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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7권 별집
종북소선(鍾北小選)
1 자서(自序)
2 낭환집서(蜋丸集序)
3 녹앵무경서(綠鸚鵡經序)
4 우부초서(愚夫艸序)
5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
6 북학의서(北學議序)
7 풍악당집서(楓嶽堂集序)
8 유씨도서보서(柳氏圖書譜序)
9 영처고서(嬰處稿序)
10 형언도필첩서(炯言桃筆帖序)
11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
12 영재집서(泠齋集序)
13 순패서(旬稗序)
14 염재기(念齋記)
15 관재기(觀齋記)
16 선귤당기(蟬橘堂記)
17 애오려기(愛吾廬記)
18 환성당기(喚醒堂記)
19 취미루기(翠眉樓記)
20 이당(李唐)의 그림에 제(題)하다.
21 천산엽기도(天山獵騎圖) 발문
22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발문
23 관재(觀齋)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
24 일수재(日修齋)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
25 담헌(湛軒)이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
26 우인(友人)의 국화시(菊花詩) 시축(詩軸)에 제(題)하다
27 효자 증 사헌부 지평 윤군(尹君) 묘갈명(墓碣銘)
28 양 호군(梁護軍) 묘갈명
29 취묵와(醉黙窩) 김군(金君) 묘갈명
30 운봉 현감(雲峯縣監) 최군(崔君) 묘갈명
자서(自序)
아, 포희씨(庖犧氏)가 죽은 뒤로 그 문장(文章)이 흩어진 지 오래다. 그러나 벌레의 촉수(觸鬚), 꽃술, 석록(石綠), 비취(翡翠)의 깃털에 이르기까지도 그 문장의 정신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으며, 솥 발, 병 허리, 해 고리, 달 시울에도 그 자체(字體)가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바람과 구름, 천둥과 번개, 비와 눈, 서리와 이슬 및 새와 물고기, 짐승과 곤충 등이 웃고 울고 지저귀는 소리에도 성(聲) · 색(色) · 정(情) · 경(境)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주역(周易)》을 읽지 않으면 그림을 알지 못하고, 그림을 알지 못하면 글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포희씨가 《주역》을 만들 적에 위로는 하늘을 살피고 아래로 땅을 관찰하여 홀수인 양효(陽爻)와 짝수인 음효(陰爻)를 배가한 것에 불과하였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그림이 되었으며, 창힐씨(蒼頡氏)가 문자를 만들 적에도 사물의 정(情)과 형(形)을 곡진히 살펴서 상(象)과 의(義)를 전차(轉借)한 것에 불과하였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에도 소리〔聲〕가 있는가?
이윤(伊尹)이 대신(大臣)으로서 한 말과 주공(周公)이 숙부(叔父)로서 한 말을 내가 직접 듣지는 못했으나 글을 통해 그 목소리를 상상해 보면 아주 정성스러웠을 것이며, 아비에게 버림받은 백기(伯奇)의 모습과 기량(杞梁)의 홀로된 아내의 모습을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글을 통해 그 목소리를 상상해 보면 아주 간절하였을 것이다.
글에도 빛깔〔色〕이 있는가?
《시경(詩經)》에도 있듯이, “비단 저고리를 입으면 엷은 덧저고리를 입고, 비단 치마를 입으면 엷은 덧치마를 입는다네.〔衣錦褧衣 裳錦褧裳〕”라 하고, “검은 머리 구름 같으니, 달비도 필요 없네.〔鬒髮如雲 不屑髢也〕”라고 노래한 것이 그 예이다.
어떤 것을 정(情)이라 하는가?
새가 울고 꽃이 피며 물이 푸르고 산이 푸른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을 경(境)이라 하는가?
멀리 있는 물은 물결이 없고 멀리 있는 산은 나무가 없고 멀리 있는 사람은 눈이 없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이요 공수(拱手)하고 있는 사람은 듣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늙은 신하가 어린 임금에게 고할 때의 심정과, 버림받은 아들과 홀로된 여인의 사모하는 마음을 알지 못하는 자와는 함께 소리〔聲〕를 논할 수 없으며, 글에 시적인 구상(構想)이 함께 없으면 《시경》 국풍(國風)의 빛깔〔色〕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이별을 겪지 못하고 그림에 고원한 의취(意趣)가 없다면 글의 정(情)과 경(境)을 함께 논할 수 없다. 벌레의 촉수나 꽃술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문장의 정신이 전혀 없을 것이요, 기물(器物)의 형상을 음미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글자를 한 자도 모르는 사람이라 말해도 될 것이다.
[주D-001]포희씨(庖犧氏)가 …… 오래다 : 포희는 복희(伏羲)라고도 하며, 태곳적 중국의 삼황(三皇) 중의 한 사람이다.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포희가 천지를 관찰하여 팔괘(八卦)로 된 최초의 《역(易)》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 문장이 흩어진 지 오래다’라는 것은, 포희가 팔괘와 각 효(爻)를 풀이한 문장〔繫辭〕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주D-002]석록(石綠) : 공작석(孔雀石)이라고도 한다. 녹청색의 아름다운 광물로 장식품이나 안료(顔料)로 쓰인다.
[주D-003]비취(翡翠)의 깃털 : 원문은 ‘羽翠’인데, ‘翠羽’와 같은 뜻이 아닌가 한다. 비취는 물총새로 아름다운 녹색 깃털을 지녔는데, 귀중한 물건으로 여겨져 장식품으로 쓰인다.
[주D-004]솥 발 …… 남아 있다 : 솥 정(鼎) 자는 솥의 세 발을 상형(象形)으로 나타낸 것이고, 병 호(壺) 자는 병의 허리 부분을 상형으로 나타낸 것이고, 해 일(日) 자는 해의 둥근 고리 모양을 상형으로 나타낸 것이고, 달 월(月) 자는 달의 휜 가장자리인 시울을 상형으로 나타낸 것이라는 뜻이다.
[주D-005]사물의 …… 전차(轉借) : 한자(漢字)의 조자(造字) 방법인 ‘육서(六書)’를 가리킨다. 사물의 정(情)과 형(形)을 곡진히 살펴서 글자를 만든 것은 지사(指事) 및 회의(會意)와 상형(象形)에, 상(象)과 의(義)를 전차한 것은 형성(形聲) 및 전주(轉注)와 가차(假借)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주D-006]이윤(伊尹)이 …… 말 : 탕왕(湯王)이 죽고 그의 아들 태갑(太甲)이 왕이 되자 이윤이 어린 왕을 훈도하는 글을 올렸다. 《서경(書經)》 이훈(伊訓) · 태갑(太甲) · 함유일덕(咸有一德) 등은 이를 기록한 것이다.
[주D-007]주공(周公)이 …… 말 : 무왕(武王)이 죽고 그의 아들 성왕(成王)이 왕이 되자 무왕의 아우인 주공 단(旦)이 어린 왕에게 안일(安逸)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훈계하였다. 《서경》 무일(無逸)은 이를 기록한 것이다.
[주D-008]아비에게 버림받은 백기(伯奇) : 주(周) 나라 선왕(宣王)의 신하인 윤길보(尹吉甫)의 아들 백기가 계모(繼母)의 모함을 받아 쫓겨나게 되자 ‘이상조(履霜操)’라는 노래를 지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樂府詩集 琴曲歌辭1》
[주D-009]기량(杞梁)의 홀로된 아내 : 춘추 시대 제(齊) 나라 대부인 기량이 전사(戰死)하자 그의 아내가 슬퍼하면서 목놓아 크게 울다 강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그녀의 여동생이 언니의 이러한 죽음을 애도하여 ‘기량처(杞梁妻)’라는 노래를 지었다. 《古今注 音樂》
[주D-010]비단 저고리를 …… 입는다네 : 《시경》 정풍(鄭風) 봉(丰)에 나온다.
[주D-011]검은 머리 …… 필요 없네 : 《시경》 용풍(鄘風) 군자해로(君子偕老)에 나온다. 달비〔髢〕는 여자들이 머리를 장식하기 위해 덧넣은 가발로서 ‘다리’라고도 한다.
[주D-012]새가 …… 말한다 : 당(唐) 나라 현종(玄宗)이 양 귀비(楊貴妃)와 사별(死別)한 뒤에, “새가 울고 꽃이 지며 물이 푸르고 산이 푸르니〔鳥啼花落 水綠山靑〕” 더욱 슬프다고 탄식했다 한다. 여기에서는 ‘花落’을 ‘花開’로 고쳐 인용한 것이다. 《說郛 卷111下 楊太眞外傳下》
[주D-013]멀리 …… 없다 : 산수화에서 원경(遠景)을 간략하게 그리는 수법을 말한 것이다. 왕유(王維)의 산수론(山水論)이나 형호(荊浩)의 화산수부(畵山水賦)에 유사한 구절이 있다.
[주D-014]고원한 의취(意趣) : 왕유는 산수론에서 “산수를 그릴 때 의취가 붓질보다 우선한다.〔凡畵山水 意在筆先〕”고 하여, 원경(遠景)을 세부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원의(遠意)를 표현할 것을 강조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낭환집서(蜋丸集序)
자무(子務)와 자혜(子惠)가 밖에 나가 노니다가 비단옷을 입은 소경을 보았다. 자혜가 서글피 한숨지으며,
“아, 자기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기 눈으로 보지를 못하는구나.”
하자, 자무가,
“비단옷 입고 밤길을 걷는 자와 비교하면 어느 편이 낫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청허선생(聽虛先生)에게 함께 가서 물어보았더니, 선생이 손을 내저으며,
“나도 모르겠네, 나도 몰라.”
하였다.
옛날에 황희(黃喜) 정승이 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 딸이 맞이하며 묻기를,
“아버님께서 이〔蝨〕를 아십니까? 이는 어디서 생기는 것입니까? 옷에서 생기지요?”
하니,
“그렇단다.”
하므로 딸이 웃으며,
“내가 확실히 이겼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며느리가 묻기를,
“이는 살에서 생기는 게 아닙니까?”
하니,
“그렇고 말고.”
하므로 며느리가 웃으며,
“아버님이 나를 옳다 하시네요.”
하였다. 이를 보던 부인이 화가 나서 말하기를,
“누가 대감더러 슬기롭다고 하겠소. 송사(訟事)하는 마당에 두 쪽을 다 옳다 하시니.”
하니, 정승이 빙그레 웃으며,
“딸아이와 며느리 둘 다 이리 오너라. 무릇 이라는 벌레는 살이 아니면 생기지 않고, 옷이 아니면 붙어 있지 못한다. 그래서 두 말이 다 옳은 것이니라. 그러나 장롱 속에 있는 옷에도 이가 있고, 너희들이 옷을 벗고 있다 해도 오히려 가려울 때가 있을 것이다. 땀 기운이 무럭무럭 나고 옷에 먹인 풀 기운이 푹푹 찌는 가운데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은, 옷과 살의 중간에서 이가 생기느니라.”
하였다.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말을 타려고 하자 종놈이 나서며 말하기를,
“나으리께서 취하셨군요. 한쪽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른 한쪽에는 짚신을 신으셨으니.”
하니, 백호가 꾸짖으며
“길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길 왼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짚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내가 뭘 걱정하겠느냐.”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논할 것 같으면, 천하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발만 한 것이 없는데도 보는 방향이 다르면 그 사람이 가죽신을 신었는지 짚신을 신었는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참되고 올바른 식견은 진실로 옳다고 여기는 것과 그르다고 여기는 것의 중간에 있다. 예를 들어 땀에서 이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은미하여 살피기 어렵기는 하지만, 옷과 살 사이에 본디 그 공간이 있는 것이다.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으며,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니라 할 것이니, 누가 그 ‘중간〔中〕’을 알 수가 있겠는가.
말똥구리〔蜣蜋〕는 자신의 말똥을 아끼고 여룡(驪龍)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여룡 또한 자신에게 구슬이 있다 하여 ‘말똥구리의 말똥〔蜋丸〕’을 비웃지 않는다.
자패(子珮)가 이 말을 듣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로써 내 시집(詩集)의 이름을 붙일 만하다.”
하고는, 드디어 그 시집의 이름을 ‘낭환집(蜋丸集)’이라 붙이고 나에게 서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내가 자패에게 이르기를,
“옛날에 정령위(丁令威)가 학(鶴)이 되어 돌아왔으나 아무도 그가 정령위인지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비단옷 입고 밤길을 걷는 격이 아니겠는가. 《태현경(太玄經)》이 크게 유행하였어도 이 책을 지은 자운(子雲 양웅(揚雄))은 막상 이를 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소경이 비단옷을 입은 격이 아니겠는가. 이 시집을 보고서 한편에서 여룡의 구슬이라 여긴다면 그대의 짚신〔鞋〕을 본 것이요, 한편에서 말똥으로만 여긴다면 그대의 가죽신〔鞾〕을 본 것이리라. 남들이 그대의 시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는 마치 정령위가 학이 된 격이요, 그대의 시가 크게 유행할 날을 스스로 보지 못한다면 이는 자운이 《태현경》을 지은 격이리라. 여룡의 구슬이 나은지 말똥구리의 말똥이 나은지는 오직 청허선생만이 알고 계실 터이니 내가 뭐라 말하겠는가.”
하였다.
[주C-001]낭환집서(蜋丸集序) : 유득공(柳得恭)의 숙부인 유연(柳璉 : 1741~1788)의 《기하실시고략(幾何室詩藁略)》에는 길강전서(蛣蜣轉序)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자구상 약간 차이가 있으나, 동일한 작품이다. 《길강전(蛣蜣轉)》은 유연의 시고(詩藁)로서, 다름 아닌 《낭환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낭환집서에서 《낭환집》의 작자로 소개되어 있는 자패(子珮)는 곧 유연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계명대학교 김윤조(金允朝) 교수의 조언에 의거한 것이다.
[주D-001]자무(子務)와 자혜(子惠) : 자무는 이덕무(李德懋)의 자(字)인 무관(懋官), 자혜는 유득공(柳得恭)의 자인 혜풍(惠風)에서 따온 이름인 듯하다.
[주D-002]비단옷 …… 자 : 항우(項羽)가 진 시황의 아방궁을 함락하고 나서 “부귀한 뒤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으니, 누가 알아줄 것인가. 〔富貴不歸故鄕 如衣繡夜行 誰知之者〕”라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史記 卷7 項羽本紀》
[주D-003]여룡(驪龍)의 구슬 : 여룡은 검은 빛깔의 흑룡을 말한다. 용의 턱밑에는 여의주(如意珠)라는 영묘한 구슬이 있다고 한다.
[주D-004]말똥구리〔蜣蜋〕는 …… 않는다 :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63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 “螗蜋自愛滾丸 不羨驪龍之如意珠 驪龍亦不以如意珠 自矜驕而笑彼蜋丸”이라 하여 거의 똑같은 구절이 있다.
[주D-005]정령위(丁令威)가 …… 못하였으니 : 정령위는 한(漢) 나라 때 요동(遼東) 사람으로 신선이 된 지 천 년 만에 학(鶴)으로 변해 고향을 찾아갔으나, 그가 학이 되어 화표주(華表柱)에 앉은 줄을 모르는 한 젊은이가 활로 쏘려고 했으므로 탄식하며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搜神後記 卷1》
[주D-006]짚신〔鞋〕 : 연암 후손가 소장 필사본 및 《기하실시고략》 길강전서에는 ‘가죽신〔靴〕’으로 되어 있다.
[주D-007]가죽신〔鞾〕 : 연암 후손가 소장 필사본 및 《기하실시고략》 길강전서에는 ‘짚신〔鞋〕’으로 되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녹앵무경서(綠鸚鵡經序)
낙서(洛瑞 이서구(李書九))가 푸른 앵무새를 얻었는데, 지혜로울 듯하다가도 지혜로워지지 않고 깨우칠 듯하다가도 깨우쳐지지 않기에, 새장 앞으로 가서 눈물을 흘리며, “네가 말을 못하면 까마귀〔烏鴉〕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네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나야말로 동이(東夷)로구나 - ‘彛’ 자가 이본에는 ‘夷’ 자로 되어 있다. - 하니, 갑자기 앵무새의 총기가 트였다. 이에 《녹앵무경(綠鸚鵡經)》을 짓고 나에게 그 서문을 청해 왔다.
내가 일찍이 흰 앵무새의 꿈을 꾸고서 박수무당을 불러다 꿈 이야기를 들려준 후 점을 쳐 달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내 평소에 꿈을 꾸는데, 꿈에서는 밥을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꿈에서는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고, 꿈에서는 악취를 맡아도 더럽지 않고, 꿈에서는 향내를 맡아도 향기롭지 않고, 꿈에서는 힘을 써도 강해지지 않고, 꿈에서는 불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네. 혹은 용(龍)이 하늘을 날기도 하고, 혹은 봉황이나 기린이나 귀물(鬼物)이나 이수(異獸)들이 뒤섞이어 달리고 쫓곤 하지. 눈 넷 달린 신장(神將)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입이 등 위에 있고, 이빨에는 칼이 물려져 있고, 손에도 눈이 있으며, 작은 눈에 작은 귀, 큰 입에 큰 코를 가지고 있지. 또 큰 바다에 파도가 넘실대기도 하고 푸른 산이 불에 타기도 하며, 일월(日月)과 성신(星辰)이 내 몸을 휘감아 에워싸기도 하고 천둥과 번개에 놀라 식은땀이 흐르기도 하고, 높은 하늘에 올라 빛나는 구름을 타기도 하지. 9층 누대에 날아오르기도 하는데, 아름다운 단청(丹靑)과 유리 창문에 아름다운 여인들이 눈웃음 지으며 즐거워하고 절묘한 노랫소리 맑게 드날리니 피리 젓대 어우러져 반주하기도 하네. 혹은 매미 날개마냥 몸이 가벼워져 나뭇잎에 붙기도 하고, 지렁이와 싸우기도 하고, 맹꽁이와 함께 웃기도 하며〔或助蛙笑〕 - ‘笑’ 자가 이본에는 ‘哭’ 자로 되어 있다 -, 혹은 담벼락을 뚫고 들어가니 바로 널찍한 집〔室〕이 있기도 하고, 혹은 높은 손〔客〕이 되어 큰 깃발과 작은 깃발, 대장기(大將旗)를 휘날리며, 큰 파초선(芭蕉扇)을 받친 초거(軺車)가 백 채나 되기도 한다네. 무슨 망상(妄想)이 이와 같이 뒤죽박죽 나타난단 말인가?”
하니, 박수무당이 큰 소리로 외치며 말하기를,
“온몸이 덜덜 떨리는구나. 죄를 받을까봐 두렵다. 너는 잘 생각해 보아라. 네가 연단(鍊丹)을 하게 되면 공기 속의 진기(眞氣)만 들이마시고 아무런 음식도 필요치 않게 될 것이며, 점차 가족도 싫어져 집도 필요치 않게 될 것이다. 저 바위 밑에 거처하면서 아내와 자식을 다 버리고 친구마저 이별하며, 하루아침에 몸이 가벼워져 어깨에는 도토리 나뭇잎을 걸치고 허리에는 범 가죽을 두른 채, 아침에는 창해(滄海)에서 노닐고 저녁에는 곤륜산(崑崙山)에서 노닐다가 그 이튿날 낮이나 저녁이 되어 잠시 만에 돌아오는데, 그 사이에 이미 천 년이 지나기도 하고 혹은 팔백 년이 지나기도 한다. 저렇듯이 오래 사는 것을 이름하여 신선(神仙)이라 한다. 그렇게 되면 다시 어찌할 텐가?”
하였다. 나는 바로 마다하며,
“이것도 하나의 망상이다. 천 년이나 팔백 년이 아침저녁으로 노니는 사이에 지나가 버리다니 어찌 그리 짧은 건가. 내가 장생(長生)한들 누가 다시 나를 알아보겠으며, 어느 친구가 있어 내가 나인 줄 알아보겠는가. 만에 하나라도 다행스럽게 옛집이 허물어지지 않고 마을도 예전 그대로 있으며 자손도 번성하여 8대, 9대 또는 10대에 이른다 한들, 내가 내 집에 돌아가면 대문에 들어설 때 잠깐 기쁠 뿐이고 다시금 슬퍼질 것이다. 한동안 앉아 있다가 가는 목소리로 집안사람들에게 살짝 이르기를, 동산 뒤에 있는 배나무와 부엌에 있는 크고 작은 솥들이며 진주(眞珠)와 보당(寶璫)에 대하여 어떤 게 있고 어떤 게 없는지를 말하여, 그 말이 조금씩 맞아떨어지게 되면, 자손들이 크게 성을 내면서, 저기 어떤 망령된 늙은이냐, 저기 어떤 미친 영감이냐, 저기 어떤 취한 놈이냐 하며 와서 나를 욕하고 지팡이로 나를 쫓아내며 몽둥이로 나를 몰아낼 터이니, 내가 어찌해야 하겠는가? 나를 증명할 만한 문서도 없으니 관청에 가서 소송한들 어찌하겠는가. 비유하자면 내가 꿈을 꾸는 것과 같아서, 내 꿈은 나만이 꿀 뿐 남들이 내 꿈을 꾸어 주지는 않으니 누가 내 꿈을 믿겠는가.”
