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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관내정사(關內程史)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관내정사(關內程史) 박지원(朴趾源, 1737∼1805)     관내정사(關內程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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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관내정사(關內程史) 박지원(朴趾源, 17371805)

 

 

관내정사(關內程史)

 

관내정사(關內程史) 7 24일 경자에 시작하여 8 4일 경술에 그쳤다. 모두 11일 동안이다.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연경까지 이르기가 모두 6 40리다.

 

1. 가을 7 24일 경자(庚子)

2. 25일 신축(辛丑)

3. 열상화보(冽上畵譜)

4. 26일 임인(壬寅)

5. 이제묘기(夷齊廟記)

6. 난하범주기(灤河泛舟記)

7. 석호석기(射虎石記)

8. 27일 계묘(癸卯)

9. 28일 갑진(甲辰)

10. 호질(虎叱)

11. 호질후지(虎叱後識)

12. 29일 을사(乙巳)

13. 30일 병오(丙午)

14. 8 1일 정미(丁未)

15. 동악묘기(東嶽廟記)

16. 2일 무신(戊申)

17. 3일 기유(己酉)

18. 4일 경술(庚戌)

 

 

 

가을 7 24일 경자(庚子)

 

 

개다.

홍화포에서 떠나 범가장(范家庄)까지 20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범가장에서 양하제(楊河堤)까지 3, 대리영(大理營) 7, 왕가령(王家嶺) 3, 봉황점(鳳凰店) 2, 망해점(望海店) 8, 심하역(深河驛) 5, 고포대(高舖臺) 8, 왕가포(王家舖) 2, 마붕포(馬棚舖) 7, 유관(楡關) 3, 모두 48리이다. 이날에는 68리를 걸었다. 유관(楡關)에서 묵다. 유관은 혹은 유관(渝關)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임유현(臨渝縣)이다.

관내(關內)의 풍기는 관동에 비하여 아주 달라서 산천이 밝고 아름다우며 굽이굽이 그림 같다. 홍화포로부터 비로소 돈대가 있어 5리에 하나, 10리에 하나씩인데, 그 제도는 네모지고 바르며, 높이는 다섯 길 그 위에 집 3칸을 짓고, 곁에는 세 길 되는 깃대를 세웠으며, 돈대 밑에 다시 집 5칸을 지었다. 담 위에는 활집살통과 표창(熛鎗)화포(火砲) 등을 그려 붙였고, 집 앞에는 도()()()()을 늘어 꽂았으며, 무릇 봉화 드는 것과 망보는 일들에 관한 여러 가지 조목을 써서 벽에 둘러 붙였다.

 

 

[C-001]가을 : ‘수택본에는 이 위에 성상 4년 경자 청 건륭 45이라는 원주(原註)가 있으나, 여기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5일 신축(辛丑)

 

 

개다.

유관에서 떠나 영가장(營家庄)까지 3, 상백석포(上白石舖) 2, 하백석포(下白石舖) 3, 오가장(吳家庄) 3, 무령현(撫寧縣) 9, 양장하(羊腸河) 2, 오리포(午哩舖) 3, 노가장(蘆家庄) 2, 시리포(時哩舖) 3, 노봉구(蘆峯口) 5, 다붕암(茶棚菴) 5, 음마하(飮馬河) 3, 배음보(背陰堡) 3, 모두 46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배음보에서 쌍망점(雙望店)까지 8, 요참(要站) 5, 달자영(㺚子營) 3, 부락령(部落嶺) 6, 노룡새(盧龍塞) 3, 여조(驢槽) 13, 누택원(漏澤園) 3, 영평부(永平府) 2, 모두 43리이다. 이날 89리를 걸었다. 영평부에서 잤다.

무령현을 지나자 산천이 더욱 명랑(明朗)한 기운을 띠고, 성안 거리에는 집집마다 금편(金篇)옥음(玉音)이요, 패루가 곳곳이 휘황찬란하다. 길 오른편 한 문 앞에 부사와 서장관의 하인들이 가마를 멎고 있다. 이는 곧 서 진사(徐進士) 학년(鶴年)의 집이다. 부사와 서장관이 지금 이 집에서 구경을 하고 있다 하기에 나도 말에서 내려 들어가니, 그 집이 사치스럽고 그릇들의 진기함이 과연 전날 듣던 바와 다름없다. 학년은 십여 년 전에 죽고, 두 아들이 있어서 맏은 조분(苕芬)이요, 둘째는 조신(苕信)인데, 조신은 제법 문필(文筆)에 능하여 사고전서(四庫全書)를 꾸미는 데 서사원(書寫員)으로 뽑혀서 방금 북경에 가 있고, 조분만이 집에 있긴 하나 문필이 매우 짧다. 당에 가득히 과친왕(果親王 청 세종의 일곱째 아들)아극돈(阿克敦 청 고종 때의 명신. 문장가)우민중(于敏中 청 고종 때의 학자. 정치가)악이태(鄂爾泰 청 태종 때의 명신)황삼자(皇三子 이름은 홍시(弘時))황오자(皇五子 이름은 홍서(弘書). 화석공친왕(和碩恭親王)) 등의 시()를 새겨 걸었다. 그들은 모두 흥경 제관(祭官)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들러 묵고 시를 남기고 간 것이다. 우민중과 아극돈은 다 해내(海內)의 명필이라 일컫건만 과친왕(果親王)에 비해 여간 손색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침실 문설주 위에 백하(白下) 윤 판서(尹判書) ()의 칠언 절구 한 수를 새겨 걸었고, 문 밖 설주 위에는 조 참판(曺叅判) 명채(命采)가 윤()의 시를 차운(次韻)한 것을 새겨 걸었다. 윤공(尹公)은 우리나라의 명필이라, 한 점 한 획이 옛법 아닌 것이 없어, 그 천재의 화려하고 고운 품이 마치 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 같고, 먹빛이 짙고 연함과 획의 살찌고 여윈 것이 알맞게 섞이었으나, 이제 그들의 글씨에 비해서는 손색이 없지 않음은 어인 까닭일까. 대개 우리나라에서 글씨를 익힘에는 옛날 사람의 참된 필적을 보지 못하고 한평생 본뜬 것이 기껏해야 금석문자(金石文字)에 지나지 않으니, ‘금석이란 다만 고인의 글씨에 대하여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뿐, 그지없이 오묘(奧妙)한 그 붓 놀림의 신운(神韻)은 벌써 선천(先天)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본 글씨의 체세(體勢)에는 방불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뼈대가 뻣뻣해져서 전혀 필의(筆意)가 엿보이지 않으며, 그 먹빛이 짙을 때에는 묵저(墨猪)처럼 되고, 마를 때는 고등(枯藤)처럼 되니, 이는 다름 아니라 금석에 새긴 획이 습성에 젖어 있고 또 종이와 붓이 그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중국서 옛날부터 고려의 백추지(白硾紙 백지를 다듬질한 것)낭모필(狼毛筆)을 일컬었다 하나, 이는 특히 외국의 진기한 물건이라 해서 그런 것이지 실지로 쓰고 그리기에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종이도 먹빛을 잘 받고 붓길이 순순히 풀려남을 귀히 여기는 것이요, 반드시 단단하고 질겨서 찢어지지 않은 것만이 덕()이 됨은 아니리라. 서위(徐渭)가 말하기를,

 

고려 종이는 그림에는 맞지 않고 다만 돈[]처럼 두꺼운 게 좀 낫다.”

하였으니, 이와 같이 별로 좋지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종이는 애초에 다듬지 않으면 결이 거칠어서 쓰기 힘들고, 다듬이질을 지나치게 하면 지면이 너무 빳빳해지므로 미끄러워서 붓이 머무르지 않고 딱딱하여서 먹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종이가 중국만 못하다 함이요, 붓은 부드럽고 날씬하고 고르고 순하여 팔과 함께 잘 돌아가는 것이 좋은 것이요, 뻣뻣하고 강하고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은 좋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좋은 붓이라면 반드시 호주(湖州) 것을 말하는데, 이는 오로지 양호(羊毫)를 써서 다른 털을 섞지 아니한다. 양털은 다른 털에 비하여 가장 부드러우므로 부서지지 않고, 종이에 닿으면 먹을 마음대로 놀리는 것이 마치 효자(孝子)가 어버이의 뜻을 말하기 전에 벌써 알아차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른바 낭모필(狼毛筆)’이란 더욱 잘못인 것이, 이리가 무슨 짐승인지도 알지 못하고 어찌 그 꼬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는 곧 족제비의 속명(俗名) ()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광() 자에서 녹() 변을 떼고 또 광() 자에서 엄(广)을 버리면 황() 자가 되므로 이를 황필(黃筆)’이라 한다. 이는 늘 굳세며 억세고 뻣뻣하여 부서질 염려가 있어 마치 동서를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내닫는 철없는 아이 같다. 그러므로 우리 붓이 중국 것만 못하다 함이다. 종이와 붓이 이러한 데다가 안동(安東)의 마간석(馬肝石) 벼루에 해주(海州)의 후칠(厚漆)먹을 갈아서 왕희지(王羲之) 필진도서(筆陣圖序)를 체첩(體帖)으로 본받으니, 이 아무리 삼절법(三折法 세 번 붓을 꺾는 서법)을 쓰더라도 여윈 뼈대가 메마르다. 아이들의 습자에 쓰는 분판(粉版)이란 또 무엇들인지.

그 후당(後堂)이 매우 조용하고 깨끗하여 세간의 잡된 소리가 들리지 않고 강진향(降眞香 열대산 향나무로 만든 향)으로 만든 와탑(臥榻)이 있는데, 탑 위에 진열해 놓은 것들은 여러 사람이 지닐 수 없는 진기(珍奇)한 물건들이었고, 시렁 위에 놓인 서화(書畵)는 그야말로 금권(錦卷)옥축(玉軸)으로 질서 있게 배치되었다.

정사부사의 비장들이 함부로 어지러이 뽑아서 무어라 떠들면서 빙 둘러서 펼쳐 보는 품이 마치 조보(朝報)를 펴보듯, 피륙을 말라 재는 듯이 접었다 꺾었다 하고, 함부로 날뛰는 양은 성을 무너뜨리고 전진을 떨어뜨리며, 적장을 베고 적기(敵旗)를 꺾어뜨리는 듯한 기세이다. 더구나 구경할 마음만이 바빠서 그 긴 것을 다 펴 보기 어려운즉,

 

공연히 펴기 시작했네그려.”

하고 도리어 만든 공장(工匠)을 탄하여,

 

이렇게 긴 축()을 무엇에 쓴단 말야. 병풍도 안 되겠고 족자도 못 만들 것을.”

하고 투덜거린다. 그리고 어떤 이는,

 

나는 그림을 모르네만, 그림이야 주홍빛 나는 까마귀가 가장 좋데그려.”

한다. 그리고 보니 환현(桓玄 ()의 서화 애호가) 같은 사람은 자기 집에 손님이 와도 혹시나 붙여둔 서화를 더럽힐까 하여 기름과자를 대접하지 않았으니, 이야말로 참말 명사(名士)라 아니할 수 없겠다. 서편 벽 밑에서 별안간 군대가 행진하는 듯이 우당탕하는 소리가 나기에 깜짝 놀라서 돌아다 보니 여러 사람이 정()()()() 등의 고동(古董)을 제멋대로 들추는 것이다. 나는 하도 민망하여 바삐 문을 나섰다. 그 아래 윗집이 모두 금자(金字)로 현판을 달았기에, 장복만 데리고 이집저집을 들렀으나 모두 주인이 없었다. 한 집에 이르니, 담 밑에 자죽(紫竹) 수십 대가 자라고 축대 아래에 벽오동(碧梧桐) 한 그루가 서 있으며, 그 서쪽에는 두어 이랑 되는 모난 못이 있되, 흰 돌로 난간을 만들어 못 가를 둘렀다. 못 가운데는 대여섯 자루 연밥이 떠 있고, 난간 가까이 거위 새끼 세 마리가 노닌다. 당 가운데는 주렴을 깊게 드리우고 주렴 속에는 뭇 사람의 지껄이고 웃는 소리가 와아 하고 들린다. 나는 곧 못 가에 이르러 잠깐 난간에 기대어 섰다. 온 당 안이 잠잠하여 쥐죽은 듯하고 주렴 너머로 엿보는 것이 어른거린다. 나는 못 가를 배회하면서 당 안을 향하여 연거푸 기침을 보냈더니, 이윽고 한 동자가 당 뒤를 둘러 나오며 멀찌감치 서서 읍을 하고 소리를 높여,

 

노장(老丈)께서는 무엇하러 여기를 오셨습니까?”

한다. 장복은,

 

너희집 어른이 어디 계시관대 멀리서 오신 손님을 맞이하지 않느냐?”

하니, 동자는,

 

아버지는 아까 일가 어른 이공(李公)과 함께 고려에서 온 양반들의 사관을 찾아 그들의 태의관(太醫官)을 만나러 가셔서 아직껏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하기에, 나는,

 

너희 댁에서 의원을 찾을 때는 필시 집안에 우환이 있는 게로군. 내가 곧 태의관이고 이미 이곳까지 온 김이니 진찰해 보아도 좋고, 또 진짜 청심환도 있으니 네 곧 가서 너의 아버지를 모셔 오너라.”

하였으나, 동자는 들은 체도 않고 옷을 빌려서 거위새끼를 몰아 새초롱에 넣고, 난간에 세워 둔 낚싯대를 집어서 못 가운데 꺾어진 연잎을 끌어내어 우산처럼 들고 주척대며 가버린다. 주렴 안에는 일여덟 사람이 있는 듯한데, 무어라고 소곤소곤하고는 또 입을 막고 가만히 웃는 소리가 들린다. 한참 서성거리다가 몸을 돌이켜 나오는데 장복을 돌아보니 그 귀밑의 사마귀가 요즘 더 커진 듯싶다. 조 주부(趙主簿) 명회(明會)와 함께 말을 나란히 타고 가면서,

 

무령의 풍속이 좋지 못하군.”

하였더니, 조는,

 

무령 사람들은 조선 사람을 귀찮은 손님으로 친답니다. 서학년은 성품이 본래 손님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처음으로 백하(白下) 윤공(尹公)을 만나 흉금을 터놓고 정성을 다해 대접하며, 그가 간직했던 서화를 내어 보였던 것이, 그 뒤로부터 무령현 서 진사(徐進士)의 이름이 우리나라에 회자하여 해마다 사행(使行)이 반드시 찾아 들른 것이 마침내 준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고을에 서씨집보다 더 나은 집들이 많고 또 손님을 좋아하는 주인도 다 학년만 못지 않으나, 공교로이 윤공이 먼저 학년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가진 것이 우리나라 재상도 당할 수 없음을 보고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기리어서, 그 뒤로부터 역관들이 으레 서씨집으로 찾아 들게 됨은 역시 다시 다른 집을 귀찮게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우리 사행은 반드시 하인 수십 명을 거느리는 까닭에 비록 두어 길 되는 문호(門戶)를 드나들 때에도 반드시 소리를 갖추어 알리고, 또 한 군데 몰리어 당에 오르면 물러나 기다릴 줄 모르는 것은 대청이 없기 때문입니다. 학년의 집에서도 그 접대가 차츰 전과 같지 못하던 것이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들이 조선 손님을 아주 귀찮게 여기어서, 우리 사행이 올 무렵이면 좋은 그릇은 갈무리고 너저분한 것들만 벌여 놓아서 겨우 이때까지의 준례를 지킬 뿐이랍니다. 이제 그 옆집에서 피하고 숨은 것도 학년의 집처럼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자 서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윤공이 돌아온 뒤에 되놈의 새끼에게 재주를 팔았다 하여 탄핵을 입은 것은 대개 이 시()를 지은 까닭이다. 당시 언론(言論)의 지나침이 이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유주(幽州)와 기주(冀州)의 산세는 맑은 기운이 서리었다. 태항산(太行山)이 서쪽으로 쫓아와서 연경(燕京)을 껴안은 듯하고, 의무려산이 동으로 달려서 후진(後鎭)이 되어 용이 나는 듯 봉이 춤추듯이 각산(角山)에 이르러 뭉툭 잘리어 산해관이 되었다. 관에 들어서자 뭇 산들은 더욱 대막(大漠)의 억세고 거친 기세를 벗어나서 남으로 탁트인 국면이 맑고 빼어나며 밝고 부드럽다. 창려(昌黎)에 이르자 모든 바닷가 고을들의 산기는 더욱 아름다웠다.

우공(禹貢)의 갈석(碣石)이 창려현(昌黎縣) 서쪽 20리 되는 가까운 곳에 있으니, 조조(曹操 위 무제(魏武帝)) (),

 

동으로 갈석에 다다라 / 東臨碣石

아득한 저 바다 구경코저 / 以觀滄海

라 함은 곧 이를 말함이다. 이 고을에는 한 문공(韓文公)과 한상(韓湘)의 사당이 있다. 당서(唐書) 본전(本傳 한유전(韓愈傳))에는 문공을 등주(鄧州) 남양인(南陽人)이라 하였고, 광여기(廣輿記 () 육응양(陸應陽)의 저)에는 곧 창려인(昌黎人)이라 하였으며, ()의 원풍(元豊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연간에 문공을 창려백(昌黎伯)으로 봉하였고, 원 지원(至元 원 세조(元世祖)의 연호)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이곳에다 사당을 세워서 지금도 문공의 소상(塑像)이 있다 한다. 내 평생에 문공을 몽상(夢想) 중에 그리워했으므로 여러 사람더러 함께 가 보자고 하였으나 응하는 이가 없으니, 이는 20리나 길을 돌아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서 가기도 어려우니 한스러운 일이다. 지나는 길에 동악묘(東嶽廟)에 들렀다. 뜰에 비석 다섯이 있고 전각 위에는 금자(金字) 동악대제(東嶽大帝)’라 써 붙였고, 그 가운데에는 금신(金神) 둘을 앉혔는데, 모두 단정히 손을 모으고 홀()을 잡았다. 후전(後殿) 제도도 전전과 같은데, 여상(女像) 셋을 앉혔고 이름을 낭랑묘(娘娘廟)’라 한다. 머리에는 모두 면류관을 썼다.

영평부(永平府)에 이르니, 성 밖으로 굽이쳐 흐르는 강물이 성을 둘러싸서 그 지형이 평양과 흡사하나 시원하게 툭 트인 것은 평양보다 더 낫다. 다만 대동강과 같이 맑은 물이 없을 뿐이다. 세인들의 전하는 말에,

 

김 학사(金學士) 황원(黃元 고려 예종 때의 문장가)이 부벽루(浮碧樓)에 올라가서,

긴 성 저 한 편에는 용용히 흐르는 강물이요 / 長城一面溶溶水

넓은 벌 동쪽 머리엔 점점이 찍힌 뫼이로다 / 大野東頭點點山

의 두 구()를 읊고는 아무리 끙끙거려도 시상(詩想)이 메말라서 그 다음을 잇지 못한 채 통곡(痛哭)하고 누를 내려오고 말았다.”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논평하기를,

 

평양의 아름다운 경치가 이 두 글귀에 다 표현되었으므로 그 뒤 천 년이나 되는 오랜 시간을 지냈건만 다시 한 구라도 덧붙이는 이가 없다.”

한다. 그러나 나는 늘 이것이 좋은 글귀가 아니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용용(溶溶)’은 대강(大江)의 형세를 표현함에는 부족하고, ‘동두(東頭)’점점(點點)’의 산이란 그 거리가 40리에 불과한데 어찌 대야(大野)라 이를 수 있으리오. 이제 이 글귀를 연광정(練光亭)의 주련(柱聯)으로 붙였으나, 만일 중국의 사신이 이 정자에 올라가서 읽어 본다면 반드시 대야의 글자를 웃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 영평성루(永平城樓)는 그야말로,

 

넓은 벌 동쪽 머리엔 점점이 찍힌 뫼이로다

라고 할 만하다. 혹은 이르기를,

 

영평도 역시 기자(箕子)가 수봉(受封)한 땅이다.”

하나, 이는 잘못이다. 영평은 곧 한()의 우북평(右北平)이요, ()의 노룡새(盧龍塞)이다. 옛날에는 아주 궁벽한 땅이었던 것이 요()() 때로부터 북경에 가까이 있어서 거리와 점포의 번영함이 다른 곳보다 더하고, 진사(進士)의 패액(牌額)이 무령에 비기어 훨씬 많다. 영평부 앞 원문(轅門 병영 앞에 세운 문) 고지우북평(古之右北平)’이라 써 붙였다.

어두워진 뒤에 정 진사(鄭進士)와 함께 조용히 거닐다가 우연히 한 집에 드니, 마침 등불을 켜놓고 고려진공도(高麗進貢圖 조선 사행을 그린 그림)를 새기는 중이다. 지나온 길의 바람벽에 흔히 이 그림을 붙인 것을 보았는데, 모두 너절한 그림에다 추하게 찍어 내어 괴상스럽고 가소롭다. 그 그림에 홍포(紅袍)를 떨쳐 입은 것은 서장관이요, 몇십 년 전에는 당하관(堂下官)이 홍포를 입더니, 이제는 푸른 것으로 변했다. 흑립(黑笠)을 쓴 건 역관이요, 얼굴이 흡사 중과 같으면서 입에 담뱃대를 문 것은 전배(前排)의 비장이요, 곱슬수염에 고리눈은 군뢰(軍牢)이다. 이제 여기서 새기는 것도 추악하기 그지없어서 얼굴이 모두 원숭이처럼 되었다. () 가운데에 세 사람이 있으나 더불어 이야기할 만한 자가 못 된다. 탁자 위에 돌병풍[硏屛]이 놓여 있는데, 높이가 두 자 남짓, 너비는 한 자쯤 되는 화반석(花斑石)이다. 강산(江山)수목(樹木)누대(樓臺)인물(人物) 등을 그려 새겼으되, 모두 돌 무늬를 따라 천연스럽게 빛깔을 내어 그 미묘한 품이 신경(神境)에 들 지경이다. 강진향(降眞香)으로 받침대를 만들어 세웠다.

이때 소주(蘇州) 사람 호응권(胡應權)이란 자가 화첩(畵帖) 하나를 가지고 왔는데, 겉장에는 어지러운 초서(草書)를 썼으되 먹똥이 거듭 앉아 비눌지고 더할나위 없이 해져서, 한 푼어치도 못 되어 보이건만 호생(胡生)의 거조를 보니 마치 세상에 다시 없는 보배인 듯 사뭇 조심조심하여 이를 받들고 꿇어앉아서 여닫는 데도 오직 깍듯이 한다. 정군(鄭君)이 침침한 눈으로 두 손에 이를 움켜 쥐고 책장을 풍우처럼 재빨리 넘기니, 호생이 얼굴을 찡그리며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다. 정군이 다 보고는 획 집어 던지면서,

 

겸재(謙齋)나 현재(玄齋)가 모두 되놈의 호이구먼.”

