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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전법륜(初轉法輪)
1. 최초의 설법
붓다는 바라나시(현재의 베나레스) 근처의 이시빠따나(Isipatana, 仙人住處)에 있는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예전에 함께 수행했던 다섯 수행자들을 만났습니다. 붓다께서 녹야원에 도착했을 때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처음에는 환영하지 않기로 서로 약속하였지만 붓다의 위의(威儀)에 압도되어 결국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붓다는 다섯 수행자들에게 최초로 법을 설하였는데, 이 최초의 설법을 일반적으로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합니다.
붓다께서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왕위를 계승하면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서 세계의 통치자가 되고, 출가를 하면 부처님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해탈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예언되었습니다. 전륜성왕과 부처님은 완전한 정복자라는 의미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자는 외면적인 지배자인데 반해서 후자는 내면적인 지도자입니다. 전륜성왕의 상징인 윤보(輪寶)가 나아가는 곳에 저항하는 자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설법도 또한 반론할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는 그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설법을 법륜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1)
고대 인도에서는 우주의 바퀴를 ‘범천의 바퀴’, 즉 브라흐마 차크라(Brahma Cakra)라고 하여, 이를 돌리는 자는 신들 가운데서 최고의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상에서의 이상적인 왕은 일곱 개의 보물을 소유하고, 그 하나인 윤보(輪寶)를 굴리는 자라는 뜻에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붓다께서 행한 최초의 설법도 이와 같은 전통과의 연관 속에서 ‘법(진리)의 바퀴’, 즉 다르마 차크라(Dharma Cakra)를 처음으로 굴린다고 비유되었던 것입니다.2)
아쇼카왕이 건립한 석주에는 가끔씩 ‘법의 바퀴’가 등장합니다. 또 최초의 설법을 표현하는 불상의 대좌 등에 법륜을 묘사하는 일이 많은 것은 이때 석존이 법의 바퀴를 굴렸다고 하는 전승에 의거한 것입니다. 불상의 인계(印契, mudrā) 중에는 양 손가락을 서로 끼고 있는 설법인(說法印)이 있는데, 이것은 ‘법륜을 굴린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후대에 와서는 법륜이 붓다의 설법뿐만 아니라 붓다의 교법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사용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널리 친숙해져 있습니다.3)
이와 같이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은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을 선포하시어, 법륜이 구르기 시작하였고, 또 다섯 고행자가 귀의한 곳이기 때문에 교법[法]과 승단[僧]의 탄생지가 되었습니다. 아쇼카왕은 이 성스러운 지점을 순례하고서 많은 건조물을 세웠는데, 그 중에서도 기운찬 사자 네 마리를 새긴 대접받침(柱枓)의 석주는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이 대접받침은 법륜을 떠받치고 있어 불법의 흥륭(興隆)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르나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오늘날 인도의 공식적 국가 상징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날을 기리는 법륜제(法輪祭)가 지금도 스리랑카에서 봉행되고 있습니다.4)
자와할랄 네루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베나레스 근처 사르나트에서 나는 부처님이 첫 법문을 설하고 계시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경에 나오는 말씀들이 2500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곧장 나의 귀에 먼 메아리처럼 다가오는 것 같았다. 명문(銘文)에 새겨진 아쇼카의 석주는 그 장엄한 언어로 나에게 한 인간, 황제였지만 황제 이상으로 위대했던 한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5)
2. 최초 설법의 의의
초전법륜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이 이를 갖가지로 전하고 있으며, 또 후대의 경전은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 중도(中道), 무아설(無我說), 십이인연(十二因緣) 등 체계화된 불교 교리의 모든 것이 여기서 설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6)
비교적 오래되었다고 생각되는 전승을 보면 쾌락과 고행 두 가지 극단을 떠난 중도를 설하고 있는데, 내용적으로는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과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이 초전법륜의 골자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실제 역사적 사실을 전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예로부터 붓다가 행한 최초의 설법의 내용이 중도(中道), 팔정도(八正道), 사제(四諦)로 인정되어 왔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7)
붓다의 설법을 듣고 다섯 명의 수행자 가운데 가장 먼저 가르침을 이해한 이는 꼰단냐(Kondañña, 憍陳如)입니다. 그는 붓다께서 다시 출가 수계(受戒)하여 최초의 출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뒤이어 나머지 네 명도 가르침을 이해하여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불교교단(sangha, 僧伽)이 성립하여 비로소 불(佛), 법(法), 승(僧) 삼보가 갖추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 후 붓다는 다시 오온무아(五蘊無我)의 가르침인 [무아상경(無我相經)]을 설하였는데, 이것을 들은 다섯 명의 비구는 모두 아라한(阿羅漢, 聖者)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8)
3. <전법륜경>의 내용
초전법륜의 내용은 [전법륜경(轉法輪經)]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때 붓다는 마가다를 중심으로 한 동쪽 지방의 방언으로 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팔리어, 산스끄리뜨어, 한역, 티베트어역으로 20여종이 전해지며 이전(異傳)도 적지 않습니다. 남방불교의 전승인 팔리 [율장(律藏)]에 의하면, 최초의 설법, 즉 [전법륜경]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9)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두 가지 극단이 있으니 출가자들은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여러 가지 애욕에 빠져 그것을 즐기는 것이니, 그것은 열등하고 세속적이고 범부의 짓이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되는 바가 없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짓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니, 그것도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되는 바가 없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원만히 잘 깨달았다. 중도는 눈을 뜨게 하고 앎을 일으킨다. 그리고 고요함과 수승(殊勝)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여래가 원만히 잘 깨달았고, 눈을 뜨게 하고 앎을 일으키고, 고요함과 수승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正道]를 말하는 것이니,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원만히 잘 깨달았고 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이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여기에 성스러운 고제(苦諦)가 있다. 곧 태어남도 괴로움, 늙음도 괴로움, 병듦도 괴로움, 죽음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도 괴로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간단히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집제(集諦)가 있다. 곧 재생(再生)을 유도하고 희열과 탐욕을 동반하여 이곳 저곳에 집착하는 갈애이다. 다시 말하면 애욕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멸제(滅諦)가 있다. 곧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하고 포기하고 버리고 벗어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도제(道諦)가 있다. 곧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말하는 것이니,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것이 성스러운 고제이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성스러운 고제를 두루 알아야 한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성스러운 고제를 이미 두루 알았다’라는 …… 비구들이여, 나는 ‘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집제를 이미 끊었다’라는 …… 비구들이여, 나는 ‘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멸제를 이미 증득했다’라는 …… 비구들이여, 나는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도제를 이미 수습했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비구들이여, 만약 내가 이 사성제(四聖諦)를 이와 같이 세 번씩 열두 단계로 관찰하지 않아, 있는 그대로 깨끗하게 알지 못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나는 천신, 악마, 범천의 세계와 사문(沙門), 바라문, 인간의 세계에서 가장 높고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훌륭히 성취하였다고 선언할 수 없다.
비구들이여, 나는 사성제를 이와 같이 세 번씩 열두 단계로 관찰하여, 있는 그대로 깨끗하게 알았기 때문에, 나는 천신, 악마, 범천의 세계와 사문, 바라문, 인간의 세계에서 가장 높고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훌륭히 성취하였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알고 보게 되었다. 나의 해탈은 흔들림이 없다. 이것이 최후의 생존이니, 이제 다시 괴로운 존재를 받지 않는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다섯 비구는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세존께서 이 가르침을 설하시자, 꼰단냐는 먼지와 때를 멀리 여윈 법안(法眼)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았던 것이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렸을 때, 땅의 신들이 소리쳤다.
“세존께서 바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서 가장 훌륭한 법륜을 굴리셨다. 이것은 사문, 바라문, 천신, 악마, 범천 등 세상의 어떤 누구도 굴리지 못한 것이다.”
땅의 신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 사왕천(四王天)의 여러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셨다.” 그들의 소리를 듣고서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셨다.” 야마천(夜摩天)의 신들도 도솔천(兜率天)의 신들도, 화락천(化樂天)의 신들도,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셨다.” 그 소리를 듣고서 범천(梵天)의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바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서 가장 훌륭한 법륜을 굴리셨다. 이것은 사문, 바라문, 천신, 악마 등 세상의 어떤 누구도 굴리지 못한 것이다.”
이와 같이 순식간에 범천에까지 그 소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그때 일천 세계(一千世界)가 격렬하게 진동했고, 신들의 위엄을 능가하는 한량없는 광채가 세상에 나타났다.
그때 세존께서는 감흥을 읊으셨다.
“아,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구나.
아,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구나.”
이리하여 꼰단냐 장로는 그때부터 안냐 꼰단냐(Añña Kondañña)로 불리게 되었다.
진실로 안냐 꼰단냐는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알았고, 법을 꿰뚫었다. 의심에서 벗어났고, 망설임을 제거했고, 두려움이 없었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은 필요없게 되었다.
그가 세존께 청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자 합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오너라, 비구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안냐 꼰단냐는 이렇게 구족계를 받았다.
세존께서는 나머지 비구들에게도 교법을 설하셨다. 그때 밥빠(Vappa) 장로와 밧디야(Bhaddiya) 장로가 먼지와 때를 멀리 여읜 법안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은 것이다.
진실로 그들은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알았고, 법을 꿰뚫었다. 의심에서 벗어났고, 망설임을 제거했고, 두려움이 없었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은 필요없게 되었다. 그들이 세존께 청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오너라, 비구들이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두 장로는 이렇게 구족계를 받았다.
세존께서는 가져온 음식을 드시고 난 뒤, 다시 나머지 비구들에게 교법을 설하셨다. 이렇게 세존과 비구들은 세 비구가 걸식해 온 음식을 먹으며 지냈다.
세존의 교법을 듣던 사이에 마하나마(Mahānāma) 장로와 앗사지(Assaji) 장로가 먼지와 때를 멀리 여읜 법안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았던 것이다.
진실로 그들은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알았고, 법을 꿰뚫었다. 의심에서 벗어났고, 망설임을 제거했고, 두려움이 없었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은 필요 없게 되었다.
그들이 세존께 청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오너라, 비구들이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두 장로는 이렇게 구족계를 받았다.
Notes:
1)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 샘터, 1990), p.160.
2) 中村元著, 金知見譯, [불타의 세계] (서울 : 김영사, 1984), p.211.
3) 中村元著, 金知見譯, [불타의 세계], p.211.
4) 피야다시 지음, 정원 옮김, [부처님, 그분: 생애와 가르침] 법륜, 하나 (서울 : 고요한 소리, 1988), p.37.
5) 자와할랄 네루, [인도의 발견], p.44: 피야다시 지음, 정원 옮김, [부처님, 그분 : 생애와 가르침], p.37 No.2에서 재인용.
6) 中村元著, 金知見譯, [불타의 세계], p.211.
7)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서울 : 민족사, 1989), p.43.
8)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p.43.
9) Vinaya Pitaka(PTS), Vol. Ⅰ, pp.10-13; 최봉수 옮김, [마하박가 1] (서울 : 시공사, 1998), pp.59-66; E. H. 브루스터 편저, 박태섭 옮김, [고타마 붓다의 생애] (서울 : 시공사, 1996), pp. 74-79 참조.
불교 교단의 성립
1. 다섯 제자와 상가의 성립
불전(佛傳)에 의하면, 석존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바라나시(Bārānasi, 波羅奈城, 현재의 베나레스)의 이시빠따나 미가다야(Isipatana Migadāya, 仙人住處 鹿野苑)에서 다섯 명의 고행자들을 향해 최초로 설법하였습니다. 이 최초의 설법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며,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에피소드와 함께 불전(佛傳)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였습니다.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사람들에게 설하기로 결심하고 설법의 상대로서 먼저 생각한 것이 옛날의 스승이었던 알라라 깔라마(Ālāra Kālā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āmaputta)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다음으로 생각한 것은 예전에 함께 수행했던 다섯 명의 고행자들이었습니다. 다섯 명의 고행자 이름은 팔리 율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꼰단냐(Kondañña, 憍陳如), 마하나마(Mahānāma, 摩訶那摩, 摩訶男), 밧파(Vappa. 婆破, 婆濕婆), 앗사지(Assaji, 阿說示, 馬勝), 밧디야(Bhaddhiya, 跋提伽, 婆提) 등입니다.
이 다섯 명의 고행자들은 석존이 출가했을 때, 그를 지키기 위해 부왕 숫도다나(淨飯王)가 딸려 보냈다고도 합니다만 그 사실 여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1) 이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석존의 수행시절의 동료로서 함께 고행하였으마, 석존이 고행을 멈추고 깨달음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을 보고 타락하였다고 생각하여 그의 곁을 떠나 바라나시 교외에서 계속 수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석존이 붓다가 되어 미가다야(Migadāya, 鹿野苑) 가까이 온 것을 보고 이들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고행을 포기하였던 석존이 가까이 와도 경의를 표시하지 않기로 서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 가까이 다가오자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경의를 표하지 않기로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예배하고 의발(衣鉢)을 받아주기도 하고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하면서 붓다를 맞이하였습니다. 붓다는 준비된 자리에 앉자 다섯 명의 수행자들이 옛날의 습관대로 ‘고따마여’ 또는 ‘친구여’라고 불렀는데, 붓다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비구들이여,2) 이름을 말하거나 ‘친구여’라고 여래(如來)를 불러서는 안 된다. 여래는 존경받아야 할 사람, 정각자(正覺者)이다. 비구들이여, 잘 들어라. 나는 불사(不死)를 얻었다. 나는 가르치려 한다. 나는 법(法)을 설하려 한다. 너희들이 가르침대로 행한다면 머지않아, 훌륭한 집안의 아들들이 집을 나와 출가한 목적인 위없는(無上) 불도(佛道) 수행의 구극(究極)을 현세에서 스스로 알고 깨달아 실증(實證)할 것이다.3)
다섯 명의 비구들은 처음에는 이 말을 믿지 않았지만, 붓다께서 이 말을 세 번 반복하자 저절로 붓다의 설법에 귀를 기울일 마음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때 붓다는 자신에 넘치는 태도로 깨달은 바를 거짓없이 설했습니다. 그러자 먼저 꼰댠냐(Kondañña)라는 수행자가 깨달음의 문에 들어섰습니다. 경전에는 그때 붓다께서는 “아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구나!”4)라는 감탄의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깨달은 꼰단냐’의 뜻으로 ‘안냐 꼰단냐(Añña Kondañña)’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맨 처음으로 정각을 얻은 꼰단냐의 뒤를 이어서 밥파(Vappa)와 밧디야(Bhaddhiya)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두 사람은 당시에 곧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경전에는 이미 정각을 얻은 세 사람의 비구가 탁발하여 얻은 공양으로 여섯 사람이 함께 생활하는 동안 최후의 두 사람인 마하나마(Mahānāma)와 앗사지(Assaji)가 정각을 얻어, 붓다를 포함한 여섯 명의 아라한(阿羅漢, Arahat: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5)
이렇게 해서 미가다야에서 다섯 명의 비구들이 붓다께 귀의함으로써 최초의 출가 제자의 무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불교 상가(Samgha, 僧伽)가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불교는 우주의 진리성인 법(法)을 자각하여 ‘깨달은 자[覺者]’가 된 붓다와 그의 가르침인 ‘법(法)’과 그의 가르침을 신봉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단(敎團)이 갖추어져 비로소 하나의 종교로서 성립하였습니다.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라고 할 때, 승(僧)이라고 하는 것은 상가(Samgha)라고 하는 원어를 승가(僧伽)라고 음사하고 이를 줄여서 승(僧)이라고 한 것으로, 이 불, 법, 승 중의 어느 하나가 빠져도 불교는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6)
그런데 다섯 명의 비구가 교단에 들어오기 전에 붓다의 가르침에 귀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붓다께서 아직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우유죽을 공양한 수자따(Sujāta, 善生)와 우루벨라(Uruvelā) 마을의 바라문 가족의 남녀, 그리고 붓다의 성도(成道) 직후 보리죽과 꿀을 세존께 공양올리고, 붓다께 귀의한 따뿟사(Tapussa)와 발리까(Bhallika)라는 두 상인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재가 불자들로서, 아직 공식적으로 교단이 형성되기 전에 붓다께 귀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다섯 비구의 귀의는 조직적 교단의 형성에 관련된 최초의 사건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다섯 비구에 대한 그 후의 동정은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최후의 앗사지 장로에 대한 기록으로는, 후에 사리뿟다(Sariputta, 舍利弗)와 목갈라나(Moggallāna, 目犍連)가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에서 이들을 만났을 때, 그의 자세가 단정한 것을 보고서 자신들도 붓다의 제가가 될 단서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2. 야사의 출가
다섯 명의 비구들로부터 귀의를 받은 붓다는 다음에는 바라나시에 사는 부유한 장자의 아들인 야사(Yasa, Skt. Yaśas, 耶舍)를 교화하여 출가시켰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야사의 청소년 시대와 출가 전후의 기록은 붓다의 경우와 매우 비슷합니다. 겨울, 여름, 우기를 위한 세 개의 궁전 속에서 오직 홀로 기녀들에게 둘러싸여 지낸 온 야사는 어느 날 밤, 문득 잠에서 깨어나 시녀들이 머리칼을 흩트리고 잠꼬대를 하면서 보기 흉하게 잠들어 있는 광경을 보고, 마치 눈앞에 묘지를 보는 것 같은 심한 혐오감을 느껴 출가의 결심을 굳혔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집을 뛰쳐나온 야사는 붓다께서 머물고 있던 이시빠따나로 오게 되었는데, 붓다는 괴로워하는 야사를 자리에 앉게 한 뒤 다음과 같은 법문을 들려주었습니다.