하였다. 박수무당이 큰 소리로 외치며 말하기를,
“온몸이 덜덜 떨리는구나. 죄를 받을까 봐 두렵다.”
하고는, 큰 자비심을 내어 탄식하기를,
“네 말인즉 크게 맞는 말이다. 너도 알 것이다. 자손과 처첩이 잠시만 이별해 있어도 너를 알아보지 못하는데, 네가 그들을 연연해서 무엇하겠는가. 서방(西方)에 한 나라가 있으니 세계(世界)의 낙국(樂國)이다. 네가 고행(苦行)을 하여 수양을 혹독하게 하면, 그 나라에 왕생(往生)하여 삼재(三災)에서 벗어나고 ‘줄칼에 쓸려 불에 타 죽는 것〔剉燒〕’을 면할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부처〔佛〕라 한다. 그렇게 되면 다시 어찌할 텐가?”
하였다. 나는 바로 마다하며,
“이것도 하나의 망상이다. 이미 왕생이라 말할진대 이승에서 죽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다비(茶毘)를 하여 뼛가루를 날려 버리는데 어찌 줄칼에 쓸려 불에 타 죽는 것을 면한다는 말인가. 지금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이렇게 각고의 고행을 하면서 저 내세(來世)를 기다린다고 하지만 깜깜하고 아득한 그곳이 극락임을 누가 알겠는가. 만약에 내세의 세계가 극락임을 안다면 어찌하여 이승에서는 전생을 모른단 말인가.”
하였다.
이를 듣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진짜 신선이나 부처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닐세. 신선은 신령스럽고 부처는 지혜로운 존재인데 앵무새가 그러한 본성을 지녔으니, 이는 박수무당이 앵무새가 신령스럽고 지혜로워 사람의 말을 잘하는 것을 점친 것일세. 그대의 문장이 앞으로 날로 진보함이 있을 것이네.”
하였다.
아! 그 일이 있은 후로 지금 18년이 지났는데 나의 도덕은 날이 갈수록 졸렬해지고 문장은 조금도 진보되지 못했으며, 어리석은 마음과 망상은 꿈을 꾸지 않을 때도 꿈을 꿀 때와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녹앵무경》을 보니 앵무새의 둥근 혀와 갈라진 발가락이 완연히 꿈에서 본 것과 같으며, 신령한 본성으로 신묘하게 알아듣고 지혜로운 말이 구슬 구르듯 하여, 신선의 신령함과 부처의 지혜로움을 다했다 할 것이다. 박수무당의 해몽은 아마도 이 점을 두고 한 말이리라.
[주D-001]지혜로울 …… 않기에 : 푸른 앵무새가 스스로 말을 하거나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형(禰衡)의 앵무부(鸚鵡賦)에 “본성이 지혜로워서 말을 할 줄 알며, 재주가 총명하여 기미를 알아챈다.〔性辯慧而能言兮 才聰明而識機〕”고 하였다. 《文選 卷31》
[주D-002]까마귀〔烏鴉〕 : 이본에는 ‘까치〔烏鵲〕’로 되어 있다.
[주D-003]네 말을 …… 동이(東夷)로구나 : 중국에서 수입된 앵무새이기에 중국어를 하는 앵무새의 말을 자신은 동이(東夷) 즉 조선인이라서 알아듣지 못한다는 자조적(自嘲的) 표현이다. 원문에서는 오랑캐라는 뜻의 ‘夷’ 자를 기휘(忌諱)하여 ‘彛’ 자로 바꾸어 놓았다. 원주(原註)는 이 점을 시사하고 있다.
[주D-004]《녹앵무경(綠鸚鵡經)》 : 이서구가 북경(北京)에서 수입된 푸른 앵무새를 접한 것을 계기로, 영조 46년(1770)에 앵무새에 관한 각종 문헌 기록들을 모아 편찬했다는 책이다. 《불리비조편(不離飛鳥編)》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그 내용의 일부가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권48 앵무변증설(鸚鵡辨證說)에 전하고 있다. 또한 이규경의 《시가점등(詩家點燈)》에도 녹앵무경서와 그에 대한 평(評)이 실려 있다.
[주D-005]이수(異獸) : 이본에는 ‘귀수(鬼獸)’로 되어 있다.
[주D-006]신장(神將) : 무속(巫俗)에서 잡귀나 악신을 물리친다는 장수신(將帥神)을 말한다.
[주D-007]절묘한 …… 드날리니 : 원문은 ‘妙肉淸颺’으로, 반주 없이 부르는 노래를 육성(肉聲) 또는 청창(淸唱)이라 한다.
[주D-008]맹꽁이와 …… 하며 : ‘웃기도 하며’는 원주에 따라 ‘울기도 하며’로 고쳐야 옳다. 조객(弔客)이 오면 상주(喪主)가 사람을 시켜 조객과 함께 곡하도록 하는 것을 ‘조곡(助哭)’이라 한다.
[주D-009]삼재(三災) : 불교 용어로, 계산할 수 없는 긴 세월인 겁(劫)의 말년에 일어나는 세 가지 재해를 말한다. 도병재(刀兵災) · 역병재(疫病災) · 기근재(饑饉災)의 소삼재(小三災)가 있고 화재(火災) · 수재(水災) · 풍재(風災)의 대삼재(大三災)가 있다고 한다.
[주D-010]줄칼에 …… 것 : 좌골소신(剉骨燒身)을 말한다. 뼈가 줄칼에 쓸려 가루가 되고 육신이 뜨거운 불에 타는 지옥의 형벌이다.
[주D-011]그대의 …… 것이네 : 연암이 흰 앵무새의 꿈을 꾼 것은, 말 잘하는 앵무새처럼 문인으로서 대성할 것을 예언한 것이라는 뜻이다.
[주D-012]나의 …… 못했으며 : 문학은 도(道)를 전달해야 하며, 문인은 글쓰기에 앞서 도덕에 힘써야 한다는 ‘문이재도(文以載道)’와 ‘도문일치(道文一致)’의 문학관을 전제로 한 말이다.
[주D-013]갈라진 발가락 : 앵무새는 앞 발가락이 2개, 뒷 발가락이 2개로 갈라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五洲衍文長箋散稿 卷48 鸚鵡辨證說》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우부초서(愚夫艸序)
상말도 알고 보면 모두가 고상한 말이다. 예를 들어 지금 여염(閭閻)에서는 부스럼을 가리켜 ‘곤데〔麗〕’라 하고 식초를 ‘단 것〔甘〕’이라고 한다. 어린 계집애가 마을의 할멈이 단 것을 판다는 말을 듣자 그것이 꿀이라 생각하고, 어머니 어깨에 매달려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에이, 시다. 어째서 단 것이라고 하는 거야?”
하니, 그 어미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예(禮)라는 것이로구나. 무릇 예라는 것은 인정(人情)에서 연유된 것이다. 매실(梅實)이란 말만 들어도 저도 모르게 입에 침이 고인다. 그러므로 식초를 음식에 치기 전에는 오히려 그것이 시다고 말하기를 꺼린다. 하물며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 부스럼보다 더 더럽게 여기는 것에 있어서랴.”
이에 《사소전(士小典)》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무릇 귀가 먹어 들리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귀머거리’라 부르지 않고 ‘소곤대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며, 눈이 흐려 보이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장님’이라 부르지 않고 ‘남의 흠집을 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며, 혀가 굳고 목소리가 막혀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벙어리’라 부르지 않고 ‘남 비평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또 ‘등이 굽고 가슴이 튀어나온 사람〔鉤背曲胸 곱사등이〕’을 가리켜 ‘아첨하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며, 혹이 달린 사람을 가리켜 ‘중후함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고 한다. 심지어 네 발가락이나 여섯 손가락, 절름발이나 앉은뱅이처럼 비록 육체는 병신이지만 덕(德)에는 해가 될 것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도 오히려 둘러대어 말할 것을 생각하고 곧바로 지적하여 말하는 것을 꺼린다. 하물며 이른바 ‘어리석다〔愚〕’고 하는 말은 소인(小人)의 덕이요, 변화될 수도 없는 성품임에 있어서랴. 천하에 치욕스러움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그런데 여경(汝京 유언호(兪彦鎬)) 같은 총명과 예지를 갖춘 사람이 그 어리석음을 자처하고 스스로 ‘우부(愚夫)’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웬일인가?
그의 문집인 《연석(燕石)》을 읽어 보았더니 기휘(忌諱)에 저촉되고 혐노(嫌怒)를 범한 것이 퍽이나 많았다. 백가(百家)의 장점을 포용하고 만물(萬物)을 다 감싸 안아 그 정상(情狀)을 터득한 것이 마치 무소뿔에 불을 붙여 비추어 보고 구정(九鼎)에다 그림을 그려 넣은 것과 같았으며, 그 미묘한 데에서 변화하는 것은 알에서 털이 돋기 시작하고 매미의 날개가 돋아나려는 것과 같아서, 운기(雲氣)와 돌고드름까지도 만져 볼 수 있으며 벌레의 촉수와 꽃술까지도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직설적으로 지적하여 말하는 것이 어찌 귀머거리, 장님, 벙어리라 부르는 정도뿐이겠으며, 원망과 노여움을 사게 되는 것이 또한 어찌 식초의 신맛에 얼굴을 찡그리는 정도뿐이겠는가. 사람의 노여움을 범하는 것도 오히려 피해야 하거늘 하물며 조물주가 꺼리는 바이겠는가.
무릇 이러한 것을 두려워한다면, 총명(聰明)과 혜지(慧智)와는 반대로 행동하여 자신을 숨기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며, 세상 사람들에게도 또한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게 한다거나 입에서 군침이 돌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아!
[주C-001]우부초서(愚夫艸序) : 유언호(兪彦鎬)의 문집인《연석(燕石)》에 써 준 서문인 연석서(燕石序)와 거의 같은 글이다. 연석서의 말미에 을미년(1775, 영조 51) 12월에 지었다고 밝혔다.
[주D-001]부스럼을 …… 하고 : 원문은 ‘指癤爲麗’로, 홍기문(洪起文) 선생은 서울 방언에서 부스럼을 ‘곤데’라고 하는 것은 곪았다는 의미인 ‘곪은 데’요 곱다는 의미인 ‘고운 데’가 아닐 것이라고 하면서 ‘지절위려(指癤爲麗)’의 그릇된 해석은 연암의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 하였다. 홍기문의 「朴燕巖의 藝術과 思想」(조선일보, 1937. 7. 29) 참고.
[주D-002]《사소전(士小典)》 : 연암이 연석서를 쓴 영조 51년 12월에 이덕무는 사전(士典) 등 3편으로 구성된 《사소절(士小節)》 8책을 완성하였다. 《사소전》은 이 《사소절》과 같거나 유사한 책이 아닌가 한다.
[주D-003]마치 …… 같았으며 : 진(晉) 나라 사람인 온교(溫嶠)가 무소뿔을 태워 물속을 비추어 보았더니 괴물들이 모조리 정체를 드러냈다는 전설이 있다. 《異苑 卷7》 하(夏) 나라 때에는 구정(九鼎)에다 온갖 사물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백성들이 괴물들을 익히 알아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宣公3年》 두 가지 비유 모두 사물에 대한 통찰이 비범한 경우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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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
달관한 사람에게는 괴이한 것이 없으나 속인들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이른바 ‘본 것이 적으면 괴이하게 여기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달관한 사람이라 해서 어찌 사물마다 다 찾아 눈으로 꼭 보았겠는가.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눈앞에 그려 보고, 열 가지를 보면 백 가지를 마음속에 설정해 보니, 천만 가지 괴기(怪奇)한 것들이란 도리어 사물에 잠시 붙은 것이며 자기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마음이 한가롭게 여유가 있고 사물에 응수함이 무궁무진하다.
본 것이 적은 자는 해오라기를 기준으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기준으로 학을 위태롭다고 여기니, 그 사물 자체는 본디 괴이할 것이 없는데 자기 혼자 화를 내고, 한 가지 일이라도 자기 생각과 같지 않으면 만물을 모조리 모함하려 든다.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깃털보다 더 검은 것이 없건만, 홀연 유금(乳金) 빛이 번지기도 하고 다시 석록(石綠) 빛을 반짝이기도 하며, 해가 비추면 자줏빛이 튀어 올라 눈이 어른거리다가 비췻빛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내가 그 새를 ‘푸른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고, ‘붉은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 새에게는 본래 일정한 빛깔이 없거늘, 내가 눈으로써 먼저 그 빛깔을 정한 것이다. 어찌 단지 눈으로만 정했으리오. 보지 않고서 먼저 그 마음으로 정한 것이다.
아, 까마귀를 검은색으로 고정 짓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또다시 까마귀로써 천하의 모든 색을 고정 지으려 하는구나.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하지만, 누가 다시 이른바 푸른빛과 붉은빛이 그 검은 빛깔〔色〕 안에 들어 있는 빛〔光〕인 줄 알겠는가. 검은 것을 일러 ‘어둡다’ 하는 것은 비단 까마귀만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검은 빛깔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은 검기 때문에 능히 비출 수가 있고, 옻칠은 검기 때문에 능히 거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빛깔이 있는 것치고 빛이 있지 않은 것이 없고, 형체〔形〕가 있는 것치고 맵시〔態〕가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미인(美人)을 관찰해 보면 그로써 시(詩)를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고개를 나직이 숙이고 있는 것은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고, 턱을 고이고 있는 것은 한스러워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고, 홀로 서 있는 것은 누군가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고, 눈썹을 찌푸리는 것은 시름에 잠겨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이 있으면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바라는 것이 있으면 파초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만약 다시 그녀에게 서 있는 모습이 재계(齋戒)하는 것처럼 단정하지 않다거나 앉아 있는 모습이 소상(塑像)처럼 부동자세를 취하지 않는다고 나무란다면, 이는 양 귀비(楊貴妃)더러 이를 앓는다고 꾸짖거나 번희(樊姬)더러 쪽을 감싸 쥐지 말라고 금하는 것과 마찬가지며, ‘사뿐대는 걸음걸이〔蓮步〕’를 요염하다고 기롱하거나 손바닥춤〔掌舞〕을 경쾌하다고 꾸짖는 것과 같은 격이다.
나의 조카 종선(宗善)은 자(字)가 계지(繼之)인데 시(詩)를 잘하였다. 한 가지 법에 얽매이지 않고 온갖 시체(詩體)를 두루 갖추어, 우뚝이 동방의 대가가 되었다. 성당(盛唐)의 시인가 해서 보면 어느새 한위(漢魏)의 시체를 띠고 있고 또 어느새 송명(宋明)의 시체를 띠고 있다. 송명의 시라고 말하려고 하자마자 다시 성당의 시체로 돌아간다.
아, 세상 사람들이 까마귀를 비웃고 학을 위태롭게 여기는 것이 너무도 심하건만, 계지의 정원에 있는 까마귀는 홀연히 푸르렀다 홀연히 붉었다 하고, 세상 사람들이 미인으로 하여금 재계하는 모습이나 소상처럼 만들려고 하지만, 손바닥춤이나 사뿐대는 걸음걸이는 날이 갈수록 경쾌하고 요염해지며 쪽을 감싸 쥐거나 이를 앓는 모습에도 각기 맵시를 갖추고 있으니, 그네들이 날이 갈수록 화를 내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세상에 달관한 사람은 적고 속인들만 많으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쉬지 않고 말을 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아!
연암노인(燕巖老人)이 연상각(烟湘閣)에서 쓰노라.
[주D-001]오리를 …… 여기니 : 다리가 짧은 오리가 다리가 긴 학을 넘어지기 쉽다고 비웃는다는 뜻이다. 부단학장(鳧短鶴長)이란 말이 있다. 《장자(莊子)》 변무(騈拇)에 “길다고 해서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며, 짧다고 해서 부족한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오리는 다리가 짧지만 그 다리를 이어 주면 걱정하고, 학은 다리가 길지만 그 다리를 자르면 슬퍼한다.”고 하였다.
[주D-002]양 귀비(楊貴妃) : 당 나라 현종(玄宗)의 애첩이다. 양 귀비가 평소 치통을 앓았는데 그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를 그린 양귀비병치도(楊貴妃病齒圖)가 있다.
[주D-003]번희(樊姬)더러 …… 말라고 : 번희는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영현(伶玄)의 애첩이었던 번통덕(樊通德)을 가리킨다. 영현이 번희에게 조비연(趙飛燕)의 고사를 이야기하자, 번희가 손으로 쪽을 감싸 쥐고 서글피 울었다고 한다. 이를 소재로 한 번희옹계(樊姬擁髻)라는 희곡도 있다. 《趙飛燕外傳 附 伶玄自敍》
[주D-004]사뿐대는 걸음걸이〔蓮步〕 : 제(齊) 나라 폐제(廢帝) 동혼후(東昏侯)가 금으로 연꽃을 만들어 땅에다 깔아 놓고 애첩인 반비(潘妃)로 하여금 그 위를 걸어가게 한 후 사뿐대는 걸음걸이를 보고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난다고 하였다. 《南史 齊紀下 廢帝東昏侯》
[주D-005]손바닥춤〔掌舞〕 : 한 나라 때 유행한 춤으로 춤사위가 유연하고 경쾌하다. 한 나라 성제(成帝)의 황후인 조비연(趙飛燕)이 잘 추었다고 한다. 장상무(掌上舞) 또는 장중무(掌中舞)라고도 한다.
[주D-006]종선(宗善) : 1759~1819. 연암의 삼종형(三從兄)인 박명원(朴明源)의 서장자(庶長子)로 규장각 검서를 지냈다.
[주D-007]연상각(烟湘閣) : 연암이 안의 현감(安義縣監) 시절 관아(官衙) 안에 지었다는 정각(亭閣)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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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서(北學議序)
학문의 길은 다른 길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물어야 한다. 심지어 동복(僮僕)이라 하더라도 나보다 글자 하나라도 더 많이 안다면 우선 그에게 배워야 한다. 자기가 남만 같지 못하다고 부끄러이 여겨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면, 종신토록 고루하고 어쩔 방법이 없는 지경에 스스로 갇혀 지내게 된다.
순(舜) 임금은 농사짓고 질그릇을 굽고 고기를 잡는 일로부터 제(帝)가 되기까지 남들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나는 젊었을 적에 미천했기 때문에 막일에 능한 것이 많았다.”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막일 또한 농사짓고 질그릇을 굽고 고기를 잡는 일 따위였을 것이다. 아무리 순 임금과 공자같이 성스럽고 재능 있는 분조차도, 사물에 나아가 기교를 창안하고 일에 임하여 도구를 만들자면 시간도 부족하고 지혜도 막히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순 임금과 공자가 성인이 된 것은 남에게 잘 물어서 잘 배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한쪽 구석 땅에서 편벽된 기운을 타고나서, 발은 대륙의 땅을 밟아 보지 못했고 눈은 중원의 사람을 보지 못했고,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을 때까지 제 강역(疆域)을 떠나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학의 다리가 길고 까마귀의 빛이 검듯이 각기 제가 물려받은 천성대로 살았고, 우물의 개구리나 밭의 두더지마냥 제가 사는 곳이 제일인 양 여기고 살아왔다. 예(禮)는 차라리 소박한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누추한 것을 검소하다고 여겨 왔으며, 이른바 사민(四民 사(士) · 농(農) · 공(工) · 상(商))이라는 것도 겨우 명목만 남아 있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구는 날이 갈수록 빈약해져만 갔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배우고 물을 줄을 몰라서 생긴 폐단이다.
만일 장차 배우고 묻기로 할진대 중국을 놓아 두고 어디로 가겠는가. 그렇지만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의 중국을 차지하고 있는 주인은 오랑캐들이다.” 하면서 배우기를 부끄러워하여, 중국의 옛법마저도 다 함께 얕잡아 무시해 버린다. 저들이 진실로 변발(辮髮)을 하고 오랑캐 복장을 하고 있지만, 저들이 살고 있는 땅이 삼대(三代) 이래 한(漢), 당(唐), 송(宋), 명(明)의 대륙이 어찌 아니겠으며, 그 땅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삼대 이래 한, 당, 송, 명의 유민(遺民)이 어찌 아니겠는가. 진실로 법이 훌륭하고 제도가 아름다울진대 장차 오랑캐에게라도 나아가 배워야 하는 법이거늘, 하물며 그 규모의 광대함과 심법(心法)의 정미(精微)함과 제작(制作)의 굉원(宏遠)함과 문장(文章)의 찬란함이 아직도 삼대 이래 한, 당, 송, 명의 고유한 옛법을 보존하고 있음에랴.