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아니 보아도 잘 알 일이지.”

하고, 호생더러,

 

당신은 이걸 어디서 구하셨소.”

하고 물으니, 그는,

 

아까 초저녁 때 귀국 김 상공(金相公)이 우리 점포에 오셔서 팔고 갔소. 김 상공은 믿음직한 사람이옵고 또 나와는 정분이 자별하여 친형제나 다름 없습니다. 문은(紋銀 품질이 우수한 은) 3 5푼으로 샀으니 만일 장황(裝潢)을 고쳐 놓으면 7냥은 실히 가리다. 다만 그린 이의 관지(款識)가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선생께서 이를 일일이 고증해서 적어 주시옵소서.”

하고는, 이내 품 속에서 붉은 주사 한 홀()을 꺼내어 패물로 주며, 화자(畵者)의 소전(小傳)을 간곡히 부탁한다. 주인도 주과를 내어 왔다. 대개 우리나라의 서화 권 중에는 연호(年號)도 없고 이름을 적기도 꺼리며, 시축(詩軸)의 끝에도 흔히들 강호산인(江湖散人)’이라 하였을 뿐 어느 때 어느 곳 아무 성 어떠한 사람의 솜씨인지 알 길이 없다. 이제 이 책 가운데도 간단한 두 글자씩 된 별호(別號)가 적혀 있기는 하나 분명하지 않아서 누가 누군지를 분간할 수 없으므로, 정군이 겸재현재를 되놈이라 한 것도 괴이한 일은 아니다. 정군은 한어(漢語)가 서투른데다 또 이가 성기어서 달걀 볶음을 매우 좋아하므로, 책문에 들어온 뒤로 늘 하는 한어라고는 다만 초란(炒卵)’뿐인데, 그나마 혹시 말할 때 잘못 비어질까, 듣는 사람이 잘못 들을까 두려워하여, 가는 곳마다 사람을 만나면 문득 초란 하고 불러 보아서 그 혀끝이 돌아가는가를 잘 가늠하므로, () 초란공(炒卵公)’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 광대놀음에 탈쓴 것을 초란(俏亂)’이라 부르는데, 중국말로 계란볶음이라는 초란과 발음이 근사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곧 가서 한 쟁반을 지져 가지고 왔다.

그러나 행적이 마치 음식을 빼앗아 먹은 것같이 되었으므로 한바탕 웃고 나서 주인에게 사연을 말하고 값을 치르려 하니, 주인이 도리어 몹시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여기는 음식점이 아니어요.”

하고 자못 노여워하는 기색까지 있기에 나는 곧 대강 그림 옆에 적힌 별호(別號)를 상고하여 그들의 성명을 적어서 사례하였다.

 

 

[D-001]사고전서(四庫全書) : 청의 건륭 37년에 시작해서 천하의 서적을 모아, 16 8천여 책을 경()()()()의 네 종류로 나눠 정리한 것이다.

[D-002]백하(白下) …… () : 조선 숙종(肅宗) 때의 서예가. 백하는 호요, 순은 이름. 자는 중화.

[D-003]조 참판(曺叅判) 명채(命采) : 조선 영조(英祖) 때 사람. 명채는 이름.

[D-004]서위(徐渭) : ()의 저명한 예술가. 시문과 서화에 모두 능하였으며, 자는 문장(文長).

[D-005]마간석(馬肝石) : 경상북도 안동 독천(禿川)이라는 냇물 속에서 나는 유명한 벼룻돌.

[D-006]왕희지(王羲之) 필진도서(筆陣圖序) : 왕희지는 진()의 서예가. 중국의 대표적 명필. 희지는 이름, 자는 일소(逸少). 필진도서는 왕희지가 짓고 쓴 유명한 필첩.

[D-007]분판(粉版) : 종이가 귀하므로, 널판에다 분을 칠하고 기름을 먹여서 종이로 대용하였다.

[D-008]한 문공(韓文公) : ()의 저명한 문학가 한유(韓愈). 문공은 시호. 자는 퇴지(退之).

[D-009]한상(韓湘) : 한유의 조카. 그의 자는 청부(淸夫).

[D-010]겸재(謙齋) : 조선 숙종 때 저명한 화원(畫員) 정선(鄭歚)의 호. 자는 원백(元伯).

[D-011]현재(玄齋) : 겸재의 제자인 화원 심사정(沈師正)의 호. 자는 이숙(頤叔).

[D-012]김 상공(金相公) : ‘상공은 애초에는 정승이라는 의미지마는, 여기서는 상인들끼리 서로 높여서 하는 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열상화보(冽上畵譜)

 

 

이조화명도(二鳥和鳴圖), 충암(冲菴 ).

김정(金淨)의 자는 원충(元冲)이요, () 가정(嘉靖)때 사람이다.

한림와우도(寒林臥牛圖)

김식(金埴).

석상분향도(石上焚香圖)

이경윤(李慶胤)은 학림정(鶴林正)이다.

녹죽도(綠竹圖), 탄은(灘隱 ).

이정(李霆)의 자는 중섭(仲燮)이요, 석양정(石陽正)이니, 익주군(益州君)의 지자(枝子)이다.

묵죽도(墨竹圖)

위와 같다.

노안도(蘆雁圖)

이징(李澄)의 자는 자함(子涵)이요, 호는 허주재(虛舟齋), 학림정(鶴林正)의 아들이다.

노선결기도(老仙結綦圖), 연담(蓮潭 ).

김명국(金鳴國)이니, () 천계(天啓) 연간 사람이다.

연강효천도(煙江曉天圖)

임지사자도(臨紙寫字圖), 공재(恭齋 ).

윤두서(尹斗緖)의 자는 효언(孝彦)이니, 강희(康熙) 연간 사람이다.

춘산등림도(春山登臨圖), 겸재(謙齋 ).

정선(鄭歚)의 자는 원백(元伯)이니 강희건륭 연간 사람이다. 나이 80이 넘어서도 겹돋보기 안경을 끼고 촛불 아래에서 가는 그림을 그려도 털끝만큼도 그릇됨이 없었다.

산수도(山水圖)

네 폭인데, 겸재.

사시도(四時圖)

여덟 폭인데, 겸재.

대은암도(大隱巖圖)

겸재. 이 위의 것은 모두 정선(鄭歚)’원백(元伯)’이라는 소인(小印)이 있다.

부장임수도(扶杖臨水圖), 종보(宗甫).

조영석(趙榮祏)의 자는 종보요, 호는 관아재(觀我齋), 강희건륭 연간 사람이다.

도두환주도(渡頭喚舟圖), 진재(眞宰 ).

김윤겸(金允謙)의 자는 극양(克讓)이니, 강희건륭 연간 사람이다.

금강도(金剛圖), 현재(玄齋 ).

심사정(沈師正)의 자는 이숙(頤叔)이니, 강희건륭 연간 사람이다.

초충화조도(草蟲花鳥圖)

여덟 폭인데, 현재. ‘심사정사인(沈師正私印)’ 현재(玄齋)’라는 소인이 있다.

심수노옥도(深樹老屋圖),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의 자는 경백(敬伯)이니, 공재(恭齋)의 아들이다.

백마도(白馬圖)

군마도(羣馬圖)

팔준도(八駿圖)

춘지세마도(春池洗馬圖)

쇄마도(刷馬圖)

이상은 모두 낙서의 윤덕희사인(尹德熙私印)’ 낙서(駱西)’라는 소인이 있다.

무중수죽도(霧中睡竹圖), 수운(峀雲 ).

유덕장(柳德章). ‘수운사인(峀雲私印)’이 있다.

설죽도(雪竹圖)

수운(峀雲)’이란 두 글자와 수운(峀雲)’의 인이 있다.

검선도(劒仙圖), 인상(麟祥).

이인상(李麟祥)의 자는 원령(元靈)이요, 호는 능호관(凌壺觀)이니, ‘이인상(李麟祥)’의 인이 있다.

송석도(松石圖), 원령.

인상(麟祥)’이란 인과 기미삼월삼일(己未三月三日)’이란 소지(小識)가 있다.

난죽도(蘭竹圖), 표암(豹菴 ).

강세황(姜世晃)의 자는 광지(光之), ‘표암광지(豹菴光之)’의 인이 있다.

묵죽도(墨竹圖)

위와 같다.

추강만범도(秋江晩泛圖), 연객(烟客).

허필(許佖)의 자는 여정(汝正)이니, ‘연객(烟客)’이라는 소인이 있다.

 

[D-001]김정 …… 사람이다 : 이와 같은, 연암의 적은 그림에 대한 모든 해설은, ‘박영철본에는 소주(小註)로 되었으나, ‘주설루본에 의하여 별행(別行) 대자(大字)로 하였다. 다음의 것도 모두 이에 따랐다.

[D-002]김식(金埴) : 조선 선조(宣祖) 때 화가. 자는 중후(仲厚), 또는 치온(致溫)이요, 호는 퇴촌.

[D-003]이경윤(李慶胤) : 조선 인조(仁祖) 때의 종실(宗室). 학림정은 봉호요, 자는 계길(季吉)이며, 호는 낙촌(駱村).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6일 임인(壬寅)

 

 

개다. 오후에 우레 일고 비바람이 몹시 불었으나 곧 멈추었다.

영평부에서 청룡하(靑龍河)까지 1, 남허장(南墟庄) 2, 압자하(鴨子河) 7, 범가점(范家店) 3, 난하(灤河) 2, 이제묘(夷齊廟) 1, 모두 16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이제묘에서 망부대(望夫臺)까지 5, 안하점(安河店) 8, 적홍포(赤紅舖) 7, 야계타(野雞坨) 5, 사하보(沙河堡) 8, 조장(棗庄) 10, 사하역(沙河驛) 2, 모두 45리이다. 이날 61리를 가서 사하역 성 밖에서 잤다.

이날 아침 일찍 영평부를 떠날 때 새벽 바람이 선선하였다. 성 밖의 강가에 장이 섰는데, 온갖 물건이 거리에 꽉 찼고 수레와 말이 즐비하였다. 장판에 들어가서 능금 두 개를 사노라니 옆에 대상자를 멘 자가 있어서 상자를 여니 수정합(水晶盒) 다섯이 나오고, 합마다 뱀 한 마리씩 들었다. 뱀은 모두 그 합 속에 도사리고 있는데 머리 내민 것이 마치 솥뚜껑에 꼭지 달린 듯이 한복판에 솟아 있고 두 눈이 반들반들하다. 검은 놈이 한 마리, 흰 놈이 하나, 초록색이 둘, 빨간 놈이 하나, 모두가 합 밖에서 환히 들여다 보이긴 하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분간하기 어렵기에 물어보니, 대답이 시원하지 않다. 대개 이를 악창(惡瘡)에 쓰면 기이한 효과가 난다 한다. 또 다람쥐 놀리는 자, 토끼 놀리는 자, 곰 놀리는 자의 여러 가지 놀이가 있는데 모두 비렁뱅이들이다.

곰은 크기가 개만 한데 칼춤도 추고 창춤도 추며, 사람처럼 서서 다니기도 하고, 절도 하며 꿇어앉기도 하며, 머리를 조아리기도 하여 사람이 시키는 대로 온갖 시늉을 다하나, 꼴이 몹시 흉악하고 그 민첩함도 원숭이보다 못하다. 토끼와 다람쥐놀이는 더욱 재롱스럽고 또 사람의 의도를 잘 알아차리긴 하나 길이 바빠서 상세히 구경하지 못하였다.

도사(道士) 둘과 동자 하나가 장판에 비럭질하며 다니는데 운관(雲冠 도사 관의 일종)을 쓰고 하대(霞帶 도사 띠의 일종)를 띠고 눈매가 청수한데, 손으로 영저(鈴杵)를 흔들며 입으론 주문(呪文)을 외고, 그 행동이 괴특하여 사람인가 귀신인가 의심스럽다.

여자 셋이 바야흐로 길차림을 차리고 말을 타고 달린다.

배로 청룡하(靑龍河)와 난하(灤河)를 건넜다. 따로 이제묘기(夷齊廟記)’난하범주기(灤河泛舟記)’고죽성기(孤竹城記)’가 있다.

이제묘에서 먼저 떠나서 야계타(野雞坨)에 거의 다 갔을 무렵에 날씨가 찌는 듯하고 한 점 바람기도 없더니, ()()()()의 여러 사람들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이야기하며 가는데, 손등에 갑자기 한 종지 찬물이 떨어지며 마음과 등골이 함께 선듯하기에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아무도 물을 끼얹는 이는 없었다.

다시 주먹 같은 물방울이 떨어지며 창대(昌大)의 모자 챙을 쳐서 그 소리가 탕하고, 또 노군의 갓 위에도 떨어졌다. 그제야 모두들 머리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니, 해 옆에 바둑돌만 한 작은 구름장이 나타나고 은은히 맷돌가는 소리가 나더니, 삽시간에 사면 지평선(地平線)에 각기 자그마한 구름이 일되 마치 까마귀 머리 같고 그 빛은 유난히 독해 보인다. 그리고 해 곁에 검은 구름이 이미 해 둘레의 반쯤을 가렸고, 한 줄기 흰 번갯불이 버드나무 위에 번쩍하더니 이내 해는 구름 속에 가리고 그 속에서 천둥하는 소리가 마치 바둑판을 밀어치는 듯 명주를 찢는 듯하다. 수많은 버들이 다 어둠침침하여 잎마다 번갯불이 번쩍인다.

여럿이 일제히 채찍을 날려 길을 재촉하나 등 뒤에 수많은 수레가 다투어 달리고, 산이 미친 듯 뒤집히는 듯, 성낸 나무가 부르짖는 듯하여 하인들은 손발이 떨리어, 급히 우장을 꺼내려 하나 얼른 부대끈이 풀리지 않는다. 바람천둥번개가 가로 휘몰아쳐 지척을 분별할 수 없을 지경이다. 말은 모두 사시나무 떨듯 하고 사람은 숨길이 급하여 할 수 없이 멀머리를 모아서 삥 둘러 섰는데 하인들은 모두 얼굴을 말갈기 밑에 가리고 섰다.

가끔 번갯불에 비치는 데 보니, 노군이 새파랗게 질리어 두 눈을 꼭 감고 곧 숨이 넘어갈 것 같다. 조금 뒤에 비바람이 좀 멎자 서로 바라보니 얼굴이 모두 흙빛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양편에 있는 집들이 보이는데 불과 40~50보밖에 안 되는 곳에 두고서도 비가 막 쏟아질 때에는 피할 줄 알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조금만 더했더라면 거의 숨막혀 죽을 뻔했군.”

한다. ()에 들어가서 잠깐 쉬려니 하늘이 맑게 개고 바람과 햇빛이 산뜻하였다. 간단히 술잔을 나누고는 곧 떠났다. 길에서 부사를 만나서,

 

어디서 비를 피하셨소.”

하고 물었더니, 부사는,

 

가마문이 바람에 떨어졌기 때문에 빗발이 가로 들이쳐서 한데 선 것이나 다름 없었소. 빗방울 크기가 주발(酒鉢)만큼 하니 대국은 빗방울조차 무섭소그려.”

한다. 나는 계함더러,

 

나는 오늘에야 더욱 사전(史傳 역사에서 전하는 기록)을 믿지 않으우.”

하였더니, 정 진사가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나서면서,

 

무슨 말씀이오?”

하기에, 나는,

 

항우(項羽)가 아무리 노하여 고함친다 하더라도 어찌 이 우레 소리를 당할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史記)에 적천후(赤泉侯)의 인마가 모두 놀라서 수리(數里)를 물러섰다 하였으니, 이는 거짓말이 아니고 무엇이오. 항우가 비록 눈을 부릅떴다 하기로서니 이 번갯불만 못했을 터인즉, 여마동(呂馬童 한의 장수)이 말에서 떨어졌다 함은 더욱 못 믿을 일이오.”

하니, 여럿이 모두 크게 웃었다.

 

 

[D-001]영저(鈴杵) : 중이 가지는 악기(樂器)의 일종. 송 태종(宋太宗) 때 인도(印度)에서 왔다 하였다.

[D-002]이제묘기 …… 고죽성기(孤竹城記) : 모든 본에 다 보이지 않으니 의심되는 일이다.

[D-003]적천후(赤泉侯) : ()의 장수 양무(楊武)의 봉호. 항우가 죽을 때 그 시체를 찢어서 가진 다섯 장수 중의 한 사람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이제묘기(夷齊廟記)

 

 

난하(灤河) 기슭에 자그마한 언덕을 수양산(首陽山)’이라 하고, 그 산 북쪽에 조그만 성이 있으니 고죽성(孤竹城)’이라 한다. 성문에는 현인구리(賢人舊里)’라 써 붙였고, 문 오른편 비석에는 효자충신(孝子忠臣)’이요, 왼편 비에는 지금칭성(至今稱聖)’이라 새겼으며, 묘문(廟門) 앞 비석에는 천지강상(天地綱常)’이요, 문 남쪽 비에는 고금사표(古今師表)’라 하였다. 그리고 문 위에는 상고일민(上古逸民)’이란 현판이 걸렸고, 문 안에 비석 셋, 뜰 가운데 비석 둘, 섬돌 좌우에 비석 넷이 있으니, 모두 명()() 때의 어제(御製)들이다.

뜰에는 고송(古松) 수십 그루가 서 있고, 섬돌 가에는 흰 돌로 난간을 둘렀다. 가운데에 큰 전각이 있어 고현인전(古賢人殿)’이라 하고, 전각 속에 곤룡포면류관을 갖추고 홀을 들고 섰는 것이 곧 백이(伯夷)숙제(叔齊)이다.

전 문에는 백세지사(百世之師)’라 써 붙였고, 전 안에는 큰 글자로 만세표준(萬世標準)’이라 쓴 것은 강희제의 글씨요,  윤상사범(倫常師範)’이라 한 것은 옹정제의 글씨이다. 전 가운데 간직한 보기(寶器)들은 만력(萬曆) 때 물건이 많다. 그 주련(柱聯)에는,

 

인을 찾아서 인을 행했으니 만고의 맑은 바람 고죽국이요 / 求仁得仁萬古淸風孤竹國

몹씀으로 몹씀을 바꿨다 하니 천추의 외론 절개 수양산이로다 / 以暴易暴千秋孤節首陽山

하였고, 뜰에 두 문이 있으니 동쪽에는 염완(廉頑)’이요, 서쪽에는 입나(立懦)’라 하였으며, 또 작은 문 둘이 있으니 왼편은 관천(盥薦)’이요, 오른편은 재명(齊明)’이라 하였고, 그 문을 나서면 당()이 있어 읍손(揖遜)’이라 하였으며, 비석이 있는데 이는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연간에 세운 것이다. 비 뒤에 대()가 있어 청풍(淸風)’이라 하고, 문 둘이 있어 하나는 고도풍진(高蹈風塵)’이요, 또 하나는 대관환우(大觀寰宇)’라 새겨 붙였으며, 대 위에는 각()이 있어 재수지미(在水之湄)’라 하였고, 그 주련(柱聯)에는,

 

뫼들은 인자처럼 고요하고 / 山如仁者靜

바람은 성인인 양 맑디맑다 / 風似聖人淸

하였고, ,

 

가산 가수는 고죽나라에 / 佳山佳水孤竹國

난형 난제의 성인 나시다 / 難兄難弟古聖人

라고 한 것이 있다. 대 위에 문 둘이 있어 하나는 백대산두(百代山斗)’, 또 하나는 만고운소(萬古雲霄)’라 하였다. ()의 헌종 순황제(憲宗純皇帝) 때에 백이에게는 소의청혜공(昭義淸惠公), 숙제에게는 숭양인혜공(崇讓仁惠公)이란 시호를 주었다. 중국에서 수양산(首陽山)이라 하는 곳이 다섯 군데가 있으니, 하동(河東)의 포판(蒲坂)인 화산(華山)의 북쪽 하곡(河曲)의 어름에 산이 있어 수양이라 하였고, 혹은 농서(隴西)에도 있다 하며, 혹은 낙양(洛陽) 동북쪽에도 있다 하고, 또 언사(偃師) 서북쪽에도 이제묘가 있다 하며, 또는 요양(遼陽)에도 수양산이 있다 하여, 모든 전기(傳記)에 나타났다. 그러나 맹자(孟子)에는,

 

백이가 주왕(紂王)을 피하여 북해(北海) 가에 살았다.”

하였고, 우리나라 해주(海州)에도 수양산이 있어서 백이숙제를 제사지내나, 이는 중국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일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자(箕子)가 동으로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주()의 판도 안에 살기 싫어함이요, 백이도 차마 주의 곡식을 먹을 수 없음인즉, 혹은 그가 기자를 따라와서 기자는 평양에 도읍하고 백이숙제는 해주에 살지나 않았는가.’

그리고 우리나라 항간에서 전하는 말에,

 

대련(大連)소련(少連)이 해주 사람이다.”

하였으니, 이를 무엇으로 고증할 수 있을까.

문과 담장에 당()() 역대의 치제문(致祭文)을 많이 새겨 놓은 것을 보아서는 이 묘가 영평에 있은 지 오래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홍무(洪武) 초년에 영평부 성 동북쪽 언덕에 옮겨 세웠다가 경태(景泰 명 경종(明景宗)의 연호) 연간에 다시 이곳에 세웠다.”

한다. 행궁(行宮)이 있어 그 제도는 강녀묘북진묘의 행궁과 같으나 지키는 자가 금하므로 그 내용을 구경하지 못하였다.

 

 

[D-001]백이(伯夷)숙제(叔齊) : () 고죽군(孤竹君)의 아들. 백이는 형, 숙제는 아우로 어버이가 죽자 서로 자리를 사양하였고, 주 무왕이 은을 칠 때에 반대하여 수양산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어 먹었다.

[D-002]인을 …… 하니 : 백이숙제의 채미가(采薇歌) 중에서 나오는 구절.

[D-003]뫼들은 …… 고요하고 : 논어(論語), “인자(仁者)는 뫼를 사랑한다.” 하였다.

[D-004]바람은 …… 맑디맑다 : 논어, “백이는 성인 중의 맑은 이다.” 하였다.

[D-005]하곡(河曲) : 황하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가 또 동으로 굽이치는 곳.

[D-006]주왕(紂王) : ()의 말왕(末王). 중국 고대의 대표적 폭군.