보시(布施)을 실천하고 계율(戒律)을 준수하면 하늘에 나게 된다. 여러 애욕에는 환난과 공허함과 번뇌가 있기 마련이다. 애욕에서 벗어나면 큰 공덕이 드러난다.7)
이와 같이 붓다가 야사에게 들려준 법문은 보시와 계율, 그리고 생천(生天)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각각 시론(施論), 계론(戒論), 생천론(生天論)이라고 불리는 이들 세 가지를 차제설법(次第說法: 순서대로 설법함)이라 하는데, 특히 재가 신자에 대한 교화의 주된 내용으로 삼았습니다. 시(施)는 보시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갖가지 공덕을 말하고, 계(戒)는 계율을 준수함으로써 얻어지는 질서의 유지라는 두 가지 덕행을 기반으로 하여 도덕적인 선(善)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이 일상 생활을 영위한다면, 사후에는 하늘에 태어날 수 있다는 생천론은 당시 인도의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신봉되고 있었던 사상이므로, 붓다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난해한 교리를 설한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길잡이로써 우선 일반적인 도덕론을 설했던 것입니다.
야사는 이어서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 즉 인간의 괴로움과 그 원인,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과 그에 도달하는 길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일체의 집착에서 떠나 마음속의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다음에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습니다.
3. 재가 신자 – 우바새와 우바이
아들의 출가를 막으려고 뒤쫓아온 야사의 아버지는 아들의 출가를 슬퍼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전하지만, 야사의 결의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장자도 붓다의 설법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 귀의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한 첫 번째 남성 재가 신자, 즉 우빠사까(upāsaka, 優婆塞)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야사의 어머니와 아내도 붓다께 귀의하여 최초의 여성 재가 신자, 즉 우빠시까(upāsika, 優婆夷)가 됩니다. 이렇게 하여 앞서 말한 남성 출가자(比丘)와 함께 상가의 사중(四衆) 가운데서 여성 출가자(比丘尼)를 제외한 기타의 성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출가자가 계를 받고 머리와 수염을 깎아 버리고 황색 가사를 입는 데 대하여, 재가 신자는 계를 지키고 “오늘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 불, 법, 승에 귀의하겠습니다”라는 소위 삼귀의(三歸依)를 외움으로써 불교 신자가 됩니다. 재가 신도는 가정에 거주하면서 출가자 교단을 경제적으로 지탱해 나가도록 뒷받침해 주는 등,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시빠따나에서 이루어진 재가 신자의 귀의는 후에 불교 교단을 성립시키는 데 있어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야사에게는 네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크고 작은 부호의 아들들로서, 비말라(Vimala, 無垢), 수바후(Subāhu, 善臂), 뿐나지(Punnaji, 滿足), 가밤빠띠(Gavampati, 牛王)였습니다. 이들도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습니다.8) 그 뒤 다시 야사가 재가 시절에 사귀었던 50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거나 그 다음 오래된 가문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이들 야사의 친구 50명도 출가하여 교단에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바로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로써 불교교단에는 붓다를 포함하여 61명의 아라한이 있었던 것입니다.9)
4. 전도의 길
이제 붓다는 60명의 제자를 거느리게 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아라한으로서 법을 깨닫고 충분히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역량을 갖추 분이었습니다. 우기(雨期)가 끝나자, 세존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신들과 인간들의 덫으로부터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너희들도 신들과 인간들의 덫으로부터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길을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세상에 대하여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신들과 인간들의 이익, 축복, 행복을 위해서. 둘이서 한 길로 가지 마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뜻과 문장이 훌륭한 법을 설하라. 오로지 깨끗한 청정한 삶을 드러내라. 눈에 티끌 없이 태어난 사람이 있지만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버려지고 있다. 그들은 가르침을 아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도 또한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우루벨라의 세나니 마을로 간다.10)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전도선언(傳道宣言)’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순 한 사람의 아라한이 각기 갈 곳을 정해서 포교활동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때 붓다는 가르침을 펼치기 위해 곧바로 바라나시를 출발하여 붓다 가야로 되돌아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도중에 길에서 좀 떨어진 밀림 속에 들어가 한 나무 아래서 좌선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고장의 상류층 청년 서른 사람이 그 숲으로 놀이를 왔었습니다. 저마다 아내를 데리고 왔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의 독신자는 기녀를 데리고 왔었습니다. 다들 노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그 기녀는 여러 사람의 옷가지와 패물 등을 가지고 도망쳐버렸습니다. 청년들은 허둥지둥 그 뒤를 쫓다가 부처님이 좌선하고 있는 장소에 이르러 부처님에게 물었습니다.
“한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혹시 보지 못하셨습니까?”
“여자를 어떻게 하려는가?”
“이러이러한 사정으로 그 여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때 부처님은 청년들을 돌아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들이여, 여자를 찾는 것과 자기 자신을 찾는 것과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물론 자기 자신의 일이 더 중요합니다.”
“좋다, 그러면 거기들 앉거라.”
이와 같이 해서 서른 사람의 청년들은 부처님께 예배하고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설법을 듣고 모두 즉석에서 출가했습니다. 이리하여 부처님의 새로운 교단은 점점 성장해 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은 입멸하시는 날까지 계속하게 되는 성스러운 전법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과 더불어 부처님께서는 인도의 크고 작은 길을 빠짐없이 두루 편력(遍歷)하시며 무한한 자비와 지혜의 광명으로 그 모든 길을 가득히 채우셨습니다. 처음 승단은 겨우 60여명으로 시작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수천으로 늘어났습니다.11)
Notes:
1)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서울 : 김영사, 1984), p.213.
2) 붓다는 이 다섯 명의 고행자들을 ‘비구(Bhikkhu, 比丘)’라고 호칭하였는데, 이 때는 아직 붓다의 제자가 되기 전이었다. 그러나 붓다 당시 출가하여 유행하며 수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비구’라고 불렸다. 당시의 출가자들은 모두 걸식에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원래 ‘비구’라는 단어 자체가 ‘걸식한다(begged food)’ 또는 ‘구걸한다(mmendicant)’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후대에는 불교교단의 남성 출가자를 일컫는 말로 주로 사용되었다.
3) Vinaya Pitaka(=Vin.), ed. H. Oldenberg, 5 volumes (London: PTS, 1879-1883), Ⅰ, p.9.
4) Vin. Ⅰ, p.12; “aññasi vata bho Kondañño aññasi vata bho Kondañño’ti.”
5) Vin. Ⅰ, pp.10-13.
6)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올김. [초기, 부파불교의 역사], p.107.
7) Vin. Ⅰ, p.15; “dānakatham sīlakatam saggakatham kāmānam ādīnavam okāram samkilesam nekkhamme ānisamsam pakāsesi.”
8) Vin. Ⅰ, pp.18-19.
9) Vin. Ⅰ, p.19.
10) “Mutto-ham bhikkhave sabbapāsehi ye dibbā ye ca mānusā, Tumhe pi bhikkhave muttā sabbapāsehi ye dibbā ye ca mānusā. caratha bhikkhave cārikam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ak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m. Mā ekena dve agamettha, desetha bhikkhave dhammam ādikalyānam majjhe kalyānam pariyosāna-kalyānam, sāttham savyanjanam kevala-paripunnam parisuddham brahmacariyam pakāsetha. Santi sattā apparajakkha-jātikā, assavanatā dhammassa parihāyanti, bhavissanti dhammassa aññātāro. Aham pi bhikkhave yena Uruvelā Senānigamo ten’upasankamissāmi dhamma- desanāyā ti.” <S.Ⅰ, pp.105-6; V.Ⅰ, pp.20-21.>
11) 피야다시 지음, 정원 옮김, [부처님, 그 분: 생애와 가르침] (서울: 고요한소리, 1988), p.39.
초기의 교화활동
녹야원에서의 설법을 계기로 붓다의 교화활동은 급속히 전개되었습니다. 팔리어 [율장(律藏)] 「대품(大品)」에서는 그러한 교화활동 상황을 역사적 순서대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라나시에서 장자(長者)의 아들 야사(Yasa, 耶舍)가 교화를 받고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으며, 그의 부모와 아내도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재가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뒤 야사의 친구 4명과 50명의 옛친구도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불교 교단에는 붓다를 포함하여 61명의 아라한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 때 붓다께서는 저 유명한 ‘전도선언(傳道宣言)’을 단행했던 것입니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전도의 여행을 떠나라고 당부하고, 자신은 홀로 성도지(成道地) 우루벨라(Uruvelā, 優樓頻螺)로 향하였습니다. 붓다께서 우루벨라로 돌아오는 도중에 30명의 젊은이들을 교화하여 제자로 받아들입니다. 30명의 젊은이들은 각자 아내를 거느리고 숲속으로 나들이를 나와 즐겼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은 아내가 아닌 기녀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이 놀이에 빠져 있는 동안 기녀는 그들의 귀중품을 모두 가지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들이 도망간 여인을 찾느라고 소란을 피우고 있을 때, 숲속에서 명상 중이었던 붓다를 발견하고, 붓다께 여인의 행방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도망간 기녀를 찾는 일과 자신을 찾는 일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를 묻고, 그들에게 법을 설하여 교화시켰습니다. 그들은 모두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1. 깟사빠 삼형제
초기불교 교단에서 가장 큰 수확은 깟사빠(Kassapa, 迦葉) 삼형제를 개종시킨 사건일 것입니다. 이들 깟사빠 삼형제는 붓다께서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야(Buddhagayā, 佛陀伽倻, 현재의 보드가야)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시 가장 명성이 높은 종교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일 먼저 이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이들 삼형제 중 첫째는 우루벨라 깟사빠(Uruvelā Kassapa, 優樓頻螺迦葉)입니다. 그는 우루벨라 숲속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불렸는데, 그에게는 500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둘째는 나디 깟사빠(Nadī Kassapa, 那提迦葉)인데, 그는 우루벨라 숲과 가야를 연결하는 네란자라 강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습니다. 팔리어 나디(Nadī)는 강(江) 또는 하(河)이라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300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셋째는 가야 깟사빠(Gayā Kassapa, 伽倻迦葉)입니다. 그는 하류(下流)인 가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는데, 그에게도 200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머리를 땋고 불을 숭배하면서 해탈을 목표로 고행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불의 신 ‘아그니(agni, 火神)’를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사화외도(事火外道) 혹은 배화교도(拜火敎徒)라고 불렸으며, 머리를 땋고 주로 고행하였기 때문에 결발행자(結髮行者) 혹은 결발외도(結髮外道)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 종교의 교리와 수행 내용 등과 같은 자세한 사항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팔리 [율장] 「대품」에는 붓다께서 우루벨라 깟사빠를 신통력으로 교화하는 내용이 아주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은 ‘우루벨라의 신통’으로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경전의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세존께서는 결발의 행자 우루벨라 깟사빠가 머물고 있던 수행처로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깟사빠여, 그대가 불편하지 않다면 나는 오늘 하룻밤을 그대의 화옥(火屋)에서 지내고자 한다.”
“위대한 사문이시여, 저는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흉악하고 신통한 용왕이 살고 있는데, 그 용은 맹렬한 독을 뿜는 독사여서 당신을 해치게 될까 걱정됩니다.”
이렇게 세존께서는 깟사빠에게 세 번 반복하여 간청하였습니다. 그러자 깟사빠는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하였습니다.
여기서 화옥(火屋)이란 불을 섬기는 성화당(聖火堂)을 말하는데, 이곳에 나가(Nāga)가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팔리어 나가(Nāga)는 용(龍), 코끼리(象), 뱀(蛇)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아마 거대한 독을 가진 뱀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드디어 세존께서는 화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풀로 엮은 자리를 깔고 그 위에 가부좌로 앉으신 뒤 몸을 세우고 선정(禪定)에 드셨습니다. 큰 독을 가진 뱀은 세존께서 들어와 계시는 것을 보고는 괴롭고 쓰라린 심정으로 독의 연기를 내뿜었습니다. 세존께서는 생각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이 독을 가진 뱀의 피부와 가죽과 살과 힘줄과 뼈와 골수를 다치지 않게 하면서, 나의 불로써 독뱀의 불을 소멸시켜야겠다.’
세존께서는 신통력으로 연기를 뿜어 내셨습니다. 그러자 독뱀은 분노를 참지 못한 채 불을 뿜었습니다. 세존 역시 화계삼매(火界三昧)에 들어 불을 뿜으셨습니다. 세존과 독뱀, 그 둘이 불꽃에 휩싸이자 성화당 안은 마치 거세게 불타는 것과 같았습니다. 수행자들은 성화당 주위에 모여 말했습니다.
“아, 그 위대한 사문은 참으로 아름다웠는데, 이제 독뱀에게 죽임을 당하는구나.”
세존께서는 피부, 가죽, 살, 힘줄, 뼈, 골수 등 그 어느 것도 다치지 않게 하면서 자신의 불로써 독뱀의 불을 소멸시켰고, 밤이 지나자 그 독뱀을 발우에 담아 우루벨라 깟사빠에게 보여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그대의 독뱀이다. 이 독뱀의 불은 나의 불로 소멸되었다.”
그러자 우루벨라 깟사빠는 생각했습니다.
‘이 위대한 사문의 위력은 참으로 훌륭하다. 이 흉악하고 신통한 독뱀이 맹렬한 독으로 불을 뿜는데도, 그 불을 자신의 불로써 소멸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와 같은 아라한은 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우루벨라 깟사빠는 세존께서 보이신 신통을 보고 존경심을 일으켰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승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루벨라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대한 사문이시여, 여기서 머무십시오. 언제나 제가 당신께 공양 올리겠습니다.”
어느 때 세존께서는 우루벨라 깟사빠의 수행처 근처에 있는 숲에서 지내셨습니다. 그런데 밤이 으슥한 무렵에 사대천왕(四大天王)이 뛰어난 용모를 한 채, 숲 전체를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 왔습니다. 그들은 세존께 공손히 절하고 사방에 서 있었는데, 마치 거대한 불기둥과 같았습니다.
