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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수필(馹汛隨筆)
일신수필(馹汛隨筆) 7월 15일 신묘(辛卯)에 시작하여 23일 기해(己亥)에 그쳤다. 모두 아흐레 동안이다.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 안에 이르기까지 모두 5백 62리다.
1. 일신수필 서(馹汛隨筆序)
2. 가을 7월 15일 신묘
3. 북진묘기(北鎭廟記)
4. 거제(車制)
5. 희대(戲臺)
6. 시사(市肆)
7. 점사(店舍)
8. 교량(橋梁)
9. 16일 임진(壬辰)
10. 17일 계사(癸巳)
11. 18일 갑오(甲午)
12. 19일 을미(乙未)
13. 20일 병신(丙申)
14. 21일 정유(丁酉)
15. 22일 무술(戊戌)
16. 23일 기해(己亥)
17. 강녀묘기(姜女廟記)
18. 장대기(將臺記)
19. 산해관기(山海關記)
일신수필 서(馹汛隨筆序)
한갓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은 것에만 의지하는 이들과 학문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인데, 하물며 그의 평생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에서야 더욱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만일 어떤 이가 성인(聖人)이 태산(泰山)에 올라서 천하를 작게 생각하였다고 말한다면,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입으로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가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보살핀다 하면 그는 곧 환망(幻妄)된 일이라고 배격할 것이며, 태서(泰西 서양(西洋)) 사람이 큰 배를 타고 지구(地球) 밖을 둘러 다녔다 하면, 그는 괴이하고도 허탄한 이야기라고 꾸짖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누구와 함께 천지 사이의 크나큰 구경을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 아아, 성인(공자를 가리킴)이 2백 40년간의 역사를 필삭(筆削)하여 이름을 《춘추(春秋)》라 하였으나, 이 2백 40년간의 옥백(玉帛)과 병거(兵車)의 모든 일은 곧 하나의 꽃피고 잎지는 삽시의 광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아, 슬프도다. 내 이제 글을 빨리 써서 이에 이르러 생각하니, 이 한점의 먹을 찍을 사이는 하나의 순(瞬)과 식(息)에 지나지 않는 것이건만, 눈 한번 감고 숨 한번 쉬는 사이에 벌써 소고(小古)ㆍ소금(小今)이 이룩된다. 그러면 하나의 옛날이란 것이나, 지금이란 것 역시 대순(大瞬)ㆍ대식(大息)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에 그 사이에서 온갖명예와 사업을 세우고자 한다는 것이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
내 일찍이 묘향산(妙香山)에 올라서 상원암(上元庵)에 묵을 때 밤이 다하도록 낮과 다름없이 달빛이 밝았다. 창문을 열고 동쪽을 바라보니, 절 앞에는 안개가 질펀하여 그 위에 달빛을 받자 별안간 수은 바다가 이룩되었다. 그리고 바다 밑에는 은은히 코고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자 중들이,
“저 하계(下界)에는 방금 큰 천둥과 소나기가 내리는 것이다.”
한다. 며칠 뒤에 산을 떠나 안주(安州)에 이른즉, 전날 밤에 과연 갑작스러운 비ㆍ천둥ㆍ번개로 물이 평지에 한 길이나 괴고, 민가들이 많이 해를 입었다. 이를 보고서 나는 말을 멈추고 섭섭한 듯이,
“어제 밤에는 나는 운(雲)ㆍ우(雨) 밖에서 밝은 달을 껴안고 누웠은즉, 저 묘향산이란 태산에 비한다면 겨우 한 개의 둔덕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으나, 이토록 높낮이가 심한 세계를 이룩했거늘 하물며 성인이 천하를 봄이랴.”
하니, 설산(雪山 석가가 도를 닦던 곳)의 고행(苦行)을 닦는 이가 만일 공씨(孔氏 공자의 한 가족)의 집을 두고서 다만 세 번이나 출처(出妻)를 했느니, 백어(伯魚)가 일찍 죽었느니, 노(魯)ㆍ위(衛)에서 봉변을 당했느니 하고서 조금 더 넓게 보지 못한다면, 이는 실로 땅ㆍ물ㆍ바람ㆍ불 등이 별안간에 모두 빈 것이 된다는 것인즉 정말 한심한 일일 것이다. 또 그들은 성인과 불씨(佛氏)의 관점도 오히려 땅에 떠나지 못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이 지구를 어루만지고 공중을 달리며 별을 따서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이들은 스스로 자기의 보는 것이, 유(儒)ㆍ불(佛) 이씨(二氏)보다 낫다고 함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그들이 모두 이국(異國)에 와서 말을 배우며, 머리끝이 희도록 남의 글을 익혀서 썩지 않을 사업을 꾀함은 무슨 까닭일까. 대체로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다는 것은 벌써 지나간 경지이니, 그 경지가 지나고 또 지나서 쉬지 않는다면 옛사람들의 이를 빙자하여 학문을 하는 이 역시 무엇을 가지고 고증(考證)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꿋꿋이 글을 지어서 남들이 이를 반드시 믿어주게 하고자 함이다. 그리하여 그들(서양 사람)은 우리 유가(儒家)에서 이단(異端)을 치는 이론을 보고는 그 남은 일을 주어서 억지로 불교를 배격하고, 또 그들은 불씨의 천당(天堂)ㆍ지옥(地獄)의 설을 기뻐하여 그의 조박(糟粨)을 들일 뿐이었다. 몇 글자가 빠졌다. 내 이번 걸음 이하는 탈락되었다. 에,
[주C-001]일신수필 서(馹汛隨筆序) : ‘박영철본’에는 이 소제가 없었으나 ‘수택본’ 또는 ‘일재본’에 모두 서(序) 자가 있으므로 이들을 따라서 이 다섯 글자의 소제를 붙였다.
[주D-001]태산(泰山)에 …… 생각하였다 :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 성인은 곧 공자. 공자의 학문 세계가 점차 넓어짐을 의미한 것이다.
[주D-002]시방세계(十方世界) : 불가에서 말하는 이 세상 밖의 다른 여러 세계들.
[주D-003]춘추(春秋) : 공자가 지은 책. 기원전 770년으로부터 240년간 노(魯)를 중심으로 하여 쓴 역사서. 십삼경(十三經)의 하나.
[주D-004]공씨(孔氏)의 …… 했느니 : 공자ㆍ백어ㆍ자사의 3대가 모두 아내를 내쫓았다 한다.
[주D-005]백어(伯魚)가 …… 죽었느니 : 백어는 공자의 아들 공리(孔鯉)의 자. 공리는 공자가 재세할 때에 요사하였다.
[주D-006]노(魯) …… 당했느니 : 공자는 일찍이 노ㆍ위 등지에서 무뢰배에게 봉변하였다.
[주D-007]귀로 …… 보았다 : ‘수택본’에는 “애초 이 몸의 현재를 위함이다.”로 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가을 7월 15일 신묘
개다.
내원과 변 태의(卞太醫) 관해(觀海) 조 주부 달동과 새벽에 소흑산을 떠나 중안포(中安浦)까지 30리를 와서 점심 먹고, 또 앞서 떠나 구광녕(舊廣寧)을 지나 북진묘(北鎭廟)를 구경하고, 달빛을 띠고 40리를 가서 신광녕(新廣寧)에서 묵었다. 북진묘를 구경하느라고 20리 돌림길을 하니 모두 90리를 갔다. 《정리록(程里錄)》에 실린 것으로 말하면, 백대자(白臺子)ㆍ망우대(蟒牛臺)ㆍ사하자(沙河子)ㆍ굴가둔(屈家屯)ㆍ삼의묘(三義廟)ㆍ북진보(北鎭堡)ㆍ양장하(羊腸河)ㆍ우가둔(于家屯)ㆍ후가둔(侯家屯)ㆍ이대자(二臺子)ㆍ소고가자(小古家子)ㆍ대고가자(大古家子) 등의 지명과 이수가 서로 어긋난 것이 많다. 만일 이대로 계산한다면 1백 80리가 될 것이나 지금은 상고할 길이 없다. 이날은 몹시 더웠다.
우리나라 선비들이 북경에서 돌아온 이를 처음 만나면 반드시,
“자네, 이번 걸음에 제일 장관(壯觀)이 무엇이던고. 그 제일 장관을 뽑아서 이야기해 다오.”
하면, 그들은 제각기 본 바를 좇아서 입에 나오는 대로,
“요동 천 리의 넓디넓은 들이 장관이죠.”
“구요동 백탑(白塔)이 장관이더군.”
“그 연로의 시가와 점포가 장관이오.”
“계문(薊門)의 내 낀 숲들이 장관이오.”
“노구교(蘆溝橋)가 장관이야.”
“산해관이 장관이오.”
“각산사(角山寺)가 장관이오.”
“망해정(望海亭)이 장관이오.”
“조가패루(祖家牌樓)가 장관이오.”
“유리창이 장관이오.”
“통주(通州)의 주집(舟楫)들이 장관이오.”
“금주위(錦州衛)의 목축(牧畜)이 장관이오.”
“서산(西山)의 누대가 장관이오.”
“사천주당(四天主堂)이 장관이오.”
“호권(虎圈)이 장관이오.”
“상방(象房)이 장관이오.”
“남해자(南海子)가 장관이오.”
“동악묘가 장관이오.”
“북진묘가 장관이오.”
하고, 대답이 분분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상사(上士)는 섭섭한 표정으로 얼굴빛을 바꾸면서,
“도무지 볼 것이 없더군요.”
한다.
“어째서 아무런 볼 것이 없더냐?”
하고 물으면, 그는,
“황제가 머리를 깎았고, 장(將)ㆍ상(相)과 대신 모든 관원들이 머리를 깎았으며, 사(士)와 서인(庶人)들까지도 모두 그러한즉, 비록 공덕이 은(殷)ㆍ주(周)와 같고 부강함이 진(秦)ㆍ한(漢)에 지나치다손 치더라도 사람이 생겨난 이래로 아직껏 머리 깎은 천자는 없었다오. 또 비록 육롱기(陸隴其)ㆍ이광지(李光地)의 학문이 있고, 위희(魏禧)ㆍ왕완(汪琬)ㆍ왕사징(王士澂 왕사진(王士稹)인 듯함)의 문장이 있고, 고염무(顧炎武)ㆍ주이준(朱彛尊)의 박식이 있다 한들 한번 머리를 깎는다면 곧 되놈이요, 되놈이면 곧 짐승일 것이니, 우리가 그들 짐승에게서 무슨 볼 게 있단 말이오.”
한다. 이것이 곧 으뜸가는 의리(義理)라 하여 이야기하는 이도 잠잠하고, 듣는 이도 옷깃을 여민다. 그리고 중사(中士)는 말하기를,
“그들의 성곽은 장성(長城)의 남은 제도를 물려받은 것이요, 건물은 아방궁(阿房宮)의 법을 본뜬 것이요, 사(士)ㆍ서인(庶人)은 위(魏)ㆍ진(晉)의 부화를 숭배함이요, 풍속은 대업(大業 수 양제(隋煬帝)의 연호)ㆍ천보(天寶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때의 사치함을 지었으며, 신주(神州)가 더럽힘을 입어서 그 산천이 피비린내 나는 고장으로 변했고, 성인들의 끼친 자취가 묻혀지자 언어조차 야만의 것을 따르게 되었으니 무슨 볼 만한 게 있으리오. 진실로 10만의 군사를 얻을 수 있다면 급히 달려 산해관을 쳐 들어가서, 중원(中原)을 소탕한 다음에야 비로소 장관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한다. 이는 《춘추(春秋)》를 잘 읽은 이의 말이다. 이 일부(一部)의 《춘추》는 중화를 높이고 이족(夷族)을 낮추어보는 사상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글이다. 우리나라가 명(明)을 섬긴 지 2백 년 동안 충성을 한결같이 하여 이름은 속국(屬國)이라 하나 실상은 한 나라나 다름 없고, 만력(萬曆) 임진년(壬辰年 1592) 왜적의 난에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천하의 군사를 이끌고 우리를 구원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종(頂踵)ㆍ모발(毛髮) 어느 것 하나하나 그 은혜 아닌 것이 없었고, 인조(仁祖) 병자(丙子 1636)에 청(淸)의 군대가 쳐 들어오매, 의열 황제(毅烈皇帝)가 우리나라가 난리를 입었다는 말을 듣고, 곧 총병(總兵) 진홍범(陳洪範 명의 장수 이름)에게 명하여 시급히 각 진(鎭)의 수군(水軍)을 징벌하여 구원병을 파견하였다. 홍범이 관병(官兵)의 출범(出帆)을 아뢸 제, 산동순무(山東巡撫) 안계조(顔繼祖)가 조선이 이미 무너져서 강화(江華)마저 떨어졌다 아뢰니, 황제는 계조가 힘껏 구원하지 않았다 하여 조서를 내려 준절히 나무랐다.
이때를 당하여 천자는 안으로 복주(福州)ㆍ초주(楚州)ㆍ양주(襄州)ㆍ당주(唐州) 등 각지의 난리를 누를 길이 없고, 밖으로 조선의 근심이 더욱 절박하여 그 구출해 줄 뜻이 형제의 나라에 못지 않았더니, 마침내 온 누리가 천붕(天崩)ㆍ지탁(地坼)의 비운을 만나고 온 인민의 머리를 깎아서 모두 되놈을 만들었은즉, 비록 우리나라만이 이런 수치를 면했으나 그 중국을 위하여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으려 하는 마음이야 어찌 하루 사인들 잊을 수 있었으랴. 그리고 우리나라 사대부들이 《춘추》 존(尊)ㆍ양(攘)의 이론을 일삼는 이가 군데군데 우뚝 서서 백년을 하루같이 줄기차게 잇달렸으니 가히 장한 일이라 이르겠다.
그러나 존주(尊周)의 사상은 주를 높이는 데에만 국한될 것이요, 이적(夷狄)의 문제는 이적에서만 쓸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성곽과 건물과 인민들이 예와 같이 남아 있고, 정덕(正德)ㆍ이용(利用)ㆍ후생(厚生)의 도구도 파괴된 것이 없으며, 최(崔)ㆍ노(盧)ㆍ왕(王)ㆍ사(謝)의 씨족도 없어지지 않았고, 주(周)ㆍ장(張)ㆍ정(程)ㆍ주(朱)의 학문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 이후로 성스럽고 밝은 임금들과 한(漢)ㆍ당(唐)ㆍ송(宋)ㆍ명(明)의 아름다운 법률 제도도 변함없이 남아 있다. 저들이 이적일망정 실로 중국이 자기에게 이로워서 길이 누리기에 족함을 알고, 이를 빼앗아 웅거하되 마치 본시부터 지녔던 것같이 한다.
대개 천하를 위하여 일하는 자는 진실로 인민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될 일이라면, 그 법이 비록 이적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이를 거두어서 본받으려거든, 하물며 삼대 이후의 성제(聖帝)ㆍ명왕(明王)과 한ㆍ당ㆍ송ㆍ명 등 여러 나라의 고유적(固有的)인 옛것인들 어떨쏘냐. 성인이 《춘추》를 지으실 제 물론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쳤으나, 그렇다고 이적이 중화를 어지럽힘을 분히 여겨서 중화의 숭배할 만한 진실 그것마저 물리친다는 일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이 진실로 이적을 물리치려면 중화의 끼친 법을 모조리 배워서 먼저 우리나라의 유치한 문화를 열어서 밭갈기, 누에치기, 그릇굽기, 풀무불기 등으로부터 공업ㆍ상업 등에 이르기까지도 배우지 않음이 없으며, 남이 열을 한다면 우리는 백을 하여 먼저 우리 인민들에게 이롭게 한 다음에, 그들로 하여금 회초리를 마련해 두었다가 저들의 굳은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매질할 수 있도록 한 뒤에야 중국에는 아무런 장관이 없더라고 이를 수 있겠다.
그러나 나와 같은 사람은 하사(下士 하류의 선비)이지마는 이제 한 말을 한다면,
“그들의 장관은 기와 조각에 있고, 또 똥부스러기에도 있다.”
고 하련다. 대개 저 깨어진 기와 조각은 천하에 버리는 물건이지만, 민간에서 담을 쌓을 때 담 높이가 어깨에 솟을 경우, 다시 이를 둘씩 또 둘씩 포개어서 물결 무늬를 만든다든지, 혹은 넷을 모아서 둥근 고리처럼 만든다든지, 또는 넷을 등지워서 옛 노전(魯錢)의 형상을 만들면 그 구멍난 곳이 영롱하고 안팎이 서로 어리비쳐서 저절로 좋은 무늬가 이루어진다. 이는 곧 깨어진 기와 쪽을 버리지 아니하여 천하의 무늬가 이에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집마다 뜰 앞에 벽돌을 깔지 못한다면 여러 빛깔의 유리 기와 조각과 시냇가의 둥근 조약돌을 주워다가 꽃ㆍ나무와 새ㆍ짐승의 모양으로 땅에 깔아서 비올 때 진수렁이 됨을 막으니, 이는 곧 부서진 자갈돌을 버리지 아니하여 천하의 도화(圖畫)가 이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똥은 지극히 더러운 물건이지만 이를 밭에 내기 위해서 황금처럼 아껴 길에 내다 버린 분회가 없고, 말똥을 줍는 자가 삼태기를 들고 말 뒤를 따라 다닌다.
그리고 이를 주워 모으되 네모 반듯하게 쌓고, 혹은 여덟 모로 혹은 여섯 모로 하고 또는 누각이나 돈대의 모양으로 만드니, 이는 곧 똥무더기를 보아서 모든 규모가 벌써 세워졌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저 기와 조각이나 똥무더기가 모두 장관이니, 하필 이 성지(城地)ㆍ궁실(宮室)ㆍ누대(樓臺)ㆍ시포(市舖)ㆍ사관(寺觀)ㆍ목축(牧畜)이라든지, 또는 저 광막한 원야(原野)라든지, 변환하는 연수(煙樹)라든지, 그런 것들만이 장관이 아닐 것이다.”
구광녕성은 의무려산(醫巫閭山) 밑에 있는데, 앞으로 큰 강이 열리고 강물을 끌어서 해자를 만들었으며, 탑(塔) 둘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성에 못 미쳐 몇 마장 되는 곳에 큰 사당이 하나 있어 단청을 새로이 하여 찬란하게 눈에 든다.
광녕성 동문밖 다리 머리에 새긴 공하(蚣 패하(覇夏)와 같음)가 매우 웅장하고 기묘하게 보였다. 겹문을 들어가서 거리를 지나노라니 점포들의 번화함이 요동만 못지 않다.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梁)의 패루(牌樓)가 성 북쪽에 있다. 혹은 이르기를,
“광명은 본시 기자(箕子)의 나라여서 옛날에 기자의 우관(冔冠 은(殷) 때의 갓 이름) 쓴 소상이 있더니, 명(明)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연간의 난리통에 타버렸다.”
한다. 성이 겹으로 되었는데 내성은 온전하나 외성은 많이 헐었다. 성 안의 남녀가 집집이 나와서 구경하며 거리의 노는 사람들이 수없이 떼를 지어 말머리를 둘러싸기 때문에 빠져 나가기가 힘들었다.
성 밖의 관제묘는 그 장려함이 요양의 것과 비슷하다. 문 밖에는 희대(戲臺)가 있어 높고 깊고 화려ㆍ사치하며, 마침 뭇사람이 모여서 연극을 하고 있는 모양이나 길이 바빠서 구경하지 못하였다. 천계(天啓) 연간에 왕화정(王化貞)이 이영방(李永芳)에게 속아서 그의 날랜 장수 손득공(孫得功)이 적군을 성 안으로 맞아들이었으므로 광녕이 떨어지고 천하의 대세가 어찌할 수 없이 되어 버렸다.
[주C-001]가을 : ‘수택본’과 ‘일재본’에는 이 위에 18년이란 글자가 있으나 삭제됨이 옳다. 여기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주D-001]관해(觀海) : 곧 변계함. 태의는 그의 벼슬이요, 관해는 이름.
[주D-002]상사(上士) : 사(士) 중에서도 지식이 높은 이. 여기서는 존명사상에 철저한 고루한 선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주D-003]이광지(李光地) : 청의 성리학(性理學)의 대가. 광지는 이름이요, 자는 진경(晉卿).
[주D-004]위희(魏禧) : 청의 문학가(文學家). 희는 이름이요, 자는 빙숙(氷叔).
