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
https://www.joongang.co.kr/article/18423958#home
의사(義士): ‘무력(武力)으로써 항거하여 의롭게 죽은 사람’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등
열사(烈士): ‘맨몸으로써 저항하여 자신의 지조를 나타낸 사람’
유관순 열사, 이준 열사, 을사늑약에 반대해 자결한 민영환 열사
지사(志士):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제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사람’
‘지사’는 살아 있을 때도 쓸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jN_MfNZcjo
https://www.youtube.com/watch?v=Lel3T2UQjpg
https://www.youtube.com/watch?v=FsGSEFsANrE
https://www.youtube.com/watch?v=KUOSDS0TIE4
https://www.youtube.com/watch?v=HHnhs_Jfanw
https://m.blog.naver.com/mpvalove/221187185088
박열(朴烈, 박렬, 1902년 3월 12일 (1902년 음력 2월 3일)[1] - 1974년 1월 17일)은 한국의 아나키스트, 사회운동가이다. 본관은 함양(咸陽). 본명은 박준식(朴準植)[2] 간토 대지진 직후 대역사건 중 하나인 박열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된 후 1945년까지 22년간 투옥 후 출소하여 일본에서 결성된 한국인 교민단체인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의 초대 단장(1946년 10월 ~ 1949년 4월)을 지냈다.
주요 경력
독립 운동
1922년 김약수·정태성 등과 함께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에서 '전국노동자 제군에 격함'이라는 선언을 발표했다.
박열은 1923년 4월 불령사(不逞社)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고,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때 증발한 자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이 있는 장덕수를 잡아다 구타하기도 했다. 같은 해 관동대지진 이후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인 부인인 가네코 후미코(일본어: 金子文子)와 함께 1923년 10월에 히로히토 황태자의 혼례식 때 암살을 기도한 죄로 체포되었다. 불령사가 다이쇼 천황과 히로히토 황태자 등을 폭탄으로 암살하기로 모의했다는 혐의 때문이었으나, 사건 자체가 과장, 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7월 23일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박열은 22년 2개월을 복역하고 해방 후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그동안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로만 알려졌던 박열이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의열단 단원이라는 증거가 최근에 나왔다. 1924년 4월2일 이뤄진 일본 도쿄 지방재판소 제8회 신문조서 내용으로, 박열 선생이 당시 "피고(박열)는 의열단에 가입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의열단과 관계는 있다"고 답한 부분이 기록돼 있다.
의열단 독립운동사의 권위자로 꼽히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2019년 7월 16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뉴시스와 만나 일본 도쿄 지방재판소 기록을 공개했다. 김 전 관장은 이같은 내용을 이번에 출간되는 저서 '의열단, 항일의 불꽃'(2019년, 도서출판 두레)에도 공개할 계획이다.[3]
광복 이후
전후의 박열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뒤 풀려나 일본에서 우익 교포 단체인 재일본조선거류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전신)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이때 저서로 《신조선혁명론》(1946)을 남겼고, 이승만 노선을 지지했다.
김구가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4]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 분열의 조짐이 보이자 편지를 보내, 이승만과 김구의 화해를 촉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6년 2월 ~ 6월 김구의 부탁으로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유해발굴 봉환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12월과 1947년 4월 2차례에 걸쳐 국제연맹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이승만과 회담했다.
그 후 1947년 6월 〈민단신문〉에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1947년 10월 민단 정기대회에서 이승만 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지지했다. 민단은 1948년 남한 정부수립 직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였다.
1948년 재정 문제와 민단 내 반대파들 때문에 단장직에서 물러났다.
납북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초청으로 1949년 귀국하여 한국독립당 당무위원을 지내다가 한독당 탈당 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북에서 구체적인 활동 자료는 알 수 없다. 1974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명단에 이름이 있으나 동 단체는 대남선전과 통일전략에 납북 인사를 활용하기 위한 의도에서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인물들을 대부분 비자발적으로 동원했던 단체였다.
http://www.senior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35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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