밤이 지나자 우루벨라 깟사빠는 세존께로 다가와서 아뢰었습니다.
“위대한 사문이시여, 때가 되었습니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런데 위대한 사문이시여, 어젯밤에 뛰어난 용모를 한 채, 숲 전체를 밝히면서 당신이 계신 곳으로 와서 공손히 절하고 사방에 서 있던, 거대한 불기둥과 같았던 그들은 누구였습니까?”
“깟사빠여, 그들은 사대천왕으로 법을 듣기 위해 나에게 온 것이다.”
그러자 우루벨라 깟사빠는 생각했습니다.
‘이 위대한 사문의 위력은 참으로 훌륭하다. 사대천왕조차 법을 듣기 위해 그에게 오지 않는가? 그러나 그는 나와 같은 아라한은 되지 못한다.’
세존께서는 우루벨라 깟사빠가 준비한 음식을 드시고는 숲으로 돌아가 머무셨습니다.
그 뒤에도 붓다는 여러 가지 신통력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팔리 [율장] 「대품」에는 3,500가지의 신변(神變), 즉 신통력을 보이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신통력으로써 우루벨라 깟사빠를 계속적으로 압박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쉽게 세존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존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이 어리석은 자는 나를 위대한 사문으로, 그리고 나의 위신력을 진정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자신과 같은 아라한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이 자가 스스로 자신의 생각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해야겠다.’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우루벨라 깟사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깟사빠여, 그대는 아라한도 아니고, 아라한의 경지에 들지도 못했다. 아라한과 아라한의 경지에 들기 위한 도(道)를 그대는 갖추지 못했다.”
그러자 우루벨라 깟사빠는 세존의 발에 머리를 대는 예를 갖추고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깟사빠야, 그대는 500명의 수행자들을 이끌고 있는 최고의 지도자이다. 그대는 그들이 자신들의 생각대로 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루벨라 깟사빠는 수행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나는 저 위대한 사문 곁에서 청정한 수행을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신들의 생각대로 하길 바랍니다.”
“깟사빠여, 우리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저 위대한 사문에게 큰 믿음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만약 깟사빠께서 저 위대한 사문에게 가서 청정한 수행을 하신다면 우리들 모두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행자들은 머리를 깎고, 소지품과 불을 섬기는 제사 도구 등을 모두 물에 떠내려보내고, 세존께 가서 머리를 발에 대는 예를 갖추고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자 합니다.”
“오너라, 비구들이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이렇게 그들은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그때 강의 하류에 살던 나디 깟사빠는 물 위에 머리카락과 짐과 불을 섬기는 제사 도구들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형에게 어떤 재난도 닥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수행자들을 형이 있는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300명의 수행자들과 함께 우루벨라 깟사빠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더 뛰어난 것입니까?”
“그렇다. 이것이 진정 더 뛰어나다.”
그리하여 나디 깟사빠와 그 제자 300명이 세존께 귀의하고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야 깟사빠도 자신의 제자 200명과 함께 세존께 귀의하고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깟사빠 삼형제는 자신들의 제자 1,000명과 함께 모두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약하면, 붓다는 우루벨라에서 결발의 행자였던 우루벨라 깟사빠를 신통력으로써 항복시키고, 나디 깟사빠와 가야 깟사빠 및 이 세 명의 깟사빠가 이끄는 제자 천 명을 귀의시켜 교단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이러한 전승은 마가다국 최대의 도시인 가야로 되돌아 온 붓다께서 전통 힌두교와는 다른 출가자 교단의 지도자와 격렬한 종교 논쟁이나 또는 종교상의 대결을 통해서 그를 물리치고 불교 교단의 기반을 이 지역에 구축해 나간 것을 상징해 주는 것입니다. 불교 교단은 개종자를 흡수하면서 계속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2. 불의 설법
붓다는 이제 6년 전에 마가다국의 국왕 빔비사라와 한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깟사빠 삼형제를 비롯한 천 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마가다의 수도 왕사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왕사성 교외의 가야시사(Gayāsīsa, 伽倻尸沙)에 머물렀습니다.
가야시사는 상두산(象頭山)이라고 한역되었습니다. 현장(玄奘) 스님의 기록에 의하면, 가야시사는 가야성(伽倻城)의 서남(西南) 5-6리(里)에 있었다고 하였고, [우다나]의 주(註)에는 가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못과 내가 있는데 그곳은 세속의 사람들이 악(惡)을 씻어버리는 영장(靈長)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 거기에 한 산이 있는데, 코끼리의 머리와 비슷한 큰 바위가 있어 천 명의 비구를 수용할 수 있어 상두산이라고 불린다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사촌동생 데와닷따(提婆達多)가 부처님을 배반하고 독립한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어느 때 세존께서는 우루벨라에서 좋을 만큼 지내신 뒤, 예전에 결발외도(結髮外道)였던 천 명의 비구들과 함께 가야시사를 향해 떠나셨습니다. 이윽고 가야 지방의 가야시사에 도착하여 천 명의 비구들과 함께 머무셨습니다. 그곳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불타고 있는가? 눈이 불타고 색(色)이 불타고, 안식(眼識)이 불타고, 안촉(眼觸)이 불타고, 안촉에 기대어 발생한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불타고 있다. 무엇으로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타고 노여움의 불로 타고 어리석음의 불로 타고, 출생, 늙음, 죽음, 슬픔, 눈물, 괴로움, 근심, 갈등으로 불탄다. 귀도, 코도, 혀도, 몸도,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비구들이여, 들은 것이 많은 나의 성스러운 제자들은, 이와 같이 보는 까닭에 눈도 싫어하고 색들도 싫어하고 안식도 싫어하고 안촉도 싫어하고 안촉에 기대어 발생한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싫어한다. 귀도, 코도, 혀도, 몸도,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에 대해 탐욕을 제거하고 그들로부터 해탈한다. 그리고 해탈했다는 지혜를 일으킨다.
나의 괴로운 생존은 끝났다.
청정한 수행은 완성되었다.
실천해야 할 바를 모두 실천했다.
다시는 괴로운 생존을 받지 않는다.
이렇게 불의 설법이 베풀어졌을 때, 천 명의 비구들은 집착이 사라져 모든 번뇌에서 해탈하였다.
이것이 저 유명한 ‘불의 설법(燃火經)’입니다. 이 법문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단(壇)을 꾸미고 불을 태워 그 타오르는 화염(火炎) 속에 제사를 지냈던 자들에게 설한 것입니다. 이 법문의 핵심은 외부의 불보다 인간의 내부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더 무서우며, 그 불길을 꺼버리고 해탈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王舍城에서의 敎化
1. 왕사성과 초기불교 교단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는 붓다 당시 인도의 사대강국(四大强國) 중의 하나인 마가다(Magadha, 摩揭陀)국의 수도(首都)였습니다. 라자가하는 당시로서는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는데,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옛 도시는 기릿바자(Giribbaja, 山圍域)로 널리 알려졌던 언덕 위의 요새, 즉 산성(山城)이었습니다. 이 산성은 매우 오래되었으며, 능숙한 건축가였던 마하고빈다(Mahāgovinda)왕이 설계하고 세운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1) 신도시는 산 기슭의 평지에 빔비사라(Bimbisāra)왕이 세웠습니다. 신(新), 구(舊) 도시 모두 기릿바자(Giribbaja)로 불렸습니다. 그 이유는 주위에 빤다바(Pandava, 白善山), 깃자꾸따(Gijjhakūtā, 靈鷲山), 베바라(Vebhāra, 負重山), 이시기리(Isigili, 仙人掘山), 베뿔라(Vepulla, 廣普山) 등 다섯 개의 산으로 둘러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자가하는 붓다의 활동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붓다께서 처음 출가하여 90마일 거리의 아노마(Anomā) 강을 건너 걸어서 라자가하를 방문했습니다. 빔비사라왕은 거리에서 탁발하는 싯다르타를 발견하고, 그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출가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빔비사라왕은 나중에 그가 목적을 이루면 라자가하를 다시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싯다르타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2) 그래서 붓다는 깨달음을 이룬 뒤, 자띨라(Jatila, 結髮外道)를 개종시키고, 가야(Gayā)에서 라자가하로 와서 1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빔비사라왕과 그의 백성들은 붓다를 열렬히 환영했으며, 왕은 붓다와 제자들을 왕궁으로 초대하여 융숭하게 대접했습니다. 붓다께서 왕실 구역 안으로 들어오던 날 삭까(Sakka)는 어린 아이로 변신하여 붓다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대열을 이끌었다고 합니다. 이 첫 번째 방문 때, 빔비사라 왕은 벨루와나(Veluvana, 竹林)를 붓다와 승단에 기증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와 목갈라나(Moggallāna, 目犍連)도 라자가하에서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가장(家長)들이 승단에 합류했는데, 사람들은 붓다가 자신들의 가정을 파괴한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비난은 채 일주일도 넘기기 못하였습니다.
붓다는 라자가하에서 첫 번째 왓사(vassa, 安居)를 보내고, 겨울과 그 이듬해 여름까지 라자가하에서 머물렀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스님들을 뵙기를 원했고, 자신들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붓다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먼저 닥키나기리(Dakkhināgiri)에 갔으며, 이어서 까삘라왓투(Kapilavatthu, 迦毘羅衛城)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붓다방사(Buddhavamsa, 佛種性史)의 주석서에 의하면, 붓다는 세 번째, 네 번째, 열일곱 번째, 스무 번째의 안거를 라자가하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붓다는 20년 동안 라자가하를 중심으로 그의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왓티(Sāvatthī, 舍衛城)를 자신의 본거지로 삼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종종 라자가하를 방문하여 머물었습니다. 많은 율의 규정들도 라자가하에서 제정되었습니다. 붓다는 입멸 직전 마지막으로 라자가하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아자따삿뚜(Ajātasattu, 阿闍世王)는 밧지족(Vajjian)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자신의 성공 여부를 알기 위해 대신 왓사까라(Vassakāra)를 깃자꾸따(Gijjhakūta, 靈鷲山)에 계시던 붓다께 보냈습니다.3)
붓다께서 열반하신 뒤, 마하깟사빠(Mahākassapa, 大迦葉)와 여러 스님들에 의해 제1차 결집을 위한 만남의 장소로써 그들의 본부로 라자가하를 선정했습니다. 제1차 결집은 삿따빤니구하(Sattapanniguhā, 七葉窟)에서 행해졌는데, 아자따삿뚜왕은 진심으로 후원해 주었습니다. 또한 왕은 자신의 몫으로 차지했던 붓다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라자가하에 탑을 세웠습니다.
마하방사(Mahāvamsa, 大史)에 의하면, 약간 후대에 마하깟사빠(대가섭)의 제안에 따라 아자따삿뚜왕은 라자가하의 일곱 장소에 분산하여 보관해 오던 붓다의 사리 중 라마가마(Rāmagāma)에 봉안된 것을 제외하고 모두 거두어 한 곳에 모아 대탑(大塔, Mahāthūpa)를 세웠습니다. 후세의 아소까(Asoka)왕이 세운 사찰과 탑에 봉안된 사리는 모두 대탑에서 꺼낸 것입니다.
라자가하는 붓다 재세시 육대(六大) 도시 가운데 하나였으며, 중요한 무역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의 육대 도시는 라자가하를 포함하여 짬빠(Campa, 앙가의 수도), 사왓티(Sāvatthī, 꼬살라의 수도), 사께따(Sāketa, 고살라의 도시), 꼬삼비(Kosambi, 밤사의 수도), 바라나시(Bārānasī, 까시의 수도) 등입니다.4)
붓다께서 입멸했을 때, 라자가하에는 열 여덟 개의 큰 사원이 있었습니다. 그 후 따뽀다(Tapodā)와 삿삐니(Sappinī) 강의 범람으로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붓다 생존시 라자가하에는 인구가 1억 8천만 명이었는데, 도시 안에 9천만 명이 살았고, 도시 밖에 9천만 명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위생 시설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라자가하의 회계원과 아나타삔디까(Anathapindika, 給孤獨)는 서로 자기들의 여동생과 바꾸어 결혼했습니다. 아나타삔디까는 결혼을 위해 라자가하로 가는 도중에 처음으로 붓다를 만났습니다. 붓다 입멸 후 곧바로 라자가하는 그 중요성과 번영을 모두 잃어버리고 쇠퇴하였습니다. 시수나가(Sisunāga)왕은 수도를 베살리(Vesāli)로 옮겼으며, 깔라소까(Kālāsoka)왕은 다시 빠딸리뿟따(Pataliputta)로 천도(遷都)하였습니다. 빠딸리뿟따는 이미 붓다 당시에 전략상 중요한 장소로 여겨졌던 곳입니다. 중국의 현장(玄奘) 스님이 라자가하를 방문했을 때는 바라문들이 라자가하를 차지하고 있었고, 도시 전체가 매우 황폐화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2. 빔비사라왕과의 만남
붓다는 깟사빠 삼형제를 교화한 다음, 가야시사(Gayāsīsa, 象頭山)를 출발하여 라자가하에 도착했습니다. 붓다는 깟사빠 삼형제를 비룻한 천 명의 제자들과 함께 랏티와눗야나(Latthivanuyyāna, 杖林)의 수빠띳타 쩨띠야(Supatittha cetiya)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마가다국의 세니야 빔비사라(Seniya Bimbisāra)왕은 세존께서 천 명의 비구들과 함께 라자가하에 도착하여 수빠띳따 쩨띠야에 머물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빔비사라왕은 마가다국의 12만 명의 바라문과 장자들을 거느리고 세존을 찾아뵈었습니다. 왕은 세존께 공손히 절하고 한쪽에 앉았습니다.
그때 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저 위대한 사문이 우루벨라 깟사빠(Uruvela Kassapa, 優樓頻螺迦葉)를 모시고 청정한 수행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루벨라 깟사빠가 저 위대한 사문을 모시고 청정한 수행을 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존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우루벨라 깟사빠에게 게송으로 “어찌하여 불에 제사 지내던 일을 그만두게 되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우루벨라 깟사빠는 “제사를 지내는 일에도 즐겁지 않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어깨에 상의를 걸치고 세존의 발에 머리를 대는 예를 갖추고 아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저의 스승이시며, 저는 세존의 제자입니다.”라고 반복하여 아뢰었습니다. 그리하여 12만 명의 바라문과 장자들은 ‘우루벨라 깟사빠가 저 위대한 사문을 모시고 수행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보시를 실천하고 계율을 준수하면 하늘에 나게 된다. 여러 애욕에는 환란과 공허함과 번뇌가 있다. 애욕에서 벗어나면 큰 공덕이 드러난다.”라는 요지의 법문을 설했습니다. 이어서 세존께서는 본래 진실한 고집멸도의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그러자 때 없는 흰 천이 잘 염색되듯이, 빔비사라 왕을 비롯한 11만 명의 바라문과 장자들은 그 자리에서 먼지와 때를 멀리 여윈 법안을 얻었습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때 빔비사라왕은 붓다께 왕자 시절에 자신이 세운 다섯 가지 소원을 모두 이루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섯 가지 소원이란 첫째는 왕위에 오르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 영토에 평등하시며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세존께서 오셨으면 하는 것이고, 셋째는 세존을 모셔 봤으면 하는 것이고, 넷째는 그 세존께서 자기에게 법을 설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세존의 법을 명료하게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빔비사라왕이 붓다를 친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다섯 가지 소원을 모두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빔비사라왕은 붓다를 찬탄한 뒤, 자신을 재가 신자로 받아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는 생명이 다할 때까지 붓다께 귀의하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은 세존과 비구 승단을 내일 왕궁으로 초대하여 공양을 올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붓다는 침묵으로 승낙하였습니다.