우리를 저들과 비교해 본다면 진실로 한 치의 나은 점도 없다. 그럼에도 단지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튼 것만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제일이라고 하면서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산천은 비린내 노린내 천지라 나무라고, 그 인민은 개나 양이라고 욕을 하고, 그 언어는 오랑캐 말이라고 모함하면서, 중국 고유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마저 배척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장차 어디에서 본받아 행하겠는가.
내가 북경에서 돌아오니 재선(在先 박제가(朴齊家))이 그가 지은 《북학의(北學議)》 내편(內編)과 외편(外編)을 보여 주었다. 재선은 나보다 먼저 북경에 갔던 사람이다.
그는 농잠(農蠶), 목축(牧畜), 성곽(城郭), 궁실(宮室), 주거(舟車)로부터 기와, 대자리, 붓, 자〔尺〕 등을 만드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눈으로 헤아리고 마음으로 비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물어보았고,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배웠다. 시험 삼아 책을 한 번 펼쳐 보니, 나의 일록(日錄 《열하일기(熱河日記)》)과 더불어 조금도 어긋나는 것이 없어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았다. 이러한 까닭에 그가 진실로 즐거운 마음으로 나에게 보여 준 것이요, 나도 흐뭇이 여겨 3일 동안이나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 이것이 어찌 우리 두 사람이 눈으로만 보고서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진실로 비 뿌리고 눈 날리는 날에도 연구하고, 술이 거나하고 등잔불이 꺼질 때까지 토론해 오던 것을 눈으로 한번 확인한 것뿐이다. 요컨대 이를 남들에게 말할 수가 없으니, 남들은 물론 믿지를 않을 것이고 믿지 못하면 당연히 우리에게 화를 낼 것이다. 화를 내는 성품은 편벽된 기운을 타고난 데서 말미암은 것이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원인은 중국의 산천을 비린내 노린내 난다고 나무란 데 있다.
[주C-001]북학의서(北學議序) : 박제가의 《북학의》에 붙은 원래의 서문 말미에 신축년(1781, 정조 5) 중양절(重陽節)에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주D-001]나는 …… 많았다 : 《논어》 자한(子罕)에 나온다.
[주D-002]심법(心法) : 용심지법(用心之法)을 말한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청 나라 문물의 특장(特長)으로 ‘대규모(大規模) 세심법(細心法)’ 즉 규모가 크고 심법이 세밀한 점을 들었다.
[주D-003]내가 북경에서 돌아오니 : 연암은 정조 4년(1780) 5월부터 10월까지 진하 겸 사은별사(進賀兼謝恩別使)의 일원으로 중국 북경을 다녀왔다.
[주D-004]재선은 …… 사람이다 : 박제가는 정조 2년(1778)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의 일원으로 이덕무와 함께 북경을 다녀온 뒤 《북학의》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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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악당집서(楓嶽堂集序)
옛날에 승려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총명하고 영특하고 출중한 인물들이었다. 한번이라도 임금이 그의 계행(戒行)을 존경하고 불전(佛典)에 마음을 두어 그에게 호(號)를 내리고 예를 달리하여 빈객으로 대우하고 스승으로 맞아들이는 일이 있으면 당시의 사대부들 역시 모두가 그와 함께 어울리기를 즐겨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고행을 하며 숨어 지내고 조용히 있어도 도리어 부귀와 영화가 뒤따른다. 이것이 본디 불문(佛門)의 본분은 아니지만 불교를 권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의 언어와 문장이 찬란하여 볼 만하였다.
국조(國朝) 이래로 유교를 전적으로 숭상하여 사대부들이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데 엄격했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는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스스로 체득하는 선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이른바 이단의 학설마저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 그 황폐된 사찰에는 살고 있는 승려들이 여전히 끊이지 않고는 있으나, 모두 궁핍한 백성과 굶주린 종들로서 군역(軍役)을 도피하여 머리 깎고 검은 장삼을 입는 자들이라, 비록 이름은 승려라 하지만 어리석고 혼몽하여 눈으로는 글자 하나 보지 못하는 형편이니, 불교를 금지하지 않아도 그 도(道)가 거의 사라질 지경이다.
나는 항상 명산(名山)을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명산의 태반을 둘러보았다. 일찍이 특이한 중을 만나 방외(方外)의 교유를 해 보고자 생각하였으나, 산수(山水)에 등림(登臨)할 적마다 그들을 만나지 못해 쓸쓸히 배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친구인 신원발(申元發 신광온(申光蘊)) · 유사경(兪士京 유언호(兪彦鎬))과 어울려 백화암(白華菴)에서 함께 잔 적이 있었다. 그때 준(俊)이란 중이 깊은 밤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불등(佛燈)은 밝게 빛나고 선탑(禪榻)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며 책상 위에는 《반야심경(般若心經)》과 《법화경(法華經)》 등 여러 불경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준에게,
“네가 불경을 좀 아느냐?”
하고 물었더니,
“모릅니다.”
하고 사과하기에, 또
“네가 시율(詩律)을 알고 지을 줄 아느냐?”
하고 물었더니,
“못합니다.”
하고 또 사과하였다. 그래서 또 묻기를,
“이 산중에 더불어 교유할 만한 특이한 중이 있느냐?”
했더니, 대답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 이튿날 진주담(眞珠潭) 아래에 앉아서 일행끼리 말하기를,
“준공(俊公)은 미목(眉目)이 청수(淸秀)하니, 만약 문자를 조금만 알았다면 시를 꼭 잘 짓지는 못하더라도 시축(詩軸)에 연서(聯書)할 정도는 될 것이요, 담론(談論)이 반드시 심오하지는 못하더라도 회포를 풀기에는 충분할 것이니, 어찌 우리들의 풍류를 돋우어 주지 않았겠는가.”
하면서 서로 돌아보며 탄식하고 일어섰다.
이번에 풍악대사(楓嶽大師) 보인(普印)의 시문(詩文)을 보다가, 미처 다 보기도 전에 탄식하기를,
“내가 지난번에 특이한 중을 만나서 방외의 교유를 해 보고자 했으면서도 인공(印公)을 놓쳤구나!”
하였다. 대체로 그는 내원통(內圓通)에서 수행을 하였는데, 그 시기가 바로 내가 관동(關東) 지방을 유람하던 때였다. 그의 문집을 보았더니 준과 더불어 수창(酬唱)한 시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준은 확실히 그의 벗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보인(普印)이라는 특이한 중이 있다고 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던가? 준이 아마도 나를 속인 것이리라. 나는 여기에서, 보인이 본디 고승이었으나 준이 과연 그를 위하여 말해 주지 않은 것임을 더욱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 보건대, 준이 과연 시에도 능하고 불경의 담론에도 능한 자일 것이니, 준 역시 고승이었을 것이다. 나는 함께 놀았던 준도 몰라보고 놓쳤는데, 하물며 직접 보지도 못한 인공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불교를 권장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그 도(道)를 믿고 스스로 수행한 것이 이와 같다. 그렇다면 인공처럼 내가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나는 산에 있어서도 아직 가 보지 못한 곳이 북으로는 장백산(長白山), 남으로는 지리산(智異山), 서로는 구월산(九月山)이 있다. 내 장차 두루 유람하여 혹시 그런 이를 한번 만나게 된다면 준공에게서 그랬던 것처럼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우선 이 시집에다 서문을 지어 놓는 바이다.
[주D-001]방외(方外)의 교유 : 세속의 예법에서 벗어나 승려나 도인(道人), 은자(隱者)들과 사귀는 것을 말한다.
[주D-002]일찍이 …… 있었다 : 박종채(朴宗采)의 《과정록》에 의하면, 연암은 1765년(영조 41) 몇몇 친구들과 함께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였다.
[주D-003]보인(普印) : 1701~1769. 호가 풍악(楓嶽)으로, 금강산의 내원통암(內圓通庵)에서 염불과 참선에 전념하다가 법랍(法臘) 51세로 입적(入寂)하였다. 이복원(李福源)이 지은 비가 금강산 유점사에 세워졌으며, 저서로 시문집인 《풍악당집(楓嶽堂集)》 1책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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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씨도서보서(柳氏圖書譜序)
연옥(連玉)은 인장(印章)을 잘 새겼다. 그는 돌을 쥐고 무릎에 받치고서 어깨를 비스듬히 하고 턱을 숙인 채, 눈을 깜빡이며 입으로 후후 불면서, 먹 자국에 따라 누에가 뽕잎 갉아먹듯 파 들어가는데 마치 실처럼 가늘면서도 획이 끊어지지 않았다. 입술을 모으고 칼을 밀고 나가는데 눈썹을 찡긋찡긋하며 힘을 쓰더니, 이윽고 허리를 받치고 하늘을 쳐다보며 ‘휴!’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이 지나는 길에 들렀다가 그 모습을 보고 위로하기를,
“자네는 그 굳은 돌멩이를 새겨서 장차 무엇을 하려는 건가?”
하였더니, 연옥이 대답하기를,
“무릇 천하의 모든 물건에는 각각 그 주인이 있고, 주인이 있으면 이를 증명할 신표가 있어야 하네. 그러기에 열 집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고을이나 백부장(百夫長)까지도 부절(符節)이나 인신(印信)이 있었던 것일세. 주인이 없으면 흩어져 버리고 신표가 없으면 어지러워지거든.
내가 무늬 있는 좋은 돌을 얻었는데 결이 반질반질하고 크기가 사방 한 치로 옥처럼 빛이 난다네. 손잡이 꼭지에다 쭈그리고 앉아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서 으르렁대는 사자를 새겨 놓으면, 나의 문방(文房 서재)을 지키고 문방의 사우(四友 종이, 붓, 먹, 벼루)를 보호할 걸세. 또 ‘아조헌원 씨류명련(我祖軒轅氏柳名璉)’이라는 여덟 글자를 아름답고 우아하게 종정문(鍾鼎文)과 석고문(石鼓文)의 서체나 조전(鳥篆)과 운전(雲篆)의 서체로 새긴 다음, 서책에다 찍어서 나의 자손들에게 물려준다면 산일(散佚)될 우려가 없어 수백 권이라도 다 보전될 걸세.”
하였다. 무관(懋官)이 허허 웃으며,
“그대는 화씨(和氏)의 벽(璧)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그야 천하의 지극한 보배이지.”
하므로,
“그렇다네. 옛날 진 시황이 6국을 병합한 후 그 옥돌을 깨뜨려 도장을 만들었네. 위에는 푸른 용을 서려 두고 옆에는 움츠린 붉은 용을 새겨, 이것을 자신이 천자(天子)라는 증거물과 사해(四海)를 진정시키는 상징물로 삼고,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만리장성을 쌓아 지키게 하였네. 그러고는 하는 말이, ‘2세, 3세로 내려가 만세(萬世)에 이르도록 무궁하게 전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였다. 연옥이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어린 아들을 무릎에서 밀쳐 내려 놓으며,
“어찌 네 아비의 머리를 희게 만드느냐?”
하였다.
하루는 그가 전에 수집했던 고금의 인본(印本 인보(印譜))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서문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그래도 예전에는 사관(史官)이 의심나는 내용은 적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러한 풍습이 없어졌다.” 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세태를 슬퍼한 것이다. 여기에 함께 적어 두어, 책을 빌려 주지 않는 사람을 깊이 경계하는 바이다.
[주D-001]연옥(連玉) : 유연(柳璉 : 1741~1788)의 자이다. 유연은 유득공의 숙부로, 1776년(영조 52) 연행(燕行)을 다녀오면서 이름을 유금(柳琴)으로 고쳤다.
[주D-002]자네는 …… 새겨서 : 원문은 ‘子之攻堅也’인데 ‘攻堅’은 원래 견고한 곳을 공격한다는 뜻이다. 《관자(管子)》 제분(制分)에 용병술(用兵術)과 관련하여, 상대방의 견고한 곳을 공격하면 쉽사리 패배시킬 수 없으며, 틈이 있는 곳을 파고들어야 신속히 승리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무관의 말은 풍자의 어조를 띤 것이다.
[주D-003]백부장(百夫長) : 천 명의 병졸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를 천부장(千夫長), 백 명의 병졸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를 백부장이라 하였다. 《書經 牧誓》
[주D-004]새끼에게 …… 으르렁대는 : 새끼를 기르는 맹수를 유수(乳獸)라 한다. 맹수는 젖을 물려 새끼를 기르는 동안에는 평소보다 더욱 사납다.
[주D-005]아조헌원 씨류명련(我祖軒轅氏柳名璉) : 유연의 본관은 문화(文化)인데, 문화 유씨의 시조 유차달(柳車達)은 원래 차씨(車氏)로서 차무일(車無一)의 38세손이라고 한다. 차씨는 황제(黃帝) 헌원씨의 후손 사신갑(似辛甲)이 조선으로 망명한 뒤 그 후손이 차무일로 변성명함으로써 비롯되었으며, 신라 말에 유씨(柳氏)로 개성(改姓)하였다가, 고려 초에 유차달의 아들 중 장남이 차씨를 계승하고 연안(延安) 차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유연(柳璉)의 《기하실시고략(幾何室詩藁略)》에 이와 같은 문화 유씨의 세계(世系)를 노래한 술계(述系)라는 시가 있다.
[주D-006]종정문(鐘鼎文)과 …… 서체 : 종정문은 주로 주(周) 나라 때의 청동기에 새겨진 문자인 금문(金文)을 말하며, 석고문(石鼓文)은 현재 북경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보존되어 있는 북 모양의 돌에 새겨진 문자를 말한다. 조전(鳥篆)은 전체(篆體)의 고문자(古文字)로 모양이 새의 발자국과 흡사하다 해서 조적서(鳥迹書), 조서(鳥書)라고도 한다. 운전(雲篆) 역시 전체의 고문자로 필획이 구름 같다고 해서 운서(雲書)라고도 한다.
[주D-007]사해(四海)를 …… 상징물 : 이와 유사한 것으로 진규(鎭圭)가 있다. 사방을 진정시킨다는 뜻으로 사방의 진산(鎭山)을 본떠 만든 천자의 홀(笏)을 진규라고 한다.
[주D-008]2세 …… 전하라 : 진 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뒤 시법(諡法)을 없앨 것을 명하면서,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 부르고 후세는 숫자로만 헤아려, 2세, 3세라는 식으로 만세에 이르도록 무궁하게 전하라고 하였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주D-009]그래도 …… 없어졌다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수록된 원문을 보면 “그래도 예전에는 사관(史官)이 의심나는 내용은 적지 않고 말을 가진 사람이 남에게 빌려 주어 타게 하는 풍습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러한 풍습조차 없어졌다.〔吾猶及史之闕文也 有馬者借人乘之 今亡矣夫〕”로 되어 있다. ‘有馬者借人乘之’를 생략하였으나, 실은 생략된 부분에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 공자가 남에게 말을 빌려 주지 않는 야박한 세태를 비판했듯이, 연암은 남에게 책을 빌려 주지 않는 세태를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연암집》 권5 여인(與人)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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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처고서(嬰處稿序)
자패(子佩 유연(柳璉))가 말했다.
“비루하구나, 무관(懋官)이 시를 지은 것이야말로! 옛사람의 시를 배웠음에도 그와 비슷한 점을 보지 못하겠다. 털끝만큼도 비슷한 적이 없으니 어찌 그 소리인들 비슷할 수 있겠는가? 야인(野人)의 비루함에 안주하고 시속(時俗)의 자질구레한 것을 즐기고 있으니, 바로 오늘날의 시이지 옛날의 시는 아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서 크게 기뻐하여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시에서 살필 수 있는 점이다. 옛날을 기준으로 지금을 본다면 지금이 진실로 비속하기는 하지만, 옛사람들도 자신을 보면서 반드시 자신이 예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시를 살펴보던 사람 역시 그때에는 하나의 지금 사람이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세월이 도도히 흘러감에 따라 풍요(風謠)도 누차 변하는 법이다. 아침에 술을 마시던 사람이 저녁에는 그 자리를 떠나고 없으니, 천추만세(千秋萬世)토록 이제부터 옛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는 것은 ‘옛날’과 대비하여 일컬어지는 이름이요, ‘비슷하다’는 것은 그 상대인 ‘저것’과 비교할 때 쓰는 말이다. 무릇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비슷하기만 한 것이어서 저것은 저것일 뿐이요, 비교하는 이상 이것이 저것은 아니니, 나는 이것이 저것과 일치하는 것을 아직껏 보지 못하였다.
종이가 하얗다고 해서 먹이 이를 따라 하얗게 될 수는 없으며, 초상화가 아무리 실물과 닮았다 하더라도 그림이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사단(雩祀壇) 아래 도저동(桃渚洞)에 푸른 기와로 이은 사당이 있고, 그 안에 얼굴이 붉고 수염을 길게 드리운 이가 모셔져 있으니 영락없는 관운장(關雲長)이다. 학질(瘧疾)을 앓는 남녀들을 그 좌상(座牀) 밑에 들여보내면 정신이 놀라고 넋이 나가 추위에 떠는 증세가 달아나고 만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아무런 무서움도 없이 그 위엄스러운 소상(塑像)에게 무례한 짓을 하는데, 그 눈동자를 후벼도 눈을 깜짝이지 않고 코를 쑤셔도 재채기를 하지 않는다. 그저 덩그러니 앉아 있는 소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를 통해 보건대, 수박을 겉만 핥고 후추를 통째로 삼키는 자와는 더불어 그 맛을 말할 수가 없으며, 이웃 사람의 초피(貂皮) 갖옷을 부러워하여 한여름에 빌려 입는 자와는 더불어 계절을 말할 수가 없듯이, 관운장의 가상(假像)에다 아무리 옷을 입히고 관을 씌워 놓아도 진솔(眞率)한 어린아이를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무릇 시대와 풍속을 걱정하고 가슴 아파한 사람으로는 역사상 굴원(屈原)만 한 사람이 없는데도, 초(楚) 나라 풍속이 귀신을 숭상했기 때문에 귀신을 노래한 구가(九歌)를 지었으며, 한(漢) 나라는 진(秦) 나라의 옛것에 의거하여 진 나라의 땅에서 황제가 되고 진 나라의 성읍에다 도읍을 정하고 진 나라의 백성을 백성으로 삼았으되, 약법삼장(約法三章)에 있어서는 진 나라의 법을 답습하지 않았다.
지금 무관(懋官)은 조선 사람이다. 산천과 기후가 중화(中華) 땅과는 다르고 언어와 풍속도 한당(漢唐)의 시대와 다르다. 그런데도 만약 작법을 중화에서 본뜨고 문체를 한당에서 답습한다면, 나는 작법이 고상하면 할수록 그 내용이 실로 비루해지고, 문체가 비슷하면 할수록 그 표현이 더욱 거짓이 됨을 볼 뿐이다.
우리나라가 비록 구석진 나라이기는 하나 이 역시 천승(千乘)의 나라요, 신라와 고려가 비록 검박(儉薄)하기는 하나 민간에 아름다운 풍속이 많았으니, 그 방언을 문자로 적고 그 민요에다 운(韻)을 달면 자연히 문장이 되어 그 속에서 ‘참다운 이치〔眞機〕’가 발현된다. 답습을 일삼지 않고 빌려 오지도 않으며, 차분히 현재에 임하여 눈앞의 삼라만상을 마주 대하니, 오직 이 시가 바로 그러하다.
아, 《시경》에 수록된 삼백 편의 시는 조수(鳥獸)와 초목(草木)의 이름을 들지 않은 것이 없고, 여항(閭巷)의 남녀가 나눈 말들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패국(邶國)과 회국(檜國) 사이에는 지리적으로 풍토가 같지 않고, 강수(江水)와 한수(漢水) 유역에는 백성들이 그 풍속을 각기 달리하므로, 시를 채집하는 사람이 열국(列國)의 국풍(國風)으로 만들어 그 지방 백성들의 성정(性情)을 고찰하고 그 풍속을 파악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무관(懋官)의 이 시가 예스럽지 않은 점에 대해 어찌 다시 의아해하겠는가. 만약 성인(聖人)이 중국에 다시 나서 열국의 국풍을 관찰한다면, 이 《영처고(嬰處稿)》를 상고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조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될 것이고, 우리나라 남녀의 성정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를 ‘조선의 국풍’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주D-001]이것이야말로 …… 점이다 : 원문은 ‘此可以觀’인데,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시경(詩經)》의 시로써 풍속의 성쇠(盛衰)를 “살필 수 있다.〔可以觀〕”고 하였다.