[D-007]대련(大連)소련(少連) : 예기(禮記) 중에 나오는 인물. 이들 형제는 동이(東夷)의 아들로서, 상주질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난하범주기(灤河泛舟記)

 

 

난하는 장성 북쪽 개평(開平)에서 처음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서 천안현(遷安縣) 지경을 거쳐 노룡새(盧龍塞)에 이르러 칠하(漆河)와 합하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낙정현(樂亭縣)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요동요서에 ()’라고 이름한 물 치고는 모두 흐린 것인데, 다만 이 난하만이 고죽사(孤竹祠 고죽군(孤竹君)의 사당) 밑에 이르러 깊게 고여서 호수가 되어 그 맑은 빛이 거울 같다. 고죽성은 영평부 남쪽 1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후한서(後漢書)의 군국지(郡國志),

 

우북평(右北平) 영지(令支)에 고죽성이 있다.”

하였고, 그 주(),

 

백이숙제의 본국(本國)이다.”

하였다. 난하의 남쪽 기슭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아 있고, 그 위에는 청풍루(淸風樓)가 있는데, 누 아래 강물이 더욱 맑으며 강 한복판에 작은 섬이 있고, 섬 가운데 돌을 병풍처럼 쌓고 그 앞에 고죽군(孤竹君)의 사당이 있으며, 사당 아래 배를 띄우니, 물 맑고 모래 희며, 들 넓고 숲 깊숙한데, 물가에 수십 호 되는 집이 모두 그림자가 호수 속에 박혔고, 고기잡이 배 서너 척이 한창 그물을 사당 밑에 치고 있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니, 중류에 대여섯 길 되는 돌봉우리가 있어 이름은 지주(砥柱)’라 하는데, 기암괴석이 삑 둘러싸서 우뚝우뚝 서 있으며, 교청새뜸부기 같은 물새 떼 수십 마리가 모래 위에 늘어 앉아 깃을 다듬고 있다. 배에 함께 탄 사람들이 이 경치를 돌아보고 기뻐하면서,

 

강산이 그림 같으오.”

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들은 강산도 모르고 그림도 모르는구려. 어디 강산이 그림에서 나온 것인가. 그림이 강산에서 나왔지. 흔히들 흡사하다느니 같다느니 유사하다느니, 닮았다느니 똑같다느니 하는 말들은 모두 같다는 의미를 말함이다. 그러나 비슷한 것으로써 비슷한 것을 비유함은 실은 같을 성싶어도 같은 것이 아닌거요. 옛사람이 강(양자강(揚子江))에서 나는 요주(瑤柱)를 여지(荔支 남방에서 나는 과실)와 같다 하고, 서호(西湖)를 서자(西子 서시(西施))와 같다 하면, 어리석은 사람은 다시 말하기를, 담채(淡菜 조개의 일종)는 용안(龍眼 용안수(龍眼樹)의 열매)과 같고, 전당(錢塘)은 비연(飛燕)과 같다 하니, 어찌 그럴 수 있겠소.”

 

[D-001]요주(瑤柱) : 조개의 일종. 껍질이 엷고 길게 생겼으며, 줄이 방사선으로 났다.

[D-002]서호(西湖) :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에 있는, 경치 좋기로 유명한 호수.

[D-003]전당(錢塘) : 항주에 있는 경치 좋은 호수.

[D-004]비연(飛燕) : 한 성제(漢成帝)의 황후 조비연(趙飛燕). 몸이 나는 제비처럼 가볍다 하여 붙인 이름.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석호석기(射虎石記)

 

 

영평부에서 남쪽으로 10여 리를 가면 가파른 언덕에 드러난 바위가 있다. 비스듬히 보면 빛깔이 희고, 그 밑에는 비석이 있어 한비장군석호처(漢飛將軍射虎處)’라 새겨 있다. 나는, “청의 건륭 45년 가을 7 26일에 조선인(朝鮮人) 아무아무는 이를 구경하다.”라고 썼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7일 계묘(癸卯)

 

 

개다. 아침에 잠깐 서늘하였으나 낮에는 몹시 더웠다.

사하역(沙河驛)에서 홍묘(紅廟)까지 5, 마포영(馬舖營) 5, 칠가령(七家嶺) 5, 신점포(新店舖) 5, 건초하(乾草河) 5, 왕가점(王家店) 5, 장가장(張家莊) 5, 연화지(蓮花池) 10, 진자점(榛子店) 5, 모두 50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진자점에서 연돈산(烟墩山)까지 10, 백초와(白草漥) 6, 철성감(鐵城坎) 4, 우란산포(牛欄山舖) 4, 판교(板橋) 6, 풍윤현(豐潤縣) 20, 모두 50리이다. 이날 1백 리를 가서 풍윤성 밖에 묵었다.

어제 이제묘 안에서 점심 먹을 때 고사리 넣은 닭찜이 나왔는데, 맛이 매우 좋고 또 길에서 변변한 음식을 먹지 못한 끝이라 별안간 입맛이 당기는 대로 달게 먹었으나, 그것이 구례(舊例)인 줄은 몰랐다. 오후에 길에서 소나기를 만나서 겉은 춥고 속은 막히어 먹은 것이 내려가지 않고 가슴에 그득히 체하여, 한번 트림을 하면 고사리 냄새가 목을 찌르는 듯하여 생강차를 마셔도 속이 오히려 편하지 않았다.

 

이 한창 가을에 철 아닌 고사리를 주방(廚房)은 어디서 구해 왔는고.”

하고 물었더니, 옆에 사람이 말하기를,

 

이제묘에서 점심 참을 대는 것이 준례가 되어 있사오며, 또 사시를 막론하고 여기서는 반드시 고사리를 먹는 법이옵기에 주방이 우리나라에서 마른 고사리를 미리 준비해 가져와 여기에서 국을 끓여서 일행을 먹이는 것이 이젠 벌써 하나의 고사(故事)로 되었답니다. 10여 년 전에 건량청(乾糧廳)이 이를 잊어버리고는 갖고 오지 않아서 이곳에 이르자 궐공(闕供)되었으므로, 건량관(乾糧官)이 서장관에게 매를 맞고 물 가에 앉아서 통곡하면서 푸념하기를, ‘백이숙제, 백이숙제야. 나하고 무슨 원수냐. 나하고 무슨 원수냐.’ 라고 하였답니다. 소인(小人)의 소견으로는 고사리가 고기만 못하며, 또 듣자온즉 백이들은 고사리를 뜯어 먹고 굶어죽었다 하오니, 고사리는 참 사람 죽이는 독물인가 하옵니다.”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허리를 잡았다. 태휘(太輝)란 자는 노 참봉의 마두(馬頭)인데 초행일뿐더러 위인이 경망해서, 조장(棗庄)을 지나다가 대추나무가 비바람에 꺾이어 담 밖에 넘어진 것을 보고는, 그 풋열매를 따 먹고 배앓이로 설사가 멎지 않아서, 한창 속이 허하고 몸이 달고 마음이 답답하고 목이 타는 듯하다가, 급기야 고사리독이 사람 죽인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몸부림치면서,

 

아이고, 백이숙채(熟菜 삶은 나물)가 사람 죽이네. 백이숙채가 사람 죽인다.”

하니, 숙제(叔齊)와 숙채(熟菜)가 음이 서로 비슷한지라, 또한 당에 가득한 사람들이 깔깔거리고 웃었다.

내 일찍이 백문(白門 서울 부근의 지명)에 살 때이었다. 때마침 숭정(崇禎) 기원(紀元)  137, 세 돌째 맞이한 갑신년(甲申年)이며, 3 19일은 곧 의종 열황제(毅宗烈皇帝)가 순사(殉社 국가와 함께 죽음)한 날이다. 시골 선생님이 동리 아이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서(城西 서울 서대문 밖)에 있는 송씨(宋氏)의 셋방살이 집에 찾아가서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 송시열(宋時烈))의 영정에 절하고, 초구(貂裘)를 내어서 어루만지며 강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는 이까지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성 밑에 이르러서 팔을 뽐내며 서쪽을 향하여,

 

되놈.”

하고 불렀다. 그리고는 선생님이 이에 여수(旅酬)를 벌이되 고사리나물을 차렸다. 이때 마침 주금(酒禁)이 내렸으므로 꿀물로서 술을 대용하여 그림 놓은 자기주발에 담았으니, 그 주발의 관지(款識)에는 대명(大明) 성화(成化)에 만든 것이다라고 새겼다. 여수하는 자가 꿀물을 따를 때면 반드시 머리를 숙여 주발을 들여다보곤 한다. 이는 춘추(春秋)의 의리를 잊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이에 서로 시()를 읊었다. 그 중 한 동자(童子)가 쓰기를,

 

무왕도 만약 패해서 죽었다면 / 武王若敗崩

아득한 천 년 뒤에 주왕에겐 역적이 되올 것을 / 千載爲紂賊

여망이 어이하여 백이를 구하고도 / 望乃扶夷去

역적을 옹호했다 하여 벌을 받지 않았던고 / 何不爲護逆

춘추의 큰 의리를 이제껏 떠들건만 / 今日春秋義

되놈으로 간주하면 되놈의 역적일 걸 / 胡看爲胡賊

하였다.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그 선생님이 섭섭한 표정으로 한참 있다가,

 

아이들은 불가불 일찍부터 춘추를 읽혀야 돼. 아직 그게 무엇인지 분간을 못하므로 이 따위의 괴상한 말들을 하는 게야. 어디 한번 즉경(卽景)이나 읊어 보아라.”

하자, 또 한 동자가 짓기를,

 

고사리 캐고 캔들 배 부르단 거짓말이 / 採薇不眞飽

백이도 나중에는 주려서 죽었다오 / 伯夷終餓死

꿀물이 몹시 달아 술보다 나을지니 / 蜜水甘過酒

이것 마시자 죽는다면 그 아니 원통하리 / 飮此亡則寃

하였다. 선생은 눈썹을 찡그리면서,

 

어어, 이게 또 무슨 괴상한 수작이여.”

하니, 만좌의 사람들이 또 한번 크게 웃었다. 그리한 지도 어언간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때의 늙은이들도 다 가버린 오늘날에 다시 백이의 고사리로 이런 말썽이 생겨서, 타향(他鄕)의 풍등(風燈) 아래에서 옛 이야기를 하다보니 끝내 잠을 잃고야 말았다.

새벽에 떠나 길에서 상여(喪轝)를 만났다. 널 위에 흰 수탉을 놓았는데 닭이 홰를 치며 울고 있다. 연이어 상여를 만났으나 모두 닭을 놓았으니 이는 영혼을 인도하는 것이라 한다.

길 곁에 넓이 수백 이랑이나 되는 못이 있는데 연꽃은 벌써 지고 사람들이 각기 조그마한 배를 타고 들어가서, 마름연밥연근 같은 것을 캐고 있었다. 돼지 수십 마리를 몰고 가는 이가 있는데, 그 모는 법이 마소 다루는 것과 같다. 길 가 백여 리 사이에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수없이 많이 자빠져 있다. 이는 어제 비바람에 쓰러진 것이다.

진자점(榛子店)에 이르렀다. 이 점은 본래 기생이 많기로 이름난 곳이다. 강희 황제가 일찍이 천하의 창기를 엄금하여 양자강(揚子江)판교(板橋) 같은 곳의 창루(娼樓)기관(妓館) 들이 모두 쑥대밭이 되었는데, 이곳만이 남아 있어서 그를 양한적(養閒的)’이라 이름하는데 얼굴이 그럴싸하고 음악도 곧잘 한다. 재봉(再鳳)과 상삼(象三)이 후당(後堂)으로 들어가며 나를 보고는 빙긋 웃음을 띤다. 나도 그 뜻을 짐작하고 가만히 그 뒤를 밟아가서 문틈으로 들여다본즉 상삼이 벌써 한 여인을 끼고 앉았다. 이는 전부터 안면이 있는 모양이다. 청년 둘이 의자에 마주 걸터앉아서 비파를 타고 한 여인은 의자 위에서 봉() 부리에 금고리를 물린 저를 불고 있는데, 부리에는 금고리가 달렸고 금고리에는 붉은 수술을 드리웠다. 재봉은 그 아래에 서서 손으로 수술을 어루만지고 있고, 또 한 여인은 주렴을 걷고 나오더니 손에 박자 판을 들고 재봉을 부축하여 앉히려 하였으나 재봉은 듣지 않았다. 한 늙은이가 주렴을 걷고 서서 재봉을 향하여,

 

안녕하시오.”

한다. 나는 곧 밖에서 큰 기침 한번을 내며 가래침을 뱉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란다. 상삼과 재봉이 서로 보고 웃으며 곧 일어나 문을 열고 나를 맞아들인다. 내가 문안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안녕들 하시오.”

했더니, 늙은이와 두 젊은이가 일제히 일어나서 웃으며,

 

예 안녕하십니까.”

하고 답하니, 세 양한적도 모두들,

 

천복(千福)을 누리시옵소서.”

한다. 재봉은 노랑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여인을 가리키며,

 

저 이름은 유사사(柳絲絲)랍니다. 병신년(丙申年)에 이곳을 지날 때 나이 스물넷에 그야말로 일색이었던 것이 이제 5년 동안에 얼굴이 아주 그냥 망가져서 보잘것없이 되었습니다그려.”

한다. 상삼은,

 

유사사는 일찍이 열네 살부터 소리 잘하기로 이름을 날렸답니다.”

하고, 검은 웃옷에 주홍치마를 입은 여인을 가리키며,

 

저 이름은 요청(幺靑)이고 올해에 나이 스물다섯입니다. 작년부터 이곳에 와 있는 산동 여자입니다.”

한다. 나는 검은 저고리에 초록치마를 입은 그 중 제일 앳되보이는 여인을 가리켰더니, 상삼은,

 

그는 처음 보는 여인이어서 이름이나 나이를 모르겠습니다.”

한다. 세 기생이 모두들 특별한 자색은 없으나 대체로 당화(唐畵) 미인도(美人圖) 중에서 보이는 여인과 같았다. 그 늙은이는 곧 관() 주인이고, 두 청년은 모두 산동에 온 장사치들이다. 나는 상삼에게 눈짓하여 그들에게 음악을 아뢰도록 했더니, 상삼이 그 청년을 보고 무어라고 하자 한 청년은 노래하고 요청은 홀로 박자판을 치며 소리를 맞추어 합창할 때, 다른 기생들은 모두 부는 것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듣기만 한다. 한 청년이 자리를 옮겨, 나더러,

 

알아 들으시는지요?”

하기에, 나는,

 

잘 모르네.”

하였더니, 그는 글로 써서 보이며,

 

이 사곡(詞曲) 계생초(雞生草)’라 부르고, 가사는,

전조에 낳은 장수 모두들 영웅이라 / 前朝出了英雄尉

도원의 의를 맺어 그 성은 유장을 / 桃園結義劉關張

그 셋이 뜻이 맞아 제갈량을 군사 삼고 / 他三人請了軍師諸葛亮

신야와 박망파를 불사라 버리고선 / 火燒新野博望屯

상양성을 또 깨뜨렸네 / 炮打上陽城

노천을 원망하건대 주유를 낳았으니, 제갈량이 또 웬일고 / 怨老天旣生瑜又生亮

라고 하였습니다.”

한다. 그 청년이 글은 제법 아는 모양이나 얼굴은 못생겼다. 그는 스스로 소개하기를,

 

저는 신성(新城)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성은 왕()이요, 이름은 용표(龍標)라 합니다.”

한다. 나는,

 

자네가 혹시 왕서초(王西燋) 사록(士祿) 선생의 후손되시는 이인가?”

했더니, 그는,

 

아니올시다. 저희는 민가(民家) 출신으로서 장사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한다. 그 청년이 또 한 곡조를 부를 때 모든 기생들이 혹은 박자판을 치고, 혹은 비파를 뜯고, 또는 봉저[鳳笛]를 불어서 소리를 맞춘다. 왕용표는,

 

공자(公子)께선 이를 아십니까?”

하기에, 나는,

 

모르네. 이건 무슨 사()라 하나.”

했더니, 용표는 글로 써 보이기를,

 

이 곡조는 답사행(踏莎行)’이라 하옵니다. 그리고 그 가사는,

세월은 문틈의 말달리기 티끌이나 곧 아지랑이 / 日月隙駒塵埃野馬

동으로 흐른 강물 쉴 줄 모르누나 / 東流不盡江河瀉

명리를 다투던 건 예로부터 헤어보니 / 向來爭奪名利人

백년이 채 못 되어 몇몇이나 남았던고 / 百歲幾個長存者

라고 하였습니다.”

한다. 유사사는 그 뒤를 이어서,

고기잡이 나무꾼의 싸늘한 이야기가 / 漁樵冷話

옳고 그름 예 있으니 춘추만 못잖으리 / 是非不在春秋下

술 부어 마시면서 시구를 길이 읊어 / 自斟自飮自長吟

알아 줄 이 적다고 한탄하지 마소서 / 不須贊嘆知音寡

라고 부르는데, 그 소리가 사뭇 구슬퍼서 남의 창자를 에이는 듯싶고, 참으로 들보의 티끌이 저절로 나부낀다. 상삼이 다시 이어서 창()하기를 청하니, 유사사가 눈을 흘기며,

 

채소 사는지요, 더 달라게.”

한다. 그 청년은 손수 비파를 뜯으면서 유사사더러 노래 계속하기를 권한다. 그 소리는 더욱 보드랍고 아리땁다. 왕용표는 또 글을 써서 보이었다.

 

이 곡조는 서강월(西江月)’이라 하며, 가사는,

쓰르라미 울음소리 세월이 바쁘구나 / 蟪蛄忍忍甲子

모기가 날아들 제 산천이 어지러라 / 蚊擾擾山河

거센 바람 소낙비가 밤 사이 지나가고 / 疾風暴雨夜來過

그제야 눈 떠보니 한 낱도 없구나 / 轉眼都無一個

라고 한 것입니다.”

하고, 요청은 곧 그 뒤를 이어서 창()을 하였다.

 

항아리 속 빚은 술을 다하도록 마시고서 / 且盡尊中美酒

달 아래 높은 노래 고요히 들어 보소 / 閑聽月下高歌

공명이랑 부귀마저 마침내 그 무언고 / 功名富貴竟如何

닥쳐 오는 뒷일일랑 그 아예 묻지 마오 / 莫問收場結果

그 소리는 매우 거세어서 유사사의 가냘픔만 못하였다. 나는 그제야 곧 일어서서 나올 때 재봉 역시 뒤를 따랐다. 재봉이 나에게 말하기를,

 

상삼이 관주(館主)에게 은() 두 냥, 대구어(大口魚) 한 마리, 부채 한 자루를 주었답니다.”

한다. 이곳에서 식암(息菴) 김공(金公 식암은 김석주(金錫冑)의 호)이 보았다는 계문란(季文蘭)의 시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 일은 피서록(避暑錄)중에 보인다.

연로(沿路) 수천 리 사이에 부녀들의 말소리들은 모두 연연(燕燕)앵앵(鶯鶯)이고 하나도 거친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야말로,

 

아리따운 님이시여 있는 곳을 몰랐더니 / 不識佳人何處在

눈썹 그리는 그 소리 주렴 넘어 들리는 듯 / 隔簾疑是畵眉聲

이 곧 그것이었다.

나는 한번 그들의 앳된 노래소리를 듣고 싶어 했더니, 이제 그 부르는 사곡(詞曲)의 의미는 짐작할 수 있겠으나, 오히려 성음(聲音)은 분변하지 못할뿐더러, 더욱이 그 곡조를 알지 못하므로 차라리 듣지 않았을 때 여운(餘韻)을 지니고 있느니만 같지 못했다.

저녁 나절에 풍윤성(豊潤城) 아래에 이르다. 주인 집 뒷문이 해자를 향해서 열리고 문 앞엔 몇 그루 실버들이 가렸다. 정사(正使),

 

지난 정유년(丁酉年 1777) 봄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일찍이 이 집에 머물면서 서장관 신형중(申亨重) 이름은 사운(思運)이다 과 함께 이 버드나무 밑에서 한담한 일이 있었다.”

하고, 가마에서 내려 곧 뒷문 밖에 자리를 펴게 하고 모든 비장들과 잠깐 술을 나눴다. 그 해자의 넓이는 십여 보나 되는데 버들 그늘이 짙어서 땅 위에 치렁치렁 드리우고 물가에 남실남실 잠기었다. () 위엔 3층 높은 다락이 구름 위에 솟아 보일락말락한다.

드디어 모든 사람들과 함께 성에 들어가 다락에 올라 구경할 제, 그 이름은 문창루(文昌樓)’라 하였는데 문창성군(文昌星君 별 이름을 딴 귀신 이름)을 모셨다 한다.

길에서 초인(楚人) 임고(林皐)를 만나 함께 호형항(胡逈恒)의 집에 가서 촛불을 밝히고, 차수(次修 박제가(朴齊家)의 자)가 쓴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의 자)의 시()를 구경하고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 다시 오기로 약속할 제,

 

혹 성문이 닫히지나 않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곧 닫겠지만 반 시간도 못 되어 다시 연답니다.”

하고 답한다. 저녁 뒤에 촛불을 들고 다시 가보니 성문이 닫히지 않았다. 이때 우리를 따라 온 하인들은 더부룩한 맨머리로 거리에 삑삑하게 쏘다니며 말먹이 풀을 구하는 모양이었다.

()와 임() 두 사람이 반기며 나와서 맞이한다. 방안엔 벌써 주안상을 차려 놓았다. 그는,

 

이형암(李炯菴 형암은 이덕무의 일호(一號))과 박초정(朴楚亭 초정은 박제가의 호)이 모두 잘 지내십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모두 편하지요.”

하였더니, 임생(林生),

 

()과 이() 그 두 분은 참으로 인품이 맑고 재주가 높은 선비지요.”

하기에, 나는,

 

그들은 모두 나의 문생(門生)이지만 그 변변하지 않은 글 재주를 이다지 칭찬할 게야 뭐 있겠소.”

하였더니, 임생은,

 

옛말에 정승의 문하엔 정승이 나고 장수의 문하엔 장수가 난다더니 과연 헛된 말이 아니군요.”

하고, 그는 또,

 

형암초정 두 분이 일찍이 무술년(戊戌年 1778) 황태후(皇太后) 진향(進香) 때 이곳을 지나다 하룻밤 쉬어 갔습니다.”

한다. 임과 호 그 둘이 비록 정성껏 대접하는 셈이나 전연 글을 모르고 게다가 호생(胡生)은 얼굴마저 단아하지 못하여 시정배의 모습을 면치 못했고, 임생은 긴 수염에 장자(長子)의 풍도가 없진 않으나, 다만 수작하는 사이에 장사치들의 행투가 바이 가시지 못했다. 호생은 내게 송하선인도(松下仙人圖)를 주고, 임생 역시 그림 부채 한 자루를 선사하기에 각기 부채 한 자루와 청심환 한 개씩을 주어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술을 몇 잔 하였다. 그 곁에는 유리등(琉璃燈) 한 쌍이 있어서 제법 아름다워 보였다. 밤이어서 다른 골동품은 구경하지 못할 것이므로, 나는 곧장 일어서면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찾기를 약속했다. 임생이 문에 나와 전송하며 제법 섭섭한 모양이다. 사관에 돌아와 호생이 선사한 민강(閩薑 복건산(福建産) 생강)국다(菊茶)귤병(橘餠 귤 말린 것) 등을 내어서 장복으로 하여금 푸욱 달여 소주에 타서 두어 잔을 마시니 그 맛이 유달리 좋았다.