[주D-005]왕완(汪琬) : 역시 청의 문학가. 완은 이름이요, 자는 소문(苕文). 당시에 요봉(堯峯)의 문필(文筆)과 원정(院亭)의 시(詩)를 병칭하였으니, 요봉은 그의 호요, 원정은 왕사진(王士稹)의 호.
[주D-006]아방궁(阿房宮) : 진 시황(秦始皇)이 그의 수도 함양(咸陽)에 세운 큰 궁궐 이름.
[주D-007]신주(神州) : 전국 때 학자 추연(騶衍)이 중국을 신주라 하였는데, 그 뒤에 이내 중국의 별칭으로 써왔다. 신은 신성의 의미를 지녔다.
[주D-008]각지의 난리 : 명말(明末) 안으로 장헌충(張獻忠)ㆍ이자성(李自成)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주D-009]정덕(正德) …… 도구 : 이 세 가지의 일은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 중에 나온 말.
[주D-010]최(崔) …… 씨족 : 이 네 성씨는 진(晉)으로부터 당(唐)에 이르기까지의 벌족들.
[주D-011]주(周) …… 학문 : 이 넷은 송의 성리학(性理學)의 대가 주돈이(周敦頤)ㆍ장재(張載)와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와 주희(朱熹)를 일컬었다.
[주D-012]노전(魯錢) : 노는 전신론(錢神論)의 저자 노포(魯褒).
[주D-013]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梁) : 명 신종 때 요동좌도독(遼東左都督)이 되었으며, 그의 선조는 조선 사람이었다. 영원백은 그의 봉호. 이여송(李如松)의 아버지.
[주D-014]왕화정(王化貞) : 명말의 장수로 일찍이 광녕을 지켜서 몽고를 무마하였으나 웅정필(熊廷弼)과 함께 요동에서 실패하여 극형을 받았다.
[주D-015]이영방(李永芳) : 명의 유격(游擊)으로 무순(撫順)을 지키다 청에 항복하여 병자호란에도 종군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북진묘기(北鎭廟記)
북진묘는 의무려산 밑에 있다. 그 뒤에 여러 묏부리가 마치 병풍을 친 듯이 둘러 있고 앞으로는 큰 벌이 트이었으며, 오른편은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광녕성은 마치 슬하의 아이들처럼 앞에 벌여져 있다.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푸른 연기는 띠를 두른 듯 그 속에 잠긴 탑(塔)이 유달리 희게 보인다. 그 지형을 살펴본즉 편편한 벌판이 차츰 여러 길 되는 둥근 언덕을 이루어, 굽어보나 쳐다보나 천지가 하도 넓어 걸릴 것이 없으며, 해와 달이 떴다 졌다 하며 바람과 구름이 일다 사라졌다 함이 모두 그 가운데 있다. 동쪽을 바라보니 오(吳)ㆍ제(齊) 두 나라는 나의 손에 닿을 듯 가까워 보이나 내 안력(眼力)이 미치지 못함이 한스러울 뿐이다. 사당의 모양이 웅장하고 괴걸하다. 그렇지 않으면 해(海)ㆍ악(嶽)ㆍ진사(鎭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에는 북의의 현명제군(玄冥帝君 북방을 맡은 신군)과 아울러 그 종신(從神)을 모셨는데, 모두 곤포(袞袍)를 입고 면류관(冕旒冠)을 쓴 채 옥을 차고 옥홀(玉笏)을 받들고 섰는데, 위풍이 늠름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향정(香鼎)은 높이 여섯 자가 넘고 괴상한 간물(姦物)과 귀물(鬼物)들을 새겼는데, 푸른 기운이 속속들이 스며 배었다. 그 앞에는 검은 항아리가 놓여 있어서 열 섬은 듬직하며, 횃불 네 개를 켜서 밤낮없이 밝히고 있다.
순(舜)이 일찍이 열 두 곳의 이름난 산에 봉선(封禪)할 때 이 의무려산을 유주(幽州)의 진산(鎭山)으로 삼았더니, 그 뒤 하(夏)ㆍ상(商)ㆍ주(周)ㆍ진(秦)이 모두 그대로 변경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한 예식은 저 오악(五岳)이나 사독(四瀆)과 같이하였다. 이 사당이 어느 시대에 비롯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의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때에 의무려산의 신을 봉하여 광녕공(廣寧公)으로 삼았고, 요(遼)ㆍ금(金) 때에는 왕호를 붙였으며, 원(元)의 대덕(大德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연간에 정덕광녕왕(貞德廣寧王)을 봉했더니, 명의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초년에는 다만 북진의무려산지신(北鎭醫巫閭山之神)이라 하고, 설이 되면 향품을 하사하여 제사하고 축문(祝文)에는 천자의 성명까지 쓴다고 한다. 나라에 큰 식전(式典)이 있으면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하였다. 지금은 청이 동북에서 일어났으므로 특히 이 산의 신을 받드는 품이 더욱 융숭하다 한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옹정 황제(雍正皇帝)가 아직 등극하기 전에 칙명을 받들고 강향하러 와서 그 제삿날 밤에 재실에서 자는데, 꿈에 신인이 그에게 커다란 구슬 한 개를 주어 그 구슬이 해가 되었더니, 그 길로 돌아가서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므로, 이에 이 사당을 크게 중수하여 그 신인의 은덕을 갚았다.”
한다.
사당 앞에는 다섯 문의 패루가 있는데 순전히 돌로만 세워 기둥이며 서까래며 기와며 추녀며 모두 다 나무는 하나도 쓰지 않았으며, 높이는 너덧 길이나 되고 그 구조의 공교함이나 조각의 정미로움이 거의 사람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할 만큼 잘 되었다. 패루의 좌우에는 돌사자가 있는데 높이는 두 길이었고, 묘문(廟門)으로부터 흰 돌로 층계를 놓았으며, 묘문의 왼편에는 절이 있는데 그 뜰에는 빗돌 둘이 서 있다. 하나는 ‘만수선림(萬壽禪林)’이라 하였고, 또 하나는 ‘만고유방(萬古流芳)’이라 하였으며, 절 속에는 큰 금불 다섯을 모셨다.
절 오른편에는 문 하나가 있는데 왼쪽은 고루(鼓樓)요, 오른쪽은 종루(鍾樓)였고, 그 두 누의 사이에 또 문 셋이 있고 그 앞에는 비석 셋이 있는데, 모두 누런 기와로 비 위를 덮었다. 그 둘은 강희제(康熙帝)의 글과 글씨였고, 또 하나는 옹정제의 글과 글씨였다.
정전(正殿)은 푸른 유리기와를 이었는데, 북쪽 벽에는 ‘울총가기(鬱葱佳氣)’라 써 붙였으니 이는 옹정제의 글씨였고, 층계 위에는 동서로 돌화로가 마주 서 있는데 높이는 모두 한 발이 넘었으며, 다시 동서로 낭무 수백 칸이 있고 정전 뒤에는 공전(空殿)이 있으되, 그 제도는 정전과 다름없이 단청이 휘황찬란하나 텅 비어서 아무 것도 놓인 것이 없고, 그 뒤에 또 전각 한 채가 있는데 제도는 역시 정전과 같으며, 소상 둘이 있는데 면류를 쓰고 옥홀을 가진 이는 문창 성군(文昌星君)이요, 봉관(鳳冠 중국 고대 여자용의 관)을 이고 구슬띠를 띤 것은 옥비 낭랑(玉妃娘娘)이라 한다. 그 좌우에는 두 동자가 모시고 섰다. 현판에는 ‘건시령구(乾始靈區)’라 하였으니 이는 지금 황제의 글씨이다. 바깥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층계마다 흰 돌로 만든 난간을 둘렀는데 그 조촐하고 매끄러움이 마치 옥 같으며, 그 위에는 골고루 이룡과 도롱룡을 새겨서 곁채와 층대를 두루 둘러 전전(前殿)에까지 이르고, 또 전전에서 굼틀굼틀 끊이지 않게 후전(後殿)까지 흰 빛 일색이 눈부시어 티끌 하나가 날지 않는다. 정전의 앞뒤에는 역대의 큰 비석이 나란히 서서 마치 파 이랑 같으며, 거기에 새긴 글들은 모두 나라를 위하여 복을 빈 말들이다. 그 중에는 송의 연우비(延祐碑 연우는 송 인종(宋仁宗)의 연호)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각문(西角門)을 나서니, 두어 길이나 되는 창벽이 있어 ‘보천석(補天石)’이라 새겼는데, 이는 명의 순무(巡撫) 장학안(張學顔 명 신종(明神宗) 때의 명신)의 글씨였고, 다시 한 칸쯤 떨어져 ‘취병석(翠屛石)’이라 새긴 것이 있으며, 동문 밖으로 수백 걸음을 나와서 커다란 둥근 돌이 놓였는데, 마치 거북의 등처럼 금이 갔으며, ‘여공석(呂公石)’ 또는 ‘회선정(會仙亭)’이라 새겼다. 그 위에 오르니 의무려산의 아름다운 기운과 가득찬 형세가 한 눈에 선뜻 들어온다. 문득 조그만 정자 하나가 바위를 의지하여 섰는데 흙 섬돌이 두 층이요, 띠이엉에 끝을 약간 가지런하게 베었는데 그 깨끗하고 그윽함이 퍽 마음을 즐겁게 한다. 거기서 잠깐 앉아 쉬면서 변군은 말하기를,
“비유하건대 마치 감사(監司)가 군읍을 돌아다니느라면 아침저녁으로 공궤하는 것이 모두 산해의 진미여서 속이 거북하고 구역질이 날 즈음에 문득 산뜻한 야채 한 접시를 보면 그냥 구미가 당기는 것 같군요.”
한다. 나는 웃으면서,
“그야말로 참 의원다운 말이로군.”
하니, 조군은,
“늘 분단장한 기생과 노닐어서 그 예쁘고 예쁘지 않은 것조차 분간하지 못하다가 들이랑 촌 싸리문에서 별안간 형차(荊釵)ㆍ포군(布裙)으로 수수하게 차린 여인을 만나면 모르는 결에 눈이 훤하게 트이지 않겠습니까.”
한다. 나는,
“이건 호색가(好色家)다운 말이로군. 만일 그대들 말과 같이 될진댄 이제 이 흙 섬돌과 띠 이엉에 천자의 안목과 비위를 이끌 수 있겠지요.”
하고는, 돌아와 회랑(廻廊) 아래에 앉았는데, 사당을 지키는 도사(道士) 셋이 있기에 부채 석 자루, 종이 세 권, 청심환 세 개를 선물하니, 모두들 못내 기뻐하였다. 뜰 앞에 복숭아가 방금 무르익은 것을 도사가 한 쟁반 따 왔다. 하인들이 다투어 나무 아래로 달려가서 가지를 휘어잡고 마구 딴다. 내가 그리 말라고 타일러도 막무가내였다. 도사는,
“애써 금하실 게 없습니다. 배부르면 저절로 그만두겠죠.”
하고, 또 하인들을 향하여,
마음대로 따 먹게만 가질랑 다치지 마오 / 任君摘取莫傷枝
그렇게들 두었다가 명년에 다시 때맞춰 오소 / 留待明年再到時
라 한다. 그 도사의 성명은 이붕(李鵬)이요, 호는 소요관(逍遙館), 또는 찬하도인(餐霞道人)이라 한다. 뜰에는 반이나 썩은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황제가 갑술년(甲戌年 건륭 19년) 거둥 때에 남겼다는 시(詩)와 그림은 바위 사이에 새겨져 있다.
[주D-001]오악(五嶽) : 태산ㆍ화산ㆍ형산ㆍ항산ㆍ숭산.
[주D-002]사독(四瀆) : 강(江)ㆍ하(河)ㆍ회(淮)ㆍ제(濟).
[주D-003]형차(荊釵)ㆍ포군(布裙) : 한(漢)의 양홍(梁鴻)의 아내. 맹광(孟光)의 고사에서 나온 말. 형차는 나무로 만든 머리꽂이.
[주D-004]마음대로 …… 오소 : 고시인 듯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거제(車制)
타는 수레는 태평차(太平車)라 한다. 바퀴 높이가 팔꿈치에 닿으며 바퀴마다 살이 서른 개인데, 대추나무로 둥글게 테를 메우고 쇳조각과 쇠못을 온 바퀴에 입혔다. 그 위에는 둥근 방을 만들어 세 사람이 들 만하다. 방에는 푸른 베 혹은 공단이나 우단으로 휘장을 치고 더러는 주렴을 드리워 은 단추로 여닫게 되었다. 좌우에는 파리(玻璃)를 붙여서 창을 내고, 앞에 널판을 가로 놓아서 마부가 앉게 되었으며, 뒤에도 역시 하인이 앉게 마련이다. 나귀 한 마리가 끌고 갈 수 있으나 먼 길을 가려면 말이나 노새 수를 더 늘린다.
짐을 싣는 것은 대차(大車)라 한다. 바퀴 높이가 태평차보다 조금 덜한 듯하며 바퀴 살은 입(廿) 자의 모양으로 되었고, 싣는 수량은 8백 근으로 정하여 말 두 필을 메우고, 8백 근이 넘을 경우에는 짐을 보아서 말을 늘린다. 짐 위에는 삿자리로 방을 꾸미되 마치 배 안같이 하여 그 속에서 자고 눕게 되어 있다. 대체로 말 여섯 필이 끄는데 수레 밑에 커다란 왕방울을 달고 말 목에도 조그만 방울 수백 개를 둘러서 그 댕그랑댕그랑 하는 소리로 밤을 경계한다. 태평차는 겉 바퀴로 돌며, 대차는 속 바퀴로 돈다. 그리고 쌍 바퀴가 똑같이 둥글므로 고루 돌아가고 빨리 달릴 수 있다. 멍에 밑에 매는 말은 제일 튼튼한 말이나 건실한 나귀를 사용하며, 수레 멍에를 쓰지 않고 조그만 나무 안장을 만들어 가죽끈이나 튼튼한 바로 멍에 머리에 얽어매어서 말을 달았다. 멍에 밑에 들지 않은 말들은 모두 쇠가죽끈으로 배띠를 하고 바를 매어서 끌게 되었다. 짐이 무거우면 바퀴채보다도 훨씬 더 밖으로 튀어 나오고 때로는 높이가 몇 길이나 되며, 끄는 말도 많으면 십여 필이나 된다. 말 모는 사람을 ‘칸처더[看車的]’라 부르며, 그는 짐 위에 덩실 높이 앉아서 손에는 긴 채찍을 쥐고 길이 두 발이나 되는 끈 두 개를 그 끝에 매어서, 그것을 휘둘러 때리되 그 중에 힘내지 않는 놈은 귀며 옆구리며 헤아리지 않고 때리고, 손에 익으면 더욱 잘 맞는다. 그 채찍질하는 소리가 우레처럼 요란스럽다.
독륜차(獨輪車)는 뒤에서 한 사람이 칫대를 잡고 수레를 밀도록 되었다. 한가운데쯤 바퀴를 달았는데 바퀴가 수레바탕 위로 반이나 솟았으며, 양쪽이 상자처럼 되어 싣는 물건이 꼭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바퀴 닿는 곳에는 북을 반쯤 자른 것같이 보이며, 바퀴를 가운데로 하고 짐은 사이를 두고 실어서 바퀴와 짐이 서로 닿지 않도록 하였다. 칫대 밑에 짧은 막대가 양쪽으로 드리워서, 갈 때는 칫대와 함께 들리고 멈출 때는 바퀴와 함께 멈추어서, 이것이 버팀나무가 되어 수레가 쓰러지지 않게 마련이다. 길가에서 떡ㆍ엿ㆍ능금ㆍ오이 등을 파는 장사들도 모두 이 독륜차를 이용하며, 또 밭둑 길에 거름 내기에 가장 편리하다. 언젠가 보니, 시골 여자 둘이 양쪽 상자에 타고 앉아서 각기 어린애 하나씩을 안고 가는 것도 있으려니와 물을 긷는 데는 한 쪽에 대여섯 통씩 싣는다. 짐이 무겁고 많으면 끈을 달아서 한 사람이 끌고, 때로는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마치 배를 끌 듯이 한다.
대개, 수레는 천리로 이룩되어서 땅 위로 가는 것이며, 땅 위를 다니는 배요, 움직일 수 있는 방이다. 나라의 쓰임에 수레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주례(周禮)》에 임금의 가멸함을 물었을 때 수레의 많고 적음으로써 대답했다 하니, 수레는 비단 싣고 타는 것뿐이 아님을 말함이다. 수레 중에도 융차(戎車)ㆍ역차(役車)ㆍ수차(水車)ㆍ포차(砲車) 등이 있어서 천백 가지의 제도가 있으므로 이제 창졸간에 이루 다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타는 수레, 싣는 수레는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어서 시급히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내 일찍이 담헌(湛軒) 홍덕보(洪德保), 참봉(叅奉) 이성재(李聖載)와 더불어 거제(車制)를 이야기할 제,
“수레의 제도는 무엇보다도 궤도를 똑같이 하여야 한다. 이 이른바 궤도를 똑같이 하여야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일까. 두 바퀴 사이에 일정한 본을 어기지 않음을 이름이다. 그리하면 수레가 천이고 만이고 간에 그 바퀴자리는 하나로 통일될 것이니, 이른바 거동궤(車同軌)는 곧 이를 두고 말함이다. 만일 두 바퀴 사이를 마음대로 넓히고 좁힌다면 길 가운데 바퀴 자리가 한 틀에 들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말한 일이 있었다. 이제 천 리 길을 오면서 날마다 수없이 많은 수레를 보았으나, 앞 수레와 뒷 수레가 언제나 한 자국을 도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쓰지 않고도 같이 되는 것을 일철(一轍)이라 하고, 뒤에서 앞을 가리켜 전철(前轍)이라 한다. 성 문턱 수레바퀴 자국이 움푹 패어서 홈통을 이루니 이는 이른바 ‘성문지궤(城門之軌 《맹자(孟子)에 나오는 구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전혀 수레가 없음은 아니나 그 바퀴가 온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 자국이 틀에 들지 않으니, 이는 수레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늘 하는 말에,
“우리나라는 길이 험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
하니, 이 무슨 말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쓰지 않으니까 길이 닦이지 않을 뿐이다. 만일 수레가 다니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이게 될 테니 어찌하여 길거리의 좁음과 산길의 험준함을 걱정하리오. 전(傳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배와 수레 이르는 곳,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
이라 하였으니, 이는 수레가 어떠한 먼 곳이라도 이를 수 있다고 하는 말이다.
중국에도 검각(劍閣) 아홉 굽이의 험한 잔도(棧道)와 태항(太行)과 양장(羊腸)처럼 위태한 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수레가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그리하여 관(關)ㆍ섬(陝)ㆍ천(川)ㆍ촉(蜀)ㆍ강(江)ㆍ절(淛)ㆍ민(閩)ㆍ광(廣) 등지와 같은 먼 곳에서도 큰 장사치들이나, 또는 온 가족을 이끌고 부임(赴任)하러 가는 벼슬아치들의 수레바퀴가 서로 잇대어서 저의 집 뜰 앞을 거니는 것이나 다름없이 다니고, 우렁차게 굉굉거리는 수레바퀴 소리가 대낮에도 늘 우레치듯 끊이지 않는다. 이제 이 마천(摩天)ㆍ청석(靑石)의 고개와 장항(獐項)ㆍ마전(馬轉)의 언덕들이 어찌 우리나라의 것보다 덜 위험하겠는가. 그 큰 바위에 막혀 험준한 것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도 목격(目擊)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수레를 폐하고 다니지 않음이 있던가. 이러므로 중국의 재산이 풍족할뿐더러 한 곳에 지체되지 않고 골고루 유통(流通)함은 모두 수레를 쓴 이익일 것이다. 이제 비근한 예를 든다면, 우리 사행이 모든 번거로운 폐단을 없애버리고 우리가 만든 수레에 우리가 올라 타고 바로 연경에 닿을 텐데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리하여 영남(嶺南) 어린이들은 새우젓을 모르고, 관동(關東) 백성들은 아가위를 절여서 장 대신 쓰고, 서북(西北) 사람들은 감과 감자(柑子)의 맛을 분간하지 못하며, 바닷가 사람들은 새우나 정어리를 거름으로 밭에 내건만 서울에서는 한 웅큼에 한 푼씩 하니 이렇게 귀함은 무슨 까닭일까. 이제 육진(六鎭)의 마포(麻布)와 관서(關西)의 명주(明紬), 양남(兩南 영남과 호남)의 딱종이와 해서(海西)의 솜ㆍ쇠, 내포(內浦 충청남도 서해안)의 생선ㆍ소금 등은 모두 인민들의 살림살이에서 어느 하나 없지 못할 물건들이며, 청산(靑山 충청북도에 있다)ㆍ보은(報恩)의 천 그루 대추와 황주(黃州 황해도에 있다)ㆍ봉산(鳳山)의 천 그루 배와 흥양(興陽 전남 고흥)ㆍ남해(南海)의 천 그루 귤(橘)ㆍ유자[柚], 임천(林川 충청남도에 있다)ㆍ한산(韓山)의 천 이랑 모시와 관동의 천 통 벌꿀 들은 모두 우리 일상생활에서 교역해 써야 할 것인데도, 이제 이곳에서 천한 물건이 저곳에서는 귀할뿐더러 그 이름만 알고 실지로 보지 못함은 어찌된 까닭일까. 그것은 오로지 멀리 나를 힘이 없기 때문이다. 사방이 겨우 몇 천 리밖에 안 되는 나라에 인민의 살림살이가 이다지 가난함은, 한 말로 표현한다면 수레가 국내(國內)에 다니지 못한 까닭이라 하겠다. 어떤 이가,
“그러면 수레는 어찌하여 다니지 못하는 거요.”
