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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10) 91칙 ~ 100칙

벽암록(10) 91칙 ~ 100칙 벽암록 제91칙 염관(官)화상과 무소뿔 부채 마음부채 놓고 왈가왈부…바람은 어디에? {벽암록} 91칙은 염관화상과 무소뿔 부채를 주제로 한 다음과 같은 선문답이다. 염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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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091則]犀牛猶在
〈垂示〉垂示云。超情離見。去縛解粘。提起向上宗乘。扶豎正法眼藏。也須十方齊應八面玲瓏。直到恁麽田地。且道還有同得同證同死同生底麽。試擧看。
〈本則〉擧。鹽官一日喚侍者。與我將犀牛扇子來。侍者云。扇子破也。官云。扇子旣破。還我犀牛兒來。侍者無對。投子云。不辭將出。恐頭角不全。雪竇拈云。我要不全底頭角。石霜云。若還和尙卽無也。雪竇拈云。犀牛兒猶在。資福畫一圓相。於中書一牛字。雪竇拈云。適來爲什麽不將出。保福云。和尙年尊。別請人好。雪竇拈云。可惜勞而無功。
〈頌〉犀牛扇子用多時。問著元來總不知。無限淸風與頭角。盡同雲雨去難追。雪竇復云。若要淸風再復。頭角重生。請禪客各下一轉語。問云。扇子旣破。還我犀牛兒來。時有僧出云。大衆參堂去。雪竇喝云。抛鉤釣鯤鯨。釣得箇蝦蟆。便下座。

벽암록(10) 91칙 ~ 100칙
벽암록 제91칙 염관(官)화상과 무소뿔 부채

마음부채 놓고 왈가왈부…바람은 어디에?


{벽암록} 91칙은 염관화상과 무소뿔 부채를 주제로 한 다음과 같은 선문답이다.

염관화상이 어느 날 하루 시자를 불러 말했다.

"무소뿔 부채를 가져오너라!"

시자가 말했다. "부채가 부서졌습니다."

염관화상이 말했다. "부채가 부서졌다면 나에게 무소를 되돌려 다오."

시자는 대꾸를 하지 못했다.

투자(投子)선사가 말했다. "사양치 않고 갖다 드리겠습니다만, 뿔이 온전치 못할까 걱정입니다."

설두선사가 말(拈)했다. "나는 온전치 못한 뿔을 요구한다."

석상(石霜)선사가 말했다. "화상께 되돌려 줄 것이 없다."

설두선사가 말했다. "무소는 아직 그대로 있다."

자복(資福)선사는 일원상을 그리고, 그 가운데 우(牛)자를 썼다.

설두선사가 말했다. "조금 일찍이 왜 빨리 제시하지 않았는가?"

보복(保福)선사가 말했다. "화상은 춘추가 높으니 따로 사람에게 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설두선사가 말했다. "고생을 했지만 공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擧. 鹽官一日喚侍者, 與我將犀牛扇子來. 侍者云, 扇子破也, 官云, 扇子旣破, 還我犀牛兒來, 侍者無對. 投子云, 不辭將出, 恐頭角不全. 雪竇拈云, 我要不全底頭角. 石霜云, 若還和尙卽無也. 雪竇拈云, 犀牛兒猶在, 資福一圓相, 於中書一牛字. 雪竇拈云, 適來爲什不將出. 保福云, 和尙年尊, 別請人好. 雪竇拈云, 可惜勞而無功.


부채질해야 시원한 바람이 일 듯
본래 갖춘 불성도 닦아야만 체득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7권 염관제안(官齊安)전에 보인다.

염관(755~817)화상은 마조의 법을 이은 선승으로 항주 염관의 해창원에 거주하며 선법을 펼쳤다. 그의 전기는 노간구(盧簡求)가 지은 <탑비>를 비롯하여 {조당집} 15권, {송고승전} 11권 등에 전하고 있는데, 속성이 이씨, 당 왕실의 후손으로서 선종(宣宗)이 한때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신라의 범일(梵日)국사도 그의 법을 계승했다. 황제는 오공(悟空)선사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본칙은 날씨가 무더운 여름철에 선승들이 부채를 사용하면서 나눈 선문답이다. {아함경}에도 아난과 라운이 부채를 손에 들고 세존을 시중한 사례가 있으며, {선원청규}에도 옆 사람이 바람을 싫어하면 부채를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주의가 보인다. {연등회요} 4권에 마곡보철(寶徹)선사가 부채를 사용하자 어떤 스님이 "바람의 성품(風性)이 항상 움직이며 일체처에 편만되어 있는데 부채를 굳이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그대는 바람의 성품이 편만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바람 그 자체를 모르는군." "바람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마곡은 잠자코 부채를 부쳤다는 일단이 보인다. 바람이 일체처에 두루하지만, 부채질을 하지 않으면 바람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일체 중생이 불성을 구족하고 있지만 원력을 세우고 발심수행해야 보리 열반의 경지를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염관화상이 시자에게 "무소뿔 부채를 가져오너라!"고 말했다. 옛날에는 무소뿔로 부채를 만들었다고 한다. 염관화상은 부채가 부서졌다는 사실을 알면서 일부러 시자의 안목을 열어주기 위해서 부채를 가져오라 했다. 부채에 용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자의 본래면목을 제시해보라는 지시이다. 시자는 부채라는 사물에만 집착하여 "부채가 부서져 버렸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염관화상은 "부채가 부서졌다면 그 무소 뿔 부채의 골격은 남아 있겠지. 그것이라도 가지고 오라." 즉 부서진 부채는 그만두고 그대의 본래면목이나 제시해 보라니까. 시자는 화상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여 대답을 하지 못했다.

투자대동(投子大同)선사가 시자를 대신하여 말했다. "사양치 않고 화상께 갖다 드리겠습니다만, 부채가 부서져 뿔의 모양이 일그러졌습니다." 즉 본래면목(부채)은 그대로 언어 문자로 설명하거나 제시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손으로 집어 들거나 언어 문자로 설명하면 본래면목을 상대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한 부분만을 표현하게 되기 때문에, 진여법성 그 전체를 온전하게 제시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이다. 설두선사는 투자선사의 대어(代語)를 꼬집어서 "나는 온전치 못한 뿔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즉 제시할 수도 없는 본래면목을 제시할 수가 있는가? 온전치 못하다고 말하는데, 온전치 못한 진여법성이 있는가? 그런 모습을 제시해 보시요라고 날카롭게 꼬집어서 비판하고 있는 말이다.

석상경제(石霜慶諸)선사도 시자를 대신해서 "화상께 되돌려드리고 싶은데 나에게 한 물건도 드릴 것이 없다"고 말했다. 본래 무일물이며 무상 무아인 본래면목을 어떻게 돌려 드릴 수가 있겠는가. 설두선사는 석상의 대어를 꼬집어서 "무소는 아직 그대로 있다"고 말했다. 석상선사가 없다고 말했지만 본래면목(무소)은 항상 여전히 있는 것이며, 되돌려 준다고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복여보(資福如寶)선사는 하나의 둥근 원상을 그리고, 그 가운데 우(牛)자를 써서 무소는 여기에 있습니다 라고 했다. {벽암록} 33칙에도 자복선사는 일원상(一圓相)으로 법문을 제시하고 있다. 일원상은 시방삼세에 두루하는 우주를 표현하는데, 그 가운데 우(牛)자를 써서 염관화상에게 무소(본래면목)의 골격을 염관화상께 돌려드리고 있다. 자복의 대어에 대하여 설두선사는 "조금 일찍이 왜 빨리 제시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했다. 그런 훌륭한 소가 있었다면 왜 좀 더 빨리 가지고 왔어야지, 지금까지 뭐하고 있는가라고 야유하고 있다. 원오도 "그림자를 가지고 노는 한심한 놈"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마지막에 설봉의 제자 보복종전(保福從展)선사가 시자를 대신하여 말했다. "화상은 춘추가 높으니 다른 사람에게 (시자를) 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화상께서 아까는 부채를 가지고 오라 하시고, 이번에는 무소를 가지고 오라 하시니 나이가 들어 망령이 든 것 같군요. 나로서 도저히 화상의 시자가 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시자를 맡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즉 본래면목은 남에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화상 자신이 찾아야 할 일이라고 한 말이다. 설두선사가 보복의 대어에 대하여 "애써 노력했지만 공(功)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라고 비꼬며 평했다. 그대가 지금 여기서 시자로 살면서 수행하지 않고 이곳을 떠나간다면 고행하고 수행해도 영원히 아무런 깨달음과 본래면목을 체득하지 못하고 만다고 염관화상을 대신하여 지적한 말이다.

이공안은 염관화상과 시자의 대화를 중심으로 투자, 석상, 자복, 보복 등 4명의 선승들이 시자의 대변을 한 말에 대하여 설두는 염관화상을 대변한 답변을 싣고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무소뿔 부채를 오랫동안 사용했네." 무소뿔 부채라는 본래면목은 사람들이 본래 구족하고 있기에 언제나 사용하고 있다. "물어보면 의외로 아무도 모르네." 그런데도 사람들에게 본래면목을 물어보면 모두가 잘 모른다. 매일 자신의 삶으로 사용하면서도 알지 못한다. "무한한 청풍(淸風)과 뿔(頭角)" 석상 등 4인 선승의 대어에 대하여 읊었다. 무소이기에 뿔이라고 하고, 부채이기에 바람도 일으킨다고 했지만, "구름과 비와 똑같아 뒤쫓기 어렵다." 자취나 흔적이 없기에 포착할 수가 없다. 설두화상이 다시 말했다. "선객들이여! 각기 깨달음을 체득하는 한마디(一轉語)를 말해라." 앞의 4인 선승은 이 공안에 대하여 무한한 청풍을 일으키고, 무소뿔의 위용을 거듭 떨쳤는데, 그대들도 심기를 일전시키는 한 마디를 말해 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설두화상은 염관화상과 똑같이 다시 말했다. "부채가 부서졌다면 무소를 되돌려다오." 이때 어떤 스님이 나오면서 말했다. "대중들이여! 설법이 끝났으니 선당으로 가자!" 상당설법이 끝났으니 각자 선당에 가서 편히 쉬라는 말은 주지가 해야 하는 말이다. 이 스님은 설두화상이 대중에게 요구한 한 마디(一轉語)에 대한 대답으로 한 말이다. 원오가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당겼군"이라고 착어한 것처럼, 설두화상이 처음 한마디를 해 보라고 했을 때 곧장 말했어야지, 지금 늦게 서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래서 설두화상이 고함을 한번 치고, "낚시를 던져 고래를 낚으려 했더니 겨우 새우를 낚을 줄이야"라는 말을 마치고 곧 법석에서 내려왔다. 대중들에게 안목있는 한 마디의 견해를 말하라고 한 것은 고래를 낚으려 한 것인데, 겨우 새우 한 마리인가.

 

[第092則]世尊便下座
〈垂示〉垂示云。動絃別曲。千載難逢。見免放鷹。一時取俊。總一切語言爲一句。攝大千沙界爲一塵。同死同生。七穿八穴。還有證據者麽。試擧看。
〈本則〉擧。世尊一日陞座。文殊白槌云。諦觀法王法。法王法如是。世尊便下座。
〈頌〉列聖叢中作者知。法王法令不如斯。會中若有仙陀客。何必文殊下一槌。

벽암록 제92칙 세존의 설법

문수보살 뒷북이 소용없었을 것을…

{벽암록} 제92칙은 세존의 설법과 문수의 해설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세존께서 어느 날 설법하기 위해 법좌에 올랐다. 문수보살이 종을 치면서 말했다. "법왕의 설법을 자세히 관찰하라. 법왕의 가르침은 이와 같다" 세존은 곧 법좌에서 내려 오셨다.

擧. 世尊一日陞座. 文殊白槌云, 諦觀法王法, 法王法如是. 世尊便下座.


근원적 불심의 지혜 설한 '침묵'
8만 사부대중 가운데 知音 없어

본칙의 공안은 {종용록} 제1칙에도 똑같은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데, 출처는 {조당집} 제12권 화산(禾山)장이 최초이며, {전등록}에는 보이지 않고, {벽암록}과 똑같은 내용은 {연등회요} 제1권과 {오등회원} 제1권 석가모니불전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로 {조당집} 12권 화산장에는 화산선사의 설법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들어보지 못했는가? 석가가 법상에 올라 말없이 침묵(良久)하시니, 대중들은 법문을 설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사리불(鷲子)이 나서 나무막대기로 치고 대중에게 알리기(白槌)를 '법왕의 법을 잘 관찰하라!'하고, 또 '법왕의 법은 이와 같다'라고 하니, 부처님이 곧 법좌에서 내려 왔다고 한다. 여러분들은 이 한 구절의 법문을 가지고 얼마나 많이 꿰어 맞추고 있었는가? 또 아자세왕이 가섭에게 설법을 청했는데 가섭이 법석의 자리에 올라 잠시 침묵(良久)했다가 곧바로 법석에서 내려오니, 왕이 '어째서 제자에게 설법해 주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가섭이 '지위가 높고 명예가 두텁습니다(位崇名重)'라고 말했다."

