상은 "아아!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게 불법의 궁극적인 한마디(末後句)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럽다. 내가 그때 그에게 말후구(末後句)를 일러주었더라면 천하 사람들이 설봉을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한마디가 본칙 공안의 핵심이며, 진실로 자비심이 깊은 암두의 인격이 들어나고 있다. 왜냐하면 스님이 설봉을 참문했을 때, 설봉이 "뭐야!"라고 말하자, 스님도 "뭐야!"라고 응답하자, 설봉이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갔다고 한 말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암두는 "설봉은 나와 같이 덕산을 스승으로 참선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오산에서 성도하게 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 때 불법의 궁극적인 한마디를 더 제시했었더라면 이 스님들과 같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인데"라고 후회하고 있는 말이다. 암두의 이 말은 들은 스님은 비로소 설봉이 "뭐야!" 말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간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말후구가 불법을 체득해야 할 문제(疑團)가 되어 90일간 안거동안 이 문제를 공부하게 된 것이다. 말후구는 최후로 궁극적인 불도를 체득하는 한마디(一句)로 중생심(의심)을 죽이고 깨달음의 체험을 통한 확신(信心)으로 불심의 지혜작용을 살리는 법문을 말한다.

그 스님은 하안거가 끝날 때에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들어내어 암두화상께 법문을 청했다. 암두화상은 "왜 진작 묻지 않았는가"라고 말하자, 스님은 "감히 쉽게 여쭙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암두화상은 "설봉이 나와 똑같이 덕산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으로서 깨달음은 같지만, 교화방법은 같지 않다. 불법의 궁극적인 한 말(末後句)을 알고자 하는가. 단지 이것뿐이다."라고 말했다. 똑같은 스승의 문하에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했다고 할지라도 설봉은 설봉의 안목이 있고, 암두는 암두의 안목이 있기 때문에 학인을 교화하는 수단은 같지 않다. 불법의 궁극적인 한마디는 바로 이것뿐이다. 지견 분별과 언어문자를 여읜 본래심으로 사는 경지를 체득하는 것이라고 설했다.

설두는 게송으로 읊었다. '궁극적인 한마디. 그대에게 말한다.' 암두가 말후구를 설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는데, 내가(설두) 학인들을 위해 설하리라. '밝음과 어둠이 쌍쌍으로 어울리는 시절이다.' 차별과 평등, 미혹과 깨달음을 함께 초월한 경지가 설두가 설한 말후구이다.

'같은 가지에서 나온 것은 알지만, 죽음을 달리한다는 사실은 모르는군.' 암두의 말을 이어 설두는 밝음이 쌍으로 이루어지는 천지 만물이 생성하는 경지와 어둠이 쌍으로 전개되는 만물일체의 절대 평등의 세계를 읊고 있다. 만물이 생성하는 것도 마찬가지처럼, 성장과 모양과 작용은 각기 다른 것이다. 매화와 벚꽃이 다르고 산과 물이 각각 자기의 모양과 색깔과 기능을 가지고 있는 제법실상의 세계라는 사실이 설두가 제시한 말후구의 법문이다.

'달리한다는 사실.' 만물이 같이 태어나도 같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그와 같이 '석가와 달마의 다름도 잘 분별해야 한다'고 읊고 있다. 만물이 각자 되돌아갈 본래의 곳으로 '남북동서로 돌아가라' '한밤중에 일천 바위를 뒤덮은 흰눈을 함께 본다'는 말은 밝음과 어둠(明暗)을 함께 보는 절대평등의 경지를 설두는 말후구로 읊고 있다.



[第052則]渡驢渡馬
〈本則〉擧。僧問趙州。久響趙州石橋。到來只見略彴。州云。汝只見略彴。且不見石橋。僧云。如何是石橋。州云。渡驢渡馬。
〈頌〉孤危不立道方高。入海還須釣巨鼇。堪笑同時灌溪老。解云劈箭亦徒勞。

벽암록 52칙 조주의 돌다리

“조주의 돌다리는 깨달음 인도하는 가르침”


{벽암록} 제52칙은 조주의 돌다리(石橋)에 대한 질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을 찾아와서 말했다. "조주의 돌다리(石橋)에 대하여 우러러 사모한지 오래 되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통나무 다리뿐이군요" 조주화상이 말했다. "그대는 통나무 다리만 보았을 뿐 돌다리(石橋)는 보지 못했군!" 스님이 질문했다. "어떤 것이 조주의 돌다리(石橋) 입니까?" 조주화상이 대답했다.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너지"

擧. 僧問趙州, 久響趙州石橋, 到來只見略. 州云, 汝只見略, 且不見石橋. 僧云, 如何是石橋. 州云, 渡驢渡馬.


어떤 사람이나 짐승도 건너가게
모두다 이끌어주는 훌륭한 스승

본칙의 공안은 {조주록} 중권과 {전등록} 제10권 조주전에 전하고 있다. 조주종심(778 ~897)은 {벽암록} 9칙에 조주 동서남북의 문에도 등장한 유명한 선승이다. {전등록}에는 위의 선문답에 이어서 다음의 질문이 첨가되어 있다. "스님이 어떤 것이 통나무 다리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조주화상은 "사람마다 각각 따로 건넌다(度)"라고 대답하고 있다. 여기서 '건넌다(度)'라는 말은 다리가 사람과 나귀, 말 등이 건너간다(渡)는 의미뿐만 아니라 이곳(사바세계)에서 저곳(열반)의 경지로 구제(渡)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또 {조주록}에는 본칙의 공안과 똑같이 스님이 "어떤 것이 조주의 돌다리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조주화상은 "건너오게, 건너와!"라고 대답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을 찾아와 "조주의 돌다리(石橋)에 대하여 오랫동안 우러러 사모했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뭐야! 통나무 다리뿐이군!"이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우러러 사모했다는 말로 구향(久響)은 구향(久嚮)이 맞다. {무문관} 제28칙에 덕산이 용담선사를 찾아가서 "오랫동안 용담을 사모(久響龍潭)하고 찾아갔는데, 연못도 없고 용도 보이지 않네"라는 덕산의 말도 같은 의미이다. 원오는 '평창'에서 "하북성 조주 땅에는 돌다리(石橋)가 있었는데, 이 다리는 이응(李膺)이 만든 것이라고 하며, 지금까지 천하에 유명하다. 약작(略)이란 외나무다리를 말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종심화상이 거주한 조주의 관음원은 조주성의 동쪽에 있는데, 조주의 돌다리를 건너 10리쯤 떨어진 곳이다. 석교(石橋)로 유명한 곳은 천태산과 남악과 조주의 돌다리 세 곳이다.

질문한 스님은 유명한 장소인 조주의 돌다리를 항상 우러러 사모하고 있었는데 와서 직접 확인해 보니 널판자 하나를 걸쳐놓은 다리 아닌가. 널판자 다리를 비유하여 조주화상을 비판하고 있는 말이다. 즉 조주화상은 안목이 뛰어나고 도가 높은 선지식으로 천하에 유명하여 항상 존경하고 사모했었는데, 찾아와서 직접 보니까 '볼품없이 늙고 메마른 영감이 아닌가'라는 의미를 내포한 비판의 일침을 내뱉고 있는 말이다. 원오는 "그래도 호랑이 수염을 잡아당기는 사람이 있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조주화상을 상대하여 거침없이 비판할 수 있는 이 스님의 용기를 칭찬하면서, 그러나 자칫 잘못하다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아주 위험에 직면한 사람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조주화상은 "그대는 조주의 외나무다리만 보았을 뿐, 진짜 조주의 돌다리(石橋)는 보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눈으로 보이는 널판자의 조주 다리만 보고, 늙어빠진 조주를 친견하고도 조주화상의 진수인 지혜작용을 펼치는 참된 법신(法身)을 친견하지 못하고 있군' 즉 그대는 눈과 귀로 보고 듣고,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것만을 마음이라고 믿고 중요한 본래의 불심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말이다. 원오는 "역시 조주는 이러한 스님을 상대하는 수단이 노련하다"고 착어했다. 마치 늙은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조주의 접화 수단은 너무나 노련하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먹이로 제시하여 그 스님을 낚아 올리고 있다.

즉스님은 "어떤 것이 조주의 돌다리(石橋) 입니까?"라고 다그치며 질문한 것은 원오의 착어에도 언급한 것처럼, 조주화상이 던진 낚시에 걸린 것이다. 사실 질문한 스님은 조주의 돌다리와 널판자다리, 두 가지 다리(사물)로 나누어 대립시키고 있는 것부터 커다란 결함을 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조주화상은 "조주의 돌다리는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너지"라고 태연하게 대답하고 있다. 조주의 돌다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짐승도 마차도 모두 왕래하며 다니는 다리이다. 조주의 돌다리는 어떠한 사람이나 마차나 짐승이 밟고 지나가도 본래 여여한 그대로 무심한 경지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조주의 마음도 무심의 경지에서 평상심으로, 일체의 차별심을 일으키지 않고, 마치 돌다리와 같은 경지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말이다.

황벽의 설법에 '무심한 마음'을 허공과 갠지스 강의 모래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갠지스 강의 모래(恒河沙)라는 말은 경전에 자주 나오고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설법한다. 이 모래는 부처나 보살이나, 제석천이나 범천 등의 천인이 그 위를 밟고 걸어도 별달리 고맙고 감사하며 기쁘게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소나 양, 곤충 벌레들이 밟고 지나가도 달리 성내거나 화내지 않는다. 진귀한 보물이나 값비싼 향수도 욕심내지 않으며, 똥이나 오줌, 더러운 물질도 싫어하지 않는다. 이 갠지스 강의 모래 같은 마음을 무심(無心)의 마음이라고 한다."

"조주의 돌다리는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넌다"라고 말한 것은 무심의 경지에서 묵묵히 하심행을 하는 보살이며, 부처가 중생과 함께하는 동사섭으로 철저하게 돌다리와 같고, 갠지스 강의 모래와 같은 대승보살의 마음이라고 설한 것이다.

{화엄경} 정행품에 다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만약 교량을 보면 마땅히 원력을 세워라 중생을 위하여 불법의 다리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건너게 하여 망념을 쉬도록 하리라고." 중생의 제도하는 보현보살의 정신을 다리를 건너 열반의 경지를 체득하도록 하는 자비로 실행할 것을 설하고 있다. 조주의 돌다리를 밟고 지나가는 것은 조주의 본래 부처(古佛)를 친견하는 것이며, 중생심의 사바세계에서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되는 인연인 것이다.

