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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燕巖集)》 해제(解題)
김명호(金明昊)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568A
1. 머리말
본서는 한국문학사의 최고봉에 속하는 문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시문(詩文)을 최초로 완역한 것이다.
연암은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정조(正祖) 임금이 특별히 거론하고 그 문체의 영향력을 문제 삼았을 정도로 당대 조선의 걸출한 작가였다. 뿐만 아니라 연암은 사후(死後)에도 그의 문학과 사상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고조되어 간 점에서 유례가 드문 작가라 할 수 있다.
19세기에 필사본으로만 전하던 그의 문집은 20세기의 벽두인 애국계몽기(愛國啓蒙期)에 처음 활자본으로 공간(公刊)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조선학운동(朝鮮學運動)이 일어나던 무렵에 다시 활자본으로 공간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또한 그에 관한 학문적 연구는 북에서는 홍기문(洪起文)ㆍ김하명(金河明) 등에 의해 1950년대부터 활발하게 이루졌으며, 남에서는 1960년대 이후 이가원(李家源)ㆍ이우성(李佑成) 등의 선구적 연구에 이어 오늘날까지 실로 왕성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리하여 이제 《열하일기》를 비롯한 연암의 작품들은 한국문학이 낳은 특출한 성과로서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주목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이 연암 연구가 날로 발전해 온 추세를 감안할 때 아직 연암의 문집이 완역되지 못한 것은 만시지탄을 금할 수 없다. 연암의 문집 중 《열하일기》는 이미 완역본이 나온 바 있으나, 일반 시문은 선집(選集)의 형태로만 몇 차례 국역되었을 따름이다.
홍기문의 《박지원 작품 선집》(1960)을 비롯해서 현재까지 남과 북에서 몇 종의 국역서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연암집(燕巖集)》에 수록된 시문 전체의 3할을 넘지 않는 일부 작품들만 국역되는 데 그쳤다. 게다가 이러한 국역서들은 대개 텍스트 자체에 대한 서지적 검토를 소홀히 하고 작품의 이해와 감상에 필요한 주해(註解)를 충실히 베풀지 않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본서는 종전의 국역서들이 지닌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하고자 연암의 시문 전체를 국역 대상으로 했을 뿐 아니라, 역자(譯者) 자신을 포함한 학계의 연암 연구 성과를 국역에 충분히 반영한 ‘전문적 학술 번역’을 추구하였다.
그간 학계의 숙원 사업의 하나였던 연암의 시문 완역이 이루어지게 된 데에는 우전(雨田) 신호열(辛鎬烈 : 1914 ~1993) 선생의 공로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우전 선생은 일찍이 1978년부터 매주 《연암집》 강독회를 열고 작고할 때까지 연암의 글들을 국역ㆍ구술하셨다.
그 뒤 문하생들이 선생의 유업(遺業)으로 《연암집》 국역 출간을 기획했으나 선생의 구술을 받아 적은 원고가 방대한 분량이라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결국 문하생 중에서 연암 문학을 전공한 필자가 그 일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동안 필자는 연암의 손자인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고 있어서 그 연구를 마치는 대로 우전 선생의 국역 원고를 정리할 계획이었는데, 어느덧 10여 년이 지났음에도 환재 연구가 끝나지 않아 《연암집》 국역 작업 역시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늘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던 차,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시급히 국역해야 할 고전의 하나로 《연암집》을 선정하고 우전 선생과 필자의 공역(共譯) 형식으로 국역해 줄 것을 요청해 왔으므로, 제백사하고 이 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연암 서거 200주년이 되는 2005년에 맞추어 연암의 시문을 드디어 완역 출간하게 된 것이다.
2. 연암의 생애와 문학
연암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 음력 2월 5일 서울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중미(仲美)이다. 연암의 가문은 선조조(宣祖朝)의 공신인 박동량(朴東亮)과 그의 아들로서 선조의 부마가 된 박미(朴瀰)를 위시하여 세신귀척(世臣貴戚)을 허다히 배출한 명문거족이었다. 연암의 조부 박필균(朴弼均)은 경기도 관찰사와 호조 참판을 거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지냈으며, 시호(諡號)는 장간(章簡)이다. 부친 박사유(朴師愈)는 평생 포의(布衣)로 지내면서 부모 밑에서 조용한 일생을 보냈다. 따라서 연암의 정신적 성장에는 집안의 기둥이던 조부가 부친보다 더 강한 영향을 끼쳤던 듯하다.
연암은 16세 때 전주 이씨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혼인하였다. 장인 이보천은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학통을 계승한 산림처사(山林處士)로 명망이 높았다. 이보천의 아우인 이양천(李亮天)은 시문에 뛰어났으며,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결혼 후 연암은 이러한 장인 형제의 자상한 지도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학업에 정진하였다.
