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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6권 별집
서사(書事)
이방익(李邦翼)의 사건을 기록함
면천 군수(沔川郡守) 신 박지원은 교명(敎命)을 받들어 지어 올립니다.
금상(今上 정조(正祖)) 20년 - 청(淸) 나라 가경(嘉慶) 원년(1796) - 9월 21일에 제주 사람 전(前) 충장장(忠壯將) 이방익이 서울에 있는 자기 부친을 뵐 양으로 배를 탔다가 큰바람을 만나 표류되어 10월 6일에 팽호도(澎湖島)에 닿았습니다. 관에서 의복과 음식을 주어 십여 일을 머물게 한 뒤에 호송하여 대만(臺灣)에 당도하고, 거기서 또 하문(厦門)을 경유하여 복건(福建), 절강(浙江), 강남(江南), 산동(山東) 등 여러 성(省)들을 거쳐 북경(北京)에 도달하고, 요양(遼陽)을 경유하여 다음해인 정사년 윤6월에 서울에 돌아오니, 수륙(水陸) 만여 리를 거쳐온 것입니다.
상께서 특별히 방익을 불러 보고 지나온 산천과 풍속을 하문하면서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그 일을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배를 같이 탄 8명 가운데 방익만이 문자를 알기는 하였으나, 겨우 노정(路程)만을 기록해 놓았을 뿐이요, 또 기억을 더듬어 입으로 아뢴 것도 왕왕 차서(次序)를 잃었습니다. 신 지원이 면천 군수로서 사은숙배(謝恩肅拜)하러 희정당(熙政堂)에 입시(入侍)하자 상께서 분부하시기를,
“이방익의 사건이 몹시 기이한데 좋은 기록이 없어 애석하니 네가 한 책을 지어 올리도록 하라.”
하시었습니다. 이에 신 지원이 송구한 마음으로 명을 받들고는 물러나 그 사실을 가져다 대략 증정(證正)을 가하였습니다.
방익의 부친은 전(前) 오위장(五衛將) 광빈(光彬)인데 일찍이 무과에 응시하려고 바다를 건너다가 표류되어 일본 장기도(長崎島)에 이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외국 선박들이 많이 모이고 시장과 마을이 번화하였습니다. 그때 의사(醫士) 한 사람이 광빈을 맞아 그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잘 대접하면서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광빈이 굳이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하니 의사가 내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예쁘장한 젊은 계집을 나오라 하여 광빈에게 절을 시키면서,
“내 집에 천금 재산을 쌓아 놓았으나 사내자식은 하나도 없고 다만 이 계집애가 있을 뿐이니, 원컨대 그대는 내 사위가 되어 달라. 내가 늙어서 죽게 되면 천금의 재산은 그대의 차지가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계집을 슬쩍 보니 치아가 서리같이 하얗고 아직 철즙(鐵汁)을 물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과연 처녀였습니다. 광빈이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제 부모의 나라를 버리고 재물을 탐내고 여색에 연연해서 다른 나라 사람이 되어 버린다면 이는 개돼지만도 못한 자이다. 더구나 나는 내 나라에 돌아가면 과거에 올라 부귀를 누릴 수 있는데, 하필 그대의 재물과 그대의 딸을 탐내겠는가.”
했더니, 의사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광빈이 비록 섬 속의 무인(武人)이지만 의젓하여 열사(烈士)의 기풍이 있었으며, 그 부자(父子)가 멀리 이국에 노닐게 된 것도 역시 기이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제주는 옛날의 탐라(耽羅)입니다. 《북사(北史)》에 이르기를, “백제에서 남쪽으로 항해하면 탐모라(耽牟羅)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땅에는 노루와 사슴이 많으며 백제에 복속하였다.”라 했고, 또 이르기를, “고구려 사신 예실불(芮悉弗)이 위(魏) 나라 선무제(宣武帝)에게 말하기를, ‘황금은 부여(夫餘)에서 나고 옥은 섭라(涉羅)에서 산출되는데 지금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이 됐으므로, 이 두 가지 물품은 그 때문에 올리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용삭(龍朔) 초에 담라(澹羅)가 있었는데 그 왕 유리도라(儒理都羅)가 사신을 보내 입조(入朝)했다. 나라는 신라 무주(武州) 남쪽 섬에 있는데 풍속이 박루(樸陋)하여 개가죽 옷을 입고 여름에는 혁옥(革屋 가죽을 펴서 지붕을 삼은 집)에서 살고 겨울에는 움집에서 생활한다. 처음에는 백제에 복속되었으나 후에 신라에 복속되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이는 다 탐라를 가리킵니다. 우리나라 방언에 도(島)를 ‘섬’이라 이르고 국(國)을 ‘나라’라 이르는데 탐(耽) · 섭(涉) · 담(澹) 세 음은 모두 ‘섬’과 유사하니 대개 섬나라라는 뜻입니다. 옛 기록에 일컬은 바, “처음에 탐진(耽津 강진(康津))에 배를 정박하고 신라에 조회했기 때문에 ‘탐라’라 한다.”고 한 것은 견강부회의 설입니다.
송 나라 가우(嘉祐) 연간에 소주(蘇州) 곤산현(崑山縣) 해상에 배 하나가 돛대 꼭지가 부러져 바람에 날리어 해안에 닿았는데, 배 안에는 30여 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의관(衣冠)은 당 나라 사람 같았으며 홍정(紅鞓 붉은 가죽 띠)과 각대(角帶 뿔로 장식한 허리띠)를 띠고 짧고 검은 베적삼을 입었는데, 사람을 보면 모두 통곡만 하고 언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험 삼아 글자를 쓰게 했더니 쓴 글자 역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다닐 적에는 서로 줄지어 다녀 기러기 줄과 같았습니다. 한동안 있다가 문서 하나를 꺼내어 사람에게 보이는데, 바로 한자(漢字)로 씌어진 것으로서 당 나라 천수(天授 690~692) 연간에 둔라도(屯羅島) 수령 배융부위(陪戎副尉)에 임명한다는 제서(制書 왕의 명령서)이고, 또 하나의 문서가 있는데 바로 고려에 올리는 표문(表文)으로서 ‘둔라도’라 칭했으며 그 역시 한자를 사용했습니다. 곤산현 지사(崑山縣知事)가 사람을 시켜 그 돛대 꼭지를 수리해 주게 했는데 그 돛대 꼭지는 예전에는 선목(船木) 위에 꽂혀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인(工人)이 그를 위하여 돌리는 굴대를 만들어 돛대를 일으키고 눕히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살펴보건대, 제주는 옛날에 또한 ‘탁라(乇羅)’라고도 불렸으며 한 문공(韓文公 한유(韓愈))은 ‘탐부라(耽浮羅)’라 불렀습니다. 이른바 ‘둔라(屯羅)’라는 것은 ‘탁라(乇羅)’의 와전입니다. 천수(天授)는 고려 태조의 연호이니 《고려사》에 “천수 20년에 탁라 도주(乇羅島主)가 내조(來朝)하여 왕이 작(爵)을 내렸다.”는 것이 바로 그 실례입니다. 송 나라 사람이 이를 당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연호로 본 것은 더욱 틀린 것으로서, 제주 사람이 중국에 표류되어 들어간 것은 예로부터 있어 온 일입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배가 바람에 휘날려 혹은 동서로 혹은 남북으로 표류하기를 열엿새 동안이나 하였습니다. 일본에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중국으로 향하였습니다. 양식이 떨어져서 먹지 못한 것이 여러 날이었는데, 문득 큰 물고기가 배 안으로 뛰어들어 여덟 사람이 함께 산 채로 씹어 먹었습니다. 먹을 물이 다 떨어졌는데 하늘이 또 큰비를 내려 주어 모두들 두 손을 모아 받아 마시고 갈증을 풀었습니다. 배가 처음 해안에 닿았을 때는 정신이 어지러워 인사불성이 되었사온대, 어떤 사람이 멀리 서서 이를 엿보고 있더니 이윽고 무리를 지어 배에 올라 배 안에 있는 의복 따위들을 모두 챙기고 각자 한 사람씩 업고 나섰습니다. 이렇게 30여 리를 가니 마을이 나왔는데 30여 호쯤 되었고 중앙에는 공청(公廳)이 있어 ‘곤덕배천당(坤德配天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들이 미음을 만들어 주어 마시고 화로를 가져다 옷을 말려 주곤 하여 겨우 정신을 차려서는 지필(紙筆)을 청하여 글자를 써서 묻고서야 비로소 그곳이 중국의 복건성(福建省) 소속인 팽호도(澎湖島) 지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팽호도는 서쪽으로 천주(泉州)의 금문(金門)과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도경(圖經 지도책)에 의하면 팽호도는 동길서(東吉嶼), 서길서(西吉嶼) 등 36개의 섬이 있어 바다를 건너는 자는 반드시 동길서와 서길서를 경유하여야 합니다.
