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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9권 별집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9권 별집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9권 별집 고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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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9권 별집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9권 별집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

 

1 조부 자헌대부(資憲大夫)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증시(贈諡) 장간공(章簡公) 부군(府君) 가장(家狀)

2 승지 증() 이조 판서 나은(懶隱) 이공(李公) 시장(諡狀) 사신(詞臣) 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3 예조 참판 증 영의정 부군(府君) 묘표음기(墓表陰記) 금성위(錦城尉 : 박명원朴明源)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4 문효세자(文孝世子) 진향문(進香文) 의빈(儀賓) 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5 정종대왕(正宗大王) 진향문(進香文)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6 양 경리(楊經理) () 치제문(致祭文) 사신(詞臣)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7 형 상서(邢尙書) () 치제문(致祭文)

8 연분(年分) 가청(加請) 장계 감사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무오년(1798, 정조 22)

9 연분 가청 장계 정사년(1797, 정조 21)에 감사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10 둔암집서(遯庵集序) 남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11 공손앙(公孫鞅)이 진() 나라에 들어가다

 

 

 

조부 자헌대부(資憲大夫)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증시(贈諡) 장간공(章簡公) 부군(府君) 가장(家狀)

 

부군의 휘는 필균(弼均), 자는 정보(正甫), 초휘(初諱)는 필현(弼賢)이다. 우리 박씨는 계통이 신라에서 나왔으며, 나주(羅州)의 반남현(潘南縣)에서 성()을 얻어 반남인이 되었다.

고려 공양왕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낸 휘 상충(尙衷)이 맨 먼저 상소를 올려 명() 나라를 받들 것을 청하였는데 그 사실이 고려사 본전(本傳)에 실려 있으며, 우리 왕조에서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추증하였다. 문정공의 아들 휘 은()은 우리 태종대왕을 도와 좌의정에 올랐고 시호가 평도(平度)이다. 여러 대를 지나 휘 소()는 사간(司諫)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인데, 세상 사람들이 야천선생(冶川先生)이라 불렀으며 부군에게는 6세조가 된다. 휘 응복(應福)을 낳았는데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고조(高祖)는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휘 동량(東亮)인데, 공훈을 세워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증조(曾祖)인 금양위(錦陽尉) 휘 미()는 선조(宣祖)의 제 5 녀 정안옹주(貞安翁主)에게 장가들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요, 조부는 첨정(僉正)을 지낸 휘 세교(世橋)인데 이조 판서 금흥군(錦興君)에 추증되었다. ()의 휘는 태길(泰吉)인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종숙부 문순공(文純公) 세채(世采)에게 사사(師事)하였고 뛰어난 행실로 명성이 사우(士友)들 사이에 자자하였으나 일찍 졸()하였다. ()는 칠원 윤씨(漆原尹氏) 진사 선적(宣績)의 따님으로서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부군은 숙종 11년 을축년(1685) 정월 1일에 태어났다. 다섯 살에 부친을 여의고 중부(仲父)인 교리공(校理公) 태만(泰萬)도 곧이어 졸하였으므로 부군은 종형(從兄)인 금녕군(錦寧君) 필하(弼夏)에게 양육을 받았는데, 금녕군의 아들인 판서공(判書公) 사익(師益)과 참판공(參判公) 사정(師正)이 모두다 부군보다 나이가 많았다. 부군이 어려서 학문을 시작하여 약관에 이르러서는 경사(經史)를 널리 통하였는데, 이는 모두 그들을 따라 배운 덕분이었다.

금녕군이 오랫동안 담화병(痰火病)을 앓던 중에도 부군을 사랑한 것은 유독 지성(至性 극히 선량한 성품)에서 나온 것이었다. 병이 심하게 되자 발자국 소리와 문소리를 특히 싫어하였으나 부군의 발소리와 문 여닫는 소리만은 탓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군이 그 안색을 먼저 살핀 다음에 아들들을 데리고 와 뵙게 하였으며, 아들들이 매일 밤늦은 시각에 땔감을 가지고 아궁이 앞에 서 있다가 부군이 몰래 전하는 기침 신호를 받은 뒤에야 감히 불을 지피곤 하였다. 혹 그 틈을 얻지 못하면 날이 차고 눈이 얼어붙어도 문 안팎에서 함께 날을 새며 서로 가엾이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무릇 이와 같이 하기를 8, 9년이 되도록 하루같이 하였다. 그래서 판서공 형제는 부군의 은덕이 골육보다 낫다고 감격해하였으며, 부군이 비단 양육해 준 이에게 효도를 실천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효를 실천하도록 만들어 주기까지 한 것을 온 집안이 모두 칭송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대부들 사이에 언론이 서로 엇갈려 각각 자기가 어질게 여기는 이를 스승으로 삼아, 비록 한집안일지라도 지향하는 바가 동일하지 않으면 나가는 길이 서로 달라지곤 하였다. 부군의 사촌 형제 수십 명 중에 부군의 나이가 가장 적었지만 명론(名論 명분론)은 가장 고명하였다. 종형 여호선생(黎湖先生) 필주(弼周)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는, 장차 한강 밖으로 은둔할 계획으로 부군의 어린 아들을 데려다 양자를 삼고 가사(家事)를 모두 부군에게 맡기면서 출처(出處 벼슬길에 나서는 문제)로써 부군을 권면하여 말하기를,

 

나는 죄를 짊어지고 태어난 몸이라  선생이 태어나자마자 모부인(母夫人)이 첫 국밥도 들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세상에 나갈 뜻을 끊고 지냈는데 지금 허명(虛名)으로 자신을 그르치게 되었으니, 부득불 한강을 경계로 삼아 그 너머에서 몸을 마치려 하네. 우리 아우는 재주나 학식이 모두 넉넉한데도 평생토록 과거를 보지 않고 있으니 장차 어떻게 몸과 집안을 일으킬 작정인가?”

하니, 부군은 썩 즐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천하의 의리가 무궁하다지만 끝내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것은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조야(朝野)에서 이익을 농단(壟斷)하려는 사람이 많지만 만약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을 잘못 끌어들여 이익을 독점하려고 한다면 우리 집안의 의론(議論)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우리 집안의 양대(兩代) 비갈(碑碣)은 대로(大老 송시열(宋時烈))께서 지은 것이요, 우리 중부(仲父 박태만(朴泰萬))께서 청한 것입니다. 우리 중부께서 불행히 세상을 일찍 떠나셨으나, 예전부터 팔학사(八學士)의 칭호를 받았는데 세상에서 국시(國是)를 어기는 자들이 멀리서 받들어 존중하였으니, 이를 어찌 변론하여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남구만(南九萬)과 유상운(柳尙運)이 각자 제 몸을 위하는 꾀를 내어 사론(邪論)을 주창했으니 이는 진실로 해독을 백세에 끼칠 것입니다. 그런데 유상운은 우리 집안의 외손이므로 그에 연루되어 점차 물들고 있으니,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을 끊지 않는다면 이 어찌 우리 집안의 큰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한 집안의 명론(名論)이 진실로 바르게 된다면, 내가 과거 보는 것이 아무리 늦더라도 다시 무엇을 한스럽게 여기겠습니까.”

하였다. 급기야 경종(景宗) 초년에 남구만과 유상운의 무리가 크게 무옥(誣獄)을 일으켜 건저(建儲)한 여러 대신을 죽이고 사류(士類)들을 마구 없애자 부군은 통진(通津)의 묘소 아래 은거하였다.

영종(英宗) 원년 을사년(1725)에 비로소 정시(庭試)에 응시하여 병과(丙科)에 들었으니, 이때 나이 벌써 41세였다. 대개 한 번의 응시로 급제하는 경우는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이해에 왕세자를 책봉하고 시강원(侍講院)의 요속(僚屬)들을 엄선하였는데, 참하관(參下官 7품 이하 관원)은 청망(淸望)으로서 겸함(兼銜)을 더욱 중히 여겼다. 이때 부군은 아직 분관(分館)이 되지 못하였는데도 상례(常例)를 뛰어넘어 특별히 겸설서(兼說書)에 제수되었고, 얼마 후 한림(翰林 예문관)에 천거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가 대교(待敎)에 올랐다.

병오년(1726)에 모친 윤부인(尹夫人)의 상을 당하여 삼년복을 마치고, 도로 한림에 들어와 봉교(奉敎)로 올랐다. 무신년(1728) 이전에 제수받은 것은 다 구명(舊名 필현(弼賢))으로 받은 것이고 봉교 이하의 관직부터는 지금 이름으로 받은 것이다.

기유년(1729) 경종실록(景宗實錄)이 완성되자 4월에 적상산 사고(赤裳山史庫)에 수장하고 이어 선조(先朝 경종(景宗))의 사첩(史牒)을 고출(考出)하였다. 임금이 한림을 새로 추천할 것을 재촉하여, 부군이 추천을 맡는 것을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혹자가 김약로(金若魯)를 넣어 달라고 부탁하자 부군이 말하기를,

 

내가 예전에 김사직(金士直 김약로의 아버지 김유(金楺))을 조상(弔喪)하였는데 여러 아들 가운데 눈이 붉은 자가 있더니 이자가 바로 그자인가?”

하였다. 분향고사(焚香故事)에 추천을 맡은 자는 추천장을 소매에 넣고 한림의 선배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는데, 예문관에 소속된 하인이 먼저 문으로 들어가 소리 높여 손님을 물리치라고 하면, 아무리 대관(大官)이라도 전에 검열을 지낸 사람이 아니면 으레 다 자리를 피해야 한다. 그리하여 찾아온 사람과 주인이 처음부터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채 새 추천장을 꺼내 보여 털끝만큼의 하자도 지적되지 않은 다음에야 비로소 완천(完薦 추천 완료)이 되었으니, 그 엄격함이 이와 같았다. 이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중히 여긴 까닭이다.

이때에 문벌(門閥)과 재학(才學)이 막상막하인 자가 오륙 명이었는데 급기야 신만(申晩)과 윤급(尹汲)을 한원(翰苑 예문관)에 추천해 들이자, 온 세상이 떠들썩하여 모두 부군을 허물하며 오로지 외모만 취하였다.’ 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관옥(冠玉)같이 아름다운 자라고 해서 반드시 내실을 갖춘 것은 아니다.’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어찌 그리 기탄이 없는 것이 그렇게도 제 외숙을 닮았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부군을 위하여 걱정하며 눈이 붉은 자가 두렵다.’ 하더니, 마침내 이것이 구실이 되어 원망하는 뭇사람 중에 김약로가 특히 심하였다. 얼마 안 가서 마침내 대간(臺諫)의 진언(進言)으로 추천이 폐기되었고 부군은 이로 인하여 삭직되었다가, 곧 서용(敍用 복직)되어 6품에 올랐다. 경술년에 비로소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이전에 임금이 새로 즉위하자 제일 먼저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 등 여러 역적을 베고 네 충신을 위하여 사당을 세웠는데 두어 해가 못 가서 저쪽 사람들이 다시 국권을 잡게 되어 네 충신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였으니, 이를 정미진퇴(丁未進退 정미환국)라 한다. 무신역변(戊申逆變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있은 이후로 구신(舊臣)들을 거두어 서용하여 차츰차츰 조정에 다시 서게 하였지만, 이로부터 충역(忠逆)이 뒤섞이게 되고 시비(是非)가 똑같아지는 등 당파 간의 조정(調停)에만 힘을 쏟아 마침내 탕평책(蕩平策)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충민공(忠愍公)과 충익공(忠翼公)의 관작만을 회복시키고 충헌공(忠獻公)과 충문공(忠文公)은 죄안(罪案) 속에 그대로 두었음에도 그 원통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없더니, 부군이 상소를 올려 극언하기를,

 

두 신하가 신원(伸寃)되지 못하면 성상(聖上)에 대한 무고도 씻을 수 없고, 뭇 흉적(凶賊)을 그대로 키우면 임금의 원수 역시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한() 나라와 역적은 양립하지 못한다는 것은 의리가 본시 두 가지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네 신하는 바로 한 몸인데, 반은 신원이 되고 반은 신원이 되지 않아 두 갈래로 나눠진다면, 이는 비유컨대 중풍을 앓는 사람이 몸의 반만 마비가 되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불인(不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이 이를 남의 일 보듯이 하여 조금도 구제하려 하지 않으니 그 불인이 너무 심하다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하시고 싶은 일이 어찌 나라의 원칙을 세우는 정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시비(是非)를 전도시키고 억지로 호대(互對)를 찾고 있으니, 이는 이른바 그 뿌리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그 끝만 맞추려는 것입니다. 나라의 원칙을 세우는 일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관직을 임명하고 토죄(討罪)를 명하는 것이 올바른 천리(天理)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마침내 사의(私意)를 면하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본원(本源)을 다지는 입장에서 만약 이 병폐를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리 잘 다스리고자 하여도 아마 그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런데 장령(掌令) 윤흥무(尹興茂)가 이를 두고 부군이 당을 비호한다고 질책하면서 삭직을 요청하는 계사(啓辭)를 올렸다. 신해년(1731)에 비로소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소명(召命)을 어겼다는 죄로 파직되었다가 7월에 다시 정언에 제수되자 상소를 올리기를,

 

선왕(先王 경종(景宗))께서 병이 있으시고 후사마저 없으므로 당시 대신들이 선왕의 수필(手筆)을 받들고 자성(慈聖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언교(諺敎 언문 교서)를 받들어 종사(宗社)를 위하여 왕세제를 세웠으니 이는 대신으로서 해야 할 정상적인 직임인데, 불행히도 세도(世道)가 뒤바뀌어 새 죄안(罪案)을 억지로 첨가했으니, 어찌 거듭 원통할 일이 아니리까. 신이 지난번 상소에서 신원을 청한 것은 온 나라의 공통된 정론(正論)인데, 윤흥무가 갑작스레 당을 비호한다 일렀으니, 그가 비록 감히 그 일을 바로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동과 언사에서 그 정상이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특명으로 상소를 돌려주고, 소명을 어긴 죄로 파직시켰다.

임자년(1732)에 용인 현령(龍仁縣令)으로 나갔으며, 계축년(1733)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선발되었다가 교리로 승진하였고, 또 옮겨서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가 도로 수찬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다 취임하지 않았다. 시강원(侍講院)의 사서(司書), 겸사서(兼司書), 문학(文學), 보덕(輔德)을 지내고, 그 사이에 학교수(學敎授 사학(四學)의 교수), 별겸춘추(別兼春秋), 훈국랑(訓局郞 훈련도감의 낭관(郎官)),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맡았다.

경신년(1740)에 부응교(副應敎)에 제수되고 그해 6월에 효종(孝宗)의 휘호(徽號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할 때 대축(大祝 축관의 우두머리)의 직임을 맡은 노고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제수받았다. 8월에 임금이 존호를 받을 때 예방승지(禮房承旨)를 맡은 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고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9월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제수되고, 10월에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병조 참판으로 옮겼다.

신유년(1741) 8월에 지방관으로 나가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가 되었는데, 임금이 능()을 알현하고 돌아오는 길에 고양(高陽)에 이르러 궁시(弓矢)와 호피(虎皮)를 하사했다. 10월에 당시 정승이 표재(俵災)의 일로 논계(論啓 잘못을 따져 아룀)하여 파직되었다.  가을에 장단(長湍)을 순시하였는데, 부사 윤경룡(尹慶龍)이 재해 보고를 사실보다 지나치게 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에 아전을 추궁하고 내사하자 윤경룡이 세도 재상 조현명(趙顯命)에게 부탁하여 조현명이 파직을 청하는 계사를 올린 것이다.  곧이어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교체되었으며, 좌윤(左尹)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호조 참판으로 옮겼다.

갑자년(1744)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교체되었다. 병인년(1746) 겨울에 외직으로 나가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었고, 무진년(1748)에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경오년(1750)에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무인년(1758)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제수되었는데, 임금의 특명으로 입시(入侍)하자 내시를 시켜 부축하여 전(殿)에 올라오게 하며 말씀하기를,

 

경을 본 지 지금 몇 해가 지났도다.”

하고는, 앞으로 나와 용안(龍顔)을 쳐다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스스로 용수(龍鬚)를 쓰다듬으며,

 

똑똑히 보이지 않소? 수염과 털이 이렇게 다 희었다오.”

하고서, 이어 전교(傳敎)를 내리기를,

 

이 사람은 염담(恬淡)하여 내가 늘 가상하게 여겨 왔다. 마땅히 한() 나라에서 탁무(卓茂)를 봉한 예를 본떠 특별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하여 예전부터 노인을 존대하던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경진년(1760)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제수되고 그 사이에 금오(金吾 의금부)의 총부(摠府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와 괴원(槐院 승문원)의 제거(提擧)를 겸임하였다. 무릇 한 벼슬에 거듭 제수된 것은 다 기록하지 않았다.

그해 8월 초이튿날에 세상을 뜨시니 수() 76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임금이 조제(弔祭)를 내리고, 며칠 후에 교서를 내려 돌아가신 이를 애도하고 유사(有司)에게 별도로 명하여 쌀과 포목을 더 하사하여 상사(喪事)에 쓰도록 하였다. 10월 초이렛날 광주(廣州) 초월면(草月面) 학현(鶴峴)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계해년에 양주(楊州) 별비면(別斐面) 성곡(星谷) 술좌(戌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부군은 타고난 성품이 고결하고 담박하여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털끝만큼도 세속의 영욕을 가슴속에 담아 본 적이 없었다. 일찍이 선비의 평소 행실을 논하여 말하기를,

 

그릇이나 물건 따위를 남에게 줄 경우에 반드시 이를 깨끗이 씻고 여러 겹 싸서 조심스레 만지거늘 하물며 임금에게 자신의 몸을 바치고자 하면서 먼저 자신을 더렵혀서야 되겠는가. 이는 그 임금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부군은 조정에서 벼슬한 지 30년이 되도록 전답이나 자산이 백금(百金 100)도 되지 않았으며, 성 아래 있는 허름한 집이 값으로 치면 돈 30꿰미에 불과했으나 죽을 때까지 거처를 바꾸지 않았다. 오직 늙은 종 하나를 두었는데 거친 밥이나마 배를 채우지 못했음에도 죽는 날까지 주인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진신(搢紳 높은 벼슬아치)들과도 왕래하는 일이 전혀 없어서, 이병태(李秉泰) · 정형복(鄭亨復) · 황재(黃榟) 등 세 분이 부군과 가장 친한 사이라 하는데도 일 년에 대개 한두 차례 오가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겉과 속이 진솔하여 격의를 두지 않았다.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예로부터 자신의 몸을 깨끗이 지키고 권도(權道)에 따라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명예나 이익이 따라붙을 것 같으면 이 또한 어찌 의리를 세운 본뜻이겠는가.”

하였다. 세간에 이 말을 듣고 종신토록 유감을 풀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조만간 부군이 이조(吏曹)의 관직에 제수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때마다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먼저 차지하여, 물의(物議)가 자못 비등하였다. 그러나 부군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체하였다. 전법(銓法)에 당하관(堂下官)의 통색(通塞 승진 문제)은 붓을 잡은 낭관이 주관하게 되어 있다. 낭관이 후임자를 자천(自薦)할 때가 되자 이조 판서 김취로(金取魯)가 느닷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낭관을 주시하니 낭관이 두려워 일어나 뒷간으로 나갔다. 김취로가 갑자기 부군을 홍문관 응교로 의망(擬望)하니 아전이 옛 규례를 고집하며 곧바로 승차(陞差 승진 임명)할 수 없다고 하자, 김취로가 꾸짖어 말하기를,

 

낭관이 붓을 던지고 일어나 나갔으니, 오늘 승차를 의망한 것은 바로 옥당(玉堂 홍문관)의 구차(久次 오래 승진이 지체되는 자리)이다.”

하였다. 이처럼 부군이 벼슬길에서 낭패를 본 까닭은 실로 한천(翰薦) 한 가지 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다.

판서공(判書公 박사익)이 일찍이 여호선생(黎湖先生 박필주)에게 질문하기를,

 

이여오(李汝五)가 저에게, ‘그대의 집안에 명사(名士)가 둘이 있는데 한 사람은 해오라기가 가을 물가에 서 있어 겉에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모습과 같고, 또 한 사람은 소나무가 아스라한 낭떠러지 위에 솟아나 넝쿨들이 타고 오르기 어려운 모습과 같다.’라고 하자, 이희경(李熙卿)이 이 말을 듣고는 참 좋은 말이라 하면서, ‘이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나약한 자에게 뜻을 세우게 할 수 있고 탐욕스러운 자를 청렴하게 만들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비유로 말한 저 두 인물 가운데 누가 나은가요?”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과연 그렇겠다! 시숙(時叔)은 꼿꼿하고 정보(正甫 박필균)는 담박하지. 담박한 사람은 어리숙한 듯이 보이나 실상은 꼿꼿하고, 꼿꼿한 사람은 오만한 듯이 보이나 실상은 담박하니, 이들은 대체로 두 사람이면서도 한 몸이나 마찬가지이겠지.”

하였다. 시숙(時叔)은 참판공(參判公 박사정)의 자()이다.

급기야 참판공의 아들 명원(明源)이 화평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성위(錦城尉)로 봉해지고, 참판공이 얼마 후 돌아가시자 집안에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조정에 선 자가 없게 되었다. 부군은 등과(登科)하여 16년이 지난 뒤에도 백발의 늙은 학사(學士)로 지냈으며, 늦게서야 비로소 당상관에 올랐으니, 한미한 가문 출신의 평범한 진출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처음에는 임금의 촉망을 받고 있는 줄을 알지 못했다. 승정원에서 숙직할 때에, 밤에 임금이 부군을 불러 물으시기를,

 

승지는 지금 나이가 몇이며, 집은 어디에 있는가? 왜 집을 성안으로 옮겨 살지 않는가?”

하였다. 이때 우사(右史)만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임금이 우사에게 밖으로 나가서 정명(政命)을 전달하라고 명하자, 부군이 황공하여 물러나려고 하니 임금이 갑자기 앞으로 나오라 명하고는 말씀하기를,

 

존호(尊號)를 받는 것이 내가 즐겨하는 바는 아니지만 동조(東朝)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해 여러 신하들의 청을 마지못해 따른 것인데 이제(李濟)가 소를 올려 경계의 말을 하였으므로 나는 실로 부끄러웠다. 내시들이 이것(존호를 받는 것)은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하지만, 저들이 어찌 감히 조정의 논의에 간여한단 말인가. 승지는 친인척(親姻戚)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니 바깥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

하였다. 부군이 물러나서 생각해 보니 황송하기도 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생각지도 않게 하루아침에 두 자급(資級)을 뛰어오르는 은택을 입은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규례에 따라 도승지에 오르게 되자 열이레 동안 병을 핑계 대고는 마침내 나아가 숙배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다시는 은대(銀臺 승정원)에 들어가지 않았다.

화평옹주가 처음 시집을 올 때 의식을 가례(嘉禮 사가(私家)의 혼례)와 똑같이 하여 당시에 종족(宗族)과 빈객(賓客)들이 모두 다 모였다. 그들의 생각에, 부군이 벽제(辟除)를 잡히고 초헌을 타고 와서 상석(上席)을 맡게 된다면 비단 이날에 문호(門戶)를 빛내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부마를 위해서도 빛이 나리라 여기어, 느지막에 종질(從姪) 아무개가 와서 부군에게 권하기를,

 

숙부가 오시지 않으면 자못 실망하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하니, 부군은 놀라며 하는 말이,

 

옹주의 집을 외인이 어찌 함부로 갈 수 있느냐?”

하였다.

얼마 후 옹주가 정안옹주(貞安翁主 박미(朴瀰)의 부인)의 사당을 알현하였는데, 정안옹주의 후손 중에 지위가 잘 알려진 사람이 사당의 문에서 예의를 갖추라는 중지(中旨)를 받은 데다, 장차 정안옹주에게 치제(致祭)하여 영광이 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부군이 병으로 오지 못하여 향()을 받을 자가 없어서, 마침내 치제하는 일을 중지하였다. 종중(宗中)의 여러 장로(長老)들이 모두 부군을 나무라기를,

 

어찌 병을 무릅쓰고 임금의 명을 받들어서 온 집안의 은영(恩榮)이 되도록 아니 했소.”

하였다.

명원(明源)이 병이 깊어 일 년이 넘자 어의(御醫)가 밤낮으로 간호하고 친척들이 찾아와 문병을 하였으며 날마다 병세를 기록하고 보고하였는데, 유독 부군은 이상하게도 한 차례 안부도 물은 적이 없었다. 명원 역시 일찍이 서운히 여기어 원망하기를,

 

우리 선대(先代)에서도 왕가(王家)와 혼인이 있었는데, 지금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도 소원하게 대하여 마치 몸이 더럽혀질 듯이 여긴단 말인가. 유독 우리 선친께서 소싯적에 그 고아 신세를 비호해 준 일은 생각지도 않는가.”

하였다.

종질(從姪) 아무개가 일찍이 부군에게 와서 말하기를,

 

숙부께서는 밖으로는 산림(山林)의 명망을 짊어지고 있고 안으로는 왕실의 친척과 관계를 맺고 있어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앉아서 풍속(風俗)을 진정시킬 수 있으니, 지금의 국시(國是)를 쥐고 있는 자가 어느 누군들 옷깃을 여미고 받들지 않겠습니까? 다섯 사람이 설원(雪寃)되지 못하고 세 흉적이 토죄(討罪)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 숙부께서 삼사(三司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에 절대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여러 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새로이 성상의 은총을 받고 앞길이 확 트여 세도(世道)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저 탕평파(蕩平派)의 신하들까지도 우리 집안의 동정을 몰래 엿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니, 부군이 깜짝 놀라며,

 

너는 본래 우둔한 자인데, 누가 너에게 이 말을 가르쳐 주었으며, 산림이란 너에게 있어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위로는 어진 부형에게 누를 끼치고 아래로는 어린 자식을 망치려 들려고 하느냐? 이른바 세도라는 것이 어찌 너처럼 일개 늙은 음관(蔭官)이 알 수 있는 바이겠느냐.”

