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玄奘, 602년 4월 6일 ~ 664년) 

한국의 학승들은 중국에 유학하여 불교를 공부기도 하고 귀국하여 불교 교리의 진수를 익혀 한국의 불교의 선봉에 서다.

혜초는 중국에서 海路로 출발하여 천산산맥 실크로드로 귀환함.(아래글의 지도 참조)

비행기 타고 가도 지루한 길을. 붓다의 가르침이 뭐길래? 가치 있는 삶이 뭐길래?

그분들은 목숨건 길을 떠났을까?

 

인도여행, 제1일/2009-01-29(목) ~ 제9일/2009-02-0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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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佛經의 漢譯, 구마라집 · 현장

www.youtube.com/watch?v=A_MeayCv0-E&t=442s www.youtube.com/watch?v=4seGgSt63jk 新 왕오천축국전/ 혜초, 海路로 인도를 거쳐 아랍에까지 이른 후 히말라야 실크로드로 시안에 도착, 불경 번역 작업 그의 인생 모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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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타지마할!

바그바드 기타 · 우파니샤드/ 타지마할 (0) 2019.12.10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935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바그바드 기타 · 우파니샤드/ 타지마할 https://www.youtube.com/watch?v=8HBJlbyMilY https://www.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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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주라호사원 재정리

2009년 2월 2일 카주라호 관광 앞 포스트가 산만하여 카주라호사원 관광 목차를 관광 순서대로 재정리해 보았다 카주라호 사원을 떠나며2 (2) 2009.02.18 카주라호 사원을 떠나며1 (0) 2009.02.18 돼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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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bTizqvC5X9o 

 

 

https://www.youtube.com/watch?v=kGqLDRQ9vPs&t=144s 

 

 

 

https://www.youtube.com/watch?v=l0Vxliz4pws 

 

 

http://kr.buddhism.org/%eb%b6%93%eb%8b%a4%ec%9d%98-%ec%83%9d%ec%95%a0%ec%99%80-%ec%82%ac%ec%83%81/

 

붓다의 생애와 사상 – 디지털 불교

 

kr.buddhism.org

 

교화지역과 中國 佛敎

1) 마가다국에서의 교화활동

붓다께서 깟싸빠(Kassapa) 삼 형제를 교화하고 천 명의 제자들과 함께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를 방문했을 때, 세니야 빔비사라(Seniya Bimbisāra, 頻婆娑羅) 왕이 붓다께 귀의하여 재가 신자가 되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의 귀의로 말미암아 붓다의 교화활동은 마가다국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왕은 라자가하 교외에 벨루와나(Veluvana, 竹林精舍)를 지어 승단에 기증하였습니다. 이러한 빔비사라 왕의 후원은 초기불교 교단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붓다는 라자가하에서 많은 제자들을 얻었습니다. 붓다의 두 상수 제자였던 사리뿟따(Sāriputta)와 목갈라나(Moggallāna)의 개종도 이 때 이루어졌으며, 마하 깟싸빠(Mahā Kassapa)가 붓다의 제자가 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마하 깟싸빠와 붓다의 첫 만남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붓다께서 벨루와나의 간다꾸띠(Gandhakutī, 香室, 붓다의 거실)에 앉아 계실 때, 붓다는 지진이 일어날 조짐을 미리 아시고 밖으로 나오신 뒤,1) 라자가하와 나란다 사이의 뿌리가 많이 달린 니그로다 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붓다의 몸에서는 후광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마하 깟싸빠가 이러한 붓다의 모습을 뵙자마자 단번에 이 분이야말로 자신의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붓다 앞에 엎드렸습니다. 붓다는 그를 자리에 앉히고 세 가지 설교를 한 뒤 구족계를 주었습니다.  그 후 둘은 함께 라자가하로 돌아왔는데, 마하 깟싸빠는 이미 붓다의 32호상 가운데 일곱 가지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붓다께 귀의한 마하 깟싸빠는 8일 후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2) 그는 일생 동안 수행자의 자세를 잃지 않았으며, 붓다의 입멸 후에는 제1회 결집을 주도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마가다 출신의 유명한 제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에는 벨루와나 외에도 의사 지바까(Jīvaka, 耆婆)가 기부한 망고 숲(Jīvakambavana)을 비롯한 정사(精舍)들이 여러 곳에 건립되었습니다. 붓다는 라자가하 근처의 깃짜꾸따(Gijjhakūtā, 靈鷲山 혹은 耆闍崛山, ‘독수리 봉우리’의 뜻), 삿따빠니구하(Sattapanniguhā, 七葉窟), 랏티와나(Latthivana, 杖林) 등에 머물면서 교화활동을 펼쳤습니다.

붓다의 만년에는 돈독한 신자였던 빔비사라 왕이 그의 아들 아자따삿뚜(Ajātasattu, 阿闍世)에게 왕위를 찬탈당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왕 역시 얼마 후 잘못을 뉘우치고 붓다에게 귀의하였다고 전합니다.

2) 꼬살라국에서의 교화활동

붓다 당시 가장 번성했던 도시는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와 꼬살라(Kosala)국의 수도 사왓티(Sāvatthī, 舍衛城)였습니다. 학자들은 지금의 사헤트 마헤트(Sāhet-Māhet)가 사왓티의 유지(遺址)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3) 사왓티라는 도시 이름은 그곳에 사왓타(Savattha)라는 성자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전통에서는 그곳에 대상(隊商)들의 숙박소가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만나 각자 “무슨 물품이 있는가?(Kim bhandam atthi?)”라고 물으면, “모든 것이 있다(Sabbam atthi.)”라고 대답했는데, 이 ‘삿방아티’라는 대답이 곧 도시의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4) 어느 설이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도시가 붓다 당시에는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였음은 분명합니다.     