{조당집}에는 대중에게 알리는 인물이 사리불(鷲子)인데 {벽암록}에는 문수보살로 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조정사원} 8권에 "나무 막대기로 치고 대중에게 알리는 백퇴(白槌)는 세존의 율의(律儀)로서 불사를 설명할 때 반드시 먼저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며, 대중을 조용하게 하는 방법이 된다. 지금 선문에서 백퇴는 반드시 불법을 잘 아는 존숙을 임명하여 그 소임을 맡겨 백퇴사라고 한다. 주지가 법상에 올라 설법하려 할 때 백퇴사는 나무막대를 세 번 치고, 대중에게 알리기를 '용상(龍象)의 대중에게 법연(法筵)을 베푸니 마땅히 불법의 근본(第一義)을 관찰하라'고 크게 말한다. 대중을 용상으로 비유하고 마땅히 불법의 근본대의를 관찰하여 깨닫도록 하라고 당부하고, 이제부터 주지의 설법이 시작됨을 알린다. 주지의 설법이 끝난 이후에 빈주(賓主)의 법거량과 선문답이 실행되고, 법회가 끝날 때는 백추사가 앞으로 나아가 {화엄경} 4권에 있는 '그대들은 마땅히 법왕을 관찰하라. 법왕의 법은 이와 같다(汝應觀法王 法王法如是)'라는 게송을 외치고 법회를 증명하는 인사말을 한다." 법왕은 세존을 지칭하는 말이며, 법왕의 법은 불법의 지극한 근본 대의이다.

본칙은 세존이 법좌에 올라 설법하려고 하는데, 백추사인 문수가 앞으로 나와 법회를 마친 게송을 외우며 대중에게 알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설법이 시작된다는 말을 하지 않고 설법이 끝난 사실을 알린 것이다. 설법이 시작했다고 생각하자 무언의 설법이 그대로 끝나버린 일자불설(一字不說)의 설법이다. 원오는 "한 자식만을 친히 얻었다"라고 착어했는데, 역시 불법의 지혜를 구족한 문수는 언어 문자로 설하지 않은 세존의 불법을 귀나 의식을 통해서 듣지 않고 법문을 깨달았다고 칭찬하고 있다. 문수가 백퇴하면서 세존의 설법이 끝났음을 알리자 세존도 곧바로 법상에서 내려 오셨는데, 법상에 오르고 내려오는 그 가운데 한 마디의 설법도 없었지만 설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문수는 대중에게 알리고 있다. 세존의 설법은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설법하는 삼업설법이기 때문에 반드시 입을 통한 언어로만 설법하는 것이 아니다. 선승들의 어록도 선문답이라는 대화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말씀과 어묵동정의 일체 모든 행동도 불심의 전체작용으로 깨달음의 생활임과 동시에 제자들을 위한 교육이고 설법이었다. 원오는 '평창'에 세존이 법상에서 말씀을 하지 않고 불법의 근본을 설한 사례를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여 주시기 전에 벌써 이러한 소식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원오가 말한 이러한 소식이란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기 이전 불법의 궁극적인 진실을 말한다. 말하자면 불법의 궁극적인 진리는 언어 문자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도단(言語道斷)과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주장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석가는 마갈타국에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유마거사(淨名)는 비야리성에서 문수의 입을 막았으니 이 모두가 말이 없는 침묵으로 이미 설해 버린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은 {조론}의 [열반무명론]에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석가는 마갈타국에서 방문을 걸어 잠갔고, 정명은 비야리성에서 입을 다물었으며, 수보리는 설법하지 않음을 주창하여 불도의 근본을 나타내자 범천은 설법 듣는 것이 없음이 참된 청법이라는 사실을 말하며 꽃비를 내렸다. 이것은 모두 불법의 이치를 정신(마음)으로 깨닫도록 했던 것이다. 그래서 입으로 침묵한 것인데, 어찌 논변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논변으로 능히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열반경}에 "진실한 해탈은 언어와 법칙을 떠나서 적멸하며 영원히 평안하다. 시작도 끝도 없고 어둡지도 밝지도 않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것이 마치 허공과 같고, 명칭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라고 하였으며, {중론}에서 말하길 "열반은 실재하지 않지만 역시 실로 없는 것도 아니다.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심의식(心意識)의 생각도 없어진 경지이다(言語道斷 心行處滅)."라고 하였다.

석존이 성도 후에 문을 닫고 21일간 설법하지 않았다고 하는 말은 심오한 불법이 난해하여 설법해도 중생들이 오해할 것을 염려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설법을 어떻게 할까 걱정한 고사를 말한다. 또 {유마경}에 유마거사가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침묵으로 표현한 고사를 말하는데, 언어나 문자로 불법에 대해 설명한다면 불법의 진실을 상대적인 언어나 문자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불법의 지혜가 될 수 없다. {벽암록} 65칙에 전하는 외도가 부처님께 "말이 있는 것도 묻지 않고, 말이 없는 것도 묻지 않겠습니다." "유언(有言), 무언(無言)을 떠나서 불법의 궁극적인 진실을 설해 주시요"라는 질문에 세존은 단지 침묵을 했다. 그러자 그 외도가 "세존께서 대자 대비하시어 저의 미혹한 구름을 열어 주시고 저로 하여금 도를 체득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라고 칭찬하며 물러갔다는 일화도 마찬가지이다. 아난이 "부처님께 외도는 무엇을 얻었기에 도를 체득했다고 하십니까?"라고 묻자, 세존은 "훌륭한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달린다"고 말했다. 유무의 상대적 분별심으로 가로막힌 미혹을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인 근원적인 불심의 지혜를 침묵으로 설하여 깨닫도록 한 것이다. 참된 설법은 언어 문자의 방편에 의거하지 않고 침묵하는 설법을 깨달아 체득해야 한다. 언어문자로 설할 수 없는 불법의 진실을 체득하도록 하는 법문이 언어의 갈등을 텅 비우고 본래의 불심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침묵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고 있다. "수많은 성인(列聖)들 가운데 작가가 있어 법왕의 명령이란 이와 같지 않은 줄을 알았네" 세존의 가르침을 받은 수 많은 보살들과 성문연각 등 8만 대중들 가운데 정법의 안목을 갖춘 사람이 있었다면 세존이 승좌설법하고, 문수가 백퇴하며, 또 세존이 법좌에서 내려오는 이러한 필요없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법은 불법을 가르치기 위한 수단인데, 불법을 체득한 사람은 설법이라는 방편과 의식이 필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회석상에 선타객(仙陀客)이 있었더라면." {열반경} 국왕의 영리한 시자 선타파(仙陀婆)는 주인이 부르면 소금, 그릇, 말, 물 가운데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판단하여 조금도 틀리지 않고 대령한 것을 말한다. 선타파와 같은 참된 지음의 동지를 구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문수보살이 백퇴(白槌)를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원오도 "문수는 작가가 아니다"라고 착어한 것처럼, 세존이 승좌한 후에 백퇴를 하는 것은 이미 때늦은 행동이다. 대중 가운데 선타파와 같은 영리한 사람이 있었다면 굳이 문수가 백퇴를 할 필요도 없었는데, 어쩔 수가 없이 백퇴를 하게 되어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第093則]大光作舞
〈本則〉擧。僧問大光。長慶道。因齋慶讚。意旨如何。大光作舞。僧禮拜。光云。見箇什麽。便禮拜。僧作舞。光云。這野狐精。
〈頌〉前箭猶輕後箭深。誰云黃葉是黃金。曹溪波浪如相似。無限平人被陸沈。

벽암록 제93칙 대광(大光)화상이 춤을 추다.

분별심 죽이는 지혜의 화살 '백발백중'

{벽암록} 제93칙은 대광화상이 춤을 추는 선기작용을 다음과 같은 선문답으로 전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대광화상께 질문했다. "장경(長慶)선사가 '재(齋)를 올리고 축하한 것이다'라고 말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대광화상은 춤을 추었다. 그 스님은 절을 올렸다. 대광화상이 말했다. "그대는 무엇을 보았길래 곧바로 절을 올리느냐?" 그 스님은 춤을 추었다. 대광화상은 말했다. "이 여우같은 놈!"

擧. 僧問大光, 長慶道, 因齋慶讚, 意旨如何. 大光作舞, 僧禮拜. 光云, 見箇什, 便禮拜, 僧作舞, 光云, 這野狐精.


불법의 큰 뜻 바로 깨닫지 못하고
겉모습 흉내내는 엉터리에 '한 방'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제8권 금우(金牛)화상전에 전하고 있는데, {벽암록} 74칙에 수록된 "금우화상이 밥통에 밥을 퍼서 보살들에게 공양 한 뒤에 춤을 추었다"는 일단의 공안을 계승한 선문답이다. 그래서 {설두송고}에서는 76칙에 '금우의 밥통' 77칙에 '대광의 춤'을 연결하여 수록하고 있다. 대광화상은 {조당집} 제15권에는 거양(居讓)선사로 전하고, {전등록} 제16권에는 거회(居誨, 837~903)선사라는 이름으로 약간의 전기를 수록하고 있다. 석상(石霜)선사의 문하에서 20년간 수행했고 북탑에 남몰래 과일나무를 심고 재배하였으며, 베옷과 짚신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뒤에 호공(胡公)이라는 단월이 선사께 귀의하여 담주(潭州) 대광산에 거주하기를 원해서 법당을 열고 종지를 크게 드날렸다.

{전등록}에는 다음과 같은 대광화상의 법문이 전한다. "부처님이 한 평생 중생을 위해 펼친 가르침(一代時敎)을 누구더러 펴라고 하느냐? 일대시교(一代時敎)라는 것은 다만 당대의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설사 불법을 깨달아 철저한 경지에 이르러도 결국 일대사 일을 마친 사람일뿐이다. 그대들은 그것으로 출가인의 할 일이라 여기지 말라. 그래서 49년 동안 밝혀도 다 밝히지 못했고, 49년 동안 표식을 세우지 못했다." 즉 출가인은 자기의 본분사를 밝히는 일에 안주해서는 안 되며, 부처님이 가르치신 일대시교의 법문을 당대 사람들을 위해 가르침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한 말이다.

본칙의 공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등록} 제8권 금우화상전에 수록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아야 한다. "금우선사는 공양주가 되어 밥을 지어 대중들을 공양했다. 공양시간이 되면 항상 밥통을 메고 승당 앞에 와서 춤을 추면서 말했다. '아기 보살들이여 밥을 잡수시오.' 그리고는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 이런 일을 매일 계속했다. 이러한 금우화상의 행동에 대하여 어떤 스님이 장경선사에게 질문했다. '옛 사람(金牛)이 손뼉을 치면서 스님들께 밥을 먹으라고 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장경선사가 말했다. '마치 재가 끝난 뒤에 축원하는 것과 같다.'"

금우화상이 스님들에게 밥을 지어 '보살들이여 공양하시요'라고 말한 것은 {유마경} 제자품에 유마힐이 수보리의 발우에 밥을 가득 담아주면서 일체의 모든 것에 평등한 마음을 갖는다면 공양하고, 탐진치 삼독심을 버리지 않고 일체 깨달음의 생활을 할 수 있는 보살도의 경지가 되어야 공양할 수 있다고 설하는 법문을 토대로 하고 있다. {벽암록} 74칙은 금우화상이 춤을 추는 선기작용과 장경선사의 코멘트에 대해 언급했는데, 본칙은 이 내용을 계승한 선문답으로 {전등록} 8권에 수록한 것이다. 장경선사께 질문한 그 스님이 이번에는 대광화상께 [금우선사가 보살들에게 밥을 공양하고 승당 앞에서 춤을 춘 것에 대하여 장경(長慶)선사가 "재(齋)를 올리고 축하한 것이다"라고 말한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했다.