하니, 아무개가 무색하여 말하기를,

 

숙부께서 답답하게도 성벽을 마주하고 앉아 여론을 접하지 않으시기에 특별히 와서 진심을 토로한 것인데, 도리어 성을 내신단 말씀입니까.”

하자, 부군이,

 

돌아가 지금 세도를 행하는 자에게 말하라. 숨바꼭질하듯이 몸을 숨기는 것을 도깨비罔兩라 이르고, 구차스레 득실을 걱정하는 자를 비부(鄙夫 비열한 인간)라 이른다. 나는 진실로 답답하거니와, 어찌 너처럼 자질구레한 자 때문에 지조가 무너지겠느냐. 세상에 공정한 여론이 있다면, 지난번에 내가 갑자기 승진한 것에 대해서 논박을 달게 받을 것이다.”

하였다. 이는 추측컨대 당시 사람들이, 부군이 이미 누차 중지를 어긴 줄을 알지 못하고 근거 없는 소문에만 주목하여 남몰래 청탁할 일이 있게 되자 임금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를 타진해 본 것인 듯하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은 본시 세상에 영합하여 뜻을 이루었는데, 임금의 마음이 한번 옮겨지고 정대한 여론이 마침내 펴지는 날이면 자신도 한 패거리로 몰려 빠져나오지 못할 것을 다시 두려워하여, 남들과 다르다는 점을 조금이라도 보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부군이 홀로 세상과 영합하지 않아 예전에는 김씨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얼마 전에는 또 요상(僚相)이 모함을 한 사실을 생각하고는, 자주 부군에게 관심을 보였으나 부군은 그의 언론이 항상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을 평소에 비루하게 여겨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이에 마침내 여호선생을 천거하여 이조 판서를 삼았으니, 이것이 바로 그가 세상에 영합하는 술책이었다. 그런데 임금은 본래 생각하기를 산림에 묻혀 뜻을 닦는 자는 세상에 쓰이기에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잠깐 나왔다 곧바로 떠나곤 하여 절차만 번거롭게 할 뿐이다. 게다가 조야(朝野)가 편안하지 못한 것도 대개는 이에 연유한다.’고 하였던 터였다. 하지만 이미 초빙이 되었으므로, 여호선생이 부군(府君)의 집에 와서 처소를 정하니, 처소에 모이는 자가 매일 조정의 절반은 되었다. 정승 조현명(趙顯命)이 찾아오자, 방과 대청이 협착하고 누추하여 여러 조신(朝臣)들이 피해 있을 곳이 없었다. 이에 조현명이 여러 조신들에게 읍을 하고 자리에 나아가 말하기를,

 

오늘은 선생님을 모시고 강론하고 싶은 대목이 있어 여러 분들과 더불어 함께 듣고자 하니, 조정의 예()로써 서먹서먹하게 대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소매 속에서 대학(大學)을 꺼내 혈구장(絜矩章)을 강론하기 시작하자 부군이 웃으며,

 

상공(相公)의 혈구(絜矩)는 본디 사슴 가죽으로 된 것인데 어찌하여 사슴을 타고 와서 강론하려 드시오?”

하자, 조현명이 히히 웃다가 얼굴빛이 변하면서 그쳤다. 이날 구경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모두들 부군을 위해 걱정하였다.

홍계희(洪啓禧)는 척분(戚分)이 있어 날마다 선생을 모시고 잤는데, 부군이 몰래 선생에게 말하기를,

 

() 나라 수레와 주() 나라 면류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아마도 순서가 바뀐 듯합니다.”

하자, 선생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부군이,

 

“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 하라遠佞人는 대목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홍계희가 밤에 부군에게 의견을 묻기를,

 

어제 여호선생이 등대(登對)하셨을 적에 임금께서 친히 손을 잡으시고는 개정(開政)할 것을 독촉하셨으니 한번 명()을 받드는 것이 그만둘 수 없는 일인 듯싶습니다만, 부제학 자리를 만약 신통(新通 새 인물을 후보로 결정함)한다면 피차간에 어려운 점이 있어 중통(重通)만 못합니다. 그렇다면 김상로(金尙魯)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의 말이 비록 남을 위하는 것 같지만 본심은 실로 자기가 맡으려는 것이었다. 이에 부군이 말하기를,

 

이른바 집이 가까워도 사람은 멀다는 격이군요. 그대는 왜 곧장 이조(吏曹)에 가서 그렇게 말하지 않는 거요?”

하였다. 이튿날 홍계희가 우암(尤庵)의 고사를 다분히 끌어대어 여호선생에게 넌지시 말하자, 부군이 버럭 소리를 치기를,

 

우암이 정사(政事)를 했다면 김상로는 제주 목사가 되고 정익하(鄭益河)는 부령 부사(富寧府使)가 되었을 것이오.”

하자, 좌중 사람들이 몸이 오싹하여 서로 쳐다보았다. 이때 홍계희는 벌써 여러 김씨(金氏)들에게 달려가 고자질하여 부군을 위태롭게 하고자 꾀하고, 나아가 선생에게까지 위험이 미치게 하려 하였다. 그러자 떠들기 좋아하는 자들이 제주 목사를 부풀려서 강계 부사(江界府使)니 영월 부사(寧越府使)니 하면서 다투어 상대를 지목하니, 당로자(當路者)들이 모두들 부군을 뼈에 사무치도록 원망하였다. 그리하여 여호선생이 직접 차자(箚子)를 올리고 진신(搢紳)들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여 유봉휘(柳鳳輝)와 조태구(趙泰耈) 등을 토죄(討罪)할 때 유독 김상로 형제만 참여하지 않았으며, 박문수(朴文秀)가 상소를 올려 여호선생을 쫓아냈을 때에 여러 김씨들의 힘이 작용하였으니, 이는 다 홍계희가 한 짓이었다.

9월에 비로소 유봉휘, 조태구 등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자 세간에서 부군을 편론(偏論)의 도가(都家)로 지목하는 일이 있게 되니, 부군은 스스로 마음이 편치 않아 지방으로 나가기를 구하여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었다. 방어영(防禦營)을 철원(鐵原)으로 옮겨 설치한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두어 달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화평옹주(和平翁主)가 죽자 임금이 갑자기 왕림하시니 백관들이 허둥지둥 걸어서 뒤를 따랐다. 중지(中旨)가 내리기를,

 

시가(媤家)의 존속(尊屬) 한 사람이 입장(入帳)하고 상사(喪事)를 감독하게 하라.”

하였으나, 부군이 성명(成命 공식 왕명)이 내리지 않았다 하여 병을 핑계 대고 가지 않았다. 상이 이틀 밤이 지나도록 환궁하지 않아 대신들이 누차 환궁할 것을 청했으나 거듭 엄한 분부만 듣고 모두 문밖에서 대기하였다. 어떤 사람이 부군을 원망하면서,

 

이때가 어느 때인데 정()으로 보나 의()로 보나 어찌 유독 오지 않는단 말인가.”

하였다. 장차 명정(銘旌)을 설치하려고 부군에게 와서 글씨를 요청하자, 부군은 병이 위독하다고 핑계 대고서 쓰지 않았다. 이어 붉은 비단을 그대로 돌려보내면서, 도위(都尉 박명원)에게 편지를 써 나무라기를,

 

듣자니 삼공(三公)이 감히 물러가지 못하고 마구간 사이에 줄지어 있다 하니 이게 무슨 거조(擧措)란 말인가. 오늘날 조정이 아무리 비루하다 한들 어찌 너희같이 조의(朝衣)와 조관(朝冠)을 갖추고 도탄(塗炭)에 앉아 있는 무리들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어이해 제 머리를 깨부수고 제 목을 찌를 듯이 하여 임금의 마음을 빨리 돌리지 않고 내시들과 함께 앉아서 겨우 눈물이나 흘리고 있단 말이냐?”

하였다. 이때 군사 호위가 너무도 엄하여 뭇 신하들을 들여놓지 않았으므로 도위가 실로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하다가, 급기야 이 편지를 보고서 어찌할 바를 몰라 뜰에 내려와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니, 임금이 몹시 성을 내며,

 

너도 또한 조정 신하들을 흉내 내느냐? 파직시켜라, 파직시켜라!”

하였다. 얼마 후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파직을 시킨다면 결국 맹만택(孟萬澤)의 경우와 같은 꼴이 될 것이다.”

하고는, 곧바로 그 명을 도로 거두도록 명하였다. 이때 임금이, 부군이 도위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말을 어렴풋이 듣고는 외판(外辦)할 것을 하명하니, 대신이 그제야 비로소 진현(進見)할 수 있게 되어 바야흐로 진언을 드리려 하였으나, 임금이 갑자기 신사철(申思喆)을 꾸짖으며 도로 다시 편전(便殿)의 문을 닫아 버렸다. 그제야 비로소 임금이 치미는 울화가 있어서 다른 일에다 성을 낸 것을 조정의 안팎에서 알게 되었다.

당시에 사대부로서 처신에 능란한 자들에게는 기회를 엿보기에 모든 것이 좋은 때였으나 홀로 부군만이 꿋꿋이 자신을 지켜 조금도 자리를 옮겨 앉지 않았으니, 19년 동안 한산직(閑散職)을 전전한 것만 보아도 그 본말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영욕(榮辱)의 사이에도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았고, 방촌(方寸 마음)의 사이에 담연(澹然)하여 얽매임이 없었던 것은 오직 부군만이 그러했으니, 비록 당세에 부군을 좋아하지 않던 이들도 또한 청신(淸愼)하고 개제(愷悌 온화함)하다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는 정부인(貞夫人) 여주 이씨(驪州李氏)로 우윤(右尹) ()의 따님이다. 3 1녀를 낳으니, 아들은 사유(師愈), 사헌(師憲), 사근(師近)인데, 사근은 현감을 지냈으며 여호선생에게 출계(出繼)했다. 딸은 판관(判官) 어용림(魚用霖)에게 출가했다. 손자는 희원(喜源)과 지원(趾源)인데 지원은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손녀는 감역(監役) 이현모(李顯模)와 현감 서중수(徐重修)에게 출가했는데, 다 큰아들 소생이다. 진원(進源)은 일찍 죽고 수원(綏源)은 부사요, 손녀는 황형(黃馨)에게 출가했는데, 사근(師近)의 소생이다. 외손(外孫)에는 군수 어재소(魚在沼)와 어재운(魚在雲)이 있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불초 손() 지원이 삼가 쓰다.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조부 …… 가장(家狀) : 연암이 만년에 지은 글이다. 박종채(朴宗采) 과정록(過庭錄)에 의하면, 당시 연암은 눈이 어둡고 팔이 마비되어 아들 박종채에게 구술해서 이 글을 완성했다고 한다. 純祖實錄에 의하면 순조 5(1805) 1 7일 박필균에게 장간(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연암은 그 해 10 20일에 별세했으므로, 이 글은 그가 남긴 최후의 글이었을 것이다.

[D-001]고려사》 …… 있으며 : 고려사 112 열전(列傳)25에 실려 있다. 박상충(1332~1375)은 이곡(李穀)의 문인이요 사위였으며, 신진 성리학자이자 친명파(親明派)로 활약하다가 반대파에게 암살되었다.

[D-002]모두 …… 덕분이었다 : 원문은 皆肩隨師資也인데,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 나이가 다섯 살이 많은 사람과는 어깨를 나란히 하여 그 뒤를 따라간다.五年以長 則肩隨之고 하였다. 나이 차이가 그 정도밖에 나지 않는 사이였지만 박사익 · 박사정 형제를 스승처럼 여겨 본받았다는 뜻이다.

[D-003]사대부들 …… 하였다 : 숙종(肅宗) 때 서인(西人)이 송시열(宋時烈) 등을 추종하는 노론(老論)과 윤증(尹拯) 등을 추종하는 소론(少論)으로 갈라진 사실을 말한다. 연암의 집안에서도 박세채(朴世采 : 1631~1695)는 소론에 속하였고, 박필주(朴弼周 : 1665~1748)는 노론에 속하였다.

[D-004]우리 …… 것입니다 : 송자대전(宋子大全) 191에 박동량의 묘표인 금계군 박공 동량 묘표(錦溪君朴公東亮墓表)’와 권163에 박미의 신도비인 금양군 박공 미 신도비명(錦陽君朴公瀰神道碑銘)’이 수록되어 있다. 박미의 신도비는 그 손자인 박태만(朴泰萬)이 송시열에게 지어 주기를 청한 사실이 본문에 밝혀져 있다. 박동량의 묘표는 그 손자인 박세채(朴世采)가 송시열에게 지어 주기를 청한 글이었다.

[D-005]팔학사(八學士) : 송시열의 고제(高弟) 8인을 뜻하는 듯하다. 참고로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 한원진(韓元震) · 이간(李柬)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었다.

[D-006]남구만(南九萬) …… 것입니다 : 소론의 지도자였던 남구만(1629~1711)과 유상운(柳尙運 : 1636~1707)은 숙종 20(1694) 합세하여,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오빠 장희재(張希載)를 처형하는 데 반대하고 그를 유배에 처하는 유화 조치를 취하여 노론의 지탄을 받았다. 또한 이 두 사람은 숙종 27(1701) 노론에 맞서 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경형(輕刑)으로 다스릴 것을 주장했다가 숙종이 희빈 장씨에게 사사(賜死)를 내리자, 노론의 탄핵을 받고 함께 파직당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왕위 계승 문제에서 소론이 희빈 장씨의 소생인 세자(후일의 경종)를 추대한 반면, 노론은 세자의 이복 동생인 연잉군(延礽君 : 후일의 영조)을 추대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유상운은 박동량(朴東亮 : 1569~1635)의 외손자였다.

[D-007]경종(景宗) …… 없애자 : 남구만과 유상운은 소론의 초기 인물이다. 이 사건은 경종 초기에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세워 대리청정을 하게 한 노론을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 과격파들이 공격하여 대대적으로 숙청을 가한 신임사화(辛壬士禍 : 1721~1722)를 가리키는 것으로, 남구만과 유상운이 이미 죽고 난 후의 일이다. 따라서 남구만과 유상운의 무리는 이들의 영향을 받은 김일경 등 소론 과격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D-008]청망(淸望) : 청환(淸宦)의 의망(擬望)이란 뜻으로, 명예로우면서도 중요한 벼슬자리, 즉 청요직(淸要職)에 삼망(三望)  3인의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천거되는 경우를 말한다. 시강원의 참하관으로는 설서(說書), 겸설서, 자의(諮議)가 있다.

[D-009]아직 …… 못하였는데도 : 과거 급제자를 박사(博士)의 채점에 따라 삼관(三館) 즉 승문원과 성균관과 교서관에 차례로 배치하는 것을 분관(分館)이라 한다. 소정의 점수를 얻지 못해 다음번 분관을 기다리는 사람을 미분관인(未分館人)이라 한다.

[D-010]고출(考出) : 실록(實錄)을 포쇄(曝曬)할 때 취래(取來) · 고출(考出) · 개장(改粧) · 개궤(改櫃) 등의 작업을 하는데, 고출은 실록의 내용을 초록(抄錄)하는 것을 뜻한다. 실록의 포쇄관(曝曬官)으로는 예문관 봉교대교검열이 파견되었다.

[D-011]김약로(金若魯) : 1694~1753.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박세채 · 송시열의 문인으로 이조참판 겸 양관의 대제학을 지낸 김유(金楺 : 1653~1719)의 아들이다. 김약로는 영조 3(1727) 과거 급제 후 승문원 정자가 되고,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좌의정까지 지냈다. 판서를 지낸 그의 형 김취로(金取魯), 우의정을 지낸 아우 김상로(金尙魯), 영의정을 지낸 사촌 형 김재로(金在魯)와 함께 고위직에 있으면서 한때 세도가 매우 컸다.

[D-012]분향고사(焚香故事) : 분향은 예문관에서 한림의 새 후보자를 추천하여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에 분향하여 고하는 절차를 말한다. 그러나 후보자에게 소시(召試)를 보게 하는 것으로 제도가 바뀌면서 분향하던 절차도 없어졌다. 그러므로 고사(故事)라 한 것이다. 연암집 3 왕고수서한림천기(王考手書翰林薦記)에서도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D-013]이것은 …… 까닭이다 : 예문관의 봉교(奉敎) 이하는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였다.

[D-014]신만(申晩)과 윤급(尹汲) : 신만(1703~1765)은 판중추부사 신사철(申思喆 : 1671~1759)의 아들이다. 1726년 과거 급제 후 승문원 정자가 되었으나 이듬해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득세할 때 파직당했다. 후일 영의정까지 지냈다. 윤급(1679~1770)은 이재(李縡), 박필주(朴弼周)의 문인으로 1725년 과거 급제 후 이조 판서, 우참찬까지 지냈으나, 탕평책에 반대하여 누차 파직 또는 좌천되었다.

[D-015]관옥(冠玉)같이 …… 아니다 : 사기(史記) 56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서 유방(劉邦)의 총애를 받던 진평(陳平)을 헐뜯는 자들이 진평은 비록 미남자이지만 모자를 장식하는 옥과 같을 따름이니, 그 내실을 반드시 갖춘 것은 아니다.平雖美丈夫 如冠玉耳 其中未必有라고 한 말에서 따온 표현이다.

[D-016]네 충신 : 경종 때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사대가인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를 가리킨다.

[D-017]저쪽 사람들 : 소론을 가리킨다. 영조 3(1727) 소론 측의 이광좌(李光佐)가 영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우의정이 되고, 노론 측의 정호(鄭澔), 민진원(閔鎭遠)이 유배를 가게 되었다.

[D-018]() 나라와 …… 못한다 :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선제(先帝 : 유비)는 한 나라와 역적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先帝慮漢賊不兩立고 하였다. 한 나라의 정통을 계승한 촉()은 한 나라의 역적인 위()의 조조(曹操)를 토벌해야 한다는 뜻이다.

[D-019]나라의 …… 정치 :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홍범구주(洪範九疇)의 하나로 임금이 원칙을 세움建用皇極을 들었다.

[D-020]호대(互對) : 노론과 소론의 세력 균형을 취한 인사정책을 말한다. 노론 측 인사를 영의정으로 삼으면 소론 측 인사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는 식이다.

[D-021] …… 맞추려는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말이다. ()보다 식색(食色)이 중요하지 않느냐는 주장에 대해 맹자는 그 뿌리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그 끝만 맞추려는不揣其本而齊其末 궤변이라고 비판하였다.

[D-022]표재(俵災) : 재해를 입은 논밭에 대하여 그 비율에 따라 조세의 감면을 할당하는 것을 말한다.

[D-023]염담(恬淡) : 명예나 이익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을 뜻한다.

[D-024]탁무(卓茂) : ?~28. 왕망(王莽)이 집권할 때 벼슬을 내렸으나 병을 핑계 대고 사직하였으므로,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특별히 불러 태부(太傅)를 삼고 포덕후(褒德侯)에 봉하였다.

[D-025]이병태(李秉泰) · 정형복(鄭亨復) · 황재(黃榟) : 이병태(1688~1733) 1723년 과거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호조 참의가 되었으나 탕평책에 반대하다 파직되었고, 1730년 경상 감사 · 우부승지에 취임하기를 거부하여 합천 군수로 좌천되었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청백리로서 합천의 청천서원(淸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정형복(1686~1769) 1725년 과거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강원도전라도황해도 감사를 지내면서 선정을 폈고 판서까지 지냈다. 황재(1689~?) 1718년 과거 급제 후 1721년 설서(說書)가 되었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그 후 이조 참의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노론의 청류(淸流)로 명망이 높았다. 두 차례 중국을 갔다 온 뒤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 경오연행록(庚午燕行錄)을 남겼다.

[D-026]자신의 …… 사람 : 논어 미자(微子)에서 공자가 우중(虞仲)과 이일(夷逸)을 평하여 그들은 은거하여 기탄없이 말하면서 자신의 몸을 깨끗이 지키고 권도에 따라 벼슬하지 않았다.隱居放言 身中淸 廢中權고 하였다.

[D-027]전법(銓法) : 전랑천대법(銓郞薦代法)을 말한다. 이조의 낭관이 사면(辭免)하려면 반드시 후임자를 추천하여 직책을 대신하도록 하게 한 규정이다.

[D-028]붓을 잡은 낭관 : 전랑(銓郞)이라고도 한다. 이조(吏曹)의 정랑(正郞)과 좌랑(佐郞)을 말한다.

[D-029]한천(翰薦) 한 가지 일 : 앞서 김약로를 예문관 검열에 추천하지 않았던 일을 가리킨다.

[D-030]이여오(李汝五) : 여오는 이병상(李秉常 : 1676~1748)의 자이다. 판서와 대제학을 지냈으며, 검소하게 살았다. 이병태(李秉泰)의 족형(族兄)이다.

[D-031]이희경(李熙卿) : ‘희경은 이재(李縡 : 1680~1746)의 자이다. 대제학과 참판을 지냈으며, 탕평책에 반대하였다. 낙론(洛論)계의 저명한 성리학자였다.

[D-032]나약한 …… 있다 : 원문은 立懦廉頑인데, 맹자 만장 하(萬章下) 및 진심 하(盡心下)에서 맹자는 백이(伯夷)를 예찬하면서 그의 기풍에 관해 들은 자라면 탐욕스러운 자는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는 뜻을 세울 수가 있게 된다.頑夫廉 懦夫有立志고 하였다.

[D-033]학사(學士) :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여기서는 예문관의 하급 관원을 말한다.

[D-034]늦게서야 …… 올랐으니 : 원문은 晩始緋玉인데, 비옥(緋玉)은 홍포(紅袍)에다 옥관자를 붙인 당상관의 차림새를 말한다.

[D-035]우사(右史) : 고대 중국의 사관으로 좌사(左史)와 우사(右史)가 있어 각각 기언(記言)과 기사(記事)를 맡았다고 한다. 여기서는 사관(史官)을 가리킨다. 주로 예문관의 봉교 이하가 춘추관의 사관을 겸임하였다.

[D-036]동조(東朝) : 왕대비를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숙종의 계비(繼妃)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를 가리킨다.

[D-037]승지는 …… 때문에 : 박사정의 아들 박명원(朴明源)이 부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D-038]하루아침에 …… 입은 : 박필균은 영조 16(1740) 6월 정 3 품 통정대부에 오른 데 이어 8월에 다시 종 2 품 가선대부에 올랐다.

[D-039]중지(中旨) : 임금이 조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어필로 써서 내린 명령을 말한다.

[D-040]나를 …… 말인가 : 원문은 疎絶我若浼也인데, 백이(伯夷)는 관을 올바로 쓰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마치 자기 몸이 더렵혀지기나 할 듯이 여겼다.若將浼焉고 한다. 孟子 公孫丑上

[D-041]다섯 …… 있다 : 신원되지 못한 다섯 사람이란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경종(景宗) 시해 음모 혐의로 처형된 김용택(金龍澤 : 김창집의 아들), 이천기(李天紀 : 이이명의 아들), 이희지(李喜之), 심상길(沈尙吉), 정인중(鄭麟重)을 가리키며, 토죄되지 못한 세 역적이란 소론 대신인 이광좌(李光佐), 최석항(崔錫恒), 조태억(趙泰億)을 가리킨다.

[D-042]삼사(三司) ……  : 원문은 鐵限於三司인데, 철한(鐵限)은 철문한(鐵門限) 즉 얇은 철판으로 문지방을 감싼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출입의 제한을 엄중하게 하는 비유로 쓰였다.

[D-043]성벽을 마주하고 앉아 : 원문은 面郭而坐인데, 담벼락을 마주하고 서 있다는 면장이립(面牆而立)과 비슷한 표현이다. 소견이나 견문이 좁음을 비유한 말이다.

[D-044]송인명(宋寅明) : 1689~1746. 영조 때 조현명(趙顯命 : 1690~1752)과 함께 탕평책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D-045]김씨들 : 김약로, 김취로, 김상로 등을 가리킨다.

[D-046]요상(僚相) : 정승이 다른 정승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는 좌의정 송인명이 앞서 표재의 일로 박필균의 파직을 청하는 계사를 올렸던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을 가리켜 한 말이다.

[D-047]혈구장(絜矩章) : 대학장구 () 10장에 이른바 평천하(平天下)가 그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것은, 위에서 노인을 노인으로 대접하니 백성들이 효심을 일으키며, 위에서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니 백성들이 공경심을 일으키며, 위에서 고아를 돌보니 백성들이 배반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군자에게는 혈구의 도絜矩之道가 있다. 위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아래를 부리지 말며, 아래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위를 섬기지 말며, 앞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뒤에 먼저 하지 말며, 뒤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앞이 따르게 하지 말며, 오른쪽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왼쪽에 건네지 말며, 왼쪽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오른쪽에 건네지 말라. 이것을 혈구의 도라 이른다.”고 하였다. 혈구(絜矩)란 곡척(曲尺)으로써 잰다는 뜻으로,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도덕 규범을 뜻한다. 여기서는 언행의 기준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D-048]상공(相公) …… 드시오 : 조현명의 호가 귀록(歸鹿)인 점과 녹비(鹿皮)에 가로왈이라는 속담을 연계시켜 탕평파인 그를 신랄하게 풍자한 말이다. 사슴 가죽에 쓴 날 일() 자는 가죽을 잡아당기면 가로 왈() 자도 되므로, 조현명의 처신이 바로 그처럼 주견이 없이 세상에 영합함을 풍자한 것이다. 또한 사슴을 타고 와서騎蒭라고 한 것은 조현명의 호가 백록을 타고 다니는 신선처럼 살고 싶다는 뜻의 귀백록(歸白鹿)’에서 유래한 점을 비꼰 것이다.

