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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막북행정록(漠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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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8 5일 신해(辛亥)에 시작하여 8 9일 을묘(乙卯)에 그쳤다. 모두 닷새 동안이다. 연경(燕京)으로부터 열하(熱河)에 이르기까지이다.

 

1. 막북행정록 서(漠北行程錄序)

2. 가을 8 5일 신해(辛亥)

3. 6일 임자(壬子)

4. 7일 계축(癸丑)

5. 8일 갑인(甲寅)

6. 9일 을묘(乙卯)

 

 

 

막북행정록 서(漠北行程錄序)

 

 

열하는 황제의 행재소(行在所 군주가 임시 머무는 곳)가 있는 곳이다. 옹정 황제 때에 승덕주(承德州)를 두었는데, 이제 건륭 황제가 주()를 승격시켜 부()로 삼았으니 곧 연경의 동북 4 20리에 있고, 만리장성(萬里長城)에서는 2백여 리이다. 열하지(熱河志)를 상고해 보면,

 

() 시대에 요양(要陽)백단(白檀)의 두 현()으로 어양군(漁陽郡)에 속하였고, 원위(元魏) 때에는 밀운(密雲)안락(安樂) 두 군()의 변계로 되었고, 당대(唐代)에는 해족(奚族)의 땅이 되었으며, ()는 흥화군(興化軍)이라고 하여 중경에 소속시켰고, ()은 영삭군(寧朔軍)으로 고쳐서 북경에 소속시켰으며, ()에서는 고쳐서 상도로(上都路)에 속하였다가 명()에 이르러서는 타안위(朶顔衛)의 땅이 되었다.”

하니, 이는 곧 이때까지 열하의 연혁(沿革)이다. 이제 청()이 천하를 통일하고는 비로소 열하라 이름하였으니 실로 장성 밖의 요해의 땅이었다. 강희 황제 때로부터 늘 여름이면 이곳에 거둥하여 더위를 피하였다. 그의 궁전들은 채색이나 아로새김도 없이 하여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 이름하고, 여기에서 서적을 읽고 때로는 임천(林泉)을 거닐며 천하의 일을 다 잊어버리고는 짐짓 평민이 되어 보겠다는 뜻이 있는 듯하다. 그 실상은 이곳이 험한 요새이어서 몽고의 목구멍을 막는 동시에 북쪽 변새 깊숙한 곳이었으므로 이름은 비록 피서(避暑)라 하였으나, 실상인즉 천자 스스로 북호(北胡)를 막음이었다. 이는 마치 원대(元代)에 해마다 풀이 푸르면 수도를 떠났다가, 풀이 마르면 남으로 돌아옴과 같음이다. 대체로 천자가 북쪽 가까이 머물러 있어서 자주 순행하여 거둥을 하면, 북방의 모든 호족들이 함부로 남으로 내려와서 말을 놓아 먹이지 못할 것이므로 천자의 오고 감을 늘 풀의 푸름과 마름으로써 시기를 정하였으니, 이 피서라는 이름도 역시 이를 이름이었다. 올 봄에도 황제가 남방을 순행하였다가 바로 북쪽 열하로 온 것이다.

열하의 성지와 궁전은 해로 더하고 달로 늘어서, 그 화려하고 튼튼하고 웅장함이 저 창춘원(暢春苑)이라든가 서산원(西山苑) 들보다도 지나치다. 뿐만 아니라 그 산수의 경치도 오히려 연경보다 나으므로 해마다 이곳에 와서 머물게 되었으며, 애초에는 외적을 막기 위했던 곳이 도리어 방탕한 놀이터로 발전되었다. 이제 우리나라 사신이 갑자기 열하로 오라는 명을 받아서 밤낮 없이 달려 닷새 만에야 겨우 다달았으니, 그 노정을 짐작하건대 4백여 리뿐이 아닐 것이다. 열하에 와서 산동 도사(都司) 혁성(郝成)과 함께 이정의 원근을 논할 제 그도 역시 열하에 처음 온 모양이다. 그의 말이,

 

대개 구외(口外)에서 북경이 7백여 리이나, 강희 황제 이후로 해마다 이곳에 피서하여 석왕(碩王 황제의 아들)액부(額駙)와 각부 대신(閣部大臣)들이 닷새마다 한번씩 조회하게 마련되었는데, 길에 빠른 여울, 사나운 큰물, 높은 고개, 험한 언덕이 많아서 모두들 그 험하고도 먼 곳으로의 발섭(跋涉)을 꺼리므로 강희 황제가 일부러 참( 차참(車站))을 줄여 4백여 리를 만든 것이지 그 실은 7백 리나 됩니다. 그러나 모든 신하들이 늘 말을 달려와서 일을 품하므로, 막북(漠北)을 문앞처럼 여기고 몸이 안장 위에 떠날 겨를이 없으니, 이는 성군(聖君)이 편안할 때 오히려 위태로움을 잊지 않으려는 뜻이랍니다.”

하니, 그의 말이 근사한 듯싶다. 그리고 고염무(顧炎武) 창평산수기(昌平山水記),

 

고북구역(古北口驛)으로부터 북으로 56리를 가서 청송(靑松)이란 곳이 한 참()이고,  50리를 가서 고성(古城)이라 하는 곳이 한 참이며,  60리를 가서 회령(灰嶺)이란 곳이 한 참이고,  50리를 가서 난하(灤河)라 하여 한 참이다.”

하였으니, 이제 난하를 건너서 열하까지 40리인즉, 고북구(古北口)로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모두 2 56리이다. 이를 보더라도 벌써 56리가 열하지에 기록된 것보다 많다.

구외(口外)의 노정(路程)이 서로 이렇게 어긋나니 장성 안이야 더욱 그러할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제 이 걸음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일뿐더러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달려와서 마치 소경이 걷는 것이나 꿈결에 지나치는 것 같아서, 역참이며 돈대를 일행 중에 아무도 자세히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열하지를 상고하니 4 20리라 하였은즉, 그를 좇을 수밖에 없다.

 

 

[C-001]막북행정록 서(漠北行程錄序) : 이 소제는 다른 본에는 없었으나, 이제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D-001]열하지(熱河志) : 열하의 지지(地志)이니, 건륭 42년에 고종의 칙명에 의하여 엮었다.

[D-002]액부(額駙) : 부마(駙馬)의 만주어. 예를 들면 화석공주(和碩公主)에 장가든 사람을 화석액부(和碩額駙)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가을 8 5일 신해(辛亥)

 

 

개고 덥다.

아침 사시(巳時)에 사은겸진하정사(謝恩兼進賀正使)를 따라 연경으로부터 열하 길을 떠날 때 부사 서장관과 역관 세 사람, 비장 네 사람, 또 하인들, 모두 일흔넷이고, 말이 모두 쉰다섯 필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서관(西館)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애당초 책문을 들어선 뒤로, 길에서 자주 비를 만나고 물이 막히어 통원보(通遠堡)에서는 앉아서 5~6일을 허비했으므로 정사가 밤낮으로 근심하였다. 나는 때마침 그 건너편 구들에 묵었으므로 비 소리가 들리는 밤이면 곧 불을 밝히고 밤을 새웠다. 그리하여 휘장을 넘어 나에게 말로,

 

천하 일은 알 수 없는 것일세. 만일 우리 일행을 열하까지 오라고 하는 일이 있다면 날짜가 모자랄 것인즉, 그때에는 장차 어떻게 할 것이며, 또 설사 열하로 가는 일이 없다 하더라도 마땅히 만수절(萬壽節 황제의 탄일)은 대어 가야 할 것인데, 다시 심양과 요양의 사이에서 비에 막히는 일이 있다면, 이야말로 속담(俗談)에 밤새도록 가도 문에 닿지 못하였다는 격이 아니겠는가.”

하고 걱정하였다. 그러다가 밝은 날 백방으로 물 건널 계책을 세울 제 여러 사람들이 이를 말리면, 그는 곧,

 

나는 나랏일로 왔으니 물에 빠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는 내 직분이라, 또한 어찌하리.”

한다. 이로부터 아무도 감히 물이 많아서 건너지 못하겠다는 말이 없었다. 때마침 더위가 심하고, 또 이곳에는 비오지 않은 날에도 마른 땅이 갑자기 물바다를 이루는 일이 일쑤이니, 이는 모두 저 천리 밖에서 폭우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물을 건널 때면 모두 몸이 떨리고 앞이 캄캄하여, 낯빛을 잃고 하늘을 우러러 가만히 잠깐 동안 목숨을 빌지 않은 자 없었으며, 그리하여 저쪽편에 도달한 뒤에야 비로소 서로 돌보며 축하의 말들을 나누되 마치 죽을 고비를 겪고 난 사람이나 만난 듯이 하였으나, 다시 앞 물이 지나간 물보다 더하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놀라서 서로 돌보며 생각이 막연할 뿐이었다. 그러면 정사는,

 

제군들은 걱정마소. 이 역시 왕령(王靈)이 도우시리.”

하고는, 불과 몇 리도 못 가서 다시 물을 건너게 되고, 어떤 때에는 하루에 여덟 번이나 건너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쉴 참을 뛰어가며 쉴 새 없이 달렸으므로 말이 많이 더위에 쓰러지고, 사람 역시 모두 더위를 먹어서 토하고 싸게 되면, 문득 사신을 원망하되,

 

열하 갈 일이야 만무할 텐데 이렇듯 한 더위에 쉴 참을 뛰어감은 전례에 없는 일이에요.”

하며, 투덜거리고, 혹은,

 

나랏일이 아무리 중하다손 정사께선 늙고 또 쇠약하신 분이 이렇게 몸을 가벼이 하시다가 만일 덧나시기나 하면 도리어 일을 그르치는 거요.”

하고, 또는,

 

지나치게 서두르면 도리어 더딘 법이라오.”

하고, 또는,

 

앞서 장계군(長溪君)이 진향사(進香使)로 왔을 때 책문 밖에서 물이 막혀 침상(寢牀)을 쪼개어서 밥 지으며 열이레를 묵었어도 쉴 참을 뛰어가는 일은 없었다오.”

하고, 옛 일까지 끌어대곤 하였다. 그리하여 8월 초하룻날 연경에 닿아서 사신은 곧 예부(禮部)에 가서 표문과 자문(咨文)을 바치고 서관에서 나흘을 묵었으나 별다른 지시가 없으므로 그제야 모두들,

 

과연 아무런 염려는 없나보다. 사신이 매양 우리 말을 곧이 안 들으시더니 글쎄 그런 것을. 아무튼 일이야 우리들이 잘 알지. 참대로 왔어도 열사흗날 만수절에야 넉넉히 대어 올 것을.”

하며, 빈정거리었다. 그리하여 더욱 열하는 염에도 두지 않았으며, 사신도 차츰 열하로 갈 걱정을 놓기 시작하였다.

초나흗날, 나는 구경 나갔다가 저녁 때 취하여 돌아와서 이내 곤히 잠들어서 밤중에야 잠깐 깨었다. 남들은 벌써 깊이 잠들었고 목이 몹시 마르기에 상방(上房)에 가서 물을 찾았다. 방안에는 촛불을 밝혔는데, 정사가 내 오는 기척을 듣고는 불러서,

 

아까 잠깐 졸았더니 꿈결에 열하 길을 떠났는데 행리(行李)가 역력하데그려.”

하시기에, 나는,

 

길 뜨신 뒤로 열하가 늘 생각에 떠올랐으므로 이제 비록 편안히 계시어도 오히려 꿈에 오르는가 보지요.”