원오는 "참으로 의심이 많군, 묻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지"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의문점이 있기에 질문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질문은 일시적인 수치이지만, 질문하지 않으면 불법을 체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원히 중생으로 지혜의 안목 없는 무지와 수치스러운 삶이 되고 만다. 선문답의 질문은 간절한 구도심과 원력의 토대 위에 나온 의문들이다. 대광화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었다. 금우선사가 승당 앞에서 춤을 춘 것처럼, 대광화상은 금우선사와 똑같은 경지의 지혜작용으로 재 공양을 올리고 축원하며 찬탄하는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 스님은 대광화상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곧바로 절을 올렸다.

이 스님은 무슨 의미로 예배를 한 것인가? 선문답에서 예배를 하는 것은 스승의 말씀에 곧바로 불법의 대의를 깨달아(言下大悟) 감사의 뜻을 표명하는 인사를 올리는 경우이다. 선지식은 학인의 견해를 살펴보고 정말 올바르게 불법을 깨닫고 정법의 안목을 구족했는지,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대광화상이 그 스님을 점검해보기 위해서 '그대는 무엇을 보고 깨달았기에 곧바로 예배를 올리느냐?'라고 다그치며 묻고 있다. 그러자 그 스님은 곧바로 춤을 추었다. 원오는 "모본을 따라 고양이를 그린다"고 착어했다. 금우선사와 대광화상이 춤을 추며 보살의 공양을 찬탄한 것을 모방하여 자신도 춤을 춘 것이다. 원오는 또 "과연 잘못 알고 있군. 그림자나 희롱하는 놈이야!"라고 착어한 것처럼,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지 못한 엉터리 선승으로 남의 흉내나 내는 놈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대광화상도 엉터리 흉내만 내는 스님에게 "이 여우같은 놈!"이라고 질타했다. '여우같은 놈'이란 말은 의심과 사량분별심에 떨어진 수행자를 꾸짖는 말이다. {전등록}에 남양혜충국사가 타심통을 갖추었다고 주장하는 대의삼장에게 '이 여우같은 놈! 타심통이라고, 무슨 엉터리 같은 소리냐?'라고 꾸짖는 말처럼, 올바르게 수행하여 불법을 깨닫고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지 못한 엉터리 선승을 질타한 말이다.

대광화상이 이 스님에게 '이 여우같은 놈!'이라고 꾸짖은 말에 대하여 원오는 "이 은혜를 보답하기 어렵다"라고 착어했다. 즉 대광화상은 이 스님이 남의 흉내만 내고 그릇된 생각에 빠져 불법수행을 잘못하고 있는 점을 질타한 것은 선지식으로서 너무나도 친절하고 광대한 자비심을 베푼 것인데 이 은혜를 어떻게 갚겠는가. '평창'에도 "대광화상은 훌륭하게 사람을 교화하는 방도가 있었으며, 그의 말에는 생사를 해탈하고 불법을 깨닫도록 하는 길이 있었다. 종사라면 반드시 사람들을 위해서 못과 쐐기와 같이 고정관념에 빠진 마음을 뽑아주고 집착과 속박에 사로잡힌 마음을 풀어줄 수 있어야 선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앞에 쏜 화살은 그래도 가볍게 박힌 것이나, 뒤에 쏜 화살은 깊이 박혔다." 대광화상이 질문한 스님에게 춤을 춘 것이 앞에 쏜 화살인데, 첫 번째 화살에는 대광화상의 선기가 그래도 깊은 상처를 낼 만큼 강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여우같은 놈!'이라고 말한 두 번째 쏜 화살은 이 스님의 골수에 깊이 박혀 큰 상처를 내도록 한 것이다. 원오도 "백발백중"이라고 착어한 것처럼, 대광화상이 쏜 지혜의 화살은 스님이 남의 흉내나 내고 분별의식으로 살고 있는 중생심을 죽이는 살인전(殺人箭)으로 명중시킨 것이라고 했다. "그 누가 누런 나뭇잎을 황금이라고 말하는가?" {열반경} 영아행품에 우는 애를 달래기 위해 방편으로 엄마가 누런 나뭇잎을 황금이라고 하며 어린애에게 주어 울음을 그치게 한 고사처럼, 부처님이 중생을 위해 설법한 것은 중생의 번뇌 망념을 없애기 위한 일시적인 방편법문이다.

한 법도 줄 것이 없다. 금우선사의 춤이나, 대광화상의 춤도 어린애를 달래기 위한 누런 나뭇잎과 같이 방편이었는데, 그것을 향상의 종승(宗乘)이며, 진짜 황금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흉내내어 춤을 춘 스님에게 '여우같은 놈!'이라고 꾸짖었다. "조계의 물결이 이와 같다면." 조계의 육조(六祖) 혜능으로부터 전해온 중국의 선불교가 이렇게 춤을 추고 방망이나 고함을 치는 모습이나, 옛사람의 언어와 문자를 빌리고 형식적이고 거짓 모양만으로 진짜처럼 보이려고 하는 선법을 계승한다면 틀에 박혀 죽은 선이 된다. 독자적인 안목으로 자유 자재한 선기를 펼치는 선승이 없다면 '한량없이 괜한 사람도 육지에서 침몰한다' 천하의 납승들이 모두 육지에서 죽는 바보 같은 사태에 빠질 것이다.

 

[第094則]楞嚴不見處
〈垂示〉垂示云。聲前一句。千聖不傳。面前一絲。長時無間。淨裸裸赤灑灑。露地白牛。眼卓朔耳卓朔。金毛獅子。則且置。且道。作麽生是露地白牛。
〈本則〉擧。楞嚴經云。吾不見時。何不見吾不見之處。若見不見。自然非彼不見之相。若不見吾不見之地。自然非物。云何非汝。
〈頌〉全象全牛翳不殊。從來作者共名模。如今要見黃頭老。刹刹塵塵在半途。

벽암록 제94칙 능엄경의 법문

"참된 불심이 바로 그대 자신의 본성"

{벽암록} 94칙은 {능엄경} 제2권에서 부처님과 아난이 나눈 대화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능엄경}에서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무 것도 보지 않을 때, 어째서 그대는 내가 보지 않는 곳(不見處)을 보질 못하는가? 만약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본다면, 당연히 그것은 (보고 아는 모습이기에) 보지 않았다고 하는 모습(不見相)이 아니다. 만약 내가 보지 않는다고 하는 그 곳(不見地)을 보지 않는다면, 당연히 보지 않는 불견(不見)은 상대적인 대상의 사물이 아니다. 바로 그대 자신의 본성인 것이다.'

擧。楞嚴經云。吾不見時。何不見吾不見之處。若見不見。自然非彼不見之相。若不見吾不見之地。自然非物. 云何非汝。

본칙은 {수능엄경} 제2권에 세존과 아난이 견(見)에 대한 문답의 일부를 인용한 것으로 {종용록} 88칙에도 똑같이 제시하고 있다. {수능엄경}은 강원 교재로 많이 읽는 경전으로, '중인도 나란타 대도량경(大道場經)'이라고 하며, 본래의 제목은 {대불정 여래밀인수증요의 제보살만행 수능엄경(大佛頂 如來密因修證了義 諸菩薩萬行 首楞嚴經)}이라고 한다. 송대 장수자선(長水子璿)의 해석에 의하면 <대불정(大佛頂)>은 이 경의 법체(法體)로 교법, 도리, 수행, 불과를 포용하여 그 기초가 되는 여래장의 교의는 법계에 두루하고 있기 때문에 '대(大)'라고 하고 지극하여 무상한 경지이기에 '정(頂)'이라고 한다. {기신론}의 용어를 빌리면 여기에 체상용(體相用)의 삼대(三大)를 포함하며, 더군다나 그것이 일심(一心)을 여의지 않기 때문에 <대불정>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래밀인수증요의(如來密因修證了義)>는 불과를 증득하고 스스로 심원한 수행 성과에 의거해 불법을 설하고 중생을 이익하게 하는 것이다. <제보살만행 수능엄경(諸菩薩萬行 首楞嚴經)>은 성불의 원력과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이 수행을 거듭해 자신과 일체 중생들이 구족한 보살행을 나타낸 것이다.

<수능엄(首楞嚴)>은 일체 사물에 대하여 그 근원을 밝히고 절대로 파멸되지 않는다는 '일체구경견고(一切究竟堅固)'라는 의미로 어떠한 법에서도 자유자재하며, 아무리 미세한 번뇌나 무명도 타파하여 그 법력으로 무애자재(無碍自在)한 법을 설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이 경은 오염과 청정의 차별경계를 여의지 않고 지혜를 나투며, 오염된 번뇌 망념을 그대로 청정한 지혜작용으로 전환하여 불생불멸한 법계를 밝게 비추는 여래장 경전이라는 사실을 설하고 있다.

이 경전의 성립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데, 많은 대승경론에서 발췌하여 편집한 경전이다. 당나라 신룡 원년(705) 5월 23일, 중천축 사문 반자밀제(般刺密帝)가 광주 제지사에서 번역하고 방융(房融)이 필수하였다고 한다. 본경의 발단은 아난이 걸식하는 도중 마녀 마등가의 요술에 유혹되어 파계하기 직전에 부처님이 문수보살에게 명하여 부처님 처소에 데려와 애욕을 여의도록 하기 위해 세존은 본래 청정한 진심과 정심의 당체를 깨닫도록 7문 7답을 설하고 있다. 이것이 유명한 '칠처징심(七處徵心)'인데, 주객, 내외에 관계없이 마음을 고정적으로 파악하려는 생각을 타파하고 있다. 즉 일체 중생은 전도와 착각, 무명으로 생사의 근본과 보리 열반의 당체, 이 두 종류의 근본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불법의 근본대의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수행을 쌓아도 효과가 없고 윤회하는 중생이 되고 있다. {수능엄경}은 일체 만법이 오직 마음의 작용으로 나툰 것임을 제시하여 청정한 불심을 체득하도록 설한다. 본칙에는 짧게 인용하여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운데 {수능엄경}에는 석존이 아난의 망견(妄見)을 타파하기 위해 나눈 대화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일체의 사물은 차별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보는 본성은 다르지 않다

"아난이여! 가깝고 멀리 있는 사물은 여러 가지 차별이 있지만, 한결같이 그대의 청정한 본성으로 분명히 보고 있다. 여러 종류의 사물이 각자 차별이 있을지라도 그 사물을 보는 시각의 본성은 다르지 않고, 시각의 미묘하고 청명한 지혜 작용이 진실로 본성이다. 만약 시각의 본성이 사물이라면 (내 시각의 본성도 사물이 되기 때문에) 그대는 내 시각의 본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대와 내가 똑같은 대상을 볼 경우 그대는 내가 본 작용을 보았다고 한다면, 내가 아무 것도 보지 않았을 때, 어떻게 그 보지 않은 곳이 보이지 않는가? 만약 내가 보지 않은 곳을 그대가 본다고 한다면 (이미 아무것도 보지 않는 곳이란 있을 수가 없음으로)당연히 보지 않는 상태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보이지 않는 곳이 그대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것은 대상의 경계가 아닌 것이다.(즉 내 시각의 본성은 대상의 경계가 아니며, 그런 점에서 그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것이 그대의 참된 시각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체의 다양한 사물은 천차만별의 차별이 있지만, 사물을 보는 주체인 견성(見性)은 다름이 없고, 본다는 시각의 본성은 평등한 법성(法性)의 진리라는 사실을 설하고 있다. 여기서 '만약 시각의 본성이 사물이라면 (내 시각의 본성도 사물이 되기 때문에) 그대는 내 시각의 본성을 볼 수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일절은 어려운 말인데, 아난이 보는 사물의 객관현상의 차별이 있는 것처럼, 주관의 보는 시각의 주체인 본성에도 역시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보는 시각의 주체인 본성이 객관적인 사물이라고 한다면 부처님이 지금 하나의 사물을 보고 있을 때에 아난 그대도 역시 동시에 그 사물을 본다면 그 사물과 똑같이 부처의 시각적인 본성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또한 보는 주체인 본성이 객관적인 사물에 속한다고 한다면 보지 않는 불견(不見)도 역시 사물에 속한 것이 되어야 한다.