[주D-002]옛날을 …… 따름이다 : 옛날을 이상화하고 지금을 말세로 여기는 귀고천금(貴古賤今)의 복고적 사상을 비판한 말이다.
[주D-003]우사단(雩祀壇) : 서울 남산 서편 기슭에 있었던 기우제 지내던 단(壇)이다. 사방이 40척이고, 구망(句芒), 축융(祝融), 후토(后土), 욕수(蓐收), 현명(玄冥), 후직(后稷)을 모셨다. 유월 상순에 제사를 드렸다. 남관왕묘(南關王廟)가 그 부근인 남대문 밖 도저동(桃渚洞)에 있었는데 선조(宣祖) 때 명 나라 장수 진인(陳寅)이 세웠다고 한다.
[주D-004]구가(九歌) : 태일신(太一神)인 동황태일(東皇太一), 구름신인 운중군(雲中君), 상수(湘水)의 신인 상군(湘君),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의 상부인(湘夫人) 등 귀신들을 노래한 11수로 되어 있다.
[주D-005]약법삼장(約法三章) : 한 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진 나라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한 뒤, 진 나라의 가혹하고 번다한 법률 대신 삼장(三章), 즉 살인자는 죽이고 상해자와 도적은 처벌한다는 세 가지 법만을 시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史記 卷8 高祖本紀》
[주D-006]실로 : 원문은 ‘實’로 되어 있는데, 이본에는 ‘益’으로 되어 있다.
[주D-007]《시경》에 …… 없고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시경(詩經)》의 시를 공부하면 “조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주D-008]여항(閭巷)의 …… 않는다 : 주자(朱子)는 시집전서(詩集傳序)에서 《시경》의 국풍(國風)은 여항의 가요에서 나온 것이 많으며, 남녀가 함께 노래하면서 각자의 감정을 말한 것이라 하였다.
[주D-009]우리나라 남녀의 성정 : 원문은 ‘貊男濟婦之性情’인데, ‘貊男’은 강원도 남자, ‘濟婦’는 제주도 여자를 가리킨 것이 아닌가 한다. 강원도는 옛날에 맥국(貊國)의 땅이었다고 한다. 《연암집 卷3 送沈伯修出宰狼川序》 또한 《연암집》 권7 ‘이방익의 사건을 기록함(書李邦翼事)’에서 제주도 사람을 ‘제인(濟人)’이라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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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언도필첩서(炯言桃筆帖序)
아무리 작은 기예(技藝)라 할지라도 다른 것을 잊어버리고 매달려야만 이루어지는 법인데 하물며 큰 도(道)에 있어서랴.
최흥효(崔興孝)는 온 나라에서 글씨를 제일 잘 쓰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여 시권(試卷)을 쓰다가 그중에 글자 하나가 왕희지(王羲之)의 서체와 비슷한 것을 발견하고는, 종일토록 들여다보고 앉았다가 차마 그것을 버릴 수가 없어 시권을 품에 품고 돌아왔다. 이쯤 되면 ‘이해득실 따위를 마음속에 두지 않는다’고 이를 만하다.
이징(李澄)이 어릴 때 다락에 올라가 그림을 익히고 있었는데 집에서 그가 있는 곳을 몰라서 사흘 동안 찾다가 마침내 찾아냈다. 부친이 노하여 종아리를 때렸더니 울면서도 떨어진 눈물을 끌어다 새를 그리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그림에 온통 빠져서 영욕(榮辱)을 잊어버렸다’고 이를 만하다.
학산수(鶴山守)는 온 나라에서 노래를 제일 잘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산속에 들어가 소리를 익힌 적이 있었는데, 매양 한 가락을 마치면 모래를 주워 나막신에 던져서 그 모래가 나막신에 가득 차야만 돌아왔다. 일찍이 도적을 만나 장차 죽게 되었는데, 바람결에 따라 노래를 부르자 뭇 도적들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쯤 되면 ‘죽고 사는 것을 마음속에 두지 않는다’고 이를 만하다.
나는 처음 그 이야기를 듣고서 이렇게 탄식하였다.
“큰 도(道)가 흩어진 지 오래되어, 어진 이를 좋아하기를 여색 좋아하듯이 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저들은 기예를 위해서라면 자기의 목숨마저도 바꿀 수 있다 여겼으니, 아! 이것이 바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것이로구나.”
도은(桃隱)이 《형암총언(炯菴叢言)》 도합 열세 조목을 글씨로 써서 한 권의 책자로 만들어 나에게 서문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도은과 형암 이 두 사람은 내적인 면에 오로지 마음을 쓰는 사람인가, 육예(六藝) 속에서 노니는 사람인가? 그것이 아니고 이 두 사람이 사생(死生)과 영욕(榮辱)의 분별을 잊어버리고 이와 같이 정교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어찌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이 두 사람이 무언가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면, 도와 덕 속에서 서로를 잊고 지내기 바란다.
[주D-001]최흥효(崔興孝) : 조선 세종(世宗) 때의 명필로 초서에 뛰어났다고 한다.
[주D-002]이징(李澄) : 선조 14년(1581) 유명한 화가였던 종실(宗室) 학림정(鶴林正) 이경윤(李慶胤)의 서자로 태어났다.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이 되었으며, 산수화에 뛰어났다고 한다.
[주D-003]학산수(鶴山守) : 성명은 미상(未詳)이다. 수(守)는 종친부(宗親府)의 정 4 품 벼슬이다.
[주D-004]어진 이를 …… 못하였다 : 《논어》 자한(子罕)과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5]아침에 …… 좋다 :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가 한 말이다.
[주D-006]《형암총언(炯菴叢言)》 : 이덕무가 지은 책인데,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전하지 않는다. 형암은 이덕무의 호이다.
[주D-007]육예(六藝) …… 사람인가 : 육예는 예(禮) · 악(樂) · 사(射) · 어(御) · 서(書) · 수(數)를 말한다. 공자가 이르기를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며, 인에 의지하며, 예에서 노닌다.〔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 하였는데, 앞의 세 항목이 ‘내적인 면에 마음을 쓰는’ 것이라면, 육예에서 노니는 것은 외적인 면, 즉 일상적인 행동을 통해 수양에 힘쓰는 것을 뜻한다. 주자(朱子)의 주에 따르면, 그렇게 할 때 본말을 갖추게 되고 내외가 서로 함양된다고 하였다. 《論語 述而》
[주D-008]도와 …… 바란다 :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물고기들이 샘물이 말라붙는 바람에 졸지에 육지에 처하여 서로 습기를 호흡하고 입의 거품으로 서로의 몸을 축여 주느라 고생하고 있는데, 그보다는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지내는 것〔相忘於江湖〕’이 낫다고 하였다. 연암은 이와 같이 유교의 예악(禮樂)과 인의(仁義)를 모두 잊어버릴 것을 역설한 《장자》의 일절(一節)을 변용하여, 도리어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라’는 공자의 말씀을 철저히 실천하는 일 외에 다른 모든 일을 잊어버리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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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
옛글을 모방하여 글을 짓기를 마치 거울이 형체를 비추듯이 하면 ‘비슷하다’고 하겠는가? 왼쪽과 오른쪽이 서로 반대로 되는데 어찌 비슷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물이 형체를 비추듯이 하면 ‘비슷하다’고 하겠는가? 뿌리와 가지가 거꾸로 보이는데 어찌 비슷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이 한다면 ‘비슷하다’고 하겠는가? 한낮이 되면 난쟁이〔侏儒僬僥〕가 되고 석양이 들면 키다리〔龍伯防風〕가 되는데 어찌 비슷할 수 있겠는가. 그림이 형체를 묘사하듯이 한다면 ‘비슷하다’고 하겠는가? 걸어가는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 소리가 없는데 어찌 비슷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옛글과 끝내 비슷할 수 없단 말인가?
그런데 어찌 구태여 비슷한 것을 구하려 드는가? 비슷한 것을 구하려 드는 것은 그 자체가 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천하에서 이른바 서로 같은 것을 말할 때 ‘꼭 닮았다〔酷肖〕’라 일컫고, 분별하기 어려운 것을 말할 때 ‘진짜에 아주 가깝다〔逼眞〕’라고 일컫는다. 무릇 ‘진(眞)’이라 말하거나 ‘초(肖)’라고 말할 때에는 그 속에 ‘가(假)’와 ‘이(異)’의 뜻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천하에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전혀 다르면서도 서로 비슷한 것이 있다. 언어가 달라도 통역을 통해 의사를 소통할 수 있고, 한자(漢字)의 자체(字體)가 달라도 모두 문장을 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외형은 서로 다르지만 내심은 서로 같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마음이 비슷한 것〔心似〕’은 내면의 의도라 할 것이요 ‘외형이 비슷한 것〔形似〕’은 피상적인 겉모습이라 하겠다.
이씨의 자제인 낙서(洛瑞 이서구(李書九))는 나이가 16세로 나를 따라 글을 배운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 심령(心靈)이 일찍 트이고 혜식(慧識)이 구슬과 같았다. 일찍이 《녹천관집(綠天館集)》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질문하기를,
“아, 제가 글을 지은 지가 겨우 몇 해밖에 되지 않았으나 남들의 노여움을 산 적이 많았습니다. 한 마디라도 조금 새롭다던가 한 글자라도 기이한 것이 나오면 그때마다 사람들은 ‘옛글에도 이런 것이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면 발끈 화를 내며 ‘어찌 감히 그런 글을 짓느냐!’고 나무랍니다. 아, 옛글에 이런 것이 있었다면 제가 어찌 다시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선생님께서 판정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손을 모아 이마에 얹고 세 번 절한 다음 꿇어앉아 말하였다.
“네 말이 매우 올바르구나. 가히 끊어진 학문을 일으킬 만하다. 창힐(蒼頡)이 글자를 만들 때 어떤 옛것에서 모방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안연(顔淵)이 배우기를 좋아했지만 유독 저서가 없었다. 만약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창힐이 글자를 만들 때를 생각하고, 안연이 표현하지 못한 취지를 저술한다면 글이 비로소 올바르게 될 것이다. 너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남들에게 노여움을 받으면 공경한 태도로 ‘널리 배우지 못하여 옛글을 상고해 보지 못하였습니다.’라고 사과하거라. 그래도 힐문이 그치지 않고 노여움이 풀리지 않거든, 조심스러운 태도로 ‘은고(殷誥)와 주아(周雅)는 하(夏) · 은(殷) · 주(周) 삼대(三代) 당시에 유행하던 문장이요, 승상(丞相) 이사(李斯)와 우군(右軍)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는 진(秦) 나라와 진(晉) 나라에서 유행하던 속필(俗筆)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하거라.”
[주D-001]난쟁이〔侏儒僬僥〕 : 주유(侏儒)는 난쟁이를 말하고, 초요(僬僥)는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나오는 단인국(短人國) 사람, 또는 《국어(國語)》 노 하(魯下)에 나오는 키가 석 자밖에 안 된다는 종족이다.
[주D-002]키다리〔龍伯防風〕 : 용백(龍伯)은 《열자》 탕문에 나오는 대인국(大人國) 사람, 방풍(防風)은 《국어》 노 하에 나오는 키가 큰 종족이다.
[주D-003]나이가 16세로 : 이서구는 1754년에 태어났으므로, 이 글을 지은 때는 1769년임을 알 수 있다.
[주D-004]은고(殷誥)와 주아(周雅) : 은고는 중훼지고(仲虺之誥)와 탕고(湯誥), 즉 《서경(書經)》을 가리키고, 주아는 주공(周公)이 제정했다는 소아(小雅)와 대아(大雅), 즉 《시경(詩經)》을 가리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영재집서(泠齋集序)
장석(匠石 돌을 다듬는 사람)이 기궐씨(剞劂氏 돌에 글씨를 새기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천하의 물건 가운데 돌보다 단단한 것은 없다. 그렇게 단단한 것을 베어 내어 자르고 깎고 하여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만들어 신도(神道)에 세우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바로 나의 공이니라.”
하니, 기궐씨가 이렇게 말했다.
“오래도록 닳아 없어지지 않기로는 글자를 새기는 것보다 더 오래가는 것이 없다. 위대한 인물의 훌륭한 행적에 대하여 군자가 비명(碑銘)을 지어 놓았다 하더라도 나의 공력이 들어가지 않으면 장차 그 빗돌을 어디에다 쓰겠는가.”
그렇게 다투다가 마침내 마렵자(馬鬣子 무덤)에게 함께 가서 시비를 가리려 했으나, 마렵자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조용히 있기만 할 뿐 세 번을 불러도 세 번 다 대답이 없었다. 이때 옆에 있던 석옹중(石翁仲 무덤 앞에 세워놓은 석인(石人))이 껄껄대고 웃으면서,
“그대들은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것으로 돌보다 더한 것이 없고, 오래도록 닳아 없어지지 않는 것으로 글자를 새기는 것보다 더 오래가는 것이 없다고 하는구먼. 비록 그러하나 돌이 정말 단단하다면 어떻게 깎아서 빗돌을 만들 수 있겠으며, 닳아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글자를 새길 수 있겠는가. 그것을 깎아서 새길 수 있는 이상 부엌을 만드는 사람이 가져다가 솥을 앉히는 이맛돌로 쓰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하겠는가.”
하였다.
양자운(揚子雲 양웅(揚雄))은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기자(奇字)를 많이 알았다. 한창 《태현경(太玄經)》을 저술하다가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변하더니, 개연히 크게 탄식하기를,
“아! 오(烏)야, 너는 알고 있어라. 석옹중의 풍자를 들은 사람들은 장차 이 《태현경》을 장독의 덮개로 쓰겠지.”
하니, 듣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봄날에 《영재집》에다 쓴다.
[주D-001]기자(奇字) : 고문(古文 : 공자벽중서〈孔子壁中書〉), 전서(篆書), 예서(隸書), 무전(繆篆), 충서(蟲書)와 함께 한자(漢字)의 육체(六體)의 하나로, 고문의 변체(變體)인데 양웅이 이를 즐겨 배웠다고 한다.
[주D-002]오(烏) : 양웅의 아들 양오(揚烏)로, 동오(童烏)라고도 한다. 문학의 신동(神童)이었으나 아홉 살로 요절했다고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순패서(旬稗序)
소천암(小川菴)이 우리나라의 민요와 민속, 방언(方言)과 속기(俗技) 등을 두루 기록하고, 심지어는 종이연에도 계보(系譜)를 만들고 어린애들 수수께끼에도 해설을 붙여 놓았다. 여항(閭巷) 구석구석의 익숙한 실태며, 문에 기댄 기녀들이 몸을 움츠리고 아양을 떠는 모습과 칼을 두드리는 백정이 손뼉을 치면서 맹세하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수집해 실어 놓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각각의 내용들을 조목별로 잘 엮어 놓았다. 입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까지도 붓으로 잘 묘사했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내용들까지도 책을 펼쳐 보면 곳곳에 나와 있으며, 닭이 울고 개가 짖어 대는 소리와 벌레가 몸을 일으키고 굼벵이가 꿈틀거리는 모습 등 모든 것이 실제의 모습과 소리대로 표현되어 있다. 이를 십간(十干)의 순으로 배열하고는 책이름을 《순패(旬稗)》라 하였다.
하루는 이 책을 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며,
“이 책은 내가 어린 시절에 손장난 삼아 지어 본 것일세. 그대는 음식 가운데 거여(粔籹 유밀과(油蜜菓)의 일종인 중배끼)를 보지 못하였는가? 찹쌀을 가루로 만들어 술에 적시어 누에 크기만큼 잘라서 더운 구들장에 말린 다음 기름에다 튀기면 그 모양이 누에고치 모양으로 부푼다네. 보기에 깨끗하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 속이 텅텅 비어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으며, 잘 부스러지는 성질이 있어 입으로 훅 불기만 해도 눈발 날리듯 한다네. 그래서 물건 가운데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이 비어 있는 것을 ‘거여’라고 하지.
그런데 개암, 밤, 벼 등은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것들이지만 실로 아름다우면서도 참으로 배가 불러서, 이것으로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드릴 수도 있고 귀한 손님에게 예물로 드릴 수도 있지. 무릇 문장을 짓는 방법 역시도 이와 마찬가지일세. 그런데도 사람들은 개암, 밤, 벼를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기니 그대가 나를 위해 시비를 가려 주지 않겠는가?”
하였다. 내가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그에게 대답하기를,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는 말은 믿지 않을 수 없지만, 한(漢) 나라 때의 장수 이광(李廣)이 쏜 화살이 바위를 뚫고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끝내 의문을 남긴다네. 왜냐하면 꿈이라는 것은 직접 보기 어려운 것이고, 반면에 실제로 눈앞에 일어난 일은 징험하기가 쉽기 때문이지. 그런데 지금 그대는 일상생활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조사하고 사회의 구석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수집하였으므로, 평범한 남녀들의 가벼운 웃음거리와 일상적인 생활사들이 어느 것 하나 눈앞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이 없으니, 눈이 시도록 보고 귀로 실컷 들어서 성단용노(城旦庸奴)라도 그렇다고 여기는 것들이네. 그렇기는 하지만 묵은 장(醬)이라도 그릇을 바꾸어 담으면 입맛이 새로워지듯, 늘 보던 것도 장소가 달라지면 마음과 보는 눈이 모두 달라지는 법이지.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은 굳이 소천암이 어떤 사람인지, 민요가 어느 지방의 것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이 책만 보면 바야흐로 알 수가 있으이. 이 책에다 운(韻)을 달아 연독(聯讀)하면 백성들의 성정(性情)을 논할 수 있고, 계보에 따라 그림을 그리면 그 대상의 수염과 눈썹까지도 검증할 수가 있을 것이네.
재래도인(䏁睞道人)이 일찍이 말하기를, ‘석양 아래 작은 돛단배가 갈대숲 속에 살짝 가리워지니, 사공과 어부가 모두 텁수룩한 수염에 구레나룻이 험상궂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저 건너 물가에서 바라보면 그들이 곧 고사(高士) 육노망(陸魯望) 선생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하였으니, 아아, 도인(道人)이 이러한 생각을 나보다 먼저 해버렸네그려. 그러니 그대는 도인을 스승으로 섬겨야 하겠네. 찾아가서 징험해 보도록 하게나.”
하였다.
[주D-001]문에 …… 모습 : 원문은 ‘肩媚’인데, 견미란 ‘협첨(脅諂)’과 같은 말로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몸을 움츠리고 억지웃음 짓는 것이 여름철 밭일하기보다 괴롭다.〔脅肩諂笑 病于夏畦〕”고 하였다. ‘협견첨소(脅肩諂笑)’는 소인배가 권세가 앞에서 아첨하는 태도를 말한다.
[주D-002]손뼉을 …… 모습 : 원문은 ‘掌誓’로 민간에서 맹세할 때 손뼉을 쳐서 신용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격장위서(擊掌爲誓)’라 한다.
[주D-003]이광(李廣)이 …… 이야기 : 이광이 사냥을 나갔다가 풀 속에 있는 바위를 호랑이인 줄 알고 힘껏 쏘았더니 화살이 바위를 뚫고 들어갔으나, 바위인 줄 알고 난 뒤 다시 쏘았을 때는 끝내 화살이 바위를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
[주D-004]성단용노(城旦庸奴) : 도형(徒刑)을 사는 무식한 자이다. 원문에서는 조선 태조(太祖)의 이름자 단(旦)을 휘하여 ‘城朝庸奴’라 하였다.
[주D-005]이 책에다 …… 있고 : 이 책의 내용을 소재로 시를 지으면 이를 통해 백성들의 심성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주D-006]재래도인(䏁睞道人) : 재래도인은 귀머거리에다 사팔뜨기를 겸한 도인이란 뜻으로 이덕무의 호의 하나이다. ‘䏁䚅道人’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재래도인이 했다는 말은 《청장관전서》 권63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 나오는 말과 거의 똑같다.