성 밖에 사성묘(四聖廟)가 있고 옹성(甕城) 안에 백의암(白衣菴)이 있으며, 앞 네거리엔 패루(牌樓) 둘이 있고, 초루(譙樓)에는 관제(關帝)의 소상을 모셨다.

 

 

[D-001]건량청(乾糧廳) : 먼 길을 가는 데 마른 양식을 준비하는 부서.

[D-002]초구(貂裘) : 초피 두루막. 효종의 하사품인데, 북벌 곧 청을 칠 때 요()()의 풍설(風雪)에 입으라 하였다.

[D-003]여수(旅酬) : 제사를 마친 뒤 술잔을 나누는 일종의 음복놀이.

[D-004]여수하는 …… 한다 : ‘대명성화(大明成化)’라는 글자를 새겼으므로, 대명을 잊지 않음이 곧 춘추의 대의라는 것이다.

[D-005]여망이 …… 구하고도 : 백이숙제가, 무왕이 주왕을 치려 함을 말렸을 때, 무왕의 좌우가 모두 그를 죽이려 하자, 여망(呂望)이 홀로 그를 의사(義士)라 하여 놓아주었다.

[D-006] : 중국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중에 나오는 유비(劉備)관우(關羽)장비(張飛) 등의 결의형제의 고사(故事).

[D-007]주유(周瑜) : 주유가 죽을 때에, “하늘이 이왕 주유를 낳았으니 어찌 또 제갈량을 낳았을꼬.” 하며 비탄하였다.

[D-008]신성(新城) : 직례성(直隷省) 무극현(無極縣)에 있는 지명.

[D-009]고기잡이 …… 못잖으리 : 초동과 어부의 쑥덕공론이 춘추대의를 부르짖는 이들의 이론만 못하지 않다는 말.

[D-010]들보의 …… 나부낀다 : 유향(劉向) 별록(別錄), “우공(虞公)이 맑은 새벽에 노래를 부르면, 그 소리가 들보 위의 티끌을 움직였다.” 하였다.

[D-011]연연(燕燕)앵앵(鶯鶯) : 둘 다 유명한 기생의 이름.

[D-012]황태후(皇太后) 진향(進香) : 황태후의 탄일 열흘 전에 황제가 향을 바치는 예식.

[D-013]송하선인도(松下仙人圖) : 고송(古松) 밑을 거니는 선인을 그린 것.

[D-014]초루(譙樓) : 먼 적진(敵陣)을 바라보기 위하여 세운 문 위의 높은 누각.

[D-015]관제(關帝) : ‘수택본에는 관공(關公)’이라 기록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8일 갑진(甲辰)

 

 

아침에 갰다가 오후엔 바람과 우레가 크게 일었으나 우세(雨勢)는 앞서 야계타에서 만난 것만 못했다.

풍윤성(豊潤城)에서 새벽에 떠나 고려보(高麗堡)까지 10, 사하포(沙河舖) 10, 조가장(趙家庄) 2, 장가장(蔣家庄) 1, 환향하(還香河) 1리인데, 환향하의 일명은 어하교(魚河橋)였고, 거기에서 민가포(閔家舖) 1, 노고장(盧姑庄) 4, 이가장(李家庄) 3, 사류하(沙流河) 8리를 가서 점심을 먹으니 모두 40리였고, 또 사류하로부터 양수교(亮水橋)까지 10, 양가장(良家庄) 5, 입리포(廿里舖) 5, 시오리둔(十五里屯) 5, 동팔리포(東八里舖) 7, 용읍암(龍泣菴) 1, 옥전현(玉田縣) 7, 모두 40리인데 이날에는 80리를 가서 옥전성(玉田城) 밖에서 잤다. 옥전은 옛 이름이 유주(幽州), 무종국(無終國)이 이에 있었는데 곧 소공(召公)의 봉지(封地)이다. 정의(正義 당 공영달(孔穎達)이 지은 경전 주석서)에 이르기를,

 

소공은 애초에 무종에 봉했다가 나중엔 계주(薊州)로 옮겼다.”

하였고, 시서(詩序)에는,

 

부풍(扶風) 옹현(雍縣) 남쪽에 소공정(召公亭)이 있으니, 이곳이 곧 소공의 채읍(采邑 식읍(食邑))이다.”

하였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고려보에 이르니, 집들이 모두 띠 이엉을 이어서 몹시 쓸쓸하고 검소해 보인다. 이는 묻지 않아도 고려보임을 알겠다. 앞서 정축년(丁丑年 병자호란 다음 해, 1637)에 잡혀 온 사람들이 저절로 한 마을을 이루어 산다. 관동 천여 리에 무논이라고는 없던 것이 다만 이곳만은 논벼를 심고, 그 떡이나 엿 같은 물건이 본국(本國)의 풍속을 많이 지녔다. 그리고 옛날에는 사신이 오면 하인들의 사 먹는 주식치고는 값을 받지 않는 일도 없지 않았고, 그 여인들도 내외하지 아니하며, 말이 고국 이야기에 미칠 때에는 눈물을 짓는 이도 많았다. 그러므로 하인들이 이를 기화로 여겨서 마구잡이로 주식을 토색질해서 먹는 일이 많을뿐더러, 따로이 그릇이며 의복 등속을 요구하는 일까지 있으며, 또 주인이 본국의 옛 정의를 생각하여 심하게 지키지 않으면 그 틈을 타서 도둑질하므로, 그들은 더욱 우리나라 사람들을 꺼려서 사행이 지날 때마다 주식을 감추고 즐겨 팔지 않으며, 간곡히 청하면 그제야 팔되 비싼 값을 달라 하고 혹은 값을 먼저 받곤 한다. 그럴수록 하인들은 백방으로 속여서 그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 상극이 되어 마치 원수 보듯 하며 이곳을 지날 때면 반드시 일제히 한 목소리로,

 

너희 놈들, 조선 사람의 자손이 아니냐. 너희 할아비가 지나가시는데 어찌 나와서 절하질 않느냐.”

하고 욕지거리를 하면, 이곳 사람들도 역시 욕설을 퍼붓는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리어 이곳 풍속이 극도로 나쁘다 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길에서 소낙비를 만났다. 비를 피하느라고 한 점포에 들었더니 차를 내어 오고 대접이 좋았다. 비가 한동안 멎지 않고 천둥 소리가 드높아진다. 그 점포의 앞마루가 제법 넓고 뜰도 백여 보나 되는데, 마루 위에는 늙고 젊은 여인 다섯이 바야흐로 부채에 붉은 물감을 들여서 처마 밑에 말리고 있었다. 이때 별안간 말몰이꾼 하나가 알몸으로 뛰어드는데 머리엔 다 해진 벙거지를 쓰고, 허리 아래엔 겨우 한 토막 헝겊을 가릴 뿐이어서 그 꼴은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고 그야말로 흉측했다. 마루에 있던 여인들이 왁자그르 웃고 지껄이다가 그 꼴을 보고는 모두 일거리를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주인이 몸을 기울여 이 광경을 내다보고는 얼굴을 붉히더니, 교의에서 벌떡 뛰어내려 팔을 걷고 철석하고 그의 뺨을 한 대 때렸다. 말몰이꾼은,

 

말이 허기가 져서 보리찌꺼기를 사러 왔는데 당신은 왜 공연히 사람을 치오.”

한다. 주인은,

 

이 녀석, 예의도 모르는 녀석. 어찌 알몸둥이로 당돌하게 구는 거야.”

한다. 말몰이꾼이 문 밖으로 뛰어나갔으나 주인은 오히려 분이 풀리지 않아서 비를 무릅쓰고 뒤를 쫓아 나갔다. 그제야 말몰이꾼이 몸을 돌이켜 왝 소리를 내며 한 번 그의 가슴을 움켜잡고 치니, 주인이 흙탕 속에 나가 넘어지는 것을 다시 앙가슴을 한 번 걷어차고 달아나버렸다. 주인이 꿈쩍도 하지 못하고 마치 죽은 듯하더니, 이윽고 일어나서 아픔을 못 이겨 비틀거리며 걸어오는데,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었으나 분풀이할 곳이 없어서 씨근거리면서 도로 돌아와, 곱지 않은 눈시울로 나를 보는데 입으로 말은 못하나 풍세가 매우 사납다. 나는 그럴수록 넌지시 눈을 내리뜨고 사색을 가다듬어 늠름히 범하지 못할 기세를 보인 후에, 이윽고 얼굴빛을 부드럽게 해서 주인더러,

 

하인이 매우 무례해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봅니다만 다시 마음에 두지 마시지요.”

했더니, 주인이 곧 노염을 풀고 웃으며,

 

도리어 부끄럽습니다. 선생, 다신 그 말씀 마십시다.”

한다. 우세(雨勢)가 점차 드높고 오래 앉았으니 몹시 답답하였다. 주인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옷을 갈아입고 8, 9세쯤 되어 보이는 계집애를 데리고 나와서 내게 절을 시킨다. 아이 생김새가 한악(悍惡)해 보인다. 주인이 웃으며,

 

이게 제 셋째 딸년입니다. 전 사내아이를 두지 못했답니다. 선생께선 보아 하니 너그러우신 어른이시니까 성심껏 이 아이를 선생께 바치오니, 수양아버지가 되어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하기에, 나도 웃으며,

 

실로 주인의 후의에 감사하고 있습니다마는 일이 그렇지 않은 것이, 나로 말하면 외국 사람으로 이번에 한번 왔다 가면 다시 오기 어려운즉, 잠깐 동안 맺은 인연이 나중에 서로 생각하는 괴로움만 남길지니 이는 한갓 부질없는 일이오.”

했더니, 주인은 그래도 굳이 수양아비가 되어 달라 하나 나 역시 굳이 사양했다. 만일 한 번 수양딸을 삼으면 돌아갈 때 으레 연경의 좋은 물건을 사다 주어서 정표를 삼아야 하니, 이는 실로 마두(馬頭)들의 사이에 항용이 있는 일이라 한다. 괴롭고도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가 잠시 멎고 산들바람이 일기에 곧 일어나 문을 나가니 주인이 문까지 나와서 읍하고 작별하는데 제법 섭섭한 모양이다. 청심환 한 개를 내주었더니, 그는 두세 번 사양하기를 마지않는다. 이곳 여인들은 발에 검은 신을 신었으니 대체 기하(旗下 만주 사람)들인 듯싶다.

용읍암(龍泣菴)에 이르니 그 앞 큰 나무 밑에 건달패 여남은 명이 더위를 피하는데, 도끼를 돌리는 자도 있거니와, 비파 타고 저[] 불며 서유기(西遊記)놀음을 하는 판이었다.

저녁에 옥전현(玉田縣)에 이르니 무종산(無終山)이 있다. 혹은 이르기를,

 

연 소왕(燕昭王)의 사당이 이곳에 있었다.”

한다. 성중에 들어가서 한 점포를 조용히 구경하고 있는 즈음에 어디서인지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므로, 곧 정 진사와 함께 그 소리를 따라 들어가 보니 낭각 아래에 젊은이 대여섯이 늘어 앉아서, 혹은 저와 피리를 불며 혹은 현악(絃樂)을 타는 이도 있다. 방 가운데에는 한 사람이 교의 위에 단정히 앉았다가 우리를 보고 일어나 읍하는데, 얼굴이 제법 단아하고 나이는 쉰 남짓해 보이며 수염이 희끗희끗하다.

이름을 써 보이니 그는 머리를 끄덕일 뿐 성명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다. 네 쪽 벽엔 이름난 사람들의 서화가 가득 걸리었다. 주인이 일어나 작은 감실(龕室)을 여니, 그 속에 주먹 만한 옥으로 새긴 부처가 들어 있고 부처 뒤에는 관음상(觀音像)을 그린 조그마한 장자(障子)를 걸었는데, 그 화제(畵題)에는,

 

태창(泰昌) 원년(元年 1620) 춘삼월(春三月)에 제양(除陽) 구침(邱琛)은 쓰다.”

라고 씌었다. 주인이 부처 앞에 나아가 향을 피우고 절을 한 뒤에 감실문을 닫고 도로 교의 위에 앉더니, 그 성명을 글씨로 써 보인다.

 

전 심유붕(沈由朋)입니다. 소주(蘇州)에 살고 있으며, 자는 기하(箕霞), 호는 거천(巨川)이며, 나이는 마흔여섯입니다.”

그는 매우 말수가 적으며 조용한 기상을 지녔다. 나는 곧 그를 하직하고 일어나 문을 나오려는 즈음에, 얼핏 보니 탁자 위에 구리를 녹여서 사슴을 만든 것이 있는데, 푸른 빛이 속속들이 스민 듯하고 높이는 한 자 남짓 되며 또 두어 자 남짓한 연병(硏屛)에 국화를 그렸고, 그 겉에는 유리를 붙였는데 솜씨가 매우 기교하였으며, 서쪽 바람벽 밑에 푸른 꽃항아리가 있고 게다가 벽도화(碧桃花) 한 가지를 꽂았는데, 검은 왕나비 한 마리가 그 위에 앉았기에 애초에는 만든 것이려니 하였더니, 상세히 본즉 비취 바탕에 금무늬가 진짜 나비로서 꽃잎 위에 다리를 붙여서 말라버린 지 벌써 오래된 것이었다.

그리고 벽 위에 한 편의 기문(奇文)이 걸려 있는데, 백로지(白鷺紙)에다 가늘게 써서 격자(格子)를 만들어 가로 붙인 것이 한 폭 벽에 가득하였다. 글씨 역시 정미롭기에 그 밑에 다가서서 한 번 읽어 본즉, 가히 절세(絶世)의 기이한 글이라 이르겠다.

나는 다시 자리에 돌아와서,

 

저 벽 위에 걸린 글은 어떤 사람이 지은 거요.”

하고 물었더니, 주인은,

 

어떤 이가 지은 것인지를 모릅니다.”

한다. 정군은,

 

이는 아마 근세(近世)의 작품인 듯싶은데, 혹시 주인 선생께서 지으신 게 아닙니까?”

하니, 심유붕은,

 

저는 글을 한 줄도 모른답니다. 지은이의 성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즉, 대체 한()이 있는 줄도 모르는 놈이 어찌 위()인지 진()인지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한다. 나는,

 

그럼, 이게 어디에서 났단 말씀이오.”

했더니, 심은,

 

며칠 앞서 계주(薊州) 장에서 사온 것입죠.”

한다. 나는,

 

베껴 가도 좋습니까?”

하였더니, 심은 머리를 끄떡이며,

 

관계없습니다.”

한다. 종이를 가지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고 저녁 뒤에 정군과 함께 간즉 방 안에는 벌써 촛불 두 자루를 켜 놓았다. 내가 벽 가까이 가서 격자를 풀어 내리려 하였더니, 심은 심부름하는 사람을 불러서 내려 준다. 나는 다시,

 

이게 선생이 지으신 게 아니오.”

하였더니, 심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저는 거짓이 없기가 마치 저 밝은 촛불과 같답니다. 전 오래 전부터 부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부질없는 말은 삼가고 있습니다.”

한다. 나는 그제야 정군에게 부탁하여 그 한가운데에서 쓰기 시작하게 하고 나는 처음부터 베껴 내려가는 판이었다. 심은,

 

선생은 이걸 베껴 무얼 하시려오.”

하기에, 나는,

 

돌아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 번 읽혀서 모두들 허리를 잡고 한바탕 웃게 하려는 거요. 아마 이걸 읽는다면 입 안에 든 밥알이 벌처럼 날아갈 것이며, 튼튼한 갓끈이라도 썩은 새끼처럼 끊어질 것이야.”

하고 말을 마쳤다. 사관에 돌아와 불을 밝히고 다시 훑어 본즉, 정군이 베낀 곳에 그릇된 것이 수없이 많을뿐더러, 빠뜨린 글자와 글귀가 있어서 전혀 맥이 닿지 않으므로 대략 내 뜻으로 고치고 보충해서 한 편을 만들었다.

 

 

[D-001]시서(詩序) : 공자의 제자 복상(卜商)이 지은 시경(詩經) 각 편의 해제.

[D-002]마두(馬頭) : 역마(驛馬)의 일을 맡아 보는 사람.

[D-003]연 소왕(燕昭王) : 전국 시대 연()의 임금. 소왕은 시호요, 이름은 평().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호질(虎叱)

 

 

범은 착하고도 성스럽고, 문채롭고도 싸움 잘하고, 인자롭고도 효성스럽고, 슬기롭고도 어질고, 엉큼스럽고도 날래고, 세차고도 사납기가 그야말로 천하에 대적할 자 없다.

그러나 비위(狒胃)는 범을 잡아먹고, 죽우(竹牛 짐승 이름)도 범을 잡아먹고, ()도 범을 잡아먹고, 오색 사자(五色獅子)는 범을 큰 나무 선 산꼭대기에서 잡아먹고, 자백(玆白)도 범을 잡아먹고, 표견(䶂犬)은 날며 범과 표범을 잡아먹고, 황요(黃要)는 범과 표범의 염통을 꺼내어 먹고, () 뼈가 없다. 은 범과 표범에게 일부러 삼켜졌다가 그 뱃속에서 간을 뜯어먹고, 추이(酋耳)는 범을 만나기만 하면 곧 찢어서 먹고, 범이 맹용(猛㺎 짐승 이름)을 만나면 눈을 감은 채로 감히 뜨질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사람은 맹용을 두려워하지 않되 범은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음을 보아서는 범의 위풍이 몹시 엄함을 알 수 있겠구나.

범이 개를 먹으면 취하고 사람을 먹으면 조화를 부리게 된다. 그리고 범이 한 번 사람을 먹으면 그 창귀(倀鬼)가 굴각(屈閣 창귀 이름)이 되어 범의 겨드랑이에 붙어 살면서, 범을 남의 집 부엌으로 이끌어 들여서 솥전을 핥으면 그 집 주인이 갑자기 배고픈 생각이 나서, 밤중이라도 밥을 지으려 하게 되며, 두 번째 사람을 먹으면 그 창귀는 이올(彛兀 창귀 이름)이 되어 범의 광대뼈에 붙어 살며, 높은 데 올라가서 사냥꾼의 행동을 살피되, 만일 깊은 골짜기에 함정(陷穽)이나 묻힌 화살이 있다면, 먼저 가서 그 틀을 벗겨 놓으며, 범이 세번째 사람을 먹으면 그 창귀는 육혼(鬻渾 창귀 이름)이 되어 범의 턱에 붙어 살되 그가 평소에 알던 친구들 이름을 자꾸만 불러댄다.

하루는 범이 창귀들을 모아 놓고 분부를 내리되,

 

오늘도 벌써 해가 저무는데 어디서 먹을 것을 취한단 말이냐.”

한다. 굴각은,

 

제가 진작 점쳐 보았더니 뿔 가진 것도 아니고 날짐승도 아닌 검은 머리한 것이, [] 위에 발자국이 비틀비틀 성긴 걸음을 하며 뒤통수에 꼬리가 붙어서 꽁무니를 못 감추는 그런 놈입니다.”

하고, 이올은,

 

저 동문(東門)에 먹을 것이 있사오니 그 이름은 의원(醫員)’이라 한답니다. 그는 입에 온갖 풀을 머금어서 살과 고기가 향기롭고, 서문(西門)에도 먹을 것이 있사오니 그 이름은 무당(巫堂)’이라 한답니다. 그는 온갖 귀신에게 아양부려 날마다 목욕재계해서 고기가 깨끗하온즉, 이 두 가지 중에서 마음대로 골라 잡수시죠.”

했다. 그제야 범이 수염을 거스리고 낯빛을 붉히며,

 

에에, ‘()’란 것은 ()’인만큼 저도 의심나는 바를 모든 사람들에게 시험해서 해마다 남의 목숨을 끊은 것이 몇만 명으로 셀 수 있고, ‘()’ ()’인만큼 귀신을 속이고 인민들을 유혹하여 해마다 남의 목숨을 끊은 것이 몇만 명으로 셀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뭇 사람의 노여움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그것이 화하여 금잠(金蠶)이 되었으니, 독이 있어 먹을 수 없다.”

했다. 이에 육혼은 또,

 

저 숲속(유림(儒林))에 살코기가 있사온데 그는 인자한 염통과 의기(義氣)로운 쓸개에 충성스러운 마음을 지니고 순결한 지조를 품었으며, ()은 머리 위에 이고 있고, ()는 신처럼 꿰고 다닌답니다. 뿐 아니라 그는 입으로 백가(百家)의 말들을 외며 마음속으로는 만물의 이치를 통했으니, 그의 이름은 석덕지유(碩德之儒 높은 덕망을 지닌 유학자)’라 하옵니다. 등살이 오붓하고 몸집이 기름져서 오미(五味)를 갖추어 지녔답니다.”

한다. 범이 그제야 눈썹을 치켜 세우고 침을 흘리며 하늘을 쳐다보고 싱긋 웃으면서,

 

()이 이를 좀 상세히 듣고자 한다.”

하였다. 모든 창귀들이 서로 다투어가며 범에게 추천한다.

 

일음(一陰)일양(一陽)을 도()라 하옵는데, 저 유()가 이를 꿰뚫으며, 오행(五行)이 서로 낳고 육기(六氣)가 서로 이끌어 주옵는데, 저 유가 이를 조화시키나니, 먹어서 이보다 맛좋은 것이 없으리다.”

범이 이 말을 듣자 문득 추연(愀然)히 낯빛을 붉히며 기쁘지 않은 어조로서,

 

아니다. 저 음()과 양()이란 것은 한 기운에서의 죽고 삶에 불과하거늘, 그들이 둘로 나뉘었으니 그 고기가 잡()될 것이요, 오행은 각기 제 바탕이 있어서 애당초 서로 낳는 것은 아니거늘, 이제 그들은 구태여 자()()로 갈라서 심지어는 짜고 신맛들에 이르기까지 분배(分配)시켰으니 그 맛이 순()하지 못할 것이요, 육기는 제각기 행하는 것이어서 남이 이끌어 줌을 기다릴 것이 없거늘, 이제 그들은 망녕되이 재성(財成)보상(輔相)이라 일컬어서 사사로이 제 공을 세우려 하니, 그것을 먹는다면 어찌 딱딱하여 가슴에 체하거나 목구멍에 구역질이 나지 않겠느냐.”

하였다.