{조당집} 제7권에 설봉은 행각하면서 천태산의 돌다리(石橋)를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불도를 배우고 수행을 하기에 힘이 충분치 못하거든, 부디 이 몸을 끌고 험한 길을 걸어라. 돌다리(石橋)를 한차례 지나고 난 뒤에 허망한 이 몸이 다시 나지 않는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고고하게 위세를 부리지 않지만 도는 드높네." 조주화상이 사람들을 지도하는 방법은 임제나 덕산처럼, 고함이나 방망이를 사용하지도 않고,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수단을 사용하지도 않고, 일상생활의 평범한 대화로 말하고 있지만, 그의 평범한 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오르기 힘든 천 길의 벼랑이 있다. 설두는 이 한 마디로 조주의 위대한 교화를 찬탄하고 있다. “바다에 들어가면 반드시 큰 자라를 낚아야지.” 열자(列子)에 용백국(龍伯國)이라는 곳에 큰 사람이 한 번의 낚시에 여섯 마리의 자라를 낚아 돌아간다는 고사를 토대로 읊은 것인데, 바다에서 낚시를 하려면 피라미나 새우같은 잡어를 낚아서는 안 된다. 조주화상이 불법의 대해(大海)에서 사람을 접견하는 것은 한마디의 낚시로 큰 자라를 잡는 것처럼, 출격 대장부를 낚으려고 한 것이라고 조주의 수단을 칭송한 말이다.

“우습다. 같은 시대의 관계(灌溪)스님이여”

관계스님은 임제의 법을 이은 지한(志閑)선사로 조주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평창'에 인용한 것처럼, 어떤 스님이 관계화상을 침문하고 본칙의 내용과 똑같은 질문을 하고, “어떤 것이 관계입니까?” 질문하자, 관계화상은 "쏜살같은 급류"라고말했다. 자신의 지혜작용은 "쏜살같은 급류"라고 말할 줄은 알았지만, "부질없는 헛수고였네." 왜 조주화상처럼,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넌다고 평탄한 말로 본지풍광을 들어내지 못했을까? 동시대의 관계스님의 안목을 비판하며 조주의 경지를 칭찬하고 있다.



[第053則]何曾飛去
〈垂示〉垂示云。遍界不藏。全機獨露。觸途無滯。著著有出身之機。句下無私。頭頭有殺人之意。且道古人。畢竟向什麽處休歇。試擧看。
〈本則〉擧。馬大師與百丈行次。見野鴨子飛過。大師云。是什麽。丈云。野鴨子。大師云。什麽處去也。丈云。飛過去也。大師遂扭百丈鼻頭。丈作忍痛聲。大師云。何曾飛去。
〈頌〉野鴨子。知何許。馬祖見來相共語。話盡山雲海月情。依前不會還飛去。欲飛去。卻把住。道道。

벽암록 53칙 마조화상과 들오리

"지극한 '도(道)'는 온 세계에 두루 퍼져있어"


{벽암록} 제53칙은 마조도일 화상과 백장스님이 들오리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마조대사가 백장스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들오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마조대사가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가?' 백장스님이 말했다. '들오리입니다' 마조대사가 말했다. '어디로 날아갔느냐?' 백장이 말했다. '날아 가버렸습니다' 마조대사는 드디어 백장의 코를 잡고 비틀었다. 백장은 아픔의 고통을 참느라고 신음하였다. 마조대사가 말했다. '뭐야! 날아 가버렸다고'

擧. 馬大師, 與百丈行次, 見野鴨子飛過. 大師云, 是什. 丈云, 野鴨子. 大師云, 什處去也. 丈云, 飛過去也. 大師, 遂百丈鼻頭, 丈作忍痛聲. 大師云, 何曾飛去.

본칙은 {광등록} 제8권 백장전에 처음으로 전하고 있으며, {연등회요} 제4권과 {설두송고} 53칙에 최초로 수록한 공안이다. {조당집} 제15권 오설영묵(五洩靈默)전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어느 날 마조대사가 대중을 거느리고 서쪽 담장 밑을 거닐다가 갑자기 오리떼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마조대사가 주위를 돌아보고 물었다. '무슨 소리인가?' 정(政)상좌가 말했다. ' 오리떼 입니다' '어디로 갔는가?' '날아갔습니다' 마조대사는 정상좌의 코를 잡아끄니 정상좌가 아파서 소리 지르자, 대사가 말했다. '아직 여기에 있는데 언제 날아갔다고 하는가' 정상좌가 활짝 깨달았다” 정상좌는 마조의 제자 백장유정(百丈惟政)으로, 이것이 본칙공안의 원형인데, 뒤에 {광등록}과 {설두송고}에서는 마조와 백장회해와의 인연으로 변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조도일(709~788)은 {벽암록} 제3칙에서 소개한 것처럼, 조사선의 선구자이다. {전등록}에는 그의 문하에 뛰어난 선지식이 139명이나 배출되었다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조사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특히 그의 문하에서 선원을 독립하고 {백창청규}를 제정하여 선불교의 새로운 교단을 체계화한 사람이 백장회해(749~814)인데, 그의 법문도 26칙에 싣고 있다.

마조대사가 백장스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들오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선문답의 화제로 제시하여 백장의 안목을 시험하고 있다. 이러한 선문답을, 사물을 가리켜서 불법의 참된 정신을 체득하게 하는 문제라고 한다. 마조대사가 들오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원오도 '평창'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조대사가 들오리인줄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마조대사는 그렇게 물었을까. 마조대사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말하자면 들오리가 날아가는 그 곳에 만물이 존재하는 본질과 미묘한 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백장이 잘 알고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던진 물음인 것이다.

백장스님은 그냥 "들오리입니다"라고 들오리가 날아가고 있는 그대로를 본대로 정직하게 대답한 것이다. 당시의 백장은 마조대사를 지도를 받고 있는 젊은 수행자였기 때문에 안목을 갖춘 날카로운 선기(禪機)가 없다. 원오도 "백장의 면목(鼻孔)이 이미 다른 사람(마조)의 손안에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마조의 물음에 너무 정직하게 대답한 것은 자신이 자유가 없다. 때문에 그의 생명은 이미 마조대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마조대사는 다시 "어디로 날아갔느냐?"고 물었다. 들오리가 어디로 갔는가라고 묻는 마조대사의 저의는 법계에 두루하여 감출 수 없는 대도의 지혜작용은 필경 어느 곳에 귀착되는가? 들오리와 일체의 만법이 결국 어디로 돌아가는가? 만법의 귀결처를 묻고 있는 말이다. 두 번째로 시험하는 마조의 물음은 문제의 핵심을 더욱 분명히 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원오도 "앞의 화살은 아직 가볍게 박혔지만, 뒤의 화살은 깊게 박혔다"라고 착어했다. 원오는 또 "또한 마땅히 스스로 알아야지"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마조대사가 “이것은 무엇인가?” "어디로 날아갔는가?"라고 혼잣말로 묻는데, 들오리의 낙처를 문제로 한다면 마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백장에게 물을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닌가?.

백장은 거듭 "날아 가버렸습니다"라고 어디까지나 바보처럼 정직하게 본대로 들오리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다. 원오는 "단지 마조대사의 말만 쫓아다닌다. 정면에서 어긋났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백장은 마조대사의 질문에 따라 너무 정직하게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마조대사는 본분사를 문제로 하여 묻고 있는데, 백장은 들오리를 화제로 삼고 대답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빗나간 대화라고 비평하고 있다. 마조대사는 드디어 백장의 코를 잡고 비틀었다. 마조대사는 어떻게 해서라도 백장을 깨닫도록 여러가지 물음과 방편을 제시했지만 생각한대로 진행하지 못하자 즉시 선기(禪機)를 발동하여 백장의 코를 잡고 비틀었다. 원오는 "부모가 낳아준 코(본래면목)를 도리어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마조가 손으로 비틀은 코는 백장 자신의 코인데, 그 코를 다른 사람이 붙잡고 비틀고 있으니 안타깝다. 멍청하게 들오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을 상황이 아니며, 마조대사의 물음에 그냥 본대로 대답할 분위기도 아니다. 코는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서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본래면목과 지혜작용이 전부 들어난 전기독로(全機獨露)인 것이다. 백장 자신도 원래 자신의 본래면목과 지혜작용이 있는데 왜 그것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자신의 본래면목과 선기를 발동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백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공안을 읽는 모두가 자신의 본래면목과 지혜작용을 발휘해야 할 것을 자각해야 한다.

마조대사가 백장의 코를 잡고 비틀자 백장은 아픔의 고통을 참지 못하여 "아야!"라고 신음소리를 냈다. 백장이 고통을 참지 못해서 나오는 신음소리는 본래심의 작용으로 들어난 백장의 본분사인 것이다. 인통(忍痛)의 소리는 일부러 내는 작위성의 소리나 분별심의 소리가 아니다. 백장 자신의 근원적인 본래심의 고함소리이며 본래면목의 지혜작용으로 나타난 전기독로(全機獨露)인 것이며, 우주법계가 감출 수 없는 본래 자연의 소리이며 법음(法音)인 것이다. 원오는 "아파서 신음하는 그 가운데 본래면목이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백장은 앞에서 "날아가 버렸다"고 말했는데, 들오리는 지금 코를 비틀자 여기서 아프다고 신음하고 있지 않는가? 신음하고 있는 것이 들오리인가, 백장인가? 이 소리는 들오리의 울음이기도 하고, 백장의 신음 소리이기도 하며, 각자의 본래심의 소리(법음)인 것이다.

마조대사는 백장의 코를 비틀고 쳐다보며 “뭐야! 들오리가 날아 가버렸다고” 여기 내 앞에서 아프다고 고함치고 있지 않는가? 젊은 제자 백장을 지도하는 노파심이 넘치고 있다.

이후의 이야기는 '평창'에 전하고 있는 것처럼, 마조대사의 지도와 시절인연이 도래되어 백장은 단박에 깨닫게 되었다. 이튼날 마조대사는 "그대는 깊이 오늘의 일을 잘 알아야 한다"라고 말하며 백장을 인가하였다고 전한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들오리여!” 설두는 큰 소리로 들오리를 부르고 있다. 마조와 백장이 가는 길에 나타난 들오리인가? 여기서 말하는 들오리는 불법의 대도이며, 사람들이 구족하고 있는 불성인 들오리를 불러 자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디(何許)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들오리가 날아갔다고 하는데 어디로 갔는가? 설두는 마조를 대신하여 백장, 그대는 들오리가 어디로 날아갔는지 아는가? “마조대사는 만나자 말을 걸었네.” 마조는 들오리를 발견한 백장에게 대화를 한 것을 읊었다. 백장은 충분히 훌륭한 인물이 될 것임을 파악하고, 대화를 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인줄 알고 말을 걸었다. “산, 구름, 바다, 달, 등 온갖 것들에 대해서 모두 말했네.” 마조는 속진(俗塵)을 떠난 자연의 대도(大道)와 불법의 근본을 마음껏 말했네. 그러나 백장은 마조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모르고서 도리어 날아갔다"고 말했다. 백장은 코가 비틀리자 아야! 하면서 깨달았다. 설두는 "날아가려고 하는 순간, 붙잡고서 말해라, 말해봐!"라고 독자에게 재촉한다. 그대는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第054則]某甲話在
〈垂示〉垂示云。透出生死。撥轉機關。等閑截鐵斬釘。隨處蓋天蓋地。且道是什麽人行履處。試擧看。
〈本則〉擧。雲門問僧近離甚處。僧云。西禪。門云。西禪近日有何言句。僧展兩手。門打一掌。僧云。某甲話在。門卻展兩手。僧無語。門便打。
〈頌〉虎頭虎尾一時收。凜凜威風四百州。卻問不知何太嶮。

벽암록 54칙 운문화상의 ‘어디서 왔는가’

"구도자는 독자적인 지혜와 안목 갖춰야”


{벽암록} 제54칙은 운문문언 화상을 참문한 스님과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운문 화상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서선사(西禪寺)에서 왔습니다.” 운문 화상이 물었다. “서선사에서는 요즘 어떤 말(言句)이 있었는가?” 스님은 두 손을 펼쳤다. 운문 화상은 손바닥으로 한방 갈겼다. 스님은 말했다. “나도 할 말이 있습니다.” 운문 화상이 곧장 두 손을 펼쳐 보였다. 그 스님은 말이 없었다. 운문 화상은 곧장 내리쳤다.