꼬살라국에서의 붓다의 교화활동은 처음에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지방에는 바라문의 세력이 강하였고, 자이나교, 아지비카교 등도 왕성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붓다가 꼬살라국에 예속된 석가족 출신이었다는 사실도 장애가 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5) 그러나 아나타삔디까(Anāthapindika, 給孤獨, ‘고독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자’의 뜻)라 불렸던 사왓티의 장자 수닷따(Sudatta, 須達)의 귀의를 계기로 비로소 이 나라에서의 교화의 거점이 확보되었습니다. 그때는 붓다께서 성도한 지 4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수닷따가 붓다를 만나 재가신자가 된 전후 사정에 대해서는 팔리『율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아나타삔디까는 사업차 라자가하에 갔다가 ‘깨달으신 분’ 즉 붓다(Buddha, 覺者)께서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금이라고 빨리 붓다를 친견하고 싶은 마음에 밤이 새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캄캄한 밤중에 성문(城門)을 나와 새벽녘에 시따와나(Sītavana, 寒林)로 가서 붓다를 친견하였습니다. 그는 붓다의 설법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일생 동안 재가자로서 붓다의 가르침을 받들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아나타삔디까는 이튿날 붓다와 제자들을 초청하여 공양을 베풀고, 사왓티에서 우기(雨期)를 보내도록 붓다를 초청했는데, 붓다는 그것을 승낙하였습니다. 사왓티로 돌아온 그는 붓다께서 머물 수 있는 적합한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그런데 제따(Jeta, 祗陀) 왕자의 공원이야말로 모든 조건을 갖춘 곳임을 확인하고, 왕자를 찾아가 양도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제따 왕자는 양도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엄청난 금액을 요구했습니다. 아나타삔디까는 그 금액을 지불하기로 하고, 황금을 수레에 싣고 와서 공원을 덮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련한 동산에 아나타삔디까는 건물들을 세웠습니다. 그는 회랑을 설계하고, 문들을 만들었으며, 대기실을 짓고, 화실(火室), 창고, 화장실을 지었습니다. 또한 산책길을 다듬고, 우물을 마련하고, 공중목욕탕를 짓고, 욕실을 준비했으며, 연못을 파고, 천막들을 세웠습니다.6)

이와 같이 원래 이 땅은 제따 태자가 소유하였던 원림(園林)이었기 때문에 ‘제따와나-아나타삔디까라마(Jetavana-Anāthapindikārāmā)’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 말은 ‘제따 태자의 원림에 아나타삔디까 장자가 세운 정사’라는 뜻입니다. 한역에서는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 하였으며, 줄여서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 부릅니다. 아나타삔디까는 ‘보시 제일’이라는 호칭과 함께 80명의 으뜸가는 제자들의 명단에 나타납니다.

사왓티에서 비사카(Visākhā, 毘舍佉)라는 여인도 아나타삔디까와 마찬가지로 ‘보시 제일’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신심 돈독한 재가 여신도였습니다. 그녀는 붓다와 상가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비사카는 원래 앙가(Anga, 鴦伽)국의 도시 밧디야(Bhaddiya)의 대부호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젊어서 붓다께 귀의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다난자야(Dhanañjaya)는 빔비사라 왕에 의해 꼬살라국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꼬살라국의 빠세나디(Pasenadi, 波斯匿) 왕이 자신의 왕국에 재산이 많은 사람을 보내 달라고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에게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다난자야는 사왓티로 오는 도중 21마일 떨어진 한 장소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그곳에 정착하고 싶다고 빠세나디 왕에게 간청했습니다. 왕의 허락을 받아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저녁에 첫 주민이 살게 되었다고 해서 ‘저녁’이라는 의미의 사께따(Sāketa, 娑鷄多)가 그곳의 지명(地名)이 되었습니다.7)

비사카는 사왓티의 부자 미가라(Migāra)의 아들 뿐냐왓다나(Punnavaddhana, 分那婆陀那)와 결혼했습니다. 시아버지 미가라는 나체 고행자들의 추종자였습니다. 그들은 비사카가 붓다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게 하라고 미가라에게 충고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에 어떤 모함으로 그녀를 고발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들의 그릇됨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을 때, 불교 승려들에게 봉사하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더 이상 머물지 않겠다고 거부했습니다. 붓다께서 그의 집을 직접 방문했을 때, 미가라는 개종했습니다. 그는 며느리를 통해 예류과(預流果)를 얻었기 때문에 자기의 어머니에게 하는 것처럼 비사카에게 깍듯이 예를 표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녀에게 ‘미가라의 어머니(Migāramātā, 鹿母)’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습니다.8)

『법구경주(法句經註)』에 의하면, 비사카는 시집올 때 값비싼 옷을 입고 왔는데, 그 옷을 희사하여 정사를 건립하겠다고 붓다께 요청했습니다. 붓다의 승낙을 받고 목갈라나가 감독하여 9개월이 걸려 사왓티 동쪽에 2층 건물을 완성하였습니다. 그 건물은 위, 아래 각각 500실을 갖춘 큰 규모였습니다. 이 승원의 이름은 뿟바라마(Pubbārāma, 東園)이지만, ‘미가라마뚜-빠싸다(Migāramātu- pāsāda, 鹿母講堂)로 더 널리 알려졌습니다.9)       