때마침 정()의 어느 고을에 살고 있으면서 벼슬을 좋아하지 않는 척하는 선비 하나가 있으니, 그의 호는 북곽선생(北郭先生)’이었다. 그는 나이 마흔에 손수 교정한 글이 1만 권이요, 또 구경(九經)의 뜻을 부연(敷衍)해서 책을 엮은 것이 1 5천 권이나 되므로, 천자(天子)가 그의 의()를 아름답게 여기고, 제후(諸侯)들은 그의 이름을 사모하였다.

그리고 그 고을 동쪽에는 동리자(東里子)라는 얼굴 예쁜 청춘과부 하나가 살고 있었다. 천자는 그의 절조(節操)를 갸륵히 여기고 제후(諸侯)들은 그의 어짊을 연모하여, 그 고을 사방 몇 리의 땅을 봉하여 동리과부지려(東里寡婦之閭)’라 하였다.

동리자는 이렇게 수절(守節)하는 과부였으나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각기 다른 성()을 지녔다. 어느 날 밤 그 아들 다섯 놈이 서로 노래처럼 된 말로서,

 

강 북편에 닭 울음 소리 / 水北雞鳴

강 남쪽엔 별이 반짝이네 / 水南明星

방 안 소리 자아하니 / 室中有聲

북곽선생 어인 일고 / 何其甚似北郭先生也

하고는 성 다른 형제 다섯이 번갈아서 문 틈으로 들여다보았다. 동리자가 북곽선생께 청하기를,

 

오랫동안 선생님의 덕을 연모하였답니다. 오늘 밤엔 선생님의 글 읽으시는 음성을 듣고자 하옵니다.”

한다. 그제야 북곽선생은 옷깃을 여미고 꿇어앉아서 시() 한 장()을 읊었다.

 

병풍에는 원앙새요 반짝반짝 반딧불을 / 鴛鴦在屛耿耿流螢

가마솥과 세발솥은 무얼 본떠 만들었나 / 維鬵維錡云誰之型

흥이라 / 興也

그 꼴을 본 다섯 아들은 서로 말하기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과부의 문엔 함부로 들지 않는다.’ 하였는데 북곽선생은 어진이라서 그런 일 없을 거야.”

나는 듣자 하니, 이 고을 성문이 헐어서 여우가 구멍을 내었다고 하더군요.”

나는 들은즉, 여우가 천 년을 묵으면 환생(幻生)하여 능히 사람 시늉을 할 수 있다 하니, 그놈이 필시 북곽선생으로 둔갑한 것일게다.”

하고, 다시 서로 의논하되,

 

나는 듣건대, 여우의 갓을 얻는 자는 천금의 장자가 되고, 여우의 신을 얻는 자는 대낮의 그림자를 감출 수 있고, 여우의 꼬리를 얻는 자는 남을 잘 괴어서 누구라도 그를 기뻐한다 하니, 우리 저 여우를 잡아 죽여서 나눠 갖는 게 어떨꼬.”

하고, 이에 다섯 아들이 함께 어미의 방을 에워싸고 들이쳤다. 북곽선생이 크게 놀라서 뺑소니를 칠 제 남들이 행여 제 얼굴을 알아볼까 해서 한 다리를 비틀어서 목덜미에 얹고 도깨비처럼 춤추고 귀신처럼 웃으며 문밖으로 나와서 들이뛰어 가다가 벌판 구덩이에 빠지니 그 속에는 똥이 가뜩 채워져 있었다. 간신히 휘어잡고 기어 올라서 목을 내밀고 바라본즉 범이 어흥하며 길을 가로막았다. 범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구역질하고 코를 싸 쥐고 머리를 왼편으로 돌리며,

 

에퀴이, 그 선비 구리도다.”

한다. 북곽선생이 머리를 조아리며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와서 세 번 절하고 꿇어앉아서 고개를 쳐들고 여쭈되,

 

범님의 덕이야말로 참 지극하시지요. 대인(大人)은 그 변화를 본받고제왕(帝王)은 그 걸음을 배우며,남의 아들 된 이는 그 효성을 본받고,장수는 그 위엄을 취하며 그 거룩하신 이름은 신룡(神龍)과 짝이 되어 한 분은 바람을, 또 한 분은 구름을 일으키시니, 저 같은 하토(下土)의 천한 신하 감히 하풍(下風)에 있습니다.”

한다. 범은 이 말을 듣자 꾸짖는다.

 

에에, 앞에 가까이 오질 말렸다. 앞서 내 들은즉, ‘()’란 것은 ()’라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네가 평소에는 온 천하의 모든 나쁜 이름을 모아서 망녕되이 내게 덧붙이더니, 이제 다급해지자 낯간지럽게 아첨하는 것을 그 뉘라서 곧이 듣겠느냐. 대개 천하의 이치야말로 하나인만큼 범이 진정 몹쓸진대 사람의 성품도 역시 몹쓸 것이요, 사람의 성품이 착할진대 범의 성품도 역시 착할지니, 너희들의 천만 가지의 말이 모두 오상(五常)을 떠나지 않으며 경계나 권면이 언제나 사강(四綱)에 있긴 하나, 저 도회지나 큰 고을에 코 베이고 발 잘리고 얼굴에 먹바늘을 뜨고 다니는 것들은 모두 오륜(五倫)을 순종하지 않았다는 사람이란 말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밧줄이며 먹바늘이며 도끼며 톱 따위를 공급하기에 겨를이 없었지만 그 나쁜 짓들은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범의 집에는 본래 이러한 악독한 형벌이 없으니, 이로써 본다면 범의 성품이 사람보다 어질지 아니하냐. 그리고 범은 나무와 푸새를 씹지 않고, 벌레나 물고기를 먹지 않으며, 강술 같은 좋지 못한 것을 즐기지 않고, 새끼나 기르는 것 같은 자잘구레한 것도 차마 먹지 않는다. 그리고는 산에 들어가면 노루나 사슴을 사냥하고, 들에 나가면 마소를 사냥하되, 아직 구복(口腹)의 누()를 입거나 음식의 송사를 일으키거나 한 일은 없으니, 범의 도()야말로 어찌 광명 정대하지 아니하냐. 범이 노루나 사슴을 먹으면 너희들 사람은 범을 미워하지 않다가도, 범이 만일 마소를 먹는다면 사람들은 원수라고 떠들어대니, 이것은 아마 노루와 사슴은 사람에게 은혜로움이 없지만, 저 마소는 너희들에게 공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들은 저 마소의 태워 주고 일해 주는 공로도, 따르고 충성하는 생각도 다 저버리고 다만 날마다 푸줏간이 미어지도록 이들을 죽이고, 심지어는 그 뿔과 갈기까지 남기지 않고도 다시 우리들의 노루와 사슴을 토색질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산에서 먹을 것이 없고 들에서도 끼니를 굶게 하니, 하늘로 하여금 이를 공평하게 처리하게 한다면 너희를 먹어야 하겠는가, 놓아 주어야 되겠는가. 대개 제것 아닌 것을 취함을 도()라 하고, 남을 못살게 굴고 그 생명을 빼앗는 것을 적()이라 하나니, 너희들이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쏘다니며 팔을 걷어붙이며 눈을 부릅뜨고, 함부로 남의 것을 착취하고 훔쳐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심지어는 돈을 형이라 부르고,장수되기 위해서 아내를 죽이는 일까지도 있은즉, 이러고도 인륜의 도리를 논할 수 있을 것인가. 뿐만 아니라 메뚜기에게 그 밥을 빼앗고 누에한테서 옷을 빼앗으며, 벌을 제압하여 꿀을 약탈하고, 심한 자는 개미 알을 젓담아서 그 조상께 제사하니 그 잔인하고도 박덕함이 너희들보다 더할 자 있겠는가. 너희들은 이()를 말하며 성()을 논하면서 툭하면 하늘을 일컬으나, 하늘이 명()한 바로써 본다면 범이나 사람이 다 한가지 동물이요,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아서 기르는 인()으로써 논한다면 범과 메뚜기누에개미와 사람이 모두 함께 길러져서 서로 거스를 수 없는 것이요, 또 그 선악으로써 따진다면 뻔뻔스레 벌과 개미의 집을 노략질하고 긁어 가는 놈이야말로 천하의 큰 도()가 아니며, 함부로 메뚜기와 누에의 살림을 빼앗고 훔쳐 가는 놈이야말로 인의(仁義)의 큰 적()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범은 아직 표범을 먹지 않음은 실로 차마 제 겨레를 해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범이 노루나 사슴 먹는 것을 헤아려도 사람이 노루와 사슴을 먹는 이만큼 많지 못할 것이며, 범이 마소 먹는 것을 헤아려도 사람이 마소를 먹는 이만큼 많지 못할 것이며, 범이 사람을 먹는 것을 헤아려도 사람이 저희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이만큼 많지 못할 것이다. 지난해 관중(關中 중국의 섬서성(陝西省) 지방)이 크게 가물었을 때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것이 몇만 명이요, 그 앞서 산동(山東)에 큰물이 났을 적에도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것이 역시 몇만 명 있었으니까. 그러나 서로 잡아먹음이 많기야 어찌 저 춘추 전국 시대만 하였으랴. 춘추 그 때엔 명색이나마 정의를 위해서 싸운다는 난리가 열일곱 번이요, 원수를 갚는다고 일으킨 싸움이 서른 번에 그들의 피는 천리를 물들였고 죽어 자빠진 시체는 백만이나 되었다. 그러나 범의 집에선 물이나 가뭄의 걱정을 모르므로 하늘을 원망할 것도 없고, 원수와 은혜를 모두 잊고 지내므로 다른 물건에게 미움을 입지 않고, 천명을 알고 그에 순종하므로 무당이나 의원의 간교함에 혹하지 않고, 타고난 바탕 그대로 지녀서 천명을 다하므로 세속의 이해에 병들지 아니하니, 이것이 곧 범이 착하고도 성스러운 것이다. 그뿐일까. 그 한 곳의 아롱진 것을 엿보더라도 족히 그 문()을 온 천하에 보일 수 있겠고, 척촌의 병장기(兵仗器) 하나 지니지 않고 발톱과 날카로운 이빨만을 쓰는 것은 이로써 무()를 천하에 빛내는 것이었다. 범과 원숭이를 그릇에 그린 것은 효()를 천하에 넓히는 것이었으며, 하루에 한번 사냥하여 까마귀솔개참개구리말개미 따위와 함께 그 대궁[ 먹다 남은 음식]을 나눠 먹으니, 그 인()이야말로 이루 다 쓸 수 없겠고, 고자질하는 자는 먹지 않으며, 병폐한 자도 먹지 않고, 상제된 자도 먹지 않으니, 그 의()야말로 이루 쓸 수 없지 않겠느냐. 그런데 너희들이 먹고 사는 것이야말로 불인(不仁)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저 틀과 함정으로도 오히려 모자라서 저 새 그물과 작은 노루 그물과 물고기 그물과 큰 물고기 그물과 수레 그물과 삼태 그물 따위들을 만들었으니, 이는 애당초 그물을 뜬 자야말로 뚜렷이 천하에 화근을 퍼뜨린 놈일 것이다. 게다가 큰 바늘이니, 쥘 창이니, 날 없는 창이니, 도끼니, 세모난 창이니, 한 길 여덟 자 창이니, 뾰족 창이니, 작은 칼이니, 긴 창이니 하는 것들이 생기고, 또 화포(火礮)란 것이 있어서 터뜨린다면 소리가 화산(華山)을 무너뜨릴 듯 그 불 기운은 음양을 누설하여 그 무서움이 우레보다 더하거늘, 이러고도 그 못된 꾀를 마음껏 부리지 못하여서 이제는 보드라운 털을 빨아서 아교를 녹여 붙여 날을 만들되, 끝은 대추씨처럼 뾰족하고 길이는 한 치도 못 되게 하여, 오징어 거품에다 담그었다가 세로 가로로 멋대로 치고 찌르되, 그 굽음은 세모창 같고, 날카로움은 작은 칼 같고, 열쌤은 긴 칼 같고, 갈라짐은 가지창 같고, 곧음은 살 같고, 팽팽하기는 활 같아서, 이 병장기가 한 번 번뜩이면 모든 귀신들이 밤중에 곡()할 지경이라니, 그 서로 잡아먹기로도 가혹함이 뉘라서 너희들보다 더할 자 있겠느냐.”

한다. 북곽선생이 자리를 떠나 한참 엎드렸다가 일어나 엉거주춤하더니, 두 번 절하고 머리를 거듭 조아리며,

 

()에 이르기를 비록 아무리 못난 사람일지라도 목욕재계를 한다면 상제(上帝)라도 섬길 수 있다 하였사오니, 이 하토(下土)에 살고 있는 천신(賤臣)이 감히 하풍(下風)에 섭니다.”

하고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듣되, 오래도록 아무런 분부가 없으므로 실로 황송키도 하고 적이 두렵기도 해서, 손을 맞잡고 머리를 조아리며 쳐다본즉 동녘이 밝았는데, 범은 벌써 어디론지 가버리고 말았다. 마침 아침에 밭갈러 온 농부가,

 

선생님, 무슨 일로 이 꼭두새벽에 벌판에다 대고 절은 웬 절이시옵니까.”

하고 묻는다. 북곽선생은,

 

내 일찍이 들으니

하늘이 높다 하되 / 謂天蓋高

머리 어찌 안 굽히며 / 不敢不跼

땅이 비록 두텁단들 / 謂地蓋厚

얕디디지 않을쏘냐 / 不敢不蹐

하였네그려.”

하고는 말 끝을 흐려 버렸다.

 

 

[D-001]비위(狒胃) : 짐승 이름. 비비(狒狒)의 일종.

[D-002]() : 말과 같은 짐승인데, 산해경(山海經), “몸은 희고 꼬리는 검으며 외뿔에 범처럼 생겼으며, 어금니와 발톱을 가졌고, 호표를 먹는다.” 하였다.

[D-003]오색 사자(五色獅子) : 호회(虎薈), “누런 털에 오색이 찬란하고, 꼴은 사자와 같다.” 하였다.

[D-004]자백(玆白) : 급총궐서(汲冢闕書), “꼴이 말 같으며, 톱니가 날카로워서 호표를 먹는다.” 하였다.

[D-005]표견(䶂犬) : 거수국(渠搜國)에 있는 개. 일명은 노견(露犬)인데, 날아서 호표를 먹는다 하였다.

[D-006]황요(黃要) : 개의 일종. 표범과 비슷하고, 허리 이상은 누르고 이하는 검으며, 작은 놈은 청요(靑要)라 하는데, ()는 요()와 같다.

[D-007]() : 범의 입에 들어가도 범이 물지 못한다. 그러면 범의 뱃속에서부터 먹어 나온다.

[D-008]추이(酋耳) : 범의 일종. 크고 꼬리가 길다 한다.

[D-009] …… 놈입니다 : 사람을 가리킨다.

[D-010]금잠(金蠶) : 박물지(博物志), “남방 사람이 금잠을 기르는데, 촉금(蜀錦)을 먹이고, 그 똥을 음식 속에 넣으면 독이 있다.” 하였다.

[D-011]육기(六氣) : ()()()()()().

[D-012]재성(財成)보상(輔相) : 역경(易經), “천지의 도를 마련해 이룩하며, 천지의 의()를 도와 준다.” 하였다.

[D-013]구경(九經) : 역경(易經)》ㆍ《서경(書經)》ㆍ《시경(詩經)》ㆍ《춘추좌전(春秋左傳)》ㆍ《예기(禮記)》ㆍ《주례(周禮)》ㆍ《효경(孝經)》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

[D-014]가마솥과 …… 만들었나 : 발 없는 가마솥과 세발솥은 그 모형이 다 다르다. 이로써 성 다른 다섯 아들에게 비하였다. 대체 다섯 아이들이 성도 다르고 얼굴도 같지 않으니, 이는 어떤 잡놈들과 관계해서 이런 것들을 낳았다는 의미.

[D-015]흥이라[興也] : 육의(六義)의 하나. 먼저 어떤 다른 물건을 읊어서 그 목적하고 있는 것을 끄집어 일으키는 것으로, 예를 들면 원앙새를 먼저 이끌어서 남녀의 사건을 전개하는 것이다.

[D-016]여우의 꼬리 : 꼬리라 하였지마는, 사실은 샅을 일컬었다.

[D-017]대인(大人) …… 본받고 : 역경(易經)에 나오는 구절.

[D-018]제왕(帝王) …… 배우며 : 송사(宋史) 태조기(太祖紀)에 나오는 말.

[D-019]남의 …… 본받고 : 서경(書經) 채침(蔡沈)의 주()에 나오는 말.

[D-020]장수는 …… 취하며 : 무관직에는 범호() 자를 많이들 쓴다. 예를 들면 촉한(蜀漢) 때의 오호대장(五虎大將)과 같은 것.

[D-021]신룡(神龍) …… 일으키시니 : 역경에 나오는 말.

[D-022]오상(五常) : 부의(父義)모자(母慈)형우(兄友)제공(弟恭)자효(子孝).

[D-023]사강(四綱) : ()()()().

[D-024]돈을 …… 부르고 : 옛날 돈이 구멍이 났으므로 공방형(孔方兄)이라 하였고, 또는 돈을 가형(家兄)이라 한 이도 없지 않았다. () 나라 노포(魯褒) 전신론(錢神論)에 나오는 말들.

[D-025]장수되기 ……  : 전국 때 명장 오기(吳起)의 고사.

[D-026]개미 …… 제사하니 : 예기 내칙편(內則篇)에 나오는 일.

[D-027]고자질하는 …… 않으니 : 이 세 가지를 먹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나라 재래로부터 내려오는 속담.

[D-028]보드라운 …… 지경이라니 : 붓으로 문자를 써서 온갖 못된 짓을 다한다는 비유. 옛날 창힐(倉頡)이 한자(漢子)를 처음 짓자, 귀신이 밤에 울었다 하였다.

[D-029]아무리 …… 있다 : 맹자(孟子) 이루편(離婁篇)에 나오는 한 구절.

[D-030]하늘이 …… 않을쏘냐 : 시경(詩經)에 나오는 글귀.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호질후지(虎叱後識)

 

 

연암씨(燕巖氏) 가로되,

 

이 편()이 비록 지은이의 성명은 없으나 대체로 근세 중국 사람이 비분(悲憤)함을 참지 못해서 지은 글일 것이다. 요즘 와서 세운(世運)이 긴 밤처럼 어두워짐에 따라 오랑캐의 화()가 사나운 짐승보다도 더 심하며, 선비들 중에 염치를 모르는 자는 하찮은 글귀나 주워 모아서 시세에 호미(狐媚)하니, 이는 바로 남의 묘혈(墓穴)을 파는 유학자(儒學者)로서 시랑 같은 짐승으로도 오히려 먹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 아닐는가 싶다. 이제 이 글을 읽어 본즉, 말이 많이들 이치에 어긋나서 저 거협(胠篋)도척(盜跖)과 뜻이 같다. 그러나 온 천하의 뜻있는 선비가 어찌 하룬들 중국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청()이 천하의 주인이 된 지 겨우 네 대째건마는 그들은 모두 문무가 겸전하고 수고(壽考)를 길이 누렸으며, 승평을 노래한 지 백 년 동안에 온 누리가 고요하니, 이는 한()() 때에도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처럼 편안히 터를 닦고 모든 건설하는 뜻을 볼 때에 이 또한 하느님의 배치(配置)한 명리(命吏 제왕을 일컬음)가 아닐 수 없겠다. 옛날 어느 학자가 일찍이 하늘이 순순(諄諄)히 명령하신다는 말씀을 의심하여 성인(맹자)에게 질문했더니, 그 성인은 똑똑히 하느님의 뜻을 받아서,

하느님은 말씀으로 하진 않으시고 모든 실천과 사실로서 표시하는 거야.’

하셨으니, 소자(小子) 일찍이 이 글을 읽다가 이곳에 이르러선 퍽 의심스러웠다. 이제 나는 감히 묻노니,

하느님께선 모든 실천과 사실로써 그의 의사를 표시하실진대, 저 오랑캐의 제도로써 중국의 것을 뜯어 고친다는 것은 천하의 커다란 모욕인만큼 저 인민들의 원통함이 그 어떠하며, 향기로운 제물과 비린내 나는 제물은 각기 그들의 닦은 덕()에 따라 다른 것이니, 백신(百神)은 그 어떤 냄새를 응감할 것인가.”

요컨대, 사람으로서 보면 중화(中華)와 이적의 구별이 뚜렷하겠지마는 하늘로서 본다면 은()의 우관(冔冠)이나 주()의 면류(冕旒)도 제각기 때를 따라 변하였거니, 어찌 반드시 청인(淸人)들의 홍모(紅帽)만을 의심하리오. 이에 천정(天定)인중(人衆)의 설()이 그 사이에 유행되고는, 사람과 하늘의 서로 조화되는 이()는 도리어 한 걸음 물러서서 기()에게 명령을 받게 되며, 또 이런 문제로써 옛 성인의 말씀에 체험하여도 맞지 않으면 문득 이르기를,

이건, 천지의 기수(氣數)가 이런 것이야.’

한다. 아아, 슬프다. 이것이 어찌 참으로 기수의 소치라 이르고 말 것인가. 아아, 슬프다. ()의 왕택(王澤)이 끊인 지 벌써 오래여서 중원의 선비들이 그 머리를 고친(치발(薙髮)) 지도 백 년의 요원한 세월이 흘렀으되, 자나깨나 가슴을 치며 명실(明室)을 생각함은 무슨 까닭인고. 이는 차마 중국을 잊지 못함이다. 그러나 청이 저를 위한 계책도 역시 허술하다 하리로다. 그는 전대(前代) 오랑캐 출신의 말주(末主)들이 항상 중화의 풍속과 제도를 본받다가 쇠망했음을 징계하여 철비(鐵碑)를 새겨서 전정(箭亭 파수 보는 곳)에 묻었으나, 그들 평소에 하고 버리는 말 가운데에는 언제나 스스로 그의 옷과 벙거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음이 없건마는, 오히려 다시 강약의 형세에만 마음을 두니 그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저 문왕(文王)처럼 깊은 꾀와 무왕(武王) 같은 높은 공렬로도 오히려 말주(은의 주왕(紂王))의 쇠퇴함을 구해 내지 못했거늘, 하물며 구구(區區)하게 저 의관 제도의 하찮은 것을 고집해선 무엇할 것인가. 그들의 옷과 벙거지가 진정 싸움에 경편하다면 저 북적(北狄)이나 서융(西戎)의 그것인들 아니될 이유는 없을 것인즉, 그들은 의당 힘껏 저 서북쪽의 오랑캐들로 하여금 도리어 중국의 옛 습속을 따르게 한 연후에야 비로소 천하에 홀로 강한 체할 것이어늘, 이제 온 천하의 인민들을 모두 욕된 구렁에 몰아넣고는 홀로 호령하되,

잠깐 너희들의 수치를 참으면 우리를 따라 강하게 될지어다.’