다음 날 세존께서는 가사를 두르고 발우를 든 채, 예전에 결발외도였던 천 명의 비구들과 함께 라자가하로 들어갔습니다. 그 장면은 참으로 거룩하고 감동적입니다. [율장(律藏)] 「대품(大品)」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5)
그때 천신들의 왕 삭까(Sakka)가 동자의 모습으로 변한 뒤, 세존이 지도자이신 비구 승단의 선두에 나아가 게송을 읊었다.
“세존께서는 이미 극복했고 해탈하셨네.
세존을 통해 과거 결발외도들도
이미 극복했고 해탈하였네.
금(金)의 고리와 같이 아름다우신 세존께서는
그들과 함께 라자가하로 들어가시네.
세존께서는 이미 벗어났고 해탈하셨네.
세존을 통해 과거 결발외도들도
이미 벗어났고 해탈하였네.
금의 고리와 같이 아름다운신 세존께서는
그들과 함께 라자가하로 들어가시네.
세존께서는 이미 건너셨고 해탈하셨네.
세존을 통해 과거 결발외도들도
이미 건넜고 해탈하였네.
금의 고리와 같이 아름다우신 세존께서는
그들과 함께 라자가하로 들어가시네.
세존께서는 이미 멈추셨고 해탈하셨네.
세존을 통해 과거 결발외도들도
이미 멈추었고 해탈하였네.
금의 고리와 같이 아름다우신 세존께서는
그들과 함께 라자가하로 들어가시네.
열 가지에 거주하고 열 가지 힘이 있고
열 가지 법을 알고 열 가지를 갖추신 세존께서는
천 명의 사람들에 둘러싸여
라자가하로 들어가시네.
사람들은 천신들의 왕 삭까를 보고 말했다.
“아! 저 동자는 너무도 수려하다. 아! 저 동자는 너무도 아름답다. 아! 저 동자는 너무도 매혹적이다. 저 동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 말을 듣고 천신들의 왕 삭까는 그 사람들에게 게송으로 말했다.
확고부동하고 모든 것을 극복했으며
청정하고 세상에 짝할 이 없으며
아라한이고 선서(善逝)이신 세존의 시자(侍者)이다.
세존께서는 빔비사라왕의 거처에 이르러 비구 승단과 함께 준비된 자리에 않으셨다. 왕은 세존을 비롯한 비구 승단을 위해 손수 시중들고 봉사했다. 세존께서 식사를 끝내고 그릇에서 손을 거두시니 왕은 한쪽에 앉았다.
왕은 생각했다.
‘세존께서는 어떤 장소에서 지내셔야 할까?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고, 오고가기에 편하며, 이런저런 목적을 지닌 사람들이 찾아뵙기 좋고, 낮에는 지나치게 붐비지 않고 밤에는 소음이 없고 인적이 드물고, 혼자 지내기에 좋고 좌선하기에 적절한 곳, 바로 그런 곳에 머물러야 하실텐데.’
왕은 다시 생각했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벨루 숲이 있다.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고, 오고 가기에 편리하고, 이런저런 목적을 지닌 사람들이 찾아뵙기 좋고, 낮에는 지나치게 붐비지 않고 밤에는 소음이 없고, 인적이 드물고, 혼자 지내기에 좋고 좌선하기에 적절한 곳이다. 나는 벨루 숲을 세존이 지도자이신 비구 승단에게 승원(僧園)으로 사용하도록 바쳐야겠다.’
그리하여 왕은 왕금으로 만든 병을 세존게 올리면서 말했다.
“세존이시여, 벨루 숲을 세존이 지도자이신 비구 승단에 승원으로 사용하도록 바치고자 합니다.”
세존께서는 승원을 받으셨다. 그리고 다시 빔비사라 왕에게 법을 설하신 뒤 왕이 그것을 받들고 기뻐하는 것을 보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셨다.
세존께서는 이 인연으로 법을 설하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승원을 받기로 하였다.”
Notes:
1) G. P. Malalasekera(ed.),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Oriental Books Reprint Corporation, 1983), Vol. II, p.489, 참조.
2) 出家經(Pabbajja sutta)와 그 주석서 참조.
3) Dīgha-nikāya(PTS), Vol. II, p.72.
4) D. II, p.147.
5) 아래의 번역은 최봉수 옮김, [마하박가1](서울: 時空社, 1998), pp.112-115에서 인용한 것임.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귀의
붓다께서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를 중심으로 교화를 펼치고 계실 때, 라자가하 부근에는 여러 종교 단체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인 산자야 벨랏티뿟따(Sañjaya Belatthiputta)도 250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우빠띳사(Upatissa, 優波帝須)와 꼴리따(Kolita, 俱律陀)라는 두 사람의 수제자(首弟子)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나중에 붓다께 귀의하여 초기불교 교단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와 목갈라나(Moggallāna, 目犍連)입니다.
사리뿟따의 본명은 우빠띳사(Upatissa)였습니다.1) 주석가들은 우빠띳사가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이라고 하지만,2) 다른 곳에서는 나라까(Nāraka)가 그의 마을 이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3) 사리뿟따의 아버지는 바라문 방간따(Vanganta)4)이고, 그의 어머니는 루빠사리(Rūpasāri)입니다. 그가 사리뿟따(사리의 아들)로 불린 것은 그의 어머니 이름 때문이었습니다.5) 우빠띳사라는 이름은 경전들에서 아주 드물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쭌다(Cunda), 우빠세나(Upasena), 레와따(Revata)라는 세 명의 남동생과 짤라(Cāla), 우빠짤라(Upacāla), 시수빠짤라(Sisūpacāla)라는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모두 출가하여 승단에 입단했습니다. 또한 경전에는 그의 숙부와 조카의 이야기도 언급되어 있습니다.6)
목갈라나는 라자가하 근처의 꼴리따가마(Kolitagāma)에서 태어났습니다. 같은 날 사리뿟따도 태어났다고 전합니다.7) 그는 나중에 그의 마을 이름인 꼴리따(Kolita)로 불렸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목갈리(Moggalī) 혹은 목갈라니(Moggallāni)로 불렸던 여성 바라문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마을 촌장이었습니다.8) 그의 이름 목갈라나는 그의 어머니 이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갈라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승단에 너무 많았기 때문에 붓다의 두 번째 제자인 목갈라나는 마하목갈라나(Mahāmoggallāna)로 불렸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라자가하의 축제를 구경하며 함께 즐기고 있었는데, 그들은 문득 백년 후에 이 사람들 중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과연 있을 것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무상(無常)을 느껴, 해탈의 길을 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집을 떠나 육사외도의 하나인 회의론자 산자야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산자야의 문하에서 수행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먼저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달하는 자가 다른 사람에게 반드시 알려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불사라는 말은 오랜 옛날부터 최고의 이상을 표현하는 말로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절대의 경지 또는 해탈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9)
산자야의 두 수제자였던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붓다께 귀의하게 된 것은 불교교단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건입니다.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개종에 관해서는 팔리 『율장(律藏)』「대품(大品)」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10) 그 전후 사정을 요약해서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라자가하의 거리를 거닐고 있던 사리뿟따는 한 사문의 엄숙한 용모와 고요하고도 위엄있는 거동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문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최초의 다섯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앗사지(Assaji, 馬勝)였습니다. 앗사지 비구는 나아가고 물러서고, 앞을 보고 뒤를 보고, 굽히고 펴는 것이 의젓하였고, 눈은 땅을 향하여 훌륭한 몸가짐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사리뿟따는 이러한 앗사지 비구의 위의(威儀)에 크게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앗사지 비구의 걸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벗이여, 당신의 모습은 우아하고, 당신의 눈빛은 맑게 빛납니다. 벗이여, 당신은 누구에게 출가하였으며,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며, 누구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까?”
“벗이여, 사캬족 가문(Sakyakulā)의 사캬의 아들(Sakyaputta)로서 출가한 위대한 사문이 있습니다. 그 분은 세존이십니다. 나는 세존에게 출가하였으며, 세존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며, 세존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대의 스승께서는 무엇을 설하십니까?”
“벗이여, 저는 어리고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법과 계율에 대해서는 배움이 짧습니다. 저는 세존의 가르침을 자세히 가르쳐 줄 수는 없고 다만 간략한 의미만을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앗사지 비구는 사리뿟따에게 법문(法門, dhammapariyāyam)을 설하였습니다.
“모든 법은 인(因)으로 말미암아 생긴다.
여래께서는 이 인(因)을 설하시었다.
모든 법의 소멸에 대해서도
위대한 사문은 그와 같다고 설하시었다.”11)
(諸法從緣起 如來說是因 彼法因緣塵 是大沙門說.)
사리뿟따는 이 법문을 듣고 먼지와 때를 멀리 여윈 법안(法眼)을 얻었습니다. 곧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는 것’12)이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깨달음의 첫 단계인 예류과(預流果, sotāpanna)를 성취하였습니다. 그리고 게송을 읊었습니다.
“비록 이것뿐이라고 하여도 이것은 바른 법이다.
수만 겁(劫)을 헤매어도 보지 못하였던
슬픔 없는 이 법구(法句)를 그대들은 깨달았네.”13)
사리뿟따는 목갈라나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앗사지 비구를 만난 사실과 가르침을 받은 내용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목갈라나 역시 친구가 전해주는 게송을 듣고서 곧바로 깨침의 첫 단계를 얻었습니다. 이때 목갈라나는 사리뿟따에게 말했습니다.
“벗이여, 우리 세존의 곁으로 갑시다. 세존만이 우리의 스승입니다. 그런데 벗이여, 250명의 유행자(遊行者)들이 우리를 의지하며 여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정을 알려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합시다.”
이러한 말을 전해들은 다른 동료들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들은 그대들에게 의지하며 여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만약 그대들이 저 위대한 사문에게 가서 청정한 수행을 하신다면 저희들도 모두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때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산자야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저희들은 세존의 곁으로 갑니다. 세존만이 저희들의 스승입니다.”
그러자 산자야는 “안된다. 가지 마라. 우리 셋이 함께 이 무리를 보살피도록 하자.”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250명의 유행자들을 이끌고 벨루와나(Veluvana, 竹林)를 향해 떠났습니다. 산자야는 그곳에서 뜨거운 피를 토했습니다.
세존께서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저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저기에 오고 있는 두 사람은 꼴리따(Kolita)와 우빠띳사(Upatissa)이다. 그들은 가장 뛰어나고 현명한 나의 한 쌍의 제자가 될 것이다.”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세존께서 계신 곳에 이르러 세존의 발에 자신들의 머리를 대는 예를 갖추고 아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오너라. 비구들이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이렇게 그들은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산자야의 제자들 중에서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부처님에게 귀의한 것은 불교교단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후에 불교교단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널리 포교하였기 때문입니다.14)
위에서 언급한 앗사지가 전한 붓다의 가르침은 게송(偈頌)의 형식으로 전하는데 매우 유명한 것입니다. 물론 그 게송의 형식이 앗사지가 말한 그대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부처님의 가르침의 중심 골자가 들어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게송은 후대에 매우 중요시되어 법신게(法身偈) 또는 법사리(法舍利)라고 불리어지게 되었습니다.15) 여러 불전(佛典)에는 이 게송이 조금씩 다른 형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16)
붓다께서는 제자가 된 이들 두 사람을 모든 제자의 상좌(上座, 윗자리)에 두었습니다. 이는 하루라도 일찍 교단에 들어온 자를 상좌에 두는 전통에 어긋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고참 비구들로부터의 불평이 많이 있었지만 붓다는 이들을 잘 달랬다고 합니다. 이 일은 두 사람이 얼마나 뛰어난 자질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가 하는 사실을 잘 나타내 줍니다.
사리뿟따는 부처님을 모시고 수행하는 중 자기를 부처님께 인도해 준 앗사지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어서 일생동안 앗사지가 있는 쪽으로는 다리를 뻗고 자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리뿟따는 방위(方位)를 믿는 이교도(異敎徒)라는 비난이 생길 정도였다고 합니다.17)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두 사람이 부처님게 귀의한 이래 부처님의 명성(名聲)은 더욱 높아지고 라자가하의 명문 자제로서 출가하는 사람의 수효가 점점 늘어갔습니다. 그 때문에 ‘고따마 사문은 부모에게서 자식을 빼앗아 가고, 아내로부터 남편을 빼앗아 가고, 집안의 혈통을 끊는 자’라는 비난마저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한 때 그 제자들의 탁발까지도 어려운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법(正法)을 가르치는 부처님의 숙연한 태도에 그 비난의 소리도 점차 가라앉아 교세(敎勢)는 더욱 늘어가기만 하였습니다.18)
사리뿟따는 ‘지혜제일(智慧第一)’이라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갖가지 지식에 통하고 통찰력도 뛰어났으며, 더욱이 교단의 통솔에도 빼어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경전 가운데도 세존을 대신해서 사리뿟따가 교리를 상세하게 설하고, 붓다께서 그것을 추인하는 형식이 가끔 보입니다.
목갈라나는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고 불리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습니다. 어느 날 그의 안색이 너무나 좋아서 사리뿟따가 그 이유를 물은 즉, “오늘 나는 붓다와 법담(法談)을 나누었는데, 붓다와 내가 모두 천안천이(天眼天耳)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신통력은 붓다와 동등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 그는 가끔 쁘레따(preta, P. peta, 餓鬼)를 보고 웃곤 했는데, 그 이유를 묻는 이에게 쁘레따에 대해 설명했다고 합니다. 쁘레따는 보통 사람은 볼 수 없는 조상의 영혼이나 전세에 지은 악업의 대가로 기아와 갈증에 시달리며 배회하는 귀신을 뜻합니다. 또 마리지(摩利支) 세계에 살고 있는 죽은 모친을 천안으로 보고서, 그곳으로부터 모친을 구출했다고도 합니다. 이것이 소위 목련구모(目連救母)의 전설인데, 이것은 중국 등지에서 거행되는 우란분(盂蘭盆; 지옥에 떨어진 이의 혹심한 괴로움을 구원하기 위하여 닦는 법)이나 시아귀회(施餓鬼會; 굶주림에 고통 받는 망령을 위안하기 위하여 베풀어 주는 법회)에서의 인연 설화의 기원이 되고 있습니다.19)
목갈라나는 붓다와 함께 사왓티(Sāvatthi, 舍衛城) 교외의 미가라마뚜빠사다(Migāramātupāsāda, 鹿子母 講堂)에 있을 때, 많은 비구들이 단정치 못한 자세로 잡담을 즐기는 광경을 보고, 신통력을 써서 발가락으로 강당을 흔들었기 때문에 비구들이 놀라서 도망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20) 또 모여든 비구 중에 부정한 자가 있음을 알고 그의 팔을 잡아 축출해냈다고도 합니다. 그는 아난다, 사리뿟따와 함께 교단 내부의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므로, 교단의 통제를 위해서도 그는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21)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모두 붓다께서 열반에 드시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붓다보다 먼저 입멸했다고 전해집니다. 두 사람 모두가 붓다보다 나이가 많았고, 또 붓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은 사실입니다. 붓다 자신도 “두 사람의 죽음으로 모든 비구들이 허전해 하는 것 같다”라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사리뿟따의 죽음을 애도하는 목갈라나의 게(偈)가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사리뿟따가 먼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생각됩니다.22)
현장은 라자가하와 날란다의 중간 지점에서 사리뿟따의 출생지로 알려진 카라피나카 마을을 찾아 스투파에 참배했다고 하며, 목갈라나의 고향인 꼴리따 마을의 스투파에도 참배했다고 합니다.23)
사리뿟따는 고향 나라까 마을에서 시종이기도 했던 동생 쭌다의 임종 간호를 받으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쭌다는 그 유골과 남긴 주발, 입었던 가사 등을 가지고 사왓티에 체류 중이던 붓다 앞에 이르러, 아난다와 함께 그의 죽음을 알렸습니다. 붓다는 그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했다고 합니다. 현장은 이 두 제자가 모두 자신의 출생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법현은 마투라에 사리불탑과 목련탑이 있었다고 전하고, 현장도 그곳에서 목건련과 그 밖의 다른 불제자의 사리탑에 참배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24)
Notes:
1) Majjhima-nikāya(PTS), Vol. I, p.150.
