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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성경잡지(盛京雜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성경잡지(盛京雜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성경잡지(盛京雜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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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성경잡지(盛京雜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성경잡지(盛京雜識)

 

성경잡지(盛京雜識) 7 10일 병술(丙戌)에 시작하여 14일 경인(庚寅)에 마쳤다. 모두 5일 동안이다. 십리하(十里河)로부터 소흑산(小黑山)에 이르기까지 모두 3 27리다.

 

1. 4년 경자(庚子) 가을 7 10일 병술(丙戌)

2. 11일 정해(丁亥)

3. 속재필담(粟齋筆談)

4. 상루필담(商樓筆談)

5. 12일 무자(戊子)

6. 고동록(古董錄)

7. 13일 기축(己丑)

8. 14일 경인(庚寅)

9. 성경가람기(盛京伽藍記)

10. 산천기략(山川記略)

 

 

 

4년 경자(庚子) 가을 7 10일 병술(丙戌)

 

 

비오다 곧 개었다.

십리하(十里河)에서 일찍 떠나 판교보(板橋堡) 5, 장성점(長盛店) 5, 사하보(沙河堡) 10, 폭교와자(暴交蛙子) 5, 전장보(氈匠堡) 5, 화소교(火燒橋) 3, 백탑보(白塔堡) 7, 도합 40리를 가고, 백탑보에서 점심 먹고 거기서 다시 일소대(一所臺) 5, 홍화포(紅火舖) 5, 혼하(渾河) 1, 배로 혼하를 건너서 심양(瀋陽)까지 9, 도합 20리이니, 이날은 60리를 갔다. 심양에서 묵었다.

이날은 몹시 더웠다. 멀리 요양성(遼陽省) 밖을 돌아보니 수풀이 아주 울창한데 새벽 까마귀 떼가 들 가운데 흩어져 날고 한 줄기 아침 연기가 하늘 가에 짙게 끼었는데다 붉은 해가 솟으며 아롱진 안개가 곱개 피어 오른다. 사방을 둘러본즉 넓디넓은 벌에 아무런 거칠 것이 없다. 아아, 이곳이 옛 영웅들이 수없이 싸우던 터전이구나. 범이 달리고 용이 날 제 높고 낮음은 내 마음에 달렸다는 옛말도 있겠지만, 그러나 천하의 안위(安危)는 늘 이 요양의 넓은 들에 달렸으니 이곳이 편안하면 천하의 풍진(風塵)이 자고, 이곳이 한번 시끄러워지면 천하의 싸움 북이 소란히 울려댄다. 이는 어인 까닭일까. 대개 평평한 벌과 넓은 들판이 한 눈에 천 리가 트인 이곳을 지키자니 힘들고, 버리자니 오랑캐가 쳐들어 오는데 아무런 방비할 계교가 없으므로 이곳은 중국으로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터전이어서, 비록 천하의 병력을 기울여서라도 이를 지킨 뒤에야 천하가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천하가 백년 동안이나 아무 일이 없음이 어찌 그들의 덕화와 정치가 전대(前代)보다 훨씬 뛰어난 때문이라 할 수 있으리오. 단지 이 심양은 본시 청()이 일어난 터전이어서 동으로 영고탑(寧古塔)과 맞물리고, 북으로 열하(熱河)를 끌어당기고, 남으로는 조선을 어루만지며 서로는 향하는 곳마다 감히 까딱하지 못하니, 그 근본을 튼튼히 다짐이 역대에 비하여 훨씬 낫기 때문일 것이다.

요양에 들어오면서부터 뽕나무와 삼밭이 우거지고, 닭 소리들이 끊이지 않는다. 이토록 백 년 동안이나 무사하긴 하나 청의 황제로서는 오히려 한낱 근심이 남아 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몽고(蒙古) 수레 수천 채가 벽돌을 싣고 심양에 들어오는데, 수레마다 소 세 마리가 끈다. 그 소는 흰 빛깔이 많으나 간혹 푸른 것도 있으며, 찌는 듯한 더위에 무거운 짐을 끌고 오느라고 코에서 피를 뿜는다. 몽고 사람들은 코가 우뚝하고 눈이 깊숙하며 험상궂고 날래고 사나운 품이 인간 같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옷과 벙거지가 남루하고 얼굴에는 땟국이 흐른다. 그런데도 버선은 꼭 신고 있다. 우리 하인배들이 알정강이로 다니는 것을 보곤 이상스럽게 여기는 모양이다. 우리의 말몰이꾼들은 해마다 몽고 사람을 봐 와서 그 성격을 잘 알므로 서로 희롱하면서 길을 간다. 채찍 끝으로 그들의 벙거지를 퉁겨서 길 곁에 버리기도 하고, 혹은 공처럼 차기도 한다. 그래도 몽고 사람들은 웃고, 성내지 않으며 두 손을 펴서 부드러운 말씨로 돌려 달라고 사정한다. 또 하인들이 뒤로 가서 그 벙거지를 벗겨 가지고 밭 가운데로 뛰어들어 가면서 짐짓 그들에게 쫓기는 체하다가 갑자기 몸을 돌이켜 그들의 허리를 안고 다리를 걸면 영락없이 넘어지고 만다. 그러면 그 가슴을 가로 타고 앉아서 입에 티끌을 넣으면, 뭇 되놈들이 수레를 멈추고 서서 모두들 웃으며, 밑에 깔렸던 자도 웃으며 일어나서 입을 닦고 벙거지를 털어서 쓰고는 다시 덤벼들지 않는다.

길에서 한 수레를 만났다. 사람 일곱을 태웠다. 모두 붉은 옷을 입었고 쇠사슬로 어깨와 등을 얽어 매어서 목덜미에다 채우고는 다시 한 끝은 손을 매고 한 끝은 다리를 묶었다. 이들은 금주위(錦州衛)의 도둑으로, 사형을 한 등 감하여 멀리 흑룡강(黑龍江) 수자리 지역으로 귀양보내는 것이라 한다. 그들의 입이나 눈의 생김새가 무서워 보인다. 그래도 수레 위에서 서로 웃고 떠들며 조금도 괴로워하는 빛이 보이지 않는다.

말 수백 필이 길을 휩쓸고 지나간다. 마지막 한 사람이 썩 좋은 말을 타고 손에 수숫대 한 가지를 쥐고 뒤에서 말 떼를 따라 간다. 말들은 굴레도 없고 고삐도 없이 다만 가끔 뒤를 돌아다 보면서 걸어 간다.

탑포(塔舖)에 이르렀다. 탑은 그 동리 한 가운데 있는데, 8 13층이고, 높이는 20여 길이나 된다. 층마다 둥근 문 네 개씩 틔어져 있다. 그 속으로 말을 타고 들어가서 우러러보니 홀연 현기증이 생기기에 고삐를 되돌려 나와 버렸다. 일행은 벌써 사관에 들었다. 뒤쫓아 후당으로 들어가니 주인의 수염 밑에서 갑자기 강아지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멈칫하니, 주인이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나에게 앉기를 청한다. 주인은 긴 수염이 희끗희끗한 늙은이로 방 안 나지막한 걸상에 오똑이 걸터앉았고, 방 밖에는 교의를 마주하여 한 할멈이 앉아 있다. 머리 위에 희붉은 촉규화(蜀葵花) 한 봉오리를 꽂았으며, 옷은 야청 빛깔에 복숭아꽃 무늬 놓은 치마를 입었다. 할멈의 품에서도 강아지 짓는 소리가 더욱 사납게 들린다. 그제사 주인이 천천히 가슴 속에서 삽살강아지 한 마리를 끄집어 낸다. 크기는 토끼만 한데, 눈처럼 흰 털은 길이가 한 치나 되고, 등은 담청색이고 눈은 노랗고 입 언저리는 붉으레하다. 노파도 옷자락을 헤치고 강아지 한 마리를 꺼내어 내게 보이는데, 털 빛은 똑같다. 노파가 웃으면서,

 

손님, 괴이하게 여기지 마셔요. 우리 영감할멈 둘이서 하는 일 없이 집안에 들앉았으려니 정말 긴긴 해를 지우기가 지루해서 이것들을 안고 놀리다가 도리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곤 하지요.”

한다. 나는,

 

주인 댁엔 자손이 없으신가요.”

하고 물은즉 주인은,

 

아들 셋, 손주 하나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올해 서른 하나에, 방금 성경장군(盛京將軍)을 모시는 장경(章京)으로 있으며, 둘째 놈은 열아홉 살이고, 막내는 열여섯 살인데 둘 다 서당에 가서 글 읽는답니다. 아홉 살 된 손주놈은 저 버드나무에서 매미 잡는다고 나가선 해가 지도록 보기조차 어려워요.”

한다. 얼마 안 되어서 주인의 어린 손자가 손에 웬 나팔을 쥐고 숨이 차서 후당으로 뛰어 들어 노인의 목을 끌어안고 나팔을 사 달라고 조른다. 노인은 얼굴 가득히 사랑겨운 빛을 띠면서,

 

이런 건 쓸데없어.”

하고 타이른다. 그 아이는 미목이 희맑게 생겼다. 살구빛 무늬 놓인 비단 저고리를 입었다. 갖은 재롱과 어리광을 다 떨면서 이리저리 뛴다. 노인이 손자더러 손님 뵙고 인사 드리라고 시킨다. 군뇌가 눈을 부르뜬 채 후당으로 쫓아 들어와서 그 나팔을 빼앗고 큰 소리로 야단을 친다. 노인이 일어나서,

 

미안합니다. 그 놈이 놀잇감으로 갖고 온 게요. 물건은 아무런 파손이 없습니다.”

하고 사과한다. 나도,

 

찾았으면 그만이지. 하필 이토록 야단을 쳐서 남을 무료하게 한단 말인가.”

하고 군뇌를 나무랐다. 나는 또,

 

이 개는 어디서 나는 것이오.”

물은즉, 주인은,

 

운남(雲南)서 나는 거랍니다. 촉중(蜀中사천(四川) 지방)에서도 이와 같은 강아지가 있지요. 이것의 이름은 옥토아(玉兎兒)이고, 저것은 설사자(雪獅子)라 부른답니다. 둘이 모두 운남 산이지요.”

하고 주인이 옥토아를 불러 인사하라 하니, 그 놈이 오똑히 서서 앞 발을 나란히 추켜들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다시 땅에 머리가 닿도록 조아리곤 한다.

장복이 와서 식사를 여쭙는다. 나는 곧 몸을 일으켰다. 주인은,

 

영감, 이미 이 미물을 귀여워하셨은즉 삼가 이걸 드리고자 합니다. 방물을 바치시고 돌아오시는 길에 영감께서 가져 가셔도 무방하옵죠.”

한다. 나는,

 

고맙소이다마는, 어찌 함부로 받으리까.”

하고 급히 돌아서 나왔다. 일행이 벌써 나팔을 불고 떠나려 했으나, 내가 간 곳을 몰라서 장복을 시켜 두루 찾아 다닌 것이다. 밥을 이미 지은 지 오래되어 굳어지고, 또 마음이 바빠서 목에 넘어가질 않기에 장복과 창대더러 나눠 먹으라 하고, 혼자서 음식점에 들어가서 국수 한 그릇, 소주 한 잔, 삶은 달걀 세 개, 참외 한 개를 사 먹고는 마흔두 닢을 헤어서 치르고 나니 상사의 행차가 문 앞을 막 지나간다. 곧 변군과 함께 고삐를 나란히 하여 길을 떠났다. 배가 잔뜩 불렀으므로 20리 길을 잘 갈 수 있었다. 해는 벌써 사시(巳時)가 가까워서 볕이 몹시 내려 쪼인다.

요양에서부터 길가에 버드나무를 수없이 많이 심어서 그 우거진 그늘에 더위를 잊을 만하다. 가끔 버드나무 밑에 물이 괴어서 웅덩이를 이루었으므로 이를 피하여 길 위로 둘러 나오면, 찌는 듯한 햇볕이 내려 쪼이고, 후끈거리는 흙 기운이 치올라서 삽시간에 가슴이 막힐 듯 갑갑해진다. 멀리 버들 그늘 밑을 바라본즉 수레와 말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다. 말을 재촉하여 그곳에 이르러서 잠깐 쉬기로 했다. 장사꾼 수백 명이 짐을 내리고 땀을 들이고 있다. 혹은 버드나무 그루에 걸터 앉아서 옷을 벗어놓고 부채질을 하며, 혹은 차를 마시고 술을 기울이며, 어떤 이는 머리를 감기도 하고 깎기도 하며, 더러는 골패도 치며, 또는 팔씨름도 한다. 짐 속에는 모두 그림 그린 자기가 있고, 또 껍질 벗긴 수숫대로 조그맣게 누각의 모양을 만들어서 그 속에는 각기 우는 벌레나 매미를 넣은 것이 여남은 짐이나 되며, 어떤 것은 항아리에 빨간 벌레와 파란 마름을 넣었는데, 빨간 벌레는 물 위에 둥둥 뜬 것이 마치 새우알처럼 작다. 이는 고기 밥으로 쓰인다. 수레 30여 채에 모두 석탄을 가득히 실었다. 술도 팔며, 차도 팔고, 떡과 과실 등 모든 음식을 파는 자가 모두 버들 그늘 밑에 걸상을 죽 늘어 놓고 앉아 있다. 나는 여섯푼으로 양매차(楊梅茶) 반 사발을 사서 목을 축이었다. 맛이 달고 신 것이 제호탕(醍醐湯)과 비슷하다.

태평거(太平車 청의 승용차의 한 가지) 한 채에 두 여인이 탔는데 나귀 한 마리가 끌고 간다. 나귀가 물통을 보자 수레를 끈 채 통으로 달려 든다. 그 여인 둘 중 하나는 늙고 하나는 젊었다. 앞을 가렸던 발을 걷고 바람을 쏘이고 있다. 둘 다 꾀꼬리 무늬 놓은 파란 웃옷에 주황 빛깔 치마를 입고, 옥잠화패랭이꽃석류화로 머리를 야단스럽게 꾸몄다. 아마 한녀(漢女)인 듯하다.

변군이 술을 마시자기에 각기 한 잔씩 기울였다. 곧 떠났다. 몇 리를 못 가서 멀리 군데군데에 불탑(佛塔)이 나타나서 훤히 눈에 든다. 아마 심양이 점점 가까워지는가보다.

 

어부가 손을 들어 강성이 여기매요 / 漁人爲指江城近

뱃머리에 솟은 탑이 볼수록 더 높아지네 / 一塔船頭看漸長

하는 옛 시가 문득 생각난다. 대개 그림을 모르는 이 치고 시를 아는 이가 없는 법이다. 그림에는 짙고 옅은 법이 있으며, 또는 멀고 가까운 자세가 있다. 이제 이 탑의 모양을 바라보니 더욱 옛사람이 시를 지을 때 반드시 저 그림 그리는 방법을 체득했으리라고 깨달은 것이 있다. 대개 성의 멀고 가까움을 탑의 길고 짧음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까닭이다.

혼하의 이름은 아리강(阿利江)이요, 또는 소요수(小遼水)라고도 부른다. 장백산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사하(沙河)와 합하고, 성경성(盛京城) 동남을 굽이쳐 흘러 태자하와 합하며, 또 서로 비끼어서 요하(遼河)와 합하여 삼차하(三叉河)가 되어 바다로 흐른다.

혼하를 건너 몇 리를 가서 토성이 있다. 그다지 높지 않고 성 밖에는 검은 소 수백 마리가 있는데, 그 빛깔이 아주 새까맣게 옷칠한 듯하다.  1백 경()이나 되는 큰 못이 있는데, 붉은 연꽃이 한창이고 그 속에는 거위와 오리 떼가 수없이 떠다닌다. 못가에는 백양(白羊) 천여 마리가 마침 물을 먹다가 사람을 보고 모두 머리를 쳐들고 섰다. 외곽의 문을 들어가니 성 안 인물의 번화함과 점포의 호화스러움이 요양보다 10배나 더하다.

관묘에 들어가 잠깐 쉬었다. 삼사(三使)는 관복을 모두 갖추었다. 한 노인이 있어 수화주(秀花紬)로 지은 홑적삼을 입고 민숭하니 벗어진 이마에, 땋은 뒷머리가 드리웠다. 내게 깊이 읍하면서,

 

수고하십니다.”

한다. 나도 손을 들어서 답례하였다. 노인이 내가 신고 있는 가죽신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 마치 그 만든 법을 상세히 알고자 하는 듯하므로 나는 곧 한 짝을 벗어서 보였다. 사당 안에서 갑자기 도사(道士) 한 사람이 뛰어나오는데 몸에는 야견사(野繭絲) 도포를 걸치고, 머리에는 등갓을 썼으며, 발에는 검은 공단 신을 신었다. 그는 갓을 벗고 상투를 어루만지면서,

 

이게 영감의 것과 똑같지 않습니까.”

한다. 노인은 자기 신을 벗고서 내 신을 바꿔 신어 보면서,

 

이 신은 무슨 가죽으로 만들었소이까.”

하고 묻는다. 내가,

 

나귀가죽으로 만든 겁니다.”

하니, 그는 또,

 

밑창은 무슨 가죽입니까.”

한다. 나는,

 

쇠가죽에 들기름을 먹여서 만든 것이라 흙탕을 디디어도 젖지 않는답니다.”

하고 답했다. 노인과 도사가 한 마디로 참 좋다고 칭찬하고 또,

 

이 신은 진 땅에는 편리하지만 마른 땅엔 발이 부르트지나 않을까요?”

하고 묻는다. 나는,

 

정말 그렇소.”

하고 답하였다. 노인이 나를 인도하여 사당 안 한 군데에 이르렀다. 도사가 손수 두 주발의 차를 따라서 각기 권한다. 노인이 제 성명을 복녕(福寧)이라 써 보인다. 그는 만주 사람으로 현재 성경 병부낭중(兵部郞中)의 벼슬에 있으며 나이는 63세이다. 성 밖에 피서 와서 큰 못에 연꽃이 한창 핀 것을 조용히 한 바퀴 둘러 보고 방금 돌아가는 길이라 한다. 그는 이어,

 

영감의 벼슬은 몇 품이오며, 연기(年紀)는 몇이시옵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나의 성명은 아무개요, 그저 선비의 몸으로 중국에 관광(觀光)하러 온 것이고 나이는 정사생(丁巳生)입니다.”

하고 답하였다. 그는 또,

 

그러면 월일과 생시(生時)?”

하기에 나는,

 

“2 5일 축시(丑時).”

했다. 그는,

 

그러면 하마경(蝦蟆更)이오.”

하기에, 나는,

 

아니오.”

했다. 복녕이 다시,

 

저 윗 자리에 앉으신 분은 지난해에도 오셨더랬죠. 내 그 때 서울서 막 내려오다가 옥전(玉田)서 며칠 동안 한 객사에서 묵은 일이 있습니다. 이는 아마 한림(翰林) 출신이죠.”

하고 묻는다. 나는,

 

한림이 아니라 부마도위(駙馬都尉). 나하고는 삼종 형제 사입니다.”

하고 답했다. 그가 또 부사와 서장관에 대한 일을 묻기에 각각 성명과 관품을 일러 주었다. 사행들이 옷을 갈아 입고 떠나려 한다. 나는 하직하고 일어섰다. 복녕이 앞으로 나와서 손을 잡고,

 

행차 보중(保重)하시오. 마침 쇠어 가는 더위가 점점 더하오니 날오이나 냉한 음료수를 부디 자시지 마시오. 우리 집은 서문 안 마장거리 남쪽에 있는데, 문 위엔 병부낭중이란 패가 있고, 또 금자로 계유문과(癸酉文科)라 써 붙였으니 찾기 쉬우리다. 영감은 언제쯤 오시게 되는지요.”

한다. 나는,

 

“9월 중에나 성경에 돌아오게 될 것 같소이다.”

한즉, 복녕은 또,

 

그 무렵에 긴급한 공무가 생기지 않는다면 반가이 맞이하오리다. 이미 당신의 사주(四柱)를 알았으니 조용히 추수(推數)해 두었다가 귀한 행차가 돌아오시길 기다리리다.”