하나, 나는 그 강하다는 것이야말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굳이 의관 제도만으로 강함이 된다면, 저 신시(新市)녹림(綠林) 사이에 그 눈썹을 붉게 물들이거나 또는 그 머리 수건을 노란 빛깔로 고쳐서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했던 도적놈이라야 되는 것은 아니리라. 가령 어리석은 인민들로 하여금 한번 일어나서 그들이 씌워 주었던 벙거지를 벗어서 땅에 팽개친다면, 청 황제(淸皇帝)는 벌써 천하를 앉은 자리에서 잃어버리게 될지니, 지난날 이를 믿고서 스스로 강하다고 뽐내던 것이 도리어 망하는 실마리가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된다면 그 빗돌을 새겨 묻어서 후세에 경계한 일이야말로 어찌 부질없는 짓이 아니리오. 이 편은 애초엔 제목(題目)이 없으므로 이제 그 글 중에 호질(虎叱)’이란 두 글자를 따서 제목을 삼아 두어 저 중원의 혼란이 맑아질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하였다.

 

 

[C-001]호질후지(虎叱後識) : 다른 에는 이 소제가 없었던 것을, 이제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다.

[D-001]거협(胠篋)도척(盜跖) : 모두 장자의 편명. 남화경(南華經) 외물편(外物篇)에 나오는 말.

[D-002]옛날 …… 거야 : 맹자 만장편에 나오는 구절. 여기서 어느 학자란 맹자의 제자인 만장(萬章)을 말함.

[D-003]소자(小子) : 연암이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서 한 말.

[D-004]천정(天定) …… () : 귀잠지(歸潛志), “사람의 숫자가 많으면 하늘도 막아 낼 수 없고, 하늘이 정해 놓은 것은 사람이 어쩔 수 없다.” 하였다.

[D-005]신시(新市)녹림(綠林) : 이 둘은 모두 당시의 소위 유적(流賊)이 출몰하는 근거지.

[D-006]눈썹을 …… 물들이거나 : 적미적(赤眉賊). 서한(西漢) 말년의 유적.

[D-007]머리 …… 고쳐서 : 동한(東漢) 말기의 황건적(黃巾賊).

[D-008]도적놈 : 옛날 지배 계급의 역사에서는, 정의를 들고 일어서서 항쟁하는 농민들은 모두 도적이라 일컬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9일 을사(乙巳)

 

 

개다.

옥전현(玉田縣)에서 새벽에 떠나 서팔리보(西八里堡)까지 8, 오리둔(五里屯) 7, 채정교(釆亭橋) 5, 대고수점(大枯樹店) 10, 소고수점(小枯樹店) 2, 봉산점(蠭山店) 3, 별산점(鱉山店) 12, 송가장(宋家庄)을 구경하고 모두 47리를 가서 점심 먹고, 또 별산점에서 이리점(二里店)까지 2, 현교(現橋) 5, 삼가방(三家坊) 2, 동오리교(東五里橋) 16리인데, 이 다리의 일명은 용지하(龍池河) 어양교(漁陽橋)라 한다. 거기에서 계주성(薊州城)까지 5, 서오리교(西五里橋) 5, 방균점(邦囷店) 15, 모두 50리이다. 이날 95리를 가서 방균점에서 묵었다.

산 오목한 곳에 큰 나무가 있는데 몇 백 년 동안을 잎이 피어나지 않으나 가지나 줄기가 썩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고수(枯樹)’라 일컫는다. 송가장의 성 둘레는 2, ()의 천계(天啓) 연간에 송씨(宋氏)들이 쌓은 것이다. 그들의 이른바 외랑(外郞)이란 서리(胥吏 아전(衙前))의 별칭(別稱)인데, 송씨가 이 지방의 큰 성바지여서 그 일족이 몇 백 명이요, 살림이 모두 넉넉하여 명청이 교체될 즈음에 저희들끼리 이 성을 쌓아서 겨레들을 모아 지키었다. 성 가운데엔 대() 셋을 세웠는데 높이가 각기 여남은 길이나 되고 문 위엔 다락을 세웠고, 집 뒤에는 네 층 높은 다락이 있고, 맨 꼭대기엔 금부처를 모셨다. 난간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니 눈앞이 시원스레 트이었다. 청인(淸人)이 처음 이곳을 들어올 때 온 문중을 모아서 성을 사수하였고, 천하의 대세가 정한 뒤에도 곧 나가 항복하지 않았으므로, 청인이 이를 미워하여 해마다 은() 1천 냥을 벌로 받치게 하였더니, 강희 말년에 이르러서는 그 대신으로 말먹이 풀 1천 단씩을 내게 하였다.

성중에는 아직도 큰 집 여남은 채가 모두 송씨들이며 노비들도 오히려 오륙백 명이나 된다 한다.

계주(薊州) 성안엔 인물들이 번화하니 실로 북경 동쪽의 거진(巨鎭)답다. 산 위엔 안녹산(安祿山)의 사당이 있고 성중엔 돌로 세운 패루 셋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금자(金字)로 대사성(大司成)이라 새기고, 그 아래엔 국자좨주(國子祭酒 국자감(國子監)의 벼슬 이름)  삼대고증(三代誥贈)’이라고 나란히 써서 붙였다. 이곳의 술맛은 관동에서 으뜸이라 하므로 한 주루(酒樓)에 들어가 여러 사람과 함께 흉금을 터놓고 한번 취토록 마셨다. 독락사(獨樂寺)에 들어간즉, 정전(正殿)의 제액(題額)은 자비사(慈悲寺)였고, 그 뒤엔 2층 다락이 서 있는데 그 가운데엔 아홉 길이나 되는 금부처를 세웠고, 그 머리 위엔 작은 금부처 수십 개를 앉히었다. 다락 밑엔 한 부처를 누인 채 비단 이불을 덮어 두었는데, 그 다락의 현판엔 관음지각(觀音之閣)’이라 하고, 그 왼편엔 조그마한 글자로 태백(太白)’이라 써 붙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저기 이불 덮은 채 누운 것은 부처님이 아니고 이백(李白)이 취해서 자는 소상(塑像)입니다.”

한다. 행궁(行宮)이 있긴 하나 굳게 잠그고는 구경을 허락하지 않는다. 객관에 돌아온즉, 문밖엔 장사치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데, 말과 나귀에다 서책서화골동 등을 실었고, 곰을 놀리는 등 여러 가지 재주를 구경했다. 그러나 뱀 놀리는 자 범 놀리는 자도 있었던 모양이나 벌써 흩어져 버렸으므로 미처 보지 못해서 한스러운 일이다. 앵무새를 파는 자가 있으나 날이 저물어서 그 털빛을 상세히 볼 수 없으므로 막 등불을 찾아 오는 동안에 그 자가 그만 가버려서 더욱 유감이었다.

 

 

[D-001]안녹산(安祿山) : 본래 당 나라 때의 잡호(雜胡)로서, 당 현종(唐玄宗) 때 양귀비의 눈에 들어 몇 개 절도사(節度使)를 겸임했다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후계자 문제로 아들 경서(慶緖)에게 시해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30일 병오(丙午)

 

 

개다.

방균점(邦囷店)에서 별산장(別山庄)까지 2, 곡가장(曲家庄) 2, 용만자(龍灣子) 3, 일류하(一柳河) 2, 현곡자(現曲子) 2, 호리장(胡李庄) 10, 백간점(白幹店) 2, 단가점(段家店) 2, 호타하(滹沱河) 5, 삼하현(三河縣) 5, 동서조림(東西棗林) 5, 모두 46리를 가서 점심 먹고, 조림에서 백부도장(白浮屠庄)까지 6, 신점(新店) 6, 황친점(皇親店) 6, 하점(夏店) 6, 유하점(柳河店) 5, 마이핍(馬已乏) 6, 연교보(烟橋堡) 7, 모두 41리이다. 이날 84리를 가서 연교보에서 묵었다.

계주는 옛날 어양(漁陽)이다. 그 북에 반산(盤山)이 있는데 위태로이 솟은 봉우리가 깎아 세운 듯하고, 봉우리마다 위가 퍼지고 아래가 가늘어서 그 꼴이 소반과 같으므로 반산이란 이름을 얻었고, 또 일명 오룡산(五龍山)이라고도 한다. 내 앞서 원중랑(袁中郞) 반산기(盤山記)를 읽다가 기승(奇勝)한 곳이 많음을 알았더니, 이제 기어코 한번 올라가 보고 싶었지만 함께 갈 사람이 없으니 하는 수 없었다.

그 산이 비록 가파로우나 몇백 리를 웅장(雄壯)하게 서려 있을뿐더러 겉은 바위가 입혔지만, 속은 살찐 흙이어서 과실 나무들이 극히 많으므로 연경(燕京)에서 날마다 소비하는 대추배 등속이 모두 이곳에서 나는 것이라 한다.

어양교(漁陽橋)에 다다르니 길 왼편에 양귀비(楊貴妃)의 사당이 있어서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안녹산의 사당과 서로 마주 보고 섰다. 천하에 돈 있는 자가 아무리 많다손 치더라도 하필이면 이런 추잡한 사람들의 사당을 지어서 명복(冥福)을 빈단 말인가.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아무리 복을 구한단들 사곡해선 안 되리라 / 求福不回

하였으니, 이런 것이야말로 돈만 헛되이 버렸다 하겠다. 혹은 이르기를,

 

성인(공자)도 정() 나라() 나라의 음시(淫詩)를 뽑아버리지 않아서 후세 사람의 경계를 삼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라 계주 금병산(錦屛山) 석벽에는 양웅(揚雄)이 반교운(潘巧雲)을 베는 상()도 있다.”

고 변명한다. 백간점에서 구경하러 온 수재(秀才) 하나를 만나서 서로 이야기할 제 그는,

 

안녹산 역시 명사랍니다. 그가 앵두를 두고 읊은 시에,

앵두 알 한 광주리 / 櫻桃一籃子

파랑 노랑이 반씩일세 / 半靑一半黃

절반은 회왕(안녹산의 아들)에게 / 一半寄懷王

절반은 주지(안녹산의 스승)에 나눠 보내고저 / 一半寄周摯

하였기에, 어떤 이가 청하기를,

당신의 주지(周摯) 구를 회왕(懷王) 구와 바꾸었으면 운()이 맞지 않겠소.’

하였더니, 녹산은 크게 노하여,

그게 무슨 말야. 주지로 하여금 우리 집 아이 위에 누르게 한단 말이야.’

했으니, 이 정도의 시인을 어찌 사당이 없고야 배기겠소.”

하고는, 서로 더불어 한바탕 웃었다.

지나는 길에 향림사(香林寺)에 들어갔다. 불전(佛殿)에는 향림암(香林菴)’이라 씌어 있고 그 위에는 금자로서 향림법계(香林法界)’라 씌었으니, 이는 강희 황제의 글씨이다. 순치(順治 청 세조(世祖)의 연호)의 아우 누이가 청상과부로서 여승이 되어 이 암자에 있다가 나이 아흔이 넘어서 죽었다 한다. 그리고 이 암자에는 모두 비구니(比丘尼)만이 살고 있었다. 뜰 가운데에는 줄기가 흰 소나무 두 그루가 있어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며, 나무 껍질의 비늘도 푸른 채 희다. 암자 동편에는 작은 탑 다섯이 있고 그 좌우에는 역시 흰 소나무 세 그루가 있어서 푸른 빛이 뜰에 가득 차고, 바람 소리가 마치 물결처럼 서늘함을 돕는다. 그러고 보니 백간점이라는 이름도 아마 흰 줄기 소나무에서 말미암은 듯싶다.

차츰 연경이 가까워지자 거마 울리는 소리가 메마른 하늘에 우레 소리인 듯하고, 길 양편에는 모두 부호가들의 무덤인데, 담을 둘러서 마치 여염집같이 즐비하고 담 밖에는 하수를 이끌어 해자를 만들었고, 문 앞의 돌다리는 모두 무지개처럼 공중에 떠 있는 듯하고, 가끔 돌로 패루(牌樓)를 만들어 세웠다. 그리고 해자 가의 갈대 사이엔 때로 콩깍지만 한 작은 배가 매여 있고, 다리 아래에는 여기저기 고기 그물을 쳐놓았다. 담 안에는 수목이 울창한데 가끔 기왓골이나 처마 끝이 보이기도 하고, 혹은 지붕 위의 호리병 박 꼭대기가 솟아 오르기도 하였다.

점방에서 잠깐 쉬노라니 울 밖에 예쁜 아이들 수십 명이 떼를 지어 노래하며 가는데, 비단저고리에 수놓은 바지를 입고 옥같이 맑은 얼굴에 살결이 눈처럼 희다. 혹은 박자판을 치고, 혹은 피리를 불며, 혹은 비파를 뜯고, 나란히 서서 천천히 노래한다. 모두들 곱고도 아름다운 치장이다. 이들은 모두 연경의 거지들로서 거리로 돌아다니며 멀리서 온 장사치들에게 하룻밤 베개를 같이하고 몇백 냥의 돈을 받는 일이 있다 한다.

길 옆에 삿자리를 걸쳐서 햇빛을 가리고 군데군데 놀이 하는 곳을 만들었는데, 삼국지(三國志)를 연출(演出)하는 자, 수호전(水滸傳)을 연출하는 자, 서상기(西廂記)를 연출하는 자가 있어서, 높은 소리로 그 사()를 부르고 음악이 이에 따른다. 온갖 장난감들을 벌여놓고 파는데 모두들 어린이들의 일시적 장난감이었지만, 그 재료가 희귀한 것일뿐더러 만든 솜씨가 하나도 교묘하지 않은 게 없으며, 어떤 것은 손만 거쳐도 깨질 물건인데도 그 수공은 몇 냥이나 좋이 된다. 탁자 위에는 관공(關公)의 상을 몇만 개나 별여놓았는데 칼을 가로 잡고 말을 탔으나 그 크기는 겨우 두어 치밖에 안 되며, 모두 종이로 만들어 교묘하기 짝이 없다. 이는 아이들 장난감인데 이렇게 많음을 보니 다른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하도 황홀찬란한 것들을 많이 보았는지라 이목과 정신이 함께 피로할 지경이었다.

배로 호타하를 건너서 삼하현 성중에 들어가 손용주(孫蓉洲) 유의(有義)의 댁을 찾았더니, 용주는 벌써 달포 전에 산서(山西)에 가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 집은 성 동편 관왕묘(關王廟) 곁으로 대여섯 칸 초가집이니 그의 가난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 손 심부름하는 아이도 없이 주렴 너머로 부인의 목소리가 마치 연연(燕燕)앵앵(鶯鶯)처럼 아름답다. 그는,

 

저희 집 주인께선 어떤 글방 훈장으로 맞이되어 산서 지방에 가시고는 제 홀로 딸년 하나 데리고 살고 있는 형편이옵니다. 조선서 멀리 오신 선생님께서 이런 누지(陋地)에 왕림하셨는데도 공손히 맞아들이지 못하여 죄송하옵니다.”

하고는 또 사람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제야 담헌(湛軒 홍대용의 호)의 편지와 정표를 내어 주렴 앞에 놓고 나온다. 담이 허물어진 곳에 나이 열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계집애 하나가 섰는데, 그 흰 얼굴에 조촐한 목덜미, 아마 용주의 따님인 듯싶다.

삼하현은 옛날 임후(臨昫)이다.

 

 

[D-001]원중랑(袁中郞) : 명의 저명한 문학가. 원굉도(袁宏道). 중랑은 그의 자.

[D-002]양웅(揚雄) …… () : 중국 고전 소설 수호지(水滸誌)에 나오는 양웅이, 그의 애인 반교운이 행실이 부정하다고 하여 금병산에서 찔러 죽였다.

[D-003]당신의 …… 않겠소 : 그 두 글귀를 바꾸면 황() 자와 왕() 자가 같은 양() 운이 된다.

[D-004]손용주(孫蓉洲) 유의(有義) : 연암의 친구 홍대용(洪大容)이 전년에 왔을 때에 깊이 사귀었던 학자. 용주는 호요, 유의는 이름.

[D-005]마치 …… 아름답다 : 이 부분은 다른 본에는 모두, “몹시 분명하지 않다.”로 되었으나, ‘다백운루본을 좇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8 1일 정미(丁未)

 

 

아침엔 개고 찌는 듯 덮다가 오후에는 비가 오다 멎다 했고, 밤엔 큰비가 우레치며 내리다.

연교보에서 새벽에 떠나서 사고장(師姑庄)까지 5, 등가장(鄧家庄) 3, 호가장(胡家庄) 4, 습가장(習家庄) 3, 노하(潞河) 4, 통주(通州) 2, 영통교(永通橋) 8, 양가갑(楊家閘) 3, 관가장(關家庄) 3, 모두 35리를 가서 점심을 먹고, 거기에서 다시 삼간방(三間房)까지 3, 정부장(定府庄) 3, 대왕장(大王庄) 3, 태평장(太平庄) 3, 홍문(紅門) 3, 시리보(是里堡) 3, 파리보(巴里堡) 2, 신교(新橋) 6, 동악묘(東岳廟) 1, 조양문(朝陽門) 1, 서관(西館)에 드니 모두 27리이다. 이날 모두 62리를 걸었다. 압록강으로부터 연경까지 모두 33() 2 30리였다.

새벽에 연교보를 떠나 변()() 여러 사람과 먼저 갔다. 몇 리를 가지 않아서 날이 벌써 밝아지는데 별안간 우레 같은 소리가 우렁차게 공중을 울린다. 이는 노하(潞河)의 배 속에서 나는 포성이라 한다. 아침노을이 어린 곳으로 멀리 바라본즉, 돛대들이 총총히 늘어선 갈대 같고, 버드나무 위에는 뗏목과 풀뿌리 따위가 많이 걸렸는데, 이는 한 열흘 전에 연경에 큰비가 내려서 노하가 넘치어 민가 몇만 호를 쓸어가고, 물에 휩쓸린 사람과 짐승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한다. 내 이제 말 위에서 담뱃대를 쥔 채 팔을 뻗쳐서 버드나무 위의 물 찬 흔적을 가늠해 본즉, 땅에서 두서너 길 됨직하다. 물가에 다다르니 물이 넓고도 맑으며 배가 빽빽이 들어선 것이 장성(長城)의 웅대함과 견줄 만하고 큰 배 십만 척에 모두 용()을 그렸는데, 호북(湖北)의 전운사(轉運使 운수(運輸)를 맡은 벼슬 이름)가 어제 호북의 곡식 3백만 석을 싣고 왔다 한다. 한 배에 올라가서 그 대략의 제도를 구경하니, 배 길이는 모두 여남은 발이나 되고 쇠못으로 장치하였으며, 그 위에는 널빤지를 깔아서 층 집을 세웠으며 곡물들은 모두 선창 속에 그냥 쏟아 넣었다.

집은 모두 아로새긴 난간, 그림 기둥, 아롱진 들창, 수놓은 지게문으로 꾸미어, 그 제도가 뭍의 건물과 다름없이 밑은 창고이고 위에는 다락으로 되었으며, 그 패액(牌額)주련(柱聯)장유(帳帷)서화(書畵) 등이 모두 아득히 신선의 세계였다. 지붕에는 쌍돛을 높이 세웠는데 돛은 가는 등()으로 엮어 몇 폭이나 되고, 온 배에 연분(鉛粉)을 기름에 타서 두껍게 바르고, 그 위에 노란 칠을 입혔으므로 한 방울 물도 스며들지 않으니 비가 내려도 아무런 걱정이 없는 것이다.

선기(船旗)에는 절강(浙江)’이니 산동(山東)’이니 하는 배 이름이 크게 씌었으며, 물을 따라 1백 리를 내려오는 사이에 배들은 마치 대밭처럼 빽빽하게 들어 섰으되, 남으로 직고해(直沽海)에 줄곧 통하여 천진위(天津衛)를 거쳐 장가만(張家灣)에 모이게 된다. 그리하여 천하의 선운(船運)들이 모두 통주(通州)에 모여들게 되니, 만일 노하의 선박들을 구경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 수도의 장관(壯觀)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삼사(三使)와 함께 한 배에 오르니, 그 양쪽에는 채색 난간을 두르고 그 앞에는 휘장을 드리우고 창을 세워서 문을 만들고, 양편에는 온갖 의장(儀仗)기치(旗幟)도창(刀鎗)검극(劒戟)봉인(鋒刃) 등을 세웠는데 모두 나무로 만들었고, 방 안에는 관() 하나가 놓이고 그 앞에는 교의와 탁자가 늘어 놓였으며 탁자 위에는 온갖 제기(祭器)를 벌여 놓았다. 상주는 푸른 들창 아래에 걸터앉았는데 몸에는 무명 옷을 입었고 머리는 깎지 않아서 두어 치나 자란 것이 마치 중과 같은 모양이다.

남과 수작을 즐기지 않고 앞에는 의례(儀禮) 한 권을 놓았다. 부사가 그 앞으로 다가서서 읍하니 상주가 역시 읍하여 답례하고 이마를 조아리며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다가 다시 교의에 앉는다. 부사가 나더러 그와 필담(筆談)하여 보라 하기에 나는 그제야 부사의 성명과 관함을 써 보이었더니, 상주 역시 머리를 조아리며 쓰되,

 

저의 성은 진()이요, 이름은 경()이옵고, 가계(家系)는 호북(湖北)이옵니다. 선친(先親)께옵서 북경에 벼슬하여 한림원(韓林院) 수찬(修撰)을 지내시고 금년 칠월 구일에 세상을 버리시자, 임금께옵서 토지(土地)와 돌아갈 배를 내리시옵기에 고향으로 유해(遺骸)를 모시고 돌아가는 길이옵니다. 상복이 몸에 있으므로 손님을 접대하질 못하와 죄송합니다.”

한다. 부사가 글씨로 그의 나이를 물었으나 진경은 대답하지 않는다. 부사가 또 글씨로,

 

중국서는 누구든지 모두 삼년상(三年喪)을 치르시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진경은,

 

성인께옵서 인정을 따라 예를 제정하였사온즉 저같이 불초한 자도 힘껏 따르고자 하옵지요.”

한다. 부사는,

 

상제(喪制)는 모두들 주자(朱子)의 학설을 따르는가요?”

했더니, 진경은,

 

그렇습니다. 모두 문공(文公 주희(朱熹)의 시호)을 따르지요.”