본칙은 이러한 취지의 대화로 연결하여 '내가 아무 것도 보지 않을 때, 어째서 그대는 내가 보지 않는 곳(不見處)을 보질 못하는가?'라고 힐문하고 있다. 그러나 사물을 보는 본성은 객관적인 사물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세존이 보지 않는 곳을 아난도 볼 수가 없는 도리이다. 견(見)과 불견(不見)에 대하여 {수능엄경}에는 태양과 달과 등불에 의거해 여러 가지 모양을 보는 이것을 견(見)이라고 한다. 만약 이 세 가지 광명이 없으면 사물을 볼 수 없다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객관적인 사물의 모습을 비추는 빛이 있고, 사물을 볼 수 있는 시각적인 본성이 있어야 한다. '만약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본다면, 당연히 그것은 (보고 아는 모습이기에) 보지 않았다고 하는 모습(不見相)이 아니다.' 즉 본다고 하는 시각적인 작용이 객관적인 사물에 속하지 않는다면 사물을 본다고 하는 견(見)이라는 것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보지 않는 곳(不見)도 볼 수가 없으며, 만약 그 보지 않는 곳(不見處)를 본다고 한다면 그것은 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보지 않는다고 하는 그 곳(不見地)을 보지 않는다면, 당연히 보지 않는 불견(不見)은 상대적인 대상의 사물이 아니다.' 이미 보지 않는 곳을 볼 수가 없다고 한다면 보는 주체인 본성은 객관적인 사물에 속한다고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밝힌 말이다. 그래서 세존은 아난에게 객관적인 사물이 아니고, 사물을 보는 주체이며, 참된 불심이 '바로 그대 자신의 본성'이라고 설하였다. 본칙은 '일체의 사물을 보고 듣는 주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깨닫도록 하기 위해 {수능엄경}의 일절을 제시한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온전한 코끼리(全象)와 온전한 소(全牛)를 보았다고 해도 눈병 탓이다.' {열반경}에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온전한 코끼리를 본(見)사람과 {장자} [양생주편]의 칼로 소를 잡는 유명한 이야기를 토대로 온전한 소를 보지 않은(不見) 명인을 제시하여 이들 모두 도의 경지를 말했지만, 견(見)과 불견(不見)은 공중에서 꽃을 보는 것과 다름없다. 보았거나 보지 않았다고 해도 사물에 대한 차별적인 사고이기에 마찬가지이다. 견과 불견을 모두 함께 초월해야 한다. '예로부터 모든 작가가 껍데기만 더듬었네.' 역대의 부처나 조사들의 이름과 껍질 모양에만 집착되어 여래 진실의 당체를 체득하지 못했다. '지금 황두(黃頭)노인을 보고 싶은가?' 여래의 진실 법신을 체득하고자 한다면, 멀리서 찾으면 안 된다. '시방세계 일체의 곳곳에서 보았다고 해도 반 밖에 안 된다'라고 말하리라.

 

[第095則]喫茶去
〈垂示〉垂示云。有佛處不得住。住著頭角生。無佛處急走過。不走過。草深一丈。直饒淨裸裸赤灑灑。事外無機機外無事。未免守株待免。且道總不恁麽。作麽生行履。試擧看。
〈本則〉擧。長慶有時云。寧說阿羅漢有三毒。不說如來有二種語。不道如來無語。只是無二種語。保福云。作麽生是如來語。慶云。聾人爭得聞。保福云。情知爾向第二頭道。慶云。作麽生是如來語。保福云。喫茶去。
〈頌〉頭兮第一第二。臥龍不鑒止水。無處有月波澄。有處無風浪起。稜禪客稜禪客。三月禹門遭點額。

벽암록 제95칙 장경화상과 여래의 말씀

'용호상박' 두 도반의 경책과 탁마

{벽암록} 제95칙은 장경혜릉 화상과 보복종전 화상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장경화상이 어느 때에 말했다. '차라리 아라한에게 탐진치 삼독(三毒)이 있다고 말할지라도, 여래에게 두 종류 설법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여래께서 말씀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두 종류의 말씀이 없었을 뿐이다.' 보복화상이 말했다. '어떤 것이 여래의 말씀인가?' 장경화상이 말했다. '귀먹은 사람이 어떻게 들을 수가 있겠는가?' 보복화상이 말했다. '그대가 제이의(第二義)에서 말했음을 알겠노라.' 장경화상이 말했다. '어떤 것이 여래의 말씀인가?' 보복화상이 말했다. '차나 마시게!'

擧. 長慶有時云, 寧說阿羅漢有三毒, 不說如來有二種語. 不道如來無語, 只是無二種語. 保福云. 作生是如來語. 慶云, 聾人爭得聞. 保福云, 情知爾向第二頭道. 慶云, 作生是如來語. 保福云, 喫茶去。

여래 말씀 놓고 벌인 열띤 설전서
보복화상 '끽다거'로 카운터펀치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제19권 보복전에 전하고 있다. 장경혜릉(長慶慧陵:854~932)과 보복종전(保福從展: ?~928)은 설봉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선승이다. 장경화상에 대한 자료는 {조당집} 10권, {송고승전} 13권, {전등록} 18권에 전하고 있으며, {벽암록} 8칙을 비롯해 운문, 조주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설봉 문하에서 12년간 7개의 방석이 닳도록 수행하여 깨닫고, "만상 가운데 홀로 드러난 몸, 사람들 스스로가 수긍해야 친해진다. 예전에는 잘못하여 길에서 찾았는데, 오늘 보니 불 속의 얼음과 같다"고 게송을 읊고 설봉과 현사의 인가를 받았다. 그로부터 오후(悟後)의 수행을 53살까지 하였고, 천우 3년(906) 천주자사 왕연빈(王延彬) 초청으로 소경원(昭慶院) 주지가 되면서 법당을 열고 출세했다. 뒤에 민왕(悶王) 왕심지의 초청으로 복주 장락부 서원의 주지가 되어 크게 법당을 열었고, 왕은 장경(長慶)이라고 쓴 칙액(勅額)과 초각(超覺)대사라는 호를 하사했다.

종전화상의 약전은 {조당집} 11권, {전등록} 19권에 전하고 있는데 15살에 설봉 문하에 출가하여 오랫동안 스승을 시봉했으며, 항상 고금의 방편법문을 제시하여 장경선사에게 질문하니 장경이 퍽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장경과 보복, 두 사람이 나눈 선문답은 {벽암록} 8, 23, 76칙 등에도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항상 서로가 문제를 제시하여 경각시키며 정법수행의 안목을 체득하도록 탁마했다. 본칙도 장경과 보복이 평상시의 대화로 나눈 것이다.

'차라리 아라한에게 탐진치 삼독이 있다고 말할지라도, 여래에게 두 종류 설법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아라한은 소승불교에서 4종류의 깨달음 가운데 아라한과(阿羅漢果)라는 최고 경지를 이룬 성자로 생사윤회의 원인인 번뇌를 단멸하고 육도 윤회를 벗어났기 때문에 무생(無生) 혹은 불생(不生)이라고 한다. 또한 수행력이 뛰어나 인천의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기에 응공(應供)이라 하고, 계정혜 삼학의 수행을 완전히 체득했기 때문에 배우고 익혀야할 것이 없다는 의미로 무학(無學)이라고 한다. 또한 일체 번뇌의 도적을 끊어버렸기 때문에 살적(殺賊)이라고 하는데, 번뇌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탐진치 삼독도 있을 수 없다. 장경화상은 '가령 아라한에게 삼독이 있다고 할지라도'라고 말하고 있으며, 여래는 두 가지 종류의 말이나 설법이 결코 있을 수가 없는데, 여래에 두 가지 말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아라한의 삼독을 끌어 붙이고 있는 것이다.

여래의 두 가지 말이란 진실어(眞實語)와 방편어(方便語)인데, {법화경}에 "나는 지금 진실어를 설한다. 그대들은 일심으로 확신하도록 하라"라고 하며, {금강경}에도 "여래는 이와 같이 실어자(實語者)이며 진어자(眞語者)이다"라고 하고, {열반경}에도 "정어(正語), 실어(實語), 진어(眞語), 헛된 언어를 발설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처럼, 부처님 설법은 모두 진실어이다. {유마경} 등 대승경전에 부처님은 일미(一味) 평등의 진실을 설하기에 일음(一音) 설법이라고 강조한다. {화엄경}에도 "여래는 법음(法音)을 설하니 시방에 두루하여 듣지 못하는 자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수능엄경}에는 부처님 설법을 원음(圓音), 묘음(妙音)이라고 했다. 사실 여래의 설법을 진실어라고 말할 필요도 없고, 두 종류의 말이 없다고 하는 것도 여래 설법을 비방한 말이라 할 수 있다. {능가경}에 여래는 49년간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중생구제를 위한 팔만사천의 방편설법을 했다. {유마경}에 "부처님은 일음으로 연설했지만, 중생은 근기에 따라 법문을 이해한다"고 한 것처럼, 여래의 설법을 듣는 중생은 자신의 근기에 맞추어 받아들이기 때문에 다양한 방편설법이 된 것이다.

장경화상은 또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여래께서 말씀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진실어와 방편어라는 두 종류 말씀이 없었을 뿐이다'라고 주석을 붙였다. 보복화상은 장경에게 여래는 두 가지 말이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는데, 도대체 '여래의 말이란 어떤 것이라고 알고 있는가? 과연 여래의 말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다그치자, 장경화상은 '여래는 여래의 말이 있지만, 그대와 같이 귀 먹은 사람이 들을 수가 없지'라고 말했다. {벽암록} 88칙에 현사가 봉사, 벙어리, 귀머거리 삼종병인(三種病人)에게 어떻게 불법을 설해야 하는가? 라고 문제를 제시한 것처럼, 여래의 진실어를 귀가 먹었다고 들을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은 문제가 있다. 여래의 진실어는 오관의 감각기관을 통해 분별의식으로 듣고 보는 것이 아니라 온몸(通身)으로 듣고 보고 체득할 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복화상은 '그대는 불심의 지혜작용에서 벗어나 상대적인 차별경계인 제이의(第二義)에서 여래의 말을 들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며 불법의 안목과 지혜 작용이 없다고 힐책했다. 그러자 장경화상은 '그러면 그대는 여래의 말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보복화상은 '자, 여기 차나 마시게!'라고 말했다. 보복이 '차나 마시게!'라는 말이 여래의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래의 말은 사량분별하거나 망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원오는 '알았다(領)'고 하고, '또 말하기를, 알겠는가?' '빗나갔다'라고 착어했다. 원오가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는 말인데, 만약 '차나 마시게!'라고 말한 보복의 말이 여래의 말이라고 생각하고 분별해 버린다면 어리석은 중생이 되기에 곧바로 '잘못된 것'이라고 경계한 말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제일의(第一義), 제이의(第二義)라고 하네.' 설두는 먼저 보복화상이 장경의 말에 대하여 제이의(第二義)라고 평한 말을 제기하여 읊고 있는데, 진실과 방편을 표현한 말이다. 그러나 제일두(第一頭)나 제이두(第二頭)라는 숫자에서 여래의 말을 찾으려고 한다면 잘못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용이 있는 곳(有處)과 없는 곳(無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와룡(臥龍)은 썩은 물에 나타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용(와룡)이 썩은 물과 같은 제일의나 제이의라는 언구에 있을 수 있는가? 여래의 말을 사량분별로 이해하는 자는 썩은 물에서 사는 인간이다. 보복화상이 '차나 마시게!' 한 말은 마치 산 용이 승천하는 자세라고 칭찬한 말이다.

'용이 없는 곳에는 맑은 파도에 달빛 어리고.' 이 말은 장경화상이 불심의 지혜작용이 결여된 점을 읊은 것이다. 무처(無處)란 용이 없는 썩은 물로 파도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달빛이 맑게 비추고, 맑은 파도에 물이 청명하다고 한 것이다. '용이 있는 곳에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물결이 일어났다.' 보복화상이 '끽다거(喫茶去)!'라고 말한 불심의 살아있는 지혜작용을 읊은 말이다. 유처(有處)란 용이 살고 있는 물에는 바람이 없어도 스스로 하얀 물결이 일어나 물결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이다. 설두화상은 '혜릉선객이여! 혜릉선객이여!'라고 불러내어, 당신은 선불장에서 합격하지 못한 낙제생이라고 선포한 말이 '3월 우문(禹門)의 폭포에서 이마만 다쳤구나'이다. 장경화상이 보복에게 여래의 말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제시해 불법의 안목을 체득하는 등용문을 설치했는데, 보복이 '차나 마시게'라는 한마디로 용문의 폭포에 밀어버려 상처를 받고 말았다.

 

[第096則]泥佛不渡水
〈本則〉擧。趙州示衆三轉語。
〈頌〉泥佛不渡水。神光照天地。立雪如未休。何人不雕僞。金佛不渡罏。人來訪紫胡。牌中數箇字。淸風何處無。木佛不渡火。常思破窖墮。杖子忽擊著。方知辜負我。

벽암록 제96칙 조주화상의 삼전어(三轉語) 법문

형상으로 부처나 마음을 구하지 말라

{벽암록} 96칙은 조주화상의 삼전어(三轉語)라는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조주화상이 대중에게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도록 하는 세 가지 획기적인 법문을 하였다.