[주D-007]육노망(陸魯望) : 당 나라 때의 인물로 이름은 귀몽(龜蒙),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이며, 노망(魯望)은 그의 자이다. 강호에서 노닐기를 좋아하였으며, 조정에서 고사(高士)로서 초빙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염재기(念齋記)
송욱(宋旭)이 술에 취해 쓰러져 자다가 해가 떠올라서야 겨우 잠에서 깨었다. 누워서 들으니, 솔개가 울고 까치가 지저귀며, 수레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시끄러우며, 울 밑에서는 절구 소리가 나고 부엌에서는 그릇 씻는 소리가 나며, 늙은이의 부르는 소리와 어린애의 웃음소리, 남녀 종들의 꾸짖는 소리와 기침하는 소리 등 문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분별하지 못할 것이 없건만 유독 자신의 소리만은 들리지 않았다.
이에 몽롱한 가운데 중얼거리기를,
“집안 식구는 모두 다 있는데 나만 어찌하여 없는가?”
하며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저고리와 바지는 다 횃대에 놓여 있고 갓은 벽에 걸려 있고 띠는 횃대 끝에 걸려 있으며, 책들은 책상 위에 놓여 있고, 거문고는 뉘어져 있고 가야금은 세워져 있으며, 거미줄은 들보에 얽혀 있고, 쇠파리는 창문에 붙어 있다. 무릇 방 안의 물건치고 하나도 없는 것이 없는데 유독 자기만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급히 일어서서 제가 자던 곳을 살펴보니 베개를 남쪽으로 하여 요가 깔려 있으며 이불은 그 속이 드러나 있었다. 이에 ‘송욱이 미쳐서 발가벗은 몸으로 집을 나갔구나!’라고 생각하고는 매우 슬퍼하고 불쌍히 여겼다. 한편으로 나무라기도 하고 한편으론 비웃기도 하다가, 마침내 의관(衣冠)을 안고서 그에게 찾아가 옷을 입혀 주려고 온 길을 다 찾아다녔으나 송욱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성(城) 동쪽에 살고 있는 소경에게 가서 점을 쳐 보니, 소경이 점을 치며 말하기를,
“서산대사(西山大師)가 갓끈이 끊겨 염주가 흩어졌구나. 저 부엉이를 불러다가 헤아려 보게 하자꾸나.”
하고는 엽전을 던지자 동그란 것이 잘도 굴러가 문지방에 부딪쳐서야 멈추었다. 소경이 엽전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축하하기를,
“주인은 여행을 나가고 나그네는 여의(旅衣)가 없구나. 아홉을 잃고 하나만 남았으니 이레가 지나면 돌아오리라. 이 점사(占辭)가 크게 길(吉)하니 마땅히 과거에 장원급제하리라.”
하였다. 송욱이 크게 기뻐하여 매양 과거가 열려 선비를 시험할 때면 반드시 유건(儒巾)을 쓰고 응시를 하였는데, 그때마다 제 시권(試券)에다 비점(批點)을 치고 나서 큰 글씨로 높은 등수를 매겨 놓았다. 그래서 한양(漢陽)의 속담에 반드시 이뤄질 수 없는 일을 두고 ‘송욱의 과거 보기〔宋旭應試〕’라고 말한다.
식자들이 이 말을 듣고서 말하기를,
“미치긴 미쳤으나 역시 선비답구나. 이러한 행동은 과거에 응시하면서도 과거에 뜻을 두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계우(季雨)는 성격이 소탈하여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목청을 높여 노래하면서 스스로 ‘주성(酒聖)’이라고 호를 지었다. 세상에 겉으로는 씩씩한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을 보면 마치 자기 몸이 더렵혀지기나 한 듯 구역질을 하였다.
내가 그에게 장난삼아 말하기를,
“술에 취하고서 자신을 성인이라 일컫는 것은 ‘미친 것〔狂〕’을 숨긴 것이거니와, 그런데 심지어 취하지 않고서도 반성하지 않는다면 ‘큰 미치광이〔大狂〕’에 가깝지 않겠는가.”
하니, 계우가 수심에 잠겨 한동안 있다가,
“그대의 말이 옳소.”
하고는, 드디어 그 당(堂)의 이름을 ‘염재(念齋)’라 짓고 나에게 기(記)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송욱의 일을 써서 그를 권면하는 바이다. 저 송욱은 미치광이이기는 하지만 그 또한 스스로 노력한 자이다.
[주D-001]여의(旅衣) : 여행 도중 입을 옷, 즉 행장(行裝)을 말한다.
[주D-002]계우(季雨) : 성명은 미상(未詳)이다. 《연암집》 권5 여중관(與仲觀)에 백우(伯雨)의 동생으로 언급되어 있다. 연암 후손가 소장 필사본 《종북소선집(鍾北小選集)》에는 이 글의 제목이 염재당기(念哉堂記)로 되어 있으며, 그와 함께 ‘계우’가 ‘숙응(叔凝)’으로 되어 있다. 숙응은 연암의 친구인 신광온(申光蘊)의 아우 신광직(申光直 : 1738~1794)의 자(字)로, 그의 호가 또한 염재(念齋)였다. 신광직은 젊은 시절 연암뿐만 아니라 홍대용(洪大容)과도 절친하여 담헌서(湛軒書)에도 ‘여신염재부증박연암지원(與申念齋賦贈朴燕巖趾源)’ 등 신광직과 관련된 시문이 몇 편 있다. 김영진의 「조선 후기의 明淸小品 수용과 小品文의 전개 양상」(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2003) 참고.
[주D-003]세상에 …… 하였다 : 공자는 ‘겉으로는 씩씩한 체하면서 속으로는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을 남이 알까 두려워하며 몰래 벽을 뚫고 담을 넘는 도둑에 비겨 비판하였고, 《論語 陽貨》 백이(伯夷)는 시골 사람과 서 있을 적에 그가 관을 올바로 쓰고 있지 않으면 뒤도 안 보고 가 버리면서 ‘마치 자기 몸이 더럽혀지기나 할 듯이 여겼다.〔若將浼焉〕’고 하며, 《孟子 公孫丑上》 오릉중자(於陵仲子)는 어머니가 만들어 준 거위 요리를 먹고 난 뒤 그 거위가 바로 형에게 선물로 들어온 것이었음을 알게 되자 ‘나가서 구역질을 하였다.〔出而哇之〕’고 한다. 《孟子 滕文公下》
[주D-004]술에 …… 않겠는가 : 《서경(書經)》 다방(多方)에 “성인이라도 반성하지 않으면 광인이 되고, 광인이라도 반성할 줄 알면 성인이 된다.〔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고 하였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을 강조한 말이다. 본래 《서경》 다방에서의 ‘광인’은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송욱(宋旭)의 경우와 연계되어 쓰였으므로 ‘미치광이’로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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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재기(觀齋記)
을유년(1765, 영조 41) 가을에 나는 팔담(八潭)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마하연(摩訶衍)에 들어가서 준대사(俊大師)를 방문하였다. 그때 대사는 손가락으로 감중련(坎中連)을 하고서 눈으로는 코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자(童子)가 옆에서 화로를 헤치고 향(香)을 피우는데, 그 연기가 둥글게 피어올라 머리털을 묶은 듯 버섯이 돋아난 듯 방 안에 자욱하였다. 연기는 붙들지 않아도 곧게 피어오르고 바람이 없어도 저절로 출렁이며, 너울너울 한들한들하며 장차 다함이 없을 듯싶었다. 동자가 갑자기 깨우침을 얻은 듯 웃음을 지으며,
“공덕(功德)이 충분히 쌓이면 움직임〔動轉〕은 바람으로 돌아가고, 나의 깨달음이 성취되면 한낱 향은 무지개로 화하리라.”
하니, 대사가 눈길을 돌리며 말하기를,
“얘야, 너는 향(香)을 맡았지만 나는 그 재를 보며, 너는 그 연기를 보고 좋아하지만 나는 그 공(空)을 본다. 동정(動靜)이 이미 적멸했으니, 공덕(功德)을 어디에 베풀랴.”
하였다. 동자가 말하기를,
“감히 묻겠습니다. 무엇을 이른 말씀입니까?”
하니, 대사가,
“너는 시험 삼아 그 재를 맡아 보아라. 다시 무슨 냄새가 나느냐? 너는 그 공(空)을 보아라. 다시 무엇이 있느냐?”
하였다. 동자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기를,
“예전에 스승님께서 제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저에게 오계(五戒)를 내리셨고 저의 법명(法名)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름은 곧 내가 아니요, 나는 바로 저 공(空)이다.’ 하셨습니다. 공이란 곧 형체가 없는 것이니 이름이 있다 한들 장차 어디에다 쓰오리까. 청컨대 그 이름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하니, 대사가,
“너는 공순히 받아서 고이 보내라. 내가 60년 동안 세상을 보았는데 어떠한 사물이든 머물러 있는 것이 없이 모두가 도도하게 흘러간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 바퀴를 멈추지 않으니, 내일의 해는 오늘의 해가 아니다. 그러므로 ‘미리 헤아린다〔迎〕’는 것은 이치를 ‘거스르는〔逆〕’ 것이요, ‘붙잡는다〔挽〕’는 것은 ‘억지로 애쓰는〔勉〕’ 것이요, ‘보낸다〔遣〕’는 것은 ‘순응하는〔順〕’ 것이다. 너는 마음속에 머물러 두지 말고 기운이 막힘이 없도록 하라. 명(命)에 순응하여 명(命)으로써 나를 보고, 이(理)에 따라 보내어서 이(理)로써 사물을 보면, 흐르는 물이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는 곳에 있을 것이요 흰 구름이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나는 이때 턱을 고이고 옆에 앉아서 듣고 있었으나 진실로 아득한 기분이었다.
백오(伯五 서상수(徐常修))가 그의 대청을 ‘관재(觀齋)’라 이름 짓고 나에게 글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저 백오도 준대사의 설법을 들은 적이 있었던가. 드디어 그 말을 써서 기(記)를 짓는 바이다.
[주D-001]손가락으로 …… 있었다 : 손가락으로 감중련을 하고 있다는 것은 감괘(坎卦) 모양으로 소지(小指)를 대지(大指)와 맞닿게 한 인상(印相)을 말한다. 눈으로 코끝을 내려다보는 것은 조식법(調息法)의 일종이다.
[주D-002]동정(動靜) : 이본에는 ‘동전(動轉)’으로 되어 있다.
[주D-003]제 …… 내리셨고 : 계사(戒師)가 수행자의 정수리를 쓰다듬고 나서 계(戒)를 내려 주는 것을 말한다. 오계(五戒)란 살생 · 도적질 · 간음 · 망언 · 술을 금하는 계율이다.
[주D-004]미리 …… 것이요 : 거스를 ‘逆’ 자에 ‘迎’ 자와 같이 ‘맞이한다’는 뜻이 있음을 이용한 궤변이다. 단 여기서 ‘영(迎)’ 자는 ‘예측한다’는 뜻이다. 한편 ‘역(逆)’ 자에도 ‘미리’, ‘사전에’라는 뜻이 있다.
[주D-005]붙잡는다〔挽〕는 …… 것이요 : 이본에는 ‘挽’이 ‘留’로, ‘勉’이 ‘强’으로 되어 있다.
[주D-006]보낸다〔遣〕는 …… 것이다 : 이본에는 ‘遣’이 ‘送’으로 되어 있다.
[주D-007]관재(觀齋) : 이본에는 ‘관물(觀物)’로 되어 있으며, 따라서 글의 제목도 ‘관물헌기(觀物軒記)’로 되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선귤당기(蟬橘堂記)
영처자(嬰處子 이덕무(李德懋))가 당(堂)을 짓고서 그 이름을 선귤당(蟬橘堂)이라고 하였다. 그의 벗 중에 한 사람이 이렇게 비웃었다.
“그대는 왜 어지럽게도 호(號)가 많은가. 옛날에 열경(悅卿)이 부처 앞에서 참회를 하고 불법을 닦겠다고 크게 맹세를 하면서 속명(俗名)을 버리고 법호(法號)를 따를 것을 원하니, 대사(大師)가 손뼉을 치고 웃으면서 열경더러 이렇게 말을 했네.
‘심하도다, 너의 미혹됨이여. 너는 아직도 이름을 좋아하는구나. 중이란 육체가 마른 나무와 같으니 목비구(木比丘)라 부르고 마음이 식은 재와 같으니 회두타(灰頭陀)라 부르려무나.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이곳에서 이름은 있어 어디에 쓰겠느냐. 너는 네 육체를 돌아보아라. 이름이 어디에 붙어 있느냐? 너에게 육체가 있기에 그림자가 있다지만, 이름은 본래 그림자조차 없는 것이니 장차 무엇을 버리려 한단 말이냐? 네가 정수리를 만져 머리카락이 잡히니까 빗으로 빗은 것이지, 머리카락을 깎아 버린 이상 빗은 있어 무엇하겠느냐.
네가 장차 이름을 버리려고 한다지만, 이름은 옥이나 비단도 아니요 땅이나 집도 아니며, 금이나 주옥이나 돈도 아니요 밥이나 곡물도 아니며, 밥솥이나 가마솥도 아니요 큰 가마나 큰솥도 아니며, 광주리도 술잔도 아니요 곡식 담는 각종 제기(祭器)도 고기 담는 제기도 아니다. 차고 다니는 주머니나 칼이나 향낭(香囊)처럼 풀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비단 관복이나 학(鶴)을 수놓은 흉배(胸背), 서대(犀帶)나 어과(魚果)처럼 벗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양쪽 끝에 원앙(鴛鴦)을 수놓은 베개나 술이 달린 비단 장막처럼 남에게 팔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때나 먼지처럼 물로 씻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물까마귀 깃으로 토해 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부스럼이나 마른 딱지처럼 손톱으로 떼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네 이름이기는 하지만 너의 몸에 속한 것이 아니라 남의 입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남이 부르기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되고 영광스럽게도 치욕스럽게도 되며 귀하게도 천하게도 되니, 그로 인해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멋대로 생겨난다.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유혹을 받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공포에 떨기까지 한다. 이빨과 입술은 네 몸에 붙어 있는 것이지만 씹고 뱉는 것은 남에게 달려 있는 셈이니, 네 몸에 언제쯤 네 이름이 돌아올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저 바람 소리에 비유해 보자. 바람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인데 나무에 부딪침으로써 소리를 내게 되고 도리어 나무를 흔들어 댄다. 너는 일어나 나무를 살펴보아라. 나무가 가만히 있을 때 바람이 어디에 있더냐? 너의 몸에는 본시 이름이 없었으나 몸이 생겨남에 따라 이름이 생겨서 네 몸을 칭칭 감아 너를 겁박하고 억류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또 저 울리는 종에 비유해 보자. 북채를 멈추어도 그 소리는 울려 퍼진다. 그렇듯이 사람의 몸이 백 번 죽어도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것은 실체가 없으므로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이는 마치 매미의 허물이나 귤의 껍질과 같아서, 껍질이나 허물과 같은 외물에서 매미 소리를 찾거나 귤 향기를 맡으려 한다면 이는 껍질이나 허물이 저처럼 텅 비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네가 처음 태어나서 강보(襁褓)에서 응애응애 울 때에는 이러한 이름이 없었다. 부모가 아끼고 기뻐하여 상서로운 글자를 골라 이름을 지어 주고, 다시 더럽고 욕된 이름을 지어 주었으니, 이 모든 게 다 네가 잘 되기를 축원한 것이다. 너는 이때만 해도 부모에 딸린 몸이어서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성장하고 나서야 네 몸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고 ‘나’를 입신(立身)하고 나서는 ‘그’가 없을 수 없으니, ‘그’가 ‘나’에게 와서 짝이 되어 몸이 홀연 한 쌍이 되었다. 한 쌍의 몸이 잘 만나서 자녀를 두니 둘씩 짝을 이루는 것이 마치 《주역》의 팔괘와 같았다.
그리하여 몸이 이미 여럿이다 보니 거추장스럽게 되어 무거워 다닐 수가 없게 된다. 비록 명산(名山)이 있어 좋은 물에서 놀고 싶어도 이것 때문에 즐거움이 그치고 슬퍼하고 근심하게 되며, 사이좋은 친구들이 술상을 차려 부르면서 이 좋은 날을 즐기자고 말을 해도 부채를 들고 문을 나서다 도로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이 몸에 딸린 것을 생각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네 몸이 얽매이고 구속을 받는 것은 몸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이는 네 이름과 마찬가지여서, 어려서는 아명(兒名)이 있고 자라서는 관명(冠名)이 있으며, 덕(德)을 나타내기 위해 자(字)를 짓고 사는 곳에 호(號)를 짓는다. 어진 덕이 있으면 선생(先生)이란 호칭을 덧붙인다. 살아서는 높은 관작(官爵)으로 부르고 죽어서는 아름다운 시호(諡號)로 부른다. 이름이 이미 여럿이라 이처럼 무거우니 네 몸이 장차 그 이름을 감당해 낼지 모르겠다.’
이는 《대각무경(大覺無經)》에 나온 이야기일세. 열경(悅卿)은 은자(隱者)로서 이름이 아주 많아 다섯 살 적부터 호(號)가 있었지. 때문에 대사(大師)가 이로써 경계한 것이네.
갓난아기는 이름이 없으므로 영아(嬰兒)라 부르고 시집가지 않은 여자를 처자(處子)라고 하지. 따라서 영처(嬰處)라는 호는 대개 은사(隱士)가 이름을 두고 싶지 않을 때 쓴다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선귤(蟬橘)로써 자호(自號)를 하였으니 자네는 앞으로 그 이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일세. 왜냐하면 영아는 지극히 약한 것이고 처자란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어서, 사람들이 자네의 유약함을 보고는 여전히 이 호로써 부를 것이요, 매미 소리가 들리고 귤 향기까지 난다면 자네의 당(堂)은 앞으로 시장처럼 사람이 모이게 될 걸세.”
이에 영처자(嬰處子)가 말하기를,
“대사가 한 말과 같이, 매미가 허물을 벗어 그 허물이 말라붙고 귤이 시들어서 그 껍질이 텅 비어 버렸는데 어디에 소리와 빛과 내음과 맛이 있겠소? 이미 좋아할 만한 소리와 빛과 내음과 맛이 없는데 사람들이 장차 껍질이나 허물과 같은 외물에서 나를 찾겠소?”
하였다.
[주D-001]그대는 …… 많은가 : 이덕무는 젊은 시절에 삼호거사(三湖居士) · 경재(敬齋) · 팔분당(八分堂) · 선귤헌(蟬橘軒) · 정암(亭巖) · 을엄(乙广) · 형암(炯菴) · 영처(嬰處) · 감감자(憨憨子) · 범재거사(汎齋居士) 등의 호를 지녔다. 《靑莊館全書 卷3 嬰處文稿1 記號》 그 밖에 청음관(靑飮館) · 탑좌인(塔左人) · 재래도인(䏁睞道人) · 매탕(槑宕) · 단좌헌(端坐軒) · 주충어재(注蟲魚齋) · 학초목당(學草木堂) · 향초원(香草園) 등의 호가 있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호는 청장관(靑莊館)과 아정(雅亭)이다.
[주D-002]열경(悅卿) : 김시습(金時習)의 자이다. 김시습 역시 청한자(淸寒子) · 동봉(東峯) · 매월당(梅月堂) · 벽산청은(碧山淸隱) · 췌세옹(贅世翁) 등 호가 많았다.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주D-003]회두타(灰頭陀) : 두타(頭陀)는 범어(梵語)의 음역(音譯)으로 행각승(行脚僧)을 말한다.
[주D-004]어과(魚果) : 과(果)는 신표(信標)라는 뜻이다. 물고기 모양을 나무에 새기거나 구리로 빚어 허리띠에 차던 관리의 신표를 말한다. 어부(魚符) 또는 어패(魚佩)라고도 하였다.
[주D-005]몸이 …… 생겨서 : 원문은 ‘卽有是事 廼有是名’으로 되어 있으나 이본에 ‘卽有身故 乃有是名’으로 되어 있어 이본에 따라 번역하였다.
[주D-006]다시 …… 주었으니 : 유아 사망률이 높던 당시에 귀신이 데려가지 말라고 일부러 ‘개똥이’와 같은 천한 이름을 지어 불렀던 풍습을 말한다.
[주D-007]몸이 홀연 : 원문은 ‘遂忽’로 되어 있는데 뜻이 어색하다. 《종북소선》에 ‘身忽’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주D-008]한 쌍의 …… 만나서 :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혼의(昏義)에 “혼례란 장차 두 성씨가 잘 만나는 것〔婚禮者 將合二姓之好〕”이라 하였다.