[D-049]홍계희(洪啓禧) : 1703~1771.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1737년 과거 급제 후 우의정 조현명의 천거로 교리에 특진되었으며, 좌의정 송인명의 천거로 공조 참의가 되었다. 판서와 대제학을 거쳐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탕평파나 척신(戚臣)에 접근하여 출세했으므로 지탄을 받았다.

[D-050]() 나라 …… 말입니다 : 안연(顔淵)이 공자(孔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하 나라의 역법을 쓰고, 은 나라의 수레를 타고, 주 나라의 면류관을 쓰고, 음악은 소무를 쓰고, 정 나라 음악을 추방하고,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 정 나라 음악은 인심을 음탕하게 하고 말재주 있는 사람은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行夏之時 乘殷之輅 服周之冕 樂則韶舞 放鄭聲 遠佞人 鄭聲淫 佞人殆라고 하였다. 論語 衛靈公 말재주 있는 사람은 홍계희를 빗대어 한 말이다.

[D-051]개정(開政) : 이조에서 관원들의 인사 문제를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대개 6월과 12월에 시행하였다.

[D-052]집이 …… 멀다 : 시경 정풍(鄭風) 동문지선(東門之墠) 동문 옆 평지 지나 언덕에 꼭두서니 자라는 곳. 그 집은 가까워도 그 사람은 몹시 멀어라.東門之墠 茹藘在阪 其室則邇 其人甚遠라고 하였다. 사모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는 홍계희가 인사 문제 청탁차 사처(私處)로까지 찾아온 것을 풍자하기 위해 이 시의 일절을 인용하였다.

[D-053]편론(偏論)의 도가(都家) : 다른 당파를 비난하는 편파적인 여론 조성을 도맡아 한다는 뜻이다.

[D-054]입장(入帳) : 기장(記帳), 즉 명부(名簿)에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D-055]조의(朝衣) …… 있는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백이(伯夷) 악인의 조정에 서서 악인과 함께 말하는 것을 마치 조의와 조관을 갖추고 도탄에 앉아 있는 듯이 여겼다.立惡人之朝 與惡人言 如以朝衣朝冠 坐於塗炭고 하였다.

[D-056]맹만택(孟萬澤)의 경우 : 맹만택은 맹주서(孟冑瑞)의 아들로 현종(顯宗)의 딸 명선공주(明善公主)에게 장가가기로 되어 신안위(新安尉)에 봉해졌다. 그러나 공주가 미처 시집오기 전에 죽었다 하여 그 작호를 환수당하였다. 顯宗實錄 12 12 27

[D-057]외판(外辦) : 임금이 행차하기 위해 호위들을 소집하여 정돈시키는 것을 말한다.

[D-058]신사철(申思喆) : 1671~1759. 노론계 중신으로 영조 때 평안 감사, 예조 판서, 공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1745년 판중추부사로 기로소에 들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승지 증() 이조 판서 나은(懶隱) 이공(李公) 시장(諡狀) 사신(詞臣)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금상(今上) 8년 갑진년(1784)에 영남 유생 아무개 등 몇 사람이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소장을 올려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우리 영종대왕(英宗大王 영조)께서 특별히 고() 승지 신() 이동표(李東標)에게 이조 판서의 관직을 추증하시고, 그 고신(告身) 청의(淸議)를 힘써 주장하여 수립한 공로가 남보다 뛰어났다.力主淸議 樹立卓然라는 여덟 자를 쓰도록 명하여 포창(褒彰)하였으니, 조정에서 이룩한 대절(大節)이 이에 밝게 빛을 발하고 위대하게 드러나, 공이 기사년(1689)에 구원하려고 했던 박태보(朴泰輔), 오두인(吳斗寅) 등 여러 충신들과 아울러 백세(百世)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행적의 본말에 있어서는 임금이 임종하시기 직전이라 상세히 아뢰지 못한 바가 있어, 시호(諡號)를 내리는 은전이 밝게 다스려진 이 시대에 아직까지 시행되지 않았으니, 지사(志士)들이 오랫동안 품어 온 유감이 오늘을 기다린 듯합니다.

옛날 송() 나라 신하 공도보(孔道輔)는 벼슬이 중승(中丞)이요, 추호(鄒浩)는 벼슬이 우정언(右正言)이었습니다. 법으로 따지자면 마땅히 시호를 얻지 못할 처지인데도 단지 곧은 절개로써 둘 다 당대에 훌륭한 시호를 얻었습니다. 지금 동표(東標)가 행한 의리는 이들 옛 성현과 꼭 같을 뿐만 아니라 학문의 순수하고 심오함에 있어서는 두 사람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유음(兪音 허락하는 조서)을 내리시어 특별히 동표에게 증시(贈諡)의 은전을 거행케 하여 주소서. 신 등은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이 소()가 아침에 올라가자 저녁에 회보를 내리기를,

 

그가 행한 의리에 대해서는 내가 익히 아는 바이니 소청(疏請)한 대로 시행할 것을 특별히 윤허한다.”

하였다. 이에 그 일을 태상(太常 봉상시(奉常寺))에 내리자 백관들은 경외하며 우러러보고 사림(士林)들은 면목이 섰다.

( 서유린(徐有隣))는 일찍이 관각(館閣)의 직책을 맡았고 사관(史官)을 맡은 적이 있으니, 어진 사대부의 덕업(德業 덕행과 사업)과 명행(名行 명성과 품행)에 대하여 기꺼이 드러내야 할 처지인데, 하물며 이 시장(諡狀)을 짓는 데 있어 어찌 감히 글재주가 없다 하여 사양할 수 있으랴.

삼가 살피건대, ()의 자는 군칙(君則)이요, 호는 나은(懶隱)이요, 그 선세(先世)는 진보(眞寶) 사람이다. 고려 말엽에 활동한 휘() 자수(子修)는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홍건적(紅巾賊) 토벌을 도와 공신이 되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으며, 6세조 휘 우()는 경학과 문장으로써 정릉조(靖陵朝 중종(中宗))에 이름을 드날려 세상 사람들이 송재(松齋)라 불렀는데, 이분은 퇴계(退溪) 문순공(文純公)의 숙부(叔父)가 된다. 증조(曾祖)인 휘 일도(逸道)는 봉사(奉事)를 지내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인 휘 지형(之馨)은 참봉을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일찍이 광해조(光海朝)에 상소를 올려 이이첨(李爾瞻)을 참형에 처하기를 청하였다. ()인 휘 운익(雲翼)은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으며, 종조숙부(從祖叔父) 휘 지온(之馧)에게 출계(出系 양자로 나감)하였다. ()는 순천 김씨(順天金氏)로 생원(生員) 기후(基厚)의 따님이다.

숭정(崇禎) 갑신년(1644, 인조 22) 4 5일에 공()을 낳으니, 용모가 뛰어나고 인품을 타고났다. 지학(志學 15)의 나이 때부터 분발하여 성현(聖賢)을 목표로 삼고, 한 가지 기예로써 이름이 나는 것을 부끄러이 여겼다. 처사공(處士公 부친 이운익)의 임종 시 부탁을 받고 난 뒤로 더욱 스스로 노력하여 아우와 더불어 날마다 반드시 첫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단정히 하여 자리를 맞대고 학문을 강론하여 침식을 잊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 아우가 죽게 되자 공은 비로소 과거(科擧) 공부에 힘을 쏟았는데 이는 모부인(母夫人)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을묘년(1675)에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니 선비들의 기대가 더욱 커졌다. 일찍이 동당시(東堂試)에 응시한 적이 있었는데 여러 고관(考官)들이 사석에서 서로 말하기를,

 

재주와 학식이 이모(李某)보다 나은 자가 없으니 마땅히 장원을 차지할 것이다.”

하였는데, 공은 어렴풋이 이 말을 듣고서 시험 당일이 되자 일부러 머리를 천 번이나 빗고 또 빗으며 늑장을 부려 마침내 과장(科場)의 문에 들어가지 않고 물러 나왔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이천소(李千梳)라 부르며 웃음거리로 삼았다.

정사년(1677)의 증광시(增廣試)에 회시(會試) 장원(壯元)이 되었으나 얼마 뒤 곧 파방(罷榜 급제자 발표 취소)이 되었고, 계해년(1683)의 증광시에 또다시 회시 장원이 되어 삼관(三館)에 분관(分館)하게 되자,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말하기를,

 

영남 선비들의 여론은 모두 이 사람이 주동한다.”

하고서, 마침내 성균관에 눌러두어 4년 동안 등용되지 못했다.

정묘년(1687)에 외직으로 쫓겨나 창락 찰방(昌樂察訪)에 제수되었다.

기사년(1689)에 사국(史局 춘추관(春秋館))에 천거되고 다시 남상(南床 홍문관 정자)에 의선(議選 선발)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전적(典籍)으로 품계를 뛰어 넘어 승진되고 그 이튿날에 홍문관 부수찬에 특별히 제수되니, 공이 너무 빠른 승진이라 하여 사양하고 소명(召命)에 나가지 않았다. 5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이때 오두인(吳斗寅), 박태보(朴泰輔), 이세화(李世華)가 상소를 올려 극력으로 간언하였다. 임금의 노여움이 극에 달하여 이들을 모두 대궐 뜰에서 국문하니, 오두인과 박태보 두 분 모두 국문의 여독으로 귀양 도중 길에서 죽었다. 임금이 명을 내리기를,

 

이 일로써 다시 말하는 자가 있으면 역적의 죄로써 다스리겠다.”

하였다. 공이 이때 시골집에 있다가 변을 듣고 상소를 지어 극언을 올리려 하다가 나이 많은 태부인(太夫人 어머니)에게 큰 슬픔을 끼칠까 두려워서 망설이고 있는데, 태부인이 그 말을 기껍게 듣고는 공을 재촉해서 길에 오르게 하였다.

공이 서울에 당도하자, 상소 내용 가운데, “옥산의 새 무덤엔 양마석(羊馬石)이 우뚝 서고, 여양의 옛집은 기상이 참담하다.玉山新阡 羊馬嵯峨 驪陽舊宅 氣像愁慘라는 말이 있어 보는 자마다 모두 얼굴빛이 변했다. 그 상소에 또 이르기를,

 

전하께서 이세화(李世華)의 죄에 대해서는 이미 다 풀어 주셨으나 이상진(李尙眞)에 대해서는 아직 완전히 다 풀어 주지 않고 있으니 어찌 한결같이 대하고 똑같이 사랑하는 도()이겠습니까. ! 일을 만나면 논쟁하는 것이 신하된 직분이거늘 전하의 오늘날 처사에 대하여 모두가 분부에 순종하여 한 사람도 과감히 말하는 자가 없으니, 천하만세(天下萬世)의 사람들이 전하의 조정에 서서 전하의 녹을 먹고 있는 자를 충신이라 하겠습니까, 아니라 하겠습니까? 오늘날 조정 신하 중에는 합문(閤門)에 엎드려 간언하기를 갑자기 중지한 것을 가지고 지금도 한스럽게 여기는 자들이 있는데, 그 마음이 어찌 다 전하께 불충하거나 국가의 계책을 근심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후회한다는 한 마디 말씀을 아끼시고 사방 백성의 소망을 가볍게 저버리려 하십니까.”

하였고, 또 이르기를,

 

조사기(趙嗣基)의 말이 궁위(宮闈)를 범하여 보고 듣기에 놀라운 점이 있는데 대간(臺諫)의 계사(啓辭)를 갑자기 정지시키셨으니 신은 이를 애석히 여깁니다.”

하였다. 이 상소가 올라가자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일이 장차 어찌 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얼마 있다가 임금의 마음이 풀려 그 죄가 파출(罷黜)에 그쳤다.

곧 서용되어 병조 정랑에 제수되고 다시 수찬에 제수되었다. 이때 여론을 쥐고 있는 자들이 노봉(老峯) 민공(閔公)을 논계(論啓)하여 기어코 사지(死地)에 몰아넣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삼사(三司)가 일제히 모여 공에게 논계에 참여하기를 청하자 공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곤성(坤聖 인현왕후)께서 폐위되던 날에 여러분이 머리가 부서지도록 힘껏 간()하지 못하였으니 이미 신하로서 나라를 위해 죽는 의리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 또다시 이 사람마저 죽이려 하고 있으니, 성모(聖母 인현왕후)에 대해 어찌 하려는 것인가?”

하였다. 이담명(李聃命)이 이 주장을 특히 강력하게 지지하여 붓과 벼루를 앞에다 내놓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너무 사양하지 말고 나를 봐서라도 계사를 기초하라.”

하니, 공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그대가 사적인 원한을 갚고자 하면서 어찌 남의 붓을 빌리려 하는가.”

하고서, 마침내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그 뒤 사간원 헌납,  원문 빠짐  수찬에 연이어 제수되었으나 다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공은 나랏일이 걱정되기는 하였으나 세상에 나갈 뜻을 끊어 버리고 영천암(靈泉巖)을 사랑하여 그곳에다 집을 지어 놓고 학문을 닦을 장소로 삼아 평생토록 지낼 듯이 하였다.

경오년(1690)에 또 헌납과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어버이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양양 부사(襄陽府使)에 제수되었다.

그 이듬해 봄에 공의 경학(經學)으로 보아 외방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아뢰는 자가 있어, 헌납으로 부름을 받아 서학 교수(西學敎授)를 겸임하고 이어 수찬으로 옮겼다. 임금이 장릉(章陵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의 묘)에 행행(幸行)할 때 호종하였는데, 임금이 육신묘(六臣墓)를 지나면서 제사를 내리고 아울러 복관(復官)하도록 명하였다. 조정의 의론이 불가함을 고집하면서 그 이유로써 춘추(春秋) 어버이를 위하여 그 잘못을 숨긴다.爲親者諱는 대문을 들고 나오자, 공이 홀로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광묘(光廟 세조(世祖))께서 이미 육신을 죽였으니 만약 그 충절을 포장(褒獎)해 준다면 어찌 성덕(聖德)의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교리에 제수되자 휴가를 청하여 근친(覲親)하였고, 가을에 또 헌납으로 부름을 받았다가 교리로 옮겨 제수되었다. 임금이 과거 급제자들에게 광대로 하여금 앞길을 인도하도록 명하자, 공이 아뢰기를,

 

광대의 잡희(雜戱)는 성인(聖人)이 싫어하신 바이니 아마도 정색(正色)을 함으로써 아랫사람을 통솔하는 도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였다.

일찍이 천둥의 이변으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임금이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논했는데 절실한 말들이 많았다. 공이 조정에 있을 때에는 지조가 꿋꿋했으며 풍도가 준엄하였고, 경연(經筵)에서 경서(經書)를 펼쳐 놓고 토론을 할 때에는 그 뜻이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에 있었으므로 임금이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세속에 따라 적당히 살고자 하지 아니하여 자주 근친을 위한 휴가를 청하고 이로 인해 아주 떠나 버리고자 하였으나, 임금이 매번 공이 떠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공에게 따뜻한 봄이 되면 모친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라 명한 다음, 모친에게는 곡식과 비단을 내려 특별히 은총을 베풀었다.

또 헌납으로 부름을 받아 이조좌랑 겸 시강원사서(吏曹佐郞兼侍講院司書)에 제수되었다. 전형(銓衡)을 맡은 자가 이수인(李壽仁)과 유재(柳栽)를 청환직(淸宦職)에 통망(通望 후보 추천)하자고 하자, 공이 유재는 문학(文學)이 없고 이수인은 일찍이 기사년의 대론(大論)을 피해 갔다는 이유를 들어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또 민장도(閔章道)를 통망하자고 하였는데, 그 아비 민암(閔黯)이 당시에 국권을 잡고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장도는 평소 훌륭한 행실이 없다.”

하고, 매우 준엄하게 막아 버렸다. 이에 강요를 하다가 먹혀들지 않자 심지어 화복(禍福)으로써 유혹하기까지 하니,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이따위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부끄럽다.”

하며, 그날로 정고(呈告 사직서를 올림)하고 비를 무릅쓰고 남으로 돌아갔다. 도롱이를 입고 배에 오르니 공을 전송하는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며 서로 말하기를,

 

오늘 작은 퇴계小退溪를 다시 보게 되었도다.”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자마자 학문을 강론하려는 자들이 날마다 모여들어 그들과 토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헌납, 부교리, 교리, 겸교수에 제수되고 얼마 후 헌납으로 옮겨 제수되고 다시 이조 좌랑, 겸문학, 교리, 겸필선(兼弼善)에 제수되고 또다시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일찍이 영천암(靈泉巖)의 별장에 거처하여 조용히 앉아 주역을 읽으면서 지냈는데, 이때 문인(門人)에게 답한 태극(太極)에 대한 변설(辨說), ‘천리와 인욕이 행은 같으나 정이 다르다天理人欲同行異情는 설에 대한 해석은 그 연구가 극히 정미(精微)하였다.

계유년(1693)에 의정부 사인, 사헌부 집의, 시강원 보덕에 오르고 또다시 집의에 제수되었다.

이렇게 전후로 역마(驛馬)를 보내 부른 것이 13차례나 되었으므로 마침내 마지못하여 명에 응하였다. 이때 장희재(張希載)가 장부(將符)를 차고 있으면서 권세를 믿고 불법을 많이 자행하고 있었으므로 공이 그의 노비 가운데 심하게 우쭐대는 놈을 호되게 처벌하니,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이 통쾌히 여겼다.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옮겨 제수되자 또 휴가를 빌어 귀성하였다. 사간 겸 중학교수(司諫兼中學敎授)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올리고 이와 함께 시정(時政)을 논하기를,

 

주자(朱子) 사대부의 출처거취(出處去就)가 풍속의 성쇠(盛衰)에 관계된다.’고 하였습니다. 근래에 대각(臺閣)의 신하들이 한 번이라도 소명(召命)을 어기면 곧바로 이조의 논의를 따라 하옥하고 갈아 치우니, 이는 예로써 신하를 부리는 도리가 아닙니다. 대관(臺官)이 자기 직책을 소홀히 한 지 실로 이미 오래되기는 하였으나, 전하께서 간신(諫臣)을 대우하는 것 또한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열 사람의 대간(臺諫)이 강하게 간쟁을 하여도 받아들이지 않던 일을 대신(大臣) 한 사람의 한 마디 말에 거뜬히 해결이 되며, 뻣뻣하게 남의 말을 거부하는 기색이 있을 뿐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미덕은 없으시니, 오늘날 언로(言路)가 막혀 버린 것이 어찌 모두가 어물쩡 넘어가는 신하들만의 죄이겠습니까. 군신간에 존재하는 정의(情義)가 신뢰감을 잃고 질책만 뒤따르니, 신하들이 무서워 성상의 마음을 거스르지나 않을까 오직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황공한 마음으로 대죄합니다.惶恐待罪만 나불대는 승정원(承政院) 성교가 지당하십니다.聖敎至當만 나불대는 비변사(備邊司)를 불행히도 오늘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전하께서는 여러 차례 조정의 신하를 들어 쓰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하셨습니다. 한창 중용할 때에는 마치 무릎 위에라도 올려놓을 듯이 하다가 밀어내어 배척할 때에는 못에다 떨어뜨릴 듯이 하였으며, 정권을 바꿔 치울 때에는 대대적으로 주살(誅殺)을 행하였으니, 국운이 어떻게 병들지 않을 수 있겠으며 인심이 어떻게 동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여러 신하에 대하여 은혜와 원수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게 하면 나라의 위망(危亡)이 장차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내언(內言)이 문지방 밖으로 나가고 외언(外言)이 문지방 안으로 들어와 정도(正道)를 거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소인들이 사악한 농간을 부리는 매개가 되는 것이니, 임금이 그 술책에 한번 빠지게 되면 그들의 술책대로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러한 은밀한 샛길을 호되게 막으소서.”

하였다.

성균관 사성에 제수되었다가 집의로 옮기고 응교에 제수되었다가 또다시 집의에 제수되었고 다시 응교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조정에 돌아오자 곧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왕명에 사은하는 날 임금이 초모(貂帽)를 내리고 탑전(榻前)에서 써 보도록 명하였다.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가 부모의 봉양을 위해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가 요역(繇役)을 줄이고 민폐(民弊)를 혁파하니 고을이 크게 다스려졌으나, 관찰사와 일의 가부(可否)를 다투다가 마침내 수령의 인()을 던지고 돌아왔다.

을해년(1695)에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병자년(1696)에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제수되었다. 이에 앞서 공은 누차 부제학, 대사성, 이조 참의의 물망에 올랐는데, 급기야 외직으로 나가게 되자 모두들 공이 나가는 것을 애석히 여겼다. 그러나 공은 관직에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기는 지조만은 시종 한결같이 지키면서,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고을이 한가하고 바다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기도 해서, 한 고을을 힘껏 잘 다스려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마침 큰 흉년을 만나 백성들이 유랑하여 고을이 거의 다 비게 되었다. 공은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녹봉을 털어 진휼하였고, 아울러 삼(), , 생선, 미역 등을 세금으로 걷던 것을 모두 다 없애주고는 스스로 살길을 찾게 하였다. 그리고 상소를 올려 흉년 구제에 대한 편의를 요청하자 임금은 다 그렇게 하라고 했다. 정승 장암(丈巖) 정호(鄭澔)가 그 당시 암행어사가 되어 수계(繡啓)에서 공의 업적을 칭찬하였고, 해직하고 돌아온 뒤에는 그 고을 사민(士民)들이 공을 추모하여 동비(銅碑)를 만들어 그 덕을 칭송하였다.

무인년(1698) 겨울에 모친상을 만나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묘소를 살피며 호곡(號哭)하였는데, 아무리 모진 바람과 심한 비가 내려도 이를 폐하지 않았다. 2년 뒤인 경진년(1700) 7 17, 마침내 그 슬픔으로 수척해진 끝에 졸하니 향년 57세였다. 수의(襚衣)가 만들어지는 대로 염()을 마치고 부음을 알리니, 임금이 놀라고 슬퍼하여 특별히 부의(賻儀)를 내렸다. ()는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며, 공이 낳은 아들과 손자들은 지갈(誌碣 묘지와 묘갈)에 실려 있으므로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사대부 간의 명론(名論)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서 나라의 불행이 된 지 오래되었다. 이는 단지 그들이 어질다고 여기는 분이 서로 같지 아니하여 이에 따라 호오(好惡)가 편파적으로 이루어지고 심지어 평피의 기회平陂之會에 이르러 번갈아 국시(國是)를 정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옳다고 여기는 것이 천정(天定)이면 세운(世運)이 융성하고 평화롭게 될 것이요,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인승(人勝)이면 명의(名義 명분과 도의)가 어긋나고 어지러워질 것이니, 이는 호오가 공정하냐 아니냐에 달렸을 뿐이다.

나은(懶隱) 이공(李公)을 삼가 살펴본 적이 있는데, 공은 국시가 무너지던 날에 초연히 우뚝 서서 권세에도 굽히지 아니하고 화()를 당하는 것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도 윤리를 힘껏 지켜 나갔으니, 스스로 충정(忠正)을 견지하고 평소 의리에 밝아서 공정한 천정(天定)을 확실하게 자득한 자가 아니면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이 옳다고 인정해 주지 않아도 답답해하지 않는다.’고 한 말은 아마도 공에게 가까운 말이 될 것이다.

영남(嶺南)이란 곳은 본래 우리나라의 추로(鄒魯)에 해당되는 지역으로서 그 호오에 있어 공과 차이가 있는 사람이 거의 드무니, 이 또한 나은(懶隱)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기사년 이후로 한결같이 명의(名義)로 인해 질책을 받았으니, 이는 국시를 통일시키고 호오를 함께하려는 조정의 본뜻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기에 선조(先朝 영조(英祖))께서 관직을 추증하는 은전을 내리고 금상(今上)께서 시호(諡號)의 은전을 내린 것이 어찌 다만 공의 이름과 덕이 온 나라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다는 이유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공이 모범을 보인 것이 저렇듯이 우뚝하니, 이 때문에 권장하고 격려하는 임금의 뜻도 전후에 한결같았던 것이다. 그러하니 조정에서 벼슬을 같이한 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임금의 뜻을 우러러 본받아 이 일에 함께 힘쓰지 않겠는가.

삼가 공이 조정에서 벼슬을 한 경위를 수집하여 집사(執事)에게 고하노라.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사신(詞臣) : 왕을 측근에서 수행하면서 각종의 글을 기초하는 문학시종(文學侍從)의 신하를 말한다. 시장(諡狀)은 봉상시와 홍문관에서 작성하므로, 여기서는 홍문관 관원을 가리킨다.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8에 수록된 시장(諡狀)은 연암이 지은 시장을 바탕으로 한 글인데 지은이가 서유린(徐有隣)으로 되어 있다. 서유린은 연암의 절친한 벗으로, 시장을 찬진할 당시 이조 판서로서 홍문관 제학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등을 겸하고 있었다.