하며 대답하고, 물을 마시고 돌아와서 이불에 들어 곧 코를 골았다. 꿈결에 별안간 여러 사람의 벽돌 밟는 발자국 소리가 마치 담이 허물어지고 집이 쓰러지듯이 요란스레 들리므로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으니,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내 하루 종일 나가 돌아다니다가 밤에 돌아와 누우면 매양 관문(館門)이 깊이 잠긴 것을 생각할 제 마음이 울적하여 여러 가지 망념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는 곧 옛날 원 순제(元順帝)가 북으로 도망갈 제 그제야 고려의 사신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니 사신은 관을 나서서야 비로소 명 나라의 군대가 온 천하를 점령한 줄 알았고, 가정(嘉靖) 때에는 엄답(俺答 달단(韃靼)의 추장)이 갑자기 수도를 에워싼 일이 있다고 한다. 어젯밤에 내가 변군내원과 이 이야기를 하고 웃었다. 이제 저렇듯 요란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큰 변고가 일어난 것은 틀림없는 듯싶다. 급히 옷을 주워 입을 제 시대(時大)가 달려 와서,

 

이제 곧 열하로 떠나게 되었답니다.”

한다. 그제야 내원과 변군도 놀라 깨어서,

 

관에 불이 났소.”

하기에, 나는 짐짓 장난으로,

 

황제가 열하에 거둥하여 연경이 비어서 몽고 기병(騎兵) 십만 명이 쳐들어 왔다오.”

했더니, 변군들이 놀라서,

 

아이고.”

한다. 내가 곧 바삐 상방으로 간즉 온 관이 물끓듯 한다. 통관(通官) 오림포(烏林哺)박보수(朴寶秀)서종현(徐宗顯) 등이 달려와서 모두 황급하여 얼굴빛을 잃고서 혹은 제 가슴을 두드리고 혹은 제 뺨을 치며 혹은 제 목을 끊는 시늉을 하며 외치고 울면서,

 

이제야 카이카이[開開].”

한다. ‘카이카이는 목이 달아난다는 말이었다. 또 펄펄 뛰며,

 

아까운 목숨 달아난다.”

한다. 아무도 그 까닭을 묻지 못하나 그 하는 짓거리는 몹시 흉측하고 왈패스러웠다. 이는 대체로 황제가 날로 조선 사신을 기다리다가 급기야 주문(奏文)을 받아 보고는, 예부가 조선 사신을 행재소(行在所)로 보낼 것인가 또는 아니 보낼 것인가를 품하지 않고서, 다만 표문만 올렸음을 노하여 감봉(減俸) 처분을 내렸으므로, 상서(尙書) 이하 연경에 있는 예부의 관원들이 황송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다만 얼른 짐을 꾸리고 인원을 줄이어서 빨리 떠나도록 독촉할 따름이었다.

이에 부사와 서장관이 모두 상방에 모여서 데리고 갈 비장을 뽑는데, 정사는 주 주부 명신(命新), 부사는 정 진사 창후(昌後), 이 낭청(李郎廳) 서귀(瑞龜)를 지명하고, 서장관은 조 낭청(趙郞廳) 시학(時學)을 데리고 수역 홍 첨추(洪僉樞) 명복(命福)과 조 판사(趙判事) 달동(達東), 윤 판사(尹判事) 갑종(甲宗)이 수행하기로 하였다. 나는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첫째 먼 길을 겨우 쫓아 와서 안장을 끄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피곤이 가시지 않은 데다가 다시 먼 길을 떠남은 실로 견딜 수 없는 노릇이요, 둘째는 만일 열하에서 바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황경(皇京) 구경이 낭패가 되는 것이다. 전례에 황제가 우리나라 사행을 각별히 생각하여 빨리 돌아가도록 분부한 특별 은전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십중팔구는 바로 돌려보낼 염려가 없지 않다 하고 내가 주저하던 차에, 정사가 나더러,

 

자네가 만 리 연경을 멀다 않고 온 것은 널리 구경하고자 함이거늘, 이제 열하는 앞서 온 사람들의 보지 못한 곳일뿐더러 돌아간 뒤에 열하가 어떻더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무어라 대답할 것인고. 그리고 연경은, 온 사람치고는 다 본 바이지만 이번 길이야말로 좀처럼 얻기 어려운 기회이니 꼭 가야만 할 것이 아닌가?”

하기에, 나는 드디어 가기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정사 이하로 직함과 성명을 적어서 예부로 보내어 역말 편에 먼저 황제에게 알리기로 하였으나, 나의 성명은 단자(單子) 속에 넣지 않았으니, 이는 별상(別賞)이 있을까 보아서 피혐(避嫌)한 것이었다.

그제야 인마를 점고(點考)할 때 사람은 발이 모두 부르트고, 말은 여위고 병들어서 실로 대어갈 것 같지 아니하다. 이에 일행이 모두 마두를 없애고 견마잡이만 데리고 가기로 하여 나도 하는 수 없이 장복을 떨어뜨리고 창대만 데리고 가기로 했다. 변군과 노 참봉(盧叅奉) 이점(以漸), 정 진사(鄭進士) (), 건량 판사(乾糧判事) 조학동(趙學東) 등은 관문 밖에서 손 잡고 서로 작별할 제 여러 역관들도 다투어 와서 손을 잡으며 무사히 다녀 오기를 빌었다. 남아 있고 떠나고 하는 이 마당에 자못 처연함을 금치 못하였으니, 이는 함께 외국에 와서 또 다시 외국에서 헤어지게 되는 만큼 인정이 어찌 그렇지 않으리오. 마두들이 다투어 빈과(蘋果)와 배를 사서 드리므로 각기 한 개씩을 받았다. 그들은 모두 첨운패루(瞻雲牌樓) 앞까지 이르러서 말 머리에서 절하고 작별할 때, 각기,

 

귀중하신 몸 조심하소서.”

하고는, 눈물을 짓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지안문(地安門)에 드니, 지붕은 누런 유리기와를 이었고 문안 좌우에는 시전이 번화장려하여, 이른바 수레바퀴가 서로 부딪치고 사람 어깨가 서로 스치고 땀은 비 같으며, 소매는 천막을 이루었다는 말이 곧 이를 이름이었다. 문을 나서서 다시 꼬부라져 북으로 자금성(紫禁城)을 끼고 돌아 7~8리를 갔다. 자금성은 높이가 두 길이며 밑바닥을 돌로 깔고 벽돌로 쌓아 올리고, 누런 기와를 이고 주홍빛 석회를 칠했는데, 벽은 마치 대패로 민 듯하고 그 윤기가 왜칠(倭漆)한 것 같았다. 길 가운데 대여섯 발 되는 높은 돈대가 있고 그 위에는 삼층 다락이 있는데, 그 제도는 정양문루(正陽門樓)보다도 훌륭하고 돈대 밑에는 붉은 난간을 둘렀으며 문이 있으나 모두 잠기었고 병졸들이 지키고 섰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것이 곧 종루(鍾樓)입니다.”

한다. 거기에서 30~40리를 가서 동직문(東直門)을 나서니 내원이 따라와서 슬피 작별하여 가고, 장복은 말 등자를 붙잡고 흐느껴 울며 차마 헤어지기 어려워한다. 내가 돌아가라 타이른즉 또 창대의 손목을 잡고 서로 슬피 우는데 눈물이 마치 비내리듯 한다. 이 만 리를 짝지어 와서 하나는 가고 하나는 떨어지니, 인정이 그렇지 않을 수 없겠다. 나는 이내 말 등에서 생각하기를,

 

인간의 가장 괴로운 일은 이별이요, 이별 중에도 생이별(生離別)보다 괴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대개 저 하나는 살고 또 하나는 죽고 하는 그 순간의 이별이야 구태여 괴로움이라 할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인자한 아버지와 효성스러운 아들, 믿음 있는 남편과 아름다운 아내, 정의로운 임금과 충성스러운 신하, 피로 맺은 벗과 마음 통하는 친구들이 그의 역책(易簀)할 때에 마지막 교훈을 받들거나 또는 궤석(几席)에 기대어 말명(末命)을 받을 즈음, 서로 손을 잡고 눈물 지며 뒷일을 정녕히 부탁함은 이 천하의 부자부부군신붕우가 다 한가지로 겪는 바이요, 이 세상 사람의 인자와 효도, 믿음과 아름다움, 정의와 충성, 혈성(血誠)과 지기(知己)에 솟아나온 정리는 한결같을 것이다. 이것이 사람마다 한가지로 겪는 바이요, 사람마다 한결같이 솟는 정이라면 이 일은 곧 천하의 순리일 것이다. 그 순리를 행함에 있어서는 삼년(三年) 동안을 아버지의 도()를 고치지 말라 하였고, 또는 구원(九原)에서 다시 살려 일으켰으면 함에 불과하였고, 살아 남은 자의 괴로움을 논한다면 부모를 따라서 죽으려는 이, 아들을 여의고 눈이 먼 이, ()을 두들기며 노래 부르는 이, 거문고 시위를 끊은 이, 숯을 머금고 벙어리 된 이, 슬피 울어 성()을 무너뜨린 이 들도 있거니와, 나랏일을 위하여 몸이 망쳐져 죽은 뒤에야 만 이도 없지 않으나 모두 죽은 이에겐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인즉, 역시 그들에게 괴로움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천고에 임금과 신하의 사이로는 반드시 부견(苻堅 전진(前秦)의 임금)과 왕경략(王景略 부견의 승상), 당 태종(唐太宗)과 위 문정(魏文貞 당 태종 때의 직신인 위징(魏徵)의 시호)이라 일컬으나 나는 아직 경략을 위하여 눈이 멀고 문정을 위하여 시위를 끊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노라. 오히려 무덤의 풀이 어울리기 전에 그 채찍을 던지고 그 비()를 넘어뜨려 구원(九原)에 깊이 간직한 사람에게 부끄러울 바가 있었은즉, 이로써 보면 살아 남은 자로서 괴로움을 느끼지 못한 이도 없지 않으리라. 또 세상 사람이 흔히들 사생의 즈음에 대하여 너그럽게 위안하는 말로,

순리(順理)로 지냄이 옳지.”