한다. 그 어조가 정중하여 작별을 못내 서운해 하는 모양이다. 도사는 코 끝이 뾰족하고 눈동자가 똑바로 박혔으며 행동이 경박하여 전혀 은근한 맛이라곤 없다. 복녕은 사람됨이 기걸하고 원만하다.

삼사(三使)가 차례로 말을 타고 간다. 대개 문무관이 반()을 짜서 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성 둘레가 10리인데 벽돌로 여덟 문루를 쌓았다. 누는 모두 3층이며 옹성(甕城)을 쌓아서 보호했다. 좌우에는 또한 동서 두 대문이 있는데 네거리를 통하도록 돈대를 쌓고, 그 위에 3층으로 문루를 세웠다. 문루 밑에는 저절로 십자로가 트이었는데 수레바퀴는 서로 부딪히고 어깨가 서로 닿을 정도이다. 그 번화함이 바다 같다. 점방들은 한길을 사이에 두고 그림 그린 층집과 아로새긴 들창에다 붉은 간판 푸른 방()을 써 붙였으며, 가지 각색의 보화가 그 속에 가득하다. 점방을 보는 이들은 모두 희멀건 얼굴에 옷[] 차린 맵씨가 깨끗하다.

심양은 본시 우리나라 땅이다. 혹은 이르기를,

 

() 4군을 두었을 때에는 이곳이 낙랑의 군청[治所]이더니 원위(元魏)()() 때 고구려에 속했다.”

한다. 지금은 성경이라 일컫는다. 봉천 부윤(奉天府尹)이 백성을 다스리고 봉천 장군(奉天將軍)부도통(副都統)이 팔기(八旗)를 통할하며, 또한 승덕지현(承德知縣)이 있는데, 각부(各部)를 설치하고 좌이아문(佐貳衙門)을 두었다. 문 맞은편에 조장(照墻)이 있고 문 앞마다 옻칠한 나무를 어긋매끼로 세워서 난간을 만들었다. 장군부(將軍府) 앞에는 큰 패루(牌樓) 한 채가 서 있다. 길에서 그 지붕의 알록달록한 유리 기와를 바라보았다.

내원과 계함과 함께 행궁(行宮) 앞을 지나가다가 한 관인(官人)을 만났다. 그는 손에 짧은 채찍을 쥐고 매우 바쁜 걸음으로 간다. 내원의 마두(馬頭) 광록(光祿)이 관화(官話)를 잘하므로 관인을 쫓아가서 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니 그는 얼른 광록을 붙들어 일으키면서

 

큰 형님, 왜 이러시오. 편히 하시오.”

한다. 광록이 절하며 여쭙기를,

 

저는 조선 방자(幫子)이온데, 우리 상전께서 큰 임금님 계신 궁궐을 구경하시길 마치 하늘같이 높이 바라오니, 영감께서 이를 승낙하시겠습니까.”

한즉, 관인이 웃으면서,

 

그것, 어려울 것 없소. 날 따라 오시오.”

한다. 나는 곧 쫓아가서 인사를 하고자 했으나 그의 걸음이 나는 듯 빨라서 따라갈 수 없다. 길이 막다른 곳을 바라본즉 붉은 목책(木柵)을 둘렀는데, 관인이 그 속으로 들어가면서 돌아다 보고 채찍으로 한 군데를 가리키면서,

 

여기 좀 서서 기다리시오.”

하고 이내 몸을 돌이켜 어딘지 가버린다. 내원은,

 

이왕 들어가 보지 못할 바에는 여기 우두커니 서 있는 게 싱거운 노릇이야. 또 이렇게 겉으로 한 번 바라보았으면 그만이지.”

하고 곧 계함과 함께 술집으로 가버린다. 나는 다만 광록과 함께 목책 속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정문의 이름은 태청문(太淸門)이라 하였다. 마침내 그 문을 들어섰다. 광록의 말이,

 

아까 만났던 관인은 필시 수직장경(守直章京)일 겁니다. 지난해 하은군(河恩君)을 모시고 왔을 때도 두루 행궁을 구경했으나 아무도 막는 사람이 없었사오니 아주 마음 놓고 구경하시지요. 설사 사람을 만나더라도 쫓겨나기밖에 더하겠습니까.”

한다. 나는,

 

네 말이 옳다.”

하고 곧 걸어서 전전(前殿)에 이르렀다. 현판에 숭정전(崇政殿)이라 하였고, 또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이라는 현판도 붙어 있다. 왼편은 비룡각(飛龍閣), 오른편은 상봉각(翔鳳閣)이라 하였고, 그 뒤에는 3층 높은 다락이 있는데, 이름은 봉황루(鳳凰樓)이다. 좌우에 익문(翼門)이 있고 문 안에는 갑군(甲軍) 수십 명이 있어서 길을 막는다.

할 수 없이 문 밖에서 멀리 바라본즉, 높은 누각 겹전과 겹겹이 둘린 회랑들이 모두 오색 찬란한 유리 기와로 지붕을 이었다. 이층 8각 집을 대정전(大政殿)이라 하였고, 태청문 동쪽에는 신우궁(神祐宮)이라는 건물이 있어서 삼청(三淸)의 소상을 모셨는데, 강희 황제(康熙皇帝)의 어필로 소격(昭格), 옹정 황제(雍正皇帝)의 어필로 옥허진제(玉虛眞帝)라 써 붙였다.

도로 나와서 내원을 찾아 한 술집에 들렀다. ()에 금자로,

 

하늘 위엔 술별[酒星] 한알 번쩍번쩍 빛나고요 / 天上已多星一顆

인간 세상엔 부질없이 고을이름[酒泉]과 나란하네 / 人間空聞郡雙名

라고 썼다. 술집은 붉은 난간에, 파란 문, 하얀 벽에 그림 기둥인데, 시렁 위에는 층층이 똑 같은 놋 술통을 나란히 놓고 붉은 종이로 술 이름을 써 붙인 것이 이루 다 헤일 수 없이 많다.

조 주부(趙主簿) 학동(學東)이 마침 그 집에서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가 일어나 웃으면서 나를 맞아들인다. 방 안에는 50~60개의 훌륭한 걸상과 20~30개의 탁자가 놓였으며, 화분 수십 그루가 있는데 마침 저녁 물을 주고 있었다. 추해당수구화는 이제 한창으로 피었고, 다른 꽃들은 모두 처음 보는 것뿐이다.

조군이 불수로(佛手露 술 이름) 석 잔을 내게 권한다. 계함 등은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으나 모른다고 답한다.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에서 또 주부 조명회(趙明會)를 만나니 몹시 반가워하면서 어디 가서 함께 실컷 마시자는 것이다. 나는 몸을 돌이켜 방금 나온 술집을 가리켰다. 다시 저기로 가서 마시자는 의미이다. 조는,

 

반드시 저 집뿐만이 아니라 어디를 가더라도 다 그만큼은 하죠.”

한다. 이에 서로 손을 맞잡고 어떤 술집에 들었다. 그 웅장하고 화려함은 아까 그 집보다 훨씬 지나친다. 달걀부침 한 쟁반, 사괴공(史蒯公) 한 병을 사서 실컷 먹고 나왔다.

어떤 한 골동품 다루는 점포에 들렀다. 그 집 이름은 예속재(藝粟齋)이다. 수재(秀才) 다섯 사람이 동업하여 점포를 내고 있는데, 모두 나이가 젊고 얼굴이 아리따운 청년들이다.

다시 밤에 이 집을 찾아 이야기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상세한 이야기는 따로 속재필담(粟齋筆談)에 실었다.

또 한 점포에 들렀다. 이는 모두 먼 곳에서 온 선비들이 갓 개업한 비단점이었다. 집 이름은 가상루(歌商樓)이다. 모두 여섯 사람인데 의관의 차림이 깨끗하고 행동과 인상이 모두 단아하므로 또한 밤이 되면 예속재에 함께 모여서 이야기하기로 약속하였다.

형부(刑部 지금의 재판소) 앞을 지나니 아문이 활짝 열렸다. 문 앞에는 나무를 어긋지게 둘러쳐서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나는 스스로 외국 사람임을 믿고 거리낄 것이 없을뿐더러, 여러 아문 중에 오직 이 문만 열렸으므로 관부(官府)의 제도를 속속들이 봐 두리라 생각하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막는 이가 없었다.

한 관인이 대 위에서 걸상에 걸터앉았고 그 뒤에는 한 사람이 손에 지필을 든 채 모시고 섰다. 뜰 아래는 한 죄인이 꿇어앉았고, 그 좌우에는 한 쌍 사령이 대곤장을 짚고 섰다. 그러나 분부나 거행 등의 여러 가지 호통도 없이, 관인이 죄인을 마주보고 순순히 말을 따진다. 한참 만에 큰 소리로 치라고 호통하니, 그 사령이 손에 들었던 곤장을 던지고 죄인 앞으로 달려가서 손바닥으로 따귀를 네다섯 번 때리고 다시 전 자리에 돌아가서 막대를 들고 섰다. 다스리는 법이 아무리 간단하다기로니 따귀 때리는 형은 옛적에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저녁 뒤에 달빛을 따라 가상루에 들러서 여러 사람을 이끌고 함께 예속재에 이르렀다. 밤이 이슥하도록 이야기하다가 헤어지다.

 

 

[D-001]범이 …… 달렸다 : 후한서(後漢書) 하진전(何進傳)에 있는 말인데, 큰 권세를 홀로 잡았으며, 그 조종(操縱)은 나 한 사람에 있다는 것이다.

[D-002]()이 일어난 터전 : 청은 애초 무순(撫順)의 동쪽 흥경(興京)에서 일어나서 태조 천명(天命) 10년에 심양에 수도를 옮겼다.

[D-003]청의 황제 : ‘박영철본(朴榮喆本)’에는 청실(淸室)로 되었다.

[D-004]성경장군(盛京將軍) : 성경을 지키는 관원. 성경은 지금의 봉천(奉天).

[D-005]양매차(楊梅茶) : 소귀나무의 열매를 볶아서 만든 차.

[D-006]제호탕(醍醐湯) : 오매육(烏梅肉)백단향(白檀香)사인(砂仁)초과(草果) 등의 가루를 꿀에 넣어서 끓인 청량 음료.

[D-007]하마경(蝦蟆更) : 오경(五更). 주준도(周遵道)의 표은기담(豹隱紀談)에 나온다. “내루(內樓) 5경이 다하면 목탁과 북을 울리니 이를 하마경이라 한다.” 하였다.

[D-008]부마도위(駙馬都尉) : 임금의 사위인데, 일반적으로 부마라 하였다.

[D-009]옹성(甕城) : 큰 성 밖의 작은 성인데 혹은 월성(月城)이라 한다.

[D-010]원위(元魏) : 남북조 시대의 후위(後魏). 그의 성은 본시 척발(拓跋)이었으나 효원제(孝元帝)에 이르러서 원으로 고쳤으므로 원위라 일컬었다.

[D-011]조장(照墻) : 병문(屛門)의 담. ‘박영철본에는 향장(響牆)으로 되었다.

[D-012]패루(牌樓) : 우리나라 홑살문처럼 세우는 기념용 장식 건물.

[D-013]방자(幫子) : 지방 관아 하례(下隷)의 하나. 조선시대에는 방자(房子)로 통용함.

[D-014]하은군(河恩君) : 이광(李垙)의 봉호. 정조 원년에 진하사은진주겸동지행정사(進賀謝恩陳奏兼冬至行正使)가 되었다.

[D-015]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 : ‘박영철본에는 태정전(太政殿)으로 되었다.

[D-016]삼청(三淸) : 도교에서 말하는 세 신선(神仙). , 원시천존(元始天尊)태상도군(太上道君)태상노군(太上老君).

[D-017]옹정 황제(雍正皇帝) : 청의 5대 황제인 세종(世宗). 강희 황제의 아들.

[D-018]사괴공(史蒯公) : 술 이름. ‘박영철본에는 사국공(史國公)으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1일 정해(丁亥)

 

 

개었다. 몹시 덥다. 심양에서 묵다.

아침 일찍 성 안에 우레 같은 대포소리가 들린다. 대개 상점들이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 때면 으레 종이 딱총을 터뜨리는 버릇이라 한다.

급히 일어나 가상루로 가자 여러 사람이 또 모였다.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사관에 와서 아침을 먹고 다시 여러 사람들과 함께 거리 구경을 나섰다. 길에서 두 사람을 만났는데 서로 팔을 끼고 간다. 보아한즉 생김새들이 모두 수려하기에 그들이 혹시 글하는 사람인가 싶어서 그 앞에 가서 읍을 한즉, 둘이 팔을 풀고 답례를 아주 공손히 하고는 이내 약방으로 들어간다. 나도 뒤좇아 들어갔다. 둘은 빈랑(檳榔) 두 개를 사서 칼로 넷으로 쪼개어 나에게 한 쪽을 먹어보라 권하고 자기네도 씹어 먹는다. 내가 그들의 성명과 거주를 글로 써서 물은즉, 둘이 들여다보고 멍해 하는 품이 글을 모르는 듯싶다. 다만 길이 읍하고는 가버린다.

해마다 연경에서 심양의 여러 아문과 팔기(八旗)의 봉급을 지급하면 심양에서 다시 흥경(興京)선창(船廠)영고탑 등지로 나누어 보내는데 그 돈이 1 25만 냥이라 한다.

저녁에는 달빛이 더욱 밝다. 변계함에게 함께 가상루에 가자 하였더니, 변군이 부질없이 수역(首譯)에게 가도 좋으냐고 물었으므로 수역의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성경은 연경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함부로 밤에 나다닌단 말씀이오.”

하는 바람에 변군이 한풀 꺾이었다. 수역은 실로 어젯밤 우리 일을 모르는 모양이다. 만일 알게 되면 나도 붙잡힐까 두려워서 일부러 알리지 않고 홀로 빠져 나가면서 장복더러 혹시라도 나를 찾는 이가 있거든 뒷간에 간 것처럼 대답하라고 일러 두었다.

 

 

[D-001]빈랑(檳榔) : 한약의 일종으로 소화제로 씹기도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속재필담(粟齋筆談)

 

 

전사가(田仕可)의 자는 대경(代耕) 또는 보정(輔廷)이고, 호는 포관(抱關)이며, 무종(無終) 사람이다. 자기 말로, 전주(田疇)의 후손이며 집은 산해관(山海關)에 있는데, 태원(太原) 사람 양등(楊登)과 함께 이곳에 점포를 내었다 한다. 나이는 스물아홉이요, 키는 일곱 자이다. 넓은 이마와 갸름한 코에 풍채가 날렵하다. 그는 고기(古器)의 내력을 잘 알고 남에게 몹시 다정스러웠다.

이귀몽(李龜蒙)의 자는 동야(東野), 호는 인재(麟齋)이며, ()의 면죽(綿竹) 사람이다. 나이는 서른아홉이요, 키는 일곱 자이다. 입이 모나고 턱은 넓으며 얼굴은 분바른 듯 희고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여 금석을 울리는 듯싶다.

목춘(穆春)의 자는 수환(繡寰)이요, 호는 소정(韶亭)이며 촉 사람이다. 나이는 스물넷이요, 눈매가 그린 듯하나 글을 모르는 게 흠이다.

온백고(溫伯高)의 자는 목헌()이며 촉의 성도(成都) 사람이다. 나이는 서른하나인데 역시 까막눈이다.

오복(吳復)의 자는 천근(天根)이요, 항주(杭州) 사람이며, 호는 일재(一齋). 나이는 갓 마흔이요, 학문은 짧으나 사람은 얌전하다.

비치(費穉)의 자는 하탑(下榻)이요, 호는 포월루(抱月樓) 혹은 지주(芝洲) 또는 가재(稼齋)이며 대량(大梁) 사람이다. 나이는 서른다섯이요, 아들 여덟을 두었다. 그림을 잘 그리고 조각에도 능하며, 경의(經義)도 곧잘 이야기한다. 집이 가난한데도 남들을 잘 도와 주니, 이는 여러 아들을 위하여 복을 기르는 것이라 한다. 목수환(穆繡寰)온목헌(溫軒)을 위하여 회계를 보아줄 양으로 방금 촉에서 돌아온 것이라 한다.

배관(裴寬)의 자는 갈부(褐夫)이며 노룡현(盧龍縣) 사람이다. 나이는 마흔일곱이요, 키는 일곱 자 남짓 하고, 아름다운 수염에 술을 잘하고 문장에 능하여 나는 듯 빠르며, 너그러운 품이 장자의 풍도이다. 스스로 과정집(薖亭集) 두 권을 새기고 또 청매시화(靑梅詩話) 두 권을 지었다. 아내 두씨(杜氏)는 열아홉에 요절했다 한다. 임상헌집(臨湘軒集) 한 권이 있는데 내게 서문을 부탁하므로 써주었다.

그 다음 몇몇 사람들은 모두 녹록하여 적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게다가 목소정이나 온목헌과 같은 풍골도 없고 그저 장사치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틀 밤이나 함께 놀았으나 그 이름을 잊어버렸다.

내가 목소정을 보고,

 

저처럼 미목이 그림 같은 분으로서 젊어서 이렇게 멀리 고향을 떠나와 있음은 어인 까닭이오. 인재와 온공(溫公)과는 모두 같은 촉의 사람인즉 무슨 친척의 연줄이나 없으시오?”

하고 물은즉, 인재가,

 

그에겐 묻질 마십시오. 그의 얼굴은 비록 아름답긴 하나 마치 관옥(冠玉) 같아서 그 속엔 아무 것도 든 것이 없답니다.”

한다. 나는,

 

이건 비평이 너무 지나치지 않소.”

한즉, 인재는,

 

온형과 수환과는 종모(從母) 형제 사이지만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이다. 우리 세 사람이 배에다 서촉(西蜀) 비단을 싣고 병신년(丙申年 청의 건륭 41) 2월에 촉을 떠나, 삼협(三峽)을 거쳐 오중(吳中강소성(江蘇省)오현(吳縣))에 넘겨 버리고 장삿길을 좇아서 구외(口外)로 나와 이곳에 점포를 낸 지도 벌써 3년이랍니다.”

한다. 내 목춘을 못내 그리워하여 그와 더불어 필담(筆談)을 하고자 하였더니, 이생(李生 이귀몽)이 손을 저으면서,

 

목 저 두 분은 입으론 봉황새를 읊을 수 있으나 눈으론 시()와 해()를 분간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다. 나는.

 

그럴 리가 있나요.”

한즉, 배관이,

 

허튼 소리가 아니오. 귀에는 이유(二酉)의 많은 서적을 간직했으나 눈엔 하나의 고무래정() 자도 뵈지 않는답니다. 하늘에 글 모르는 신선은 없어도 인간 속세엔 말 잘하는 앵무새가 있다오.”

한다. 나는,

 

과연 그러할진댄 비록 진림(陳琳)으로 하여금 격문(檄文)을 쓰인대도 골치 앓는 것이 시원해지지 않겠소그려.”

한즉, 배관이,

 

아주 이것이 모두 유행(流行)이랍니다. ( 서한(西漢))이 육국(六國)을 세운 뒤에 문득 이 법이 그릇됨을 깨달았다 합니다. 이는 이른바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새나오는 학문이라는 것이니, 지금 향교(鄕校)나 서당(書堂)에서도 한갓 글을 읽기에만 힘쓸 뿐 강의(講義)는 하지 않으므로 귀로는 똑똑히 들으나 눈으로 보는 건 아득해서, 입으론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모두 술술 풀려 나오지만 손으로 글을 쓰려면 한 글자도 어려울 뿐이랍니다.”

한다. 이생이,

 

귀국에서는 어떠합니까.”

하기에, 나는,

 

책을 펴놓고 읽는 법을 가르치되 소리와 뜻을 함께 익힌답니다.”

한즉, 배생(裵生 배관(裵寬))이 거기에 관주(貫珠)를 치면서,

 

그 법이 정말 옳습니다.”

한다. 나는,

 

비공(費公 비치(費穉))은 언제 촉을 떠나셨습니까.”

하고 물은즉 비생(費生),

 

이른 봄이었습니다.”