[D-001]영남 …… 사람 : 안동(安東) 유생 권이도(權履度) 등을 가리킨다. 正祖實錄 8 11 5

[D-002]공도보(孔道輔) : 공자의 45대손으로, 송 나라 인종(仁宗)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자 범중엄(范仲淹) 등과 함께 곽 황후(郭皇后)의 폐위에 극력 반대하여 직신(直臣)으로 명성이 높았다. 사후인 인종 황우(皇祐) 3(1051)에 공부시랑(工部侍郞)에 특별히 증직(贈職)되었다고 하나, 시호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宋史 卷297 孔道輔傳

[D-003]추호(鄒浩) : 송 나라 철종(哲宗) 때 우정언(右正言)에 발탁되자 맹후(孟后)의 폐위를 반대했으며 그 일로 인해 두 번이나 귀양을 갔다가 복직되었다. 사후인 고종(高宗) 즉위 초에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에 증직되고 충()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宋史 卷345 鄒浩傳

[D-004]민정중(閔鼎重) : 1628~1692.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송시열의 문인이자 서인의 지도자로서 좌의정까지 지냈으나 기사환국 이후 귀양 가서 죽었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은 그의 동생이다.

[D-005]옥산(玉山) …… 참담하다 : 옥산은 장희빈의 본관인 인동(仁同)의 별칭으로 그 선조의 무덤이 이곳에 있으며, 여양은 인현왕후의 본관인 여흥(驪興)의 별칭으로 그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이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따라서 이 말은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희빈이 왕후가 된 상황을 개탄한 것이다.

[D-006]이세화(李世華) : 1630~1701. 경상 감사를 지낸 뒤 향리에 있다가, 인현왕후 폐비에 반대하는 상소에 참여하여 숙종의 친국(親鞫)을 받은 후 유배가던 중 풀려났다.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서용되어 판서와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D-007]이상진(李尙眞) : 1614~1690. 우의정까지 지냈으나 인현왕후 폐비에 반대하여 간언(諫言)하다가 종성(鍾城) 등지로 귀양을 갔다. 그 뒤 용서되어 향리에서 은둔하던 중 죽었다.

[D-008]조사기(趙嗣基) …… 범하여 : 궁위(宮闈)는 현종(顯宗)의 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를 가리킨다. 이는 당시 호군(護軍)으로 있던 조사기가 상소를 올려 명성왕후의 지문(誌文)을 지은 송시열을 비판하면서 명성왕후에 대해 언급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숙종실록(肅宗實錄) 15 3 27일 조에 조사기의 상소가 실려 있다. 조사기는 이 상소로 인해 숙종 20년에 참형을 당하였다.

[D-009]이 상소 : 숙종실록(肅宗實錄) 15 5 27일 조에 이 상소가 실려 있다.

[D-010]나라를 …… 의리 : 원문은 循國之義로 되어 있으나,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중의 시장에는 殉國之義로 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11]이담명(李聃命) : 1646~1701. 남인(南人)으로 허목(許穆)의 문인이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홍주 목사에서 파직되었으나, 숙종 9(1683) 복관되어 감사, 참판 등을 지냈다.

[D-012]원문 빠짐 : 이동표의 문집인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부록 권8에 실린 홍중효(洪重孝) () 묘지명에는 겸지제교(兼知製敎)’ 4자가 들어 있다.

[D-013]춘추(春秋) …… 숨긴다 :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민공(閔公) 원년(元年) 조에 나온다.

[D-014]과거 …… 명하자 : 유가(遊街)라 하여, 과거 급제자가 광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며 거리를 행진하고 시험관과 선배 급제자, 친지들을 방문하던 풍속이 있었다.

[D-015]광대의 …… 바이니 : () 나라 정공(定公)이 제() 나라 경공(景公)과 협곡(夾谷)에서 회합할 때 당시 재상(宰相)의 일을 섭행(攝行)하던 공자는 제 나라가 노 나라 정공 앞에서 광대와 난쟁이를 시켜 잡희를 벌이는 것을 금지시키고, 임금을 웃긴 죄를 물어 처형하도록 하였다. 春秋穀梁傳 定公10》 《史記 卷47 孔子世家》 《孔子家語 卷1 相魯

[D-016]정색(正色) …… 도리 : 서경(書經) 필명(畢命)에서 강왕(康王)은 필공(畢公)에게 훈계하면서 정색으로 아랫사람들을 통솔하라.正色率下고 하였다. , 안색(顔色)을 엄하게 가짐으로써 아랫사람들이 경외(敬畏)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D-017]전형(銓衡)을 맡은 자 : 당시 이조 판서 오시복(吳始復)을 가리킨다. 懶隱先生文集 卷8 行狀

[D-018]기사년의 대론(大論) : 숙종 15(1689) 장희빈의 소생을 원자(元子)로 정하는 것을 반대한 서인(西人)들의 논의를 가리킨다. 이로 인해 남인(南人)들이 집권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다.

[D-019]민장도(閔章道) : 1655~1694. 남인의 영수인 우의정 민암(閔黯 : 1636~1694)의 아들로, 인현왕후의 복위를 추진하던 서인들을 체포하여 일대 옥사를 일으키려다가, 도리어 갑술환국을 당해 민장도는 국문 도중 장살(杖殺)되고, 민암은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D-020]심지어 …… 하니 : 이세택(李世澤)이 쓴 행장에 의하면, 이조 판서 오시복은 심지어 사람을 시켜 넌지시 귀띔하기를 만약 민장도의 추천을 허락한다면, 나도 역시 영남 사람을 통용(通用)하겠다고 했다 한다. 懶隱先生文集 卷8

[D-021]천리(天理) ……  : 호굉(胡宏) 지언(知言)에서 천리와 인욕이 체는 같으나 용이 다르며同體異用, 행은 같으나 정이 다르다同行異情고 주장하였다. 주자(朱子)는 이러한 호굉의 주장 중에서 체는 같으나 용이 다르다同體異用는 설은 비판하고 물리쳤으나, ‘행은 같으나 정이 다르다同行異情는 설은 긍정하여 받아들였다. 즉 시청언동(視聽言動)이나 식색(食色)과 같은 행동은 성인도 범인과 마찬가지이지만, 성인은 그것이 예()와 합치되게 함으로써 천리(天理)를 따른다는 점에서 정()이 다르다고 보았다. 朱子語類 卷101 程子門人 胡康侯

[D-022]문인(門人)에게 …… 정미(精微)하였다 : 그의 문인 김이갑(金爾甲 : 자는 원중元中)에게 준 편지 답김원중문목(答金元中問目)의 내용을 가리킨다. 懶隱先生文集 卷4

[D-023]장희재(張希載) …… 있으면서 :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는 숙종 18(1692) 총융청(摠戎廳)의 우두머리인 총융사(摠戎使)가 되었다.

[D-024]사대부의 …… 관계된다 : 주자는 사대부의 사수출처(辭受出處)는 비단 그 자신만의 일이 아니다. 그 처신의 득실은 바로 풍속의 성쇠에 관계가 된다. 그러므로 특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性理大全書 卷50 8 力行

[D-025]예로써 …… 도리 : 논어(論語) 팔일(八佾)에서 공자는 임금은 신하를 예로써 부려야 한다.君使臣以禮고 하였다. 신하를 대할 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D-026]내언(內言) …… 들어와 : 내언은 여자가 규방에서 하는 말을 가리키고, 외언(外言)은 남자가 공무에 관해 하는 말을 가리킨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 외언이 문지방 안으로 들어오지 말아야 하며, 내언이 문지방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外言不入於梱 內言不出於梱고 하였다.

[D-027]정호(鄭澔) : 1648~1736.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현손이며 송시열의 문인이다. 기사환국 때 파직되고 유배되었으나, 인현왕후가 복위하자 풀려나 판서까지 지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자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하여 파란을 많이 겪었다. 신임사화로 파직되고 유배되었으나, 영조 즉위 후 영의정까지 지냈다.

[D-028]그 당시 …… 칭찬하였고 : 원문은 褒公績이라고만 되어 있으나,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중의 시장에는 啓褒公績으로 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29]평피의 기회平陂之會 : 시운에 따라 세력이 크게 변하는 기회를 이른다. 주역 태괘(泰卦) 구삼(九三)의 효사에 편평하기만 하고 치우치지 않은 경우는 없고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법은 없다.无平不陂 无往不復고 하였다. 여기서는 숙종 때의 환국(換局)을 가리킨다.

[D-030]옳다고 …… 것이니 : 천정(天定)은 천명으로 정해진 것을 뜻하고, 인승(人勝)은 다수 대중의 힘으로 천명을 어기는 것을 뜻한다. 사기 66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서 신포서(申包胥)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지만, 천명도 정해지면 사람들을 능히 격파한다.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는 말을 인용하여, 초 나라 평왕(平王)의 시신을 매질하여 복수한 벗 오자서의 난폭한 행동을 나무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록 한때의 난폭한 행동으로 천명을 어길 수 있을지라도, 천명 역시 화를 내려 난폭한 자들을 징계한다는 뜻이다.

[D-031]홀로 …… 않는다 : 주역 대과괘(大過卦)의 단사(彖辭) 군자는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숨어 살아도 답답해하지 않는다.君子以獨立不懼 遯世无悶고 하였다.

[D-032]추로(鄒魯) : 맹자(孟子)와 공자(孔子)의 고향으로 곧 유교의 발상지를 뜻한다.

[D-033]공이 …… 고하노라 : 정조 8(1784) 11월 이동표에게 시호를 내리라는 어명이 내렸으며, 12(1788) 4월 충간(忠簡)의 시호가 내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예조 참판 증 영의정 부군(府君) 묘표음기(墓表陰記) 금성위(錦城尉 : 박명원朴明源)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여기 파주(坡州) 읍치(邑治) 서쪽 백석리(白石里) 갑좌(甲坐 정동쪽에서 북으로 15도 방향)의 언덕에 예조 참판 증 영의정 박공지묘(禮曹參判贈領議政朴公之墓)’라는 묘표(墓表)가 있는데, 바로 우리 선고(先考)의 의리(衣履)가 매장된 곳이다. 부군(府君)의 휘()는 사정(師正)인데 초휘(初諱)는 사성(師聖)이요, ()는 시숙(時叔)이다. 세상에서 반남 박씨(潘南朴氏)를 관면(冠冕 벼슬을 한 집안)의 대족(大族)으로 높이 받드는 것은 그 선세에 문정공(文正公) 휘 상충(尙衷)과 문강공(文康公) 휘 소()가 있어 곧은 도()와 바른 학문으로 명덕(名德)이 서로 계승된 때문이었다. 증조는 첨정(僉正) 휘 세교(世橋)인데 이조 판서 금흥군(錦興君)에 추증되었으며, ()는 군수(郡守) 휘 태두(泰斗)인데 좌찬성 금은군(錦恩君)에 추증되었으며, ()는 참봉(參奉) 휘 필하(弼夏)인데 좌찬성 금녕군(錦寧君)에 추증되었다. 고조(高祖)인 문정공(文貞公) 휘 미() 때부터 적손(嫡孫)으로서 충익공(忠翼公) 휘 동량(東亮)의 훈봉(勳封)을 승습(承襲)하였다. ()는 윤씨(尹氏)인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으며 관찰사 반()의 따님이다.

숙종(肅宗) 9년인 계해년(1683)에 부군을 낳았는데, 셋째 아들이었다. 정유년에 문과(文科)에 발탁되어 예문관 검열에 천거되었다가 대교로 승진하였다. 부모의 상을 거듭 당한 뒤 상복을 벗고서 다시 봉교에 부직(付職)되었다.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에서는 실직(實職)과 겸직(兼職)으로 설서에서 보덕까지 이르렀으며, 양사(兩司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는 정언, 헌납, 사간, 집의, 대사간을 역임하였고, 옥서(玉署 홍문관)에서는 부수찬에서 응교까지 이르렀다. 전랑(銓郞 이조 좌랑)에 천배(薦拜 추천 임명)되었고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 사복시 정(司僕寺正), 종부시 정(宗簿寺正)을 역임하였으며, 은대(銀臺 승정원)에서는 동부승지로부터 도승지에 이르렀다. 육조에서는 이조 · 호조 · 병조의 참의를 지내고, 호조 · 예조 · 공조의 참판을 지냈으며, 경조(京兆 한성부)에서는 좌윤과 우윤을 지냈다. 외임(外任)으로는 안변 부사(安邊府使), 강화 유수(江華留守)를 제수받았고, 별직(別職)으로는 지제교(知製敎), 겸교서교리(兼校書校理), 별겸춘추(別兼春秋), 동학 교수(東學敎授), 전라도 암행어사, 실록청 낭청(實錄廳郞廳), 천릉도감 도청(遷陵都監都廳),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오위도총부 총관(五衛都摠府摠管), 태상(太常 봉상시) · 괴원(槐院 승문원) · 주사(籌司 비변사)의 제거(提擧)에 제수되었으며, 자급(資級)은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영종(英宗 영조) 기미년(1739) 10 26일에 돌아가시니 수() 57세였다. 임금이 몹시 애도하여 윤음(綸音)을 내리고 특별히 관재(棺材)를 내렸다.

예전에 한원(翰院 예문관)에서 당시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서 사국(史局 춘추관)으로 들여보낼 때 적신(賊臣) 이진유(李眞儒)에 의해 밀려났다. 급기야 뭇 흉적들이 권력을 쥐고서 장차 사필(史筆)을 독점하기 위해 먼저 부군을 회인 현감(懷仁縣監)으로 내쫓아 부군이 천거되는 것을 아예 막아 버렸다. 얼마 안 있어 무옥(誣獄 신임사화(辛壬士禍))이 일어났는데 우리 백부(伯父) 장효공(章孝公 박사익(朴師益))이 위맹(僞盟)에 참여하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마침내 귀양을 가게 되자 부군은 시골집으로 물러 나와 버렸다.

영종이 새로 즉위하여 구신(舊臣)들을 불러들이게 되자, 부군은 마침내 연명(聯名)으로 상소를 올려 김일경(金一鏡)을 처형할 것을 청하였고, 또 시정(時政)에 대하여 극력 진언하였으며, 신치운(申致雲) 등이 박필몽(朴弼夢)에게 빌붙어 사국(史局)의 관직을 마구 차지한 것을 공박하였으며, 양사(兩司)와 합동으로 조태구(趙泰耈), 유봉휘(柳鳳輝)를 비롯한 역적들을 토죄(討罪)하고 사대신(四大臣)을 한 사당에 함께 제향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차자(箚子)를 올려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윤지완(尹趾完)을 묘정(廟庭)에서 출향(黜享)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조 좌랑으로 있을 때 판서가 공격(公格 공직의 격식)을 어긴 것을 비판한 것으로 임금의 뜻을 거슬러 흥양 현감(興陽縣監)으로 전출되었다가 얼마 뒤 돌아왔다. 누차 제수(除授)가 있었으나 부임하지 않다가, 특별히 남해 현령(南海縣令)에 보직되었다. 당시에 조정이 누차 평피(平陂)를 겪어 사람들이 일정한 지향이 없었으며 시류에 영합하는 자들은 국시(國是)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였고, 선악(善惡)을 뒤섞고 반드시 양편을 짝 지워 천거하는 것으로써 조정(調停)을 삼았으므로 사대부들이 오랫동안 답답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아침에 머리를 숙이면 저녁에 벌써 조정의 윗자리에 오르게 되곤 하였는데 부군만은 홀로 본마음을 그대로 지켰다. 일찍이 충신과 소인이 함께 등용되는 것을 개탄하고 수치로 여겨서 임금의 부름에 기어이 응하지 않았고, 그때마다 하옥되어 아침에 용서받았다가 저녁에 갇히기도 하고 해를 넘기도록 갇혀 지내기도 하였다.

삼전(三銓 이조 참의)을 맡은 뒤로 공정한 판단을 견지하여 관리의 선별을 엄격하게 함으로써 당시의 규례와 완전히 다르게 하니 당로자(當路者)들이 미워하여 기어이 중상하려고 하였다.

불초(不肖 박명원(朴明源) 자신을 가리킴)가 화평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를 들고 부군이 이조 참의로 오래 지체되어 있었기 때문에 규례대로 강화 유수(江華留守)에 승진되는 것으로 추천되었다. 그러자 당인(黨人)들이 묘당(廟堂)의 의론을 먼저 부탁했다는 이유를 들어 조정을 협박했으나 다행히 임금께서 그들의 간사함을 환히 아셨으며, 이에 부군은 벼슬길이 갈수록 험악함을 깊이 깨닫고는 스스로 조용히 물러나 지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광좌(李光佐)가 영의정이 되자 비변사의 관직을 극력 사임하였으니, 국민들이 역적이 날뛰도록 내버려 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였다.

부군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단정하였으며 용모가 아름다웠다. 몸을 조심하고 명성을 단속하여 내심과 외모가 모두 정숙하였으며, 도의(道義)를 숭상하고 유능하다고 명성이 나는 것을 억눌렀다. 또한 온화하면서도 씩씩하여 화복(禍福) 때문에 거취(去就)에 얽매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계부(季父) 문경공(文敬公 박필주(朴弼周))이 당세의 유종(儒宗 유학의 대가)이 되었고, 장효공(章孝公)은 원우완인(元祐完人)이라 일컬어졌으므로, 부군이 사우(師友)와 부형(父兄)의 사이에서 나눈 명론(名論)이 집 밖을 나가지 않고도 세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남들과 어울리고 쫓아다니며 열성적으로 영합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아무리 익숙한 친구일지라도 항상 처음 대면한 듯이 하여 생각 없이 함부로 말을 하지 않았다.

상하간에 논의를 하거나 일에 응하고 사람을 대할 때는 철두철미하고 화기애애하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정성이 간절하여, 남들로 하여금 즐겁게 만들고 비루한 마음이 움트는 것을 저절로 녹여 버렸다. 무인(武人)이나 역관(譯官)들은 문에 들이지도 않았으며, 또한 방 안에 조용히 앉아 일체 세속에서 연모하는 즐거움 따위는 마음속에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찍이 세도(世道)를 대신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선비(先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 함평 이씨(咸平李氏)로 증 참판 택상(宅相)의 따님이요, 구원(九畹) 이춘영(李春英)의 후손이다. 16세에 부군에게 시집왔는데, 서사(書史 경사류(經史類)의 책)에 밝으며 말이 적고 행동이 신중하였으며, 동서들과 잘 지내 규문(閨門)의 미덕이 세족(世族 대대로 벼슬한 집)의 모범이 되었다. 왕가(王家)와 혼인을 맺은 후로는 더욱 조심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으며, 부군보다 19년 뒤에 돌아가셨다.

4 2녀를 길렀는데, 아들은 진사 흥원(興源), 정언 창원(昌源), 형원(亨源), 불초(不肖) 명원(明源)이며, 사위는 김기조(金基祚)와 이도양(李度陽)이다.

장남은 아들이 셋인데, 종덕(宗德)은 판서요, 종악(宗岳)은 참의(參議)로 셋째 아들 형원의 집으로 출후(出后)하고, 상철(相喆)은 부윤(府尹)인데 명원의 후사가 되었다. 종덕(宗德)의 아들로는 정자(正字)에 추증된 수수(綏壽), 진사 홍수(紭壽), 경수(絅壽)이며, 종악(宗岳)의 아들로는 아무개와 아무개가 있다. 김기조는 계자(繼子) 택현(宅鉉)을 두었는데 주부(主簿)이고, 이도양은 1남 갑()을 두었는데 판서이다.

, 부군의 산소를 누차 옮기는 바람에 비석을 갖출 겨를이 없었고, 지금 아들과 손자로서는 다만 불초와 종악이 남아 있을 뿐이다. 더구나 돌아가신 이의 덕행을 징험해 줄 만한 사람으로서 아득한 50년 사이에 누가 생존하여 이를 근심할 것인가.

아침 이슬 같은 인생, 나 역시 곧 죽을 것이 두려워서 세벌(世閥)과 관력(官歷)과 자손(子孫)을 위와 같이 대략 기록해 둔다.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묘표음기(墓表陰記) : 묘표의 뒤에 새긴 글을 말한다. 박사정(朴師正)의 묘갈명(墓碣銘) 연암집 3 재종숙부 예조 참판 증 영의정공 묘갈명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D-001]의리(衣履) : 무덤에 함께 묻는 옷과 신발인데, 시신의 대유(代喩)로 쓰였다.

[D-002]동량(東亮)의 훈봉(勳封) : 박동량이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義州)로 호종한 공으로 호성 공신(扈聖功臣) 2등을 받고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진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D-003]겸교서교리(兼校書校理) : 교서관(校書館)의 종 5 품 관직으로 겸교리라고도 한다. 홍문관 교리와 구별하기 위해 여기서는 겸교서교리라고 하였다.

[D-004]이진유(李眞儒) : 1669~1730. 소론으로서 경종 1(1721) 김일경(金一鏡) 등과 함께 노론의 사대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이들을 축출하였다. 경종이 죽자 이조 참판이 되어 고부사(告訃使)로 청 나라에 다녀왔으며, 영조 즉위 후 유배 갔다가 불려 와 문초 중 장살되었다.

[D-005]위맹(僞盟) …… 되자 : 박사정은 경종 시해 음모를 고변(告變)한 목호룡(睦虎龍) 등 부사 공신(扶社功臣)의 회맹(會盟)에 불참하였다고 탄핵되어 경종 3(1723) 4월 유배되었다.

[D-006]신치운(申致雲) : 1700~1755. 경종 때 소론의 신예(新銳)로서 노론의 거두였던 권상하(權尙夏) 등을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영조 31(1755) 역모 혐의로 처형되었다.

[D-007]박필몽(朴弼夢) : 1668~1728. 소론 강경파로서 김일경 · 이진유 등과 함께 노론 사대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영조 즉위 초 무신란(戊申亂)이 나자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가담하려 했으나 여의치 못해 은둔하던 중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D-008]사대신(四大臣) :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를 가리킨다.

[D-009]이조 좌랑으로 …… 전출되었다가 : 영조실록 4 6 20일 조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D-010]평피(平陂) : 주역 태괘(泰卦) 구삼(九三)의 효사에 편평하기만 하고 치우치지 않은 경우는 없고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법은 없다.无平不陂 无往不復고 하였고,  서경(書經) 홍범(洪範) 치우치지 말고 왕의 의로움을 따르라.無偏無陂 遵王之義”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가 탕평하리라.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고 하였다.

[D-011]당로자(當路者)들이 …… 하였다 :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임금을 알현한 자리에서 이조 참의 박사정이 이흡을 대사간으로 의망한 것은 법을 굽혀 사정(私情)을 따른 조치라고 비난하였다. 英祖實錄 12 3 24

[D-012]묘당(廟堂) …… 들어 : 수찬 홍중일(洪重一)이 상소를 올려, 박사정이 아들 박명원이 부마가 되도록 의정부의 추천을 먼저 부탁하고廟薦先屬 순서를 뛰어넘어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하였다고 비난하였다. 英祖實錄 14 6 6

[D-013]유능하다고 …… 억눌렀다 : 원문은 絀抑聲能인데, ‘성능(聲能)’ 능성(能聲)’,  유능하다는 명성과 같은 뜻으로 쓴 것으로 보았다.

[D-014]원우완인(元祐完人) : 송 나라 때 철종 원우 연간(1086~1093)에 활동한 유안세(劉安世 : 1048~1125)를 가리킨다. 유안세는 사마광(司馬光)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철종 즉위 후에 사마광이 집권하자 그의 천거로 관직에 나갔다가 장돈(章惇)에 의해 밀려난 인물이다. 그 후 30년 동안 전전하다, 휘종(徽宗) 선화(宣和) 연간에 환관 양사성(梁師成)이 권력을 잡아 그에게 자식을 위해서라도 관직에 나오라는 편지를 보내자, 그는 내가 자식을 위했더라면 이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밀려난 지 거의 30년이 되도록 일찍이 권력을 가진 자에게 편지 한 자 주고받은 적이 없다. 나는 원우의 완인으로 그대로 남고 싶으니 그 마음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편지를 되돌려 보냈다. 사마광을 추종하고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는 당파를 원우당인(元祐黨人)이라 하며, 완인(完人)이란 덕행이 완미(完美)한 사람이란 뜻이다.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12 여기서는 박사익이 노론의 당론에 충실한 것을 칭송한 말이다.