한다. 그 순리로 지낸다는 말은 곧 이치를 따르라는 말이다. 만일 그 이치를 따를 줄 안다면 이 세상에는 벌써 괴로움이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는 살고 또 하나는 죽고 하는 그 순간의 이별이야 구태여 괴로움이라 할 것이 못 된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별의 괴로움은 하나는 가고 하나는 떨어지는 때의 괴로움보다 더함이 없을 것이다. 대개 이러한 이별에 있어서는 벌써 그 땅이 그 괴로움을 돋우는 것이니, 그 땅이란 정자(亭子)도 아니며, 누각(樓閣)도 아니며, 산도 아니며 들판도 아니요, 다만 물을 만나야만 격에 어울리는 것이다. 그 물이란 반드시 큰 것으로 강과 바다거나 또는 작은 것으로 도랑과 개천이어야 됨은 아니고, 저 흘러가는 것이라면 모두 물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고에 이별하는 자 무한히 많건마는 유독 저 하량(河梁)을 일컫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결코 소무(蘇武)이릉(李陵)만이 천하의 유정(有情)한 사람이 아니건만 특히 그 하량이란 곳이 이별하는 지역으로 알맞았던 것이며, 그 이별이 그 지역을 얻었으니 괴로움이 가장 심한 것이다. 저 하량은 내가 아노니, 아마 얕지도 않고 깊지도 않으며, 잔잔하지도 않고 거세지도 않은 그 물결이 돌을 이끌어 안고 흐느껴 우는 듯하며, 바람도 불지 않는, 비도 내리지 않는, 음산하지도 않는, 볕도 쪼이지 않는, 그 햇볕이 땅을 감돌아 어슴프레 해미 끼고 하수 위의 다리는 오랜 세월에 곧장 허물어지려 하고, 물 가의 나무는 늙어서 가지 없이 고목이 되려 하고, 물 언덕 모래톱은 앉았다 섰다 할 수 있고, 물 속에는 물새가 있어 떴다 잠겼다 노닐며, 이 가운데 사람은 넷도 아니요, 셋도 아님에도 서로 묵묵히 말없는 이 이별이야말로 천하의 가장 큰 괴로움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별부(別賦)에 이르기를,

말 없이 마음 아픔 / 黯然銷魂

이별에서 더할쏜가 / 唯別而已

하였으니, 어찌 그 표현이 이렇게 멋이 없을까. 천하의 어떤 이별치고 누가 말없지 않는 이 있으며, 마음 아프지 않는 이가 있으리오. 이는 다만 한 개의 별() 자에 대한 전주(箋注)에 지나지 않을 말이니 그다지 괴로움이 될 것이 없으리라. 특히 이별하는 일 없이 이별하는 마음을 지닌 자는 천고에 오직 시남료(市南僚) 한 사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이르기를,

그대를 보내러 갔던 이가 저 아득한 강둑으로부터 돌아오니, 그대의 모습은 이로부터 멀어졌구나.”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천고의 애끊을 만한 말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곧 물에 다다라서 이별함이니 그야말로 이별이 땅을 얻은 까닭이다. 옛날 유우석(劉禹錫)이 상수(湘水) 가에서 유종원(柳宗元)과 헤어졌다가 그 뒤 5년 만에 우석이 옛길로부터 계령(桂嶺)을 나와 다시 앞서 이별하던 곳에 이르러 시를 읊어서 유()를 슬퍼하기를,

내 말은 구슬피 숲 가린 채 울건마는 / 我馬暎林嘶

임 싣고 감돈 배는 산 너머 아득하구나 / 君帆轉山滅

하였으니, 천고의 귀양살이꾼이 무한히 많건마는 이것이 가장 괴롭게 여겨짐은 오로지 물가에서 이별한 까닭이리라. 그런데 우리나라는 땅이 좁은 곳이라 살아서 멀리 이별하는 일이 없으므로 그리 심한 괴로움을 겪은 일은 없으나, 다만 뱃길로 중국에 들어갈 때가 가장 괴로운 정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대악부(大樂府) 중에 이른바 배따라기곡(排打羅其曲)이 있으니 우리 시골 말로는 배가 떠난다는 것이다. 그 곡조가 몹시 구슬퍼서 애끊는 듯하다. 자리 위에 그림배를 놓고 동기(童妓) 한 쌍을 뽑아서 소교(小校)로 꾸미되, 붉은 옷을 입히고, 주립(朱笠)패영(貝纓)에 호수(虎鬚)와 백우전(白羽箭 흰 깃을 단 화살)을 꽂고, 왼손엔 활시위를 잡고, 오른손엔 채찍을 쥐고, 먼저 군례(軍禮)를 마치고는 첫 곡조를 부르면 뜰 가운데에서 북과 나팔이 울리고, 배 좌우의 여러 기생들이 채색 비단에 수놓은 치마들을 입은 채 일제히 어부사(漁父辭)를 부르며 음악이 반주(伴奏)되고, 이어서 둘째 곡조, 셋째 곡조를 부르되, 처음 격식과 같이 한 뒤에 또 동기가 소교로 꾸며 배 위에 서서 배 떠나는 포를 놓으라고 창한다. 이내 닻을 거두고 돛을 올리는데 여러 기생들이 일제히 축복의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에,

닻 들자 배 떠난다 / 碇擧兮船離

이제 가면 언제 오리 / 此時去兮何時來

만경창파에 가는 듯 돌아오소 / 萬頃蒼波去似回

하였으니,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눈물지을 때이다. 이제 장복은 어버이와 아들의 친함도 아니요, 임금과 신하의 의도 아니요, 남편과 아내의 정도 아니요, 동창과 친구의 사귐도 아니거늘, 그 살아서 헤어지는 괴로움이 이러한즉, 이는 그 이별하는 땅이 오로지 강이나 바다, 또는 저 하수의 다리에서만이 이러함은 아니었으리라. 실로 이국이나 타향치고서 이별에 알맞은 땅이 아닌 것이 없는 까닭이리라. 아아, 슬프외다. 앞서 소현세자(昭顯世子 인조의 맏아들)께서 심양에 계시올 때 당시 신료(臣僚)들이 머물고 떠날 즈음이나 사신의 오가는 무렵이면 그 심회 어떠하였으리. 임금이 욕되매 신하된 자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것도 이 경지면 오히려 헐후(歇後)한 말일지니, 그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가며, 어떻게 참고 보내며 어떻게 참고 놓았겠는가.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통곡할 때였던 것이다. 아아, 슬프도다. 내 비록 이나 벼룩 같은 미천한 신민(臣民)이건마는 백 년이 지난 오늘에 시험조로 한번 생각해 볼 때에도 오히려 정신이 싸늘하고 뼈가 저리어 부러질 것 같거늘, 하물며 그 당시 자리에 일어서서 절하고 하직할 즈음이리오. 하물며 그 당시 걸림이 많고 혐의 또한 깊어서, 눈물을 참고 소리를 머금으며, 얼굴엔 슬픈 표정을 드러내지 못할 때이리오. 하물며 그 당시 떨어져서 머무른 여러 신하가 아득히 떠나가는 이들의 행색을 바라볼 제 저 요동의 넓은 들판은 가이 없고, 심양의 우거진 나무들은 아득한데, 사람은 팥낱처럼 작아지고 말은 지푸라기처럼 가늘어서, 시력이 다하는 곳에 땅의 끝, 물의 마지막이 하늘에 닿도록 아련하게 지경이 없으니, 해가 저물어 관문을 닫을 때에 그 간장이 어떠하리. 이런 이별일진대 어찌 반드시 물가만이 이에 알맞은 땅이 되리오. 정자도 좋고, 누각도 좋고, 산도 좋고, 들판도 좋을지니, 어찌 반드시 저 흐느껴 우는 물결과 어슴프레 해미 낀 햇볕만이 우리의 괴로운 심정을 자아낼 것이며, 또 하필이면 저 무너지려는 다리, 오똑한 망가진 고목만이 우리 이별의 마당이 될 것인가. 이 경지에 이르러서는 비록 저 그림 기둥에 현란스러운 문지방과 푸른 봄철에 밝은 날씨라도 모두들 우리를 위한 애끓는 이별의 땅이 될 수 있겠고, 또는 우리를 위한 가슴치고 통곡할 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를 만나서는 제가 비록 돌부처라도 머리를 돌릴 것이요, 쇠로 된 간장일지라도 다 녹고 말 것이니, 이는 또 우리나라에서 정사(情死)함에 제일 알맞은 때일 것이리라.”

하고는,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20여 리를 갔다. 성문 밖은 꽤 쓸쓸한 편이어서 산천이 눈에 드는 것이 없다. 해는 이미 저물었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수레바퀴를 쫓아간다는 것이 서쪽으로 너무 치우쳐서 벌써 수십 리나 돌림길을 걸었다.

양편에 옥수수가 하늘에 닿을 듯 아득하여 길은 함() 속에 든 것 같은데, 웅덩이에 고인 물에 무릎이 빠진다. 물이 가끔 스며 흐르도록 구덩이를 파 놓았는데 물이 그 위를 덮어서 보이지 않으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하여 길을 따라 소경처럼 용을 쓰고 앞으로 나아간즉, 밤이 벌써 깊었다. 손가장(孫家庄)에서 저녁을 먹고 머물다. 동직문(東直門)은 그 지름길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수십 리 돌림길을 걸었다.

 

 

[C-001]가을 : ‘수택본에는 이 위에 건륭 45년 경자라는 한 구절이 있으나, 그를 따르지 않았다.

[D-001]사은겸진하정사(謝恩兼進賀正使) : 사은사(謝恩使)와 진하사(進賀使)를 겸한 정사. 곧 박명원을 말한다.

[D-002]밤새도록 …… 못하였다 : 우리나라에서 많이 유행되는 말.

[D-003]별상(別賞) : 청의 황제가 유상(有賞) 종인(從人)에 주는 상사(賞賜).

[D-004]수레바퀴가 …… 이루었다 : 전국 때 제()의 수도 임치(臨淄)의 번화함을 설명한 말. 사기(史記)에 나온다.

[D-005]역책(易簀) : 공자의 제자 증참(曾參)이 운명할 때에 제자를 시켜 자리를 바꿨으므로, 스승의 운명을 역책이라 한다.

[D-006]삼년(三年) …… 말라 : 논어에 나오는 말.

[D-007]구원(九原)에서 ……  : 예기(禮記)에 나오는 조문자(趙文子)의 말.

[D-008]살아 ……  : 효경(孝經)에 나오는 실사.

[D-009]아들을 ……  : 복상(卜商) 즉 자하(子夏)의 고사.

[D-010]() ……  : 남화경(南華經)에 나오는 장주(莊周)의 고사. 아내가 죽으매 분을 두들기며 노래하였다.

[D-011]거문고 ……  : 종자기(鍾子期)가 죽으매 백아(伯牙)가 거문고 줄을 끊고 뜯지 않았다.

[D-012]숯을 ……  : 예양(豫讓)이 그의 임금 지백(智伯)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숯을 머금어 벙어리가 되었다.

[D-013]슬피 ……  : 기량(杞梁)이 죽으매 그 아내가 울어서 성을 무너뜨렸다.

[D-014]나라 ……  : 제갈량(諸葛亮) 출사표(出師表)에서 나온 구절.

[D-015]무덤의 …… 던지고 : 부견이 처음에는 왕맹을 써서 국세가 크게 떨치고 강북을 통일했으나, 그의 유언을 지키지 않고 남으로 진()을 치다가 패하여 나라가 망했다.

[D-016]() …… 있었은즉 : 위징이 죽은 뒤에 당 태종이 몹시 슬퍼하였으나, 고구려 정벌을 반대했다 하여 나중에는 그 묘비(墓碑)를 넘어뜨리었다가,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를 뉘우쳐서 다시 세웠다.

[D-017]하량(河梁) : 북방 오랑캐 땅에 있는 하수의 다리. 소무와 이릉이 이에서 작별할 때에, 이릉이 소무에게 읊어 준 시가 천고에 비장강개하기 짝이 없었다.

[D-018]소무(蘇武) : 한 무제(漢武帝)의 명신으로서 흉노(匈奴)에게 사절로 갔었는데, 그들에게 억류당하였다가 10년 만에 돌아왔다.

[D-019]이릉(李陵) : 한 무제의 명장이요, 이광(李廣)의 손자로서, 흉노를 치다가 실패하여 흉노에게 머물고 있었다.

[D-020]별부(別賦) : 남북조(南北朝) 때 유명한 문학가 강엄(江淹)이 이별의 슬픔을 묘사한 작품 이름.

[D-021]시남료(市南僚) : 장주(莊周) 남화경(南華經) 중에 나오는 사람.

[D-022]유우석(劉禹錫) : ()의 문학가. 자는 몽득(夢得).

[D-023]유종원(柳宗元) : 당의 문학가. 자는 자후(子厚). 일찍이 유주 자사(柳州刺使)로 좌천되었다.

[D-024]대악부(大樂府) : 소악부(小樂府)에 비하여 장형(長型)이다.