[주D-009]둘씩 …… 같았다 : 자녀들이 차례로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팔괘가 음효(陰爻)와 양효(陽爻)의 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비유하였다. 이 구절이 ‘卽成四身’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아들과 딸을 두어 네 몸이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주D-010]몸이 …… 보니 : 원문은 ‘身之旣多’인데, ‘몸이 이미 넷이다 보니〔身之旣四〕’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11]이것 …… 그치고 : 원문은 ‘爲此艮兌’인데, 간괘(艮卦)는 그침〔止〕을 상징하고, 태괘(兌卦)는 즐거움〔說〕을 상징한다. 이 구절이 ‘이 네 몸 때문에〔爲此四身〕’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12]이 …… 생각하여 : 원문은 ‘爲此卦身’인데, ‘이 네 몸을 생각하여〔爲此四身〕’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13]몸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 원문은 ‘以多身故’인데, ‘몸이 넷이기 때문이다〔以四身故〕’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14]《대각무경(大覺無經)》 : 허구로 지어낸 불경 이름이다.
[주D-015]다섯 …… 있었지 : 김시습은 다섯 살 적에 세종 앞에서 시를 지어 명성을 떨쳤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오세(五歲)’라고 불렀다고 한다. 《梅月堂先生傳》 오세암(五歲菴)도 그의 당호(堂號)라는 설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애오려기(愛吾廬記)
정군 인산(鄭君仁山)이 자기가 거처하는 집을 ‘애오려(愛吾廬)’라 이름하고 하루는 나에게 기(記)를 청해 왔기에, 나는 인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사람이나 사물이 처음 생길 적에는 진실로 각자가 구별되지 않았다. 즉 남이나 나나 다 사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기를 들어 남과 마주 놓고서 ‘나’라 일컬으며 구분을 짓게 되었다. 이에 천하의 사람들이 비로소 분분히 일어나 자기를 말하고 일마다 ‘나’라 일컫게 되었으니, 이미 그 사심(私心)을 이겨 낼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까지 스스로 덧붙인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효경(孝經)》에서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감히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나’를 이미 ‘나’라고 할진댄, 지금 ‘나’의 터럭 하나를 잡아당긴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온몸이 편치 않을 것이다. 어찌 내 몸 전체를 들어 ‘나’라고 여긴 경우에만 그러하겠는가. 비록 가느다란 터럭 하나라도 다 ‘나’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요, 장차 사랑하지 않는 터럭이 없게 될 것이다.
아, 터럭 하나도 ‘나’라고 하여 이미 사랑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면, 나의 몸에서 겨우 터럭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대상이라도 실로 모른 척하고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제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 사람에게 이로움이 돌아간다 해도 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이미 자기의 터럭 하나를 천하보다 중하게 여기고 사랑하기를 지극히 두텁게 하니, 자기를 온전히 보호하여 아끼고자 생각하는 것이 어찌 지극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해(四海)가 지극히 넓다지만 장차 나의 터럭 하나도 잘 간수할 방법이 없을 터인즉, 또한 제 몸을 도외시함으로써 몸을 보존하는 자들이 있다. 그런데 저들은 제 몸을 도외시하여도 스스로를 보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나면, 자신을 사랑하기를 더욱 깊이 하고 근심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여, 심지어는 제 몸을 적멸(寂滅)하고자 하여 ‘나’라는 것을 가합(假合)으로 여기고 사랑을 원업(冤業)으로 여기며 삼강오륜을 끊어 버리고 삶을 보기를 원수 대하듯 한다. 따라서 저들은 제 한 몸의 ‘나’도 스스로 지닐 겨를이 없는데 하물며 터럭 하나의 ‘나’이랴. 그리되면 앞에서 말한 사랑하기를 ‘지극히 두텁게 한다’는 것이 도리어 천하에 지극히 박한 것이 되고 만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내 한 몸을 사유물로 여기고 자기를 사랑하기를 지나치게 하기 때문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사람은 제 몸을 골고루 사랑하니, 제 몸을 기르는 것도 골고루 하려 한다. 그러나 몸의 작은 부분으로써 큰 부분을 해치지 말고 천한 부분으로써 귀한 부분을 해치지 말라.” 하였다. 그러므로 왕응(王凝)의 아내는 도끼를 가져다가 자신의 팔목을 끊어서 그 몸을 깨끗이 하였던 것이다. 팔목이 이미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면, 그 대소(大小)와 귀천(貴賤)이 어찌 한 점의 살이나 한 올의 머리털에 비할 바이랴. 그런데도 장차 자기 몸에 오물이 묻을 듯이 여겨, 이를 악물고 잘라 내어 조금도 연연해하는 마음을 갖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팔목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기를 왕씨의 아내같이 한다면 이는 사랑할 바를 안다고 할 것이다.
[주D-001]제 …… 있다 : 맹자가 양자(楊子)에 대해 “ ‘나를 위함〔爲我〕’을 취하여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 사람에게 이로움이 돌아간다고 해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孟子 盡心上》
[주D-002]적멸(寂滅)하고자 하여 : 열반(涅槃)에 들게 하고자 한다는 뜻이다.
[주D-003]가합(假合) : 불교에서는 일체의 사물을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 사대(四大)가 잠시 합쳐져서 이루어진 가합지신(假合之身)이라 본다.
[주D-004]원업(冤業) : 악업(惡業), 즉 악한 결과를 받는 행동을 말한다.
[주D-005]하물며 …… 나이랴 : 중이 삭발하는 것을 풍자한 것이다.
[주D-006]전(傳)에 …… 하였다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서 맹자가 한 말이다. 몸에서 천하고 작은 부분이란 구복(口腹)을 가리키며, 귀하고 큰 부분은 심지(心志)를 가리킨다. 구복만을 기르는 자를 소인이요, 심지를 기르는 자를 대인이라 하였다.
[주D-007]왕응(王凝)의 …… 것이다 : 왕응이 타향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병으로 죽게 되자 그의 아내 이씨(李氏)가 어린 아들과 함께 유해를 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개봉(開封)에 들러 숙박을 하게 되었다. 이때 여관 주인이 그녀를 보고 수상하게 여겨 숙박을 거절하며 팔을 잡아당겨 끌어내자 이씨가 하늘을 보고 통곡하며 “내가 여자가 되어 수절하지도 못하고 다른 남자에게 손이 잡혔으니, 이 손 때문에 내 몸을 더럽힐 수 없다.” 하고는 도끼를 가져다 제 팔목을 끊어 버렸다. 《新五代史 卷54 雜傳》
[주D-008]장차 …… 여겨 : 백이(伯夷)는 관을 올바로 쓰고 있지 않은 시골 사람과 마주 서게 되면 뒤도 안 보고 가 버리면서 ‘장차 자기 몸에 오물이 묻을 듯이 여겼다.〔若將浼焉〕’ 한다. 《孟子 公孫丑上》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환성당기(喚醒堂記)
당(堂)의 액호(額號)를 ‘불러서 깨운다’는 뜻의 ‘환성당(喚醒堂)’으로 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주인옹(主人翁)이 손수 쓴 것이다. 주인옹은 누구인가? 서봉(西峰) 이공(李公)이다. 부르는 대상은 누구인가? 바로 자신을 부른 것이다. 무엇 때문에 불렀는가? 공은 평소에 경이직내(敬以直內)하고 잠깐 사이라도 주일무적(主一無適)하여, 언제나 삼가고 독실하여 하나의 공경할 ‘경(敬)’ 자로써 힘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온 세상 사람들이 무지몽매하여 취생몽사(醉生夢死)하니 어느 한 사람도 이러한 도리를 간파한 자가 없었으므로, 아무리 불러 보았자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였고 아무리 깨워 보았자 취기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에 기거하는 당에다 편액을 걸어서 좌우명(座右銘)으로 대신하고 아침저녁으로 스스로를 깨우치며 항상 볼 수 있게 하였으니, 어찌 옳은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공의 후손인 판서공(判書公)이 집을 짓고자 한 선조의 뜻을 잊지 아니하고 훌륭한 집을 이처럼 빛나게 지어 능히 선조의 미덕을 계승하였으니, 그 집안의 어진 자손이요 조상을 욕되게 아니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나는 이 당에 대하여 거듭 감회가 있다. 이른바 오래된 가문이라는 것은 거기에 교목(喬木)이 있다고 해서 이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대로 공신이 이어져 온 집에는 반드시 수백 년 된 교목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 그 정원을 두루 살펴보면, 늙은 나무가 우람하고 큰 가지 작은 가지가 새로 나서 울울창창하니, 이는 단지 비와 이슬만 먹고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만약에 나무를 배양하는 노고가 없었더라면 어찌 이처럼 무성할 수 있겠는가.
계속해서 이 당에 사는 후손이 진실로 거경(居敬)하여 몸가짐을 지켜가지 않는다면, 뜰을 뒤덮은 늙은 나무를 보고 왕씨(王氏)의 세 그루 홰나무에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를 힘써야 할진저.
[주D-001]서봉(西峰) 이공(李公) : 이시방(李時昉 : 1594~1660)의 호가 서봉(西峰)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아들이요 영의정을 지낸 이시백(李時白)의 아우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부친과 함께 가담하여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으며,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호란 · 병자호란 때에도 공로가 있었다.
[주D-002]경이직내(敬以直內)하고 …… 주일무적(主一無適)하여 : 《주역》 곤괘(坤卦)에 “군자는 경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의로써 행동을 바르게 한다.〔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고 하였다. 《논어》 학이(學而)에서 공자가 천승(千乘)의 제후국을 통치하는 방법으로서 “그 일을 공경하고 인민들에게 신임을 얻어야 한다.〔敬事而信〕”고 했는데, 주자(朱子)의 주(註)에 “경이란 주일무적을 이른 것이다.〔敬者 主一無適之謂〕”라고 하였다. ‘주일무적’은 정신을 한 가지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성리학에서 ‘경이직내’와 ‘주일무적’은 수양(修養) 방법을 나타내는 표어로 흔히 쓰였다.
[주D-003]판서공(判書公) : 연암과 교분이 있었으며 공조 판서 · 형조 판서를 지낸 이민보(李敏輔 : 1717~1799)가 아닌가 한다.
[주D-004]이른바 …… 마련이다 :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맹자가 제(齊) 나라 선왕(宣王)을 만나서 “이른바 오래된 나라라는 것은 거기에 교목이 있다고 해서 이르는 것은 아니다. 대대로 이어져 온 공신들이 있기에 그렇게 이르는 것이다.〔所謂故國者 非謂有喬木之謂也 有世臣謂之也〕”라고 하였다. 연암의 말은 맹자의 이 말을 조금 변형한 것이다.
[주D-005]거경(居敬) : 경으로써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거경궁리(居敬窮理)는 성리학에서 수양과 학문의 요체로 간주되었다.
[주D-006]왕씨(王氏)의 세 그루 홰나무 : 송(宋) 나라 때 왕우(王祐)가 뜰에다 홰나무 세 그루를 심어 놓고서, “내 자손 가운데 반드시 삼공(三公)이 나올 것이다.” 하였는데, 그 후에 아들 왕단(王旦)이 정승이 되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삼괴왕씨(三槐王氏)’라 하였다. 《宋史 卷282 王旦傳》 삼괴(三槐)는 주 나라 때 삼공이 천자에게 조회할 때 궁정 뜰의 세 그루 홰나무를 바라보고 서 있었으므로 ‘삼공’을 상징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취미루기(翠眉樓記)
해마다 연말에 사신이 북경에 들어가게 되면 사대부들이 역관을 시켜 당액(堂額)의 글씨를 받아 오게 하는데, 받아 온 글씨를 보면 언제나 박명(博明)의 글씨였다. 박명은 현재 기거주(起居注) 일강관(日講官)으로서, 진실로 당액의 글씨를 잘 썼다. 그런데 그 뒤에 박명의 다른 글씨를 여러 번 보게 되었는데, 필력(筆力)이 당액의 글씨에 비하여 크게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나는 속으로 이상하게 여겼다. 들리는 말로는 한 역관이 사물재(四勿齋)의 당액을 써 달라고 청하자 박명이 종이를 집어던지며 투덜대기를, “동방에는 호가 같은 자가 어찌 그리도 많으냐? 내 녹침필(綠沈筆)이 사물재를 쓰느라 다 닳아 버렸다.” 하더라는 것이었다.
박명은 조선 주고(主顧) 황씨(黃氏)의 사위인 까닭에 역관들이 박 기거(博起居)가 글씨를 잘 쓰는 줄 알게 되었을 것이며, 박명이 당액을 잘 썼던 것은 ‘사물(四勿)’이란 액호(額號)를 워낙 많이 썼기 때문일 것이다.
아, 우물에 빠진 모수(毛遂)와 좌중을 놀라게 한 진준(陳遵)도 똑같은 이름 때문에 오히려 당대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물며 호(號)란 것은 사람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거늘, ‘삼성(三省)’이니 ‘구용(九容)’이니 하며 가는 곳마다 다 그런 호들이고, ‘눌와(訥窩)’니 ‘묵재(黙齋)’니 하는 호들이 열에 서넛을 차지한다. 남산(南山) 밑에 사는 사람은 그 대청의 이름을 반드시 ‘공신(拱辰)’이라 짓고, 북촌(北村) 안에 사는 사람은 그 당(堂)의 이름을 모두 ‘유연(悠然)’이라 짓는다. 조금이라도 원림(園林)이 있어서 잠시나마 그윽한 운치를 맛볼 수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성시산림(城市山林)’이라 써서 걸어 놓고 있으니, 한 번은 있을 수 있지만 두 번은 지나친 것이다.
아, 경기의 남양(南陽)이나 황해도 황주(黃州)는 지명이 중국과 우연히 같은데도, 남양에는 반드시 와룡선생(臥龍先生 제갈량(諸葛亮))을 모신 사당을 두고 황주에는 기어이 죽루(竹樓)를 짓고 마는데, 이것은 실질을 흠모한 것인가, 아니면 그 이름만 흠모한 것인가?
내가 임진강을 지나다가 강가의 절벽을 바라보았더니, 깎아지른 암벽이 수십 리나 뻗어 있었고 단풍나무 잎이 한창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몇 사람의 길손과 함께 한참 동안 물길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정색을 하며 옷깃을 여미고 똑바로 앉더니,
“적벽(赤壁)은 예전 모습 그대로인데 다만 세월이 임술년이 아니요 기망(旣望)의 달도 없는 것이 한스럽구나.”
하기에, 내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지금부터 임술년을 기다리자면 내 나이 예순여섯 살 먹은 노인이 될 것이니, 가을 강의 찬 바람과 이슬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오. 게다가 그대는 소씨(蘇氏)가 아니요, 나 또한 그대의 노래에 화답하여 퉁소를 불지 못하니 이를 어찌하겠소?”
하고서, 서로 한바탕 웃은 일이 있었다.
이번에 이군 유일(李君有一)의 서루(書樓)에 올라가 보니, 누각이 남산 기슭에 있어 북으로는 백악산(白嶽山)을 바라보고 서로는 길마재〔鞍嶺 무악재〕를 마주하고 동으로는 낙산(駱山)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면이 확 틔어 있어 수많은 집들이 지상에 널려 있고 먼 봉우리들이 처마 위에 떠 있어 마치 미인의 눈썹처럼 아름다웠다. 누각의 이름을 ‘취미루(翠眉樓)’로 지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누각의 이름을 들은 사람들은 마치 미인의 안방 이름과 같다 하여, 괴이하다고 질책하는 등 뭇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하였다. 이군이 이러한 점을 답답하게 여겨 나에게 오해를 풀어 줄 것을 청하기에 나는 바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예로부터 임금에게 충성과 사랑을 바치는 자는 반드시 미인을 노래하며 그리워하였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저 미인이여, 서방 사람이로다.〔有美一人兮 西方之人兮〕’ 하였는데, 이 시를 설명하는 자가 말하기를, ‘서방의 미인은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다.’ 하였다. 굴원(屈原)과 경차(景差)의 일파도 미인을 노래하며 찬송한 시가 많았다. 지금 그대의 누각을 어찌 꼭 ‘취미루’라고 할 것이 있는가. ‘미인루(美人樓)’라 이름 지어도 무방할 것이다. 더구나 저 하늘가에 마치 그림과 같이 긴 눈썹이 검푸르게 드리워져 있으니, 시인이 노래를 지어 읊듯이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생각을 일으키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나는 그대가 남을 따라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요, 시문을 짓되 반드시 진부한 표현을 없애 버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나는 그대가 누각의 이름을 지은 것만으로도 이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족히 기록할 만하다.
[주D-001]박명(博明) : 호는 석재(晰齋) · 서재(西齋) 등이다. 몽골인으로, 원 세조(元世祖)의 후손으로 자칭하였다. 건륭(乾隆) 때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한림편수(翰林編修) 등을 거쳐 운남이서도(雲南迆西道)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을 지냈다. 저명한 고증학자 옹방강(翁方綱)과 동향(同鄕)이자 동문(同門)에다 동방(同榜)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조선 사행(使行)을 상대로 장사하여 치부한 북경 상인 황씨(黃氏) 집안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북경에 온 조선 인사들과 빈번하게 교유하였다. 장고(掌故)에 밝았으며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 《봉성쇄록(鳳城鎖錄)》 등이 있다.
[주D-002]사물재(四勿齋) : 사물(四勿)은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가 극기복례(克己復禮) 즉 인을 실천하는〔爲仁〕 조목을 묻는 안연에게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고 답한 것을 가리킨다.
[주D-003]녹침필(綠沈筆) : 대나무 붓대에 옻칠을 한 붓이다.
[주D-004]조선 주고(主顧) : 조선인을 단골 고객으로 삼은 상인을 말한다.
[주D-005]박 기거(博起居)가 …… 것이며 : 기거(起居)는 박명의 당시 직책인 기거주 일강관의 줄임말이다. 이본에는 이 구절의 첫머리에 ‘유독’이란 뜻의 ‘獨’ 자가 첨가되어 있다.
[주D-006]우물에 빠진 모수(毛遂) : 조(趙) 나라에 두 사람의 모수, 즉 평원군(平原君)의 식객(食客)으로 있는 모수와 야인(野人)인 모수가 있었다. 하루는 야인 모수가 우물에 빠져 죽었다. 식객 중에 한 사람이 이를 평원군에게 고하자, 평원군이 이 말을 듣고 “아, 하늘이 나를 버리셨도다.” 하며 탄식하였다. 《西京雜記 卷6》
[주D-007]좌중을 놀라게 한 진준(陳遵) : 진준은 전한(前漢) 말의 인물로 자는 맹공(孟公)이다. 당시에 열후(列侯) 가운데 진준과 성(姓)과 자(字)가 같은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진준이 남의 집을 방문할 때 언제나 진맹공(陳孟公)이 왔노라고 알렸다. 좌중이 깜짝 놀라 일어나 보면 그들이 생각했던 그 열후가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에 진준을 가리켜 ‘진경좌(陳驚座)’라고 불렀다. 《漢書 卷92 游俠傳 陳遵》
[주D-008]삼성(三省) : 《논어》 학이(學而)에서 증자(曾子)가 “나는 날마다 세 가지 조목에 비추어 자신을 반성한다.〔吾日三省吾身〕”고 하였다.
[주D-009]구용(九容) : 《예기》 옥조(玉藻)에 제시된 바 군자가 수신하고 처세할 때 지녀야 할 9종의 자용(姿容)으로, “발은 무겁고 손은 공손하며 눈은 단정하고 입은 다물며 목소리는 조용하고 머리는 곧게 세우며 기운은 엄숙하고 선 자세는 덕스러우며 낯빛은 씩씩하여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고 하였다.
[주D-010]눌와(訥窩) :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가 “군자는 말은 유창하지 못해도 실천은 민첩하고자 한다.〔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고 하였다.
[주D-011]묵재(黙齋) : 《논어》 술이(述而)에서 공자는 “말없이 마음에 새겨 두고, 배우되 싫증을 내지 않으며,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내게 무슨 힘든 일이랴.〔黙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라고 하였다.
[주D-012]공신(拱辰) : 《논어》 위정(爲政)에서 덕정(德政)이란 “비유컨대 제자리에 정지해 있는 북극성을 뭇별이 에워싸고 도는 것과 같다.〔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共之〕”고 하였다.
[주D-013]유연(悠然) : 도잠(陶潛)의 음주(飮酒) 시에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며,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고 하였다.
[주D-014]와룡선생(臥龍先生)을 모신 사당 :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에 “신은 본래 포의로서 남양에서 몸소 농사를 지었다.〔臣本布衣 躬耕於南陽〕”고 하였다. 이덕무(李德懋)의 ‘동짓날 내제(內弟)를 그리워함〔至日憶內弟〕’이란 시 제목 아래 주(註)에 “남양(南陽)에 와룡사(臥龍祠)가 있다.〔南陽有臥龍祠〕”고 하였다. 《靑莊館全書 卷2 嬰處詩稿》
[주D-015]죽루(竹樓) : 왕우칭(王禹稱)의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가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실려 있다. 왕우칭(954~1001)은 송 나라 진종(眞宗) 때 재상(宰相)과 불화하여 호북성(湖北省) 황주부(黃州府) 황강현(黃岡縣)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은 대나무의 명산지였으므로, 왕우칭은 대나무로 조촐한 누각 2칸을 짓고 나서 이 기를 지었다고 한다.