20세 무렵부터 연암은 여느 양반가 자제와 마찬가지로 과거 준비에 몰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혼탁한 벼슬길에 과연 나서야 할 것인지 몹시 번민했다고 한다. 그의 초기작을 대표하는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은 이러한 심각한 정신적 갈등 상황에서 창작된 것으로서, 여기에 수록된 ‘마장전(馬駔傳)’ ‘양반전’ 등은 당시 양반사회의 타락상을 통렬하게 풍자한 작품들이다. 또한 연암은 1765년 가을 금강산을 유람하고 장편 한시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叢石亭觀日出〕’를 지었다.
장래의 거취 문제로 오랫동안 번민하던 연암은 1771년경 마침내 과거를 폐하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 연암은 서울 전의감동(典醫監洞)에 은거하며 벗 홍대용(洪大容) 및 문하생 이덕무(李德懋)ㆍ박제가(朴齊家)ㆍ유득공(柳得恭)ㆍ이서구(李書九) 등과 교유하는 가운데 자신의 사상과 문학을 심화해 나갔다.
이 시절에 그는 ‘법고창신(法古創新)’ 즉 ‘옛것을 본받되 새롭게 창조하자’는 말로 집약되는 특유의 문학론을 확립하고, 파격적이고 참신한 소품(小品) 산문들을 많이 지었다. 뿐만 아니라 홍대용을 필두로 잇달아 연행(燕行)을 다녀온 박제가 등과 함께,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자 청 나라의 발전상을 깊이 연구하였다.
1778년경 연암은 왕위 교체기의 불안한 정국과 어려운 가정 형편 등으로 인해 개성(開城) 근처인 황해도 금천군(金川郡) 연암협(燕巖峽)으로 은둔했다. 이곳에서 그의 고명을 듣고 찾아온 개성의 선비들을 지도하는 한편, 국내외의 농서(農書)들을 두루 구해 읽고 초록(抄錄)해 두었다. 후일 연암은 이때 초록해둔 것을 바탕으로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저술하게 된다.
1780년(정조 4) 삼종형(三從兄) 박명원(朴明源)이 청 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을 축하하는 특별 사행(使行)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자, 연암은 그의 수행원으로서 숙원이던 연행(燕行)을 다녀왔다. 북경(北京)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번 사행은 사상 처음으로 황제의 별궁이 있던 만리장성 너머 열하(熱河)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당시의 견문을 도도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열하일기》로, 이 책은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면서 연암의 작가적 명성을 한껏 드높여 주었다.
1786년 연암은 음직(蔭職)으로 선공감 감역이 되었다.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나이 쉰 살에 비로소 벼슬길에 나선 것이다. 그 후 평시서 주부, 의금부 도사, 제릉 영(齊陵令), 한성부 판관을 거쳐, 1792년부터 1796년까지 경상도 안의(安義)의 현감으로 재직했다. 이 안의 현감 시절에 연암은 선정(善政)에 힘쓰는 한편으로,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여 주옥같은 작품들을 지었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비판한 「홍범우익서(洪範羽翼序)」, 과부의 순절(殉節) 풍속을 문제삼은 「열녀 함양 박씨전 병서(幷序)」, 장편 한시 「해인사」 등의 걸작들은 모두 이 시기의 소산이다. 그런데 이 시절에 그는 뜻밖에 《열하일기》로 인해 곤경을 겪기도 했다. 《열하일기》의 문체가 정통 고문(古文)에서 벗어난 점을 질책하면서 속죄하는 글을 지어 바치라는 정조의 어명이 내려왔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편승하여 《열하일기》가 오랑캐인 청 나라의 연호(年號)를 쓴 글이라는 비방 여론이 일어났던 것이다.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로 돌아온 연암은 제용감 주부, 의금부 도사, 의릉 영(懿陵令)을 거쳐, 1797년부터 1800년까지 충청도 면천(沔川)의 군수로 재직했다. 면천 군수 시절에 그는 어명으로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를 지어 바쳤다. 이 글은 제주도 사람 이방익이 해상 표류 끝에 중국 각지를 전전하다 극적으로 귀환한 사건을 서술한 것으로서, 정조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연암은 농업 장려를 위해 널리 농서를 구한다는 윤음(綸音)을 받들어 《과농소초》를 진상하였다. 《과농소초》에 대해 정조는 좋은 경륜 문자(經綸文字)를 얻었다고 칭찬하면서 장차 연암에게 농서대전(農書大全)의 편찬을 맡겨야겠다고까지 했으며, 규장각의 문신들 사이에서도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정조가 승하한 직후인 1800년 음력 8월 연암은 강원도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승진했다. 그러나 궁속(宮屬)과 결탁하여 횡포를 부리던 중들을 징치(懲治)하는 문제로 상관인 관찰사와 불화한 끝에 이듬해 봄 노병(老病)을 핑계 대고 사직했다. 1805년(순조 5) 음력 10월 29일 연암은 서울 북촌 재동(齋洞) 자택에서 영면하였다.