하고 묻는다면, 역시 한 마디 말로,
“이는 사대부(士大夫)들의 허물입니다.”
하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소에 글을 읽을 때에는,
“《주례》는 성인이 지으신 글이야.”
하고는, 또 윤인(輪人)이니, 여인(輿人)이니, 거인(車人)이니, 주인(輈人)이니 하고 떠들어대나, 끝내 그것을 만드는 기술이나 움직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도무지 연구하지 않으니, 이는 이른바 한갓 글만 읽을 뿐이니 참된 학문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아아, 슬프도다. 황제(黃帝)가 수레를 창조하였으므로 헌원씨(軒轅氏)라 불린 뒤에 백천 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 몇 성인의 심사(心思)ㆍ목력(目力)ㆍ수기(手技)가 마멸 되었고, 또 몇 사람의 수(倕)처럼 공교한 손을 거쳤으며, 또 상앙(商鞅)ㆍ이사(李斯) 같은 이들의 제도 통일을 가져왔으니, 이는 실로 저 현관(縣官)들의 학술에 비한다면 몇백 배나 나을 것이다. 그들의 정미로운 연구와 행하기 간편함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는 진실로 민생의 살림에 이익되고 나라 경영에 큰 그릇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날마다 눈에 나타나는 놀랍고 반가운 것들을 이 수레의 제도로 미루어 모든 일을 짐작할 수 있겠으며, 또한 어렴풋이나마 몇천 년 모든 성인의 고심(苦心)을 알 수 있겠다.
밭에 물을 대는 것으로 용미차(龍尾車)ㆍ용골차(龍骨車)ㆍ항승차(恒升車)ㆍ옥형차(玉衡車) 등이 있고, 불을 끄는 것으로서 홍흡(虹吸)ㆍ학음(鶴飮) 등의 제도가 있으며, 싸움에 쓰는 수레로는 포차(砲車)ㆍ충차(衝車)ㆍ화차(火車) 등이 있어서 모두 서양의 《기기도(奇器圖)》와 강희제(康熙帝)가 지은 경직도(耕織圖)에 실려 있고, 그 글로 설명된 것은 《천공개물(天工開物)》ㆍ《농정전서(農政全書 명 서광계(徐光啓)의 저)》에 있으니 이에 뜻있는 이가 잘 연구하여 그 제도를 본받는다면 우리나라 백성들의 극도에 달한 가난병도 얼마쯤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내가 본 불끄는 수레의 제도를 대략 적어서 우리나라에 돌아가 이를 전하려 한다.
북진묘(北鎭廟)에서 달밤에 신광녕(新廣寧)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성밖의 어떤 집이 저녁 나절에 불이 나서 이제 겨우 불길을 잡은 모양인데, 길 위에 수차(水車) 세 대가 있어서 방금 거두어 가려는 것을 내가 그들을 잠깐 멈추어 세우고 먼저 그 이름을 물었더니, 수총차(水銃車)라 한다. 그 제도를 살펴본즉 바퀴가 넷에 그 위에 큰 나무 구유가 놓였고, 구유 속에 커다란 구리그릇이 있으며, 구리그릇 속에는 구리통 둘을 두었는데, 구리통 사이에는 목이 을(乙) 자 모양으로 생긴 물총을 세웠다. 물총은 발이 둘이어서 양쪽 구리통에 통하였고, 양쪽 구리통은 짧은 다리가 있어서 밑에 구멍이 뚫렸으며, 구멍은 얇은 구리쇠쪽으로 문짝을 만들어서 물의 오르내림을 따라 여닫게 되었다. 그리고 두 구리통 주둥이에는 구리반으로 뚜껑을 해 달되 그 둘레가 구리통에 꼭 알맞게 되었다. 그 구리반 한복판에 쇠기둥을 세워서 나무를 건너지르고 그 나무가 구리반을 누르기도 하고 들기도 할 수 있게 되어서 구리반의 드나들고 오르내림이 그 나무에 달렸다.
그리고는 물을 구리동이 속에 붓고 몇이서 나무를 밟으면 구리반이 솟았다 내렸다 하여, 대체로 물을 빨아들이는 조화는 구리반에 있다. 구리반이 구리통 목에까지 솟으면 구리통 밑에 뚫린 구멍이 갑자기 열리면서 바깥 물을 빨아들이고, 이와 반대로 구리반이 구리통 속으로 떨어지면 그 밑구멍이 세차게 닫히어서 이에 구리통 속에 물이 가득 차서 쏟아질 곳이 없으므로, 물총 뿌리로부터 을(乙) 자로 생긴 물총의 목으로 내달아서 위로 치솟아 내뿜으니, 여남은 길이나 물발이 서고 가로는 3, 40보에 뻗는다.
그 제도가 생황(笙簧 관악기(管樂器)의 일종)과 비슷하고 물 긷는 이는 연방 나무 구유에 물을 들어부을 따름이다. 옆에 있는 두 물차는 그 제도가 이것과도 다르고 더욱 무슨 곡절이 있는 듯싶으나 창졸간에 상세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물을 빨아들이고 뿜는 묘리는 거의 같았다.
물건을 찧고 빻는 데는 큰 아륜(牙輪 치륜(齒輪))이 두 층으로 되어서, 쇠궁글 막대로 이를 꿰어 방 안에 세워두고 틀을 움직여서 돌리게 되었다. 아륜이라는 것은 마치 자명종(自鳴鍾)의 기계 속처럼 이가 들쭉날쭉하여 서로 맞물게 된 것이다. 방 안 네 구석에 두 층으로 맷돌반을 두고, 맷돌반의 가장자리 역시 들쭉날쭉하여 아륜의 이와 서로 맞물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륜이 한번 돌기만 하면 여덟 맷돌 반이 모두 다투어 돌며, 순식간에 밀가루가 눈처럼 쌓인다. 이 법은 시계의 속과 비슷하다. 길가의 민가들은 각기 맷돌 방아 하나와 나귀 한 마리씩이 있고 곡식 빻는 데는 항상 돌곰배를 쓰며, 더러는 나귀를 끌어서 방아공이를 대신하기도 한다.
가루 치는 법은 굳게 닫힌 방 안에 바퀴가 셋이 달린 요차(搖車)를 놓았는데, 그 바퀴는 앞이 두 개, 뒤가 한 개이다. 수레 위에 기둥 넷을 세우고 그 위에 두어 섬들이 큰 채를 두 층으로 간들거리게 놓았다. 윗채에 가루를 붓고, 아래채는 비워 두어서 윗채의 것을 받아서 더 보드랍게 갈리도록 되었다. 그리고 요차 앞에는 막대기 하나를 바로 질렀는데 그 막대기의 한쪽 끝은 수레를 잡아 달리고 또 한쪽 끝은 방 밖으로 뚫고 나가 있다. 밖에 기둥 하나를 세워서 그 막대기 끝을 잡아매고, 기둥 밑에는 땅을 파서 큰 널빤지를 놓아 막대기 밑이 이에 닿게 했다. 그 널빤지 밑 한가운데에 받침을 놓고, 그 양쪽을 뜨게 하여 마치 풀무를 다루듯 한다. 사람이 널빤지 위에 걸터앉아서 다리만 약간 움직이면 널빤지의 두 머리가 서로 오르내리며 널빤지 위의 기둥이 견디지 못하여 흔들린다. 그러면 그 기둥 끝에 가로지른 막대기가 세게 들이밀고 내밀고 하여 방 안의 수레가 나섰다 물러섰다 한다. 방은 네 벽에 열 층으로 시렁을 매어서 그릇을 그 위에 올려 놓아 날아오는 가루를 받게 되었다. 방 밖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발을 놀리면서 책도 읽고 글씨도 쓰고 손님과 수작도 하여 못하는 일이 없다. 다만 등 뒤에 약간 요란한 소리가 들릴 뿐 누가 그러는지 알지 못한다. 대체로 그 발 움직이는 공력은 아주 적으면서도 일은 많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여자들이 몇 말 가루를 한 번에 치려면 머리도 눈썹도 삽시에 하얗게 되고 팔이 나른해지니, 그 어느 것이 힘이 덜들고 편리한 것인가. 이와 비교해 보면 어떤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고치 켜는 소차(繅車)는 더욱 묘하니 마땅히 본받아야 한다. 이는 아까 곡식 빻는 것과 같이 커다란 아륜을 쓰되 소차의 양쪽 머리에 아륜이 달리고, 그 역시 들쭉날쭉한 이가 서로 맞물려서 쉴 새 없이 저절로 돌아간다. 소차는 별 것이 아니요, 곧 몇 아름드리가 되는 큰 자새이고, 수십 보 밖에서 고치를 삶되, 그 사이에는 여러 층 시렁을 매고 높은 곳에서부터 차츰 낮은 데로 기울게 하고, 시렁 머리마다 쇳조각을 세워서 구멍을 바늘귀처럼 가늘게 뚫고 그 구멍에 실을 꿴다. 틀이 움직이면 바퀴가 돌고, 바퀴가 돌면 자새가 따라 돌되 그 아륜이 서로 맞물려서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천천히 실을 뽑는다. 그 움직임이 거세지도 않고 몰리지도 않게 제대로 법도가 있으므로 실이 고르지 않거나 한데 얽히거나 하는 탈이 없는 것이다. 켠 실이 솥에서 나와 자새로 들기까지에 쇠구멍을 두루 지나서 털도 다듬어지고 가시랭이도 떨어져 버렸으며, 또 자새에 들기 전에 실몸이 알맞게 말라서 말쑥하고 매끄러우므로, 다시 재에 삭히지 않아도 곧 베틀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고치 켜는 법이란 다만 손으로 훑기만 할 뿐이지 수레를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놀림이 그 타고난 바탕 제대로의 성질에 맞지 않아서, 빠르고 더딘 것이 고르지 않다. 어쩌다 홀치고 섞갈리면 실과 고치가 성내는 듯 놀래는 듯 뛰어 내달려서 실켜는 널판 위에 휘몰리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고, 무거리가 나서 덩이가 지면 저절로 광택을 잃게 되며 실밥이 얽히어 붙으면 실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므로, 티를 뽑고 눈을 따려면 입과 손이 모두 피로하다. 이를 저 고치 켜는 수레와 비교하면, 그 우열이 또한 어떠한가. 나는 그들에게 고치가 여름을 나도 벌레가 생기지 않는 방법을 물었더니, 약간 볶으면(찌면) 나비도 나지 않고, 또 더운 구들에 말리면 나비도 나지 않고 벌레도 먹지 않으므로 겨울철이라도 켤 수 있다 한다.
길에서 날마다 상여(喪轝)를 만났는데, 그 제도는 한결같지 않으나 가장 거추장스럽게 보인다. 거의 두 칸 방만하고 오색 비단으로 휘장을 치고, 거기다 구름ㆍ꿩ㆍ참새 같은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렸으며, 당마루턱에는 혹은 은실을 땋아 늘이었다. 양쪽 대채의 길이는 거의 일곱여덟 발이나 되는데, 붉은 칠을 하고 누런 구리를 올려서 금빛으로 꾸몄다. 횡강목(橫杠木)은 앞뒤에 각기 다섯씩인데 길이는 역시 서너 발이나 되고 그 위에 짧은 막대기를 걸쳐서 양쪽을 어깨에 메게 되었다. 상여꾼은 적어도 수백 명이고, 명정(銘㫌)은 모두 붉은 비단에 금자(金字)로 썼다. 명정대는 세 길이나 되는데 검은 칠을 하고 금빛 나는 용을 그렸다. 깃대 밑에는 발을 달고, 거기에 역시 막대기 두 개를 가로 놓아서 반드시 아홉 사람이 멘다. 붉은 일산 한 쌍, 푸른 일산 한 쌍, 검은 일산 한 쌍, 수레 앙장 대여섯 쌍이 이에 따르고 그 다음에 저ㆍ퉁소ㆍ북ㆍ나팔 등 악대가 서고, 승려와 도사들이 각기 그 구색을 차리고 불경과 주문(呪文)을 외면서 그 뒤를 따른다. 중국의 모든 일이 간편함을 위주하여 하나도 헛됨이 없는데 이 상여만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물론 본받을 것이 못 된다.
[주D-001]이성재(李聖載) : 이광려(李匡呂). 참봉은 벼슬이요, 성재는 자.
[주D-002]거동궤(車同軌) : 《중용(中庸)》과 《좌전(左傳)》 소(疏)에 나오는 말.
[주D-003]육진(六鎭) : 두만강(豆滿江) 기슭에 있는 여섯 고을. 곧 종성(鍾城)ㆍ경원(慶源)ㆍ회령(會寧)ㆍ경흥(慶興)ㆍ온성(穩城)ㆍ부령(富寧).
[주D-004]윤인(輪人) …… 주인(輈人)이니 : 이 넷은 모두 《주례》 중에 나오는, 옛날 수레를 맡은 관리의 벼슬 이름.
[주D-005]글만 읽을 뿐 : 전국 때 장수 조괄(趙括)의 고사.
[주D-006]수(倕) : 중국 황제(黃帝) 때의 유명한 공장(工匠)의 이름.
[주D-007]상앙(商鞅) : 전국시대 정치가. 위인(衛人)으로서 형명(刑名)의 학으로 진 효공(秦孝公)을 도와 부국강병의 실적을 이룩하였다.
[주D-008]이사(李斯) : 전국시대 정치가. 진 시황(秦始皇)을 도와서 육국을 통일하였다.
[주D-009]홍흡(虹吸) : 굽은 관(管)으로 만들어서 액체(液體)를 이 그릇에서 다른 높은 그릇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한 기계.
[주D-010]학음(鶴飮) : 홍흡과 비슷한 기계일 것이나 자세한 제도는 알 수 없다.
[주D-011]기기도(奇器圖) : 곧 《기기도설(奇器圖說)》. 서양 사람 등옥함(鄧玉函)의 저. 전중(轉重)ㆍ취수(取水)ㆍ전마(轉磨) 등 39도(圖)에다 각기 설명을 붙였다.
[주D-012]천공개물(天工開物) : 명 송응성(宋應星)의 저. 중국의 천산(天産)과 인공(人工)에 관한 저서. 그 원본은 일본제국도서관(日本帝國圖書館)에 간직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희대(戲臺)
절이나 관(觀 도사가 깃들이는 건물)이나, 사당의 맞은편 문에는 반드시 희대(戲臺)가 하나씩 있다. 들보의 수가 모두 일곱 혹은 아홉이므로 드높고 깊숙하고 웅걸하여 보통 점방과는 비길 바가 아니다. 이렇게 깊고 넓지 않으면 만 명이나 되는 사람을 들일 수 없는 까닭이다. 등자(登子)며, 탁자며, 의자며, 평상이며 모든 앉을 자리가 적어도 천을 헤아리며 붉은 칠이 조촐하고도 사치롭다. 연로 천 리에 가끔 삿자리로 누(樓)ㆍ각(閣)ㆍ궁(宮)ㆍ전(殿)의 모양을 본떠서 높은 희대를 만들었는데, 그 구조의 공교로움이 기와집보다 더 낫게 보인다. 혹은 현판에 ‘중추경상(中秋慶賞)’이라 하였고, 또는 ‘중원가절(中元佳節)’이라 하였다. 소소한 시골 동네에 사당이 없는 곳이면 반드시 정월 보름과 8월 보름을 맞이하여 이러한 삿자리로 희대를 만들어 여러 가지 광대놀이를 연출한다. 언젠가 고가포(古家舖)를 지나다가 보니, 길에 수레가 끊이지 않고 수레마다 여인들 일곱여덟 명씩 탔는데 모두 진한 화장에 고운 나들이 차림새였다. 그런 차들이 몇백 대로 셀 수 있는데, 이는 모두 소흑산(小黑山)에 가서 광대놀이를 구경하고 해가 저물어서 돌아가는 시골 부인네들이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시사(市肆)
이번 천여 리 길에 지나온 시포(市舖)는 봉성ㆍ요동ㆍ성경ㆍ신민둔ㆍ소흑산ㆍ광녕 등지였는데, 그 크고 작고, 사치하고 검소한 구별이야 없지 않겠지만 그 중 성경이 가장 화려한 편이다. 그곳은 모두 비단 창에 수 놓은 무늬요, 길을 사이 두고 늘어선 술집들이 더욱 오색이 찬란하였다. 다만 이상한 것은 처마 밖에 불쑥 내민 아롱진 난간이 여름 장마를 겪고도 그 단청 빛이 퇴색하지 않은 것이었다. 봉성은 동쪽 변두리에 있는 다시 더 발전하지 못할 궁벽한 곳이지만, 그곳의 의자ㆍ탁자ㆍ주렴ㆍ휘장ㆍ담요 등의 모든 도구라든가 꽃과 풀까지도 모두 우리로서는 처음 본 것이었고, 뿐만 아니라 그 문패며 간판들이 서로 사치ㆍ화려함을 다투어 그 겉치레를 꾸미기 위하여 낭비가 천금에 그칠 뿐이 아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장사가 잘 되지 않을뿐더러 재신(財神)이 도와 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이 모신 재신은 흔히들 관공(關公)의 소상이었으며, 탁상에 향불을 피우고 아침저녁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는 품이 가묘(家廟)보다 더하다. 이로 미루어 보면 산해관 안의 습속을 가히 예측할 수 있겠다.