2) Dhammapadatthakathā(PTS), Vol. I, p.88ff; Anguttaratthakathā(PTS), Vol. I, p.155ff;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third edition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49), pp.84-85.
3) Satipatthāna Samyutta의 Cunda Sutta와 그 주석서에 의하면, 사리뿟따의 탄생지는 나라까(Nālaka) 혹은 Nālagāma로 되어 있다. 이 이름은 저 유명한 나란다(Nālanda)와 매우 가깝다. Nyanaponika Thera, The Life of Sariputta, The Wheel Publication No. 90-92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66), p.7 No.1.
4) Dhammapadatthakathā(PTS), Vol. II, p.84.
5) Sanskrit 경전들에서는 그의 이름이 Sāriputra, Śāliputra, Śārisuta, Sāradvatīputra로 나타난다. 또한 譬喩經(Apadāna, II, p.480)에서는 Sārisambhava라고 불렸다.
6)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Oriental Books Reprint Corperation, 1983), Vol. II, p.1109.
7)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95.
8)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II, p.541.
9)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샘터, 1990), p.186.
10) Vinaya Pitaka(=Vin.) Vol. I, pp.39-44.
11) “Ye dhammā hetuppabhavā/ tesam hetum tathāgato āha/ tesañ ca yo nirodho/ evamvādī mahāsamano.” <Vin. I, p.40.>
12) “생겨난 것은 소멸하는 것”이라는 말은 팔리어 “yam kiñci samudayadhammam sabbam tam nirodhadhammam”를 번역한 것이다.
13) “es’eva dhammo yadi tāvad eva paccavyathā padam asokam adittham abbhatitam bahukehi kappanahutehīti.” <Vin. I, p.40.>
14) 스가누마 아키라 지음, 편집부 옮김, 『부처님과 그 제자들』(서울: 봉은사출판부, 1991), p.107.
15) 이기영, 『석가』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지문각, 1965), p.155.
16) 四分律 33: “如來說因緣生法 亦說因緣滅法 若法所因生如來說是因 若法所因滅大沙門亦說是義 若法此是我師說..”; 五分律: “我師說法從緣生 亦從緣滅 一切諸法空無有主.”; 因果經 4: “一切諸法本因緣生無主 若能解此者卽得眞實道.”; 佛本行集經: “諸法因生者 從法隨因滅 因緣滅卽道 大師說如是.”; 大智度論 18: “諸法從緣生 是法緣及晝 我師大聖主 是義如是說.”; 南海寄歸傳 4: “若法종從緣起 如來說是因 彼法因緣滅 是大沙門說.”
17) 이기영, 『석가』, p.157.
18) 이기영, 『석가』, p.157-158.
19)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서울: 김영사, 1984), p.217.
20) Pasādakapana sutta(S. V. 269ff.; Utthāma sutta, SNA. I. 336f.).
21)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217.
22)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218.
23)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218.
24)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218.
디가나카와 마하까싸빠의 귀의
붓다께서 성도한 이후의 행적은 팔리어 『율장(律藏)』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헌에는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와 목갈라나(Moggallāna, 目犍連)가 250명의 무리와 함께 붓다께 귀의하여 교단에 들어왔다는 사실까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대 불전(佛傳)에는 계속하여 디가나카(Dīghanakha, 長爪)와 마하까싸빠(Mahā Kassapa, 大迦葉)의 귀의나 고향인 까삘라밧투(Kapilavatthu, 迦毘羅衛城)을 방문하여 사캬족(Sakya, 釋迦族)을 교화했다는 사실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행적을 편년사적(編年史的)으로 더듬어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후 상세한 내용이 알려지고 있는 것은 입멸 전후의 사건뿐입니다.1)
1) 디가나카의 귀의
역사적으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불교교단에 들어온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붓다께 귀의한 사람은 디가나카(Dīghanakha, 長爪)였습니다. 디가나카는 사리뿟따의 조카로서2) 숙부인 사리뿟따가 붓다께 귀의한지 겨우 반달이 지났을 때 붓다를 친견했습니다.3) 팔리어 디가나카(Dīghanakha)라는 말은 ‘긴 손톱’이라는 뜻이며, 한역에서는 장조(長爪)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마 손톱을 깍지 않고 길게 길렀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바라문 가문의 출신자였지만 바라문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던 회의주의자 혹은 절멸주의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라문의 전통에서 보면 이단자였던 것입니다.4) 불교 경전에서는 그를 편력자(遍歷者)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디가나카는 그의 숙부 사리뿟따가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대체 붓다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보려고 붓다를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수까라카따(Sūkarakhatā, 豚崛洞, ‘멧돼지 동굴’이라는 뜻)에서 처음으로 붓다를 친견했습니다.5) 디가나카와 붓다의 대화는 팔리어로 씌어진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 中部) 제74경 디가나카 숫따(Dīghanakha Sutta, 長爪經)6)에 실려 있습니다. 이 팔리어 경전과 대응하는 한역은 잡아함경(雜阿含經) 34권 장조경(長爪經)7)과 별역잡아함경 11권 5경8)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전들에 의하면, 그는 붓다를 친견한 뒤 곧바로 “나는 일체의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라고 자신의 회의주의적인 생각을 피력하였습니다. 그러자 붓다께서는 “당신은 그 인정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붓다는 “주의주장에는 일체를 긍정하는 것, 일체를 부정하는 것, 일부를 긍정하는 것, 일부를 부정하는 것이 있으나, 이 중 일체를 긍정하는 견해는 탐욕과 계박(繫縛)과 집착에 가깝고, 또 일체를 부정하는 견해는 적이 생기고 장애가 나타나므로 이 두 견해는 모두 다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9)
이 경전에서 붓다는 그를 악기베싸나(Aggivessana, 火種)10)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한역 『장조경』에 의하면, 붓다의 설법을 듣고 디가나카는 “티끌과 때를 멀리 떠나 진리의 눈이 깨끗하게 되어, 법을 보아 법을 얻고 법을 깨달아 법에 들어갔다. 모든 의혹을 끊되 남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바른 법, 율에 들어가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11)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붓다로부터 구족계를 받아 비구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는 “곧 선래(善來)비구가 되어 ‘착한 남자로서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바른 믿음으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는 까닭’을 생각하고 내지,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12)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팔리어 『디가나카 숫따』에서는 그가 붓다의 설법을 듣고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 재가불자가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13) 다시 말해서 남전의 팔리어 경전에서는 디가나카(長爪)가 붓다의 설법을 듣고 재가 신자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북전의 한역 아함경에서는 그가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전승이 역사적으로 더 정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마하까싸빠의 귀의
붓다께서 입멸하신 뒤 실제로 교단을 이끌었던 마하까싸빠(Mahā Kassapa, 大迦葉)가 붓다의 제자가 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마하까싸빠는 붓다의 저명한 제자 가운데 한 분이며, 가장 엄격한 두타행(頭陀行, dhutavādānam)14)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에 ‘두타제일(頭陀第一)’ 혹은 ‘행법 제일(行法第一)’이라고 불리었습니다.
마하까싸빠는 마가다국의 마하띳타(Mahātittha) 바라문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까삘라(Kapila) 바라문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수마나데비(Sumanādevī)였습니다.15) 그의 어릴 때 이름은 삡빨리(Pippali)였습니다. 그가 성장했을 때 그의 부모들은 결혼하기를 원했으나 그는 결혼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부모들의 강요를 회피하기 위해 그는 아름다운 황금 인형을 만들어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한다면 결혼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모들은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그러한 조건을 갖춘 밧다 까삘라니(Bhaddā Kāpilānī)라는 여인을 사가라(Sāgala)에서 찾아냈습니다. 두 사람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비록 결혼하지만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겠다고 서로 약속했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이틀 밤을 함께 지냈지만 꽃으로 만든 사슬을 경계로 서로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삡빨리는 막대한 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혼자서 많은 양의 향료를 사용했습니다. 그가 소유한 토지는 엄청나게 광대하였습니다. 그 토지에 농사를 짓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열여섯이었다고 합니다.16)
어느 날 그가 들에 나가서 농부들이 밭갈이 할 때, 기어 나오는 벌레들을 새들이 쪼아 먹는 것을 보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저토록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소유한 모든 재산을 버리고 출가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같은 시간 그의 아내 밧다(Bhaddā)도 까마귀가 작은 벌레들을 잡아먹고, 이 때 밖으로 뛰어나온 씨앗들이 말라죽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모든 생물들이 생명을 잃는 아픔을 생각하며, 그녀도 출가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17)
남편과 아내가 서로 의견이 일치하였습니다. 둘은 함께 출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각자 머리를 깎고 황색 가사로 갈아입고, 발우를 들고 길을 떠났습니다. 함께 같이 길을 걷다가 교차로에 도착하여 서로에게 장애가 될 것을 염려하여 남편은 오른쪽으로 아내는 왼쪽으로 떠났다고 합니다.18)
아내와 헤어져서 혼자서 여행을 계속하던 삡빨리는 어느 날 붓다를 친견하게 됩니다. 그때 붓다께서는 벨루와나(Veluvana, 竹林精舍)의 간다꾸띠(Gandhakuti, 香室, 부처님의 거실)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런데 붓다께서는 지진이 일어날 징후를 아시고, 세 가부따(gāvuta, 길이의 단위, 1/4 由旬)19)를 걸으신 다음, 라자가하(Rājagaha)와 나란다(Nālandā) 사이에 있는 바후뿟따까(Bahuputtaka, 多子) 니그로다(Nigrodha, 榕樹) 나무 밑에 앉으셨습니다. 이 여행으로 붓다의 명성은 더욱 빛이 났다고 합니다. 삡빨리(이제부터는 마하 까쌋빠라고 부른다)20)는 붓다를 발견하고, 곧바로 붓다를 자신의 스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붓다께서 그를 굴복시키기 전에 그는 이미 붓다의 위대함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그를 자리에 앉도록 하고 세 가지 설교를 한 다음, 그에게 구족계를 주었습니다.21)
붓다와 함께 라자가하로 돌아오던 마하까싸빠는 자신의 몸이 위대한 성자의 상징인 32호상 가운데 일곱 가지가 갖추어져 있음을 알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붓다는 길옆의 어느 나무 아래 앉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마하까싸빠는 자신의 가사를 접어 붓다께서 앉을 수 있도록 바닥에 갈아드렸습니다. 붓다께서 그곳에 앉으신 다음, 그 가사를 만져보시고 매우 부드럽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마하까싸빠는 자신의 가사를 세존께서 받아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면 너는 무엇을 입지?”라고 붓다께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까싸빠는 붓다께서 입고 계시는 누더기 가사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사용하여 빛이 바랬다”라고 붓다께서 말씀하였으나, 까싸빠는 전세계에서 이것이 최상이라고 찬양하고, 가사를 교환했습니다.22) 보통 사람들은 붓다께서 벗어버린 가사를 입기에 적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까싸빠의 공덕에 의하여 다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까싸빠는 이것을 매우 영예롭게 생각했으며, 자기 스스로 열세 가지 명세들[dhutagunā, 頭陀의 德]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으며, 그리고 8일 뒤 아라한이 되었습니다.23)
마하까싸빠는 두타제일로 불리는 것과 같이 엄격함을 지니고 살았으며 부처님이 입멸한 후의 불교교단에 중심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우루벨라 까싸빠(Uruvela Kassapa), 나디 까싸빠(Nadi Kassapa), 가야 까싸빠(Gayā Kassapa) 등 까싸빠 삼형제와 구별하기 위하여 마하까싸빠(Mahā Kassapa, 大迦葉)로 불리어졌습니다. 그에 관한 전기는 남, 북 양전에 달리 나타나지만, 애욕이 부정한 것임을 알아 아내를 맞이해도 끝내 육체관계를 멀리 했으며, 아내와 함께 출가를 했다는 점에선 남전과 북전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 나와 있으며, 그에 관한 시구가 『테라가타(Theragāthā, 長老偈)』제1051-1090게(偈)에 전하고 있습니다.24)
북전에 의하면 마하까싸빠와 헤어진 아내는 외도의 수행자 밑에 있었지만, 부처님의 교단에 비구니의 출가가 허용되었을 때 마하까싸빠가 아내의 일이 염려되어 천안(天眼)으로 그녀의 소재를 알고 비구니 한 사람을 시켜서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비구니 교단에 들어온 그녀는 비구니 교단의 수석이었던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i Gotami)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꾸준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얼마 안 있어 불제자로서 최고의 경지인 아라한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25)
마하까싸빠는 언제나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누르고 간소한 생활 규율(頭陀行)을 지켰습니다. 붓다께서 당신은 이미 늙었으니 부드러운 옷을 입고 신자의 초대를 받으면서 나의 곁에 있으라고 권했을 때도 그는 이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또 언젠가 그는 지난날 함께 수도를 하던 동료가 환속을 하여 도적질을 하다가 체포당해서 형장으로 끌려갈 때, 곧 달려가서 여러 가지로 훈계를 하여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형리의 무기를 두려워하지 않아, 당시의 왕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평소 마하까싸빠가 어떻게 생활했는가는 그가 남긴 시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래으 시들은 그가 남긴 시구 가운데 일부입니다.
“나는 침상에서 내려와 시내로 탁발을 나갔다. 밥을 먹고 있는 한 문둥병자에게 가, 그의 곁에 가만히 섰다.”<1054게>
“그는 문드러진 손으로 덩이의 밥을 주었다. 발우 안에 밥을 담아줄 때, 마침 그의 문드러진 손가락이 ‘툭’하고 그 안에 떨어졌다.”<1055게>
“담 벽 아래에서 나는 그가 준 밥을 먹었다. 그것을 먹고 있는 동안,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내게는 혐오스러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1056게>
“문전에 서서 탁발로 얻은 것을 양식으로 삼고, 소 따위의 냄새나는 오줌으로 만든 것을 약으로 삼으며, 나무 밑을 침상으로, 누더기 기운 것을 옷으로 삼아, 그것만으로 만족해하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사방(四方)의 사람26)이다.”<1057게>
이처럼 마하까싸빠는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된 이후, 철저한 두타행을 실천함으로써 승가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후대의 대승불교에서는 그가 붓다의 정법(正法)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존께서 입멸 하신 뒤 세존의 유해를 넣은 관은 마하까싸빠가 도착할 때까지 아무리 해도 불이 붙지 않아서 다비를 행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붓다께서 열반에 든 직후, 교단의 동요와 분열을 염려한 그는 아난다와 함께 비구들을 라자가하의 칠엽굴에 모이게 하고, 세존의 바른 가르침을 확인하기 위한 이른바 제1차 결집을 거행하였습니다.
Notes:
1)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 『초기, 부파불교의 역사』(서울: 민족사, 1989), p.44 참조.
2) 어떤 책에서는 디가나카가 사리뿟따의 숙부라고 하였으나, 디가나카는 사리뿟따의 여동생의 아들(조카)임이 거의 확실하다. I. B. Horner(tr.) The Middle Length Sayings(Majjhima-nikāya) (London: PTS, 1957), Vol. Ⅱ, p.176. No.4.; G. P. Malalasekera, The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Ⅰ, p.1081.
3) “堂於爾時尊者舍利弗受具足始經半月.”[大正藏 2, p.249下.]
4) G. P. Malalasekera, The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Ⅰ, pp.1081-2.
5) 漢譯 『長爪經』에서는 왕사성(王舍城) 가란타죽원(迦蘭陀竹園)이라고 되어 있다.[大正藏 2, p.249上.]