연암의 저작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열하일기》와 《과농소초》이다. 이 책들에서 벽돌과 수레 등 청 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적극 수용할 것을 주장하고 선진적인 중국의 농사법과 농기구를 소개했고, 이로 말미암아 연암은 오늘날 조선 후기 북학파(北學派)를 대표하는 실학자로 간주되고 있다.
한편 김택영(金澤榮)의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서는 연암을 중국의 당송팔가(唐宋八家)에 비견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고문가(古文家)의 한 사람으로 꼽았다. 그런데 연암은 고문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소설식 문체와 조선 고유의 속어ㆍ속담ㆍ지명 등을 구사하여 ‘기기(奇氣)’와 ‘기변(奇變)’이 넘치고 민족문학적 개성이 뚜렷한 산문들을 남겼다.
「방경각외전」 중의 「양반전」, 《열하일기》 중의 「호질(虎叱)」과 「허생전」, 그리고 안의 현감 시절 작품인 「열녀 함양 박씨전 병서」 등은 오늘날 한문소설로 간주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연암은 조선후기 소설사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는 비록 과작(寡作)이기는 하지만,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 「해인사」 등과 같이 빼어난 한시도 남겼다. 따라서 연암은 탁월한 자연 묘사를 성취한 시인으로서도 재인식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법고창신(法古創新)’을 핵심으로 한 연암의 문학론은, 시대착오적인 모방을 일삼던 당시의 문풍을 비판하고 당대 조선의 현실을 참되게 그릴 것을 역설한 점에서 근대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문학론의 선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연암집》의 편성과 수록 작품
본서에서 국역 대본으로 삼은 텍스트는 1932년 박영철(朴榮喆)이 편한 활자본 《연암집》이다. 이는 연암의 직계 6대손인 박영범(朴泳範)이 보관해온 필사본 《연암집》을 그 저본(底本)으로 삼았다고 하며, 모두 17권 6책으로 되어 있다.
그중 제 1 권부터 제 10 권까지가 일반 시문이고,
제 11 권부터 제 15 권까지는 《열하일기》,
제 16 권과 제 17 권은 《과농소초》이다.
본서의 국역 대상이 된 일반 시문에 한하여 박영철 편 《연암집》의 편성을 필사본 《연암집》과 비교해 보면 아래와 같다.
박영철 편 《연암집》 | 필사본 《연암집》 |
양식별 특징 | ||
원집(原集) | 제 1 권 |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 제1 ~ 6권 | 각종 산문 |
제 2 권 | 연상각선본 | |||
제 3 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 제7 ~ 10권 | 각종 산문 | |
제 4 권 | 영대정잡영(映帶亭雜詠) | 제 11 권 | 시(詩) | |
제 5 권 | 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 | 제 12 권 | 척독(尺牘) | |
별집(別集) | 제 6 권 |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 | 제 13 권 | 서사(書事) |
제 7 권 | 종북소선(鍾北小選) | 제14 ~ 15권 | 각종 산문 | |
제 8 권 |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 제 16 권 | 전(傳) | |
제 9 권 |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 | 제 56 권 | 각종 산문 | |
제 10 권 |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 | 제 57 권 | 각종 산 |
박영철 편 《연암집》에서 근간을 이루는 부분은 제 1 권에서 제 3 권까지에 해당하는 「연상각선본」과 「공작관문고」라고 할 수 있다. 연암의 초기작부터 만년작까지 망라하여 전체 산문의 절반이 넘는 글들이 여기에 정선(精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더욱 핵심적인 부분은 「연상각선본」이다.
연상각(煙湘閣)은 연암이 안의 현감 시절에 세운 정각(亭閣)의 하나였다. 안의 현감으로 갓 부임한 때인 1793년, 연암은 정조로부터 《열하일기》로 인해 문풍(文風)의 타락을 초래한 잘못을 속죄하는 뜻에서 순정(純正)한 문체로 글을 지어 바치라는 하교를 받았다.