꼬살라 국왕 파세나디(Pasenadi, 波斯匿)도 나중에 왕비 말리카(Mallika, 末利) 부인의 인도로 붓다께 귀의하였습니다. 그리고 빠세나디 왕은 제따와나(기원정사) 반대편에 ‘라자까라마(Rājakārāma, 王園)’ 즉 왕실 사원을 건립하였습니다. 사왓티에서 붓다의 으뜸가는 후원자는 아나타삔디까, 비사카, 숫빠와사(Suppavāsa), 빠세나디였습니다.10)

붓다는 성도 후 20년이 지난 후부터 입멸하기 한 해 전까지 25년간의 안거(安居)를 사왓티에서 보냈습니다. 기원정사에서 19번, 녹모강당에서 6번의 안거를 보냈습니다.11) 이것은 붓다가 사왓티를 중심으로 교화생활의 후반을 보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후 붓다께 출가하여 승단에 들어오는 자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사왓티 출신의 유명한 불제자도 많이 출현하였습니다. 경전에 나타난 제자들의 이름을 보면 사왓티 출신의 비구가 80명이나 되며, 비구니가 14명, 우빠사까(Upāsaka, 信男)가 19명, 우빠시까(Upāsika, 信女)가 10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 중에는 당시의 카스트 제도를 무시하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위로는 왕가(王家)의 주요 인물들로부터 아래로는 도로청소부에 이르기까지 사왓티 일대의 주민 대부분이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12)

3) 그 밖의 중요한 교화지역

붓다의 고향인 까삘라밧투에서의 교화도 두드러진 자취를 남겼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자세히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한편 밧지(Vajji)국의 릿차비(Licchavi, 離車)족 수도 베살리(Vesālī, 毘舍離城)에는 비교적 일찍부터 교화가 미쳤던 것 같습니다. 이 땅은 자이나교가 성행했던 곳이었는데, 그 신봉자인 삿짜까(Saccaka, 薩遮)나 시하(Sīha, 獅子) 등은 붓다를 만나 불교로 전향하였다고 합니다. 이곳의 재가신자로서 유명한 이는 욱가(Ugga, 郁伽) 장자입니다. 또한 암바빨리(Ambapālī, 菴婆婆利)도 원림(園林)을 기부하였으며, 뒷날 출가하여 여성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붓다는 밤사(Vamsa)국의 수도 꼬삼비(Kosambi, 憍賞彌城)에도 종종 유행하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성도 후 9년째 되던 해의 안거를 여기서 보냈다고 합니다. 고시따(Ghosita, 瞿師羅) 장자가 기부한 승원, 즉 고시따라마(Ghositārāma, 瞿師羅園)는 잘 알려져 있으며, 국왕 우데나(Udena, 優塡)는 뒷날 삔도라 바라드바자(Pindola Bhāradvāja, 賓頭盧頗羅墮)와 왕비 한 명과 함께 붓다께 귀의하였다고 합니다.

붓다는 성도 후 입멸에 이르기까지 45년간 인도 각 지방을 유행하며 교화하였습니다. 붓다의 교화가 인도 어느 지역까지 미쳤는가 하는 문제는 초기성전에 나타나는 붓다의 유행 경로나 설법 장소로서 대충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또 후대의 자료이기는 하지만 붓다가 성도한 후 안거하였던 곳을 기록한 것이 있는데 이것도 추정의 실마리가 됩니다. 이러한 자료에 의하면 붓다의 교화지역은 앙가, 마가다, 밧지, 말라, 꼬살라, 까시, 밤사 등의 여러 나라를 중심으로 멀리는 꾸루, 빤짤라까지 이르렀던 흔적이 있습니다. 설법이 많이 행해졌던 장소는 사왓티(꼬살라의 수도), 라자가하(마가다의 수도), 베살리(밧지의 수도), 까삘라밧투(석가족의 수도), 꼬삼비(밤사의 수도) 순이며, 그 중에서도 사왓티와 라자가하 두 도시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붓다의 유행도 이 두 도시의 왕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안거 역시 이 두 도시에서 많이 시행되었다고 전합니다.13)

붓다의 교화지역은 ‘불교중국(佛敎中國)’과 거의 일치합니다. 불교중국(Majjima-janapada 또는 Majjhima-desa)이란 원래 ‘수계(受戒)할 때 필요한 10명의 스승을 얻을 수 있는 중앙지역’을 의미합니다. 이른바 불교문화의 중심지를 가리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중국의 범위에 대해서는 많은 종류의『율장』에서 규정하고 있습니다.14) 

이와 같이 붓다의 교화활동은 불교중국 곳곳에 미쳐 그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붓다는 몸소 교화에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전도 선언 이래 출가 제자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전도활동을 권장하였습니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서쪽 아반띠(Avanti)국 출신의 마하캇짜나(Mahākaccāna, 大迦旃延)나 그 서남쪽의 스나빠란따(Snāparanta, 현재의 뭄바이 서북방에 해당함) 출신 뿐나(Punna, 富樓那)와 같은 탁월한 교화력을 지닌 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붓다의 직제자(直弟子)들의 출신지나 교화지역을 조사해 보면 그 교화범위는 불교중국을 훨씬 넘어 동으로는 갠지스 강 유역, 서북으로는 탁샤실라(Taksaśilā) 부근까지 미치고 있었습니다.15) 붓다 재세시(在世時) 이미 불교는 크게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Notes:

 

1) 이 때 세존께서는 세 가부따(gāvuta)를 걸어 나오셨다고 한다. 가부따는 거리의 단위로서 1/4유순(由旬)이라고 한다.
2)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DPPN),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 Oriental Books Reprint Corporation, 1983), Vol. Ⅱ, p. 477.
3) Cunningham, AGI. 469; DPPN. Vol. Ⅱ, p. 1127.
4) Suttanipāta Commentary(PTS), Ⅰ. 300; Patisambhidāmagga Commentary(SHB). 367; DPPN. Vol. Ⅱ, p. 1126.
5)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초기, 부파불교의 역사』(서울 : 민족사, 1989), p. 47.
6) Vinaya Pitaka(PTS), Vol.Ⅱ, pp. 154-159; I. B. Horner tr., The Book of the Discipline (London: PTS, 1952), pp. 216-223.
7)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Munshiram Manoharlal, 1992), pp. 105-6.
8)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p. 105-6.
9) 『望月佛敎大辭典』5권, p. 5061上.
10) DhA.Ⅰ. 330; DPPN. Vol. Ⅱ, p. 1126-7, 참조.
11) DhA. Ⅰ. 4; DPPN. Vol. Ⅱ, p. 1126.
12) 李箕永, 『석가』세계대사상전집5 (서울 : 지문각, 1965), pp. 172-3, 참조.
13)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 앞의 책, p. 44.
14)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 위의 책, p. 45.
15)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 위의 책, p. 48.

비구니 교단의 성립과 발전

1) 비구니 교단의 성립

불교교단에서 비구니 상가(Samgha, 僧伽)의 성립은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비구니 상가가 언제 성립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비구 상가보다 나중에 성립되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처음 붓다는 여성의 출가에 대해서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고 합니다. 그 이전에 이와 같은 사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불교교단에서 여성출가자, 즉 비구니가 출현했다는 것은 종교사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사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불교교단에서 최초의 비구니는 붓다의 양모였던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i Gotamī, 摩訶波闍波提瞿曇彌)였습니다. 팔리어 율장에 의하면, 슛도다나왕이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붓다는 까삘라밧투(Kapilavatthu, 迦毘羅衛城)의 교외에 있는 니그로다(Nigrodha, 榕樹) 동산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붓다를 찾아와 여성의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녀는 세 번씩이나 교법과 계를 베풀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받아들여지지 않아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 후 붓다는 까삘라밧투를 떠나 베살리(Vesālī, 毘舍離城) 교외에 있는 마하바나(Mahāvana, 大林)의 꿋따가라살라(Kūtagārasālā, 重閣講堂)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마하빠자빠띠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은 다음 붓다의 뒤를 좇아 베살리의 중각강당까지 찾아왔습니다. 이때 같은 뜻을 가진 사캬족의 여인들도 동행했습니다. 그들은 맨발로 걸어서 발은 부어터지고 얼굴은 눈물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마하빠자빠띠와 사카족의 여인들이 정사의 문밖에 선 채로 출가의 허락을 재차 간청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아난다가 세 번이나 붓다께 그들의 뜻을 전했지만 붓다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난다는 다시 붓다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여인이 이 가르침을 따라 출가하여 수행한다면 남자와 같이 수행의 효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아난다야, 물론 그럴 수 있다.” 이 대답을 듣고 용기를 얻은 아난다는 다시 마하빠자빠띠가 붓다께 바친 은혜를 말하고 꼭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몇 번이고 간청을 했습니다. 붓다는 마침내 여성의 출가를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여덟 가지 조건이 따랐습니다.1)

첫째, 출가하여 백년의 경력을 가진 비구니(比丘尼, 尼僧)일지라도 바로 그날 자격을 얻은 비구(比丘)에 대해서는 먼저 합장, 존경을 해야 한다.

둘째, 비구니는 비구가 없는 장소에서 안거(安居)를 해서는 안 된다.

셋째, 비구니는 한 달에 두 번씩 비구 승단으로부터 계율의 반성[布薩]과 설교를 들어야 한다.

넷째, 비구니는 안거가 끝난 뒤 남녀 양쪽의 승단에 대해서 수행이 순결했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다섯째, 비구니가 중대한 죄를 범했을 때에는 남녀 양쪽의 승단으로부터 반 달 동안 별거(別居) 취급을 당해야 한다.

여섯째, 비구니의 견습(式叉摩那, Siksamānā)은 2년 동안 일정한 수행을 거친 다음 남녀 양쪽의 승단으로부터 온전한 비구니가 되는 의식(儀式)을 받아야 한다.