擧. 雲門問僧, 近離甚處. 僧云, 西禪. 門云, 西禪近日, 有何言句. 僧, 展兩手. 門, 打一掌. 僧云, 某甲話在. 門, 展兩手. 僧, 無語. 門, 便打.


운문문언(864~949) 화상은 {벽암록}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당말의 선승으로 달리 소개할 필요가 없으리라.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하권, '감변(勘弁)'에 수록되어 있는데, 본문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화 내용은 같다. 하안거를 마치고 운수납자인 어떤 수행자가 운문 화상을 친견하러 왔다. 운문 화상은 그 스님에게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물었다. 이것은 선지식이 처음 참문하는 수행자에게 던지는 상투적인 수단이다.

{벽암록} 10칙과 35칙에서도 목주와 앙산이 학인에게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처럼 선문답에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원오가 "탐간영초(探竿影草)"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어부가 고기를 불러들이기 위해 수단방편으로 설치하는 도구이다.

즉 수행자의 안목과 식견을 살펴 측정해 보기 위해 던지는 한마디이다. 물의 깊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지팡이를 사용하고, 사람의 안목과 지혜를 파악하기 위해서 한마디 인사말(一句)를 던지는 것이다. 한마디의 말과 행동으로 벌써 상대방의 역량과 안목을 간취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학인을 맞이하는 일상적인 한마디지만 방심할 수 없는 말이다.

'어디(甚處)서 왔는가?'라고 묻고 있지만 단순히 지리적인 장소나 위치방향을 묻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소나 방향위치를 등지고는 물음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단순한 인사말이라고 할 수 없다. 학인이 장소로 대답하면 장소를 물은 것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고, 단순히 인사로 받아들이면 운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운문이 묻고 있는 '어디(甚處)서 왔는가?'라는 한마디에 장소와 학인의 본분을 묻는 두 가지 문제가 내포된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 그 스님은 "서선사(西禪寺)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운문어록}에는 운문 화상이 "하안거는 어디서 보냈는가?"라는 질문에 "서선사에서 안거를 보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서선사는 소주(蘇州)에 있는 사찰인데, 이 스님은 광동성의 소주(韶州) 운문산까지 온 것이다. 당시 서선사에는 누가 주지로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등회원} 제4권에는 남전보원의 제자인 소주서선 화상이 행화를 펼친 곳인데, 운문 화상과 시대적으로는 맞지 않는다. {회요}에는 서선 화상의 문하에서 수학한 스님이 뒤에 운문의 스승인 설봉선사를 참문한 이야기도 전하고 있지만, 운문 당시의 서선사의 선지식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운문 화상은 스님에게 "서선사의 주지 화상은 어떠한 법문(言句)으로 학인들을 지도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즉 그대는 서선사에서 주지 화상의 법문을 듣고 체득한 경지는 어떠한지 제시해 보라는 말이다. 그러자 그 스님은 두 손을 펴서 앞으로 내보였다. 손바닥을 펼쳐 보인 행동을 전수(展手)라고 하는데, 선승들의 선문답에 자주 등장한다.

{운문광록} 중권에도 "운문 화상은 어떠한 법문을 설하는가?"라고 질문하자, 그 스님은 '두 손을 펴서 양쪽으로 내렸다(展兩手垂兩邊)'라는 일단이 보인다. {조당집} 19권, "'불법의 궁극적인 일은 무엇입니가?'라는 질문에 선사는 양 손을 펼쳤다"라고 하는 것처럼, 양손을 펼쳐 보인 행동은 불법의 근본을 제시하여 보인 행동이다. 이것으로 불법의 근본정신을 하나도 감춤없이 모두 다 들어내 보였다는 의미이다.

또한 {조주록}에는 다음과 같은 일단이 보인다. 조주선사는 새로운 스님에게 '요즘 어디서 왔는가?'라고 질문했다. 그 스님은 '오대산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조주는 '문수를 친견했는가?'라고 질문했다. 스님은 손을 펴 보였다. 조주는 '그러한 흉내를 내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문수는 누가 친견한 것인가?'라는 대화가 있다. 여기서도 자신이 바로 문수이기 때문에 중생구제의 원행을 손을 펴 보인 행동으로 나타내고 있다.

동산양개 화상이 학인들을 교화하는 수단으로 조도(鳥道), 현로(玄路),전수(展手)의 세 가지 방편수단을 제시하고 있다. 조도(鳥道)는 새가 공중을 날아다니며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처럼, 일체의 경계에 걸림 없는 무심의 경지를 체득하도록 하는 것이고, 현로(玄路)는 일체의 차별 견해를 초월한 공적한 경계에 살도록 하며, 전수(展手)는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실천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전수(展手)는 수수(垂手)나 수자(垂慈)와 같은 말로 부모가 손을 내밀어 어린애를 사랑으로 양육하는 것처럼,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행을 말한다. {십우도}의 마지막에 저자거리에 나아가 중생을 구제하는 '입전수수(立廛垂手)'는 이러한 보살도의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참고로 법화사상에서 말하는 수적(垂迹)은 부처나 보살이 중생교화를 위하여 여러 가지 모습으로 화신을 나툰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불보살의 근본을 본지(本地)라고 하며 화신으로 몸을 나툰것을 본지수적(本地垂迹)이라고 한다.

그런데 스님이 손을 펴서 내보이자 운문 화상은 전광석화와 같이 손으로 그 스님을 한방 후려쳤다. 덕산의 방망이와 임제의 고함과 같이 운문의 안목은 일체의 분별심과 거짓 흉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원오는 그 스님이 남의 흉내를 내고 있는 살림살이에 대하여 도적의 살림이 파산되었다고 평하고 있다. 이러한 운문의 행동에 그 스님은 "나도 할 말이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내 말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후려갈기면 어떠합니까'라는 강한 의사 표현이다. 그러자 운문 화상은 그 스님이 행동으로 보인 것처럼, 곧장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손을 펼쳐보인 행동은 같지만 그 스님은 남의 흉내를 낸 것이고, 운문 화상은 그 스님을 위해서 불법의 대의를 숨김없이 모두 다 행동으로 제시해 보인 것이다. 그러나 그 스님은 운문의 자비심과 행화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이 없었다. 그래서 운문화상은 그 스님을 본격적으로 곧장 내리치며 정신 차리도록 지시한 것이다.

진정한 구도자는 어떤 선지식을 모시고 불법을 공부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독자적인 지혜와 정법의 안목을 구족해야 하는 것이다. {전등록} 29권에 '장부는 하늘을 찌르는 뜻이 있으니 여래가 행한 길도 가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나 여래의 경지까지 초월한 독자적인 안목을 구족해야 한다는 말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호랑이의 머리와 꼬리를 일시에 잡으니” 운문화상의 선기와 방편적인 수단이 원만하고 뛰어남을 칭찬한 말이다. 처음 운문 화상이 곧장 한방 후리치리고, 나중에 운문 화상이 두 손을 내밀어 보이자, 그 스님이 대답하지 못하자 역시 또 한방 먹인 것은 정법의 안목으로 지도한 것이다. 운문의 교화방법은 전후와 수미(首尾)에 지혜의 방편법문으로 일관되게 대응하여 제시한 것을 읊고 있다.

“늠름한 위풍이 천하(四百州)에 떨쳤네.” 앞의 한 마디로 본칙 공안의 입장을 읊었지만, 다시 뜻을 이어서 운문에 대한 찬사를 연장하고 있다.

"운문화상의 덕망과 지혜의 선풍은 중국 천하 4백주(四百州)에 두루 하네. 아무리 중국 땅이 넓다고 할지라도 운문 화상에 견줄만한 사람이 없다"고 지극히 높게 찬탄하고 있다. 원오도 "온 천하 사람들의 말문을 막고 있네. 누구 한 사람 운문화상 앞에서 일언반구도 제시할 수가 없다."고 찬탄하고 있다.

“도리어 묻노니 어쩌면 그렇게 험준한지 알 수 없어라.” 설두 화상이 학인에게 제시한 문제의 질문으로 운문 화상의 선기작용이 험준한 경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다. “설두는 운문을 대신해서 '한번 용서해 준다'라고 했다.” 어떻게 운문의 험준한 선기를 파악해야 할 것인가? 잘 사유하고 사유해야 할 것이다.


[第055則]不道不道
〈垂示〉垂示云。穩密全眞。當頭取證。涉流轉物。直下承當。向擊石火閃電光中。坐斷[言+肴]訛。於據虎頭收虎尾處。壁立千仞。則且置。放一線道。還有爲人處也無。試擧看。
〈本則〉擧。道吾與漸源至一家弔慰。源拍棺云。生邪死邪。吾云。生也不道。死也不道。源云。爲什麽不道。吾云。不道不道。回至中路。源云。和尙快與某甲道。若不道。打和尙去也。吾云。打卽任打。道卽不道。源便打。後道吾遷化。源到石霜擧似前話。霜云。生也不道。死也不道。源云。爲什麽不道。霜云。不道不道。源於言下有省。源一日將鍬子。於法堂上。從東過西。從西過東。霜云。作什麽。源云。覓先師靈骨。霜云。洪波浩渺白浪滔天。覓什麽先師靈骨。源云。正好著力。太原孚云。先師靈骨猶在。
〈頌〉免馬有角。牛羊無角。絶毫絶氂。如山如嶽。黃金靈骨今猶在。白浪滔天何處著。無處著。隻履西歸曾失卻。

벽암록 55칙 도오화상의 조문

“생사가 여일한데 生과 死는 왜 구별하나”


{벽암록} 제55칙은 도오원지(道吾圓智)화상과 제자 점원(漸源)이 어떤 집을 방문하여 문상하면서 나눈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도오화상이 제자 점원스님과 함께 어느 집에서 조문을 하게 되었다. 점원이 관을 두드리며 말했다. “살았는가? 죽었는가?” 도오화상이 말했다. “살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점원이 말했다. “어째서 말할 수 없습니까?” 도오화상이 말했다. “말할 수 없지, 말할 수 없어.” 절로 돌아오는 길에 점원이 말했다. “화상은 저를 위해서 어서 말하세요. 말하지 않으면 화상을 때리겠습니다.” 도오화상이 말했다. “때릴려면 때려라! 그러나 말할 수 없다.” 점원은 곧장 후려 쳤다. 그 뒤에 도오화상이 입적하자 점원은 석상화상께 가서 이 이야기를 했다. 석상화상은 말했다. “살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점원이 말했다. “어째서 말할 수 없습니까?” 석상화상이 말했다. “말할 수 없지, 말할 수 없어.” 점원은 그 말을 듣고 곧장 깨달았다.

