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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생애와 사상 – 디지털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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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출가와 수행

1. 출가의 동기

고따마 싯닷타(Gotama Siddhattha, Sk. Gautama Siddhartha)는 온갖 호화로움과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도 비범한 재능을 발휘한 학문이나 무예도 결코 싯닷타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싯닷타는 부족함이 없는 왕궁의 생활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는 인간이나 세계와 같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 깊은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 가운데서도 특히 그를 괴롭힌 것은 생(生) · 노(老) · 병(病) · 사(死)와 같은 삶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와 양모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Sk. Mahaprajapati Gautama, 摩訶波闍波提瞿曇彌)는 이런 왕자를 조심스럽게 지켜보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싯닷타가 훌륭하게 자라나 왕위를 잇고 석가족(釋迦族)의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싯닷타는 그런 세속의 일보다는 항상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혹시 왕자가 출가(出家)하여 수행자가 되지나 않을까 늘 염려하였습니다. 싯닷타를 서둘러 결혼시킨 것도 이러한 걱정과 염려 때문이었습니다.1)

이와 같이 젊은 날의 싯닷타는 자신이 처한 위치와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뇌하였던 것입니다. 여러 문헌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호사스런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생의 문제에 대해 깊이 사색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의 고뇌는 주로 생·노·병·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사문출유(四門出遊)로서 정리되었던 것입니다.2)

초기경전인 <마하빠다나 숫따(Mahapadana sutta, 大本經)>에는 과거세(過去世)의 비바시불(毘婆尸佛)의 ‘사문유관(四門遊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붓다는 유원(遊園)으로 가기 위해서 곱게 꾸민 수레를 신두산(産) 말에 매고 가던 중, 머리는 희고 이는 빠진 채 지팡이를 손에 쥐고 부들부들 떠는 노인을 만남으로써 살아있는 모든 것이 늙는다면 태어나는 일 자체가 화(禍)라고 느꼈으며, 마찬가지로 질병과 죽음을 보고 인생의 덧없음을 알았고, 최후로 출가 수행자를 보고 자신도 집을 떠날 결심을 굳혔다”3)고 합니다. 이것이 후세에는 정형화(定型化)하여 사문출유(四門出遊)의 전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4) 이 전설에 의하면 태자는 왕성(王城)의 네 개의 문으로부터 출유(出遊)하여 각각 노인·병자·죽은 사람, 그리고 수행자를 만났다는 것이며, 이것이 출가의 동기(動機)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붓다의 출가 동기로서 널리 전해지고 있는 ‘사문출유’의 전설은 후대의 불전문학(佛傳文學)인 <랄리따위스따라(Lalitavistara, 普曜經)>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 태자는 동쪽의 성문을 나와 노인을 만나고, 남쪽의 성문을 나와 병자를 만났으며, 서쪽 문을 나와 죽은 자를 만나 비애(悲哀)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북쪽 문을 나와 출가 수행자를 만나 그의 숭고한 모습에 감동하여 출가를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팔리어로 씌어진 <자따까(Jataka, 本生經)>의 주석서 서설(序說)에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설화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처음 세 차례의 출유(出遊)에서 노인과 병자와 죽은 사람을 만나 도중에서 되돌아섰던 태자는, 네 번째의 출유 때 사문을 만나고서 자기 생애의 목표를 분명히 깨달았으므로 마음 가볍게 그대로 동산에 가서 해질 녘까지 즐겁게 놀았습니다. 동산의 못에서 미역을 감고 향을 뿌린 몸에 새 옷을 입고 산뜻한 기분으로 돌아갈 채비를 차립니다. 바로 이때 성 안에서는 태자비가 사내아이를 낳았으므로 숫도다나왕은 기뻐하면서 급히 시종을 보내어 태자에게 알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자는, “라훌라가 생겼구나!” 라고 외쳤습니다. 라훌라(Rahula)란 ‘장애(障碍)’라는 뜻입니다. 은애(恩愛)의 굴레가 늘면 출가 수행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로 인해서 그 아이는 라훌라(羅候羅)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날 태자의 귀로에는 시민들의 환영으로 떠들썩했다. 어느 길가에 왔을 때, 한 높은 누상(樓上)에서 무사 귀족의 딸 끼사 고따미(Kisa Gotami, 機舍喬答彌)가 태자의 행렬(行列)과 그 행렬 속의 태자의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저런 아들을 가진 아버지는 행복하겠네,
저런 아들을 가진 어머니는 행복하겠네,
저런 사람을 남편으로 받드는 부인은 행복하겠네.

이 노랫소리가 태자의 마음을 끈 것은 그 노래 속의 ‘행복하겠네'(Nibbuta)란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태자가 늘 구해 마지않던 열반(涅槃)과 관련이 있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5) 태자는 ‘드디어 출가할 시기가 온 것을 깨우쳐주었다’라고 생각하고 아주 기뻐하며, 그 답례로 자기 몸에 지니고 있던 값비싼 진주 목걸이를 벗어 그녀에게 던져주었습니다. 끼사 고따미는 ‘태자는 날 사랑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고 기뻐 어찌 할 줄을 몰랐습니다.

궁전에 돌아온 태자는 출가의 결심을 하고, 그 날밤 마부 찬나(Channa, Sk. Chandaka, 車匿)에게 분부하여 애마(愛馬) 깐타까(Kanthaka, 犍陟)를 채비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들에게 이별을 고하고자 하지만, 태자비의 팔에 안겨 있는 갓난아기를 만지면 태자비가 눈을 떠 출가의 기회를 잃어버릴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말없이 떠나버렸다고 합니다.6)

이처럼 불전문학(佛傳文學)에 씌어진 사문출유(四門出遊)의 이야기는 사실 그대로를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들은 있었겠지만, 이것은 후대의 불전 작가들이 보다 드라마틱하게 윤색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7) 이것은 ‘인간 고뇌로부터의 해탈’이라고 하는 붓다의 출가 목적을 확실히 드러내려고 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8)

여하튼 싯닷타 태자가 왕궁의 호화로운 생활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아들 라훌라(Rahula, 羅候羅)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제 출가를 결행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밤 싯닷타는 남몰래 왕궁을 빠져 나와 출가 구도(求道)의 길을 나섰습니다. 후대 불전에 의하면 태자는 어느 날 밤 몰래 마부 찬나(Channa)를 앞세워 애마 깐타까(Kanthaka)를 타고 까삘라밧투를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그때 나이는 29세였습니다.