한다. 창 밖에 아롱진 대 난간이 사창에 비치어 영롱하고, 옆 배에서 흘러나오는 풍류 소리가 소란하며, 갈매기 날고 내와 구름 끼고 누대(樓臺)의 아름다움이 모두 선창에 어리고 흰 모래톱 아득한 언덕에는 바람을 안은 돛들이 나타났다 꺼졌다 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슬며시 이것이 곧 부가(浮家)범택(泛宅)들인 줄로 알고도 마치 저 번화한 도시 한 가운데 화려한 방안에 몸을 담고서, 강호(江湖) 경물(景物)의 아름다운 낙()을 겹누르는 듯싶었다. 부사가 몸을 돌려 미소를 지으며,

 

저야말로 월파정(月波亭) 상주라고 이르겠군.”

하기에, 나 역시 가만히 웃었다.

정사가 사람을 보내어 구경할 것이 있으니 얼른 오라 하기에 곧 부사와 함께 일어날 제, 등 뒤에 무엇이 툭하는 소리가 나기에 돌아다본즉, 부사의 비장 이서구(李瑞龜)가 넘어져서 겸연쩍은 듯이 웃고 있다. 대개 배 위에 깐 널빤지가 얼음처럼 미끄러워 발 붙이기가 힘들다. 부사가 쩔쩔매자 좌우로 부축하고 가다가 이를 돌아다본다는 것이 그만 옆의 사람들까지 함께 쿵하고 넘어졌다.

휘장 안에서 네 사람이 한창 투전을 하고 있기에 나는 들여다보았으나 모두 만주 글자여서 도시 알 수 없다, 혹은,

 

이것의 이름은 마조(馬吊)랍니다.”

한다. 깊숙한 곳에 탁자를 늘어놓고 그 위에 준()()()() 등의 그릇을 진열했는데 모두 기이하게 생긴 물건들이다. 또 한 문을 나선즉, 정사와 서장관이 널빤지에 앉아서 선창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 안이 곧 주방(廚房)인데, 흰 베로 머리를 감싼 늙은 부인 둘이 가마솥에 녹두나물미나리 등속을 삶아서 다시 찬물에 헹구고 있고, 또 나이 열여섯쯤 되어 보이는 처녀 하나가 있는데 아리따운 얼굴이 견줄 데 없다. 낯선 손님을 보고도 조금도 수줍은 태가 없이 찬찬하고 다소곳이 제 맡은 일만 하고 있는데, 고운 깁옷의 주름은 안개처럼 어른어른하고 하얀 팔목은 연뿌린양 민듯하다. 아마 진씨(秦氏)의 차환(叉鬟)으로서 아침상을 보살피고 있는 모양이었다. 배 양편에는 파초선(芭蕉扇)을 두루 꽂았는데 한림(翰林)’지주(知州)’정당(正堂)’포정사(布政使)’라 썼으니, 이는 모두 죽은 이의 이력들이었다.

강 가운데에는 이곳저곳 뱃놀이가 한창이다. 작은 배에 혹은 붉은 일산을 펴고, 혹은 푸른 휘장을 두르고는 삼삼오오(三三五五) 서로 짝을 지어 각기 다리 짧은 교의에 기대기도 하고, 혹은 평상 위에도 앉아서 책권이며 그림축이며 향로며 차도구들을 벌여 놓았고, 혹은 봉생(鳳笙)이나 용관(龍管)을 불고, 혹은 평상에 의지하여 글씨와 그림도 치고, 더러는 술 마시며 시 읊기도 하는데, 그들이 반드시 모두가 고인(高人)운사(韻士)들은 아니겠지만, 그윽하게 아취가 있어 보인다. 배에서 내려 언덕에 오른즉, 수레와 말이 길을 막아서 다닐 수가 없다.

동문에서 서문까지 줄곧 5리 사이에 외바퀴 수레 몇 만 채가 꽉 차서 몸 돌릴 곳이 없다. 말에서 내려 한 점방으로 들어가니 기려하고 번창함이 벌써 성경(盛京)산해관 따위에는 비길 것이 아니었다.

길이 비좁아 간신히 조금씩 나아가 본즉, 시문(市門)의 현판에는 만수운집(萬艘雲集)’이라 하였고, 한길 위에 이층 높은 누()를 세우고는 성문구천(聲聞九天)’이라 써붙였다. 성 밖에는 창고 셋이 있는데 그 제도를 성곽과 같이 해서, 지붕은 기와로 이었고 그 위에는 공기창을 내어서 나쁜 기운을 내보내게 하고, 벽에도 곁 구멍을 뚫어서 습기가 가시게 하고 강물을 끌어들여 창고를 둘러 해자[]를 만들었다.

영통교(永通橋)에 이르렀는데, 이 다리는 일명 팔리교(八里橋)라 한다. 길이가 수백 발, 너비는 여남은 발이요, 무지개 문의 높이도 여남은 발이나 되는데, 좌우에는 난간을 돌리고 그 위에는 사자 몇백 마리를 앉혔는데, 그 새김의 정미로움이 마치 도장(圖章) 꼭대기의 가는 무늬와 같았다. 다리 밑에 선박들은 줄곧 조양문(朝陽門 북경의 동북문) 밖에 닿아서 다시 작은 배로써 물문을 열고 태창(太倉)에 끌어들인다 한다.

통주에서 연경까지 40리 사이는 돌을 깎아서 길에 깔았다. 쇠 수레바퀴가 서로 맞닿는 소리가 더욱 커서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 아찔하게 한다. 길가 양편에는 모두 무덤인데 담이 잇달고 나무가 울창하여 봉분은 보이지 않는다.

대왕장(大王庄)에 이르러서 잠깐 쉬고 곧 떠났다. 길 왼편에 돌 패루 세 칸이 있기에 말에서 내려 그 만든 양을 보니, 이는 곧 퉁국유(佟國維 청 강희 때의 충신)의 무덤이었다. 패루에는 그의 벼슬들을 나란히 새겨 붙였고, 윗층에는 여러 가지 조칙을 새겼다. 곧 다리를 건너 문 안에 들어서니 좌우에 여덟모난 화표주(華表柱 망주석)를 세우고 그 위에는 돌 사자를 새겼다. 가운데에는 길을 쌓아 올려서 층대 높이가 한 발이나 되며, 길 좌우에는 늙은 소나무 수십 그루가 섰고, 3층 돌대를 쌓고 그 위에 큰 비석 열셋을 세웠는데, 모두 퉁씨(佟氏) 삼대의 훈벌(勳閥)을 표창한 조칙(詔勅)들이다. 퉁국유의 일명은 융과다(隆科多)라고도 하며 그 아내는 하사례씨(何奢禮氏)이다. 북쪽 담 밑에 봉분 여섯이 나란히 있는데, 띠를 입히지 않고 밑은 둥글고 위는 뾰족하게 석회로 번질번질하게 발랐다. 누런 기와로 이은 집 수십 칸이 있는데 단청이 이미 우중충하며, 층계는 무너지고 채색한 주렴은 해졌는데, 집 안에는 박쥐똥이 가득할 뿐 텅 비고 괴괴하여 지키는 자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마치 깊은 산중의 낡은 절과 같다. 매우 괴이한 일이다.

아마도 훈벌이 혁혁하였던 집안이었으나 이제는 자손이 없어서 그런 것인 듯싶다.

동악묘(東嶽廟)에 이르러 심양에 들어갈 때처럼 삼사가 옷을 갈아입고 반열을 정돈하였다. 이때 통역관 오림포(烏林哺)서종현(徐宗顯)박보수(朴寶秀) 등이 벌써 그 가운데에 와서 기다린다. 그들은 모두 망포(蟒袍)수보(繡補 청 관리의 예복)에다 목에는 조주(朝珠)를 걸고, 말을 타고 앞을 인도하여 조양문에 이르니, 그 제도는 산해관과 다름없으나 다만 상세히 볼 수 없었다. 검은 먼지가 공중에 자욱하니 수레에 물통을 싣고 곳곳마다 길바닥에 물을 뿌린다.

사신은 곧장 예부(禮部)를 찾아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바치러 갔다. 나는 그와 헤어져서 조명회와 함께 먼저 사관으로 갔다. 순치(順治) 초년에 조선 사신의 사관을 옥하(玉河) 서쪽 기슭에다 세우고 옥하관(玉河館)이라 일컬었더니, 그 뒤에 악라사(鄂羅斯)가 점령한 바 되었다. 악라사는 이른바 대비달자(大鼻㺚子)인데 하도 사나우므로 청인도 그들을 누를 길이 없어서, 할 수 없이 회동관(會同館)을 건어호동(乾魚衚衕)에다 세우니, 이는 곧 도통(都統) 만비(滿丕)의 집이었다. 만비가 도륙당할 때에 집안 사람이 많이 자결하였으므로 그 집에 귀매(鬼魅)가 많았다 한다. 혹은 우리나라 별사(別使 임시 사행(使行))와 동지사가 한꺼번에 맞부딪치면 서관(西館)에 나누어 들게 되었다. 연전에 별사가 먼저 건어호동에 들었으므로 금성위(錦城尉)가 마침 동지사로 와서 서관에 머문 일도 있었다. 지난해 건어호동에 있는 회동관이 불타 버리고 여태까지 다시 세우지 못했으므로 이번 걸음에도 서관에 옮겨 들게 되었다.

아아, 슬프다. 옛 역사에 이르기를,

 

문자(文字)가 생기기 전엔 연대(年代)와 국도(國都)를 상고할 수 없다.”

하였으나, 문자가 생긴 이후 21() 3천여 년 동안에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 과연 어떠한 술법으로 하였을 것인가. 이는 곧 그들의 이른바 유정(惟精)유일(惟一)이란 심법(心法)으로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천하를 다스림에는 요()순씨(舜氏)가 있음을 알고, 홍수를 다스림에는 하우씨(夏禹氏)가 있음을 알며, 정전(井田) 제도를 마련함엔 주공씨(周公氏)가 있음을 알고, 학문의 선전엔 공자씨(孔子氏)가 있음을 알고, 재정과 세금을 골고루 마련함엔 관중씨(管仲氏)가 있음을 알았을 뿐이다. 나는 알지 못하겠구나. 그 밖에 또 다시 얼마나 많은 성인이 그 머리를 짜냈으며, 또 얼마나 많은 성인이 그 심력을 기울였으며, 또 얼마나 많은 성인이 그 총기를 다했던고. 뿐 아니라 또 얼마나 많은 성인이 벌써 저 21 3천여 년 동안 문자(文字)가 창조되기 전에 이를 기초(起草)하고 이를 빛내고 이를 수정하였던고. 생각하건대, 이러한 여러 성인이 그 생각과 그 심력과 그 총기를 다 기울여서 기초하고 빛내고 수정하였으니, 그들은 장차 이것으로써 자기의 사리(私利)를 취하려 하였음일까, 아니면 길이길이 만세를 두고 모든 백성들과 그 행복을 함께 누리고자 하였음일까.

그리하여, 그 중에 한 사람이라도 그의 심술(心術)이 같지 못하고 사업(事業)이 각기 다르면 이를 곧 우인(愚人)’이라 지목하였을뿐더러, 그를 일찍이 집과 나라를 망친 자라고 시종 헐뜯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체로 마음의 음탕함과 귀와 눈의 영리함이 도리어 성인을 능가하므로, 더욱이 후세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그의 몸을 배격하면서도 은근히 그의 공훈을 본받고, 또 겉으로는 그 사람을 욕하면서도 속으론 그 이익점을 얻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하의 온갖 기이한 기술과 음탕한 솜씨가 날로 부풀어오른 법이다.

보라, 대개 궁궐을 옥과 구슬로 꾸민 자는 이른바 걸()()가 아니었으며, 산을 허물어 골을 메우고 만 리의 장성을 쌓은 자는 이른바 몽염(蒙恬)이 아니었으며, 천하에 곧은 도로를 닦은 자는 이른바 진 시황(秦始皇)이 아니었으며, 천하의 일이 법()이 아니고는 아니 된다 해서 드디어 나무를 옮겨 보기도 하고, 또는 쓰레기를 버리는 것까지 간섭하여 그 제도를 통일시킨 자는 이른바 상앙(商鞅)이 아니었던가. 대개 이 네댓 사람들은 그의 역량과 재주와 정신기백과 계획과 시설이 족히 천지를 움직일 만하였던 만큼, 애초에는 모든 성인들과 함께 이 우주 사이에서 나란히 설 수 있으련마는, 불행히 서계(書契 문자(文字))가 이미 이룩된 뒤에 나왔기 때문에, 그들의 공로와 이익의 누림은 오로지 뒷사람에게로 돌아가고, 그 몸은 화단(禍端)이 되어 길이 우부의 이름을 듣게 되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는 더욱 알지 못하겠구나.  21() 3천여 년의 사이에는 몇 명의 걸주와, 몇 명의 몽염과, 몇 명의 진 시황과, 몇 명의 상앙이 있어서, 그 서계가 이룩된 이후의 것을 본받았던 것인가. 서계가 이룩된 뒷일이 그러하니, 서계가 이룩되기 전의 일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하여 이를 아는가 하면, 옛날에 진시황이 육국(六國)의 것을 본떠서 아방궁(阿房宮)의 전전(前殿)을 크게 지었으니, 본뜬다는 것은 저 환쟁이들의 이른바 모사(摹寫)가 곧 그것이다. 육국의 선비들이 그들의 임금을 유세(遊說)할 때에는 모두 걸주를 욕하지 않은 이가 없었건마는, 그 실에 있어서는 앞서 이른바 궁궐을 옥과 구슬로 꾸몄다는 것이 마침내는 족히 저 장화대(章華臺 전국 초()의 누각)와 황금대(黃金臺 전국 때 연 소왕(燕昭王)의 궁전)의 부본이 되는 동시에, 장화대황금대는 역시 아방궁의 윤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항우(項羽)가 이에 한번 불질러서 곧 평지의 재가 되고 만 것은 족히 뒷세상의 토목(土木) 공사(工事)만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한 거울이 되었음직하다. 그 본심은 이왕 내가 이에 살지 못할 바에는 다른 사람이 와서 차지함을 싫어했던 것에 불과할 뿐이니, 그렇다면 저 팽성(彭城)의 도시 또한 아방궁이 될 것이었으나, 다만 미처 하지 못하였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소하(蕭何)가 미앙궁(未央宮 한 고조의 궁궐)을 크게 공사할 때에, 한 고제(漢高帝 고제는 유방의 묘호)는 귀와 눈이 없지는 않았건마는, 짐짓 모르는 체하다가 궁궐이 다 이룩된 뒤에는 도리어 소하를 꾸지람하였으니, 이 꾸지람이 실로 옳다면 어째서 소하를 당장 죽여 저자에 조리돌리지 않았으며, 또 궁궐을 불질러 태워 버리지 아니하였던고. 이로써 미루어 볼 것 같으면, 앞서 육국의 것을 본떠서 아방궁의 전전을 지은 것은 곧 미앙궁을 위하여 터를 닦은 것에 지나지 않은 셈이었다.

내 이제 조양문에 들어서자, 곧 저 요순의 이른바 유정유일의 마음씨가 이러하고, 하우씨의 홍수 다스림이 이러하고, 주공의 정전이 이러하고, 공자의 학문이 이러하고, 관중의 이재(理財)가 이러하였음이 눈에 선하게 띄었으며, 주가 옥과 구슬로 궁궐을 세운 것도 이런 방법에 지나지 않고, 몽염이 산을 허물어서 골을 메운 것도 이런 방법에 지나지 않으며, 진 시황이 곧은 길을 닦은 것도 이런 방법에 지나지 않고, 상앙이 제도를 통일시킨 것도 이런 방법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성인이 일찍이 율()()()() 등을 하나로 통일시켜서 둥근 것은 그림쇠에 맞도록, 모난 것은 곡척(曲尺)에 맞도록 하고, 곧은 것은 먹줄에 맞추었기에, 천하에 퍼지자 천하가 이를 좇고, 주에게 주어도 걸주 역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성인이 일찍이 높은 언덕에 넘실거리는 홍수를 다스릴 제, 그 삼태기에 삽질하는 번거로움과 부착(斧鑿)의 날카로움과, 기술자의 교묘함과 역부의 많음이, 어찌 뫼를 헐고 골을 메워 만 리의 장성을 쌓음에 그치었으며, 성인이 일찍이 천하의 밭이란 밭은 죄다 금을 그어 정전의 제도를 만들면서, 그 밭두둑과 도랑 사이에는 수레 몇 채가 달릴 수 있도록 마련하였은즉, 그 곧고 바름이 어찌 천 리의 한길을 닦음만 못하였으며, 성인이 일찍이 그 문인(門人)의 물음에 대답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말씀하셨으나, 이는 다만 말로만 하였을 뿐 몸소 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후세의 임금들이 반드시 그 학문이 성인보다 나은 것이 아니로되 곧 이를 행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역시 어찌 중화(中華)의 민족만이 그러하리오. 이적(夷狄)의 출신으로서 중원의 임금이 된 자치고, 일찍이 도()를 물려받아서 행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또 의식(衣食)이 넉넉한 뒤에야 예절을 지킬 수 있다 하였은즉, 후세의 임금들 중에 그 나라를 튼튼히 하고 그 군사를 굳세게 하고자 한 자가, 차라리 각박하고 인정머리 없다는 이름을 무릅쓸지언정, 어찌 그 자신을 위해서 사리를 탐했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또 그 심술의 위험미묘한 때를 논하여 본다든지, 혹은 그 사업을 공사(公私)의 사이에서 분간한다면, 저들에게 곧 이른바 정일(精一)의 방법을 알았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 공리(功利)의 효과를 누림에 있어서는, 비록 그 방법이 이적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그 여러 가지 좋은 점을 모아서 행하는 데 있어서는 역시 정일을 본받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앞서 이른바 재지와 역량이 하늘과 땅을 움직일 수 있다 함이 오늘날의 중국을 이룩한 것이며, 21 3천여 년 동안의 모든 제도를 이에서 가히 상고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나라 이름을 ()’이라 하고, 수도를 순천부(順天府)’라 하니, 천문으로 보면 기()() 두 별의 사이였고, 지리로 말한다면 우공(禹貢)에서 이른바 기주(冀州)의 터전으로서, 고양씨(高陽氏 오제(五帝)의 하나인 전욱(顓頊))는 유릉(幽陵)이라 하였고, 도당씨(陶唐氏 ())는 유도(幽都), ()는 유주(幽州), ()()은 기주(冀州), ()은 상곡(上谷)어양(漁陽)이라 하였으며, ()의 초기엔 연국(燕國)이라 하였다가 뒤에는 나누어서 탁군(涿郡)이라 했고, 또 고쳐서 광양(廣陽)이라 하였으며, ()()에서는 범양(范陽)이라 하였고, ()는 남경이라 하였다가 뒤에는 고쳐서 석진부(析津府)라 하였으며, ()은 연산부(燕山府)라 하였고, ()은 연경(燕京)이라 했다가 곧 중도(中都)라 고쳤으며, ()은 대도(大都)라 하였고, ()의 초년엔 북평부(北平府)라 하였다가, 태종 황제(太宗皇帝 청 태조의 8)가 이에 수도를 옮기고 순천부(順天府)라 고쳤더니, 이제 청()은 이내 이곳에 수도를 세웠다. 그 성 둘레는 40, 왼쪽에 창해(滄海)가 둘리고, 오른편에는 태항산(太行山)을 끼고, 북으로 거용관(居庸關)을 베고, 남으로는 하수(河水)제수(濟水)가 옷깃처럼 되어 있다. 성문의 정남은 정양(正陽), 오른편은 숭문(崇文), 왼편은 선무(宣武), 동남은 제화(齊化), 동북은 조양(朝陽), 서남은 평택(平澤), 서북은 서직(西直), 북동은 덕승(德勝), 북서는 안정(安定)이고, 외성(外城)에 문이 일곱 있으며, 자금성(紫禁城 황제가 거처하는 궁성)에는 문이 셋 있고, 궁성(宮城) 17리인데 문이 넷이며, 그 전전(前殿)을 태화(太和)라 하여 오로지 한 사람만이 살고 있으니, 그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그 종족은 여진(女眞) 만주부(滿洲部), 그 위()는 천자(天子), 그 호()는 황제(皇帝)이고, 그 직책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었으며, 그가 자신을 일컬을 때는 ()’이라 하고,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그를 높여서 폐하(陛下)’라 하며, 말씀을 내면 ()’라 하고, 명령을 내리면 ()’이라 하며, 그 갓은 홍모(紅帽)이고, 그 옷은 마제수(馬蹄袖)이며, 그는 국통(國統)을 이은 지 벌써 네 대였고, 연호(年號)를 세워 건륭(乾隆)’이라 한다. 이 글을 쓴 자가 누구인가 하면 조선에서 온 박지원(朴趾源)이고, 쓴 때가 언젠가 하면 건륭 45년 가을 8월 초하루이다.

 

 

[D-001]2 30 : 통문관지(通文館志)에는 2 49.

[D-002]노하(潞河) : 통주(通州)에서 천진(天津)까지 이르는 운하.

[D-003]월파정(月波亭) 상주 :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행되던 말인데, 황주(黃州) 월파정에 놀러 온 풍류적인 상주(喪主).

[D-004]마조(馬吊) : 투전 40장을 가지고 노는 중국의 놀음감.

[D-005]조주(朝珠) : 청의 제도에 5() 이상과 한림(翰林)중서(中書) 등이 가슴에 달게 된 1 8개의 구슬.

[D-006]회동관(會同館) :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 나중에는 사린관(四隣館)과 합쳐서 회동사역관(會同四譯館)이라 하였다.

[D-007]만비(滿丕) : 청 강희 때의 외교관. 아라사와 조약을 맺을 때에도 참가하였다.

[D-008]21() : () 이전 21()의 소위 정사(正史) 21()라 하였다.

[D-009]유정(惟精)유일(惟一) : 서경(書經), “인심(人心)은 오직 정미고, 도심(道心)은 오직 위태롭다.” 하였는데, 이 몇 구절에 동방 천고 성인의 정신이 표현되었다.

[D-010]하우씨(夏禹氏) : 9년 동안 치수 사업에 공적이 많아서 순()의 선양을 받아 임금이 되었다.

[D-011]정전(井田) 제도 : 중국 고대의 농촌 경리에 적용하던 일종의 토지 제도.

[D-012]관중씨(管仲氏) : 전국 제()의 정치가. 특히 경제에 밝았다. ()은 그의 자요, 이름은 이오(夷吾).

[D-013]몽염(蒙恬) : ()의 유명한 장수. 진 시황을 도와서 장성을 쌓아 흉노(匈奴)를 물리쳤다.

[D-014]도로를 …… 아니었으며 : 진 시황이 6국을 통일한 뒤에, 함곡관(函谷關)을 중심으로 하여 각처에 곧은 길을 냈다.

[D-015]상앙(商鞅) : 진의 정치가. 그는 법치(法治)를 주장하여 처음 법을 행할 때에, 나무 기둥을 남문에 세우고 그것을 북문까지 옮기면 상금을 준다 하여 백성의 믿음을 얻었다. 마침내 진 효공(秦孝公)을 도와서 부국 강병하였으나, 지나치게 가혹한 법을 만들었으므로 나중에는 실패하였다.