[D-025]배따라기곡(排打羅其曲) :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이 지었다 한다.

[D-026]소교(小校) : 군교(軍校)를 따라서 죄인을 잡는 사령(使令).

[D-027]어부사(漁父辭) : 중국 굴평(屈平)이 지은 것도 있겠지마는, 여기서는 우리나라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것인 듯싶다.

[D-028] …… 돌아오소 : 이것이 곧 배따라기곡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6일 임자(壬子)

 

 

아침에 갰다가 차츰 덥더니 낮에는 크게 비바람치며 천둥과 번개를 치다가, 저녁 나절에 개다.

새벽에 길을 떠나다. 역정(驛亭) 표목에 순의현계(順義縣界)라 쓰였고, 또 수십 리를 가니 표목에 회유현계(懷柔縣界)라 쓰였는데, 그 현성(縣城)은 길에서 십여 리 혹은 7~8리 떨어져 있다 한다.

()의 개황(開皇 수 문제(隋文帝)의 연호) 연간에 말갈(靺鞨 당 때의 만주족 칭호)이 고구려와 싸워서 지자 그 부장(部將 추장과 같음) 돌지계(突地稽)가 팔부(八部)를 거느리고 부여성(扶餘城)으로부터 그 부락을 통틀어 귀순(歸順)하였으므로, 새로이 순주(順州)를 두어서 이에 수용하였더니, 당 태종(唐太宗) 때에 오류성(五柳城)을 주치(州治)로 하고 돌리극한(突利可汗 동돌궐(東突厥)의 추장)을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삼아서 그 무리를 거느리고 순주를 도독(都督)하게 하였으며,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때에는 탄한주(彈汗州)를 두었고, 천보(天寶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이후로는 귀화현(歸化縣)이라 고쳤으며, 후당(後唐)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勗)의 묘호) 때 주덕위(周德威)가 유수광(劉守光)을 쳐서 순주를 점령하였다 하니, 생각하건대 순의(順義)회유(懷柔) 두 고을의 땅이 곧 옛날의 순주인 듯싶다. 우란산(牛欄山)이 그 서북 삼백 리에 뻗쳐 있는데, 옛 늙은이의 전해 내려오는 말에,

 

옛날에는 금소[金牛]가 그 골짜기에서 나오고 선인(仙人)이 이를 타고 노닐었다 하며, 돌이 마치 구유처럼 생긴 것이 있어서 이름을 음우지(飮牛池)라 하고, 이 뫼를 또한 영적산(靈蹟山)이라 부른다.”

한다. 그 산 동쪽에서는 조하(潮河)가 백하(白河)와 합하며 동북에 호로산(狐奴山)이 있고, 또 서북엔 도산(桃山)의 다섯 봉우리가 깎아지른 듯이 마치 손가락을 세운 것 같다. 다시 수십 리를 가서 백하를 건너는데 백하의 근원은 새문(塞門) 밖에서 흘러 나와 석당령(石塘嶺)에서 장성을 뚫고, 황화(黃花)의 진천(鎭川), 창평(昌平)의 유하(楡河) 등 새문 밖의 모든 물과 합하여 밀운성(密雲城) 밑으로 지나간다. ()의 승상(丞相) 탈탈(脫脫)이 일찍이 수리(水利)에 능한 자를 뽑아서 둑을 내고 논을 풀어 해마다 곡식 백여만 섬을 거두었더니 뒤에 명()의 태감(太監) 조길상(曹吉祥)이 몰수한 땅으로 국영 농장을 삼자, 세민(細民)들이 이로 말미암아 업을 잃고, 백하의 수리도 마침내 폐지되었다. ()의 알리불(斡離不)이 순주에 들어와서 곽약사(郭藥師)를 백하에서 깨뜨렸다 하니 곧 이곳이다. 물살이 세고 빛이 탁하니, 이는 대체 새외(塞外)의 물은 모두 누런 빛이다. 다만 작은 배 두 척밖에 없는데, 모래톱에 다투어 건너려는 자의 수레가 수백 대요, 인마가 수없이 서 있다. 올 때 길에서 본즉, 막대를 가로 질러서 누런 궤() 수십 개를 나르고 있는데, 혹은 뾰족하고 혹은 넓적하고 혹은 길쭉하고 혹은 높다란 것들이다. 여기에는 모두 옥그릇을 실었는데 회자국(回子國 회교국)에서 조공 바치는 것이었으며 북경에서 짐꾼을 세내어서 나르고 회자 너덧 사람이 이를 거느리고 가는 판이다. 그 생김새는 벼슬아치인 듯하며 그 중 한 사람은 회자국의 태자(太子)라 하는데, 그 몰골이 웅건하고 사나워 보인다. 누런 궤짝을 배 속에 메어다 놓고 방금 삿대를 저어서 언덕에서 떠나려 할 순간에 주방(廚房)과 구인(驅人 말몰이꾼)들이 펄쩍 배에 뛰어 올라 말을 포개어 놓은 궤짝 위에 세웠다. 배는 이미 길을 떠났고 언덕에 있는 회자는 놀라서 소리 치고 발을 구르나 주방과 구인들은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먼저 건너려고만 한다. 내가 수역에게 말하니 수역이 크게 놀라서,

 

빨리 내려.”

호령하고, 회자들 역시 어지러이 지껄여 대면서 배를 돌리게 하여 그 궤짝을 모두 메어 내렸으나 한 마디도 우리나라 사람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중류(中流)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한 조각 검은 구름이 생겨 거센 바람을 품고 남에서부터 굴러 오더니 삽시간에 모래를 날리고 티끌을 자아올려 연기와 안개처럼 하늘을 덮어서 지척을 분변하지 못할 지경이다. 배를 내려서 하늘을 쳐다본즉, 검으락푸르락하고 여러 겹 구름이 주름잡듯 하였는데, 독기를 품은 듯 노염을 피는 듯 번갯불이 그 사이에 얽히어서 올올이 번쩍이는 금실이 천 송이 만 떨기를 이루었으며, 벽력과 천둥이 휘감고 겹겹이 싸여서 마치 검은 용이라도 뛰어 나올 듯싶다. 밀운성을 바라보니 겨우 몇 리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채찍을 날려서 빨리 말을 몰았으나, 바람과 우레가 더욱 급하여지고 빗발이 비껴치는 것이 마치 사나운 주먹으로 후려갈기는 듯하여 형세가 지탱할 수 없으므로, 재빨리 길가 낡은 사당에 뛰어 들었다. 그 동편 월랑(月廊)에 두 사람이 책상을 사이에 놓고 교의에 걸터 앉아서 바삐 문서(文書)를 다루고 있으니, 이는 밀운 역리(驛吏)가 오가는 역말들을 적는 것이었다. 하나는 한자(漢字)로 쓰고 또 하나는 만주 글자로 번역하는데, 그 중에서 내 눈에 얼핏 조선(朝鮮)이란 글자가 보이기에 들여다보니, ,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북경에 있는 병부(兵部)로부터 조선 사신들에게 건장한 말을 주어서 험난함이 없게 하며, 또는 그들 행리(行吏)의 필수품을 공급하라.”

는 내용이다. 이윽고 사신이 비를 피하여 뒤이어서 들어왔으므로 내 수역을 끌어서 그 종이를 보이매 수역이 사신에게로 가져 갔다. 이에 그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그들은,

 

저희들은 모르는 일입니다. 저희들은 다만 오가는 문서를 장부와 견주어 맞춰볼 따름입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 문서에 이른바 건장한 말이란 찾아볼 곳도 없거니와 설령 그 말을 준다 한들 모두 몹시 날세고 건장해서 불과 한 시간에 70리를 달리니, 이는 그들의 이른바 비체법(飛遞法)이다. 길에서 역말의 달리는 것을 보니, 앞에서 선창하기를 노래하듯 하면 뒤에서 응하기를 마치 범을 쫓는 듯이 하는데, 그 소리가 산골과 벼랑을 울리면 말이 일시에 굽을 떼어 바위시내덩굴을 가리지 않고 훌훌 날뛰며 달리는데, 그 소리가 마치 북 치는 듯 소낙비가 퍼붓는 듯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쥐처럼 잔약한 과하마(果下馬) 따위를 견마 잡히고 부축하여서도 오히려 떨어질까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이렇게 날뛰는 역말이야 누가 능히 탈 수 있겠는가. 만일 황제의 명령으로 억지로 이를 타게 한다 해도 도리어 걱정거리일 것이다. 대개 황제가 근신(近臣)을 보내어서 우리 사신을 영접 두호하게 한 것이 방금 이곳을 지나쳤는데 길이 서로 어긋난 모양이다.

비가 좀 멎기에 곧 길을 떠났다. 밀운성 밖을 감돌아서 7~8리를 갔다. 별안간 건장한 호인(胡人) 몇이 모두 건장한 나귀를 타고 오다가 손을 내저으며,

 

가지 마시오. 앞으로 5리쯤에 시냇물이 크게 불어서 우리도 모두 되돌아오는 길이오.”

하고, 또 채찍을 이마에까지 들어 보이며,

 

이마만큼 높으니 당신네들 두 날개가 돋쳤나요.”

한다. 이에 서로 돌아보며 낯빛을 잃고 모두 길 가운데서 말을 내려 섰으나, 위에서는 비가 내리고 아래로는 땅이 질어서 잠시 쉴 곳도 없다. 그제야 통관과 우리 역관들을 시켜서 물을 가보게 하였다. 그들이 돌아와서,

 

물 높이가 두어 발이나 되어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한다. 버드나무 그늘이 촘촘하고 바람결이 몹시 서늘한데 하인들의 홑옷이 모두 젖어서 덜덜 떨지 않는 자가 없다. 비가 잠깐 개자 길 왼편 버드나무 밖에 새로 지은 조그만 행전(行殿)이 보이므로 곧 말을 달려 그리로 들어가서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대개 연경으로부터 길가에 삼십 리마다 반드시 행궁(行宮)이 하나씩 있어서 창름(倉廩)과 부고(府庫)까지도 다 갖추어 있다. 그러나 이 성 밖에 이미 행궁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십 리도 못 되는 이곳에 또 이 집을 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제도의 거대하고 사치함과 현란한 품이 여느 대목 따위의 손으로 이룩된 것이 아닌 듯싶으나 다만 내 몸이 춥고 배가 주려서 두루 구경할 경황이 없었다.

때마침 해는 홍라산(紅螺山)에 지는데 온 산 봉우리 겹겹이 쌓인 푸른 빛이 한덩이 붉은 빛으로 물들고, 아계(丫髻)서곡(黍谷)조왕(曹王)의 여러 산이 금빛 구름과 수은 안개 사이에 삥 둘러섰다. 삼국지(三國志),

 

조조(曹操)가 백단(白檀)을 거쳐 오환(烏桓)을 유성(柳城)에서 쳐부셨으므로 지금까지 그 산 이름을 조왕(曹王)이라 하였다.”

는 것이 곧 이를 이름이었고, 유향(劉向) 별록(別錄)에는,

 

()에 서곡(黍谷)이란 땅이 있으나 추워서 오곡(五穀)이 나지 않더니 추연(鄒衍)이 율()을 불어서 온기(溫氣)가 생기었다.”

하였고,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북쪽으로 한곡(寒谷)을 지나쳤다.”

하였으니, 곧 이곳을 이름이다. 내 어렸을 때 과체시(科體詩 과거 볼 때 짓는 시체(詩體))를 짓다가 서곡의 취율(吹律)을 써서 고실(古實)을 삼았더니 이제 눈으로 바로 그 산을 바라보게 되었다.