싯닷타가 뒷날 진리를 깨달아 붓다가 된 다음, 그는 자신의 출가 동기를 이렇게 술회하고 있습니다.9)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 걱정 번뇌가 없고, 더러움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열반)을 얻기 위해서였다.<중아함경 권56, 라마경>

이 세상에 만약 늙고, 병들고, 죽는 이 세 가지가 없었다면 여래(如來, 붓다)는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잡아함경 권14, 346경>

위에서 살펴본 사문유관의 도식적인 묘사나 이같은 붓다 자신의 술회는 다같이 싯닷타의 절실한 출가 동기가 무엇이었던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늙고 병들고 죽는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했고, 그 필연적인 인생의 괴로움을 슬퍼하였으며, 불완전한 인간 세상의 모습을 괴로워했습니다. 그 끝에 마침내 그러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왕궁을 버리고 출가를 단행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의 길을 찾아 세속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던져 버린, 참으로 ‘위대한 버림’ 바로 그것이었습니다.10)

2. 구도의 편력

이렇게 해서 사문(沙門), 즉 출가 구도자가 된 싯닷타에게 이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후대의 문헌에 속하는 테리가타(Theragatha, 長老尼偈)의 주석서에서는 그의 편력(遍歷)에 대해서 처음 박가와(Bhaggava)의 은신처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는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하늘에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고행을 닦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싯닷타는 우선 이들 고행자들의 목적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일 또한 생과 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떠난 싯닷타는 다시 브라흐만(Brahman, 梵天)과 해와 달과 불을 섬기는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서도 그는 역시 자신이 닦을 만한 수행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된다.11)

이 외에도 많은 수행자들을 찾아 다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랄리따위스따라(Lalitavistara)>에 의하면, 그는 출가하여 바라문 여성 싸끼(Saki)와 바라문 여성 빠드마(Padma)의 은신처에 초대를 받았으며, 바라문 라이와따(Raivata) 성인과 뜨리만디까(Trimandika)의 아들 라자까(Rajaka)로부터 환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때는 싯닷타가 베살리에 도착하여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를 만나기 전이었습니다.12)

이렇게 싯닷타의 구도 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까삘라왓투(Kapilavatthu)에서 동남쪽으로 약 1,000리 거리에 위치한 베살리(Vesali, Sk. Vaisali, 毘舍離城)로 가서는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 Sk. Arada Kalama, 阿羅羅伽羅摩)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배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관(觀)하는 선정(禪定)’ 즉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당시 큰 나라였던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 라자가하(Rajagaha, Sk. Rajagrha, 王舍城)에 도착했습니다. 신흥의 도시 라자가하는 당시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답게 수많은 사문들과 사상가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싯닷타는 그곳에서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 Sk. Udaraka Ramaputra, 優陀羅羅摩子)라는 스승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13) 웃다까 라마뿟다는 ‘상념(想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관(觀)하는 선정(禪定)’ 즉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는데, 싯닷타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상비비상처정’은 ‘무소유처정’보다 더욱 미묘한 선정의 경지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미묘한 선정에 들면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지고 마치 마음이 ‘부동(不動)의 진리’와 합체(合體)된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선정에서 깨어나면 다시 일상의 동요하는 마음으로 되돌아옵니다. 따라서 선정에 들어 마음이 고요해졌다고 해서 진리를 체득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선정은 심리적인 마음의 단련이지만, 진리는 논리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진리는 지혜에 의해 얻어집니다. 그래서 싯닷타는 그들이 택하고 있는 수정주의(修正主義)의 방법으로는 생사의 고통에서 해탈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곁을 떠났다고 합니다.14)

베살리에서 헤어진 알라라 깔라마와 함께 웃다까 라마뿟따는 당시 가장 명망높은 수행자들이었습니다. 선정(禪定), 즉 정신통일에 의해서 정신적 작용이 완전히 정지되어 고요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이들의 수행 목적이었습니다. 선정(禪定)주의자 또는 수정(修定)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지도 아래, 싯닷타는 그들이 해탈의 경지라고 인정하는 최고 단계에까지 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모든 괴로움이 없는 완전한 경지는 아니었습니다. 정신통일이란 끊임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경지이며, 정신적 작용의 완전한 정지 또한 결국 죽음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15)

그들은 수행의 목적과 방법을 혼동한 채 오로지 수행을 반복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같은 모순을 알게 된 싯닷타는 더 이상 수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답습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스승으로 삼아왔던 웃다까 라마뿟따와도 작별하였습니다.16)

싯닷타는 전통적인 수행자들로부터는 더 이상 기대할 바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 라자가하에서 남쪽으로 80㎞ 가량 떨어진 우루웰라(Uruvela, Sk. Uruvilra, 優樓頻螺)의 세나(Sena, 斯那) 마을에 있는 네란자라(Neranjara, Sk. Nairanjana, 尼連禪河) 강 근처의 숲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고행림(苦行林)으로 불리던 이 곳은 현재의 보드가야(Bodhgaya) 동쪽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그는 새로운 결심으로 맹렬한 고행을 시작했습니다.17)

싯닷타가 구도자의 길에 들어선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라자가하의 성 밖의 판다바 산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빔비사라(Bimbisara, 頻婆娑羅)왕은 성 안에서 탁발하고 있는 싯닷타를 발견하고, 그 단정한 태도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을 시켜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을 알아낸 다음, 스스로 수레를 갖춰 판다바산으로 가서 동굴에 거주하던 싯닷타를 방문하고, 코끼리 무리를 선두로 하는 군대와 재력을 제공하여 원조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빔비사라 왕은 싯닷타의 출가 수도를 중지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싯닷타는 자신이 유서 깊은 샤카족 출신으로 욕망의 충족을 위하여 출가한 것이 아니라, 욕망을 벗어나 열심히 수도하기 위하여 출가한 것이라 하여 이 원조의 약속을 거절했다고 합니다.18) 이때 빔비사라 왕은 당신의 뜻을 이룬 다음 자신에게 그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이룬 뒤 붓다는 빔비사라 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라자가하를 방문하여 그에게 법을 설하게 되었습니다.