6) Majjhima-nikāya Ⅰ, pp.497-501; 南傳藏 10, pp.333f.; I. B. Horner(tr.), The Middle Length Sayings, Vol. Ⅱ, pp.176-180.
7) 大正藏 2, pp.249上-250上.
8) 大正藏 2, p.449上-中.
9) 李箕永, 『釋迦』세계사상대전집 5 (서울: 지문각, 1965), p.158.
10) 악기베싸나(Aggivessana, 火種)는 그가 속한 바라문 종족의 이름인 것 같다. I. B. Horner(tr.) The Middle Length Sayings(Majjhima-nikāya) (London: PTS, 1957), Vol. Ⅰ, p.280. No.6; 전재성 역주,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제2권 (서울: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2), p.89. No.56 참조.
11) “爾時長爪外道. 出家遠塵離垢. 得法眼淨. 長爪外道出家. 見法得法覺法入法. 度諸疑惑. 不由他度. 入正法律. 得無所畏.”[大正藏 2, p.250上.]
12) “卽得善來比丘出家. 彼思惟所以. 善男子剃除鬚髮. 著袈裟. 正信非家. 出家學道. 乃至心解脫. 得阿羅漢.”[大正藏 2, p.250上.]
13) “Esāham bhavantam Gotamam saranam gacchāmi dhammañ-ca bhikkhusanghañ-ca. Upāsakam-mam bhavam Gotamo dhāretu ajjatagge pānupetam saranagatan ti.”[M. I, p.501.]; “I am going to the revered Gotama for refuge and to dhamma and the Order of Monks. May the revered Gotam accept me as a layfolloer going for refuge from today forth for as long as life lasts.”[I. B. Horner(tr.), The Middle Length Sayings (Majjhima-nikāya), Vol. II, p.180.]
14) Anguttara-nikāya(PTS), Ⅰ, p.23.
15) 그러나 Apadāna(譬喩經) Ⅱ, p.583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꼬시야곳따(Kosiyagotta)로 불렸다.
16) G. P. Malalasekera, The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Ⅱ, pp.476-7.
17) G. P. Malalasekera, The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Ⅱ, pp.477.
18) G. P. Malalasekera, The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Ⅱ, pp.477.
19) 이 붓다의 여행은 자주 인용된다. MA. Ⅰ, p.347, 357.
20) 왜 그를 까싸빠(Kassapa)라고 부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어디에도 설명되어 있지 않다. 아마 그의 성(性, gotta-name)이었을 것이다. 註 10 참조.
21) G. P. Malalasekera, The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Ⅱ, p.477.
22) 이 사건으로 까싸빠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S. II, p.221.] 이것은 붓다께서 까싸빠가 자신의 사후에 결집(結集)을 주도하고, 자기 종교의 영존(永存)을 도울 것이라고 알았기 때문에 이러한 영예를 그에게 주었다고 말해진다.[SA. II, p.130.]
23) G. P. Malalasekera, The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Ⅱ, pp.477-8.
24) 스가누마 아키라(管沼晃) 지음, 편집부 옮김, 『부처님과 그 제자들』(서울: 봉은사 출판부, 1991), p.137.
25) 스가누마 아키라(管沼晃) 지음, 편집부 옮김, 『부처님과 그 제자들』, pp.137-8.
26) 역사적으로 승가를 형성한 주체는 출가자들이었으며, 재가자들이 승가를 형성한 적은 없었다. ‘사방승가(四方僧伽)’란 관념적으로 사방 또는 지역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출가집단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에 대해, 눈앞에 현실로 존재하는 출가집단은 ‘현전승가(現前僧伽)’라 부른다.
붓다의 까삘라밧투 방문
1) 계율 제정의 배경
붓다께서 처음 녹야원에서 다섯 고행자를 교화하고, 붓다가야로 되돌아가서 까싸빠(Kassapa) 삼형제를 개종시킨 후,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로 돌아와 교화를 펼치고 계실 때, 승단에는 이미 천 명이 훨씬 넘는 출가자가 모인 큰 집단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마하까싸빠(Mahā Kassapa, 大迦葉)와 같은 뛰어난 제자들도 있었지만, 질서를 지키지 않고 좋지 못한 행동을 하는 자도 더러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래 승단에는 사성(四姓)의 계급차별 없이 누구나 출가할 수 있도록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비구의 수가 점차 많아지게 되면서 자연적으로 공동체의 통제상 여러 가지 규칙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규칙을 계(戒, sīla)라고 하는데, 계의 조항은 교단 안에서 일어난 문제에 대해서 하나씩 제정하여 실행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총괄적으로 정해 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1) 처음에는 붓다께서 가르친 생활상의 대원칙인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며,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는 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러한 가르침만으로는 교단을 통제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점차 외부적인 구속적 계율로 발전해 갔던 것입니다.2)
먼저 새로 들어온 비구들은 각자 일상적으로 가르침을 받고 감독을 받을 수 있는 스승을 정하는 것이 규정되었습니다. 물론 최고의 스승이 붓다인 것은 사실이지만 옷을 입는 법, 식사하는 법으로부터 그 밖의 모든 일상적인 교훈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와 같이 가르쳐주는 스승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의식도 처음에는 삼보에 대한 귀의를 선언하는 간단한 것이었는데 점차 복잡하게 제정되어 갔습니다. 그것은 많은 귀의자(歸依者) 가운데 혹시 결심이 견고하지 않은 사람들이 섞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입니다.3)
이와 같이 불교 교단의 질서 유지를 위해 계율이 제정될 수밖에 없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사회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다국은 그 당시 문화의 중심지인 동시에 종교 활동이 특히 융성했습니다. 불교 이외에도 크고 작은 여러 교단과 종교 지도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연 종교 활동에 대한 사회적 요망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달마다 정해진 날에는 사람들이 사원에 모여 설법을 듣는다거나 무슨 행사가 있다거나 하는 것 등입니다. 또 교단에 속한 출가 수행자에 어울리는 태도나 비난받을 행위에 대해서도 사회적인 통념이 있었습니다. 불교에서 계나 율로 정해진 것도 이와 같은 요청에 따르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4)
2) 최초의 까삘라밧투 방문
붓다는 일생동안 고향인 까삘라밧투(Kapilavatthu, 迦毘羅衛城)를 몇 차례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붓다께서 성도(成道)한 뒤 고향을 찾게 된 최초의 방문이 언제였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도 후 첫 겨울을 라자가하에서 보내고 이듬해 봄에 까삘라밧투를 방문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한 뒤 6년쯤 지난 다음이라는 것입니다. 전자는 붓다께서 마가다의 수도 라자가하에서 고향으로 갔다는 것이고, 후자는 꼬살라(Kosala)의 수도 사왓티(Sāvatthī, Sk. Śravastī, 舍衛城)에서 고향을 방문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붓다의 아들 라훌라(Rāhula, 羅睺羅)의 출생과 출가 시기와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일본의 불교학자 와다나베 쇼오꼬(渡邊照宏)는 후자의 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싯다르타 태자가 성을 나와 고행하기 6년이 지난 다음에 성도하고, 그 후 다시 6년이 지나 고향 땅을 밟게 되는 것이므로 부왕과의 대면은 12년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5)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붓다의 아버지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는 아들이 성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을 방문해 달라고 수차례 사신을 파견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좌부 권에서는 대체로 전자의 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성도 직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최초로 고향 까삘라밧투를 방문했다는 것입니다. 에드워드 제 토마스(Edward J. Thomas)는 “붓다는 까싸빠 삼형제를 개종시키고 한겨울에 라자가하로 돌아왔다. 그리고 주석가들에 의하면 이곳에서 두 달 동안 머물렀다. 붓다의 다음 방문지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이것은 정전(正典)에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장로들이 읊은 게송들의 모음집[Theragāthā, 長老偈]에 씌어진 깔루다이(Kāludāyī, 迦樓陀夷)6) 장로의 게송7)에서 이 이야기를 암시하고 있는데, 이것을 제외하면 이해하기 어렵다.”8)라고 말했습니다.
숫도다나 왕은 자기 아들이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듣고, 붓다를 까삘라밧투로 초청하기 위해 많은 수행원을 거느린 신하들을 여러 차례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붓다의 설법을 듣는 순간 아라한이 되어 그들의 임무를 잃어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왕은 깔루다이를 파견했습니다. 붓다께서 그의 출가를 허락할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9) 그는 붓다께로 가서 법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비가 내리고 대지에 꽃과 잎들이 피어날 때, 깔루다이는 붓다께서 그의 혈족들을 방문하기에 좋은 때라고 느끼고, 자신에게 부과되었던 초청의 뜻을 아름다운 시의 형식으로 노래했습니다. 라자가하에서 까삘라밧투까지는 거리적으로 60리그(1리그는 3마일)였는데, 붓다는 60일이나 걸려 까삘라밧투에 도착했습니다. 깔루다이는 매일 공중으로 숫도다나의 왕궁으로 가서 여행의 진행과정을 왕에게 말하고, 발우 가득히 특별한 음식을 왕궁에서 붓다께로 날랐다고 합니다. 붓다께서 그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친척들은 붓다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깔루다이가 이러한 재주로 그것을 성취했으며, 붓다께서는 종족을 기쁘게 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분이라고 전했기 때문입니다.10)
이처럼 붓다의 최초 고향 방문과 관련된 이야기 속에는 약간 과장된 듯한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테라가타(Theragāthā, 長老偈)』의 주석서에 의하면, 깔루다이는 숫도다나 왕의 궁전 신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붓다의 생일날에 태어났으며, 붓다의 놀이 친구로 함께 자랐다고 합니다. 숫도다나 왕이 붓다께서 라자가하에서 법을 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를 초청하기 위해 천명과 함께 한 궁중 신하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붓다께서 법을 설하고 있는 동안 도착하여, 군중의 가장자리에 서서 교리를 듣고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붓다는 곧바로 그들이 교단에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순식간에 장로들의 모습으로 바뀌어서 발우와 가사를 걸치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아라한들은 세속의 일에는 무관심해졌기 때문에 그들은 아버지의 메시지를 붓다께 전해 주지 않았습니다. 숫도다나는 다른 신하와 천명을 보냈지만 결과는 동일하였습니다. 그는 아홉 차례나 반복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난 뒤 그는 깔루다이를 붓다께 보냈습니다. 만일 붓다께서 그의 출가를 하락하신다면, 고향 방문의 약속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승단에 들어가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 라자가하에 두 달 동안 머물고 팍구나(Phagguna, 2월-5월) 달의 보름인 봄이 될 때까지 숫도다나 왕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 미루었습니다. 갈루다이는 여행을 하기에 적합한 때가 되었음을 알고, 『테라가타』에 나오는 다음의 게송을 읊었습니다.11)
거룩한 분이시여, 이제 진홍빛으로 물든 나무들은 잎을 떨구고 열매를 맺으면서 화염을 일으키며 불타오르듯 찬란합니다. 거룩하고 당당하신 분이여, 지금은 가르침을 음미하며 즐겨야 할 때입니다.<527게>
아름다운 나무들은 꽃을 피워 사방에 널리 향기를 날리면서 잎을 떨구고 열매를 맺습니다. 당당하신 분이여, 이제 길을 나서 행각해도 좋을 때입니다.<528게>
춥지도 않고 또한 덮지도 않습니다. 즐거운 계절, 여행에 알맞습니다. 당신이 서쪽을 향해 로히니 강을 건너시는 모습을 사캬족 콜리야족이 뵐 수 있도록 하소서.<529게>
꿈을 안고 밭을 갈았고, 꿈을 안고 씨를 뿌렸습니다. 상인들은 꿈을 안고 바다로 나가 재물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내게도 꿈이 있거늘, 부디 저의 꿈을 이루어 주소서.<530게>
사람들은 되풀이하여 씨를 뿌리고, 신들은 때맞추어 비를 내린다. 농사꾼은 되풀이하여 밭을 갈고, 수확물을 어김없이 나라에 바친다.<531게>
걸인들은 변함없이 방랑을 하고, 시주(施主)들은 되풀이하여 보시를 한다. 그들은 되풀이하여 보시를 해서 거듭 천계(天界)에 태어난다.<532게>
지혜롭고 당당한 사람이 어떤 가문(家門)에 태어나면, 실로 7대(代) 조상까지 업이 소멸된다. 석가모니(釋迦牟尼)시여, 실로 당신은 신(神) 가운데의 신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석가라고 불리는 성자가 당신의 탄생으로 오셨기에.<533게>
위대한 선인(仙人)의 부친은 숫도다나라는 분이었습니다. 또한 붓다의 모친인 마야 부인은 보살(菩薩; 깨닫기 전의 석가모니)을 잉태하신 분으로서, 돌아가신 뒤에 삼십삼천계(三十三天界)를 두루 노니셨습니다.<534게>
고타미 부인은 죽어 세상을 떠난 뒤 天界에 태어나, 신들에 둘러싸여 오욕락(五欲樂)을 즐기고 계십니다.<535게>
나는 견디기 어려운 일을 견디어낸 비할 바 없이 훌륭하신 붓다, 그리고 앙기라사의 자손입니다. 석가모니시여, 당신은 내 아버지의 아버지이십니다. 고타마여, 당신은 진리에 관한한 나의 할아버지이십니다.<536게>12)
붓다께서 제자들과 함께 까삘라밧투에 도착했을 때, 석가족들은 그들이 니그로다(Nigrodha) 동산에 머물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석가족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붓다께 경의를 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공중에 떠올라 쌍신변(雙神變, yamaka-pātihāriya)의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석가족 친척들은 붓다의 발에 존경의 예를 표했다고 합니다.13)
다음날 붓다는 제자들과 함께 도시의 이집 저집을 돌면서 탁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싯닷타(Siddhattha) 태자가 걸식을 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붓다의 탁발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붓다의 아내 역시 그를 보고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은 흥분하여 붓다께로 달려가 “왜 우리의 가문을 부끄럽게 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이것은 우리의 관습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우리의 가계(家系)는 마하삼마따(Mahāsammata)의 끄사뜨리야(kshatriya) 가계이며, 끄사뜨리야는 단 한번도 걸식을 행한 적이 없소.”라고 왕은 말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왕이시여! 그 왕계(王系)는 당신의 가계(家系)이지만, 나의 가계는 디빵까라(Dīpamkara, 燃燈佛), 곤단냐(Kondañña, 憍陳如佛)에서 까싸빠(Kassapa, 迦葉佛)에게로 전해져 온 붓다의 가계입니다. 그 분들과 수천의 붓다들은 걸식에 의해 삶을 유지했던 것이오.”14)
숫도다나 왕과 붓다와의 이 대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숫도다나는 자기의 아들이 끄사뜨리야의 왕계를 계승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붓다는 결코 왕계를 승계한 것이 아니라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붓다는 거리의 중간에 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나 일어나 게으르지 말고,
법을 잘 실천하시오.
법을 실천하는 사람은 축복 속에 안락하리.
이 세상에서나 내세에서나.
왕은 곧바로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인 ‘흐름에 들어감’[預流果]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붓다의 발우를 들고 붓다와 그의 제자들을 왕궁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공양을 했습니다. 공양을 마치고 라훌라의 어머니를 제외한 왕궁의 여인들은 붓다께 다가와서 존경의 예를 표했습니다. 이때 붓다는 앞서 설한 시구와 비슷한 내용의 시를 읊었습니다.15)
그러자 마하빠자빠띠(Mahāpajāpatī)는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에 도달했고, 숫도다나는 두 번째 단계인 ‘한번 되돌아 옴’[一來果]을 얻었습니다. 『마하바스투(大事)』에서는 그 뒤 라훌라의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다음 날은 붓다의 이복동생이자 마하빠자빠띠의 아들인 난다(Nanda)의 왕실 성별식(聖別式)이 거행되었습니다. 이것은 붓다의 경우처럼 16세가 되면 별도의 궁전에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또한 난다가 결혼할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날 붓다는 자신의 발우를 난다에게 주고 축복의 게송(mangala)을 읊으시고, 발우를 돌려받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난다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발우를 들고 붓다의 처소까지 따라왔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만일 그가 출가한다면 스승에 대한 존경의 예를 그만두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난다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붓다는 난다를 출가시켰습니다.16)
Notes:
1)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 샘터, 1990), p.201.