한다. 내가,

 

촉에서 여기가 몇 리나 됩니까.”

한즉, 비는,

 

 5천여 리나 된답니다.”

한다. 나는,

 

비씨(費氏)의 여덟 용( 아들들을 지칭)은 모두 한 어머니가 낳으셨나요.”

하자, 비는 다만 빙그레 웃을 뿐이었고, 배생이,

 

아니어요. 소실 두 분이 좌우에서 도와 드렸답니다. 난 저 사람의 여덟 아들이 부러운 것보다 작은 마누라나 하룻밤 빌렸으면 그만이겠소.”

한다. 온 방안 사람들이 모두 한바탕 웃었다. 나는,

 

오실 때 검각(劒閣)의 잔도(棧道)를 지나셨나요.”

하고 곧 물은즉, 비는,

 

그랬죠. 참 좁디좁은 조도(鳥道) 일천 리(一千里), 하루에 열두 시간 줄곧 원숭이 소리뿐입디다그려.”

한다. 배생은,

 

참말, ()의 길은 배로 가나 뭍으로 가나 마찬가지로 어려워요. 이는 이른바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지요. 내가 요전 신묘년(辛卯年 청의 건륭 36)에 강을 거슬러 촉()으로 들어갈 제 74일 만에 겨우 백제성(白帝城)에 이르렀습니다. 배를 타니 때마침 늦은 봄철이이어서 양쪽 언덕에는 여러 가지 꽃이 한창으로 피었고, 쓸쓸한 다북 창 속의 나그네 외론 밤 길기도 한데 소쩍새 피를 뿜고, 원숭이 우지지며, 학이 울고, 매가 웃으니, 이것은 고요한 강물 위의 달 밝은 경치였고, 낭떠러지 위의 큰 바위가 무너져 강에 떨어지자 두 돌이 서로 부딪혀서 번갯불이 번쩍하고 일어나니 이것이 여름 장마 때의 경치입니다. 이 길을 걸어서 비록 황금덩이와 비단이 바리로 많이 생긴다손 치더라도 머리칼이 세고 가슴이 타는 이 고생을 어찌 하겠습니까.”

한다. 나는 또,

 

비록 고생하신 것은 그러하지만 저 육방옹(陸放翁 송대의 문호인 육유(陸游)의 호)의 입촉기(入蜀記)를 읽을 때면 미상불 흥겨워 춤이라도 너풀너풀 추고 싶던 걸요.”

한즉, 배생은,

 

무어, 꼭 그런 것도 아니에요.”

한다.

이날 밤에는 달이 낮처럼 밝았다. 전사가가 주식을 차리느라고 이경(二更)에야 겨우 돌아왔다. 불불(호떡의 일종) 두 소반, 양 곱창 곰국 한동이, 익힌 오리고기 한 소반, 닭찜 세 마리, 돼지 삶은 것 한 마리, 신선한 과실 두 쟁반, 임안주(臨安酒 중국 남방산 명주) 세 병, 계주주(薊州酒 중국 북방산 명주) 두 병, 잉어 한 마리, 백반(白飯) 두 냄비, 잡채(雜菜) 두 그릇이니, 돈으로 친다면 열두 냥어치나 된다. 전생(田生 전사가)이 앞으로 나와 공손히,

 

이 변변치 못한 걸 장만하느라고 오늘밤 선생님의 좋은 말씀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교의에서 내려서며,

 

이다지 수고하시니 꼿꼿이 앉아 받긴 황송합니다.”

한즉, 여러 사람들도 일어서면서,

 

귀하신 손님이 오셨는데 도리어 부끄럽습니다.”

한다. 이에 일제히 일어나서 다른 좌석(座席)으로 옮기고 이내 점방 문을 닫았다.

들보 위에 부채 모양의 사초롱[紗燈] 한 쌍을 달았는데, 겉에는 모두 꽃과 새를 그렸으며, 또 이름 있는 사람의 시구(詩句)도 적혀 있다. 그리고 네모난 유리등(琉璃燈) 한 쌍이 낮처럼 밝게 비친다.

여러 사람들이 각기 한두 잔씩 권하는데 닭이나 오리는 모두 주둥이도 발도 떼지 않았고, 양고기 국도 몹시 비려서 비위에 받지 않으므로 떡과 과실만 먹었다.

전생이 필담한 종이쪽을 두루두루 열람하고 연신,

 

좋아, 좋거든.”

하고 감탄한다. 그리고 그는 또,

 

선생께서 아까 저녁 전에 골동을 구하셨으면 하시더니, 어떤 진품(眞品)을 구하시렵니까?”

하기에, 나는,

 

비단 골동뿐만이 아니라 문방(文房)의 사우(四友)까지도 사고 싶습니다. 정말 희귀하고 고아(古雅)한 것이라면 값은 계교치 않으렵니다.”

하니, 전생은,

 

선생께서 이제 오래지 않아서 북경에 들르시면 유리창(琉璃廠) 같은 데도 들르실 테니 얻기 어렵지는 않으리다. 그러나 다만 그의 참과 거짓을 분간하기 어렵사오니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선생의 감상력이 어떠하신지요?”

한다. 나는,

 

궁벽한 바다 구석에 살고 있는 이 사람이라 감식이 고루하니, 어찌 진짜 가짜를 잘 분간할 줄 알겠습니까?”

하니, 전생은 또,

 

이곳은 말이 도회이지 중국에선 한 구석이었으므로, 모든 거래는 다만 몽고나 영고탑이나 또는 선창 등지에 의뢰할뿐더러, 변방의 풍습이 몹시 무디어서 아담한 취미를 갖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가지 신비스러운 빛깔이나 고아한 그릇조차 이곳에는 나온 일이 드물거늘, 하물며 은()의 그릇과 주()의 솥과 같은 것이야 어디서 볼 수 있겠습니까. 귀국에서 골동 다루는 식이 이곳과는 또 달라서 전에 그 장사하는 이들을 본즉, 비록 차[]와 약재 같은 따위라도 상품을 가리지 않고 값싼 것만 따지더군요. 그러고서야 무슨 진짜 가짜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차나 약재뿐만 아니라, 모든 기물이 무거우면 실어가기 어려우니까 대개 변문(邊門)에서 사가지고 돌아가더군요. 그러므로 북경 장사꾼들이 미리 내지(內地)에서 쓰지 못할 물건들을 변문으로 넘겨보내서 서로 속여서 이익을 취한답니다. 이제 선생께서는 구하시는 것이 속류(俗流)에서 훨씬 벗어난 것이고, 또 우연히 이 타향에서 서로 만나서 불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나머지 벌써 지기의 벗이 되었으니, 비록 정성을 다하여 물건을 드리진 못할망정 어찌 잠깐이라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한다. 나는,

 

선생의 이 말씀은 참으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이는 가히 이미 술로 취하게 하고 또 덕()으로써 배부르게 했다.’고 할 만하군요.”

하니, 전생은,

 

너무 지나치신 사랑이십니다. 내일 아침 다시 오셔서 점포에 있는 물건들을 죄다 구경하시죠.”

하니 배생은,

 

내일 아침 일을 미리 이야기할 것 있소. 다만 선생을 모시고 이 밤의 즐거움을 다하면 그만이죠.”

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옳소.”

한다. 전생은 또,

 

옛날 공자께서도 구이(九夷)의 땅에 살고 싶다.’ 하셨고,  군자(君子)가 그곳에 산다면 무엇이 야비함이 있겠느냐.’ 하셨은즉, 상공(相公)께서 비록 먼 나라에 계시오나 기우(氣宇)가 헌칠하시고, 또 글은 공()()의 끼치신 글을 통하시며, 예법에는 주공(周公)의 도()를 닦았사온즉 이는 곧 한 분의 군자이신데 다만 한스러운 것은 우리들이 먼 땅 다른 하늘 밑에 살고 있어서 서로 마음에 있는 것을 다 풀지 못한 채 만나자 곧 헤어지게 되니 이를 어이하오리이까.”

하니 이귀몽이 그 대목에다 수없이 동그라미를 치면서,

 

은근하고도 애처로움이 꼭 내 마음 같구려.”

하고 감탄한다. 술이 다시 두어 순배 돈 때에 이생이,

 

이 술 맛이 귀국의 것과 비교하여 어떠합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이 임안주는 너무 싱겁고, 계주주는 지나치게 향기로워서, 둘 다 술의 애초부터 지니고 있는 맑은 향기는 아니라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엔 법주(法酒)가 더러 있습니다.”

한즉, 전생은,

 

그러면 소주(燒酒)도 있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 있습니다.”

하고 답하였다. 전생이 곧 몸을 일으켜 벽장에서 비파를 끄내어 두어 곡조를 뜯었다. 나는,

 

옛날에도 연()()엔 슬피 노래부르는 이가 많다고 일컬었으니 여러분도 응당 노래를 잘 하시겠죠. 원하건대, 한 곡조 들려 주시지요.”

하니, 배생은,

 

잘 부르는 이가 없어요.”

하고, 이생은,

 

옛날에 이른바 연조의 슬픈 노래는 곧 궁벽하고도 작은 나라 선비로서 뜻 잃은 이들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이제야 사해가 한 집이 되고 성스러운 천자(天子)가 위에 계시오니, 사민(四民)이 업을 즐기어서 어진 이는 밝은 조정의 상서로운 인물이 되어, 임금과 신하가 노래를 창수(唱酬)하며, 어리석은 백성들은 강구(康衢)의 연월(煙月) 속에서 밭 갈고 우물 파며 노래 부르니 아무런 불평이 있을 리 없으니, 어찌 슬픈 노래가 있을 수 있겠나이까.”

한다. 나는,

 

성스러운 천자가 위에 계시면 나아가 섬김이 의당하올 것인데, 여러분으로 말하면 모두 당세의 영걸이시라 재주가 높고 학문이 넉넉하옵거늘, 어찌 세상에 나가서 일하지 않으시고 이다지 녹록하게 이 시정 사이에 잠겨 지내시나요.”

하고 물으니, 배생은,

 

이런 자격은 다만 전공(田公)께서나 담당하실 수 있겠죠.”

하니, 한 자리에 앉은 사람의 웃음보가 터졌다. 이생은,

 

이야말로 때와 운수가 있는 것인즉, 함부로 요구할 수는 없겠지요.”

하고, 그는 곧 책꽂이 위에서 선문(選文) 한 권을 뽑아서 나에게 한 번 읽기를 청한다.

나는 곧 후출사표(後出師表)를 읽을 제 우리나라 식의 언토(諺吐) 구두(句讀) 를 달지 않고 높은 소리로 읽었다. 여럿이 둘러앉아 듣다가 무릎을 치며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다. 이생이 내가 다 읽기를 기다려서 유량(庾亮) 사중서감표(辭中書監表)를 골라 읽는데 그의 높았다 낮았다 하는 음절이 분명해서 비록 글자를 따라 일일이 알 수는 없어도 지금 어느 구절을 읽고 있는가를 넉넉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목청이 맑아서 마치 관현을 듣는 듯하였다.

벌써 달은 지고 밤은 깊었는데 문 밖에는 인기척이 끊이지 않는다. 나는,

 

성경에는 순라(巡邏 야경꾼)가 없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전생은

 

, 있습니다.”

한다. 나는 또,

 

그럼, 길에 행인이 끊이지 않음은 어인 까닭이죠.”

한즉, 전생은

 

다들 긴한 볼일이 있는게죠.”

한다. 나는,

 

아무리 볼 일이 있은들, 어찌 밤중에 나다닐 수 있겠어요.”

한즉, 전생은

 

, 못 다닌답니까. 초롱 없는 이야 못 다니겠지만, 거리마다 파수보는 데가 있어서 갑군이 지키고, 창과 곤봉으로 나쁜 놈을 적발하여 낮과 밤의 구별이 없거늘, 어찌 밤이라고 다니지 못하리까.”

한다. 나는,

 

밤도 깊고 졸리니 초롱을 들고 사관으로 돌아감이 어떨까요.”

하니, 배와 전이 함께,

 

아니어요, 그렇지 않아요. 반드시 파수꾼에게 검문을 당할 것입니다. 어떻게 이 깊고깊은 밤에 혼자서 쏘다니냐고 하며 오가면서 들르신 처소까지 밝히라 할 것이온즉, 몹시 귀찮을 것입니다. 선생이 이미 졸리신다면 이 누추한 곳에서나마 잠시 눈을 붙이시죠.”

하자, 목춘(穆春)이 곧 일어나서 탑() 위의 털방석을 말끔히 털고 나를 위해서 누울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젠 졸음도 갑자기 깨는군요. 다만 나 때문에 여러분께서 하룻밤 잠을 잃으실까 두려울 뿐입니다.”

하니, 여럿이,

 

아니오, 조금도 졸립지 않아요. 이토록 고귀하신 손님을 모시고 하룻밤 아름다운 이야기로 새는 건 참으로 한 평생 가도 얻기 어려운 좋은 인연일까 합니다. 이렇게 세월을 보낸다면 하룻밤은커녕 석달이 넘도록 촛불을 돋우어 밤을 새워도 무슨 싫증이 나겠습니까.”

하고, 모두들 흥이 도도하여 다시 술을 더 데우고 안주를 다시 가져오게 한다. 나는,

 

술을 다시 데울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그들은,

 

찬 술은 폐()를 해칠 우려가 있을뿐더러 독이 이[]에 스며듭니다.”

한다. 그 중 오복(吳復)은 밤새도록 단정히 앉았는데 눈매가 범상치 않다. 나는,

 

일재선생(一齋先生)께선 오중을 떠나신 지 몇 해나 되시는지요.”

하니, 오생(吳生 오복(吳復)),

 

열한 해나 되었습니다.”

한다. 내가,

 

무슨 일로 고향을 떠나 이다지 분주히 다니십니까?”

하니, 오생은,

 

장사로 생애를 삼고 있습니다.”

한다. 내가 또,

 

가족도 이곳에 따라와 계십니까?”

하니, 오생은,

 

나이는 벌써 40세입니다마는, 아직껏 장가 들지 못했습니다.”

한다. 나는,

 

오서림선생(吳西林先生)의 휘()는 영방(潁芳)이옵고, 항주(杭州)의 고사(高士)이신데 혹시 노형의 일가가 아닙니까?”

한즉, 오생은,

 

아니에요.”

하기에, 나는 또,

 

해원(解元) 육비(陸飛)와 철교(鐵橋) 엄성(嚴誠)과 향조(香祖) 반정균(潘庭筠)은 모두 서호(西湖절강(浙江)에 있는 명소)의 이름 높은 선비들인데 노형이 혹시 잘 아시나요.”

한즉, 오생은,

 

모두들 서로 이름을 통한 적도 없습니다. 제가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었으니까요. 다만 육비가 그린 모란을 본 기억은 납니다. 그는 호주(湖州) 사람이더군요.”

한다.

조금 뒤에 닭이 우니 이웃 사람들이 일어나 움직인다. 나는 고단한데 또 술까지 취하여, 교의 위에 걸터앉은 채 꾸벅꾸벅하다가 곧장 코를 골고 잠이 들었다. 그리하여 훤하게 밝을 무렵에야 놀라서 잠을 깨니, 모두들 서로 걸상에 의지하여, 베기도 하고, 눕기도 하며, 혹은 의자에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나는 홀로 두어 잔 술을 기울이고 배생을 흔들어 깨워서, 가노라 이르고는 곧 사관에 돌아오니 해가 벌써 돋았다.

장복은 깊은 잠에 빠졌고 일행 상하도 모두 일어나지 않았다. 장복을 툭 차 깨워서,

 

누가 날 찾는 이가 있더냐.”

하고 물었더니,

 

아무도 없더이다.”

한다. 곧 세숫물을 재촉하여 망건을 두르고 바삐 상방(上房)으로 가니, 여러 비장과 역관들이 바야흐로 아침 문안을 아뢰는 중이었다. 아무도 간밤의 일을 눈치채지 못한 듯한 모양이므로 마음속으로 적이 기뻐하며 다시 장복더러,

 

입밖에 내지 말라.”

당부하였다.

아침 죽을 약간 마시고 곧 예속재에 이르니 모두들 일어나 가고, 전생과 이인재가 골동을 벌여 놓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모두 놀라는 듯이 반기면서,

 

선생은 밤새 고단하지 않았습니까.”

하기에, 나는,

 

밤낮을 헤일 것 없이 게으름증은 나질 않아요.”

하니, 전생은,

 

그럼, 차나 한 잔 드시죠.”

한다. 조금 앉았으려니 한 아름다운 청년 하나가 밖에서 들어와 찻잔을 받들어 내게 권한다. 나는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그는,

 

저는 부우재(傅友榟)입니다. 집은 산해관에 있사옵고 나이는 열아홉 살입니다.”

한다. 전생이 골동들을 다 늘어놓고는 날더러 감상하기를 청한다. ()()()() 등이 모두 열하나인데, 큰 것, 작은 것, 둥근 것, 모난 것이 제각기 다르고, 그 새김질과 빛깔이 낱낱이 고아하며, 관지(款識)를 살펴보니 모두 주()() 시대의 물건이다. 전생은,

 

그 글자는 고증할 것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요새 금릉(金陵)하남(河南) 등지에서 새로 꽃 무늬를 새긴 것이라, 관지는 비록 옛 식을 본떴더라도 꼴이 벌써 질박하지 못하고, 빛깔이 또한 순하지 못해서, 만일 이것들을 진짜 골동 사이에 놓는다면 필시 야비함이 대번에 드러날 것입니다. 내 비록 몸은 시전(市廛)에 잠겨 있더라도, 마음은 늘 배움터에 있던 차에 선생을 뵈오니, 마치 여러 쌍 보패(寶貝)를 얻은 듯싶사온즉, 어찌 조금이라도 서로 속여서 한평생을 두고 마음에 께름칙하게 하오리까.”

한다. 나는 여러 그릇 중에서 창 같은 귀가 달리고 석류 모양으로 발을 단 통화로 하나를 들고 자세히 훑어본즉, 납다색(臘茶色) 빛깔에 제법 정미하게 만들었다. 화로 밑을 들쳐보니 대명선덕년제(大明宣德年製 선덕은 명 선종(明宣宗)의 연호)라고 양각(陽刻)으로 새겨져 있다. 나는,

 

이것은 제법 좋은 듯싶은데요.”

하니, 전생은,

 

실상 그대로 말씀드린다면 이는 선로(宣爐)가 아닙니다. 선로는 대개 납다색 수은(水銀)으로 잘 문질러서 속속들이 스미게 한 뒤 다시 금가루를 이겨 칠하였으므로, 불을 오래 담으면 저절로 붉은 빛이 나타나는 것인데, 이거야 어찌 민간에서 함부로 흉내낼 수 있겠습니까.”