擧. 趙州示衆, 三轉語.

조주화상이 대중들에게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도록 설한 획기적인 세 가지 법문(三轉語)의 내용을 본칙에서는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지만 원오의 '평창'과 설두의 '게송'에 읊고 있는 것처럼, {조주록} 중권에 다음과 같은 법문이 있다.

"조주선사가 법당에 올라 대중들에게 법문을 제시했다. '쇠 부처(金佛)는 용광로를 거치면 녹아버릴 것이고, 나무부처(木佛)는 불에 타 버릴 것이고, 진흙 부처(泥佛)는 물에 녹아 풀어진다. 참된 부처(眞佛)는 마음 속에 있다. 보리나 열반, 진여 불성이 모두 몸에 걸친 의복과 같고, 역시 번뇌라고 할 수 있다. 의문이 없으면 번뇌도 없다. 궁극적인 실제 이치라도 어디에 둘 수가 있으랴! 망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만법은 허물이 없다. 단지 불법의 이치를 구명하기 위해 참선하라. 그렇게 수행하여 만약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지 못한다면 노승의 머리를 잘라버려라!'"

설두화상은 "쇠 부처는 용광로를 거치면 녹아버릴 것이고, 나무 부처는 불에 타 버릴 것이고, 진흙 부처는 물에 녹아 풀어진다"는 법문을 조주의 삼전어로 제시한 것이다. 전어(轉語)란 중생의 미혹한 마음을 깨달음으로 전향하도록 하는 말이다. 전미개오(轉迷開悟)라는 말과 같이 중생의 몸과 마음을 부처의 몸과 마음으로 전향시키는 전신(轉身)의 의미인데, 진퇴양난의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을 때 한 마디 법문으로 깨달음을 체득해 자유를 얻도록 하는 것이다.

심기일전(心機一轉)하도록 하는 선승의 법문을 일구(一句)라고 한다. 선에서 말하는 일구는 일전어(一轉語)이며, 삼구(三句)는 삼전어(三轉語)이다. 조주화상은 금불(金佛)과 목불(木佛), 니불(泥佛)에 의미를 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래 청정한 법신인 진불을 깨닫고, 한 생각의 망심(妄心)이 없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는 {신심명}의 일절을 깨닫도록 한 법문이다. 그런데 설두는 금불과 목불, 니불(泥佛)은 인연가합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필경 불가득(不可得)이고 무자성(無自性), 공(空)이라는 사실을 체득하도록 제시한 것이다. 단하천연선사가 목불을 쪼개어 군불을 지핀 이야기처럼, 목불은 불에 타 버리고 인연이 흩어지면 본래 공(空)이 된다. 중생은 목불, 철불, 진흙 부처에 관계없이 등신불로 모시면 미신적인 우상으로 인정하고 집착해 버리고, 법계에 충만한 진불 법신을 보지 못한다. 이러한 범부의 망정(妄情)을 타파해 버리기 위해 제시한 것이다.

설두화상은 조주의 삼전어에 각각 게송을 읊고 있다. 첫번째는 "진흙 부처는 물을 건너지 못한다"이다. 진흙이나 부처라는 차별심 뿐만 아니라, 물을 건너고 건너지 않는 생각조차 없어졌을 때, 조주가 말한 것처럼, 마음 속의 진불인 자성 천진 법신불이 신령스러운 지혜광명을 천지에 비추게 된다. 운문선사가 '사람들은 각자 광명이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본래 구족한 진불의 지혜광명을 2조 혜가의 이름에 맞추어 "신광(神光)이 천지를 비춘다"고 읊고 있다. 본 게송은 부처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깊이 사유하여 자성천진불의 지혜광명을 체득해야 한다. "눈 위에 서서 불법을 깨닫지 못했다면." '평창'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신광이 달마를 찾아 신명을 돌보지 않는 구도심으로 한쪽 팔을 자르고, 눈 속에서 제자의 불안한 마음을 안심시켜 달라는 법문을 청한 고사를 읊고 있다.


金佛.木佛.泥佛 제시…망상 타파
미혹한 마음 깨달음으로 이끌어

달마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오라!'고 하자, '불안한 마음을 찾아봐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니, '내가 그대를 위해 안심시켜 주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신광이 2조 혜가가 된 선문답인데, 불법은 스승이나 남에게서 찾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본성을 깨닫고 불법의 지혜를 체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신광(神光)은 사람들 모두 각자 구족하고 있는 광명이지만, 혜가가 눈 속에서 불법을 구한 것처럼, 결사적인 구도심과 수행으로 철저한 깨달음을 체득하지 않았다면 진불의 광명이 천지를 두루 비출 수 있는 대기 대용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설두가 '휴(休)'라고 읊은 말은 크게 비우고 불안한 망심을 몽땅 비우고 쉬워버린 대휴대헐(大休大歇)의 깨달음을 말한다. 각자의 본분상에 구족되어 있는 신광도 수행하고 체득하지 않으면 지혜의 광명으로 작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구라도 허위의 무리가 되었으리라." 앞의 게송을 이어받아 혜가가 눈 속에서 구도심으로 진정한 불법을 실참하여 확실히 본성의 진불을 깨달았기 때문에 불법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혜가가 허위로 거짓 수행한 선승이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모방하고 흉내내는 허위의 선승들이 되었을 것이라고 비판한 말이다.

두 번째는 "쇠 부처는 용광로를 통과 할 수 없다"이다. 쇠부처가 용광로 속에서 녹아 고정된 형상과 모양도 없이 자기의 법성과 하나가 된 평등의 경지가 진불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찾아와 자호(紫胡)선사를 방문했네." 자호이종(子胡利: 800~880)선사는 남전보원의 제자로 {전등록} 10권에 "자호선사는 산문에 하나의 팻말을 세우고 글자를 썼다. '자호에게 개 한 마리가 있다. 위로는 머리를, 가운데로는 허리를, 아래로는 다리를 물어뜯는다. 머뭇거리면 목숨을 잃는다'"라는 고사를 인용했다. 나를 찾아오는 구도자가 사량분별하면 자호의 개에게 물려 죽는다는 경고문이다. 산문은 열반의 경지를 체득하는 문이다. 그래서 이 문에 들어오는 사람은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라고 경고한다. 누구라도 쇠 부처라는 분별심을 일으키면 본분과는 어긋나고 불심의 지혜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호선사가 팻말에 적은 언어 문자의 경고문에 일체의 사량분별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쇠 부처에 대한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도록 주의하라는 말이다. 쇠 부처는 용광로를 건너지 못한다거나, 자호의 개에 물리지 않는 것은 언어 문자나 사량분별심을 비우는 것이다. 사량분별심이 끊어진 경지는 시방 삼세의 일체 처에 깨달음의 지혜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이다. 청풍(淸風)은 지금 여기 서 있는 이곳에 상쾌하게 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호선사는 그러한 경지를 제시한 선승이라고 읊은 게송이다.

세번째는 "나무로 된 부처는 불을 건너지 못한다"이다. 원오는 목불이 불을 건너기 전에 그대로 "완전히 소각해 버렸다"고 착어했는데, 진흙 부처나 쇠 부처처럼, 나무부처라는 분별적인 사고를 완전히 텅 비워 버렸다는 의미이다. 설두는 "항상 파조타(破墮)선사를 생각나게 한다"라고 하며, {조당집} 3권, {전등록} 4권에 전하는 혜안국사 제자인 파조타선사의 고사에 맞추어 게송을 읊고 있다. 즉 숭산 혜안국사의 제자가 마을 사람들이 부엌 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주장자로 부엌을 세 번 치면서, '그대는 흙과 기왓조각으로 만들어진 물건인데, 신령함이 어디서 왔으며, 성스러움이 어디서 일어났다고 이렇게 짐승의 생명을 삶아 죽이는가!'라고 말하고, 또 주장자로 세 번 치자 솥이 저절로 깨어지면서 갑자기 푸른 옷에 높은 관을 쓴 사람이 앞에 나타나 절을 한 뒤 말했다. '저는 부엌 신입니다. 오늘 선사의 설법으로 깨달아 이곳을 벗어나 천상에 태어났기에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선사가 '그대에게 본래 있는 성품이지 내가 억지로 한 말이 아니다'라고 말하자, 두 번 절을 하고 사라졌다. "나를 저버렸다는 걸 알겠네." 부엌신이 오랫동안 업보로 자아를 등지고 있었는데, 선사의 법문으로 깨닫게 되었다. 목불이나 부엌이나, 자기 또한 인연소생이니, 부처나 마음을 구해도 불가득이라는 불법의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부처나 법에 집착하여 자아를 등지고 있으면 업을 짓고 과보를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을 읊고 있다.



[第097則]罪業消滅
〈垂示〉垂示云。拈一放一(2?)。未是作家。擧一明三。猶乖宗旨。直得天地[陡-土+止]變四方絶唱。雷奔電馳雲行雨驟。傾湫倒嶽甕瀉盆傾。也未提得一半在。還有解轉天關能移地軸底麽。試擧看。
〈本則〉擧。金剛經云。若爲人輕賤。是人先世罪業。應墮惡道。以今世人輕賤故。先世罪業。則爲消滅。
〈頌〉明珠在掌。有功者賞。胡漢不來。全無技倆。伎倆旣無。波旬失途。瞿曇瞿曇。識我也無。復云。勘破了也。

벽암록 제97칙 금강경의 설법

망념(妄念)을 자각할 때 돈오견성(頓悟見性)할 수 있다

{벽암록} 제97칙은 {금강경} 가운데 남으로부터 경멸과 천대를 받는 수행으로 죄업을 소멸한다는 경천(輕賤)의 설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금강경}에 말씀하시길 '만약에 사람들에게 업신여김과 천대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이 사람은 과거세에 지은 죄업으로 응당히 삼악도에 떨어지는 과보를 받아야 하겠지만, 지금 금생에 사람들의 업신여김과 천대를 받았기 때문에, 과거세에 지은 죄업이 곧 소멸된다'고 하였다"

擧。金剛經云。若爲人輕賤。是人先世罪業. 應墮惡道. 以今世人輕賤故。先世罪業。則爲消滅


{벽암록} 67칙에 양무제가 부대사를 청하여 {금강경}을 강의하도록 하였고, 소명태자는 이 경을 32과목으로 나누면서 본칙을 '능정업장(能淨業障)'이라고 하였고 규봉종밀은 경죄성불(輕罪成佛)의 의미로 보았다. 특히 선문에서는 {신회어록}과 {돈오요문}, {종용록} 58칙에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중요한 공안으로 주목하고 있으며, {전등록} 29권에 법안문익도 이 일단에 대한 게송을 읊고 있다.

본칙은 {금강경}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전을 수지독송하면 만약에 사람들에게 업신여김과 천대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이 사람은 과거세에 지은 죄업으로 응당히 지옥·아귀·축생의 삼악도에 떨어지는 과보를 받아야 하겠지만, 지금 금생에 사람들의 업신여김과 천대를 받았기 때문에, 과거세에 지은 죄업이 곧 소멸하고 마땅히 아누다라샴막삼보디를 얻으리라"

{금강경}은 선종의 소의경전으로 수지독송하면 업장소멸과 불가사의한 공덕이나 영험이 있다고 하며 금강경독송의 민간신행까지 성행하였다.

원오는 '평창'에서 "교학가들이 20장 정도 되는 경전을 가지고 자꾸 돌려읽는 것을 지경(持經)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업보와 무슨 관계가 있나. 어떤 사람은 경전은 반드시 영험이 있다고 하나, 그렇다면 이 한 권의 책을 한가한 곳에 펴놓아라 거기에 무슨 감응이 있는가? 그러나 법안선사는 '불지(佛地)를 증득한 자를 지경(持經)이라 한다'고 하였다. {금강경}에서도 '모든 부처님들이 위없는 정각을 이루는 법이 모두 이 경전에서 나왔다'고 했다. 말해봐라! 무엇으로 이 경전을 만들었는가?"라고 경전의 수지독송과 영험에 대한 잘못된 사고를 비난하고 있다.

{육조단경}에도 내 마음이 바른 선정일 때 경전을 수지(持經)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지경(持經)은 경전에 설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마음이며, {금강경}의 근본사상인 사구게(四句偈)를 깨달아 불법을 남에게 설하여 깨닫도록 하는 설법의 공덕이 수승한 것이라고 설한다.