역관이 제독(提督)과 통관과 더불어 의논하되,

 

이제 이미 앞으로 물을 건널 수 없고 물러나도 밥 지을 곳이 없는데 해가 또한 저무니 어찌하면 좋을까.”

하니, 오림포(烏林哺),

 

여기는 밀운성에서 겨우 5리밖에 안 되는 곳이니 사세가 부득불 도로 성으로 들어가서 물 빠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다. 오림포는 나이가 70이 넘어서 그 중 춥고 주림을 못 견디는 모양이다. 대개 새북(塞北) 길을 제독 이하의 여러 사람이 전에 가본 일이 없으므로, 길도 모르고 해는 저물어 사람의 그림자도 드물어지자 그 아득히 갈 바를 모름이 우리와 다름이 없다. 내 먼저 밀운성에 이르렀는데 길가의 물이 벌써 말 배에 닿았다. 성문에서 말을 세우고 일행을 기다려서 함께 들어가니, 뜻밖에 쌍등쌍촛불을 들고 와서 맞이하는 이가 있고, 또 기병(騎兵) 10여 명이 앞에 와서 환영하는 듯이 보이었다. 이는 곧 밀운 지현(知縣)이 몸소 와서 맞이함이다. 통관이 먼저 가서 주선한 것이 불과 몇 마디 말이 끝나기 전인데 이처럼 그 거행이 재빠르다. 중국의 법이 비록 왕자(王子)나 공주(公主)의 행차라도 민가(民家)에 머무르지 못하므로 그 사관은 반드시 점방이 아니면 사당이다. 이제 이 고을에서 우리 일행의 숙소로 정해진 곳은 관묘(關廟)인데, 지현은 문까지 와서 곧 돌아가고 관묘인즉 인마를 들일 수는 있으나 사신이 거접할 곳은 없었다. 이때 밤이 이미 깊어서 집집마다 문을 닫아 걸었으므로, 오림포가 백 번 천 번 두드리고 부르고 한 끝에 겨우 나와서 응대하는 이가 있으니 이는 곧 소씨(蘇氏)의 집이었다. 이 고을 아전으로서 집이 훌륭하기가 행궁이나 다름없다. 그 주인은 이미 죽고 다만 열여덟 살 나는 아들이 있는데, 눈매가 청수하여 속세의 풍상(風霜)을 겪지 않은 사람 같다. 정사가 불러서 청심환 한 개를 주니 그는 무수히 절하나 몹시 놀라서 두려워하는 기색이다. 이에 마침 잠이 들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어 나가보니, 사람 지껄이는 소리와 말 우는 소리가 요란한데 모두 생전 처음 듣는 소리요, 급기야 문을 열자 벌떼처럼 뜰에 가득 찬 사람들이 이 어디 사람들인가. 이른바 조선 사람이라고는 이곳에 온 일이 없으므로 북로(北路)에서는 처음 보니, 그들은 아마 안남(安南) 사람인지 일본(日本)유구(琉球)섬라(暹羅) 사람인지 분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쓴 모자는 둥근 테가 몹시 넓어서 머리 위에 검은 우산을 받은 것 같으니, 이는 처음 보는 것이라, “이 무슨 갓일까 이상하다.” 했을 것이며, 그 입은 도포는 소매가 몹시 넓어서 너풀거리는 품이 마치 춤추는 듯하니, 이 또한 처음 보는 것이라, “이 무슨 옷이랴, 이상한지고.” 했을 것이요, 그 말소리도 혹은 남남(喃喃)’ 하고 혹은 니니(呢呢)’ 또는 각각(閣閣)’ 하니 이 역시 처음 듣는 소리라, “이 무슨 소리랴 야릇한지고.” 했을 것이다. 처음 본다면 비록 주공(周公)의 의관(衣冠)이라도 오히려 놀라울 것이거늘, 하물며 우리나라 제도가 몹시 크고 고색이 창연할까보냐. 그리고 사신 이하의 복장이 모두들 달라서 역관들의 복장, 비장들의 복장, 군뢰들의 복장이 각기 따로따로 되어 있고, 역졸(驛卒)마두배는 맨발 벗고 가슴을 풀어 헤치고는 얼굴은 햇볕에 그을리고 옷은 해져서 엉덩이를 가리지 못하였으며, 왁자하게 지껄이며 대령하는 소리는 너무도 길게 빼니 이 모두 처음이라. “이 무슨 예법이랴. 이상하고 야릇한지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한 나라 사람이 함께 온 것을 모르고 아마 남만(南蠻)북적(北狄)동이(東夷)서융(西戎) 들이 함께 제 집에 들어온 줄로 알았을 것이니, 어찌 놀랍고 떨리지 아니하리오. 이는 비록 백주에라도 넋을 잃을 것이거늘 하물며 아닌밤중이리오. 비록 깨어 앉았어도 놀라울 것이거늘 하물며 잠결에서리오. 또 더군다나 열여덟 살 약관(弱冠)의 어린 사내이겠는가. 비록 세상 일을 싫도록 겪은 여든 살 노인일지라도 필시 놀라서 와들와들 떨며 졸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역관이 와서,

 

밀운 지현이 밥 한 동이와 채소과실 다섯 쟁반, 돼지거위오리고기 다섯 쟁반, 술 다섯 병을 보내왔고, 또 땔나무와 말먹이도 보내왔습니다.”

한다. 정사는,

 

그래, 땔나무나 말먹이는 받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마는, 밥과 고기 들은 주방이 있으니 남에게 폐를 끼칠 게 있겠어. 받든지 안 받든지 간에 부사님과 서장관 나리께 여쭈어 결정짓는 게 옳을 거야.”

하였다. 수역은,

 

이곳을 들어오면 동팔참(東八站)으로부터 으레 공궤(供饋)가 있는 법이랍니다. 다만 이렇게 익힌 음식을 제공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이제 이곳에 도로 오게 된 것은 비록 뜻밖의 일이었습니다마는, 그러나 저들이 지주(地主)의 체면으로서 이를 제공하였은즉 무슨 이유로 그를 물리칠 수 있사오리까.”

한다. 이러한 차에 부사와 서장관이 들어와서,

 

이건 황제의 명령도 없은즉 어찌 받을 수 있겠어요. 마땅히 돌려보냄이 옳겠습니다.”

한다. 정사도,

 

그렇겠소.”

하고는, 곧 명령을 내려 그를 받기 어려운 뜻을 밝히게 하였다. 이제 여남은 인부들이 끽 소리도 없이 다시 지고 가버렸다. 서장관이 또 하인들에게,

 

만일 한 줌의 땔나무나 말먹이를 받는다면 반드시 무거운 매를 내릴 거야.”

하고, 엄격히 단속하였다. 얼마 아니 되어서 조달동(趙達東)이 와서,

 

군기 대신(軍機大臣) 복차산(福次山)이 당도하였답니다.”

하고 여쭙는다. 대개 황제가 특히 군기 대신을 파견하여 사신을 맞게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바른 길로 덕승문(德勝門)에 들어가자 우리의 일행은 벌써 동편 바른 문을 통과하였으므로 서로 어긋나게 된 것이다. 복차산은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뒤를 쫓아 온 것이다. 그는,

 

황제께옵서 사신을 고대하고 계시오니 반드시 초아흐렛날 아침 일찍 열하에 도달하여 주시오.”

하며, 두세 번 거듭 부탁하고 가버린다. 군기(軍機)란 마치 한()의 시중(侍中)과 같아서 늘 황제 앞에 모시고 앉았다가, 황제가 군기에게 명령을 내리면 군기가 하나하나를 의정대신(議政大臣)에게 전달하곤 한다. 그가 비록 계급은 낮으나 황제에게 가까운 직책을 맡았으므로 대신(大臣)’이라 일컬었다. 복차산의 나이는 스물 대여섯쯤 되는데 키는 거의 한 길쯤이고 허리가 날씬하고 눈매가 가늘어서 매우 풍치가 있어 보이었다. 그는 말이 끝난 뒤에 화고(花糕) 하나를 먹고는 곧 말을 달리며 떠나버렸다.

그리고 벽돌이 깔린 대청이 넓고도 통창하였으며 탁자 위의 모든 물건은 위치가 정돈되었다. 하얀 유리 그릇에 불수감(佛手柑) 세 개를 담았는데 맑은 향내가 코를 찌른다. 10여 개의 교의는 모두 무늬 있는 나무로 꾸몄으며, 서편 바람벽 밑에는 등자리와 꽃방석양털보료 등이 깔려 있고, 구들 위에는 붉은 털방석을 깔았으되 길이나 너비가 알맞게 되어 있고, 침대 위에 깔린 자리는 말총으로 쌍룡을 수놓았으되 오색이 찬란하였다. 두 하인이 그 위에 누워 있음을 보고 시대를 시켜 깨웠으나 곧 일어나지 않자 시대가 크게 호통하여 쫓아버렸다. 나는 이때 하도 피로하기에 잠깐 그 위에 누웠더니 별안간 온 몸이 가려워 견디기 어렵기에 한 번 긁자 굶주린 이들이 더덕더덕하였다. 곧 일어나 옷을 털고 나서,

 

밥이 이미 익었느냐.”

하고, 물었다. 시대는,

 

애초부터 밥을 지은 일이 없답니다.”

하면서, 빙그레 웃는다. 대체로 이때는 밤이 곧 닭울 녘이어서 한 그릇 물이나 한 움큼 땔나무도 사올 곳이 없으니, 비록 저 사자(獅子) 어금니같이 흰 쌀과 높게 쌓인 은이 있다 하더라도 밥을 익힐 길은 없었다. 그리고 부사의 주방은 낮에 벌써 비 내리기 전에 시내를 건넜으므로 영돌(永突) 상방의 건량고(乾糧庫) 지기이다. 이 부사와 서장관의 주방을 겸하였으나 밥을 지을 기약은 아득하였다. 하인들이 모두 춥고 굶주려서 혼수 상태에 빠졌다. 나는 그들을 채찍으로 갈겨 깨웠으나 일어났다가 곧 쓰러지곤 한다. 하는 수 없어서 몸소 주방에 들어가 살펴본즉 영돌이 홀로 앉아 공중을 쳐다보면서 긴 한숨을 뽑는다. 남은 사람들은 모두 종아리에 고삐를 맨 채 뻗고 누워 코를 곤다. 마침 간신히 수숫대 한 움큼을 얻어서 밥을 지으려 했으나 한 가마솥의 쌀에 반 통도 못 되는 물을 부었으니 결코 끓을 리 없거니와 도리어 가소로운 일일 뿐이다. 이윽고 밥을 받아 본즉 물이 쌀에 스며들지 못 하였으니 그 생()과 숙()이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리하여 한 숟갈을 들지 못한 채 정사와 함께 술 한 잔씩을 마시고 곧 길을 떠났다. 이때 닭은 서너 홰를 쳤다. 창대가 어제 백하를 건너다 말굽에 밟혀서 발굽철이 깊이 들어 쓰리고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신음하고 있으나, 그의 대신으로 견마잡을 자도 없어서 일이 극히 낭패스러웠다. 그렇다 해서 촌보를 옮기지 못하는 그를 중도에다 떨어뜨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비록 잔인하기 짝이 없으나 하는 수 없이 기어서라도 뒤를 따라 오게 하고 스스로 고삐를 잡고 성을 나섰다. 사나운 물결이 길을 휩쓸고 간 나머지 어지러운 돌이 이빨처럼 날카로웠다. 손에는 등불 하나를 가졌으나 거센 새벽 바람에 꺼져버렸다. 그리하여 다만 동북쪽에서 흘러내리는 한 줄기 별빛만을 바라보며 전진하였다. 앞 시냇가에 이른즉, 물은 이미 물러갔으나 아직 말 배꼽에 닿았다. 창대는 몹시 춥고 주린데다 발병이 나고 졸음을 견디지 못하는 채 또 차가운 물을 건너게 되어 그저 걱정되기 짝이 없었다.