[D-015]남들과 …… 않아 : 원문은 不喜徵逐爲翕翕熱인데, 한유(韓愈) 당 고 조산대부 상서고부랑중 정군 묘지명(唐故朝散大夫尙書庫部郞中鄭君墓誌銘)’ 중에 不爲翕翕熱이라 한 대목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한유의 문집 중에는 翕翕熱 翕翕然으로 되어 있는 이본(異本)도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문효세자(文孝世子) 진향문(進香文) 의빈(儀賓)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하늘이 우리 동방 돌보시사 / 天眷東方

광명하고 창성하니 / 景明靈昌

성신(聖神)으로 기르시고 / 聖造神育

인덕(仁德)으로 살찌우시네 / 德膴仁肪

백성 소망 살피시어 / 乃省群顒

탄생을 늦추지 않아 / 其降不遲

한 번 구해 진괘(震卦) 되고 / 一索成震

두 번 밝아 이괘(離卦) 되었네 / 兩明作离

영조의 증손이요 / 英宗曾孫

지금 임금의 세자시니 / 今王世子

나라 점()이 길조여서 / 國占用吉

선조를 계승하리라 하네 / 厥曰攸似

붉디붉은 궁중 대추 / 赫赫宮棗

백년 만에 다시 열리니 / 百年再實

숙조와 부합하는 영험을 / 肅祖靈符

오늘 다시 보게 되네 / 復覩今日

탄생하던 그날 저녁 / 誕彌之夕

붉은빛이 궁에 가득 / 紅光滿宮

추성(樞星)에 번개 두른 듯 / 如樞繞電

화저(華渚)에 무지개 지듯 / 如渚流虹

이 모든 징조들이 / 凡厥庶徵

처음부터 다 후하여 / 罔不篤初

봉의 바탕에 용의 무늬 / 鳳質龍章

실로 하늘이 예비하셨네 / 實天所儲

어질고 온화함은 / 仁孝溫文

본성에서 나왔으니 / 惟性之根

임금님이 오시면은 / 天顔載臨

기뻐하며 옹알대다 / 婉愉言言

임금님이 가시면은 / 玉趾言旋

돌아보며 앙앙 우네 / 顧懷喤喤

병풍 위의 글자 분별 / 屛間辨字

걸음마도 하기 전이요 / 時未扶床

쓴 약 권해 올릴 때도 / 誘進苦劑

반드시 책을 먼저 잡으셨네 / 必先方冊

한밤중에 화재 경고하시니 / 深宵警火

하늘이 준 예지로세 / 慧智天錫

코 골던 놈 곧 깨어나 / 彼鼾方覺

연소(延燒) 아니 되었다오 / 遂不延逮

청구를 처음 열 제 / 靑邱肇闢

요 임금의 첫해와 같았으니 / 叶堯初載

조정에서 세자 책봉 받으실 제 / 受冊大庭

해 빛나고 구름 상서로워라 / 日麗雲卿

쌍상투에 칠장복(七章服) / 雙髻七章

차비 갖춰 맞을 적에 / 備事將迎

백관의 모자 우뚝우뚝 / 會弁嵬峨

일만 눈이 다투어 보며 / 萬眸爭瞻

목을 빼고 발끝 드니 / 延頸跂踵

수염이 길게 드리웠네 / 若若其髥

의젓하게 앉았으니 / 穆然端坐

늘 본 것같이 여기되 / 若常覿之

기대거나 한눈팔지 않고 / 不凭不惰

두려워하거나 의심 않으니 / 不攝不疑

저절로 생긴 위엄 / 不威而嚴

하마 그 위()에 나타났네 / 已見其位

어릴망정 대인(大人)이요 / 雖幼大人

군자의 덕 갖추셨네 / 維德不器

이날 여러 재상들이 / 是日群卿

뛸 듯이 기뻐하며 절하고 / 忭躍俯跪

사랑으로 안고 싶었으나 / 愛若進抱

두려워서 물러나 기다렸지 / 畏將退俟

이듬해 중구일(重九日) / 翌歲重九

효경 수업 시작하니 / 肇講孝經

우리 왕가 빛난 전통 / 我家徽躅

나이와 때 꼭 맞았네 / 年辰適丁

반교(泮橋 성균관 다리)에 둘러서서 귀 기울이면 / 環橋聳聽

글 읽는 소리 경종(磬鐘)을 울리는 듯 / 若出磬鍾

천년의 밝은 운수 / 千載熙運

거듭 만나 아름다워라 / 於休重逢

사백 년의 긴긴 세월 / 厥禩四百

쌓고 쌓인 경사에다 / 積慶累洽

하늘 보답 또렷하여 / 天有顯報

큰 덕으로 왕위를 얻으리라 / 大德必得

장구한 국가 사업 / 靈長之業

영원하길 비옵고 / 永祈千秋

우리 임금 근심 없어 / 吾王無憂

병만을 근심했네 / 惟疾是憂

복이 내려 이튿날 나았으니 / 慶臻翌瘳

하늘 이치 어긋나리요 / 謂理無舛

성한 의식 거행키로 / 縟儀將擧

좋은 날을 가렸는데 / 吉日載選

하룻밤 새 이게 웬일 / 云胡一夕

온 장안 놀라 뒤숭숭 / 滿城駭遑

남종 여종에다 / 丫靑隸皂

늙은이와 어린애들까지 / 叟白童黃

허둥지둥 헐떡이며 / 顚仆喘汗

가슴 헤치고 하늘에 호소 / 袒胸龥旻

세자를 부르짖으며 / 長號貳極

모두 대신 백번이라도 죽으려 하네 / 擧懷百身

제사도 지내 봤고 / 珪璧旣卒

의술도 소용없어 / 刀圭亦窮

팔도는 슬픔으로 뒤덮이고 / 哀普八域

삼궁은 비통에 잠겼네 / 痛纏三宮

종묘 제사 어디 의탁하며 / 宗器靡托

신과 사람은 뉘를 의지하리 / 神人疇依

중륜의 칭송 스러지고 / 重輪撒謠

전성의 빛 가리우니 / 前星掩輝

상자 속 사계삼(四䙆衫)은 겨우 한 자요 / 篋䙆纔尺

소반 위 활은 겨우 석 자로세 / 盤弧厪三

슬프다 이 온 나라에 / 嗟爾匝域

수많은 어린아이들 / 有萬女男

홍역 한창 치성하여 / 疹之方熾

마을 곳곳 불 지필 때 / 衖鬨爐烘

왕께선 자식인 양 여기시고 / 王無弗子

내 몸처럼 아파하여 / 若恫在躬

영약을 집집이 돌리고 / 靈丹戶遍

의원을 보내 다 같이 치료받게 하여 / 臣跗汝偕

귀신에게서 빼앗아 내어 / 奪之鬼牙

어미 품에 돌려주니 / 還厥母懷

이 누구의 덕이더뇨 / 繄誰之賜

검은 머리 백성들아 / 群黎百姓

너희가 하루라도 안정되면 / 集汝一日

바로 네 경사로다 / 尙作汝慶

복령(茯苓) 백출(白朮) 모아다가 / 阜厥苓朮

산처럼 쌓았건만 / 猶成陵岡

하늘 실로 못 믿겠고 / 天固難諶

사람 또한 어질지 못하네 / 人亦不臧

저 의원놈 잡아다가 / 願執彼醫

승냥이나 범에게 던져 주었으면 / 投畀豺虎

아 슬퍼한들 어쩌리요 / 何嗟及矣

이내 마음 씀바귀 맛 / 我心荼苦

어린 세자 지극한 효성 / 沖齡至性

저승에 간들 다름없으리 / 無閒幽明

 원문 빠짐  / □□□□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문효세자(文孝世子) : 정조의 첫아들이다. 정조 6(1782) 의빈(宜嬪) 성씨(成氏)의 소생으로 태어나 정조 8년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정조 10(1786) 5월 병사(病死)하였다. 효창원(孝昌園)은 그의 묘소이다.

[C-002]의빈(儀賓) : 임금의 사위. 여기서는 금성위 박명원을 가리킨다. 당시 경희궁(慶熙宮)에 안치한 빈궁(殯宮)에 박명원이 종척(宗戚)으로서 참석하여 향을 올렸다.

[D-001]백성 소망 살피시어 : 군옹(群顒)은 군생(群生)이 앙모(仰慕)함을 뜻한다. 회남자(淮南子) 숙진훈(俶眞訓) 이런 까닭에 성인은 음양의 기를 호흡하니 군생이 모두 앙모하여 그 덕을 우러러 유순하게 따른다.是故聖人呼吸陰陽之氣 而群生莫不顒顒然 仰其德以和順고 하였다. 옹옹연(顒顒然)은 앙망하는 모양을 뜻한다.

[D-002]한 번 …… 되고 : 주역 정전(程傳)에 의하면 진괘(震卦)는 나라를 계승하는 왕의 장남(長男)을 상징한다. 양효(陽爻)가 두 음효(陰爻)의 아래에 있어 하늘과 땅의 교접을 한 번 구하여 진()이 되니, 생물의 장()이므로 장남이 된다.乾坤之交 一索而成震 生物之長也 故爲長男고 하였다. 여기서는 장남이 태어났다는 뜻이다.

[D-003]두 번 …… 되었네 : 3개의 효()로 된 소성괘(小成卦) ()는 밝음을 상징하는데, 이것이 중복된 것이 대성괘(大成卦) ()이다. 이괘는 왕이 선왕(先王)의 명덕(明德)을 계승하여 선정을 베풀 조짐을 상징한다. 주역 이괘 상사(象辭)에 이르기를, “밝음이 중복되어 이()를 일으키니 대인(大人)이 이로써 밝음을 계승하여 천하를 밝게 비춘다.明兩作離 大人以繼明 照于四方고 하였다. 여기서는 왕위를 능히 세습할 만한 인물이 태어났다는 뜻이다.

[D-004]선조를 계승하리라 하네 : 점사(占辭)의 내용을 가리킨다. ()는 사속(嗣續)의 뜻으로, 선조의 유업(遺業)을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간(斯干) 선조를 계승하여 담장이 백도나 되는 집을 지었네.似續妣祖 築室百堵라는 구절이 있다.

[D-005]숙조(肅祖) …… 되네 : 숙조는 공경하는 선조란 뜻으로, 여기서는 숙종(肅宗)을 가리킨다. 정조 10 6월 판돈녕부사 김종수(金鍾秀)가 지어 올린 문효세자지문(文孝世子誌文)에 의하면, 경희궁(慶熙宮)에 있던 큰 대추나무가 한동안 시들었다가 현종(顯宗) 2(1661)에 갑자기 꽃을 피우더니 그해 가을에 숙종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그 후 대추나무가 다시 시들었다가 문효세자가 태어날 때에도 꽃을 피우는 이적(異蹟)을 나타냈으며, 정조는 대추가 익자 측근의 신하들에게 이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夢梧集 卷7 文孝世子誌文

[D-006]추성(樞星) : 북두칠성의 첫째 별을 말한다. 황제(黃帝)는 그의 어머니가 번갯불이 추성을 에워싸는 것을 보고 감응하여 잉태하게 되었다고 한다.

[D-007]화저(華渚)에 무지개 지듯 : 황제(黃帝)의 아들 백제(白帝) 소호씨(少昊氏)는 그의 어머니가 큰 별이 무지개처럼 화저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감응하여 낳았다고 한다. 宋史 卷23 符瑞志 그러므로 왕의 탄생을 유저(流渚)나 유홍(流虹)이라 한다.

[D-008]실로 하늘이 예비하셨네 : ()는 예비로 저축한다는 뜻으로, 세자를 저군(儲君)이라 하고, 세자를 세우는 것을 건저(建儲)라고 한다.

[D-009]반드시 …… 잡으셨네 : 문효세자는 말을 배우기 전부터 이미 책을 좋아할 줄 알아서 글자가 씌어진 병풍을 곁에 두게 했으며, 몸이 아파 울 적에도 장난감이 아니라 책을 가져다 손에 쥐어 주면 진정되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천자문(千字文)이 닳아지고 손때가 탔을 정도라고 한다. 夢梧集 卷7 文孝世子誌文

[D-010]청구(靑邱) …… 같았으니 : 삼국유사(三國遺事) 1 기이(紀異) 고조선(古朝鮮) 조에 위서(魏書)를 인용하여, 고조선의 개국이 요 임금과 같은 때與高同時라고 하였다.

[D-011]칠장복(七章服) : 무늬가 장식된 대례(大禮) 제복(祭服), 즉 면복(冕服)을 장복(章服)이라 한다. 황제는 12종의 무늬를 장식한 12장복을 입고, 왕은 9장복을 입는다. 왕세자는 화충(華蟲) · () · 종이(宗彛) · () · 분미(粉米) · () · ()의 무늬를 장식한 7장복을 입는다.

[D-012]군자의 덕 갖추셨네 : 논어 위정(爲政)에서 공자는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君子不器라고 하였다. 특정한 용도를 가진 그릇처럼 특정한 기능만을 갖춘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D-013]우리 …… 맞았네 : 문효세자는 네 살이 되던 정조 9(1785) 중양절(重陽節) 날부터 효경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날은 숙종이 처음 효경을 배웠던 연월일(年月日)로부터 꼭 재주갑(再周甲 : 120)이 되는 때였다고 한다. 夢梧集 卷7 文孝世子誌文

[D-014]천년의 …… 아름다워라 : 기자(箕子)가 건국한 이래 천년이 지나 다시 조선(朝鮮)이 중흥했다는 뜻이다.

[D-015]사백 년의 긴긴 세월 : 조선왕조 건국 이후 400년이 지났다는 뜻이다.

[D-016] …… 얻으리라 : 중용장구  17 장에서 공자는 순() 임금의 위대한 효성을 칭찬하면서 그러므로 큰 덕은 반드시 그 지위를 얻는다.故大德必得其位고 하였다.

[D-017]우리 …… 근심했네 : 논어 위정(爲政)에서 맹무백(孟武伯)이 효()에 관해 묻자 공자는 부모가 오직 그의 병만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다.父母唯其疾之憂라고 답하였다. 병을 앓는 일 외의 일체의 다른 일로 부모를 근심하게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효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는 문효세자가 다른 일로는 정조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았는데 다만 홍역을 앓아 정조가 걱정했다는 뜻이다.

[D-018]제사도 지내 봤고 : 시경 대아(大雅) 운한(雲漢) 규벽도 다 썼는데 왜 호소를 들어 주시지 않나.圭璧旣卒 寧莫我聽라고 하였다. 규벽(圭璧) 규벽(珪璧)’과 같으며, 제사 지낼 때 예물로 바치는 옥()이다.

[D-019]삼궁(三宮) : 왕과 대비(大妃)와 왕비를 가리킨다.

[D-020]중륜(重輪) : 태양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광채를 가리키는 것으로 고대에는 태자(太子)를 이에 비유하였다.

[D-021]전성(前星) : 심성(心星)의 세 별 중의 하나로서 세자(世子)를 가리킨다. 한서(漢書) 27 오행지(五行志) 심성 가운데 큰 별은 천왕(天王), 앞의 별은 태자(太子), 뒤의 별은 서자(庶子)를 상징한다.” 하였다.

[D-022]사계삼(四䙆衫) : 동자(童子)의 평상복을 가리킨다. 居家雜服攷 卷3 幼服

[D-023]소반 …… 석 자로세 : 세자가 태어난 지 3일 뒤에 활 쏘는 사람이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로 천지와 사방에 여섯 번 쏜다. 세자가 장차 원대한 뜻을 품기를 기대하는 취지에서라고 한다. 禮記 內則

[D-024]의원을 …… 하여 : ‘신부(臣跗)’ ()’는 황제(黃帝) 때의 명의(名醫)인 유부(兪跗)를 가리킨다. 유부는 편작(扁鵲)과 함께 유편(兪扁)’이라 불렸으며, 명의의 치료술을 유편지술(兪扁之術)이라 하였다. 당시 정조는 한성부(漢城府)에 명하여 양반과 상민을 막론하고 자력으로 약물을 준비할 수 없는 자들에게는 의사(醫司)가 의원을 지정하여 진찰하고 약물도 공급하도록 했다. 正祖實錄 附錄 行狀

[D-025]원문 빠짐 : 이본에는 장지를 정하니 율목의 언덕이라.去隧載卜 栗木之原는 구절이 더 있다. 율목은 고양군(高陽郡) 율목동으로 현재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효창공원 자리를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정종대왕(正宗大王) 진향문(進香文)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천 년 지나 성인 한 분 / 千載一聖

동방에서 왕위를 받으시니 / 誕膺東方

기자(箕子) 홍범(洪範)으로 다시 질서 세우고 / 箕範再敍

문운(文運) 거듭 창성했네 / 奎運重昌

공자(孔子) 생각 주공(周公) 마음 / 孔思周情

계승하고 본받아서 / 祖述憲章

크고 넓은 정책 펴니 / 宏規鴻猷

 · 당조차 옹색하다 여기셨네 / 狹陋漢唐

재위하신 스물네 해 동안 / 二紀光御

한결같이 건강의 덕을 지켜 / 一德乾剛

궁원 호칭 바로잡고 / 號正宮園

선왕(先王)을 깊이 사모하셨네 / 慕深羹牆

총악 같은 간신 잘라 버리고 / 璁萼折萌

헌기 같은 외척 없애 버리니 / 憲冀鋤强

밝게 내건 큰 의리가 / 大義昭揭

모든 왕에 우뚝하네 / 卓冠百王

교화하고 상벌 주기 / 秩敍命討

우로(雨露) 같고 상설(霜雪) 같아 / 雨露雪霜

누가 감히 현혹하며 / 孰敢疑眩

누가 감히 속이리 / 孰敢譸張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즈음에 / 向背之際

군자와 소인이 판명되나니 / 斯判陰陽

저 일만 삼천 선비들 / 彼萬三千

어찌하여 광풍처럼 날뛰는가 / 云胡颷狂

군중으로써 위협하여 / 要脅以衆

우리나라의 법도(法度) 거스르니 / 悖我典常

말세 풍속 길을 헤매며 / 末俗昏衢

자빠지고 쓰러지네 / 醉顚汗僵

어찌 악취가 다르랴만 / 豈不異臭

같은 속셈 이게 웬일 / 柰此同腸

화복과 이해 따라 / 利害禍福

허둥대는 꼬락서니 / 所以披猖

그 원인을 따져 보면 / 究厥所原

망녕된 생각이 주가 된 것 / 妄度爲將

거센 물결 넘실넘실 / 滔滔狂瀾

뉘라 능히 막을쏜가 / 誰能力鄣

의리는 대소를 막론하고 / 理無巨細

털끝만 한 차이로 나뉜다네 / 析在毫芒

이 의리를 준수하는 자 / 嚴此義者

상서롭고 길하거니와 / 迺吉迺祥

이 이치를 등진 자는 / 北是理者

올빼미 아니면 승냥이라 / 爲梟爲狼

옛 성왕(聖王)의 훌륭하신 예절 / 皇王盛節

이 대방을 뉘 지키리 / 孰此大防

황극(皇極)에 모이고 귀의하게 하여 / 會極歸極

도를 따라 모두 선량하게 하니 / 與道偕臧

어허, 이 지극한 덕 / 嗚呼至德

뉘라서 잊게 하리 / 俾也可忘

용도각(龍圖閣)을 세우고 / 龍圖建閣

천책부(天策府)를 만드니 / 天策設廂

진실로 문무 갖추어 / 允文允武

그 공 그 꾀 아름답네 / 謨烈思皇

백사(百事)가 절도에 맞아 올바르시니 / 百度惟貞

이에 비로소 대양하였네 / 昉此對揚

형벌을 신중히 하고 농업을 중시하여 / 欽刑重農

일념으로 백성을 보살피시니 / 一念如傷

형벌을 감해 주신 은혜 뼈에 사무치고 / 恩蠲浹髓

내린 윤음(綸音) 빛나고 빛나 / 寶綸煌煌

모진 추위 심한 더위에도 / 祈寒盛暑

종묘 제사라면 몸소 나서고 / 必躬烝嘗

상신 더욱 중히 하니 / 尤重上辛

밝은 덕이 향기롭네 / 明德馨香

친히 지은 백 권 문집 / 御製百卷

성스러운 방략 원대하여라 / 聖謨洋洋

정주 학문 으뜸 삼고 / 學宗程朱

복희(伏羲) 황제(黃帝) 법통 이어 / 統接羲黃

대지 같고 바다 같은 학문으로 / 地負海涵

동방에 유교를 전파하셨네 / 吾道其東

 

()은 협운(叶韻)으로 도()와 량()의 반절(反切),  으로 발음한다.

세도(勢道) 물리치고 속악(俗樂) 바로잡기 / 黜霸正䵷

쇠를 긁어내고 쭉정이 솎아 내듯 / 剔鐵簸糠

열성조(列聖朝) 가법 따라 / 列聖家法

존화양이(尊華攘夷) 준수하고 / 式遵尊攘

춘추대의(春秋大義) 따라 / 一部陽秋

손수 조정의 기강 이끄시니 / 手提天綱

백성 중의 비범한 인물들 / 赤子龍蛇

임금께 대도(大道) 보였도다 / 示我周行

오늘날의 서학(西學)이란 / 今之西學

양주(楊朱) 묵적(墨翟)보다 심하기에 / 甚於墨楊

사서(邪書)를 불태우고 / 火其邪書

우리 백성 사람 되게 하셨네 / 人吾黔蒼

맹자(孟子)처럼 사설(邪說)을 물리치니 / 辭廓孟闢

우 임금처럼 크신 공로 / 功侔禹荒

선왕의 사업 잇고 앞길 개척해 / 繼往開來

세자 위해 좋은 계책 전했으니 / 燕詒元良

구여 칭송 드높고 / 九如頌騰

사중 노래 길었도다 / 四重歌長

요순의 도 한번 꽃피우리라 / 堯舜一花

은인을 용상(龍床) 앞에 두시더니 / 銀印在床

천만년 지나도록 / 謂千萬年

강녕(康寧) 길이 받으시리 믿었는데 / 永受色康

어쩌자고 하루저녁 / 胡寧一夕

하늘나라로 떠나셨소 / 遽遐雲鄕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듯 / 地坼天崩

온 세상 사람들 부모를 여읜 듯이 여기네 / 率土如喪

남방에서 부음 듣고 / 奉諱南服

북을 향해 통곡하네 / 長號北望

팔도 백성 모두 엎디어 절하며 / 頓顙八埏

천지 일월 아득아득 / 宇宙茫茫

산과 바다도 슬피 울고 / 山哀海哭

피눈물이 눈에 가득 / 血淚盈眶

지난날 깊은 인덕(仁德) / 驗昔深仁

이 큰 슬픔 보니 알겠도다 / 觀此巨創

수렴하신 성모님이 / 聖母垂簾

희정당에 납시어서 / 熙政一堂

원우의 덕 짝하시고 / 媲懿元祐

주강 미덕 이으시사 / 嗣徽周姜

어린 임금 도우시니 / 保佑聖躬

황상원길(黃裳元吉)과 화합하도다 / 吉叶黃裳

하늘이 지으신 화성에는 / 天作華城

뽕나무 가래나무 우거졌네 / 有菀梓桑

가까이 선침 있어 / 仙寢密邇

대왕을 장차 모시리라 / 劍舃將藏

신이 오 년 동안 붓을 꽂고 / 臣五載簪筆

대왕을 곁에 모셔 / 黼扆之傍

각별히 입은 총애 / 偏荷寵私

하해(河海)엔들 비하리까 / 河海莫量

맡은 직책 얽매이어 / 符守所攖

흠위도 바라보지 못했도다 / 廞衛靡瞻

 

()은 협운으로 제()와 량()의 반절,  으로 발음한다.

욕의조차 못한 몸이 / 身未褥蟻

활을 안고 방황하며 / 抱弓彷徨

삼가 토산 제물 마련하고 / 敬修壤奠

명수 따라 올립니다 / 明水在觴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 정조 24(1800) 6월 정조가 승하하자 충청 감사가 당시 면천 군수로 재임 중이던 연암을 진향문 제술관(進香文製述官)으로 차출했으므로, 충청 감사를 대신해서 이 글을 지었다. 과정록 3에도 이 진향문이 인용되어 있다.

[D-001]동방에서 왕위를 받으시니 : 서경(書經) 무성(武成)에서 무왕(武王)은 선왕인 문왕(文王)을 예찬하면서 천명을 크게 받으셨다.誕膺天命고 하였다. 탄응(誕膺)은 천명이나 왕위를 이어받는 것을 뜻한다.

[D-002]기자(箕子) …… 세우고 : () 나라 무왕(武王)이 기자에게 인륜(人倫)의 질서에 관해 묻자, 기자는 하늘이 우() 임금에게 주었다는 홍범구주(洪範九疇)가 곧 인륜의 질서라고 답하였다. 書經 洪範

[D-003]건강(乾剛) : 주역(周易) 잡괘전(雜卦傳) 건괘는 강함을 상징하고 곤괘는 부드러움을 상징한다.乾剛坤柔고 하였다. 건강의 덕乾剛之德은 왕의 권위를 뜻한다.

[D-004]궁원(宮園) 호칭 바로잡고 : 정조의 어머니 혜빈(惠嬪)을 혜경궁(惠慶宮)으로 높이고,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하여 그 묘를 현륭원(顯隆園)으로 정한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D-005]선왕(先王)을 깊이 사모하셨네 : 정조 10(1786) 왕명으로 열성조(列聖朝) 19대의 업적을 서술한 갱장록(羹牆錄)을 간행한 일을 말한다.

[D-006]총악(璁萼) : () 나라 세종(世宗)의 신하인 장총(張璁 : 1475~1539)과 계악(桂萼 : ?~1531)을 가리킨다. 세종이 황제가 되어 자신의 생부 흥헌왕(興獻王)을 추숭하려고 하자 장총과 계악이 세종의 뜻에 영합하여 효종(孝宗)을 황백고(皇伯考), 흥헌제를 황고(皇考)로 부를 것을 청하고, 이에 반대하는 조정의 수많은 신하들을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다. 여기에서는 정조 즉위년인 1776년에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추숭하자고 주장을 하다가 죽음을 당한 이덕사(李德師)와 조재한(趙載翰) 등을 가리킨다.

[D-007]헌기(憲冀) : 후한 화제(和帝)의 외숙인 두헌(竇憲 : ?~92)과 환제(桓帝)의 외숙인 양기(梁冀 : ?~159)를 가리키며, 모두 황제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전횡한 사람이다. 여기에서는 정조 즉위년에 죽음을 당한 정조의 외종조부 홍인한(洪麟漢)과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양자 정후겸(鄭厚謙) 등을 가리킨다.

[D-008]밝게 …… 의리가 : 정조는 즉위 직후 홍인한 등을 역적으로 사사(賜死)한 사건의 전말을 밝힌 명의록(明義錄)을 간행하였다.