한 권의 경전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경전의 가르침을 수지하지 않는다면

경전 자체가 어떤 영험이 있을 수 있겠는가?
{돈오요문}에도 '어떤 법사가 {반야경}을 수지하면 공덕이 가장 많다고 하는데 믿는가?'라는 질문에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경전의 영험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전은 단지 종이와 먹으로 만든 것이며, 종이와 먹으로 만든 문자는 본질적으로 공한 것이다. 어디에 영험이 있는가? 영험이란 경전을 수지한 사람의 마음가짐에 있기에 신비적인 감응이 본인의 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 권의 경전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경전의 가르침을 수지하지 않는다면 경전 자체가 어떤 영험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과거에 지은 죄업이 사람들로부터 경멸과 천대를 받은 덕택으로 소멸된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금강경의해}는 이 일단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경전을 수지한 사람은 마땅히 일체 인천의 공경과 공양을 받아야 하지만, 다생에 무거운 업장이 있게 된 까닭에 금생에 비록 모든 부처님들의 심히 깊은 경전을 수지하면서도 항상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남의 공경과 공양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경전을 수지하였기에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등을 일으키지 않아서 원수거나 친한 이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고, 항상 공경을 실행하여 마음에 번뇌와 원한이 없고, 탕연(蕩然)히 사량분별하는 것이 없어서 순간순간 항상 반야바라밀을 실행하여 물러남이 없다. 능히 이와 같이 수행함으로써 무량겁으로부터 금생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무겁고 나쁜 업장들을 모두 소멸하게 한다. 또한 이치로 말하면 선세(先世)란 앞(과거)에 일어난 번뇌 망념의 마음이요, 금세(今世)란 번뇌 망념을 자각한 뒤(지금)의 마음이다. 뒤에 깨달은 마음으로 앞의 번뇌 망념의 마음을 업신여겨서 망심이 머물지 못하게 하는 까닭에 선세(先世)의 죄업이 곧 소멸된다고 하는 것이다. 번뇌 망념이 이미 소멸되었으면 죄업이 성립되지 못하며, 곧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일단은 {신회어록}의 주장을 토대로 한 것인데, {금강경}에서 주장한 근본사상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등 사상(四相)을 텅 비운 반야바라밀의 실천이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멸시나 경천을 받을 지라도 업장이 생기지 않는다. 선세(先世)의 죄업(罪業)이란 무엇인가? 본래 죄성(罪性)은 공(空)한 것이며 무자성(無自性)이기에 불가득(不可得)인 것이다. 번뇌 망념이 일어난 마음이 선세(先世)요,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한 지금의 마음이 금세(今世)라고 주장하고 있는 말은 남종선에서 돈오견성(頓悟見性)을 체득하는 가르침이다.

{신회어록}과 종밀의 {도서}, {좌선의}에서는 "망념이 일어나면 망념이 일어난 것을 자각하라. 망념을 자각하면 망념은 없어진다(念起卽覺 覺之卽失)"라고 요약하고 있다. 망념(妄念)을 자각할 때 번뇌 중생심을 불심(佛心)으로 전환하여 돈오견성(頓悟見性)할 수 있다. 과거의 모든 죄업은 중생심으로 만든 업장이지만, 망념의 자각으로 일체의 업장을 텅 비움과 동시에 불심의 지혜로 업장을 소멸하게 된다. 그래서 선을 자각의 종교라고 한다.

{돈오요문}에는 경전의 이 구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어떤 사람이 선지식을 만나지 못해서 악업을 짓고 청정한 마음이 삼독(三毒)의 무명(無明)에 뒤덮여서 드러나지 못하기에 사람들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는다. 금세 사람들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는 것은 곧 지금 발심(發心)하여 불도를 구함으로 무명이 다 없어져, 삼독이 일어나지 않고 곧 본심(本心)이 명랑하여 다시 산란스럽지 않고, 모든 악이 영원히 없어져버리므로 금세 사람들의 경멸과 천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무명이 모두 없어져 산란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자연히 해탈한 것이므로 마땅히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니, 발심(發心)한 때를 금세라고 하는 것이지, 다른 생을 받는 격생(隔生)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일심으로 수행하면 과거의 업장을 소멸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돈오요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견성(見性)하지 못한 사람은 소멸할 수 없지만, 견성한 사람은 마치 태양이 비추면 서리와 눈을 녹이는 것과 같다. 견성한 사람은 풀더미를 수미산처럼 쌓아도 하나의 별과 같이 밝은 불로 태워버리는 것처럼, 업장은 풀더미와 같고, 지혜는 불과 같다" {대보적경} 112권에도 "백천만겁의 오랜 세월에 익힌 나쁜 죄업도 하나의 지혜로 관하면 모두 소멸한다. 등불의 밝음은 성스러운 지혜이며, 어둠은 모든 죄업"이라고 설한다. {육조단경}에, "하나의 등불이 만년의 어둠을 없애고, 하나의 지혜가 만년의 어리석음을 소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밝은 구슬이 손아귀에 있다”

금강의 본체를 밝은 구슬(明珠)로 비유했다.
일체중생이 모두 구족하고 있는 명주를 체득하여 손에 쥐고 있는데,

“공적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리라”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반야의 지혜를 구족한 사람에게 이 명주를 준다.

“호인(胡人)과 한인(漢人)이 오지 않으니, 전혀 기량이 없다”
설두는 경전을 수지한 공덕자를 읊고 있다. 명주는 호인이나 한인이 오면 그대로 비추지만, 불법을 체득한 사람은 아무런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않기에 비춤이 없고, 명주라는 형상도 보이지 않는다. 기교와 기량을 쓸 용무가 없어진 것이다.

“이미 기량이 없으니, 파순(波旬)이 길을 잃는다”
금강의 지혜를 구족한 사람은 일체의 기량이 없기에 번뇌 망념의 악마인 파순도 접근 할 수가 없다.

“구담(瞿曇)이여. 구담이여. 나를 찾을 수 있는가?”
파순도 못 찾는데, 석가는 자취와 흔적이 없는 나를 찾을 수 있을까?

“다시 말했다. 감파했다”
설두는 부처와 마구니도 일제히 모두 감파해 버리고, 자취 없이 본분의 경지에 있다고 자신 있게 읊었다.

 

[第098則]西院兩錯
〈垂示〉垂示云。一夏嘮嘮打葛藤。幾乎絆倒五湖僧。金剛寶劍當頭截。始覺從來百不能。且道作麽生是金剛寶劍。眨上眉毛。試請露鋒鋩看。
〈本則〉擧。天平和尙行脚時參西院。常云。莫道會佛法。覓箇擧話人也無。一日西院遙見召云。從漪。平擧頭。西院云。錯。平行三兩步。西院又云。錯。平近前。西院云。適來這兩錯。是西院錯。是西院錯。是上座錯。平云。從漪錯。西院云。錯。平休去。西院云。且在這裏過夏。待共上座商量這兩錯。平當時便行。後住院謂衆云。我當初行脚時。被業風吹。到思明長老處。連下兩錯。更留我過夏。待共我商量。我不道恁麽時錯。我發足向南方去時。早知道錯了也。
〈頌〉禪家流。愛輕薄。滿肚參來用不著。堪悲堪笑天平老。卻謂當初悔行脚。錯錯。西院淸風頓銷鑠。復云。忽有箇衲僧出云錯。雪竇錯。何似天平錯。

벽암록 제98칙 천평선사의 행각

“경전이 약방의 처방전과 같다는 편견 자각”

{벽암록} 제98칙은 천평 선사가 행각하며 서원 화상을 참문한 대화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천평 선사가 행각할 때 서원 화상을 참문하고, 평상시처럼 말했다. '불법을 안다고 말하지 않고, 한 사람도 화두를 제기하는 사람은 찾아 볼 수 없구나!' 하루는 서원 화상이 멀리서 바라보고 그를 부르며 말했다. '종의(從?)야!' 천평 선사가 머리를 들자, 서원화상은 '틀렸다!'라고 말했다. 천평 선사가 두 세 걸음 걸어가자, 서원 화상이 또다시 '틀렸다!'라고 말했다. 천평 선사가 앞으로 가까이 다가서자, 서원 화상이 말했다. '조금 전에 두 번 "틀렸다!"라고 말했는데, 서원이 틀렸는가, 상좌가 틀렸는가?' 천평은 말했다. '제(從?)가 틀렸습니다.' 서원 화상은 또 다시 '틀렸다'고 말했다. 천평 선사가 그만두려고 하자, 서원 화상이 말했다. '우선 여기에 머물며 하안거를 지내면서 상좌와 함께 두 번 틀렸다는 문제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천평 선사는 당시 곧장 떠나 가버렸다. 그 뒤에 선원에 주석하면서 대중들에게 말했다. '내가 처음 행각 할 때에 업풍(業風)에 끌려 사명장로의 처소를 찾아갔더니, 연이어 두 번이나 '틀렸다!'고 말한 뒤에, 나에게 그 곳에 머물며 하안거를 보내며 이 문제를 함께 살펴보자고 하였다. 나는 그 때 틀렸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내가 그 곳을 떠나 남쪽으로 떠날 때에 비로소 틀린 것임을 알았다.]

擧。天平和尙行脚時參西院。常云。莫道會佛法。覓箇擧話人也無。一日西院遙見召云。從?.平擧頭。西院云。錯。平行三兩步。西院又云。錯。平近前。西院云。適來這兩錯。是西院錯。是西院錯。是上座錯. 平云。從?錯。西院云。錯. 平休去。西院云。且在這裏過夏。待共上座商量這兩錯。平當時便行。後住院謂衆云。我當初行脚時。被業風吹。到思明長老處。連下兩錯。更留我過夏。待共我商量。我不道恁?時錯。我發足向南方去時。早知道錯了也.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12권과 {광등록} 14권 서원사명(西院思明)전에 전하며, 서원 화상은 임제의 제자인 보수(寶壽)의 법을 이은 선승이다. 그리고 천평은 {전등록} 26권에 의하면 상주 천평산에서 교화를 펼친 종의(從?)선사로 현사-라한-청계의 법을 계승한 선승인데, {전등록} 24권에 청계산 홍진(洪進) 선사와 선문답을 나누며 불법을 깨닫게 된 인연을 전한다.


수행자는 항상 경전을 읽고 자신을 비추어 돌아보는
수행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

천평 선사가 처음 행각할 때 여주 서원에 주석하는 사명화상의 회상에 방부를 들이고 10일쯤 지나 입을 열었다. 이곳에는 '불법을 깨달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은 있어도, 진짜 고칙 공안을 제시하여 학인들에게 불법을 깨닫도록 제시하는 안목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하며, 자신이 불법을 깨달은 사람처럼 행세하며 나와 상대하여 불법을 논의할 사람이 없다고 큰소리친 것이다.

서원화상이 이 말을 듣고 잠자코 있었다. 어느 날 하루는 천평이 법당에 올라 왔기에 서원화상이 멀리서 그를 바라보고 '종의(從?)야!'라고 불렀다. 천평 선사가 머리를 들었다. 원오는 "걸렸다(着). 이중공안(二重公案)이다."라고 착어했다. 서원 화상이 천평의 이름을 부를 소리에 머리를 든 것도 명상에 떨어진 것이고, 불법을 체득했다고 큰소리친 것도 엉터리로 탄로난 것이며, 이중으로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서원화상은 '틀렸다(錯!)'라고 하며 엉터리 같은 소리나 하는 놈이라고 고함친 것이다.

즉 천평이 머리를 든 순간 자기 본분사를 상실한 것을 간파한 것이다. 서원화상이 틀렸다! 고 한 말은 원오가 수시에 말한 "금강의 보검"으로 천평의 망심을 타파한 지혜의 칼이다. 그러나 천평은 서원 화상의 지혜작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두 세 걸음 걸어갔다. 자신의 경지를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한 것이지만, 분명한 점이 없이 애매모호한 행동이다.

원오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네. 진흙 수렁에서 흙덩이를 씻는구나!"라고 착어한 것처럼, 분명한 선기작용이 없다. 서원 화상이 또다시 '틀렸다!'라고 말했다. 원오는 "배를 자르고 심장을 긁어냈다."고 착어한 것처럼, 너무나 친절한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천평은 전혀 문제점을 자각하지 못하고 서원화상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서원 화상은 천평에게 '조금 전에 내가 두 번이나 "틀렸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내(서원)가 틀린 것인가? 아니면 그대가 틀렸는가?' 천평은 '제(從?)가 틀렸습니다.'라고 말했다. 천평은 나와 남이라는 자타의 분별과 이원(二元)의 차별에 떨어지고 말았다. 서원화상은 또 다시 '틀렸다'고 말했다.