예전에는 동안현(同安縣)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명 나라 말기에 이르러 지역이 바다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백성들이 흩어져 있음으로 인해 세금 수납이 불가능하므로, 마침내 논의하여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 후 내지(內地)의 백성들이 부역에 시달리다 못해 가끔 그 안으로 도피해 갔는데, 동안(同安)과 장주(漳州)의 백성이 가장 많았습니다. 홍모(紅毛 네덜란드인)가 대만(臺灣)을 점령했을 때 이 지역도 아울러 차지했으며, 정성공(鄭成功) 부자(父子)가 다시 대를 이어 웅거할 때 이 지역을 맏고 대만의 문호로 삼았습니다. 주위를 빙 둘러 36개의 섬이 있는데, 그중 제일 큰 섬은 마조서(媽祖嶼) 등지로 오문구(澳門口)에 두 포대(砲臺)가 있고, 그 다음은 서서두(西嶼頭) 등지이며, 각 섬들 가운데 서서(西嶼)만이 조금 높을 뿐 나머지는 다 평탄합니다. 하문(厦門)으로부터 팽호에 이르기까지는 물빛이 검푸른 색이어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으며 뱃길의 중도(中道)가 되어 순풍이면 겨우 7경(更) 반 만에 갈 수 있는 물길이지만 한번 태풍을 만나면 작게는 별항(別港)에 표류되어 한 달 남짓 지체하게 되고, 크게는 암초에 부딪쳐 배가 엎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뱃사람들은 바람을 보고 기후를 점치는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침반으로 방향을 정하였고, 바다에 나갈 때는 시기에 따라 각각 그 방향을 달리하였습니다. 즉 봄과 여름에는 진해기(鎭海圻)를 통해 바다로 나가는데, 정남풍이 불면 건해방(乾亥方 서쪽에서 북으로 45도~60도 방향)에서 손사방(巽巳方 동쪽에서 남으로 45도~60도 방향)을 향해 나아가며, 서남풍이 불면 건방(乾方 북서향)에서 손방(巽方 남동향)을 향해 나아갑니다. 겨울에는 요경(寮經)을 경유하여 바다로 나가는데, 정북풍이 불면 술방(戌方 서쪽에서 북으로 30도 방향)에서 진방(辰方 동쪽에서 남으로 30도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한밤중에는 건술방(乾戌方 서쪽에서 북으로 30도~45도 방향)에서 손진방(巽辰方 동쪽에서 남으로 30도~45도 방향)을 향해 나아가며, 동북풍이 불면 신술방(辛戌方 서쪽에서 북으로 15도~30도 방향)에서 을진방(乙辰方 동쪽에서 남으로 15도~30도 방향)을 향해 나아갑니다. 혹 위두(圍頭)를 경유하여 바다로 나가기도 하는데, 정북풍이 불면 건방(乾方)에서 손방(巽方)을 향해 나아가고 한밤중에는 건해방(乾亥方)에서 손사방(巽巳方)을 향해 나아가며, 동북풍이 불면 건술방(乾戌方)에서 손진방(巽辰方)을 향해 나아갑니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든 날이 밝아질 즈음이면 모두 팽호의 서서두(西嶼頭)를 볼 수가 있습니다. 팽호를 거쳐 대만으로 갈 때에는 모두 손방(巽方)을 향해 나아가는데 저물녘이면 대만을 볼 수 있습니다. 팽호는 애초에 벼를 심을 만한 수전(水田)이 없었고 다만 고기 잡는 것으로써 생계를 삼았으며 혹은 남새를 가꾸어 자급하는 형편이었는데, 지금은 무역선이 폭주하여 점차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여덟 사람이 함께 채선(彩船 아름답게 장식한 배)을 타고 5리쯤 가서 마궁(馬宮)의 아문(衙門)으로 나아가니 강물을 따라 채선 수백 척이 널려 있고 강가에는 화각(畵閣)이 있는데 바로 아문이었습니다. 문 안에서 소리를 높여 세 번 외치고는 우리 여덟 사람을 인도하였습니다. 마궁의 대인(大人 고위 벼슬아치)이 홍포(紅袍)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나이는 예순 남짓하고 수염이 좋게 났으며, 계단 아래에는 붉은 일산을 세우고 대상(臺上)에는 시립(侍立)해 있는 자가 80명쯤 되었습니다. 모두 무늬 새긴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혹은 남색 혹은 녹색이었으며, 혹은 칼을 차고 혹은 화살을 짊어졌고, 대하(臺下)에는 붉은 옷 입은 병졸이 30명쯤 되는데 모두 몽둥이를 쥐고 있었으며 간혹 대나무 작대기도 쥐고 있었습니다. 황룡기 2쌍을 들고 징 1쌍을 울리면서 우리 여덟 사람을 인도하여 대상에 올라가니 마궁의 대인이 바다에 표류된 연유를 묻기에, 우리는 조선 전라도 전주부(全州府) 사람으로서 이러이러한 연유로 표류하게 되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고는 물러 나오니, 큰 건물이 있는데 바닥에 깐 것이 모두 주단이었습니다. 우리들 각자에게 대로 만든 자리와 베개를 주고 날마다 미음 한 그릇과 닭고깃국 한 그릇을 주고 또 향사육군자탕(香砂六君子湯)을 두 때씩 주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마궁 대인의 그 궁(宮) 자는 아마도 공(公) 자인 것 같습니다. 공(公)과 궁(宮)이 중국 음으로는 서로 같으므로 이는 응당 마씨(馬氏) 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통판(通判 주부(州府)의 장관(長官) 다음 직책)이 된 자일 것입니다. 또 탐라 사람이 이국에 표류된 경우 본적을 일컫기를 꺼리고 영광(靈光) · 강진(康津) · 해남(海南) · 전주(全州) 등의 지방으로 둘러대는 것은, 속(俗)에서 전하기를 유구(琉球)의 상선(商船)이 탐라 사람의 해를 입은 때문이라고 합니다. 혹은 유구가 아니고 안남(安南)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 그에 대한 시(詩)가 모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증거가 될 만한 옛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세속의 유전(流傳)일 뿐이니 굳이 그 진위(眞僞)를 분변하려 들 것은 없습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두 척의 큰 배에 나누어 타고 서남(西南)으로 향하여 이틀 만에 대만부(臺灣府)의 북문(北門) 밖에서 하륙(下陸)했는데, 번화하고 장려하여 길 양옆에 누대가 늘어서 있고 밤에는 유리등을 켜 대낮처럼 밝았습니다. 또 기이한 새를 채색 초롱에 기르고 있는데 그 새는 시간을 알아서 울곤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대만은 《명사(明史)》에 계롱산(鷄籠山)이라 칭하였고 또 동번(東蕃)이라 칭했습니다. 영락(永樂) 연간에 정화(鄭和)가 동서의 대양(大洋)을 두루 원정하여 모두가 조공을 바치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유독 동번만은 멀리 피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화가 이를 미워하여 집마다 하나씩 구리 방울을 주어 그 목에 걸게 하였는데, 이는 대개 구국(狗國)에 비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사람들은 도리어 그 방울을 보배로 여겨, 부자는 여러 개씩을 걸고 다니며 ‘이는 조상이 물려준 것’이라며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풍속은 꿩을 먹지 않고 다만 그 털만 취하여 장식품을 만든다 합니다. 건륭 52년(1787)에 임상문(林爽文)의 난을 토벌하자 임상문의 군사가 패하여 내산(內山)으로 들어가니 생번(生番)들이 포박하여 바쳤는데 열하(熱河)의 문묘(文廟) 대성문(大成門) 바른편 벽의 비(碑)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번들은 다 키가 왜소하며 단발한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머리카락은 칠흑색이며 양미간이나 턱 위에 팔괘(八卦) 무늬와도 같은 낙인을 찍었으며, 귓바퀴를 뚫어 주석(朱錫) 통을 꽂았는데 그 통은 앞뒤가 통하며, 혹은 횡목(橫木)을 꿰어 골패(骨牌)를 달고 다닌다고 합니다. 투왕(投旺), 균력력(勻力力), 나사회축(囉沙懷祝), 야황와단(也璜哇丹), 회목회(懷目懷)라 불리는 자들은 일찍이 열하에 입조(入朝)한 자들입니다.
○ 바다로 둘러싸인 대만부(臺灣府)의 경내에는 모두 뱃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는 것을 거리로 구분하지 않고 하루를 10경(更)으로 나눈 시간으로 기준을 삼습니다. 계롱(鷄籠)과 담수(淡水)에서 배로 복주(福州) 항구에 이르자면 5경(更)이 걸리고, 대만항으로부터 팽호(澎湖)에 이르자면 4경이 걸리고, 팽호로부터 천주(泉州) 금문소(金門所)에 이르자면 7경이 걸립니다. 동북으로 향하여 일본국에 이르자면 72경이 걸리며, 남으로 여송국(呂宋國 스페인 치하의 필리핀 루손섬)에 이르자면 60경이 걸리며, 동남으로 대항(大港)에 이르자면 22경이 걸리며, 서남으로 남오(南澳)에 이르자면 7경이 걸리는데, 다 순풍을 만났을 때를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동쪽 끝의 바다에 위치하여 달이 항상 일찍 뜨기 때문에 조수(潮水)의 드나듦도 하문(厦門)과 동안(同安)에 비교하여 또한 이른 편입니다. 바다에 큰바람이 많아서 그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 태풍(颱風)입니다. 토번(土蕃)에 태풍이 오는 것을 알려 주는 풀이 있어 이 풀이 나면서 마디가 없으면 일 년 내내 바람이 없고, 마디가 하나면 태풍이 한 번 불고, 마디가 많으면 태풍 또한 그 수만큼 부는데, 들어맞지 않는 적이 없었습니다.