일곱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비구니는 비구를 욕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

여덟째, 비구니는 비구의 허물을 꾸짖을 수 없지만 비구는 비구니의 허물을 꾸짖어도 무방하다.2)

아난다는 마하빠자빠띠에게로 가서, 만약 이 여덟 가지 조항을 받아들인다면 여성의 출가가 허락되리라는 뜻을 전했습니다. 그녀는 “젊은이가 머리를 감고 아름다운 꽃을 장식하는 것을 좋아하듯이, 나는 이 여덟 가지 조항을 한평생 소중하게 지켜가겠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이 여덟 가지 조항(尼八敬戒, 八重法이라고도 함)을 받아들임으로써 마하빠자빠띠는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그때 붓다는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난다야, 만약 여성에게 불교교단에 출가가 허용되지 않았더라면 수행의 순결이 유지되어 1천년 동안 정법(正法)이 존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여성이 출가하게 되었으니, 수행의 순결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정법은 5백년밖에 존속되지 못하게 되었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은 집안에는 도적이 침범하기 쉽다. 또 논밭에 물것이 성하면 열매를 거둘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출가하게 되면 수행의 순결은 유지되기 어렵다. 큰 연못 둘레에 미리 둑을 쌓아 물의 범람을 막듯이, 나는 비구니들에게 이 여덟 가지 조항을 베푼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교 교단에 여성의 출가가 인정되었습니다. 여성을 독립된 인격으로 볼 경우, 남성과 같이 우수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붓다 자신도 인정한 바와 같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남녀의 차별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비구니들 중에서도 수행과 학덕이 뛰어난 인물이 있었다는 것은 [테리가타(Therīgāthā, 長老尼偈)]의 예를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붓다는 수행에 의해서 여성도 성자(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여성의 이름도 몇 사람 기록되어 있습니다.3)

2) 비구니 교단의 성립 시기와 그 배경

불교교단에서 비구니 상가가 성립된 것은 붓다 성도 후 20년경이라고 봅니다. 일부 학자들은 붓다 성도 후 5년째에 비구니 상가가 성립되었다고 합니다만4) 이것은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마하빠자빠띠가 처음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성도 후 5년째 일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베살리의 중각강당에서 비구니의 출가를 승인한 것은 아난다 존자가 붓다의 시자로 책봉된 이후임이 분명합니다. 역사적으로 아난다는 붓다 성도 20년 후부터 시봉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법인 스님은 비구니 교단의 성립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비구니 승가는 부처님 성도 후 20년경에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즉 부처님의 이모이며 양모인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출가를 간청 드린 것이 붓다 성도 후 15년경이며, 허락을 받은 것은 아난 존자가 붓다의 시봉을 들기 시작한 첫 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미 비구 승가와 재가신도가 탄탄하게 형성된 후에 비구니 승가가 성립된 것이다.”5) 

이와 같이 법인 스님은 마하빠자빠띠가 붓다께 출가를 간청 드린 것이 붓다 성도 후 15년경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처음의 간청은 성도 후 5년경이고, 실제로 출가를 허락한 것은 성도 후 20년경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이유는 여인의 출가를 처음부터 승낙할 경우 당시 바라문들의 극심한 비난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바라문들의 반응을 타진해 보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잠롱 통프라스트의 견해에 따르면, 붓다는 여성의 출가를 허가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첫째, 붓다는 여성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라한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둘째, 여성은 위험, 특히 나쁜 남자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수가 없다. 이런 경우에는 승려들에게 부담을 더하게 된다. 비구니들은 비구들의 사찰에서 떨어져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만일 그들이 비구들과 같은 공간에서 사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불교를 반대했던 다른 종교, 특히 바라문교에게 불교를 공격하도록 기회를 제공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이것이 바라문교의 사회 제도를 뒤엎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바라문 사회에서 여성들은 점점 더 불교도가 되어 갔다. 이것은 바라문의 제도를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바라문들은 온갖 수단으로 방해할지도 모르며, 자신의 새로운 교리를 전파하는 데 어려움이 될 수도 있었다. … 이와 같이 그는 조심스럽게 진행해 나갔다. 마침내 그의 속도 조절은 기대 이상으로 효과를 낳았다. 사실, 붓다는 먼저 바라문들의 반응을 타진해 보기를 원했었다. 왜냐하면 성직을 요청했다는 마하빠자빠띠의 소문은 널리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바라문들은 어떻게 했는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붓다는 그녀가 요청했던 것과 같이, 그녀와 석가족 여성 일행의 입단을 허가하기로 결심했다.”6) 

한편 대부분의 학자들은 비구니의 상가 입단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제시한 ‘여덟 가지 조항’ 즉, 팔경법(八敬法, Attha-garudhammā)은 상당히 후세에 정리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팔경법의 내용 중에는 비구니 교단이 성립되지도 않았는데, 식차마나에 관한 언급이 있는 것 등을 예로 들어 붓다께서 직접 제정한 것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팔경법의 내용과 합치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어떤 형태로든 전제 조건을 붓다께서 제시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붓다께서 여성을 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 바라문 사회의 극심한 반발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방편에서 마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행의 팔경법은 부파불교 시대에 첨가 보완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비구니에게 요구한 팔경법 때문에 불교에서는 여성을 폄하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떤 학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부처님의 여성 출가자 수용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나 문화적 여건에서 볼 때 거의 혁명적인 사건에 가까운 것이었다. 인도의 사회구조와 반여성적 풍토는 여성에 대해 아주 냉소적이었으며, 특히 종교행위를 가장 신성한 행위로 간주했던 인도인의 생활방식에서 여성의 종교생활은 커다란 도전이었고 파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여성의 몸 그대로는 성불(成佛)할 수 없다는 ‘여성불성불론(女性不成佛論)’에 근거한 ‘여인오장설(女人五障說)’과 ‘여성변성남자성불론(女性變性男子成佛論)’ 등을 말하는 문헌들도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모두 붓다의 참뜻이 아님은 거의 확실합니다.8)