[주D-016]세월이 …… 것 :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가 “임술년 가을 7월 기망(旣望)에 내가 길손들과 함께 배를 띄워 적벽(赤壁)의 아래에서 노닐었다.〔壬戌之秋七月旣望 蘇子與客浮舟於赤壁之下〕”로 시작되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주D-017]나 …… 어찌하겠소 : 소동파의 적벽부에서 소동파가 술이 거나하여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니 “손님 중에 퉁소를 부는 사람이 있어 노래에 따라 화답을 하였다.〔客有吹洞簫者 依歌而和之〕”고 하였다.
[주D-018]이군 유일(李君有一) : 이유동(李儒東)으로, 자가 유일(有一)이고 호는 취미(翠眉)이다. 박제가(朴齊家)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요절하였다. 《貞蕤詩集 卷1 戱倣王漁洋歲暮懷人六十首幷小序, 卷2 四悼詩》
[주D-019]有美一人兮 : 영남대본 연암집에는 ‘彼美人兮’로 되어 있다. 《시경》 패풍(邶風) 간혜편(簡兮篇)에 의거하여 바로잡은 것으로 보인다.
[주D-020]경차(景差) : 전국(戰國) 시대 초(楚) 나라의 시인으로서, 굴원(屈原)의 뒤를 이어 송옥(宋玉), 당륵(唐勒)과 함께 사부(辭賦)를 잘 지었다.
[주D-021]긴 눈썹 : 당시(唐詩)에서 먼산〔遠山〕을 흔히 긴 눈썹〔脩眉〕에 비유하였다.
[주D-022]진부한 …… 사람 : 한유(韓愈)는 답이익서(答李翊書)에서 “오직 진부한 표현을 없애는 데 힘쓸 것〔惟陳言之務去〕”을 역설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이당(李唐)의 그림에 제(題)하다.
송(宋) 나라 도군황제(道君皇帝 휘종(徽宗)) 때에 하양현(河陽縣)의 삼성(三城) 사람 이당(李唐)이 있었는데, 자는 희고(晞古)이다. 화원(畵院)에 들어가 건염(建炎 남송 고종(高宗)의 연호. 1127~1130) 연간에 태위(太尉) 소연(邵淵)의 천거로 어지(御旨)에 따라 성충랑(成忠郞)과 화원대조(畵院待詔)를 제수받고 금대(金帶)를 하사받았다. 이때 나이가 80세였다. 산수화와 인물화를 잘 그렸으며 특히 소 그림을 잘 그렸다. 고종이 평소 그의 그림을 사랑하여 일찍이 그가 그린 장하강사도(長夏江寺圖)의 두루마리 첫머리에 제사(題辭)를 쓰기를, “이당은 당 나라 이사훈(李思訓)에 견줄 만하다.”고 하였다.
이 화첩이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은 만력(萬曆) 연간의 말기였는데 제사(題辭)로는 진인석(陳仁錫), 신용무(申用懋), 진계유(陳繼儒), 누견(婁堅), 요희맹(姚希孟), 동기창(董其昌), 문진맹(文震孟), 범윤림(范允臨), 설명익(薛明益), 진원소(陳元素) 등 여러 사람의 글씨가 있다.
설을 쇨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이 그림을 내놓은 것이니, 그 값은 오천 냥이다. 그러나 그 주인의 이름은 숨기고 있다. 아마도 기계 유씨(杞溪兪氏) 집안에서 나온 물건으로 보인다. 나는 가난하여 이것을 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므로 그 내력이나마 기록해 둔다.
만력후(萬曆後) 사갑오(四甲午 1774년) 섣달 그믐날 저녁 전의호동(典醫衚衕)에서 쓰다.
[주D-001]송(宋) 나라 …… 하였다 : 이 단락은 연암이 《도회보감(圖繪寶鑑)》 권4, 《식고당서화휘고(式古堂書畵彙考)》 권44에 있는 내용을 거의 그대로 전재(轉載)한 것이다. 이사훈(李思訓 : 651~716)은 당(唐) 나라 종실(宗室)로서 청록 산수화(靑綠山水畵)로 유명하였다.
[주D-002]진인석(陳仁錫) …… 진원소(陳元素) : 모두 명말(明末)의 저명한 문사요 서화가이다. 진인석은 숭정(崇禎) 때 남경국자좨주(南京國子祭酒)를 지냈다. 《明史 卷288》 신용무(申用懋)는 천개(天開) 때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를 지냈다. 《明史 卷218》 진계유(陳繼儒)는 동기창(董其昌 : 1555~1636)과 동향으로, 산중에 은거하면서 시사(詩詞)와 서화에 전념하였다. 《明史 卷298》 요희맹(姚希孟)은 숭정 때 남경소첨사(南京少詹事)를 지냈다. 《明史 卷216》 문진맹(文震孟)은 문징명(文徵明)의 증손으로, 숭정 때 예부좌시랑 겸 동각대학사(禮部左侍郞兼東閣大學士)를 지냈으며, 문징명에 못지않은 명필이었다. 《明史 卷251》 범윤림(范允臨)은 서화에 뛰어나 동기창과 제명(齊名)하였다. 설명익(薛明益)은 글씨에 뛰어나 ‘형산(衡山 : 문징명) 이후 제일인자’로 평가되었다. 진원소(陳元素)는 묵란(墨蘭)을 잘 그렸으며 글씨와 시에 뛰어났다.
[주D-003]전의호동(典醫衚衕) : 전의감동(典醫監洞)으로 종로구 견지동 일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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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엽기도(天山獵騎圖) 발문
엽기도(獵騎圖)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는 모두 다섯 축(軸)이 있는데, 진거중(陳居中)이 그린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
숲 밖에 구름 기운이 음침하게 덮은 것은 바로 눈이 내릴 기세요, 꼬리가 긴 하얀 새가 갈 곳이 없어 나뭇가지에 앉았는데 그 털과 깃이 더욱 하얗게 보이고, 그 새를 흘겨보며 화살을 뽑은 되놈의 눈알은 온통 흰자위만 보이며, 말 위에서 비파를 절묘하게 타는 여인의 손가락도 하얗다.
이 그림만 보아도 북방의 한기(寒氣)가 음침하게 몰려와 온 하늘이 곧 눈으로 가득해지리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주C-001]천산 : 중국 감숙성(甘肅省)과 청해성(靑海省) 경계에 있는 고산(高山)으로, 기련산(祁連山)이라고도 한다.
[주D-001]진거중(陳居中) : 남송(南宋) 때의 유명한 화가로 영종(寧宗) 초에 화원대조(畵院待詔)가 되었다. 《南宋院畵錄 卷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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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발문
도읍으로서 융성하기는 송(宋) 나라 도읍인 변경(汴京) 같은 데가 없고, 절기로서 화려하기는 청명(淸明) 같은 때가 없고, 화품(畵品)으로서 가장 섬세하기는 구영(仇英) 같은 사람이 없다.
이 두루마리 그림을 그리자면 10년 세월은 걸렸을 터이다. 이 두루마리 그림을 제외하고도 내가 본 것을 세어 보면 이미 일곱 종이나 된다.
십주(十洲)가 15세의 정년(丁年) 때부터 그리기 시작했다면 이것은 95세 때의 작품에 해당할 터인데, 그때까지도 두 눈이 어둡거나 백태가 끼지 않고 털끝만큼이나 섬세하게 그릴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림 속의 거리와 점포들은 어슴푸레하여 꿈결 같고, 콩알만 한 사람과 겨자씨 같은 말들은 소리쳐 불러야 할 만큼 가물가물하다. 그중 특히 거위를 몰고 가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세심하게 그렸다.
[주C-001]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 청명절(淸明節)에 변하(汴河)를 거슬러 오를 때 보이는 풍경을 그린 대작(大作)이다. 송 나라 때 장택단(張澤端)이 그렸다고 하는데, 원작은 전하지 않고 구영(仇英) 등 후대 화가들의 모방작만 전한다.
[주D-001]구영(仇英) : 명(明) 나라 때의 화가로서 자는 실보(實父), 호는 십주(十洲)이다. 산수화와 화조화를 주로 그렸으며 특히 인물화를 잘 그렸다. 심주(沈周), 문징명(文徵明), 당인(唐寅) 등과 함께 명대 4대가로 불린다.
[주D-002]정년(丁年) : 장정(壯丁)으로 간주되는 나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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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재(觀齋)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
이 두루마리 그림은 상고당(尙古堂) 김씨(金氏)의 소장으로서 구십주(仇十洲)의 진품이라 여기어 훗날 자신이 죽으면 무덤에 같이 묻히기로 다짐했던 것이다. 그런데 김씨가 병이 들자 다시 관재(觀齋 서상수(徐常修)) 서씨(徐氏)의 소장품이 되었다.
당연히 묘품(妙品)에 속한다. 아무리 세심한 사람이 열 번 이상 완상했더라도 매양 다시 그림을 펼쳐 보면 문득 빠뜨린 것을 다시 보게 된다. 절대로 오래 완상해서는 안 된다. 자못 눈을 버릴까 두려워서다.
김씨는 골동품이나 서화의 감상에 정밀하여, 절묘한 작품을 만나면 보는 대로 집안에 있는 자금을 다 털고, 전택(田宅)까지도 다 팔아서 보태었다. 이 때문에 국내의 진귀한 물건들은 모두 다 김씨에게로 돌아갔다.
그렇게 하자니 집안은 날로 더욱 가난해졌다. 노경에 이르러서는 하는 말이, “나는 이제 눈이 어두워졌으니 평생 눈에 갖다 바쳤던 것을 입에 갖다 바칠 수밖에 없다.” 하면서 물건들을 내놓았으나, 팔리는 값은 산 값의 10분의 2, 3도 되지 않았으며, 이도 이미 다 빠져 버린 상태라 이른바 ‘입에 갖다 바치는’ 것이라곤 모두 국물이나 가루음식뿐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주D-001]상고당(尙古堂) 김씨(金氏) : 상고당은 김광수(金光遂 : 1696~?)의 호이다. 이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의 아들로, 서화에 뛰어났으며 골동품 수집과 감정으로 명성이 높았다. 《연암집》 권3 필세설(筆洗說)에도 그에 관한 언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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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수재(日修齋)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
변경(汴京)이 전성기에는 40만 호가 되었는데 숭정(崇禎) 말기에 주왕(周王)이 변경을 지켰다.
틈장(闖將)으로 조조(曹操)라는 별호를 가진 나여재(羅汝才)가 세 차례나 쳐들어와 포위했으나, 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남녀들이 들끓어 식량과 병기를 어느 것 하나 성안에서 가져다 쓰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변경이 가장 오래 버티다 함락되었다.
바야흐로 포위된 지가 오래되다 보니, 양식이 다 떨어져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 되어 보리쌀 한 되의 값이 은(銀)으로 수천 수백 냥이나 되었고, 인삼(人蔘), 백출(白朮), 복령(茯苓) 등 모든 약재들도 다 먹어 없어지자, 수중의 물벼룩이나 뒷간의 지충(地蟲)까지도 다 보옥(寶玉)을 주고 사자 해도 살 수가 없었다.
급기야 황하가 터지고 성이 잠기게 되자 하룻밤 사이에 마침내 모든 곳이 늪지대가 되고 말았으며, 주왕부(周王府)에 있는 팔면 누각의 황금호로(黃金胡盧)가 겨우 그 꼭지만 보일 정도였다.
나는 매양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당시의 번화한 모습을 상상하였는데, 그림 속의 복전(複殿 복층의 궁전)과 주랑(周廊)과 층대(層臺)와 첩사(疊榭)를 보면, 주왕부의 황금호로 생각에 마음이 아프지 않은 적이 없었다.
[주D-001]주왕(周王) : 숭정 14년(1641) 주공효(朱恭枵)가 개봉(開封)의 왕, 즉 주왕으로 봉해졌다.
[주D-002]틈장(闖將) : 맹장(猛將)이라는 뜻으로, 이자성(李自成) · 장헌충(張獻忠) · 나여재(羅汝才) 등을 부르는 칭호로 쓰였다. 나여재는 장헌충을 좇아 도적이 되었다가 이자성에게 귀의하였다.
[주D-003]수중의 …… 지충(地蟲) : 물벼룩은 물고기의 사료로 쓰인다. 지충은 풍뎅이의 애벌레로 농작물을 해치는 땅속의 해충이다.
[주D-004]황금호로(黃金胡盧) : 호로(胡盧)는 곧 호리병박〔葫蘆〕으로, 누각 지붕의 중앙 정점(頂點)에 설치한 호리병박 모양의 장식물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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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湛軒)이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
나는 이 그림에 발문을 지은 것이 이미 여러 번이었다. 모두 다 십주(十洲) 구영(仇英)의 그림이라 일컫고 있으니, 어느 것이 진품이고 어느 것이 위조품인가?
중국의 강남(江南) 사람들은 교활하기 짝이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정에 어두우니, 이 두루마리 그림이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온 것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글씨는 왜 꼭 종요(鍾繇),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 유공권(柳公權)이라야 하며, 그림은 어찌 꼭 고개지(顧愷之), 육탐미(陸探微), 염입본(閻立本), 오도자(吳道子)라야 하며, 고정(古鼎)과 이기(彝器)는 어찌 꼭 오금(五金)으로 만든 선덕(宣德) 연간의 제품이라야만 하는가? 진품만 찾기 때문에 위조품이 수백 가지로 나오는 것이니, 비슷할수록 가짜가 많다.
융복사(隆福寺)나 옥하교(玉河橋)에 가면 손수 글씨나 그림을 그려 가지고 나와 파는 사람들이 있으니, 우아한지 속된지를 대충 가려서 사 두면 된다. 향로(香爐)로 말하면 건륭(乾隆) 연간의 제품이라도 모양이 고괴(古怪)하고 돈후(敦厚)한 것만 취한다면 북경 시장에서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주D-001]오금(五金)으로 …… 제품 : 명(明) 나라 선종(宣宗) 선덕 연간에 강서(江西) 경덕진(景德鎭)의 관요(官窯)에서 만든 제품으로, 금 · 은 · 구리 · 철 · 납을 사용한다. 특히 선덕로(宣德爐)라 하여 선덕 연간에 만든 향로(香爐)를 일품으로 친다. 《宣德鼎彛譜 卷1》
[주D-002]융복사(隆福寺)나 옥하교(玉河橋) :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 권1 성북내외(城北內外)에 의하면 융복사는 명 나라 경종(景宗) 때 창건한 큰 절이었으나 현재는 없어지고 북경 동성구(東城區)에 융복사가(隆福寺街)라는 지명으로만 남아 있다. 옥하교는 어하교(御河橋)라고 하며, 정양문(正陽門) 안 한림원(翰林院)과 조선관(朝鮮館 : 옥하관〈玉河館〉) 부근에 있었다. 연암의 《열하일기》 앙엽기(盎葉記) 및 알성퇴술(謁聖退述)에 이 두 곳에 관한 언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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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인(友人)의 국화시(菊花詩) 시축(詩軸)에 제(題)하다
꽃이란 들쑥날쑥 틀어지고 비스듬한 것이 도리어 정제(整齊)된 모습이 되는 것이니, 마치 진(晉) 나라 시대 사람의 글씨가 글자를 구차스레 배열하지 않고도 줄이 저절로 시원스레 곧은 것과 같다. 만약 노란 꽃 흰 꽃을 서로 마주 대하게 한다면 이는 곧 자연스러운 멋을 잃어버리고 만다.
담배를 피워 연기로 꽃을 질식시키지 말 것이며, 속인들이 함부로 평론하여 꽃을 기죽게 하지 말 것이며, 가끔 맑은 물을 살짝 뿜어 주어 꽃의 정신을 안정시키도록 하라.
[주D-001]마치 …… 같다 : 이와 거의 동일한 구절이 《연암집》 권5 답창애(答蒼厓) 여덟 번째 편지에 있다. 진(晉) 나라 사람은 왕희지(王羲之)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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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증 사헌부 지평 윤군(尹君) 묘갈명(墓碣銘)
효자의 휘(諱)는 관주(觀周)요, 자는 중빈(仲賓)으로, 칠원(漆原) 사람이다. 그의 7세조 율(霱)이 명 나라 도독(都督) 진린(陳璘)을 따라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순천(順天)에 머물렀는데, 도독이 본국으로 돌아가자 마침내 남쪽에 그대로 남아 자손들이 대대로 살게 되었다. 군(君)에 이르기까지 6세가 연달아 진사(進士)였다.
군은 효도로써 고을에 알려졌으며, 계모를 섬김에 있어서도 효성이 지극하였다. 군이 죽은 후 고을의 선비들이 이러한 사실을 글로 적어 관찰사에게 올리려고 하였는데, 그 글 속에는 말하기 어려운 내용이 들어 있었다. 군의 맏아들 모(某)가 또한 효도로써 알려졌는데, 그가 길에까지 쫓아 나와서 그 글을 빼앗아 구기고 울면서 말하기를,
“누가 우리 아버지를 효자라 해 달라던가?”
하니, 고을의 선비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향중(鄕中)에서 의논을 모으자 모두들 하는 말이,
“이 일은 효자의 자제들과는 관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차라리 그 선행을 아주 묻어 버릴지언정 효자의 마음을 슬프게 해서야 되겠는가. 더더구나 죽은 자의 마음까지 슬프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그 글을 고쳐서 말하기 어려운 사실은 없애 버리고 그 내용을 심오하게 표현하여 관찰사에게 바치니, 관찰사가 그의 효를 살펴보았으나 증빙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내버려 두고 조정에 아뢰지 않았다.
그 후 관찰사가 세 번 바뀌고 나서야 비로소 장계(狀啓)를 올려 그 사안이 예조(禮曹)에 내려졌다. 그러나 예조에서도 효자가 어버이를 섬긴 시말을 보고한 글이 애매모호하여 그 내용이 드러나지 않는다 하여 역시 내버려 둔 채 임금에게 아뢰지 않았다. 이에 고을의 선비 14인이 도내 57개 고을 836인의 연명장을 가지고서 예조의 문 아래에 서서 큰 소리로,
“어버이를 위해서는 그 잘못을 숨겨 주는 법이요, 잘못한 점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어진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니, 우리 향당(鄕黨)에서의 정직함이란 의리상 서로 숨겨 주는 데에 있습니다.”
하고서 눈물을 흘리며 그 언사가 강개하니, 예관(禮官)이 “알겠다.”고 말하고는 그날로 즉시 아뢰어 효자로 정려(旌閭)하였다.
그 후 3년이 지나서 이 도를 안찰(按察)하는 어사(御史)가 장계를 올려, 사헌부 지평에 추증하였다.
묘는 군 소재지 남쪽 10리 지점 곤좌(坤坐)의 묘역에 있다. 세 아들 모(某), 모(某), 모(某)를 두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효자란 외쳐댄다고 해서 만들어지겠는가? / 孝可聲
외쳐대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 如可聲也
크게 탄식하며 명을 썼으리라. / 太息而銘
[주D-001]이 일은 …… 일이다 : ‘이 일’이란 효자로 표창해 줄 것을 상소하는 일을 가리킨다. 《연암집》 권10 박 열부 사장(朴烈婦事狀)에서, 순절한 박씨를 열녀로 표창해 주도록 건의하려는 것을 박씨의 아버지가 만류하자, 동네 사람들은 “이 일은 친정집과는 관계없는 일이오.〔是無與於本家〕”라고 하면서 예조에 글을 올린 내용이 나온다.