 

 

[D-001]돌지계(突地稽) : 수 문제(隋文帝) 때 말갈의 추장으로, 수 나라에 귀화하여 순주 도독(順州都督)이 되었다.

[D-002]주덕위(周德威) : 후당의 명장. 자는 진원(鎭遠).

[D-003]유수광(劉守光) : 후량(後梁)의 난신(亂臣) 패자(悖子).

[D-004]조길상(曹吉祥) : 명 영종(明英宗) 때의 사례 태감(司禮太監)으로, 삼대영(三大營)을 총독하여 석형(石亨)과 더불어 위복(威福)을 누리었으나, 나중에 반란을 꾀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D-005]알리불(斡離不) : 금 태조(金太祖) 아골타(阿骨打)의 둘째 아들.

[D-006]곽약사(郭藥師) : ()가 망할 때 원군(怨軍)의 괴수.

[D-007]과하마(果下馬) : 과실나무 가지 밑을 타고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작은 말.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중에 나오는 한반도의 말.

[D-008]행전(行殿) : 군주가 지방을 순시할 때 임시 거처하는 곳. 행재소(行在所). 행궁(行宮).

[D-009]삼국지(三國志) : ()의 진수(陳壽)가 지은 위()()() 삼국의 역사.

[D-010]유향(劉向) : ()의 종실(宗室)로서 저명한 학자.

[D-011]추연(鄒衍) : 전국 시대 제()의 음양가(陰陽家). 퉁소를 불어서 추운 날씨가 따뜻해지게 하였다.

[D-012]불수감(佛手柑) : 중국 복건(福建)과 광동(廣東) 등지에서 자라는 상록관목의 과실. 곧 귤의 일종.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7일 계축(癸丑)

 

 

아침에 비가 조금 뿌리다가 곧 개다.

목가곡(穆家谷)에서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남천문(南天門)을 나섰다. 성은 큰 재 마루턱에 있고 그 후미진 곳에 문을 내었는데 이름은 신성(新城)이다. 옛날 오호(五胡) 때 석호(石虎 후조(後趙)의 임금)가 단요(段遼)를 추격하자 단요가 모용황(慕容皩 북연(北燕)의 임금)과 함께 도로 반격하여 석호의 장수 마추(麻秋)를 쳐서 죽인 곳이 곧 이곳이었다.

이로부터 잇달아 높은 고개를 넘게 되어 오르막은 많으나 내리막이 적어지는 것을 보아 지세가 점차 높아짐을 알겠고 물결은 더욱 사나웠다. 창대가 이곳에 이르자 통증을 견디지 못하여 부사의 가마에 매달려 울면서 하소연하고 또 서장관에게도 호소하였다 한다. 이때에 나는 먼저 고북하(古北河)에 이르렀으므로 부사와 서장관이 이르러 창대의 딱하고 민망스러운 꼴을 얘기하면서, 나에게 달리 구처(區處)할 좋은 꾀를 생각해 보기를 권하였으나 실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이윽고 창대가 엉금엉금 기다시피 따라 왔다. 이는 중로에서 말을 얻어 타고 온 모양이다. 곧 돈 2백 닢과 청심환 다섯 알을 주어서 나귀를 세내어 뒤를 따르게 하였다.

드디어 냇물을 건넜다. 이 물의 또 하나의 이름은 광형하(廣硎河)였으니 이곳이 곧 백하의 상류였다. 물세가 변방에 이를수록 더욱 사나우므로 건너기를 다투는 거마들이 모두 웅기중기 서서 배 오기를 기다린다. 제독과 예부 낭중(禮部郞中)이 손수 채찍을 휘두르면서 이미 배에 오른 사람들까지도 몰아쳐 내리게 하고는 우리 일행을 먼저 건너 주게 하였다.

저녁 나절에 석갑성(石匣城) 밖에서 밥을 지었다. 이 성의 서쪽에 갑()처럼 생긴 돌이 있다 하여 역() 이름까지도 석갑이라 하였다 한다. 그리고 옛날 유수광(劉守光)이 도망왔다가 사로잡힌 데가 곧 이곳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곧 떠났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산길은 심한 굴곡이 거듭되었다. 왕기공(王沂公)이 일찍이 거란(契丹)에 올린 서한 중에,

 

금구전(金溝淀)에 이르러 산을 감돌아 들어 오르고 또 오르되 이표(里標)나 척후(斥堠)도 없으므로 말이 달리는 시간을 따져서 대체로 90리쯤 가서 고북관(古北館)에 이르렀습니다.”

고 하였다는데, 이제 벌써 금구전은 어디인지를 알 길이 없을뿐더러 새북의 노정이 멀고 가까운 것에 대하여는 옛사람도 역시 아리송한 모양이다.

때마침 대추가 반쯤 익었는데 마을마다 대추나무로 울타리가 이룩되었으며, 혹은 대추나무 밭이 보여 마치 우리나라의 청산(靑山)보은(報恩)과 같았고, 대추는 모두 한 줌이 넘을 만큼 컸다. 그리고 밤나무 역시 숲을 이루었으나 밤톨이 극히 자잘하여 겨우 우리나라 상주(尙州)의 것과 비슷하였다. 옛날 소진(蘇秦)이 연 문공(燕文公)을 유세하던 말 중에,

 

()의 북쪽에 밤과 대추의 생산지가 있는데 천부(天府)’라 이른답니다.”

하였으니, 아마 이는 고북구(古北口)를 두고 이른 듯싶다.

마을 거리를 지날 때마다 남녀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나이 조금 지긋한 여인치고 혹이 목에 달리지 않은 자 없는데, 큰 것은 거의 뒤웅박처럼 되었고, 더러는 서넛이 주렁주렁 달린 이가 없지 않아서 대개 열에 7~8은 모두 그러하였고, 젊은 계집애들과 얼굴 고운 여인은 흰 분을 발랐으나 목에 달린 뒤웅박처럼 생긴 혹을 가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남자 중에도 늙은이는 가끔 커다란 혹이 달렸다. 옛 말에,

 

()에 살고 있는 사람은 이가 누렇고, 험한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목에 혹이 달린다.”

하였고, ,

 

안읍(安邑)은 진()의 땅으로, 대추가 잘 되므로 그들은 단 것을 많이 먹어서 이가 모두 누렇다.”

하였으나, 이제 이곳에는 대추나무밭이 이룩되었으나 여인들의 하얀 이가 마치 박씨를 쪼개 세운 듯하니 이는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의방(醫方)에 이르기를,

 

산협(山峽)의 물은 흔히들 급히 내리흐르므로 오래도록 마시면 혹이 많이 생긴다.”

하였으니, 이제 이곳 사람들의 혹이 많음은 험한 곳에 살고 있는 까닭이겠지마는, 유독 여인에게 많이 볼 수 있음은 어인 일인지 알 길이 없겠다.

잠시 성안에서 말을 쉬었다. 시전(市廛)과 거리가 제법 번화하긴 하였으나 집집마다 문이 닫혔으며, 문밖에는 양각등(羊角燈)을 달아 오롱조롱 별빛과 함께 오르내리곤 한다. 때는 이미 밤이 깊었으므로 두루 구경하지 못하고 술을 사서 조금 마시고 곧 나섰다. 어두운 가운데 군졸 수백 명이 나타났다. 이들은 아마 검색하려고 지키고 있는 듯싶다. 세 겹의 관문(關門)을 나와서 곧 말에서 내려 장성에 이름을 쓰려고, 패도(佩刀)를 뽑아 벽돌 위의 짙은 이끼를 긁어 내고 붓과 벼루를 행탁 속에서 꺼내어 성 밑에 벌여놓고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물을 얻을 길이 없었다. 아까 관내(關內)에서 잠시 술 마실 때 몇 잔을 남겨서 안장에 매달아 밤 샐 때까지를 준비한 일이 있기에, 이를 모두 쏟아 밝은 별빛 아래에서 먹을 갈고, 찬 이슬에 붓을 적시어 여남은 글자를 썼다. 이때는 봄도 아니요 여름도 아니요 겨울도 아닐뿐더러, 아침도 아니요 낮도 아니요 저녁도 아닌 곧 금신(金神)이 때를 만난 가을에다 닭이 울려는 새벽이었으니, 그 어찌 우연한 일일까보냐. 이에서 또 한 고개에 올랐다. 초승달은 이미 졌는데, 시냇물 소리는 더욱 요란히 들렸으며, 어지러운 봉우리는 우중충하여 언덕마다 범이 나올 듯 구석마다 도적이 숨은 듯할뿐더러, 때로는 우수수하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나부낀다. 따로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에 적은 것이 있다. 산장잡기(山莊襍記) 속에 들어 있다.

물가에 다다르니 길이 끊어지고 물이 넓어서 아득히 갈 곳을 찾을 수 없는데 다만 너덧 허물어진 집들이 언덕을 의지하여 서 있었다. 제독이 달려가서 말에서 내려 손수 문을 두드리며 백천 번 거듭 그 주인을 불러 호통쳤다. 그는 그제야 대답하며 문을 나와 자기 집 앞에서 곧 건너기를 가르쳐 준다.  5백 닢으로 그를 품사서 정사의 가마 앞을 인도하게 하여 마침내 물을 건넜다. 대개 한 강물을 아홉 번이나 건너는데 물 속에는 돌에 이끼가 끼어서 몹시 미끄러우며, 물이 말 배에 넘실거려 다리를 옹송그리고, 발을 모아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안장을 꽉 잡고, 끌어 주는 이도 부축해 주는 이도 없건마는 그래도 떨어지지 않는다. 내 이에 비로소 말을 다루는 데는 방법이 있음을 깨달았다.