3) 비구니의 출가 설화

마하빠자빠띠에 이어서 붓다의 아내였던 야소다라를 비롯하여 사캬족의 많은 여성들이 출가를 했는데, 이들과 그 밖의 여성 출가자들을 합하여 비구니 교단이 발족되었습니다. 비구니 중에는 남성 출가자를 능가하는 자질을 가지고 있어서 폭넓은 활동을 하는 자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들 비구니의 설화는 팔리어 경전인 [테리가타]에 기록되어 있는 이외에도 여러 경전과 그 주석서에도 가끔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성 출가의 원인이나 동기에 대해서는 갖가지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웃자이니의 왕녀 수메다는 어려서부터 붓다의 가르침에 접하고, 정신적으로 충실한 생활을 찾아서 결혼식 직전에 풍요로운 검은 머리를 잘라 버리고 집을 떠났습니다. 또 빔비사라왕의 교계사(敎戒師)의 딸인 소마는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어둠의 숲’에서 명상을 하던 중, 유혹하러 나타난 악마를 일언직하에 물리치고 있습니다. 이들 여성은 원래 물질적인 세계로부터 등을 돌려, 이상적인 경지에 마음을 안착시키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한편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나가면서도 그 비참한 환경에 절망하여 출가한 여성도 많았습니다. 바라문의 딸인 뭇타는 용모가 괴이한 가난한 남성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결국 남편의 폭력에 견디다 못해 출가하게 되었습니다. 소나와 바다마타는 나이가 들어 늙게 되자 애지중지하여 키운 자식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됨으로 교단에 의탁하고자 출가했습니다.

사랑하는 육친과의 생각지 못했던 이별로 인하여 출가한 여성도 많았습니다. 사왓티에 사는 상인의 딸인 빠따짜라(Patācāra)는 부모의 뜻에 맞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여 집을 나갔지만, 믿고 의지하던 남편이 독사에게 발을 물려 죽고, 또 남은 두 자식도 하나는 독수리에게 채여 가고 하나는 강물에 쓸려 들어가 버리자 하는 수 없이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양친과 형제들 모두가 태풍으로 쓰러진 집에 깔려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슬픔에 몸부림치며 미친 듯이 헤매다가 붓다에게 구원을 받아서 출가했다고 합니다. 빠따짜라가 어느 날 항아리에 물을 길어 발을 씻을 때, 흘려보낸 물이 처음에는 조금 흘러갔고, 두 번째는 좀 더 앞에까지 흘렀으며, 세 번째는 더 앞에까지 흘러갔습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사라져 없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을 안 그녀는 사람의 수명도 비록 장단은 있지만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정각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또한 같은 사왓티의 가난한 가정의 딸 끼사 고따미(Kisa Gotamī)는 어쩌다가 자신의 아이가 죽자 죽은 아이를 가슴에 안고, 그 아이를 소생시킬 수 있는 약을 구하려 다니다가 붓다를 만났습니다. 붓다는 이제까지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을 찾아가 겨자씨를 얻어 오면 아이를 소생시켜 주겠다고 합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러한 집을 찾아다녔지만 물론 조건에 맞는 겨자씨를 얻지 못하니,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어 슬픔을 극복하고 비구니 교단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여성 출가의 설화는 이밖에도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성 출가자에 비해서 지켜야 할 계율이 엄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출가에 진력한 아난다가 나중에 비난을 받는 등, 불교 교단 통제 상의 갖가지 문제를 야기 시킨 일을 기술한 문헌도 있습니다.9)

Notes:

1) 中村元著, 金知見譯, [佛陀의 世界](서울 : 김영사, 1984), p.221.
2)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 샘터, 1990), pp.263-4.
3)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 pp.264-5.
4)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 1992), p.107.
5) 법인, “비구니 팔경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불교평론]제18호(서울: 불교평론사, 2004년 봄호), p.97.
6) 잠농 통프라스트, 이마성 옮김, “정치적 시각에서 본 붓다의 생애”, [불교평론]제7호(서울: 불교평론사, 2001년 여름호), pp.378-379.
7) 이현옥, “여성의 관점에서 본 ‘여성성불론’”, [불교평론]제3호(불교평론사, 2000, 여름), p.85.
8)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샘터, 1990), pp.264-5; 이현옥, 위의 글, pp.89-93, 참조.
9) 中村元著, 金知見譯, [佛陀의 世界](서울: 김영사, 1984), p.221.

붓다의 마지막 여로(1)

1)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붓다는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시작한 이후, 사십여 년 동안 갠지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교화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붓다는 북인도의 거리에서 거리로, 마을에서 마을로 유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그동안의 활동에 대한 그 역사적 전후 관계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경전은 모두 붓다께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일에 대해서 설법했다고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1)  

그러나 붓다의 만년(晩年), 즉 입멸 전후의 사정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자세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전의 디가 니까야(Dīgha Nikāya, 長部)의 세 가지 경전2)에서는 붓다의 마지막 나날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마하빠리닙바나 숫따(Mahāparinibbāna sutta, 大般涅槃經)]는 그 대표적인 경전입니다. 현재 팔리어 [대반열반경] 외에도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된 산스끄리뜨어 사본(寫本)의 단편과 티베트어역, 그리고 다섯 종류의 한역본이3) 전해지고 있습니다.4) 이로 미루어 이 경전은 다른 부파에서도 전승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제 역본들의 기록은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모두 붓다 입멸 전후의 사정이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성(事實性)이 높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후대에 삽입된 부분도 포함되어 있음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약간의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전의 [대반열반경]에 묘사된 내용은 역사적, 지리적 사실에 가깝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전의 핵심 내용은 위대한 분의 크나큰 죽음과, 그 죽음을 앞에 두고 설해 남기신 최후의 설법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경전이 지니는 가치와 크나큰 매력은 역시 이 크나큰 죽음의 사실과 그 최후 설법에 있어서의 주옥같은 가르침의 말씀입니다.5)