Notes:

1)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불교교재편찬위원회 편, <불교사상의 이해> (서울 : 불교시대사, 1997), pp. 53-54 참조.
2) 후지타 코타츠 外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서울 : 민족사, 1989), p. 39 참조.
3) Digha Nikaya II, p. 21 ff; 中村元 著 ·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서울 : 김영사, 1984), p. 187.
4)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지문각, 1965), p. 59.
5) Edward J. T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Munshiram Manoharlal Pvt Ltd, 1992), pp.53-54 참조.
6)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pp. 67-68.
7) 이기영, <석가>, p. 61 참조.
8) 후지타 코타츠 外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p. 39.
9) <불교사상의 이해>, p. 55.
10) <불교사상의 이해>, p. 55.
11) <불교사상의 이해>, p. 55-56.
12) Edward J. T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p. 69-70.
13) <불교사상의 이해>, p. 56.
14) 平川彰 著 · 李浩根 譯, <印度佛敎의 歷史> 上卷 (서울 : 민족사, 1989), pp. 42-43.
15) <불교사상의 이해>, p. 56.
16) <불교사상의 이해>, p. 56.
17) <불교사상의 이해>, p. 57.
18) 中村元 著 ·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서울 : 김영사, 1984), p. 194.

고행과 중도의 실천

1. 수정(修定)에서 고행(苦行)으로

붓다는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이루기까지 몇 단계의 수행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출가하여 알라라 깔라라(Alara Kala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라는 두 스승 밑에서 선정(禪定)을 주로 배우고 닦았습니다. 그는 곧바로 스승들의 경지를 체득하였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그들로부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들 곁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언급할 수정주의(修定主義)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석존은 라자가하(Rajagaha, 王舍城)를 떠나 남서쪽 가야(Gaya, 伽倻) 교외, 우루벨라(Uruvela)의 세나(Sena) 마을에 있는 네란자라(Neranjara) 강 근처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고행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았습니다. 이곳은 부근에 고요한 삼림이 있었고 강물은 맑아 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오직 혼자서 여러 가지 고행을 실천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수정(修定)을 버리고 고행(苦行)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행(苦行)은 당시 아지비까(Ajivika)나 자이나교(Jaina) 등의 사문들이 즐겨 실천했던 수행방법이었습니다. 아지비까는 숙명론자(宿命論者)였던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가 이끌고 있던 교단이었습니다. 아지비까라는 명칭은 원래 단순히 각각의 ‘생활법(生活法)에 따른 자’라는 의미이지만 교단의 명칭으로 사용하여 ‘생활법의 규정을 엄격히 지키는 자’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사상에서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고행하는 자’로 이해되었고, 훗날 한역경전에서는 ‘사명외도(邪命外道)’로 폄칭(貶稱)되었습니다. 아지비까에서는 고행도 자연의 정해진 이치, 즉 결정으로 보았다거나 고행 그 자체를 목적시하였다거나, 혹은 고행에 어떠한 실천적 의의를 인정하였을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 학설이 추정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아지비까 교도들은 생계수단을 위해서이건 철저한 고행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이나교는 그 어느 종교 단체보다도 고행을 중요시하는 교단이었습니다. 자이나교의 교주 마하비라(Mahavira, 大雄)는 업(業, karma)을 미세한 물질로 보고 이 업이 외부로부터 신체 내부의 영혼에 유입(流入, asrava) 부착하여 영혼은 속박(bandha)하기 때문에 윤회의 생존이 되풀이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업에 의해 속박된 윤회에서 벗어나 영혼이 그 본성을 발현하여 해탈하기 위해서는, 미세한 업 물질을 지멸(止滅, nirjara)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고 고행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출가수행에 의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출가 수행자는 불살생(不殺生) · 진실어(眞實語) · 부도(不盜) · 불음(不淫) · 무소유(無所有) 등 ‘다섯 가지 대금계(大禁戒)’ 즉 오대서(五大誓)를 엄격히 지키고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형(裸形)으로 여러 가지 고행을 행하였으며, 때로는 단식 수행으로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붓다 당시 가장 엄격한 고행주의를 실천했던 사람들이 바로 자이나 교도들이었습니다.

2. 고행의 실천 내용

이러한 당시의 수행풍토에 따라서 석존도 본격적으로 고행을 실천했습니다. 석존께서 실천했던 여러 종류의 고행들을 경전에서는 언급하고 있는데, 석존은 그러한 모든 것들을 실수(實修)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곧 마음을 제어하는 것, 호흡을 멈추는 것, 단식(斷食)에 의한 것, 절식(絶食)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경전의 설명에 따르면 마음을 제어하는 고행이란 단정히 앉아 아랫니와 윗니를 맞닿게 모으고 혀는 위턱에 붙이고 마음을 억제하여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호흡을 멈추는 고행이란 먼저 입과 코로부터의 호흡을 막으면 귀로 숨이 들락날락하게 되며 커다란 이명(耳鳴)이 들려 격심한 고통이 따릅니다. 이 귀의 호흡을 막으면 날카로운 정수리를 빠개는 듯한 고통이 일어나며 또한 질긴 가죽끈으로 머리를 휘감는 듯한 고통을 느낍니다. 그 숨이 하복부로 옮겨가면 배를 가르는 듯한 고통이 따릅니다. 마지막으로 이같은 호흡을 막고 있으면 마치 힘이 센 남자들이 힘이 약한 남자의 팔을 잡아 잿불 속으로 집어넣어 불에 타는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처럼 온몸에 타는 듯한 괴로움이 일어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앗기벳사나(Aggivesana)여, 신들은 나를 보고 이같이 생각하였다. ‘사문 고따마는 이미 죽었다’고. 어떤 신들은 이같이 생각하였다. ‘사문 고따마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나 죽을 것이다’고. 어떤 신들은 이같이 생각하였다. ‘사문 고따마는 죽지 않았고 죽지 않을 것이다. 사문 고따마는 아라한이다. 실로 아라한의 경지는 이와 같은 것이다’고. [<中部經典> I, p.245]

석존은 그의 고행을 본 사람들이 그가 죽어버렸다고 여길 정도로 극심한 고행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극심한 고행을 실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안은 얻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석존은 일체의 음식을 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절식(絶食)에 의한 고행, 감식(減食)에 의한 고행을 계속한 결과 석존의 전신은 살이 빠져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났으며 눈은 움푹 들어가고 몸의 털은 부식하여 뽑혀지고 피부는 생기를 잃어 그때까지 아름답게 빛나던 황금색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일을 회상한 석존의 말을 경전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앗기벳사여, 나는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옛날 어떤 사문 · 바라문이 어떠한 격심한 고통을 받았다 해도 내가 받은 것은 최고이며 그 이상의 고통은 없었다. 또 미래의 어떠한 사문 · 바라문이 어떠한 격심한 고통을 받게 되더라도 내가 받은 것은 최고이며 그 이상의 고통은 없을 것이다. 또 현재의 어떠한 사문 · 바라문이 어떠한 격심한 고통을 받는다 해도 내가 받은 것은 최고이며 그 이상의 고통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격심한 고행에 의해서도 나는 일상의 인간이나 법(法)을 초월한 최고의 지견(智見)에 도달할 수 없다. 깨달음에 이르는 다른 도(道)가 있을 것이다.[<中部經典> I, p.246]