대개 우리나라의 말 다루는 방법은 몹시 위태로운 것이다. 옷소매는 넓고 한삼(汗衫) 역시 길므로 그것에 두 손이 휘감겨서 고삐를 잡거나 채찍을 드날리려 할 때 모두 거추장스러움이 첫째 위태로움이다. 그런 형편이므로 부득이 딴 사람으로 하여금 견마를 잡히게 되니, 온 나라의 말이 벌써 병신이 되어 버린다. 이에 고삐를 잡은 자가 항상 말의 한쪽 눈을 가려서 말이 제멋대로 달릴 수 없음이 둘째 위태로움이다. 말이 길에 나서면 그 조심함이 사람보다 더하거늘 사람과 말이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으므로 마부(馬夫) 자신이 편한 땅을 디디고 말을 늘 위태한 곳으로 몰아넣으므로 말이 피하려는 곳을 사람이 억지로 디디게 하고, 말이 디디고 싶어하는 곳에서 사람이 억지로 밀어버리니, 말이 되받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항상 사람에게 노여운 마음을 품은 까닭이니, 이는 셋째의 위태로움이다. 말이 한 눈은 이미 사람에게 가려졌고 남은 또 한 눈으로 사람의 눈치를 살피노라고 온전히 길만 보고 걷기 어려우므로 잘 넘어지기 일쑤이니, 이는 말의 허물이 아닌데도 채찍을 함부로 내리치니 이는 넷째 위태로움이다. 우리나라 안장과 뱃대끈의 제도는 워낙 둔하고 무거운데 더군다나 끈과 띠가 너무 많이 얽히었다. 말이 이미 등에 한 사람을 싣고 입에 또 한 사람이 걸려 있으니, 이는 말 한 필이 두 필의 힘을 쓰는 것이라 힘에 겨워서 쓰러지게 되니 이는 다섯째 위태로움이다. 사람이 몸을 씀에도 바른편이 왼편보다 나음을 보아서 말 역시 그러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의 오른 귀가 사람에 눌리어 아픔을 참을 수 없으므로 할 수 없이 목을 비틀어서 사람과 함께 한 옆으로 걸으며 채찍을 피하려는 것이다. 사람은 곧 말이 그 목을 비틀어서 옆으로 걷는 것을 사납고도 날랜 자태라 하여 기뻐하기는 하나 실은 말의 본정이 아니니 이는 여섯째 위태로움이다. 말이 채찍을 늘 받아 오니 그 바른편 다리만이 짝지게 아플 것임에도 불구하고 탄 사람은 무심히 안장을 버티고 앉아 있고, 견마잡이는 갑자기 채찍질하므로 몸을 뒤쳐서 사람을 떨어뜨리게 하고는 도리어 말을 책망하나, 이 역시 말의 본의가 아니니 이는 일곱째 위태로움이다. 문무를 막론하고 벼슬이 높으면 반드시 좌견(左牽)을 잡히니 이는 무슨 법인지, 우견(右牽)이 이미 좋지 않거늘 하물며 좌견이며, 짧은 고삐도 불가한데 하물며 긴 고삐이겠는가. 사삿집의 출입에는 혹시 위의를 갖출 법도 하거니와 심지어 임금의 어가를 모시는 신하로서 다섯 길이나 되는 긴 고삐로써 위엄을 보이려 함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이는 문관(文官)도 불가한데 하물며 영문(營門)으로 나아가는 무장(武將)이겠는가. 이는 이른바 스스로 얽을 줄을 찬다는 겪이니 이 곧 여덟째 위태로움이다. 무장이 입는 옷을 철릭[帖裹]이라 하는데 이는 곧 군복이다. 세상에 어찌 명색이 군복이면서 소매가 중의 장삼처럼 넓단 말인가. 이제 이 여덟 가지의 위태로움이 모두 넓은 소매와 긴 한삼 때문이거늘, 오히려 이러한 위태로움에 편안히 지내려 하니 아아, 슬프구나. 이는 설사 백락(伯樂)으로 바른편에 견마잡히고 조보(造父)로 왼편에 따른다 한들 이 여덟 가지의 위태로움을 그대로 둔다면 비록 준마(駿馬)가 여덟 필일지라도 배겨내지 못할 것이다. 옛날 이일(李鎰)이 상주(尙州)에 진칠 때 멀리 숲 사이에서 연기가 오름을 바라보고는 군관 한 사람을 시켜 가보게 하였더니, 그 군관이 좌우로 쌍견(雙牽)을 잡히고 거들먹거리고 가다가 뜻밖에 다리 밑에서 왜병 둘이 내달아 말의 배를 칼로 베고 군관의 목을 베어가 버렸다. 만력 임진년 왜구가 왔을 때의 일이다. 그리고 서애(西厓) 유성룡공(柳成龍公)은 어진 정승인데, 그가 징비록(懲比錄)을 지을 때에 이 일을 기록하여 비웃었다. 그런데도 그 잘못된 습속을 그런 난리와 어려움을 겪고도 고치지 못하였으니, 심하구나, 습속의 고치기 어려움이여. 내 이 밤에 이 물을 건넘은 세상에서 가장 위태로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말만을 믿고 말은 제 발을 믿고 발은 땅을 믿어서 견마잡히지 않는 보람이 이와 같구나. 수역이 주부더러 하는 말이,

 

옛사람이 위태로운 것을 말할 제 소경이 애꾸말을 타고 밤중에 깊은 물가에 섰는 것이라고 하지 않소. 정말 우리들 오늘 밤 일이 그러하구려.”

한다. 나는 곧,

 

그게 위태롭긴 위태로운 일이지만 위태로움을 잘 아는 것이라곤 할 수 없소.”

했다. 그 둘은,

 

어째서 그렇단 말씀이오.”

한다. 나는,

 

소경을 볼 수 있는 자는 눈 있는 사람이라 소경을 보고 스스로 그 마음에 위태로이 여기는 것이지, 결코 소경이 위태로운 줄 아는 것이 아니오. 소경의 눈에는 어떠한 위태로움도 보이지 않는데 무엇이 위태롭단 말이오.”

하고는, 서로 껄껄대고 웃었다. 따로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를 적은 것이 있다. 산장잡기(山莊襍記) 속에 들어 있다.

 

 

[D-001]오호(五胡) : 북방의 다섯 개 종족, 곧 흉노(匈奴)()선비(鮮卑)()()이 중국 내부에 들어와서 집권하던 시대.

[D-002]왕기공(王沂公) : 송의 문학가 왕증(王曾). 기공은 봉호.

[D-003]연 문공(燕文公) : 전국시대 연의 임금. 소진의 말을 들어서 6국을 연합하여 종장(從長)이 되었다.

[D-004]여남은 …… 썼다 : 그 제자(題字) 산장잡기(山莊襍記)중의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에 실렸다.

[D-005]한삼(汗衫) : 소매 끝에 붙여 드리우는 흰 헝겊.

[D-006]백락(伯樂) : () 나라 때 말을 잘 다루던 사람.

[D-007]조보(造父) : 주 목왕(周穆王)의 팔준(八駿)을 잘 길들인 사람.

[D-008]서애(西厓) 유성룡공(柳成龍公) : 임진왜란 당시에 영상까지 지낸 저명한 정치가. 서애는 호요, 자는 이현(而見).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8일 갑인(甲寅)

 

 

개다.

새벽에 반간방(半間房)에서 밥 지어 먹고, 삼간방(三間房)에서 잠깐 쉬었다. 가끔 산기슭에 화려한 사당과 절들이 보이는데 혹은 아흔아홉 층의 백탑(白塔)이 있다. 그 탑과 사당을 지은 자리를 살펴보아도 아무런 아름다운 경개가 없는 혹은 산등성이 또는 물이 흘러 떨어지는 곳에 거만의 돈을 허비하였음은 대체 무슨 뜻인지. 이런 것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으며, 그 제작의 웅장함과 조각의 공교로움과 단청의 찬란함이 모두 똑같은 수법이어서 하나만 보면 다른 것은 모두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니, 일일이 기록할 것조차 없겠다.

차츰 열하에 가까워지니 사방에서 조공(朝貢)이 모여들어서, 수레낙타 등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우렁대고 쿵쿵거려서 울리는 수레바퀴 소리가 마치 비바람 치는 듯하다. 창대가 별안간 말 앞에 나타나 절한다. 몹시 반가웠다. 제 혼자 뒤떨어질 때 고개 위에서 통곡하자 부사와 서장관이 이를 보고 측은히 여겨 말을 멈추고 주방에게,

 

혹시 짐이 가벼운 수레가 있어 저를 태울 수 있겠느냐?”

하고 물었으나 하인들이,

 

없소이다.”

하고 대답하므로, 민망하게 여기고 지나갔을 뿐이더니 또 제독이 이르매 더욱 서럽게 울부짖으니, 제독이 말에서 내려 위로하고 그 곳에 머물러 있다가 지나가는 수레를 세내어 타고 오게 하였다. 어제는 입맛이 없어 먹지 못하니 제독이 친히 먹기를 권하고 오늘은 제독이 자기가 그 수레를 타고 자기가 탔던 나귀를 창대에게 주었으므로 이에 따라 올 수 있었다. 그 나귀가 매우 날쌔어 다만 귓가에 바람 소리가 일 뿐이었다 하기에 나는,

 

그 나귀는 어디다 두었느냐?”

하고 물었더니,

 

제독이 저더러 이르기를, ‘네 먼저 타고 가서 공자(公子)를 따르되 만일 길에서 내리고 싶거든 지나가는 수레 뒤에 나귀를 매어 두라. 그러면 내가 뒤에 가면서 찾을 테니 염려 말라.’ 하더이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50리를 달려 고개 위에서 수레 수십 바리가 지나가기에 나귀에서 내려 맨 나중 수레 뒤에 매어 주었습니다. 차부가 묻기에 멀리 고개 남쪽 지나 온 길을 가리켜 보였더니 차부[車人]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더이다.”

한다. 제독의 마음씨가 매우 아름다우니 고마운 일이다. 그의 벼슬은 회동사역관 예부정찬사낭중 홍려시소경(會同四譯官禮部精饌司郞中鴻臚寺少卿)이요, 그 직품은 정사품(正四品) 중헌대부(中憲大夫)였으며, 그 나이는 이미 60에 가까웠다. 그러나 외국의 한 마부를 위하여 이토록 극진한 마음씨를 보임은 비록 우리 일행을 보호함이 직책이라 하겠지만, 그 처신의 간략함과 직무에 충실함이 가히 대국의 풍도를 엿볼 수 있겠다. 창대의 발병이 조금 나아서 견마를 잡고 갈 수 있게 되었음은,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삼도량에서 잠깐 쉬고 합라하(哈喇河)를 건너 황혼이 될 무렵에 큰 재 하나를 넘었다. 조공 가는 수많은 수레가 길을 재촉하면서 달린다. 나는 서장관과 고삐를 나란히 하며 가는데, 산골짝 속에서 갑자기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두세 마디 들려 온다. 그 많은 수레가 모두 길을 멈추고서 함께 고함을 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할 듯싶다. 아아, 굉장하구나. 따로 만방진공기(萬方進貢記)〉 〈산장잡기 속에 들어 있다. ‘수택본에는 없다. 를 썼다.

이곳에 이르기까지 온 나흘 밤낮을 눈을 붙이지 못하여 하인들이 가다가 발길을 멈추면 모두 서서 조는 것이었다. 나 역시 졸음을 이길 수 없어, 눈시울이 구름장처럼 무겁고 하품이 조수 밀리듯 한다. 혹시 눈을 뻔히 뜨고 물건을 보나, 벌써 이상한 꿈에 잠기고, 혹은 남더러 말에서 떨어질라 일깨워 주면서도, 내 자신은 안장에서 기울어지고는 한다. 포근포근 잠이 엉기고 아롱아롱 꿈이 짙을 때는, 지극한 낙이 그 사이에 스며 있는 듯도 하였다. 그리하여 때로는 온 몸이 날아갈 듯하고 두뇌가 맑아져서, 그 견줄 곳 없는 묘한 경지야말로 취리(醉裏)의 건곤이요, 몽중(夢中)의 산하(山河)였다. 또 때는 가을 매미 소리가 가느다란 실오리를 뽑고, 태공에 흩어진 꽃봉오리가 어지러이 떨어지며, 그 아늑한 마음은 도교(道敎)의 내관(內觀 묵상(黙想))과 같고, 놀라서 깰 때는 선가(禪家)의 돈오(頓悟)와 다름없었다. 팔십일난(八十一難)이 삽시간에 걷히고, 사백사병(四百四病)이 잠깐에 지나간다. 이런 때엔, 비록 추녀가 몇 자가 넘는 화려한 고대광실에 석 자를 괸 큰 상을 받고 예쁜 계집 수백 명이 모시고 있는 즐거움이나,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아니한 구들목에 높지도 낮지도 않은 베개를 베고,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이불을 덮고, 깊지도 얕지도 않은 술잔을 받으면서, 장주(莊周)도 호접(蝴蝶)도 아닌 꿈나라로 노니는 그 재미와는 결코 바꾸지 않으리라. 길가에 돌을 가리키며,

 

, 장차 우리 연암(燕巖) 산중에 돌아가면, 일천하고도 하루를 더 자서 옛 희이 선생(希夷先生)보다 하루를 이길 것이고 코 고는 소리가 우레 같아 천하의 영웅으로 하여금 젓가락을 놓치고, 미인으로 하여금 놀라게 할 것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이 돌과 같으리라.”