[D-009]교화하고 상벌 주기 : 서경 고요모(皐陶謨), 하늘이 부여한 질서天敍에 오전(五典 : 오륜)이 있고, 하늘이 부여한 등급天秩에 오례(五禮)가 있으며, 하늘이 임명하심天命은 덕이 있기 때문이니 오복(五服)으로써 그런 사람을 표창하고, 하늘이 성토하심天討은 죄가 있기 때문이니 오형(五刑)을 그런 사람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서() · () · () · ()는 백성들을 전례(典禮)로써 교화하고 신하들에게 상벌을 공정하게 시행하는 것을 뜻한다.

[D-010]일만 삼천 선비들 : 정조 16(1792) 4 27일 사도세자 30주기에 즈음하여 영남 유생 이우(李㙖)  1 57명이 연명하여 사도세자의 죄를 신원하고 그를 모해한 무리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정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5 7일에 다시 1 368명이 연명하여 2차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 노론(老論)의 이병모(李秉模), 서유린(徐有隣), 정민시(鄭民始) 등이 동조하고 소론(少論) 유생 700여 명도 동조하는 상소를 올렸다. 일만 삼천의 선비라고 한 것은 이들을 포함한 숫자로 보인다. 正祖實錄

[D-011]거센 …… 막을쏜가 :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 백천(百川)을 막아 동으로 흐르게 하고, 거꾸로 흐르는 거센 물결을 돌이켰다.障百川而東之 廻狂瀾於旣倒고 하였다. 불교나 도교와 같은 이단사설(異端邪說)의 유행에 맞서 유교의 정통을 수호한 공로를 예찬한 말이다.

[D-012]올빼미 : 올빼미는 어미를 잡아먹는다고 하여 불효조(不孝鳥)로 간주되었다. 부모를 잡아먹는 극악무도한 인간을 효경(梟獍)이라 한다.

[D-013]대방(大防) : 백성들이 악에 빠지는 것을 막아 주는 큰 둑이란 뜻이다. 옛 성왕(聖王)들은 이를 위해 예절을 제정하였다.

[D-014]황극(皇極) …… 하여 : 황극은 제왕(帝王)이 천하를 통치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을 말한다. 이 구절은 서경 홍범의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왕의 도가 탕탕(蕩蕩)하며, 편당함이 없고 편벽됨이 없으면 왕의 도가 평평(平平)하며, 상도(常道)에 위배됨이 없고 기울어짐이 없으면 왕의 도가 정직(正直)할 것이니, 그 극()에 모여 그 극()에 돌아올 것이다.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無反無側 王道正直 會其有極 歸其有極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D-015]용도각(龍圖閣) : () 나라의 왕실 도서관으로서 황제의 문집, 도화(圖畵), 세보(世譜) 등을 보관한 곳이다. 여기에서는 정조가 왕실 도서관으로 설치한 규장각(奎章閣)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D-016]천책부(天策府) : 당 나라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 설치한 군부(軍府)의 이름으로 이세민은 이를 통해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는 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한 친위 군영(親衛軍營)인 장용영(壯勇營)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D-017]진실로 문무 갖추어 : 시경 노송(魯頌) 반수(泮水) 진실로 문무 갖추어 조상을 빛내시니允文允武 昭假烈祖라 하였다. () 나라 임금을 칭송한 말이다.

[D-018]백사(百事) …… 올바르시니 : 서경 여오(旅獒) 귀와 눈에 부림을 당하지 않으면 백사가 절도에 맞아 올바를 것이다.不役耳目 百度惟貞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임금이 성색(聲色)을 멀리하였다는 뜻이다.

[D-019]대양(對揚) : 신하가 왕명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D-020]일념으로 백성을 보살피시니 : 맹자 이루 하(離婁下) 문왕(文王)은 백성을 마치 다친 사람처럼 보살피셨다.視民如傷고 하였다.

[D-021]형벌을 …… 사무치고 : 정조는 재판과 형벌에도 신중을 기하여 억울한 죄인이 나오지 않도록 했으며, 형구(刑具)를 정비하기 위해 흠휼전칙(欽恤典則)을 편찬하게 했다. 정조의 판결을 모은 심리록(審理錄) 26권이 있다.

[D-022]내린 …… 빛나 : 정조는 농정(農政)을 권장하는 윤음을 여러 차례 내렸는데, 그중 특히 정조 22(1798)에는 권농정(勸農政) 구농서(求農書)의 윤음을 내려 널리 농사 진흥책을 구하였다.

[D-023]상신(上辛) …… 하니 : 상신은 매월 상순(上旬)의 신일(辛日)에 해당하는 날짜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정월(正月) 신일에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특히 중하게 다룬 것을 말한다.

[D-024]밝은 덕이 향기롭네 : 서경 군진(君陳) 훌륭한 정치는 향기로워 신명을 감응케 한다. 기장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밝은 덕이 오직 향기롭다.至治馨香 感于神明 黍稷非香 明德惟馨고 하였다.

[D-025]백 권 문집 : 홍재전서(弘齋全書) 100권을 가리킨다.

[D-026]성스러운 방략 원대하여라 : 서경 이훈(伊訓)에서 이윤(伊尹)은 탕() 임금의 손자 태갑(太甲)이 왕위에 오르자, 선왕(先王) 성스러운 방략은 원대하고, 훌륭한 교훈은 매우 분명하다.聖謨洋洋 嘉言孔彰고 하면서 이러한 선왕의 모훈(謨訓)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훈계하였다.

[D-027]동방에 유교를 전파하셨네 :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가 오도는 일관되어 있다.吾道一以貫之고 하였듯이, ‘오도(吾道)’는 공자의 가르침 즉 유교를 말한다. 또한 후한(後漢) 때 정현(鄭玄)이 마융(馬融)의 문하를 떠나자 마융이 오도가 동으로 갔구나.吾道東矣라고 탄식하였다고 한 고사에서, 동쪽으로 유학이 전파되었다는 뜻의 오도동(吾道東)’이란 성어가 생겼다.

[D-028]임금께 대도(大道) 보였도다 : 시경 소아(小雅) 녹명(鹿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여 나에게 대도(大道)를 제시했네.人之好我 示我周行라고 하였다. 신하들에게 잔치를 후히 베풀어 화합을 도모하니, 신하들이 감복하여 임금인 자신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대도(大道)를 피력했다는 뜻이다.

[D-029]맹자(孟子)처럼 …… 공로 : 정조가 천주교를 배척한 것은 맹자가 피사(詖辭) · 음사(淫辭) · 사사(邪辭) · 둔사(遁辭)를 확청(廓淸)함으로써 양주와 묵적 같은 이단(異端) 사설(邪說)을 배척한 것과 같으며, 우 임금이 치수(治水) 사업으로 홍수를 막은 공로에 비할 만하다는 뜻이다.

[D-030]구여(九如) : 임금의 덕을 칭송하여 산과 같고如山 언덕과 같고如阜 산마루와 같고如岡 구릉과 같고如陵 냇물이 한창 흘러오는 것과 같으며如川之方至 초승달과 같고如月之恒 떠오르는 해와 같고如日之升 장구한 남산과 같고如南山之壽 무성한 송백과 같음如松柏之茂을 말한 것이다. 詩經 小雅 天保

[D-031]사중(四重) : 말을 중하게 하고重言 행동을 중하게 하고重行 용모를 중하게 하고重貌 좋아하는 것을 중하게 하는 것重好을 말한다. 揚子 法言

[D-032]요순(堯舜) …… 두시더니 : 영조 말년 대리청정할 때 정조는 영조에게 상소를 올려 승정원일기에서 자신의 생부(生父)인 사도세자와 관련된 기사를 세초(洗草)해 줄 것을 간청했다. 정조의 효성에 감동한 영조는 이를 허락하고 정조에게 유서(諭書)와 함께 효손(孝孫)’이라 새긴 은으로 주조한 도장을 하사했다. 그 후 정조는 조회할 때나 행차할 때나 항상 이 유서와 은인(銀印)을 앞에다 두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정조는 영조와 사도세자에 대해 효도를 다하고자 했으므로, 정조실록에 실린 행장에서도 맹자(孟子)에서 요순의 도는 효제일 따름이다.堯舜之道 孝悌而已矣란 말을 인용하여 정조의 효를 예찬했다.

[D-033]하늘나라로 떠나셨소 : 운향(雲鄕)은 선계(仙界)를 가리킨다.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성인(聖人) 천세토록 살다가 인간 세상이 싫어지면 떠나서 신선이 되어 올라가 저 흰 구름을 타고 제향에 이른다.千歲厭世 去而上僊 乘彼白雲 至於帝鄕고 하였다.

[D-034]성모님 : 영조(英祖)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를 가리킨다. 순조가 11세로 즉위하자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D-035]원우(元祐)의 덕 짝하시고 : 원우는 송() 나라 철종(哲宗)의 연호이다. 철종이 9세로 황제에 오르자 조모 선인태후(宣仁太后) 고씨(高氏)가 수렴청정을 하여 사마광(司馬光), 여공저(呂公著), 문언박(文彦博)을 재상으로 삼아 나라를 안정시켰다.

[D-036]주강(周姜) 미덕(美德) 이으시사 : 주강은 주() 나라 태왕(太王)의 비()이자 문왕(文王)의 조모(祖母)인 태강(太姜)을 말한다. 현명하고 덕이 있었다. 시경 대아(大雅) 사제(思齊) 태사께서 태강의 미덕을 이으시니太似嗣徽音라고 하였다.

[D-037]황상원길(黃裳元吉) : 주역 곤괘(坤卦) 육오(六五)의 효사(爻辭) 황색 치마이니 크게 길하리라.黃裳 元吉 하였는데, 이는 여자로서 높은 신분에 있으면서 중도를 지키고 아래에 거처하면 크게 길하다는 뜻이다.

[D-038]뽕나무 가래나무 우거졌네 : 뽕나무와 가래나무桑梓는 부모가 자손에게 물려주고자 심는 나무들이다. 따라서 고향이나 노부모를 상징하는데, 여기서는 정조의 부친인 사도세자가 묻힌 곳이라는 뜻이다.

[D-039]선침(仙寢) :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인 현륭원(顯隆園)을 가리킨다. 정조의 능침인 건릉(健陵)은 현륭원의 동편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두 능침은 현재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화산(花山)에 나란히 있다.

[D-040]대왕을 장차 모시리라 : ‘검석(劍舃)’은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죽어 교산(橋山)에 묻혔는데, 산이 무너지면서 관이 텅 비고 칼과 신만 관에 남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列仙傳

[D-041]붓을 꽂고 : ‘잠필(簪筆)’은 모자에다 붓을 꽂아 두어 측근에서 임금의 말씀을 기록할 준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사관(史官)이나 간관(諫官), 승지(承旨) 등의 직무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D-042]흠위(廞衛)도 바라보지 못했도다 : 흠위는 국장(國葬)의 행렬에 동원된 군대를 말한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D-043]욕의(褥蟻) : 임금과 함께 죽는 것을 말한다.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 나오는 안릉군(安陵君)의 고사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D-044]활을 안고 방황하며 : 황제(黃帝)가 죽을 때 용을 타고 승천하자, 용을 타지 못한 신하들이 용의 수염을 붙잡는 바람에 용의 수염이 뽑혀 떨어지면서 황제가 지니고 있던 활도 함께 떨어졌으므로, 백성들이 그 활과 용 수염을 끌어안고 통곡했다고 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여기서는 죽은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D-045]명수(明水) : 제사 때 올리는 맑은 물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양 경리(楊經理) () 치제문(致祭文) 사신(詞臣)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우리 동방 되살린 건 / 再造我東

누구의 공이던고 / 繄誰之功

천자의 명을 받은 / 天子攸命

창서 양공 이분일레 / 蒼嶼楊公

직책은 경리로서 / 職是經理

문무 재주 겸했고 / 才兼文武

범과 용 모양 부절(符節) 차니 / 虎符龍節

옛 윤길보(尹吉甫)에 견줄 만하네 / 視古吉甫

천과 휘두르며 / 天戈所揮

왜놈 소탕 맹세하니 / 誓蕩島夷

어사중승(御史中丞) 배도(裴度) / 如御史度

회서(淮西) 군사 순무하듯 / 往撫淮師

동작나루에서 군대 살피고 / 觀軍銅雀

자각을 호위하네 / 圍碁紫閣

호령소리 들릴세라 / 不聞號令

방략 지시 가만가만 / 潛授方略

으뜸 공은 뉘의 차지 / 孰占頭功

휘하에 서마 있어 / 帳有西麻

삼천 기병 풀어다가 / 發騎三千

소사에서 적 맞으니 / 迎敵素沙

깃대 하나 둑에 꽂고 / 塘置一旗

묵묵히 적의 동정 살피어서 / 黙察偃竪

천리 밖의 승부 결단 / 千里決勝

제 손바닥 금을 보듯 / 如掌其覩

적이 모인 남쪽 땅에 / 妖氛南天

나비 모양 진 만들고 / 蝴蝶爲陣

아침 해가 떠오르며 거울처럼 빛나자 / 輝鏡朝旭

칼 휘두르고 나아갔네 / 舞劍以進

이에 천자의 군사 / 于時天兵

다리 밑서 철갑을 걸치고 / 浴甲橋下

재빠른 삼백 기병(騎兵) / 弄猿三百

한꺼번에 말 채찍질 / 一時鞭馬

 원문 빠짐 - / □□□□

말굽 아래 무찔렀으니 / 悉殲蹄間

이 한 접전 아니면 / 微此一鏖

교관(郊關) 지키기 어려웠지 / 難保郊關

번개처럼 군사 달려 / 全師電馳

저 울산(蔚山) 성채 쳐부수니 / 搗彼蔚砦

왜놈 수괴 궁지 몰려 / 凶渠窮蹙

사로잡긴 시일 문제 / 指日可械

반구정(伴鷗亭) 태화강(太和江)에서 / 鷗亭和江

적의 발톱 뽑아 버렸지만 / 落其牙距

몰린 왜놈 전세를 관망하며 / 困獸隙鬪

도산성(島山城)에서 버티네 / 島山是拒

절지를 앙공하며 / 絶地仰攻

막 불을 놓아 잡으려니 / 方圖熏穴

마침 하늘 찬비 내려 / 會天凍雨

손가락 떨어지고 살갗 찢어졌네 / 指墮膚裂

남은 도적 못 벤 것은 / 殘寇逋誅

때가 아직 불리한 탓 / 緣時未利

포위 풀고 잠시 철수 / 暫撤重圍

뒷 계획을 의논하자 / 後擧是議

간교한 참설 꾸며 / 讒說如簧

성대한 공적 헐뜯으며 / 忮毁茂績

공이 패전 숨기고 / 誣公掩敗

적을 풀어 줬다 무고하니 / 咎公縱敵

온 나라가 놀라 부르짖으며 / 擧國驚號

천조(天朝)에 달려가 송사했는데 / 走訟天朝

사신 내왕 빈번했어도 / 冠蓋旁午

비방 여론 막지 못하였네 / 莫遏群囂

마침내 공이 해임되어 / 遂解重務

행차 돌려 돌아가니 / 旌棨言旋

도성 안의 백성들이 / 都人士女

앞서 뒤서 달려오네 / 奔走後先

수레 잡고 통곡하나 / 攀轅痛哭

뉘 이 걸음 만류하리 / 莫挽其行

왜 조금 더 머물러서 / 胡不少留

우리를 끝까지 지켜 주지 않나 / 究我生成

결국 왜놈 잡은 것은 / 終焉獲醜

실로 공의 위엄 덕분 / 寔公餘威

백성들이 안정되고 / 生靈奠妥

온 나라가 깨끗해졌네 / 區宇淸夷

무릇 우리 조선 사람 / 凡我東人

은혜 입고 못 갚았으니 / 含恩未報

눈앞에 뵈옵는 듯한 정성으로 / 如見之誠

빛나는 사당 세웠도다 / 有奐廟貌

, 군탄의 해를 맞아 / 嗚呼涒灘

중국이 상전벽해(桑田碧海) 되었으나 / 桑海中州

오직 우리나라만은 / 惟我家法

춘추 대의(春秋大義) 지켰노라 / 一部春秋

명 나라 망한 것을 슬퍼하며 / 浸苞之悲

구원병 보내 준 일 생각하니 / 采芑之思

백 년이 지나도록 / 逮玆百年

의리 더욱 깊어지네 / 罙篤是義

운거에다 풍마 타고 / 雲車風馬

칠월이라 동쪽 순행 나서시니 / 七月東巡

충만하여 곁에 계신 듯한 / 洋洋左右

공은 황제의 신하 / 公惟帝臣

성 남쪽을 돌아보니 / 顧瞻城南

이내 생각 깊어지고 / 我思邃長

깨끗하고 엄숙한 사당 / 庭宇汛肅

단청 다시 으리으리 / 丹雘復光

흡사 영용(英勇)한 모습으로 / 彷彿英姿

갑옷 입고 머무시는 듯하니 / 來憩鎧仗

신령의 위엄 미친 곳마다 / 威靈所曁

바다 육지 길이 안정되리 / 永鎭海壤

술과 고기 진설하고 / 牲醪踐列

징과 북을 울리오니 / 鐃鼓振作

밝으신 신명이여 / 神明不昧

이 잔 고이 받으소서 / 庶歆玆酌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양 경리(楊經理) 치제문(致祭文) :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도찰원우첨도어사 겸 경리조선군무(都察院右僉都御史兼經理朝鮮軍務)로서 조선에 파견되었던 명 나라 장수 양호(楊鎬)에 대한 제문이다. 양호는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함께 왜군을 격퇴했으나 울산 전투에서 고전 끝에 일시 경주로 철수한 뒤 참소를 당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조선 정부는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양호의 공적을 밝히고 그의 유임을 건의하면서 그에 대한 참소에 대해 해명하는 상소를 명 나라에 보냈으며, 그의 귀환을 애석해하여 거사비(去思碑)를 세우고 선무사(宣武祠)에 배향(配享)하였다. 박종채(朴宗采) 과정록(過庭錄) 3에 의하면 이 글은 정조 20(1796) 안의 현감의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로 돌아와 산직(散職)에 있던 연암이 당시 좌승지였던 이서구(李書九)의 부탁으로 지은 것이라 한다. 즉 이서구가 편지를 보내, 어명으로 명 나라 장수 양호와 형개(刑玠)의 제문을 짓게 되었으나 공무에 바빠 겨를이 없으니 각각 50()으로 초고를 대신 만들어 줄 것을 간절히 부탁했으므로 지어 준 것이라 한다.

[D-001]창서(蒼嶼) : 양호의 호()이다.

[D-002]윤길보(尹吉甫) : 서주(西周) 선왕(宣王) 때의 인물로 성은 혜씨(兮氏)요 이름은 갑(), 자는 백길보(伯吉甫)이며, ()은 관직 이름이다. 선왕 때에 험윤(玁狁)이 침입하여 호경(鎬京)을 공격하자 윤길보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험윤을 태원(太原)까지 쫓아내고 돌아왔다. 여기에서 양호(楊鎬)를 굳이 윤길보에 견준 것은 양호의 ()’ 자가 서주의 도읍인 호경의  자와 같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詩經 小雅 六月

[D-003]천과(天戈) : 천자의 창 즉 제왕의 군대를 가리킨다. 한유(韓愈)의 조주자사사상표(潮州刺史謝上表) 천자의 창을 휘두르니 모두 순종하네.天戈所麾 莫不寧順라고 하였다.

[D-004]어사중승(御史中丞) …… 순무하듯 : 당 나라 헌종(憲宗) 원화(元和) 12(817)에 어사중승 배도가 회서선유초토처치사(淮西宣諭招討處置使)가 되어 채주(蔡州)의 오원제(吳元濟)를 사로잡은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新唐書 卷173 裵度傳

[D-005]동작나루에서 군대 살피고 : 선조 30(1597) 9 12일에 양호가 선조와 함께 한강의 동작나루에 와서 남쪽 지방의 전황을 살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宣祖實錄

[D-006]자각(紫閣) : 도성(都城)을 가리킨다.

[D-007]서마(西麻) : 양호 휘하의 제독 마귀(麻貴)를 가리킨다. 당시에 명 나라에서는 이여송(李如松)으로 대표되는 철령(鐵嶺)의 이씨와 마귀로 대표되는 사령(沙嶺)의 마씨 집안에 장수들이 가장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동리서마(東李西麻)’라 하였다. 또한 이여송의 아우 이여매(李如梅)도 총병(摠兵)으로 양호의 휘하에 함께 와 있었다. 明史 卷238 麻貴傳

[D-008]소사(素沙) : 직산(稷山)의 소사평(素沙坪)으로 정유재란 때 명 나라 장수 해생(解生), 양등산(楊等山) 등이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일본군을 격파한 곳이다.

[D-009]적의 동정 : 언수(偃竪)는 깃발을 내리거나 세우는 것을 말한다. 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깃발을 내리는 것을 언기(偃旗)라 한다.

[D-010]철갑을 걸치고 : 철갑을 걸치는 것을 욕철(浴鐵)’이라 한다.

[D-011]재빠른 삼백 기병(騎兵) : 동진(東晉)의 화가 대규(戴逵)의 그림에 농원도(弄猿圖)가 있고, 마상희(馬上戱)의 하나로 원기(猿騎)가 있다. 원숭이는 동작이 민첩하여 원첩(猿捷)’이란 성어가 있다.

[D-012]원문 빠짐 :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狡彼倭奴’, 숭실대 박물관 소장 필사본에는 猾彼倭奴로 되어 있다. 둘 다 교활한 저 왜놈들이란 뜻이다.

[D-013]교관(郊關) : 도성(都城)을 에워싼 교외 지역을 방어하는 관문(關門)을 말한다.

[D-014]왜놈 수괴 : 왜장 가또오 기요마사加藤淸正를 가리킨다.

[D-015]전세를 관망하며 : 소식(蘇軾)의 초연대기(超然臺記) 마치 틈 사이로 싸움을 구경하는 것 같으니, 승부가 어느 쪽에 있을지 또 어찌 알 수 있으랴.如隙中之觀鬪 又焉知勝負之所在라고 하였다.

[D-016]도산성(島山城) : 왜장 가또오 기요마사가 울산의 해변가 험준한 곳에 쌓은 성이다. 1597 12월에 양호가 울산으로 진군하여 반구정과 태화강의 왜적 소굴을 공격하자 왜군은 미리 만들어 놓은 도산성으로 도망을 가 항거하였다. 燃藜室記述 卷17 宣祖朝故事本末

[D-017]절지(絶地)를 앙공(仰攻)하며 : 험악하여 출로가 없는 지역을 절지라 하며, 저지대에서 높은 곳을 공격하는 것을 앙공이라 한다.

[D-018]간교한 참설 꾸며 : 당시 병부직방사 찬획주사(兵部職方司贊劃主事)로 조선에 온 정응태(丁應泰)가 명 나라 조정에다 양호를 무고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시경 소아(小雅) 교언(巧言) 간교한 말 생황의 혀 같네.巧言如簧라고 하였다.

[D-019]눈앞에 …… 정성으로 : 제사 지낼 때 재계(齋戒)하는 동안 고인을 간절히 그리워하면, 그러한 정성에 감응하여 고인이 눈앞에 나타난다고 한다. 禮記 祭義

[D-020]사당 : 선무사(宣武祠)를 가리킨다. 선무사는 선조 31(1598)에 형개(邢玠)의 공로를 표창하기 위하여 세운 생사당(生祠堂)인데, 선조 37(1604)에 왕명으로 양호를 배향하였다.

[D-021]군탄(涒灘)의 해 : 군탄은 고갑자(古甲子)에서 신()에 해당한다. 여기에서는 명 나라가 멸망한 1644년인 갑신년(甲申年)을 가리킨다.

[D-022]명 나라 …… 슬퍼하며 : 시경 조풍(曹風) 하천(下泉) 차갑게 흘러내리는 저 샘물, 가라지 덤불을 적시네. 아아 내 깨어나 탄식하며, 저 주 나라 서울을 생각하노라.洌彼下泉 浸彼苞稂 愾我寤嘆 念彼周京 하였다. 서주(西周)의 서울은 호경(鎬京)이므로, 양호(楊鎬)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뜻도 함축할 수 있다.

[D-023]구원병 …… 생각하니 : 시경 소아(小雅) 채기(采芑)의 내용을 가리킨다. 주 나라 선왕(宣王) 때 만형(蠻荊)이 반란을 일으키자 방숙(方叔)에게 정벌을 명하였는데, 그때 군사들이 쓴 나물을 뜯어 먹으며 행군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정유재란 때 명 나라 천자가 양호가 이끄는 구원병을 파견한 사실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D-024]운거(雲車)에다 풍마(風馬) 타고 : () 나라 무제(武帝) 때 만든 교사가(郊祀歌) 천지 신령의 수레는 검은 구름을 얽고 …… 천지 신령이 내려오실 때 바람같이 빠른 말을 타시네.靈之車 結玄雲 …… 靈之下 若風馬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명() 나라 신종(神宗)에게 제사를 올리니 황제의 신령이 강림한다는 뜻이다.

[D-025]칠월이라 …… 나서시니 : 음력 7 21일이 명() 나라 신종(神宗)의 기일(忌日)이었으므로, 임금이 대보단(大報壇)을 향해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영조실록󰡕 36 7 21일 영조 22(1746)부터 대보단 제사에 명 나라 신종의 신하인 양호(楊鎬)와 형개(邢玠)를 배향(配享)하기로 하였다.