이 밖에 초기경전에서는 석존이 실천하였던 고행으로서 식사에 관한 고행, 신체적인 고행, 항상 먼지나 오물로 더렵혀져도 결코 몸을 씻지 않겠다고 하는 따위의 맹세를 지키는 것 등의 고행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석존이 실제로 실수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석존은 고행은 심신(心身)을 훼손시키는 것일 뿐 깨달음에 이르는 도(道)는 아니라고 명확하게 단정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석존은 마음을 제어하고 호흡을 멈추고 감식(減食)하고 혹은 단식(斷食)하였습니다. 죽음에 직면할 정도로 육체를 괴롭혔으며, 그러한 고통을 극복함으로써 강한 의지를 확립하여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행은 6년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3. 중도의 실천

그러나 그것으로도 역시 궁극의 해탈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석존은 고행이 해탈하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이것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먼저 고행에 의해 극도로 쇠약해지고 더러워진 몸을 네란자라 강물에 깨끗이 씻고, 마을 처녀 수자따(Sujata, 善生)가 바친 우유죽을 섭취하여 심신을 회복한 후 깨달음에 이르는 자기 자신만의 수행 방법을 강구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정주의와 고행주의의 두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 Majjhim Patipada)인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출가자는 두 가지 극단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모든 욕망에 따라 쾌락에 탐닉하는 것으로, 열악하고 야비하며 범부가 행하는 것이며 천하고 이익이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을 피로하게 하는 것에 탐닉하는 것으로, 괴롭고 천하며 이익됨이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에 가까이 가지 않고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眼)이 되고 지(智)가 되어 적정(寂靜) · 증지(證智) · 정각(正覺) · 열반(涅槃)으로 이끄는 것이다.[<相應部經典> V. p.42.]

이러한 중도를 비고비락(非苦非樂)의 중도(中道)라고 하며, 구체적으로는 팔정도(八正道, Ariya-atthangika-magga)가 바로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팔정도란 고(苦) · 집(集) · 멸(滅) · 도(道) 네 가지 진리 가운데 도제(道諦)의 내용이 되는 것으로, 바로 ‘열반으로의 삶’이다. 중도는 고(苦)도 아니고 낙(樂)도 아닌 중도(中道)를 말하지만 이는 단지 중간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석존이 스스로 실천하여 정각에 도달한 도(道),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라면 누구든지 실수(實修)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도(道)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초기경전에서 ‘도(道)’라고 할 경우 여기에는 두 가지 용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중도라고 할 때의 도(道, patipada)로서 석존이 정각을 얻은 행도(行道)로서의 도(道)이며, 다른 하나는 객관적인 도법(道法)으로서 도(道, magga, Sk. marga)입니다. 전자는 깨달음을 얻으려는 수행자가 석존의 실천방법에 따라 스스로 실천하는 주체적 도(道)이고, 후자는 객관적인 도로서의 도(道)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정각을 얻은 석존에게 있어 눈(眼)이 되고 지혜(智)가 되어 깨달음으로 이끄는 도(道)이기 때문에 다만 객관적인 진리성을 나타내는 도(道)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실천하는 주체적인 도(道)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4. 중도의 실천적·철학적 의미

한편 붓다 당시 인도의 철학과 종교는 크게 바라문(波羅門) 계통과 사문(沙門) 계통의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전자는 베다·우빠니샤드에 근거한 인도 정통파의 입장에 속하는 것으로, 유일의 원리인 브라흐만(Brahman, 梵)으로부터 전 세계가 생겨났다고 하는 점이 사상적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보통 전변설(轉變說, parinama-vada)이라고 합니다. 바라문 계 사상에 있어서는 전 세계가 어떻게 성립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고찰할 때 먼저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근본원리를 세우고, 이러한 근본원리인 브라흐만이 자기 자신을 전개시켜 질료인(質料因)도 되고 동력인(動力因)도 되어 전 세계를 성립시킨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이러한 바라문 계 사상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한 자유사상가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육사외도(六師外道)들이 주장한 사상의 특징은 유일(唯一)의 원리로부터 복잡한 현상세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독립된 원리와 요소가 어떠한 형태로서 결합하여 이 세계가 구성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아지따 께사깜발린(Ajita Kesakambalin)은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의 네 가지 원소를 주장했습니다. 즉 인간은 이들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체가 소멸함과 동시에 제(諸) 원소도 각각 분해한다고 설하였습니다. 빠꾸다 깟차야나(Pakudha Kaccayana)는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 · 고(苦) · 낙(樂) · 명아(命我) 등 칠요소(七要素)를 인정하였고, 사명외도(邪命外道, Ajivika)로 대표되는 막갈리 고살라(Makkhali Gosala)는 살아 있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영혼(靈魂) ·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 · 허공(虛空) · 득(得) · 실(失) · 고(苦) · 낙(樂) · 생(生) · 사(死) 등 12 가지 원리를 주장하였습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구성요소가 결합하여 인간 및 세계가 성립한다고 하는 주장을 초기경전에서는 적집설(積集說 또는 積聚說, arambha-vada)이라고 합니다. 이 적집설은 바라문 계의 전변설에 비해 유물론적 색채가 강하며, 업(業, karma)이나 인과응보의 이치를 부정하는 경향을 띠고 있습니다.

종교상의 실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바라문 계의 사상은 한결같이 선정을 실수함으로써 해탈을 얻는다고 주장한 데 반해, 이 적집설의 입장을 취하는 자들의 수행방법은 고행이었습니다. 그들은 적집설의 입장에 서서 육체와 정신의 두 가지 원소로 이루어진 인간은 정신이 육체에 의해 지배되어 더럽혀졌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육체를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정신이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석존이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의 가르침을 버리고, 또한 고행생활에 들어갔다가 이것마저 버렸다고 하는 사실은 수정주의(修定主義)로서 주장된 전변설과 고행주의의 근거로 삼는 적집설 양자를 극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석존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이러한 두 가지 입장과는 전혀 다른 새롭고도 보다 높은 차원을 획득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전변설과 같은 절대 유일의 원리를 주장하며 그것으로부터 세계가 전개하였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계는 상호 의존의 관계에서 성립하였다고 관찰하는 연기(緣起)의 입장입니다. 그것은 ‘모든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이 도리는 법으로서 정해져 있다’고 말하였던 것과 같은 우주의 이법(理法)이며,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자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보는 자이다’라고 설하였던 것처럼 석존은 이같은 연기를 자각하여 각자(覺者) 불타(佛陀)가 되었던 것입니다.