이에 그는 새로 글을 지어 바치는 대신 구작(舊作)에서 고른 약간 편과 안의에서 지은 글 몇 편을 합쳐 몇 권의 책자로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장차 정조에게 진상할 목적으로 연암 자신이 정선한 글들만을 모은 자찬(自撰) 문집이 바로 「연상각선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은 「연상각선본」과 유사한 성격의 필사본 선집들을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즉 《연상각집(煙湘閣集)》, 《운산만첩당집(雲山萬疊堂集)》, 《하풍죽로당집(荷風竹露堂集)》 등은 판심(版心)에 ‘연암산방(燕岩山房)’이라 찍힌 사고지(私稿紙)를 사용하고 있어 연암 집안의 가장본(家藏本)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러한 필사본 선집에 수록된 글들은 《열하일기》에서 뽑은 5편의 글을 제하면 모두 「연상각선본」의 수록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짐작건대 연암은 《열하일기》의 일부도 포함한 자찬본(自撰本)을 만들어 두었으나, 그의 사후에 문집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열하일기》를 별도로 포함함에 따라 「연상각선본」에서 《열하일기》 중의 글들은 배제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연암의 처남이자 지기(知己)였던 이재성(李在誠)이 「연상각선본」과 아울러 「공작관문고」에만 평어(評語)를 남긴 점으로 미루어, 「공작관문고」 역시 연암의 작품 중 정수(精髓)를 모아 놓은 부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연상각선본」에는 모두 32편의 글에 대해 이재성의 평어가 있는 데 비해, 「공작관문고」에는 단 3편의 글에 대해서만 평어가 있다. 「공작관문고」에는 연암이 십대 소년인 1755년에 지은 「영목당 이공에 대한 제문〔祭榮木堂李公文〕」에서부터 노년인 1801년 양양 부사로서 강원도 관찰사에게 올린 편지까지 상당한 시차를 둔 작품들이 두루 섞여 있는 점이 특색이다.
또한 「공작관문고」의 자서(自序)와 동일한 글인 「공작관집서(孔雀館集序)」가 《겸헌만록(謙軒漫錄)》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글을 지은 시기가 ‘기축(1769)’년으로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원래 「공작관문고」에는 「청향당 이선생 묘지명(淸香堂李先生墓誌銘)」과 「죽각 이 선생 묘지명(竹閣李先生墓誌銘)」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연암 손자 박규수가 필사본에 붙인 두첨(頭籤)에 의하면 이는 이재성의 글이 잘못 편입된 것이어서, 박영철 편 《연암집》에서는 제외했다고 한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아마도 연암이 중년 이전에 자찬(自撰)한 《공작관집(孔雀館集)》이 있었는데, 거기에다 연암의 만년작들까지 포함하여 「연상각선본」에 수록되지 못한 작품들을 합쳐서 개편한 것이 곧 「공작관문고」가 아니었던가 한다. 이재성의 평어가 단 세 군데에 그치고 있고 그의 글 2편이 혼입되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공작관문고」는 이재성이 별세한 1809년 이후의 어느 시기에 편찬된 듯하다.
이와 같이 《연암집》의 근간을 이루는 「연상각선본」과 「공작관문고」에다, 연암의 시만을 모은 「영대정잡영」, 중년 이전의 짧은 편지들만을 모은 「영대정잉묵」, 1797년경 정조의 어명으로 지은 독립된 저술 「서이방익사」, 주로 중년에 지은 소품 산문들을 모은 「종북소선」, 그리고 오늘날 한문소설로 간주되는 그의 초기 전(傳) 9편을 모은 「방경각외전」이 합쳐져서, 1차로 문집이 완성되었던 듯하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朴宗采)가 선친의 언행을 기록한 《과정록(過庭錄)》을 지은 뒤 1831년에 쓴 추기(追記)에, 《열하일기》와 《과농소초》를 제외한 연암의 문고(文稿)는 모두 ‘16권’이라고 하였다. 위의 표에서도 보듯이, 이는 곧 필사본으로 제 16 권인 「방경각외전」까지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반당비장」과 「엄화계수일」은 각각 연암의 은거지에 있던 ‘고반당’이란 집과 ‘엄화계’란 시내의 이름을 취한 것이다. 또한 박종채가 문집에 붙인 안설(按說)이 모두 일곱 군데 있는데, 그중 「엄화계수일」에 마지막으로 수록되어 있는 「원사(原士)」 한 군데에만 자신의 초명(初名)인 ‘종간(宗侃)’을 적지 않고 ‘종채’라 적어 놓았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고반당비장」과 「엄화계수일」은 아마도 박종채가, 《과정록》에 추기를 쓴 1831년부터 그의 몰년인 1835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황해도 금천 연암협에 남아 있던 선친의 유고를 마저 수습하여 문집에 최후로 추가한 것이 아닌가 한다.