2) 이기영, 『석가』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 지문각, 1965), p.160.
3) 이기영, 『석가』, p.161.
4)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pp.201-2.
5)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p.227.
6) Edward J. Thomas는 이 사람의 이름을 깔루다인(Kāludāyin)이라고 표기했지만, G. P. Malalasekera의 『Dictionary of Pāli Proper Names』를 비롯한 다른 서적들에서는 깔루다이(Kāludāyī)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서는 후자의 표기법을 따른다. 깔루다이(Kāludāyī)는 시민들이 기쁨으로 충만해 있던 날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다이(Udāyī)로 불렸으며, 그의 피부색이 약간 검었기 때문에 깔라(Kāla)라고도 불렸다.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āli Proper Names,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l, 1983), Vol I, p.589,
7) Theragāthā v. 527-536.
8)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l, 1992), p.97.
9) 『마하바스뚜(Mahāvastu, 大事)』ed. Senart, Vol. III, p.233에 의하면, 그는 예전에 붓다의 마부였던 찬냐(Channa)와 함께 출가했다고 한다.
10) A. I. 25; Theragāthā 527-36; Jātaka I. 54, 86f; AA. I. 107, 117; ThagA. I. 497ff; UdA. 168; DA. II. 425;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āli Proper Names, Vol I, p.589.
11)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p.97-98.
12) 하야시마 쿄쇼 외 편, 박용길 옮김, 『비구의 고백 비구니의 고백』(서울 : 민족사, 1991), pp.114-115.
13)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p.98-98.
14)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p.99-100.
15) 누구나 법을 잘 실천해야 한다./ 누구나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 법을 실천하는 사람은 축복 속에 안락하리./ 이 세상에서나 내세에서나.
16)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100.
라훌라의 출가 인연
1) 라훌라 어머니와의 재회
붓다께서 깨달음을 이루고 난 뒤, 처음으로 까삘라밧투((Kapilavatthu, 迦毘羅衛城)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까삘라밧투 방문의 둘째 날, 붓다는 거리에서 탁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습니다. 라훌라의 어머니(Rāhulamāta)는 이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녀는 탁발하고 있는 붓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붓다의 훌륭한 인품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때 그녀는 붓다를 찬탄하는 여덟 수의 게송을 읊었습니다. 이 게송들은 나라시하가타(Narasīhagātha, 人獅子偈)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1)
붉은 성스러운 두 발은 탁월한 법륜으로 장식되고, 긴 팔꿈치는 성스러운 징표들로 치장되셨고, 발등은 불자(拂子)와 양산으로 분장되셨으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우아하고 고귀한 석가족의 왕자님, 몸은 성스러운 징표로 가득 차시고, 세상의 이익을 위하는 사람 가운데 영웅이시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얼굴빛은 보름달처럼 빛나고 하늘사람과 인간에게 사랑받으며, 우아한 걸음걸이는 코끼리의 제왕과 같으시니 인간 가운데 코끼리,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왕족으로 태어난 귀족으로서 하늘사람과 인간의 존귀함을 받는 님, 마음은 계율과 삼매로 잘 이루어진 님,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잘 생긴 목은 둥글고 부드러우며, 턱은 사자와 같고, 몸은 짐승의 왕과 같고, 훌륭한 피부는 승묘한 황금색이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훌륭한 목소리는 부드럽고 깊고, 혀는 주홍처럼 선홍색이고, 치아는 스무 개씩 가지런히 하야시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칠흑 같은 심청색이고, 이마는 황금색 평판처럼 청정하고 육계는 새벽의 효성처럼 밝게 빛나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많은 별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달이 창공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수행자들의 제왕은 성스러운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2)
그날 붓다께서는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 왕의 초대에 응하여 왕궁에서 공양을 하셨습니다. 붓다께서 공양을 마치자 라훌라의 어머니를 제외한 왕궁의 모든 여인들이 붓다께 경의(敬意)를 표하기 위해 그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라훌라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녀에게 도덕적으로 어떠한 결함도 없다면 붓다께서 그녀에게로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붓다는 그녀가 원했던 것처럼 붓다께 인사하도록 허락한다고 말하고, 두 수제자와 함께 그녀에게로 갔습니다. 그녀는 붓다의 발에 엎드려 손으로 발을 붙잡고 자신의 머리를 그곳에 대었습니다. 숫도다나 왕은 붓다께서 출가한 이후 라훌라의 어머니는 스스로 모든 사치를 포기하고, 붓다께서 가사를 걸치고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는 것을 듣고,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지냈다고 붓다께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짠다낀나라 자따까(Candakinara Jātaka)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과거의 그녀 역시 충절이 대단했었다는 내용입니다.3)
그녀의 이름은 여러 가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팔리고유명사사전』에 의하면, 그녀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남전의 경전들에서는 라훌라의 어머니(Rāhulamāta)4) 또는 고따마(Gotama)의 부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녀는 밧다깟짜(Bhaddakaccā)5)로 불렸으며, 후대의 문헌들에서는 야소다라(Yasodharā),6) 빔바데비(Bimbādevī)7)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아마 빔바순다리(Bimbāsundarī)8)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북전의 경전들에서는 ‘야소다라’라는 이름을 선호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단다빤니(Dandapāni)의 딸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고따마의 부인 이름은 빔바(Bimbā)이고, 밧다깟짜(Bhaddakaccā), 수밧다까(Subhaddakā), 요사다라(Yosadhāra)와 그 밖의 이름들은 나중에 추가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녀에게 적용했던 일종의 별명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고따마 왕실에서는 야소다라(Yasodharā)와 단다빠니((Dandapāni)의 딸이라고 불렸는데, 이것은 나중에 혼동되었을 것입니다. 주석서9)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의 몸이 빛나는 황금색이었기 때문에 밧다깟짜나(Bhaddakaccānā)로 불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10) 한편 그녀의 이름이 깟짜나(Kaccāna) 종족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깟짜나(Kaccāna)는 바라문 종족이었고, 석가족(Sākyans)은 바라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11)
나중에 붓다께서 여인의 출가를 허락했을 때, 라훌라의 어머니는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i Gotamī) 밑에서 비구니가 되었습니다.12)
2) 라훌라의 출가 인연
라훌라(Rāhula, 羅睺羅)의 출가 사정에 대해서는 팔리 『율장(律藏)』「대품(大品)」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붓다께서 까삘라밧투를 방문한지 칠일 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왕궁에서 공양을 마치고 붓다께서 떠나려고 할 때였습니다. 그때 라훌라의 어머니(Rāhulamāta)는 어린 라훌라에게 말했습니다. “라훌라야, 저 분이 너의 아버지이시다. 가서 너의 유산을 달라고 해라.” 라훌라는 세존께 다가가서 그 앞에 섰습니다. “사문이시여, 당신의 곁에 있으니 즐겁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렸습니다. 라훌라는 세존의 뒤를 따라 가면서 “사문이시여, 저의 유산을 주십시오. 사문이시여, 저의 유산을 주십시오.”
그러자 세존께서는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 존자에게 말했습니다. “사리뿟다여, 그대가 라훌라를 출가(pabbajjā)시켜라.”
“세존이시여, 라훌라는 어떻게 출가시켜야 합니까?” 그러자 세존께서는 법을 설해 주고자 할 때와 그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붓다는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사마네라(Sāmanera, 沙彌)의 출가는 삼귀의에 의해 허락한다. 하지만 출가는 이러한 방법으로 해야 한다. 먼저 머리와 수염을 깎고, 황색 가사를 몸에 걸치게 한다. 그리고 한쪽 어깨에 상의를 걸치고, 비구들의 발에 예배하게 한다. 무릎을 꿇게 하고, 두 손을 올려 합장 한 채, 삼귀의를 낭송하게 한다. 곧 ‘저는 붓다(Buddha, 佛)께 귀의합니다. 저는 담마(Dhamma, 法)에 귀의합니다. 저는 상가(Sangha, 僧)에 귀의합니다. 두 번째 저는 붓다께 귀의합니다. 두 번째 저는 담마에 귀의합니다. 두 번째 저는 상가에 귀의합니다. 세 번째 저는 붓다께 귀의합니다. 세 번째 저는 담마에 귀의합니다. 세 번째 저는 상가에 귀의합니다.’라고 말하게 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사미의 출가는 이와 같이 삼귀의를 함으로써 이루어지느니라.”
그리하여 사리뿟따 장로는 라훌라를 출가시켰습니다. 그러자 숫도다나 왕이 세존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세존께 공손히 절하고 한쪽에 앉은 뒤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고따마시여,13) 여래는 은혜를 초월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의 부탁은 적절하며 비난받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
“고따마시여, 그렇다면 말해 보시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출가하실 때 저는 무척이나 괴로웠습니다. 난다(Nanda)14)가 출가할 때도 그러했는데, 이제 라훌라까지 출가하니 저는 너무나 괴롭습니다.15) 세존이시여, 자식에 대한 애정이 저의 피부를 도려냅니다. 피부를 도려낸 뒤 살갗을 도려내고, 살점을 도려내고, 힘줄을 끊고, 뼈를 자르고, 골수를 뽑아내는 듯합니다. 세존이시여, 원하건대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은 아들은 출가시키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세존께서는 숫도다나 왕에게 법문을 베푸셨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 지니게 하고 격려하고 기쁘게 하셨다. 세존의 법을 받아 지니고 기뻐한 숫도다나 왕은 세존께 공손히 절한 뒤 오른쪽으로 도는 예를 올리고 떠났다.
이러한 인연으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모이게 한 뒤 법문을 베푸신 뒤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은 아들을 출가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자는 악작을 범하는 것이다.”16)
여기서 우리는 숫도다나 왕의 마음을 한번쯤 헤아려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붓다가 돌아온 후 아들 난다를 빼앗기고, 손자 라훌라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에 비통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특히 그 손자를 잃은 슬픔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왕계(王系)가 단절되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은 직접 붓다를 찾아가서 앞으로는 부모의 허락 없이는 자식을 출가시키지 못하도록 금해 주시기를 간정했던 것입니다. 붓다는 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렇게 하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라훌라는 혹독한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때에는 잠잘 곳이 없어서 붓다가 쓰는 뒷간에서 하룻밤을 보낸 일도 있었습니다. 붓다께서 라훌라에게 한 교훈의 말씀들을 보면 라훌라는 장난삼아 거짓말을 잘하는 버릇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버릇을 없애기 위해 붓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사문의 법임을 강조하였다고 합니다.17)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 中部)에는 ‘라훌라에게 주는 말씀’이란 제목의 경전이 세 개나 실려 있습니다.18) 어린 라훌라에게 법을 가르치고 있는 이 경전들은 대부분 계율과 선정을 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마하라훌로와다-숫따(Mahā-Rāhulovāda Sutta)』의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라훌라야! 자애[愛, mettā]19)를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자애로운 마음을 닦으면 나쁜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더불어 아파함[悲, karunā]를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더불어 아파하는 마음을 닦으면 잔인한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더불어 기뻐함[喜, muditā]를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을 닦으면 혐오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평온함[捨, upekkhā]을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평온한 마음을 닦으면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육신의) 더러움[不淨, asubha]을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더러움을 관하는 공부를 닦으면 애욕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무상의 개념(無常想, anicca-saññā)20)을 관하는 공부를 닦아라. 무상의 개념을 관하는 공부를 닦으면 아만(我慢, asmi-māna; ‘내가 있다’ ‘나다’라는 생각)이 사라지게 된다. 라훌라야! 출입식(出入息)을 염하는 공부(ānapāna sati)를 닦아라. 라훌라야! 출입식을 염하는 공부를 닦아 자주 익히면 얻는 바가 많아서 크게 이익되리라.”21)
라훌라를 불전(佛典)에서 ‘학족제일(學足第一)’의 제자라고 칭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열심히 정진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22) 디가 니까야(Dīgha Nikāya)의 주석서23)에 의하면, 라훌라는 12년 동안 침대에 눕지 않았다고 합니다. 라훌라가 읊은 네 개의 게송은 『테라가타(Theragāthā, 長老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24)
사람들은 나를 ‘행복한 라훌라’라고 부른다. 나는 두 가지 행운을 누리고 있다. 하나는 내가 붓다의 제자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일체의 도리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295게>
나의 오염은 소멸되어, 이제 헛된 삶을 받는 일은 없다. 나는 존경받아야 할 사람, 공양받아야 할 사람, 세 가지 명지(明知)를 체득한 사람, 불사(不死)를 얻은 사람이다.<296게>
그들은 갖가지 욕망에 눈이 멀어, 삿된 올가미에 걸리고 망집(妄執)에 들씌워져 게으름뱅이 친족들에게 얽매어 있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같이.<297게>
나는 애욕을 떠나 악마의 속박을 끊고 애착을 뿌리 뽑아, 서늘해지고 평안해졌다.<298게>
후대의 문헌에서는 라훌라를 붓다의 십대제자 가운데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밀행제일이란 계율을 정해진 그대로 세세한 것까지 지켜, 실천하는 데에 제일이라는 뜻입니다.
Notes:
1)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āli Proper Names,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 Oriental Books Reprint Corporation, 1983), Vol. Ⅱ, p.742.
2) K. Sri Dhammananda, Daily Buddhist Devotions (Kuala Lumpur : The Buddhist Missionary Society, 1991), p.216; 전재성, “왜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야 하는가” 『불교평론』제4호(200년 가을), pp.303-304에서 재인용.
3)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āli Proper Names, Vol. Ⅱ, p.742.
4) Vinaya Pitaka (PTS), Vol. I, p.82.
5) Buddhavamsa (PTS). XXVI. 15; Mahāvamsa, ed. Geiger(PTS). II. 24에서는 그녀를 밧다깟짜나(Bhaddakaccānā)라고 불렀다. 또한 그녀를 수밧다까(Subhaddaka)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것은 아마 밧다까짜나(Bhaddakaccānā)의 와전일 것이다.
6) Buddhavamsa Commentary (SHB), p.245; Divyāvadāna, ed. Cowell and Neill (Cambridge), p.253.
7) Jatāka, II, p.392 f.; Sumangala Vilāsinī (PTS), II, p.422.
8) Jatāka, VI, p.478.
9) AA. II. 204.
10)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āli Proper Names, Vol. Ⅱ, pp.741-742.
11)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London : Routleledge and Kegan Paul, 1949), p.49.
12) AA. I. 198;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āli Proper Names, Vol. Ⅱ, p.743.
13) 여기서 말하는 고따마(Gotama)는 종족을 일컫는 말이다. 즉 숫도다나 왕을 붓다께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14) 난다(Nanda)는 마하빠자빠띠(Mahāpajāpati)의 아들이기 때문에 붓다의 배 다른 동생이다.
15) 율장의 주석서(VA. 1010)에 의하면, 숫도다나(Suddhadana) 왕은 혈족인 3명 모두 출가했기 때문에 가계(家系), 즉 왕계(王系)가 끊어졌기 때문에 어디서 왕을 데려와야 되느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I. B. Horner(tr.), The Books of the Disciplines(Vinaya Pitaka), Vol. IV, p.104. No. 5 참조.
16) Vinaya Pitaka(PTS), Vol. Ⅰ, pp. 82-83.
17) 李箕永, 『釋迦』세계사상대전집 5 (서울 : 지문각, 1965), p.166.