[D-026]충만하여 …… 듯한 : 중용장구  16 장에서 공자는 조촐하게 재계하고 엄숙한 옷차림으로 제사를 받들면 귀신이 충만하여 위에 계신 듯하고 좌우에 계신 듯하다.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형 상서(邢尙書) () 치제문(致祭文)

 

 

덕 높이고 공 갚는 건 / 崇德報功

나라의 큰 예법이라 / 邦禮之經

그 공 그 덕 무엇인고 / 功德維何

사직과 백성 살리신 것 / 社稷生靈

비하자면 물과 불이 / 譬如水火

문턱까지 아슬아슬 / 危迫堂戶

아차 순간 못 구했더라면 / 斯須不救

기둥까지 미쳐 집이 무너질 뻔했네 / 延棟潰宇

엄청난 신력으로 / 有大神力

불을 잡고 물 막으니 / 撲燎湮洪

어찌 갚아 좋을는지 / 宜如何報

그런 덕과 그러한 공 / 之德之功

예전에 우리나라 / 往歲吾邦

백륙 운수 걸려들어 / 離運百六

용과 뱀을 못 죽이니 / 龍蛇未菹

고래 악어 다시 뭍에 올랐네 / 鯨鱷復陸

영남 호남 재차 함락 / 嶺湖再陷

서울 근교까지 화 미쳤네 / 震及郊圻

이에 오 년이라 긴 세월 / 于時五載

우리 군사 비바람 속에 고생했으나 / 暴露王師

뒷마무리 계책 실수하고 / 策遺善後

화친(和親) 의논 잘못되어 / 和議實謬

황제 이에 성을 내어 / 天怒斯赫

요동 바다 병력 증가 / 遼海增戍

삼십 만의 대군이라 / 雄師卅萬

징과 북 소리 천리나 이어지고 / 鉦鼓千里

육지로 바다로 내달리니 / 陸走海運

꼴과 곡식 산더밀레 / 芻粟山峙

왜놈 정벌 이제까지 / 自征倭來

이런 거동 처음이라 / 未有此擧

천자의 말씀이, 이럴 수가! / 天子曰吁

군사 뉘 독려할꼬 / 疇督我旅

늠름할사 우리 형공(邢公) / 曁曁我公

궁중의 파목이라 / 禁省頗牧

병법 알고 변방 익숙 / 知兵熟邊

온 조정이 추천하니 / 廷中推轂

너는 가서 공경히 행하라 / 汝往欽哉

내 위엄을 대신 행하라 하시며 / 朕威汝將

상방검(尙方劍)을 빌려 주시니 / 劍借尙方

추상(秋霜)보다 으시으시 / 凜若秋霜

경리라 제독이라 / 惟是經理

그 이하를 막론하고 / 提督以下

모두 네가 통제하여 / 咸汝節制

가차 없이 지휘하라 하시었네 / 無所貸假

압록강에 공이 이르러 / 公臨鴨水

선발대가 한강 넘자 / 先驅渡漢

군대 함성 우레 같고 / 軍聲震駭

벽루 모습 달라졌네 / 壁壘改觀

공이 군중 다짐할 제 / 公來誓衆

옥대에다 망포 입고 / 玉帶蟒袍

원수 장군 숨죽이며 / 元帥屛營

활집을 메고 화살통을 찼네 / 屬鞬注櫜

청산(靑山) 직산(稷山)에서 무찌르고 / 靑稷旣鏖

울산(蔚山) 도산(島山)에서 몰아치니 / 蔚島繼蹙

토끼 굴이 마구 파이고 / 窟兎橫決

상산(常山)의 뱀 움츠러드네 / 常蛇瑟縮

괴수 놈은 넋 빠지고 / 凶渠褫魄

남은 잔당 놀라 숨으니 / 餘醜駭竄

우리나라 백성들이 / 惟我邦人

도탄 속을 벗어났소 / 得出塗炭

강을 건너 다시 올 젠 / 方其再渡

상처 입고 자리에 누웠더니 / 瘡痍衽席

마침내 돌아갈 젠 / 逮厥大歸

왜병 막을 꾀 남기셨네 / 禦倭餘策

공이 처음 올 적에는 / 始公之來

천둥 번개 치는 듯이 / 迹若雷霆

요사 흉악 쓸어 내길 / 蕩沴殲妖

재빠르고 힘차더니 / 奮迅砰轟

우로(雨露) 같은 은혜 남겨 / 留作雨露

죽은 목숨 살려 주고 / 洗癍蘇枯

은택을 베푼 뒤엔 / 膏澤旣潤

없는 듯이 떠났다네 / 斂歸如無

저 천둥과 저 이슬은 / 惟彼雷露

상제님의 은덕이나 / 上帝之仁

사람으론 상제님께 / 人於上帝

은혜 삼지 못하나니 / 莫之敢恩

조선 사람 이 때문에 / 所以東人

공의 은덕 잊지 못하네 / 公之德含

은덕 잊지 못하면 어찌하리 / 含德如何

성 남쪽에 생사당(生祠堂) / 廟貌城南

남들은 사자(死者) 제사하나 / 人祭其死

우린 생자(生者) 제사하니 / 我祠其生

이는 실로 조선 사람들이 / 寔由東人

신명처럼 받들기 때문 / 奉若神明

사악(四嶽)의 정기 타고나신 분 / 嶽降之神

세상 떠나신 지 하마 오래 / 久已騎箕

더더구나 백 년 지나 / 矧復百年

중원 문물 쑥밭이라 / 周京黍離

온 누리를 돌아보니 / 顧瞻四海

한쪽 우리 땅만 조촐하이 / 片土乾淨

공의 영령 예 계시니 / 公靈在此

누구보다 큰 업적 남기셨네 / 孔烈無競

해마다 칠월이면 / 年年七月

옥로(玉輅)가 동순(東巡)하니 / 玉輅東巡

명 나라 그리는 맘 / 風泉之思

이 사당을 중수(重修)하고 / 廟宇重新

지조 있는 선비들 잔 올리며 / 介士奉斝

징과 북을 울리노니 / 鐃鼓轟鳴

공을 죽지 않도록 하는 건 / 俾公不死

우리나라 사람들 정성일레 / 我人之誠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형 상서(邢尙書) 치제문(致祭文) : 원문에는  자가  자로 잘못 되어 있다. 형개(邢玠)는 정유재란 때 병부상서 겸 우부도어사 총독계요보정군무(兵部尙書兼右副都御史總督薊遼保定軍務)로서 명 나라 원병 3만 명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형개에 대한 제문 역시 1796년경 좌승지 이서구의 부탁으로 지은 것이다.

[D-001]백륙(百六) 운수 : 액운(厄運)을 말한다. 백륙은 음양가(陰陽家)에서 말하는 양구(陽九)의 액이다. ()는 양()의 극수(極數), 양만 있고 음이 없으므로 만물이 교섭을 할 수 없어 천하가 어지러워진다고 한다. 4617() 1()으로 하고, 처음 원에 든 106세 중에 양구(陽九)  9번의 재해가 있다고 하며, 재해가 가장 많으므로 액회(厄會)라 한다.

[D-002]용과 …… 올랐네 : 용과 뱀, 고래와 악어는 모두 포악한 존재, 곧 왜적을 가리킨다. 또한 용과 뱀은 각각 진()년과 사()년을 상징하며, 이러한 용사년(龍蛇年)은 흉년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서는 처음 왜란이 난 임진년과 그 이듬해 계사년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섬멸하지 못해 정유재란이 났다는 뜻이다.

[D-003]파목(頗牧) : 전국(戰國) 시대 조() 나라의 명장인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을 가리키는 말로서, 궁중의 시종관(侍從官) 가운데 문무(文武)를 겸비한 신하를 금중파목(禁中頗牧)’이라 한다. 여기에서는 당시에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있던 형개를 빗대어 말한 것이다.

[D-004]너는 …… 행하라 : ‘가서 공경히 행하라往欽哉 서경(書經) 요전(堯典)에서 요 임금이 곤()에게 황하로 가서 치수(治水)에 힘쓸 것을 명하면서 한 말이다.

[D-005]상방검(尙方劍) : 상방(尙方)은 천자가 사용하는 기물(器物)을 제작하는 관서로서 천자가 대신(大臣)에게 권한을 위임할 때 그 징표로 내려주는 칼을 상방검이라 한다.

[D-006]경리(經理)라 제독(提督)이라 : 경리 양호(楊鎬)와 제독 마귀(麻貴)를 가리킨다.

[D-007]토끼 굴 : ‘영리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만들어 놓는다.狡兎三窟는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 왜적들이 만들어 놓은 여러 개의 은신처를 말한다.

[D-008]상산(常山)의 뱀 : 머리와 꼬리가 서로 도와 적을 공격한다는 전설상의 뱀이다. 여기에서는 군진(軍陣)의 수미(首尾)가 서로 도와 가며 적에게 공격을 가하는 진법(陣法)을 말한다.

[D-009]사악(四嶽) …… 오래 : 시경 대아(大雅) 숭고(崧高) 사악이 정기를 내려 보후(甫侯)와 신백(申伯)을 낳으셨도다.維嶽降神 生甫及申라고 하였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부열(傅說)이 죽어서 기미(箕尾)를 타고 올라가 별이 되었다고 하였다. 기수(箕宿)와 미수(尾宿) 사이에 부열성(傅說星)이 있다.

[D-010]누구보다 …… 남기셨네 : 시경 주송(周頌) 집경(執競) 강력하신 무왕이여, 누구도 다툴 수 없는 업적이셨다.執競武王 無競維烈라고 하였다.

[D-011]옥로(玉輅) : 천자가 타는 수레를 가리킨다.

[D-012]명 나라 그리는 맘 : ‘풍천지사(風泉之思)’는 주() 나라 왕실이 쇠미해짐을 탄식한 시경 회풍(檜風)의 비풍(匪風)과 조풍(曹風)의 하천(下泉) 시를 슬픈 마음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연분(年分) 가청(加請) 장계 감사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무오년(1798, 정조 22)

 

 

본도(本道)의 농사가 참혹하게 흉년이 든 연유와 절박한 백성들의 사정에 대해서는 이미 연달아 장계를 올린 바 있습니다. 신이 관할 지역을 순행하면서 연해의 고을을 먼저 하고 산간의 고을을 나중에 하여 이목(耳目)이 미치는 고을은 거의 다 파악하였으나, 길이 돌거나 구석진 고을의 경우는 편비(褊裨 측근의 비장(裨將))를 보내어 탐사하게 하거나 해당 수령들에게 물어서 처리하였습니다.

대저 본도는 경기와 영남의 사이에 처해 있어 왼쪽의 산간 지방은 그 지형이 높고 건조한 곳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오른쪽의 해안 지방은 그 토질이 소금기가 있는 땅이 절반이 넘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흉년이 들면 유달리 심한 흉년이 들기도 하고 풍년이 들어도 고르게 풍년이 들지 않습니다. 이 점을 호서(湖西) 사람들은 깊이 걱정하고 크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재해의 대장(臺帳)을 낱낱이 상고해 보면 그중에서도 가뭄의 피해가 가장 심합니다. 그런데 금년의 경우는 갓 해동(解凍)하던 때부터 이미 가뭄이 들 조짐이 있었으며, 2, 3월경에 비록 네댓 차례 비가 내리기는 하였으나 호미질하거나 쟁기질하거나 할 때 강수량이 일정치 않았으며 연해의 고을과 산간의 고을에 따라서도 강수량이 같지 않았습니다. 골짜기의 물이 나는 논이나 시내에서 봇물을 대어 오는 들판의 경우 간혹 때에 맞추어 물을 대고 파종을 하여 제때에 모내기를 한 곳이 있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10 2, 3에 불과합니다. 이 밖에 뭍으로 이어진 높고 메마른 땅들은 간신히 두레박으로 물을 끌어올리느라 힘은 갑절이나 들면서도 이미 모내기한 모는 땅에 심자마자 시들어 버리고 모내기를 하지 못한 모는 모판에서 그대로 타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계절이 늦여름이 되도록 한결같이 불볕 같은 가뭄이 계속되어 각처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인심이 목이 타들어 가듯 하였으나, 어리석은 백성들은 다른 데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채 눈앞에서 농사의 때를 놓치고 있으면서도 단지 황급한 사태를 쳐다만 볼 뿐 앞으로의 조처를 어떻게 변통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루 이틀 아무런 손도 써 보지 못하고 있을 때, 성상께서 특별히 염려하시어 식량을 넉넉히 할 방도를 생각하시어 다른 작물을 대신 파종하도록 권장하고 세금을 면제해 줄 것을 유시(諭示)하여 봄기운처럼 온화한 윤음(綸音)을 내리시니, 백성들이 갈라지고 소금기 있는 들판과 묵혀서 버려진 구릉을 갈고 파종하여 앞 다투어 일을 하였습니다.

유월 초닷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큰비가 밤낮으로 계속 쏟아져 원근의 고을에 모두 흡족히 내렸습니다. 이에 미처 모를 옮겨 심지 못한 자들도 일제히 일어나 힘을 합쳤으므로 영읍(營邑)에서 백성들을 독려하고 권면할 때면 반드시 그래도 아예 버려두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였고, 요행을 바라는 백성들도 있어서 비록 늦기는 하지만 혹 수확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노약자들까지 힘을 모아 도롱이에 삿갓을 쓰고 다투어 달려 나오기는 하였으나 절기가 이미 늦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할 일은 어지럽게 많은데 인력이 이에 미치지 못하여 보름이나 스무날을 끄는 바람에 이조차 차례로 중지하고 말았으니, 이 때문에 늦게 모내기한 벼가 모내기하지 않은 벼보다 많고, 모내기하지 않은 벼가 일찍 모내기한 벼보다 많게 된 것입니다. 대체로 이렇게 늦게 모내기한 허다한 벼들이 모두 중복(中伏) 전후로 심겨져, 설령 이후의 날씨가 고르고 비가 자주 내린다 하더라도 오히려 수확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형편이거늘, 농가(農家)에서 말하는 삼복(三伏)의 가뭄이 또다시 혹독하게 닥쳐와 유월 그믐과 칠월 스무날에 내린 비로는 이미 그 시듦을 막을 수가 없었으니, 일찍 모내기한 것은 대부분이 말라 버렸고 늦게 심은 것도 거의 다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강가의 척박한 땅과 바닷가의 소금기가 밴 땅이 가장 심하여 한 평() 두 평을 막론하고 마른 벼 포기가 논두렁에 연이어져 있고, 5 10리에 걸쳐 거친 갈대가 숲을 이루어 이것저것 보이는 것이 극히 참담합니다.

다만 산에 의지하여 조금 일찍 심은 것과 가뭄을 입되 조금 덜한 것 가운데는 혹 농사가 모양을 갖추어 간혹 수확되는 것도 있기는 하나, 여러 번 재상(災傷)을 겪어 받은 피해가 이미 고질이 되어 열매를 맺은 것이 거의 보잘것없다시피 하며 소출이 태반이나 줄어들었습니다. 대신 파종한 각종 작물은 필경 수확한 것이 처음 예상보다 배나 더하여, 늦게 모내기하느라 아무런 이익도 없이 헛수고한 것에 비하면 그 이익이 현격히 차이가 날 뿐만이 아닙니다. 이에 이르러 민심이 마치 믿는 바가 있는 듯이 여기면서 모두들 조정에서 미리 다른 작물의 파종을 권장한 거룩한 덕과 지극한 뜻에 감격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한스러운 것이 있다면 이는 일찌감치 힘을 써 벼농사를 포기하고 다른 작물을 파종하지 못한 점입니다.

밭농사의 경우 논농사와 비교하여 훨씬 낫기는 하지만 이삭이 팰 무렵에 가뭄을 만나고 열매가 영글 무렵에 바람의 피해를 당한 탓에, 처음 대풍을 바라던 곳은 겨우 흉작을 면하였고 처음 흉작을 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곳은 결국 제대로 익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콩팥은 화종(和種 씨를 뿌려서 심는 것)과 근경(根耕 그루갈이)을 막론하고 기름진 곳이 아니면 거의 말라 시들어 수확이 얼마 되지 않았으며, 목면(木綿)은 연해의 고을이 더러 흉년이 들기는 하였으나 산간의 밭은 자못 수확이 잘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전답을 조사하여 급재(給災 재해를 입은 전답의 조세를 면제해 주는 것)해 주는 일은 위로는 나라의 살림과 관계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과 관계되므로 평년이라 할지라도 진실로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되는 일이거늘, 하물며 금년처럼 곳곳에서 재해를 입어 이 고을 저 고을에서 흉작을 보고해 오는 실정에서야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전번에 사목재(事目災) 1 5000결을 획하(劃下)하라는 특명을 내리셨는데 이는 실로 상례(常例)를 넘어선 전후에 보기 드문 은혜이니, 성상의 뜻을 선양하는 직책에 있는 자로서 특히나 십분 경계하고 백배 잘 살핀 다음 수령들을 연이어 신칙하여 고을마다 정리를 하게 하고 간간이 염탐하는 관리를 보내어 창고마다 살피게 하여 묵은 재탈(災頉)과 새 재탈 사이에 뒤섞이기 쉬운 것이나, 일찍 모내기하고 늦게 모내기한 것 사이에 구별하기 어려운 것 및 어느 면()이 재해가 많고 적은지와 어느 리()가 재해가 들고 풍실(豐實)한지를 별도로 조사하여 실정에 맞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다 보니 자연 이리저리 꿰맞추게 되어 각 고을의 개장(槪狀)조차 마감해 들이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따라서 모두 도착된 다음에 신이 삼가 장부를 열람하여 재총(災摠 재결의 총수)을 비교하고 가감(加減)할 것을 변별하여 세세한 것까지 타당하게끔 만들어 차례대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재해가 일어난 해에 토지의 등급을 매기는 것은 관계된 바가 더욱 중하므로 한번 착오가 생겨 혹 은혜가 고르게 베풀어지지 못하거나 조세를 편파적으로 징수한다는 원망이 나오게 되면, 이 또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성상의 뜻을 받드는 도리가 아닙니다.

신이 이에 고을에서 올라온 보고와 백성들의 호소를 참고하고 직접 귀로 들은 것과 눈으로 본 것을 비교하여 한 도()를 세 등급으로 나누어 정했으니, 홍주(洪州)  39개 고을과 평신진(平薪鎭)은 우심읍(尤甚邑)에 올리고 충주(忠州)  18개 고을은 지차읍(之次邑)에 올리고 청풍(淸風)  7개 고을은 초실읍(稍實邑)에 올려 해당 고을의 이름을 낱낱이 기록하여 예람(睿覽 임금이 열람함)하실 수 있게 하였습니다.

대개 이와 같이 등급을 나눈 것은 다만 격례(格例)에 따라 거행한 것으로서, 구체적으로 따져 들어가 말하자면 그 사이에 재해를 입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통틀어 논해 보면 등급을 달리할 만큼 우열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산간의 고을은 밭이 많은 데다 밭농사의 수확이 논농사의 수확보다 잘 되었으므로 간혹 초실읍이 나온 것이며, 바닷가의 고을은 논이 많으나 논농사의 수확이 밭농사의 수확보다 못하였으므로 대체로 우심읍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금년에 이른바 초실읍이라고 하는 곳도 거두어들인 수확을 가지고 비교해 보면 평년의 우심읍과 차이가 없으니, 지차읍이나 우심읍의 상황 또한 이를 통해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우심읍 가운데 은진(恩津) · 석성(石城) · 부여(扶餘) · 예산(禮山) · 한산(韓山) · 연기(燕岐) · 서천(舒川) · 태안(泰安) · 덕산(德山)  9개 고을의 경우 강가의 토지는 척박하고 바다와 가까운 토지는 메말라 한눈에 보기에도 적지(赤地)여서 왕왕 모든 면()이 재황(災荒)으로 처리된 곳도 있으니, 이는 우심읍 가운데서도 특히 심한 고을입니다.

고을의 등급이 이미 나누어졌으니 면()을 나누는 일이 흉년에는 응당 시행되어야 할 것이며 리()를 나누고 가호(家戶)를 가리는 일 또한 그만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게다가 재해를 입은 곳이 예전에 비해 몇 갑절이나 되며, 한 평 안에서도 동쪽 서쪽이 판이하고 한 고() 안에서도 아래위로 현저히 달라서 우심면(尤甚面) 가운데에도 혹 초실호(稍實戶)가 있고 초실면(稍實面) 가운데에도 또한 우심호(尤甚戶)가 많이 있으니, 정밀하게 조사하는 정사(政事)를 시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전 고을로 나누어 그 대체(大體)만을 범범하게 논해서는 진실로 안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각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유별로 구분하게 하되 면()의 등급을 나누는 것은 고을의 보고가 올라오기를 조금 더 기다렸다가 성책(成冊)을 하여 추후에 비변사(備邊司)로 올려 보낼 계획입니다. ()를 나누고 가호를 가리는 일을 같은 식으로 기록하자면 결국 너무 번잡해지게 되겠기에 이것은 다만 영읍(營邑)에서만 사용하여 참고할 자료로 삼겠습니다.

본도(本道)로 말하자면 평소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하다고 일컬어지며 평년에도 목숨을 연명하는 것조차 이어 가기가 어려운 실정인데, 이번의 참혹한 흉년을 돌아보면 옛날에도 드문 일이라 길쌈질도 그만두었을 뿐 아니라 소량의 양식도 똑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곡물 값이 배로 뛰어 다른 지역에서 사 오려고 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추수가 한창인 계절에 목숨을 구걸하는 백성들과 봄이 채 되기도 전에 진휼을 청하는 백성들이 신의 일행이 가는 곳마다 말을 에워싸고 울며 호소하기를,

 

밭을 갈고 김을 매느라 온 힘과 양식을 다 바치고 열 식구가 이마에 손을 얹고 축수하며 추수 때가 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한번 가뭄이 들어 온갖 곡식이 모두 흉작이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해전(海箭 어전(魚箭) 즉 어살), 염분(鹽盆 바닷물을 가마에서 졸여 소금 만드는 일), 백저(白苧 흰모시), 포소(圃蔬 채소 기르기)와 같은 민간의 부업이 될 만한 것들도 거의 다 실패하게 되었으니, 신포(身布)는 어디서 마련해 낼 것이며 환곡(還穀)은 어디에서 구해 바치오리까?”

하며, 수백 수천 명이 떼를 지어 모여듭니다. 그들을 일일이 대응할 겨를도 없거니와 신 또한 이 지경이 되니 대답할 말이 없어, 단지 조정에서 백성들을 자기 몸 상한 듯이 가슴 아파하고 어린애를 보호하듯이 여기는 덕의(德意)를 받들어 가는 곳마다 유시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위로해 줄 뿐입니다.

지금 보니 가을걷이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므로 당장 구휼할 방법과 앞으로의 구제책을 다시 깊이 생각하여 계속해서 즉시 아뢸 계획입니다. 앙청(仰請)할 여러 조목들을 참작하고 마련하여 또한 일체 개좌(開坐 개록(開錄) 즉 기록)하였으니 묘당(廟堂 비변사)으로 하여금 성상의 지시를 받들어 분부하게 하소서.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연분(年分) 가청(加請) 장계 : 매년 호조에서 그해의 작황을 참고하여 조세 감면 대상인 급재결(給災結)과 조세 부과 대상인 실결(實結)의 총수를 정하여 각 도()에 반포한 것을 연분 사목(年分事目)이라 한다. 호조에서 연분 사목을 내려 보내면 각 도의 감사는 도내 고을 수령들이 재실(災實)을 보고한 개장(槪狀)을 참작하여, 고을별로 초실(稍實) · 지차(之次) · 우심(尤甚)으로 등급을 정한 뒤 급재결수(給災結數)를 배분하고 이를 성책(成冊)하여 호조에 보고한다. 이를 연분 장계라 한다. 호조에서 연분 사목으로 정해 준 급재(給災)를 사목재(事目災)라고 하며, 만약 사목재가 실제보다 적게 책정되었다고 판단되면 감사는 재결(災結)을 추가해 달라고 요청하는 장계를 올리는데 이 장계를 가청 장계라 한다.

[D-001]각처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 원문은 圭璧徧擧인데, 규벽(圭璧)과 같은 옥기(玉器)를 신에게 바치고 기우제를 드린다는 뜻이다. 시경 대아(大雅) 운한(雲漢)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음이 없고 이 희생물을 아끼지 않아, 규벽을 이미 다 바쳤거늘 어찌 나의 호소를 들어주시지 않나.靡神不擧 靡愛斯牲 圭璧旣卒 寧莫我聽라고 하였다.

[D-002]개장(槪狀) : 중요 내용을 개략적으로 보고한 문서로, 대개장(大槪狀)이라고도 한다.

[D-003]적지(赤地) : 재해를 입어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한 땅을 말한다.

[D-004]() : 일정한 곳의 논밭을 말한다. 성종실록(成宗實錄) 6 4 23일 조에 토속어로 전지가 있는 곳을 고라 한다.俗以田之所在謂庫 하였다.

[D-005]관문(關文) :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시달하는 공문서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연분 가청 장계 정사년(1797, 정조 21)에 감사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본도(本道)의 농사 형편은 이미 전후(前後)의 장계(狀啓)에서 대강 진술하였거니와, ()의 부임이 마침 사방 들판의 곡식들이 익어 가는 때였으므로 도로변에서 본 바로는 풍년이 들 희망이 없지 않았으며 열읍(列邑)의 보고를 참조해 보아도 또한 그렇게 파악되었습니다. 그런데 관할 지역 순행에 나섰을 때가 곡식들을 수확할 무렵이어서 직접 눈으로 본 바로는 앞서와 확연히 달라, 비단 비가 내리기를 빌고 있는 고을들만 큰 흉년이 든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순행길에 몸소 지나간 곳이 아니면 수령들을 직접 면대하여 물어보았고, 만약 또 멀리 떨어져 있는 궁벽한 곳이라면 편비(褊裨)를 나눠 파견하여 하나하나 자세히 탐문하고 곳곳마다 허위 보고를 적발하게 하였더니, 도내(道內)의 농사 정도가 보고 들은 것이 대략 동일하고 열읍(列邑)의 작황이 심중에 분명하게 파악되었습니다.