박영철 편 《연암집》은 위와 같은 경위로 만들어져 후손가에 보관되어 온 필사본 《연암집》을 모두 6책의 활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이 《연암집》을 편찬하면서 종종 임의로 개작했던 것과 달리, 박영철본이 필사본의 원문을 존중하여 함부로 고치지 않은 점은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원문 판독이나 인쇄 과정에서 발생한 오자ㆍ탈자가 적지 않고, 필사본 원문 자체의 오류가 시정되어 있지 않으며, 필사본의 편차를 그대로 따른 결과 편차가 정연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점 등 일부 문제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박영철 편 《연암집》에 수록된 연암의 시문을 양식별로 분류하고 괄호 안에 작품의 편수를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연암의 글인지, 독립된 작품인지, 어떤 양식으로 분류할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는 별도의 설명을 붙였다.
① 序(30) : 序(20)/ 自序(3)/ 引(1)/ 贈序(3)/ 送序(2)/ 壽序(1)
② 記(35)
* 「안의현 여단 신우기(安義縣厲壇神宇記)」(권1)는 본래 박제가(朴齊家)가 연암의 부탁으로 대신 지은 글이다. 박제가가 지은 원본은 그의 문집에 「여단기(厲壇記)」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그런데 「안의현 여단 신우기」를 이 원본과 대조해 보면 연암이 박제가의 글에 상당한 손질을 가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안의현 여단 신우기」를 연암의 글로 간주해도 무방하다고 보아 작품 편수에 넣었다.
③ 跋(12) : 跋(3)/ 題跋(7)/ 書後(2)
* 「광문전 뒤에 쓰다〔書廣文傳後〕」(권8) 외에 「이몽직 애사(李夢直哀辭)」(권3)의 후기(後記)도 1편의 서후(書後)로 간주하였다. 《연암집》 목록에서 그 제목 아래에 “서후를 붙였다〔書後附〕”고 밝히고 있을 뿐더러, 이 작품의 본보기가 된 한유(韓愈)의 「구양생 애사(歐陽生哀辭)」에도 별도로 「애사 뒤에 쓰다〔題哀辭後〕」가 있기 때문이다.
④ 書牘(101) : 書(52)/ 尺牘(49)
⑤ 傳狀(14) : 傳(8)/ 行狀(1)/ 家狀(1)/ 事狀(3)/ 諡狀(1)
*「방경각외전」(권8) 중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과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은 실전(失傳)이라 작품 편수에서 제외했다.
⑥ 碑誌(18) : 墓誌銘(5)/ 墓碣銘(9)/ 墓表陰記(1)/ 神道碑(1)/ 紀蹟碑(1)/ 塔銘(1)
⑦ 哀祭(11) : 祭文(6)/ 進香文(2)/ 哀辭(3)
⑧ 論說(5) : 論(4)/ 說(1)
⑨ 奏議(7) : 疏(2)/ 狀啓(2)/ 報牒(2)/ 對策(1)
*「순찰사에게 답함〔答巡使書〕」(권2)의 부록인 「감사 자핵소 초본〔監司自劾疏草〕」을 독립된 1편의 소(疏)로 간주했다. 「감사 자핵소 초본」은 김택영의 《중편(重編)연암집》에도 「경상 감사를 대신하여 지은 자핵소〔代慶尙監司自劾疏〕」라는 제목으로 별개의 글로 수록되어 있다.
*「순찰사에게 올림〔上巡使書〕」(권2)의 부록 「병영에 올린 보첩의 초본〔兵營報草〕」과 「순찰사에게 올림〔上巡使書〕」(권3)의 부록 「보첩의 초본(報草)」을 각각 독립된 1편의 보첩(報牒)으로 간주하였다.
*「주금책(酒禁策)」(권3)은 실전(失傳)이라, 작품 편수에서 제외했다.
⑩ 雜著(3)
*「원사(原士)」(권10)와 아울러, 「원도에 대해 임형오에게 답함〔答任亨五論原道書〕」(권2)에서 덕성이기(德性理氣)를 논한 부록과, 「순찰사에게 올림〔上巡使書〕」(권2)에서 사학원위(邪學源委)를 논한 부록도 별개의 잡저(雜著)로 간주하였다.
⑪ 書事(1) : 권5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
⑫ 詩(42) : 권4 「영대정잡영(映帶亭雜詠)」 32제(題)
위와 같이 계산하면 《연암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통틀어 시(詩) 42수, 문(文) 237편이다.
4. 원문 교감과 주해 작업
본서가 목표로 한 전문적 학술 번역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연암집》의 이본(異本)들을 널리 수집ㆍ검토하여 신뢰할 수 있는 교감본(校勘本)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종전의 국역서들처럼 어구 풀이에 그치지 않고, 창작 시기나 창작 배경, 작품들의 상호 관계, 난해하거나 심오한 의미를 지닌 대목들에 대한 해명 등 작품 해석에 긴요한 내용까지 충실히 주해(註解)해야 할 것이다.