길을 가면서 물건을 파는 장사치들은 혹은 큰 소리로 싸구려를 부르기도 하나, 푸른 천을 파는 장수는 손에 든 작은 북을 흔들고, 머리를 깎는 이는 양철판을 두드리고, 기름 장수는 바리때를 친다. 또 더러는 쇠징ㆍ대비치개ㆍ목탁 따위를 갖고 다니는 자도 있다. 그들이 거리를 감돌며 두드리는 소리가 쉬지 않으니 집 안에서 작은 아이들이 달려나와 이를 부른다. 그들이 큰 소리로 외치지 않아도 두드리는 소리만 들으면 그 파는 물건을 알게 마련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점사(店舍)
점사는 뜰이 넓어서 적어도 수백 보는 된다. 그렇지 못하면 수레와 말과 사람들을 수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에 들어가서도 한 마장을 달리어야 전당(前堂)에 이르니, 그 넓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낭각 사이에 의자ㆍ탁자 40~50개가 놓였고 마굿간에는 길이가 두세 칸, 너비가 반 칸쯤 되는 돌구유가 있었는데 돌이 아니면 벽돌을 쌓아서 돌구유처럼 만들었다. 뜰 가운데 역시 나무통 수십 개를 나란히 두고는 양쪽 머리에 아귀진 나무로 받쳐 두었다. 기명은 오로지 그림 그린 자기를 쓰고, 백통ㆍ놋쇠ㆍ주석 등의 그릇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궁벽한 두메에 다 허물어져 가는 집에서라도 날로 쓰는 밥주발ㆍ접시 등속은 모두 울긋불긋 그림을 아로새긴 것들이다. 이는 반드시 사치를 숭상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릇 굽는 이들의 솜씨가 본시 그러해서 아무리 조잡한 것을 쓰려 해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깨어져도 버리지 않고 밖으로 쇠못을 쳐서 다시 쓴다. 다만 아무리 해도 내가 알지 못할 것은 못이 그릇 속에는 비어져 나오지 않고 꼭 끼어서 풀로 붙인 듯 감쪽같은 것이다. 높이 두 자나 되는 여러 가지 빛깔의 술잔과 오지병이며, 꽃과 잎을 꽂은 병과 두루미 같은 것은 어딜 가나 흔히들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우리나라 분원(分院)에서 구운 것은 저자에 들어올 수도 없을 것들이다. 아아, 그릇 굽는 법 한 가지가 좋지 못하여 온 나라의 모든 일과 모든 물건이 그 그릇과 같아서 마침내 한 나라의 풍속을 이루었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주D-001]분원(分院) : 조선시대 궁중이나 중앙 관아에서 쓰던 자기를 만든 사옹원(司饔院)의 분원이 있었으므로 이런 이름이 생겼다. 경기도 광주(廣州) 즉 한강 기슭 마현(麻峴)의 건너편에 있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교량(橋梁)
교량은 모두 무지개 다리여서 다리 밑이 성문과 같다. 큰 것은 돛단배가 마음대로 지나갈 수 있겠고, 작은 것도 거룻배는 지나다닐 수 있다. 돌 난간에는 흔히들 구름 무늬와 공하(蚣)ㆍ교리(蛟螭) 등을 새겼고, 나무 난간에도 역시 단청을 입혔다. 그리고 양쪽 다리목에는 모두 팔(八) 자로 된 담을 쌓아서 이를 보호하게 하였다. 지나온 것 중에서 만보교(萬寶橋)ㆍ화소교(火燒橋)ㆍ장원교(壯元橋)ㆍ마도교(磨刀橋)가 가장 큰 것들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16일 임진(壬辰)
개다.
정 진사ㆍ변 주부ㆍ내원과 이날도 서늘한 새벽에 먼저 떠나기로 약속했다. 신광녕에서 흥륭점(興隆店)까지 5리, 쌍하보(雙河堡) 7리, 장진보(壯鎭堡) 5리, 상흥점(常興店) 5리, 삼대자(三臺子) 3리, 여양역(閭陽驛) 15리, 모두 40리를 와서 점심을 먹었다. 이곳에서부터 등마루 없는 집이 시작된다. 여양역에서 두대자(頭臺子)까지 10리, 이대자(二臺子) 5리, 삼대자 5리, 사대자(四臺子) 5리, 왕삼포(王三舖) 7리, 십삼산(十三山) 8리 이날 80리를 가 십삼산에서 묵었다.
새벽에 신광녕을 떠날 때 지새는 달이 아직 땅 위에서 몇 자 아니 되는 곳에 걸려 있는데 서늘하고 완연하다. 계수나무 그림자가 성기고 옥토끼와 은두꺼비는 금방도 손으로 만져볼 수 있을 듯하고 펄펄 날리는 항아(姮娥 달 속에 산다는 선녀)의 흰 옷자락 속으로 비치는 살결이 얼룽얼룽하여, 나는 정군(鄭君)을 돌아보면서,
“이상도 하이,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돋는구려.”
하였더니, 정은 그것이 달인 줄을 깜박 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늘 새벽에 여관을 떠나므로 처음에 정말 동서남북을 가리기 어렵더군요”
하매, 모두들 허리를 잡았다. 조금 뒤에 달이 점점 기울어져 들 밖에 떨어지니 정도 역시 크게 웃었다. 아침 노을이 물결처럼 일어 먼 나무 끝에 가로 뻗치더니, 별안간 천만 가지 이상한 봉우리로 화하여 맑은 기운 탄탄한 형세가 마치 용이 서린 듯 봉이 춤추는 듯 천리 벌에 가없이 뻗쳤다. 나는 정을 돌아보면서,
“허, 장백산이 뽀얗게 눈에 드네그려.”
하니, 비단 정군만이 그러려니 할 뿐 아니라 모두들 기이하다고 외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러나 조금 뒤에 구름과 안개가 말끔히 걷히니, 해가 이미 서 발은 솟았는데 하늘에는 한 점 티끌도 없다. 별안간 먼 마을 나무숲 사이로 새어드는 빛이 마치 맑은 물이 하늘에 고여서 어린 듯, 연기도 아니며 안개도 아니요, 높지도 낫지도 않고 늘상 나무 사이를 감돌며 훤하니, 비치는 품이 마치 나무가 물 가운데 선 것 같고, 그 기운이 차츰 퍼지며 먼 하늘에 가로 비낀다. 흰 듯도 하고, 검은 듯도 한 것이 마치 큰 수정 거울과 같아서 오색이 찬란할뿐더러 또 한 가지 빛인 듯 기운인 듯 그 무엇이 있다. 비유 잘하는 이도 흔히들 강물빛 같다 하고 또는 호수(湖水)빛 같다 하나, 말끔하고도 어리어리한 것이 그 무엇인지는 실로 형언하기 어렵다. 그리고 동네와 집, 수레와 말들이 모두 그림자가 거꾸로 비친다. 태복은,
“이것이 곧 계문(薊門)의 연수(煙樹)올시다.”
하기에, 나는,
“계주(薊州)가 여기서 오히려 천 리인데 연수가 어찌 이곳에 있으랴.”
하니, 의주(義州) 상인 임경찬(林景贊)의 말이,
“계문이 비록 이곳에서 멀지만 이를 통칭 ‘계문연수(薊門煙樹)’라 한답니다. 날씨가 청명하고 바람이 잔잔한 때면 요동 천 리 벌에 늘상 이 기운이 있사오나, 계주에 들어가더라도 만일 바람이 불고 날씨가 음산하면 볼 수 없습니다.”
한다. 이는 통상 겨울 날씨가 고요하고 따뜻하면 산해관 안팎에서 날마다 볼 수 있다 한다. 마침 여양(閭陽)의 장날을 만났는데 온갖 물건이 모여들고 수레와 말이 거리에 가득 찼다. 아로새긴 듯한 초롱 속에 가지가지 새를 넣어서 그 이름이 매화조(梅花鳥)니, 요봉(幺鳳)이니, 오동조(梧桐鳥)니, 화미조(畵眉鳥)니 하여 형형색색이다. 새장수는 수레가 여섯, 우는 벌레를 실은 수레가 둘이어서 그 지저귀는 소리에 온 장판이 마치 깊은 산 속에나 들어온 듯싶다. 국차[菊茶] 한 잔, ‘불불[餑餑]’ 두 덩이를 사먹고, 거기서 조 역관(趙譯官) 명회(明會)를 만나서 어떤 술집에 들어가니, 마침 소주를 내린다기에 다른 집으로 옮기려 했더니 술집 아범이 성을 내고 조에게 달려들어 머리로 앙가슴을 받으며 꼼짝 못하게 한다. 조는 부득이 웃고 자리에 돌아와 돼지고기 볶음 한 쟁반, 달걀 지진 것 한 쟁반, 술 두 주발을 사서 배불리 먹고 자리를 떴다. 멀리 십삼산을 바라보니, 산맥이 뻗어온 것도 없고 끊어진 곳도 없이 별안간 큰 벌판 가운데에 열세 무더기의 돌메 봉우리가 날아와 앉은 듯하여, 그 보일락말락 기이하게 솟은 품이 마치 여름 하늘에 피어오르는 구름 봉우리 같다. 머리가 뽀얗게 센 늙은이 하나가 손에 조그만 낚싯대를 들고 그 끝에 고리를 달아서 참새 한 마리를 앉히고 색실로 발을 잡아 매어 길로 다니고 있다. 그 새짐승을 놀리는 양이 거의 다 이러하다. 더위에 지쳐서 졸리므로 말에서 내려 걷기로 했다. 7~8세쯤 되는 아이 하나가 머리에는 새빨간 실로 뜬 여름 모자를 쓰고 몸에는 고동색 운문사(雲紋紗) 두루마기를 입고 공단 까만 신을 신었는데, 걸음걸이가 아담하고 얼굴이 눈빛 같고 눈매가 그린 듯싶다. 내 짐짓 길을 막아 서니, 아이는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는 빛도 없이 앞에 와 공손히 절하고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다. 나는 황망히 안아 일으켰다. 그 뒤에 한 노인이 멀찌감치 따라오면서 웃음을 머금고,
“이 애는 이 늙은 몸의 손주놈이오. 영감께서 이 놈을 귀여워하시니, 원 무어라 고마운 말씀을 사뢰리까.”
하기에, 나는 그 아이에게,
“나이는 이제 몇 살이냐.”
하고 물었더니, 아이는 손가락을 꼽아서 보이면서,
“아홉 살입니다.”
한다. 나는 또 성명을 물었더니, 그는,
“제 성은 사(謝)입니다.”
하더니, 곧 신발 속에서 작은 쇠빗[鐵箆] 하나를 꺼내어 땅에다 효(孝)ㆍ수(壽)의 두 글자를 그으면서,
“효는 백행(百行)의 근본이요, 수는 오복(五福)의 으뜸이기에 저의 할아버지가 제게 축원하시기를 남의 아들이 되어서는 효도를 해야 한다 하시고, 또 저에게, 첫째는 수(壽)하라 하시고, ‘효’ㆍ‘수’ 두 글자를 합하여 아명(兒名)을 지어서 효수(孝壽)라 부르옵니다.”
하고 설명한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어,
“지금 무슨 글을 읽느냐.”
하고 물었더니, 효수는,
“두 책은 벌써 외고 지금은 학이편(學而篇 《논어(論語)》의 편명)을 읽는 중입니다.”
하기에, 내가,
“두 책이라니 무엇무엇인가?”
하였더니, 그는,
“《대학(大學)》ㆍ《중용(中庸)》입니다.”
한다. 나는,
“그러면 강의(講義)도 이미 끝났느냐?”
하니, 그는,
“두 글은 외우기만 하였고, 《논어(論語)》는 강의(講義)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하고, 이어서,
“선생께서는 성이 누구시오니까?”
하기에, 나는,
“내 성은 박(朴)이야.”
하고 답하였다. 효수는,
“《백가원(百家源)》에도 없는 것이옵니다.”
한다. 노인은 내가 그 손자를 귀여워함을 보고는, 얼굴에 천진스러운 웃음을 가득 머금고,
“고려 노야(老爺)께서는 부처님같이 어지신 양반입니다. 아마 슬하에는 많은 봉새 같은 아드님에 기린 같은 손주님을 두신 모양이어서, 그 생각을 하시고 남의 어린이를 귀여워하신 게죠.”
하기에, 나는,
“내 나이는 많이 먹었으나 아직 손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이내,
“당신께서는 연세가 얼마나 되셨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헛되이 쉰여덟 해를 지났소이다.”
한다. 나는 손에 들었던 부채를 아이에게 주니, 노인은 허리춤에서 쇠사슬 고리에 달아매어 찼던 비단 수건과 아울러 부시까지 겹쳐 주면서 못내 고마운 뜻을 표한다. 나는 노인에게,
“댁은 어디 계신지요.”
하고 물었더니, 사생(謝生)은
“여기에서 멀지 않은 왕삼포(王三舖)에서 살고 있습니다.”
한다. 나는,
“영손(令孫)이 매우 숙성하고 총명하여 옛날 왕(王)ㆍ사가(謝家)의 풍류에 부끄럽지 않겠소이다.”
하니, 사생은,
“조상(祖上) 때부터 내려오는 계통이 끊인 지 이미 오래이니 어찌 강좌(江左 강소성(江蘇省))의 풍류를 다시 바라오리까.”
한다. 길이 바빠서 드디어 서로 작별하였다. 아이가 공손히 읍하면서,
“영감, 행리(行吏) 보중(保重)하옵소서.”
한다. 나는 길을 가며 늘 그 아이의 절묘한 눈매와 동작이 눈에 삼삼하고 또 사생이 땅에 그린 몇 마디 말이 족히 서로 이야기할 만하였으나, 갈 길이 바빠서 그 집을 찾지 못하였음이 한스럽다.
[주D-001]대학(大學)ㆍ중용(中庸) : 이 두 책은 본시 《예기(禮記)》 중의 각기 한 편이었으나 주희(朱熹)가 뽑아 사서(四書)의 하나로 독립시켰다.
[주D-002]백가원(百家源) : 백가성(百家姓). 곧 여러 성씨를 모은 책으로, 중국 촌 글방에 흔히들 유행되는 책이다.
[주D-003]왕(王) …… 풍류 : 왕ㆍ사는 진(晉)의 왕검(王儉)과 사안(謝安). 풍류는 왕검이 일찍이, “강좌의 풍류는 다만 사안이 있을 뿐이야.” 하였으니, 이는 실은 자기를 비기어 하는 말.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17일 계사(癸巳)
개다.
아침에 십삼산을 떠나 독로포(禿老舖)까지 12리, 배로 대릉하(大陵河)를 건너기까지 14리, 대릉하점(大陵河店)이 4리, 이곳에서 묵었다. 이날 겨우 30리를 갔다.
대릉하는 그 근원이 장성 밖에서 시작하여, 구관대(九官臺)와 변문을 뚫고 광녕성을 지나 두산(斗山)을 나와서, 금주위(錦州衛) 지경에 들어와 점어당(點魚塘)에 이르러, 동으로 바다에 든다.
호행통관(護行通官) 쌍림(雙林)은 곧 조선수통관(朝鮮首通官) 오림포(烏林哺)의 아들이며, 집은 봉성에 있다. 말은 호행이라 하지만 저는 태평차를 타고 뒤를 따를 뿐이며, 그의 행동거지는 우리 사행의 관할할 바가 아니다. 그는 하인 넷을 거느렸는데, 하나는 성이 악(鄂)이라 하여 연로의 조석 공궤와 말 먹이는 일만을 맡아보고, 또 하나는 이(李)인데 매를 가지고 그저 길에서 꿩 사냥만 일삼고, 또 하나인 서(徐)는 제 말로 의주 부윤 서모(徐某)와는 서로 일가간이라 하며, 또 하나는 감(甘)인데 그들은 모두 조선 사람이고 나이도 열아홉 살이며 눈매가 아름다워서 쌍림의 길동무들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감(甘)이란 성은 없으니 이는 의심스러운 일이다. 내 책문에 든 지 10여 일이 되어도 쌍림의 꼴을 보지 못하더니, 통원보(通遠堡)의 시냇물을 건널 때 언덕에 올라가서, 내가,
“물살이 센데.”
하니, 이때 언덕 위에 깨끗하게 차린 되놈 하나가 우리 역관들과 함께 서 있다가 선뜻 조선말로,
“물살이 셉니다. 그런데도 용하게 건너셨습니다.”
한다. 그는 연산관에 이르러서 수역더러,
“아침나절 물 건널 때 얼굴이 웅위(雄偉)한 이가 거 누구요?”
하고 물으매, 수역은,
“정사 대감과 일가 형제 되시는 분이오. 글을 잘 아셔서 구경하러 오셨답니다.”
하니, 쌍림은,
“그러면 사점(四點)인가요?”
한다. 수역은,
“아니오, 정사 대감의 적친(嫡親) 삼종형제(三從兄弟)입죠.”
하니, 쌍림은,
“그럼, 이량위첸[伊兩羽泉]이구먼.”
한다. ‘이량위첸’이란 중국 말로 한냥 닷돈을 말한다. 한냥 닷돈은 곧 양반(兩半)이라, 우리나라에서 사족(士族)을 양반(兩班)이라 하니, 양반(兩半)과 양반(兩班)이 음이 같으므로, 쌍림이 ‘이량우첸[一兩五錢]’이라 하여 은어(隱語)를 쓴 것이다. 사점(四點)이란 서(庶) 자이니 우리나라 서얼(庶孼)을 두고 말함이다.
사행이 갈 때마다 사무를 맡은 역관이 공비(公費)로 은 4천 냥(四千兩)을 가져 가서 5백 냥은 호행장경(護行章京)에게 주고, 7백 냥은 호행통관에게 주어 차삯과 여관비에 쓰게 되었으나, 실상은 한 푼도 쓰는 일이 없이 상사와 부사의 주방(廚房)에서 돌려가면서 두 사람을 먹인다. 쌍림은 그 사람됨이 교활하고 조선말을 잘한다고 한다. 앞서 소황기보(小黃旗堡)에서 점심을 먹을 때 여러 비장ㆍ역관 들과 둘러앉아서 한담을 하노라니, 쌍림이 밖에서 들어왔다. 여러 사람이 모두 반겨 맞았다. 쌍림이 부사의 비장 이성제(李聖濟)와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또 내원을 향하여 말을 붙였다. 그것은 이 두 사람이 두 번째 길이어서 구면이기 때문이다. 내원이 쌍림더러,
“내, 영감께 섭섭한 일이 있소.”
하니, 쌍림이 웃으면서,
“무슨 섭섭한 일이오니까.”
한다. 내원은,
“상사또(上使道)께서는 비록 작은 나라의 사신이라 할지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정일품(正一品) 내대신(內大臣)이므로 황제께서도 각별히 예법으로 대우하시는 바이니, 영감은 대국 사람이지만 조선의 통관인즉 우리 사또에게 마땅히 체면을 지켜야 할 것이어늘, 두 사또께서 말을 갈아타실 때마다 길가에 가마를 멈추시는 데마다 영감들은 마땅히 수레를 멈춰 기다려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고 번번이 수레를 그냥 몰아서 지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이 무슨 도리요. 이래서 장경(章京)도 영감을 본받으니 더욱 한심한 일이오.”
하니, 쌍림은,
“그것은 당신이 모르는 거요. 대국의 체모가 당신네 나라와는 훨씬 다르오. 대국에서 칙사가 가면 당신네 나라 의정대신(議政大臣 내각의 세 대신)이 우리들과 평등하게 대접하여 말도 서로 공경하는 것인데, 이제 당신이 새로이 체모를 지어내어서 나더러 회피하란 말이오.”
하고 발끈 성을 낸다. 조 역관 학동(學東)이 내원에게 눈짓하여 더 다투지 말라 하였으나, 내원은 한층 소리를 높여서,
“그럼, 영감의 종놈은 어느 존전이라고 손에 매를 낀 채 의기가 양양하게 지나간단 말이오. 그건 해괴한 일이 아니오. 이제 다시금 그런 걸 보면 내 곧 곤장을 내릴 테니 영감은 괴이하게 여기지 마시오.”
하니, 쌍림은,
“그것은 아직 못 보았소. 만일 내가 보기만 하면 단매에 처치해 버리겠소.”
한다. 그는 조선말을 잘한다지만 가장 분명하지 못하고 다급하면 도로 북경말을 쓰곤 한다. 공연히 7백 냥 돈을 허비하니 실로 아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내가 이때 종이를 꼬아서 코를 쑤시니, 쌍림이 제 콧담배(코로 피우는 담배) 그릇을 끌러서,
“재채기를 하시려오.”
하나, 나는 그와 말을 건네기도 싫고 또 콧담배 그릇을 쓰는 법도 알지 못하므로 받지 않았다. 쌍림이 날 보고 몇 번이나 말을 걸고 싶어했으나 내가 더욱 도사리고 앉으니 그는 곧 일어나서 나가 버렸다. 그 뒤에 역관들의 말을 들은즉, 쌍림이 내가 저와 수작을 건네지 않으므로 무료히 일어나서 매우 노하였다 한다. 그리고 그 아비가 늘 아문(衙門)에 앉아 있으니 만일 쌍림의 노염을 사면 구경하러 드나들 때 반드시 말썽이 있을 것이고, 또 속담에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저번 쌍림을 냉대한 것은 재미없는 일이라고들 한다. 나 역시 마음에 그러려니 여겼다. 이윽고 사행은 먼저 떠나고, 나는 곤히 잠들었기 때문에 늦게 일어나서 마침 밥상을 물리고 행장을 차리는 차에 쌍림이 들어온다. 나는 웃는 얼굴로 맞이하여,
“영감, 한참 못 뵈었구려. 요즘 안녕들 하시오.”