통틀어 논하자면 과연 혈농(穴農)이기는 하지만, 연해와 산간 고을 사이에 득실(得失)의 차이가 있고 한 고을 안에서도 재해와 풍실(豐實)이 다릅니다. 이는 대체로 모내기할 때부터 대부분 가뭄이 들어, 비록 방죽 아래에 있는 논이나 봇물이 닿는 땅이라 하더라도 수원(水源)이 마른 곳이 많아서 제대로 물을 대지 못하였고, 가끔씩 소낙비가 내리기는 하였지만 물이 적셔진 곳은 같은 들에서도 배미끼리 서로 물을 다투고, 같은 배미에서도 논두렁끼리 서로 물을 다투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이때를 틈타서 모를 옮겨 심느라 자연히 시기를 놓치게 되다 보니 한 평 안에서도 모내기를 하지 못한 곳이 여기저기 많아졌습니다.

유월 이후부터는 한결같이 내리쪼이는 햇볕이 더욱 심하여 은진(恩津)  16개 고을은 칠월 한 달 동안 시종 기우제를 지내야 했으며, 늦게야 큰비가 내리기는 하였지만 말라붙은 벼포기를 소생시키기에는 별로 효험이 없었습니다.

무릇 바닷가의 소금기가 많은 땅은 모내기도 늦었거니와 그나마 곧바로 말라붙어, 미처 벼가 자라지도 못한 상태에서 소금기가 올라오는 바람에 더러는 애초부터 이삭이 패지 못한 것도 있고 더러는 빈 이삭만 나온 것도 있으며, 심지어 온 들판을 바라보면 벼들이 갈대처럼 하얗게 서 있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산골짜기에 가까운 척박한 고을은 일찌감치 가뭄을 입어 이삭도 크지 못했거니와 여문 열매 또한 드물었으며, 급기야 수확을 마치고 보니 평년보다 반이나 줄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백성들 사정이 급박한 것이 흉년을 만난 것이나 다를 바 없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또한 감히 무슨 재해라 이름 붙여 말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여름과 가을 이래로 바람, 서리, 멸구, 우박 같은 일시적인 재앙도 없는 상태에서 단지 비가 끝내 흡족하지 못하여 절기(節氣)의 변화가 늦추어진 데서 일어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신이 처음 부임하면서 풍년을 점쳤던 것이 허사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비록 땅만 보고 사는 늙은 농사꾼조차도 저도 모르는 사이 가만히 앉아서 풍년을 놓친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논농사의 대강입니다.

이어 밭농사에 대해 말하자면, 가뭄으로 타서 말라붙은 흙이 쇠처럼 굳어 싹을 잘 틔우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나마 비를 기다려서 잡초를 제거하자니 자연 때가 지나고 말아 늦게 맺은 곡식은 절반이 쭉정이뿐이었으며, 모래흙에 메마른 밭의 경우는 간혹 온 고()가 다 버려져 종자를 찾을 희망조차 갖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면화는 아무리 한초(旱草 가뭄을 잘 견디는 식물)라고는 하지만 이것도 너무 건조하면 뿌리를 내릴 수 없으며, 비록 뿌리를 내릴 수 있다 할지라도 줄기가 왜소하고 가지가 성글어 꽃과 열매가 패지 못하여 제일 나중에 수확한 것은 겨우 큰 흉작을 면할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밭농사의 대강입니다.

지금 한 도()의 좌우(左右)를 들어 논하면 우도(右道)는 해안에 접하여 논이 많고 밭이 적은 까닭에 벼가 조금이라도 익은 곳은 해안 고을이 많으며, 좌도(左道)는 산골짜기에 가까워서 밭이 많고 논이 적은 까닭에 각종 곡물이 조금이라도 익은 곳은 산간 고을이 비교적 낫습니다.

그리고 재해의 정도를 논하면 우도 해안의 포구에 가까운 논은 소금기가 유달리 심하고 좌도 산간의 높고 건조한 지대는 가뭄의 피해가 가장 심합니다. 신이 순행하며 살피는 길에 재해를 입은 백성들이 도처에서 떼를 지어 어깨에 말라붙은 짚단을 메고 말 머리를 에워싸는 바람에 거의 앞으로 나가지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이에 신이 하나하나 면대하여 각자 안심할 것이며 무분별하게 조세를 징수할 염려는 하지 말라는 뜻으로 타일렀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전답을 조사하여 급재(給災)를 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큰 정사로서, 위로는 국가 경비의 넉넉하고 모자람에 관계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기쁨과 근심이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지나치게 급재를 베풀다 보면 나라 살림을 이어 가기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과감하게 급재를 줄이면 백성의 고통을 구휼해 줄 길이 없습니다.

신이 변변치 못한 몸으로 외람되이 분수 밖의 관직을 받아, 밤낮으로 두려움에 떨면서 자고 먹는 것도 잊은 채 어찌하면 백성을 근심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전하의 뜻을 만의 하나나마 받들까 생각하나, 그 길은 표재(俵災 재결을 배분하는 것)를 하는 정사보다 우선되는 것이 없습니다. 더하고 덜고 하는 사이에 털끝 하나라도 실상과 어긋난다면 신이 성은(聖恩)을 저버린 죄야 그래도 신 한 몸에 그치고 말겠으나, 나라의 살림은 어찌하며 백성의 고통은 어찌하겠습니까?

신이 열읍(列邑)의 개장(槪狀)이 모두 당도한 후로 정밀하게 분석하기에 힘썼는데, 보고된 재총(災摠) 중에서 검토 결과 타당한 것은 곧 모내기조차 못한 곳이 ()이고, 그 밖에 함손(鹹損 소금기로 인해 손상됨) · 준축(蹲縮 땅이 내려앉아 줄어듦) · 환진(還陳) 등 각종의 재탈(災頉) 결이며, 유래(流來)와 구초불(舊初不)의 경우로서 신재(新災)로 추이(推移)하여 분표(分俵 재결을 배분함)한 것이 또 1237결이어서, 신구(新舊)의 재탈(災頉)을 통계하면 도합 1 결입니다. 이를 사목재(事目災)로 획하(劃下) 1070결에 비하면 부족량이 결입니다. 만약 재해를 입은 열읍들을 통틀어서 따지자면 을묘년(1795)의 재해에 비하여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집중적으로 재해를 입은 지역만 가지고 말하자면 을묘년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을묘년에 내린 표재(俵災) 2 5500결이었으니, 금년의 재탈이 을묘년에 비하여 3분의 2가 줄어든 것으로 볼 때 너무 지나치게 책정한 것은 아닐 듯합니다.

대저 금년의 농사는 들리는 바로는 호남과 영남이 특히 심하며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모두 가뭄으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신이 관할하는 지역은 작황만 가지고 논한다면 차이가 있으나 재손(災損)을 비교해 보면 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이처럼 분등(分等)할 때에 신의 도를 연분(年分)  5 등에 묶어 두어 획하한 표재(俵災)가 겨우 1000결을 넘는 정도이니, 신이 아무리 변변치 못하나 도대체 유독 무슨 마음으로 의례적으로 장황하게 백성들의 고통을 실지 이상으로 늘어놓아 성상의 귀를 놀라게 하고 구중궁궐에서 밤낮으로 근심하는 성상의 마음을 더 괴롭게 하겠습니까. 만약 신이 한갓 성상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만 가지고 아무 말 없이 세월을 보내며, 백성을 어린애 돌보듯이 하시는 성상의 은혜를 우러러 본받지 못하고 마침내 한 백성이라도 그 은택을 고루 받지 못해 탄식하게 한다면 조정에서 신을 범부(凡夫) 중에서 선발하여 특별히 직책을 주신 뜻이 자못 아닐 것입니다.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에 감히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간절한 마음을 아뢰는 바입니다.

전에 획급한 사목재 외에 부족한 급재(給災) 결을 특별히 더 획급해 주도록 하시면, 신이 삼가 순서에 따라 분표(分俵)하여 농사를 망친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마치 다친 사람처럼 살피시는 성상의 은택을 골고루 받게 하겠습니다. 열읍의 등급을 나누는 일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하므로 더욱 정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따라서 상호 참작하고 잘 재량하여 각각의 고을들을 우심읍(尤甚邑), 지차읍(之次邑), 초실읍(稍實邑)으로 구분하여 후면에 기록하였습니다. 앙청(仰請)할 여러 조목들을 참작하고 마련하여 일체 개좌(開坐)하였으니 아울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성상의 지시를 받들어 분부하게 하소서.

그리고 지금 재해를 가장 혹독하게 입은 우심읍 몇 고을의 백성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구휼이 있은 연후에야 자리를 잡고 생업을 지탱할 수 있을 터인데, 작년에 이미 약간의 풍년이 들었을 뿐 아니라 금년은 공통적으로 대흉(大凶)은 아닌 만큼, 격식을 갖추어 진휼하는 일에 대해서는 감히 갑작스레 거론할 바가 아니므로, 형편의 완급(緩急)에 따라 사진(私賑 수령이 자신의 녹봉을 털어 구휼함) 또는 구급(救急)의 방법을 통해 편의에 맞게 원조하여 백성들이 굶어 죽는 일은 기어코 면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이런 연유를 아울러 치계(馳啓)합니다.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D-001]혈농(穴農) : 곳에 따라 풍작과 흉작이 고르지 못한 농사, 즉 구메농사를 말한다.

[D-002]환진(還陳) : 논밭이 도로 묵어짐.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續還陳으로 되어 있다. 해마다 계속 묵히는 논밭을 속진전(續陳田)이라 한다.

[D-003]유래(流來) …… 경우 : 유래는 곧 여러 해 동안 계속 재해를 입은 논밭인 유래재결(流來災結)을 말하고, 구초불(舊初不)은 여러 해 전부터 경작하지 않고 묵히는 논밭을 말한다.

[D-004] 5  :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에 따라 중중년(中中年)으로 분류되었다는 뜻이다.

[D-005]마치 …… 은택 : 맹자 이루 하(離婁下) 문왕(文王)은 백성을 마치 다친 사람처럼 살피셨다.視民如傷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둔암집서(遯庵集序) 남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옛날 나의 선친이 일찍이 암행어사로서 호우(湖右 전라우도(全羅右道)) 지방의 민심을 채방(採訪)할 때에, 영광(靈光)에 사는 양군(梁君) 아무개가 성품이 순근(醇謹)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마치 한() 나라의 삼로(三老)가 농사에 힘쓰면서 효도와 우애를 다진 것과 같았으므로 술과 쇠고기로 위로하고 비단을 주어 장려할 만하다고 하였다.

얼마 후 조정에서 배척을 당해 호남 고을에 보직이 되자 양군이 예전에 은혜를 입었다 하여 따라와 문객(門客)이 되었고, 또 이로 인하여 왕래가 계속되어 한양에 와서도 문객이 되었다. 이때에 선친이 자주 전부(銓部 이조(吏曹))를 맡았으나 매위(靺韋 무부(武夫))와 제상(鞮象 역관(譯官))의 알현은 문전에서 거절하였으며, 심지어 먼 지방의 방기(方技)와 이술(異術)에 밝은 선비나 비록 평소 문장을 잘한다고 소문난 자에 이르러서도 모두 사절하고 한 번도 대면한 일이 없었다. 반면에 유독 양군만은 문객이 된 지 수십 년 동안 명성(名聲)이나 세리(勢利) 따위는 서로 잊어버리고 지냈다. 집 남쪽에 무성한 나무 그늘이 뜨락에 반쯤 내려와 덮게 되면 바둑을 여러 판 둘 뿐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다만 손에 책 한 권을 쥐고 저녁 내내 흥얼대면서 거의 기갈(飢渴)도 잊어버리고 형해(形骸)도 내버린 듯이 지냈다. 아마도 우리 집의 청백(淸白)하고 화락한 가풍에 깊이 탄복한 바 있어서 우리와 감고(甘苦)를 같이하여 문객이 된 것을 즐겁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집안의 젊은이들부터 그가 근후(謹厚)한 장자(長者)임을 흠모하여 따랐으며, 아래로는 하인들까지도 그를 공경하여 따를 줄을 알고 그가 문객으로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지낼 정도였다. 게다가 나는 그 당시 겨우 더벅머리 어린아이였으므로 그는 유모처럼 나를 안고서 입으로 동서남북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그어 주기도 하였다.

, 양군(梁君)은 생각해 보면 우리 양대(兩代)와 함께 지내며 백발이 된 사람이다. 그는 평소에 공손하여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을 것 같다가도,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면 마치 강둑이 터져 물이 퀄퀄 내려가듯이 하였으며, 그 밖에 의술, 점술, 천문 역법, 풍수(風水)로 대상을 넓혀 이야기를 하여도 어느 것 하나 모르는 것이 없었다. 비록 그것이 하나하나 다 맞는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독자적으로 터득하여 심오한 경지로 곧바로 나아갔으며 여러 학자들의 훈고(訓詁)에 구애되지 않은 점은 족히 칭찬할 만하였다. 또한 그의 문장은 속으로는 큰 기상이 들어 있고 겉으로는 호방하여, 글을 매끄럽게 다듬지 않았어도 예스러우면서 순박하고 노숙하면서 힘이 있어 볼 만한 것이 매우 많았다.

지금 그의 아들 아무개가 그 글을 오래도록 세상에 전하게 하고자 하여, 그 평생의 저술을 수집하여 몇 편()으로 정리하였는데 시()와 문()이 몇 권()이 된다. 그리고 재주 없는 내가 양대에 걸쳐 세의(世誼)가 있는 집안이라 하여 나의 거친 글을 청하기에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 마침내 예전에 보고 기억나는 것을 낱낱이 서술하여 돌려보낸다.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D-001]() 나라의 삼로(三老) : 한 나라 때 지방에서 덕행이 있는 장로(長老)를 삼로로 천거하여 향()에는 향삼로(鄕三老), ()에는 현삼로(縣三老), ()에는 군삼로(郡三老)를 두고, 지방관들을 도와 교화(敎化)에 힘쓰게 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공손앙(公孫鞅)이 진() 나라에 들어가다

 

 

 

임금께서 지으신 책문(策問)은 이러하다.

남이 자기를 비방한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 두려워하며 그 화를 피하려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공손앙은 끝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으니 계책이 밝은 사람이 아니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그에게 범인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음을 공숙좌(公叔座)가 알기는 하였으나, 위앙(衛鞅 공손앙)이 쓸 만한 인물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혜왕(惠王)이 등용하지 못하리라는 점은 알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신하가 임금에게 고할 적에 지성으로 고하지 않고서 그 청을 받아들이게 한 사람은 없었다. 혜왕에게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청한 말을 보건대, 이는 대체로 공손앙을 기재(奇才)라고 한 칭찬과 임금을 신하보다 우선시하는 의리를 실증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온 나라를 들어다 그에게 맡기라고 청해 놓고 또다시 그를 죽이라고 권했으니, 어찌 앞뒤가 어긋난다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소하(蕭何)가 한신(韓信)을 천거할 때 한신을 쓸 일이 없다.’고 말한 것에 불과하였으나, 한 고조(漢高祖)가 선뜻 그의 말을 따랐는데, 이는 단지 한 고조가 한 고조다웠기 때문만이 아니라 소하 또한 성실하고 거짓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공숙좌가 진작에 지성으로 천거하고 충심으로 아뢴 다음, 위앙이 하는 일과 말을 살피고 누차 시험하고 점차적으로 등용하는 방법을 다하게 했더라면, 혜왕이 과연 온 나라를 들어서 위앙에게 맡겼을 뿐만 아니라 진 효공(秦孝公)이 이룩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공렬(功烈)도 이룰 수 있지 않았겠는가?

 

() 아무개는 삼가 답합니다.

예로부터 신하가 그 임금에게 간언을 올림에 있어서는 어느 것이든 지성에서 우러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풍언(諷言 넌지시 풍자함)으로써 간하는 것이 배우의 익살에 가깝고, 궤변으로써 대답하는 것이 회휼(回遹)함을 면치 못하였으나 옛사람을 논한 후세의 논자(論者)들은 또한 그들의 간언이 정성스럽지 못하다고 비난한 적이 없었고, 심지어는 죽은 뒤에 자신의 시신을 늘어놓게 한 일도 있었으나 군자가 오히려 그의 곧음을 인정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공숙좌가 위앙을 천거한 것은 곧은 점으로는 사어(史魚)와 같고, 속임수를 쓴 점으로는 소하(蕭何)와 같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위앙의 나라 다스림과 한신(韓信)의 군사 거느림은 오직 크게 써야 할 능력이지 작은 일로써 시험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무릇 길가에 재를 버리는 데에서 법을 세우고, 목재 하나 옮기는 데에서 상()을 미덥게 한 것은 곧 나라를 부유케 하고 군사를 강하게 하는 술책으로서, 이를 작은 관직에서나 일개 현()에서 시험했다면, 대중의 생각과 어긋나고 풍속을 놀라게 하여 당장에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며, 아무리 하루아침에 경상(卿相)의 자리에 앉았다 할지라도 당시의 군주가 온 나라를 들어 맡기지 않았다면 위앙이 큰 일을 하지 못하였을 것 또한 분명합니다.

이 때문에 평상시 일 없는 날에 위앙을 추천하고 아뢸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하는 자도 힘이 되지 못할까를 항상 걱정하고, 듣는 자도 깊이 신뢰할 수 없음을 늘 괴로워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하는 일과 그의 말을 살피는 방법은 인재를 등용하는 보통의 방법에 불과하며, 누차 시험하고 점차적으로 등용하는 방법은 단지 약한 나라의 대부(大夫)에게나 적용할 방법일 뿐이니, 도리어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아침저녁 좌우로 모시던 날에는 우선 참고 있다가 병문안을 온 임금을 대할 때에야 비로소 위앙을 천거한 것은, 죽음에 임박하여 비장한 말로써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자신의 말을 반드시 믿게 하기에 부족하다 여겨 마지막에는 그를 죽여 버리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비단 임금을 격동하여 그 부탁을 굳히자는 것일 뿐만 아니라, 만약 그를 놓아주어 국경을 벗어나게 한다면 진실로 위() 나라에 후일의 근심이 있을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충신이 나라를 근심하는 고심을 엿볼 수 있는 동시에, 시신을 늘어놓게 한 직간(直諫)에도 부끄럼이 없다 할 것입니다.

소하가 한신을 천거한 경우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소하가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도 한 고조가 등용하지 않자, 결국은 한신을 추적했노라는 궤변을 하여 고조를 격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저 한신은 적국의 한 도망병에 불과한데, 그를 위해 하루아침에 단장(壇場)을 만들고 갑작스레 상장(上將)의 인()을 수여하는 것이 충격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공숙좌의 지혜가 한 고조의 총명함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공숙좌는 단지 혜왕의 일개 구신(具臣)이요 위앙의 하류(下流)에 불과한 자입니다. 맹자(孟子)도 일찍이 위 나라에 갔었는데 공숙좌가 그 임금에게 천거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인의(仁義)의 설이 천하를 통치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 세상에서 진 효공(秦孝公)을 논하는 자들은 그가 위앙을 등용했다 해서 현명하다 하고, 양 혜왕(梁惠王)을 논하는 자들은 공숙좌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해서 어리석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설령 맹자가 진 나라에 갔다 해도 효공(孝公)은 반드시 그를 등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엇으로써 그럴 줄을 아느냐 하면, 위앙이 먼저 제왕(帝王)의 도로써 말하자 효공이 이따금 졸았으니, 맹자라면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펴는 따위는 반드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만약에 혜왕이 위앙을 직접 보았다면 반드시 허둥지둥 빗자루를 끼고 맞았을 것이니, 공숙좌의 천거가 없었더라도 나라를 들어 그에게 맡겼을 것입니다. 무엇으로써 그것을 아느냐 하면, 처음 맹자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어떻게 하면 나라를 이롭게 할지를 물은 것으로 보아, 공실(公室)을 강화하고 사문(私門)을 막아야 한다는 위앙의 주장이 나라를 이롭게 하는 술책이 아닌 것이 없으며 모두 혜왕이 듣기 좋아하는 말들이었으니, 혜왕이 부국강병의 공렬을 이루는 것이 어찌 진 효공보다 뒤졌겠습니까.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D-001]남이 …… 있겠는가 : () 나라 재상 공숙좌(公叔座)가 병이 위중하자 혜왕(惠王)이 병문안을 가서 그가 죽은 후의 대책을 물었더니 공숙좌가 대답하기를, “공손앙(公孫鞅)이 나이 비록 젊으나 기재(奇才)가 있으니 왕께서 온 나라를 들어다 맡기소서.” 하니, 왕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가려 하였다. 이에 다시 왕께서 공손앙을 등용하지 않으시겠다면 반드시 그를 죽여서 국경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다. 그런 다음 공손앙을 불러다 신하보다 임금을 우선시하는 마음에 너를 죽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빨리 도망치거라.” 하니, 공손앙이 왕이 나를 등용하라는 말을 듣지 않았으니 나를 죽이라는 말 또한 어찌 듣겠습니까?” 하고는 끝내 도망가지 않았다. 한편 혜왕은 좌우의 신하들에게 공숙이 병이 심하니 슬픈 일이오만, 나더러 나라를 공손앙에게 맡기게 하려 하니, 어찌 앞뒤 안 맞는 소리가 아니오.豈不悖哉라고 하였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D-002]한신을 …… 없다 : 승상 소하(蕭何)가 도망친 한신(韓信)을 데려와 한 고조에게 천거하면서, “왕께서 한중(漢中)에서 영원히 왕으로 지내고 싶으시면 한신을 쓸 일이 없겠으나, 반드시 천하를 다투고자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와도 일을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D-003]성실하고 …… 때문이다 : 원문은 老實無 缺로 되어 있으나,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老實無妄耳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04]회휼(回遹) : 간사하고 편벽되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민(小旻) 정책이 회휼하니 언제 멈출 건가.謀猶回遹 何日斯沮라고 하였다.

[D-005]심지어는 …… 인정하였습니다 : 공자가어(孔子家語) 곤서(困誓)에 위() 나라 영공(靈公)이 어진 거백옥(蘧伯玉)을 등용하지 않고 어질지 못한 미자하(彌子瑕)를 등용하자 대부(大夫) 사어(史魚)가 달려가 이를 간하였으나 영공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어가 병이 들어 죽음에 임박하자 아들을 불러다 놓고, “내가 위 나라 조정에 거백옥을 등용하지도 못하고 미자하를 물리치지도 못하였다. 이는 내가 임금을 바로잡지 못한 것이니 죽어도 장례를 치를 수가 없구나. 내가 죽거든 내 시신을 창문 아래에다 그냥 두거라.”라고 하였다. 영공이 조문을 왔다가 이상하게 여겨 아들에게 물어서 그 연유를 알고는 깜짝 놀라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곧바로 거백옥을 등용하였다. 이에 대해 논어 위령공(衛靈公)에서 공자(孔子) 곧도다, 사어여!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으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구나.”라는 말로 그를 칭송하였다.

[D-006]길가에 …… 세우고 : 공손앙이 변법(變法)을 만들면서 길가에 재를 버리는 사소한 잘못을 중형에 처함으로써 큰 법을 어기지 못하게 하였다. 史記 卷87 李斯列傳

[D-007]목재 ……  : 공손앙이 변법을 제정한 다음 이를 시행하기에 앞서 백성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도성의 남문에 세 길이 되는 목재를 세워 놓고 이를 북문까지 옮겨다 놓는 사람에게는 50()을 상으로 주겠다고 선포한 후 목재를 옮기는 사람이 나오게 되자 곧바로 50금을 주어 백성들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D-008]병문안을 ……  : 원문은 東首拖紳之除際이다. 논어(論語) 향당(鄕黨)에 공자는 병이 들어, 임금이 와서 살펴보시거든, 동으로 머리를 두시고, 조복(朝服)을 몸에 덮고 그 위에 큰 띠를 얹으셨다.疾 君視 東首 加朝服拖紳고 하였다.

[D-009]구신(具臣) : 단지 수효만 채우고 있는 쓸모 없는 신하를 말한다.

[D-010]위앙이 …… 졸았으니 : 위앙이 진() 나라 총신(寵臣)인 경감(景監)을 통해 진 효공을 만났는데, 첫 번째 만남에서 제도(帝道)에 대하여 유세하였더니 진 효공이 꾸벅꾸벅 졸았다. 다음 만남에서는 왕도(王道)에 대해 말하였으나 이 또한 듣지 않았고, 다음에는 패도(霸道)에 대하여 말하자 차츰 관심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강국(强國)에 대하여 말하자 효공이 매우 좋아하였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D-011]한 자를 …… 따위 : 원문은 枉尺直尋인데,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이다. 자존심을 조금 굽힘으로써 큰 이익을 얻는 짓을 말한다.

[D-012]빗자루를 …… 것이니 : 고대 중국에서는 귀빈을 맞을 때 길을 먼저 청소하고, 주인이 빗자루를 끼고 대문에서 손님을 맞음으로써 경의를 표하는 풍습이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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