점원은 어느 날 삽을 들고 법당 안에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고가자, 석상화상이 말했다. “무엇하는가?” 점원은 말했다. “스승(先師)의 영골(靈骨)을 찾습니다.” 석상화상이 말했다. “거대하게 밀려오는 파도가 까마득히 하늘까지 넘실거리는데, 무슨 스승의 영골을 찾겠다는 것인가?” 설두가 착어했다. “아이고! 아이고!”점원이 말했다. “온 힘을 다해서 부딪쳐 봅니다.” 태원의 부상좌가 말했다. “스승의 영골이 아직 남아 있네.”

擧. 道吾, 與漸源, 至一家弔慰. 源, 拍棺云, 生邪死邪. 吾云, 生也不道, 死也不道. 源云, 爲什不道. 吾云, 不道, 不道. 回至中路, 源云, 和尙, 快與某甲道. 若不道, 打和尙去也. 吾云, 打卽任打, 道卽不道. 源, 便打. 後, 道吾遷化. 源, 到石霜, 擧似前話. 霜云, 生也不道, 死也不道. 源云, 爲什不道. 霜云, 不道不道. 源, 於言下有省. 源, 一日將子, 於法堂上, 從東過西, 從西過東. 霜云, 作什. 源云, 覓先師靈骨. 霜云, 洪波造渺, 白浪滔天. 覓什先師靈骨.(雪竇著語云, 蒼天蒼天.) 源云, 正好著力. 太原孚云, 先師靈骨猶在.


"살았는가 죽었는가…" 물음에
도오화상 "말할 수 없다" 대답

이일단의 선문답은 {조당집} 제6권, {전등록} 제15권 점원장에 전하고 있는데, 이야기는 약간 다르다. 도오원지(道吾圓智. 769~835)화상은 약산유엄선사의 법을 이은 제자로서 그의 전기는 {조당집} 제5권, {전등록} 제14권, {송고승전} 제11권 등에 전하고 있다. 점원중흥(漸源仲興)선사에 대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지만, 도오화상의 법을 이은 선승이다.

어느 날 도오화상은 제자 점원과 함께 신도 집에 조문을 하게 되었다. 점원이 관을 두드리며 도오화상에게 질문했다. “관속의 사람은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육체적인 현상으로 볼 때 생사가 있고, 관 속의 사람은 죽었다고 할 수 있지만, 선문답의 주제로 하는 법신의 본체상에서 볼 때 생사와 생멸이 없다. 그래서 도오화상은 "살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고 생사의 차별에 떨어지지 않는 법문을 친절하게 말했다. 점원은 도오화상의 말뜻을 알지 못하고 "어째서 말씀하셔서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까"라고 다그친다.

도오화상은 역시 "말할 수 없지 말할 수 없어"라고 했다. 법신의 존재 그 자체를 생사와 생멸의 차별심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중생이다. 산이 높고 물이 흐르는 제법의 본체를 생사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도오화상은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 문제를 완전히 체득하지 못한 점원은 절로 돌아오는 길에 도오화상에게 말했다. “화상은 저를 위해서 어서 말하세요. 말하지 않으면 화상을 때리겠습니다.” 점원은 생사대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승에게 필사적인 결단으로 가르침을 요구하고 있다. 도오화상은 "때릴려고하면 그대 마음대로 때려라. 그러나 말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점원은 도오화상을 곧장 후려쳤다.

'평창'에는 이 사건의 전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도오화상은 이처럼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도록 그를 지도했으나 점원은 깨닫지 못했다. 도오화상은 맞은 뒤에 점원에게 말했다. '그대는 이곳을 떠나도록 하라! 절의 책임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대에게 화가 미칠까 걱정스럽다' 남모르게 점원이 절을 떠나도록 했다. 점원은 그 뒤 작은 절에서 행자가 외우는 {관음경}의 '비구의 몸으로 제도를 받을 자에겐 비구의 몸을 나타내어 설한다'는 구절을 듣고 곧장 크게 깨치고, '내가 당시 스승의 말씀을 잘 모르고 나쁜 짓을 했구나. 생사의 일이 언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구나!'라고 말했다. 점원이 불법의 대의를 깨닫고 생사문제를 해결한 뒤에 스승에게 자신의 견해를 말하려고 했지만 스승이 입적한 뒤였다.”

점원은 사형인 석상경제(石霜慶諸. 807~888)선사를 찾아가서 이 이야기를 제시하며 점검해 줄 것을 청했다. 석상선사 역시 도오화상의 법을 이은 선승으로, 그의 전기는 {조당집} 제6권, {전등록} 15권 등에 전하고 있는 것처럼, 담주 석상산에서 교화를 펼쳤다. 석상선사도 "살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점원은 "어째서 말할 수 없습니까?"라고 다그쳤다. 석상선사 역시 도오화상의 말과 똑같이 "말할 수 없지, 말할 수 없어"라고 했다. 점원은 그 말을 듣고 곧장 깨달았다. 많은 세월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생사대사의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한 것이다. 이 공안은 여기서 한 단락을 맺는다.

점원은 어느 날 삽을 들고 법당 안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 시늉을 하면서 동쪽에서 서족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갔다하자 석상선사가 "자네는 도대체 무엇하고 있는가?"라고 점원의 심중을 떠보려고 물었다. 점원은 "스승(先師)의 영골(靈骨. 법신)을 찾습니다"라고 말했다. 법당에서 입적하신 도오화상의 영골을 찾아 마치 삽으로 파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자 석상화상은 "뭐야! 여기는 거대하게 파도가 몰아치는 큰 바다 한 가운데야! 무슨 스승의 영골을 찾겠다는 것인가?"라고 말했다.

즉 온 대지가 마치 하나의 파도와 같이 물거품속인에 선사의 영골을 어디서 찾으려 하는가? 선사의 영골이라면 언제 어디라도 눈에 가득 귀에 가득 함께 하고 있는데, 굳이 삽을 들고 찾으려고 할 필요가 있는가? 석상은 점원이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하고 있는 것을 타파하려고 한 말이다. 설두화상은 이 공안을 제시하면서 "아아! 아아! 통탄할 일이야!"라고 착어하고 있다. 설두는 왜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하는가. 온 천지 가득찬 영골을 찾는 점원에 대한 탄식인가. 아니면 석상의 친절한 가르침에 대한 것인가. 원오는 "너무 늦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점원이 천화한 도오화상의 영골을 찾는 일이 너무 늦은 일이라고 한 것인가. 점원은 석상의 말에 대하여 "찾을 수 없는 영골을 찾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애쓰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뒤에 설봉의존의 제자인 태원(太原)의 부상좌(孚上座)가 이 선문답에 대하여 "도오화상의 영골이 아직 남아 있네"라고 평했다. 본원 자성의 법신사리는 천지와 우주에 하나 가득 충만해 목전에 분명히 현전하고 있다는 말이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토끼와 말은 뿔이 있고, 소와 염소는 뿔이 없다” 도오화상이 '말 할 수 없다'는 말을 읊은 것으로, 관 속에는 사인(死人)인데, 살았다고도 죽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미세하게 가는 터럭도 끊었네.” 아주 미세한 터럭도 끊었다고 하는 것은 먼지 하나 없는 본래 무일물의 경지로서 생사망념의 차별심을 초월한 입장이다. 구름 한 점도 없는 창공, 절대의 경지는 생사망념을 초월한 본체의 입장이기에 비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일체를 초월한 절대 평등의 경지에 '산은 높이 솟아 있다' 미세한 터럭도 끊어진 절대 평등의 세계가 그대로 산이 높이 솟아 있는 차별세계가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읊고 있다. 생사의 본체인 법신은 없다고 하면 형상도 아무 것도 없는 것이지만, 있다고 하면 분명하고 역역하게 전부 드러나고 있다. 태원 부상좌가 "황금빛 영골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말하고, 석상은 "바닷물이 파도가 하늘까지 넘실거린다"고 한 것처럼, "찾을 곳이 없다." “신발 한 짝을 가지고 서천으로 돌아가다 잃어버렸네.” 달마가 웅이산에서 장례 치른 뒤에, 관을 열어보니 유해도 없고, 인도로 돌아갔다지만, 그의 행방도 알 수 없다는 고사로 게송을 읊고 있다.


[第056則]一鏃破三關
〈垂示〉垂示云。諸佛不曾出世。亦無一法與人。祖師不曾西來。未嘗以心傳授。自是時人不了。向外馳求。殊不知自己脚跟下。一段大事因緣。千聖亦摸索不著。只如今見不見聞不聞。說不說知不知。從什麽處得來。若未能洞達。且向葛藤窟裏會取。試擧看。
〈本則〉擧。良禪客問欽山。一鏃破三關時如何。山云。放出關中主看。良云。恁麽則知過必改。山云。更待何時。良云。好箭放不著所在便出。山云。且來闍黎。良回首。山把住云。一鏃破三關卽且止。試與欽山發箭看。良擬議。山打七棒云。且聽這漢疑三十年。
〈頌〉與君放出關中主。放箭之徒莫莽鹵。取箇眼兮耳必聾。捨箇耳兮目雙瞽。可鄰一鏃破三關。的的分明箭後路。君不見。玄沙有言兮。大丈夫先天爲心祖。

벽암록 56칙 흠산화상의 화살 일촉(一鏃)

“선승 흉내낸다고 깨달음의 세 관문 통과 못해”


{벽암록} 제56칙은 흠산화상과 거양선객과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거양(巨良)선객이 흠산(欽山)화상에게 질문했다. "하나의 화살촉으로 세 관문을 돌파했을 때는 어떻습니까?" 흠산화상이 말했다. "관문속의 주인을 들어내 보여라!" 거양이 말했다. "그러한즉 허물을 알면 반드시 고쳐야지요." 흠산화상이 말했다. "다시 어느 시기를 기다리는가? 당장 고쳐야지!" 거양이 말했다. "화살은 잘 쏘았는데, 잘 맞지는 않았군요."라고 말하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흠산화상이 말했다. "잠깐 보세, 화상!" 거양이 머리를 돌리자 흠산화상은 멱살을 붙잡고 말했다. "하나의 화살촉으로 세 관문을 돌파하는 일은 그만두고 흠산에게 화살을 쏘아 봐라!" 거양이 무슨 말을 하려고 망설이자, 흠산화상이 일곱 방망이를 치면서 말했다. "이 놈은 앞으로 30년 더 헤매야 정신을 차리겠군!"