그런데 대승경전에도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이라는 같은 이름의 경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전은 붓다께서 입멸할 때의 설법을 주제로 한 것으로 아주 딴 경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반열반경]은 팔리어 경전과 그에 해당되는 한역본을 가리키는 것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팔리어로 씌어진 남전의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붓다의 마지막 여정은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를 출발하여 갠지스강을 가로질러 베살리(Vesālī, 毘舍離城)에 이르러 안거를 마치고, 말라(Mallā)국의 도시였던 꾸시나라(Kusinārā, Kusinagara, 拘尸那竭羅)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입적(入寂)하게 됩니다. 그리고 붓다의 입멸 후 화장과 사리분배 등에 관한 후대의 기사까지 아주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팔리어 경전에 근거하여 붓다의 마지막 여로에 대한 줄거리를 더듬어 보겠습니다. 

2) 라자가하에서 설한 칠불퇴법(七不退法)

[대반열반경]은 붓다께서 입멸하기 반 년 내지 일 년 정도 전 라자가하의 깃자꾸따(Gijjhakūta, 耆闍崛山, 靈鷲山)에 머물고 있을 때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무렵 마가다국의 아자따삿투(Ajātasattu, 阿闍世) 왕은 밧지(Vajji)국을 정복할 야망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밧사까라(Vassakāra)라는 대신(大臣)을 붓다께 보내 그 의향을 여쭤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붓다는 아자삿투왕의 대신 밧사까라에게 직접 답하지 않고, 제자 아난다에게 밧지족 사람들이 다음의 일곱 가지 사항을 실행하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물었습니다.

① 밧지족 사람들은 자주 회의를 열고 회의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가.

② 밧지족 사람들은 함께 집합하고 함께 일을 시작하며 밧지족으로서 해야 할 것을 함께 행하는가.

③ 밧지족 사람들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을 정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것을 깨뜨리지 않으며 옛날에 정해진 오래된 밧지족의 법에 따라 행동하는가.

④ 밧지족 사람들은 밧지족 중의 밧지 노인들을 존경하고 환대하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⑤ 밧지족 사람들은 종족의 부인이나 여자아이를 폭력으로 꾀어내거나 그것을 만류하지 않은 일은 없는가.

⑥ 밧지족 사람들은 내외(內外)의 밧지족 조상의 사당을 존중하고 공경하며 공양하고 그리고 이전에 바치고, 이전에 시행한 올바른 공양물을 버리지는 않는가.

⑦ 밧지족 사람들은 아라한에 대하여 올바로 보호하고 수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또 아직 오지 않은 아라한이 이 땅에 오도록 하고 이미 오고 있는 아라한이 이 땅에서 편안히 머물 수 있도록 하는가.6)

밧지족 사이에 이러한 일곱 가지 사항이 그대로 행해지고 있다고 아난다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밧지족 사람들이 이러한 일곱 가지 사항을 실행하는 한 그들은 영원히 번영하고 결코 마가다국에 의해 멸망되지 않는다고 설했습니다. 그리고 경전에서는 이들 밧지족의 멸망을 초래하지 않는 일곱 가지 법(七不退法)을 설한 다음 계속하여 동일한 내용을 그대로 불교승가에 적용시켜 다음과 같이 설했습니다.

① 비구들이 자주 회의를 열고 회의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② 비구들이 함께 집합하고 함께 일을 시작하고 함께 승가의 제반 행사를 치르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③ 비구들이 이전에 정해진 적이 없는 것을 정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것을 깨뜨리지 않으며 모든 학처(學處=戒本)에 따라 행동하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④ 비구들이 출가한 지 오래되어 경험이 풍부한 장로비구들, 승가의 어른들, 승가를 이끄는 사람들을 모두 존경하고 존중하며 공양하고,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⑤ 비구들이 이미 생기(生起)해 있는 재생(再生)을 초래하는 갈애(渴愛)에 지배되지 않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⑥ 비구들이 숲속의 좌와소(坐臥所)에 있기를 원하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⑦ 비구들이 각자 자신의 마음을 단련하고 또 착한 수행자들을 거기에 오게 하고 또 거기에 오고 있는 수행자들을 편안하게 머물러 있게 하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7)

이 외에도 교단이 쇠퇴하지 않는 다른 네 가지 종류의 칠불퇴법과 한 가지 종류의 육불퇴법이 언급되어 있습니다.8) 이와 같이 비구들이 자주 회의를 열고 회의에는 많은 비구들이 모이는 것, 비구들이 공동으로 승가의 제반 행사를 치르는 것, 정해진 학처(學處)에 따라 행동하는 것 등은 불교승가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되는 사항들입니다. 이러한 승가 운영상의 중요한 사항들이 밧지족 사이에서 시행되고 있던 관습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 경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9)