18) No. 61 Ambalatthika-Rāhulovāda Sutta(敎誡羅睺羅菴婆藥林經); No. 62 Mahā-Rāhulovāda Sutta(敎誡羅睺羅大經); No. 147 Cūla-Rāhulovāda Sutta(敎誡羅睺羅小經).
19) 자애[慈]의 원어 Mettā는 친구 사이의 우정(friendship)을 의미하며, 친구의 우정과 같은, 동등한 입장의 평등한 사랑을 말한다.
20) 무상상(無常想, anicca-saññā)은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상념하는 것을 말한다.
21) Piyadassi Thera, The Buddha : His Life and Teaching, The Wheel Publication No. 5A/B pp.35-36; 피야다시 스님 지움, 정원 스님 옮김, 『부처님, 그분: 생애와 가르침』(서울 : 고요한 소리, 1988), pp.67-68.
22) 李箕永, 『釋迦』, p.166.
23) DA. III. 736.
24) Theragāthā, vv. 259-98.
석가족 사람들의 출가
붓다는 성도 후 몇 차례 고향인 까삘라밧투(Kapilavatthu, 迦毘羅衛城)를 방문하였습니다. 붓다는 첫 고향 방문 때,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던 배다른 동생 난다(Nanda, 難陀)를 제일 먼저 출가시켰습니다. 이어서 아들 라훌라(Rāhula, 羅睺羅)도 출가시켰습니다. 그 이후 붓다의 교화를 받고 많은 샤카(Sakya, 釋迦)족의 청년들이 출가하였습니다. 당시 출가한 샤카족 청년은 사촌 동생인 아난다(Ānanda, 阿難)와 데와닷따(Devadatta, 提婆達多)를 비롯하여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 밧디야(Bhaddiya, 跋提伽, 婆提), 바구(Bhagu, 跋俱), 낌빌라(Kimbila, 金毘羅) 등이었습니다.
샤카족 청년들의 출가 인연과 전후 사정에 대해서는 팔리 『율장』「소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들 샤카족 청년 여섯 명이 출가할 때 이발사였던 우빨리(Upāli, 優波離)도 함께 출가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아난다와 데와닷따가 먼저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1) 팔리 율장에 묘사된 샤카족 청년들의 출가 인연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한때 붓다께서 말라(Malla)의 작은 도시 아누삐야(Anupiyā, 阿奴比耶)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그때 많은 샤카족의 특별한 청년들이 출가한 붓다를 모방하여 출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샤카족에는 마하나마(Mahānāma, 摩訶那摩, 摩訶男)와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라는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샤카족의 아누룻다는 고상하게 양육되었습니다. 그는 세 개의 궁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2) 그런데 마하나마는 그 동생을 보고 “우리 종족에서 부처님이 나셔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쫓아 출가를 하였으니, 우리들도 출가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 말에 아누룻다는 느낀 바가 있어 출가할 결심을 세우고 그 뜻을 어머니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좀처럼 승낙을 하지 않고 “만약 밧디야(Bhaddiya)가 출가한다면 너도 출가해도 좋다.”고 대답을 회피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니룻다의 어머니는 밧디야 왕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할 까닭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 아누룻다는 밧디야에게로 가서 그로 하여금 출가할 마음을 하게끔 하고 더 나아가 아난다, 바구, 낌빌라, 데와닷따의 출가를 권유하고, 또 이발사 우빨리를 데리고 부처님 뒤를 쫓아갔습니다. 국경을 넘어서자 그들은 몸에 매달았던 금환보식(金環寶飾)을 다 떼버리고, 이것을 우빨리에게 주어 귀국케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발사 우빨리는 “만약 내가 이런 금은보식(金銀寶飾)을 가지고 혼자 나라에 돌아가면 나는 공자님들을 죽인 사람처럼 오해를 받아 혹은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공자님들도 출가를 하신다니 저도 출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귀국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빨리는 샤카족 청년들의 뒤를 따라 붓다를 친견하고 자신의 출가를 허용해 달라고 간청했다. 율장에 의하면, 이들이 출가하여 승단에 들어갈 때 붓다께 다음과 같이 요청하였다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우리 샤카족 사람들은 자만심을 갖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기 이발사 우빨리(Upāli, 優波離)는 오랫동안 우리들의 하인이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를 먼저 출가시켜 주십시오. 우리들은 그를 공경하고 일어서서 맞으며, 합장하고 예경할 것입니다. 이같이 하여 우리 샤카족 사람들은 샤카족으로서의 자만심을 제거할 것입니다.4)
샤카족 출신의 비구들은 샤카족으로서의 자만심 때문에 평등을 본지(本旨)로 삼는 불교교단의 질서가 어지럽혀지지 않게 할 것을 결의하고 이같이 원하자 붓다는 이를 받아들여 우빨리를 먼저 출가시켰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일곱 사람의 새 출가제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율장에 의하면, 출가 후 이들 가운데 밧디야는 세 가지 지혜[三明]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고, 아누룻다는 이러한 지혜의 두 번째인 천안통(天眼通)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아난다는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인 예류과(預流果)를 얻었고, 데와닷따는 아직 개종하지 않은 사람들을 개종시킬 수 있는 신통력을 얻었습니다.5) 나중에 바구와 낌빌라는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다른 문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6) 이때 출가한 샤카족 청년들의 출가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 대략적으로나마 살펴보겠습니다.
1) 밧디야(Bhaddiya, 跋提伽, 婆提)
밧디야는 깔리고다뿟따(Kāligodhāputta)로도 불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샤카족의 귀부인이었던 깔리고다(Kāligodhā)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7) 그는 귀족 출신의 승려 가운데 으뜸이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가 숫도다나 왕의 뒤를 계승한 왕이었다면, 초기불교 교단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출가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그를 ‘귀성제일(貴性第一)’이라고 했습니다.8)
밧디야는 출가한 그 해에 아라한과를 성취했다고 합니다.9) 그는 계속해서 숲속의 나무 밑이나 길가 혹은 빈 집에서 정진하였습니다. 그는 ‘아! 기쁘다, 아! 기쁘다’를 외치곤 하였습니다. 비구들은 그가 출가의 청정한 수행을 좋아하지 않고 왕이던 때의 쾌락을 회상하면서 즐기고 있는 것 같다고 붓다께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그를 불러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는 “왕으로 있을 때는 아무리 경비가 튼튼해도 불안했고 근심스러웠는데, 지금은 그 어떤 것도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출가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아! 기쁘다, 아! 기쁘다’라고 탄성을 올리는 것입니다.”10)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붓다는 그를 칭찬하고 시를 읊어주었습니다. 그 뒤 그는 귀족 출신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제자라고 붓다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2)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
아누룻다는 붓다의 사촌동생으로서 출가 후 붓다를 도와 교단의 통솔에 진력했습니다. 비구들이 분쟁을 일으키는 일이 많았던 꼬삼비(Kosambi, 憍賞彌城)의 동쪽, 대나무 숲에서 두 동료와 사이좋게 지내는 화합의 모범을 보여, 마침 이곳을 방문한 붓다를 기쁘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는 붓다를 뒤따르는 일이 많았으며, 특히 꾸시나라(Kusinārā, 拘尸那羅)에서 붓다의 입멸을 머리맡에서 지켜보았던 분입니다. 그는 붓다께서 입멸했을 때 “스승은 언젠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헤어질 때가 있다고 설법하셨다. 슬퍼하지 말라. 통곡하지 말라.”고 하여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한편, 아난다에게 명하여 붓다의 입멸을 꾸시나라의 말라족 사람들에게 알리게 하였습니다. 아누룻다는 또 석존의 입멸 후, 교법이 분산되어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개최된 불전결집(佛典結集) 때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서 수행했다고 합니다. 그는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3) 낌빌라(Kimbila, 金比羅)
낌빌라도 샤카족 명문(名門)의 출신인 것은 틀림없으나 붓다와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출가 후 특히 아누룻다와 난디야(Nandiya, 難提)와 의좋게 지내며 수행한 분입니다. 꼬삼비에서 비구들 사이에 쟁론(爭論)이 벌어졌을 때에도 이 세 사람만은 숲속에 있어 수행에 전념(專念)하여 붓다로부터 칭찬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4) 바구(Bhagu, 跋俱)
바구는 샤카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친척인 아누룻다, 낌빌라와 함께 출가하여 발라까로나(Bālakalona) 마을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는 어느 날 졸음을 내쫓기 위해 작은 방을 나와서 계단으로 올라가려고 하다가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더욱 정진한 결과 자기를 극복하고 아라한과를 성취하였습니다. 그 뒤 그가 깨달음의 희열로 생활하고 있을 때, 붓다는 그를 축하하기 위해 그가 머물고 있던 벽지로 찾아갔습니다.11) 그 기회에 붓다는 하루 낮 하룻밤 동안 바구에게 설법했다고 합니다.12)
5) 아난다(Ānanda, 阿難)
아난다는 붓다의 제자로서 너무나 유명한 분입니다. 아난다의 부친과 붓다의 부친이 형제 관계에 있었으므로 붓다와 아난다는 사촌형제의 관계가 되는 셈입니다. 데와닷따도 같은 관계입니다. 아난다는 마음씨가 곱고, 퍽 사람들에게 친절한 인물이었습니다. 나중에 부처님의 시자(侍者)가 되어 25년 동안 한결같이 붓다를 모셨습니다. 또 매우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었으며, 붓다 곁에서 들은 말씀들을 모조리 암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붓다 입멸 후 최초의 불전결집 때에는 마하깟사빠(Mahākassapa, 摩訶迦葉)와 더불어 교단의 중심인물로서 활약하였습니다. 그는 ‘다문제일(多聞第一)’, ‘정념제일(正念第一)’, ‘행지제일(行持第一)’, ‘근시제일(近侍第一)’이라고 불렸습니다.
석존은 성도 후 20년간 특정한 시종을 거느리지 않고, 여러 제자들이 때와 형편에 따라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처음 20년간은 비구 나가사말라(Nāgasamāla), 나기따(Nāgita), 우빠바나(Upavāna), 수낙캇따(Sunakkhatta), 사가따(Sāgata), 라다(Rādha), 메기야(Meghiya), 쭌다(Cunda) 사미(沙彌) 등 여덟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성도 후 20년이 지난 다음에는 일정한 시자를 정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등 80여 명의 대아라한들이 모두 스승을 시봉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붓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붓다께서는 이들 아라한들이 자신을 시봉하기 보다는 인류를 위해 보다 큰 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장로들은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던 아난다 장로에게 시자로 받아주실 것을 청해 보라고 권유했습니다. 아난다 장로의 대답이 흥미롭습니다. “스승께서 나를 시자로 삼기를 원하신다면 직접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자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다른 사람들의 권유를 기다리지 말라. 너 혼자서 나를 시봉하도록 하여라.”13)
그 후 25년간 아난다는 그림자처럼 붓다를 따라다니면서 신변의 모든 일을 뒷바라지해 드리고, 붓다께서 병석에 누우면 계를 범하면서까지 특별한 식사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또한 가르침을 구하여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한 모든 편의를 제공해 주고, 고민을 가진 동료의 상담역을 맡기도 했으며, 때로는 붓다를 대신하여 설법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난다는 사리뿟따, 목갈라나, 마하까싸빠, 아누룻다 등과 친교가 깊었으며, 특히 사리뿟따와는 각별한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경전에는 그가 사리뿟따를 칭찬하는 말이 나와 있습니다. 사리뿟따의 입적 소식을 듣고 아난다가 낙심하는 모습은 “고양이의 습격을 간신히 피해서 허탈감에 빠진 수탉과 같이” 매우 딱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아난다는 아누룻다와 함께 석존의 최후를 지켜보고, 이어서 그때까지 개별적으로 전해지던 붓다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경전으로 편집하기 위하여 마하까싸빠와 함께 제1결집을 열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아난다는 붓다의 최측근으로서 가장 많은 설법을 들었기 때문에 ‘경(經)’을 편집하는 일을 주관했습니다.
아난다는 매우 오래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테라가타』에는 비구들이 “다문(多聞)한 사람, 법을 소유한 사람, 어둠 속에서 어둠을 헤치는 사람인 아난다 장로는 보배의 근원이로다.”라고 그의 죽음을 애도한 게송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6) 데와닷따(Devadatta, 提婆達多)
데와닷따는 한역경전에서는 대체로 아난다의 형제라고 하고 있으나 팔리 경전에서는 야쇼다라비의 오빠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물로서는 상당히 위대한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데와닷따는 엄격한 계율주의자였으나 붓다는 일방적인 계율주의를 지향하지 않았습니다.
데와닷따는 후에 붓다의 목숨을 빼앗고 스스로 교단을 인솔하려 획책했다는 이유로, 교단의 화합을 파괴하는 반역자의 표본처럼 취급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와 데와닷따 사이에 있었던 대립의 이면에는, 교단 본연의 자세와 비구의 생활 방법에 관한 의견 차이가 숨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후세에 이르기까지 그의 추종자는 남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7) 우빨리(Upāli, 優波離)
우빨리는 샤카족 명문 인사들에게 봉사해 온 이발사였습니다. 불제자가 된 후 그는 늘 새로운 출가자들의 머리를 깎아주는 일에 종사하였으므로 그 때마다 부처님이 설하는 계율을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일결집 때에는 계율의 송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불교 교단의 규율 및 규칙에 정통했으며, 또 계를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엄격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율제일(持律第一)’ 혹은 ‘지계제일(持戒第一)’로 불렸습니다.
Notes:
1) Dhammapada Commentary Ⅰ. 133; Ⅳ. 124; Anguttara Nikāya Commentary Ⅰ. 183, 292; Jātaka Ⅰ. 87;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l, 1992), p. 102 No. 2.
2) Vinaya Pitaka Mahāvagga Ⅰ, p. 7에는 야사(Yasa)에 대해서도 똑같은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에드워드 J. 토마스는 이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Edward J. Thomas, op. cit., p. 103 참조.
3) 밧디야(Bhaddiya)는 샤카족의 왕(Sakya-rāja)으로 불렸다. 이에 대해서 Edward J. Thomas는 그를 다른 샤카족 귀족과 같이 라자(rāja, 왕)로 불렸던 것 같다고 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왕은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Edward J. Thomas, op. cit., p. 104 참조.] 그러나 와다나베 쇼오고(渡邊照宏)는 그 무렵 까삘라의 성주(城主) 숫도다나는 이미 은퇴하고 붓다의 사촌 되는 밧디야가 왕위를 계승하고 있었다고 한다.[와다나베 쇼오고 지음,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 샘터, 1990), p. 232.]
4) Vinaya Pitaka(PTS), Ⅱ, p. 183.
5) Ibid., Ⅱ, p. 183.
6) AA. Ⅰ. 191; I. B. Horner tr., The Book of the Discipline(Vinaya Pitaka) (London: PTS, 1975), Vol. Ⅴ, p. 257 No. 3.
7) I. B. Horner, Ibid., p. 255.
8) Anguttara Nikāya(PTS), Vol. Ⅰ, p. 23.
9) AA. Ⅰ, p. 191; I. B. Horner tr., The Book of the Discipline, p. 257 No. 1.
10) Thag. vss. 842-865; UdA. Ⅱ. 10; Vin. Ⅰ. 183 f.; J. Ⅰ. 140.
11) Thag., vss. 271-4; ThagA. Ⅰ. 380 f.,; cf. M.Ⅲ. 155; vin. Ⅰ. 350, Ⅱ. 182; DhA. Ⅰ. 56, 133; J. Ⅰ. 140, Ⅲ. 489; Mil. 107;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roper Names, Vol. Ⅱ, p. 344.
12) SA. Ⅱ. 222; 이 법문은 Kilesiya Sutta와 관련이 있다.
13) Piyadassi Thera, The Buddha: His Life and Teaching, The Wheel Publication No.5A/B (Kandy, Sri Lanka :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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