○ 녹이문(鹿耳門)은 대만 서쪽 30리에 있는데 그 형상이 사슴의 귀처럼 생겼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습니다. 양쪽 해안에 모두 포대(砲臺)를 쌓아 놓았고 바닷물이 해협 사이로 흘러 구불구불 휘돌아 들어옵니다. 그 가운데에 해옹굴(海翁崛)이 있는데 평소에는 뜬모래가 많고 물이 얕으나, 바람이 세게 불면 깊이가 돌변하여 가장 험한 곳이 됩니다. 녹이문 안으로 들어가면 수세(水勢)가 약해지고 넓은 곳이 나와 1000척의 배를 정박해 둘 만한 곳이 있으니 곧 대원항(大圓港)이라는 곳입니다.
○ 가의현(嘉義縣)은 정씨(鄭氏) 때에 천흥주(天興州)에 속하였다가 강희(康熙) 23년(1684)에 분리되어 제라현(諸羅縣)이 되었습니다. 건륭 52년(1787)에 대만의 도적 임상문이 현성(縣城)을 공격했을 때 성내의 거주민 4만 명이 제독(提督)을 도와 성을 지켰으므로, 이로 인해 칙령을 내려 제라현을 가의현으로 고쳐 정표(旌表)를 한 것입니다.
○ 안평진성(安平鎭城)은 일곤신(一崑身)의 위에 있는데, 곤신(崑身)이란 번어(蕃語 원주민의 말)로 모래 제방이라는 뜻입니다. 동쪽으로는 만가도두(灣街渡頭)에 닿고 서쪽의 모래언덕은 대해(大海)에 닿으며, 남쪽으로는 이곤신(二崑身)에 이릅니다. 북쪽에는 해문(海門 해협)이 있는데 원래 홍모(紅毛)의 협판선(夾板船)이 드나들던 곳입니다. 살펴보건대, 일곤신은 둘레가 5리입니다. 홍모가 성을 쌓을 때 큰 벽돌을 이용하고 동실유(桐實油)와 석회를 섞어 함께 다져서 만든 것입니다. 성의 기초는 땅 밑으로 한 길 남짓 들어가고 깊이와 너비도 한두 길이나 됩니다. 성벽 위의 성가퀴는 모두 쇠못을 박았는데 둘레가 1리이며 견고하여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동쪽 지역에는 집들과 시장을 마련하여 백성의 무역을 허용하였습니다. 성안은 누대를 오르내리듯 굴곡이 심하고, 우물물은 싱겁고 짠맛이 일정하지 않아 별도로 우물을 파 놓았는데 구멍이 하도 작아서 두레박이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고 물이 벽에서 흘러내립니다. 서쪽과 남쪽 일대는 본시 모래 돈대였는데 홍모들이 돌을 실어다 견고하게 쌓아서 파도가 대질러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 적감성(赤嵌城) 역시 홍모가 쌓은 것인데 대만의 해변에 있어 안평진(安平鎭)과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 성의 둘레는 반 리(里)에 지나지 않습니다. 계롱(鷄籠)과 담수(淡水)는 조그마한 성인데 홍모가 쌓아서 바닷바람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풍만 막아 줄 뿐 북풍은 막아 주지 못합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대만에 머문 지 7일째 되던 날 글을 올리고 돌아갈 것을 청했더니 관에서 옷 한 벌을 내주고 전별연을 열어 송별해 주었는데 손을 꼭 잡고 아쉬워하였습니다. 배로 하문(厦門)에 이르러 자양서원(紫陽書院)에 머물렀는데, 들어가서 주자(朱子)의 상(像)에 절을 하니 유생 수백 명이 와서 보고 다정스레 대해 주었습니다. 험한 길에는 또 죽교(竹轎)를 타고 갔으며 동안현(同安縣)의 치소(治所)와 천주부(泉州府) · 흥화부(興化府)를 지났는데, 대홍교(大虹橋 대형 무지개다리)가 있어 좌우로 용주(龍舟 용머리로 장식한 경주용 배) 만여 척이 줄지어 서 있고 노래와 풍악 소리로 시끌벅적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주자가 동안현의 주부(主簿)로 있을 때에 고사헌(高士軒)을 지어 여러 유생과 더불어 그곳에서 강습한 일이 있는데 지금의 서원이 서 있는 자리는 아마도 그 옛터인 듯합니다. 또 원(元) 나라 지정(至正) 연간에 고을 수령 공공준(孔公俊)이 서원을 세우고 청하여 대동서원(大同書院)이란 액호를 하사받았는데 바로 이 서원을 가리킵니다. 대홍교는 곧 낙양교(洛陽橋)로서, 당 나라 선종(宣宗)이 미행(微行)을 나와 산천의 승경(勝景)을 구경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경탄하며 하는 말이, “우리 낙양과 너무나 닮았구나.” 했기 때문에 낙양교라 이름한 것이고, 일명(一名) 만안교(萬安橋)라고도 합니다. 또 강어귀에 낭자교(娘仔橋)가 있는데 그 길이가 매우 깁니다. 예전에 바닷나루〔海渡〕에서 해마다 빠져 죽는 자가 수없이 많았기에 군수 채양(蔡襄)이 돌을 포개어서 교량을 만들고자 했는데, 조수가 밀려들어 인력으로는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침내 해신(海神)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을 지어 한 아전에게 주어 보냈는데 그 아전이 술을 실컷 마시고는 해안에서 반나절 동안이나 잠을 자다가 조수(潮水)가 빠질 때 깨어나 보니 문서는 이미 봉투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돌아와서 바치므로 채양이 열어 보았더니 다만 작(醋) 자 한 자만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채양이 그 뜻을 깨닫고서 “신(神)이 나에게 스무하룻날 유시(酉時)에 공사를 시작하라고 하는구나.”라고 하였는데 그날에 이르자 조수가 과연 물러갔습니다. 그리하여 8일 저녁만에 공사가 완료되었는데 소비된 금전이 1400만이요, 길이가 360장(丈)이요, 너비는 1장 5척(尺)입니다. 예전에도 표류하다 돌아온 제주 사람 가운데 이 다리를 지나온 자가 있었는데, 어떤 이는 다리의 길이가 10리라 하고 어떤 이는 50리라 하는 등 안타깝게도 정확하게 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기록에는 길이가 360장이고 홍공(虹空)이 47개라고도 합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정월 초닷샛날 복건성(福建省)에 들어서니 문안에 법해사(法海寺)라는 절이 있었고 보리는 하마 누렇게 익었으며 귤과 유자(柚子)는 열매가 드리워 있고 의복과 음식이 우리나라와 비슷하였습니다. 우리를 보러 온 사람들이 앞 다투어 사탕수수를 던져 주었으며, 어떤 이는 머뭇거리고 아쉬워하며 자리를 떠나지 못하였고 어떤 이는 우리의 의복을 입어 보고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또 어떤 이는 옷을 안고 돌아가 가족들에게 보여 주고 돌아와서는 ‘소중하게 감상하면서 가족들과 돌려 보았다’고도 말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장주(漳州)에는 신라현(新羅縣)이 있는데 당 나라 시대에 신라가 조공을 바칠 때 거쳤던 지역이었습니다. 또 “신라가 오(吳) · 월(越)을 침범하여 그 지역의 일부를 점령하여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주(泉州)와 장주 지역의 유속(遺俗)이 우리와 유사하다는 것은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 의복을 보고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아직도 고국을 그리는 마음이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행차가 지체되어 또다시 글을 올려 순무부(巡撫府)에 애걸하던 차에 관인(官人) 한 사람이 쌍가마를 타고 누런 일산(日傘)을 받치고 지나가기에 바로 나아가 길을 가로막고 진정하였더니, 그 관원이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며칠 후에 서른다섯 명의 관원이 일제히 모일 터이니 그때 다시 오라.’ 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가서 호소하였더니 뭇 관원이 돌려 가면서 보고 나서 순무부에 고하여 순검(巡檢) 한 사람을 임명해 호송하도록 하였습니다. 성(城)의 서문(西門)으로 나와 40리를 가서 황진교(黃津橋)에 당도하였고, 작은 배에 올라 이틀 만에 상륙하여 서양령(西陽嶺), 보화사(寶華寺)를 경유하여 절강성(浙江省)에 당도하여 선하령(仙霞嶺)을 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선하령은 강산현(江山縣)에 있습니다. 송 나라 사호(史浩)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곳을 지나면서 돌을 쌓아 길을 냈는데 모두 360개의 층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강남성(江南省) 강산현(江山縣)에 당도한 다음 배를 타고 길을 재촉하여 떠났습니다. 강가에 작은 배가 있는데 어옹(漁翁)이 청둥오리〔靑鳧〕 수십 마리를 싣고 가서 물 한가운데에다 풀어놓으니 그 오리가 고기를 물고 배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강산현의 지명은 그곳에 강랑산(江郞山)이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뱃사람이 곡식으로 돼지를 키워 돼지고기 맛이 보통과 다른데, 사람들 말에 이르기를 “희생(犧牲)으로는 대려(大荔)의 염소와 강산의 돼지가 가장 좋다.” 하였습니다. 또 고기를 잡아 오는 청둥오리는 바로 가마우지요, 물오리가 아닙니다. 일명 오귀(烏鬼)라고도 하는데 두보(杜甫)의 시에,