한다. 나는 또,

 

그렇다면 골동기에 청록색 주반(硃斑 주사의 얼룩)이 생기는 건 흙 속에 오랫동안 파묻혀야 그러하므로, 그래서 무덤 속에 묻혔던 것이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제 이 그릇들이 만일 갓 구운 것이면 어찌 이런 빛깔을 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은즉, 전생은,

 

이건 참 알아 두어야 합니다. 대개 골동기는 흙에 들면 청색(靑色)이 나고, 물에 들면 녹색(綠色)이 나는 법입니다. 무덤 속에서 파낸 그릇들은 흔히 수은빛을 내는데, 어떤 이는 시체 기운이 스며들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아득한 옛날에는 흔히 수은으로 염()을 했기 때문에, 혹시 제왕의 능묘에서 나오는 그릇은 수은이 옮아서 오래된 것일수록 속속들이 스며 배는 법이므로, 대개 갓 구운 것인지, 옛 것인지, 또는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가리기 쉽습니다. 고기(古器)는 비단 살이 두껍고 질이 좋을 뿐만 아니라, 본 몸에서 나는 빛이 대체로 천연스럽게 맑고도 윤기 있고, 수은 빛 역시 그릇 전체에 고루 퍼지는 게 아니라, 혹은 반쪽에서, 혹은 귀에서만, 또는 다리에서만, 그리고 가끔 번져나간 것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청록색 얼룩 역시 그러하여, 전체 아닌 반만이 짙게도 들고, 여리게도 들고,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흐리다고 더러울 정도는 아니어서 머리카락 같은 무늬가 투명하게 뵈며, 맑다고 매마르진 않아서 어른어른함이 마치 물오른 듯합니다. 가끔 주사 알록점이 속속들이 깊이 스며든 것이 있는데, 그 중에도 갈색(褐色)진 것이 가장 고귀한 것이어서, 흙 속에 오래 들어 있으면 청()()()()의 점들이 알록달록 하여, 혹은 버섯 무늬 같기도 하고, 혹은 구름 속 햇무리 같기도 하고, 또는 함박눈 조각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흙 속에서 천 년쯤 묻혀 있어야 될 테니 이건 정말 상품으로 치는 것입니다. 옛날 명 선종(明宣宗)이 무척 갈색을 좋아해서 이른바 선로에는 갈색이 많았던 것입니다. 근년에 섬서(陝西)에서 갓 지은 것도 문득 선덕의 것을 본뜨려 하였으나, 선로는 아예 꽃 무늬가 없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일부러 꽃 무늬를 새겼으니, 이것은 모두 요즘의 가짜입니다. 그들이 빛깔을 이토록 잘 위조함은, 대체로 그릇을 구운 뒤에 칼로 무늬를 새기고 관지를 파서 넣은 다음 땅속에 구덩이를 파서 거기에다 소금물 두어 동이를 들이 붓고 마르기를 기다려 그릇을 그 속에 묻어두었다가 몇 해 만에 꺼내 보면 자못 고의(古意)가 있어 보이나, 이는 가장 하품이며 서투른 솜씨입니다. 이보다 더 교묘한 방법은, 붕사(鵬砂)한수석(寒水石)망사(䃃砂)담반(膽礬)금사반(金砂礬)으로 가루를 만들어 소금물에 풀어서, 붓으로 골고루 그릇에 먹여 말린 뒤에, 씻고 또 씻은 다음 다시 붓질하여, 이러기를 하루에 서너 번 한 뒤에 땅을 깊게 파서 그 속에 숯불을 피워 구덩이를 화로처럼 달군 뒤에 진한 초[]를 뿌리면, 구덩이가 펄펄 끓으면서 곧 말라 버립니다. 그 다음 그릇을 그 속에 넣고 초 찌꺼기로 두껍게 덮고, 또 흙을 다져서 빈틈 없이 하여 4~5일 지난 뒤에 꺼내 보면 여러 가지 알록점이 나타나 있습니다. 다시 댓잎을 태워 그 연기를 풍겨서 푸른빛을 더 짙게 하고, 납으로 문지르되, 수은 빛을 내려고 한다면 바늘로 가루를 만들어 문지르고 그 위에 백랍(白蠟)으로 닦으면 그럴듯한 고색(古色)이 납니다. 그러고도 혹은 일부러 한쪽 귀를 떼기도 하고, 또는 몸에 흠집을 내기도 해서, ()()()() 시대의 유물이라고 속이는 것은 더욱 얄미운 짓입니다. 뒷날 창() 중에 가시면 모두 먼 곳에서 온 장사치들이오니 물건을 사실 때 진가를 분간치 못한 채 우물쭈물하다가 웃음감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한다. 나는,

 

감사합니다. 선생이 이렇게 진심을 보여주시니까요. 저는 내일 아침 일찍 북경으로 떠날테니, 바라건대, 선생은 문방서화정이(鼎彛) 등 여러 가지에 대하여 고금의 동이(同異)와 명호(名號)의 진위(眞僞)를 기록하셔서 어두운 길에 지남(指南)이 되도록 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생은,

 

선생이 만일 이것이 소용이 있으시다면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서청고감(西淸古鑑) 박고도(博古圖) 중에서 제 소견을 첨가하여 깨끗이 써서 드리겠습니다.”

한다. 이에 달이 돋으면 다시 오기로 약속하고 사관에 돌아오니, 이미 아침 밥을 올렸으므로 잠깐 상방에 다녀 빨리 조반을 치르고 다시 나오니, 정 진사가 계함과 내원과 함께 역시 유람을 나서면서 나더러,

 

혼자서 다니며 무슨 재미난 구경을 하시오.”

하고 나무라더니, 내원이 또,

 

실은 아무 것도 구경한 게 없습디다. 옛날 광주(廣州) 골 생원님이 처음 서울에 와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인사 한 마디도 똑똑히 못하여 서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더니 이제 우리들이 꼭 그 꼴이군요. 난 더군다나 두 번째라 아무런 재미란 느끼지 못했구려.”

한다.

길에서 비치(費穉)를 만났더니 나를 이끌고 담자리전으로 들어가서 오늘 밤 가상루에서 모이자고 부탁한다. 나는 이미 전포관(田抱關)과 예속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고, 어제 저녁에 모였던 여러분들이 다 모이기로 했다고 말했더니, 비생은,

 

아까 포관과도 잘 이야기 되었습니다. 이제 선생이 외국의 손님으로 녹명(鹿鳴)을 노래하며 북경으로 가시는 길이온즉, 우리들이 선생을 위해서 백구(白駒)의 옛 시를 읊는 심정은 누구나 다 같을 것입니다. 배공이 이미 촉중의 온공(溫公)과 함께 주식을 장만하였은즉, 이 약속을 어기시면 안 될 것입니다.”

한다. 나는,

 

어제 저녁엔 너무 많이 여러분께 폐를 끼쳤는데 오늘밤은 그러시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니, 비생은,

 

저 뫼에 아름다운 나무가 있다면 공장이 자로 잴 것이요, 나는 백로(白鷺)가 멀리 찾았으니 피차 서로 싫지 않을 것입니다. 열두 행와(行窩)엔 애초부터 일정한 약속이 없을 것이요, 사해가 모두 형제인즉 누구에게 후박이 있겠습니까.”

하자, 마침 내원 등이 거리를 서성거리다가 나를 찾아 가게로 들어왔다. 나는 급히 필담(筆談)하던 종이쪽을 걷어치우고 고개를 끄덕여서 응낙하였다. 비생 역시 내 뜻을 눈치채고 빙그레 웃으면서 턱을 끄덕였다. 계함이 종이를 찾으며 말을 하고 싶어 하기에 내가 먼저 일어나면서,

 

그와 더불어 이야기할 게 못 되네.”

하니, 계함 역시 웃고 일어선다. 비생이 문까지 나와서 내 손을 넌지시 잡고 은근한 뜻을 비치므로, 나는 그저 끄덕이고 나와 버렸다.

 

 

[C-001]속재필담(粟齋筆談) : ‘다백운루본(多白雲樓本)’에는 속재야화(粟齋夜話)라 하여 성경잡지에서 각립(各立)시켰으며, 또 차례를 성경가람기(盛京伽藍記)의 다음에 두었는데 그릇된 것이다.

[D-001]전주(田疇) : 조위(曹魏)의 문학가. 격검(擊劒)에 능하였다.

[D-002]소정(韶亭) : 어떤 본에는 소정 두 글자가 궐문(闕文)이 되었다.

[D-003]아들 여덟 : 어떤 본에는 아들 여덟이 궐문으로 되었다.

[D-004]온공(溫公) : 곧 온백고인데, ()은 성 밑에 붙이는 미칭(美稱).

[D-005]관옥(冠玉) : 한서(漢書) 진평전(陳平傳)에 있는 말. 마치 옥으로 꾸민 갓과 같아서 비록 밖에 나타나는 빛은 아름다우나 그 내용은 변변하지 못함을 이른 말이다. 미남자의 호칭으로 쓰임.

[D-006]구외(口外) : 장성(長城) . 그 경계에 장가구(張家口)와 고북구(古北口)가 있으므로 그 밖의 땅을 구외라 한다.

[D-007]이유(二酉) : 대유산(大酉山)과 소유산(小酉山). 그 산 밑에 석혈(石穴)이 있는데, 그 중에는 책 천 권을 간직하였다 한다.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에서 나온 말이다.

[D-008]진림(陳琳) : 조위(曹魏)의 문학가. 일찍이 원소(袁紹)의 밑에 있으면서 조조(曹操)에게 보내는 격문을 지어 바쳤더니 조조는 마침 머리를 앓다가 그 자리에서 나았다 한다.

[D-009]귀로 …… 학문 : 순자(荀子)에서 나온 말. 소인(小人)의 학문은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새어 나간다. 그의 얕음을 일렀다.

[D-010]제자백가(諸子百家) : 중국 고전으로 각파 학자들의 학술이 실려 있는 서적.

[D-011]관주(貫珠) : 글이 잘된 곳을 보아서 그 글자의 오른편에 주묵(朱墨)으로 동그라미를 치는 것이다.

[D-012]잔도(棧道) : 중국 사천(四川) 지방에 있는 험준한 절벽에 나무로 시렁을 만들어 길을 낸 곳.

[D-013]하늘에 …… 더 어렵다 : 이백(李白)의 시구에, “촉도의 가기 어려움은 푸른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하구려.” 하였다.

[D-014]양곱창 곰국 한 동이 : 이 구절은 수택본에는 다음에 나오는 과실 두 쟁반의 밑에 있다.

[D-015]이미 술로 …… 했다 : 시경(詩經) 대아(大雅) 생민지십(生民之什) 기취(旣醉).

[D-016]구이(九夷) …… 싶다 : 논어(論語) 자한편(子罕篇) 공자께서 구이에 살고 싶으셨다.” 했다. 구이는 견이(畎夷)어이(於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 등 동방의 여러 민족.

[D-017]상공(相公) : 통속편(通俗篇) 이제 의관을 차린 이를 모두 상공이라 남용하여 그의 계급에 따라서 대상공(大相公)이상공(二相公)이라 한다.” 했다. 여기서는 연암을 가리킨 말.

[D-018]주공(周公) : 성명은 희단(姬旦). ()의 대표적 정치가.

[D-019]() …… 많다 : 한유(韓愈) 송동소남서(送董邵南序) 중의 한 구절.

[D-020]어리석은 …… 부르니 : 열자(列子), “제요(帝堯)가 천하를 다스린 지 50년 만에 미복(微服)으로 강구에 놀면서 동요(童謠)를 들었다.” 했다. 강구는 한길.

[D-021]전공(田公) …… 있겠죠 : 전의 이름이 사가(仕可)  출사할 만하다는 뜻이었으므로 농담을 붙인 것이다.

[D-022]선문(選文) : 어떤 본에는 문선(文選)으로 되었으나 그릇된 듯하다. 문선에는 출사표는 있으나 후출사표는 실려 있지 않다.

[D-023]후출사표(後出師表) : 촉한의 명신 제갈량이 지었다 하나 출사표 곧 속칭 전출사표(前出師表)는 그가 지은 것이요, 소위 후출사표는 뒷사람의 위작(僞作)이라 한다.

[D-024]유량(庾亮) : 동진(東晉)의 정치가로서 특히 사부(辭賦)에 능하였다. 사중서감표는 유량이 진 명제(晉明帝)에게 올려서 중서감을 사퇴한 표문.

[D-025]오서림선생(吳西林先生) : 청 고종(淸高宗) 때의 학자. 서림은 그의 자.

[D-026]관지(款識) : 골동에 새긴 글자. 관은 음각(陰刻)이요, 지는 양각(陽刻).

[D-027]서청고감(西淸古鑑) : 청 고종(淸高宗)의 명참(命讖)으로서 내부(內府)에 있는 고기를 해설한 책 이름.

[D-028]박고도(博古圖) : 송 휘종(宋徽宗)이 지은 책 이름. 흔히 선화박고도(宣和博古圖)라 한다.

[D-029]광주(廣州)  …… 되었다 : 우리나라에 많이 유행된 속담.

[D-030]녹명(鹿鳴) : 시경(詩經)의 편명(篇名). 임금이 군신(羣臣)을 모아서 잔치할 때 녹명편을 노래로 불렀다.

[D-031]백구(白駒) : 시경의 편명. 어진 선비를 여의는 노래. 백구는 흰 말.

[D-032]저 뫼에 …… 잴 것 : 좌전(左傳)에서 나온 말.

[D-033]나는 …… 찾았으니 : 시경 진로편(振鷺篇)에서 나온 말. 나는 백로로써 외국 손님이 이름에 비하였다.

[D-034]열두 행와(行窩) : 송사(宋史) 소옹전(邵雍傳), “일을 좋아하는 자가 별도로 소옹의 살고 있는 집과 비슷한 집을 지어서 그가 이르기를 기다렸으니 그 이름은 행와라 한다.” 했다. 그리하여 열두 군데에 행와가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상루필담(商樓筆談)

 

 

저녁에는 더위가 오히려 찌는 듯하고 하늘 가엔 붉은 햇무리가 끼었다.

나는 밥을 재촉해 먹고 잠깐 상방에 가서 조금 앉았다가 곧 일어나면서 혼잣말로,

 

고단하고 더위가 특히 심하니 일찍 자야겠군.”

하고는, 뜰로 내려와서 서성거리다가 틈만 있으면 나갈 궁리였다. 마침 내원과 주 주부노 참봉 등이 밥 먹은 뒤 뜰을 거닐면서 배를 문지르며 트림을 하고 있다. 때에 달빛이 차츰 돋아나고 시끄러운 소리가 잠깐 끊기었다. ()가 달그림자를 따라 두루 거닐면서 부사가 요양서 지은 칠률(七律)을 외고, 또 자기가 차운(次韻)한 것을 읊고 있었다. 나는 바쁜 걸음으로 마루로 올라갔다가 도로 나오면서 노군더러,

 

형님이 매우 심심해하시더군.”

하니, 노군은,

 

사또께서 너무나 적막하시리다.”

하고, 곧 마루 위로 향한다. 주군도 근심스러운 낯빛으로,

 

요즘 병환이 나실까 두렵습니다.”

하고, 곧장 마루 쪽으로 향해 가니 내원도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나는 그제야 빨리 문을 나가면서, 장복에게,

 

어제처럼 잘 꾸며 대려무나.”

하고, 타이르자 계함이 밖에서 들어오다가 나를 보고,

 

어디를 가시오.”

한다. 나는 가만히,

 

달을 따라 어디 좋은 데 가서 이야기나 해보자꾸나.”

한즉, 계함은,

 

어딜요.”

하므로, 나는,

 

그야 어디든지.”

하였더니, 계함이 발을 멈추고 망설이는 차에 수역이 마침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달이 좋으니 좀 거닐다 와도 좋겠지요.”

한다. 수역이 깜짝 놀라면서 무어라고 말하니, 계함은 웃으면서,

 

일이야 의당 이렇게 해야죠.”

하기에, 나도 허튼 말로,

 

그럴 법 하군.”

하고, 곧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들어갈 제 마침 수역과 계함이 마루에 올라서 돌아보지 않는 틈을 타서 나는 가만히 빠져 나왔다. 이미 한길에 나오니, 비로소 가슴이 후련하였다. 더위도 약간 물러가려니와 달빛이 땅에 가득하다. 먼저 예속재에 이른즉, 벌써 문이 닫혔는데 전생은 어딘지 나가고 이인재만이 혼자 있었다. 이는 곧,

 

잠깐 앉으셔서 차나 마시세요. 전공이 곧 돌아올 겁니다.”

한다. 나는,

 

가상루의 여러분께서 벌써 모여서 몹시 기다릴 걸요.”

하니, 이생은,

 

가상루의 아름다운 약속은 벌써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모시고 가리다.”

한다. 마침 전생이 손에 붉은 양각등(羊角燈)을 들고 들어와서 곧 가기를 재촉하므로, 이생과 함께 담뱃대를 입에 문 채 문을 나섰다. 한길이 하늘처럼 넓고 달빛은 물결처럼 흘러내린다. 전생이 손에 들었던 초롱을 문 위에 걸기에, 나는,

 

초롱을 들지 않아도 무방한가요.”

한즉, 이생은,

 

아직 밤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한다. 드디어 천천히 네거리를 거닐었다. 양편 상점(商店)들은 벌써 문이 닫혔고, 문 밖엔 모두 양각등을 걸었는데 더러는 푸르고 붉은 빛깔도 섞여 있다.

가상루 여러 사람들이 마침 난간 밑에 죽 늘어서 있다가 나를 보고 모두들 못내 반겨하며 상점 안으로 맞아들인다. 이중에는 배관갈부이귀몽동야비치하탑전사가포관온백고목재( 목헌())목춘수환오복천근 등이 모두 모였다. 배생이,

 

박공(朴公)은 가히 믿음 있는 선비라 이를 만합니다.”

한다. 마루 가운데에 부채처럼 생긴 사초롱 한 쌍이 걸려 있고 탁상에는 촛불 두 자루가 켜졌는데, ()()()() 들을 이미 차려 놓았으며, 북쪽 벽 밑에도 따로이 한 식탁을 벌여 놓았다.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먹기를 청하기에 나는,

 

저녁밥이 아직 덜 내려갔습니다.”

한즉, 비생이 손수 더운 차 한 잔을 따라서 권한다. 마침 자리에 처음 보는 손님이 있기에 나는 그들에게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저이는 마영(馬鑅)이라 하며, 자는 요여(耀如)이고, 산해관에 살고 있는 분인데 장사하러 이곳에 왔으며, 나이는 스물셋이고 글도 대략 안답니다.”

하고, 소개한다. 비생은,

 

오십독역(五十讀易)을 어떤 이는 정복독역(正卜讀易)이라 하여 복() 자에다 획 하나 더 붙은 것이라 하는데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기에, 나는,

 

오십독역의 오십(五十)은 비록 졸() 자가 아닌가 하고 의심할 수는 있겠으나, 이제 정복(正卜)의 그릇된 것이라 함은 너무 천착함이 아닐까요. 역경(易經)은 비록 복서(卜筮)에 쓰는 책이지만 계사(繫辭 역경 중의 한 편명(篇名))에도 점()과 서()를 말했으나 복()자는 보이지 않을뿐더러 복 자로 말한다 하더라도 곤() 자에다 한 점()을 더한 것인만큼 애초에 일() 자의 획을 건너 그은 건 아니니까요.”

하니, 비생은 또,

 

혹은 무약단주오(無若丹朱傲)의 오() 자를 오() 자의 잘못이라 하고, 그 아래 망수행주(罔水行舟)라는 글을 보아서도 두 사람으로 봄이 옳다 하는데요.”

하기에, 나는,

 

()가 능히 뭍에서 배를 저었다 하니, 망수행주와 뜻은 매우 그럴싸하게 맞으나 오()와 오()는 비록 음은 같을지라도 글자의 모양은 아주 다를뿐더러 오()와 착()으로 말하면 모두 하 태강(夏太康) 때의 사람인즉 위로 우순(虞舜) 시대와는 매우 요원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이동야는,

 

선생의 변증이 꼭 옳습니다.”

한다. 나는 전포관더러,

 

부탁드린 골동의 목록은 이미 집필을 시작하셨지요.”

하고 물은즉, 전생은,

 

점심 때 마침 조그마한 일이 생겨서 아직 반도 베끼지 못한 채 그대로 접어 두었습니다. 내일 아침 떠나시는 길에 잠시 점포 앞에서 행차를 멈추시면, 제 손수 수하 사람에게 전해 드릴 터이오며, 이번엔 결단코 전 약속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한다. 나는,

 

선생께 이렇듯 수고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하니, 전생은,

 

이건 친구간의 예사 일입죠. 다만 진작 못해 드려 부끄러울 뿐입니다.”

한다. 나는 또,

 

여러분은 일찍이 천산(千山)을 구경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들은,

 

예서 백여 리나 되어 아무도 가본 일이 없답니다.”

한다. 나는,

 

병부 낭중(兵部郞中) 복녕(福寧)이란 이를 잘 아십니까.”

하니, 전생은,

 

아직 모릅니다. 우리 친구 중에도 다들 그럴 것입니다. 그는 벼슬하는 양반이요, 우리는 장사치인데 어찌 서로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한다. 동야는,

 

선생은 이번 길에 황제를 직접 뵈옵지요?”

하기에, 나는,

 

사신은 때로 뵐 수 있겠지만, 나는 한갓 수원(隨員)이라 그 반열에 참가할 것 같지 않습니다.”