《연암집》의 주요 이본으로는 다음과 같은 활자본 4종과 필사본 6종이 알려져 있다.
〈활자본〉
○ 김택영 편, 《연암집》(1900) : 선집(選集)으로 6권 2책이다.
○ 김택영 편, 《연암속집(燕巖續集)》(1901) : 선집으로 3권 1책이다.
○ 김택영 편, 《중편(重編)연암집》(1917) : 선집으로 7권 3책이다.
○ 박영철 편, 《연암집》(1932) : 전집(全集)으로 17권 6책이다.
〈필사본〉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승계문고본(勝溪文庫本) : 전집이나 총 57권 22책 중 2권 1책이 빠졌다.
○ 숭실대 소장 자연경실본(自然經室本) : 전집이나 11책만 남아 있다.
○ 연세대 소장본 : 전집이나 7책만 남아 있다.
○ 영남대 소장본 : 전집이나 8책만 남아 있다.
○ 연암 후손가 소장 《연상각집》 : 1책. 서(序)와 기(記) 27편을 수록했다.
○ 연암 후손가 소장 《운산만첩당집》 : 1책. 33편의 글을 수록했다.
이러한 주요 이본들에 관해서는 김혈조(金血祚) 교수가 「연암집 이본에 대한 고찰」(한국한문학회, 《한국한문학연구》 17, 1994)에서 자세히 검토한 바 있으며, 본서에서는 그 연구 결과를 원문 교감에 요긴하게 활용하였다. 다만 그 연구에서도 이본 간의 차이를 간과한 경우가 간혹 있고, 서로 차이 나는 경우에 시비(是非) 판단을 내리지 않았으며, 원문 자체가 잘못된 결과 이본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오류 등은 적시(摘示)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서에서는 그러한 한계를 보완하고, 나아가 아래와 같은 여러 문헌들을 추가로 참고하여 더욱 철저한 원문 교감을 하고자 하였다.
○ 《병세집(幷世集)》 : 윤광심(尹光心) 찬(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연암의 시 2수와 문(文) 11편을 수록했다.
○ 《종북소선(鍾北小選)》 : 연암 후손가 소장. 1책. 「서(叙)」를 포함하여 연암의 글 11편을 수록했다.
○ 《연암제각기(燕岩諸閣記)》 : 서울대 소장. 1책. ‘연암산방(燕岩山房)’ 사고지(私稿紙)를 사용했으며, 연암의 글 7편을 수록했다.
○ 《백척오동각집(百尺梧桐閣集)》 : 장서각(藏書閣) 소장. 1책. 연암의 글 15편을 수록했다.
○ 《하풍죽로당집(荷風竹露堂集)》 : 성균관대 소장. ‘지(地)’ 1책. ‘연암산방’ 사고지를 사용했으며, 연암의 글 41편을 수록했다.
○ 《연상각집(煙湘閣集)》 : 성균관대 소장. 1책. ‘연암산방’ 사고지를 사용했으며, 연암이 지은 비지(碑誌) 11편을 수록했다. 말미에 「문고 보유목록(文稿補遺目錄)」과 「열하일기 보유목록(熱河日記補遺目錄)」이 있어 주목된다.
○ 《연암집(燕巖集)》 : 성균관대 소장. 1책. 산고(散稿)로서, 「여릉 참봉 왕군 묘갈명(麗陵參奉王君墓碣銘)」 「운봉 현감 최후 묘갈명(雲峰縣監崔侯墓碣銘)」 「백수 이 공인 묘갈명(伯嫂李恭人墓碣銘)」 3편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이본들에는 일실(逸失)된 「여릉 참봉 왕군 묘갈명(麗陵參奉王君墓碣銘)」의 명사(銘辭)가 보존되어 있는 등 자료적 가치가 적지 않다.
○ 《동문집성(東文集成)》 : 송백옥(宋伯玉) 찬. 연암의 글 26편을 수록했다.
○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 : 김택영 편(1921). 연암의 글 17편을 수록했다.
이 밖에 《모초재실기(慕初齋實紀)》, 《나은선생문집(羅隱先生文集)》 등, 연암의 글이 단 1 ~ 2편이라도 실려 있는 다수의 문헌들을 찾아서 원문 교감에 참고하였다.
이상과 같이 철저한 원문 교감을 한 위에서, 본서에서는 가급적 충실하고 친절한 주해를 달고자 하였다. 본서의 주해에서 특별히 힘을 기울인 점을 밝히고, 아울러 그에 해당하는 사례를 하나씩만 들면 아래와 같다.