붓다의 깨달음[成道]

1. 깨달음의 완성

싯닷타 태자가 네란자라(Neranjara) 강가에서 목욕하고, 우루벨라(Uruvela) 근처의 세나니 마을의 촌장 세나니(Senani)의 딸 수자따(Sujata, 善生)가 공양 올린 우유죽을 먹고 체력을 회복한 뒤, 근처에 있는 앗삿타(assattha) 나무 아래 홀로 앉아 명상에 들었습니다. 앗삿타 나무는 아사왓타(asvattha) 나무 또는 삡빨라(pippala, 畢鉢羅) 나무라고도 하는데, 무화과 나무의 일종입니다. 거기서 드디어 석존은 ‘깨달음’ (anttara sammasambodhi, anuttara samyaksambodhi, 無上正等覺·無上菩提)을 얻어 붓다(Buddha, 佛陀) 즉 ‘깨달은 자'[覺者]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중국이나 한국 · 일본에서는 흔히 ‘성도(成道)’라고 합니다. 이 말은 ‘깨달음의 완성’이란 뜻입니다.

태자가 깨달음을 이룬 시기는 35세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뒷날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이곳을 붓다가야(Buddhagaya, 佛陀伽倻, 현재의 보드가야)라 이름하였으며, 앗삿타 나무를 보리수(菩提樹)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보리수 밑에는 금강보좌(金剛寶座, 성도할 때 앉았다고 하는 돌로 된 좌대)가 있으며 그 옆에는 사각 형태의 대탑(大塔)이 우뚝 솟아 있어 불교도에게 가장 중요한 성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4각4면(四角四面)으로 위쪽으로 갈수록 좁혀져 있는 높이 52미터의 대탑입니다. 이 탑은 굽타 왕조의 위풍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장은 오랫동안 인도교(힌두교)의 손에 있다가 1953년 5월에야 불교도의 관리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탑 그 자체보다도 사실은 그 뒤에 있는 보리수에 이 성지(聖地)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성도한 것은 이 보리수 아래에서였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 이 보리수는 부처님이 입멸한 2백년 후에 불교에 귀의한 아쇼카왕(阿育王)을 비롯하여 굽타 왕조 때에도 대대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중국의 법현(法顯)이나 현장(玄奘) 스님도 여기에 찾아와 보리수 울타리가 쳐 있다는 것과 그 주변에 정사(精舍)와 탑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유적은 그 뒤 정글에 파묻혀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1881년에 이르러 영국인 커닝햄이 발굴,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2)

붓다의 성도일(成道日)은 후대의 전승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음력 12월 8일이라고 하며 남방의 불교국가에서는 베사카(Vesakha 月)3)의 만월일(滿月日)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을 태양력으로 고치면 5월의 만월일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한역경전에서는 2월 8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곳이 많습니다. 그 까닭은 베사카 달이 인도력의 둘째 달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역법(曆法)은 자주 바뀌었으나 주(周)의 역법에 의하면 음려의 11월을 첫째 달로 헤아림으로 둘째 달은 음력 12월이 됩니다. 그러므로 중국·한국·일본 등지에서는 붓다의 성도일(成道日)을 음력 12월 8일로 보고 경축하게 되었습니다.4) 

2.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석존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후의 사정을 불전문학에서는 아주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불전문학에서는 석존께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악마(惡魔)와의 싸움을 계속했다는 사실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팔리어로 씌어진 <마하삿짜까-숫따(Mahasaccaka-sutta, 薩遮迦大經)>5)에서는 악마와의 싸움 부분을 생략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경전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여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6)

“이제 나는 단단한 음식이나 끊인 쌀죽을 먹어 힘을 얻어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고, 멀리 떠남에서 생겨난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유와 숙고를 멈춘 뒤, 안으로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사유를 뛰어넘고 숙고를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희열이 사라진 뒤, 아직 신체적으로 즐거움을 느끼지만, 깊이 새기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평정에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고귀한 이들이 ?평정하고 새김이 깊고 행복을 느낀다?고 말하는 세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나는 행복을 버리고 고통을 버려서, 이전의 쾌락과 근심을 사라지게 하고, 괴로움도 뛰어넘고 즐거움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이 깊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전생의 삶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했습니다. …… 이것이 내가 밤의 초경에 도달한 첫 번째의 지혜입니다.7)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이,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뭇삶(중생)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뭇삶들을 보았습니다. …… 이것이 내가 밤의 이경에 도달한 두 번째의 지혜입니다. ……8)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번뇌의 소멸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

내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자,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존재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무명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습니다. 해탈되었을 때에 나에게 ‘해탈되었다’는 앎이 생겨났습니다. 나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것이 내가 밤의 삼경에 도달한 세 번째의 지혜입니다.9)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이,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습니다.”10)

위 경전의 내용을 요약하면, 태자는 먼저 사선정(四禪定)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태자의 마음은 고요하고, 맑고, 더러움이 없고, 무엇에 의해서도 장애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태자는 과거를 상기(想起)하고 먼 몇 세대 이전의 일들을 상기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태자는 초경(初更)에 제1의 명지(明知)를 얻고, 이경(二更)에서는 제2의 명지를, 삼경(三更)에서는 제3의 명지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명지를 한역경전에서는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서 제3의 명지, 즉 누진통은 곧 네 가지 온전한 지혜[四聖諦]를 알고, 세속의 허망함이 연기(緣起)의 탓임을 아는 것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마지막 지혜가 생긴 것은 새벽이 통틀 무렵이었던 것입니다.11)

한편 불전문학에 속하는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에 묘사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라를 굴복시킨 보살은 사선정(四禪定)을 체험하였다고 합니다. 사선정은 보살만이 아니고 다른 많은 수행자들에게도, 또 나중에는 부처님의 제자에게도 공통되는 수행 방법입니다. 성도한 날 밤의 보살은 이것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도한 날 밤 보살의 체험은 초저녁(初夜) · 한밤중(中夜) · 새벽(後夜)의 세 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그 중 새벽, 즉 먼둥이 틀 무렵 부처로서의 자각(自覺)에 도달한 것입니다.