하다가 한번 꾸벅하면서 깨니, 이 또한 꿈이었다. 그리고 창대도 가면서 이야기하기에, 나 역시 대꾸하다가 가만히 살펴보니, 헛소리를 자주한다. 대개 제가 여러 날 동안 주린 끝에 다시 크게 추위에 떨다가 학질에 걸린 듯 인사를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때에 밤은 이미 이경(二更) 즈음이다. 마침 수역과 동행하였는데, 그의 마부도 역시 벌벌 떨고 크게 앓으므로 함께 말에서 내렸다. 다행히 앞 참() 5리밖에 남지 않았다 하므로, 병든 두 마부를 각기 말에 싣고, 흰 담요를 꺼내어 창대의 온몸을 둘러싸고 띠로 꼭꼭 묶어서 수역의 마두더러 부축하여 먼저 가게 하고, 수역과 더불어 걸어서 참에 이르니, 밤이 이미 깊었다. 이곳에는 행궁이 있고 여염과 시전이 극히 번화하였으나, 그 참의 이름은 잊었다. 아마 화유구(樺楡溝)인 듯싶다. 객점에 이르니 곧 밥을 내어 왔으나, 심신이 피로하여 수저가 천 근이나 되는 듯 무겁고, 혀는 백 근인 양 움직이기조차 거북하다. 상에 가득한 소채나 적구이가 모두 잠 아닌 것이 없을뿐더러, 촛불마저 무지개처럼 뻗쳤고 광채가 사방으로 퍼지곤 한다. 이에 청심환 한 개로써 소주와 바꾸어 마시니, 술맛이 또한 좋아서, 마시자 곧 훈훈히 취하여 퇴연(頹然)히 베개를 이끌어 잠들었다.

 

 

[D-001]팔십일난(八十一難) : 중생(衆生)이 도를 통하기에 여든한 가지의 장애가 있다. 불가에서 나온 말.

[D-002]사백사병(四百四病) : ()()()()이 각기 일백여덟 가지의 병이 있다 한다. 유마경(維摩經)에서 나온 말.

[D-003]장주(莊周) …… 노니는 : 남화경(南華經)에서 나온 몇 구절.

[D-004]희이 선생(希夷先生) : 송의 은사 진단(陳摶). 희이는 호요, 자는 도남(圖南). 그는 한 번 잠들면 천 날씩 오래 잤다 한다.

[D-005]천하의 …… 놓치고 : 유비(劉備)가 조조(曹操)와 함께 영웅을 논하다가, 조조가 자기를 영웅이라 지적할 때 유비는 수저를 떨어뜨렸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9일 을묘(乙卯)

 

 

개다.

아침나절 사시(巳時)에 열하에 들어 태학(太學)에 머물렀다. 그 날 닭울 녘에 먼저 떠나서 수역과 동행하였다. 길에서 난하(灤河)가 건너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수역이 오는 사람마다 붙들고 난하의 소식을 물었다. 그들은 모두,

 

예니레 기다려야 한번 얻어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한다. 강가에 이르니, 거마가 구름처럼 모인 것이 무려 천이며 만인데, 물은 넓고 거세어서 흙탕물이 소용돌이치며 흘러 행궁 앞이 제일 물살이 세다. 난하는 독석구(獨石口)에서 나와 옛 흥주(興州)의 지경을 거쳐 북예(北隸)에 들어가는 것이다. 수경(水經) ()에 이르기를,

 

유수(濡水)는 어융진(禦戎鎭)에 나와서 사야(沙野)를 거치며 굽이굽이 돌아서 1 5백 리쯤 흘러 장성에 든다.”

하였다. 겨우 작은 배 너덧 척이 있었다. 사람은 많고 배는 작으므로 건너기 어려운 것이다. 말 탄 사람들은 모두 옅은 물결을 골라서 건너지만, 수레는 그리할 수 없었다. 석갑(石匣)에서 가마 탄 자 하나를 만났다. 따르는 사람이 10여 기요, 네 사람이 어깨에 가마채를 메고 5리에 한 번씩 교대하는데, 말 탄 사람이 내려서 서로 바꾸어 메곤 하였다. 우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는데, 병부 시랑(兵部侍郞)의 행차라 한다. 가마는 녹색 우단(羽緞)으로 가리고 삼면에 유리를 붙여서 창을 내었으나, 탄 사람은 늘 깊이 들어앉았으므로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모자를 벗어 창 한 구석에 걸어 놓고 종일토록 책을 읽고 있다. 어제는 종자(從者)를 부르니까 종자가 갑() 속에서 책 하나를 꺼내어 바쳤는데, 그 제목은 오자연원록(五子淵源錄)이었다. 창 안에서 손을 내밀어 이를 받는데, 그 팔뚝이나 손가락이 옥같이 희었다. 또 창 안에서 이아익(爾雅翼 송 나안(羅顔)의 저) 한 권을 내준다. 그 목소리나 손길이 모두 여인 같다. 이곳에 이르자 가마에서 내리고, 가마 안의 책을 꺼내어 종자들이 나누어 품 속에 간직하며, 그 사람은 다시 말을 타는데, 참으로 미남자였다. 미목이 시원하고 몇 줄기 흰 윗수염이 듬성듬성하다. 가마는 휘장을 걷고, 종자를 태웠던 말들은 모두 물에 둥둥 떠서 건넌다. 모자에 푸른 새깃을 꽂은 사람이 언덕 위에 서서 채찍을 들어 지휘하여 먼저 우리 일행을 건너게 하는데, 비록 짐짝에다 진공(進貢)’이니 상용(上用 황제의 어용(御用))’이니 하는 글자를 쓴 기()를 꽂은 것이라도 먼저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혹시 먼저 뛰어오른 자의 차림새가 관원인 듯하여도, 반드시 채찍으로 몰아 내어 버린다. 이는 곧 행재 낭중(行在郞中)으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이 건너는 일을 간검하는 자이다. 다만 쌍교(雙橋) 넷이 있어 그 크기가 집채만한데, 바로 배 안으로 메고 들어가는 것이 마치 무거운 산을 들어서 알[]을 누르는 듯싶다. 그러하므로, 낭중들도 채찍을 거두고 한 걸음 물러서서 그의 날카로운 위세를 피하곤 한다. 그 가마꾼들의 눈에는 하늘도 없고 땅도 없고 물도 없을뿐더러, 사람도 뜨이지 아니하고 외국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고, 다만 그가 멘 가마만이 있을 뿐이니, 알지 못하겠노라. 그 가운데 어떠한 보물이 들었건대, 가마꾼이 그처럼 세를 쓸까.

강을 건너 10여 리를 가니, 환관(宦官) 셋이 와서 박보수(朴寶樹)와 더불어 말머리를 대고 몇 마디 수작하고는, 곧 말을 돌려 가버린다. 또 한 내시가 오림포(烏林哺)와 나란히 타고 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림포가 가끔 낯빛을 변하고 놀라워하는 기색을 보일 때, 박보수와 서종현(徐宗顯)이 말을 달려서 옆을 가면 오림포가 손짓하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보아, 무슨 비밀한 이야기인 듯싶다. 그 내시 역시 말을 달려 가 버린다.

한 산모롱이를 지나치니, 언덕 위에 돌을 깎아 세운 듯한 봉우리가 탑처럼 마주 서 있어서, 하늘의 기교한 솜씨를 보이는 듯 높이가 백여 길이나 된다. 그리하여 쌍탑산(雙塔山)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다. 연달아 내시가 와서, 사행이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알아보고 간다. 예부에서 태학에 들라는 뜻을 먼저 알리러 왔다.

며칠 동안 산골 길을 다니다가 열하에 들어가니, 궁궐이 장려하고 좌우에 시전이 10리에 뻗쳐 실로 새북(塞北)의 한 큰 도회이다. 바로 서쪽에 봉추산(捧捶山)의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았는데, 마치 다듬잇돌과 방망이 같은 것이 높이 백여 길이요, 꼿꼿이 하늘에 솟아서 석양이 옆으로 비치어 찬란한 금빛을 뿜고 있다. 강희 황제가 이를 경추산(磬捶山)’이라 고쳐 이름지었다 한다. 열하성(熱河城)은 높이 세 길이 넘고, 둘레가 30리이다. 강희 52(1713)에 돌을 섞어서 얼음 무늬로 쌓아올리니, 이는 이른바 가요문(哥窰紋)이었다. 인가의 담도 모두 이 법으로 하였다. 성 위에 비록 방첩(防堞)을 쌓긴 하였으나 여느 담과 다름이 없으며 지나온 여러 고을의 성곽(城郭)만도 오히려 못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삼십육경(三十六景)이 있다 한다. 한 나라의 옛 요양(要陽)백단(白檀)활염(滑鹽) 세 고을의 땅이니, 한 경제(漢景帝)가 이광(李廣)에게 조칙을 내려 말하기를,

 

장군은 군사를 거느리고 동으로 달려 백단에서 깃발을 멈추라.”

한 것이 곧 이곳을 이름이다. 거란의 아보기(阿保機)가 활염(滑鹽)의 허물어진 성을 고쳐 쌓았는데, 세속 사람들은 이를 대흥주(大興州)’라 일렀고, 명 나라 상우춘(常遇春)이 먀속(乜速 ()의 명장)을 전녕(全寧)으로 몰아서 깨뜨리고 대흥주로 나아가 머물렀다 함은 곧 이곳이다.

지난해에 태학(太學)을 새로 지었는데, 그 제도는 연경과 다름없었다. 대성전(大成殿)과 대성문(大成門)이 모두 겹처마에 누런 유리기와를 이었고, 명륜당(明倫堂)은 대성전의 오른편 담 밖에 있으며, () 앞 행각(行閣)에는 일수재(日修齋)시습재(時習齋) 등의 편액이 붙어 있고, 그 오른편에는 진덕재(進德齋)수업재(修業齋) 등이 있었다. 뒤에는 벽돌로 쌓은 대청이 있고, 그 좌우에 작은 재실이 있어서, 그 오른편엔 정사가 들고 왼편엔 부사가 들었다. 그리고 서장관은 행각 별재(別齋)에 들고 비장과 역관은 한 재실에 모두 들었으며 두 주방은 진덕재에 나누어 들었다. 대성전 뒤와 좌우에 둘려 있는 별당(別堂)별재 들은 이루 다 기록하기 어려울 만큼 많고도 또 모두 화려하기 그지없는데, 우리 주방으로 인해 많이 그슬리고 더럽혀졌으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로 승덕태학기(承德太學記)를 썼다.

 

 

[D-001]삼십육경(三十六景) : 피서록(避暑錄) 첫머리에 상세히 적혀 있다.

[D-002]이광(李廣) : 북방 흉노족과 70여 회를 싸워서 이긴 한의 명장.

[D-003]아보기(阿保機) : 요 태조(遼太祖)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D-004]상우춘(常遇春) : 명 태조(明太祖) 때의 명상(名相).

[D-005]승덕태학기(承德太學記) : 일문(逸文)이 되었다. ‘박영철본 권지 십오(卷之 十五) 끝 보유(補遺) 중에도 열하태학기(熱河太學記)라는 편목(篇目)이 남아 있으나, 역시 일문으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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