집집마다 오귀를 기르니 / 家家養烏鬼
끼니마다 황어를 먹게 된다 / 頓頓食黃魚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강남 지방을 그린 그림 속에 왕왕 이러한 풍경이 있습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용유현(龍游縣)을 지나서 엄주(嚴州)에 당도하여 자릉대(子陵臺)에 올라보니 대(臺) 곁에 자릉사(子陵祠)가 있었습니다. 항주부(杭州府) 북관(北關)의 대선사(大善寺)에 이르니 산천의 수려함이라든가 인구의 번성함이라든가 누대의 웅장함이 쉴 새 없이 보아도 다 볼 수 없을 정도였으며, 큰 배가 출렁이는 물결 위에 떠 있어 여러 명의 기녀들이 뱃머리에서 유희를 하고 있었는데 차고 있는 패옥 소리가 쟁그랑쟁그랑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용구산(龍邱山)은 용유현에 있는데 아홉 개의 바윗돌이 수려하게 솟아서 형상이 연꽃과 흡사합니다. 한(漢) 나라 용구장(龍邱萇)이 이곳에 은거하였는데 엄광(嚴光)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조대(釣臺)는 바로 엄광이 은거한 곳으로서 두 벼랑이 깎아지른 듯이 서서 검주(黔州)와 무주(婺州)에서 흘러온 물을 끼고 동려(桐廬)현으로 내려가는데 꾸불꾸불 헤엄치는 용의 형세로 7리를 뻗쳐 있습니다. 물이 불어나면 물살이 부딪치는 것이 화살과 같고 산허리에 큰 바윗돌 두 개가 우뚝하니 마주 서서 기울어 떨어질 듯하므로 조대(釣臺)라고 이름한 것이니 이는 천연적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호사자(好事者)가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왼편에는 백 척(尺)의 낚싯줄을 드리우고 오른편에는 아주 작은 솥 하나를 남겨 두었습니다. 대(臺)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깊은 못은 물빛이 녹옥(綠玉 에메랄드)처럼 검푸른 빛을 띠고 있고 산기슭에는 온갖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뻗어 있으며 아래에는 십구천(十九泉)이 있는데 육우(陸羽)의 품평을 거친 샘입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항주(杭州)로부터 엿새 만에 소주(蘇州)에 당도하니 서쪽에 한산사(寒山寺)가 있는데 누런 기와집 40칸이었습니다. 지현(知縣)인 왕공(王公)이 음식을 장만하여 후대하고 저희들에게 유람을 시켜 주었습니다. 배로 10리를 가니 고소대(姑蘇臺)에 당도했고 또 30리를 가니 악양루(岳陽樓)가 나왔는데 구리로 기둥을 세웠고 창문과 대청마루는 다 유리를 써서 만들었으며 대청 밑에다 못을 파고 오색 물고기를 길렀고, 앞으로는 동정호(洞庭湖)가 바라보였습니다. 거기서 돌아와서 또 호구사(虎邱寺)에 당도하니 천하에서 제일 큰 절이라고 하는데 7층의 탑이 바라보니 가없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신 지원이 일찍이 듣건대, 중국 사람들은 강산이 아름답기로는 항주가 제일이요, 번화하기로는 소주가 제일이라 하였고, 또 여자의 머리 모양새는 소주에서 유행하는 모양을 제일로 친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소주는 한 주(州)의 부세(賦稅)만 보더라도 다른 고을에 비하여 항상 10배가 더하니, 천하의 재물과 부세가 소주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산사(寒山寺)는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이 일찍이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장계(張繼)의 시(詩) 중에 ‘고소성 밖의 한산사〔姑蘇城外寒山寺〕’라는 시구를 익히 들어 왔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반드시 이로써 품평을 하는데 이것은 모방이 지나친 것으로, 진짜 한산사나 진짜 고소대로 말하자면 종래로 이곳에 몸소 갔다 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 방익이 창문(閶門)에서 옷을 털고 태호(太湖)에서 갓끈을 씻을 수는 있으나, 그가 악양루(岳陽樓)를 보았다고 말한 것은 사뭇 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대개 태호는 동동정(東洞庭)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고 태호 속에는 포산(包山)이 있어 이를 또 동정산(洞庭山)이라 불렀습니다. 이 동정(洞庭)이라는 이름 때문에 마침내 악주성(岳州城) 서문루(西門樓 악양루)의 이름까지 함부로 들먹였으니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 태호와 관련된 여러 기록들을 부기(附記)하여 근거 없이 하는 이야기를 논파하고자 합니다.
○ 태호는 오군(吳郡)의 서남쪽에 있는데 넓이가 3만 6000경(頃)이며 그 안에는 72개의 산이 있고 소주(蘇州), 호주(湖州), 상주(常州)를 접하고 있습니다. 일명은 구구(具區)이며 일명은 입택(笠澤), 일명은 오호(五湖)입니다. 우중상(虞仲翔)이 말하기를, “태호는 동으로 장주(長洲)의 송강(松江)과 통하고, 남으로 오정(烏程)의 삽계(霅溪)와 통하고, 서로 의흥(宜興)의 형계(荊溪)와 통하고, 북으로 진릉(晉陵)의 격호(滆湖)와 통하고, 동으로 가흥(嘉興)의 구계(韭溪)와 이어진다. 물이 무릇 다섯 길로 흐르기 때문에 오호라 이른다.” 하였습니다. 지금 호수 속에 또한 다섯 개의 호수가 있는데 즉 능호(菱湖), 막호(莫湖), 유호(游湖), 공호(貢湖), 서호(胥湖)입니다. 막리산(莫釐山)의 동에 30여 리를 두른 것은 능호요, 그 서북으로 50리를 두른 것은 막호요, 장산(長山)의 동으로 50리를 두른 것은 유호요, 무석(無錫)과 노안(老岸)을 따라 내려가서 190리를 두른 것은 공호요, 서산(胥山)의 서남쪽 60리를 두른 것은 서호입니다. 오호 이외에 또 세 개의 작은 호수, 즉 매량호(梅梁湖), 금정호(金鼎湖), 동고리호(東皐里湖)가 있는데 오인(吳人 강남 지방 사람)들은 이들을 일컬을 때 오직 태호라고만 합니다.
태호에는 봉우리가 72개가 있는데 그 시발(始發)은 천목산(天目山)으로부터 뻗어 와서 의흥(宜興)에까지 이르고 태호에 들어 우뚝 솟아 여러 산이 되었습니다. 태호의 서북쪽에 있는 산은 14개인데 그중에 마적산(馬跡山)이 가장 크며, 또 서쪽에 있는 산은 41개인데 서동정산(西洞庭山)이 가장 크고, 또 동쪽에 있는 산은 17개인데 동동정산(東洞庭山)이 가장 큽니다. 마적산과 두 동정산을 멀리서 바라보면 아득하여 속세를 벗어난 듯한데, 가까이 나아가 보면 무성한 숲과 넓은 들, 여항(閭巷)과 정사(井舍), 선궁(仙宮 도관(道觀))과 범우(梵宇 절)들이 별이나 바둑알처럼 널려 있습니다. 마적산의 북쪽에는 진리산(津里山)과 부초산(夫椒山)이 큰 산인데 부초산은 부차(夫差)가 월 나라를 무너뜨린 곳입니다. 서동정산의 동북쪽에는 도저산(渡渚山), 원산(黿山), 횡산(橫山), 음산(陰山), 봉여산(奉餘山), 장사산(長沙山)이 큰 산이며, 장사산의 서쪽에는 충산(衝山), 만산(漫山)이 큰 산입니다. 동동정산의 동쪽에는 무산(武山)이 있고, 북쪽에는 여산(餘山)이 있으며, 서남쪽에는 삼산(三山), 궐산(厥山), 택산(澤山)이 큰 산입니다. 이들 산 위에도 사람들이 수백 가호가 살고 있습니다. 마적산의 서북쪽에는 마치 돈을 쌓아 놓은 듯한 산이 있는데 이름은 전퇴산(錢堆山)이라 합니다. 조금 동으로 가면 대올산(大屼山)과 소올산(小屼山)이 있으며, 석산(錫山)과 더불어 이어진 것 같으면서도 끊어져서 배가 그 사이로 다니는데 이를 독산(獨山)이라 하며, 물오리 두 마리가 서로 향하고 있는 것 같은 것이 있는데 이는 동압산(東鴨山)과 서압산(西鴨山)이며 그 가운데 삼봉산(三峯山)이 있습니다. 조금 남으로 나가면 대타산(大墮山)과 소타산(小墮山)이 있고 부초산과 더불어 마주 대하면서 조금 작은 산이 있는데 이것을 소초산(小椒山), 두기산(杜圻山)이라 합니다. 두기산은 범려(范蠡)가 일찍이 머물렀던 곳입니다. 서동정산의 북쪽 공호(貢湖) 가운데 두 개의 산이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데 대공산(大貢山), 소공산(小貢山)이라 이르며, 오성(五星)이 모인 것 같은 산이 있는데, 이는 오석부산(五石浮山)이라 합니다. 