하니, 동야는,

 

지난해에 어가(御駕)가 능()에 거둥하셨을 때 귀국의 종관(從官)들은 모두 천자의 존안을 가까이 뵙곤 하던데 우리네는 도리어 그가 부럽더군요.”

하기에, 나는,

 

여러분은 어째서 우러러뵙지 못합니까?”

하니, 배갈부는,

 

어찌 감힌들 당돌한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문 닫은 채 잠자코 있을 뿐이죠.”

한다. 나는,

 

황상께서 거둥하실 때면 아이 어른할 것 없이 들판에 모여들어 다투어 그 행차를 우러러보려고 할 것 아닙니까.”

하니, 그는,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한다. 나는,

 

지금 조정 각로(閣老)들 중에 누가 가장 인망이 높지요?”

하였더니, 동야는,

 

그들 이름은 모두 만한진신영안(滿漢搢紳榮案)에 실렸으니 한번 훑어보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기에, 나는,

 

비록 영안(榮案)을 본단들 그들의 사업이야 알 수 있습니까.”

하니, 동야는,

 

우리네야 모두 초야(草野)에 묻힌 몸이어서 지금 조정에 누가 주공(周公)인지 소공(召公)인지, 또 누가 꿈에서, 또는 점쳐서 등장되었는지를 모르지요.”

한다. 나는,

 

심양성 중에 경술(經術)과 문장이 능통한 이가 몇이나 있을까요?”

하니, 배생은,

 

저는 녹록해서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하고, 전생은,

 

심양 서원(書院)에 서너너덧 사람 거인(擧人)이 있었는데 마침 과거보러 북경에 가고 없답니다.”

한다. 나는,

 

여기서 북경까지 1 5백 리 사이 연로에 이름난 사람과 높은 선비들이 응당 많겠죠. 그들 성명(姓名)을 알았으면 찾아보기에 편리할 것 같습니다.”

하니, 전생은

 

산해관(山海關) 밖은 아직도 변방이라 지기(地氣)가 거칠고 사람이 사나워서, 연로엔 모두 우리와 같은 장사꾼들뿐이니, 이름을 들 만한 이도 없거니와 역시 사람을 천거하기란 가장 어려운 노릇이어서, 기껏해야 제가 아는 사람을 들춤에 지나지 못하며, 제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랬다가 한번 높으신 눈으로 보시어 꼭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저에겐 부질없는 말이 되고, 남들에겐 실망을 줄 뿐이리다. 이제 무슨 좋은 바람이 불어서 선생을 뵙고, 덕망을 우러러 촛불을 밝히고 마음껏 토론하니, 이를 어찌 꿈엔들 생각이나 했던 일이겠습니까. 이는 실로 하늘이 맺어 준 연분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나서 한 사람 지기의 벗을 얻는다면 족히 한이 없을 것이니, 선생께서는 가시는 길에 스스로 좋은 사람을 만날 것인즉, 어찌 다른 사람을 미리 소개할 일이겠습니까.”

한다. 술이 몇 순배 돌 때에 비생이 먹을 갈고 종이를 펴면서,

 

목수환이 선생의 필적을 얻어서 간직하고자 합니다.”

하기에, 나는 곧 반향조가 김양허(金養虛)를 보낼 때 준 칠절(七絶) 중에서 한 수()를 써서 주었다. 동야는,

 

반향조란 귀국의 이름 높은 선비입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닙니다. 이는 전당(錢塘) 사람으로 이름은 정균(廷筠)인데, 지금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있고 향조는 그의 자랍니다.”

했다. 배생은 또 한 공첩(空帖)을 내어서 글씨를 청한다. 짙은 먹 부드러운 붓끝에 자획이 썩 잘 되었다. 내 스스로도 이렇게 잘 쓰여질 줄은 몰랐고, 다른 사람들도 크게 감탄하여 마지않는다. 한 잔 기울이고 한 장 써 내치고 하매 필태(筆態)가 마음대로 호방해진다. 밑에 몇 쪽은 진한 먹으로 고송(古松)과 괴석(怪石)을 그렸더니, 여러 사람들이 더욱 좋아하여 서로 다투어 가면서 종이와 붓을 내놓고 삥 둘러 서서 써 달라고 조른다. 또 검은 용() 한 마리를 그리고 붓을 퉁겨서 짙은 구름과 소낙비를 그렸는데, 지느러미는 꼿꼿이 세워지고, 등비늘은 순서 없이 붙었으며, 발톱이 얼굴보다 더 크고, 코는 뿔보다 더 길게 그렸더니, 모두들 크게 웃으며 기이하다 한다. 전생과 마영(馬鑅)이 초롱을 들고 먼저 돌아가려 하므로, 나는,

 

이야기가 한창 재미있는데 선생은 왜 먼저 가시렵니까.”

하고 물은즉, 선생은,

 

지레 돌아가고 싶진 않으나 다만 약속을 지키려니 하는 수 없습니다. 내일 아침 문에 나서서 작별 드리오리다.”

한다. 나는 아까 그린 검은 용을 들고 촛불을 당겨 사르려 했다. 온목헌이 급히 일어나서 앗아다가 고이 접어서 품속에 간직한다. 배생은 껄껄 웃으면서,

 

관동(關東) 천 리에 큰 가뭄이 들까 두렵군.”

하기에, 나는,

 

어째서 가문단 말씀이오.”

하니, 배생은,

 

만일 이게 화룡(火龍)이 되어 간다면 누구든지 괴로움을 부르짖지 않을 수 없을 걸요.”

한다. 모두 한 바탕 웃은 뒤에 배생은 다시,

 

용 중에도 어질고 나쁜 것이 있는데 화룡이 가장 독하답니다. 건륭(乾隆) 8년 계해(癸亥 1743) 3월에 산해관 밖 여양(閭陽) 벌판에 용 한 마리가 떨어져서 구름도 없이 우레하며, 비도 내리지 않으면서 번갯불이 번쩍이고, 해서관 밖 늦은 봄 일기가 별안간 6월 더위로 변하였답니다. 용이 있는 곳으로부터 백 리 안은 모두 펄펄 끓는 도가니 속같이 되어서 사람과 짐승이 목말라 죽은 게 수없이 많았고, 장사치와 나그네도 다니지 못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밤낮 없이 발가숭이로 앉아도 부채를 손에서 놓지 못했답니다. 황제께서 분부를 내리시어 관내의 냉장고에서 얼음 수천 차를 내어 관 밖에 고루 나눠서 더위를 가시게 하였답니다. 용 가까이 있던 나무와 흙과 돌은 모두 콩 볶듯 되고 우물과 샘이 들끓었습니다. 용이 열흘 동안 누워 있더니 갑자기 바람이 불어치고 천둥이 일며 콩알 같은 비가 퍼붓고, 대릉하(大陵河)의 집들이 비 속에서 저절로 불이 나곤 하였으나, 다만 사람과 짐승에겐 아무런 해도 없었답니다. 용이 떠날 때엔 사람들이 나가 보니, 마침 몸을 일으켜서 하늘로 오르려 할 제 처음엔 무척 굼뜨게 머리를 쳐들고 꼬리를 끌되, 마치 타마(駝馬)가 일어선 모양인데 길이는 겨우 서너 길밖에 되지 않더랍니다. 그러다가 입으론 불을 뿜고 꼬리만 땅에 붙이고는 한 번 몸을 굼틀하매 비늘마다 번개가 번쩍 일면서 우레 소리가 나고 공중에서 빗발이 쏟아지더니, 이윽고 몸을 묵은 버드나무 위에 걸치자, 머리로부터 꼬리에 이르기까지 여남은 길이나 되며, 소낙비가 강물을 뒤엎는 듯 퍼붓더니 이내 멎었답니다. 그제야 하늘을 쳐다본즉, 그 날랜 품이 동쪽 구름 사이에 뿔이 나타나고 서쪽 구름 사이엔 발톱이 드러나는데, 뿔과 발톱 사이가 몇 리나 되더랍니다. 용이 오른 뒤엔 날씨가 청명하여 도로 삼월의 천기가 되고, 용이 누웠던 자리엔 몇 길이나 되는 맑은 못이 파이고, 못 가에 있던 나무와 돌은 모두 타버리고 반쯤만 남았으며, 마소들은 털과 뼈가 모두 타서 녹아버렸고, 크고 작은 물고기 죽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그 냄새에 사람이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답니다. 특히 이상한 것은 용이 걸렸던 버드나무는 잎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다 합니다. 그 해에 관동의 일대에 큰 가뭄이 들어서 9월이 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았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용이 간다면 또 그런 변이 생길까 저어하는 바입니다.”

하자, 일좌가 모두 한바탕 크게 웃었다. 나는 잔에 술을 부어 죽 들이키고 나서,

 

이 이야기에 아주 술맛이 도는군요.”

하니, 여럿이,

 

옳습니다. 이번엔 우리 각기 한 잔씩 돌려서 박공의 기쁨을 도웁시다.”

한다. 나는,

 

여러분이 그 용의 이름을 아십니까?”

한즉, 혹은 응룡(應龍)이라 하고, 또는 한발(旱魃)이라 한다. 나는,

 

아니에요. 그 이름은 강철(罡鐵)이라 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강철이 지난 곳엔 가을도 봄이 된다 하니, 이는 가물어 흉년이 짐을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이 일하다 잘 이룩되지 않음을 보고는 강철의 가을이라 합니다그려.”

하였더니, 배생이

 

그 용 이름이 참 기이하구려. 내가 난 때가 바로 그 해이니, 이는 곧 강철의 가을이라 어찌 가난치 않고야 견디겠소.”

하고, 그는 다시 긴 목소리로,

 

강처(罡處).”

하기에, 나는,

 

아니오, 강철.”

하고, 다시 일러주니, 배생은 또,

 

강천(罡賤).”

한다. 나는 웃으면서,

 

()이 아니요, 도철(饕餮)이란 철()과 음이 같은 철()이어요.”

하니, 동야가 크게 웃으며 이내 커다란 소리로,

 

강청(罡靑).”

하여, 모두들 허리를 잡고 웃었다. 대개 중국 사람들의 발음엔 갈()() 등의 리을 받침이 잘 궁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은 모두 오()()에 살고 계시면서 이렇게 멀리 장사와서 해를 거듭 바꾸시면 고향 생각이 간절치 않습니까.”

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오복은,

 

간절타 뿐입니까.”

하고, 동야는,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심신이 산란해집니다. 천애(天涯)지각(地角)과 같은 먼 곳에 와서 사소한 이문을 다투다 보니, 연만하신 어머니께서는 부질없이 해저문 여문(閭門)에 기대어 나를 기다리시고, 젊은 아내는 침방을 홀로 지키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편지마저 끊어지고, 꾀꼬리 소리엔 꿈 역시 이르지 않으니, 어찌 사람으로서 머리가 세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달 밝고 바람 맑으며, 잎 지고 꽃 피는 때면 하염없이 간장만 타니 이를 그 어이하오리까.”

한다. 나는,

 

그렇다면 진작 고향에 돌아가서 몸소 밭을 갈아 우러러 어버이를 섬기고, 아래로는 처자를 거느릴 계획을 세우시지 않고, 오로지 이렇게 하찮은 이문을 좇아서 멀리 고장을 떠나셨나요. 설사 이리하여 재산이 의돈(猗頓)과 겨루고 이름이 도주(陶朱)와 같이 된단들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까.”

하니, 동야는,

 

그는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 고향 사람들도 더러는 반딧불을 주머니에 넣기도 하고 송곳으로 정강이를 찌르면서 글 공부하며, 아침에 나물 밥, 저녁엔 소금 찬으로 가난을 견디는 이가 많습니다. 그러한 정성을 하늘이 가엾이 여기셨음인지 때로 비록 하찮은 벼슬을 얻어 하는 일이 있사오나, 만 리 타향에 일터를 찾으려니 고향을 떠나 사는 건 마찬가지지요. 혹시 친상을 당하든지 파면을 당하든지 한다면 고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또 관직을 가진 자는 마땅히 그 일터에서 죽어야 할 것이며, 혹시 잘못이 있을 때엔 장물(贓物)을 도로 토해내야 할뿐더러 세업(世業)마저 기울이게 될 것이니, 그때에야 비록 황견(黃犬)의 탄식을 지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희들은 배운 것이 어설프니 벼슬길도 가망 없고, 그렇다고 해서 피땀 흘리며 공장이 노릇으로 일생을 보낼 기술도 없거니와, 쌀 한 알 얻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하는 농업으로 한 평생을 지낸댔자, 이는 나서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불과 좁은 고장을 한 걸음도 떠나지 못한 채, 마치 여름 벌레가 겨울엔 나오지 못하듯이 이 세상을 마칠 터이니, 그렇다면 차라리 하루 빨리 죽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이제 가게를 내고 물건을 사고 팔아서 생활을 삼는 건 남들은 비록 하류로 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나를 위하여 이에 하늘이 한 개의 극락계(極樂界)를 열고 땅이 이러한 쾌활림(快活林)을 점지하여, 도주공의 편주(扁舟)를 띄우고, 단목씨(端木氏)의 수레를 잇달아서 유유히 사방을 다니어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고, 어떤 넓은 대도시라도 뜻에 맞는 대로 그칠 것이니, 드높은 처마와 화려한 방 안에 몸과 마음이 한가롭고, 모진 추위나 가혹한 더위에도 방편을 따라 자유롭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버이께 위안되시고 처자들도 원망치 아니하여, 나아가나 물러서나 피차간 여유 있고 영화롭거나 욕되거나를 모두들 잊게 된즉, 저 농사와 사환의 두 길에 비하여 그 괴롭고 즐거움이 어떻다 하리까. 또 저희들은 특히 사귐에 있어서 모두 지성(至性)을 지녔답니다. 옛 글에도 세 사람이 같이 행하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될 이가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두 사람의 마음이 합한다면 굳은 쇠라도 끊을 수 있다 하였으니, 이 누리의 지락(至樂)이 이보다 더 지나칠 것이 있겠습니까. 사람의 한평생에 만일 동무가 없다면 아무런 재미도 없을 것입니다. 저 입고 먹는 것밖에 모르는 위인들은 모두 이런 취미를 모른답니다. 세상에는 과연 그 면목이 얄밉고 말씨가 멋 없는 자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들의 눈엔 옷가지 밥사발만 눈에 뜨일 뿐 동무를 사귀는 즐거움이라곤 조금도 지니지 않았답니다.”

한다. 나는,

 

중국의 백성들은 제각기 네 갈래의 분업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만큼 거기엔 귀천의 차별이 없을 터이며, 따라서 혼인이라든지 또는 사환에 있어서도 아무런 구애가 없겠지요.”

한즉, 동야는,

 

우리나라에선 벼슬아치들은 장사치나 장인바치와는 혼인함을 금하여 관기(官紀)를 깨끗이 하고, 아울러 도()를 높이고 이()를 낮게 보며, 근본을 숭상하고 지엽을 누르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네는 모두 대대로 장사하는 집이므로 사대부의 집과는 혼인이 없고, 돈과 쌀을 바쳐서 생원(生員)이나 얻어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역시 향공(鄕貢)을 거쳐서 거인(擧人)이 되지는 못한답니다.”

하매, 비생은,

 

그러나 그건 다만 고향에서만이지 타관에 나서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하고, 덧붙여 설명한다. 나는,

 

한 번 제생(諸生 생원과 같음)이 되기만 하면 사류(士類)로 행세함은 용허됩니까.”

하였더니, 이는,

 

그렇습니다. 제생 중에서도 늠생(廩生 국가 급비생(給費生))감생(監生)공생(貢生) 등의 여러 가지 명목이 있어서 이들은 모두 생원 중에서, 뽑혀 오르기 때문에 한 번만 생원에 통과되면 구족(九族)에게 빛이 나나, 그 대신 이웃들이 해를 입습니다. 왜냐하면 관권(官權)을 잡고 시골에서 무단(武斷)을 감행하는 게 곧 생원님네의 전문적인 기술이고, 소위 사류(士類) 중에도 대체로 세 층이 있으니, 상등은 벼슬아치가 되어 관록을 먹는 것이요, 중등은 학관(學館)을 열어서 생도를 모집하는 것이요, 하등은 남에게 창피를 무릅쓰고 빌붙고 꾸러 다니는 축들입니다. 이는 속담에 이른바 남에게 빌붙어 사니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건만, 당장 살길이 막연하니 남에게 빌붙지 않을 수 없지요. 추위와 더위를 헤아리지 않고 줄곧 쏘다니면서 사람을 만나면 말을 할까말까 주저하다가 그 야비한 정상이 먼저 나타납니다. 한때엔 고담준론만 하던 선비가 뜻밖에 세상이 미워하는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속담에 남에게 구하는 것은 나에게 스스로 구함만 같지 못하다고 했듯이, 장사를 하면 저절로 이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한다. 나는 말머리를 돌려서,

 

중국의 상정(觴政)엔 반드시 묘한 방법이 있을 터인데, 어제 오늘 이틀 밤을 여럿이 모여 마셔도 주령(酒令)을 내지 않음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배갈부가,

 

이는 옛날의 상정을 말씀함이죠. 지금은 하찮은 운전수(運轉手)나 금고직(金庫直)이 따위도 다 아는 일이어서 그리 운치(韻致) 있는 일로 치질 않습니다.”

하니, 비생은 다시,

 

입옹소사(笠翁笑史)에 용자유(龍子猶)의 고려 중의 주령에 관한 이야기를 실었는데, 어떤 사신이 고려에 갔을 때 고려에서는 한 중으로 하여금 그를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더니 중이 영()을 내되, 항우(項羽)와 장량(張良)이 서로 산() 하나를 놓고 다투는데, 항우는 우산(雨傘)이라 하고 장은 양산(凉傘)이라 했다 하니, 사신이 창졸간에 대답하기를, ‘허유(許由)와 조조(鼂錯)가 호로(胡盧) 하나를 두고 다투는데, 허유는 유호로(油胡盧)라 하고 조조는 초호로(醋胡盧)라 하였다.’ 하니, 그때 고려 중의 이름은 누구입니까?”

하기에, 나는,

 

이 영은 전혀 이치에 닿지 않을뿐더러 중의 이름도 전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조금 눈을 붙였다가 문 밖에 사람 소리가 중얼거리기에 곧 일어나 사관에 돌아오니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았다. 옷 벗고 다시 잠들어서 조반을 알릴 때 겨우 깨었다.

 

 

[C-001]상루필담(商樓筆談) : ‘다백운루본에는 상루야화(商樓夜話)라 하여 성경잡지에서 각립시켰으나 그릇된 것이다.

[D-001]형님 : 곧 상사 박명원. 연암의 삼종형.

[D-002]오십독역(五十讀易) : 논어(論語), “쉰 살에 역경(易經)을 읽었다.” 하였다.

[D-003]무약단주오(無若丹朱傲) : 서경(書經) 단주처럼 거오한 자는 없다.” 했다. 단주는 요()의 아들 이름.

[D-004]() : 논어 ()는 능히 뭍에서 배를 끈다.” 했다. 오는 역사(力士)의 이름.

[D-005]망수행주(罔水行舟) : 물도 아닌 뭍에서 배를 가게 함을 이른 말.

[D-006]() : 사람 이름. 혹은 오가 착의 아들이라 하였다.

[D-007]하 태강(夏太康) : ()의 임금. 태강은 시호(諡號).

[D-008]만한진신영안(滿漢搢紳榮案) : 만인과 한인을 함께 실은 일종의 잠영록(簪纓錄).

[D-009]소공(召公) : 성명은 희석(姬奭). 주공과 함께 주초(周初)의 어진 재상. 소공은 봉호(封號).

[D-010]꿈에서 : 은 무정(殷武丁)이 꿈에 부열(傅說)을 만나고 초상을 그려 붙여서 그를 찾아 재상을 삼았다.

[D-011]점쳐서 : 주 문왕(周文王)은 점쳐서 여상(呂尙)을 얻어 스승을 삼았다.

[D-012]거인(擧人) : 지방에서 국가 고시에 합격하고 중앙 고시에 응할 자격을 지닌 선비.