[주D-002]어버이를 …… 있습니다 : ‘어버이를 위해서는 그 잘못을 숨겨 준다〔爲親者諱〕’는 것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민공(閔公) 원년(元年) 조에 나오는 말이다. ‘잘못한 점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어진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觀過知仁〕’는 것은 《논어》 이인(里仁)에 출처를 둔 고사성어이다. 또한 《논어》 자로(子路)에서 아비가 양을 훔친 사실을 증언한 아들을 정직하다고 칭찬한 섭공(葉公)에 대해 공자는 “우리 향당의 정직한 사람은 이와 다릅니다. 아비는 아들의 잘못을 숨겨 주고, 아들은 아비의 잘못을 숨겨 주나니, 정직은 바로 그러한 가운데 있습니다.〔吾黨之直者 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라고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양 호군(梁護軍) 묘갈명
내가 연암협(燕巖峽)에 집을 짓고 장차 가서 살 요량으로 자주 개성(開城)을 내왕하게 됨에 따라 남원 양씨(南原梁氏)의 집에 기거하게 되었다. 양씨는 예전부터 내려오는 대갓집이라 어질고 호방한 장자(長者)들이 많이 출입하였다. 그 자제를 따라 숭산(崧山 송악산) 남쪽 계곡 사이에서 노닐었는데, 연못과 누대가 맑고 그윽하였으며 숲 속의 나무들이 모두 아름드리였다. 서로 함께 술을 마시면서, 좌우를 돌아보며 즐기고 있을 때 그중에 호맹(浩孟)이란 사람이 탄식하며,
“그대는 미처 나의 백부(伯父)와 함께 노닐어 보지 못했지요. 백부께서는 좋은 술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빈객(賓客)을 좋아했습니다.”
하였다. 얼마 후 그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청하기를,
“우리 백부는 괴걸(魁傑)한 인물이니, 그대가 묘갈명을 지어 주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행장을 살펴보니, 군의 휘는 제영(濟泳)이요, 자는 군섭(君涉)이다. 증조는 부신(敷信)이니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조부는 의섬(義暹)이니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고(考)의 휘는 지성(枝盛)이니 통덕랑(通德郞)을 지냈고 비(妣)는 남양 홍씨(南陽洪氏)이다.
군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양무 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이 되어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나이도 젊은 데다 재산도 풍부하여 호탕하게 행동하였으며, 마음속으로 ‘이제 훈신(勳臣)이 되었으니 족히 당세에 벼슬을 할 만하다.’ 여기고서, 의기양양하여 좋은 옷에 좋은 말을 타고 여러 조신(朝臣)들과 교유하였다. 여러 조신들도 어여삐 보고서 천거하고 위로하면서, 장차 쓸 만한 사람이라 지목하고 모두 자기 문하에서 출세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래 지날수록, 금품에 손발이 달린 듯 남몰래 오가며 벼슬자리에 샛길과 구멍이 많음을 알게 되자, 깊이 탄식하고 말하기를,
“나는 내 고향으로 가서 즐겨야겠다.”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정원과 집을 더욱 깨끗이 가꾸고 집안 살림은 모두 아우 일가에게 맡기고 관여하지 않았다. 날마다 향중의 부로(父老)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면서 즐겁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4세요, 계미년(1763) 12월 12일이었다.
효도와 우애에 독실하여 한 고을의 모범이 되었으며, 부모상을 당해서는 이미 늙어 머리가 하얀데도 예법을 지키기를 몹시 엄격히 하였다. 배위(配位)는 평산 이씨(平山李氏) 기숭(基崇)의 딸인데, 선영(先塋) 곤좌(坤坐)의 묘역에 합장하였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요절하고, 아우 제택(濟澤)의 아들 시맹(時孟)으로 대를 이었으나 그 역시 요절하였으므로 언맹(彦孟)의 아들 경헌(景憲)으로 뒤를 잇게 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농기구가 있다 해도 때를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네 / 鎡基不如待時
상관에게 잘 빌붙는 건 때를 잘 타는 것만 못하다거나 / 或曰巧宦不如乘時
짧은 인생 즐겁게 살 따름이니 / 或曰人生行樂耳
부귀하기를 언제 기다리랴 하기도 하네 / 須富貴何時
[주C-001]호군(護軍) : 조선 시대의 군사조직인 오위(五衛)의 정 4 품 벼슬. 실지로 맡아보는 일이 없는 산직(散職)이다.
[주D-001]서로 …… 마시면서 : 원문은 ‘相與飮酒’인데, ‘相與飮食’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02]양무 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 : 양무는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려 준 공신호(功臣號)이다.
[주D-003]훈신(勳臣)이 되었으니 : 원문은 ‘勳胥’로 ‘勳胥’란 본래 연기가 점차 퍼져 나가듯이 다른 사람의 죄에 연좌되는 것을 뜻하나 여기서는 양무 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이 된 사실을 고려하여 이와 달리 풀이하였다.
[주D-004]농기구가 …… 못하다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비록 지혜가 있다 해도 때를 잘 타는 것만 못하고, 비록 농기구가 있다 해도 때를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雖有知慧 不如乘勢 雖有鎡基 不如待時〕”는 제(齊) 나라의 속담을 인용하였다.
[주D-005]짧은 …… 기다리랴 : 한(漢) 나라 양운(楊惲)이 보손회종서(報孫會宗書)에서 한 말이다. 《文選 卷41》 《漢書 卷66 楊敞傳》 양운은 사마천(司馬遷)의 외손으로, 선제(宣帝) 때 그의 벗 손회종이 자중할 것을 충고하는 편지를 보내오자 이를 반박하는 답서를 보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취묵와(醉黙窩) 김군(金君) 묘갈명
내가 개성(開城)에 기거할 잠시 기거할 적에 그 고을 선비들의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누차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말없이 기억해 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용모가 단정하고 진중하여, 음악과 술잔이 오가는 사이에서도 종일토록 말과 행동이 항상 처음 온 때와 같아서, 마치 덕이 높은 귀인이 스스로 뽐내지 않아도 풍모가 중후하게 보이는 것과 같았다. 나는 그를 몹시 특이하다고 여기어 더불어 한참 동안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가 정주 김씨(貞州金氏) 진사(進士) 형백(亨百)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서서히 그에 대한 고을 사람들의 평가를 듣게 되었는데, 모두가 충후한 장자(長者)라는 칭송을 그에게 돌리며, “의(義)를 좋아하고 선행을 즐기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김공(金公)뿐이다.” 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그의 행장을 읽어 보니 그 말이 더욱 징험이 되었다. 지난날 내가 말없이 특이하게 여겼던 것과 고을 사람들의 칭찬하던 것이 모두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군(君)의 자(字)는 석여(錫汝)요, 정주(貞州)는 지금의 풍덕부(豊德府)에 해당한다. 휘(諱) 수(守)로부터 5세(世)를 내려오면 휘 대춘(大春)에 이르는데, 남달리 특출하고 거침없이 행동했으며 이름난 산수에 노닐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처사(處士)라 불렀다. 이분이 바로 군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는 휘가 승휘(承輝)이니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고, 조(祖)는 휘가 종엽(宗燁)이니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고(考)는 휘가 시광(始光)이니 무과로 발신하여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를 지냈으며, 비(妣)는 옥야 임씨(沃野林氏) 학생(學生) 흥량(興良)의 딸이다. 영종(英宗) 2년 병오년(1726) 3월 24일에 군을 낳았다.
군은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씩씩하여 보통 아이와 달랐으므로 사과군(司果君)이 특별히 사랑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는 식견과 도량이 남보다 뛰어나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
하고서, 드디어 바깥일을 물리치고 아들을 보살피기에 전심하였으며, 부부가 서로 타이르고 깨우치며 남에게 널리 베풀어 선행을 많이 쌓음으로써 아들을 위해 복을 쌓기를 지극히 하였다.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장성하자 이를 가슴 아파해도 어쩔 도리가 없어 제삿날이 오면 그때마다 안절부절못하였으며, 종신토록 어린아이처럼 사모하여 사랑하고 공경하기를 거의 고인이 살아서 나타난 듯이 하였다.
한 분 형, 세 분 누나와 함께 어머니 임씨를 섬겼다. 형이 죽자 슬퍼하기를 마치 아버지를 여읜 듯이 하여, 상사(喪事)에 정성과 예(禮)를 다했고 고아가 된 조카들과 과부가 된 형수를 따뜻하게 정성껏 돌보았으며, 가정을 자상히 보살피어 형이 살아 있을 때보다 도리어 재산이 더욱 불어나게 하였다.
어머니 임씨가 자기한테 와서 봉양을 받았는데, 성품이 자비로워서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셨다. 친족이나 이웃 사람들의 궁핍한 사정을 차마 보지 못하여, 좀 도와주었으면 하는 눈치가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보이면, 반드시 먼저 주선해 주되 한 번도 어려워하는 안색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얼마 후 어머니 상을 당하자, 상사(喪事)를 한결같이 예법에 따랐으며 순심(純心)으로 애모(哀慕)하여, 다른 일이나 쓸데없는 말로 그 마음을 저해하지 않았다.
누나들에게도 우애가 고루 지극하여, 살아 있을 때는 의식(衣食)을 함께 나누었고, 죽어서는 대신하여 그 소생 자손들을 어루만지고 가르치되, 마치 나무를 심고 북돋우듯, 벼의 모를 옮기고 물을 대듯이 하여, 기필코 자립시켜 성취가 있도록 만들었다.
가승(家乘)이 병란(兵亂)으로 불에 탔으므로 선대의 사적을 징험할 수 없을까 두려워하여 서둘러 족보를 만들었다. 이때 의심난 점은 빼 버리고 미더운 것만 전하였으며, 스스로 글을 지어 종족 간에 우의를 돈독히 할 것을 서술하였다. 선조 3대의 묘에 묘지(墓誌)가 없으므로, 행적과 계파(係派)를 삼가 기록하여 무덤 속에 넣어 먼 장래에 대비하였다. 족인(族人)으로 마땅히 신주(神主)를 받들어야 하는 자가 가난하여 집을 갖지 못한 경우에는 그를 위하여 집을 사고 살림살이를 마련하여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외가(外家)가 친척도 없고 가난하여 단지 현손(玄孫) 하나만 있었는데, 그가 아직 어렸으므로 데려다 집에서 양육하였고, 장성해서는 장가를 들이고 농토를 떼어 주어 그것으로 제사를 지내고 먹고살게 해 주었다. 선조를 추모하고 후손을 염려하는 지극한 정성이 모두 이와 같았다.
친구들의 상사(喪事)에 있어서는 인정과 능력에 알맞게 부의(賻儀)를 보내어 혹 관곽(棺槨)과 의금(衣衾)을 만들어 보내 주기도 하였으며, 가난한 일가로서 산골짜기에 들어와 생활하는 자에게는 혹 전답을 주기도 하였으며, 예전에 꿔 준 돈을 가난하여 갚지 못하는 자에게는 빚 문서를 돌려주기도 하였으며, 살림이 가난하여 시집이나 장가를 들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직접 아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반드시 도와주었으며, 농토나 농가를 가난한 사람들더러 경영하게 한 경우에는 대개 그 세를 가볍게 받아들였으므로 이에 힘입어 목숨을 부지해 가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그는 어린 시절에 이미 부지런히 공부를 하여 글을 배운 지 몇 년 사이에 사서(四書)를 두루 외웠으며, 경서(經書)를 연구하려고 뜻을 두었으나, 집안 살림을 주간할 사람이 없어 어머니 임씨에게 심려를 끼칠까 염려하여 마침내 학업을 중단하였으니, 이것이 종신의 한이 되었다.
그러나 분별력이 정확하고 무릇 다스리고 계획하는 데 탁월하여 보통 사람의 생각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일이 시비(是非)가 뒤섞여 여러 논란이 한창 분분할 경우에도 군이 천천히 한마디 말로써 분석해 내면 보는 사람들이 당초에는 긴가민가하다가, 그 일이 끝내는 그 말대로 들어맞고 나서야 모두들 놀라 탄복하였다.
평소에 집안의 남녀들은 숙연하면서도 화목하였으며 자제와 동복(僮僕)들까지도 아순(雅順)하고 각자 직분을 잘 알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군은 날마다 반드시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단정히 한 다음 앉아서 일을 보살폈다. 집에 손님들이 항상 가득하였으나 반드시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대접하였으며, 아래로 소작인이나 촌부들까지 뒤섞여 북적대면서 도와 달라고 서로 다투어도, 일마다 척척 처리하여 어느 것 하나 흡족하게 해결해 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사람들을 대할 때는 간격을 두지 아니하여 흉금을 터놓고 지냈으나, 유독 자신의 몸가짐에 대해서만은 엄격하여 향중(鄕中)의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고 관청에는 발조차 들이지 않았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서울에서 노닐었는데, 그때 교유한 사람들은 모두 신중한 장자(長者)들이었다. 그 영향으로 군은 종신토록 위태롭고 치욕이 될 만한 일은 가까이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더욱 관대하고 화락하며 편안하고 영화로웠다. 성곽을 두른 경치 좋은 땅에다 별장을 마련하니, 화단과 연못이 씻은 듯이 깨끗하고 나무들이 무성하게 늘어섰는데 그 속에서 날마다 유유자적하게 소요하였다.
일찍이 동으로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바닷가의 절경들을 유람하고, 서쪽으로 묘향산(妙香山)에 올라 비류수(沸流水 대동강의 지류인 비류강)를 굽어보는 등 옛사람의 발자취를 뒤밟아 가며 훌쩍 속세를 벗어날 뜻을 품었다.
병이 위독하자, 가족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당부하고는 편한 모습으로 눈을 감았으니, 이날이 기유년(1789) 7월 28일이요 향년 64세였다. 이해 9월 9일에 수우리(修隅里) 고산동(高山洞) 해좌(亥坐)의 묘역에 장사 지냈다.
배(配)는 화개 김씨(花開金氏) 학생(學生) 이태(麗兌)의 딸인데 3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재진(載晉)인데 진사(進士)요, 다음은 재해(載海)인데 일찍 죽었고, 다음은 재보(載普)인데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장녀는 김상육(金尙堉)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생원(生員) 이희조(李熙祖)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박상흠(朴尙欽)에게 출가했다.
재진은 우후(虞候) 상원(祥原) 최창우(崔昌祐)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으며, 재해는 문의(文義) 이춘교(李春喬)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딸을 낳았고 언교(彦敎)를 양자로 들였으며, 재보는 목천(木川) 마지광(馬之光)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언사(彦師)를 낳았는데 재진의 양자로 들어갔고, 딸 하나를 두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공직을 못 가졌으니 / 未嘗奉公
그 충성 어이 알며 / 焉知其忠
백성을 다스려 보지 못하였으니 / 未嘗莅民
그 어짊 어이 알리 / 焉知其仁
오직 효성과 우애는 / 惟孝友于
온갖 행실의 근원이라 / 實源百行
저 옥과 비단 같은 예물을 / 如彼玉帛
바치기에 앞서 공경을 갖추어야 하듯 / 未將也敬
못 써 보았다고 뭐가 슬프리 / 不試何傷
몸에 이기(利器) 지닌 것을 / 利器在躬
후손에게 경사(慶事) 있고말고 / 必有餘慶
선행을 쌓은 집 아니던가 / 積善之家
착한 사람 무덤이라 / 善人之藏
묘지에 심은 나무들까지 무성하도다 / 澤及松柞
이제 그 묘갈명을 새기어 / 我刻銘詩
천박해진 세상에 충고하노라 / 以勸衰薄
[주D-001]내가 …… 적에 : 원문은 ‘某嘗客松京’인데, 이본에는 ‘某嘗客遊松京’으로 되어 있다.
[주D-002]그때마다 안절부절못하였으며 : 원문은 ‘輒皇皇如’이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부모의 장례를 마친 뒤에는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마치 누군가 오기를 바라건만 오지 않는 것 같다.〔旣葬 皇皇如有望而弗至〕” 하였고,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공자는 석 달만 임금을 섬기지 못하면 안절부절못하였다.〔孔子三月無君 則皇皇如〕” 하였다.
[주D-003]사랑하고 …… 하였다 : 원문은 ‘庶幾著存’이다. 《예기》 제의(祭義)에 돌아가신 부모에 대해 “사랑을 바치기를 마치 살아 계신 듯이 하고, 정성을 다하기를 마치 감응(感應)하여 나타난 듯이 한다.〔致愛則存 致慤則著〕” 하였다.
[주D-004]아순(雅順)하고 …… 알아 : 원문은 ‘雅馴職職’인데, ‘職職’은 ‘識職’과 같다. 한유(韓愈)의 남양번소술묘지명(南陽樊紹述墓誌銘)에 “문자가 종순하여 각자 그 직분을 알았다.〔文從字順 各識職〕”고 하였다.
[주D-005]저 …… 하듯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예다 예다 하는데 옥과 비단을 이른 말이냐.〔禮云禮云 玉帛云乎〕”라고 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없이 예물을 바치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서도 “공경이란 예물을 바치기에 앞서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恭敬者 幣之未將者也〕”라고 하였다.
[주D-006]후손에게 …… 아니던가 : 《주역》 곤괘(坤卦)에 “선행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후손에게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고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운봉 현감(雲峯縣監) 최군(崔君) 묘갈명
군의 휘(諱)는 모(某)요 자(字)는 모(某)이니 양천 최씨(陽川崔氏)이다. 고려 때에 휘 모가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금천(衿川)에 식읍(食邑)을 하사받음으로써 자손이 그곳에 대대로 살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금천에 본관을 두게 되었는데, 뒤에 개성부(開城府)로 옮겨 갔다.
군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정교하고 날렵한 솜씨를 아무도 앞설 만한 사람이 없었다. 금상(今上 영조) 4년 무신년(1728)에 영남에서 역적이 크게 일어나 서쪽으로 올라오자 군은 스스로 관부(官府)에 나아가 장사(壯士)의 선발에 끼었는데, 화살을 활통에 꽂고 말에 가슴걸이를 갖추고 활을 메고서 칼을 쥐고 나가며,
“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났으면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
하였다. 역적이 평정되자 양무공신(揚武功臣)에 녹훈(錄勳)되어 철권(鐵券)을 하사받았으며, 19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部將)을 거쳐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에 올랐다.
상(上)이 만월대(滿月臺)에 거둥하여 보인 시험에 합격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고, 오위장(五衛將)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운봉 현감(雲峯縣監) 겸 영장(營將)이 되었다. 이때 운봉현과 그 속읍들에 크게 기근이 들고 역병(疫病)이 돌자 군이 한탄하며 말하기를,
“우리 고향이 관직 진출이 막힌 지가 오래되었다. 내가 이번에 성상의 후한 은덕을 입고서 병부(兵符)와 인끈을 차고 일산(日傘)을 덮고 오마(五馬)를 몰아 부임한 것은 우리 고향의 영광이 되겠으나, 이 나라 백성들을 하나라도 살리지 못한다면 우리 고향의 수치가 될 것이다.”
하고는 녹봉을 모두 털어서 구제하고, 그래도 부족하자 관할하는 다섯 고을에서 두루 빌려 와서 진휼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고자 힘썼다. 그리하여 해마다 풍년이 들었으며 병들어 죽는 백성이 없었다.
모년 모월 모일에 서울 집에서 죽으니 향년 71세였다. 모년 모월 모일에 모좌(某坐)의 묘역에 장사 지냈다.
고(考)의 휘(諱)는 모(某)이니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조(祖)의 휘는 모(某)이니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증조(曾祖)의 휘는 모(某)이니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모씨(某氏)이며 아들과 딸은 아래쪽에 기록되어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작은 곳간 큰 곳간 든든히 재어 놓고 / 窖廩囷倉固所藏
조금씩 골고루 나누어 주니 유사들은 착실했네 / 庾斛釜鍾有司良
운봉 현감으로 승진되었는데 재량을 잘못하여 / 升以雲峯失所量
쌀을 쌓아 놓고 썩혀 두면 우리 고향을 슬프게 하리 / 積久腐紅悲我鄕
자신은 크게 떨치지 못했어도 후손은 창성하리 / 不振厥躬留後昌
[주D-001]철권(鐵券) : 공신들의 후손들에게도 각종의 특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증명서를 말하며 ‘단서철권(丹書鐵券)’이라고도 한다.
[주D-002]우리 …… 오래되었다 : ‘우리 고향’이란 개성(開城)을 말한다. 조선 개국 이래 개성 사람들의 관직 진출이 오래도록 막혔었다.
[주D-003]우리 …… 것이다 : 원문은 ‘爲我鄕恥耶’인데, 이본에는 ‘爲我鄕洗恥耶’로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면, “우리 고향의 수치를 씻을 수 있겠는가.”이다.
[주D-004]조금씩 …… 착실했네 : 원문의 유(庾), 곡(斛), 부(釜), 종(鍾)은 모두 소량(少量)의 단위들이다. 《논어》 옹야(雍也)에서 공자는 제자 공서적(公西赤)이 제(齊) 나라에 사신으로 갈 적에 사치스러운 차림을 한 사실을 들어 그의 모친에게 부(釜 : 6두 4승) 아니면 유(庾 : 16두)의 식량만을 주도록 허락하면서, “군자는 급한 사람을 두루 돕지, 부자가 계속 여유 있도록 돕지는 않는다.〔君子周急 不繼富〕”고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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