또 묘부산(茆浮山)과 사부산(思夫山)이 있으며, 마치 두 새가 날려다가 그친 것 같은 산이 있는데 이는 남오산(南烏山), 북오산(北烏山)입니다. 그 서쪽으로 두 산이 남북으로 마주했으나 서로 보이지 아니하며, 보이면 바로 바람 불든가 번개 치든가 하는 이상(異常) 현상이 있으니 이는 대뢰산(大雷山), 소뢰산(小雷山)입니다. 횡산의 동쪽에는 천산(千山)과 소산(紹山)이 있고 탄부산(疃浮山)이 있으며 또 동옥산(東獄山)과 서옥산(西獄山)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오 나라 왕이 이곳에다 남녀의 감옥을 각각 설치했다 합니다. 그 앞은 죽산(粥山)이라 하는데 오왕(吳王)이 죄수를 먹이던 곳이라 합니다. 거문고 같은 모양의 산이 있는데 이는 금산(琴山)이요, 방앗공이 같은 모양의 산이 있는데 이는 저산(杵山)이며, 대죽산(大竹山)과 소죽산(小竹山)은 충산(衝山)에 가까이 있습니다. 마치 물건이 수면에 뜬 것 같아서 볼 만한 것이 있는데 이는 장부산(長浮山), 나두부산(癩頭浮山), 전전부산(殿前浮山)이며, 원산(黿山)과 더불어 마주 대하여 조금 작은 것은 구산(龜山)이라 하며, 두 여자가 곱게 단장하고 서로 대한 것 같은 것은 사고산(謝姑山)입니다. 깎아지른 듯한 산머리에 기둥을 세운 것 같은 것이 있는데 옥주산(玉柱山)이요, 조금 물러서서 금정산(金庭山)이 있으며 그 남쪽에는 해산(峐山)이 있고 역이산(歷耳山)이 있으며, 가운데는 높고 옆이 낮은 산은 필격산(筆格山)이요, 머리를 쳐들고 달리는 것 같은 산은 석사산(石蛇山)이요, 노인이 섰는 것 같은 산은 석공산(石公山)인데 석사산과 석공산이 가장 기이합니다. 원산 · 구산과 더불어 남북으로 대면한 산은 타산(鼉山)이며 그 산 옆에는 소타산(小鼉山)이 있습니다. 소라 같은 모양의 산은 청부산(靑浮山)이며, 타산과 소타산 사이에 보일락 말락 한 산이 있는데 이것은 경람산(驚藍山)입니다. 동동정산의 남쪽으로 산머리가 뾰족하고 산자락이 갈라진 산은 전부산(箭浮山)이며, 집이 마치 틀어진 것 같이 생긴 것은 왕사부산(王舍浮山), 저부산(苧浮山)이요, 또 남으로 나가면 백부산(白浮山)이 되었으며, 택산(澤山)과 궐산(厥山)의 사이에 삿갓이 수면에 떠 있는 모습의 산이 있는데 이것은 약모산(蒻帽山)이요, 앞에서 도망가고 뒤에서 쫓아가서 잡은 모습의 산이 있는데 이는 묘서산(猫鼠山)이요, 마치 비석이 드러누워 있는 것 같은 산이 있는데 이는 석비산(石碑山)입니다. 이상은 태호 속에 있는 일흔두 봉을 열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크고 이름난 것은 두 동정산입니다. 《한서(漢書)》에 이르기를 “그 아래에 동굴이 있어 물밑으로 잠행(潛行)하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지맥(地脈)이라 부른다.” 하였고, 도가서(道家書)에는 이것을 제구동천(第九洞天)이라고 하였습니다.
○ 호구산(虎邱山)은 일명 해용봉(海湧峯)으로 불리는데 그 안에 작은 시내가 많고 굽이쳐 흐르는 물이 그 사이로 끼고 돌아 마치 달을 안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 가장 깊고도 아름다운 곳으로는 화정사(和靖祠) 터가 제일인데 푸른빛이 흰빛 너머로 찌를 듯이 비치어 하늘과 더불어 서로 닿아 있으며 그 위에는 탑이 있어 그곳에서 고소대(姑蘇臺)를 내려다보면 손바닥만 하게 보입니다. 탑을 돌아 남쪽으로 가면, 대대로 전하기를 생공강당(生公講堂)과 오석헌(悟石軒)이 그곳에 있다고 하며, 오석헌 곁에는 검지(劒池)가 있는데 칼로 잘라 놓은 듯이 양쪽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수천 척 높이로 곁에 서 있으며 맑고 차가운 물이 콸콸 소리 내며 흐르는데 그 아래에 사방이 트이고 한없이 넓은 거석(巨石)이 있어 그 위에 천 명이 앉을 만하고, 가운데에는 백련지(白蓮池)가 있는데 백련이 쭉쭉 솟아나 있고 꽃은 단청(丹靑)처럼 울긋불긋 피어 있습니다. 또 조금 내려가면 조그마한 돌길이 그 사이에 구불구불 뻗어 있는데 샘이 더욱 희한하고 돌은 더욱 기이하며, 홀연 높이 우뚝 솟아올라 소나무와 대나무가 넓게 자라나 있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화정(和靖)이 글 읽던 곳이었습니다. 호구산은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장지(葬地)여서 그 속에는 금부(金鳧) · 옥안(玉雁) · 동타(銅駝) · 수정(水精) · 벽해(碧海) · 단사(丹砂) 등 여러 물건이 많았으며, 일찍이 백호(白虎)가 산마루에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진(晉) 나라의 사도(司徒) 왕순(王珣)과 그 아우 민(珉)이 함께 여기에서 살았습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금산사(金山寺)는 오색의 채와(彩瓦)로써 지붕을 덮었으며 절 앞에는 석가산(石假山 인공으로 만든 돌산)이 있는데 높이가 백 길은 됨 직하고 또 섬돌을 5리나 빙 둘렀으며 이층의 누각을 세웠는데 아래층은 유생(儒生) 수천 명이 거주하면서 책을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고 있고 위층에는 노랫소리 피리 소리가 하늘을 뒤덮었으며 낚시하는 사람들이 낚싯대를 잡고 열을 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석가산 위에는 십자형(十字形)의 구리기둥이 가로놓이고 석판(石版)으로써 대청을 만들었으니 바로 법당(法堂)이었으며, 또 종경(鐘磬) 14개가 있는데 목인(木人 나무 인형)이 때에 맞추어 저절로 치게 되어 있어 종 하나가 먼저 울면 뭇 종이 차례로 다 울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금산(金山)은 양자강 한가운데에 있는데 그 빼어난 경치가 천하의 제일이라 합니다. 산아래에는 돌들이 그 앞에 나란히 솟아 쌍궐(雙闕)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곽박(郭璞)을 장사 지낸 곳이라 전해집니다. 그곳에 있는 샘을 중냉천(中冷泉)이라 하는데 맛이 극히 달고 차서 육씨(陸氏)의 수품(水品)에는 이 샘을 동남 지방의 제일로 삼았습니다. 절로는 용유사(龍游寺)가 있고 누각으로는 비라각(毘羅閣)이 있습니다. 비라각의 남쪽은 묘고대(妙高臺)라 하는데 대(臺) 위에는 예전에 능가실(楞伽室)이 있어 송 나라 미산(眉山) 소공(蘇公)이 일찍이 여기서 불경을 베껴 썼다 합니다. 북쪽은 선재루(善財樓)와 대비각(大悲閣)이 있으며, 탄해정(呑海亭) · 유운정(留雲亭) 두 정자가 산마루를 웅거하여 있고 그 두 정자를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강 물결이 아득하여 대(臺)와 전(殿)이 모두 그 아래에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날아갈 듯 정신이 상쾌해지게 만든다고 합니다. 동파(東坡)의 시에,
금산의 누각은 어찌 그리 심원한가 / 金山樓閣何耽耽
종소리 북소리가 회남까지 들려오네 / 撞鍾伐鼓聞淮南
한 것은 이를 묘사한 것입니다. 정자 남쪽에는 돌에 묘고대(妙高臺)와 옥감당(玉鑑堂)이라는 여섯 자의 큰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조금 내려가면 탑의 기단(基壇)이 둘이 있는데 남북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송 나라 승상 증포(曾布)가 건립한 것인 듯한데, 불에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관란정(觀瀾亭)을 경유하여 돌계단을 타고 서쪽으로 내려가면, 세월이 오래되어 계단의 돌이 많이 끊어지고 짜개졌으며, 강물결을 굽어보면 하늘 위를 다니는 것 같아서 발이 몹시 부들부들 떨린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조사암(祖師巖)이라는 바위가 있어, 가운데 부분이 당 나라 배두타(裴頭陀)의 형상과 닮았는데, 배두타가 산을 개간하다가 금을 얻었으므로 이 산의 이름을 금산(金山)이라 부른 것입니다. 바위의 바른편에는 동굴이 있어 깊고 캄캄하여 들어갈 수가 없으며, 용지(龍池)가 있어 가문 해에 기도를 드리면 비구름을 일으킬 수 있다 합니다. 왼편에는 용왕사(龍王祠)가 있는데 사전(祠典)에 나타나 있습니다. 또 강산일람정(江山一覽亭)과 연운기관정(烟雲奇觀亭)이라는 두 정자가 있는데 더욱 기이하고 빼어나다 합니다. 방익이 말한 이층의 누각은 바로 강천각(江天閣)으로서, 중 혜개(惠凱), 풍몽정(馮夢楨), 오정간(吳廷簡) 등 여러 사람의 기(記)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산동성(山東省) 이후로는 배에서 내려 수레를 탔는데 풍속이 비루하고 인민이 검소하여 가시싸리문에 먹는 것이라고는 기장과 서숙뿐이었습니다.”