擧. 良禪客, 問欽山, 一鏃破三關時如何. 山云, 放出關中主, 看. 良云, 恁則知過必改. 山云, 更待何時. 良云, 好箭放, 不著所在. 便出. 山云, 且來黎. 良回首. 山把住云, 一鏃破三關, 卽且止. 試與欽山發箭, 看. 良擬議. 山打七棒云, 且聽, 這漢疑三十年.


차별심 빠진 채 함부로 화살 쏘면
본래 면목 과녁 적중시킬 수 없어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17권 흠산화상전에 보인다. 흠산문수(文邃)화상은 동산양개화상의 법을 이었으며, 풍주 흠산에서 교화를 펼친 선승인데, 그에 대해선 자세히 알 수가 없지만, 설봉의존과 암두전활, 세 사람이 도반이 되어 제방의 선지식을 참문하다 오산에서 설봉이 깨닫고 성도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리고 흠산화상에게 질문을 한 거양선객에 대해서도 전연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행각수행하는 무명의 선승이리라.

어느 날 거양선객이 흠산화상을 찾아와서 "하나의 화살촉으로 세 개의 관문을 돌파했을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질문했다. 관(關)은 관문, 관소로서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문이다. 그런데 세 개나 되는 관문을 돌파했다고 한다. 전쟁에서는 내진(內陣), 중진(中陣), 외진(外陣)의 삼관문(三關門)으로 설치된 난공불락의 돌파하는 것이지만, 선에서는 번뇌 망념의 차별심과 중생심을 초월하고 깨달음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하며, 가장 돌파하기 어려운 세 개의 관문이다. 보통 법신, 반야, 해탈이라고 하고, 동산의 조도(鳥道), 현로(玄路), 전수(展手)의 삼로(三路)라고 하거나 황용의 삼관(三關) 등을 배대하여 언급하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하여 곧바로 여래의 경지를 체득한 입장이다. 거양선객이 자신이 '나는 일체의 차별세계를 초월하여 여래의 경지를 체득했습니다. 나와 같은 선객을 어떻게 제접하겠습니까'라고 흠산화상에게 정면으로 법전(法戰)을 제기하고 있다.

흠산화상은 "그래! 그렇다면 관문을 돌파한 그 주인공을 들어내 보여라!" 즉 삼관(三關)을 하나의 화살로 돌파한 관문의 주인인 그 대장을 내가 화살로 쏘아 볼 테니 지금 여기 내 앞에 들어내 보여라고 재촉한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관문의 주인(關中主)은 무엇인가? 원오는 "주산(主山)은 높고, 안산(按山)은 낮다."고 착어했다. 이 말은 {운문광록}의 말인데, 높은 산은 높은 그대로 낮은 산은 낮은 그대로 관문의 주인공(본래면목)이 본래 그대로 있다고 말한 것이다. '관중의 주인공'은 제불이 출세하기 이전, 부모라는 상대적인 차별심이 일어나기전의 자기 본래면목을 말한다. 그러자 거양은 "그렇습니까? 제가 화살을 쏘는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고쳐서 다시 한번 화살을 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원오는 "벌써 두 번째 차별에 떨어졌다."고 하며, 공격한 장수가 이진(二陣)으로 퇴각하고 있다고 착어했다. 그러나 흠산화상은 틈을 주지 않고 급히 추격하며, "잘못을 고친다고 이진으로 물러가더니 언제 다시 공격의 화살을 쏘려고 하는가? 지금 당장 공격해야지!"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거양은 "내가 화살은 잘 쏘았는데, 과녁에 잘 맞지는 않았군요. 이제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곧장 법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거량은 흠산화상에게 두 번이나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자신이 쏜 화살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흠산화상이라고 힐책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내가 던진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흠산화상에게 정법의 안목을 점검받는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니 그만 두겠다고 큰소리치고 밖으로 나간 것이다. 거양선객이 법당 밖으로 나가는 행동을 보고 흠산화상은 "잠깐 기다리게. 화상!"이라고 하며, 거양선객을 불렀다. 원오는 "부르는 것은 쉬운 일이나, 잡는 일은 어렵다."라고 착어했다. 즉 땅군이 피리를 불며 뱀을 불러모으는 일은 쉬워도 모인 뱀을 붙잡는 일은 어렵다. 뱀을 잘못 취급하다가는 뱀에게 물리기 때문에 처분하는 일은 어렵다고 한 것이다. 떠나가는 거양선객을 불러들이는 일은 쉬우나 지금부터 그를 어떻게 제접 할 것인가 어려운 일이라고 평한 말이다.

거양선객은 흠산화상이 "화상!"이라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머리를 돌려서 '무슨 일인가'하고 흠산화상 앞으로 되돌아 왔다. 원오는 "맞추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흠산화상이 "화상!"이라고 부르는 화살이 거양선객을 적중시켰다고 착어하고 있다. 그 때 흠산화상은 되돌아온 거양선객의 멱살을 붙잡고 말했다. "하나의 화살촉으로 세 관문을 격파했다고 큰 소리 치는 일은 그만두고, 지금 나 흠산에게 한 화살을 쏘아 봐라! 자 어서!"라고 전신의 기력과 지혜의 힘을 다하여 목숨 걸고 던진 선문답이다. 그래서 원오도 "흠산이 학인을 위하여 신명을 아끼지 않고 몸을 호랑이 입에다 옆으로 누웠다."라고 하며, 흠산의 지혜작용은 '역수(逆水)의 파도'처럼 놀랄 정도로 거세게 휘몰아쳤다. 거양선객이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적인 안목을 갖춘 선승이라면 흔이 선승들이 사용하는 고함을 치거나, 주장자를 휘두르는 자신의 기봉을 펼쳐야 하는데, 엉거주춤 머뭇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고 망설였다. 이의(擬議)는 지혜작용이 없는 중생심이다. 마음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순간 불심의 지혜작용과는 어긋나고(擬心卽差), 번뇌 망념이 작동하면 곧바로 불심을 벗어난다(動念卽乖). 흠산화상은 안목없이 선승들의 흉내나 내며 큰소리친 차별심에 떨어진 중생 거양선객에게 잡고 있던 주장자로 곧장 일곱 번 후려치면서 "이 놈아! 오늘은 이정도로 훈계하지만, 앞으로 30년 더 불법의 수행해야 좀 알게 될 것이다"라고 자신이 관중의 주인이 되어 호령하였다. 원오는 '평창'에 당시 거양선객이 안목있는 선승이었다면 흠산화상이 점검받을 곤란한 처지가 되었을 것인데, 그가 안목 없는 선승이었기 때문에 다행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게송으로 읊었다. "그대를 위하여 관문속의 주인공을 내보낸다." 설두는 이 공안을 읽는 사람들에게 관중의 주인(본래면목)을 들어내 보이니 잘 파악하라는 말인데, 원오는 첫 번째 화살을 잘 쏘아 맞추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화살을 쏘는 사람들은 결코 함부로 화살을 쏘지 말라." 관중의 주인공에게 화살을 쏘려고 하는 참선수행자들은 함부로 화살을 쏘면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화살만 잃어버린다. 거양선객처럼, 함부로 쏘지 말라. 일심으로 신중하게 신명(身命)을 아끼지 말고 철저한 구도심으로 관중의 주인공을 쏘아 맞추도록 해야 한다. 관중의 주인공은 항상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하지만, 그를 향해 화살을 쏘아 맞추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화살을 잘 쏘는 일은 어렵다. '눈에 신경 쓰면 귀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한쪽에 치우치고 차별심에 떨어지면 적중시킬 수가 없다. 또한 '귀에 신경쓰지 않으려고 하니 두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눈과 귀 그 어느 한쪽에 신경 쓰고, 취사선택하거나 차별하며 집착하면 관중의 주인공을 쏘아 맞출 수가 없다고 지적한 말이다. "아아! 가련하다. 하나의 화살촉으로 세 관문을 격파했다"고. 거양선객의 질문은 수행자의 참구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누구나 한 화살로 세 관문을 격파한다면, '화살이 지난 뒷길은 분명하다.' 관중의 주인을 맞춘 그 길은 분명한 것이다. "그대 듣지 못했는가? 현사화상이 '대장부란 천지가 개벽되기 전의 마음을 근본(祖)으로 삼는다.'라는 말을" 한 화살로 세 관문을 격파한 대장부는 관중의 주인공인 마음을 깨달아 체득해야 한다고 읊고 있다.



[第057則]處是揀擇
〈垂示〉垂示云。未透得已前。一似銀山鐵壁。及乎透得了。自己元來是鐵壁銀山。或有人問且作麽生。但向他道。若尙箇裏。露得一機。看得一境。坐斷要津不通凡聖。未爲分外。苟或未然。看取古人樣子。
〈本則〉擧。僧問趙州。至道無難唯嫌揀擇。如何是不揀擇。州云。天上天下唯我獨尊。僧云。此猶是揀擇。州云。田厙奴。什麽處是揀擇。僧無語。
〈頌〉似海之深。如山之固。蚊虻弄空裏猛風。螻蟻撼於鐵柱。揀兮擇兮。當軒布鼓。

벽암록 57칙 조주화상과 간택하지 않음

“차별심만 없어지면 지극한 道의 경지 체득”


{벽암록}제57칙은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는 말을 주제로 다음과 같은 선문답을 전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질문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간택하지 않으면 된다'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간택하지 않는 것입니까?" 조주화상이 말했다. "천상에나 천하에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한 존재이다." 스님이 말했다. "이 말 역시 간택입니다." 조주화상이 말했다. "이 멍청한 놈아! 어느 곳이 간택이란 말이냐!" 그 스님은 말을 하지 못했다.

擧. 僧問趙州, 至道無難, 唯嫌揀擇, 如何是不揀擇. 州云, 天上天下唯我獨尊. 僧云, 此猶是揀擇. 州云, 田庫奴, 什處是揀擇. 僧, 無語.


간택, 즉 편견과 오해가 번뇌 불러
수행통해 깨닫게 되면 모든 게 도(道)

본칙의 선문답은 {신심명}의 첫 구절을 인용하여 선문답의 주제로 삼고 조주화상에게 질문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벽암록} 제2칙에도 {신심명}의 '지도무난(至道無難)'을 화제로 선문답을 한 공안을 제시하였고, 또한 58칙, 59칙에도 똑같이 {신심명}의 '지도무난(至道無難)'을 주제로 한 선문답을 {조주록}에서 인용하여 제시하고 있다.