[D-013]김양허(金養虛) : 김재행(金在行). 양허는 자. 그는 김상헌(金尙憲)의 오대손. 영조(英祖) 41년에 홍대용(洪大容)과 함께 연행(燕行)을 하였다.

[D-014]약속 : 등사해 주기로 한 고동록(古董錄)을 베끼기 위함이었다.

[D-015]계해(癸亥) : ‘일재본에는 계사(癸巳)로 되었는데 그릇된 것이다.

[D-016]() : ‘일재본에는 명철(明哲)이란 철()로 되었다.

[D-017]의돈(猗頓) : 전국 때 노()의 유명한 부자. 돈은 이름이요, 의는 산동성 의씨(猗氏)라는 고을에서 살림을 일으켰으므로 붙였다.

[D-018]도주(陶朱) : 성명은 범려(范蠡). ()에 살 때에 주공(朱公)이 되었으며, 19년 만에 세 번이나 천금을 이룩하였고 그 자손이 더욱 돈을 늘려서 거만에 이르렀다.

[D-019]반딧불을 …… 하고 : ()의 가난한 학자 차윤(車胤)의 옛 일. 형설(螢雪)의 공()이 여기서 유래되었음.

[D-020]송곳으로 …… 찌르면서 : 육국(六國) 때 여섯 나라 재상을 겸임하던 소진(蘇秦)의 옛 일.

[D-021]황견(黃犬)의 탄식 : ()의 이사(李斯)가 그의 아들과 함께 형장으로 갈 때 그의 아들을 돌아보면서, “내 비록 너와 다시 황견을 몰고 동문을 나서 사냥을 하고자 한들 얻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D-022]쾌활림(快活林) : ()의 수도 교외에 있는 유명한 유원지의 이름.

[D-023]도주공의 …… 띄우고 : 범려가 절세의 가인 서시(西施)를 배에 싣고 함께 오호(五湖)로 떠다녔다.

[D-024]단목씨(端木氏) …… 잇달아서 :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돈벌이를 잘하는 단목사(端木賜). 그의 자는 자공(子貢).

[D-025]세 사람 …… 있다 : 논어(論語)에 나온 말.

[D-026]두 사람의 …… 있다 : 역경(易經)에서 나온 말.

[D-027]향공(鄕貢) : 지방 출신의 과거 응시자.

[D-028]감생(監生) : 국립 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의 학생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이때에는 아래 나오는 공생과 함께 일정한 월사금을 내고 관립 학교에 학적을 지니게 된 자.

[D-029]상정(觴政) : 주령(酒令)과 같다. 술을 마시는 좌석에서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내면 이에 맞추어 대구를 하여 승부를 보아 벌주를 먹이는 놀음.

[D-030]입옹소사(笠翁笑史) : 청의 유명한 희곡작가 이어(李漁)가 지은 서명(書名).

[D-031]장량(張良) : 한 고제(漢高帝) 유방(劉邦)을 도와서 천하를 얻게 한 책사.

[D-032]허유(許由) : ()가 그에게 천하를 물려주려 하였으나 받지 않았다는 은사.

[D-033]조조(鼂錯) : 한 경제(漢景帝)의 어진 신하.

[D-034]옷벗고 …… 깨었다 : ‘일재본에는 이 부분이 탈락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2일 무자(戊子)

 

 

보슬비 오다 곧 멎다.

심양에서 원당(願堂)까지 3, 탑원(塔院) 10, 방사촌(方士邨) 2, 장원교(壯元橋) 1, 영안교(永安橋) 14리였고, 길 쌓은 것이 영안교에서 비롯하여 쌍가자(雙家子)까지 5, 대방신(大方身) 10, 모두 45리다. 이곳에서 점심 먹고, 대방신에서 다시 마도교(磨刀橋)까지 5, 변성(邊城) 10, 흥륭점(興隆店) 12, 고가자(孤家子) 13, 모두 40리다. 이날 85리를 갔다. 고가자에서 머물렀다.

이날 아침 일찍 심양을 떠날 제 가상루에 들르니, 배관이 홀로 나와 맞고 온백고는 마침 잠이 깊이 들었다. 나는 손을 들어 배를 작별하고 예속재에 이르니, 전사가와 비치가 나와 맞는다. 전생이 두 봉() 글을 내어서 한 봉은 떼어 내게 뵈는데 곧 내게 주는 고동(古董)의 명목을 기록한 것이었고, 또 한 봉은 겉에 붉은 쪽지로 허태사 태촌선생 수계(許太史台邨先生手啓)’라 썼다. 전생은 다시,

 

이는 저의 성심에서 나온 것이요, 아무런 객기(客氣) 없는 말씀이옵니다. 조선관(朝鮮館 조선 사신이 드는 객관)과 서길사관(庶吉士館)은 바로 문이 나란히 있사오니, 선생이 북경에 도착하시거든 이 편지를 전하시오. 허태사는 그 의표(儀表)가 속되지 않고 게다가 문장이 아름다운즉 반드시 선생을 잘 대우하리다. 편지 중에도 선생의 존함(尊啣)과 자함(字啣)을 함께 적었으니 결코 헛걸음이 되지 않으리다.”

하고 설명한다. 나는,

 

여러분을 면면이 만나서 하직하지 못하니 매우 서운합니다. 선생이 이 뜻을 잘 전해 주시오.”

하니, 전생이 머리를 끄덕인다. 내가 곧 몸을 일으키려 하는 즈음에 전생은,

 

목수환이 옵니다.”

한다. 목춘이 한 청년을 데리고 왔는데, 청년은 손에 포도 한 광주리를 들었다. 대체 청년은 나를 만나기 위하여 예물로 포도를 가지고 온 모양이다. 그는 나를 향하여 공손히 읍한 뒤에 앞으로 다가와서 내 손을 잡는데 구면이나 다름없이 익숙해 한다. 그러나 길이 바빠서 이내 손을 들어 작별하고 점방을 떠나 말을 타는데, 그는 말 머리에 이르러 두 손으로 포도 광주리를 받쳐 들었다. 나는 말 위에서 그 한 송이를 집고 다시 손을 들어 치사하고 떠났다. 얼마 가다 돌아본즉 여러 사람이 아직도 점방 앞에서 내 가는 양을 바라보고 섰다. 길이 바빠서 미처 그 청년의 성명을 묻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연거푸 이틀 밤을 잠을 설치었으므로 해 뜬 뒤에 고단함이 더욱 심하였다. 창대로 하여금 굴레를 놓고 장복과 함께 이쪽저쪽에서 부축하게 하고 가면서 한숨 달게 잤더니, 정신이 비로소 맑아지고 주위의 물색이 한층 더 새롭다. 장복은,

 

아까 몽고 사람이 낙타 두 마리를 끌고 지나가더이다.”

하기에, 나는,

 

, 내게 알리지 않았어.”

하고 꾸짖었더니, 창대는,

 

그때 코 고는 소리가 천둥치듯하와 불렀사오나 아니 깨시는 걸 어찌하오리까. 쇤네들도 생전 처음 보는 것이라 무언지는 똑똑히 모르오나 생각에 낙타인가 싶습니다.”

한다. 나는,

 

그 꼴이 어떻게 생겼더냐?”

하고 다시 물었더니, 창대는,

 

정말 형언하기 어렵습디다. 말인가 하면 굽이 두 쪽일뿐더러 꼬리가 소처럼 생겼고, 소인가 하면 머리에 뿔이 없을뿐더러 얼굴이 양같이 생겼고, 양인가 하면 털이 꼬불꼬불하지 않을뿐더러 등엔 두 뫼봉우리가 솟았으며, 게다가 머리를 쳐들면 거위 같기도 하려니와, 눈을 떴다는 것이 청맹과니와 같사옵더이다.”

한다. 나는,

 

그게 과연 낙탄가보다. 그 크기가 얼마만하더냐?”

하니, 그는 한 길이나 되는 허물어진 담을 가리키며,

 

높이가 저만하더이다.”

한다. 나는,

 

이 담엘랑 처음 보는 물건이 있거든 비록 졸 때거나 식사할 때거나 반드시 알려야 한다.”

하고, 타일렀다.

지는 해가 뉘엿뉘엿 말 머리에 감돈다. 강가에 나귀 떼가 수백 마리 물을 먹고 있다. 한 노파가 손에 수숫대를 들고 나귀를 모는데, 일곱여덟 살 된 어린아이가 노파를 따라 다닌다. 그는 시골 마나님으로 몸에는 푸른 색 짧은 치마를 입고 발엔 검은 신을 신었는데, 머리가 모두 벗어져서 뻔질뻔질한 게 마치 바가지처럼 빛난다. 게다가 또 정수리 밑에 조그마하게 낭자를 틀고 겨우 한 치길이밖에 안 되는 곳에 온갖 꽃을 수두룩이 꽂았다. 장복을 보고 조선담배를 달라 한다. 나도,

 

저 나귀가 모두 너의 한 집에서 기르는 것이냐?”

하고 물었더니, 노파는 머리를 끄덕이고 가버린다. 그가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D-001]서길사관(庶吉士館) : 한림원에 속한 문인들을 모아 둔 곳. 서길사는 한림의 후보격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고동록(古董錄)

 

 

문왕정(文王鼎)

소보정(召父鼎)

아호부정(亞虎父鼎)

이는 모두 상()() 시대의 유물로서 상상(上賞)에 해당됩니다.

주왕백정(周王伯鼎)

단도정(單徒鼎)

주풍정(周豐鼎)

이는 모두 당()의 천보(天寶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연간(年間)에 국()에서 만든 것인데, 몸집이 작아서 서재(書齋)의 향불 피우기에 가장 알맞습니다.

상부을정(商父乙鼎)

부이정(父已鼎)

부계정(父癸鼎)

상자정(商子鼎)

병중정(秉仲鼎)

도철정(饕餮鼎)

이부정(李婦鼎)

상어정(商魚鼎)

주익정(周益鼎)

상을모정(商乙毛鼎)

부갑정(父甲鼎)

이는 모두 원나라 때 강낭자(姜娘子)의 옛것을 모방해서 만든 것입니다.

주대숙정(周大叔鼎)

주련정(周䜌鼎)

이는 모두 서실(書室)의 청공(淸供)에 들 만합니다. 대개 솥이나 화로의 귀가 고리로 된 것, 아가리가 헤벌어진 것, 배가 민숭하게 내민 것, 밑이 뾰족한 것 등은 다 하품이어서 볼 것이 못 되오니 아예 사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사망대(周師望敦)

시대(兕敦)

익대(翼敦)

상모을력(商母乙鬲)

주멸오력(周蔑敖鬲)

상호수이(商虎首彝)

주신이(周辛彝)

이는 모두 박고도(博古圖) 중에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근일에 새로 나온 서청고감(西淸古監)엔 도식(圖式)이 더욱 정밀하니, 먼저 서사(書肆) 중에서 서청고감을 찾아서 그릇 이름을 보고 그림을 살피신 뒤에, 그 모양이 단아한 것을 마음에 골라 두신 다음, 창중(廠中)에나 혹은 융복사(隆福寺) 또는 보국사(報國寺)의 장날에 가서 찾으시면 모두 틀림없으리다.

()

()

()

이 세 가지는 모두 술 그릇이지만 역시 꽃을 꽂아서 평상시의 맑은 감상에 이바지될 것입니다.

대체로 관요(官窰)는 그 법식이나 품격이 가요(哥窰)와 다름없으나, 빛깔은 분청(粉靑) 혹은 난백(卵白)을 취하였으되 맑고도 기름기가 번지르르한 것이 상품이고, 그 다음이 담백색(澹白色)이고, 다만 유회색(油灰色)은 사지 마십시오. 무늬는 얼음장이 깨진 것처럼 된 것, 또는 뱀장어 피무늬같이 된 것이 상품이고, 자디잔 무늬는 그 중 하품이니 취하지 마십시오. 그 만드는 법식 역시 박고도(博古圖) 중에서 본받은 것이 많습니다. 다만 정()()()()()() 등의 어느 것을 막론하고, 특히 키 작고 배부른 것은 속되고 추악하여 볼품없으니 결코 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전사가여연암서(田仕可與燕巖書)

 

제가 지난해 첫 겨울에 북경까지 갔다가 2월에 돌아왔습니다. 북경에 있을 때 날마다 창중(廠中)에 가보았는데, 눈에 띄는 게 모두 보배롭고 기이하여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저의 그때 심경은 마치 하백(河伯 물귀신)이 자기 얼굴의 누추함을 앎과 같이, 싸움을 시작도 않고서 벌써 항복했답니다. 다만 저 금창(金閶소주(蘇州)의 별명) 지방에 살고 있는 경박한 무리들이 마치 이와 벼룩처럼 기고 뛰어서, 창중(廠中)에 들끓으면서 값을 함부로 올려 불러서 비단 열곱이 넘게 만들뿐더러, 온갖 감언 이설로써 사람의 굳은 간장을 녹일 듯 덤빕디다.

저는 그 길이 처음인지라 하도 놀랍고 미혹하여, 삼관(三官 )이 아찔하고 오장(五膓)이 뒤집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조금도 얻은 바 없이 그저 어리둥절하다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가만히 이 일을 생각하면 문득 머리카락이 솟는 듯하니 이는 어인 까닭일까요. 제가 시골에서 생장하여 어리석고 겸허함이 지방성을 그대로 지닌지라, 연석(燕石)을 보배로 여기고 어목(魚目)을 진주로 그릇 앎은 하는 수 없는 일이지만, 다만 분한 것은 그들의 웃음감이 될 만큼 많은 값을 치렀으니, 이는 이른바 도척(盜跖)의 배를 불린다는 셈이 된 것입니다.

이제 선생이 북경으로 가시는 마당에 제가 잊지 못하고 이런 구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실로 선생과 같은 외국의 손님으로 후일 본국에 돌아가시어 중국에 전혀 옳은 사람이 없더라고 하실까 두려워함입니다. 아울러 충심껏 말씀드릴 것은 제가 옛 서화에 대해서는 감상한 것도 아직 넓지 못할뿐더러 사랑하는 버릇도 깊지 못한 것이 함부로 말씀 드리긴 어렵사오나, 이들은 대체로 전현들의 수적은 아닐지라도 역시 후세의 명필들이 잘 본뜬 것이어서, 비록 노성(老成)한 티가 없다 하더라도 그들의 전형(典刑)을 엿볼 수 있으며, ( 미불(米芾))( 채경(蔡京))(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은 모두 그 이름을 상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이 전날에 저의 보잘것없음을 헤아리지 아니하시고 아름다운 사람을 구하시는 뜻을 말씀하셨으나, 연로 중에서 누구와 이야기를 붙이는 일도 너무 창졸간이어서 마음을 다 드러내지 못할 것이요, 또한 일부러 길을 돌아가면서 일일이 찾아봄도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제가 북경에 있을 때에 허태사 조당(兆黨)과 며칠 동안 사귀어 지기의 벗으로 맹세하였는데, 그의 자는 태촌(台邨)이며 호북(湖北) 사람입니다.

여기 그에게 부치는 편지 한 통이 있으니, 선생이 북경에 닿으시는 날 곧 한림원(翰林院)에 가셔서 이 허태촌을 찾아서 제 이름을 대시고 이 글을 전하십시오.

그가 만일 선생과 저의 사이가 이처럼 친밀함을 알게 되면 반드시 푸대접하지 아니하오리다. 그리고 그의 사람됨이 헌걸하오니 한번만 보시면 문득 뜻이 맞으실 것이오며, 결코 제가 그릇 추천함이 아님을 아시리다. 아울러 박공(朴公) 노야(老爺)께옵서 양해하여 주시길 바라옵니다.

전사가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뢰옵니다.

 

[C-001]고동록(古董錄) : ‘백운루본에는 성경잡지에서 각립시켰는데, 그릇된 것이다.

[D-001]이는 모두 …… 해당됩니다 : ‘박영철본에는, 이 부분이 소주(小註)로 되었는데, 그릇된 것이다.

[D-002]융복사(隆福寺) 또는 보국사(報國寺) : 북경 동사패루(東四牌樓) 융복사가(隆福寺街)에 있다. 보국사와 함께 골동품들을 많이 매매한다. 보국사는 호국사(護國寺)라고도 함. 서성(西城) 호국사가(護國寺街)에 있다. ‘일재본에는 홍인사(弘仁寺)로 되었다.

[D-003]관요(官窰) : () 휘종(徽宗) 정화(政和) 연간에 관에서 직접 구워 낸 자기.

[D-004]가요(哥窰) : ()의 처주(處州)에 살고 있는 장씨(張氏) 형제가 각기 자기를 구웠는데, 형이 구운 것이 아우의 것보다 약간 더 희고 깨진 무늬가 많아서 이를 가요라 하였다.

[D-005]전사가여연암서(田仕可與燕巖書) : 이 편지는 다만 주설루본(朱雪樓本)’에 있는 것을 여기에 추록하였다.

[D-006]연석(燕石) …… 여기고 :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말. ()의 어떤 어리석은 이가 기와 쪽과 다름없는 연석을 보배로 그릇 알고 깊이 간직하여 남의 조소를 샀다.

[D-007]어목(魚目) …… 그릇 앎 :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오는 말. 고기 눈과 구슬과의 혼동을 이른 말.

[D-008]도척(盜跖) : 전국 때 노()의 대도(大盜). ‘는 도적이요, ‘은 그의 이름.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3일 기축(己丑)

 

 

날은 맑으나 바람이 심하다.

고가자(孤家子)에서 새벽에 떠나 거류하(巨流河)까지 8리였으니, 거류하는 주류하(周流河)라고도 한다. 거기서 거류하보(巨流河堡) 7, 필점자(泌店子) 3, 오도하(五渡河) 2, 사방대(四方臺) 5, 곽가둔(郭家屯) 3, 신민둔(新民屯) 3, 소황기보(小黃旗堡) 4리를 와서 이곳에서 점심 먹었다. 모두 35리를 갔다. 소황기보에서 대황기보(大黃旗堡)까지 8, 유하구(柳河溝) 12, 석사자(石獅子) 12, 영방(營房) 10, 백기보(白旗堡) 5, 모두 47리다. 이날에는 도합 82리를 가서 백기보에서 묵었다.

이날 새벽에 일어나 아침 소세를 마치니 몹시 고단하다. 달이 지새니 온 하늘에 총총한 별들이 모두 깜박거리고 마을 닭이 서로 홰를 친다. 몇 리를 못 가서 안개가 뽀얗게 끼어 큰 별이 삽시에 수은 바다를 이루었다. 한 떼의 의주(義州) 장사꾼들이 서로 지껄이며 지나는데, 그 소리가 몽롱하여 마치 꿈속에 기이한 글을 읽는 것처럼 분명하지는 않으나 그 영검스러운 경지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조금 뒤에 하늘 빛이 훤해지며 길에 늘어선 수많은 버드나무에서 매미가 한꺼번에 울기 시작한다. 저들이 그처럼 알리지 아니한들 이미 낮 더위가 몹시 뜨거운 줄을 모르랴. 점차 들에 가득했던 안개가 걷히고 먼 마을 사당 앞에 세운 깃발이 마치 돛대처럼 보인다. 동쪽 하늘을 돌아보니 불빛 구름이 용솟음치며 붉은 불덩이가 옥수수 밭 저편에 솟을 듯 말 듯 천천히 온 요동벌에 꽉 차게 떠오른다. 땅 위의 오가는 말이며, 수레며, 나무며, 집이며, 털끝같이 보이는 것이 불덩이 속에 잠기기 시작했다.