[D-016]육국(六國) : 전국 때의 진()을 제외한 초()()()()()().

[D-017]아방궁(阿房宮) : 중국 진 시황이 지은 궁전 이름. 그 뒤 항적(項籍)이 관중에 들어와서 이 궁을 불살랐으나, 석 달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다.

[D-018]소하(蕭何) : ()의 관리로서, 한 고제(漢高帝)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재상이 되었다.

[D-019]모르는 …… 꾸지람하였으니 : 사기(史記)에 나오는 한 고제와 소하의 고사.

[D-020]의식(衣食) …… 하였은즉 : 관이오(管夷吾) 관자(管子)에 나오는 구절.

[D-021]마제수(馬蹄袖) : 만인(滿人) 옷의 소매 모양을 형용하여 말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동악묘기(東嶽廟記)

 

 

동악묘는 조양문 밖 1리에 있다. 그 건물의 웅장하고 화려함은 여태까지 보던 중 처음이다. 성경의 궁궐도 이에 비기면 어림없었다. 묘문(廟門)의 건너편에는 두 패루가 섰는데 파란 유리벽돌과 초록빛 유리벽돌로 쌓았다.

그 찬란하고 휘황함이 앞서 본 돌집을 능가한다. 이 사당은 원()의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연간에 비로소 세웠고, ()의 정통(正統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대에 더 넓혔다. 그 가운데에는 인성제(仁聖帝 동악태제(東嶽太帝)의 별칭)병령공(炳靈公 동악태제의 셋째 아들)사명군(司命君 사람의 목숨을 맡은 귀신)과 네 승상(丞相 태제를 모신 네 정승)의 소상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원()의 소문관(昭文館) 태학사(太學士) 정봉대부(正奉大夫) 비서감경(秘書監卿) 유원(劉元 원의 저명한 조각가)이 만든 소상으로서, 유원은 그 만드는 교묘한 법이 천하에 짝이 없었다.

요즘 청의 강희 경진(1700) 3월에 불이 나서 전(殿)()와 함께 사당 가운데 있던 모든 소상이 다 불타 버리고, 다만 양편의 도원(道院)만 남아 있었다. 강희 황제는 특히 내탕금(內帑金 황제의 사용금)을 내리고, 아울러 내외의 대소 관원들에게 명하여 비용을 돕게 하고, 유친왕(裕親王)으로 하여금 그 공사를 감독하게 하여 비로소 이룩하자 황제가 친히 거둥하였고, 옹정 황제와 지금 황제 역시 내탕금을 내어 이를 수리하였다.

그 제일전(第一殿)에는 영소화육(靈昭化育)’이라 써 붙였는데, 동악태제가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었고, 모신 제신(諸神)은 왼편에 문(), 오른편에 무()가 늘어섰다.

() 앞에는 몇 섬들이 쇠항아리를 놓아서, 심지 네 개에 불을 댕겨 둔 채 철망(鐵網)을 둘렀다. 그리고 등불 앞에는 한 길이나 되는 쇠화로를 놓고 침향(沈香)을 태웠다. 그리하여 검은 등에 푸른 불꽃이 번뜩이고, 전자(篆字)처럼 얽힌 연기가 푸르며, 술을 드리운 휘장에는 쇠풍경이 댕그랑 울리는데, 전각은 침침해서 꿈속 같다. 그 제이전(第二殿)에는 여상(女像) 셋이 앉았는데, 역시 구슬로 꾸민 술을 드리웠고, 양편에서 모신 자도 모두 여선(女仙)들이다.

그 제삼전(第三殿)에는 무슨 신()을 본뜬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낭무(廊廡)에는 72() 36()을 벌여놓은 것이 기괴하여 천태만상이었다. () 위에 놓인 값진 모든 그릇들은 거의 송()() 시대의 관지(款識)가 많고, 뜰 가운데에는 큰 비석 1백여 개가 섰는데, 조맹부(趙孟頫)가 쓴 것이 많고, 또 그 아우 세연(世延)과 우집(虞集)이 쓴 것도 있었다. 동서의 제일항(第一行)에 선 비석은 모두 누런 기와로 덮고, 그 위에는 고루(鼓樓)를 설치했는데, 동쪽의 것은 별음(鼈音)’이라 하고, 서쪽의 것은 경음(鯨音)’이라 하였다.

 

 

[C-001]동악묘기(東嶽廟記) : 다른 본에는 모두 관내정사의 편말에 있었으나, ‘주설루본에 의하여 여기로 옮겼다.

[D-001]조맹부(趙孟頫) : 원의 저명한 서예가. 맹부는 이름이요, 자는 자앙(子昂).

[D-002]우집(虞集) : 원의 문학가. 집은 이름이요, 자는 백생(伯生).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일 무신(戊申)

 

 

개다.

간밤에 뇌성 벽력과 함께 내린 비를 겪고서, 아직 수리하지 못한 객관의 창호지가 떨어졌으므로, 새벽에 찬바람이 들어와서, 감기가 조금 들고 입맛을 잃었다.

아침 일찍 아문(衙門)에 모두들 모여드니, 이들은 예부(禮部)호부(戶部)의 낭중(郞中 낭관)과 광록시(光祿寺)의 관원이었다. 쌀과 팥 대여섯 수레와 돼지거위채소 등속이 바깥 뜰에 가득히 찼다. 그 부()의 관원이 교의를 나란히 하여 앉았는데, 아무도 감히 떠드는 자가 없었다.

정사에게는 날마다 관()의 찬()으로 거위 한 마리, 닭 세 마리, 돼지고기 다섯 근, 생선 세 마리, 우유 한 병, 두부 세 근, 백면(白麪) 두 근, 황주(黃酒) 여섯 항아리, 엄채(醃菜 김치) 세 근, 다엽(茶葉) 넉 냥, 오이지 넉 냥, 소금 두 냥, 청장(淸醬) 여섯 냥, 감장(甘醬) 여덟 냥, () 열 냥, 향유(香油) 한 냥, 화초(花椒 산초) 한 돈, 등유(燈油) 세 병, 납초 석 자루, 내수유(奶酥油 우유로 만든 낙농 제품) 석 냥, 세분(細粉) 근 반, 생강 닷 냥, 마늘 열 뿌리, 빈과(蘋果 능금) 열다섯 개, 배 열다섯 개, 감 열다섯 개, 말린 대추 한 근, 포도 한 근, 사과 열다섯 개, 소주 한 병, 쌀 두 되, 나무 서른 근, 또 사흘마다 몽고양(蒙古羊) 한 마리씩을 준다.

그리고 부사와 서장관에게는 날마다 두 사람 어울러서 양() 한 마리, 거위 각기 한 마리, 닭 각기 한 마리, 생선 각기 한 마리, 우유 어울러서 한 병, 고기 어울러 세 근, 백면 각기 두 근, 두부 각기 두 근, 엄채 각기 세 근, 화초 각기 한 돈, 다엽 각기 한 냥, 소금 각기 한 냥, 청장 각기 여섯 냥, 감장 각기 여섯 냥, 초 각기 열 냥, 황주 각기 여섯 항아리, 오이지각기 넉 냥, 향유 각기 한 냥, 등유 각기 한 종지, 쌀 각기 두 되, 빈과 어울러 열다섯 개, 사과 어울러 열다섯 개, 배 어울러 열다섯 개, 포도 어울러 닷 근, 말린 대추 어울러 닷 근, 그 밖의 과실은 닷새 만에 한 번씩 준다. 부사에게는 날마다 나무 열일곱 근, 서장관에게는 열닷 근씩을 준다.

그리고 대통관(大通官) 3명과 압물관(押物官) 24명에게는 날마다 각기 닭 한 마리, 고기 두 근, 백면 한 근, 엄채 한 근, 두부 한 근, 황주 두 항아리, 화초(花椒) 닷 푼(), 다엽 닷 돈, 청장 두 냥, 감장 넉 냥, 향유 너 돈, 등유 한 종지, 소금 한 냥, 쌀 한 되, 나무 한 근씩을 주고, 또 득상(得賞) 종인(從人) 30명에게는 날마다 각기 고기 근 반, 백면 반 근, 엄채 두 냥, 소금 한 냥, 등유 어울러 여섯 종지, 황주 어울러 여섯 항아리, 쌀 한 되, 나무 너 근씩을 주고, 무상(無賞) 종인 2 21명에게는 날마다 각기 고기 반 근, 엄채 넉 냥, 초 두 냥, 소금 한 냥, 쌀 한 되, 나무 너 근씩을 주었다.

 

 

[D-001]광록시(光祿寺) : 식량(食糧)과 찬품(饌品)의 제절을 맡은 관부.

[D-002]득상(得賞) 종인(從人) : 상을 탈 자격을 지닌 수행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3일 기유(己酉)

 

 

개다.

해 뜬 뒤에 비로소 관문(館門)을 연다. 나는 곧 시대장복과 함께 관을 떠나 첨운패루(瞻雲牌樓) 밑까지 걸어와서 태평거 하나를 세내었는데, 나귀 한 마리가 끌고 간다. 아까 주방(廚房)에서 하룻동안 쓸 것을 주기에, 시대로 하여금 돈으로 바꾸어서 차에 실으니, () 두 냥이 돈 2 2백 닢이었다. 시대는 오른편에, 장복은 뒤에 태우고는 빨리 달려서 선무문(宣武門)에 이르니, 그 제도가 조양문과 같다. 왼편은 상방(象房 코끼리를 기르는 곳)이요, 오른편은 천주당(天主堂)이다. 문으로 나와 오른편으로 굽어서 유리창(琉璃廠)에 들어간즉, 첫 거리에 오류거(五柳居)라는 세 글자의 간판이 붙었다. 이는 곧 도옥(屠鈺)의 책사이다. 지난해에 무관(懋官)들이 이 책사에서 책을 많이 샀다 해서 퍽 흥미 있게 오류거를 이야기하더니, 이제 이곳을 지나고 보니 마치 옛 친구를 만난 듯싶다. 그리고 무관이 나를 떠나보낼 때에 또 말하기를,

 

만일 당원항(唐鴛港) 낙우(樂宇) 을 찾으려거든, 먼저 선월루(先月樓)에 가서 그 남쪽 조그만 거리로 돌아들면 둘째 번 대문이 곧 당씨(唐氏)의 댁이랍니다.”

하였다. 곧 차를 몰아 양매서가(楊梅書街)에 이르러 우연히 육일루(六一樓)에 올랐다가 유황포(兪黃圃) 세기(世奇) 를 만나서 잠깐 이야기할 제, 서문포(徐文圃) () 와 진립재(陳立齋) 정훈(庭訓) 등이 마침 자리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아담한 선비이기에 날을 골라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수레를 돌려 북쪽 골목으로 들어가니, 길가에 금자로 선월루(先月樓)’라 쓴 것이 별안간 수레 앞에 눈부시게 보인다. 이 역시 책사이다. 곧 수레에서 내려 두 하인과 함께 당씨(唐氏)의 집을 찾아갔는데, 마치 익숙한 곳을 찾듯이 했다. 문 앞에 하인 셋이 나오더니,

 

대감께선 아침 일찍 아문(衙門)에 나가셨답니다.”

한다. 나는,

 

그럼, 어느 때쯤이나 돌아오실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묘시(卯時)에 나가셔서 유시(酉時)면 돌아오십니다.”

한다. 그 중 한 사람이,

 

잠깐 외관(外館)에 올라 땀을 들이시지요.”

하기에 곧 따라가니, 옹졸한 학구(學究) 한 사람이 나와 맞이한다. 그의 성은 주()라고 기억되나 이름은 잊어버렸다. 앞서 듣건대, 원항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모두들 잘났다더니, 이제 두 아이가 방에서 나와 공손히 읍하는 것을 보니, 묻지 않아도 원항의 아들임이 틀림없기에 나는 그 두 아이의 나이를 물었더니, 맏이는 열셋, 다음은 열하나였다. 나는 곧,

 

형의 이름은 장우(張友), 아우의 이름은 장요(張瑤)가 아니냐?”

하고 물었더니, 둘이 함께,

 

예에, 그렇습니다. 어른께선 어찌 아시옵니까?”

한다. 나는,

 

너희들이 글 잘 읽는다 하여 이름이 해외(海外)에까지 들리기에.”

하였다. 조금 뒤에 그 집 하인이 파초잎 모양으로 생긴 흰 주석 쟁반을 받들고 나와서 더운 차 한 그릇, 빈과(蘋果) 세 개, 양매탕(楊梅湯) 한 그릇을 은근히 권한다. 그리고 하인이 그 집 늙은 마나님의 말씀을 전갈하되,

 

지난해 조선 어른 두 분이 가끔 제 집에 놀러 오셨는데, 지금도 평안하신지요. 만일 청심환 가지고 오신 게 있으시면 한 두 개 주십시오.”

한다. 나는,

 

마침 지니고 온 것이 없사오니, 뒷날 다시 올 때 갖다 드리겠습니다.”

하고 답을 전했다. 앞서 듣기에, 당씨의 늙은 마나님은 늘 동락산방(東絡山房)에 있으며, 나이가 여든이 넘어도 근력이 오히려 좋다더니, 이제 하인이 멀리 손으로 가리키며,

 

노마나님이 방금 중문에 나오셔서, 귀국 사람들의 옷차림을 구경하시고 계십니다.”

한다. 나는 바로 보기가 겸연쩍어서 못 본 체하고는, 붉은 종이로 만든 중머리 부채 두 자루와 여러 가지 빛깔의 시전지(詩箋紙)를 내어 장우와 장요에게 나눠 주고, 열흘 안으로 다시 오리라 약속하고 곧 일어나 문을 나섰다. 돌아보니 마나님이 오히려 중문에 섰고 아환(丫鬟) 둘이 옆에서 부축하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니, 학발(鶴髮)이 그 머리를 덮었으나 몸이 웅건해 보이고, 아직도 화장과 보물 꾸미개를 폐하지 않았다. 두 하인의 말이,

 

아까 당씨의 여러 하인이 우리들을 좌우로 에워싸서 뜰 가운데에 세워 놓고, 늙은 마나님이 우리 옷을 벗겨서 그 제도를 보겠다 하므로, 소인들이 황공하여 감히 바로 치어다보지 못하고, ‘날이 더워서 입은 것이 단지 홑적삼뿐입니다.’ 하니, 그는 돌려 세워 보기도 하고 모로 세워 보기도 하고는, 다시 여러 하인을 시켜 깃고대도련을 들추어보고, 술과 먹을 것을 내어다 먹입디다. 소인들의 의복이 이렇게 남루해서 부끄러워 죽을 뻔했습니다.”

한다. 돌아오는 길에 회자관(回子館 이슬람 교당)에 들러 구경하였다.

 

 

[D-001]천주당(天主堂) : 당시 북경에는 네 천주당이 있었는데, 연암이 찾아간 곳은 곧 선무문 안 서천주당(西天主堂)이었다.

[D-002]유리창(琉璃廠) : 북경성 남부에 있는 거리. 본래는 해왕촌(海王村)이었으나, 유리가마가 있으므로 이름지었다. 명 때부터 서화와 골동의 저자로 유명하였다.

[D-003]오류거(五柳居) : 유리창의 서문 가까이 있는 서사(書肆). 주인 도정상(陶正祥)은 서지학(書誌學)에 밝아서, 사고전서(四庫全書) 중에 강남(江南)의 희서(稀書)를 많이 바쳤다.

[D-004]도옥(屠鈺) : 이문조(李文藻) 유리창서사기(琉璃廠書肆記)에는, 오류거의 주인이 도씨(陶氏)’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4일 경술(庚戌)

 

 

개다. 더위가 심하여 삼복(三伏)이나 다름 없었다. 수레를 몰아 정양문을 나와서 유리창을 지나면서,

 

이 창()이 모두 몇 칸이나 되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어떤 이가,

 

모두 27만 칸이나 된답니다.”

하고 답한다. 대개 정양문에서부터 가로 뻗어 선무문에 이르기까지의 다섯 거리가 모두들 유리창이었고, 국내와 국외의 모든 보화가 이에 쌓였다.

내 그제야 한 누() 위에 올라서 난간에 기대어 탄식하였다.

 

이 세상에 진실로 저를 아는 사람 하나를 만났다 하더라도 한이 없을 것이다. 아아, 인정은 대체 제 몸을 알고자 하되 이를 알지 못하면, 때로는 커다란 바보나 또는 미치광이처럼 되어서, 저 아닌 남이 되어 저를 보아야만 저도 비로소 다른 물건과 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몸이 움직이는 곳마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성인은 이 방법을 지녔으므로 세상을 버리고도 아무런 고민이 없으며, 외로이 서 있어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남이 나를 알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노여운 뜻을 품지 않는 이라면 어찌 군자(君子)가 아니겠느냐.’ 하였고, 노담(老耼 노자(老子))도 역시, ‘나를 알아 주는 이가 드물다면 나는 참으로 고귀한 존재이다.’ 하였으니, 이렇듯이 남이 나를 몰라 보았으면 하여, 혹은 그의 의복을 바꾸기도 하려니와, 혹은 그 얼굴을 못 알아보게 하고, 혹은 그 성명을 갈아 버린다. 이는 곧 성()()과 현()() 들이 세상을 한 개의 노리개로 보아서, 비록 천자의 자리를 준다 하더라도 그의 즐거움과 바꾸지 않는 까닭이다. 이러한 때에 천하에 혹시 한 사람만이라도 저를 아는 이가 있다면, 그의 자취는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실()에 있어서는, 천하에 단지 한 사람만이라도 그를 알아 주는 이가 없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 미복(微服)으로 강구(康衢)에서 놀았으나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는 늙은이가 나타났고, 석가(釋迦)가 얼굴을 달리 하였으나 아난(阿難 석가의 으뜸가는 제자)이 그를 알았고, 태백(太伯)은 몸에 그림을 떠서 놓아 남만(南蠻)으로 도피하였으나 중옹(仲雍)이 뒤를 따랐고, 예양(豫讓)은 몸에 칠을 하였으나 그 벗이 알았고, 삼려대부(三閭大夫)는 얼굴이 파리했을 때에 어부(漁夫)가 알았고, 치이자(鴟夷子 범려(范蠡)의 호)가 오호(五湖)에 뜰 때 서시(西施)가 따랐고, 장록(張祿)은 객관에서 가만히 걸을 때 수가(須賈)를 만났고, 장자방(張子房)은 이교(圯橋 다리 이름)에서 조용히 걸을 때 황석공(黃石公)을 만났다. 이제 내 이 유리창 중에 홀로 섰으니, 그 옷과 갓은 천하에 모르는 바이요, 그 수염과 눈썹은 천하에 처음 보는 바이며, 반남(潘南 연암의 관향)의 박()은 천하에 일찍이 듣지 못하던 성일지라도, 내 이에서 성()도 되고 불()도 되고 현()도 되고 호()도 되어, 그 미침이 기자(箕子)나 접여(接輿)와 같기로, 장차 그 누가 와서 이 천하의 지락(至樂)을 논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가 묻기를, ‘공자께서 송()을 지나갈 때에 무슨 관()을 쓰셨을까.’ 하기에, 나는, ‘아마 우물과 창고와 평상과 거문고가 벌여 있고, 그는 앞에 있었던 것이 별안간 뒤에 있었을 것이며, 또 물고기 가죽이나 표범 무늬처럼 별의별 변덕이 많았을 테니, 누가 그 참된 모습을 알 수 있으리오.’ 하고는 껄껄 웃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르기를, ‘선생님께서 계시니 회()가 감히 죽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볼 때, 공자가 천하의 지기(知己)를 논한다면 오직 안자(顔子 안회를 높여 부르는 말) 한 사람이 있었을 따름일 것이다.”

 

[D-001]격양가(擊壤歌) : 요가 미복으로 큰 거리를 미행하였을 때에, 격양하던 농부가 찬송의 노래를 불렀다.

[D-002]태백(太伯) : ()의 왕자로서, 그 자리를 아우에게 양보하여 남만으로 도피하였다.

[D-003]중옹(仲雍) : 태백의 아우, 곧 우중(虞仲). 태백이 자기에게 임금 자리를 양보함을 보고 자기도 뒤를 따랐다.

[D-004]예양(豫讓) : 전국 때 지백(智伯)의 신하. 지백이 죽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서 몸에 옻칠을 하고 입에 숯을 머금어서 문둥이와 벙어리로 행세하였을 때, 그의 아내는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그의 벗 중에는 아는 이가 있었다.

[D-005]삼려대부(三閭大夫) : 전국 초()의 정치가이며, 문학가 굴평(屈平). 삼려대부는 벼슬. 자는 원(), 또는 영균(靈均). 그가 정계에서 추방된 뒤에 어부사(漁父辭)를 지었는데, 그 중에 어부와 문답한 말이 있다.

[D-006]장록(張祿) : 전국 때 진()의 정치가 범저(范雎)의 변성명.

[D-007]수가(須賈) : 전국 때 위()의 고관. 일찍이 범저를 박대했는데, ()에 사신갔을 때에 범저를 만나서 그의 궁곤을 측은히 여겨 선물을 주었으나, 실은 그때 범저는 이미 진의 승상이 되었는데 궁곤을 가장하여 수가를 속였다.

[D-008]장자방(張子房) …… 만났다 : 자방은 장량(張良)의 자. 황석공은 장량에게 비서(秘書)를 전해 준 도사. 장량이 창해(滄海)의 역사(力士)로 하여금 진시황을 저격(狙擊)하게 하고는 조용히 이 다리에서 걸을 때, 황석공이 비서(秘書)를 주었다.

[D-009]그 미침이 …… 같기로 : 세상에 뜻을 잃고 미친 척하고 산 사람. () 말의 기자는 거짓 미쳐서 종이 되었고, 접여는 전국 초()의 광사(狂士) 육통(陸通).

[D-010]공자께서 ……  : 공자가 일찍이 송의 광() 땅 사람에게 습격을 당해서 미복으로 지나갔다.

[D-011]우물과 …… 거문고 : 맹자(孟子)에 나오는 순()과 상()의 고사. 여기서는, 이 네 가지는 학자의 일상생활에 보통 있을 수 있는 것임을 의미한다.

[D-012]그는 …… 것이며 :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가 공자의 학문이 변화 무궁하여 포착할 수 없음을 찬송한 말로, 논어에 실렸다.

[D-013]물고기 …… 테니 : 역경 군자는 표변(豹變)한다.” 하였다.

[D-014]선생님께서 …… 있겠습니까 : 이 한 구절은, 공자가 미복으로 송을 지나치다가 안회가 뒤처졌던 것을 죽은 줄만 알았다고 하였을 때에 안회가 답한 말인데, 논어에 실렸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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