(1) 이본들 간의 차이에 대해 시비를 판단하고자 했다.
「소완정의 하야방우기에 화답하다〔酬素玩亭夏夜訪友記〕」( 제 3 권) 중 연암의 자찬(自讚)에 ‘鼓琴似子桑□戶 著書似揚雄’으로 1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영남대본ㆍ승계문고본ㆍ연세대본ㆍ김택영본 등에는 공백 없이 ‘鼓琴似子桑戶’로 되어 있다. 이러한 이본 간의 차이에 대해 본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해를 달았다.
자상호(子桑戶)는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인물로, 그가 죽자 막역지우인 맹자반(孟子反)과 자금장(子琴張)이 그의 시신을 앞에 두고서 편곡(編曲)하거나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상호가 거문고를 탔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는 같은 대종사에 나오는 자상(子桑)과 혼동한 결과인 듯하다. 즉 자상의 벗 자여(子輿)가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자상은 거문고를 타면서 자신의 지독한 가난을 한탄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하였다. 원문의 ‘鼓琴似子桑□戶’를 그 다음 문장과 연결시켜서 ‘鼓琴似子桑 □戶著書似揚雄’으로 구두를 떼고 누락된 글자를 ‘閉’로 추정하여 ‘鼓琴似子桑 閉戶著書似揚雄’으로 판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찬의 문장들이 대개 ‘□□似□□’의 5자구(字句)를 취하고 있는 점과 어긋난다. 또한 소순(蘇洵)이 ‘폐호독서(閉戶讀書)’한 사실은 있어도 양웅이 ‘폐호저서(閉戶著書)’했다는 기록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子桑戶’의 ‘戶’는 역시 연자(衍字)로 보아야 할 것이다.(《국역 연암집》 1 325쪽)
(2) 이본들의 공통된 오류로서 필사 또는 인쇄상의 오자ㆍ탈자ㆍ연문(衍文)ㆍ연자(衍字) 등을 지적하였다.
「창애에게 답함〔答蒼厓〕」(제 5 권) 두 번째 편지의 첫머리 ‘還他本分’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해하였다.
이는 ‘還守本分’의 잘못이다. 초서로 ‘守’ 자가 ‘他’ 자와 비슷하여 잘못 판독한 듯하다. 이 편지의 말미에 ‘守分’이라는 유사한 표현이 다시 나오고, 김병욱(金炳昱)의 「곡망자묘문(哭亡子墓文)」에도 “이제부터는 출세길에서 일찍 물러나 본분으로 돌아가 이를 지키고 싶을 뿐이다.〔惟願從今以後 早謝名途 還守本分〕”라는 예가 있다. 《磊棲集 卷4》
(3) 이본들의 공통된 오류로서 원문 자체가 잘못된 경우, 즉 저자가 인명ㆍ지명ㆍ서명ㆍ원전(原典) 인용 등에서 범한 실수를 바로잡았다.
「순찰사에게 답함〔答巡使書〕」(제 2 권) 첫 번째 편지의 부록에서 잘못된 사항들을 바로잡고 자세한 주해를 달았다. 사학(邪學)의 본말을 논한 부록 중 제 5 조에서 연암은 선우(單于)가 안문(雁門)의 위사(尉史)를 ‘천주(天主)’로 삼았으며 이것이 ‘천주’란 말이 쓰인 최초의 사례라고 하였다. 이는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8 한기(漢紀) 10 세종 효무황제(世宗孝武皇帝) 원광(元光) 2년 조의 기사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나 《자치통감》의 해당 기사와, 그것의 전거가 되는 《사기(史記)》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ㆍ흉노열전(匈奴列傳)이나 《전한서(前漢書)》 흉노열전 등을 보면, 모두 선우가 안문의 위사를 ‘천왕(天王)’으로 삼았다고 했지 ‘천주’로 삼았다고는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연암은 《자치통감》에 의거한 결과, 부록 제 6 조에서 인명인 ‘옹유조(雍由調)’를 ‘옹곡조(雍曲調)’로, 부록 제 8 조에서 인명인 ‘복고돈(伏古敦)’을 ‘복명돈(伏名敦)’으로 적는 오류를 답습했다. 또한 같은 제 8 조에서 인명인 ‘후려 능씨(候呂陵氏)’를 ‘후릉 여씨(候陵呂氏)’로 잘못 적었다. 본서에서는 주해와 원문 각주에서 이상의 사실들을 지적하고 본문에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4) 필요한 경우 창작 시기나 창작 배경, 소재와 주제 등에 대해서도 해설하여 작품 감상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주공탑명(麈公塔銘)」(제 2 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해하였다.