사선정에 의해서 바르게 마음을 통일하고 청정 결백하여 광명으로 빛나며 더러움을 여의고 번뇌를 떨쳐버려 자유로이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부동(不動)의 상태에 도달한 초저녁에 보살은 천안통(天眼通)을 얻었습니다. 천안통에 의해 중생이 살고 죽는 운명을 관찰하여 바른 지(智)를 실현하며, 어둠을 없애고 광명을 일으키고 있을 때 초저녁은 지나갔습니다.

다음으로 보살은 역시 전과 같이 선정(禪定)에 든 맑은 심성으로 한밤중에는 숙주지(宿住智) 혹은 숙명지(宿命智)를 얻었습니다. ‘숙주지’라고 함은, 마음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자기 자신과 다른 중생들의 무수한 과거의 생애를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다음에 보살은 역시 앞에서처럼 선정에 든 맑은 마음으로 새벽에 들어갔습니다. 그 새벽을 맞을 때 보살은 인간적인 고뇌를 말끔히 없애고, 미혹(迷惑)의 근원이 되는 번뇌를 죄다 쳐부수는 지견(智見)의 광명을 향해서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그리하여 보살은 누진지(漏盡智)를 체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보살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무엇으로 인해 늙음과 죽음이라는 것이 있을까. 도대체 무엇을 원인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단 말인가. 태어남을 원인으로 해서 늙음과 죽음이 있다. 그러면 무엇으로 인해 태어나게 될까. 생존[有]으로 말미암아 태어난다. 그러면 무엇으로 인해 생존하게 되는 것일까. 집착[取]으로 말미암아 생존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 갈망(渴望·愛)으로 말미암아 집착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갈망이 생길까. 감수(感受 · 受)로 말미암아 갈망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접촉이 생기는가. 여섯 가지 감각[六處]으로 말미암아 접촉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여섯 가지 감각이 생기는가. 모양과 물체[名色]로 말미암아 여섯 감각이 있다. 무엇으로 인해 모양과 물체가 생기는가. 인식[識]으로 말미암아 모양과 물체가 있다. 무엇으로 인해 인식이 생기는가. 현상[行]으로 말미암아 인식이 있다. 그러면 무엇으로 인해 현상이 생기는가.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현상이 있다.”

이와 같이 해서 인간 고뇌의 원인을 연쇄적으로 차례차례 거슬러 올라가 고찰한 결과, 모든 것의 근원에는 ‘무명’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무명에서 시작되는 이 연쇄 즉,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를 십이인연(十二因緣) 혹은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3. 깨달음의 내용

사실 붓다께서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동서고금의 수많은 학자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초기경전에 나타난 성도(成道)의 과정은 일치하지 않으며 많은 이설(異說)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이설은 15가지 정도가 되는데, 크게 네 가지 부류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12)

①사제(四諦)·십이연기(十二緣起)와 같은 이법(理法)의 증득에 의했다고 하는 설.
②사념처(四念處)·사정근(四正勤)·사여의족(四如意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팔정도(八正道)(이를 모두 합해 三十七助道品 혹은 菩提分法이라고 함)와 같은 수행도(修行道)의 완성에 의했다고 하는 설.
③오온(五蘊)·십이처(十二處)·사계(四界)와 같은 제법(諸法)의 여실한 관찰에 의했다고 하는 설.
④사선(四禪)·삼명(三明)의 체득에 의했다고 하는 설.

이처럼 성도의 과정이 전승하는 바에 따라 일치하지 않은 것은 붓다 자신이 깨달음의 내용을 특정한 교설로서 고정시켜 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붓다는 듣는 자의 근기에 따라 설하는 방법을 달리했기 때문에 깨달음의 내용이 여러 가지 형태로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13)

그러나 성도의 과정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교설 가운데 만약 가장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결국 연기사상(緣起思想)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경우 연기(緣起)라고 해서 그것이 바로 십이연기(十二緣起)처럼 완성된 형태의 연기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십이연기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기 이전의, 심원한 종교적 체험으로서의 연기(緣起)에 대한 자각이 바로 성도(成道)의 근본적 입장일 것입니다.14) 마스다니 후미오(增谷文雄)도 “붓다가 깨달은 존재 법칙으로서의 법이란 결국 연기의 도리였음이 확실하다.”15)라고 말했습니다.

붓다의 성도는 출가의 목적인 해탈의 완성이며 현세에 있어서 ‘열반(涅槃, nibbana, nirvana)’을 실현한 것입니다. 성도하기 이전의 붓다를 ‘보살(菩薩, bodhisatta, bodhisattva, ‘깨달음을 구하는 자’의 뜻)’이라고 하고 붓다가 된 후에는 ‘세존(世尊, Bhagavad)’이라고 존칭(尊稱)되었습니다.16)

Notes:

1)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 샘터, 1990), p.106.
2)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 p.107.
3) 팔리어 베사카(Vesakha)는 비사카(Visakha, 毘舍去) 혹은 비사카(Visakha)로 표기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범어 바이사카(Vaisakha)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베사카는 인도력 2월인데, 양력으로는 4-5월에 해당된다.
4)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 지문각, 1965), p.98.
5) Majjhima Nikaya (PTS) Vol. I, pp.237-251; 南傳大藏經 9, pp.409f. 이 경전은 자이나교의 교주 니간타의 제자인 삿짜까(Saccaka)가 부처님께 몸을 닦는 수행과 마음을 닦는 수행에 관한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과정에서 붓다 자신이 깨달음을 이루게 된 전후 사정을 삿짜까에게 설한 것이다.
6) 아래 인용문은 전재성 역주,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aya)> (서울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2), 제2권, pp.130-134에서 발췌한 것이다.
7) ‘전생의 삶에 대한 관찰의 지혜’를 한역경전에서는 숙명지(宿命智) 혹은 숙명통(宿命通)이라고 번역하였다.
8) ‘뭇삶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찰의 지혜’를 한역경전에서는 천안지(天眼智) 혹은 천안통(天眼通)이라고 번역하였다.
9) ‘번뇌의 소멸에 대한 관찰의 지혜’를 한역경전에서는 누진지(漏盡智) 혹은 누진통(漏盡通)이라고 번역하였다.
10) 전재성 역주,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aya)> (서울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2), 제2권, pp.130-134..
11) 이기영, <석가>, p.97.
12) 후지타 코타츠 外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서울 : 민족사, 1989), p.41.
13) 후지타 코타츠 外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p.41.
14) 후지타 코타츠 外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p.43.
15) 마스터니 후미오 지음 · 이원섭 옮김, <불교개론> 개정2판 (서울 : 현암사, 2001), p.25.
16) 후지타 코타츠 外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p.42.