본칙에도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전혀 없다. 오직 취사선택하고 간택하는 분별심이 없으면 지도의 경지'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취사선택하고 간택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은 지도의 경지를 체득하기까지 많은 불법공부와 수행으로 어려운 문제들을 모두 극복한 차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불법의 대의와 어려운 과제(難題)를 완전히 체득했기 때문에 지도의 원리를 통달하고 보니 지도의 경지가 지극히 간단명료하고 쉽다는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에 그렇게 설할 수가 있는 것이다. 중국의 고전과 선어록에 '도는 가까이 있다.' '눈에 부딪치는 것이 모두 도'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도를 찾아서 여기 저기 멀리 헤매며 많은 구도의 노력과 고통과 시간을 극복한 사람이 도를 체득한 뒤에 도는 가까이 있는데 멀리서 찾아 헤맨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원오는 '수시'에 백운수단(1025~1072)의 법문을 인용하여 "지극한 대도인 만법의 진실을 체득하기 전에는 만물과 매사가 의문 덩어리로 뭉쳐서 어디를 가나 은산(銀山)처럼 접근하기 어렵고, 철벽(鐵壁)처럼 오르기 힘들어 전후좌우로 나를 가로막고 있어 뚫고 나가기 어렵다. 그러나 깨닫고 보면 자기 자신이 원래 견고한 절대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은산철벽(銀山鐵壁)은 은과 철은 견고하여 뚫기 어렵고, 산과 벽은 험준하여 접근하기 어려운 것을 말한다. 즉 범정(凡情)과 중생의 분별심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것을 비유한 표현인데, 불가사의한 불심의 경지를 사량분별하는 중생심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사량분별하고 취사선택하는 간택이 없다면 지도의 경지'라는 말은 마조가 "도는 수행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번뇌 망념에 오염되지 않도록 하라"는 설법에 의거한 것이다. 사량분별하는 차별심과 취사선택하는 중생심에 오염되지 않은 마음을 마조는 평상심이라고 하고,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주화상도 처음 남전화상을 참문하고 "무엇이 도입니까?"라고 질문하자, 남전이 마조의 법문을 체득하여 "평상심이 도"라고 대답하고 있다.

평상심은 번뇌 망념이 없는 무심(無心)이기에 "무심(無心)이 도(道)"라고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지극한 도는 평상심으로 일상생활하는 그 가운데 무심의 경지에서 실현되는 것이지 신비한 존재가 아니다. 구체적으로는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이 평상심으로 지혜로운 삶을 살고 있는 매사가 깨달음의 생활로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한 스님은 "지도의 경지를 체득하려면 오직 간택하는 중생심이 없어야 한다"고 했는데, 지도의 경지를 체득하기 위해 취사선택하고 분별하지 않도록 하는 '불간택(不揀擇)'의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질문하고 있다. 생사와 열반을 간택하고, 번뇌와 보리를 간택하고 시비득실을 간택하며 애증호오(愛憎好惡)를 간택하며 사는 중생으로 이러한 간택을 초월하는 방법을 묻고 있는 것이다. 원오도 "쇠가시는 많은 사람들이 삼키지 못한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쉬운 질문이 아니다. 지혜의 안목없이 함부로 이 질문을 쉽게 받아들이면 가시가 목에 걸리게 된다.

조주화상은 "천상에나 천하에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한 존재(天上天下唯我獨尊)"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세존이 출생하여 한 말로 세존이 홀로 유일하게 위대하고 귀중한 존재라는 독선적인 말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의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각기 모두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유일하고 위대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개는 개로서, 고양이는 고양이로서 절대 유일한 존재이다. 조금도 어렵지 않은 지도의 절대적인 모습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천상천하 시방법계에 충만하여 다른 어떤 무엇과 대비할 것도 없이 간택이 끊어지고 일체를 초월한 절대존재의 입장을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조주는 이 한마디로 일체의 사량분별과 간택을 차단하고 범성(凡聖)과 증애(憎愛)와 비시득실의 분별심을 초월한 간택하지 않는 경지를 제시하고 있다.

원오는 조주의 대답에 대하여 "금강으로 주조한 철권(鐵券)"이라고 착어했다. 이 말은 불조(佛祖)도 열 수 없는 한 장의 철권으로 가장 견고한 금강으로 주조한 것이다. 즉 금강과 같이 견고한 틀은 사람 모두가 지니고 있는 것인데,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지도(至道)의 보물을 지금 조주화상이 다시 끄집어내 주었다고 평하고 있다.

질문한 스님은 조주화상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면 좋았을 텐데, 지혜의 안목이 없었기 때문에 "화상의 말씀도 역시 간택인 것"이라고 반문했다. 원오는 "과연 예상했던 대로 조주의 말에 놀아나고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스님은 '아(我)'라는 말이 타(他)와 상대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간택이라고 하고, '홀로(獨)'는 대중(衆)과, '존귀(尊)'함이 천박(卑)함과 간택한 말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아니면 지도의 경지나 절대의 경지를 언어로 표현하면 모든 것이 간택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 라는 입장에서 반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주화상은 "이 멍청한 촌놈아! 어디에 간택이 있다는 말이냐!"라고 나무랐다. 조주화상은 불법의 지혜와 안목도 없는 이 스님을 심하게 욕하며 꾸짖는 한마디인 것이다. 질문한 스님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제법 뛰는 토끼처럼 날카롭게 질문하였지만, 안목없는 졸승이고 보니 결국 기가 죽어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바다처럼 깊고, 산과 같이 견고하네." 이 말은 조주화상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과 '이 촌놈'이라는 조주화상의 대답은 지혜가 바다처럼 깊고 확고부동한 모습이 산과 같이 동요됨이 없이 팔풍(八風)이 불어와도 움직임이 없이 당당한 모습을 칭찬한 게송이다. "모기와 등에(파리)가 허공의 사나운 바람을 희롱하네." 이 말은 {장자}의 우화에 의거하여 조주화상에게 과감하고 무모하게 질문한 스님에 대하여 읊은 게송이다. 즉 모기나 파리와 같은 벌레는 바람이 없을 때는 여기 저기 잘 날아다니지만 허공에 태풍이 불면 어디로 날려갔는데 알 수가 없는 존재인데, 질문한 스님은 태풍과 같은 조주를 만난 모기와 파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땅강아지와 개미가 무쇠기둥을 흔드네." 이 말도 {회남자(淮南子)}의 고사에 의거하여 질문한 스님을 비판한 말인데, 땅강아지와 개미같이 미약한 지혜(스님)로 조주와 같은 부동의 쇠기둥을 움직이려고 하는 무모한 짓을 한 것이다. "분간하고 선택한다는 것. 난간에 매단 헝겊 북 이로다." 조주는 간택도 없는 지도의 세계에서 헝겊 북을 아무리 쳐도 한결같이 반응없는 것처럼, 무심(無心)의 경지에서 살고 있다고 읊고 있다.



[第058則]烏飛免走
〈本則〉擧。僧問趙州。至道無難唯嫌揀擇。是時人窠窟否。州云。曾有人問我。直得五年分疏不下。
〈頌〉象王嚬呻。獅子哮吼。無味之談。塞斷人口。南北東西。烏飛免走。

벽암록 58칙 조주화상과 지도무난(至道無難)의 함정

“깨달음 경지는 시방세계에 두루 있어”


{벽암록} 제58칙은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신심명}의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至道無難)는 설법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는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질문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간택하지 않으면 된다'라고 했는데, 요즘 사람(時人)은 이 말에 집착하여 함정에 빠진 것 아닙니까?" 조주화상이 대답했다. "전에도 어떤 사람이 나한테 이와 똑같은 질문을 했었는데, 5년이 지났지만 아직 어떻다고 분명히 설명할 수가 없네."

擧. 僧問趙州, 至道無難, 唯嫌揀擇, 是時人窟否. 州云, 僧有人問我, 直得五年分疎不下.

본칙의 주제도 {신심명}의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인데, {벽암록}에 세 번째 등장한다. 조주화상은 {신심명}의 이 말을 많이 인용하여 학인들에게 법문을 하였다. 그래서 당시 문하의 제자들과 선승들이 조주화상을 찾아와서 {신심명}의 대표적인 말을 인용하여 조주화상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여기도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찾아와서 "화상은 {신심명}에서 주장하는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간택하지 않으면 된다'라는 말을 자주 인용하여 법문을 하고 있는데, 요즘 사람이 이 말에 너무 빠져 집착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신심명}의 일절에 대해서는 몇 차례 언급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 스님의 질문에서 먼저 주의해야 할 말은 요즘 사람이라는 '인(時人)'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요즘 사람, 혹은 당시의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사람을 지칭한 듯한 객관적인 표현이지만, 질문한 스님은 세간의 여러 일반적인 사람들을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조주화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조주화상 당신은 자구 {신심명}의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란 말을 인용하여 법문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지도무난이라는 언구에 너무 집착하여 함정에 빠져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상당히 날카롭게 비꼬며 힐문하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함정이라고 번역한 말은 과굴(窟)이라는 말인데, 새집, 혹은 구멍이라는 의미이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좁은 구멍에 빠지고, 이 말에 집착한 포로가 되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벽암록} 제3칙의 수시에 "(선승들이 제시한) 하나의 선기작용이나 하나의 경계, 혹은 한마디의 말이나, 하나의 문구를 가지고 깨달음을 체득하려는 근거로 삼으려 한다면 멀쩡한 살을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구멍에 떨어지고 함정에 빠지게 된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과굴(窟)은 깨달음의 경계나 언어 문자 등에 집착하여 벗어나지 못한 것을 말한다. 번뇌나 생사, 보리와 열반, 미혹함과 깨달음, 그 어느 한쪽의 경계에 치우치거나 집착하면 모두 함정(窟)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에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원오는 "저울추를 밟으니 무쇠처럼 견고하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저울추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올바르게 저울질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불법수행에서 자타(自他)와 미오(迷悟), 번뇌와 보리, 중생과 부처 등 어느 한쪽에만 집착하면 그 집착은 무쇠와 같이 단단하게 굳어버려서 진실된 불법수행을 할 수가 없게 된다고 평한 말이다.

이와 같은 의미로 금으로 만든 쇠사슬에 속박된 것을 '금쇄난(金鎖難)'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금으로 만든 쇠사슬은 아름답고 귀중한 것이지만 여기에 속박되면 도리어 자유를 잃어버리고 만다. {전등록} 27권에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무위무사인이 어째서 금의 쇠사슬에 얽힌 수난을 받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조작심과 작위성이 없고, 번뇌 망념의 일없이 무심의 경지에서 무사하게 사는 사람이 금쇄난에 떨어진 것은 무위무사라는 조사선의 참된 정신을 잘못 이해하고 글자대로 생각하여 무위무사라는 언어문자에 집착하고 빠져서 무애자재한 자유와 지혜작용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황용혜남선사어록}에도 어떤 스님이 "무위무사인이 어째서 황금의 쇠사슬에 속박된 수난을 받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는 말도 똑같은 입장이다. {벽암록} 88칙에는 "금쇄(金鎖)의 현관(玄關)을 때려 부숴라!"라는 말도 있다. 현관은 깨달음을 체득하는 지극한 관문인데, 깨달음의 경지에 집착하지 말고, 무애자재한 반야의 지혜를 전개하는 삼매경을 뚫고 나가도록 지시한 말이다. 그밖에도 어떠한 깨달음의 경지에도 안주하거나 주착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강조한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는 반야경전에서 많이 주장한 무주(無住), 무상(無相)의 구체적인 실천을 선불교의 입장에서 강조한 말이다. 질문한 스님은 조주화상 당신은 수시로 {신심명}의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법문하고 있는데, 이 말에 속박되고 집착하여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원오는 "질문한 스님이 이 말의 함정에 빠져있으면서 남도 그렇게 함정에 빠져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조주화상까지 의심하고 있다"고 꾸짖고 있다.