3) 최후의 여정에 오름

얼마 후 붓다는 80세의 노쇠한 몸을 이끌고 라자가하를 떠나 최후의 여정에 오릅니다. 붓다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북쪽의 베살리를 향해 라자가하를 출발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암바랏티까(Ambalatthika) 동산에 도착하였습니다. 붓다는 암바랏티까 동산의 ‘왕의 집(Rājâgārake)’에 머무셨습니다.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에도 비구들에게 수많은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즉 “이것이 계율이다. 이것이 선정이다. 이것이 지혜이다. 계(戒)가 실천되었을 때, 정(定)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정(定)이 실천되었을 때, 혜(慧)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혜(慧)가 실천되면 마음은 번뇌, 즉 욕루(欲漏, kammâsavā), 유루(有漏, bhavâsavā), 견루(見漏, ditthâsavā), 무명루(無明漏, avijjâsavā)로부터 해탈하게 된다.”10) 계율과 선정과 지혜, 이 셋은 불교 전체를 통해 가장 기본적인 실천 형태이며, 흔히 ‘삼학(三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경우 학(學)은 배운다는 것이 아니고 ‘실천’이라는 뜻입니다.11) 이 삼학은 불교의 매우 중요한 교설로서, 이 경전에서 붓다는 반복해서 비구들에게 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삼학에 관한 교설은 이 경전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암바랏티까 동산에서 마음껏 머무신 다음, 붓다는 나란다(Nālanda, 那爛陀)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붓다는 나란다에 도착하여 그곳의 빠와리까(Pāvārika)의 망고 숲에 머무셨습니다. 그 때 존자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가 세존의 처소를 찾아와서 세존께 예배드리고 다음과 같이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 이러한 신앙을 품고 있습니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바른 깨달음에 대해 세존만큼 심오하고 철저하게 도달한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며, 현재에도 물론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12)

그러자 붓다는 사리뿟따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사리뿟따는 자기는 과거, 현재, 미래의 제불세존(諸佛世尊)에 대해서 샅샅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릇 불세존이라는 분은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함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대목은 팔리문 [대반열반경]에는 있지만, 한역의 해당 부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내용이 팔리문과 한역(漢譯) 아함(阿含)의 다른 곳에 나와 있습니다.13)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사리뿟따의 신앙 고백은 다른 기회, 즉 붓다의 입멸 직전보다 훨씬 앞서 있었던 일로 여겨집니다.14) 그러니까 팔리문 [대반열반경]의 편집자는 나란다 마을이라는 지명(地名)이 나오기 때문에 이 고장과 관련되어 알려진 사리뿟따의 고백을 여기에 삽입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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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현장(玄奘, 602년 4월 6일 ~ 664년 3월 7일)은 당나라 초기 고승이자 번역가이며, 흔히 현장삼장(玄奘三藏)으로 불린다. 10세 때 형을 따라 낙양의 정토사에서 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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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반야심경》(般若心經, 산스크리트어: प्रज्ञापारमिताहृदय 프라냐파라미타 흐르다야 수트라)은 불교의 중심이 되는 경전으로《대반야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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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無意識界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무의식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顛倒夢想 究竟涅槃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괘애 무괘애고 무유공포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薩婆訶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  사바하
[11]

관자재보살께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때 오온이 (空)한 것을 비추어 보시고 모든 괴로움을 깨달으셨도다.
사리자여! (色)이 공(空)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아니하니 색은 곧 공이오, 공은 곧 색이며, (受)·(想)·(行)·(識) 또한 그러하니라.
사리자여! 이러한 은 서로 공하니 새로 나거나 사라지지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안에는 색도, 수·상·행·식도,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도,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도, 눈과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도다.
무명(無明)과 무명이 다함도 없고, 늙음과 죽음, 늙음과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고집멸도(苦集滅道)도, 지혜도, 얻는 것도, 얻을 것도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기대므로
마음에 걸릴 것이 없고, 걸리는 것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 뒤바뀐 헛된 생각을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노라.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에 기대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도다.
고로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따라서 반야바라밀다 주문을 읊노라
"가자, 가자, 피안(彼岸)으로 가자, 피안으로 넘어가자, 영원한 깨달음이여"

 

https://www.youtube.com/watch?v=0ntn3Q28BD4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 가, 개달음에 뿌리를 내리게 하소서!)


*위 주문(呪文)의 산스크리트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 스와하 <=== 억양을 부드럽게 했을 때

(한자 음역)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한국어 음역)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한국어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영   어 :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해   석 :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가자. 가자. 
피안으로 건너가자.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가자. 
깨달음에 뿌리를 내려 주소서.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2912 

 

https://www.youtube.com/watch?v=QgT7c-AJW0g&t=34s 

 

 

https://www.youtube.com/watch?v=bTizqvC5X9o&t=60s 

 

https://kydong77.tistory.com/21784

 

구마라집 명번역, 반야심경,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https://ko.wikipedia.org/wiki/%EB%B0%98%EC%95%BC%EC%8B%AC%EA%B2%BD 반야심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반야심경》(般若心經, 산스크리트어: प्रज्ञापा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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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21790

 

鳩摩羅什(구마라집) 漢譯, 한글妙法蓮華經 全28품/ 한글대장경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8868 묘법연화경변상도(妙法蓮華經變相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직접 경전에 그리는 사경화(寫經畵)와 목판이나 활판으로 찍은 판경화(板經畵)의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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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역,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최윤옥 국역/영인스님 독송

https://www.youtube.com/watch?v=BNIxmcdEOBU&t=563s YouTube에서 보기 를 클릭하시면 동영상이 열립니다. https://yongik337.tistory.com/592 우리말 불설아미타경 최윤옥 번역 (한글대장경)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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