하여, 일체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방익은 나이 41세로, 갑진년(1784)에 무과에 올라 수문장(守門將)에 제수되고, 승진하여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이 되었는데, 활쏘기 시합에 으뜸을 차지하여 특별히 자급(資級)을 올린 것입니다. 상께서 방익을 불러 보고는 장유(壯游)로 고생했다고 하여 특별히 전라도 중군(全羅道中軍)을 제수하여 그의 귀환을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선조(宣祖) 치세에 무인(武人)인 노인(魯認)이라는 자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쳐서 무주(婺州)에 이르러 고정서원(考亭書院)에서 늠생(廩生)으로 지내다가 압록강(鴨綠江)을 통해 돌아왔는데, 민중(閩中 복건성) 지방의 여러 명사(名士)들로부터 받은 송별시가 지금까지 그 집에 수장되어 있습니다. 노인 이후로 국외에 멀리 나간 자로는 방익을 처음으로 꼽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앞서 연경(燕京)에 들어간 자가 들은 바로는 해적이 중국의 남해를 가로막고 있어 상려(商旅)가 통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방익이 만리 길을 뚫고 지나왔으나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조금도 듣지 못했으니 온 누리가 태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방익이 기록한 도정(途程)은 《주행비람(周行備覽)》 등의 책들과 꼭 들어맞아 어긋나지 않으므로 이에 부록(附錄)하는 바입니다.
팽호(澎湖) → 대만부(臺灣府) → 하문(厦門) → 동안현(同安縣) → 천주부(泉州府) → 흥화부(興化府) → 복청(福淸) → 복녕(福寧) → 복건성성(福建省城) 법해사(法海寺) → 황진교(黃津橋) → 민청현(閩淸縣) 황전역(黃田驛) → 청풍관(淸風館) → 금사일(金沙馹) → 남평현(南平縣) 대왕관(大王館) → 태평일(太平馹) → 건녕부(建寧府) 섭방관(葉坊館) → 건양현(建陽縣) 인화관(仁化館) → 서양령(西陽嶺) → 만수교(萬壽橋) → 보화사(寶華寺) → 포성현(浦城縣) → 절강성(浙江省) 선하령(仙霞嶺) → 협구참(峽口站) → 절강성(浙江省) 구주부(衢州府) 강산현(江山縣) 제하관(齊河館) → 서안현(西安縣) 부강산(浮江山) → 용유현(龍游縣) → 엄주부(嚴州府) 건덕현(建德縣) → 자릉조대(子陵釣臺) → 동려현(桐廬縣) → 부양현(富陽縣) → 항주부(杭州府) 북관(北關) 대선사(大善寺) → 석문현(石門縣) → 가흥부(嘉興府) → 소주부(蘇州府) 한산사(寒山寺) → 고소대(姑蘇臺) → 호구사(虎邱寺) → 동동정(東洞庭) → 상주부(常州府) 무석현(無錫縣) → 장주(長洲) → 단양현(丹陽縣) → 근강부(近江府) → 과주(瓜洲) → 양주부(楊州府) 강도현(江都縣) → 금산사(金山寺) → 하신현(下信縣) → 고우현(高郵縣) 고우사(高郵寺) → 회부(懷府) 회현(懷縣) → 청강부(淸江阜) → 왕가영(王家營) → 보응현(寶應縣) → 산양현(山陽縣) → 청호현(淸湖縣) → 도원현(桃源縣) 도원역(桃源驛) → 산동성(山東省) 담성현(郯城縣) → 이가장(李家庄) → 난산현(蘭山縣) 반성관(半城館) → 서공점(徐公店) → 두장점(杜庄店) → 몽음현(蒙陰縣) → 신태현(新泰縣) 양류점(楊柳店) → 태안부(太安府) 장성관(長城館) → 제하현(齊河縣) → 우성현(禹城縣) → 덕주(德州) → 경주(景州) → 하간현(河閒縣) → 탁주(州) → 낭야현(娘縣) → 북경(北京)
팽호에서 대만까지는 수로(水路)로 2일이요, 대만에서 하문(厦門)까지는 수로로 10일이며, 하문에서 복건성성(福建省城)까지는 1600리요, 복주(福州)에서 연경(燕京)까지는 6800리이고, 연경에서 우리 국경 의주(義州)까지는 2070리이며, 의주에서 서울까지는 1030리이고, 서울에서 강진(康津)까지는 900리입니다. 탐라에서 북으로 강진까지와 남으로 대만까지의 수로는 계산에 넣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합 1만 2400리의 여정이 됩니다.
[주C-001]이방익(李邦翼)의 사건을 기록함 : 정조 21년(1797) 7월 연암이 면천 군수로 임명되어 사은(謝恩)차 입시했을 때 정조는 “내가 전에 문체를 개변하라는 뜻으로 타일렀는데 과연 개변하였느냐?”고 물은 후, “내가 요즘 좋은 제목을 하나 얻어, 너를 시켜 한 편의 좋은 문자를 창작하도록 하고 싶은 지가 오래되었다.”고 하면서 이방익의 사건을 문자화하도록 명하였다. 정조는 타락한 문풍(文風)을 바로잡으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열하일기》의 문체를 문책한 뒤, 연암에게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려고 이러한 지시를 내린 것이다. 《過庭錄 卷3》 이방익(1756~?)은 국문으로 된 표해가(漂海歌)를 남겼다.
[주D-001]하문(厦門) : 샤먼, 또는 아모이(Amoy)라고 불리는 복건성(福建省) 남동부의 항구도시이다. 명말(明末)부터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상선들이 출입하였다.
[주D-002]치아가 …… 처녀였습니다 : 일본에는 예전에 시집간 여자가 이빨을 까맣게 물들이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을 칠치지국(漆齒之國)이라고도 한다.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游錄)에, “이미 시집간 여자는 이가 모두 검은빛인데 철액(鐵液)을 약에 타서 머금으면 그 이가 곧 물들여진다. 시집가지 아니한 처녀와 기생은 모두 흰 치아이다.” 하였다. 《海行總載》
[주D-003]《북사(北史)》에 …… 하였습니다 : 《북사》 권94 백제전(百濟傳)에 나온다.
[주D-004]담라(澹羅) : 《신당서(新唐書)》에는 ‘儋羅’로 표기되어 있다.
[주D-005]유리도라(儒理都羅) : 《신당서》에는 ‘儒利都羅’로 표기되어 있다.
[주D-006]《당서(唐書)》에 …… 하였습니다 : 《신당서》 권220 동이전(東夷傳)에 나온다.
[주D-007]배융부위(陪戎副尉) : 고려 시대 무관의 종 9 품 품계이다.
[주D-008]송 나라 …… 주었습니다 : 이 부분은 송 나라 범성대(范成大)가 찬집한 《오군지(吳郡志)》 권46 이문편(異聞篇)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9]한 문공(韓文公)은 …… 불렀습니다 : 《창려선생문집(昌黎先生文集)》 권21 송정상서서(送鄭尙書序)에 나온다.
[주D-010]천수 …… 내렸다 : 연암이 어떤 기록을 인용했는지 알 수 없다. 현재 전하는 《고려사(高麗史)》에는 그와 같은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고려사》 권2 세가(世家) 2 태조(太祖) 2와 권57 지(志) 21 지리(地理) 2에 태조 21년 탐라국 태자 말로(末老)가 내조하여 성주(星主) 왕자(王子)의 작을 내렸다는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태조 21년은 천수 21년에 해당된다.
[주D-011]정성공(鄭成功) : 1624~1662. 명 나라의 유신(遺臣)이다. 명 나라가 망한 후 중국 남부로 이동하여 청 나라에 대항하다 1661년에 대만으로 건너가 네덜란드군을 축출하고 대만에 웅거하다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
[주D-012]마조서(媽祖嶼) : 팽호도 본섬의 옛 이름이다.
[주D-013]별항(別港) : 강이나 바다로 통하는 ‘작은 강〔支流〕’을 말한다.
[주D-014]저물녘이면 …… 있습니다 : 원문은 ‘薄暮可望見’으로만 되어 있다.
[주D-015]예전에는 …… 있습니다 : 이 부분은 청 나라 임겸광(林謙光)이 지은 《대만기략(臺灣紀略)》을 인용한 것이다.
[주D-016]마궁(馬宮) : 팽호군도의 주도(主島)의 중심 도시인 마공(馬公)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여신(女神)인 낭마보살(娘媽菩薩)을 제사 지내는 낭마궁(娘媽宮)이 있어 ‘마궁(媽宮)’이라 불렸던 것이 ‘마궁(馬宮)’으로 되고, 다시 ‘마공(馬公)’으로 변한 듯하다.