하니, 쌍림이 좋아라고 자리에 앉으면서 삼등초(三登草)를 달라 하고 또 제집에 붙일 주련(柱聯)도 구하며, 또 내가 먹는 진짜 청심환과 단오(端午)에 기름 먹인 접부채를 달라 한다. 나는 일일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수레에 실은 짐이 도착되면 다 드리구말구.”
하고, 또,
“내 먼 길에 말을 타고 왔기에 퍽 고단하니 한 정거장만 당신과 한 수레에 타고 갔으면 좋겠소.”
하였더니, 그는 쾌히 승낙하면서,
“공자(公子)와 함께 타고 간다면 이 길이 퍽 제게 영광이겠소.”
하고, 곧 함께 떠날 즈음에 쌍림이 수레 왼편을 비워서 나를 앉히고 제가 스스로 몰아갔다. 쌍림은 또 장복을 불러서 오른편에 앉히고는 그더러,
“내가 조선말로 묻거든 너는 북경말로 대답하여라.”
한다. 둘이서 수작하는 것을 들으니 우스워서 허리를 잡을 지경이었다. 한편 쌍림의 조선말은 세 살 먹은 아이가 밥 달라는 말이 밤 달라는 듯싶고, 또 한편 장복의 중국 말은 반벙어리가 이름 부르는 듯 언제나 애(艾)하는 소리만 거듭한다. 혼자서 보기는 참 아까운 일이다. 쌍림의 우리말이 장복의 중국말보다 어림없이 못하여 말끝마다 존비(尊卑)를 가려 쓸 줄 모르고, 게다가 말 마디를 굴릴 줄 모른다. 그는 장복더러,
“너, 우리 아버지를 보았니.”
하니, 장복은
“칙사 나왔을 때 보았소이다. 대감(大監) 수염이 좋으시고 내가 보행으로 뒤를 따르며 권마성(勸馬聲)을 거푸 지르니, 대감이 눈에 웃음을 가득 담고 ‘네 목청이 좋아. 그치지 말고 불러라.’ 하시기에 나는 쉬지 않고 외쳤더니 대감이 연방 ‘좋다, 좋아.’ 하시고, 곽산(郭山)에 이르러선 손수 차담(茶啖)을 주시었다오.”
하매, 쌍림은,
“우리 아버지 눈이 흉악해 보이지.”
하니, 장복은 껄껄 웃으면서,
“마치 꿩 잡는 매 눈과 같더구먼요.”
하니, 쌍림은,
“옳아.”
하고, 또,
“너, 장가들었나.”
한즉, 장복은,
“집이 가난해서 아직 못 들었습니다.”
하매, 쌍림은 연신,
“하하, 불상(不祥)하이.”
한다. ‘불상’이란 우리말로 ‘아아, 안 됐군.’ 하고 차탄하는 따위의 말이다. 쌍림은 다시,
“의주 기생이 몇 명이나 되느냐?”
하매, 장복은,
“아마 30~40명 있죠.”
하니, 쌍림은,
“예쁜 것도 많겠지야.”
한다. 장복은,
“예쁘다 뿐이오. 양귀비(楊貴妃) 같은 것도 있고, 서시(西施) 같은 것도 있소. 이름이 유색(柳色)이라는 기생은 수줍은 꽃, 밝은 달 같은 자태가 있고, 또 춘운(春雲)이란 기생은 구름을 멈추고 남의 애를 끊을 만큼 창(唱)을 잘한다오.”
하니, 쌍림은 깔깔대면서,
“이런 기생이 있다면 내가 갔을 때에는 왜 현신(現身)하지 않았나?”
한다. 장복은,
“만일 한번만 보시면 대감님 따위는 혼이 그만 구만 리 장천(長天) 구름 밖으로 날아가 버리고, 손 속에 쥐었던 만 냥 돈이 저절로 사라지고는 저 압록강을 다시 건너오질 못하리다.”
하니, 쌍림은 손뼉치고 깔깔거리면서,
“내 다음 번 칙사를 따라 가거든 네가 가만히 데려오려무나.”
한다. 장복은 머리를 흔들면서,
“잘 안 될 거요. 남에게 들키면 목이 달아나게요.”
하고, 둘이 모두 한바탕 크게 웃는다. 이렇게 주고받고 하면서 30리를 갔다. 이는 대개 둘이 서로 피차의 말을 시험하려 한 것인데 장복은 겨우 책문에 들어온 뒤 길에서 주워 들은 데 불과하나, 쌍림이 평생 두고 배운 것보다 더 잘한다. 이로 보아 우리말보다 중국말이 쉬움을 알겠다. 수레는 삼면을 초록빛 전으로 휘장을 쳐서 걷어올렸고, 동서 양쪽에는 주렴을 드리우고 앞에는 공단으로 차일을 쳤다. 수레 안에는 이불이 놓였고, 한글로 쓴 ‘《유씨삼대록(劉氏三代錄)》’ 두어 책이 있다. 비단 언문(諺文) 글씨가 너절할 뿐 아니라 책장이 해어진 것이 있다. 내가 쌍림더러 읽으라 하였더니, 쌍림이 몸을 흔들면서 소리를 높여 읽었으나 전혀 말이 닿지 않고 뒤범벅으로 읽어 간다. 입 안에 가시가 돋힌 듯 입술이 얼어 붙은 듯 군소리를 수없이 내며 끙끙거린다. 내 역시 한참 들어도 멍하니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다. 그래서는 제가 늙어 죽도록 읽어도 아무 보람이 없을 것이다. 길에서 사행이 말을 갈아타는데 쌍림이 수레에서 뛰어 내려 점포 속으로 몸을 숨겼다가 사행이 떠난 뒤에 천천히 수레에 올랐다. 전날 내원이 그를 나무랐을 때 겉으로 버티기는 하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움츠러들었던 모양이다.
[주D-001]내대신(內大臣) : 황제의 친척으로 시위하는 관직. 조선에서는 이런 것이 없으나 정사 박명원(朴明源)이 부마(駙馬)이므로 청(淸)의 제도에 비겨서 말한 것.
[주D-002]삼등초(三登草) : 평안남도 삼등에서 나는 질이 좋은 담배.
[주D-003]양귀비(楊貴妃) : 당 현종(唐玄宗)이 사랑하던 미녀 양태진(楊太眞). 귀비는 봉호.
[주D-004]서시(西施) : 전국시대 월(越)의 미녀. 시는 그의 성이요, 서는 시가(施家)의 서편 동네에 살았기 때문이라 한다.
[주D-005]《유씨삼대록(劉氏三代錄)》 : 우리 고전 소설의 일종. 작자는 미상.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18일 갑오(甲午)
개다.
새벽에 대릉하점(大凌河店)을 떠나 사동비(四同碑)까지 12리, 쌍양점(雙陽店) 8리, 소릉하(小凌河) 10리, 소릉하교(小凌河橋) 2리, 송산보(松山堡) 18리, 모두 50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송산보에서 행산보(杏山堡)까지 18리, 십리하점(十里河店) 10리, 고교보(高橋堡) 8리, 모두 36리, 이날은 80리를 가서 고교보에서 묵었다.
사동비 근처에 이르니, 길가에 큰 비석 넷이 있는데 그 제도가 꼭 같으므로 지명을 사동비라 한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만력(萬曆) 15년(1587) 8월 29일에 왕성종(王盛宗 명말에 요동을 지키던 장수)을 요동전둔유격장군(遼東前屯遊擊將軍)으로 삼는다는 칙문(敕文)을 새겼고, 위에는 광운지보(廣運之寶)를 찍었는데 비문 가운데 노추(虜酋)라는 두 글자는 모두 지워 버렸다. 그 둘째는 만력 15년 11월 4일에 왕성종을 요동도지휘체통행사(遼東都指揮體統行事)로 삼아서 금주(金州) 지방을 지킨다는 칙문을 새긴 것이요, 그 셋째는 만력 20년(1592) 9월 3일에 왕평(王平 명말에 요동을 지키던 장수)으로 요동유격장군(遼東遊擊將軍)을 삼는다는 칙문을 새긴 것인데, 위에는 칙명지보(敕命之寶)를 찍었고, 그 넷째는 만력 22년(1594) 10월 10일에 왕평으로 유격장군금주통할(遊擊將軍錦州統轄)을 삼는다는 칙문을 새겼고, 위에는 광운지보(廣運之寶)를 찍었다. 왕평은 왕성종의 아들이 아니면 조카인 듯싶다. 그들이 노추를 잘 막았다 하여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칙명을 내려 이를 표창하고, 큰 돌을 갈아 칙문과 고신(告身 사령장(辭令狀))을 새겨서 세상 사람들에게 그의 갸륵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성종이 만일 요동에서 대대로 장수의 직책에 있었다면, 임진년에 왜놈들을 칠 때 참가하지 않았음은 어찌된 까닭일까.
전에 사행이 다닐 때 이곳에 이르면, 비장이 반드시 이 비석에다, ‘모일 모시에 관(關)에 나왔고 모일 모시에 이곳을 지난다.’고 써 놓기로 되어 있다. 먹이는 말이 곳곳마다 떼를 지어 한 곳에 천여 마리씩 몰리어 다니는데 모두 흰 빛깔이다.
배로 소릉하를 건넜다. 수레에 몇 천 바리의 쌀을 싣고 지나가는데 먼지가 하늘을 덮는다. 이는 해주(海州)에서 금주(錦州)로 실어들이는 것이다. 사나운 바람이 일기에 내가 먼저 말을 달려 사관에 들어가 한숨 자고 나니, 정사가 뒤이어 와서 말하기를,
“낙타 수백 마리가 철물(鐵物)을 싣고 금주로 가더군.”
한다. 나는 공교롭게 두 번이나 낙타를 보지 못한 셈이다. 강가에 민가 몇 백 호가 있던 것이 지난해 몽고의 침략을 입어서 모두 아내들을 잃고 몇 리 밖으로 옮겨갔다 한다. 이제 그 길가에 허물어진 담이 둘렸으나 네 벽만이 쓸쓸하게 서 있을 뿐, 강가 아래 위에 흰 장막을 치고 파수를 보고 있다. 대개 이 강은 몽고의 지경에서 50리밖에 되지 않은 곳으로 며칠 전에 몽고기병 수백 명이 이에 이르렀다가 수비가 있음을 알고 도망해 버렸다 한다. 송산(松山)에서부터 행산(杏山)ㆍ고교(高橋)를 거쳐 탑산(塔山)까지의 백여 리 사이에는 동리나 점포가 있기는 하나 가난하고 쓸쓸하여 그들은 조금도 생업에 안주할 의사가 없다. 아아, 이곳이 곧 옛날 숭정(崇禎) 경진(庚辰)ㆍ신사(辛巳) 연간(1640~41)에 피흘리던 마당이다. 이제 벌써 백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소생하는 기색이 뵈지 않으니, 그 당시 용과 범들의 싸움이 격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지금 황제가 엮은 전운시(全韻詩) 주(注)에,
“숭덕(崇德) 6년(1633) 8월에 명의 총병 홍승주(洪承疇)가 구원병 13만 명을 송산에 모으니, 태종(太宗)이 곧 군사를 거느리고 떠나려 할 때 마침 코피를 쏟았는데, 일이 시급하자 증세가 더욱 심하여 사흘 만에 겨우 그쳤다. 제왕(諸王)과 패륵(貝勒)들이 천천히 행군하기를 청했으나 태종은 싸움에 이기려면 행군을 빨리해야 한다 하고는, 빨리 달려서 엿새 만에 송산에 이르러 군사를 송산ㆍ행산 사이에 풀어서 한길을 가로 막았다. 이에 명의 총병 여덟 명이 전봉을 범하는 것을 모두 쳐 무찌르고 그들이 필가산(筆架山)에 쌓아둔 양식을 빼앗고, 해자를 파서 송산ㆍ행산의 길을 끊었다.
이날 밤 명의 여러 장수가 칠영(七營)의 보병을 거두어 와서 송산성(松山城) 가까이 진을 쳤다. 이에 태종이 여러 장수들에게 오늘 밤 들어 적병이 반드시 도망치리라 하고, 이내 호군(護軍) 오배(鼇拜) 등으로 사기(四旗)의 기병을 거느리고 전봉과 몽고 군사가 함께 나란히 진을 펴고 곧 바닷가에 닿게 하고, 또 몽고 고산액진(固山額眞) 고로극(固魯克 액진의 이름인 듯하다) 등에게 명하여 행산 길에 매복하였다가 적을 맞아서 치게 하고, 예군왕(睿郡王)을 시켜서 금주로 가서 탑산 한길에 이르러 가로질러 적을 치게 하였다.
이날 밤 초경(初更)에 명의 총병 오삼계(吳三桂 명말의 이름 높던 장수) 등이 바닷가로 도망치는 것을 서로 잇대어 추격하고, 또 파포해(巴布海 청 태조의 열한째 아들) 등을 시켜서 탑산 길을 끊고, 무영군왕(武英郡王) 아제격(阿濟格)에게 명하여 역시 탑산으로 가서 적을 쳐부수게 하며, 패자(貝子) 박락(博洛 청 태조의 손자)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상갈이채(桑噶爾寨)에 가서 적을 쳐부수게 하고, 고산액진 담태주(譚泰柱)를 시켜서 소능하에 가서 바닷가까지 이르러 적의 돌아가는 길을 끊게 하며, 매륵장경(梅勒章京) 다제리(多濟里 매륵장경의 성명)에게 명하여 패하여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게 하고, 또 고산액진 이배(伊拜) 등을 보내어 행산의 사방에서 명병(明兵)이 행산으로 도망하여 들어오는 것을 치게 하고, 몽고 고산액진 사격도(思格圖) 등을 보내어 그들의 도망하는 군사를 추격(追擊)하게 하며, 국구(國舅) 아십달이한(阿什達爾漢 청 태종의 장인인 듯하다) 등에게 명하여 행산의 병영을 가 보아서 만일 그곳이 좋지 못하거든 다른 곳을 골라서 옮기게 하며, 그 이튿날 예군왕과 무영군왕을 시켜 탑산의 사대(四臺)를 에워싸고 홍의포(紅衣礮 대포의 일종)로 쳐서 이겼다.
명의 총병 오삼계와 왕박(王樸 명말의 장수)이 행산으로 달아나니, 이날 태종은 군사를 송산으로 옮기고 해자를 파서 에우려 하였다. 이날 밤 총병 조변교(曹變蛟)가 진을 버리고 에워싼 것을 뚫고 나가려는 시도를 여러 차례 하므로 다시 내대신(內大臣) 석한(錫翰) 등과 사자부락(四子部落) 도이배(都爾拜 사자부락 군대의 장수)에게 명하여 각기 정병 2백 50명을 거느리어 고교보(高橋堡)와 상갈이보(桑噶爾堡)에 매복시키고는 태종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고교보 동쪽에 이르러 패륵 다탁(多鐸)으로 하여금 군사를 매복시켰다. 오삼계와 왕박이 패하여 고교보에 이르니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겨우 몸을 빼쳐 도망하였다. 이 싸움에서 명병 5만 3천 7백 명을 죽이고, 말 7천 4백 필, 낙타 60필, 갑옷과 투구 9천 3백 벌을 노획하였다. 행산의 남쪽으로부터 탑산에 이르기까지 바다로 뛰어들어가 죽은 자도 심히 많아서 시체가 마치 물오리와 따오기처럼 물에 둥둥 떴으나 청군은 잘못하여 다친 자가 겨우 여덟일 뿐, 그 나머지는 코피도 흘리지 않았다.”
한다. 아아, 슬프다. 이것이 이른바 송산ㆍ행산의 싸움이다. 각라(覺羅 청 태조 애친각라(愛親覺羅))는 관외(關外)의 이자성(李自成)이요, 이자성은 역시 관내(關內)의 각라였으니, 명이 비록 망하지 아니한들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때에 13만의 많은 군사로 각라의 수천 명에게 에워싸인 바 되어서 잠시 동안에 마치 마른 나무가 꺾이듯이, 썩은 새끼 끊기듯이 되어버리고, 홍승주와 오삼계같이 슬기 있고 용맹스러움이 천하에 대적할 자 없는 이들이건만 한번 각라를 만나자 곧 혼이 날아가고 넋이 흩어져 그의 거느린 13만의 군사가 마치 지푸라기나 물거품같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이 지경에 이르면 어찌할 수 없이 운수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겠다.
전에,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지은 《송계집(松溪集)》을 읽자니까,
“청병이 송산을 에워쌌을 때에 마침 효종 대왕(孝宗大王 이호(李淏)의 묘호)께옵서 세자의 몸으로 인질(人質)이 되어 청의 진중(陣中)에 계시더니 잠깐 다른 곳으로 막차(幕次)를 옮긴 사이에 영원총병(寧遠摠兵) 오삼계가 거느린 만 명의 기병이 포위를 뚫고 달려 나오니 애초에 막차이던 곳이 바로 그 길목이었다.”
하였으니, 이야말로 왕령(王靈)이 계신 곳에 천지의 신명이 힘을 합하여 도우신 밝은 증험이 아니겠는가.
밤에 고교보(高橋堡)에 묵었다. 이곳은 지난해 사행이 은(銀)을 잃은 곳이다. 지방관은 이로 말미암아 파직을 당하였고, 근처 점포에 애매하게 죽은 사람이 있었으므로 갑군(甲軍)이 밤이 새도록 야경을 돌면서 우리나라 사람을 도적과 다름 없이 엄하게 방비한다. 사처방 청지기의 말에 의하면,
“이곳 사람들은 조선 사람을 원수같이 보아서 간 곳마다 문을 닫고 맞이하지 않으며, ‘고려야, 고려는 그 신세진 사관 주인을 죽였다. 단 천 냥 돈이 어찌 4~5명의 목숨을 당할 것인가. 우리들 가운데도 불량한 이가 많지만 당신네들 일행 중엔들 어찌 좀도둑이 없을 건가.’ 하고는 그 은닉하는 교묘한 방법이 몽고와 다름없사옵니다.”
한다. 내가 이 사실을 역관에게 물으니, 그는,
“지난 병신년(丙申年 1776) 고부차(告訃次)로 사행이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이르러 공비은(公費銀) 1천 냥을 잃어버린 일이 있습니다. 사신들이 의논하되, ‘이는 나라의 돈이라 만일 쓴 곳이 없을 때에는 액수를 맞추어서 환납함이 곧 국법이거늘 이제 공연히 잃었으니 장차 돌아가 무슨 말로 사뢸 것인가. 잃었다 한들 누가 믿으며, 이를 물자 한들 누가 감당하겠는가?’ 하고 곧 지방관에게 그 사연을 알렸더니, 곧 중후소 참장(中後所叅將)에게 알리고, 중후소에서는 금주위(錦州衛)에, 금주에서는 산해관 수비(守備)에게 알리게 되어 며칠 사이에 이 일이 예부(禮部)에 알려져서 황제의 분부가 이내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이 지방에 관은(官銀)으로 잃은 돈을 물리고, 또 이 지방관이 항상 도적을 막기에 힘쓰지 아니하여 길손에게 원통한 변을 당하게 하였다 하여 파직으로 그 책임을 지우고, 사관의 주인과 그 가까운 이웃에 사는 용의자들을 잡아다가 닥달해서 그 중 너덧 사람이나 죽었습니다. 사행이 미처 심양에 이르기 전에 황제의 분부가 벌써 내렸으니, 그 거행의 신속함이 이러합니다. 그 뒤로부터 고교보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원수같이 봄이 괴이한 일은 아닐까 하옵니다.”