신민둔의 시가나 점포가 요동보다 못지 않게 번화하다. 한 전당포(典當舖)에 들어가니 뜰 가득히 시렁 위에 포도 덩굴의 그늘이 영롱한데, 뜰 가운데엔 여러 가지 이상스러운 돌을 포개어 한 개의 가산(假山)이 이룩되었고, 그 산 앞에 높이 한 길이나 되는 항아리를 놓아서 연꽃 너덧 포기가 피어 있고, 땅을 파서 한 칸 나무통을 묻고 그 속에 뜸부기 한 쌍을 기른다. 산에는 종려추해당안석류(安石榴) 등 화분 여러 개가 놓여 있고, 휘장 밑엔 의자를 나란히 놓고 우람한 사나이 대여섯이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 일어나 읍하며, 앉기를 청하고 시원한 냉차 한 잔을 권한다. 점포 주인이 유금색(乳金色)으로 이룡(螭龍) 두 마리를 곱게 그린 붉은 종이 두 장을 끄내며 주련(柱聯)을 써달라 한다. 나는 곧,

 

쌍 목욕 원앙새는 나는 비단이요 / 鴛鴦對浴能飛繡

갓 피는 연꽃송이 말없는 신선일세 / 菡蓞初開不語仙

라고 쓰니, 보던 이들이 모두 필법이 아름답다고 칭찬이다. 주인은,

 

영감은 잠깐만 지체하셔요. 제가 다시 좋은 종이를 가져 오겠습니다.”

하고 일어나더니, 조금 뒤에 왼손에 종이를 들고 오른손엔 진한 먹 한 종지를 받쳐들고 오더니, 칼로 백로지(白鷺紙) 한 장을 끊어서 석 자 길이로 만들어 문 위에 붙일 만한 좋은 액자(額字)를 써 달라 한다. 내가 길을 오며 보니, 점포 문설주에 기상새설(欺霜賽雪)이란 네 글자가 써 붙여 있는 것이 가끔 눈에 띄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장사치들이 자기네들의 애초에 지닌 심지(心地)가 깨끗하기는 가을 서릿발 같고, 게다가 또 희디흰 눈빛보다도 더 밝음을 스스로 나타내기 위함이 아닐까.”

또 문득 생각하기를,

 

며칠 전에 난리보를 지날 때 어떤 점포 문설주에 붙인 이 넉자의 필법이 심히 기묘하기에, 내 한참 말을 멈추고 감상해 본즉, 상설(霜雪)이란 두 글자는 틀림없이 미해악체(米海嶽體)거니 하였더니, 이제 그 체대로 한번 써봄직도 하구나.’

하고, 먼저 붓끝을 먹물에 담가 붓을 낮추었다 높였다 하니 먹빛은 붉은 기운이 돌 듯, 짙고 연함이 골고루 퍼진 다음 종이를 펴고 왼쪽에서 오른편으로 쓰기 시작하여 ()’ 자가 이룩되었다. 이는 비록 미원장(米元章)의 것에야 비길 수 없겠지만 어찌 동 태사(董太史)만이야 못하랴 싶게 잘된 셈이다. 구경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 그들은 일제히,

 

글씨가 퍽이나 잘 되었습니다.”

하고 감탄한다. 다음 ()’ 자를 쓰니 더러는,

 

잘 되었다.”

하고, 칭찬하는 이도 있으나 다만 주인의 기색이 적이 달라지고 아까 ()’ 자 쓸 때처럼 절규(絶叫)하지 않는다. 나는 속으로,

 

정말 () 자야 늘 써본 적도 없어서 손에 익지 못하여 위  자는 너무 빽빽하게 썼고 아래 () 자는 지나치게 길어서, 그 마음에 들지 않을뿐더러 붓끝에서 짙은 먹물이 () 자의 왼편에 잘못 떨어져서 점차 번져 마치 얼룩진 표범처럼 되었으니, 이게 아마 그 자가 언짢게 생각하는 것이리라.’

하고, 짐짓 단숨에 잇달아서 ()’()’의 두 자를 쓰고 붓을 던지고 한번 주욱 읽어본즉, 큼직한 기상새설(欺霜賽雪)’ 네 글자가 틀림없다. 그런데 주인은,

 

이는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 없어요.”

하며, 머리를 저을 뿐이다. 나는,

 

그저 두고 보시오.”

하고, 몸을 일으켜 나오면서,

 

이런 궁벽한 곳의 장사치가 제 어찌 전날 심양 사람들만 할까. 저깐 놈이 글이 잘되고 못된 것은 어찌 안단 말야.’

하고, 혼자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날 해가 뜬 뒤에 바람이 온 누리를 뒤덮을 듯이 불어치더니, 오후에는 멎고 공중에 한 점 바람기도 없어 더위가 더욱 찌는 듯하다.

영안교(永安橋)에서부터 아름드리 통나무를 엮어서 다리를 놓았는데, 다리의 높이가 두세 길이가 되고, 넓이가 다섯 길은 되며, 양쪽의 나무 끝이 가지런하여 마치 한 칼로 밀어 놓은 듯싶다. 다리 밑 도랑엔 푸른 물이 끝없이 흐르고 진흙 벌이 윤기난다. 만일 이를 개간해서 논을 만든다면 해마다 몇만 섬의 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이르기를,

 

강희황제가 일찍이 경직도(耕織圖)와 농정(農政)에 대한 모든 글(농정전서(農政全書))을 지었으니, 지금 황제도 역시 노농가(老農家)의 자제이신만큼 이 산해관 밖의 푸른 듯 검은 기름진 땅이 상상전(上上田)이 될 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저 관 밖의 땅은 실로 자기네들이 일어난 고장이라, 벼가 기름지고 향기로우며 이밥이 차져서 백성이 혀에 감기도록 늘 먹어 버릇들인다면, 힘줄이 풀리고 뼈가 연해져서 용맹을 쓸 수 없게 될 것이라 차라리 수수떡과 산벼 밥을 늘상 먹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주림을 잘 참고 혈기를 돋우어 구복(口腹)의 사치를 잊어버리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함일 것이다. 비록 천 리의 기름진 땅을 버릴지언정 그들로 하여금 메마른 땅에 정의를 위해서 사는 백성이 되게 함이니, 이게 그의 더욱 깊은 생각일 것이다.”

한다.

길에서 보니 2리나 3리마다 시골 집들이 끊어졌다 또 이어지고, 수레와 말이 수없이 쏘다니고, 좌우의 점포들도 모두 볼 만하여 봉성에서 여기까지 비록 사치하고 검박한 것은 혹 다른 점도 없지 않겠지만, 그 규모는 모두 한결같을 뿐이다. 때로 휘딱휘딱 눈에 띄는 것이 실로 놀랄 만한 것, 기뻐할 만한 것들이 적지 않건만 이루 다 적을 수 없었다.

날이 저물어 먼 곳에 자욱이 번지는 연기를 바라보고 말을 채찍질하여 참()으로 달리는데 오이밭에서 한 늙은이가 나와 말 앞에 엎드려서 서너댓 칸 되는 초가집을 가리키면서,

 

이 늙은 게 혼자 길가에서 참외를 팔아서 오늘 내일 지내는데, 아까 당신네 조선 사람 40~50명이 이곳을 지나다가 잠시 쉬면서 처음엔 값을 내고 참외를 사 자시더니, 떠날 때 참외를 한 개씩 손에 쥐고 소리를 지르면서 달아나버렸습니다.”

한다. 나는,

 

그럼, 왜 그 우두머리 어른에게 하소연하지 않았는고.”

하니, 늙은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지 않아도 그리하였더니 그 어른이 귀먹고 벙어린 척하시는데 나 혼자 어찌 그 40~50명 힘센 장정을 당하오리까. 이제도 쫓아가니까 한 사람이 가는 길을 막으며 참외로 냅다 저의 면상을 갈기니, 눈에선 별안간 번갯불이 일고 아직도 참외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하고, 결국은 청심환을 달라고 조르기에 없다고 했더니, 그는 창대의 허리를 꼭 껴안고 참외를 팔아달라고 떼를 쓰고는 참외 다섯 개를 앞에 갖다 놓는다. 나는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라 한 개를 벗겨서 먹어본즉, 향기와 단맛이 비상하므로 장복더러 남은 네 개를 마저 사가지고 가서 밤에 먹기로 하고, 그들에게도 각기 두 개씩을 먹였다. 모두 아홉 개인데, 늙은이가 80()을 달라고 떼를 쓴다. 장복이 50문을 주니 골을 내며 받지 않는다. 창대와 둘이 주머니를 털어 세어본즉 모두 71문이라, 주기로 하고, 나는 먼저 말에 오르고 장복을 시켜 주게 하였더니, 장복이 주머니를 털어 뵈자 그제야 가만 있다. 그는 애초에 눈물을 흘려서 가련한 빛을 보인 다음에, 억지로 참외 아홉 개를 팔고서 1백 문에 가까운 비싼 값을 내라고 떼를 쓰니 심히 통탄할 만한 일이며, 그보다도 우리나라 하정배들이 길에서 못되게 구는 것이 더욱 한스러운 노릇이다.

어두워서야 참에 이르렀다. 참외를 내어 청여(淸如 내원의 자)계함 들에게 주어 저녁 뒤 입가심으로 먹게 하고, 길에서 하인들이 참외를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한즉, 여러 마두들은,

 

도무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 외딴집 오이 파는 늙은 것이 본시 간교하기 짝이 없어, 서방님이 홀로 떨어져 오시니까 거짓말을 꾸며 가지고 짐짓 가엾은 꼴상을 지어서 청심환을 얻으려던 것이죠.”

한다.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속은 것을 깨닫고, 그 참외 사던 일을 생각하니 분하기 짝이 없다. 대체 그 갑작스러운 눈물은 어디서 솟았을까. 시대(時大)의 말이,

 

그 놈은 바로 한인(漢人)일 겝니다. 만인(滿人)은 실로 그다지 요악한 짓은 아니합니다.”

한다.

 

 

[D-001]기상새설(欺霜賽雪) : 희기가 서리를 능가하여, 백설을 걸고 내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D-002]미해악체(米海嶽體) : 곧 미불(米芾)의 글씨체. 해악은 호, 원장(元章)은 자임.

[D-003]동 태사(董太史) : 동기창(董其昌). 태사는 그의 벼슬.

[D-004]경직도(耕織圖) : 본시 남송의 누숙(樓璹)이 경도(耕圖) 21과 직도(織圖) 24를 그려서 고종(高宗)에게 바쳤던 것을, () 성조 때에 초병정(焦秉貞)냉매(冷枚)진매(陳枚) 등에게 명하여 각기 한 책씩을 짓게 하였다. 특히 초병정이 그린 경도와 직도 각기 23으로 된 것이 아름다웠으므로, 판각하여 군신(羣臣)에게 나누어 주었다.

[D-005]시대(時大) : ‘일재본에는, 창대(昌大)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4일 경인(庚寅)

 

 

개다.

백기보(白旗堡)에서 소백기보(小白旗堡)까지 12, 평방(平房) 6, 일반랍문(一半拉門) 12리인데, 일반랍문은 일판문(一板門)이라고도 한다. 거기서 또 곡산둔(靠山屯) 8, 이도정(二道井) 12, 모두 50리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도정에서 은적사(隱寂寺)까지 8, 고가포(古家舖) 22리다. 여기서 다리[梁路]가 다하다. 다시 고정자(古井子) 1, 십강자(十扛子) 9, 연대(煙臺) 6, 소흑산(小黑山) 4, 모두 5리다. 이날 1백 리를 갔다. 소흑산에서 묵다.

이날은 마침 말복(末伏)이라 늦더위가 더욱 심할 것이고 또 참()이 멀어서 일행이 새벽에 떠났다. 나와 정 비장변 주부가 먼저 떠났다. 길에서 어제 해돋이 광경을 이야기했더니, 두 사람이 꼭 한번 구경하고자 하였으나 막상 해가 뜰 무렵엔 동녘 하늘에 구름과 안개가 개지 아니하여 광경이 어제보다 훨씬 못하다. 해가 이미 한 길이나 땅 위에 솟았을 때 그 밑의 구름이 여러 가지 금빛 용이 되어, 뛰고 솟고 꾸불거리고, 뒤눕는 듯, 신출귀몰하여 잠시도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은데, 해는 다만 천천히 높은 공중으로 향해 오른다.

요양에서부터 조그마한 성과 못을 많이 거쳐 왔으나,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이른바, ‘3리마다 성이요 5리마다 곽()이라.’ 함은, 반드시 모두 군이나 읍의 청소(廳所)가 있음이 아니고, 그저 시골의 취락에 지나지 않는 곳이었으나, 그 제도는 큰 성과 다름이 없다.

일판문과 이도정은 땅이 움푹 파인 곳이어서 비가 조금만 와도 시궁창이 되고, 봄에 얼음 풀릴 무렵에는 잘못 시궁창에 빠지면, 사람도 말도 삽시에 보이지 않게 되어 지척에 있어도 구출하기 어려우므로, 작년 봄에 산서(山西) 장사꾼 20여 명이 모두 건장한 나귀를 타고 오다 일판문에 이르러 한꺼번에 빠졌으며, 우리나라 마부 역시 두 사람이 빠져버렸다 한다. 그리고 당서에 이르기를,

 

태종이 고구려를 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오는 길에 발착수(渤錯水)에 이르러 80리 진펄에 수레가 통할 수 없으므로,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양사도(楊師道 당 고조(唐高祖)의 사위) 등이 군정 1만 명을 거느리고 나무를 베어 길을 쌓고 수레를 잇달아 다리를 놓을 제 태종이 말 위에서 손수 나무를 날라서 일을 도왔고, 때마침 눈보라가 심해서 횃불을 밝히고 건넜다.”

하였으니, 발착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요동 진펄 천 리에 흙이 떡가루처럼 보드라워서 비를 맞으면 반죽이 되어 마치 엿 녹은 것처럼 되어, 자칫하면 사람의 허리와 무릎까지 빠지고 겨우 한 다리를 빼면 또 한 다리가 더 깊이 빠지게 된다. 이에 만일 발을 빼려고 애쓰지 않으면 땅 속에서 마치 무엇이 있어서 빨아들이는 듯이 온 몸이 묻혀서 흔적도 없어지게 된다. 지금은 청()에서 자주 성경으로 거둥하므로, 영안교에서부터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들어서 진펄을 막되, 고가포(古家舖) 밑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치는데, 2백여 리 사이에 한결같이 뻗쳤으니 이는 비단 물력(物力)이 그처럼 굉장할뿐더러, 그 나무끝이 한 군데도 들쭉날쭉한 것이 없이 2백 리 사이에 두 쪽이 마치 한 먹줄로 퉁긴 듯이 되었으니, 그 일솜씨의 정미로움을 이로써 짐작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민간에서 항용 쓰는 물건들이라도 이를 본받아서 그 규모가 대체로 같으니, 이는 덕보(德保 홍대용(洪大容)의 자)가 이른바 중국의 심법(心法)을 우리로선 당하지 못할 것이라 한 것이 바로 이런 일을 말한 것이리라. 이 다리는 3년 만에 한 번씩 고친다 한다. 그리고 당서의 발착수는 아마 일판문이도정의 사이를 말한 것인 듯싶다.

아골관(鴉鶻關)에서부터 가끔 마을 가운데 높다랗게 흰 패루(牌樓)를 세운 것이 보이는데 이는 초상난 집들이다. 이는 삿자리로 지었는데 기왓골이나 치문(鴟吻)이 여느 성조나 조금도 다름없으며, 높이가 너덧 길이고 그 집 문앞에서 열 걸음쯤 떨어져 세웠는데, 그 밑에는 악공들이 늘어앉아서 풍류를 아뢴다. 바리 한 쌍, 피리 한 쌍, 쇄납(嗩吶) 한 쌍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객이 문에 이르면 요란하게 불고 두드린다. 상식(上食)이나 제전이 시작되자 안에서 곡성이 일면 밖에선 반드시 음악으로 서로 화답하는 듯이 야단들이다. 내가 십강자에 이르러 쉬는 사이에 정()() 둘과 함께 거리를 거닐다가 한 삿자리로 만든 패루에 이르러 바야흐로 그 제도를 상세히 구경하려 할 즈음에 요란스러운 음악이 시작된다. 둘은 엉겁결에 귀를 막고 도망치고, 나 역시 두 귀가 먹을 것 같아서 손을 흔들어 소리를 멈추라 하여도 영 막무가내로 듣지 않고, 다만 힐끔힐끔 돌아보기만 하고 그냥 불고 두드리고 한다. 나는 상가의 제도가 보고 싶어서 발을 옮겨 대문 앞에 이르니, 문 안에서 한 상주(喪主)가 뛰어나오더니 내 앞에 와 울며 대막대를 내던지고, 두 번 절하는데 엎드릴 땐 머리가 땅에 닿도록 조아리고 일어설 땐 발을 구르며 눈물이 비오듯 하면서,

 

창졸에 변을 당했사오니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수없이 울부짖는다. 상주 뒤에 5~6명이 따라 나오는데, 모두 흰 두건을 썼으며 나를 양쪽에서 부축하고 문 안으로 들어가니 상주 역시 곡을 멈추고 따라 들어온다. 때마침 건량마두(乾糧馬頭) 이동(二同)이 안으로부터 나오기에, 나는 하도 반가워서 엉겁결에,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하니, 이동은,

 

소인은 죽은 사람과 동갑이라서 본시 서로 친절하게 지냈습니다. 그래 아까 들어와서 그 처를 조문하고 나오는 길입니다.”

한다. 나는,

 

조문례를 어떻게 하는 거야.”

한즉, 이동은,

 

상주의 손목을 잡고 너의 어른이 돌아가셨다지야 할 뿐입니다.”

하고, 이동 역시 나를 따라 다시 들어오면서,

 

백지(白紙) 권이나 주지 않으면 안 되오니 쇤네가 마련해 드리오리다.”

한다. () 앞에 삿자리로 큰 집을 세웠는데 그 제도가 매우 이상스러우며, 뜰에는 흰 베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내외(內外) 복인들을 따로 나누어 두었다. 이동은,

 

주인이 주과 대접을 하오리니 좀 지체하시고 너무 빨리 일어나시지 마십시오. 만일 자시지 않으면 큰 수치랍니다.”

한다. 나는,

 

이왕 들어왔으니 이것 역시 봄직하다만, 상주가 조문을 받으려면 너무 괴롭겠구나.”

하니, 이동은,

 

아까 벌써 조문은 끝났사오니 다시 조문하실 것 없습니다.”

하고, 이내 삿자리집을 가리키며,

 

이게 빈소(殯所)올시다. 남녀가 모두 집을 비우고 이 빈소로 옮겨 옵니다. 그리고 포장 속에 각기 기()()의 복제(服制)를 따라 장소가 마련되었으며, 장사를 치른 뒤에 제마다 돌아간답니다.”

한다. 포장 속에서 한 여인이 가끔 머리를 내밀고 엿보는데, 흰 베로 머리를 싸고 제법 자태가 흐른다. 이동은,

 

저 이는 죽은 이의 딸이온데, 산해관에 살고 있는 부상의 아내랍니다.”

하고, 말해 준다. 이윽고 상주가 빈소에서 나와 걸상에 나앉고, 흰 두건을 쓴 사람 둘이 국수 두 그릇, 과실 한 쟁반, 두부 한 소반, 채소 한 쟁반, 차 두 잔, 술 한 주전자를 탁자 위에 벌여 놓고, 내 앞에 빈 잔 세 개를 놓으며 탁자 저편엔 빈 의자를 가져 오고, 잔 세 개를 나란히 늘어놓고는 이동더러 앉기를 청한다. 이동은 굳이 사양하면서,

 

저의 상전이 계신데 어찌 감히 마주 앉을 수 있으리까.”

하고, 곧 밖으로 나가더니 백지 한 권과 돈 일초(一鈔)를 갖고 들어와서 상주 앞에 놓고 내가 부의(賻儀)하는 뜻을 말하니, 상주가 걸상에서 내려와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히 사례한다. 나는 대충 음복하는 시늉만 하고 곧 일어나 나오니, 상주가 문 밖까지 나와서 전송한다. 문 앞 양쪽 상랑(廂廊)에서는 방금 대말을 만들어 종이로 옷을 입히고 있다. 이윽고 사행이 이곳에 와서 쉬고, 부사도 잇따라 이르러 길가에 가마를 내렸다. 내가 아까 조상하던 이야기를 하니 모두 허리를 잡고 웃는다.