‘주(麈)’가 원문에는 ‘규(𪊧)’로 되어 있는데, 오자이다. 규(𪊧)는 사슴의 일종이고, 주(麈)는 고라니에 속하여 서로 다르나 글자가 비슷해서 혼동하기 쉽다. 주(麈)는 사슴보다 몸집이 훨씬 크고 그 꼬리가 움직이는 대로 뭇 사슴들이 따라간다고 해서 사슴 중의 왕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왕중왕(王中王)을 ‘주중주(麈中麈)’라 한다. 또한 그 꼬리인 주미(麈尾)는 고승이 설법할 때 번뇌와 어리석음을 물리치는 표지로서 손에 쥐는 불자(拂子)로 쓰이는데 이를 승주(僧麈)라 한다. 이 글은 연암의 젊은 시절 작품으로, 그 시절 연암과 절친했던 김노영(金魯永 : 1747 ~ 1797)이 이를 애송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연암의 처조카인 이정리(李正履 : 1783 ~ 1843)는 이 글을 불교를 배척하는 작품이라 보았고, 아들 박종채가 이 글을 어느 노승에게 보였더니 그 노승 역시 불교를 배척하는 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過庭錄 卷4》 아울러 그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도 이 글은 실존했던 고승의 사리탑에 대한 명(銘)이 아니라, 승주(僧麈)를 의인화(擬人化)한 이름의 가상적인 고승을 설정하고 그에 대한 탑명(塔銘)의 형식을 빌어 불교를 비판한 희작(戱作)이 아닐까 한다.(《국역 연암집》 1 290쪽)
(5) 내용이 난해하거나 심오하여 오역하기 쉬운 대목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해석의 근거를 밝혔다.
「원도에 대해 임형오에게 답함〔答任亨午論原道書〕」(제 2 권)에서 출전이 명시되지 않은 경우까지 포함하여 일일이 원전의 출처를 밝히고 해설해 두었다. 이를테면 “馬牛之起櫪也 圓蹄先前 耦武先後”라는 구절에 대해 “말과 소가 마구간에서 일어설 때 말은 앞발을 먼저 일으키고 소는 뒷발을 먼저 일으킨다.”라고 번역하고, 다음과 같이 주해하였다.
원제(圓蹄)는 발굽이 둥근 말을 가리키고 우무(耦武)는 발굽이 둘로 갈라진 소를 가리킨다. 《조화권여(造化權輿)》에 말은 양물(陽物)이라 발굽이 둥글고 일어설 때 앞발을 먼저 일으키며〔起先前足〕, 소는 음물(陰物)이라 발굽이 갈라졌고 일어설 때 뒷발을 먼저 일으킨다〔起先後足〕고 하였다. 《周易玩辭 卷15 馬牛》(《국역 연암집》 1 147쪽)
(6) 종전의 번역서들에서 답습하던 해석상의 오류들을 철저히 바로잡고자 했다.
「양반전」(제 8 권)에서 양반이 지켜야 할 예의 범절을 나열한 대목 중 “漱口無過”에 대해, 종전에는 ‘양치질할 때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이에 대해 ‘냄새 없게 이를 잘 닦아야 한다’로 번역하고 다음과 같이 주해하였다.
입냄새를 ‘구과(口過)’라 한다.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송지문(宋之問)이 재주 있는 시인임을 알았으나 그의 입냄새가 심한 것을 싫어하여 기용하지 않았다고 한다.(《국역 연암집》 2 241쪽)
5. 맺음말
본서의 번역 대본이 된 박영철 편 《연암집》은 연암의 전(全) 저술을 모아 최초로 공간한 점에서, 편자의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원문 판독이나 인쇄 과정에서 적지 않은 오류를 범했을 뿐더러, 실은 여기에도 누락된 연암의 작품들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러한 작품들을 발굴하여 보완하는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연암집》의 보유편(補遺篇)을 만들고 이를 마저 번역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로 남아 있다. 또한 그와 아울러, 필사본의 편차를 답습한 결과 혼란스러운 박영철 편 《연암집》의 편성을 해체하여, 연암의 전 작품들을 양식과 창작 순서에 따라 정연하게 재편성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이제 연암의 시문에 대한 완역이 이루어진 만큼, 학계의 연암 연구도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국역 연암집》 1ㆍ2의 출간을 계기로, 종래와 같이 어느 일면에 치우치거나 국한되지 않고 연암 문학의 총체적인 실상(實相)을 다각도로 밝히는 연구 논저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2005년 12월 16일
ⓒ 한국고전번역원 | 김명호(金明昊) | 2005
[출처] 《연암집(燕巖集)》 해제(解題) - 김명호 |작성자 상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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