그러나 조주화상은 질문한 스님을 향하여 "아! 그 일 말인가? 전에도 어떤 사람이 나한테 그대와 똑같은 질문을 했었는데, 5년이 지났지만 아직 뭐라고 분명히 설명 할 수가 없어 말없이 가만히 있네"라고 바보처럼 태연하게 대답했다. 조주화상은 '분소불하(分疎不下)'라고 말하고 있는데, 무엇이라고 분명하게 해명(分疎) 할 수가 없다(不下)고 말한 것이다. 원오는 조주의 이 말에 대하여 "질문에 밀려 낯을 붉히는 것보다 바른 말을 하는 것이 낫다"고 착어하여 조주화상이 솔직하게 대답한 것을 칭찬하고 있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는 생기있는 법문은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만이 설할 수 있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지도가 어려움이 없다는 언어문자로 지도의 경지를 체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의 경지는 언어로 설명 할 수 없다는 언어도단(言語道斷)과 중생심으로 체득할 수 없다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을 강조한다. 그러한 지도(至道)의 세계를 어떻게 5년이나 10년이 지났다고 언어 문자로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천년만년이 지나도 언어문자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조주화상은 질문한 스님에게 뭐라고 분명히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가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원오는 '평창'에 "조주는 함정에서 그에게 대답한 것인가? 함정 밖에서 그에게 대답한 것인가?" 이 공안을 읽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말에 집착하면 함정에 떨어진 것이고, 이 말을 놓아버린 사람은 천지와 하나되고, 일체의 만물을 초월하여 곳에 따라 주인이 되어 자유자재한 지혜로 살수가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코끼리(象王)가 기지개를 피며 신음하고, 사자가 고함을 친다." 이 말은 조주화상의 역량이 광대하고 또한 그의 지혜작용은 준엄한 모습을 형용하여 짐승의 왕이라고 하는 코끼리과 사자에 비유하고 있다. 빈신(嚬呻)이라는 말은 평소에 초원에 누워있는 짐승이 손과 발을 쭉 펴고 하품을 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코끼리가 초원에 누워 있다가 크게 다리를 펴고 긴 코를 높이 쳐들어 움직이며, 길게 으르렁거리며 신음하는 것처럼, 조주화상은 태연한 얼굴로 5년이 지났는데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고 대답한 것을 읊고 있다.

원오는 "부귀중의 부귀"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조금도 결여된 것이 없는 복덕원만한 모습이라고 칭찬하였다. 또한 역량이 광대한 것은 코끼리와 같고, 지혜작용이 민첩하고 준엄한 것은 사자와 같다. 사자가 한번 포효하면 수많은 짐승이 항복하는 것처럼, 조주화상이 스님에게 대답한 말을 사자의 포효에 비교하여 읊고 있다. 조주화상의 대답은 평범한 말로 대답한 것이기에 '맛도 없는 말씀'이다. 그러나 맛도 없는 이 말에 무한의 자미(滋味)가 있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 조주의 말을 씹고 또 씹어서 묘미(妙味)를 찾아봐야 한다. 맛이 없는 말이기 때문에 단맛인가? 쓴맛인가? 어떤 맛인가? 찾아서 사량분별하는 '천하 사람들의 입을 막아 버렸다.' 지도의 경지는 공간적으로 '남북동서' 시방세계에 두루하며, 시간적으로 언제나 '태양(까마귀)과, 달(토끼)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第059則]唯嫌揀擇
〈垂示〉垂示云。該天括地。越聖超凡。百草頭上指出涅槃妙心。干戈叢裏點定衲僧命脈。且道承箇什麽人恩力。便得恁麽。試擧看。
〈本則〉擧。僧問趙州。至道無難。唯嫌揀擇。纔有語言是揀擇。和尙如何爲人。州云。何不引盡這語。僧云。某甲只念到這裏。州云。只這至道無難唯嫌揀擇。
〈頌〉水灑不著。風吹不入。虎步龍行。鬼號神泣。頭長三尺知是誰。相對無言獨足立。

벽암록 59칙 조주화상과 지도무난(至道無難) 법문

“앎이 아닌 실천적 삶으로 분별심 버려라”


{벽암록} 제59칙도 조주화상이 {신심명}의 지도무난(至道無難)의 법문에 대한 선문답을 전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질문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 단지 간택하는 마음이 없으면 된다.'라고 하였지만, 겨우 말을 하기만 하면 곧 간택인데, 화상께서는 어떻게 사람들을 지도하시겠습니까." 조주화상이 대답했다. "그대는 왜 이 말을 다 인용하지 않는가." 스님이 말했다. "저는 단지 여기까지 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주화상이 말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 단지 간택하는 마음이 없으면 된다."

擧. 僧問趙州, 至道無難, 唯嫌揀擇. 有語言, 是揀擇. 和尙, 如何爲人. 州云, 何不引盡這語. 僧云, 某甲只念到這裏. 州云, 只這至道無難, 唯嫌揀擇.


'지극한 道' 이미 여러 번 배워
이젠 말 대신 진실하게 실천을

본칙의 공안도 {조주록} 상권에 의거하고 있는데, 역시 조주화상이 {신심명}의 주제를 인용하여 자주 설법한 것을 문제로 하여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 단지 간택하는 마음이 없으면 된다"라고 하였지만, 무슨 말을 하기만 하면 곧바로 지도의 경지와는 반대인 취사선택하고 분별하는 간택에 떨어지게 되는데, 화상께서는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고 어떻게 사람들을 지도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조주화상은 "한 마디의 말이라도 하게 되면 취사 분별심에 떨어지게 된다"라고 설한 것처럼, 깨달음의 경지는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경지(言語道斷)이며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이다. 개념화된 언어로 표현하면 벌써 깨달음의 경지를 대상화하여 설명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차별심과 분별심인 간택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조주화상은 질문한 스님에게 "그대는 왜 {신심명}의 구절과 내가 한 말을 전부다 인용하지 않는가"라고 다그쳤다. 조주화상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신심명}의 첫 번째 구절에도 "지극한 불도를 체득하는 일은 조금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직 취사선택하는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차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깨달음의 경지는 분명히 드러나리라"라고 하였다. 또 '평창'에도 언급한 것처럼, 조주화상은 {신심명}의 일절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있다. "지극한 불도는 조금도 어렵지 않다. 오직 취사 선택하는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말하는 순간에 벌써 취사선택(揀擇)하는 마음에 떨어지거나 깨달음(明白)의 세계에 떨어진다. 나는 깨달음(明白)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런데 그대들은 이 깨달음(明白)의 경지를 수행의 목적으로 삼고 보호하고 아끼려고 하는가." 조주화상의 설법은 {벽암록} 제2칙에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나의 설법을 전부 언급하지 않고 왜 일부만 제시하여 질문하고 있는가라고 역습하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원오는 "도적은 소인배이지만 지혜는 군자보다 뛰어나다"라고 {임제록행록}의 앙산혜적의 말을 인용하여 착어하고 있다. 즉 조주는 정말 노련한 도적과 같이 교묘하게 질문하는 스님의 문제를 완전히 빼앗아 빈털터리로 만들었다. 조주라는 도적의 지혜는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하고 있다.

질문한 스님은 "저는 단지 여기까지만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머리를 숙이고 교묘하게 몸을 피하고 한발자국 더 나아가 조주화상을 시험하는 용기있는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노련한 조주화상의 안목을 간파할 수가 있겠는가. 이 스님은 조주화상이 역습한 화살은 일단 피했지만, 조주화상의 날카로운 칼은 피할 수가 없었다. 원오도 "두 개의 진흙 덩어리를 가지고 논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이 스님은 이래도 저래도 진흙을 가지고 노는 어린애 취급을 받고 있다고 평가한다. 노련한 조주화상에게 덜미가 잡혀서 자유를 잃어버리고 진흙탕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조주화상은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 단지 간택하는 마음이 없으면 된다"라고 {신심명}의 구절을 그 스님을 위해서 다시 그대로 설하고 있다. 그대는 오직 이 일절의 의미를 철저하게 깨닫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설법한 것이다. 지극한 불도를 체득하려면 먼저 취사 선택하거나 분별하고 차별하며 간택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고 결론적으로 설한 것이다.

지극한 불도를 체득한다는 것은 선악(善惡), 범성(凡聖), 시비(是非), 득실(得失)과 탐진치 삼독심으로 분별하는 번뇌 망념을 벗어나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신심명}의 일절을 잘 외우도록 하라고 당부한 법문이다. 원오는 "이처럼 학인을 위한 교화는 조주노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스님의 눈동자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조주화상은 평상의 말로 지도의 당체를 제시하여 질문한 스님의 눈동자도 바꾸었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이 {신심명}의 지도무난(至道無難)에 대한 법문을 제시할지라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안목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라고 평한 말이다.

간택하는 마음은 중생심의 상대적인 차별심이며 분별심이다. 지극한 불도란 이러한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자각하여 본래 청정한 불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선에서 말하는 번뇌 망념의 중생심에서 청정한 불성을 깨닫게 되면 그대로 부처를 이루는 법문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하는 것이다. 현수법장의 {화엄오교장}에서도 "한 생각의 번뇌 망념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대로가 부처이다(一念不生名爲佛)"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번뇌 망념이 없어진 그대로가 불심이기 때문이다. 본래 청정한 불심을 깨닫는 것이 지도(至道)이며 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혜능도 "도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으며, 마조도 본래 청정한 평상심이 도라고 설한다. 이러한 불법의 수행구조는 {대승기신론}에서 중생심(不覺)에서 불심(本覺)으로 되돌아가는 논리적인 구조로 설명하고 있다.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본래의 불심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수행방법이 참선수행이며 불법을 체득하는 깨달음인 것이다.

설두화상은 게송으로 읊었다. "물을 부어도 물이 묻지 않네." 마치 연꽃잎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면 물방울구슬이 되어 굴러 떨어지며 연잎에 물이 묻지 않는 것처럼, 조주화상의 대답은 이와 같이 물이 스며들어갈 틈도 없다. 이 말은 {전등록} 제9권 위산장에 보이는 말인데, 조주화상이 견고한 지도의 경지를 제시한 것을 읊은 것이다. "바람으로 불어도 들어가지 않네." 조주화상의 지혜작용은 머리위에 하늘이 없고, 발아래 땅이 없이 바람을 불어넣을 틈도 없었다. 즉 지도(至道)는 가없고(無邊) 법계에 충만하여 마치 허공과 같다. 허공이 무슨 장애가 있겠는가. 원오는 조주화상의 대답은 "허공과 같이 걸림 없이 무애자재한 지혜작용을 펼쳤고, 견고하기가 철석(鐵石)과 같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끊을 수도 없고, 쳐부술 수도 없는 견고한 대답이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범과 같이 걸어가고, 용과 같이 간다." 범은 바람을 일으키며 달리고 용은 구름을 일으키며 올라가는 것처럼, 위풍당당하여 감히 접근 할 수 없고, 변화무쌍하여 자유 자재한 조주화상의 선기작용을 읊고 있다. 원오는 "조주화상, 그는 자재를 얻었다"라고 칭찬하고 있다. 조주화상의 대답에는 질문한 스님은 물론, "귀신까지 울면서 소리친다. 머리의 길이가 삼척(三尺), 그가 누군지 알 수 없네. 갑자기 머리의 길이가 삼척인 요괴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그를 상대하고 마주하여 말없이 외발로 서 있다"고 읊고 있다.