악마의 유혹

붓다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악마의 유혹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불전문학(佛傳文學)에서는 붓다의 성도(成道)와 악마(惡魔)의 유혹(誘惑)을 결부시켜 서술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후대의 불전에서는 악마의 유혹과 그것의 극복이 성도 직전의 일인 것처럼 씌어져 있으나, 그것은 후대의 불전작가들이 성도의 극적 효과를 인상적으로 강하게 하기 위해서 그와 같이 묘사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기 어렵습니다. 초기의 불교도들은 후세의 불전작가들과는 달리 부단한 정진, 유혹에 대한 7년 간의 부단한 투쟁이 붓다의 수행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1) 이처럼 악마들은 태자가 출가하여 수행하는 동안 줄곧 따라다니면서 깨달음[正覺]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려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악마의 유혹이라는 전설입니다.

1. 고행과 애욕의 유혹

악마의 유혹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수따니빠따(Suttanipata, 經集)>에 편찬되어 있는 <빠다나-숫따(Padhana-sutta, 精勤經)>입니다. 이 경전은 붓다께서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회상(回想)하여 술회(述懷)한 것인데, 그 내용은 제자들에게 열심히 정진하라고 당부한 가르침입니다. 이 경전에 나오는 악마와의 대화는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네란자라 강 기슭에서 명상에 전념하고 있을 때, 실제로 붓다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갈등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우선 경전의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네란자라 강 기슭에서 평안을 얻기 위해 힘써 닦고 명상하는 나에게,
악마 나무찌(Namuci)는 위로의 말을 건네며 다가왔다.
“당신은 야위었고 안색이 나쁩니다. 당신은 죽음에 임박해 있습니다.
당신이 죽지 않고 살 가망은 천에 하나입니다.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생명이 있어야만 모든 착한 일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베다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청정한 행을 하고 성화(聖火)에 제물을 올리는 고행을 쌓는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애써 정진하는 길은 가기 힘들고 행하기 힘들며 도달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같은 시를 읊으면서 악마는 눈뜬 분 곁에 섰다.
악마가 이렇게 말하자, 스승(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게으름뱅이의 친척이여, 악한 자여, 그대는 세속에 선업(善業)을 구해서 여기에 왔지만,
내게는, 세속의 선업을 찾아야 할 필요는 털끝만큼도 없다. 악마는 선업의 공덕을 구하는 자에게 가서 말하라.
내게는 믿음이 있고 노력이 있고 지혜가 있다. 이처럼 전념하는 나에게 너는 어찌하여 생명의 보전을 묻는가.
힘써 정진하는 데서 일어나는 이 바람은 강물도 마르게 할 것이다. 오로지 수도에만 정진하는 내 몸의 피가 어찌 마르지 않겠는가.
몸의 피가 마르면 쓸개도 가래침도 마를 것이다. 살이 빠지면 마음은 더욱더 밝아지리라. 내 생각과 지혜와 순일한 마음은 더욱더 편안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토록 편안히 살고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내 마음은 모든 욕망을 돌아볼 수가 없다. 보라, 이 마음과 몸의 깨끗함을!
너의 첫째 군대는 욕망이고, 둘째 군대는 혐오이며, 셋째 군대는 기갈, 넷째 군대는 애착이다.
다섯째 군대는 권태와 수면, 여섯째 군대는 공포, 일곱째 군대는 의혹, 여덟째 군대는 겉치레와 고집이다.
잘못 얻은 이득과 명성과 존경과 명예와 또한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
나무치여, 이것들은 너의 병력(兵力)이다. 검은 악마의 공격군이다. 용감한 사람이 아니면 그를 이겨낼 수가 없다. 용자는 이겨서 즐거움을 얻는다.
내가 문자풀2)을 입에 물 것 같은가? 이 세상의 생은 달갑지 않다. 나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겠다.

어떤 수행자나 바라문들은 너의 군대에게 패해버리고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덕 있는 사람들의 갈 길조차 알지 못한다.

병력이 사방을 포위하고 악마가 코끼리를 탄 것을 보았으니, 나는 그들을 맞아 싸우리라. 나를 이곳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라.

신들도 세상 사람도 너의 병력을 꺾을 수 없지만, 나는 지혜를 가지고 그것을 깨뜨린다. 마치 굽지 않은 흙 단지를 돌로 깨뜨려버리듯이.

생각대로 사유(思惟)를 하면서 신념을 굳게 하고 이 나라 저 나라로 편력할 것이다.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그들은 내 가르침을 실행하면서 게으르지 않게 노력하고 있다. 그곳에 가면 근심할 것이 없고, 욕망이 없는 경지에 그들은 도달하리라.”

악마는 말했다.

“우리들은 칠 년 동안이나 그를 한 걸음 한 걸음 따라다녔다. 그러나 항상 조심하고 있는 정각자(正覺者)에게는 뛰어들 틈이 없었다.

까마귀가 기름을 발라놓은 바위 둘레를 맴돌며 ?이곳에서 말랑말랑한 것을 얻을 수 없을까. 맛 좋은 먹이가 없을까?하며 날아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 맛있는 것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까마귀는 날아 가버렸다. 바위에 가까이 가 본 그 까마귀처럼, 우리는 지쳐서 고따마를 떠나간다.”

근심에 잠긴 악마의 옆구리에서 비파(琵琶)가 뚝 떨어졌다. 그만 그 야차는 기운 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3)

이 경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악마 나무찌가 나타나 고행 중인 석존에게 고행을 포기할 것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석존은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더 정진함으로써 그 유혹을 극복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악마의 군대가 나타나 석존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석존은 지혜로써 악마의 여덟 무리 군대를 격파시켜 버렸다는 것이 이 경전의 핵심입니다.

이 경전에서는 악마와의 결투를 아주 리얼하게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악마의 여덟 무리의 군대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됩니다. 즉 악마의 군대는 ①까마(Kama, 애욕), ②아라띠(arati, 혐오), ③꿋삐빠사(khuppipasa, 기갈), ④땅하(tanha, 갈애), ⑤티나밋다(thinamiddha, 혼침 수면), ⑥비루(bhiru, 공포), ⑦위찌낏차(vicikiccha, 의혹), ⑧막카탐바(makkha-thambha, 위선과 오만) 등의 여덟 가지를 말합니다. 이것은 모두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욕망과 미혹과 나태의 측면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명백합니다.4)

위에서 인용한 <수따니빠따>에 나오는 악마의 유혹과 비슷한 내용이 한역 아함경에도 실려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때에 마라 빠삐만(Mara papiman, 惡魔波旬)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사문 고따마는 지름 우루벨라촌 네란자라 강가에 계시는데, 보리수 밑에서 도를 이룬 지 오래지 않다. 나는 거기 가서 교란시키리라.”