[주D-017]이중환(李重煥)의 …… 있습니다 : 《택리지》 복거총론(卜居總論) 산수조(山水條)에, 인조(仁祖) 때 유구(琉球)의 세자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왕을 구속(救贖)하기 위해 국보(國寶)를 배에 싣고 항해하다가 제주도에 표류했는데 보물을 탐낸 제주 목사에게 장살(杖殺)되었다고 하며, 유구의 세자가 죽기 전에 지었다는 율시(律詩) 1수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인조 때가 아니라 광해군 초에 있었던 실제 사건이었다. 한편 영조(英祖) 말에 제주도 선비인 장한철(張漢喆)이 유구에 표류하였다가 안남(安南) 상선에 구조된 끝에 귀환한 기록인 《표해록(漂海錄)》에서는, 안남 선원들은 장한철 일행이 탐라인임을 알게 되자, 옛날 탐라 왕이 안남의 세자를 죽였다고 하여 그들을 중도에 내려놓고 가버렸다고 하며, 이로 미루어 예전에 제주 목사가 죽였다는 유구 세자는 실은 안남의 세자였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주D-018]정화(鄭和) : 1371~1433. 명 나라 때의 환관이다. 영락 3년(1405) 성조(成祖)의 명으로 해외로 나간 것을 시작으로 7차에 걸쳐 28년 동안 동남아와 아라비아 등 30여 개국을 순회하며 각국을 중국에 복속하게 하였다.
[주D-019]구국(狗國) : 원래는 서융(西戎)이 세운 고국(古國)의 하나를 가리키나, 다른 나라에 대한 욕으로도 쓰인다.
[주D-020]《명사(明史)》에 …… 합니다 : 《명사》 권323 계롱전(鷄籠傳)에 나온다.
[주D-021]임상문(林爽文) : ?~1788. 청 나라 때 대만의 창화(彰化) 사람이다. 농민으로 천지회(天地會)에 참가하여 창화천지회의 수령이 되었고, 건륭 51년(1786)에 봉기하였으나 다음해에 진압되고 포로로 잡혀 죽었다.
[주D-022]생번(生番) : 야만인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대만의 원주민을 가리킨다. 원문은 ‘生蕃’으로 되어 있다.
[주D-023]투왕(投旺) …… 회목회(懷目懷) : 투왕은 주라대포사번(珠蘿大埔社番)의 두목, 균력력(勻力力)은 망자립사번(望仔立社番)의 두목, 나사회축(囉沙懷祝)은 말독사번(末篤社番)의 두목, 야황와단(也璜哇丹)은 옥오사번(屋鼇社番)의 두목, 회목회는 사자사번(獅子社番)의 두목이다. 《八旬萬壽盛典 卷52》
[주D-024]토번(土蕃) : ‘土番’이라고도 적으며, 야만적인 원주민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토번이 사는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주D-025]정씨(鄭氏) : 정성공(鄭成功) 부자를 가리킨다.
[주D-026]협판선(夾板船) : 중국인들이 네덜란드의 대형 범선(帆船)을 가리켜 부른 말이다. 원문은 ‘夾版船’으로 되어 있다.
[주D-027]공공준(孔公俊) : 자는 사도(師道)이고, 공자의 53대손으로 지정 연간에 동안현을 맡아 다스려 치적을 올렸으며 대동서원(大同書院)을 세워 주자(朱子)를 제사 지냈다. 《福建通志 卷30》
[주D-028]채양(蔡襄) : 1012~1067. 송 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군모(君謨)이다. 천주부(泉州府)의 태수가 되어 천주만을 횡단하는 만안교를 건설하였다.
[주D-029]8일 …… 완료되었는데 : 원문은 ‘凡八日夕而工成’으로 되어 있는데, 채양이 지은 만안교비문(萬安橋碑文)에 의하면 황우(皇祐) 5년(1053)에 시작하여 가우(嘉祐) 4년(1059)에 완공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와전된 것이거나 전사(轉寫)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福建通志 卷73》
[주D-030]홍공(虹空) : 아치형 교각(橋脚)을 가리킨다.
[주D-031]정월 …… 들어서니 : 이방익의 표해가(漂海歌)에는 정사(丁巳)년 정월 4일에 하문부(厦門府)의 자양서원(紫陽書院)에 들었다고 하였고, “염칠일(念七日 : 27일) 교자(轎子) 타고 복건(福建)으로 발행(發行)하니”라고 하였다. 표해가는 《청춘(靑春)》 창간호(1914)에 소개되어 있다.
[주D-032]우리나라 …… 것입니다 : 당시 청조 치하에서 만주족(滿洲族)의 의복을 강요당해 착용하고 있던 한족(漢族)들은 조선의 의복이 망한 명 나라의 제도를 따르고 있다고 하여 몹시 흠모하였다.
[주D-033]순무부(巡撫府) : 순무(巡撫)는 전성(全省)의 군사와 행정 등을 총찰하는 최고 직위로, 복건 순무(福建巡撫)는 복주(福州)에 주재(駐在)하였다. 《淸史稿 卷116 志91 職官3》
[주D-034]사호(史浩) : 1106~1194. 남송(南宋) 때의 사람으로 자는 직옹(直翁)이다. 장준(張浚)의 북벌론(北伐論)에 대항하여 강남을 지킬 것을 주장하였으며, 저서에는 《상서강의(尙書講義)》가 있다.
[주D-035]강남성(江南省) 강산현(江山縣) : 강남성은 순치(順治) 2년(1645)에 설치했던 성으로, 강희(康熙) 연간에 강소성(江蘇省)과 안휘성(安徽省)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강산현은 절강성(浙江省) 구주부(衢州府)에 속한 현이었다. 《淸史稿 卷65 志40 地理12》
[주D-036]강산현의 …… 것입니다 : 강랑산(江郞山)을 《수서(隋書)》에 강산(江山)이라 하였다. 《淸史稿 卷65 志40 地理12》
[주D-037]집집마다 …… 된다 : 《두시상주(杜詩詳註)》 권20 희작배해체견민(戱作俳諧體遣悶)에 나오는 구절이다.
[주D-038]용구장(龍邱萇) : 한 나라 때의 은사(隱士)로서 왕망(王莽)을 피해 태말산(太末山)에 들어가 은둔하였다. 왕망이 죽고 유현(劉玄)이 황제가 되자 관직에 나왔으나 곧 병으로 죽었다.
[주D-039]엄광(嚴光) : 자는 자릉(子陵)이고 한 나라 때의 은사(隱士)이다. 광무제(光武帝)와 동문수학하였으며 광무제가 즉위한 후에도 관직을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서 은둔하였다.
[주D-040]아래에는 …… 샘입니다 : 당 나라 은사(隱士)인 육우(陸羽 : 733~804)가 지은 《다경(茶經)》에 천하의 물맛을 품평하여 등급을 나누었는데 조대(釣臺) 아래에 있는 이 샘의 물이 열아홉 번째를 차지하였으므로 십구천(十九泉)이라 하였다. 육우는 차를 좋아하고 다도(茶道)에 밝아 다신(茶神), 다성(茶聖), 다선(茶仙)으로 불린다. 《浙江通志 卷19》
[주D-041]한산(寒山)과 습득(拾得) : 당 나라 태종 때의 고승으로 서로 교우관계를 맺었다.
[주D-042]장계(張繼)의 …… 한산사 : ‘고소성 밖의 한산사’는 ‘풍교야박(楓橋夜泊)’ 시의 한 구절로서, 이 시의 전문은 “月落烏啼霜滿天 江楓漁火對愁眠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이다. 장계(?~779년경)는 당 나라 때의 시인으로 자는 의손(懿孫)이며, 저서에 《장사부시집(張祠部詩集)》이 있다.
[주D-043]창문(閶門)에서 …… 있으나 : 창문은 소주(蘇州)의 성문 이름으로, 오(吳) 나라 왕 합려(闔閭)가 초(楚) 나라를 격파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옷을 턴다〔振衣〕’는 것은 먼지를 털어 복장을 단정히 하는 것을 말한다.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턴다.〔新浴者必振衣〕”와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니 나의 갓끈을 씻을 만하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는 모두 굴원(屈原)의 《초사(楚辭)》 어부사(漁父辭)에 나오는 구절이다.
[주D-044]악주성(岳州城) 서문루(西門樓) : 악양루(岳陽樓)를 가리킨다. 동정호(洞庭湖) 옆에 있다.
[주D-045]우중상(虞仲翔) : 우번(虞翻 : 164~232)의 자가 중상(仲翔)이다. 우번은 삼국 시대 오(吳) 나라 사람으로 손권(孫權)에게 기용되었으나 직언을 자주하여 좌천되었다. 저명한 학자로서 특히 《주역》에 밝았다.
[주D-046]부차(夫差) : 오 나라 왕으로 선왕 합려(闔閭)의 원수를 갚기 위해 월 나라 왕 구천(句踐)을 부초(夫椒)에서 크게 무찔렀다. 나중에 다시 월 나라에 패하여 나라가 멸망하고 자신은 자살하였다.
[주D-047]범려(范蠡) :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으로, 월 나라 왕 구천을 보좌하여 오 나라를 멸망시킨 뒤, 월 나라를 떠나 제(齊) 나라로 가서 변성명하고 상업으로 치부하였다.