'평창'에 "듣지 못했는가. 어떤 스님이 동산(洞山)스님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 질문하자, 동산스님은 '머리는 석자요, 목의 길이는 두 치이다'"고 대답했다. '머리 길이가 삼척'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사람의 풍모가 아니다. 조주의 풍모임과 동시에 지도의 경지는 일체의 형상을 초월한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다시 그와 '상대하지만 말이 없다.'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며 언제나 상대하고 있는 것으로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있는 그는 누구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홀로 존귀하게 서 있는 조주이다.



[第060則]拄杖呑乾坤
〈垂示〉垂示云。諸佛衆生本來無異。山河自己寧有等差。爲什麽卻渾成兩邊去也。若能撥轉話頭。坐斷要津。放過卽不可。若不放過。盡大地不消一掜。且作麽生是撥轉話頭處。試擧看。
〈本則〉擧。雲門以拄杖示衆云。拄杖子化爲龍。呑卻乾坤了也。山河大地甚處得來。
〈頌〉拄杖子呑乾坤。徒說桃花浪奔。燒尾者不在拏雲攫霧。曝腮者何必喪膽亡魂。拈了也。聞不聞。直須灑灑落落。休更紛紛紜紜。七十二棒且輕恕。一百五十難放君。師驀拈拄杖下座。大衆一時走散。


벽암록 60칙 운문화상의 주장자

“산하대지는 곧 '나'…다른 데서 찾지 말라”


{벽암록} 제60칙은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화상이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운문화상이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이 주장자가 변화하여 용이 되어 천하를 삼켜버렸으니, 산과 강(山河) 대지는 어디에 있는가?”

擧. 雲門, 以仗示衆云, 仗子化爲龍, 呑乾坤了也. 山河大地甚處得來.


주장자는 자신이자 '한 생각'…
한 생각이 용 만들고 천하도 삼켜

운문화상의 법문은 {운문광록} 중권에 수록하고 있다. 운문종의 조사인 운문화상은 설봉의존의 법을 이은 당말의 선승으로 {벽암록} 제6칙의 '날마다 좋은 날'을 비롯해 18회나 등장하고 있다. 운문화상이 어느 날 법당에서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법문한 것이다. 주장자는 선승이 항상 몸에 지니는 7가지 생활도구의 하나로서 길이가 7척 정도의 나무지팡이다. 원오는 운문화상이 주장자를 잘 사용하는 선승으로 평가하며, 임기응변에 능숙하고 자유자재한 작가로 학인들을 움켜쥐고(把住) 놓아주는(放行) 교화수단과 중생들의 번뇌 망념을 차단하는 방편의 지혜(殺人刀)와 지혜작용을 발휘하게 하는 수단(活人劍)도 뛰어나다고 착어하고 있다. {벽암록} 22칙에 설봉화상이 남산의 맹독을 가진 독사를 대중에게 제시하였을 때 운문은 주장자를 들고서 응답하고 있다.

운문화상은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이 주장자가 용으로 변화하여 천하를 꿀꺽 삼켜버렸다. 산과 강(山河) 대지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질문하고 있는 법문이다. "주장자가 용으로 변화하였다"는 말에 원오는 "무슨 용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는가. 주장자는 주장자 그대로 괜찮지 않는가"라고 착어하고 있다. 사실 주장자가 용이 되지 않아도 된다. 주장자가 천지를 삼켰다고 해도 좋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의 주장자는 자기자신의 주장자이며 본래면목의 주장자이다. 원오가 '수시'에 "소위 제불과 중생이 본래 다름이 없는 일심(一心)의 당체이며 산과 강이 자기와 어찌 차등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처럼, 일체 만물과 자기는 하나인 것이다. 산하가 즉 자기이며 자기가 곧 산하인 것이다. 차등이 있다고 보는 것은 중생심의 분별심이다. 그래서 {신심명}에는 만법일여(萬法一如)라고 읊고 있다.

화엄철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일체의 모든 사물이 각자의 독특한 모양과 존재하는 그대로 독자성을 상실하지 않고 그대로 만물과 서로 상즉(相卽)하며, 하나의 사물은 일체의 만물을 포용하면서도 그 독자성의 하나는 만물과 서로 상입(相入)하고 있다고 설한다. 즉 자기라는 하나의 존재는 무한한 공간인 시방세계의 중심이기 때문에 자기라는 하나는 일체의 만물을 포용한 만법의 근원인 것이다.

사실 주장자라는 이름도 임시로 붙인 것이며, 운문화상 자신이 항상 손에 들고 다니는 생활도구이기에 편의상 법당에서 대중들에게 제시하여 설법한 것이다. 자신의 손과 발과 육체를 마음대로 움직이고 활용하는 것처럼, 선승의 주장자나 생활도구도 마찬가지로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는 지혜로운 도구이기 때문에 주장자는 곧 자기 자신인 것이다.

운문화상이 주장자가 "하늘과 땅(乾坤)을 삼켜버렸다"는 말에 원오는 "천하의 납승들의 목숨(性命)이 보존하지 못한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이미 주장자가 삼켜버렸기 때문에 주장자의 목숨 그밖에 납승의 목숨이 존재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천하의 납승도 주장자와 하나가 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산과 강과 대지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말에 원오는 "시방에는 벽도 없고, 사면에는 문도 없다. 동서남북 사유 상하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미친 소리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자기 주장자가 온 우주를 모두 삼켜버렸기 때문에 장벽도 없어졌고, 관문도 없는 무한의 공간이 단지 하나의 주장자가 되었기에 그곳에는 제불도 없고 중생도 없는데 산과 강과 대지가 있을 까닭이 있겠는가. 만약 주장자라는 대상에 집착하면 또다시 차별심에 떨어진 중생이 된다.

그래서 원오는 '평창'에 "몸과 마음은 하나이며, 몸 밖에 다른 것도 없다(身心一如 身外無余)"라고 주장한 혜충국사의 말로 입증하고, 또 중생이 마음과 사물에 대한 차별과 분별에 떨어진 것이라고 지적하며, {전등록} 제10권에 전하는 장사경잠(長沙景岑)선사의 유명한 법문을 인용해 주의 주고 있다. "장사선사가 말했다. '불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불법의 진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단지 종전의 식신(識神:분별의식)에 의지하여 사물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무량겁의 오랜 세월동안 생사 망념의 근본을 어리석은 사람은 본래인(本來人)이라고 한다.'"

식신(識神)은 {기신론}에서 분류한 중생심으로 불각(不覺)의 마음인데, 미오(迷悟), 법성(凡聖)과 생사와 열반을 차별하는 분별의식이다. 불심의 본각(本覺)은 진망(眞妄)과 미오(迷悟)는 둘이 아닌 불이(不二)이며 다르지 않는 불이(不異)인데, 중생심과 불심을 대조해 분별하는 것은 중생의 차별심이다. 참선 수행자가 이러한 불법의 진실을 잘 체득하지 못하는 것은 한결같이 분별하는 중생심(識神)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식신(識神)은 불법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의 한 생각이며, 무량겁이라는 긴 세월에 생사망념에 윤회한 미혹한 중생심의 근본인데, 불법의 지혜를 체득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은 이 식신을 본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읊었다. 주장자와 자기는 하나이며, 만물과 자기는 본래 하나인데, 상대적으로 분별하고 차별하는 것은 중생심(식신)인 것이다. 자신이 젓가락을 갖고 식사한다는 의식을 하지 않고 무심하게 식사 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주장자를 갖고 시방의 일체 만물을 자신의 생활공간과 도구로서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의 안목이 있어야 한다.

설두화상은 게송으로 읊었다. "주장자가 건곤을 삼키니" 본칙의 공안을 이 한마디로 읊고 있다. "복사꽃 떨어지는 물결을 부질없이 말해 무엇하랴" 춘삼월 복사꽃이 필 때 붉은 꽃잎이 용문(龍門)의 물위에 떨어질 무렵, 고기가 몰려와 용문 삼단의 폭포를 뛰어 올라 용이 되어 승천한다는 고사를 토대로 해 주장자가 건곤을 삼켰다고 하는 말에 대해 설두는 그럴 필요가 없다. 주장자는 주장자로 무엇이 부족한가? "꼬리를 태운 놈이라고 해도 구름을 잡고 안개를 움켜쥐지는 못하거늘" 삼단의 폭포를 뛰어오른 용은 천화(天火)가 잉어로 살던 시대의 유물인 꼬리를 불로 태워버린다고 하지만, 구름과 안개를 마음대로 움켜진 살아있는 진짜 용은 꼬리를 태우거나 용문의 폭포를 뛰어넘을 필요가 없다. 용은 원래 용인데, 망상의 꼬리를 제거하지 않아도, 폭포를 뛰어올라 진짜를 추구하지 않아도 그대로 건곤을 삼킨 천진불인 것이다. "뱃속의 부레를 말리는 놈(용이 못된 잉어)이 되었다 해도 어찌 정신을 잃을 소냐" 용문의 폭포를 오르지 못한 낙제한 고기(중생)나 뛰어 오른 용(부처)이나 본래의 입장에서 볼 때, 일미(一味) 평등한 것인데 무슨 정신없이 슬퍼하고 실망하며 낙담할 필요가 있겠는가.

설두는 "이것으로 법문은 다 했다"고 하며 주장자가 용이 되어 건곤(乾坤)을 삼킨 공안의 이야기를 끝낸다고 한다. 여러분은 내가 한 말을 '들었는가. 못 들었는가.' 이해했는가. 이해하지 못했는가. '곧바로 깨끗하고 산뜻해야 한다' 산뜻하고 깨끗해 일체의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본래 청정한 모습을 읊고 있다. 보고 듣는 사물에 조금도 걸림없이 흐르는 물에 땀에 젖은 얼굴을 씻는 것처럼 깨끗한 경지에서 본래 청정한 불심에 계합한 경지를 말한다.

"다시는 지저분하고 어지럽게 하지 말라." 앞의 산뜻한 본래 청정에 반대된 분별 잡념에 떨어진 중생심에 떨어지지 말라는 충고이다. "72 방망이도 또한 가벼운 용서이니, 150 방망이를 쳐도 그대를 용서해 주기 어렵다." 분별망상에 떨어진 중생은 72 방뿐만 아니라 150 방망이를 쳐도 용서할 수 없다. "돌연 선사(설두)가 주장자를 들고 법좌에서 내려오니 대중들이 모두 흩어졌다." 설두의 주장자에 얻어 맞을까봐 걱정하던 대중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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