한다. 대개, 의주의 말몰이꾼들은 태반이 거의 불량한 축들이며, 오로지 연경에 드나드는 것으로 생계를 삼아서 해마다 연경 다니기를 저희들 뜰 앞처럼 여긴다. 그리고 의주부에서 그들에게 주는 것은 사람마다 백지 60권에 지나지 않으므로, 백여 명 말몰이꾼들이 길가며 훔치지 않으면 다녀올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넌 뒤로는 낯도 씻지 않고 벙거지도 쓰지 않아 머리털이 더부룩하여 먼지와 땀이 엉기고 비바람에 시달리어 그 남루한 옷과 벙거지 차림이 귀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꼴이 마치 도깨비처럼 우습게 보인다. 이 무리 중에는 열다섯 살 나는 아이가 있는데 벌써 이 길을 세 번이나 드나들었다는데 처음 구련성에 닿았을 때는 제법 말쑥하여 뵈던 것이 반 길도 못 가서 햇빛에 얼굴이 그슬리고 시꺼먼 먼지가 살에 녹슨 듯하여 다만 두 눈만 빠꼼하니 희게 보일 뿐 홑 고쟁이가 낡아서 엉덩이가 다 드러났다. 이 아이가 이러할 제야 다른 것들은 더욱 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은 전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도둑질하는 것을 보통으로 하고, 밤에 사관에 들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훔치고 만다. 그러므로 이를 막으려는 주인의 수단도 극도에 달하였다. 지난해 동지(冬至) 사행 때에 의주 상인 하나가 은화를 가만히 가지고 오다가 말몰이꾼에게 맞아 죽었는데, 빈 말 두 마리만 고삐를 놓아서 도로 강을 건너보냈으므로 말이 각기 그 집에 찾아 드는 것을 증거로 삼아서 마침내 법에 걸렸다 한다. 그 흉험함이 대체로 이와 같으니 이제 그 은을 잃음이 어찌 이놈들의 소행이 아니라 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사소한 일이지만 만일 병자년 호란(胡亂) 같은 일이 다시 있다 하면 용천(龍川)ㆍ철산(鐵山)의 이서는 우리 땅이 아닐 것이다. 변방을 지키는 자 역시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날 밤 바람이 심하여 날이 새도록 하늘을 뒤흔드는 듯하였다.
[주D-001]노추(虜酋) : 오랑캐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명이 청의 임금이나 장수를 부를 때 쓴 말.
[주D-002]홍승주(洪承疇) : 명(明)의 장수로서 청군과 싸우다가 항복하여 청에 공이 많았다. 그가 송산에서 청군에게 사로잡혔을 때, 명의 조정에서는 그가 순국한 줄로 알고 치제하였다.
[주D-003]오배(鼇拜) : 만인. 일찍부터 전공을 세워 의정대신(議政大臣)이 되고, 강희 초년에 선제의 고명(顧命)을 받아 정치에 참여했으나 전횡이 심하여 적몰(籍沒) 당하였다.
[주D-004]고산액진(固山額眞) : 청의 벼슬 이름. 고산장경(固山章京)이라고도 함. ‘고산’은 만주 말에서 아름다운 칭호이므로 그들의 벼슬 이름 위에 씌워서 불렀다.
[주D-005]예군왕(睿郡王) : 청 태조의 열넷째 아들. 세조를 받들고 관에 들어가 이자성(李自成)을 깨뜨리고 중원을 평정하였다.
[주D-006]아제격(阿濟格) : 청 태조의 열두째 아들. 무영군왕은 봉호.
[주D-007]패자(貝子) : 청의 벼슬 이름. 종실(宗室)이나 몽고 외번(外藩)에게 주었다. 패륵의 아래요, 진국공(鎭國公)의 위이다.
[주D-008]담태주(譚泰柱) : 만인. 명과 싸운 공으로 일등공(一等公)이 되었으나 나중에는 극형을 당하였다.
[주D-009]매륵장경(梅勒章京) : 팔기(八旗)의 부장(副將). 장경은 액진(額眞)이라고도 하였다.
[주D-010]이배(伊拜) : 만인. 홍승주를 송산에서 사로잡았다.
[주D-011]조변교(曹變蛟) : 명말의 장수. 홍승주를 따라 송산에서 싸우다가 붙잡혀서 죽었다.
[주D-012]다탁(多鐸) : 청 태조의 열다섯째 아들. 보정왕(輔政王).
[주D-013]이자성(李自成) : 명말의 유적(流賊)으로서 북경을 함락시켜 명을 망하게 했으나 오삼계가 끌어들인 청군에게 패사하였다.
[주D-014]인평대군(麟坪大君) : 인조(仁祖)의 셋째 아들 이요(李㴭)의 봉호. 병자호란이 끝난 뒤 세자(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볼모로 잡혀 갔다.
[주D-015]고부차(告訃次) : 국상을 알리는 사신. 이때는 영조(英祖)의 국상을 알리는 고부사(告訃使)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19일 을미(乙未)
개다.
새벽에 고교보를 떠나 탑산(塔山)까지 12리, 주사하(朱獅河) 5리, 조라산점(罩羅山店) 5리, 이대자(二臺子) 10리, 연산역(連山驛) 7리, 모두 32리를 가서 점심 먹었다. 또 연산역에서 오리하자(五里河子)까지 5리, 노화상대(老和尙臺) 5리, 쌍수포(雙樹舖) 5리, 간시령(乾柴嶺) 5리, 다붕암(茶棚菴) 5리, 영원위(寧遠衛) 5리, 모두 30리이다. 이날 62리를 가서 영원성 밖에서 묵었다.
어저께 벌써 부사ㆍ서장관과 새벽 일찍 탑산에 가서 해돋이를 구경하자고 약속하였으나, 모두 늦게 떠났으므로 탑산에 이르자 해가 세 발이나 높이 올랐다. 동남으로 큰 바다가 하늘에 닿은 즈음에, 만으로 헤일 만큼 많은 상선(商船)이 간밤의 바람에 쫓기어 들어와서 작은 섬에 의지하였다가 마침 일시에 돛을 달고 떠나는 것이 마치 물에 뜬 오리떼 같았다. 영녕사(永寧寺)는 숭정(崇禎) 연간에 조대수(祖大壽)가 처음 지은 절이라 한다. 절이나 관묘(關廟)는 요동에서 처음 그 웅장 화려함을 보았으므로 대략 기록한 바 있었으나, 그 뒤 길에서 수없이 본 것이 비록 대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제도는 대체로 같아서 이루 다 기록할 수도 없을뿐더러 역시 구경하기에도 지쳐서 나중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았다. 길가에 여남은 길이나 되는 묏봉우리가 있어 이름이 구혈대(嘔血臺)라 한다. 전하는 말에,
“청 태종이 이 봉우리에 올라서 영원성 안을 굽어보다가 명의 순무(巡撫) 원숭환(袁崇煥)에게 패한 바 되어서 피를 토하고 죽었으므로 이 이름이 생겼다.”
한다. 영원성 안 한길 가에 조가(祖家)의 패루(牌樓)가 마주 섰는데, 그 사이가 수백 보나 되며, 두 패루가 모두 삼문(三門)으로 되었고 기둥마다 앞에 몇 길 되는 돌사자를 앉혔다. 하나는 조대락(祖大樂 조대수의 형)의 패루요, 또 하나는 조대수의 패루이다. 높이 모두 예닐곱 길이나 되는데, 대수의 패루가 조금 낮은 편이다. 둘 다 옥결 같은 흰 돌로 층층이 쌓아 올려, 추녀ㆍ도리ㆍ들보ㆍ서까래며, 기와ㆍ처마ㆍ들창ㆍ기둥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한 토막도 쓰지 않았고, 대락의 패루는 오색 무늬가 있는 돌로 세웠다. 두 패루를 세운 솜씨와 그 아로새긴 공력은 거의 사람 힘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대락의 패루에는 삼대(三代)의 고증(誥贈), 곧 증조 조진(祖鎭)과 할아비 조인(祖仁), 아비 조승교(祖承敎)를 쓰고, 전면에는 원훈초석(元勳初錫)이요, 후면에는 등단준열(登壇峻烈)이며, 맨 위층에는 옥음(玉音)이라 썼고, 주련(柱聯)에는,
무덤이 처음 같아 새로운 경사가 네 대를 쌓였거니 / 松檟如初慶善培于四世
자손이 현달하여 영광이 천추에 빛나리라 / 琳琅有赫賁永譽于千秋
라 새겼고, 그 뒷면에는,
노래로 찬송하니 늠름한 모습은 간성의 중책이요 / 恒赳興歌國倚干城之重
임금이 괴오시니 갸륵한 공훈 금석에 새겼구나 / 絲綸錫寵朝隆銘鼎之褒
라고 새겼다. 대수의 패루에도 사대(四代)의 고증을 썼는데, 증조와 조부는 대락과 같고, 아버지는 조승훈(祖承訓)이다. 우리나라에서 만력 임진년(1592)에 왜란이 일어났을 때 승훈이 요동 부총병(副摠兵)으로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맨 먼저 구원하러 왔던 사람이다. 윗층에는 확청지열(廓淸之烈)이요, 아래층에는 사대원융(四代元戎)이라 썼으며, 그 앞뒤 주련이며 날짐승과 길짐승의 모양이나 싸움하는 그림을 새긴 것은 모두 양각(陽刻)이다. 주련의 글은 바빠서 적지 못했다. 조씨는 요계(遼薊)에서 대대로 이름난 장수 집안이다. 숭정 2년(1629) 일월에 청병이 북경을 쳐들어오매 이해 12월에 독수(督帥) 원숭환이 조대수ㆍ하가강(何可剛) 등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구원하여 지나는 곳마다 군대를 머물러서 지키니, 황제는 그가 이른다는 말을 듣고 심히 기뻐하여 그로 하여금 구원군을 모두 통솔하게 하였다. 청인이 이를 이간하려고 그 장수 고홍중(高鴻中)을 시켜 사로잡아 온 명의 태감(太監) 두 사람 앞에서 일부러 귓속말로,
“오늘 군사를 파함은 아마 원 순무(袁巡撫)와 비밀 약속이 있어서 한 일인가 보오. 아까 두 사람이 와서 한(汗)을 뵙고 이야기하다 한참 만에야 돌아갔다오.”
하였다. 양 태감(楊太監 양의 성을 가진 태감)이 잠든 체하고 그 말을 가만히 엿듣고 있다가 청이 짐짓 그를 놓아 보내자 이 일을 황제에게 일러 바쳤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마침내 원숭환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대수가 크게 놀라 하가강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동으로 달아나서 산해관을 헐고 나갔다. 그 뒤 금주ㆍ송산의 싸움에 조대락ㆍ조대성(祖大成)ㆍ조대명(祖大明 세 사람 모두 한 형제간임) 등이 모두 사로잡히고, 대수는 대릉하성(大凌河城)을 지키던 중 청군에게 에워싸였다가 양식이 다하여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이제 그들의 패루만 우뚝 서 있을 뿐, 농서(隴西)의 가성(家聲)은 벌써 헐리어서 부질없이 후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그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대수가 성 안에 있던 곳을 문방(文坊)이라 하고, 성 밖에 있던 곳을 무당(武堂)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딴 사람이 들어있다. 그리고 서쪽 몇 길 되는 담 안에 조그만 일각문이 서 있고, 그 문과 담의 제도가 패루의 기묘한 솜씨와 비슷하다. 담 안에 오히려 두어 칸 정사(精舍)가 남아 있어서 이 지방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대수가 한가할 때 글 읽던 곳이라 한다. 이날 밤에 천둥과 비가 새벽까지 멎지 않았다.
[주D-001]조대수(祖大壽) : 명의 장수로서 대릉하를 지키다가 실패하고, 면주(綿州)에서 청에게 항복하여 총병(摠兵)이 되었다.
[주D-002]원숭환(袁崇煥) : 명말의 대장, 병부 상서(兵部尙書)로서 요동 순무(遼東巡撫)로 공이 많았으나 청과 화친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주D-003]고증(誥贈) : 추증과 같다. 청의 제도에 5품관 이상은 죽은 조ㆍ부ㆍ모 처를 추봉했는데 이때 고(誥) 자를 붙였다. 생존한 이는 고봉(誥封)이라 한다.
[주D-004]하가강(何可剛) : 명의 장수로서 대릉하 싸움에 조대수가 청군에 항복하려는 것을 굳이 말리다가 피살되었다.
[주D-005]태감(太監) : 명의 벼슬 이름. 내부(內部) 모든 감(監)의 장관.
[주D-006]한(汗) : 청의 군장(君長)을 일컫는 말.
[주D-007]농서(隴西)의 가성(家聲) : 한(漢) 이광(李廣)이 농서의 명장으로 대대로 높은 명망이 일세를 울렸으나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20일 병신(丙申)
아침에 개었다가 저녁나절에 비가 내리다.
이날 새벽에 영원성을 떠나 청돈대(靑墩臺)까지 7리, 조장역(曹庄驛) 6리, 칠리파(七里坡) 7리, 오리교(五里橋) 5리, 사하소(沙河所) 5리, 모두 30리를 가서 점심 먹으니, 사하소는 곧 중우소(中右所)다. 낮 뒤에 찌는 듯한 더위가 비를 빚더니 겨우 간구대(乾溝臺) 3리를 와서 큰 비가 왔다. 비를 무릅쓰고 연대하(煙臺河) 5리, 반랍점(半拉店) 5리, 망하점(望河店) 2리, 곡척하(曲尺河) 5리, 삼리교(三里橋) 7리, 동관역(東關驛) 3리, 모두 30리이다. 이날 60리를 갔다. 청돈대는 해돋이를 구경하는 곳이다. 부사와 서장관이 닭 울 임시에 먼저 떠나서 해돋이를 구경할 예정으로 내게 하인을 보내어 같이 가기를 청했으나, 나는 푸근히 자야겠다 하고 늦게 떠났다. 대체로 해돋이를 구경함도 역시 운수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내 전에 동쪽 바다에 노닐 때 총석정(叢石亭)의 해돋이와 옹천(甕遷 통천군 남쪽)ㆍ석문(石門 통천군 바닷가)의 해돋이를 하나도 시원히 보지 못했다. 혹은 늦게 이르러 해가 벌써 바다를 떠났고, 혹은 밤새 자지 않고 일찍 나가 보면 구름과 안개에 가려서 흐리곤 하였다.
대개, 해뜰 하늘에 구름 한점 없으면 잘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이처럼 무미한 것이 없다. 이는 다만 빨간 구리 쟁반 한 덩이가 바다 속에서 나올 뿐 아무런 가관이 없는 것이다. 해는 임금의 기상이라, 요(堯)를 기리는 말에도,
바라볼 젠 구름이요 / 望之如雲
다가서니 해일러라 / 就之如日
하였으니, 그러므로 해가 돋기 전에는 반드시 많은 구름 기운이 그 변두리에 몰려들어, 마치 앞길을 인도하는 듯 뒤를 따르는 듯 의장(儀仗)을 갖추는 듯 천승(千乘)ㆍ만기(萬騎)가 임금을 모시고 옹위하여 깃발이 펄럭이고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연후에야 비로소 장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구름이 너무 많이 끼면 도리어 가물가물하고 가려져서 또한 볼 것이 없으려니, 대개 새벽 순음(純陰) 기운이 햇빛을 받아서, 이로 말미암아 바위 틈에 구름이 서리고 시냇가에 안개가 피어나서 서로 비치어 해가 돋을락 말락할 때에 그 기상이 원망스러운 듯 수심겨운 듯 해미가 끼어서 빛을 잃게 되는 것이다.
내 일찍이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가 읊은 시(詩)에,
나그네 밤중되자 서로들 외치는데 / 行旅夜半相呌譍
먼 마을 닭 울음소리 외로이 들리누나 / 遠雞其鳴鳴未應
먼 닭이 먼저 우니 그곳이 어디더뇨 / 遠雞先鳴是何處
내 마음속 그 소리는 파리처럼 가늘도다 / 只在意中微如蠅
이웃 개 짖던 것이 그마저 고요하구나 / 村裏一犬吠仍靜
고요에 잠긴 이 몸 마음속이 떨리네 / 靜極寒生心兢兢
이때에 또 한 소리 귓가에 울려 와서 / 是時有聲若耳鳴
더 자세히 들으니 또 한 소리 홰를 친다 / 纔欲審聽簷雞仍
예서 총석정이 가까워 십 리라니 / 此去叢石只十里
넓디넓은 바닷가에 해돋이를 보오리라 / 正臨滄溟觀日昇
하늘인양 물인양 혼돈하여 가이 없고 / 天水澒洞無兆眹
언덕 위에 물결 치니 벼락이 이는 듯이 / 洪濤打岸霹靂興
흑풍이 이는 곳에 온 바다를 뒤집는 듯 / 常疑黑風倒海來
멧부리째 뽑을 듯이 돌인들 온전하리 / 連根拔山萬石崩
고래 싸움 등 터지니 이게야 예사련만 / 無怪鯨鯤鬪出陸
별안간 바다 끓어 큰 붕새 날아든다 / 不虞海運値摶鵬
오래도록 이날 밤이 안 샐까 근심이라 / 但愁此夜久未曙
이제 더욱 혼돈한들 뉘라서 분간할꼬 / 從今混沌誰復徵
이곳에 신령 있어 삼엄한 경계 펴니 / 無乃玄冥劇用武
땅 깊이 문이 닫혀 서산에 얼음 어네 / 九幽早閉虞淵氷
저 하늘 한 덩이가 뒤집혀 도는 듯이 / 恐是乾軸旋斡久
서북이 기울고 지구가 휘둘리네 / 遂傾西北隳環絙
세 발 까마귀 날기도 빨리 하네 / 三足之烏太迅飛
뉘라서 그 발 하나를 놋줄에 달아맬까 / 誰呪一足繫之繩
해약(바다 귀신)의 옷과 띠에 검은 빛이 듣는 듯 / 海若衣帶玄滴滴
수비(바다의 여신)의 쪽질머리 차갑기 짝이 없네 / 水妃鬢鬟寒凌凌
큰 고기 설렁이며 용마처럼 달려올 제 / 巨魚放蕩行如馬
붉은 갈기 푸른 등성이 어찌 그리 터벅한고 / 紅鬐翠鬣何鬅鬠
하늘이 만물 낼 제 뉘라서 참간했나 / 天造草昧誰叅看
미친 듯이 고함 치며 등불 켜고 보련다 / 大呌發狂欲點燈
창날 같은 혜성 꼬리 불살을 드리운 듯 / 攙搶擁彗火垂角
나무 위에 부엉이는 그 울음이 얄미워라 / 禿樹啼鶹尤可憎
잠깐 만에 바다 위에 작은 멍울 생긴 듯이 / 斯須水面若小癤
용의 발톱 그릇 닿아 독이 나서 아픈 듯이 / 誤觸龍爪毒可疼
그 빛깔 점점 커져 만 리를 뻗치누나 / 其色漸大通萬里
물결 위 붉은 무늬 꿩 가슴 모습일레 / 波上邃暈如雉膺
아득한 이 천지가 이제야 경계 생겨 / 天地茫茫始有界
붉은 빛 선 하나가 나누어 두 층 되네 / 以朱畵一爲二層
어둠 세계 깨어나서 온누리가 물든 듯이 / 梅澀新醒大染局
만상에 빛이 스며 비단 무늬 이루었네 / 千純濕色縠與綾
산호수 찍어 내니 검은 숯을 구우련가 / 作炭誰伐珊瑚樹
동녘에 빛 오르자 찌는 듯 뜨거워라 / 繼以扶桑益熾蒸
염제는 풀무 불어 입이 응당 비뚤겠고 / 炎帝呵噓口應喎
축융이 부채 부쳐 오른팔이 피로하리 / 祝融揮扇疲右肱
새우 수염 길다 한들 불사르긴 가장 쉽고 / 鰕鬚最長最易爇
달팽이 집 굳다 한들 저절로 익어지네 / 蠣房逾固逾自脀
얇은 구름 조각 안개 동으로 모여들어 / 寸雲片霧盡東輳
찬란한 온갖 상서 제각기 나타내네 / 呈祥獻瑞各效能
옥황상제 뵙기 전에 갖옷을 던져 두고 / 紫宸未朝方委裘
도끼 그린 병풍 치고 잠자코 비껴 앉아 / 陳扆設黼仍虛凭
조각달이 가늘건만 계명성과 빛을 새워 / 纖月猶賓太白前
등ㆍ설의 나라일망정 장단을 다투도다 / 頗能爭長薛與滕
붉은 기운 점점 엷어 오색이 찬란쿠나 / 赤氣漸淡方五色
머나먼 곳 물결 머리 그 먼저 맑아지니 / 遠處波頭先自澄
바다 위 온갖 괴물 어딘지 도망치고 / 海上百怪皆遁藏
희화(태양을 몰고 가는 귀신)만 홀로 수레를 타는구나 / 獨留羲和將驂乘
둥글둥글 저 얼굴이 육만하고 사천 년에 / 圓來六萬四千年
오늘 아침 변하더니 네모도 나는구나 / 今朝改規或四楞
만 길이나 깊은 속에 뉘라서 떠올릴지 / 萬丈海深誰汲引
하늘에도 섬돌 있어 오르게 되었구려 / 始信天有階可陞
등림의 익은 과실 한 낱이 붉어 있어 / 鄧林秋實丹一顆
해 아드님 붉은 공이 꺼지고 반만 올라 / 東公綵毬蹙半登
과보(해와 경주하던 선인(仙人))도 뒤에 와서 쉬지 않고 헐떡이고 / 夸父殿來喘不定
여섯 용이 앞을 서서 자랑하기 그지없네 / 六龍前導頗誇矜
하늘 가이 어두워져 얼굴빛을 찌푸린다 / 天際黯慘忽顰蹙
햇바퀴를 힘껏 밀어 기운이 배가 솟네 / 努力推轂氣欲增
길기가 항아리라 바퀴처럼 못 궁글어 / 團未如輪長如瓮
솟았다 잠겼다 철석 소리 들리는 듯 / 出沒若聞聲砯砯
어제와 같이 환하게 만물을 보려면 / 萬物咸覩如昨日
뉘라서 두 손으로 한 번 들어 뛰올릴꼬 / 有誰雙擎一躍騰
라 하였다. 대개 해돋는 광경은 천변만화하여 사람마다 보는 바가 같지 않을뿐더러 반드시 바다에서 구경할 것만도 아니다. 내가 요동 벌에서 날마다 해돋이를 보았는데 하늘이 개서 구름 없으면 햇덩이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열흘을 두고 보아도 날마다 같지 않다. 부사와 서장관은 오늘도 역시 구름이 가려서 보지 못하였다 한다.