[주D-048]왕사부산(王舍浮山) : 《고소지(姑蘇志)》 권9에는 ‘王舍山’으로 되어 있다.
[주D-049]생공강당(生公講堂)과 오석헌(悟石軒) : 호구산의 검지(劍池) 앞에 천 명이 앉을 만한 넓고 평편한 거석(巨石)이 있는데, 그곳이 진(晉) 나라 때의 신승(神僧) 축도생(竺道生)이 설법한 자리 즉 생공의 강당이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때 축도생의 설법을 듣고 머리를 끄덕였다고 하는 점두석(點頭石) 옆에 오석헌이 세워졌다고 한다. 《姑蘇志 卷8》 《江南通志 卷31》 《方輿勝覽 卷2》
[주D-050]화정(和靖) : 윤순(尹焞 : 1071~1142)의 호이다. 윤순은 송 나라 하남(河南) 사람으로 자는 언명(彦明) 또는 덕충(德充)이며, 정이(程頤)에게서 수학하였다. 저서에 《논어해(論語解)》, 《문인문답(門人問答)》, 《화정집(和靖集)》이 있다.
[주D-051]쌍궐(雙闕) : 궁전이나 사묘(祠廟), 능묘(陵墓) 등의 앞쪽 양편에 설치하는 누대를 말한다.
[주D-052]곽박(郭璞) : 276~324. 동진(東晉)의 학자로서 자는 경순(景純)이다. 《진사(晉史)》의 편수에 참여하였고 《이아(爾雅)》, 《산해경(山海經)》 등의 주석서를 저술하였다.
[주D-053]육씨(陸氏)의 수품(水品) : 육우(陸羽)가 《다경(茶經)》에서 물맛을 평한 것을 가리킨다.
[주D-054]미산(眉山) 소공(蘇公) : 소식(蘇軾)을 가리킨다. 소식의 본향이 미주(眉州)의 미산(眉山)이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주D-055]금산의 …… 들려오네 : ‘금산에서 배를 타고 초산에 이르다〔自金山放船至焦山〕’ 시에 나온다. 《한시대성(漢詩大成)》 본에는 이 구절이 “金山樓觀何耽耽, 撞鍾擊鼓聞淮南”으로 되어 있다.
[주D-056]증포(曾布) : 1036~1107. 송 나라 때 관료로서 자는 자선(子宣)이며 증공(曾鞏)의 아우이다.
[주D-057]배두타(裴頭陀) : 두타(頭陀)는 탁발승이라는 뜻이다. 배두타는 당 나라 때 상국(相國) 배휴(裴休)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영특했다고 하며, 출가하여 두타행(頭陀行)을 하다가 금산에 이르렀다고 한다. 《江南通志 卷174》
[주D-058]노인(魯認) : 1566~1622. 호는 금계(錦溪)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남원(南原)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에 잡혀갔으나 명 나라로 탈출하여 무이서원(武夷書院 : 고정서원〈考亭書院〉)에서 주자학을 배우며 지내다가, 신종(神宗)이 조서(詔書)를 내려 포로가 되어서도 절개를 지킨 것을 칭찬하면서 귀환을 허락함에 따라 3년 만인 1599년에 귀국하였으며, 선조(宣祖)도 그의 충절을 칭찬하고 수원 부사에 임명하였다. 당시 일본과 중국의 풍물을 기록한 《금계일기(錦溪日記)》가 전한다. 그의 문집 《금계집(錦溪集)》에 명 나라 인사들의 송별시가 수록되어 있다.
[주D-059]동안현(同安縣) : 복건성(福建省) 천주부(泉州府)에 속한 현이다.
[주D-060]천주부(泉州府) : 천주부의 치소(治所)로, 현재 천주시(泉州市)를 가리킨다.
[주D-061]복청(福淸) : ‘복청현(福淸縣)’이라야 정확한 표기가 된다. 복건성 복주부(福州府)에 속한 현이다.
[주D-062]복녕(福寧) : ‘복녕부(福寧府)’라야 정확한 표기가 된다. 복건성에 속한 부이다.
[주D-063]복건성성(福建省城) : 복주부(福州府)의 치소로 현재의 복주시(福州市)인 복주(福州)에 있었다.
[주D-064]민청현(閩淸縣) : 복주부(福州府)에 속한 현이다.
[주D-065]남평현(南平縣) : 복건성 연평부(延平府)에 속한 현이다.
[주D-066]섭방관(葉坊館) : 복건성 건녕부(建寧府) 건안현(建安縣)에 속한 역(驛) 이름이다. 《淸史稿 卷70 志45 地理17 福建》
[주D-067]건양현(建陽縣) : 복건성 건녕부에 속한 현이다.
[주D-068]포성현(浦城縣) : 복건성 건녕부에 속한 현이다.
[주D-069]선하령(仙霞嶺) : 절강성 구주부(衢州府) 강산현(江山縣)에 있다. 《淸史稿 卷65 志40 地理12 浙江》
[주D-070]서안현(西安縣) : 절강성 구주부에 속한 현이다.
[주D-071]용유현(龍游縣) : 절강성 구주부에 속한 현이다.
[주D-072]자릉조대(子陵釣臺) : 절강성 엄주부 동려현(桐廬縣) 부춘산(富春山)에 있다.
[주D-073]동려현(桐廬縣) : 절강성 엄주부에 속한 현이다.
[주D-074]부양현(富陽縣) : 절강성 항주부(杭州府)에 속한 현이다.
[주D-075]석문현(石門縣) : 절강성 가흥부(嘉興府)에 속한 현이다.
[주D-076]가흥부(嘉興府) : 가흥부의 치소(治所)로, 현재의 가흥시(嘉興市)를 가리킨다.
[주D-077]소주부(蘇州府) : 강소성(江蘇省)에 속한 부이다.
[주D-078]장주(長洲) : 강소성 상주부 무석현에 속한 모래섬의 이름이다. 《淸史稿 卷58 志33 地理5 江蘇》
[주D-079]단양현(丹陽縣) : 강소성 진강부(鎭江府)에 속한 현이다.
[주D-080]근강부(近江府) : ‘진강부(鎭江府)’의 잘못인 듯하다. 진강부의 치소는 현재의 진강시(鎭江市)이다.
[주D-081]과주(瓜洲) : 강소성 양주부(楊州府) 강도현(江都縣)에 속한 모래섬으로 군사와 교통의 요지였다. 《淸史稿 卷58 志33 地理5 江蘇》
[주D-082]금산사(金山寺) : 강소성 진강시(鎭江市)의 서북쪽 금산(金山)에 있다.
[주D-083]하신현(下信縣) : 미상(未詳). 강소성 내에는 ‘하신현’이 없다.
[주D-084]고우현(高郵縣) : ‘고우주(高郵州)’의 잘못인 듯하다. 고우주는 강소성 양주부에 속한 주이다.
[주D-085]회부(懷府) 회현(懷縣) : 미상(未詳). 강소성 내에는 ‘회부’가 없다. ‘회안부(淮安府)’의 잘못인지도 모른다. ‘회현’ 역시 강소성 내에는 없다.
[주D-086]청강부(淸江阜) : 강소성 회안부(淮安府) 청하현(淸河縣) 북쪽에 있던 청강포(淸江浦)를 가리키는 듯하다.
[주D-087]왕가영(王家營) : 강소성 회안부 청하현에 있던 진(鎭)의 이름이다.
[주D-088]보응현(寶應縣) : 강소성 양주부에 속한 현이다.
[주D-089]산양현(山陽縣) : 강소성 회안부에 속한 현이다.
[주D-090]청호현(淸湖縣) : 미상(未詳). 강소성 내에는 ‘청호현’이 없다. 회안부 ‘청하현(淸河縣)’의 잘못인지도 모른다.
[주D-091]도원현(桃源縣) : 강소성 회안부에 속한 현이다.
[주D-092]담성현(郯城縣) : 산동성 기주부(沂州府)에 속한 현이다.
[주D-093]난산현(蘭山縣) : 산동성 기주부에 속한 현이다.
[주D-094]서공점(徐公店) : 난산현에 속한 역(驛)의 하나이다. 《淸史稿 卷61 志36 地理8 山東》
[주D-095]몽음현(蒙陰縣) : 산동성 기주부에 속한 현이다.
[주D-096]신태현(新泰縣) : 산동성 태안부(泰安府)에 속한 현이다.
[주D-097]태안부(太安府) : ‘태안현(泰安縣)’의 잘못인 듯하다. 태안현은 태안부에 속한 현으로, 그 치소는 현재의 태안시(泰安市)에 있다.
[주D-098]제하현(齊河縣) : 산동성 제남부(濟南府)에 속한 현이다.
[주D-099]우성현(禹城縣) : 산동성 제남부에 속한 현이다.
[주D-100]덕주(德州) : 산동성 제남부에 속한 주이다.
[주D-101]경주(景州) : 직례(直隸) 하간부(河間府)에 속한 주이다.
[주D-102]하간현(河閒縣) : 직례 하간부에 속한 현이다.
[주D-103]탁주(州) : 직례 순천부(順天府)에 속한 주이다.
[주D-104]낭야현(娘縣) : ‘양향현(良鄕縣)’의 잘못인 듯하다. 양향현은 직례 순천부에 속한 현으로, 탁주에서 북경으로 향하는 도중에 위치하고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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