이도정은 마을이 꽤 번화롭다. 은적사는 굉장한 절인데 많이 헐었다. ()에는 조선 사람 시주(施主) 성명들이 새겨졌는데, 이는 모두 의주 상인인 것 같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보이는데, 멀리 서북을 가로지른 것이 마치 푸른 장막을 드리운 것 같고, 뫼 봉우리가 오히려 보일락말락한다. 혼하를 건넌 뒤로 무릇 다섯 번 강을 건넜는데 모두 배로 건넜다. 연대(煙臺)는 이곳으로부터 시작된다. 오리마다 대()가 하나씩 있는데, 원경(圓徑) 10여 장이요, 높이가 대여섯 발이며, 쌓은 제도가 성과 다름이 없고, 그 위엔 총구멍을 뚫고 여장(女墻 성 위에 또 쌓은 담장)을 둘렀다. 남궁(南宮) 척계광(戚繼光)이 만들었다는 팔백망(八百望)이 곧 이것이다. 소흑산은 들 가운데 민 듯이 편평하며, 조금 불룩하고 주먹처럼 생긴 작은 산이라 하여 이 이름을 지었다 한다. 인가가 즐비하고 점포가 번화한 품이 신민둔보다 못지 않고, 푸른 들 가운데 말노새양 수천백 마리가 떼를 지어 있으니, 역시 큰 곳이라 이를 수밖에 없다. 일행 하인들이 으레 이 소흑산에서 돼지를 삶아서 서로 위로하므로 장복창대 역시 밤에 가서 얻어먹겠다고 여쭙는다.

이날 밤 달빛이 낮같이 밝고 더위는 이미 한물 간 모양이다. 저녁 식사 후에 곧 밖으로 나가서 아득히 먼 들판을 바라보니, 푸른 내는 땅에 깔리고 소와 양이 제각기 집으로 돌아간다. 점방들은 아직 모두 문을 닫지 않았으므로 그 중 한 집에 들어가니, 뜰 가운데 시렁을 높이 매고 삿자리로 덮어 두었다가 밑에서 끈을 당기면 걷히어서 달빛을 받게 되었다. 이상스러운 화초가 달빛 아래 얽히어 있다. 길에서 놀던 사람들이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뒤따라 들어와서 뜰에 가득하다. 다시 일각문을 들어서니 뜰 넓이가 앞 뜰과 같고, 난간 아래 몇 그루 푸른 파초가 심겨 있으며, 네 사람이 탁자를 가운데 놓고 삥 둘러앉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탁자를 차지하고 신추경상(新秋慶賞)’이란 넉 자를 쓴다. 자줏빛 먹 붉으레한 종이 위에 흰 달빛이 비끼어서 똑똑히 보이지는 않으나, 붓놀림이 매우 간삽하여 겨우 글자 모양을 이루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저 필법을 보매 저토록 옹졸하니, 내가 정작 한번 뽐낼 때로구나.’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그 글씨를 다투어가면서 구경하고, 곧 당 앞 한가운데 문설주 위에 붙였으니, 이는 대개 달 구경에 축하하는 방문(榜文)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일어나 당 앞으로 가서 뒷짐을 지고 구경을 한다. 아직 탁자 위엔 남은 종이가 있기에 내가 걸상에 가 앉아서 남은 먹을 진하게 묻혀 시비를 가리지 않고 커다랗게 신추경상(新秋慶賞)’이라 써 갈겼다. 그 중 한 사람이 내가 쓴 글씨를 보더니 뭇 사람들에게 소리쳐 모두 탁자 앞으로 달려왔다. 서로 웃고 떠들며,

 

조선 사람이 글씨 참 잘 쓰네.”

하기도 하고, 혹은,

 

동이(東夷)도 글씨가 우리와 같네.”

하고, 혹은,

 

글자는 같지만 음은 다르다네.”

한다. 나는 붓을 처억 던지고 일어섰다. 여럿이 내 손목을 잡으면서,

 

영감은 잠깐만 앉으셔요. 존함은 뉘시오니까?”

하기에, 내가 성명을 써 보이니 그들은 더욱 기뻐한다. 내가 처음 들어올 때엔 반가워하지 아니할뿐더러 본체만체 하더니, 이제 내 글씨를 본 뒤에 그 기색을 살펴보매 너무 분에 지나치게 반기면서 급히 차 한 잔을 내오고, 또 담배를 붙여 권한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염량(炎凉)이 달라진다. 그들은 모두 태원(太原) 분진(汾晉)에 사는 사람으로, 지난해에 이곳에 와서 수식포(首飾舖)를 갓 열었는데, ()비녀귀걸이가락지[彄環] 등속을 사들이고 가게 이름을 만취당(晩翠堂)’이라 한다. 그 중 셋은 성이 최(), 둘은 유()()인데 모두 문필(文筆)이 극히 짧아서 말할 것도 없으나, 곽생(霍生)이 가장 나아 보인다. 다섯 사람이 다 나이 서른 남짓하고 호건하기가 마치 노새 같으며, 얼굴들은 모두 희멁고 눈매가 서늘하나 맑고 아담한 기는 전혀 없다. 요전 오()() 사람들과는 매우 다르다. 지방 풍토의 같지 아니함을 이로써 넉넉히 알 수 있으며, 산서에서 장수[]가 잘 난다더니 과연 빈 말이 아닌 듯싶다. 나는 곽생에게,

 

당신이 태원에 살고 계시다니, 귀향(貴鄕) 곽태봉(郭泰峰), 아호는 금납(錦衲)이란 어른을 아시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곽생은,

 

모릅니다.”

하고는, 이내 곽()과 곽()의 두 글자에다 점을 치면서,

 

이는 곽 태조(郭太祖 후주(後周)의 태조 곽위(郭威))의 곽() 자요, 나는 곽거병(霍去病 한 무제(漢武帝) 때의 명장)의 곽() 자입니다.”

한다. 나는 웃으면서,

 

왜 분양(汾陽)박륙(博陸)을 끌어 오지 않고, 하필이면 주 태조나 표요(驃姚)로써 증명하시오.”

한즉, 곽생이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잠자코 있다. 아마 제 생각엔 내가 만인들처럼 곽()()을 혼용할까 보아서 이렇게 밝히는 듯싶다. 곽생은,

 

등주(登州)에서 뭍에 내리셨으면 어찌해서 이리로 오셨습니까?”

하고, 말머리를 바꾼다. 나는,

 

아니, 거기로 오지 않았소. 육로 3천 리로 바로 북경까지 대어가는 길이오.”

하니, 곽생은,

 

조선은 곧 일본(日本)과 같습니까?”

한다. 마침 한 사람이 붉은 종이를 가지고 와서 글씨를 써 달라 하고는 저의 아는 사람끼리 몰려와서 모이는 이들이 점점 늘어간다. 내가,

 

붉은 종이엔 글씨가 잘 되지 않으니 계란빛 종이를 가져 오시오.”

하니, 한 사람이 바삐 가더니 분지(粉紙) 몇 장을 가져 왔다. 나는 그것을 끊어서 주련(柱聯)을 만들어,

 

옹은 산과 숲을 즐기노니 / 翁之樂者山林也

객도 물과 달을 아시나요 / 客亦知否水月乎

라 썼더니, 그제야 여러 사람들이 좋아라고 환성을 지른다. 서로 다투어 먹을 갈고 왔다갔다 분주하니 모두 종이를 구하느라고 그러는 모양이다. 나는 이에 종이를 펴고 쓰며 쉴새 없이 붓을 달리기를 마치 소지(所志)에 제사(題辭 고소장)를 쓰듯 하니, 한 사람이 나에게 묻되,

 

영감은 술을 자실 줄 아십니까?”

하기에, 나는,

 

한 잔 술이야 어찌 사양하리오.”

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크게 한바탕 웃고 곧 따끈한 술 한 주전자를 가져 와서 연거푸 석 잔을 권한다. 나는,

 

주인은 어찌 아니 마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들은,

 

하나도 먹을 줄 아는 이가 없소이다.”

한다. 이에 모여 구경하던 이들이 서로 능금과 사과와 포도 등을 가져다 내게 권한다. 나는,

 

달빛이 비록 밝다 해도 글씨 쓰기엔 방해가 되니 촛불을 켜는 게 좋겠소.”

하니, 곽생은,

 

하늘 위에 저 한 조각 거울이 달렸으니 이 세상에 천만 개의 등불보다 낫지 않소이까.”

하고, 한 사람은,

 

영감, 눈이 좋지 못하십니까?”

하기에, 나는,

 

그렇소.”

하니, 곧 네 가지 촛불을 밝혀 준다. 나는 갑자기 생각하기를,

 

어제 전당포에서 기상새설(欺霜賽雪)’이란 넉 자를 썼는데 주인이 왜 갑자기 좋아하지 않았는지 오늘은 단연코 그 설치를 해 보렸다.”

하고, 곧 주인더러,

 

주인댁에서는 점포 머리에 달 만한 액자(額字)가 어떨까요?”

하니, 그들은 일제히,

 

이것이야말로 더욱 좋겠습니다.”

한다. 내가 드디어 기상새설(欺霜賽雪)’이란 넉 자를 써 놓은즉, 여럿이 서로 쳐다보는 품이 어제 전당포 주인 기색과 한가지로 수상스럽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것, 또 이상스러운 일이구나.’ 하고, 나는 또,

 

이건 아무런 상관없는 겁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들은,

 

그렇습니다.”

한다. 곽생은,

 

저의 집에선 오로지 부인네들 수식을 매매하옵고 국숫집은 아니옵니다.”

한다. 나는 비로소 내 잘못을 깨달았다. 전에 한 일이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나도 모르는 바 아니로되 애오라지 심심풀이로 써보았을 뿐이오.”

하여 얼버무리고 나서, 전일 요양 점포에서 본 계명부가(鷄鳴副珈 닭이 울자 수식을 갖춤)’라는 금자로 쓴 간판이 퍼뜩 생각나기에, 이와 그와는 한가지일 듯싶어서 이에 부가당(副珈堂)’이란 석 자를 써 주었더니, 그들이 소리치며 좋아해 마지않는다. 곽생은,

 

이게 무슨 뜻이옵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이제 귀댁에선 부인네들의 수식을 전문으로 한다 하니, 시경(詩經)에 이른바 부계육가(副笄六珈)란 곧 이것이오.”

하니, 곽생은,

 

저의 집을 빛내주신 그 은덕을 무엇으로 갚아 드리리까.”

하고, 사례한다. 다음날 북진묘(北鎭廟)를 구경하기로 되었으므로 일찍 돌아와서 일행 여러 사람에게 아까 일을 이야기하니 허리를 잡지 않은 이가 없다. 그 뒤로는 점포 앞에 기상새설(欺霜賽雪)’이란 넉 자를 볼 때마다 이것이 반드시 국숫집이로구나 하였다. 이는 그 심지의 밝고 깨끗함을 이름이 아니요, 실로 그 면발이 서릿발처럼 가늘고 눈보다 희다는 것을 자랑함이다. 여기서 면발[]이란 곧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진말(眞末)’이다. 청여계함, 조 주부 달동과 함께 다음날 북진묘에 가기로 약속했다.

 

 

[D-001]연대(煙臺) : 옛날의 통신 기관으로, 봉화를 놓던 축대.

[D-002]3리마다 …… ()이라 :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

[D-003]장손무기(長孫無忌) : 당의 명신. 태종의 고명(顧命)을 받들어 저수량(褚遂良)과 함께 고종(高宗)을 섬겼다.

[D-004]치문(鴟吻) : 큰 전각 같은 지붕의 용마루 끝에 장식하는 물형.

[D-005]쇄납(嗩吶) : 애초에 회족(回族)이 사용하던 것인데, 본명은 소랄(蘇㖠) 또는 쇄랄(瑣㖠).

[D-006]상식(上食) : 초상집에서 조석으로 음식을 영좌에 차려 놓는 것이다.

[D-007]제법 …… 흐른다 : 이 한 구절은 일재본에만 있는 것을 추록하였다.

[D-008]척계광(戚繼光) : 명말(明末)의 저명한 군사가요, 학자. 남궁은 그의 호. 기효신서(紀效新書),이융요략(莅戎要略) 등의 저서가 있다.

[D-009]분양(汾陽) : 당의 안녹산(安祿山)사사명(史思明)의 난을 평정한 명장 곽자의(郭子儀). 분양은 봉호.

[D-010]박륙(博陸) : 곽거병의 이모제(異母弟) 곽광(霍光). 박륙은 봉호.

[D-011]표요(驃姚) : 곽거병이 일찍이 표요 교위(驃姚校尉)를 지냈으므로 이른 말이다.

[D-012]옹은 …… 아시나요 : 앞 구절은 구양수(歐陽脩) 취옹정기(醉翁亭記)에서, 뒷 구절은 소식(蘇軾) 적벽부(赤壁賦)에서 각기 따왔다.

[D-013]부계육가(副笄六珈) : 비녀에 뒤이어서 온갖 수식을 꽂는다는 뜻.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성경가람기(盛京伽藍記)

 

 

성자사(聖慈寺)는 숭덕(崇德 청 태종(靑太宗)의 연호) 2년 무인(戊寅)에 세웠다. 전각은 깊숙하고도 장려(壯麗)하다. 법당은 돈대 높이가 한 길, 두루 돌난간을 세우고, 전각 위엔 부시(罘罳)로 둘러싸고, 세 그루 늙은 소나무 가지가 서로 엉켜서 푸른 그림자가 뜰에 가득하여 어둠침침한 빛이 고요한 속에 잠겨 있다. 비석 둘이 있는데, 하나는 태학사(太學士) 강림(剛林)이 지은 글로 뒷면엔 만주글이고, 또 하나는 앞뒷면이 모두 몽고 서번(西番)의 글자이다. 지키는 중들 중에는 라마(喇麻) 중 몇 명이 있고, 전 속엔 8백 나한(羅漢)이 있는데, 키가 겨우 몇 치씩밖에 되지 않으나 하나하나가 모두 정묘하다. 강희 황제가 손수 작은 탑 수백을 만들었는데 크기가 주사위만하고, 그 아로새긴 솜씨가 기묘하여 신경(神境)에 들어갔고 탑 높이가 10여 길인데,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났으며 사자를 새기었다.

만수사(萬壽寺)는 강희(康熙) 55년 병신(丙申)에 중수하였다. 절 앞에 패루 하나가 있는데, 현판에는 만세무강(萬歲無彊)’이라 하였고, 전각이 웅장하고 화려하기는 성자사를 능가하나 다만 뜰에 가득한 소나무 그늘이 없었다. 비석 둘이 있으며 정전(正殿)에는 강희황제가 쓴 요해자운(遼海慈雲)’이란 액자가 붙어 있고, 향정(香鼎)이며, 보로(寶爐), 그 밖에도 보물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겠다. 라마 중 10여 명이 있는데, 모두 누런 옷에 누런 벙거지를 썼으며 사납고 헌칠해 보인다.

실승사(實勝寺)는 현판에 연화정토(蓮花淨土)라 하였고, 숭덕 3년에 세웠다. 지붕 위엔 모두 푸르고 누런 유리기와로 이었다. 이는 청 태종(淸太宗)의 원당(願堂)이다.

 

 

[C-001]성경가람기(盛京伽藍記)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을 성경잡지와 각립시켰으나, 그릇된 것이다.

[D-001]부시(罘罳) : 큰 건물에서 참새가 들어 보금자리 트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물 같은 것으로 처마 밑을 둘러친 것.

[D-002]서번(西番) : 서장(西藏)을 비롯하여 중국 아시아 등지 서역의 모든 국가의 총칭.

[D-003]라마(喇麻) : 몽고서장 등지에서 성행하는 불교의 한 종파.

[D-004]병신(丙申) : ‘박영철본에는 병술(丙戌)로 되었으나, 그릇된 것이다.

[D-005]실승사(實勝寺) : ‘일재본에는 보승사(寶勝寺)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산천기략(山川記略)

 

주필산(駐蹕山)은 요양의 서남에 있다. 애초 이름은 수산(首山)이더니,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러 왔을 때 이 산 위에 며칠 머물면서 돌에 그 공덕을 새기고 주필산이라 이름을 고쳤다.

개운산(開運山)은 봉천부(奉天府) 서북에 있다. 여러 산봉우리가 둘러 있고 많은 물의 근원이 거기서 나온다. 곧 청()의 영릉(永陵)이다.

철배산(鐵背山)은 봉천부 서북에 있다. 그 위엔 계()() 두 성이 있다 한다.

천주산(天柱山)은 승덕현(承德縣) 동쪽에 있다. 곧 청의 복릉(福陵 청 태조의 능)이 있는 곳이다. 진사(晉史)에 이른바 동모산(東牟山)이 곧 이것이다.

융업산(隆業山)은 승덕현 서북에 있다. 여기에는 청()의 소릉(昭陵 청 태종의 능)이 있다 한다.

십삼산(十三山)은 금주부(錦州府) 동쪽에 있다. 봉우리가 열 셋이 있으므로 채규(蔡珪)의 시에,

 

여산이 다한 곳에 다시금 열세 봉우리 / 閭山盡處十三山

갯마을 집집마다 그림 사이 보이누나 / 溪曲人家畵幅間

라고 하였다.

발해(渤海)는 봉천부 남쪽에 있다. 성경통지(盛京統志)에 이르기를,

 

바다의 옆으로 나간 줄기를 발()이라 한다.”

하였다. 요동 2천 리 벌이 뻗쳤는데 그 남쪽이 곧 발해이다.

요하(遼河)는 승덕현의 서쪽에 있다. 곧 구려하(句驪河)인데 혹은 구류하(枸柳河)라고도 한다. 한서(漢書) 수경(水經)에는 모두 대요수(大遼水)라 하였다. 요수의 좌우가 곧 요동요서의 갈리는 경계이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칠 적에 진펄 2백여 리에 모래를 깔아 다리를 놓아서 건너갔다.

혼하(渾河)는 승덕현 남쪽에 있다. 일명(一名) 소요수(小遼水), 혹은 아리강(阿利江)이라 하고, 또는 헌우록수(軒芋濼水)라고도 한다. 장백산에서 발원하여 태자하(太子河)와 합하고, 다시 요수와 합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태자하는 요양 북쪽에 있다. 변문(邊門) 밖 영길주(永吉州)에서 발원하여 변문 안으로 흘러들어 혼하요하와 합쳐 삼차하(三叉河)가 되었다. 세상에 전하기를,

 

연 태자(燕太子) ()이 도망하여 이곳까지 온 것을 마침내 머리를 베어 진()에 바쳤으므로 후인이 이를 가엾이 여겨 이 물 이름을 태자하라 하였다.”

한다. 소심수(小瀋水)는 승덕현 남쪽에 있다. 동관(東關) 관음각(觀音閣)에서 발원하여 혼하로 들어간다. 물 북편을 양()이라 하므로 심양(瀋陽)의 이름이 대체로 여기에서 난 것이라 한다.

 

산천기략후지(山川記略後識)

 

내가 이제 지나온 산하는 다만 그 지방 사람들의 구전(口傳)하는 말과, 또 길가는 사람들의 가르침에 의하였을뿐더러 자주 다니는 우리 하인들에게 물어본 것이었는데, 대체로는 생각나는 대로 대답한 것이어서 도무지 상세하지 않다. 화표주는 요동의 고적인데, 그나마 어떤 이는 성 안에 있다 하고 혹은 성 밖 10리에 있다 하니, 다른 것도 이를 미루어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C-001]산천기략(山川記略)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을 성경잡지와 각립시켰으나, 그릇된 것이다.

[D-001]영릉(永陵) : 청 태조의 부조(父祖) 4대의 능이 있다.

[D-002]진사(晉史) : 당 태종의 명찬인 진서(晉書)를 이름인 듯하다.

[D-003]채규(蔡珪) : ()의 학자. 자는 정보(正甫).

[D-004]성경통지(盛京統志) : 지은이는 알 수 없다. 다른 본에는 성경통지(盛京通志)로 되었다.

[D-005]수경(水經) : 당서(唐書) 중에 있는 상흠(桑欽)이 지은 서명.

[D-006]산천기략후지(山川記略後識) : 다른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주설루본에 있으므로 이를 좇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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