오후에 더위가 심하더니 소낙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우장옷이 찌는 듯하고 가슴이 그득한 것이 더위를 먹은 듯싶다. 잠자리에 들 때 큰 마늘을 갈아 소주에 타서 마셨더니, 그제야 배가 편하여 온전히 잘 수 있었다. 밤새 비가 멎지 않았다.
[주D-001]총석정(叢石亭) : 관동 팔경의 하나. 강원도 통천(通川)에 있다.
[주D-002]바라볼 …… 해일러라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나왔다.
[주D-003]세 발 까마귀 : 태양 속에 까마귀가 깃들었다는 전설. 삼족오(三足烏).
[주D-004]등ㆍ설 : 전국 때 두 개의 작은 나라. 《맹자(孟子)》에서 나온 말.
[주D-005]등림(鄧林) : 곧 도림(桃林)인데, 중국의 전설에 과보(夸父)라는 선인(仙人)이 해를 쫓아 가다가 목이 타서 죽을 때 지팡이를 던지매 등림이 이룩되었다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21일 정유(丁酉)
비오다 개다 하다.
강물에 막혀서 동관역(東關驛)에 머물렀다. 들으니 옆 사관에는 등주(登州)에서 온 이 선생(李先生)이란 자가 있어서 점을 잘 치고, 또 사람을 시켜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자 한다 하기에 식후에 찾아갔다. 그의 점치는 법은 태을수(太乙數)를 본다 한다. 나는 그에게,
“이게 자미두수(紫微斗數)가 아니오.”
하고 물었더니, 이생(李生)은,
“이른바 ‘자미(紫微)’란 소수(小數)에 불과하오나, 이 태을(太乙)은 곧 태을의 일성(一星)이 자미궁(紫微宮 옥황이 살고 있는 궁전)에 있어서 천일생수(天一生水)에 속하므로 ‘태을’이라 하오. 그리하여 을(乙)이란 곧 일(一)이요, 수(水)는 조화의 근본이며, 육임(六壬)은 곧 물이요, 둔갑(遁甲) 역시 태을이라, 이는 《오월춘추(吳越春秋)》 같은 책에 명험(明驗)이 많이 나타나 있고, 육십사괘(六十四卦 《역경(易經)》에 실린 네 개의 괘)가 도시 이에 자나지 못하는 거요. 그러므로 장수(將帥)가 된 자로서 이 육임과 둔갑(遁甲)의 법을 모르면 기변(奇變)을 알지 못하는 법이오.”
한다. 내 본시 성미가 관상(觀相)이나 사주(四柱 생년ㆍ월ㆍ일ㆍ시) 같은 걸 좋아하지 않으므로 평생에 그 법을 알지 못하고, 또 그가 말한 육임ㆍ둔갑이라는 것이 몹시 허망한 것이므로 사주를 내어 주지 않았다. 보아하니 그 자 역시 그의 술수를 과장하여 많은 복채를 낚으려다가 내 기색이 매우 냉담함을 살피고 다시 말하지 않았다. 방 맞은편에 한 노인이 안경을 쓰고 앉아서 글을 베끼고 있기에, 그 앞으로 다가서서 베끼는 것을 본즉, 모두 근세의 시화(詩話)이다. 노인이 안경을 늦추고 붓을 멈추면서,
“손님이 멀리 오셨으니 길에서 해랑(奚囊)이 필수 풍부하시리니 아름다운 글귀 두어 구를 남겨 주시지요.”
한다. 그 베끼는 글씨는 비록 옹졸하나 시화에는 제법 묘한 것이 더러 있고, 노인 역시 생김새가 밝고 아담하고 곁에 놓인 물건들도 정쇄하기에 구들에 들어앉아서 서로 성명을 대니, 노인 역시 등주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성은 축(祝)인데 이름은 잊어버렸다. 그가 우리나라 여자의 비녀를 지르는 법과 의복 제도를 묻기에, 나는,
“모두 중국 상고 시대의 것을 본받았습니다.”
하니, 축은,
“좋아요, 좋소이다.”
한다. 나는 그에게,
“그럼, 귀향(貴鄕)의 여복은 어떠하오니까.”
한즉, 축은,
“대략 같습니다. 풍습이, 여자가 시집갈 때면 쪽지만 하고 비녀는 꽂지 않으며, 빈부를 가릴 것 없이 평민(平民)의 부녀는 관(冠)을 쓰지 않고, 다만 명부(命婦)만이 관을 쓰는데, 제각기 남편의 직품(職品)에 따라서 잠이나 머리꽂이 역시 모자의 제도와 같이 층하가 있으며, 쌍봉차(雙鳳釵)가 제일 고귀하되, 그 중에도 비봉(飛鳳)ㆍ입봉(立鳳)ㆍ좌봉(坐鳳)ㆍ즙봉(戢鳳) 등의 구별이 있고, 비취잠(翡翠簪)에도 모두 품직의 차이가 있으며, 처녀는 긴 바지저고리를 입다가 시집가면 적삼에다 큰 소매 달린 긴 치마를 입고 띠를 두릅니다.”
한다. 나는,
“등주가 여기서 얼마나 되며, 무슨 일로 이곳에 와 계시오.”
하니, 축은,
“등주는 옛날 제(齊)의 지경으로 이른바 바다를 등진 나라라 하는 곳입니다. 육로로는 북경까지 1천 5백 리지만 우리들은 배를 타고 면화(綿花)를 사러 금주(金州)에 가다 이곳에 지체하고 있습니다.”
한다. 그 베끼는 글 중에 다음과 같이 적힌 것이 있다.
나홍선(羅洪先 양명학파(陽明學派)의 대가)은 길수(吉水) 사람인데, 명(明)의 가정(嘉靖) 기축년(1529) 과거에 장원(壯元)했다.
주연유(周延儒)는 직례(直隷) 사람인데 만력(萬曆) 계축년(1613) 과거에 장원했다.
위조덕(魏藻德)은 통주(通州) 사람인데 숭정(崇禎) 경진년(1640) 과거에 장원했다.
그 중 연유는 명의 왕실을 크게 무너뜨렸고, 조덕은 적병에게 항복하였으나 죽음을 당했고, 나홍선은 문묘에 종사(從祀)되었으나 그는 20년 동안 성인의 도(道)를 배운 힘이 마음속에 겨우 ‘장원(壯元)’ 두 글자를 잊어버렸을 정도이다.
또 근세의 유림(儒林)들을 열록(列錄)하였다.
육가서(陸稼書) 선생의 시호는 청헌(淸獻)이니,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탕형현(湯荊峴) 선생의 휘는 빈(斌)이요, 시호는 문정(文正)이요, 자는 공백(孔伯)이며, 호는 잠암(潛菴)이니, 문묘에 종사하였다.
이용촌(李榕村 용촌은 호(號)) 선생 광지(光地) 운운(云云).
위상추(魏象樞 청초의 직신(直臣), 자는 환극(環極))는 모두들 큰 선비라 일컫는다.
서섬포(徐蟾圃 청초의 학자. 섬포는 호) 건학(乾學) 운운(云云).
그리고 축 노인(祝老人)은 이야기를 멈추고 다시 글 베끼기에 바빴다. 그 옆에 다섯 권 책이 있어 고인의 생년ㆍ월ㆍ일ㆍ시를 적었는데 하우씨(夏禹氏)ㆍ항우(項羽)ㆍ장량(張良)ㆍ영포(英布 한의 명장)ㆍ관성(關聖 관우(關羽)) 등의 사주가 모두 적혀 있다.
내가 종이 몇 쪽을 빌려서 한 벼루에 대고 대강 초하는데 이때에 점쟁이 이(李)는 방에 있지 않았더니, 내 겨우 백 명 남짓 베꼈을 때 그가 밖에서 들어와서 보고는 크게 노하여 이를 빼앗아 찢으면서,
“천기(天機)를 누설하면 아니되어.”
하기에, 나는 한 번 껄껄 웃고 일어나 사관으로 돌아왔다. 손에는 오히려 찢은 나머지 종이쪽이 있다.
왕서공(王舒公 진 명제(晉明帝)의 명신)은 신유 11월 1일 진시(辰時)에 나다.
부정공(富鄭公 부필(富弼), 정공은 봉호)은 갑진 정월 20일 사시(巳時)에 나다.
소자용(蘇子容)은 경신 2월 22일 사시에 나다.
왕정중(王正仲 중(仲)은 중(中)인 듯, 명말의 절신(節臣))은 계해 정월 11일 신시(申時)에 나다.
한장민(韓莊敏)은 기미 7월 9일 인시(寅時)에 나다.
채경(蔡京 송(宋)의 정치가)은 정해년 임인월 임진일 신해시에 나다.
증포(曾布 송대 증공(曾鞏)의 아우 채경에게 밀려났다)는 을해년 정해월 신해일 기해시에 나다.
그 중 한장민ㆍ왕정중은 어느 때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이 모두 귀인임은 짐작할 수 있겠다. 이른바 ‘천기 누설’이란 말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오후에 비가 잠깐 개기에 심심하여 한 상점에 들어갔다. 뜰 안에는 반죽(斑竹)으로 난간을 두르고, 도미(茶蘼 장미과에 속한 식물)로 짠 시렁 아래에 한 길 되는 태호석(太湖石)이 서 있다.
돌 빛은 파랗고 뒤에는 길 넘는 파초(芭蕉)가 심어져 있어서 비온 뒤의 빛깔이 더욱 산뜻해 보인다. 난간 가에 다만 사람 하나가 걸터앉아 있고, 책상 위에 놓인 붓과 벼루가 다 품질이 좋은 것들이다. 내가 그 자리에 들어 앉아 글을 써서 성명을 물었더니, 그는 손을 흔들며 대답하지 않고 곧 일어나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내 생각에 그는 아마 주인이 아닌가보다 하였으나 태호석을 구경하느라고 잠깐 지체하였더니, 그 사람이 한 청년을 데리고 웃으며 들어온다.
청년이 내게 읍하여 앉히고 바삐 종이 한 쪽을 내어 만주 글자를 쓰기에, 나는,
“그건 모르오.”
한즉, 둘이 다 웃는다. 아마 주인이 글을 한 글자도 모르므로 나가서 맞은편 점포 청년을 데리고 온 모양이다.
그 청년은 비록 만주 글은 잘 아는 듯하나 한자(漢子)는 모르므로, 마침내 서로 말로 두어 마디 수작(酬酌)하였으나 피차에 얼버무려 넘기니, 이야말로 이른바 귀머거리 아닌 귀머거리요, 장님 아닌 장님이요, 벙어리 아닌 벙어리 꼴이다.
세 사람이 정좌(鼎坐)한즉 천하에 더할 나위 없는 병신들이다. 다만 서로 웃음으로 껄껄거리고 지나가는 판이다. 아까 그 청년이 만자(滿字)를 쓸 때 주인은 옆에서,
“동무가 먼 곳에서 찾아 오니 어찌 기쁘지 않겠소.”
하기에, 나는,
“나는 만주 글을 모르오.”
하니, 청년은,
“배운 것을 때로 복습하면 어찌 즐겁지 않겠소.”
한다. 나는,
“그대들이 논어를 이처럼 잘 외면서 어찌 글자를 모르나.”
하니, 주인은,
“남이 나를 몰라주더라도 노여워하는 뜻을 품지 않는다면 어찌 군자(君子)가 아니겠소이까.”
하기에, 나는 시험삼아서 그들이 외운 석 장(章)을 써 보인즉, 그들은 모두 눈이 둥그레지며 들여다볼 뿐, 멍하니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는 모양이다. 이윽고 소나기가 퍼부어서 옆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하기에 좋으나, 둘이 다 글을 모르고 나 역시 북경 말에 서툴러서 어쩌는 수 없다.
지척(咫尺) 사이에 비에 막혔으므로 더욱 마음이 갑갑하고 무료(無聊)하기 짝이 없다. 청년이 일어나 나가더니 조금 뒤에 그 비를 무릅쓰고 손에 능금 한 바구니, 달걀 지진 것 한 쟁반, 수란(水卵) 한 자배기를 들고 왔다. 그 자배기는 둘레가 칠 위(七圍 다섯 치)나 되고, 두께는 한 치, 높이는 서너 치 되는데 푸른 유리를 올리고 두 볼엔 도철(饕餮)의 무늬를 새겼으며, 입에는 큰 고리를 물렸는데 세숫대야로 쓰기에 알맞을 것 같으나 무거워서 멀리 가져 갈 수는 없게 생겼다.
그 값을 물으니 1초(鈔)라 한다. 1초는 1백 63푼이니 은(銀)으로 치면 겨우 서 돈에 지나지 않는다. 상삼(象三)의 말이,
“이게, 북경에선 두 돈밖에 주지 않으나 몹시 무거워서 옮겨가기 어렵습니다. 만일 우리나라에 가져 가면 희귀한 보배일 줄 뻔히 알면서도 어찌 할 수 없습니다.”
한다. 저녁 때 비가 쾌히 개기에 또 한 점포에 들렀더니, 역시 등주서 온 장사치 세 사람이 솜을 틀고 고치를 켜기 위하여 배로 금주(金州)를 다니는데, 대개 금주의 우가장(牛家庄)은 등주에서 수로로 2백여 리의 맞은 편이건만 순풍에 돛을 달아 쉽사리 왕래할 수 있다 한다. 셋이 모두 약간 글을 아나 다만 사납게 생긴데다 전혀 예의를 모르고 버릇없이 농담을 붙이기에 곧 돌아왔다.
[주D-001]태을수(太乙數) : 점술의 용어. 태을은 별의 이름.
[주D-002]자미두수(紫微斗數) : 점술의 용어. 자미는 별의 이름. 제왕에 해당한 성좌(星座).
[주D-003]천일생수(天一生水) : 하늘이 열릴 때 첫째로 물을 낳는다는 것.
[주D-004]육임(六壬) : 육(六)이 음수(陰數)인 동시에 임(壬)도 북방의 귀신이었다.
[주D-005]둔갑(遁甲) : 다른 사람의 눈에 자기의 몸을 못 보도록 한다는 술법.
[주D-006]오월춘추(吳越春秋) : 한(漢) 조욱(趙煜)의 저. 전국 때 오와 월의 역사를 소설체로 쓴 것.
[주D-007]해랑(奚囊) : 시구를 수집해 넣은 주머니. 당(唐) 천재 시인 이하(李賀)의 고사에서 나왔다.
[주D-008]명부(命婦) : 부녀로서 봉호를 받음이니 내명부와 외명부의 구별이 있다.
[주D-009]주연유(周延儒) : 내치(內治)와 외정(外政)에 많은 공이 있었으나, 위인이 용렬하여 나중에 사사(賜死)되었다.
[주D-010]위조덕(魏藻德) : 이자성에게 붙잡혀 굴복하였으나 피살되었다.
[주D-011]탕형현(湯荊峴) : 청(淸) 초의 명신. 형현은 자.
[주D-012]태호석(太湖石) : 양주(楊州) 태호에서 나는 돌. 구멍이 많고 주름살이 잡힌 것.
[주D-013]동무가 …… 않겠소 : 《논어(論語)》 학이장(學而章)의 첫째 절(節).
[주D-014]배운 …… 않겠소 : 《논어(論語)》 학이장의 둘째 절.
[주D-015]남이 …… 아니겠소이까 : 《논어(論語)》 학이장의 셋째 절.
[주D-016]도철(饕餮) : 탐식하는 악수(惡獸)의 이름. 옛날 그릇에 흔히 이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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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무술(戊戌)
개다.
동관역에서 떠나 이대자(二臺子)까지 5리, 육도하교(六渡河橋) 11리, 중후소(中後所) 2리, 모두 18리를 가서 점심 먹다. 중후소에서 일대자(一臺子) 5리, 이대자 3리, 삼대자(三臺子) 4리, 사하점(沙河店) 8리, 엽가분(葉家墳) 7리, 구어하둔(口魚河屯) 3리, 어하교(魚河橋) 1리, 석교하(石橋河) 9리, 전둔위(前屯衛) 6리, 모두 48리이다. 전둔위서 묵었다. 이날 66리를 갔다.
배로 중후소하(中後所河)를 건너다. 옛날엔 성이 있었더니 중년에 허물어져서 방금 수축하는 중이다. 점포와 여염이 심양에 버금가겠고, 관제묘(關帝廟)의 장려함이 요동보다 나은데 매우 영험이 있다 한다. 일행이 모두 예폐(禮幣)를 바치고 머리를 조아리며 제비를 뽑아 길흉을 점쳐본다. 창대가 참외 한 개를 놓고 무수히 절하고 또 그 참외를 소상 앞에서 제가 먹어버렸다. 제가 무엇을 빌었는지는 알 수 없겠으나, ‘가진 것이 적으면서 바라는 것은 너무 사치롭다.’는 옛말이 곧 이를 두고 이름이다. 문 안 조장(照墻)에 그린 파란 사자가 그럴 듯하다. 이는 감로사(甘露寺)의 것을 본뜬 것 같다.
오도자(吳道字)가 그리고,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호)가 찬(贊)을 지었는데, 그 글에,
위엄은 이빨에 보이고 / 威見齒
기쁨은 꼬리에 나타나네 / 喜見尾
하였으니, 이는 가히 잘 형용했다고 할 만하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털모자는 모두 이곳에서 만드는 것이다. 그 공장은 모두 셋이 있는데, 한 집이 적어도 30~40칸은 되며 거기서 일하는 공인은 모두 백 명이 넘는다. 의주 상인들이 수없이 많이 와서 모자를 예약해 놓았다가 돌아갈 때 싣고 간다. 모자 만드는 법은 매우 쉽다. 양털만 있다면 나도 만들 것인데, 우리나라에선 양을 치지 않으므로 인민이 1년 내내 고기 맛을 모르고, 전국의 남녀 수는 수백 만이 넘는데 사람마다 털모자 하나씩을 써야만 겨울을 날 수 있게 된다. 해마다 동지(冬至)ㆍ황력(黃曆)ㆍ재자(賫資) 등의 사행에 가지고 가는 은이 줄잡아도 10만 냥은 될 것인즉, 10년을 계산하면 무려 백만 냥이다.
모자는 사람마다 삼동만 쓰다가 봄이 되어서 해지면 버리고 말 뿐인즉, 천 년을 가도 헐지 않는 은으로써 한겨울 쓰면 내어버리는 모자와 바꾸고 산에서 캐어 내는 한도 있는 은을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땅에 갖다 버리니, 그 얼마나 생각이 깊지 못한 일인가. 모자를 만드는 기술자들은 모두 웃통을 벗고 그 손놀림이 바람처럼 날쌔다. 우리나라에서 갖고 온 은화(銀貨)가 이곳에서 반은 사라지는 터이므로 공장 주인이 각기 단골 손님을 정하여 의주(義州) 장사치가 오면 반드시 크게 주식(酒食)을 베풀어 대접한다는 것이다.