그는 곧 젊은이로 화해 부처님 앞에 가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혼자서 쓸쓸한 곳에 들어와
선정에 들어 고요히 생각한다.
나라와 재물 이미 버리고
여기서 다시 무엇을 구비하는가.

만일 마을의 이익을 구한다면
어찌하여 사람을 친하지 않는가.
이미 사람을 친하지 않거니
마침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그 때에 세존께서는, ‘이것은 악마 빠삐만의 교란시키려는 짓이다’ 생각하시고,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미 큰 재물의 이익을 얻어
마음이 만족하고 편하고 고요하다.
모든 악마를 무찔러 항복 받고
어떠한 욕망에도 집착하지 않노라.

혼자 고요히 생각하면서
선정의 묘한 기쁨 먹고 있거니
그러므로 구태여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가까이 친하여 않노라.
악마는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고따마여, 만일 스스로
그 안온한 열반길 알았거든
너 혼자 스스로 무위(無爲)를 즐겨하라.
무엇하여 구태여 남을 교화하려는가.

악마의 속박 받지 않는 이
내게 와 ‘저 언덕’ 건너기 물으면
나는 곧 그에게 바른 대답으로써
그로 하여금 열반을 얻게 한다.

악마는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어떤 흰 돌이 어린 기름 같아서
새가 날아 와 먹으려 하였으나
마침내 그것을 맛보지 못하고
주둥이만 다치고 허공으로 돌아갔네.
이 나도 또한 그 새와 같거니
헛되이 수고하고 하늘로 돌아가네.

악마는 이렇게 말하고 근심과 슬픔을 품고 마음으로 뉘우쳤다. 그래서 머리를 숙이고 땅에 엎드려 손가락으로 땅을 그었다.5)

경전은 계속됩니다. 석존과의 대화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빠삐만에게 애욕(愛欲), 애념(愛念), 애락(愛樂)이라는 세 딸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그 아버지를 대신하여 석존을 유혹하고 돌아오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 석존을 유혹시키지 못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경전을 근거로 후대의 불전작가들이 악마의 유혹에 대해 좀더 윤색하고 보완하여 드라마틱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실제로 앞에서 인용한 {수따니빠따}에 나오는 악마의 군대는 <본행집경(本行集經)>과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에 그대로 기술되어 있으며, 나가르주나(Nagarjuna, 龍樹)의 <대지도론(大智度論)>에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2. 악마유혹 전설의 의미

악마의 유혹에 관한 이야기는 석존이 성도한 후의 일화에서도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빠삐만(波旬)이라고 불리는 악마는 석존을 공포에 몰아넣으려고 때로는 거대한 코끼리의 상왕(象王)으로, 때로는 큰 뱀(大蛇)의 왕으로 변하여 큰 바위를 부수고 큰 굉음을 울리며 석존에게 접근했지만 그럴 때마다 석존은 이를 피하곤 했다고 합니다. 다시 마왕은 석존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 특히 비구니(여성 출가자)를 유혹하거나 협박했습니다. 경전에는 악마가 “당신은 젊고 아름답다. 나 역시 한창이니, 함께 와서 즐겁게 악기를 타면서 놀자”거나, “여성의 몸으로 정각을 얻어 성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니, 어서 수도를 단념하라”는 유혹을 던진 이야기가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들 악마는 마라(mara, 죽음의 신), 나무찌(namuci, 한역 경전에는 ‘장해탈(障解脫)’이라고 번역되어 있음), 깡하(kanha, 검은 것), 아디빠띠(adhipati, 통치자), 안따까(antaka, 죽음의 신, 죽음의 악마) 등, 갖가지 이름으로 불리며 통틀어서 ?악한 것? 즉 빠삐만(papiman)이라고 불립니다.6)

그렇다면 이와 같은 악마유혹의 전설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석존이 출가할 때 국왕의 자리로써 유혹 받았다는 전설이나, 네란자라 강변에서 고행을 할 때 건강을 유지하여 생명을 보존하고 정통 바라문교도들이 행하듯이 행실을 삼가며 한 가정의 장으로서 성스러운 불에 제물을 바치고, 아그니(agni, 불의 신, 火天) 호트라의 제사를 지내고, 공덕을 쌓으라는 권유를 받았다는 전설 등은 모두 일반 세속세계로의 복귀, 즉 세속적인 욕망에 대한 유혹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팔마군(八魔軍)의 유혹은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인간의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갈등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7)

또 주목되는 것은 악마 빠삐만의 세 딸에 의한 석존 유혹의 전설입니다. 땅하(tanha, 갈애), 아라띠(arati, 혐오)이며, 라가(raga, 탐욕)라 불리는 세 딸은 부친인 빠삐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린 소녀, 젊은 처녀, 남의 아내, 노파 등으로 모습을 바꿔 가면서 석존에게 접근했지만, 일체의 번뇌를 떠나 정각의 경지에 도달한 석존은 이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내 마음은 고요하다’라는 말로써 일축해 버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 마녀의 유혹에도 성적 충동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하는 옛 전설({수따니빠따})이나, 또는 후대의 한역 경전에서 볼 수 있는 전설, 즉 우루벨라 마을의 네 명의 여자가 유혹했다는 이야기와({사분율, 四分律}) 아울러 생각해 볼 때, 금욕 생활을 지켜나가려는 석존에 대한 유혹이 투영된 전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경전에 나타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악마에 의한 유혹의 전설은 인간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즉 인간 존재의 근원에 깔린 욕망과 불안, 공포, 고뇌 등이 인간과 벌이는 투쟁의 경과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번뇌에 대한 인식 및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후대의 경전에서는 악마의 수가 더욱 증가하고, 그 내용도 여성뿐 아니라 추상적으로 발달해 갑니다. 불상이나 불화의 제작이 시작되어 항마성도(降魔成道)의 주제가 많이 이용됨에 따라서, 사람들은 실제로 악마가 달려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8)

Notes:

1)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 지문각, 1965), p.77.
2) 문자풀을 입에 문다는 것은 적에게 항복한다는 뜻.
3) Suttanipata v.425-449; 法頂 옮김, <숫타니파타> (서울 : 샘터, 1991), pp.128-132.
4) 中村元 著 ·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서울 : 김영사, 1984), p.198.
5) 한글대장경 잡아함경 3권, pp.146-152 참조.
6) 中村元 著 ·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198.
7) 中村元 著 ·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198.
8) 中村元 著 ·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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