서원 화상은 천평의 선병을 진단하고 있지만 천평은 전연 알지 못하고 있다. 원오는 "눈 위에 서리를 첨가하네."라고 착어한 것처럼, 아무리 서원화상이 자비심으로 선병을 진단해 주어도 전혀 쓸데가 없다는 말이다. 천평 선사가 서원 화상과의 대화를 끝내고 법당을 나가려고 하자, 서원 화상은 '그대는 우선 여기에 머물며 여유 있게 하안거를 지내면서 상좌에게 내가 두 번이나 틀렸다(錯)고 말한 문제점을 진지하게 참구해 보는 것이 어떤가.'라고 말하며 올바른 수행을 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천평선사는 서원화상의 자비심을 등지고 당시 곧장 떠나 가버렸다.

천평은 뒤에 상주 천평산의 주인이 되어 법당을 열고 선원의 대중들에게 설법하였다. '내가 처음 행각 할 때에 업풍(業風)에 끌려 서원의 사명장로의 처소를 찾아 갔었다. 그 때 연이어 두 번이나 '틀렸다!'라고 말한 뒤에, 나에게 그 곳에 머물며 하안거를 보내며 이 문제를 함께 살펴보자고 하였다. 나는 그 때 서원화상이 두 번이나 '틀렸다'라고 말한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었지만, 내가 그 곳을 떠나 남쪽으로 떠날 때에 비로소 서원화상이 '틀렸다!'라고 말한 의미를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천평이 젊은 수행자 시절 서원화상을 참문한 지난날을 회상하며 제자들을 경각시키는 법문이다.

{임제록}에도 임제가 하안거 중에 황벽 선사를 방문하니, 황벽은 경전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고, '경전의 까만 글자만 보는 노인이군!'하고 며칠 지나다 하직 인사를 하자, 황벽 선사는 '그대는 하안거를 파하고 왔다 갔다 어디를 가느냐?'하였다. 임제는 '잠깐 화상께 인사하러 왔습니다.'라고 하자, 황벽은 주장자를 내리치고 쫒아 버렸다. 임제는 몇 십리 길을 가다가 이 일을 의심하고 되돌아와서 하안거를 마쳤다는 일단을 전한다. 임제가 의심한 이 일은 불법의 본질은 경전을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경전을 약방의 처방전과 같다는 편견과 고정관념의 문제점을 자각한 것이며, 수행자는 항상 경전을 읽고 자신을 조고(照顧)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선승이 경을 보는 것을 비판하는 건방진 사고와 언어문자에 대한 편견의 선병에 떨어진 사실을 자각하는 임제와 같은 선승은 드물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선가의 수행자들은 경솔하고 천박함을 좋아하네." 천평선사 뿐만 아니라 대개의 선승들이 약간의 선에 대한 지식과 분위기만을 익혀서 깨달은 행세를 하는 모습 경박하기 짝이 없다.

"뱃속 가득히 참구하면서도 쓰지를 못하네." 제방의 선지식을 참문하는 운수행각으로 수행했다고 하지만 지혜의 안목을 갖추지 못한 벙어리 선승이라 쓸모가 없다.

"불쌍하고 가소롭다 천평노인." 서원화상이 친절하게 제시해줘도 아만심을 꺾지 못해 두 번이나 '틀렸다!'는 말의 낙처를 알지 못하네.

"도리어 말하네, 당초 행각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문하의 대중들에게 서원화상을 참문한 것에 대한 비평인데, 바보같은 소리다. 그래서 설두는 천평에게 '틀렸다! 틀렸다!'라고 질타했다.

"서원의 맑은 바람이 단번에 녹아버렸네." 서원화상이 천평에게 두 번 '틀렸다!'고 말한 것은 청풍을 일으킨 가경이었다. 설두가 두 번 '틀렸다!'고 말했을 때 서원의 청풍도 다 녹아 자취가 없어졌다. 설두는 자신의 지혜로 양착(兩錯)을 활용한 것이다.

설두는 다시 말했다. "홀연히 어떤 납승이 나와서 '틀렸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설두의 자문자답이다.

설두가 "틀렸다!"고 한 말과 천평의 틀린 것과 비교하면 어떤가? "같은가 다른가?" 이 공안을 읽는 사람들에게 참구해 보도록 제시한 말이다. 원오는 서원화상이 다시 출세한 것이라고 착어하여 설두를 칭찬했다.

 

[第099則]踏毘盧頂上
〈垂示〉垂示云。龍吟霧起虎嘯風生。出世宗猷金玉相振。通方作略箭鋒相拄。遍界不藏遠近齊彰。古今明辨。且道是什麽人境界。試擧看。
〈本則〉擧。肅宗帝問忠問師。如何是十身調御。國師云。檀越踏毘盧頂上行。帝云。寡人不會。國師云。莫認自己淸淨法身。
〈頌〉一國之師亦强名。南陽獨許振嘉聲。大唐扶得眞天子。曾踏毘盧頂上行。鐵鎚擊碎黃金骨。天地之間更何物。三千刹海夜沈沈。不知誰入蒼龍窟。



벽암록 제99칙 숙종황제의 십신조어(十身調御)

“마음에 자기나 부처라는 흔적도 없어야 정상 초월”

{벽암록} 제99칙은 숙종 황제와 혜충 국사와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숙종 황제가 혜충 국사에게 질문했다. '어떤 것이 십신(十身) 조어(調御) 입니까?' 혜충 국사가 말했다. '단월(檀越)이여! 비로자나의 정수리를 밟고 초월해 가시오.' 숙종 황제가 말했다. '과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혜충 국사가 말했다. '자기의 청정법신이 있다고 인정하지 마시오.']

擧。肅宗帝問忠問師。如何是十身調御. 國師云。檀越踏毘盧頂上行. 帝云。寡人不會. 國師云。莫認自己淸淨法身.

본칙의 공안은 {조당집} 제3권, {전등록} 제5권 남양혜충국사전에 전하고 있는데, 본래 두 가지 문답을 여기서는 하나의 선문답으로 정리하고 있다. 혜충 국사와 숙종의 대화는 {벽암록} 18칙 무봉탑에도 싣고 있다. 혜충(慧忠, ?~775) 국사는 육조혜능의 선법을 계승하였고, 숙종 황제는 당나라 현종(玄宗)의 제3 왕자로 황태자 때부터 혜충 국사에게 참선을 배워 상당한 식견을 갖추었기에 {조당집}에는 혜충 국사와 나눈 여러 선문답을 수록하고 있다.

숙종 황제가 혜충 국사에게 '어떤 것이 십신(十身) 조어(調御) 입니까?'라고 질문했다. {조당집}에는 이 질문에 혜충 국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황제에게 '아시겠습니까?'라고 묻고 있다. 황제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국사는 '노승의 물병이나 갖다 주시오.'라고 말하여 하나의 대화가 끝나고 있다.


천차만별의 응화신을 나투는 것이
부처이기에 십신(十身)이라고 하며
말을 잘 훈련시키는 듯이 자유자재로
중생들을 제도하는 의미로 조어장부

혜충 국사는 자신의 몸으로 부처의 십신(十身)과 십호(十號)의 하나인 조어장부(調御丈夫)인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황제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부처의 십신(十身)은 60권{화엄경} 42권 이세간품에 설하고 있는데, 미혹함과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고 진실한 깨달음을 완성하여 중생세계에서 활동하기에 무착불(無着佛), 원력과 서원의 힘으로 이루었기에 원불(願佛), 여러 가지 수행의 보답으로 아름답게 부처의 모습을 구족하여 업보불(業報佛), 청정한 정신으로 많은 선의 근본을 지니고 그 힘으로 깨달음을 완성하였기 지불(持佛), 항상 열반의 경지에 머물기 때문에 열반불(涅槃佛). 불신(佛身)이 널리 법계에 두루 충만하기에 법계불(法界佛). 부처가 일체 중생의 마음에 두루하며, 마음이 곧 부처(心卽佛)이기에 심불(心佛). 항상 삼매의 경지에 주하기에 삼매불(三昧佛). 사물의 진실 본성을 분명하게 나투기에 성불(性佛). 마음대로 교화하기에 여의불(如意佛)이라고 한다.

{80화엄경}과 {화엄경공목장}, {석씨요람} 등에도 언급하고 있는데,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보살이 원력을 세우고 수행을 완성하여 구경의 불과를 체득한 덕을 열 가지 방면으로 나누어 이름 붙인 것인데, 부처의 십신(十身)은 일불신(一佛身)에 십신(十身)이 구족한 비로자나라고 하고 또한 시방삼세에 두루하기에 주변법계신(周遍法界身)이라고 한다. 또 부처님의 십호중의 하나인 조어(調御), 조어장부는 {불설십호경}에 "타심(他心)을 잘 다스리는 것을 조어장부라고 한다."고 설하는 것처럼, 시방삼세의 다양하고 수많은 중생들의 마음을 잘 살펴보고 근기에 맞추어 교화하여 제도하는 능력을 갖춘 대장부를 말한다.

천차만별의 응화신을 나투는 것이 부처이기에 십신(十身)이라고 하며, 말을 잘 훈련시키는 것 같이 자유자재로 중생들을 제도하는 의미로 조어장부라고 하는 것이다. 황제의 질문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는 말과 같은 것인데, 혜충 국사는 "단월(檀越)이여! 비로자나의 정수리를 밟고 초월해 가시오."라고 대답했다. 국사는 황제께 폐하라고 부르지 않고 '단월'이라고 불렀다. 혜충 국사가 황제의 스승이며 스승이라는 훌륭한 안목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단월은 범어로 dana-pati로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며, 시주(施主)라고 한다. 그리고 비로정상은 법신이 비로자나불의 두상(頭上)이다. 혜충 국사가 황제께 말한 것은 '단월께서 자신이 십신조어의 부처가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데, 그러한 경지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십신(十身) 조어(調御)의 본체인 비로자나불의 정상까지 초월하여 향상일로(向上一路)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라는 의미이다. 즉 선에서 말하는 '백척의 장대 끝에서 머무르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깨달음을 체득한 열반적정의 경지에 이르기 어려웠기에 그 곳에 머물면 열반의 경지가 곧 자신을 죽이는 집착의 세계로 전락되고 말기 때문이다. {금강경}에서 말한 것처럼, 마음을 언제 어디서나 어떤 경계에도 머무름이 없도록 해야 자유롭게 지혜작용을 활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에 마음을 비우도록 설하는 공의 실천은 마음을 어떤 경계에도 머무름이 없도록 하는 무주(無住)의 실천이다. 번뇌 망념을 텅 비우고 근원적인 본래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향상일로(向上一路)라고 한다. 즉 중생심의 차별세계에서 불심의 절대세계로 전환시키는 것인데, 선에서는 망념을 자각하고, 불성을 깨닫는 돈오견성이라고 한다. 본래의 청정한 마음(불성)이 되어야 반야의 지혜로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자유롭게 잘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숙종 황제는 '과인은 국사가 말씀하신 비로자나 부처의 정상을 밟고 초월해 가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황제가 짐(朕)이라고 하지 않고 과인(寡人)이라고 한 것도 혜충 국사를 스승으로 모시는 입장이며, 덕이 적은 사람이라고 겸손한 말이다. 그래서 혜충 국사는 '자기의 청정법신이 있다고 인정하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즉 비로자나불의 정상을 초월하는 방법을 설했다.

청정법신은 비로자나 법신불이다. 법신은 계정혜(戒定慧) 삼학으로 요약되는 불법의 지혜와 인격을 완전히 체득하여 일체 만법과 하나가 된 지혜의 당체이다. 보신은 불법의 지혜와 인격이 구족된 부처의 능력을 구비한 것이며, 화신은 불법의 지혜를 많은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설법하여 깨달아 해탈을 얻도록 교화하는 것인데, 부처의 삼신(三身)이 달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부처의 기능과 작용을 삼신(三身)으로 나눈 것이다.

의학을 완전히 통달해야 의사의 자격을 갖추게 되고, 의사가 되어야 의학의 지혜와 기술을 환자에게 의술로 베풀 수 있는 것이다. 황제는 나 자신이 청정법신불이며, 나 이외에 부처란 없다는 입장이었기에 국사는 자신이 부처고, 십신조어의 청정법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자신이 청정법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와 법신이라는 두 가지 사물을 인정하는 이원론(二元論)에 떨어진 것이며, 진정한 법신(본래면목)을 체득한 것이 아니다. 자기도 비우고, 부처라는 생각도 비운 그 당처에 위대하고 참된 자기가 현성하게 되며, 일체 처에 두루하는 청정법신불이 현전하게 되는 것이다.