길에서 도사 세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은 짝을 지어 시장 골목으로 두루 돌아다니며 구걸한다. 그 중 하나는 머리에 구름 무늬를 놓은 검은 사(紗)로 만든 모난 갓을 쓰고, 몸에는 옥색 추사(縐紗)로 지은 소매가 넓고 길이가 긴 도포와 푸른 항라 바지를 입고, 허리에는 붉은 비단 띠를 띠고 발엔 붉고 모난 비운리(飛雲履)를 신고, 등에는 옛 참마검(斬魔劒 마귀를 베는 칼)을 지고 손에는 죽간(竹簡)을 들었는데, 흰 얼굴과 삼각(三角) 수염에 미목이 헌칠하다.
또 하나는 머리에 두 갈래 뿔상투를 짜고 붉은 비단을 감았으며, 몸에는 소매가 좁은 푸른 비단 저고리를 입고, 어깨에는 벽려(薜荔)를 걸치고, 두 무릎 위에는 호피(虎皮)를 대었으며, 허리에는 홍단 넓은 띠를 띠고 발에는 청혜(靑鞋)를 신고, 등에는 비단으로 꾸민 오악도(五嶽圖 오악을 그린 그림)의 족자를 지고 또 허리엔 금호로병을 찼으며, 손에는 도서(道書) 한 갑(匣)을 들었는데 얼굴은 희고 가냘프다.
또 하나는 머리를 말아서 어깨에 척 걸치고 금테를 둘렀으며, 몸은 검은 공단으로 지은 소매 넓은 장삼(長衫)을 입고, 맨발인 채 손엔 붉은 호로병을 들었다. 붉은 얼굴에 고리눈이요, 입 속으로 주문(呪文)을 외면서 간다. 저자 사람들의 기색을 살피건대 모두 그들을 싫어하는 모양이다.
석교하에 다다르니, 강물이 불어서 물과 언덕의 분간이 없다. 물은 그렇게 깊지 않으나 물살이 제법 세다. 모두들 말하기를,
“지금 곧 건너지 않으면 물이 차츰 더 불을 걸.”
한다. 이에, 나는 정사의 가마에 들어 함께 건너서 저쪽 언덕에 닿아서 보니 말을 타고 건너는 이는 모두 모두 하늘을 쳐다보고 얼굴빛[顔色]이 푸르락누르락 한다.
서장관의 비장 조시학이 물에 떨어져 하마터면 죽을 뻔하여 모두들 몹시 놀랐다. 의주 상인 중에 돈주머니를 빠뜨린 자가 있어 물을 굽어 보면서, ‘아이구, 어머니’ 하고 통곡하는 자도 있었다 한다.
전둔위 시장에 연극이 열렸다가 막 파하려 한다. 시골 여자 수백 명이 모두 늙은이들이었으나 오히려 차림새는 야단스럽게 꾸몄다. 연극하는 자는 망포(蟒袍)ㆍ상홀(象笏)ㆍ피립(皮笠)ㆍ종립(椶笠)ㆍ등립(藤笠)ㆍ종립(鬉笠)ㆍ사립(紗笠)ㆍ사모(紗帽)ㆍ복두(幞頭) 같은 것이 완연히 우리나라 풍속과 다름없다. 도포는 자줏빛도 있고 방령(方領)은 검은 선을 둘렀으니, 이는 아마 옛날 당(唐)의 제도인 듯싶다. 아아, 슬프다. 신주(神州)가 육침(陸沉)한 지 이제 백여 년에 의관의 제도는 오히려 저 배우 연극의 사이에 남아 있으니 하늘이 마치 이에 무심하지 않는 성싶다. 무대에는 모두 ‘여시관(如是觀 불가(佛家)의 말)’이란 석 자를 써 붙였으니 이에서도 역시 그 숨은 뜻이 어디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마침 지현(知縣 현(縣)의 장관) 한 사람이 지나는데, ‘정당(正堂)’이라 쓴 큰 부채 한 쌍, 붉은 일산 한 쌍, 검은 일산 한 쌍, 붉은 우산 한 개, 기(旗) 두 쌍, 대곤장 한 쌍, 가죽채찍 한 쌍을 가졌으며 지현은 가마를 타고 뒤에 활과 살을 가진 기병 5~6명이 따랐다.
[주D-001]가진 …… 사치롭다 : 《사기(史記)》 골계전(滑稽傳) 중에 실린 순우곤(淳于髡)의 말.
[주D-002]오도자(吳道字) : 당(唐)의 저명한 화가(畵家)인 오도현(吳道玄). 도자는 자.
[주D-003]황력(黃曆) : 역서(曆書)를 받으러 가는 사행. 본시 동지사가 받아왔던 것을 조선 현종(顯宗) 원년부터는 따로 가게 되었다.
[주D-004]재자(賫資) : 삼사의 격식을 갖추지 않고 역관 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골라서 보내는 약식 사행.
[주D-005]비운리(飛雲履) : 신발 이름. 검은 능 바탕에 흰 견을 가지고 구름 모양으로 꾸몄다. 당의 백거이(白居易)에서 비롯하였다 한다.
[주D-006]벽려(薜荔) : 풀 이름. 여기에서는 은사(隱士)들 옷의 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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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기해(己亥)
이슬비 내리다 곧 개다. 이날이 처서(處暑)이다.
전둔위에서 아침에 떠나 왕가대(王家臺)까지 10리, 왕제구(王濟溝) 5리, 고령역(高嶺驛) 5리, 송령구(松嶺溝) 5리, 소송령(小松嶺) 4리, 중전소(中前所) 10리, 모두 39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중전소에서 대석교(大石橋)까지 7리, 양수호(兩水湖) 3리, 노군점(老君店) 2리, 왕가점(王家店) 3리, 망부석(望夫石) 10리, 이리점(二里店) 8리, 산해관 2리, 관에 들어 다시 10리를 가서 심하(深河)에 이르러 배로 건넜다. 거기에서 홍화포(紅花舖) 7리, 모두 47리이다. 이날 86리를 갔다. 홍화포에서 묵었다.
길가에 보이는 분묘(墳墓)들은 반드시 담을 둘렀는데, 그 둘레가 수백 보이고,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나란히 심어서 그 배포가 가지런하다. 묘 앞에는 모두 화표주(華表柱)가 서 있는데, 석물(石物)들을 보니 거의 전조(前朝) 귀인들의 무덤이다. 문은 셋이나 혹은 패루로 하였는데 그 제도는 비록 이전 조가(祖家)의 패루만은 못하나 웅장하고 사치스러운 것이 많다. 문 앞에는 돌다리를 무지개처럼 놓고 난간을 둘렀다. 그 중 영원 서문 밖의 조대수(祖大壽)의 선영과 사하점의 섭씨(葉氏)의 분묘가 가장 웅장ㆍ화려한 것이다.
여인 셋이 있어 모두 준마를 타고 말 위에서 재주를 넘는데, 그 중에 열세 살난 소녀가 가장 재빠르고 잘 탄다. 모두 머리에 초립(草笠)을 쓰고, 그 좌우(左右)ㆍ칠보(七步)ㆍ도괘(倒掛)ㆍ시괘(尸掛) 등 법은 날램이 마치 나부끼는 눈송인 듯 춤추는 나비인 듯하다. 한녀(漢女)는 살 길이 막히면 대개 비럭질하지 않으면 이런 것들이 된다 한다.
또 들 위에 한 전진(戰陣)을 벌여 놓았는데, 진(陣) 네 귀퉁이에 각기 기 하나씩을 꽂았다. 비록 검(劒)ㆍ극(戟)ㆍ과(戈)ㆍ모(矛) 따위는 없으나 사람마다 앞에 체바퀴만한 큰 화살통을 놓고 모두 수백 개나 되는 화살을 꽂았다. 진의 모양은 똑바르고 기병은 모두 말에서 내려 진 밖에 흩어져 있다. 내가 말에 내려서 한 바퀴 둘러본즉 다만 둘씩 늘어서 있을 뿐 중권(中權 참모부 같은 중심부)의 깃발이나 북소리도 없으려니와 또 천막을 친 것도 없다.
혹은 말하기를,
“성경장군(盛京將軍)이 내일 순시한다오.”
하고, 또는,
“성경 병부시랑(兵部侍郞)이 갈리어서 점심 참에 당도(當到)할 예정이므로 중전소(中前所) 참장(叅將)이 이곳에서 맞이하는데, 참장이 아직 이르지 아니하므로 진을 풀어 방금 신지(迅地)에 모이는 중이에요.”
한다. 들판 못에 붉은 연꽃이 한창이라 말을 멈추고 한참 구경했다. 왕가점에 이르니 산 위에 장성이 아득히 눈에 들어온다. 부사ㆍ서장관과 변 주부(卞主簿)ㆍ정 진사(鄭進士)와 수종인 이학령(李鶴齡) 등과 함께 강녀묘(姜女廟)에 갔다가 다시 관 밖의 장대(將臺)를 거쳐 마침내 산해관에 들다. 저녁 나절에 홍화포(紅花舖)에 닿았다. 밤엔 약간 감기 기운이 있어서 잠을 설쳤다.
[주D-001]좌우(左右) …… 시괘(尸掛) : 마상재(馬上才) 연기의 네 가지 종류 이름. 도괘는 새의 이름.
[주D-002]신지(迅地) : 청의 병제(兵制)에 있는 일종의 군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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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녀묘기(姜女廟記)
강녀(姜女)의 성은 허씨(許氏)요, 이름은 맹강(孟姜)인데, 섬서(陝西) 동관(同官)에 사는 사람이다. 범칠랑(范七郞)에게 시집갔더니 진(秦)의 장군(將軍) 몽염(蒙恬)이 장성을 쌓을 때, 범랑(范郞)이 그 일에 역사하다가 육라산(六螺山) 밑에서 죽어 그 아내 맹강에게 현몽되었다. 그리하여, 맹강이 손수 옷을 지어 혼자서 천 리를 가서 그 지아비의 생사를 탐지하다가 이곳에서 쉬며 장성을 바라보고 울어서 이내 돌로 화하였다 한다. 혹은 이르기를,
“맹강이 그 지아비의 죽음을 듣고 홀로 가서 그 뼈를 거두어 업고 바다에 들어간 지 며칠 만에 돌 하나가 바다 가운데 솟아서 조수가 밀려 들어도 잠기지 않았다.”
한다. 뜰 가운데 비석 셋이 있는데 거기 기록된 것이 모두 같지 않고, 또 허황한 말이 많다. 묘(廟)에는 소상을 세우고 좌우에 동남(童男)ㆍ동녀(童女)를 늘어 세웠다. 황제가 여기다 행궁(行宮)을 두었는데, 지난해 심양에 거둥할 때, 지나는 행궁마다 죄다 중수하였으므로 단청이 아직도 휘황찬란하다. 묘에 문문산(文文山)이 쓴 주련(柱聯)이 있고, 망부석(望夫石)에는 황제가 지은 시(詩)를 새겼으며, 돌 곁에는 진의정(振衣亭)이 있다. 당(唐) 왕건(王建)의 망부석시(望夫石詩)는 이 돌을 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지(地志)》에,
“망부석이 둘인데 하나는 무창(武昌)에 있고, 또 하나는 태평(太平)에 있다.”
하였은즉, 왕건의 읊은 것이 그 어느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또 진(秦) 나라 때엔 아직 섬(陝)이란 땅 이름이 없었을뿐더러 강(姜)도 제녀(齊女)를 일컬은 것인즉, 허씨를 섬서 동관 사람이라 함은 더욱 터무니 없는 말이다. 행궁 섬돌에서 강녀묘에 이르기까지 돌난간을 둘렀고, ‘방류요해(芳流遼海)’라는 현판은 지금 황제의 글씨이다.
[주D-001]문문산(文文山) : 송말의 이름 높은 충신 문천상(文天祥). 문산은 호.
[주D-002]왕건(王建) : 당의 시인(詩人). 특히 궁사(宮詞)로 유명하였다.
[주D-003]강(姜)도 제녀(齊女) : 제(齊)는 강성의 고장이요, 또 미녀가 강성에 많기로 이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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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기(將臺記)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큼을 모를 것이요, 산해관을 보지 못하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요, 관 밖의 장대를 보지 않고는 장수의 위엄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산해관을 1리쯤 못 가서 동향으로 모난 성 하나가 있다. 높이가 여남은 길, 둘레는 수백 보이고, 한 편이 모두 칠첩(七堞)으로 되었으며, 첩 밑에는 큰 구멍이 뚫려서 사람 수십 명을 감출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구멍이 스물 네 개이고, 성 아래로 역시 구멍 네 개를 뚫어서 병장기를 간직하고, 그 밑으로 굴을 파서 장성과 서로 통하게 하였다. 역관들은 모두 한(漢)의 쌓은 것이라 하나 그릇된 말이다. 혹은 이를 ‘오왕대(吳王臺)’라고도 한다. 오삼계(吳三桂)가 산해관을 지킬 때에 이 굴 속으로 행군하여 갑자기 이 대에 올라 포성을 내니, 관 안에 있던 수만 병이 일시에 고함을 질러서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관 밖의 여러 곳 돈대에 주둔했던 군대도 모두 이에 호응하여 삽시간에 호령이 천 리에 퍼졌다. 일행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첩 위에 올라서서 눈을 사방으로 달려보니, 장성은 북으로 뻗고 창해(滄海)는 남에 흐르고, 동으로는 큰 벌판을 다다르고 서로는 관 속을 엿보게 되었으니, 이 대만큼 조망(眺望)이 좋은 곳은 다시 없을 것이다. 관 속 수만 호의 거리와 누대(樓臺)가 역력히 마치 손금을 보는 듯하여 조금도 가리어진 곳이 없고, 바다 위 한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듯 뾰족하게 솟아 있는 것은 곧 창려현(昌黎縣) 문필봉(文筆峯)이다. 한참동안 서서 바라보다가 내려오려 하니 아무도 먼저 내려가려는 사람이 없다. 벽돌 쌓은 층계가 높고 험해서 내려다 보기만 해도 다리가 떨리고 하인들이 부축하려 하나 몸을 돌릴 공간이 없어서 일이 매우 급하게 되었다. 나는 서쪽 층계로 먼저 간신히 내려와서 대 위에 있는 여러 사람을 쳐다보니, 모두 부들부들 떨며 어쩔 줄 모르고 있다. 대개 오를 때엔 앞만 보고 층계 하나하나를 밟고 올라갔기 때문에 그 위험함을 몰랐는데, 급기야 내려오려고 눈을 한번 들어 밑을 내려다 보니 저절로 현기증이 일어나니 그 허물은 눈에 있는 것이다. 벼슬살이도 이와 같아서 바야흐로 위로 자꾸만 올라갈 때엔 한 계단이라도 남에게 뒤떨어질세라 혹은 남을 밀어젖히면서 앞을 다툰다. 그러다가 마침내 몸이 높은 곳에 이르면 그제야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외롭고 위태로워서 앞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길이 없고, 뒤로는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이어서 다시 올라갈 의욕이 사라질 뿐 아니라 내려오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법이다. 이는 고금을 막론하고 모두 그렇다.
[주D-001]한(漢) : 혹은 한(汗)으로도 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산해관기(山海關記)
산해관은 옛날의 유관(楡關)인데, 왕응린(王應麟)의 《지리통석(地理通釋)》에,
“우(虞)의 하양(下陽), 조(趙)의 상당(上堂), 위(魏)의 안읍(安邑), 연(燕)의 유관, 오(吳)의 서릉(西陵), 촉(蜀)의 한락(漢樂)은 모두 그 지세로 보아서도 꼭 웅거해야 하고, 그 성으로 보더라도 꼭 지켜야 한다.”
하였다. 명(明)의 홍무(洪武) 17년(1384)에 대장군 서달(徐達)이 유관을 이곳에 옮겨 다섯 겹의 성을 쌓고 이름을 ‘산해관’이라 하였다. 태항산(太行山)이 북으로 달려가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었는데, 순(舜)이 열두 산을 봉(封)할 때 유주(幽州)의 진산(鎭山)으로 삼았다. 그 산이 중국의 동북을 가로막아 중국과 외국의 경계가 되었으며, 관에 이르러서는 크게 잘리어서 평지가 되어 앞으로 요동 벌을 바라보고, 오른편으로는 창해를 낀 듯하니, 이는 우공(禹貢)의,
“오른편으로 갈석(碣石)을 끼었다.”
는 것이 곧 이를 두고 일컬음이다. 그리고 장성이 의무려산을 따라 굼틀굼틀 굽이쳐 내려와 각산사(角山寺)에 이르며, 봉우리마다 돈대가 있고 평지에 들어와서 관을 둔 것이다. 장성을 따라 다시 15리를 가서 남으로 바다에 들어서 쇠를 녹여 터를 닦아 성을 쌓고는 그 위에 삼첨(三簷) 큰 다락을 세워서 ‘망해정(望海亭)’이라 하니, 이는 모두 서중산(徐中山 서달의 봉호)이 쌓은 것이다. 이 관의 첫째 관은 옹성(甕城)이어서 다락이 없고, 옹성의 남ㆍ북ㆍ동을 뚫어서 문을 내고 쇠로 만든 문 위의 홍예(虹霓) 이마에는 ‘위진화이(威振華夷)’라 새겼고, 둘째 관에는 4층의 적루(敵樓)로 되었는데 홍예 이마에 ‘산해관’이라 새겼고, 셋째 관은 삼첨 높은 다락에다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현판을 붙였다.
삼사(三使)가 모두 문무로 반(班)을 나누어 심양에 들어왔을 때와 같이 했다. 세관(稅官)과 수비(守備)들이 관 안의 익랑(翼廊)에 앉아서 사람과 말을 점고하는데, 전에 봉성의 청단(淸單 조사서(調査書))에 준한다. 대체 중국의 상인과 길손은 모두 성명과 사는 곳과 물화(物貨)의 이름과 수량을 등록하여 간사한 놈을 적발하며 거짓을 막음이 매우 엄하다. 수비들은 모두 만인인데, 붉은 일산과 파초선(芭蕉扇)을 가지고 앞에 병정 백여 명이 칼을 차고 늘어섰다.
십자가(十字街)에 성을 둘렀는데, 사면에 둥근 문을 내고 그 위에 삼첨 높은 다락을 세웠으며, ‘상애부상(祥靄榑桑)’이라 현판을 붙였으니 이는 옹정 황제(雍正皇帝)의 글씨다. 원수부(元帥府)의 문 밖에 돌사자 둘을 앉혔는데, 높이가 각기 두어 길이나 되며 여염과 저자의 번영함이 성경보다 낫고 수레와 말이 가장 많은데, 청춘 남녀들이 더욱 화려한 화장을 꾸몄으니 그 번화롭고 풍부한 품이 이제껏 보아 온 중에 제일이라 하겠다. 대개 이곳은 천하의 웅관(雄關)이며 또는 서쪽으로 북경이 멀지 않은 까닭이다. 봉성으로부터 천여 리 사이에 보(堡)니, 둔(屯)이니, 소(所)니, 역(驛)이니 하여 나날이 성 몇 곳씩은 보아 왔건만, 이제 장성을 보고 나니, 그들의 시설이나 솜씨가 모두 이 관에서 본뜬 것이긴 하나 그들을 이 관에 비하면 어린 손자뻘밖에 되지 않는다. 아아, 슬프다. 몽염(蒙恬)이 장성을 쌓아서 되놈을 막으려 하였건만 진(秦)을 망칠 호(胡)는 오히려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서중산이 이 관을 쌓아 되를 막고자 하였으나 오삼계는 관문을 열고서 적을 맞아들이기에 급급하였다. 그리하여 천하가 일이 없는 지금, 부질없이 지나는 상인과 나그네들의 비웃음을 사게만 되었으니, 난들 이 관에 대하여 다시 무어라고 말할 것이 있으리오.
[주D-001]왕응린(王應麟) : 송의 저명한 학자. 자는 백후(伯厚).
[주D-002]우공(禹貢) : 《서경(書經)》의 편명. 중국 최초의 지리지(地理志).
[주D-003]진(秦)을 …… 났으며 : 진 시황이 당시에 진을 망칠 자는 호(胡)라는 비결을 믿어서 이 만리장성을 쌓았으나 사실 진을 망친 자는 호(胡)가 아니요, 집안에 생겨난 그의 아들 호해(胡亥)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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