원오는 혜충 국사는 말이 많았지만(갈등) 역시 국사로서 친절한 지도로 깨달음을 체득할 수 있는 법문이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평창'에 동산양개 선사가 학인을 지도하는 방편으로 일체처에 자취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새의 길(鳥道)을 인용한 것처럼, 마음에 자기나 부처라는 흔적도 없어야 비로정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한 나라의 국사 또한 억지로 붙인 이름." 혜충국사는 남양 백애산에 40년간 은거하였는데 숙종황제가 초청하여 국사로 모셨지만, 본분상에서 볼때 황제나 국사라는 이름도 없다 임시방편으로 붙인 이름이다.

"혜충국사 홀로 훌륭하게 명성을 떨쳤구나." 세상에 국사나 왕사, 선사나 장수라는 작위를 부여한 사람은 많지만, 혜충국사는 최고로 훌륭한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그 이유는 혜충국사는 숙종과 대종(代宗).

"대당나라의 참다운 천자를 도와서." 세속의 훌륭한 황제가 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불법을 깨달아 참된 법왕의 천자가 되도록 하였다.

"일찍이 비로자나 정상을 밟고 넘어가도록 했네." 국사는 숙종 황제를 지도하여 비로자나 법신불을 초월하여 향상일로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철퇴로 황금 뼈를 쳐부수니." 황제가 소중하게 생각한 황금법신불의 뼈 골수까지 쳐부순 국사의 말씀은 철퇴와 같네.

"하늘과 땅 사이에 무슨 물건이 있겠는가?" 천지간에 한 물건도 없는 청정법신도 자기도 일체 인정하지 않은 경지다.

"삼천(三千)의 육지와 바다(刹海) 고요한 밤." 한 물건도 없는 본지풍광의 조용한 세계,

"누가 창용굴(蒼龍窟)에 들어갈지 모르겠다." 용의 턱에 있는 여의주를 얻기 위해서는 창용굴에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참된 불법을 체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第100則]枝枝撐著月
〈垂示〉垂示云。收因結果。盡始盡終。對面無私。元不曾說。忽有箇出來道一夏請益爲什麽不曾說。待爾悟來向爾道。且道爲復是當面諱卻。爲復別有長處。試擧看。
〈本則〉擧。僧問巴陵。如何是吹毛劍。陵云。珊瑚枝枝撐著月。
〈頌〉要平不平。大巧若拙。或指或掌。倚天照雪。大冶兮磨礱不下。良工兮拂拭未歇。別別。珊瑚枝枝撐著月。





벽암록 제100칙(끝) 파릉화상의 취모검

선승들이 구족해야 할 지혜작용을 '검'으로 비유

{벽암록} 제100칙은 파릉 화상의 취모검(吹毛劍)에 대한 질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파릉 화상에게 질문했다. '어떤 것이 취모검입니까?' 파릉 화상이 말했다. '산호의 가지가지마다 달이 달려 있구나.'

擧。僧問巴陵。如何是吹毛劍. 陵云。珊瑚枝枝撑著月.


본칙 공안의 출처는 잘 알 수가 없는데, {오등회원} 15권 파릉 선사전에 전한다. 파릉 화상은 운문문언(864~949)선사의 선법을 이은 호감(顥鑑)선사로 동정호에 가까운 악주(岳州) 파릉 신개원(新開院)에서 교화를 펼쳤는데, 변론의 대가였다고 한다. 특히 본칙의 공안과 <벽암록> 13칙에 어떤 스님이 제바종(提婆宗)의 종지를 묻는 질문에 파릉 화상은 '하얀 은쟁반위에 하얀 눈을 쌓은 것(銀椀盛雪)'이라고 대답한 말, 그리고 '어떤 것이 도(道)인가'라는 질문에 '눈 밝은 사람이 우물에 떨어졌다'는 파릉의 삼전어(三轉語)라는 유명한 공안이 전한다.


살인도는 번뇌망념 중생심 차단 '교화수단'
활인검은 번뇌망념 텅 비운 '반야지혜 작용'

파릉 화상의 대답은 운문 선사의 교화수단을 그대로 잘 계승하였다고 하여 그를 운문의 적자(的子)라고 한다. '평창'에 운문의 문하에 뛰어난 3명의 선승(三尊宿)이 있는데, 마삼근(麻三斤)으로 유명한 동산수초(洞山守初), 나한광과(羅漢匡果), 그리고 파릉 선사다. '전등록' 23권에 어떤 스님이 이들 3명의 선승에게 똑같이 취모검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수초 선사는 '금주(金州)의 객(客)'이라고 대답하고, 광과 선사는 '끝났다(了)'라고 대답하고, 파릉 화상은 본칙과 같이 '산호의 가지가지마다 달이 달렸구나!' 라고 대답하였다.

원오는 이들 세 사람 가운데, 오직 파릉 화상의 대답이 가장 뛰어났고, 불법의 본지를 분명히 드러냈다고 칭찬하며, 광과 선사가 '了(끝났다)' 라고 한 말과 파릉 화상이 '산호의 가지가지마다 달이 달렸구나!'라고 한 말과 '같은가, 다른가?'를 반문하고, 광과 선사가 '끝났다(了)'고 한 말은 불법의 냄새와 깨달음의 향기가 남아 있지만, 파릉 화상의 대답은 이러한 자취나 흔적을 모두 초월한 경지에서 분명하게 제시한 안목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취모검(吹毛劍)이란 칼날 위에 솜털을 올려놓고 입으로 불면 끊어지는 예리하고 날카로운 칼로 고대의 명검이다. 선어록에는 금강보검(金剛寶劍), 막야검(??劍), 관우 장군의 대도(大刀)가 자주 등장하는데, 반야의 지혜의 영묘한 작용을 비유한 것이다. {유마경}에 지혜의 검으로 번뇌의 적을 타파한다고 하는 것처럼, 일체의 사량분별을 끊어버리고 곧바로 여래의 경지를 체득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지혜의 칼로 일체의 번뇌 망념을 끊어버리는 비유를 많은 경전과 어록에서 설하고 있다. {임제록}에도 지혜의 칼이 작용하면 무일물(無一物)의 경지(空)라고 설하며, {증도가}에도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반야의 칼날이요, 금강의 불꽃이다. 외도의 심장을 쳐부술 뿐 아니라, 천마의 간담도 떨어뜨렸다"고 읊고 있다.

{연등회요} 23권에 도한 선사는 "영묘하고 예리한 보검(寶劍)이 항상 눈앞에 나타나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조당집} 7권에 협산이 "석상은 살인도는 있지만, 활인검이 없고, 암두 선사는 살인도도 있을 뿐만 아니라 활인검도 있다"고 평하고 있는 것처럼, 선승들이 반드시 구족해야 하는 지혜작용을 살인도(殺人刀)와 활인검(活人劍)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든 사물은 모두 두 가지 얼굴이 있는데, 살인도는 부정적이고 파괴하는 얼굴이며, 활인검은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얼굴이다.

즉 살인도는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차단하는 교화수단이고, 활인검은 일체의 번뇌 망념을 텅 비우고 반야의 지혜를 작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살인도는 종래의 구습에 젖은 중생의 생멸심과 차별, 분별심을 제거하고 없애는 지혜의 칼이고, 활인검은 본래 청정한 불심의 지혜를 회복하여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반야의 지혜로 보살도의 삶으로 활발하게 작용하는 방편수단의 칼이다. 번뇌 망념을 텅 비우는 공(空)의 실천이 살인도이고, 본래 청정한 불성의 지혜로 만법을 여여하고 여법(如)하게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는 반야지혜가 활인검이다.

선의 수행은 분별의식과 상대적인 대립관념이라는 번뇌 망념을 텅 비우는 공의 실천을 죽인다는 살인도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지 못하여 반야지혜의 작용이 없이 중생심으로 사는 수행자를 혼이 흩어지지 않은 사인(死人)이라고 한다. 잠시 번뇌 망념에 떨어져 본래심을 상실한 수행자를 죽은 사람과 같이 취급한다. 그래서 지혜작용을 죽이는 일체의 번뇌 망심을 죽인다고 표현한다.

임제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고 표현한 것처럼, 부처나 조사라는 고정관념에 떨어지면 자신이 반야지혜가 죽어버리기 때문에 일체의 경계나 차별심을 끊어버리고 텅 비운다는 선수행을 죽인다고 한다. 죽이기만 하고 살리는 능력이 없다면 사람을 못쓰게 하고, 지혜작용을 살리기만 하고 죽이는 작용을 쓰지 못하면 정사를 판단하는 안목이 없고, 선병을 진단할 능력이 없는 눈먼(暗證)선승이다. 살인도와 활인검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선승의 지혜작용을 살활자재(殺活自在)라고 하는데, 선승은 반야지혜의 예리한 취모검의 두 칼날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어야 문수의 지혜의 칼인 금강보검을 갖게 되는 것이다.

본칙에 어떤 스님이 취모검을 묻는 질문에 파릉 화상은 보월관휴(禪月貫休, 832~912) 선사가 벗을 그리며 읊은 시의 한 구절로 대답한 것이다. "두껍기는 철위산위의 무쇠와 같고, 얇기로는 쌍성선(雙成仙)의 몸에 걸친 비단 같도다. 촉 지방의 비단위에 수놓은 봉황무늬 사르르 움직이고, 산호의 가지마다 달이 걸려 있구나...(이하 생략)." 이 시는 {선월집} 제2권에 싣고 있는데, 그리운 벗의 인품을 형용한 것이다. 파릉 화상이 취모검에 대한 대답은 바다 속에 있는 산호의 가지가지마다 달빛이 밝게 비추어 빛나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과 같다. 달빛의 광명(지혜)이 산호 가지마다 서로서로 비추어 걸림 없이 상즉상입하여 무애자재한 경지이다. 이러한 경지를 어떻게 표현 할 수가 있겠는가.

원오는 "광채가 만상을 삼켰다"고 착어했다. 이 말은 반산보적 선사의 유명한 게송 "마음 달이 홀로 원명하니 빛이 만상을 삼킨다(心月孤圓 光呑萬象)"는 일절이다. 또 "사해(四海) 구주(九州) 온 세상이 광명으로 가득찼다"고 착어한 것처럼, 본래 구족한 불심의 반야지혜칼(吹毛劍)의 광명이 온 천하에 두루하고 있다고 하였다. 원오는 평창에 파릉 화상은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여 그 스님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는데도 그는 모르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설두 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공평하지 못한 일을 공평하게 하네." 옛날 협객이 길에서 불평(不平)을 보고, 강한 사람이 악한 자를 능멸하기에 칼로 강한 자의 머리를 쳐 날렸다고 하는 고사에 의거하여, 선승은 미간에 보검을 감추고, 소매에 금추(金鎚)를 감추어 천하의 공평치 못한 일을 처단한다. 취모검을 질문한 스님의 견해(不平)를 파릉 화상은 반야지혜인 산호 가지의 보검으로 공평하게 하였다.

"뛰어난 솜씨는 졸작과 같네." {노자} 45장의 말인데, 파릉의 뛰어난 지혜는 오히려 졸렬한 것처럼 보이는 것. 산호 가지에 달빛이라는 일구(一句)로 불평을 공평하게 한 지혜작용은 보검을 사용한 것 같지 않고 취모검을 휘둘렀다.

"혹은 손가락, 혹은 손아귀에 나타나." 검도의 달인은 손가락과 손을 자유자재로 쓴다. 각자가 구족한 불심의 지혜인 취모검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한다. "하늘까지 뻗치는 빛 눈을 비춘다." 파릉 화상이 휘두른 취모검의 광명이 너무나 차가워 눈과 서리를 비춘다.

"대야(大冶)라는 훌륭한 대장장이라도 이 칼을 갈지 못하고, 양공(良工)이라는 뛰어난 기술자라도 털고 닦느라 쉬지 못하네." 이 두 구절은 취모검을 갈아서 날을 세우기 어렵고, 갈을 잘 갈아서 녹슬지 않도록 보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읊고 있다. 털어버리기 어렵다는 말은 사람들의 본분상에 구족되어 있는 금강보검을 결코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갈고 털어버릴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별다르고 별다르다." 이 금강 보검은 세간의 보검과는 전연 다르고, 사용하는 방법도 다르다. 군병에서 사용하는 칼과는 격별한 것이다. "산호의 가지가지에 달이 걸려 있구나." 설두 역시 파릉 화상이 대답한 취모검의 지혜로 자신의 입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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